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고구려유적지를 찾아서
주청룡
지난 8월 20일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에서 집안 고구려유적지 탐방을 조직하였다. 나도 이 탐방팀의 일원으로 함께 가게 되였는데 탐방팀은 회장 김현순, 부회장 권중철, 비서장 황희숙, 사학자 허성운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으로 구성되였는데 이러고 보니 우스개말로는 4명의 군관에 한명의 졸병으로 조직된 셈이였다.
8월 20일 오전 9시 반에 뻐스가 연길에서 떠나 안도, 돈화, 정우, 백산, 통화를 지나 장장 10시간을 달려 저녁 7시 반에야 집안에 도착하였다. 뻐스에서 내려 숙소를 찾느라고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하여 승리로를 거닐고 있노라니 조양거리와 교차되는 지점에 커다란 돌에다“高句麗遺址公園”라고 새긴 글씨가 눈에 띄였다. 이것을 보는 순간 이곳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고 온 고구려수도의 옛터이였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하지만 이미 밤이 되였는데다 장장 10시간 뻐스를 탄 피로로 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먼저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부터 하여야 하였기에 고구려유적지 공원 구경은 이튿날로 하기로 하였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본지 사람들에서 알아본데 의하면 개방한 고구려 유적지로는 국내성, 환도산성. 호태왕비, 태왕릉, 장군총, 우산귀족묘지(五盔坟이라고 한다.) 등 곳이며 국내성터는 이 성 안에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시민들의 레저활동을 할수 있는 공원으로 되여 있어 원래의 면모는 찾아볼수 없지만 회손된 일부 성벽은 볼수 있다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9인승 소형뻐스를 세를 내여 고구려유적지를 탐방하였다.
국내성
사진설명(1): 고구려(국내성)유적지공원
국내성은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건립한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서 기원3년에 고구려의 제 2대 국왕 유리왕(琉璃王)이 수도를 료녕성 卒本川(오늘의 료녕성 환인현)의 흘승골성(紇升骨城)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국내성(지금의 집안시)로 이사해 와서 기원 427년에 고구려 제20대왕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에 옮길 때까지 장장 425년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였다
국내성은 압록강과 통구하가 합류하는 통구분지의 서부일대로 북쪽(1km)에 우산(禹山), 동쪽(6km)에 용산(龍山), 그리고 통구하를 건너 서쪽(1,5km)에 칠성산(七星山)에 있어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천연 요새이다.
오늘날 국내성내의 고구려 건축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사라져 버렸고.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시민들의 레저활동을 할수 있는 공원으로 되여 있기에 고구려 시대의 성안 시설물 포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성안의 서북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주추돌과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나온것으로 보아 당시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말하여 주고 현존의 많이 회손된 성벽들의 흔적을 보아 국내성의 대략적인 규모를 추측할수 있다.
국내성은 방형이지만 각 변의 길이는 서로 다르다고 한다. 1980년에 조사, 측정된데 의하면 국내성은 동벽이 555m, 서벽이 665m, 남벽은 750m, 북벽은 715m로서 총 길이가 2,685m인 방형으로 된 성이다. 원래는 성벽의 높이가 5 ~ 6m, 밑부분의 너비가 10m, 성안벽 높이가 3~5m이다. 성문은 총 6개였는데 동쪽은 집문문(輯文門), 서쪽은 안무문(安武門), 남쪽은 금강문(襟江門)이였다고 한다. 국내성은 우로부터 가로로 선을 그어 성의 내부를 3구역으로 구분하였으며 궁전지역은 방어를 위하여 궁성의 제일 안쪽, 북벽에 붙여 지었고 한다. 위급한 경우에는 우산으로 올라가거나 환도 산성으로 쉽게 대피할수 있게 한것이다. 그 다음에는 공공건물과 관청구역이 있고, 마지막 남벽에 가까운 곳에는 일반인들의 거주지역과 시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국내성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이 일정하지 않으나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서벽의 남쪽 부분은 높이가 3∼4m가 되고 북벽은 2m정도이나 서쪽으로 갈수록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사진설명(2): 국내성 성벽
국내성은 2001년 6월 25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국내성은 지금은 공원으로 되여 나무숲이 우거지고 각종 화초들이 어여쁨을 자랑하고 각종 운동기재들과 문화오락시설들이 있어 시민들의 레저활동공간으로 되고 있어 옛날의 그 모습을 회손된 성벽외에는 찾아 볼수는 없지만 국내성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옛날에는 나라지간의 싸움이 많았으므로 도읍을 앉힐 때에 담벽을 튼튼히 높이 쌓는것으로서 적의 침입을 방지하였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사진설명(3): 고구려유적지 공원
환도산성
사진설명(4): 환도산성 문물보호비
환도산성은 국내성 북쪽 2.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서로 보완(相輔相成) 할수 있도록 건축한것이며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환두산성은 전시 때 사용하는 산성이라고 한다.
위치와 지형으로 보아 환도산성은 방위성(防衛城)으로서 가장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천험의 요새로 되였다. 동서북 3면의 성벽은 평면으로 보면 둥근 릉선 우에 쌓았는데 성밖은 깎아 내린듯한 절벽이고 성안은 비교적 넓은 경사지로 되여있다. 남쪽은 통구하(通溝河)가 흐르고 지세가 비교적 낮지만 밖에서 성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는 산성이다. 환도산성은 국내성과 압록강까지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동태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공격로는 남문 한 곳 이다.
성벽들은 대부분 무너져 내려 않았지만 동쪽, 북쪽서단, 서쪽 북단이 비교적 보존이 잘 되여 검푸른 이끼가 화강암들 틈새에 끼여 있는 5~6m 높이의 성벽을 볼수있다. 성의 규모는 동벽이 1,716m, 서벽이 2,440m, 남벽이 1,786m, 북벽이 1,009m로서 총길이가 6,951m에 달한다. 성문은 모두 5 개인데 동과 북에 각각 2개씩, 정문 겸 남문은 1개 그리고 서벽에는 워낙 지세가 험해서인지 문이 없었다고 한다. 성안에는 샘물이 두곳이 있는데 한곳은 서북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동쪽 산기슭에 있는데 다 통구하로 흘러 들어간다.
성안에는 건축터 3개, 저수지 1개(저수지는 전망대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약간한 흔적으로 보인다.)가 있는데 3개의 건축터 가운데 하나는 동쪽 산기슭에 있는 궁전터(남북이 92m, 동서가 62m 인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이고, 하나는 점장대 [(点将台)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城), 보(堡), 둔(屯), 수(戍)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 터이며, 하나는 전망대(瞭望台)이다. 전망대는 남문 안의 200m되는 곳에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12m이고 정단부분(顶部)는 매변의 길이가 약 6m되는 평대(平台)로 되여있었다.
사진설명(5): 환도산성 전망대
전망대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집안시(국내성)와 앞록강이 다 내려다 보이였는데 당시에는 적정을 아주 똑똑히 관찰할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성안에 고분(古墳)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37기(基) 만이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산성아래 골짜기와 산기슭에는 수많은 돌로 쌓은 고분들이 군데군데 많이 있었다.
사진설명(6): 산성아래 고분군(古墳群)
1982년 2월 23일에 환도산성을 전국 중점보호단위로 비준하였다. 우리는 환도산성을 돌아보면서 정말로 삼면이 깍아지르듯한 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은 통구하가 있어 정말로 군사상에서 천연요새로 되며 평시에는 국내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위급한 시기에는 이 산성에 올라 와서 적들과 싸웠구나 하는 생을 갖게 되였으며 옛 무덤들을 돌아보면서 옛날 귀족들은 죽은 다음의 무덤에 대하여 아주 중히 여겼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그리고 그때의 궁전은 다 허물어지고 지금은 밭으로 변하였지만 점장대, 전망대 같은것들은 기본상 완연한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우산귀족묘지
사진설명(7): 5회분 5호묘 문물보호비
우산귀족묘지(禹山貴族墓地)는 집안역(集安站) 북측에 다섯 개의 높고 큰 봉토석실묘가 동서로 배열되여 있다. 본지 사람들은 큰 봉토분 다섯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 (예전에, 군인이 전쟁 때 갑옷과 함께 갖추어 쓰던, 쇠로 만든 모자.)같다 하여 '투구 회'자를 붙여 5회분(五盔墳)이라고 한다. 그 중 다섯번째 묘가 바로 5호묘(五號墓)이다.
5호묘는 이 일대의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다섯 무덤중의 하나이며, 5회분 가운데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5호묘는 4호묘와 정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일명 '쌍둥이묘'라고도 한다. 5호묘는 1945년 이전 일본인 학자에 의한 1차 조사와 1962년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에 의한 전면 발굴 및 조사가 있었는데 집안의 20여 기의 고분 벽화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개방 되였다.
무덤은 널길[(羨道) 고분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과 묘실[(墓室) 옛 무덤 속에 관이 들어 있는 네모형의 방. 유해(遺骸)와 함께 부장품도 들어 있으며 무덤 안에 길을 내어 밖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으로 묘실의 방향은 동남향이다. 널길은 남북길이 3.56m, 동서너비 4.37m의 장방향이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94m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은 잘 다듬은 화강암제 판석으로 쌓았다. 널방 천장구조는 크기가 다른 삼각석을 겹으로 쌓아 올린 2단의 삼각굄 구조이다.
묘실에 들어서 계단을 세 걸음만 내려가면 시원함이 느껴지고, 벽, 천장이 모두 습기 때문에 물이 배어 있었으며 벽화에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부에는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피장자(被葬者)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첩의 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묘실에 들어서자 관광안내원이 손전지를 비추어 가면서 벽화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나는 극소형의 유대용 록음기를 틑어놓고 안내원의 해설을 전부 록음하였다.
벽화는 석면에 직접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널길의 좌우벽에는 묘실을 지키는 문지기 힘장수를 그렸다. 묘실 네 벽의 사신은 모두 오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였다. 동쪽 벽의 청룡[(靑龍) 四 神 의 하나로 동쪽 방위를 맡은 태세신(太歲神)을 상징하는 짐승. 룡 모양으로 무덤속과 관의 왼쪽에 그렸다.]과 서쪽 벽의 백호[(白虎) 서쪽 방위의 金 기운을 맡은 太白神을 상징하는 짐승]는 널방 입구를 향하여 덮쳐내리며 포효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였고 남쪽 벽의 한쌍의 주작[(朱雀) 남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으로 여겨진 짐승. 붉은 봉황으로 형상화하였다.]은 커다란 련화좌(련꽃 모양으로 만든 불상의 자리) 우에서 막 날아오르려는 자세로 묘사되었다.
북쪽 벽의 현무[(玄武) 북쪽 방위의 물 기운을 맡은 태음신을 상징하는 상상의 짐승.]는 서편을 향하여 우뚝 서 있으며 몸이 얽힌 상태에서 머리를 틀어 서로 마주보는 거북과 뱀의 입에서는 불꽃이 뿜어나오고 있다. 사신이 표현된 공간배경은 인동무늬, 불꽃무늬, 연꽃무늬가 들어 있는 사방연속무늬로 장식되였다.
묘실 네벽 모서리는 우로 치솟는 자세의 룡면인신(龍面人身)과 괴수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우로 젖힌 룡이 만나면서 이루는 기둥형태의 그림으로 장식되였다. 묘실 천장부는 주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신앙과 관계된 표현들로 채워졌다. 굄받침에는 교룡무늬(交龍紋)와 릉형(菱形)무늬가 이어지고 있다. 3각굄 제1단의 각 삼각석 밑면에는 활짝 핀 련꽃무늬를, 옆면에는 각기 해와 달을 받쳐들고 있는 복희녀와형 일월신(伏羲女媧形日月神), 하늘세계의 신선들, 상서로운 동물 등을 묘사했다. 굄석 동북면에는 일월신을, 서북면에는 면류관을 쓴 채 룡을 타고 하늘을 나는 천인(天人)과 깃발이 달린 창을 든 채 기린(麒麟)을 타고 그뒤를 따르는 천인을, 서남면에는 수레바퀴를 다루는 제륜신(製輪神)과 절구질을 하는 천인(賤人), 씨뿌리는 천인(賤人)을 묘사했으며 동남면에는 신농(神農)으로 여겨지는 소머리에 사람몸을 한 천인(賤人)과 춤을 추는 천인(賤人)을 표현했다.
3각굄 제2단 각 삼각석 밑면에는 힘있게 꿈틀거리는 룡을 그렸고, 옆면에는 룡을 탄 채 비파, 거문고, 피리, 장고 등의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기악천(伎樂天)과 해·달·별자리들을 표현했다. 천장석에는 청룡과 백호가 서로 감기고 얽힌 채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그렸다. 벽화 중의 상서동물과 일부 짐승머리 천인의 눈은 본래 청옥(靑玉)과 같은 푸른 보석류로 상감하고 벽과 천장굄부 곳곳에 금빛 꽃장식을 했으나 현재는 소머리 천인의 오른쪽 눈에 상감된 록송석(綠松石)과 금빛 꽃장식의 흔적만 남아 있다. 5회분 5호묘는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사진설명(8): 5호묘실의 벽화 (복희녀와)
우리는 이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풍부한 문화와 생활을 상상할 수 있었으며 묘실안이 그렇게도 습하여 천정과 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있었지만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그림들이 선명하게 나나타나는 것은 그때의 벽화기술이 얼마나 높았게는가하는 것을 알수 있었다.
호태왕비(好太王碑)
호태왕비는 집안시구역에서 동북쪽 4km지점 우산(禹山)기슭 통구(通沟)평원에 자리 잡고있는데 4면이 유리벽으로 된 사각형 기와집안에 장중히 세워 있었다. 비는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여 있으며 비의 모양은 불규칙한 장방형 기둥 모양으로 되어 있고 높이는 6.39m, 면의 너비는 1.34 ~ 2.00m이고, 측면은 1.35m~1.46m 이며 무게는 약 37톤이나 된다고 한다. 이 비는 고구려 제 19대 왕 광개토왕이 사후 2년 뒤에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비로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하였는데 광개토왕비라고도 하며 “동방제1 비(东方第一碑)로 불리운다.
사진설명(9): 호태왕비
비의 4면에는 예서체(隶书体)로 된 44행 1775자에 달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여 있는데 서두에는 서문격인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건국설화,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 대왕까지의 세계(世系)와 략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고, 그 다음은 신라 내물왕을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등 대왕의 령토 확장에 관한 주요 내용이 년도별로 새겨져 있으며, 국경 지대의 통치권 확인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끝으로 대왕의 릉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비는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우리는 이 비를 보면서 당시의 그 생산력수준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37t이나 되는 돌을 운반하여 오고 세웠는가 하는것은 수수께기로 남아 있었다.
태왕릉(太王陵)
호태왕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는데 고구려 제 19대왕 호태왕의 릉묘이다. 호태왕은 기원391년,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사망하였으며 즉위 22년동안 고구려력사에서 전례없던 발전을 가져왔으며 강대한 경제와 군사실력으로 동정서벌하면서 고구려의 령토를 확장하였다.
릉묘는 기원 391년에 건축되였으며 현존하고 있는 고구려왕릉가운데서 유일하게 건축년대가 똑똑히 알려져 있는 왕릉이다.
1984년 집안시 박물관에서 왕릉의 환경을 청리 할 때에 출토된 벽돌과 기와에 새겨진 문자로부터 호태왕의 릉묘라는 것을 단정하였다고 한다.
왕릉은 고구려의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서 방형(方形)계단식 석실묘(石室墓 돌로 널방을 만들고, 널길을 갖춘 고대의 무덤)로 되여 있으며 묘실 제 8급 계단에는 묘실치옥형 석곽 (墓室置屋形石椁)이 있으며 안에는 두구의 석관상(石棺床)이 있고 묘성(墓城)에는 조약돌이 넓게 깔려 있으며 동쪽에는 대형의 제단이 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6m이며, 높이 약 14.8m이며 태왕릉이라는 명칭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벽돌에 새겨진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에서 따 온것이라고 한다.
사진설명(10): 태왕릉
장군총(將軍塚)
사진설명(11): 장군총 문물보호비
장수왕릉은 호태왕비에서 동북쪽으로 약 2km 가량 떨어져있는 룡산(龙山)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안에는 고구려 제 20대왕 장수왕의 돌로 쌓은 무덤이 있는데 장군분(將軍坟)혹은 장군총(將軍塚)이라고도 하며 이집트의 금자탑과 비슷하다고 하여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리우고 있다.
무덤은 22 층의 화강암 장대석(長臺石 계단의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이는 네모지고 긴 돌. )으로 일곱계단의 금자탑모양으로 방형석실묘(方形石室墓)를 쌓았다. 제4계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돌방[石室]을 설치했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3.1m, 밑변 한 변의 길이는 31.58m, 밑면적 997㎡. 묘꼭대기의 면적은 27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고 한다.
무덤축조에 쓰인 석재의 부피는 총 6,000㎥에 이며 무덤의 기초부는 지면을 깊이 5m가량 파내고 자연석을 다져넣은 후, 그 우에 큰돌을 깔았는데 제1층 기단부의 바깥으로 4m가량 나오게 하여 무덤돌이 내리누르는 힘에 견딜 수 있게 했다. 무덤의 제1층은 4단으로, 2~7층은 모두 3단으로 장대석을 쌓았다. 이중 제1단에 쓰인 장대석 중 큰것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0m 무게는 32톤 좌우라고 한다. 천장돌의 넓이는 약 60㎡, 무게는 50t가량이다. 묘실은 다섯번째 계단의 중간에 있으며 안에는 두구의 석관상(石棺床)이 있으며 제1층의 각면에는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5m가량의 대형 석재로 세개씩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지탱하게 했는데,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사진설명(12): 장군총 앞에서의 탐방팀원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묘실 내의 귀중한 문물들이 잃어졌다고 한다. 무덤둘레에는 잔자갈을 깔고 그 바깥에 돌담을 둘러 묘역을 구분했다. 돌담은 모두 무너져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묘역의 북편 50m 지점에는 동서로 나란히 5기의 배총(陪塚. 한 무덤 옆에 딸려 있는 조그마한 무덤)이 마련되였으나 현재는 1개의 후궁묘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장군총은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다. 우리는 장군총을 돌아보면서 그 건축구조가 이집트의 금자탑과 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정말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리우기에 손생이 없구나하는 생각과 당시의 생산력수준으로 어떻게 이런 구조를 설계하고 그 많은 커다란 돌들을 특히는 50톤이나 되는 천장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운반하여 쌓았는가하는 것은 호태왕비와 함께 수수께기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상 고구려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를 더욱 깊이 료해를 하였으며 또 지금 풀수 없는 적지 않은 수수께기를 남긴채 고구려유적지 력사탐방을 마치고 시내로 내려와서 압록강반에서 조선 만포시를 바라보면서 고구려유적지에 대한 탐방소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차로 귀로에 올랐다.
사진설명(13): 앞록강변에서
2012년 8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