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마음속의 비밀
박병대
폭우가 억수로 퍼붓는 새벽,하늘은 먹장구름에 꽈악 덮여 어두컴컴하다.고양이같이 교문을 살그머니 빠져나온 해란이는 우산도 없이 장대같은 비줄기를 맞으며 허둥지둥 대통로에 나섰다.고층건물에서 폭포같이 쏟아지는 락수가 하수도로 미처 빠지지 못해 아스팔트길은 어디라없이 온통 물천지다.삽시에 물참봉이 된 그녀는 다리가 후둘거렸지만 이를 사려물고 앞으로 앞으로 발걸음을 재우쳤다.이따금 번개가 장검같이 허공을 가르면 머리우에서는 우르릉 꽝꽝 하고 천둥이 터진다.그녀는 금세 등뒤에서 누가 유령같이 나타나 갈구리같은 손으로 덜미를 잡을것만 같아 가슴이 섬찍하였다.
이윽고 비줄기가 점차 가늘어지면서 날이 훤히 밝았다.길에는 행인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뻐스도 가끔 눈에 띄였다.지금 반란파총부에서는 그녀의 야간도주를 발견하고 급히 홍위병들을 파견하여 골목을 막을것만 같았다.승냥이한테 쫓기는 토끼신세로 된 그녀는 겁에 질려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대로를 걷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잡힐판이였다.좀 에돌더라도 안전지대를 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무작정 좁은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생소한 골목에 들어서니 방향도 가리기 어려운데 굽이진 곳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쾅쾅 뛰여 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쓰레기가 둥둥 뜬 탁수가 발목까지 잠기는 골목길을 한시간남짓 걷고나니 앞에 철길이 나타났다.이젠 학교에서 퍼그나 먼곳에 이르렀으리라 생각하니 탕개가 풀리고 사지가 나른해졌다.몸에는 한기가 덮쳐들고 주린 창자가 아우성을 쳤다.
철뚝에 올라가 다리쉼을 하려고 무거운 다리를 놀려 차단봉곁에 이르렀다.돌기둥에 기대고 한창 가쁜 숨을 몰아쉬고있는데 뒤에서 팔에 붉은 완장을 낀 한무리의 홍위병들이 두리번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것이였다.
<<아차,이젠 끝장이구나!날 잡으러 오는 모양인데 어쩐담?>>
몸을 다급히 일으킨 그녀가 도망갈 방향을 찾는데 차단봉이 내려졌다.이제 더 머물거리다가는 꼼짝달싹 못하고 잡힐 판이였다.
(뛰자, 차단봉이 내렸을 때 철길만 건느면 기차에 막혀 따라잡지 못하겠지.)그녀는 허리를 굽혀 차단봉밑을 빠져나와 철길쪽으로 내달렸다.
<<뿡!>>
기관사는 철길로 사람이 오는것을 발견하고 자지러지게 경적을 울렸다.그러나 그녀는 렬차가 다다르기전에 레루를 넘으려고 기적에 아랑곳않고 철길에 발을 올리였다.
<<서라!>>
벽력같은 웨침과 함께 넉가래같은 손이 그녀의 덜미를 잡고 뒤로 내동댕이쳤다.제동을 걸어 속도를 죽이던 렬차는 찬바람을 일구면서 그녀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무슨 일로 죽겠다는거야?네가 죽고사는건 네맘대로지만 여기서 인명사고가 나면 나는 밥통이 떨어져,알겠어?>>
그녀를 구해낸 철도로동자는 볼부은 소리를 지르면서 해란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물병아리같은 처녀의 몰골을 훑어보다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지 온화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마크를 보니 대학생같은데 무슨 일로 천금같은 목숨을 버리려고 했나?>>
그녀는 대답 대신 애끚은 눈물만 떨구었다.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단 전보를 받고 정신없이 달리느라 기차를 못봤어요.>> 해란이는 로동자의 물음에 이렇게 얼버무리고말았다.
<<그럼 길을 오꼈구만.기차역은 저 남쪽에 있는데 비나 피해가지고 가려무나.>>
<<고마와요.아저씨,저는 사정이 급해 떠나야 해요.>>
그녀는 방울방울 샘솟는 눈물을 훔치면서 역전방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뒤를 돌아보니 홍위병들은 어느 길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공연히 제김에 놀라서 원귀로 될번했었다.
(어서 마귀의 소굴을 벗어나야만 해.)허둥지둥 걸음을 다그치던 그녀는 학생마크와 홍위병완장을 떼서 책가방에 넣었다.여러 반란파조직에서 그녀를 빼앗아가려 한다던 복대위의 말이 상기되였던것이다.
(큰 역전에 갔다가 홍위병을 만나면 어쩌나?대합실에 그들이 지킬지도 모르잖아? 십리길을 더 걷더라도 작은 역전이 안전할거야.)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발길을 돌려 시교에 있는 작은 역전으로 향했다.
천근같이 무거운 다리를 옮겨 맥없이 터벅터벅 걷는 그녀의 뇌리에는 한달동안의 악몽같은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녀는 할빈 H대학교 반란파사령부의 방송실에서 <<모주석어록>>을 읽으며 아나운서면접시험을 기다렸다.
방송실은 사령부사무실과 벽 하나 사이다.두 호실의 간벽에는 작은 미닫이창문이 있고 창문턱에는 전화기를 놓아두고 두 호실에서 공동으로 쓰고있다.
작은 창문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내 사무실로 오오.>>
<<예.>>
해란이가 어록책을 손에 든채 방송실을 뛰여나가 사령부실로 들어갔다.
몸집이 우람지고 키가 1메터 80쯤 되여보이는 30대의 사나이가 일어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밤색 구두를 신고 중산복을 입은 이 사나이는 채양이 긴 모자를 쓰고 금테안경을 걸었는데 입이 유달리 크고 왼쪽 눈가에는 팥알만한 기미가 있었다.
<<동무가 옥해란이요?>>
<<그렇습니다.>>
<<올해 몇살이지?>>
<<스물셋입니다.>>
<<어느 학부에 있소?>>
<<기계전기학부입니다.>>
정색을 하고 엄숙하게 묻던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말했다.
<<좋소.생김새도 예쁘고 말도 잘하는군.훌륭한 아나운서감이요.앞으로 방송실에서 자고 일해야 하니 식사할 때와 화장실출입외에는 아무데도 가지 말고 방송실에 있으면서 수시로 나의 지시를 받아야 하오. 나는 복대위라 하는데 총부의 책임자요.이 두 사무실의 문건접수와 청소는 모두 동무가 맡아야 하오.>>
말을 마치고 밖에 나갔던 그는 무슨 일이 있는지 부랴부랴 돌아오더니 해란이에게 사무실의 열쇠를 맡기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여기의 모든것은 다 비밀이요.내 이름,주소,사무실을 남들한테 말해서는 안되오.낯선 사람이 나를 찾거든 모른다고 하오. 그리고 평소에 내 사무실의 문은 잠궈놓소.>>
복대위가 나간 뒤 해란이는 사무실을 깨끗히 청소하고나서 문을 채우고 방송실에 돌아왔다.손을 씻고나서 침대에 걸터앉아 단발머리를 손빗질하던 그녀는 총부의 책임자가 틀거지 있고 손아귀가 무척 셀것 같아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녀는 이불을 반듯히 개여놓고 실내청소를 한 뒤 웃옷을 벗고 세수를 했다.이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복대위가 불쑥 들어왔다.그녀는 부랴부랴 웃옷을 걸쳤다.
<<옷을 입지 말고 어서 세수나 하오.>>
해란이는 옷을 걸친채 얼굴을 대강 씻고나서 손으로 머리를 빗었다.
<<특수임무가 있어서 식당에 갈 시간이 없소.과자를 사왔으니 여기서 요기하오.>>복대위는 들가방에서 과자봉지를 꺼내 사무상우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무척 송구스러웠으나 과자봉지를 펼쳐놓고 먹었다.
<<복사령,무슨 특수임무가 있습니까?>>
<<오늘은 시위행진을 하는데 좀 있다가 자동차가 오면 축음기와 레코트판을 싣고 거리에 나가야 하오.여러 반란파조직에서 참가하는데 우리가 첫포를 쏴야 하니 동무는 이번에 본때를 보여줘야 하오…>>
7시가 되자 교정에는 시위행진에 참가할 홍위병들이 줄지어 섰다.복대위는 연단에 올라가서 주의사항을 말했다.
시위대오는 해방표트럭을 앞세웠는데 트럭에는 채색종이기를 든 학생들로 가득 찼다.반란총부의 기는 트럭에 고정시켜놓았다.선전차가 그 뒤를 바싹 따랐는데 복대위는 해란이와 함께 선전차에 앉았다.
성세호대한 시위행렬이 교정을 나서자 복대위가 입을 열었다.
<<해란이,차의 속도가 늦을 때는 레코트를 틀고 사람이 많은 곳에선 어록을 웨치시오.>>
뒤이어 확성기에서는 <<대해항행은 키잡이의 힘…>>이 우렁차게 울렸다.
난생처음 선전차에 앉은 해란이는 흥분과 긴장감에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자신이 혁명대오의 앞장에 섰다는 긍지감에 그녀는 시간이 가는줄도 목구멍이 아픈줄도 모르고 어록을 외우고 또 외우고 구호를 웨치고 또 웨쳤다.
<<해란이는 정말 대단해.명실공히<활어록>이야.문구사용에 무게가 있고 언어가 류창하고 고저장단도 안성맞춤하거든.>>
지도자의 칭찬을 들은 그녀는 꿀물을 마신듯 속이 달콤했다.
어느날 저녁,해란이가 어록을 읽다가 잠이 몰려와서 문을 안으로 걸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밖에서 방송실의 문고리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그녀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밖에 있던 사람은 꽁무늬를 뺐다.
해란이는 가슴이 활랑거려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옷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가 새벽녘에 쪽잠이 들었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난 해란이가 눈을 비비고 창밖응 보니 아침해살이 사무상을 비추고있었다.
<<누구세요?>>
그녀는 문가로 가며 물었다.
<<해란이,나요.>>
복대위가 찾아온것이였다.그가 방송실로 들어오자 해란이는 설음이 북받쳐서 울음보를 터뜨렸다.
<<왜 울고있소?>>
해란이는 흐느끼면서 엊저녁에 벌어질번한 일을 보고하였다.
<<그까짓게 뭐 대단해?아마 다른 반란파조직에서 너를 랍치하려고 그랬는것 같으니 각별히 조심해야겠소.>>
(다같은 혁명조직인데 사람을 랍치하다니…)한동안 입을 다물고 손톱여물만 썰던 해란이가 복대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복사령,아나운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세요.저는 밤에 무서워서 여긴 못있겠어요.>>
<<뭐라구?고만한 일로 뒤걸음치겠다고?동무는 조직기률을 잊었소?>>복대위는 정색을 하고 해란이에게 사상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기오.래일 325호실에 두사람을 파견해 야경을 시키겠소.이러면 안심할수 있겠지?>>
복대위의 말에 해란이는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운동의 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였다.며칠이 지나자 주요가도와 광장,기관,학교 및 고층건물에는 어디라없이 프랑카드와 대자보가 나붙고 이르는 곳마다 확성기소리가 고막을 울렸다.골목골목을 꿰지르고 달리는 선전차들은 온 시가지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6~7급의 바람이 몰아쳤다.폭풍우가 들이닥칠 조짐이였다.복사령이 헐레벌떡 방송실로 달려왔다.
<<해란이,어서 방송원고를 가지고 거리에 나가기오.지금은 거리에 차가 적어서 좋은 기회요.XX가 주자판가 아닌가 하는걸 XX학원 반란파들과 변론해야겠소.그자들이 준비를 못했을 때 선손을 써야겠소.>>
선전차가 XX학원에 이르러 구호를 몇번 부르지도 못했는데 번개가 일더니 폭우가 쏟아졌다.금방 벽에 붙여놓았던 대자보는 물참봉이 되여 락엽같이 길바닥에 떨어져 딩굴었고 행인들도 자취를 감추었다.XX학원의 홍위병들은 교실에서 창문을 닫아걸고 바깥의 동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망할 자식들,기세에 눌려 감히 못나오는가부지.>>복대위는 씩씩거리며 거센 숨을 몰아쉬더니 마이크를 들고 목청껏 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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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대방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비겁한 놈들, 어디 두고보자!>> 복대위는 결이 나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도전에 실패한 복대위는 운전기사를 보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분부하였다.폭풍우를 맞받아 질주하는 자동차는 소방차마냥 비방울을 신작로 량켠에 뿌리였다.
방송실에 돌아온 해란이는 머리의 비물을 닦고나서 카텐을 치고 물에서 건진것 같은 겉옷을 벗어 짜 침대머리에 걸어놓고 속옷을 갈아입은 뒤 사무상앞에 앉았다.아무리 고달파도 견지하는 일기였다. 일기를 쓰고나니 소름이 끼치고 한기가 엄숩해왔다.그녀는 진통제 약을 두알 먹고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는데 이내 굳잠이 빠졌다.
그녀는 자다가 무서운 꿈을 꿨다.그녀는 시위행진에 나갔다가 오매에도 그리던 고중때의 련인 천룡이가 부랑자들한테 물매를 맞고있는것을 보았다.그녀는 놈들과 시비를 따지려고 앞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헌 담장이 우르르 허물어져 그녀는 담장에 깔려 옴짝달싹할수 없었다.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쳐도 말이 목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한사코 몸부림치다가 깨여나보니 복면을 한 사내가 그녀의 몸우에 덮쳐들고있었다.자신이 폭행을 당한다는것을 직감한 그녀가 고함을 치려 하자 그자는 대뜸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사나이는 입에 물었던 가위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대면서 발음이 분명찮은 소리로 위협했다.
<<꼼짝말아.반항하면 눈을 도려내고 죽여버릴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해란이는 몸을 연자돌에 눌린듯 숨이 막히고 요동할수조차 없었다.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결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녀인의 연약한 힘으로 억대우같은 사내의 폭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다.발버둥치며 항거하던 그녀는 사내의 강타를 맞고 혼미상태에 빠졌다.
새벽에 정신을 차린 해란이는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을 뽑아내고 전등 스위치줄을 더듬었으나 손네 잡히지 않았다.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천근같아 꼼짝할수 없었다.정적이 깃든 사무실안에 들리는건 오로지 창문을 때리는 비소리뿐이였다.모지름을 써서 일어나 앉은 그녀는 번개빛을 빌어 하얀 침대보위에 얼룩진 피자국과 침대머리에 떨어진 가위를 보았다.
엊저녁에 폭행당한 일을 생각하자 그녀는 치가 떨리고 몸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너무 원통해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싶었으나 그럴 처지가 못되였다.울음소리에 경호원이 깨여나고 아래층의 사람들이 몰려와 이 광경을 목도한다면 무슨 꼴이겠는가?쓰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침대보에 찍힌 피자국을 보고 이를 부득부득 갈던 그녀는 가위를 자세히 보았다.건너칸 사무실에서 본 눈익은 가위였다.
안팎으로 경비가 삼엄한 반란파총부의 사무실과 방송실을 누가 감히 들어올수 있단말인가?엊저녁에 방송실문을 분명히 안으로 걸었는데 놈이 어떻게 들어왔을가?총부사무실의 미닫이를 떼고 들어온것이 분명하였다.총부사무실의 문을 열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복대위의 소행이 불보듯 뻔했다.마음같아서는 칼을 들고 그놈을 찾아가고싶었으나 리지를 잃은 미욱한 짓을 할수는 없었다.
건달놈을 법에 고소하면 어떨가?해란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공안이며 검찰,법기관이 엉망진창이 된 오늘 내가 기소를 한다면 누가 접수하며 설사 법기관에서 안건을 접수한다한들 기세등등한 그자를 누가 체포한단말인가?야속한것은 연약하고 무능한 자신뿐이였다.혁명파의 허울을 쓰고 짐승같은 짓을 하는 승냥이놈아,이제 두고보자.어느때든 내 기어코 원쑤를 갚고야말테다.이를 사려문 그녀는 가위로 침대보의 피묻은 자리를 베내서 가위를 싼 뒤 책가방안에 넣었다.죄증을 보관할 타산이였다.어둠속에서 옷을 찾아 입고나서 이불짐과 일용품을 싸서 묶어놓았다.그녀는 방송실과 총부사무실의 열쇠를 미닫이창문턱에 올려놓고나서 방송실의 문을 열고 다람쥐같이 살그머니 복도를 지나 아래층의 현관에 내려왔다.
막상 교정을 떠나려고 하니 그녀는 가슴이 쓰리고 발걸음이 무거워졌다.이곳은 소녀시절부터 그렇게 동경하던 배움의 전당이 아닌가?그녀는 동창들과 작별인사 한마디 못나누고 야반도주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기 짝이 없었다.혁명을 한답시고 남의 장단에 춤추다가 처녀의 정조를 짓밟혔는데 이제 반란에 무슨 미련을 둔단말인가?가자,어디든지 멀리 떠나버리자.날이 밝기전에 어서 이 마귀의 소굴을 벗어나야 한다…
교구에 있는 기차역이 어렴풋이 보이자 해란이는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였다.무턱대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나?그녀의 눈앞에는 천룡이의 밝은 얼굴이 달처럼 떠올랐다.천룡오빠,오매불망 그리는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있나요?그녀는 3년동안 편지 한통 없는 천룡이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오빠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 해란이가 자리잡고있을가?내가 찾아간다면 오빠가 예전처럼 나를 반겨줄가?나의 처지를 안다면 그이의 마음은 어떠할가?순결을 지키지 못한 내가 무슨 낯으로 그이를 찾아간단말인가?너무너무 사랑하기에 나는 그이를 찾아갈수가 없어.그럼 어디로 행한단말인가?아무리 생각을 굴려봐도 갈만한곳이 없었다.그녀는 대합실에 들어가서 고향집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는수밖에 없었다.
렬차에 오른 그녀는 출입문과 가까운 구석진 곳에 좌석을 잡았다.려객들은 물병아리가 된 그녀를 보고 놀라면서 왜 우산을 지니지 않고 길을 나섰는가고 나무랐다.해란이는 려객들의 동정에 설음이 북받쳐올라 차탁에 엎디여 흐느꼈다.근방에 앉은 려객들은 그녀를 달래면서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어서 옷을 벗어 비물을 짜라고 권고하였다.해란이는 몸에 한기를 느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옷을 벗어 비물을 짜 입은 뒤 좌석으로 돌아왔다.려객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을가봐 그녀는 좌석에 앉자마자 엎디였다.밤잠을 설치고 비바람속에 몇시간을 시달린 그녀는 로독에 어슴푸레 잠이 들었다.
<<얘야,이젠 일어나거라.>>
옆에 앉았던 한 할머니가 어깨를 흔드는바람에 그녀가 깨나보니 기차는 어느새 종착역에 이르렀다.정신을 가다듬고 간신히 일어나 차문어귀까지 걸어나온 그녀는 플래트홈에 내려 법석거리는 인파를 따라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역전광장의 복판에는 한 소녀가 손에 비둘기 한마리를 받쳐들고 서있는 조각상이 있었다.소녀의 발주위에는 비둘기 몇마리가 그녀를 에워싸고있었다.해란이가 조각상우를 올려다보니 소녀의 손바닥에 앉은 비둘기는 한쪽 날개죽지가 없었다.어느 심술꾸러기가 돌을 던져 비둘기를 해친 모양이였다.얼마나 참혹한 정경인가?너의 처지도 나처럼 애처롭구나.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려던 아름다운 희망이 저렇게 처참하게 깨여졌으니 비참하기는 나와 다름없구나.그 무엇이 너와 나의 행복과 파아란 꿈을 이렇게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나?오늘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나…
해란이는 저녁 네시에 있는 마지막 뻐스를 타려고 정류소로 종종걸음을 쳤다.매표구앞에서 표를 사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던 그녀는 눈이 퀭해졌다. 돈이 70전밖에 없었다.차표를 사려면 50전이 모자랐다.혹시 한마을에 사는 사람을 만날가 하고 주위를 돌아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70리나 되는시골길을 홀로 걸어갈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중때 동창이자 하숙집 주인의 아들 권철이를 찾아가기로 했다.골목길을 꿰지르니 영화관앞이였다.선전용화랑에는 영화 <<지뢰전>>을 소개한 그림이 붙어있었다.그녀는 천룡이와 처음 밀회를 가질 때 바로 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 생각이 났다.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지난날이 주마등같이 그녀의 머리속을 스쳐갔다.1961년 새학년도에 그녀가 시의 한족고중에 입학하여 두번째로 맞은 주말이였다.그날 오후 담임교원인 강선생님께서는 전교의 조선족학생들을 학교 구락부에 불러놓고 서로 인사를 시켰다.회의가 시작되기 10여분전에 그녀가 구락부에 들어서니 학생 10여명이 와 있었다.그중 검정운동복을 입은 한 남학생은 피아노를 치면서 조선민요 <<아리랑>> 을 신나게 부르고있었다.음악을 즐기는 해란이는 피아노 가까이 가서 그 노래를 가만가만 따라불렀다.연주를 마친 남학생이 일어서더니 해란이를 보고 빙긋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화음을 치는데 숙련되지 못해 부끄럽소.>> 그는 두손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동무가 한번 쳐보오.>>
피아노를 만져보지도 못한 그녀는 금세 얼굴이 익은 능금알로 되였다.
<<미안해요.저는 피아노를 칠줄 몰라요.>>
그 남학생은 다시 탁구대앞에 가더니 탁구채를 쥐고 말했다.
<<회의를 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누가 탁구를 치겠소?>>
선뜻 나서는 학생이 없자 그는 아쉬운듯 탁구채를 놓고 자리에 가 앉았다.
이윽고 강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는 학생들이 아직 덜 모인것을 보고 탁구대앞에 가더니 그 남학생을 불러 두 사람이 함께 공을 쳤다.그들은 길게 뽑고 가까이에서 깎는것과 정면이나 뒤면으로 치고 받는 기술이 대단했다.
학생들이 다 모이니 모두 18명이였는데 녀학생은 오직 해란이뿐이였다.고년급 학생이 다수이고 신입생은 세명뿐이였다. 해란이와 권철이외에 남학생 한명이 더 있었다.권철이는 학교와 1리 상거한 철길 동쪽에 사는데 해란이의 외가와 동성동본이며 해방전부터 친숙한 사이라 해란이의 어머니가 권철의 부친을 오빠라고 부르므로 해란이도 권철이를 오빠라고 불렀다.
먼저 강선생님이 자아소개를 했다.
<<우리 부부는 다 조선족입니다.우리 조선족학생들은 총명하여 공부를 잘하는데 문체활동에서도 장끼를 발휘해야 합니다…자아소개를 하고 서로 낯을 익힙시다.>>
피아노를 치던 그 남학생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서서 말했다.
<<저는 고3.1반에 있는 천룡입니다.집이 료녕에 있어서 앞으로 동무들의 신세를 많이 질것 같습니다.>>
그 한차례의 모임이 있은 뒤 해란이는 천룡이에 대해 점차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1메터 75센치가 조금 넘는 키에 둥글넙적한 얼굴,검은 눈섭아래 쪽 선 코대,커다란 눈,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꼿꼿한 키에 어느때나 검정운동복을 입고다니는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음악과 체육에 능하였다. 집이 료녕에 있는 학생이 왜 우리 길림에 와서 공부할가?피아노치는건 언제 배웠고 탁구치는 기술은 언제 익혔을가?일련의 물음표가 머리속에서 맴돌이쳤다.해란이네 교실은 천룡이네 교실과 복도를 사이두고 있어서 교실을 드나들 때면 자주 볼수 있었다.그와 만날 때면 해란이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하거나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날이 갈수록 그녀는 천룡이에 대한 호감이 커갔고 그와 접근하고싶은 충동이 생겼다.
국경절을 맞으면서 학교에서는 문예공연대회를 열었다. 천룡이네 학급에서는 <<조가네 층집을 불사르다>>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천룡이가 주역을 맡아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막간 휴식때 천룡이는 또 막앞에 나와 바이올린독주까지 하였다.해란이는 천룡이의 다재다능에 감복하였다.
어느덧 <<12.9>>운동기념일이 다가왔다.학생회에서는 또 한차례의 문예공연을 조직했는데 학습압력이 큰 3학년을 돌봐서 1,2학년에만 임무를 맡겼다.학급의 단지부서기를 맡은 해란이는 대합창을 하는데 악기반주를 맡을 학생이 없어서 문오위원인 장연과 상의한 끝에 천룡이한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해란이는 단독으로 천룡이를 만나기가 쑥스러워서 장연과 함께 천룡이네 교실문을 노크했다.
밖에서 누가 찾는다는 말을 듣고 복도에 나온 천룡이는 해란이를 보고 무슨 일로 찾는가고 물었다.장연이가 사유를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통쾌하게 응낙했다.
그들은 천룡이의 학습에 지장을 덜 주려고 점심시간이나 저녁식사후의 짬을 타 종목을 련습하였다.
이번 공연에서 해란이네가 출연한 대합창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어느 토요일날 저녁,영화관에서 조선영화 <<춘향전>>을 상영한다는 말을 들은 해란이는 천룡이와 함께 영화관람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단독으로 천룡이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 비록 맘에 내키지 않았지만 장연이를 앞세우고 천룡이를 찾아갔다. 천룡이는 그들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면서 다섯시 반에 영화관문앞에서 만나자고 말하였다.영화상영을 5분 앞두고 천룡이가 영화관앞에 왔다.좌석을 잡을 때 장연이가 해란이더러 천룡이의 곁에 앉으라고 밀자 그녀는 못이기는척하고 가 앉았다.
영화를 보다가 해란이는 천룡이한테 낯을 돌리면서 가만히 물었다.
<<동무는 료녕사람인데 왜 여기서 공부하나요?>>
<<고중에 입학한 뒤 집이 료녕으로 이사간거요.>>
천룡이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어느새 영화가 끝났다.
그해 학교에서는 <<근공검학>>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학교에서는 로동에 참가한 학생에게 약간의 량권을 내줬는데 해란이도 량권을 10근 받았다.거듭되는 천재와 인재로 온 나라 백성들이 심한 기아에 허덕일 때 알곡은 목숨과 같이 귀한것이였다.량권을 손에 받아쥔 해란이는 남먼저 천룡이를 생각하였다.천룡이는 학교의 식당밥을 먹으니 배를 얼마나 곯을가?신체가 좋고 운동을 즐기는 그가 끼마다 강냉이가루떡 두개만 먹으며 주림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할가?
<<지난번 모임에서 동무는 집이 먼데 있어서 우리의 도움을 바란다고 했지요?오늘 저에게 남은 량권이 좀 있어서 드립니다.약소하나마 보태 쓰세요.극비!!!>> 해란이는 글을 쓴 쪽지에다 량권 10근을 끼워서 천룡이가 수업을 마치고 식당으로 갈 때 남의 눈을 피해 천룡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원단에 학교에서는 사흘동안 휴식하였다.집에 오가는 뻐스비를 남기려고 학교에 남은 해란이는 교실에 홀로 있기가 적적해서 천룡이를 찾아가서 함께 영화구경을 나섰다.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걷는데 천룡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무의 관심에 감사드리오.하지만 이후로는 그러지 마오.알겠소?>>
차지도 덥지도 않은 천룡이의 말에 해란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생긋 웃어보였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천룡이의 눈길과 마주치자 얼굴이 홍시같이 익고 가슴도 참새를 품은듯 콩콩 뛰였다.그녀는 자기가 짝사랑에 빠진것이 아닌가고 의심해봤으나 천룡이가 호의를 받아들인걸 보아 자기를 배척하지는 않는다고 단정했다.영화관에서 금방 좌석을 잡을 때 두 사람은 저마다 단정한 자세를 취했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들은 그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게 되였다.영사막에 젊은 사내가 련인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이때 천룡이는 호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물건을 꺼내 해란이의 손에 쥐여주었다.그녀가 희미한 불빛을 빌어 펴보니 붉은 털실로 짠 장갑을 손수건에 싸놓으것이였다.그녀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던지 천룡이의 손을 꼭 쥐고 오래동안 놓을줄 몰랐다.
<<천룡동무,저에게 왜 이런 선물을 하나요?>>
<<동무 생각에는?>>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서 천룡이는 해란이의 물음에 확답을 피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되물었다.그는 해란이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날마다 업간체조시간때면 눈길이 동무네 학급쪽으로 향해지군 했소. 다른 학생들은 다 털실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꼈는데 유독 동무만은 추운 날씨에 그냥 체조하는걸 보니 마음이 쓰리였소.추위를 단 얼마라도 막으라고 보잘것없는 장갑을 선물했소.동무의 도움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고마와요.>> 해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어느새에 교문앞에 이르렀다.천룡이는 해란이의 자그마한 손을 꼭 쥐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마치도 그녀의 마음을 꿰뚫으려는듯이. 그는 돌아서서 두어발작 내디디다가 다시 머리를 돌려 해란이한테 손을 젓고나서 성큼성큼 교정안으로 들어갔다.해란이는 못박힌듯 서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바램을 했다.
겨울방학이 되였다.학생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귀가했다.이튿날 아침 뻐스표를 사놓은 해란이는 천룡이가 밤 11시 차표를 샀다는 말을 듣고 저녁 7시가 되자 천룡이를 찾아갔다.기차를 탈 시간이 4시간 남았으므로 그들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하늘에서는 솜털같은 눈이 날렸는데 겨울치고는 무척 푸근한 날씨였다.그들은 역전광장부근의 거리에서 어깨를 나란히하고 걸으면서 학습과 리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가슴속에 숨겨놓은 말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털어놓기를 주저했다.그들은 심중에 깊이깊이 숨겨둔 사랑이 신성하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때문이였다.
해란이는 두 사람이 호젓이 만난 이 자리에서 진정을 토로하려고 몇번이나 입술을 호물거렸지만 천룡이가 웃을가봐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그러나 이제 두시간만 지나면 천룡이가 렬차에 오를것을 생각하니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가 싫었다.
<<천룡동무,우리가 알게 된지 얼만가요?>>
<<반년이 되여오는군요.>>
<<나는 이 한학기가 십년이나 되는것 같았어요.>>
<<왜 그럴가?>>
해란이는 천룡이의 곁에 바싹 다가서서 발등을 내려다보며 모기소리로 말했다.
<<량해해주세요.저는 동무를 만나고부터 웬 영문인지 기쁨과 고통이 반죽된 느낌이예요.마치도 방향을 잃은 새가 그물에 걸린것 같이…>>
그녀는 빙그레 웃는 천룡이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그의 대답만 기다렸다.이윽고 천룡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무의 진정은 나도 알고있소.동무처럼 총명하고 맘씨 고운 녀성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거요.그러나 우리는 아직 인생을 잘 모르고 자립도 못한 학생이요.우리는 모든 정력을 학습에 몰붓고 서로 돕고 서로 고무해 두 사람이 다 대학에 진학한 다음 미래를 설계하는것이 보다 현실적이 아닐가?해란이,내가 한 말의 뜻을 알만하겠지?>>
천룡이가 해란이의 손을 꼭 쥐고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이자 그녀는 격동되여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어서 눈물을 닦아,낯이 얼겠는데…>>
해란이는 천룡이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대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밤, 삼라만상이 고요에 잠긴 밤, 가로등불도 지쳤는듯 명멸하는 거리에서 한쌍의 청춘남녀는 인적 끊긴 거리의 주인이 되여 많고 많은 정담을 나누었다.발차시간을 한시간 앞두고 그들은 정거장으로 돌아왔다.
지루한 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날이 찾아왔다.뻐스를 타고 시내에 온 해란이는 책가방과 일용품을 넣은 가방을 메고 식량자루를 짊어진 아버지를 따라 하숙집인 권철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날 저녁,해란이의 부친과 권철의 부친은 술상에 마주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흥이 난 두 사람은 말이 잦았다.
<<여보 형님,해란이가 고중을 졸업하면 혼사를 정합시다.형님네 막내가 대학에 가면 더 좋고 락방해도 무방하오.어쨌든 나는 철이를 사위감으로 점찍어놨소.우리가 사돈이 되여 오순도순 지내면 여북 좋겠소.>>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두손들고 환영하오.내가 보건대 걔들은 천생연분이요.>>
흥이 도도한 권령감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옆방에 앉아서 어른들의 말을 귀동냥하던 해란이는 너무도 억이 막히고 귀에 거슬려서 일찌감치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이튿날 아침 해란이는 밥을 먹자마자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갔다.누구보다 천룡이가 몹시 보고싶었다.
새학기가 되자 학습이 긴장해졌다.해란이는 대학입시시험준비에 바쁜 천룡이의 학습에 지장이 될가봐 의식적으로 그와의 접촉차수를 줄이였다.5월달에 천룡이가 졸업시험을 치르고나자 해란이는 그를 찾아가서 어느 대학 무슨 전업을 지망하는가,생활에서 애로는 없는가를 물었다.천룡이는 예술학원의 음악전업을 지망한다면서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으니 안심하고 공부나 잘하라고 말하였다.
7월하순에 대학입시시험이 진행되였다.수험생들에게 시험장소를 제공하느라 재학생들은 농촌에 내려가 적비로동에 참가하였다.해란이가 시골에서 닷새동안 일을 하고 교정에 돌아와보니 대학입시시험을 치른 고3학생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고 3학년 교실은 텅텅 비여있었다.해란이는 현관벽에 써붙여놓은 수험생명단에서 천룡이의 이름을 읽었을뿐이였다.
9월초에 해란이는 천룡이가 부쳐온 편지를 받았는데 금년에 국가에서 대학생모집인수를 줄인바람에 락방했다면서 명년에 시험을 한번 더 치겠다고 하였다.그는 해란이더러 잡념을 버리고 정력을 학습에 몰부어 기초를 튼튼히 닦으라고 조언하였다.며칠뒤 그는 약간의 복습재료와 백로지 한묶음을 우편으로 부쳐왔다.종이가 결핍하던 그 시기에 한뭉치의 백로지는 그녀의 학습에 커다란 도움이 되였다.
순식간에 2년이란 시간이 흘러 해란이도 고중을 졸업하였다.총명한 기질에 워낙 악착스레 공부한 보람으로 그녀는 할빈에 있는 H대학에 진학하였다.대학교에 등교하여 한주일이 되였을 때 해란이는 자기를 그렇게 아끼고 보살펴주던 천룡이에게 감사편지를 써보냈는데 어인 영문인지 강물에 돌던진 격으로 회신이 없었다.혹시 편지가 류실되지 않았나 하고 일년동안 대여섯번이나 편지를 띄웠어도 천룡이한테서는 아무 회답이 없었다.지금 그이는 어디서 무얼 하고있을가?편지를 한통도 받아보지 못했을가?아니면 나보다 이쁜 쳐녀를 만나 가정을 꾸렸나?아니, 참군했을지도 몰라.천룡이에 대한 그리움은 자나깨나 그녀를 괴롭혔다…
<<뿡—뿡à> <<28형>>뜨락또르 한대가 그녀의 곁을 스쳐가더니 몇메터앞에 가서 멈췄다.
<<뒈질 계집애,죽으려고 환장했나?왜 길도 보지 않고 걷는거야?>>
볕에 낯이 까맣게 탄 40대의 사나이가 운전석의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욕설을 퍼부었다.
깊은 상념에서 소스라쳐 깨여난 해란이는 길가로 비켜서서 운전기사에게 연신 사과했다.그러자 운전기사는 노기가 풀렸는지 얼굴에 화색을 끠우면서 롱을 던졌다.
<<길을 걸을 땐 머리를 들고 다녀라.님 생각하느라 땅만 보다가 염라왕께 잡혀가면 어쩔려구…>>
다시 발동을 건 뜨락또르는 그녀를 뒤에 두고 가스냄새를 풍기며 앞으로 질주했다.그녀는 걸음을 다그쳐 10여분만에 권철이네 집앞에 이르렀다.
뜰안에 들어서니 큰 황둥이가 멍멍 짖으면서 달려왔다.
<<누구세요?>> 권철이의 큰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아주머니,저예요.>>
그녀는 목소리의 임자가 해란이란것을 알고 달려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말 빨리도 왔구나.어제 네 막내동생이 도련님을 찾아와 아빠가 앓고있으니 누나한테 전보를 쳐달라고 하던데 그새 전보를 받았구나.>>
그녀의 말에 해란이는 가슴이 덜컹하였다.전보까지 친걸 보니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한게로구나.
<<아뇨.막내동생은요?>>
<<걔는 아침차로 집에 돌아갔단다.>>
<<철이오빠는요?>>
<<좀 있으면 올게다.어서 집에 들어가자.>>
집안에 들어간 해란이는 권철이의 부모님들께 인사를 올리고나서 아버지의 병정황을 물었다.
<<과히 걱정하지 말어라.네 아버지는 고질병이 도진게니까 며칠간 약을 쓰면 낫겠지.이젠 막차도 떠나갔을게다.오늘은 여기서 자고 래일 아침에 일찌감치 떠나려무나.>> 권철이 어머니의 말씀이였다.
그녀는 책가방을 멘채 멍하니 서있었는데 두줄기의 눈물이 줄끊어진 구슬마냥 두볼을 타고내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별일이 없을게다.배낭을 내려놓고 내방에 가서 좀 쉬거라.이제 저녁밥을 지어오마.>> 권철이의 큰아주머니가 해란이를 자기방으로 데려갔다.
저녁무렵에 권철이가 집에 돌아왔다.그는 해란이를 보고 쑥스럽게 웃더니 학교에서 청가를 맡고왔으니 래일 함께 떠나자고 하였다.
<<오빠는 언제 교원이 되였나요?>>
<<음.>>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학입시에 락방된 뒤 나는 집에서 이듬해 대학입시를 준비하고있다가 교구에 있는 조선족학교에 대리교원으로 들어갔는데 교원사업도 해보니 재미가 있더라구.열시히 공작했더니 금년 봄에 정식교원으로 되였어.>>
저녁을 먹고난 권철이는 해란이를 자기의 방에 데리고 와서 학교생활을 이야기하고나서 대학교의 정황에 대해 물었다.두사람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았다.해란이는 로독에 잠이 퍼붓는바람에 밤 열시가 되자 권철이의 어머니가 쉬는 방으로 건너와서 옷도 벗지 않은채 잠에 곯아빠졌다.
아침에 해란이는 권철이와 함께 뻐스정류소에 가서 뻐스에 몸을 실었다.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리는 뻐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 간신히 참았다.
집 뜰안에 들어서니 나지막한 초가지붕우에 흰 적삼이 얹혀있는것이 눈에 띄였다.아버지께서 세상뜬것이 분명하였다.해란이는 금세 머리가 윙—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녀는 정신없이 집안으로 뛰여들어갔다.아버지의 몸우에는 이미 흰천이 덮여있엇다.그녀는 고인의 시체우에 엎어져서 <<아버지,아버지!>>하고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며 슬피 울었다.어머니와 동생들도 집안이 떠나가게 <<애고,애고>>하고 통곡을 하였다.문상하러 온 마을사람들도 다병한 어머니와 철부지밖에 없는 상가집의 비참한 처지에 동정의 눈물을 훔치였다.
<<아버지,흑흑…왜 그렇게 바삐 떠났어요?엉엉,왜 한해도 더 참지 못하셨나요?…엉엉,내가 졸업하고 아버지 병을 고쳐드리려 했는데…엉엉,아버지 없이 우리는 어떻게 사나요?하늘도 무심해요…>>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쥐고 흔들다가 가슴을 치며 넉두리를 했다.
마을에서는 고인을 마을귀 양지바른 산기슭에 고이 모셨다.권철이는 해란이더러 후사를 말끔히 한 뒤 등교하라고 일렀다.그녀는 권철이의 사리 밝고 착한 마음이 우러러 보였다.격동되여 목이 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틀동안의 시달림과 극도로 되는 비통으로 하여 어린 동생들은 방바닥 여기저기에 쓰러져 꿈나라에 들어갔다.해란이의 어머니는 금후 생계에 대해 딸에게 물었다.그녀가 지금 아무런 타산도 없다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그녀를 보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해란아,너의 아버지는 숨이 지기전까지 너를 애타게 기다리셨단다.네 아버지는 평소에 너와 권철이의 혼사를 밥자시듯 외우셨단다…>>
<<어머니,지금 저는 마음이 삼검불같아 그런건 고려할 경황이 없어요.>>
해란이는 권철이가 쉬는 방에 가서 권철이와 후사를 토의하였다.가정에 주장이 없는 살림살이는 대들보가 부러진 초가집같았다.산후풍에 여러가지 잔병을 겸해 바깥일을 못하시는 어머니와 아직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어린 동생 셋이 있는 이 가정을 무슨 힘으로 지탱한단말인가?해란이는 앞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막 빠개질것 같았다.
<<너무 상심해 하지 마.설마 산사람의 입에 거미줄 치겠니?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야.지금 대학교에서 수업도 하지 않고 란장판을 벌였는데 등교해야 무슨 소용이 있나?한동안 집에 있으면서 가정일을 돌보다가 학교질서가 바로잡힌 뒤에 등교하면 좋잖겠니?나도 짬짬이 찾아와 힘든 일을 도와줄께.>>
<<고마와.오빠가 도와주면 나는 시름이 놓여.>>
해란이는 권철이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그녀는 지금의 처지에 어디도 갈수가 없었다.
이튿날 학교로 간 권철이는 약속한대로 두주일이 멀다하고 해란이네 집에 찾아와서 돼지우리도 치고 자류지 논의 물고도 손질해주군 하였다.
해란이는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고 직심으로 자기를 돌봐주는 권철이가 눈물겹게 고마왔다.권철이가 언변이 별로 없고 어리무던하다는 선입견도 해란이의 머리속에서 점차 가셔지기 시작했다.권철이는 성격이 내향이지만 사리 밝고 남을 잘돕는 착한 젊은이라는 인상이 그녀의 뇌리에 차츰 뿌리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속에서 천룡이가 사라진것은 아니였다.홀로 있을 때면 천룡이의 웃는 얼굴이 눈에 삼삼하였다.그녀는 근 3년동안 회답 한장 없는 천룡이가 야속하기도 했다.정조를 유린당한 처지지만 초련의 꿈에서 헤여나기는 너무도 고달팠다.어머니의 독촉이 날따라 더해지자 사랑이 아닌 혼인의 천평은 저도 모르게 권철이쪽으로 기울어지는것이였다.
자류지의 벼가을을 마친 날 저녁에 해란이는 남동생과 한방에 쉬는 권철이한테로 갔다.그들은 학교정황이며 “문화대혁명”의 추세에 대해 관점을 주고받다가 화제를 사생활쪽으로 돌리였다.
“철이오빠,오빠는 녀자친구가 있나요?”
“없어.”
“오빠네 마을에 처녀들이 많잖나요?”
“이쁜 처녀는 적잖아도 맘에 드는 처녀는 없어.네가 좋은 처녀를 소개해주렴.생김새도 너와 같고 마음씨도 너와 같은 처녀를.”
“아이 참,오빠는 무슨 롱을 그렇게 해요?세상에 꼭 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해란이는 권철이가 자기를 추구한다는걸 직감했으나 모르쇠를 하고 넌지시 물었다.그러자 권철이는 금세 얼굴이 화로같이 달아올랐다.
“왜 없겠니?네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뜻을 알수 있을텐데.”
“나는 인물도 수수하고 가정부담도 태산같아 나를 만나면 한평생 고생만 할텐데요…”해란이의 두눈에서는 상심의 이슬이 맺히였다.
“해란아,섧어 말아.나는 너의 착한 마음도 너의 재질도 다 알고있다. 나는 빛좋은 개살구에 군침 흘리는 속된 인간은 아니야.”
해란이는 권철이의 흥분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왜 진정을 일찌감치 털어놓지 않았나요?”
“해란아,고중 1학년때 아버지가 너의 부친과 우리 둘의 혼사를 거론하시는걸 나는 들었어.그뒤 너는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나는 락방했으니 내가 너를 어찌 바라볼수 있었겠니?그리고 고중때 나는 네가 천룡이한테 홀딱 반한걸 아는데 내가 제3자로 끼여들수 있겠니?너는 지금 천룡이와 서신거래가 있니?”
“서신래왕요?그의 행방도 몰라요.고중시절에 내가 천룡일 사모하고 추구한건 사실이예요.천룡이도 나를 무척 사랑했구요.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뒤 편지를 몇통이나 부쳤어도 바다에 돌던진 격이였어요.나는 천룡이가 어디서 무얼 하고있는지 몰라요.학습이 긴장해서 천룡이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구요.몇달전부터 나는 오빠와의 관계도 고려해봤어요.오빠한테 인정빚을 너무나 많이 졌거든요.그런데 인정과 애정은 같지 않은거예요.인정이 애정으로 변하기는 쉽잖은가봐요.이성간에 접촉하면서 싹이 튼 애틋한 감정은 씻어버리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녜요.첫사랑은 평생 잊을수 없다는걸 오빠도 알거예요.”
“물론이지.나는 너를 지켜보다가 네가 귀숙을 찾은 다음에 너를 잊으려고 했어>”
권철이의 페부지언을 듣고 그녀는 코가 시큰하였다.
“해란아,지금 너의 처지엔 집을 떠날수 없구나.그리고 가망없는 천룡이에 대한 미련은 버려라.이젠 우리도 나이가 적잖은데 혼인대사를 무제한 끈다는건 비현실적이잖아.오늘 나는 네한테 정식으로 청혼한다.내 마음을 받아주겠니?”
“오빤 내가 밉지도 않아요?나는 소녀의 순정을 남한테 바친 녀잔데 한평생 후회하지 않을수 있겠어요?”
“해란아,나는 널 평생 사랑한다고 맹세한다.너는 내 천사고 우상이니까 설사 네가 다른 사람과 살다가 혜여졌다고 해도 나는 너를 반갑게 받아들일거야.내 말을 믿어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첫사랑은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가봐.권철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내가 천룡이를 그리는 심정은 꼭 같을거야…)
해란이는 권철이와 속심의 말을 하고 또 했다.그러나 그날밤에 당한 폭행만은 입밖에 낼수가 없었다.그것은 권철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때문이였다. (아, 녀자는 왜 정조를 짓밟히면 고개도 떳떳하게 들수 없는가?남자들은 왜 녀성들의 이런 고충을 리해하지 못하는가?)그녀는 자신이 녀자로 태여난것이 서러웠다.
“오빠의 심정을 알만해요.천천히 고려해보겠어요.”
“해란아,고마와.나는 네가 마음을 정리하고 날 받아줄 때까지 기다릴테다.”
격동된 권철이는 해란이의 손을 꼭 쥐고 미칠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오빠,이젠 주무세요.나는 돌아가 쉬겠어요.”
어머니의 곁에 누운 해란이는 오래동안 잠들수 없었다.권철이의 청혼에 응한다는것이 쉽지 않아서였다…
초가을에 해란이네는 알곡을 팔아 약간의 혼물을 마련하여 초라한 결혼식을 올렸다.그들은 권철이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에 세집을 구해 새살림을 꾸리였다.해란이는 친정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결혼식을 치른 한주일만에 림시공일을 찾아나섰다.
이듬해 봄에 대학교에서 편지가 왔다.정상수업을 시작했으니 며칠내에 등교하라는 통지였다.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그녀는 배움의 전당에서 리상의 나래를 펼치던 학창생활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그런데 정작 등교하려고 하니 두려움도 적잖았다.반란파조직 우두머리의 보복이 두려웠다.그러나 앞날을 위해 그녀는 결연히 북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학교의 모든것은 그렇게 익숙하고 또 그렇게 생소했다.폭풍뒤의 교정은 2년전의 아늑함이 없었다.반동학술권위로 몰려난 교수들은 대부분이 아직 교단에 오르지 못했고 실험실이며 도서실 그 어느 곳도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내란끝의 사생이나 동창사이에는 아직까지 성에가 끼여있었다.말이 전기전업이지 배운다는것은 신문의 사설이나 중앙령도의 지시정신이였다.피땀에 절인 돈을 허비하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자니 피가 말랐으나 졸업장을 타기 위해 그녀는 모든 고통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몇달이 지나자 학교에서 졸업식을 거행하였다.학교에서는 졸업증서는 후에 발급할테니 집에 돌아가라면서 학생들에게 졸업증명서만 한장씩 떼주었다.
이불짐을 정리한 해란이는 부랴부랴 교정을 떠났다.안해가 집에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권철이가 보고싶었고 년로다병한 어머님과 친정 동생들이 그리웠지만 그보다도 날이 다르게 불어나는 배가 걱정스러웠던것이였다.집에 돌아와서 한달이 좀 지나자 그녀는 몸을 풀었는데 하늘이 점지했는지 옥동자를 순산하였다.오래만에 새생명이 태여나자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는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권철이와 해란이는 시대조류에 맞춰 애의 이름을 홍근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권씨댁의 경사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화가 머리에 떨어졌다.홍근이의 백날잔치를 앞둔 어느날,권철이가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가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중이였다.멀리서 질주해오는 기차는 횡도에 사람이 있는것을 보고 경적을 울리였다.이때 철길을 지나던 짐마차의 말들이 경적에 놀라 울부짖으며 길복판에서 미친듯이 내닫고있었다.70~80메터앞에는 방금 하학한 소학생들이 짐마차가 덮쳐드는것도 모르고 길에서 히히닥거리며 걷고있었다.다급해난 차몰이군이 말고삐를 힘껏 잡아당겼으나 허사였다.놀랄대로 놀란 말들이 차우에 실은 짐짝을 땅에 떨구면서 날뛰는통에 차몰이군도 차에서 떨어져 끌려가고있었다.
위기일발의 시각에 현장에 당도한 권철이는 “길을 비켜라!”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나는듯이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학생들을 피하게 하면서 자전거를 가로세워 말들의 전진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속으로 내닫던 말들을 그로서는 막아낼수가 없었다.자전거를 깔아버린 짐마차는 순식간에 권철이를 넘어뜨려 깔고지나가다 멎었다.
비장한 광경을 보고 행인들이 달려왔을 때 권철이는 이미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데다 내출혈로 인사불성이였다.칠팔명의 어린이들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권철이는 병원에 호송되기도전에 숨지고말았다.
해질무렵, 비보를 접한 해란이는 이같은 청천벽력에 까무러치고말았다…얼어붙었던 가슴이 봄바람을 맞아 바야흐로 녹기 시작했을 때 운명의 신은 그녀를 또 천길나락으로 떨어뜨렸다.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불행이란 불행은 다 나에게만 떨어지는가?그녀는 하늘이 밉고 땅이 밉다고 통탄하였다.
정부에서 약간의 위자료를 보내왔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엔 바가지로 산불을 끄는 격이였다.
생계를 위해 해란이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한주일만에 홍근이를 업고 인사부문을 찾아갔다.졸업생배치를 주관하는 젊은 간부는 그녀가내놓은 대학졸업증서와 보존서류를 자세히 보고나서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동무가 권철선생의 애인이요?””하고 묻는것이였다.
“예.”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자 그 간부는 얼굴에 화색을 띄우면서 일어나 의자를 가져다주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다.
“권선생이 장한 일에 몸바쳤는데 우리가 다른것은 못돕지만 사업단위만은 좋은 곳을 골라주겠소.해란동무,대학교에서 전기전업을 배웠으니 여기 있는 공장중에서 맘에 드는 곳을 고르시오.”
해란이는 인사간부의 손에서 공장이름이 적혀있는 종이장을 받아들고 자세히 보았다.인사간부가 곁에 서서 매개 공장의 위치와 정황을 차근차근 소개해주자 해란이는 동력곤장을 선택했다.동력공장에는 배치받은 대학생들에게 숙사를 마련해준다니 생활근심이 적은데다가 학겨까지 부근에 있어서 홍근이를 교양하는데도 유리하였다.인사간부는 소개신을 써주면서 먼저 집에 돌아가 며칠간 쉬면서 출근준비를 하고나서 공장에 가라고 하였다.
한주일뒤 해란이는 동력공장을 찾아갔다.인사부문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 사정을 알게 된 공장장과 지도일군들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해란이는 홍근이를 공장 탁아소에 맡가고 이튿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비록 산후의 몸조리는 변변히 놋했지만 직장을 찾으니 새 삶을 찯은 느낌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몸에 힘이 솟았다.
생활이란 호수물같이 고요하고 안온한것은 아니다.그녀가 비록 조직의 보살핌과 동료들의 도움을 받지만 많잖은 로임에 홀몸으로 젖먹이를 키우고 친정을 돌보며 사는게 여간 힘겹지 않았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곤난을 하나하나 이겨내였고 언제나 맑은 미소로 사업과 동료들을 맞이하였다.
생활이 궤도에 오르자 그녀에게 중매를 서겠다는 동료도 적잖았고 청혼하는 동료들도 한둘이 아니였다. 껴버린 사랑의 불씨가 소생할수 있을가? 그녀는 천룡이와의 초련과 권철이와의 짧디짧은 혼인생활을 회고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진정한 사랑란 일생에 단 한번밖에 있을수 없다. 애정이란 한곬으로만 쏠리는 것으로서 물건같이 아무에게나 주고받는것이 아니다.나는 이미 부득이한 사정에서 마음을 한번 움직였는데 이제 더는 움직일수 없다.권철이를 잃고나니 천룡이가 새삼스레 그리워졌다. 순간,그녀는 권철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홍근이를 자리우는것만이 권철이에게 보답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아들까지 있는 자기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과 새 가정을 이루는것은 불행만 초래할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그들의 호의를 웃음으로 막아버렸다.
20여년이란 파란많은 세월이 꿈결같이 흘러갔다. 기름기 흐르던 까만 머리에는 성에가 끼고 웃음기 남실거리던 눈언저리에도 잔 금이 지나갔다. 꿈많던 시절은 추억으로 사라지고 중년의 인생고개가 앞에 놓여있다. 친정어머니와 시부모들도 선후로 타계하고 철부지 동생들도 장성해서 가정을 이루어 깨알이 쏟아진다.
마음의 기둥 홍근이도 충실하게 자라났다. 초중을 졸업한 홍근이는 소년병으로 입대했는데 지금은 료녕 군구 수장의 승용차를 몰고있다. 7~8년전에 군복을 갈아입은 홍근이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사업에 충성하여 선후로 2등공과 3등공을 세워 어머니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홍근이는 비록 수당금을 많이 받지 못하지만 평소에 아껴쓰면서 용돈을 모았다가 명절이나 어머니의 생신날이 되면 집에 선물을 보내왔다. 해란이는 어엿한 아들로하여 긍지감을 느꼈고 삶의 기쁨을 느껴 사업에도 성수가 났다. 진취심이 강한 그녀는 기술개발에서 많은 성과를 얻어 공장에서 손꼽히는 고급공정사로 진급하였다. 그녀는 모든 심혈을 사업에 몰부으면서 고독과 시름을 풀었다. 모자간에 서신래왕은 그녀의 유일한 향수였다.
사람들은 해마다 설이 되면 흩어져있던 가족이 한자리에 단란히 모여 그리던 정을 나누고 천륜지락을 누린다. 그러나 해란이만은 한날한시같이 독수공방으로 고독을 달래야 하니 명절을 맞는것이 오히려 고통이였다. 그녀는 공장장을 찾아가 명절기간에 직일을 서겠다고 자원하였다. 동료들로하여금 가정식구들과 즐겁게 명절을 쇠게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고마운 처사에 깊이 감동된 공장지도자와 동료들은 륜번으로 접수실을 찾아와서 말동무를 하면서 명절음식을 나눠먹기도 하였다.
20여일전에 홍근이한테서 편지가 왔다. 홍근이는 군관학교모집에 응시하겠다 면서 경비가 좀 딸린다는 뜻을 에둘러 표했었다.
<< 홍근이가 장한 생각을 했구나.>>
해란이는 신바람나게 우체국에 달려가서 돈 200원을 부치면서 편지에 공부를 착실히 해 기쁜 소식을 전해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십여일이 지나 홍근이한테서 또 편지가 날아왔다. 피봉을 뜯어보니 보내온 돈은 잘 받았는데 돈을 더 부쳐달라는것이였다. 보름만에 돈을 두번이나 부치고난 해란이는 어쩐지 이상했다. 홍근이한테 무슨 변이 생겼나? 돈을 왜 자꾸 부쳐달라는겐가? 책 사는데 돈이 수백원씩이나 들가? 의혹은 생겼지만 홍근이의 인품을 손금보듯 아는 그녀는 아들의 말을 믿고싶었다. 아마 다른 곳에 목돈을 쓸 일이 생긴게로구나. 그렇지, 뒤문거래가 많은 세월인데 부대라고 정토겠나? 누구나 다 가고싶어하는 군관학교니 경쟁이 무척 치렬할테지. 군관학교에 입학하려면 성적만으로는 부족할거야. 령도한테 감정투자를 하려면 홍근이 손의 돈이야 새발의 피지. 이렇게 생각하니 의혹이 해소되여 가슴이 후련해졌다.
마침 해란이는 산동으로 출장가게 되였다. 홍근이의 일이 궁금한 해란이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군구를 찾아갔다. 사령부사무실에 들어가서 수장을 만난 그녀는 출장길에 들렸다면서 지금 홍근이가 어디 있는가고 물었다.
안면이 있는 수장은 해란이에게 의자를 권하고나서 홍근이가 거리에 나갔으니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라면서 차물을 한컵 부어주었다. 그녀는 수장께 홍근이의 공작과 생활정황을 물어보고싶었으나 수장이 전화를 받고 지시하느라 바쁜것을 보고 입밖으로 나오는 말을 삼켜버렸다.
그녀는 수장의 공작에 영향을 끼칠까봐 수장에게 소풍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와 대문쪽으로 걸어갔다. 이 때 마중켠에서 승용차 한대가 대문으로 들어오고있었다. 그녀가 길을 내주느라 한켠으로 비키는데 승용차가 대문앞에서 멈춰섰다.
<<어머니! 어머니 오셨어요?>>
귀익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쩍 드니 오매에도 그리던 아들이 운전석에서 뛰여내렸다.
<<어머니, 무슨 일로 여길 오셨어요?>>
<<관내에 출장갔다가 돌아오는길이다. 요즘 무척 지쳤구나. 몸이 불편한데는 없니?>>
홍근이는 약간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 잠간만 기다리세요. 인차 돌아오겠어요.>> 하고는 다시 승용차에 올랐다.
해란이는 아들의 능숙한 운전솜씨를 보고 마음이 흐뭇했다.
차고에서 돌아온 홍근이는 해란이의 손을 잡고 숙소로 왔다. 침실에 들어가자 홍근이는 어머니에게 의자를 권하고나서 작업복을 벗고 손을 씻더니 물 한컵을 부어 어머니한테 드렸다.
해란이가 물을 마시면서 집안을 돌아보니 사무상에는 전화기가 놓여있고 책꽂이에는 서적이 여러권 꽂혀있었다. 침안은 무척 우아하고 정결했다. 그녀는 롱조로 말하였다.
<<독신숙사치고는 호화롭구나. 내집보다 한결 낫구나. 나는 공정사라도 개인전화가 없는데…>>
<<어머니, 이건 사업의 수요예요.>>
해란이는 려행용가방에서 과일꾸럭을 꺼내 사무상우에 놓으면서 어서 먹으라고하였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바라보던 홍근이의 낯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머뭇거렸다.
<<얘야, 고달프면 잠시 쉬려무나.>>
<<어머니, 괜찮아요.>> 어머니의 눈길을 피하며 말하는 그는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글썽하였다. 그는 급기야 어머니의 무릎앞에 꿇어앉아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어요. 저는 일을 저지르고 이때까지 어머니를 속였어요.
아들의 반상적인 거동은 그녀로하여금 오리무중에 빠지게하였다.
<<얘야, 어서 일어나서 말해다오. 어떤 일이 생겼어도 내가 너를 도와줄테니 걱정하지 말아.>>
<<어머니, 일은 이렇게 되였어요…>>
20여일전의 어느 저녁, 홍근이가 회의하러 가는 수장을 비행장에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서북풍이 몰아치고 진눈까비가 날렸다. 그는 대통로에 행인이 적은것을 보고 차를 급히 몰았다. 앞을 내다보니 <>자형 갈림길에 시커먼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속도를 죽이고 가까이 가보니 웬 사람이 피못에 쓰러져있고 그 옆에는 찌그러진 녀자용 자전거가 누워있었다.
(어느 량심없는 운전기사가 사람을 치워놓고 도망친게로구나.) 홍근이가 급히 정차하고 내려보니 피해자는 밤빛 외투에 검은 목도리를 두른 녀인이였다. 사람부터 살려야겠다고 생각한 그가 녀인을 일으키려했으나 혼미상태에 빠진 녀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도와줄 행인도 없었다. 그는 녀인을 조심스레 안아다 승용차의 뒤좌석에 눕히고나서 찌그러진 자전거를 승용차에 실은 뒤 곧추 군구병원으로 내달렸다. 홍근이는 군의한테 정황을 대충 설명하고나서 상한 사람을 구해달라고 말하였다.
의사들이 진찰하고나서 환자는 왼쪽 팔이 부러지고 왼쪽 다리는 분쇄성골절이 되였다고 하였다. 그들은 환자가 류혈과도로 혼미했는데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의사들이 말을 듣고난 홍근이는 가슴이 덜컥하였다. 그는 담당의사의 손을 잡고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환자의 신분을 아십니까?>>
담당의사는 직답하지 않고 환자의 공작증을 보여주었다.공작증은 시 문화국에서 발급한것이였다. 공작증 안을 펼쳐보던 홍근이는 깜짝 놀랐다. 공작증의 소유자는 복령령이라는 젊은 녀성이였다.
공작증의 사진을 보던 홍근이는 그녀가 몇달전 부대에 와서 위문공연을 하던 그 인기가수 복령령이임을 대뜸 알아보았다. 그녀가 독창을 할 때 그녀의 노래에 매혹되여 박수갈채를 하고 목청껏 재청을 불렀던 홍근이였기에 그녀의 모습은 홍근이의 머리속에 깊이 새겨졌던것이였다.
내 맘속 우상인 청년가수가 이런 참화를 당하다니. 홍근이는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다급해난 그는 담당의사를 보고 최선을 다해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담당의사는 수술이 급선무라며 그녀의 피를 뽑아 검사하였다. 의사는 환자의 피가 “A”형인데 공교롭게도 지금 혈고에 “A”형의 피가 금방 떨어졌다고 하였다.
홍근이는 대뜸 팔소매를 걷어올리면서 의사를 보고 말했다.
<<의사선생님, 저의 피를 뽑으세요. “O”형입니다. 어서 저의 피를 뽑으십시오.>>
<<고맙소. 착한 젊은이를 만나 다행이요. 먼저 동무의 혈형을 확인합시다.>>
홍근이의 혈형이 “O”형임을 확인한 의사는 호사더러 당장 피를 뽑아 환자에게 수혈하라고 분부하였다.
호사는 홍근이의 팔에 주사침을 꽂고 피를 뽑는 동시에 그 피를 환자에게 수혈하였다. 급히 수요하는 피가 많은지라 홍근이의 낯빛이 창백해지는것을 보고서야 호사는 주사침을 뽑았다.
백, 2백,…, 5백,… 홍근이의 붉은 피는 혼미상태에 빠진 녀인의 정맥속으로 서서히 흘러들어갔다. 이윽고 백지장같던 녀인의 얼굴에 차츰차츰 홍조가 어리였다.
응급실밖 복도에서 밤을 새우던 홍근이는 날이 새자 기진맥진하여 숙소에 돌아오자 밑굽 잘린 나무같이 침대에 쓰러졌다. 사지가 나른하여 아침밥을 먹을 마음도 없었고 물을 마실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시 눈을 붙이려고했으나 눈까풀은 감겨도 잠은 오지 않았다.
령령이가 건강을 회복할수 있을가? 식구들은 근방에 있는지? 입원기간 누가 돌봐주고 일상 비용은 어찌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뒤일이 걱정이였다. 어제 밤에 가무단에 알렸으니 입원비는 가무단서 내겠지만 다른 비용은? 사람을 도울바엔 끝까지 도와야 되는데 어떻게 한담? 지갑이 빈 그는 바늘방석에 앉은듯 안절부절이였다. 이런 큰 일을 어머니한테 알리지 않고 될가?
머리가 흐리터분하고 마음이 황황해난 홍근이는 어머니에게 사실를 알리려고 편지지를 꺼냈다. 내가 령령이를 구한 사실을 어머니께서 아시면 장한 일을 했다고 기뻐하실거야. 하지만 내 불찰도 아닌데 내가 환자의 일상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하면 어머니께서 허락하실가? 그럼 내가 차사고를 냈다고 할가? 아니, 그러면 어머니께서 기절초풍하실거야. 생각을 굴리던 홍근이는 이 사실을 잠시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환자를 간호하는데 쓸만한 돈이 없었다. 그는 난생 처음 거짓말을 하기로 작심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군사학원에 응시하는데 돈이 급히 수요된다고 알리였다. 그는 치료의 진전을 봐가며 차차 어머니께 진상을 알리려고했는데 공교롭게도 여기서 어머니를 만난것이다.
홍근이가 울먹거리는것을 본 해란이는 안타까워 눈물을 지으면서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얘야, 상심하지 말아, 함께 병원에 가 보자.>>
그들이 병원에 가서 담당의사를 만나 환자의 정황을 물었더니 의사가 말하였다.
<<환자의 왼쪽 팔에는 이미 석고틀을 고정시켜서 별 문제가 없는데 왼쪽 다리는 완치하가 어려울것 같습니다. 십여일전에 의식을 회복한 환자는 아직까지 엄중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배합해서 안위사업을 합시다. 엊저녁에 가무단 책임자가 다녀갔는데 상황을 환자의 가정에 알릴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환자의 부모가 할빈에 살기때문입니다. 먼저 병실에 가봅시다.>>
환자는 눈을 감은채 침대우에 반듯히 누워있었는데 얼굴에는 고통이 어려있었다. 해란이는 침대앞에 다가가서 환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날이 선 코대, 약간 치솟은 눈섭아래 길게 돋은 속눈섭, 앵두같이 빨간 입술, 볼 밑의 탐스런 보조개… 퍼그나 귀염상스러운 처녀였다. 그녀는 이 처녀가 어쩐지 무척 낯익어보였는데 어디서 봤던지 기억에 떠오르지 않았다.
령령이는 사람들의 동정에 잠이 깨여 살며시 눈을 떴다. 홍근이는 령령이의 앞에 다가가서 자기 어머니를 소개해주었다. 령령이는 두사람을 족히 반분가량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하염없는 눈물이 그녀의 초췌한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홍근이는 그녀의 손을 살그머니 쥐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낼수가 없었다. 그들은 과일꾸럭과 음료수를 침대머리에 있는 궤우에 놓고 령령이를 안위하는 말을 몇마디 하고는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해란이는 홍근이와 함께 가무단을 찾아갔다. 그들은 가무단 책임자를 만나 금후의 일을 토의했는데 이런 중대사고를 환자의 가정에 알리지 않을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튿날 오후 북행렬차에 오른 그들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렬차에서 여덟시간동안 진땀을 흘리다가 저녁 아홉시가 지나서야 목적지에 이르렀다. 홍근이일행이 령령이네 집을 찾아가 노크를 몇번 했는데도 집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윽고 집안에서 누구를 찾는가고 묻는 중년 녀인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여나왔다.
홍근이는 령령이의 단위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녀인은 안전문의 고양이눈으로 밖의 사람들을 확인하고나서 문을 열고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손님들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녀인은 머리칼이 반백이 되였는데 일핏 보아서는 60고개를 바라보는듯 하였다. 집안에는 주방 한간에 침실이 하나뿐 세간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안주인은 손님들을 보고 침대에 걸터앉으라고 하였다. 좁은 방안에는 침대 하나를 내놓곤 쏘파나 의자도 없었다. 홍근이네가 침대에 걸터앉자 그녀는 차물을 끓여 사기컵에 담아서 가져왔다. 평소에 손님이 없는 모양이였다. 그들이 물을 마시는동안 그녀는 령령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단위에서 이 먼 곳을 찾아왔을가 하고 가슴을 조이였다.
홍근이가 일행을 소개하고나서 령령이가 차사고를 당한 일과 치료정황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풍상고초로 이마에 때이른 주름이 생긴 이 녀인은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나서 외투를 걸치고 일어섰다. 그녀는 단위에 청가서를 써서 이웃동료에게 주고나서 그들을 따라 집을 나섰다.
렬차에 올라 자리를 잡은 해란이는 홍근이더러 가게에서 사온 식료품을 동행들에게 나눠주어 요기하게 하였다.
령령이의 어머니는 얼빠진 사람같이 멍하니 앞을 보면서 해란이가 깎아준 사과를 3분에 한입 5분에 한입씩 씹고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눅잦혀주려고 해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는 올해 춘추가 얼마세요???
<<쉰둘이예요.>>
<< 어느 부문에서 근무하세요?>>
<<신화서점에 다녀요.>>
<< 식솔이 몇분인가요?>>
<<둘하고 반이예요.>>
그녀의 말에 해란이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희한한 일도 있구나. 집 식구가 둘하고 반이라니? 호기심이 동한 그녀가 물음을 계속했다.
<<형부되시는 분은 어디에 출근하시나요?>>
그녀는 호- 하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직장이라고요? 옥살이를 해요. 형기가 차 며칠 뒤에 나온다고 하더군요.>>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수건을 꺼내 눈으로 가져갔다.
정말 가련한 처지로구나! 해란이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고 20여년을 홀로 살아온 자기의 파란많은 인생사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해란이의 손을 으스러지게 부여잡고 탄식조로 말하였다.
<<그것도 다 팔자소관인가봐요. 우리 녀자들은 한평생 고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가봐요. 나도 령령이 아비와 가정을 꾸리고 희망을 기탁했었는데 그이가 한번 떠나 근 20년간 <영광>을 누릴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후에 나는 령령이한테 희망을 걸고 살아왔는데 걔가 또 차사고를 당했다니 인간의 길화흉복을 누가 점칠수 있겠어요?>>
<<언니, 너무 속썩이지 마세요. 령령이는 앞으로 언니한테 꼭 행복을 안겨줄거예요.>>
<<… …>>
기차가 심양역에 도착했다. 프레트홈을 나선 그들은 뻐스에 올라 군구병원으로 내달렸다.
담당의사가 그들을 병실로 안내했다.
침대우에 반듯히 누워서 천정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령령이는 문병하러 여러 사람이 들어오는것을 보고 약간 놀라더니 그들속에서 저의 어머니를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웨쳤다.
<<엄마, 엄마가 어떻게 왔어요?>> 그녀는 일어나 앉으려고 움찔거렸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냥 누웠다. 맑은 두 눈에 잔이슬이 맺혔다.
<<엄마, 엄마는 내가 다친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령령아, 네가 정말 고생하는구나. 어제 밤에 이 분들이 집에 찾아와서야 나는 네가 다쳤다는걸 알았구나. 감각이 어떠냐? 통증은 좀 덜해졌니?>>
그녀는 손수건으로 딸의 눈물을 닦아주고나서 자기의 얼굴도 훔치였다. 그녀는 함께 온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여러분, 고단하실텐데 돌아가세요. 저도 한 이틀 돌보다가 병세가 호전되면 돌아가야겠어요. 여러분들이 계시니 저는 마음이 놓여요. 어서 돌아가세요.>>
병원을 나서기 전에 해란이는 담당의사와 간호원들에게 령령이를 각별히 보살피고 치료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즉시 알려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녀는 또 홍근이더러 짬짬이 병원에 들려 환자를 보살펴주어 건강이 조속히 회복되게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그녀는 홍근이에게 다시 돈 5백원을 쥐여주면서 령령이에게 필요한 영양품을 사주라고 일렀다.
집에 돌아온 해란이는 마치도 넋을 잃은 사람같았다. 마음속이 삼검불같이 헝클리고 어수선해 안절부절이였다. 령령이를 머리속에 떠올릴수록 눈앞이 캄캄하고 기가 막혔다. 이제 갓 피여나는 꽃나이처녀, 날마다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앞길이 만리같은 가수가 병석에 있자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만약 치료가 잘안돼 장애자로 남는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되나? 령령이의 어머니는 오로지 딸애가 지피는 희망의 빛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지 않는가? 일단 일이 잘못되면 우리 모자가 한평생 자책속에 모대겨야 하니 이 일을 어쩐단말인가? 홍근아, 홍근아, 나는 네가 상한것보다 더 안타깝구나.
이틀 뒤 령령이의 어머니도 서점의 일이 바빠 집으로 돌아갔다.
의식을 회복한 뒤 생면부지의 젊은이가 자기를 살뜰하게 돌보는것을 보고 그가 교통사고를 빚은 당사자라고 착각한 령령이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홍근이가 말을 걸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억지를 부렸었다. 홍근이는 자기가 차사고를 친것이 아니라는것을 해명을 하고싶었지만 환자의 정서를 우려해 말을 입밖에 내놓을 수 없었다. 홍근이는 지성으로 사죄하면서 부대의 수장께서 의술이 가장 높은 의사를 배치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담당의사가 그녀의 생명이 위태할 때 홍근이가 선뜻 자신의 피를 6백CC나 바쳤다는 말을 하자 그녀의 얼었던 속도 얼마간 풀리고 정신상태도 많이 호전되였다.
홍근이는 퇴근하고나면 병실을 찾아가서 그녀에게 안위의 말을 해주면서 과일을 깎아 그녀의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령령이가 땀을 흘리면 그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는 령령이를 즐겁게 해주려고 이야기책을 빌려오고 반도체라디오를 사주어 혼자 있을 때 적적함을 풀게 하는 등 할만한 일은 다 하였다.
홍근이의 지성에 감동된 령령이는 기분이 많이 좋아져서 얼굴에 종종 해빛이 흘렀다.
10여일이 지나자 치료에도 호전이 있었다. 왼쪽팔의 석고판을 떼내여 두 팔을 자유로 놀릴수 있게 되여 그녀도 기뻐하고 홍근이며 의사들도 무척 기뻐하였다. 령령이와 홍근이의 감정도 날따라 가까와졌다. 홍근이는 그녀를 몇시간만 못봐도 속이 허전했고 령령이도 매일 홍근이가 찾아올 때가 되면 고개를 출입문쪽으로 돌리고 홍근이가 나타나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내가 령령이한테 맘이 끌리고 그녀를 사랑하는게 아닌가? 아니, 그래선 안돼. 령령이는 인기가수에 생김새도 이쁘니 추구하는 총각이 많을텐데 그녀가 나를 반눈에나 차 할라구. 너무 고독하니 심심풀이를 하는게지. 분에 넘친 생각은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바라는건 그녀의 조속한 출원이야. 그는 리지로 감정을 전승하려고 애썼다.
어느날 령령이가 홍근이한테 갑자기 련주포를 놓았다.
<<동무는 올해 나이가 얼마예요? 참군한지 몇해예요? 어느 학교를 나왔나요? 가정에는 누가 계셔요?>> 그녀는 지어 홍근이의 애호까지 물었다.
홍근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되물었다.
<<동무가 나를 진급시켜 주려 하오? 아니면 배우자를 소개해 주려 하오?>>
<< 동무는 성실하고 총명하여 수장들의 눈에 꼭 들거예요. 장차 진급은 물론이고 어느 수장의 사위로 될지도 몰라요.>>
<<하하하…>>
<<호호호…>>
그녀는 홍근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깔깔 웃었는데 얼굴이 홍시같이 상기되였다.
홍근이는 그녀의 오른쪽 팔을 쥐고 흔들면서 말했다.
<<소웃다꾸레미터질 소린 하지 말아요. 운전기사따위가 군관으로 된다는게 말이나 되오? 롱은 그만하오. 솔직히 말해 나는 조선족이오. 우리 어머니는 타민족 처녀와 혼인하는것은 질색이요.>>
<<참, 엉터리도 없는 소릴 하네요. 지금이 어떤 시댄가요? 혼인은 자주고 사랑에는 민족과 국계가 없잖아요? 사랑은 어떤 장벽도 막을수가 없는거예요.>>
<<동무 말에 도리가 있지만 나는 외독자라 어머니의 뜻을 따라야해요.>>
<<정말 황당한 소릴 하네요.>>
령령이가 깔깔 웃어대자 홍근이도 덩달아 웃었다.
나이가 엇비슷한 처녀총각이 날마다 만나니 호흡이 통하고 서로간에 호감이 생기지 않을수 없다. 그들은 우스개를 하다가 얼굴에 홍조를 띄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들은 심중에서 싹튼 사랑의 불씨가 끌래야 끌수 없다는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먼저 사랑를 고백하기를 주저할 뿐이였다.
<<나는 군구 문공단에 들어가고 싶어요.>>
<<왜서?>>
홍근이는 령령이가 사랑의 화살을 쏜다는걸 알면서도 모르쇠를 하고 천연스레 물었다.
<<그것도 몰라요?. 남자들은 눈치가 정말 무뎌요.>> 령령이는 그 고운 눈길에 정을 담아 홍근이에게 보내였다.
<<동무가 우리 군구 문공단에 와주면 나는 두손들고 환영이야.>>
<<하지만 군구 문공단에 들어간다는게 쉬운 일이 아닐텐데…>>
<<세상에 힘써 안되는 일이 어디 있어? 동무는 인기가수니 그리 어렵지 않을거야. 나도 힘을 써주지.>>
<<고마와요. 홍근씨, 나는 홍근씨만 믿겠어요.>>
일요일날 아침, 식사를 마친 홍근이는 병실로 찾아갔다.
령령이는 눈을 감고 침대에 반듯히 누워있었다. 얼굴에 미소가 비낀 그녀는 단잠이 든것 같았는데 가슴에는 이불이 덮여 있지 않았다. 속적삼만 입고있는 그녀는 방금 피여난 모란꽃같이 아릿답고 생신하였다. 약간 볼록하게 솟은 젓무덤은 고르러운 숨결에 따라 절주있게 오르내렸다. 그림속 선녀같은 그녀의 모습은 볼수록 황홀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앵두같은 입술에 키스를 하고싶은 충동에 고개를 숙이다가 벌떡 일어서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직은 때가 일러. 이래선 안돼.>>
그는 입속말을 하며 뒤로 두어발작 물러섰다. 이 때 령령이는 잠에서 금시 깨여났는지 실눈을 살며시 뜨더니 정찬 눈길로 홍근이를 바라보며 입을 놀렸는데 뭐라는지 귀에 들리지 않았다.
홍근이가 그 뜻을 몰라 멍하니 내려다보니 그녀는 또 뭐라고 입을 호물거렸다. 이번에도 홍근이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령령이는 하얀 이를 내보이며 방긋 웃고나서 가까이 오라고 턱짓을 하였다.
홍근이는 령령이가 무슨 속심을 털려는가 궁금하여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이 때 령령이는 두팔을 벌려 그의 목을 와락 부등켜안았다.
느닷없이 처녀의 팔에 목을 안긴 홍근이는 놀라고 당황하여 가슴이 쾅쾅 뛰였다. 목을 빼려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귀여운 처녀의 자존심에 찬물을 끼얹을가봐 령령이가 하는대로 목을 맡겼다.
홍근이한테서 적극적인 반응이 없자 령령이는 의혹에 찬 눈으로 대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홍근씨, 동무는 저를 저를 사랑하지 않나요? 왜 이리 랭담해요?>>
<<령령이, 우리가 이러기엔 너무 이르잖아요?>>
홍근이의 대답에 그녀는 아쉬운듯 천천히 손을 놓았다.
<<제가 짝이 기운가요? 어쩌면 장애자로 될지 모르니깐요.>> 령령이는 이불을 와락 덮어쓰더니 엉엉 울었다. 홍근이가 이불을 걷으려고 했으나 그녀가 손을 놓아주지 않아서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령령이, 절대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동무를 한없이 사모하지만 자신이 동무에 비해 짝이 기울다 생각해 그런거야. 이건 내 속심의 말이야.>>
홍근이는 령령이가 자기의 진정을 알아주지 못하는것 같아 안타까워서 꺽꺽거리기만 했다.
<<홍근씨, 저는 동무를 사랑해요. 솔직히 말해줘요. 동무는? >>
홍근이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 대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내가 만약 장애자로 돼도 저를 사랑하겠어요?>>
<<무슨 말을 하고있어? 나는 너의 사랑을 받는건 온 세상을 가진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나는 령령이를 버리지 않을거야.>>
<<좋아요. 저는 한평생 홍근씨만 믿고 살래요.>>
청춘남녀는 으스러지게 껴안고 불같은 키스를 나누었다.
어느날 저녁, 담당의사가 가무단의 책임자를 불러왔다.
담당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환자의 왼쪽 다리에 병독이 생겨 그냥 두면 생명이 위태하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근이는 홍두께를 맞은듯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아찔했다. 한동안 병원치료를 계속하면 령령이가 완쾌되리라 굳게 믿었는데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 수술이 만약 실패하면? 홍근이는 뒤 일을 더 생각할 용기조차 없었다.
령령이는 볼수록 귀엽고 불쌍하다. 나는 령령이와 사랑을 언약했으니 그녀의 일생을 책임져야 한다. 그녀가 장애자로 된다면 우리의 혼인을 어머니가 반대하실텐데 어떻게 설복하나? 내가 장애자와 결혼하면 세상사람들의 비웃음도 빗발치겠지? 하많은 생각이 머리를 천근같이 지지눌렀다. 지금 령령이는 완쾌를 믿고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녀가 병세를 안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가? 아마 죽더라도 수술은 마다할텐데. 병세를 어떻게 알려주고 또 무슨 수로 그녀를 다시 수술대에 오르도록 하나? 홍근이는 자신의 힘만으론 그녀의 마음을 돌려세울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와 령령이의 모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홍근이는 어머니와 령령이 모친한테 전보를 쳤다. 이틀이 지나자 어머니는 왔는데 령령이의 모친은 오지 않았다.
예순이 넘어보이는 웬 늙은이가 병원에 오더니 령령이의 부친이라고 자칭했다.
복도에서 턱수염이 터부룩한 반백의 늙은이를 바라보던 해란이는 덴겁하여 뒤로 두어발작 물러서더니 <<복사령!>> 하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늙은이는 복사령이란 소리에 와뜰 놀라더니 손을 저으며 급히 제지시켰다.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들이 병원에서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정말 넓은게 세상이고 또 좁은게 세상이였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대방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올 사람들이 다 모이자 담당의사는 령령이에 대한 치료과정과 치료중에 생긴 새 정황을 소개하고나서 조속히 수술을 진행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에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수술이 까다로워서 일단 성공하지 못하면 다리를 잘라야 하니 환자의 마음을 어떻게 눅잦히겠는가를 연구하자고 하였다. 의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먼저 복대위에게 따님의 공작을 해보라고 하였다. 늙은이는 머리를 글적거리면서 떠듬떠듬 말하였다.
<<의사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부친이 딸의 공작을 못한다면 누가 한단말인가? 사람들은 말은 않했지만 일제히 늙은이한테로 눈길을 던졌다.
<<저는 명색이 걔의 아비지 령령이를 모릅니다. 아비자격도 없는 주제에 어찌…>>
환자가정 대표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여나오자 사람들은 너무도 뜻밖이라 서로 눈치만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해란이가 발언할 차례였다.
<<이런 일에 제가 뭐라하겠나요? 내 아들 같으면 달래볼수 있지만 남의 천금한테 어떻게 입을 떼겠어요? 생각만 해도 겁이 나요.>>
말은 그렇게 던졌지만 해란이는 자기를 내놓고 이 일을 주장할 사람이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쉬고 병실문앞에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가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되돌아섰다.
이 지경에 이르자 담당의사가 정황을 환자한테 직접 알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말을 듣고난 령령이는 너무 놀라 까무러치고 말았다. 의사들이 응급처치를 취해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깨여났다.
<<저는 죽으면 죽었지 장애자로 살지는 않겠어요. 수술이 실패하면 다리를 끊어야 한다고요? 저의 생활, 저의 부모, 저의 전도에 대해 당신들은 생각이나 해봤어요?>> 억이막힌 령령이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 때부터 령령이는 눈도 뜨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으며 약도 먹지 않고 주사도 거절하면서 누워서 죽음만 기다렸다. 그녀가 꼼짝달싹하지 않고 누워있는 정상은 식물인과 방불했다.
그녀를 지켜보는 홍근이는 가슴이 바질바질 타서 재가 되였다. 수술을 하잖 으면 생명이 위태하고 수술을 하다 아차하면 장애자로 되겠으니 진퇴량난이라 손에 진땀이 났다. 홍근이는 령령이의 생각을 돌려세우는 유일한 방도는 자기가 그녀의 배우자로 되여 그녀의 일생을 책임진다는것을 령령이가 믿게 하는것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머니의 허락이 시급하였다. 홍근이는 어머니에게 눈짓하여 병실밖을 나왔다.
<<어머니, 저는 령령이를 사랑해요. 우리 둘은 백년을 함께하자 맹세했어요. 어머니가 혼인을 허락하시면 저는 령령이를 설복할수 있어요. 어머니, 허락해줘요.>>
<<홍근아, 너, 너 정신나가지 않았니?>>
해란이는 그 자리에서 몇바퀴 맴돌이쳤다. 그녀는 아들이 령령이와의 혼인을 제기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머니, 령령이를 구해줘요. 우리 혼인을 허락해줘요.>> 홍근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애원하였다. 그러나 해란이는 아들의 간청을 들어줄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속에 휠체어를 탄 령령이의 비참한 모습이 어른거렸고 복대위의 가증한 낱짝이 떠올랐다. 아무리 양부라 하나 그자와 사돈을 맺는다는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였다.
<<허락해줘요? 저는 령령이를 버릴 수 없어요.>>
<<홍근아, 네가 그애의 전정을 망쳤으니 나는 네가 경제적으로 그 애의 일생을 책임지는것은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혼인만은 안된다.>>
<<왜요? 제가 장애자와 사는데 두려워 그러세요? 아니면 령령이가 한족처녀라고 막는가요? 지금이 어떤 시대예요?>>
해란이는 아들의 물음에 대답을 잃었다. 그렇다고 20여년을 숨겨온 비밀을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신을 기다리는 령령이의 창백한 모습을 그려다보다가 무릎을 꿇고있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대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도 천정우에 답안이 씌여있는듯이.
홍근이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팔을 잡아 흔들며 재촉했다.
<<어머니, 허락해줘요. 령령이없이 저는 하루도 못살아요. 우리는 평생토록 사랑하자 맹세했어요. 어머니!>>
아들의 굳은 의지를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느낀 해란이의 두눈에선 눈물이 샘솟았다. 운명이 자기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원망스러웠다.
<<네 청을 들어주마. 어서 일어나 병실로 가자.>>
<<어머니, 고마와요. 우리는 어머님께 한평생 효도할께요.>>
병실로 돌아온 해란이는 령령이의 손을 어루만지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령령아, 수술을 하거라. 나는 너희들 혼인에 동의한다. 홍근이는 평생 너를 하루같이 사랑할테니 마음놓고 수술을 하거라. 의사도 최악의 경우를 말했을따름이다. 령령아, 위험은 있지만 네가 신심만 가지면 꼭 성공할게다.>>
죽은듯 누워있던 령령이의 눈에서 잔이슬이 샘솟았다.
밤이 깊어갔다. 해란이는 복대위를 음식점에 불러 마주앉았다.
<<복사령, 당신은…>>
복대위는 급급히 손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였다.
<<해란동무, 제발 복사령이라 하지 마오. 그저 대위라 하오.>>
<<그러지요. 그런데 당신은 무슨 죄로 근 20년간 옥살이를 했나요?>>
<<해란동무, 나는 당신을 대할 낯이 없소. 동란때 나는 나쁜짓을 너무 많이 했댔소.>> 그는 머리를 푹 숙이면서 말을 계속했다. << 동란이 일기전에 나는 H대학교 선전간사였소. 나는 신화서점의 회계와 결혼해 몇년간 아기자기한 생활을 했더랬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나는 출신과 사회의 연줄덕으로 홍위병조직의 작은 우두머리로 되였댔소. 대련합때 총부의 우두머리까지 되고나니 야심도 그만큼 커졌지요. 동란이 일자 나는 마구 짓부시고 빼앗는 범죄활동에 참가하고 무단투쟁에 앞장서서 많은 사람을 해쳤소. 몇해 뒤 나는 죄가 두려워 사처로 피해다녔지만 법망을 벗어나지 못했소…
체포된 뒤 탄백과 검거표현이 좋아 18년 도형을 언도받았었소. 그동안 나는 안해의 마음을 발기발기 찢어놓았댔소. 안해는 그때 애가 없었기에 리혼하고 재가할수 있었지만 그 란장판에 믿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오. 안해는 홀로 살기 너무 적적해 딸애를 얻어 기른다고 하더군요.. 그 뒤 우리는 출옥직전까지 소식이 끊겼지요… 오늘 여기서 당신을 만날줄은 꿈밖이요. >>
해란이는 오늘 그를 만나 복사령이라고 부를 때 젓던 손이 바로 대학교 방송실에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던 그 죄악의 손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녀는 분노에 찬 눈길로 복대위를 쏘아보았다.
복대위는 머리를 맥없이 떨어뜨리고 아무런 말도 못했는데 얼굴은 삽시에 난로불같이 달아올랐다.
해란이는 복대위가 그녀를 폭행한 죄를 탄백하지 않는것을 보고 격분했으나 지금 죄증이 손에 없어서 치솟는 분노를 가까스로 누르며 말했다.
<<지난 일은 잠시 따지지 않겠어요. 내 아들이 당신 딸을 크게 다체게 해서 미안해요.>>
<<어쩌겠소? 이미 당한 일인데. 령령이의 모친이 출장가고나서 전보를 받았기에 부득불 내가 왔소. 기실 나는 여기 올 자격도 없는데…>>
해란이는 일어서면서 대위를 보고 물었다.
<<령령이의 신상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나요?>> 해란이는 어쩐지 령령이의 신원을 알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 며칠전에 그 애의 일부 정황을 알았소. 걔는 내 사촌처제가 보내왔는데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더군요. 걔는 료녕 어느 음악학교를 나온 뒤 이 시 가무단에 배치받았다고 하더군요.>>
<<가무단에 그애의 신상을 아는 사람이 있을가요?>>
<<어릴 때 성명을 고치고 할빈서 자랐으니 가무단에서는 우리를 령령이의 친부모로 알고있을거예요.>>
<<당신 처제는 어디에 살고있나요?>>
<<전에 이 도시 교구에 살았으니 지금도 거기 있겠지요.>>
<<당신 처제는 령령이가 가무단에 있는걸 아나요?>>
<<모를겁니다. 당시는 계급계선을 엄히 가를 때라 아이의 장래를 위해 비밀을 지켰는가봐요. 그뒤 안해는 처제와도 래왕이 없었다더군요.>>
해란이가 병원에 와보니 령령이는 그때까지 훌쩍거리고있었다. 해란이도 몸을 벽쪽으로 돌리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치였다.
홍근이가 침대머리에 앉아서 령령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고 또 달래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울음을 그치고 수술을 하겠다고 응낙하였다.
의사들은 환자의 입에서 동의한다는 말이 나오자 밤이 길면 꿈이 많아질까봐 수술시간을 앞당기려하였다. 그러나 며칠동안 입에 곡기 한모금 들어가지 않아 허약한 환자를 수술대에 올려놓을수 없어서 며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란이는 이 기회에 복대위의 죄증을 가져오고 또 령령이의 신원을 밝히려고 서둘렀다. 그녀는 홍근이더러 집에 잠시 다녀올테니 그동안 령령이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였다. 집에 와서 농밑에 20여년간 감춰뒀던 죄증을 찾아 손가방에 넣은 그녀는 곧바로 령령이의 양이모댁을 찾아갔다.
해질 무렵에 령령이의 양이모를 만났다. 50대를 바라보는 그녀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와의 담화를 통해 해란이는 복대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날 밤, 해란이는 령령이의 양이모댁에서 하루밤을 쉬였다. 그들은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서 령령이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려화( 령령이의 본명)의 아버지 천룡이는 포부가 크고 의력이 강하고 훌륭한 젊은이였지요. 성격이 활달하고 후더웠어요. 그분이 결혼한 뒤 우리는 이웃이 되여 친하게 지냈어요. 그분의 말을 들어보니 고중 때 집이 길림에서 료녕으로 이사왔대요. 그분은 길림 어느 고중에 남아서 조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대요. 음악에 소질있는 그분은 고중을 졸업하고 예술학원을 지망했었대요. 원래 각 성별로 면접시험을 본다고 했었는데 입시날을 며칠 앞두고 상해, 무한, 천진, 북경 등 네 도시에서만 면접시험을 치른다는 통지를 뒤늦게 받았대요….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분은 반주임선생님의 권고에 못이겨 맘에 없는 3류대학을 지망했는데 준비부족으로 락방했대요...
그때 나이 스무살이 되였으니 친척들이 장가를 들라고 족쳤지만 그분은 고중때 사귄 녀자벗이 있다며 물리쳤대요.>〉
해란이는 천룡이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며 기다렸다는 말을 듣자 속이 찌르릉 하여 저도몰래 눈물이 솟아났다.
<<그 뒤에는요?>>
<<천룡이는 이듬해에 다시 입시준비하는데 모친의 우환이 심해져서 병시중에 약값 마련에 생계유지에 눈코뜰새가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대요. 그럭저럭 2년 가까이 지나자 모친이 타계하고 또 녀자친구가 중점대학에 진학했다는 소문을 듣고 기를 쓰고 공부해서 어느 전문대학 예술계에 붙었대요. 녀자친구 학습에 지장될까봐 그분은 설이나 명절때만 기념카드를 보냈는데 자기 주소도 적지 않았대요. 뜻인즉 그녀를 고험해보겠다는 심산이였대요...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시 가무단에 배치받았대요. 사업하면서 녀자친구가 다니는 학교에 편지를 두번 띄웠는데 종무소식이여서 그 처녀가 변심했다 생각하고 마음을 돌렸대요.>>
해란이는 그때가 바로 자기가 집에 가서 있을 때였으니 편지가 손에 들어올수 없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였다.
<<그분의 애인 선화는 우리 시교중학교의 음악교원이였대요. 시에서 조직한 문예회보연출 때 그녀의 독창이 일등상을 받았대요. 가무단의 책임자는 선화가 음악소질이 높고 장래성이 있는걸 보고 교육부문과 협상해 그녀를 가무단의 가수로 받아들였는데 천룡이와 선화는 연출하면서 서로 감정이 통해 결혼식을 올렸대요.>>
천룡이도 내가 결혼하자 뒤이어 결혼했구나.세상사가 왜 이렇게도 뒤꼬이고 사람을 희롱하는가? 해란이는 저도모르게 호-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선화가 원래 근무하던 학교 혁명위원회의 부주임은 선화의 미모에 반해 죽기내기로 그녀를 추구했대요. 선화가 외면하자 그자는 앙심을 품고 가지가지 요언을 날조해 선화를 헐뜯었대요. 선화가 가무단으로 전근해가고 또 천룡이와 결혼을 하자 그자는 천룡이를 때려잡으려고 이를 갈았대요. 천룡이의 아버지가 항미원조때 행방불명이 된 사실을 안 그자는 천룡이를 외국특무라고 무함하면서 천룡이가 피아노를 치는 기회에 외국과 내통했고 부정당한 수단으로 교육부문의 사람을 빼갔다느니 작풍이 나빠 정부가 몇이나 된다느니 하며 험담을 수없이 했대요...
흑백이 전도된 그 세월에 바람분다하면 비왔다는 판이라 승벽심이 강한 문화국 반란파들은 큰 공을 세우려고 그분을 잡아다 죽도록 때렸대요. 무더운 여름날 점심때 그들은 물매를 대다가 빗나가서 정수리를 쳤는데 머리가 깨여지고 엉덩이의 살점이 떨어졌대요. 그분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홍위병들은 찬물을 끼얹었대요.천룡이가 깨여난 뒤 목이 말라서 <<물,물>> 하였더니 그자들은 또 찬물 한초롱을 면상에 들씌웠는데 천룡이는 그만 페가 막혀서 생죽음을 당했대요.>>
아, 천룡이, 내가 그렇게 사모하던 그이가 원귀로 되다니. 해란이는 하늘이 빙빙 돌아가는것만 같았다. 슬픔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내려 베개를 적셨다.
<<그담엔 어찌 되였나요?>>
<<비보를 받은 선화는 돌도 안찬 려화를 저한테 맡겨두고 밀차를 빌려 시신을 거두러 갔어요. 그녀가 참경을 보고 천룡이의 시신우에 엎디여 대성통곡을 했더니 놈들은 선화를 계급의 적과 한속인 나쁜년이라고 욕하면서 호되게 때려놓았대요… 선화는 선혈이 랑자한 시체를 밀차에 싣고 눈물범벅이 되여 밀고 큰길을 지나 철길을 건느게 되였대요. 이때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질주해왔는데 극도의 고통과 절망에 빠진 그녀는 모진 마음을 먹고 그만…>>
그때부터 려화는 사고무친의 고아로 되고 말았지요. 나는 애가 하도 불쌍해서 3년동안 수양했는데 애의 장래가 두려웠어요. 마침 사촌언니한테 애가 없기에 려화를 남몰래 거기에 보냈던거예요. 20여년동안 저는 언니와 래왕이 없어서 려화 소식을 감감 몰랐는데 오늘 알게 되여 한시름 놓이네요. 앓던 이를 뽑은것 같이 후련하네요.>>
내 추측이 틀리잖았구나. 령령이는 확실히 천룡이의 딸이였구나! 그러기에 령령이는 첫눈에 어딘가 그렇게 낯익어 보였고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는 그렇게도 천룡이를 닮았었구나. 수술을 앞두고 그애의 친부모가 누군지 알고싶던 충동이 인것도 이런 연분때문이였구나. 해란이는 령령이의 아픔을 몰라줬던 자신이 미워졌다. 그녀는 인간세상에 왜 걸림돌이 이렇게 많고 고통이 이렇게 많고 생리사별의 슬픔이 이렇게 많은가고 하늘을 향해 소리쳐 묻고싶었다.
이튿날 아침, 병원에 돌아온 해란이는 대위의 숙소로 찾아갔다.
노크소리에 화뜰 놀란 대위는 해란이가 옛장부를 청산하러 왔으리라 짐작하고 죄책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20여년전의 여름밤에 저지른 일이 환영같이 머리속을 스쳐갔다.
폭우로 인해 헛걸음을 치고 숙소로 돌아온 그는 새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일어나보니 여덟시가 지났었다. 식당은 문을 닫은지 오래였다. 그는 해란이와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사먹으려고 사무실에 갔다. 전등을 켜고난 그는 해란이가 들으라고 몇번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방송실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해란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가? 호기심이 동한 그는 벽의 창문 미닫이를 살그머니 밀고 방송실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송실은 전등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하였다. 해란이가 하마 잠을 자나? 그는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났다.
손을 내밀고 커튼의 한쪽을 당겨보니 커튼은 두 끝을 고정해놓았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서랍에 있는 손가위를 가져와서 커튼에 작은 구멍을 내고 전등불빛을 빌어 방송실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우를 훔쳐보던 그의 눈이 확 밝아졌다. 해란이는 옷을 입은채 단잠이 들어있었다.기름기 도는 까만 머리카락, 약간 벌린 앵두입술, 능금같이 발가우리한 두 볼, 속적삼우로 봉긋하게 솟은 젖무덤,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약간 벌어진 두 다리… 그는 금세 온 몸에 피가 거꾸러 흐르고 숨이 가빠졌다. 리지를 잃은 그의 두뇌에는 수욕이 끔틀거렸다. 지지벌개진 목을 움추리고 주위 동정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인적이 없자 벽창문에 놓인 전화기를 사무상우에 옮겨놓았다. 그는 사무실의 전등을 끄고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고양이같이 미식을 노렸으나 큰 체구라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는 창문미닫이를 들어내고나서 커튼을 손가위로 베고 방송실로 기여들어갔다. 그는 귀를 도사리고 주위의 동정을 살피다가 처녀의 다리를 살짝 건드렸다. 꿈나라에 깊이 빠진 그녀는 벼락이 떨어질줄도 모르고 쌔근쌔근 달게 자고있었다.그는 손가위를 입에 물고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뒤 세수대야옆에 걸린 수건을 가져다 복면을 하고 처녀의 몸우에 덮쳐들었다…… 수욕을 한창 채울 때 전화벨이 울렸다. 화뜰 놀란 그는 누가 찾아올까봐 급히 문을 열고나와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미닫이를 다시 달아놓고 전화기를 창문턱에 올려놓은 뒤 부랴부랴 숙소로 돌아갔다……
해란이는 결김에 대위를 찾아오긴 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오늘 대위가 죄를 부인하면 어쩌나 하고 망서리였다.
그런데 심한 량심적 가책에 모대기던 대위는 해란이가 노크하고 들어오자 일어나 해란이의 걸상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짓쪼으며 용서를 빌었다.
<<해란동무, 나는 당신한테 평생 못씻을 죄를 졌습니다. 나는 백번 죽어도 아깝잖은 놈입니다…>>
남의 청춘을 여지없이 짓밟은 원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니 그녀는 너무도 분해서 말조차 할수 없었다. 치가 떨리고 이가 부득부득 갈리고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 악이 받친 그녀는 대위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부리나케 대위의 귀통을 두어번 치고나도 성이 차지 않아 발로 두어번 다리를 찼다.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주오. 나는 죽어마땅한 죄인이오. 비록 법적 제재를 받았지만 동무한테 진 죄는 청산받지 못했소. 이 인간쓰레기를 어서 속시원히 때려주오.>>
과거를 생각하면 마구 물어뜯어도 성차지 않지만 대위의 랑패상을 보니 더는 어쩔수가 없었다. 아무리 원쑤라도 사사로이 흉기를 쓸수는 없다.하물며 자신이 진 죄를 탄백하고 손이야발이야 하고 비는데야 어쩐단 말인가?
땅바닥에 꿇어앉아 이마방아를 찧는 대위의 몰골을 보니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18년간 옥살이를 한 그가 명색은 령령이의 양부가 아닌가? 광란하던 그 세월에 죄진 자가 어디 한둘인가? 20여년이 지난 오늘 다시 복수의 칼을 든다면 너무 옹졸하지 않은가? 그녀는 대위를 용서해줄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를 한번 더 자극하지 않고서는 분이 풀릴것 같지 않았다.그녀는 품속에서 피가 얼룩진 침대보조각과 손가위를 꺼냈다.
<<복대위, 이게 뭔가 봐요.나는 20여년간 이걸 지니고 당신을 기다렸어요.>>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해란이의 손을 보던 대위는 소스라쳐 악 비명을 지르더니 저의 따귀를 마구 치며 울음섞인 소리로 말했다.
<<나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요. 마음대로 징벌해주오. 엄히 징벌해주오.>>
<<일어나요. 나는 이젠 더 과거를 들먹이지 않겠어요. 앞날을 위해, 우리들의 자식을 위해 나는 당신의 죄를 더 추궁하지 않겠어요. 어서 일어나서 병원으로 가자요. 오늘은 령령이의 수술날이니 기다리고 있을거예요.>>
해란이는 대위를 일으켜세웠다.
그들이 병원에 찾아오니 가무단책임자와 담당의사가 이미 병실에 대기하고있었다. 오늘 홍근이도 청가를 맡고 와있었다.
의사는 수술하기전에 가속이 병지에 싸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가 병지를 대위한테 내미니 대위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거동을 못마땅해하는 령령이는 대번에 입이 뽀르퉁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홍근이와 해란이를 찾았다.
홍근이는 령령이를 내려다보면서 눈을 한번 껌벅하고나서 의미있게 미소 하다가 의사한테서 병지를 받아들고 환자가속이 싸인하는 자리에 권홍근이라는 세 글자를 써놓았다.
홍근이가 선참으로 싸인하자 해란이가 병지를 받았는데 마음이 삼검불같았다. 대위가 저지른 죄행과 령령이 양모의 파리한 모습이 떠오르고 령령이가 바로 첫사랑 천룡이의 딸이라는것과 홍근이가 애원하던 정경이 떠올랐다.
사랑과 증오, 동정과 원한이 한데 엉켜 맴돌이쳤다. 그녀는 병지를 들고 병실밖을 나왔다. 잠시나마 정신적 안정을 찾고싶었다. 복대위가 그녀의 뒤를 따라나왔다. 그는 해란이의 옷깃을 당기면서 앞에 꿇어앉아 밀했다.
<<해란동무, 어서 싸인하오.나는 령령이의 아비 될 자격이 없소. 하지만 우리 세대에 맺은 원한을 후대에 물려주지는 말아주오. 제발 빕니다.>>
대위의 그 말 한마디가 해란이의 어지러운 심사를 얼마간 눅잦혀주었다. 그의 가련상을 보고 또 령령이의 양모의 고달픔을 생각하며 그녀는 병지에 싸인하고나서 의사한테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복도에 나와보니 대위는 그때까지 꿇어앉아 고개를 숙인채 흐느끼고있었다.
<<공은 닦은대로 가고 죄는 진대로 간다는 속담을 잊지 말아요. 이 손가위를 간직하고 만년을 참답게 살아요.>.
해란이는 손가위를 대위에게 주고나서 품에서 침대보조각을 꺼내여 성냥을 그어 불을 달았다.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창문밖으로 팔을 내밀고 다 타기를 기다렸다가 놓아버렸다. 이른 봄바람에 재는 나비같이 춤추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호- 하고 내쉬였다.
복대위는 그 광경을 차마 눈뜨고 볼수 없어서 손으로 눈을 가리웠다.
<<복대위, 당신도 어서 가 병지에 싸인을 해요. 지난날엔 부친구실을 못했지만 령령이에게는 아버지 사랑이 수요되니까요.>>
그녀의 너른 도량, 후더운 처사에 깊이깊이 감동된 복대위는 일어나 해란이에게 굽석 절을 올리고나서 병실안으로 들어갔다.
병지에 해란이네 모자만 싸인한것을 보고 언짢아 상을 찡그리던 령령이는 양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싸인하는것을 보자 얼굴에 해살이 비끼였다.
<<이젠 모두 안심하고 돌아가세요. 저는 수술하러 가겠어요.>>
령령이의 꾀꼬리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병실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는 해란이의 눈확에는 이슬이 아롱졌다.
<<령령아, 아무런 고려 말고 수술을 하려무나.>> 해란이가 이렇게 말하자 복대위도 령령이의 곁에 가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사들의 부축을 받아 수술차에 올라가 누운 령령이의 눈시울도 촉촉이 젖어있었다.
홍근이는 수술차를 밀고가는 간호원들을 따라가면서 정찬 목소리로 소근소근 말하였다.
<<령령이, 수술할 때 긴장하지 마. 두려울게 없어. 몇십분만이면 수술이 끝날거야. 나는 수술이 성공하리라 확신하고 있어. 우리는 밖에서 기쁜 소식을 기다릴게. 마음놓아. 응.>>
차가 수술실앞에 이르러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 홍근이는 허리를 굽혀 령령이의 입술에 잽싸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는 해란이의 심정은 단지 쓴지 저도 알수 없었다.
수술실의 문이 스르르 닫기였다. 해란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현관에 나왔 다. 그녀는 홍근이와 령령이가 영원히 자기들의 신원을 모르고 또 부모들의 비밀을 모르기를 바랐다. 광란의 세월에 부모들간에 쌓인 원한을 대물림하진 말아야지. 티없이 맑고 깨끗한 그들의 심령에 그늘이 지게 해서야 될 일인가.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아란 하늘에는 솜뭉치같은 구름이 자유롭게 헤염치고 있었다.
1996.4월 초고
2007.6 수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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