라주를 떠난 학봉 김성일은 떠난지 4년만에 고향 내앞마을(지금의 안동시임하면 천전동)로 돌아왔다. 그는 낮이면 들에 나가 농사일을 거들고 저녁이면 댁을 찾아오는 벗들을 맞아 당면 정세에 대한 이야기나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손님들이 돌아간 늦은 밤에는 서재에서 초불을 밝혀놓고 밤늦도록 필을 날렸다.
학봉선생은 대현인이자 스승이신 퇴계 리황선생의 문집의 출간을 앞두고 그분의 빛나는 일생과 눈부신 업적을 상세히 정리하여 적어가는 한편 퇴계선생 문집의 교정을 보았다.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력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저서이기에 그는 퇴계선생의 유고의 매 한구절 매 한글자라도 틀릴세라 유고를 읽고 또 읽으면서 틀린 부분을 고치였다.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선조 21년, 이미51세의 로년기를 맞은 학봉 김성일은 종부사첨정(宗簿寺佥正)을 맡으라는 임금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학봉선생이 상경했다!>>
<<학봉선생께서 상경하셨다.>>
발없는 말은 순식간에 온 서울안에 퍼지고 뒤이어 린근 도에도 퍼졌다.
<<학봉선생께서 어느 당파에 가담할가?>>
서울에 사는 선비들은 궁금증을 가지고 김성일의 상경후의 행동에 이목을 돌리고있었다.
나라의 주석지신이 되여 동인과 서인간의 모순을 조절하던 리조판서 률곡 리이선생이 별세한 뒤 조정에서는 동인이요, 서인이요, 남인이요, 북인이요 하면서 주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옥신각신하였고 홍문관의 선비들도 붕당싸움에 말려들어 옴니암미하고있었다.
홍문관의 선비들도 다툼끝에 시비를 가리지 못하게 되자 선비들은 자기들이 맘속으로 한없이 우러르는 학봉선생을 찾아왔다.
<<선생님, 지금 조정에서는 동인이요, 서인이요 하면서 붕당싸움이 한창인데 선생님이 보시는데는 어느 파당의 주장이 옳은것 같습니까?>>
선비들의 천박한 생각을 안타까이 여기는 학봉 김성일은 찾아온 선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쓸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매사에 생각이 같을수는 없는것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다 소인이라고 볼수는 없느니라.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 하여 꼭 군자라 할수 있겠는가? 피차를 막론하고 오직 어진 사람이면 중용해야 하고 불초한 사람이면 쓰지 않는것이 옳느니라... 나는 평생에 이러한 말 한마디를 맘속에 새기고 좌우명으로 삼고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잘못을 비판하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요 내가 한 좋은 일만 골라가며 칭찬하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라는 말인데 나는 항상 이 말로 자신을 단속한단다...>>
학봉선생의 도리깊은 말을 새겨듣고난 선비들은 오리무중(五里雾中)에서 헤여나온듯 눈앞이 환해졌다. 그들은 학봉선생의 편협하지 않고 너그러운 성품에 감복하였으며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감정으로 대체하지 않고 언제나 리성적으로 처사하는데 대해 끝없이 흠모하였다.
학봉선생은 너그러워야 한다는 뜻의 <<관홍(宽宏)〉〉이란 두 글자를 벽에 큼직하게 써붙이고 자신을 면려(勉励)하였으며 <<자신을 깔보지 말라>>는 뜻인 <<무자기(毋自欺)〉〉라는 세 글자를 가슴속에 아로새기고 행동에 일일이 옮기였다.
학봉선생은 자기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문인들을 교육할 때 종종 이런 말을 거듭했다.
<<학문을 배운다는것은 결코 귀로 듣고 입으로 옮기는데 있지 않다. 학문은 오직 인의(仁义)를 행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것이다. ... 지금 학자들은 흔히 뜻을 세우지 못하는 병집이 있다. 재질이 조금 모자라는것은 과히 걱정할것이 없다. 비록 재질이 출중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군자(君子)로 되는데 지장되는것이 아니다. 재주가 없는것이 때로는 도리여 소인이 되는것을 면할수도 있는것이니 학문은 오로지 뜻을 세움의 여하에 있는것이다. 수양에 힘쓰지 않고 자신을 억제하는 공부에는 힘을 다하지 아니하고 학문을 닦는다는 빈 이름만 내는것은 자고로 있는 선비들의 통환(通患)이다.>>
자신의 안일은 구중천밖에 밀어놓고 오로지 조국의 운명과 백성들의 고락만 생각하며 밤낮없이 공무에 바삐도는 학봉 김성일은 나라의 정치, 군사, 교육 등 각 방면의 폐단을 보아내고 대담하게 지적하면서 자신의 정책관, 국방관을 피력한 글을 여러차레나 썼다.
그 한 례로는 홍문관제2탑자(弘文馆第二塔子)인바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쨰, 조정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조정의 부정지풍은 주로 세가지가 있다. 어질고 그른것이 서로 혼동된것이 그 첫째요. 사사로운 향락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것이 그 둘째요. 탐오하는 풍조가 성행하는것이 그 세째다.
둘째, 학교를 세워서 교화(教化)를 밝혀야 한다. 교화가 잘되지 않은 원인은 세가지가 있다. 사도(师道)가 서지 않은것이 그 첫째요. 선비들의 습관이 바르지 못한것이 그 둘째요. 과거를 볼 때 부정행위가 생기는것이 그 세째다.
셋째, 재가수신(斋家修身)을 하여 내용을 엄하게 해야 한다. 내부단속이 잘되지 못하는 원인으로는 대궐에서 녀자가 정사에 참여하는 일이 그 첫째요, 왕자가 교훈에 참여하지 않는 일이 그 둘째요, 돈과 물건(货利殖产)에 빠지는것이 그 셋째다.
넷째,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주어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는것이다. 백성들이 받는 고통에는 다섯가지가 있다. 취렴(聚敛)을 심하게 하는것이 그 첫째요, 친족과 이웃의 리익을 침해하는것이 그 둘째요, 요역(徭役)을 너무 번다하게 일으키는것이 그 셋째요, 공납과 부역이 균등하게 차례지지 못하는것이 그 넷째요, 방납(方纳)이 백성을 해치는것이 그 다섯째이다.
다섯째, 군정( 军政)을 닦아서 변경을 굳게 지키는 일이다. 군정을 잘 다스리지 않는 례는 네가지가 있다. 군대의 기률이 해이해진것이 그 첫째요, 변방을 수비하러 보낼 군사를 뽑는데 평등하지 못한것이 그 둘째요, 장수에게 빚을 진 병졸들이 어민들을 못살게 구는 것(侵帅侵渔 )이 그 셋째요, 훈련에 일정한 규범이 없는것이 그 네번째다.
여섯째, 형리(刑吏)와 옥리(狱吏)를 잘 다스려서 억울한 안건을 풀어주어야 한다. 형옥(刑狱 )이 바르지 못한데는 주로 세가지 원인이 있다. 법령이 일치하지 않은것이 그 첫째요, 관리들이 법을 어기는것이 그 둘째요, 큰 감옥이 날로 늘어나는것이 그 셋째다.
일곱째, 어진 신하를 등용하여 조정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 대신을 함부로 바꾸는 폐단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김새가 시원찮으면 공경하지 않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오는것이다.
여덟째, 조정에서 옳바른 건의(建议)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다. 신하들과 백성들의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야 한다. 옳은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은 세가지가 있다. 궁전에서 아첨이 득세하는것이 그중의 하나고 선비들의 사기가 꺾인것이 둘째요, 정당한 말이 제자리에 서지 못하는것이 그 셋째다.
아홉째, 성현의 학문을 밝히여 근본을 다스려야 한다. 성현의 요체(要谛)에는 세가지가 있다. 도술(道术)을 밝히는것이 그 첫째요, 천덕(天德)을 체득하는것이 그 둘째요,어진 사람을 공경하고 도리에 어긋나는짓을 할가봐 두려워하는것을 숭상하는 정신이 그 셋째다.
열번째, 조야(朝野)에서 사치를 부리는것을 금지하고 절약하고 검소한 기풍을 길러야 한다. 사치를 부리는 기풍의 폐단은 주로 세가지가 있다. 몸가짐을 요망하게 하는것이 그 첫째요, 의복을 단정하게 해입지 않고 어지럽게 해입는것이 그 둘째요, 손님을 접대하거나 대사를 칠 때 음식을 지나치게 풍성하게 차리는것이 그 셋째다.
이상의 십조목(十条目)의 제의는 학봉선생이 당시 나라의 정치에 대한 기본책이였는바 적잖은것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사회생활에서 적용된다.
학봉 김성일의 피타는 노력은 신진사류들과 조정안의 대다수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국방 장비도 전보다 한결 나아졌고 백성들의 질고도 한결 덜어졌다. 김성일은 밝아오는 앞날을 내다보고 더욱 이악스레 사업에 달라붙었다. 홍문관에서 종부사첨정에 종부사사정 그리고 봉상사정(奉常寺正)등 직무를 겸임한 그는 눈코뜰새없이 바빴지만 고달픔을 몰랐다.
타지방으로 도망쳐갔던 류민들이 본고장을 찾아 돌아오기 시작하자 조정에서는 민간세태를 잘 아는 김성일에게 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이란 직무를 덧붙여주었다. 그는 조정의 일상 사무를 보는 외에 짬짬이 경기도지방을 순찰하면서 귀향해온 류민들을 안치하였다.
학봉선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강직한 품성을 지니고 일편단심 모든 정력을 다 몰부었으나 무능한 선조왕과 부패한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잘 알아주지 않았다.
학봉선생이 선조왕의 앞에서 담대하게 임금의 허물을 지적하고 또 임금의 백씨인 하원군을 길들인 죄아닌 <<죄>>로 그는 정언으로 부터 병조좌랑으로 천임되였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적에 역관들의 밀무역을 못하게 엄히 단속한 탓으로 그는 마땅히 받을 대우도 받지 못하였다.
선조 22년, 학봉선생이 52세떄 조정에서는 광국공신( 光国功臣)을 록훈(录勋 )했다。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을 수개하게 되여 조정에서는 <<종계변무주청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던 사신들과 명황제의 칙지(敕旨)를 받들고 새 회전(会典)을 반포하게 한 신하들을 장려하게 되였다.
학봉선생은 주청사를 따라 명나라에 가서 서장관의 임무를 다하면서 <대명회전>>을 수개하는데 큰 공을 세웠기에 누구보다 먼저 광국공신에 오르는것은 토론할 여지도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그 당시 학봉선생때문에 횡재를 하지 못한 역관들이 글을 써올려 그를 물어뜯는바람에 학봉선생은 홀로 참훈(参勋)하지 못하고 억울하게도 광국공신 원종(原从) 일등에 봉하게 되였다.
조정의 이 불공정한 처사를 두고 홍문관의 학자들과 조정의 많은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들은 상소문을 지어서 학봉선생에게 광국공신을 록훈하도록 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영욕은 먼산보듯하는 학봉선생은 이 일을 알고 상소문을 쓰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호되게 꾸짖었다.
<<무슨 당찮은 일을 하려 하오? 나라를 위해 일을 조금 해놓고 번번이 조정에 공을 청한다면 세상일이 어떻게 되겠소?>>
<<그렇지만 조정에서 이번 록훈에서 선생님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원종 일등밖에...>>
<<내 생각에는 그것도 과분하오. 나라를 위해 자그마한 일을 하고 옴니암니하면서 공을 다투는 사람은 소인중의 소인이오, 진정 나를 생각하려거든 당장 그 상소문을 찢어버리오.>>
학봉선생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난 동료들은 저마다 낯을 붉히고는 돌아갔다.
그뒤 학봉선생은 의정부사인(议政府舍人)이라는 새직무를 맡고 의정부의 일에 분망한 나날을 보내였다.
이때 겐쇼오(玄苏)를 정사(正使)로 하는 일본국의 사신이 대마도를 떠나 조선쪽으로 출발했다는 기별이 왔다. 일본과 조선은 오래동안 래왕이 끊어져있었는데 이번에 일본국에서 갑자기 사신이 온다고 하니 조정에서는 그 의도를 알지 못하여 접대할 사람을 물색하기 어려워하였다.
경연석에서 선조왕과 대신들은 신중히 토론한 끝에 학문이 출중한 학봉선생에게 례빈사정(礼宾寺正)이란 벼슬을 제수하면서 일본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학봉선생은 외국손님을 마중가는 선위사(宣慰使)로 되여 부산 동평관에 나가 겐쇼오일행을 맞이한 뒤 그들을 배동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연회를 크게 차리고 바다건너에서 온 일본국의 사신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목하 귀국의 국정은 여하하오?>>
연회를 마치고 사신들을 객관으로 안내하고난 학봉선생은 오래동안 서로 래왕이 없었던 일본에서 갑자기 사신을 파견해온 의도를 알아보려고 시탐조로 겐쇼오에게 말을 건네였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丰臣秀吉)이라는 절세의 영웅이 나타나서 란세를 평하고 국토를 통일한 뒤 관백(关伯)으로 되였는데 우리 나라의 국력은 바야흐로 동방에서 으뜸으로 되였소이다.>>
겐쇼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체모며 무예, 장략 등에 대하여 입에 침이 마를새 없이 자랑을 해댔는데 그의 안목에 조선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대국인 명나라까지도 눈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겐쇼오의 오만무례한 언사를 들으면서 학봉선생은 이자들이 조선에 사신으로 온데는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귀하께서는 어이하여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하시였소?>>
<<귀국에서도 아시다싶이 중국과 일본은 오래동안 래왕이 단절되여 조공(朝贡)이 통하지 않고있으니 이 얼마나 큰 치욕이요? 우리 관백께서는 이로 하여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쳐서 우리 나라의 국력을 시위하려 하고있소. 만약 귀국에서 우리가 공물을 바칠수 있도록 길을 빌려준다면 모든 일이 무사히 되여 우리 일본국민들도 전쟁의 로고를 면할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전쟁을 피면하지 못할것 같소이다.>>
학봉선생이 겐쇼오의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소가 웃다가 꾸레미가 터질 노릇이였다. 조공을 바치지 못하게 되면 전쟁을 일으키겠다. 공물을 바칠 길을 빌려달라 정말 삼척동자가 듣고서도 속아넘어가지 않을 말을 일국의 사신으로 온 자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오고있으니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겐쇼오는 대방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제소리만 소리라고 마구 지껄였다.
남의 나라의 존엄도, 나라지간의 례의도 티끌만큼도 모르는 일본왕국의 무례한 태도에 학봉선생은 분노했다. 분명히 양우리에 뛰여든 승냥이로 보였지만 아무리 오랑캐나라에서 온자라도 구경은 일국의 사신인만큼 구박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동방례의지국의 체모를 지키느라 그는 치솟는 분노를 가까스로 내려누르고 장자다운 태도를 보이면서 부드러운 말로 일본관백의 그릇된 생각을 하나하나 비평하였다.
<<귀국 관백의 생각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요. 이제 귀하께서는 조공을 바칠 길을 빌려달라고 하셨는데 귀국과 명나라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나라로서 바다길로 조공을 바치는것이 십분 편리한데 하필 남의 나라의 륙로를 빌리자는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이요. 그리고 조공을 바치지 못하게 되면 군사를 일으켜 종주국을 친다는것은 천리에도 어긋나는 일이요. 그리고 조선과 중국은 자고로 화목하게 지내는 린방인데 우리 나라에서 어찌 귀국이 이웃나라를 치도록 길을 빌려줄수 있겠소...>>
학봉선생은 학자다운 성근한 태도로 겐쇼오의 그릇된 생각을 일깨워주고나서 조선과 일본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나라인 만큼 두 나라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도리를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었다.
<<귀하의 말씀에 도리가 있는것 같소이다. 후날 귀국하면 우리 관백에게 귀국의 의도를 전하겠소이다.>>
학봉선생의 조리정연한 말에 변명할 언사를 찾지 못한 겐쇼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낯을 붉히였다.
이튿날 조선조정에 국서를 바치고난 겐쇼오일행은 조선국의 답복을 기다리느라 객관에 머물면서 명산대천을 구경하며 나날을 보내였다.
조정에서는 12월에 특별회의를 열고 일본사람들에게 조선의 국체를 보여주고 일본국의 국정도 알아볼겸 답례형식으로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조정에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한 결정을 겐쇼오에게 알리자 겐쇼오는 수행인원을 먼저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부산 동평관으로 돌아가서 조선의 통신사들을 기다려 함께 일본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여러날동안 통신사로 보낼 인선을 토의하다가 결국에는 병조참판 황윤길(黄允吉 1536————?을 정사(正使)로, 김성일을 부사(副使)로, 허성(许晟1548--1612)을 서장관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1590년) 3월 5일, 대궐을 떠난 학봉선생은 19일에 안동 내앞마을에 돌아와서 집안일을 안배하고 출국할 준비를 다그쳤다. 청명을 10여일 앞두고 고향집을 떠나야 했기에 그는 서둘러 조상들과 선고의 선산을 돌아봐야 했고 이국에 가서 해를 넘겨야 하므로 행장을 준비할 일이 많았으며 친지들과 자녀들에게 부탁할 말도 많았다.
짧디짧은 나흘동안에 이 모든 일을 다 마친 학봉선생은 친지들과 하직하고 마차에 올라 남으로 달려갔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꽉 들어찬 심심산곡으로 며칠동안 차를 몬 그는 4월 3일에 부산 동쪽에 있는 동래에 이르렀다. 학봉선생이 동래에 와보니 출국준비를 하러 고향으로 내려갔던 황윤길과 허성네 일행은 아찍가지 동래에 오지 않았었다.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학봉선생은 동평관에 들려서 겐쇼오를 접대하면서 20여일이나 보내였다.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