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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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동남아려행기[11] 댓글:  조회:5570  추천:0  2013-07-17
동남아려행기[1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17 12:04:43 ] 클릭: [ ] 식물원에서 본 야자수(椰子树) 다음날(31일), 우리는 다시 방코크로 향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제비둥지쎈터(燕窝中心),금불사(金佛寺) 등 곳에 들렸는데 이러한 곳들은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쇼핑을 목적으로 한 곳들이였다. 제비둥지쎈터에는 말 그대로 제비둥지가 많았다. 제비둥지는 금사연(金丝燕)이 해안의 바위굴 혹은 절벽틈에 튼 둥지로서 일부분 식물(食物)과 해조류, 제비털, 이끼 등 물질들이 제비의 타액선(唾液腺)에서 분비한 타액혼합물이 한데 점착되여 형성된것이다. 금사연둥지 제비둥지는 풍부한 단백질, 당류, 무기염 및 기타영양물질이 포함되여있어 중의들은 연와는 피부를 윤택하게 하고 혈을 돕고 기를 돋구며 체액의 분비를 촉진하고 보페양음(补肺养阴)효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맛이 특이하여 황제음식라고도 하며 귀빈식탁에 오른다. 이러한 약효와 식재료로 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대량 채집하는데 사람이 채집하기 바쁜것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채집하게 한다고 한다. 제비둥지쎈터에는 제비둥지외에 이름 모를 각가지 자연산 약재와 약품들이 가득하였다. 우리 관광팀에서도 약재와 약품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금불사는 타이 3대 국보중의 하나인 방코크의 금불사가 아니라 파타야에 있는 향촌의 작은 절당인데 려행사의 하나의 코스로 기실은 관광쇼핑점으로 되어 있었다. 절당안에는 중문으로 《룡보사(龙宝寺)》란 글자가 있었다. 안내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절은 태, 중 두 나라 인민들이 같이 모금하여 세운 절당이라고 한다. 그러니 두 나라 인민들의 우의를 상징하는 절당으로서 중국관광객들은 모두 이곳에 들러 향을 피우고 쇼핑도 하면서 두 나라의 우의를 증진하고있다. 룡보사(龙宝寺) 돌아오는 길에 식물원에 들렀는데 식물원은 대부분 과일나무들이였다. 여기의 과일나무들이란 관목, 교목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야자수, 빠나나나무 등과 같은 초본식물들이였다. 식물원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였던 수십가지 열대과일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과일매장마다 관광객들이 발길을 멈추게 하였는데 중국관광객들을 위하여 전부 중국어로 과일이름이 표시되여 있었다. 관광객들은 자지방에서 보지 못하였던 과일들을 조금씩 사서 맛을 보았는데 배가 불러 더 맛을 보지 못하는것이 유감스러웠다. 우리는 과일매장을 다 돌아보고나서 식물원을 돌아보았다. 나무마다에 주렁주렁 열린 열매들이 탐스럽기만 하였다. 그리고 나무마다 표시판에 중국어로 이름을 써서 세워놓았기에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었다. 야자, 빈랑(槟榔)같은것은 너무 높아 머리를 들어 쳐다보았고 빠나나, 망과, 두리언(榴莲)은 우리의 키 높이에 열려 만져볼수 있었고 파이내플(菠萝)은 너무 낮게 열려 무릎을 쪼크리고 앉아서야만 만질수 있었다. 망과도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색갈이 빨간것은 사과망과(苹果芒)라고 하였다. 사과망과(苹果芒) 식물원참관을 마치고 건과상점에 들렸다. 상점안에는 수십종에 달하는 건과들이 질렬되여 있었는데 마음대로 맛을 보고 자기의 요구에 따라 살수 있었다. 우리도 맛있는 건과들을 사려고 이것저것 맛보았는데 련거퍼 여러가지를 먹으니 어느것이 어느 맛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그 가운데서 몇가지를 골라 정갈하게 포장한 건과들을 샀다. 이렇게 여러 곳을 구경하다나니 방코크에는 오후 다섯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방코크시에는 고층건물들이 띄염띄염 있었고 대부분은 3~5층 집들이였다. 이날 방코크에 돌아와서 우리는 타이 독사연구쎈터를 참관하였다. 타이 독사연구쎈터는 비 영리성 기구로서 이전에는 전문 황실가족에서 연구하는 기구였기에 모두 《황가독사연구쎈터》라고 하며 지금은 관광항목으로 개방하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뱀조련사의 표현. 독사연구쎈터 부근에는 수만마리의 독사를 기르는 뱀사양장이 있는데 안경사, 살모사, 율모기, 금환사, 은환사 등 수십종 독사들이 있다. 독사연구쎈터에서는 또 관광업도 하기에 조련사의 뱀표현도 있었다. 뱀을 목에 감고 노는가 하면, 뱀의 입에 손가락을 넣기도 하고 뱀과 입을 맞추는가 하면 또 뱀의 입에서 독액을 짜내기도 하였다. 조련사가 뱀독액을 짜내고있다. 그리고 약품전시 매대에는 뱀독, 뱀기름, 뱀피, 뱀열, 사편(蛇鞭) 및 그것들로 만든 여러가지의 약품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해설원이 각종 약품들을 성능과 용처 등을 설명하였는데 그런 약품을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다음계속]
40    동남아려행기[10] 댓글:  조회:5070  추천:0  2013-07-09
동남아려행기[10]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08 16:50:44 ] 클릭: [ ] 코끼리 연기를 보다 다음으로 동파락원에 가서 코끼리 연기를 보았는데 참으로 볼만했다. 코끼리 5마리가 횡렬로 서있고 몇메터 앞에는 5개의 고무풍선이 한줄로 매달려 있었는데 조련사의 지휘하에 코끼리들이 송곳을 코로 감아뿌려 고무풍선을 터뜨리는것이였다. 어떤 코끼리들은 단번에 터뜨리고 어떤 코끼리들은 서너번만에 터뜨렸으며 시간이 다 될때까지 터뜨리지 못한 코끼리들도 있었다. 참으로 우스웠다. 그래도 다채로운것은 코끼리롱구였다. 5마리의 코끼리가 횡렬로 서서 10여메터 앞에 있는 롱구틀에 조련사의 지휘하에 롱구뽈을 뿌려넣는데 그것도 어떤 코끼리들을 단꺼번에, 어떤 코끼리들은 서너번에,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넣지 못하는 코끼리도 있었다. 뽈이 들어갈 때마다 관람객들이 박수를 치면 코끼리들도 신이 난듯 앞발을 들고 코를 홰홰 내젓는다. 그리고 볼링도 치는데 우의 두 종목과 비슷하였다. 코끼리가 롱구를 하고있다. 코끼리는 또 세바퀴자전거를 타기도 하였는데 자전거에 올라서서 코로 운전하고 앞발로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서 타는 모습이 너무 가관이였다. 삼륜차 타는 코끼리 그리고 두 코끼리가 코를 맞대고 한사람을 들어올리는 종목도 있었다. 조련사들이 관람객들속에서 한사람이 나오라고 하면 비위가 좋은 사람이 나서는데 두 코끼리가 마주 들어올리기도 하고 한마라 코끼리가 긴 코로 사람을 감아서 거뜬 들어올리기도 하였다. 긴 코로 사람을 감아올리는 코끼리 또 사람들이 한줄로 반듯하게 누우면 코끼리가 사람들을 가로타고 지나가기, 땅바닥에 반듯하게 누운 사람을 발로 안마하기 등 장면들이 있었는데 이런 장면들은 정말 보기가 아짜아짜하였다. 놀라운 안마기교를 선보이는 코끼리 코끼리축구 또한 볼만하였다. 한마리의 코끼리가 문을 지키고 다른 한마리가 문을 향해 공을 차는데 키퍼가 꼴을 먹을 때도 있고 코로 뽈을 막아낼 때도 있었다. 이외에도 20여마리의 코끼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기, 코로 훌라후프(呼拉圈儿)돌리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사람들과 바줄당기기 등도 있었다. 바줄당기기는 관람객들이 15명이 나가서 뒤에서 당기고 코끼리가 앞에서 끌었는데 15명의 사람들이 줄줄 끌려갔다. 그리고 코끼리 그림그리기도 인상적이였다. 아주 육중하고 둔해보이는 코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색칠까지 하는데 둔한것이 아니라 아주 령민해 보였다. 화가를 찜쪄먹을 코끼리의 그림솜씨 우리가 볼바에는 코끼리들이 조련사의 지휘에 잘 복종하는듯했다. 그러나 자기의 성질과 맞지 않을 때는 말을 잘 안 듣는 모양인지 조련사들이 모두 낫자루 같은데 매부리처럼 생긴 쇠붙이를 맞춘것(괭이자루처럼 크게 만든것을 저목장에서는 도비라고 한다)을 들고있었다. 훈련시킬 때 쓰는 도구같았다. 전날 우리가 코끼리를 탔을 때에도 주인이 그것을 쥐고 코끼리의 목을 가로타고 몰았는데 코끼리의 이마에는 구멍이 여러곳이 나있었고 그 상처자국에는 메틸바이올레트(紫药水)가 발려있었다. 아마 코끼리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그것으로 쿡쿡 찔러놓는 모양이다. 코끼리연기를 다 구경하고나니 저녁때가 거의 되였다. 저녁에는 《동방공주(东方公主)》호에 올랐다. 《동방공주》호는 파타야의 야경도 감상하고 인요들과 함께 노래와 춤을 추면서 즐길수 있는 큰 배였다. 《동방공주호》는 파타야의 해변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다가운에 정착되여 있었는데 우리 관광객들은 모두 작은 배를 타고 거기까지 가서 《동방공주호》에 오르게 되여있었다. 《동방공주호》는 대단히 큰 배로서 안에는 식당도 있고 가운데 무대가 있어 유람객들이 그안에서 여러가지 서양료리를 먹으면서 인요(人妖)들의 가무를 구경할수도 있었다. 밖을 내다보면서 파타야 해변가의 야경도 감상할수 있고. 여기 말로 하면 그것은 바다우의 나이트클럽이였다. 밤이 되니 유람선에서는 오색령롱한 네온등 불빛이 명멸하면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미끈한 체격에 예쁘게 화장한 인요들이 나와서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서양료리가 오르자 유람객들은 맥주며 와인을 마시면서 인요들의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흥이 도도해지자 그들과 같이 한덩어리가 되여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동방공주(东方公主)》 레스토랑서 동행들과 함께 그들 가운데는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갈색인종 다 있었다. 그들은 부동한 피부색갈에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손시늉을 해가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는데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세상의 여러 인종들이 다 모인 환락의 지구촌이였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인류가 사는 이 지구촌은 부동한 인종, 부동한 민족이 함께 사는 세상이요, 그들은 비록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르지만 모두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바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환락의 마당은 1시간 반가량 이어졌으며 서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어떤 사람들은 서로 싸인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지구촌 한마당 파타야 해변가는 고급호텔과 방갈로(孟加拉式平房), 레스토랑(서양식 료리를 하는 음식점) 등과 함께 밤에는 화려한 불빛, 낮에는 하늘을 누비는 해상락하산과 윈드서핑(风帆板) 등이 어우러져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낼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하여 《동양의 하와이》 또는 《타이의 리비에라(里维耶拉海岸)》라는 별칭을 가지고있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면 자비로 안마를 받는다. 안마는 반시간가량 하는데 40바트였다. 인민페로 환산하면 8.5원이다. 우리 팀에서 극소수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안마를 받았다. 안마사들은 전부 타이의 50,60대 녀인들이였는데 절반 손시늉으로 한어통화가 가능하였다. 타이에서 여러 관광쇼핑쎈터를 돌아보면 판매원들 모두가 한어는 뜨개말 정도로 다 했다. 그래서 젊은 녀성들이니 한어를 빨리 배웠겠다 생각하였었다. 늙은 안마사들까지 서툴지만 한어로 대화하는것이 이상하여 어떻게 되여 이렇게 한어를 잘하는가고 물었다. 중국관광객이 많으니 그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어를 배우게 된다는것이 그들의 대답이였다. /주청룡특약기자 [다음 계속]
39    동남아려행기[9] 댓글:  조회:4366  추천:0  2013-07-01
동남아려행기[9]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3-07-01 13:37:05 ] 클릭: [ ] 아름다운 해변도시 파타야. 이튿날(10월 30일) 우리는 파타야 바다가에 가서 놀게 되였다. 파타야는 정말 아름다운 해변도시였다. 타이의 전통 건물에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진 고층건물, 우리 지방에서 볼수 없는 열대식물과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들, 수정같이 맑은 바다물에 40킬로메터되는 백사장 해수욕장은 정말 유람객들을 매혹시켰다. 그리고 바다의 상공에는 채색의 락하산들이 하늘에서 떠돌아 다녔는데 채색고무풍선들이 하늘에서 둥둥 떠다니는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약 1킬로메터 정도 들어가서 바다 가운데 선체가 넓고 바닥이 평평한 바지선(驳船)이 여러대가 널려 있었는데 바지선에서 락하산이 뜨고 내리고 하였다. 우리는 해변가에서 쾌속정을 타고 바지선이 있는데로 갔다. 바지선에 올라 보니 유람객들이 락하산을 몸에 착용한 다음 긴 바줄을 쾌속정에 이어놓고 쾌속정이 고속도로 질주하면 공기의 부력으로 사람이 탄 락하산이 하늘공중에서 솟아올라 날아다니였다. 하늘공중을 몇 바퀴 돈 다음 쾌속정이 속도를 조절하여 바지선 가까이에 와 서면 락하산이 면바로 바지선 우에 와서 내리도록 되였다. 그것도 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반시간 넘어 기다려야 탈수 있었는데 락하라는 말 자체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반대로 배우에서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여 연놀이와 같이 신기하였으며 아래를 내려다 보면 당금 바다에 떨어질것만 같았지만 비행기에서 타 보지 못한 락하산을 배우에서 타고 하늘로 오르니 별 재미였다. 해상락하산 타기 우리는 여기에서 해상락하산타기놀이를 다하고 또 쾌속정을 타고 15분가량 걸려 코란으로 갔다. 파타야에서 가까운 바다에는 여러 섬들로 된 군도가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코란이다. 타이어로 섬을 《코》라고 하며, 타이의 섬에는 이름 앞에 《코》가 붙는데 《코란》은 《란섬》이라는 뜻이다. 《코란》은 《산호 섬》이라고도 하며 파타야 서쪽 7.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이곳은 해변가 모래가 희고 보드라워 해수욕, 일광욕, 모래욕을 하기에 좋을 뿐만아니라 스쿠버 다이빙(호흡기를 달고 부력조절조끼를 입고 잠수하여 바다속을 누비는 수중 스포츠)을 할수 있어 이곳을 택한다고 한다. 우리는 산호섬에 가서 미리 준비한 수용복만 입고 또 쾌속정을 타고 바다가운데 있는 바지선이 있는데로 갔다. 우리는 바지선에 올라 호흡기를 달고 수중안내원의 안내하에 7,8메터 깊이의 바다밑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바다밑에서 수중안내원을 따라 바다밑려행을 하였는데 물밑에는 산호도 있었고 여러가지 모양과 색갈을 가진 물고기들이 놀고 있었으며 수중안내원이 빵쪼각, 과자부스러기를 뿌리면 그것을 먹겠다고 막 모여 들었다. 아마 그 놈들도 사람단련을 거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것 같았다. 바다밑려행을 하는 과정에 수중안내원이 우리들을 물밑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러 장의 사진가운데서 먹이를 주어 가지각색의 물고기들이 모여들 때와 산호앞에서 찍은것이 가장 멋있었다. 바다밑려행. 바다밑 려행을 하면서 바다물 압력으로 몸이 좀 죄여드는 감을 느꼈고 부력으로 하여 몸이 우로 뜨는 감을 느꼈다. 반시간 가량 바다밑 려행을 하고 수면으로 올라오니 바다물 압력과 물의 부력에서 벗어나 몸이 아주 자연스럽고 후련한 감을 느꼈다. 바다밑려행을 마치고 다시 쾌속정을 타고 산호도에 와서 해수욕의 즐거움을 느끼였다. 해수욕장. 산호도 해수욕장에도 호텔, 식당, 각가지 관광쇼핑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7진불산(七珍佛山)으로 갔다. 7진불산은 산의 높이가 170메터로서 태왕의 등극 50주년을 기념하여 석가모니상을 조각한 신상(神像)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것은 한 고승(高僧)이 지금의 9세왕을 위하여 룡맥(龙脉: 풍수설에서 산의 기세와 기복)을 찾아서 산을 깎아서 종단면을 평평하게 하고 이딸리아에서 수입해 들여온 레이저기술로 석가모니불상도안을 새긴 다음 18톤의 24K 황금을 부어 넣어 만들었는데 이 황금은 9세왕을 애대하는 타이의 백성들이 자원적으로 헌납한것이라고 한다. 신상(神像)심장부위에는 석가모니의 사리(舍利, 석가모니나 성자(聖者)의 유골)가 안장되여 있다고 한다. 7진불산(七珍佛山). 원래 려행일정에는 9세 황묘를 참관하는것이 있었는데 시간상 관계로 그것이 취소되였다. 타이의 9세 황묘는 파타야에 있으며 지금의 국왕을 위하여 건축하였는데 미래의 행궁(行宮)이란다. 타이민중들은 9세 황묘를 《국왕묘(国王庙)》라고 부른다. 9세 황묘안에는 력대의 고승들의 사리(舍利)가 모셔져 있으며 그들의 밀랍상관(蜡像舘)이 있다고 한다. 9세 황묘, 밀랍상관, 7진불산은 타이에서 3대 기관(奇观)이라고 한다. 이러한 3대 기관에서 두가지나 보지 못한것이 참 아쉬웠다. 7진불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또 한 가무극장에서 가무를 보았는데 그것은 동파락원에서 본것과 같이 다 같은 타이민속표현이기에 여기에서 략한다. [후일 계속]
38    동남아려행기[8] 댓글:  조회:4862  추천:0  2013-06-23
동남아려행기[8]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6-23 15:45:46 ] 클릭: [ ]   이튿날(10월 29일) 오전에는 가죽제품상점, 보석상점 그리고 보석가공공장을 참관하고 오후에 타이만(泰国湾)동쪽해안에 위치한 파타야시로 향하였다. 파타야시는 방코크에서 남동쪽으로 약 150킬로메터 떨어져 있으며 원래 이름없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곳이였는데 1961년에 윁남전쟁시 미국병사들을 위한 휴양지로 개발되여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우면서 아시아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발전하였으며 지금은 면적이 22.2평방킬로메터, 10만 5천명 인구를 가진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특별 행정구역이라고 한다. 방코크에서 떠나 장장 세시간 달리는 가운데 대지는 전부 끝이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한 벌판이였는데 파타야에 거의 갈때에야 산이 보이였다. 그 일망무제한 벌판에는 논밭이나 빠나나밭이 드문드문 보이였으며 경작지로 쓰지 않는 풀밭이 많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풀밭을 보면서 우리고장은 한푼의 땅이라도 묵일세라 밭을 일구어 모두 경작지로 사용하고있는데 이곳은 경작지가 부족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가이드한테 타이의 농업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타이는 중부가 평원이고 동부는 고원이고 기타 지방은 산구라고 한다. 타이의 경제와 사회구조에서 농업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주요 농산품들로는 중부에 입쌀, 카사바(木薯, 감자처럼 괴경을 주요한 전분으로 한다.) 과일. 동북부에 옥수수, 북부에 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과일로는 빠나나, 두리언(榴莲), 야자 등이라고 한다. 파타야에 가서 제일 처음으로 93사(孤軍)박물관을 참관하였다. 93사는 원래 국민당 운남지구 제8군에 예속되였는데 1949년에 인민해방군에 패전하여 퇴로가 막히자 709퇀 부퇀장 리국휘(李国辉)는 잔여부대 약 1,000여명을 거느리고 중국 광서로부터 버마(缅甸)경내로 철퇴하여 당지에 체류하고있던 원 국민당 항일원정군 잔여부대와 합병하여 93사를 성립하였으며 장개석의 《훈령》으로 금삼각지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공작전을 하였다. 그러나 60년대 중기에 와서야 고군 제3대(孤軍第3代) 지도자들이 반공대륙은 불가능한 임무이라는것을 깨닫고 타이북부 금삼각지대인 미사락진(美斯乐镇)에 철퇴하여 국적도 없이 집단생활을 하였으며 생계를 위하여 아편을 심고 헤로인을 가공하여 장사를 하다가 타이정부를 도와 금삼각지대의 최대반정부 무장세력 쿤사(坤沙)조직을 소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종래로 자기가 중국사람이라는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타이국왕은 무기를 놓는 전제하에서 고군(孤軍)을 중국난민의 신분으로 타이에 머물게 하고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그들이 타이 국적을 신청하면 입적시킨다고 한다.   유명한 93사박물관 입구   고군박물관에는 고군이 국민당과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 반공작전을 한 사료들이 사진으로 벽에 붙어 있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던 장비도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는 또 장가도 못가고 보토리로 늙은 그들의 후대들이 작은 다락집에서 아편을 피우고있었는데 그들과 한어로 통화가 되는지라 물어보니 부모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떴으며 자기들은 장가도 못가고 금삼각지대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으면서 생활하다가 지금은 여기에 정착하여 사는데 박물관 경영자는 그들에게 매일 100바트씩 준다고 한다. 내가 《중국에 가 보고싶지 않은가?》물었더니 《왜 화인으로서 중국에 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갈 신세가 되지 못하니 이렇게 보낸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비록 이국땅에서 태여나서 자랐고 늙어왔지만 필경은 중국인후예로서 중국을 그리는 그들의 심정을 읽을수 있었고 관광객들을 위한 동물원안의 《동물》신세로 된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무거워 났다. 고군후대들(孤軍后代) 나오면서 보니 출구 우에는 한자로 커다랗게 還我國籍(나의 국적을 돌려달라)라고 씌여있고 왼쪽에는 고군귀화 선서문이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孤军入泰籍宣誓詞 (고군 타이 귀화 선서문) 我们要遵從國家的法律和服從國家的命令 (우리는 국가의 법률을 존중하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며)   我们要以生命来愛護和保衛我们所生存的國土 (우리는 목숨으로 우리가 생존해가는 국토를 애호하고 보위하며) 我们要忠誠擁戴當今皇上陛下和皇族 (우리는 충성으로 현임황제페하와 황족을 받들어 모시며) 我们要以身體和生命來保護皇上和實座 (우리는 신체와 목숨으로 황제와 그 실좌를 보호할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十年北伐(10년 북벌), 八年抗战(8년 항전) 四年内战(4년 내전) 叱吒金三角(질타금삼각) 勝敗論狗熊(승패로 졸장부를 론하다)   란 글이 적혀 있었다. 고군박물관(孤軍博物館)출구 나는 이 글을 보면서 그들이 그렇게도 국민당에 충성을 다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남정북전하면서 싸워왔건만 차려진건 국적도 없는 타국떠돌뱅이신세였고 결국에는 타이국왕에게 목숨을 바칠것을 선서하게 되였으니 이는 국민당에 대한 저주가 아니가하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고군박물관에서 나와 뻐스를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서 코끼리를 타고 야산을 유람하면서 악어늪으로 갔다. 코끼리를 탈때에는 당지의 코끼리몰이군이 코끼리의 목을 타고 관광객들이 코끼리 잔등에 올려놓은 안장에 둘씩 앉았다. 그전에는 그저 동물원에서 코끼리구경이나 하였지 난생 처음 타보는 코끼리라 이것도 타이 유람에서 하나의 큰 기쁨이였다. 그곳의 야산은 우리 고장처럼 교목이나 관목이 많은것이 아니라 대부분 10여메터 지어 몇십메터 높이 자란 커다란 초본식물들이였다. 코끼리를 타다 늪가에 이르니 악어낚기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는데 악어들이 욱실거렸다. 우리도 배를 타고 늪 가운데로 들어가서 악어낚기를 하였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낙시대에 고기를 달아매고 수면우에 드리우면 악어들이 그것을 먹겠다고 풀쩍 뛰여오른다. 사람의 동작이 더 날쌔면 악어가 헛탕을 치고 악어가 더 날쌔면 사람이 고기덩이를 떼운다. 소름끼치는 악어낚기 악어낚기놀음을 끝낸 다음 우리는 2인승마차(해방전에 말하던 이십오시)를 타고 뻐스 있는데로 왔다. 그날 저녁에는 동파락원(东巴乐园)에서 타이민족가무표현을 보았다. 그들의 민속표현에는 타이인들의 복장, 혼례, 서민생활, 왕실생활, 태권도표현 그리고 타이인들의 민족투쟁 등이 있었다. 타이인의 민속가무 그 투쟁장면은 가관이였는데 칼이 서로 부딛칠 때면 불이 번쩍거리기도 하여 아주 치렬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코끼리를 타고 칼싸움을 하는데 치렬한 싸움끝에 타이인들의 영용한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우리는 10여 마리의 그 육중한 코끼리가 무대에 등장하여 치렬한 싸움을 하는 장면을 통하여 타이인들의 풍속과 용감한 기개를 볼수 있었고 또 이런 공연을 보게 되여 희한하기만 하였다. 기상전(騎象戰)의 한 장면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37    동남아려행기(7) 댓글:  조회:25622  추천:0  2013-06-15
동남아려행기[7] 편집/기자: [ 김택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6-14 15:31:16 ] 클릭: [ ] 대황궁을 다 참관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퍽 지났다. 점심을 먹고 먼저 면세점(免稅店)으로 갔다. 면세점에는 금은보석장식품, 의복류, 전자제품, 가죽제품 등 여러가지 상품들이 많았는데 가죽제품에는 우리고장과 달리 코끼리가죽과 악어가죽제품이 많았다. 타이에서는 가죽제품에서는 이 두가지가 특산이라고 한다. 우리 팀에서도 이러한 가죽제품들은 중국에서 만나기 힘들며 값도 여기에서 사면 싸다고 가방이나 돈지갑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페단위는 타이바트(泰铢)이고 환률은 인민페 100원에 470바트였다. 다음으로는 방코크 중심을 가로 지르는 차오프라야강(湄南河)에 가서 유람선을 타고 차오프라야강 량안의 경치를 구경하는것이였다. 유람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시간 기다려서야 유람선을 탈수 있었다. 차오프라야강 량안 구라파식 건축물 유람선에 올라 보니 방코크중심부의 차오프라야강의 너비는 약 200메터가량 되였으며 량안의 경치 또한 그야말로 가관이였는데 배에 앉아서도 대황궁을 볼수 있었다. 뾰족한 지붕을 얹은 타이의 전통건물, 원추형으로 올리 솟은 구라파식 건물, 하늘을 찌를듯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 나무숲속에서 서로 키돋음을 하며 지은 건물들은 그 아름다운 경치로 하여 유람객들의 감탄만 자아냈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니 강 동쪽은 대왕궁을 비롯한 고대건축물들이 많았고 강 서쪽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많았다. 차오프라야강 량안 타이전통 건축물 유람선은 한시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때에는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하여 어둠이 깃들자 서로 마주앉은 식탁에는 여러가지 과일, 사탕, 과자, 빵에 서양료리 그리고 맥주, 와인 및 기타 여러가지 음료들이 올랐다. 저녁코스는 인요(人妖)가무표현을 관람하는것이였다. 인요들의 가무표현은 금동니오락궁(金东尼娱乐宫)에서 진행되였으며 타이에는 인요들의 가무표현장소가 많은데 금동니환락궁에서 하는것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하루에 몇번 공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들어갈 때에는 먼저 들어간 관람객들이 꽉 밀려나오고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갔어도 관람석은 만원이였다. 막이 열리자 배경에는 한자로 된 “2008曼谷明星歌舞团”》이란 푸른색 네온등이 있었고 그 우에는 또 라틴어로 된 기다랗게 붉은색 네온등으로 된 글발들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2008방코크스타가무단》란 뜻이였는데 여기서 스타란 바로 인요를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가이드와 같이 앉아서 인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타이의 인요는 근 1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데 일부 생활이 곤난한 집들에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자아이가 5~7살쯤이면 인요를 배양하는 곳으로 보낸다고 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성기수술을 받은 다음 장기적으로 녀성호르몬 주사를 맞거나 복욕하여 변태적으로 발육하여 허리, 팔다리가 가늘고 젖가슴이 불룩하게 두드러져 나오는 등 녀성다운 모습을 갖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 인요들은 예쁘게 생기고 녀성화하였지만 손과 발이 큰것이 녀성과 구별이 된다고 한다. 인요들의 가무표현 인요들은 그곳에서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을 배우고 성장한 다음 공연하여 얻은 수입을 집에 보내여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장기간 주사를 맞은 원인으로 나이가 들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나중에는 심한 합병증으로 수명이 짧아지는데 평균수명은 40세라고 한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여 수명이 좀 연장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정상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많은 차이를 보이고있다고 한다. 공연절목은 가무가 위주였는데 타이의 전통적인 가무, 궁전가무와 현대 류행가무 등 종목들도 있었지만 중국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여 대륙, 향항, 대만의 노래들도 있었는데 례하면 《血染的风彩》,《黄土高坡》, 《潇洒走一回》 등 노래들도 있었다. 이러한 중국노래들이 나올때면 중국관관객들은 흥이 나서 같이 따라 하였다. 무대배경이 아주 황홀하였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인물체격도 뛰여났고 복장 또한 화려하였으며 노래소리도 아주 청아하여 매 절목이 끝이 날때면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였다. 하지만 그들이 입만 벌릴뿐 노래소리는 모두 사전 록음으로서 가창(假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식기 제거와 장기적인 녀성호르몬주사와 복용으로 하여 음성이 변하여 남성의 목소리도 녀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듣기가 아주 구차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인요들에 대한 가이드의 소개를 듣는 한편 그들의 표현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들이 지금 이 나이에는 무대에서 꽃피는 《처녀시절》을 보내면서 돈을 많이 번다지만 일단 이 아름다운 《처녀시절》이 지나면 행복한 가정도 이룰수 없고 생육도 할 수없는 남성도, 녀성도 아닌 페인으로 밖에 되지 않는가? 고독하고 쓸쓸하고 또 신체적인 허약으로 늘 병마와 싸워야 할 그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 났다. 공연이 끝나자 관람객들이 막 밀려서 나오는데 인요들은 먼저 나와서 관람객들을 끌어당기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사진 한장에 인민페로 20원이였다. 나는 원래는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을 생각이 없었는데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으로 인민페 100원을 주고 5장을 찍었다. 사진/글 주청룡특약기자
36    동남아려행기[6] 댓글:  조회:17357  추천:0  2013-06-10
동남아려행기[6]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6-02 14:17:35 ] 클릭: [ ] 이튿날 우리 려행단은 타이 대황궁으로 갔다. 대황궁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는 오른쪽의 한 건물을 가리키며 저것이 타이주재 중국대사관이라고 하였다. 차창으로 내다보니 중화인민공화국 국기가 바람에 나붓기고있었다. 몇개 나라를 다니며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본국에서 오성붉은기를 볼 때와 달리 이국땅에서 오성붉은기를 보면 하냥 마음이 설레이고 조국에 대한 경모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타이 대황궁 타이 대황궁은 18세기 이후부터 국왕이 머물렀던 공식관저이다. 건축은 1782년 라마 1세때 수도를 톤부리(吞武里)에서 방코크로 옮기면서 시작되였으며 여러번의 증축공사를 통해 계속 왕궁이 확장되였다. 방코크왕조 라마 1세부터 8세까지 이 왕궁에 있었으며 1946년 라마 8세가 이곳에서 피살된후 라마 9세,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은 이곳에 머물지 않고 대황궁 동쪽에 새로 지은 치뜨랄다궁(集拉达宫)에 거주하고있다. 궁전은 방코크 중심의 차오프라야강(湄南河) 동쪽에 있으며 높이 5메터, 길이 1,900메터에 달하는 백색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 면적은 218,400평방메터이다. 대황궁은 주요하게 몇개의 궁전과 하나의 사원(玉佛寺)로 구성되였으며 타이의 여러 왕궁가운데서 가장 완미하게 보존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민족특색이 있는 왕궁이다. 대황궁전경 지금 대황궁은 대관식(加冕典礼), 궁전경축 등 의식과 활동외에 평시에는 대외에 개방하여 타이의 명승고적으로 유람지로 되고있다. 대황궁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것이 큰 잔디밭이다. 잔디밭 주위에는 보리수 등 이름 모를 열대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대황궁 안에는 네채의 웅위로운 건물이 있는데 차크리궁(节基宫, chakri Maha Prasad), 두씻 마하 쁘라쌋(都实宫 Dusit Maha Prasad)、아마린 비니차이전(阿玛林宫Amarin Winitchai Hall), 에메랄드사원(玉佛寺 Wat Phra Kaeo)이다. 대황궁의 두번째 문에 들어서면 한채의 웅위롭고 류달리 아름다운 3층건물이 있는데 국왕이 취임의식을 하는 곳으로서 대황궁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본당인 차크리궁이다. 이 궁전은 라마(拉玛)5세왕이 1876년에 시작하여 건축한것인데 그 특점은 기본 구조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예술이고 우의 3개의 뾰족한 지붕은 타이식의 지붕이다. 차크리궁 차크리궁의 서쪽에는 두씻 마하 쁘라쌋이 있는데 이것은 타이의 전통건축이다. 두씻 마하 쁘라쌋에는 라마1세왕 시대에 만든 어좌(御座)와 어상(御床)이 있으며 라마왕조의 제 1류의 예술품으로 전시되여 있다. 지금 두씻 마하 쁘라쌋은 주요하게 국왕, 왕후, 태후 등 왕실인물들이 상례(丧礼)를 지내는 곳으로 되고 있다. 차크리궁의 동쪽에는 아마린 비니차이전이 있으며 3개의 주요 건축물로 구성되였는데 이곳에서는 왕을 배알하는 아마린알견청, 대관식(일부 군주 국가에서, 임금이 즉위한 뒤 처음으로 왕관을 써서 왕위에 올랐음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박사청, 군주들의 관방주택으로 사용되던 카라마디만전이 있었는데 대외에 개방하지 않았다. 대황궁안에는 또 한채의 서양식 건축물이 있는데 우룽비만궁(武隆碧曼宫)이라고 하며 라마 5세왕이 1909년에 태자에게 지어준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구가원수 및 국빈과 황실귀족들의 영빈관으로 쓰이는데 일반적으 로대외에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에메랄드사원은 대황궁안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타이에서 가장 이름 있는 불사이며 타이의 3대 국보중의 하나이다. 에메랄드 사원은 1784년에 건설된 타이 왕궁의 일부분이며 면적은 대황궁의 1/4을 차지한다. 사원은 타이 왕족이 옥불상을 모시고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며 사원내에는 대웅보전(大雄宝殿), 선왕전(先王殿), 불골전(佛骨殿), 장경각(藏经阁), 종루(钟楼)와 금탑(金塔)이 있다.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황금체디탑. 대웅보전은 에메랄드사원의 주체건물이며 대전안에는 옥불상이 모셔져 있다. 매년 5월 농경절이면 국왕이 여기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풍수를 기원한다. 그리고 타이에서 내각을 선거할 때면 새로운 정부의 전체 내각성원들이 여기에 와서 국왕에게 선서를 하고 취임을 한다. 불상사원 벽에 있는 반인반조의 부조물. 그리고 절기가 바뀌울 때마다 국왕이 친히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하는 의미에서 불상의 옷을 갈아입힌다. 뜨거운 계절에는 붉은 보석을 박은 금의, 우기에는 람보석을 박은 금의, 서늘한 계절에는 순금으로 된 금의를 갈아 입힌다고 한다. 낀날리라 불리우는 신. 대황궁을 참관할때에는 복장차림새가 정결하고 정중하여야 하며 행동거지가 단정해야 하는데 대웅보전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신, 모자 선글라스를 모두 벗고 들어가야 한다. 하여 가이드가 전날에 벌써 주의사항을 다 주었다. 녀성들이 입는 치마도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야 한다고 규정했다. 만약 짧은 치마를 입었다면 대문어구에 치마대용으로 파는 천을 사서 허리 아래에 둘러야 한다. 사원내의 네 주위에는 길이가 약 1킬로메터되는 벽화 장랑이 있는데 178폭의 인도고전문학 《라마야나》사시를 제재로 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련환화가 그려져 있으며 사원내의 몇개의 대형도자기병풍에는 중국 《3국연의》이야기를 그린 채색그림들이 있었다. 대황궁을 다 참관하고 나오면서 우리 려행단은 에메랄드사원을 배경으로 대황궁참관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대황궁참관기념 대황궁앞의 타원형의 왕가전광장(王家田广场)은 면적이 12만평방메터인데 원래 궁정뜨락으로서 어용광장(御用广场)라고 불리웠다. 주위에는 타마린드 나무가 있으며 왕실과 정부의 주요한 행사가 여기에서 진행된다. 지금은 매년 5월 춘경절과 타이신년이면 국왕이 여기에서 경축의식을 사회를 한다고 한다. 주위에는 주요 대학, 정부사무실, 타이국가박물관, 국가극원, 국가예술관, 방코크수호신사(守护神寺)가 있다. [다음 계속]
35    동남아려행(5) 댓글:  조회:18147  추천:0  2013-05-27
동남아려행기[5]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5-27 10:45:26 ] 클릭: [ ] 베니스인휴가촌(威尼斯人度假村) 다음으로 우리는 베니스인휴가촌(威尼斯人度假村)으로 갔다. 베니스인휴가촌은 감자도 로감금광대로(凼仔岛 路氹金光大道)의 중심지대에 잡고있으며 미국의 도박업 거두인 샌즈그룹(金沙集团)에서 200억딸라를 투자하여 건설한 부지면적이 29만 9천평방메터, 총건축면적이 95만 1,000평방메터, 39층에 높이 144.8메터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아세아에서 가장 큰 종합적인 카지노설비를 갖춘 오락성이다. 베니스인휴가촌(威尼斯人度假村) 이 휴가촌은 이딸리아의 항구도시 베니스의 풍격을 따른것으로서 호텔주위의 베니스특색이 짙은 무지개다리, 작은 운하, 돌판길 등은 16세기 베니스문화부흥식의 풍격이 다분히 비쳐있어 베니스인의 랑만적인 생활과 그 풍채를 만끽할수 있었다. 베니스인휴가촌은 건축물이 특색이 있을뿐만아니라 호텔내에는 세계 일류의 카지노, 전시회, 쇼핑, 체육, 종합예술, 레저 등 종합시설을 갖고있다. 그중 사용공간이 12만평방메터되는 전시회쎈터, 3,000칸의 호화객방, 1만5천 좌석을 용납할수 있는 금광종합예술관, 2,00개의 좌석을 가진 연회청, 8,000평방메터의 수료쎈터(水疗中心), 사계절명품점, 멋진 태양곡마단 등도 갖고있다. 집이 어찌나 큰지 복도의 너비만 하여도 보통 15메터가량 되고 넓은 데는 30메터 되는데도 있었다. 베니스인오락장은 면적이 5만여 평방메터되며 850개의 자동설비를 갖춘 도박상, 4,100대의 슬로머신(角子机, 老虎机: 동전을 넣고 조작하여 그림이나 숫자의 정해진 짝을 맞추면 일정 액수의 돈이 나오는 도박기기) 도박상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박장이다. 우리 팀에서도 몇몇 젊은이들은 호기심에 끌려 도박판에 들어앉았는데 처음에는 따는듯싶더니 결국에는 몇천원씩 잃고 나왔다. 베니스인휴가촌 도박장 베니스휴가촌 3층에 있는 대운하쑈핑쎈터는 오문에서 가장 큰 쑈핑쎈터로서 면적이 9만 3천 500여 평방메터이고 세갈래의 운하가 있는데 한밤중에도 푸른하늘 흰구름아래에서 배사공의 미묘한 노래소리에 도취되여 무지개다리 밑을 지나며 뽀트놀이를 하면서 운하 량안의 베니스 풍격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수 있고 여유롭게 거닐면서 쑈핑을 할수 있었다. 베니스인휴가촌 소운하 나는 하늘을 올리다 보며 너무도 신기하여 안내원에게 밤중인데 어떻게 저런 푸른 하늘, 흰구름이 있을수 있는가고 물으니 그것은 가짜인데 전반 쑈핑쎈터는 대형의 스크린으로 덮혀 있으며 컴퓨터조작으로 대형스크린에서 비추는 영상이라고 설명했다. 아침에 해 뜨는 영상, 저녁에 해지는 영상도 다 나타난다고 하였다. 해설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영상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고 진짜 푸른 하늘 흰구름 같았다. 쑈핑쎈터에는 여러가지 디지털전자제품, 진주보석, 금은장식품, 례물, 복장 등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제품들이 많이 진렬되여 있었다. 관광객들은 모두 여러가지 명품, 기념품들을 어떤것은 돈을 아끼지 않고 사고 어떤것은 손에서 놓기 아쉬워하면서도 지나친 소비로 하여 사지는 못하고 있었다. 화페는 향항화페가 통용되였다. 전시회쎈터에는 여러가지 각국의 명품들이 다 있었는데 가장 인인기를 끄는 전시장은 전시면적이 가장 큰 자동차전시장이였다. 거기에는 승용차로부터 트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가지작색 자동차가 다 전시되여 있었다. 호화객방(70평방메터, 침실·응접실·주방·화장실 등 설비가 구비)은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가격표를 보니 값은 하루에 향항화페로 6,325원이였다. 오문관광은 이것으로 끝내고 감자도에 있는 려경만호텔(丽景湾酒店)에 주숙을 정하였다. 향향에서부터 오문에 이르기까지 거리를 지나면서 나무의 수형이 거대하고 가지로부터 공중뿌리(공기뿌리, 기근)가 가득 땅에 내리박은 나무를 보면서 저것이 바로 어릴적에 영화 《홍색랑자군》에서 악패지주 남패천이 랑자군 당대표 홍상청을 나무에 묶어놓고 불을 질러 살해하던 그런 용나무가 아닌가 하여 안내원들과 물어 보았더니 그들도 나무이름을 몰라 참 유감스러웠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든 호텔마당에 수형이 거대한 두그루의 그런 나무가 있어 호텔관리원과 물어보았더니 그것이 용나무가 옳다는것이였다. 한가지 나무이름을 안것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지방에서 볼수 없었던 수형이 이렇게 거대한 나무를 아열대지방에 와서 직접 보았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서는 이번 유람길에서의 또 하나의 성적이라고 느껴지면서 이튿날 아침에 흐뭇한 마음으로 렌즈에 담았다. 용나무(榕树) 이튿날 오전은 오문에서의 자유활동이고 오후에 전날 도착하였던 감자도 림시부두에서 려객선을 타고 향항에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로 가게 되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오문에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향항에 되돌아가서 비행기를 타는가?》고 인솔자에게 물었더니 오문비행장은 작아서 비행기를 타기에 불편하다는것이였다. 과연 오문국제비행장이 부두의 길 건너편 있어 비행장을 보았더닌 정말 작았다. 오후에 우리는 려객선을 타고 향항국제비행장으로 갔다. 향항국제공항은 대서산(大屿山) 이북에 바다를 메워 만든 첵랍콕(赤鱲角)섬에 위치하고 있어서 첵랍콕 국제공항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구룡반도에 카이탁공항이 있었는데 주변의 고층건물이 많고 또 산과 바다가 잇닿아있어 착륙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공항이였다. 하여 첵랍콕섬에 새로 공항을 건설하여 1998년 7월 6일에 개항한 후 카이탁공항은 지금 페쇄된 상태라고 한다. 향항 국제공항은 5성급공항으로서 면적이 1,255만 평방메터, 시간당 54회 리착륙이 가능한 3,800×60m 크기의 활주로가 2개가 있으며 매일 800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공항이라고 한다. 배가 3시에 향항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지만 방코크로 가는 비행기는 저녁 9시에 있어 6시간은 공항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6시간 한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게 너무나 무료하고 지루하여 공항안을 한바퀴 돌아보았더니 비행기 탑승구만 하여도 100개가 넘었다. 공항안은 하나의 자그마한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의복, 가죽제품, 전자제품, 금은장식품, 식품, 서점 등 가게들이 줄느런히 들어앉았으며 식당도 있었다. 그리고 공항벽이 모두 유리로 되여 밖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것을 다 볼수 있었다. 비행기가 2,3분에 한대씩 뜨고 있었는데  내가 보아온 공항중 제일 큰 공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9시에 방코크로 가는 비행기가 리륙하였는데 비행기에서 향항의 야경을 구경하는것 역시 가관이였다. 향항의 고층건물은 모두 네온등 불빛으로 장식되여 건물의 륜곽을 다 그려볼수 있었으며 비행기가 더 높이 떴을 때 아래를 내려다보니 향항은 산간도시라 산마다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네온등 불빛이 산을 물들여 백화만발한 봄을 방불케하였다. 이러한 향항의 야경에 도취된 내 마음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비행기는 2시간 반을 날아 11시 반경에 방코크(曼谷)시의 상공에 들어섰다. 방코크시의 야경 또 특이하였는데 도시의 큰 길은 어찌나 곧게 뻗고 층집들이 어찌나 질서정연하게 들어앉았는지 마치 일망무제한 벌판의 원전화와도 같았다. 시내 가로등 불빛은 가로 세로 곧게 뻗은 논두렁에 비유할수 있었고 줄줄이 들어앉은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금방 모살이를 한 벼포기와 흡사하였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서니 려행사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있었고 키가 자그마한 총각가이드가 아주 순통한 한어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가이드에게 어찌하여 한어를 그렇게 잘 하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화인후예라고 하였다. 뻐스가 호텔로 들어가면서 가이드는 타이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타이의 공식명칭은 타이왕국, 면적은 513,120 평방킬로메터, 인구는 2011년 통계로 6,672만명, 수도는 방코크, 정치체제는 의회 량원제이고, 군주립헌제이며 국가원수는 국왕(현재 푸미폰 아둔야뎃), 정부수반으로는 총리(현재 잉락 친나왓), 민족구성으로는 35개 민족으로서 타이족이 75%, 화인(华人)14%, 말레이인 2.3%이며 부유계층의 사람들 가운데서 화인이 6,70%라고 하였다. 공용어로는 타이어, 종교는 90%이상이 불교신자로서 불교왕국, 기후는 열대기후로서 년평균기온이 27도라고 한다. 시간대는 UTC+7로서 중국(UTC+8)보다 한시간 늦어 안내원이 우리더러 시계바늘을 한시간 뒤로 맞추어 놓으라고 하였다. 방코크시내로 들어서면서 볼라니 대부분의 집마당에는 불단(佛坛)이 있었다. 불교왕국이라는것이 확연하였으며 우리가 든 호텔 마당에도 불단이 있었다. 불단(佛坛)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34    동남아려행기[4] 댓글:  조회:21698  추천:0  2013-05-20
동남아려행기(4)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5-20 11:34:26 ] 클릭: [ ] 오늘의 로정은 오문으로 가는것이였다. 아침 8시에 향항에서 려객선을 타고 오문으로 향하였는데 배가 가는 량켠에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았다. 배는 9시 40분에 오문 감자도(凼仔岛)림시부두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려 입경수속을 하고 해관을 나서니 벌써 오문려행사의 관광뻐스가 해관마당에서 기다리고있었고 남성가이드가 우리를 뜨겁게 맞이하여 뻐스에 오르도록 하였다. 우리가 뻐스에 올라 오문반도로 들어가는 동안 가이드는 오문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오문은 주강삼각주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오문반도(澳门半岛), 감자도(凼仔岛), 로환도(路环岛) 등 섬으로 되여 있다. 로환도는 감자도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로감(路凼)공로로 련결되여 있고 감자도(凼仔岛)는 우의대고(友谊大桥), 오감대교(奥凼大桥), 서만대교(西湾大桥) 로 오문반도와 련결되여 있다. 전반 오문은 북쪽으로는 주해시와 압용하(鸭涌河)를 사이두고 서쪽으로는 주해시와 좁은 해협을 사이두고 있다. 총면적은 29.2평방킬로메터, 인구는 약 55.8만명, 인구밀도가 매 평방킬로메터당 1만 9천여명으로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크며 화인(华人)이 절대다수이고 언어는 광동어, 포도아어, 영어를 같이 쓴다고 한다. 오문은 원래 광동성 향산현(지금의 중산시)에 속하였는데 16세기 중엽부터 뽀르뚜갈인이 점차적으로 점령하면서 400여년 통치하게 되였다. 1999년 12월 20일, 중국정부는 오문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면서 오문특별행정구를 성립하였다. 우리는 서만대교를 건너 오문반도로 들어갔는데 서만대교는 오문반도와 감자도를 이어놓는 세번째 다리로 북으로는 오문반도 융화문(融和门), 남으로는 감자도부두와 련결되였으며 대교의 총길이는 2200메터이고 상하층으로 되였으며 상층은 쌍방향 6차도이고 아래층은 쌍방향 4차도이며 8급 태풍에서도 정상적으로 통차할수 있다고 한다. 서만대교를 건너자 해협 서쪽으로 고층건물들이 보였는데 안내원은 저곳이 바로 주해시라고 하였다. 해협이 좁아 주해시의 고층건물들이 똑똑히 보였다. 마조각 마조각(妈祖阁) 서만대교를 지나 우리는 마조각(妈祖阁)에 갔다. 마조각은 오문의 저명한 명승고적으로서 오문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처음 명나라 홍치원년(1488년)에 세웠는데 1874년, 1875년에 두번이나 화재로 훼손되였다. 주민들이 돈을 모아 1875년에 재건을 시작해서 1877년에 락성한 이 건물은 500여 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주요 건축물들로는 석전(石殿), 대전(大殿), 홍인전(弘仁殿), 관음각(观音阁) 등 네채의 전당(殿堂)이 있다. 묘안에는 주로 도교녀신인 성모(妈祖)를 모시고있는데 매년 춘절과 음력 3월 23일 성모의 생일에 여기에 와서 향을 피우고 소망을 빌며 섣달그믐날에는 자정을 전후하여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복을 빈다고 한다. 성모(妈祖) 세인트 폴 성당 유적 (大三巴牌坊) 다음으로는 세인트 폴 성당 유적지로 갔다. 세인트 폴 성당 유적(大三巴牌坊)은 대삼파우가(大三巴右街)의 작은 산언덕에 자리잡고있는데 서방문명이 중국에 들어온 력사의 견증물이며 오문의 가장 대표적인 명승고적이다. 1580년에 준공된 세인트 폴 대성당은 화재로 1602년에 다시 수건하여 35년만인 1637년에 준공되였는데 1835년에 또 불이나 훼멸되여 지금의 앞벽만 남아 세인트 폴 성당 유적으로 되였다. 이 성당은 제수이트 교단의 이탈리아인에 의해 설계되여 구라파문예부흥시기와 동방의 건축풍격이 서로 결합된것으로서 동서방예술의 조화를 체현하여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그리스도 교회로 알려지면서 동방의 바띠까노로 불리웠다. 세인트 폴 성당 유적은 높이 27메터, 너비 23.5메터로서 이딸리아문예부흥시기의 바로크(barroco)식 건축물이며 모두 5층으로 되였는데 밑의 1,2층은 같은 장방형으로 되여있고 3~5층은 금자탑모양으로 되였으며 맨 꼭대기에는 《十》자가 세워져 있다. 그 아래 5층 중앙에는 성령(圣灵)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조각되였고 4층 중앙에는 예수, 3층 중앙에는 성모조각상이 있으며 2층에는 세개의 창문이 있고 예수를 모시는 네명의 교도들의 조각상이 네칸에 각각 있으며 1층은 세개의 출입문이 있다. 세인트 폴 성당 유적 (大三巴牌坊) 금련화광장(金莲花广场) 오후의 첫 코스는 금련화광장이였다. 금련화광장은 오문반도 동남부 신항구부근의 필사달대로(毕仕达大马路)와 우의대로(友谊大马路)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다.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문에 대한 주권을 회복한것을 경축하여 중앙정부에서 금련화조각상을 증정하여 광장에 앉혔는데 높이 6메터, 꽃의 최대직경이 3.6메터, 무게 6.5톤이다. 꽃을 받혀주는 적갈색의 화강암 기둥에는 황금색의《성세련화(盛世莲花)》란 편액이 있다. 조각상의 주체부분은 화경, 화판, 화예로 조성되였으며 청동으로 주조하고 표면을 황금색갈로 도금하였으며 그야말로 한창 피여나는 련꽃을 방불케 하였다. 련화는 오문특별행정구의 구화이며 련꽃이 천천히 피여나는 모습과 《성세련화》편액은 오문이 영원히 번영 창성함을 상징하고있다. 금련화광장 금련화광장에는 원래 국기게양대가 없었다고 한다. 2000년 오문특별행정구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성립 51주년을 기념할 때 향항의 금자형광장의 게양방식을 본받아 광장에 두개의 게양대를 세워 2000년 10월 1일 처음 국기와 구기게양식을 하였으며 이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일과 오문회귀기념일이면 정부측의 관례적인 경축활동으로 되였다고 한다. 게양의식은 매일 아침 8시에 중화인민공화국국가의 주악속에서 거행하며 저녁 6시에 강기의식을 한다. 포경오락장(葡京娱乐场) 포경오락장은 오문에서 가장 규모화한 도박오락장이며 오문반도의 최 남단 남만호부근의 포경로(葡京路)에 위치해 있다. 이 오락장은 오문관광오락유한회사에서 경영하는데 안에는 다종다양한 오락방식이 있으며 입장권이 없이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지만 18세 이하의 미성년과 21세의 당지의 사람들은 들어갈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오문에서는 도박을 행운박채(幸运博彩)라고 하고 도박장을 《오락장》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대형호텔에 설치하고 설비가 호화롭고 경비가 엄밀하고 관리가 현대적이다. 포경호텔 포경오락장은 포경호텔안에 설치되였는데 안에는 네칸의 오락장, 한칸의 카지노 슬롯 머신(角子机, 老虎机, 동전을 넣고 조작하여 그림이나 숫자의 정해진 짝을 맞추면 일정 액수의 돈이 나오는 도박기)가 있다. 포경호텔부근에는 여러 곳에 카지노 슬롯 머신이 있다. 오문의 도박업은 오문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당지 사람들이 이 도박장을 드나들뿐만 아니라 많은 유람객들은 오문에 와서 도박을 한번 노는것을 하나의 쾌락으로 느끼고있다. 우리팀에서도 훈춘과 심양에서 온 신혼부부들이 호기심에 끌려 놀았는데 처음에는 5, 6백원을 따는것 같더니 마지막에는 결국 잃고 나왔는데 얼마를 잃은것은 말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오감대교를 건너 감자도로 향하였다. 오감대교는 1974년 10월에 준공하였는데 총 길이가 2.5킬로메터로서 오문반도와 감자도를 이어놓는 제일 첫 대교라고 한다. 오감대교를 건너면서 동쪽으로 좀 멀리 기다란 큰 다리가 보이였는데 안내원은 그 다리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우의대교라고 하였다. 우의란 중뽀우의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우의대교는 오문반도 수당각(水塘角)과 감자도 북안부두(北安码头)를 이어놓은 두번째로 건설된 가장 긴 다리로서 길이 4,414메터, 너비 19메터, 왕복 4차도로이다. 신호천지룡등(新濠天地龙腾) 감자도에 건너와서 처음으로 오문의 초급오락기함 《신호천지》(超级娱乐旗舰《新濠天地》)로 갔다 《신호천지》는 오문 감자도(凼仔岛)의 로감련관공로(路凼连贯公路)와 로감금강대도(路凼金光大道)구역에 있다. 《신호천지》오락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반구형천막극장이 있는데 건축성본이 4천만딸라라고 한다. 여기에 들어가면 룡등(龙腾)표현이 있는데 삼차원립체영사관에서 방영하는 5D영화이다. 이 영화는 고화질의 단편영화인데 동시에 16대의 광속 30000ANS루멘의 영사기와 2만9천개의 극원 발광 2극관 조명을 집합한 고화질의 디지털영화로서 신비한 시청효과를 준다. 《룡등》은 진짜와 똑 같이 립체형상이 반구형천막에서 표현되여 관중들을 우주와 지구의 열대우림, 화산, 빙하, 심해를 실북나들다싶이 하면서 룡주를 호송하는 이야기를 엮은 영화인데 관중들로 하여금 바다세계에 들어선 감을 준다 《룡등》이야기는 처음에 룡주(龙珠)의 강대한 마술력으로 옥룡(玉龙)이 한 마리의 겸허한 작은 잉어로 변신하여 네 룡왕을 조각상으로부터 탈태시킨다. 네 룡왕은 룡주의 힘을 빌어 각자가 재간을 피워 관중을 이끌고 네 룡왕의 나라를 돌아다닌다. 마지막으로 작은 잉어가 힘이 강대한 옥룡(玉龙)으로 변신하여 네 룡왕을 진심으로 심복시킨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항상 다른 정체성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쳐 준다. 룡등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 계속)
33    동남아려행기[3] 댓글:  조회:4820  추천:0  2013-05-13
동남아려행기[3]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5-13 10:43:40 ] 클릭: [ ] 해양렬차(海洋列車) 그 다음 순서는 산에 올라가서 구경하는것인데 북문에서 산으로 올라가려면 공중삭도거나 해양렬차를 타야 했다. 우리팀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공중삭도를 탔고 어떤 사람들은 해양렬차를 탔다. 나는 공중삭도는 태산이나 북경향산공원에서 타 보았기에 그것은 타지 않기로 하고 해양렬차라는 이름에 매우 호기심이 끌렸다. 말의 뜻대로 하면 바다밑이거나 바다우에서 달리는 렬차여야 하겠는데 산으로 올라가는데 어떻게 해양렬차를 타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해양렬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고 보니 해양렬차는 턴넬로 하여 산꼭대기를 올라갔는데 쌍방향으로 운행하는 강삭철도(鋼索鐵道)로서 운행길이가 1300메터이며 세개의 바곤이 련결되였다. 한번에 200명씩 탑승하는데 운행시간은 3분밖에 안 걸렸다. 이 차를 타면 차바곤 천장에 형광판(荧光屏)으로 해양세계를 감상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거대한 문어에게 공격당하거나 해저화산폭발 등 사람을 놀래우는 자극을 받을수 있었다. 산우에 올라가니 여러 가지 기동놀이시설들이 매우 많았는데 우리팀원들은 시간상의 제한으로 하여 다 탈수는 없고 몇가지 큰것만 탔다. 거기에서 가장 짜릿하게 자극하는 것은 자유락하(极速之旅)와 롤러코스터(过山车)일것이다. 자유락하 자유락하는 먼저 천천히 62메터 (약 20층높이) 높이를 오른 다음 공중에서 몇초 정지하여 있다가 시속 65킬로메터의 속도로 급하강한다. 롤러코스터 롤러코스터는 청룡렬차 또는 레루가 8자모양처럼생겼다고 하여 88렬차라고 하는데 한어로는 过山车라고 한다. 이 차의 레루의 길이는 842메터로서 차가 동력으로 몇십메터의 높이까지 올라간 다음에 내려올 때에는 동력의 힘이 없이 위치에네르기가 운동에네르리기로 변하는 원리에 의하여 내려오는데 사람의 머리가 때로는 하늘로, 때로는 아래로, 때로는 옆으로 향하면서 자유락하의 속도로 운행는데 머리가 아래로 향하였를 때 떨어지지 않거나 머리가 옆으로 향하였을 때 뿌리워 나가지 않는 것은 구심력과 원심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이 두가지 놀이기구는 어린이, 늙은이, 녀성들, 심장병, 고혈압환자들은 리용하기 곤난하다. 롤러코스터는 내가 20여년전의 젊었을 때에 상해에서 타봤기에 그것은 타지 안기로 하고 마천탑을 타보기로 하였다. 마천탑(摩天塔) 마천탑(摩天塔)은 전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활동식 관광탑으로서 높이가 72메터인데 천천히 오르고 내리여 어지간한 사람은 다 탈수 있었다. 거기에 오르니 심수만, 천수만 그리고 향향의 크고 작은 섬들을 볼수 있어 한결 가관이였다. 흔들배 흔들배는 15메터 높이에서 쪼각달모양으로 120도로 흔들거리면서 그네를 뛰는 식으로 운동하여 어지간한 사람은 다 탈수 있었다. 해도관 해도관(海涛馆) 은 거대한 늪으로 되여 있는데 길이 152메터, 너비 122메터, 깊이 2.7메터로서 여러가지 부동한 인공해안으로 만들었으며 부동한 해양동물들의 생활에 적합하게 하였으며 바다표범, 바다사자, 돌고래, 사다새(塘鹅), 펜귄새등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인공파도는 전동파도기가 조정하여 파도기복이 1메터에 달한다. 여기에서는 바다사자와 돌고래의 표현이 유람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바다사자는 조련사가 지휘하는대로 여려가지 동작들을 하였는데 어떤 때에는 물을 뿜어 바다가에 서있는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때면 조련사가 바다자에게 구명대를 가져오라 명하고 조련사가 구명대를 입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나오면 바다사자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시킨다. 관람객들이 잘한다고 박수를 치면 자기도 앞발로 박수를 치는것이 참 멋졌다. 그리고 돌고래의 표현도 아주 멋지였다. 먹이를 뿌려주면 물에 떨어지기 전에 물 우에 솟아올라 먹이를 받아먹고 때로는 수면에서 물을 헤가르며 헤염치는것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쾌속정이 물을 가르며 달리는것 같았고 때로는 물우로 솟아올라 날아옌다. 해도관(海涛馆) 집고촌(集古村) 집고촌은 해양공원의 남출구의 동쪽에 있으며 절반 박물관식의 력사생활전람공간이다. 그것을 구경하려면 에스켈러이터(电动扶梯)를 타고 내려 가는데 이 에스켈러이터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야외 에스켈레이터라고 한다. 촌내에는 주요하게 중국고대의 각종궁실 주택이 있으며 하(夏), 상(商), 주(周)로부터 진(秦)왕조의 진렬관, 한대고촌(汉代古村), 위(魏), 진(晋), 남북조석굴(南北朝石窟), 송(宋)、 료(辽)、 금(金), 원(元)의 질렬관,명나라 정화의 보물선박(明朝郑和宝船), 청나라의 궁전과 원림이 있다. 공중삭도(空中索道) 집고촌을 다 구경하고 다시 에스켈러이터를 타고 산우에 올라와서 또다시 우리의 뻐스가 기다리는 북쪽출구로 가야 했다. 올라올 때에 해양렬차를 탔기에 내려갈 때에는 나는 공중삭도를 타고 내려왔다. 삭도의 전장 길이가 1.4킬로메터였는데 삭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심수만, 천수만과 공원아래의 전경을 내려다 볼수 있어 또 다른 기분이였다. 공중삭도 해양공원을 다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은 자못 흐뭇하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해양렬차도 타보고 세계 10대 수족관의 하나인 해양기관과 그 안에서 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관상돔(观赏圆顶), 바다사자와 돌고래의 멋진 표현 등 아세아에서 가장 크다는 해양공원을 구경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흐뭇하지 않았겠는가? 이튿날은 향항에서의 자유활동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향항의 크다하는 백화점들을 다 다니면서 많은 물건들을 샀지만 우리는 쇼핑에 대하여 그리 흥취가 없어 몇개의 백화점을 돌아보고 몇곳의 서점을 돌아보면서 향항, 오문지도와 향항, 오문관광을 소개한 책을 샀다. 서점을 돌아보니 내지의 서점과 다른 점들이라면 내지에서 보지 못했던 정치인들의 인물전기가 많았는데 어떤 책들은 공산당 령수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쓴 책들도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법륜공에 관계되는 그림과 사진을 올린 선전화를 전시하여 놓고 법륜공을 선전하고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보아 향항이 조국에 귀속되였다하지만 한나라 두가지 제도로 하여 정치분위기는 대륙과 좀 다른 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안내원이 해설하는 가운데서 그들은 모두 중국인이였기에 향항이 영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온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향항의 거리를 보면 넓은 거리가 얼마 안보이고 대부분 거리는 자동차 두대가 겨우 마주 달릴수 있을정도로 좁았으며 인행도도 매우 좁았다. 향항은 아마 땅이 귀하여 집도 빽빽하게 구새통처럼 올리 짓고 거리도 그렇게 좁게 낸것 같았다. 그리고 해빛이 쨍쨍 내리 쬐이는 32도의 무더운 날씨였지만 거리에서 양산을 들고 다니는 녀성들을 보지 못하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길 량옆은 모두 높다란 층집들이 콩크리트 숲을 이루어 해를 보려면 머리를 하늘로 곧추 쳐들고 봐야 했으므로 양산이 전혀 필요없었던것이다. 저 멀리 구룡반도가 바라보인다. 오후에는 해변가에 나가서 구룡반도를 바라보고 려객선과 화물선을 구경하기도 하고 낚시군들이 고기잡이를 하는것도 보았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32    동남아려행기[2] 댓글:  조회:4756  추천:2  2013-04-29
동남아려행기[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4-28 13:08:28 ] 클릭: [ ] 이튿날 아침식사 후 우리를 실은 뻐스는 해저터널을 지나 구룡만국제무역전시쎈터로 갔다. 무역쎈터에는 여러가지 진주보석, 각국의 시계, 디지털 전자제품, 프랑스화장품, 복장 등 많은 상품들이 진렬되여 유람객들의 마음을 끌었다. 인민페와 향항화페의 비례는 100:120였는데 인민페가 통용되였으며 현금으로도 되고 은행련합카드사의 카드(银联卡)로도 되였다. 우리팀의 내몽골에서 온 로부부는 1만 5천원짜리 보석목걸이를, 훈춘에서 온 신혼부부는 5,000원짜리 핸드빽을, 심양에서 온 신혼부부는 3,500원짜리 화장품을, 무순에서 온 50대의 중년은 2,400원짜리 디지털촬영기를 샀다. 하여튼 모두 돈을 아끼지 않고 샀는데 이 령수증를 가지면 공항을 나설때에 세금을 물려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물건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호감이 없어 그냥 한고패 쭉 돌아보고는 가이드와 같이 앉아서 이것저것을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고 필기장에 적어 넣었다. 1. 황대선묘(黄大仙廟) 그다음으로는 구룡반도의 북쪽에 있는 황대선묘(黄大仙廟)를 참배하였다. 황대선묘의 원명은 색색원(啬色园)이며 1945년에 건설되였는데 부지면적이 1만 8천평방메터인데 향항의 주요한 명승고적의 하나이며 가장 이름있는 중국식 도교사원의 하나로서 향항에서 유일하게 도교혼례를 진행하는 도교사원이다. 이 사원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있으며 매년 음력 섣달그믐날이나 초하루부터 15일까지 시민들이 모두 와서 향을 피운다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 건축구도는 오행8괘(五行八卦)의 원리에 근거하여 설계하였으며 대전의 좌측에는 화형우향정(火形盂香亭)이 건축되여 있고 정원가운에는 토형 《조불》벽조(土形《朝佛》壁照)가 건축되여 있으며 서쪽에는 금형란대(金形鸾台)가 건축되여 있으며 경당(经堂)정면에는 옥같이 맑은 늪이 있어 5행가운데의 물과 서로 어울린다. 지금 황대선묘는 향항의 정신의탁으로서 안녕, 구직, 연분, 의난병 등 문제를 가지고 모두 여기에 와서 기도한다. 황대선묘는 대륙유람객들에게는 향향의 관광명소로 되고 있다. 우리 유람객들은 도교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향불을 피우고 자기와 가정이 행복하고 모든 일이 순리롭게 되기를 비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는 정원을 돌아보며 마음에 드는 배경을 찾아 기념사진도 남기였다. 향항대황선묘입구에는 색색원이라는 원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2. 금자형광장(金紫荆广场) 우리는 부원호텔(富源酒店)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해저터널을 지나 향항도의 만자부두(湾仔码头)옆에 있는 인공섬으로 된 금자형광장(金紫荆广场)으로 왔다. 금자형광장은 향항회의전람쎈터(香港会展中心)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1997년 7월 1일 향항조국회귀를 기념으로 향항특별행정구에서 건설하였으며 중앙정부에서 금자형동상을 증정하여 광장복판에 세웠다. 금자형광장에서 금자형동조각상의 높이는 6메터이고 설계방면에서 황금색의 박태기꽃을 적갈색 원형의 화강석기반우에 놓았으며 기반의 형상은 성벽의 모양으로 설계하였으며 성벽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상징하며 장성은 조국을 상징하고 박택기꽃은 향항을 상징하며 전반 설계는 향항이 중국의 령토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향항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상징하였다. 광장동북쪽에는 향항회귀조국기념비가 있는데 높이 20메터, 너비 1.6메터로서 기석(基石), 주신(柱身), 주두(柱头) 세부분으로 조성되였다. 기념비주신정면에는 강택민국가주석이의 친필제사[香港回归祖国纪念碑]란 비명이 새겨져 있다. 기석동서 량쪽에는 각각 중문과 영문으로 된 비문 새겨져 있다. 금자형광장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향항특별행정구 구기가 나란히 나붓기고있는데 매일 아침 8시에 국기게양식을 하며 저녁 6시에 국기강하식을 한다. 매년 7월 1일 향항특별행정구성립기념일과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이면 여기에서 국기게양식을 성대히 하며 특구행정장관이 특구정부 주요 관원들을 인솔하여 참가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항공복무부대가 직승기를 타고 낮게 광장상공을 날아예고 소방선이 분수표현을 하여 전체 시민과 유람객들을 감상하게 한다. 광장은 빅토리아항을 사이두고 구룡반도를 마주하고 있어 구룡반도를 건너다 볼수 있어 거기에서 구룡반도를 배경으로사진을 찍는 유람객들도 많았다. 3. 천수만(浅水湾) 그다음 코스는 향항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해양공원인데 거기에 가는 길에 먼저 천수만(浅水湾)에 들러 천수만의 해변가 풍경을 감상하였다. 천수만은 향항도의 남쪽에 있으며 산과 바다가 린접하여 있어 초생달 모양으로 되였으며 백사장이 넓고 길며 경사도가 약하고 모래가 보드라우며 물이 맑고 옅으며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차거워 향항사람들이 피서를 하기 가장 좋은 해수욕장이며 유람객들의 아주 좋은 관광지점으로 되고있다. 천수만은 향항의 최고 주택구의 하나이며 많은 별장과 호화주택이 모두 해만의 산기슭으로부터 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다 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천수만의 해수욕장. 이렇게 산수풍경이 좋기에 천수만은 《천하제일만》 또는 《동방의 하와이》라는 좋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천수만은 경치가 좋은 천연해수욕장이기에 해수욕을 하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시간상 관계로 해수욕은 하지 않고 풍경감상을 약 30분 정도 하고 해양공원으로 향하였다. 4. 해양공원(香港海洋公园) 해양공원은 향항남구의 황죽갱(黄竹坑)에 위치하여 있다. 면적은 87만 평방메터이고 3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은 심수만(深水湾), 남쪽은 동박료해협(东博寮海峡), 서쪽은 대수만(大树湾)과 접해있고 면적이 87만 평방메터로서 아세아주에서 가장 큰 해양공원이며 1977년 1월 10일에 개업하였다고 한다. 해양공원은 록야화원(绿野花园), 해양천지(海洋天地), 집고촌(集古村), 새천당(雀鸟天堂), 기동성(机动城), 급류천지(急流天地), 수상락원(水上乐园), 아동왕국(儿童王国) 등 8개 구로 나눈다. 해양공원은 북문과 남문이 있는데 북문이 정문이였다. 정문에 들어서면 록야화원(绿野花园)이다. 록야화원에서 가장 눈에 띄우는 것이 채색기구 승천이다. 채색기구 승천 직경이 22메터되는 커다란 고무풍선에 헬륨기체를 넣어서 100메터 상공으로 올라가는데 기구에 28명이 앉을수 있는 원형 의자를 달았다. 사람들은 거기에 앉아서 향항도 남구의 아름다운 정경을 볼수 있었는데 우리 팀에서도 몇몇 젊은이들은 거기에 올라탔다. 그다음으로는 대웅묘원이였는데 1997년에 중앙정부에서 향향조국회귀를 축하하여 기념으로 참대곰 안안(安安)과 가가(佳佳)를 증송한것이라고 한다. 2007년에, 또 조국회귀 10주년 기념으로 어린 참대곰 락락(乐乐)과 영영(盈盈)을 증송하였단다. 향항 당지 사람들이나 외국 유람객들은 참대곰에 대하여 특별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전에 여러 공원에서 많이 보아왔기에 그리 호기심이 없었다. 해양기관(海洋奇观) 산 아래에서는 그래도 해양기관이 제일 인기를 끌었다. 해양기관은 원래 산 우에 있었는데 지난해(2011년 1월)에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게 확건하고 이름을 원래의 《해양관》으로부터 《해양기관(海洋奇观)》이라고 고쳤는데 세계 10대 수족관의 하나라고 한다. 물 용량이 52만립방메터, 물 깊이가 11메터이고 400가지 품종의 5000여 마리의 진귀한 어류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관내에는 길이가 2센치메터의 작은 어류로부터 길이가 3메터의 상어 그리고 갯장어, 신선어, 우럭바리 등 산호초어류들도 있으며 이 관에는 또 산호와 산호초 전람도 있어 정말 바다 밑 세계에서 유람하는것 같았다. 그리고 안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직경이 5.5메터의 관상돔(观赏圆顶)이 있어 유람객들이 물밑세계를 관상할수 있었고 너비 13메터, 높이 8메터의 스크린이 있어 관내의 어류들은 다 볼수 있었다. 해양관이 원래 산우에 있을 때에는 한 시간에 800명의 유람객을 수용하였지만 지금은 3600명을 수용한다고 한다. 확건한 다음의 수족관을 구경하였으니 우리도 운수가 좋은 셈이였다. [다음 계속]
31    동남아려행기[1] 댓글:  조회:5095  추천:4  2013-04-18
동남아려행기[1]   지난해 10월, 우리 부부는 심양국제려행사에서 조직한 동남아관광을 떠나게 되였다. 퇴직한후 처음으로 부부동반으로 떠나는 국제관광이여서 그런지 마음은 젊은부부들의 가슴처럼 한없이 부풀기만 하였다. 연길에서 기차를 타고 23일 아침 심양역에 내리니 6촌 녀동생이 자가용을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동생이 우리를 싣고 도선공항(桃仙机场)으로 가는데 밤에 진눈까비가 내려 가는길이 매우 질척거렸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어구에 이르러 보니 고속도로에 차들이 기다랗게 줄을 지어 있었다. 알고보니 지난밤 진눈까비가 내린데다가 기온이 급속히 하강되여 고속도로가 빙판으로 되여 교통이 봉페되였던것이였다. 일반도로로 비행장에 갈수밖에 없었다. 비행장에 도착해보니 우리 관광팀은 모두 20명으로 구성, 심양, 안산, 연변, 통료 등 곳에서 왔는데 조선족으로는 우리 부부뿐이였다. 우리 관광팀에는 모두 7쌍의 부부가 있었는데 우리와 통료에서 온 부부가 60대이고 기타는 모두 젊은 부부들이였다. 신혼려행을 하는 부부도 있었다. 우리를 태운 심수항공기가 9시 25분에 리륙하여 심수에 도착하였을 때는 1시 25분이였다. 몸을 바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꼬박 4시간 고정자리에 앉아있는다는것도 쉽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에 방송원이 지금 심수의 기온이 령상 30도라고 하였다. 집에서는 모두 솜옷을 입고 떠났는데 심수 보안공항에 내리니 심수의 날씨는 찌는듯 무더웠다. 숱한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에서 옷을 갈아입을 곳을 찾다가 우리는 할수없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침에 솜바지를 입고 떠났던 녀성들은 점심에 치마로 탈바꿈을 하였다. 보안공항에서 나와 우리를 태운 뻐스는 심수시내를 가로질러 황강(皇崗)세관으로 향하였다. 달리는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온 시내가 고층건물로 콩크리트숲을 이루고있었다. 원래 자그마한 어촌이였던 심수가 지금은 우리나라 개혁개방의 전초지로 된 모습을 보고 다시한번 등소평의 개혁개방로선이 락후한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전변시켰다는것을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황강세관에 도착하니 3시 10분이였다. 향항은 1997년에 이미 조국에 귀속되였다지만 한 나라 두가지제도로 한 특별행정구인것만큼 세관에서 향항입경수속을 해야 했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나와서 자그마한 강(심수하) 하나를 건너면 바로 향항특별행정구이다. 향항세관에서 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우리를 기다리고있던 향항려행사의 녀성가이드가 우리를 뜨겁게 맞이하였다. 뻐스에 오르면서 보니 뻐스문이 왼쪽에 있었다. 하여 내가 《아야! 뻐스문이 왼쪽에 있다.》고 하니 우리팀의 인솔자가 이번에 우리가 려행을 하는 지구와 나라의 교통은 모두 차가 왼쪽통행이기에 차문이 모두 왼쪽에 있으므로 앞으로 차를 탈 때에 왼쪽에서 탄다는것이였다. 심수에서 핸드폰으로 연변에다 통화를 하였는데 향항에 들어서니 핸드폰이 통화권을 벗어났기에 핸드폰을 사용하려면 통화카드를 사야 한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향항시내로 들어가면서 가이드는 향항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향항은 신계(新界), 향항도(香港島), 구룡반도(九龍半島)와 그 부속섬과 부근의 해역이 포함되며 인구는 약 7백만이고 면적은 1,102평방킬로메터이고 언어는 광동어, 학카스어 (학카스족: 서진말년부터 원조이전까지 전쟁란리를 피해 중원으로부터 남방에 이주하여 정착한 한족) 와 영어를 사용한다. 향항은 자고로 중국의 령토였으며 1842년 아편전쟁후 영국식민지였던것이 1997년 7월 1일 중국에 귀한되여 향항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여 한 나라 두가지 제도하에서 향항인이 향항을 다스리는 고도의 자치권리를 행사하는 중화인민공화국 향항특별행정구이다. 아열대해양기후에 속하는 향항은 년평균기온이 22.8도이고 봄은 따뜻하고 안개가 많은것이 특징이며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은것이 특징이다. 가을은 시원하고 맑으며 겨울은 건조하고 좀 차다. 향항은 10~12월이 유람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향항은 국제 금융중심으로서 금융정책이 고도로 개방되였으며 국제성 은행업무와 황금시장, 외화시장, 주식시장, 보험시장이 활약상을 보이는데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 대금융쎈터이다. 향항은 자유무역항으로 15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으며 지리적으로 아세아태평양지구의 중요한 길목으로 세계 각국의 화물이 관세없이 들어오고 나갈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각국의 최신 제품이 자유로이 향항시장에 들어올수 있어 세계 명품들이 이곳에 집중되고 시대적 풍조를 따를수 있으며 가격이 적당하여 《쇼핑천당》으로 불리고있다. 안내원이 향항의 개황을 소개를 하는 사이에 뻐스는 신계와 구룡반도를 지나 해저터널에 들어섰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구룡반도와 향항도를 이어놓는 이 해저터널은 빅토리아항 밑으로 지나는데 동구, 중구, 서구 세개의 턴넬이 있으며 길이가 2킬로메터 정도 된다고 하였다. 해저터널 우리를 태운 뻐스는 해저터널을 나와서 향항에서 자장 높다는 태평산에 올랐다. 태평산은 해발 554메터로서 향항도의 서북부에 있으며 줄곧 향항의 표징으로 되였으며 향항의 유람명승지의 하나이다. 태평산에 올라서니 향항의 전경을 다 내려다 볼수 있었는데 하늘을 찌르듯 한 고층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그야말로 콩크리트 숲같이 보였다. 손바닥만한 땅을 사서 구새통처럼 높다랗게 집을 지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과 집사이는 한 사람이 나들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향항은 산간도시로서 평지가 얼마 없다니 산에다 층집들을 줄줄이 가득 올리 지었는데 층집들 사이에 난 《之》자형 길을 통해 뻐스는 산꼭대기까 올라갈수 있었다. 태평산에 올라서면 가장 눈길이 오래 머무르는것이 빅토리아항구이다. 책에서만 많이 보아왔던 빅토리아항구를 직접 보게 되니 자못 흥분되였다. 빅토리아항은 아세아주에서 제일 큰 항구이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항구이며 구룡반도와 향항도사이의 바다항구이다. 이 항구는 넓고(41.88 km²) 수심(평균 깊이 12.2m)이 깊어 천연적으로 량호한 항구이다. 향항 역시 이로하여 《동방진주》로 불리고있으며 《세계3대 천연항》, 《세계 3대야경》의 아름다운 별명을 가지고있다. 빅토리아항의 이름의 유래는 영국의 빅토리아녀왕으로부터 온것이다. 이 항은 일년 사계절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다. 영국은 향항을 청정부로부터 자기들의 수중에 넣은 다음 원동의 해상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빅토리아항은 줄곧 향항의 력사와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향항의 경제와 관광업의 발전을 주도하여 왔으며 향항을 국제화 대도시로 건설하는데서의 관건적인 작용을 놀았다. 태평산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항구. 태평산에서 내려와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유람선을 타고 빅토리아항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빅토리이항 량안의 야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수풀처럼 들어선 고층건물들이 5색령롱한 네온등 불빛으로 륜곽을 이루고 그 고층건물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서로 어울려 향항도와 구룡반도로 이어진 빅토리아항의 전경을 그대로 그려냈으며 또 그 불빛이 바다물에 반사되여 황홀한 빅토리항의 야경에 관광객들은 너무나도 매료되였다. 《야! 멋있다! 야! 황홀하다!》는 감탄소리가 끊일줄 몰랐다. 빅토리항의 야경은 일본의 하코다테와 이탈리아 나폴리의 야경과 더불어 세계 3대 야경으로 불리운다고 한다. 빅토리아항의 야경 빅토리아항의 야경 빅토리아항의 야경 빅토리아항의 야경을 다 구경하니 저녁 8시 반이 되였다. 려행사에서 정해준 숙소는 바로 북각부두(北角码头)부근에 위치한 가락헌(嘉樂軒)호텔이였다. 호텔은 4성급이여서 안의 설비는 좋았다. 호텔에 들어 잊지 말하야 할것이 사진기의 전지를 충전하는것이였는데 향항의 콘센트는 영국식이여서 내지와 달랐다. 향항세관을 나설 때 콘센트전환기(插座转换器)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려행사에서 미리 준비시켰기에 떠날 때에 벌써 사가지고 왔었다. 향항의 콘센트에 콘센트전환기를 꽂은 다음 내지의 전기플러크를 꼽으면 충전할수 있었다. (타이의 콘센트가 중국것과 같았다.) [다음 계속] 주청룡특약기자  
30    조선관광(9) 댓글:  조회:7835  추천:1  2013-03-11
조선관광(9)  발전하고 있는 평양   고려성균관을 다 참관하고 우리는 다시 뻐스에 몸을 실어 평양으로 달렸다. 평양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좀 넘었다. 아직 저녁때 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그리하여 뻐스는 평양의 주요한 거리들을 돌면서 우리를 구경시키는것이였다. 평양시의 거리들은 정말 깨끗하고 새로 지은 고층건물들이 많았다. 지도원의 소개에 따르면 평양의 창전거리(仓田街)는 새로 건설한 구역으로서 올해 6월 완공됐다고 한다. 창전거리에는 고층건물이 가득 들어 섰는데 45층짜리 고층아빠트가 14동이 있으며 이 구역에 백화점, 식당, 목욕탕, 리발소 등 복무시설과 학교, 유치원 등 교육시설이 다 갖춰졌다고 한다. 사진(1): 평양시의 창전(仓田街)거리   거리를 지나면서 보면 녀성들의 복장도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것 같았다. 무릅까지 올라오는 짧은 치마에 굽높은 구두를 신고 머리단장도 새로운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는 사람, 상점에서 짐꾸러미를 들고 나오는 녀성들의 밝은 모습, 아이들의 씽씽 로라스케트를 타면서 달리는 모습도 볼수 있었다. 사진(2):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조선녀성   사진(3): 물건을 가득 사든 녀성의 밝은 모습   사진(4): 로라스케트를 타고 있는 어린이들   평양시의 주요한 거리를 다 돌면서 구경을 한 다음 지도원은 평양에 왔다가 지하철을 안 타보겠는가고 하면서 모두 내리라는것이였다. 우리는 “그것도 좋지” 하며 내리여 지하철역으로 들어 갔는데 딱 한 정거장구역만 탄다는것이였다. 다른 여러 나라에 가서 지하철을 타 봐도 여러 개 층으로 꺾어 내려가면서 에스컬레이터(电动扶梯)가 있었는데 이곳의 지하철은 여러 층으로 꺾지 않고 지하 150m를 경사지게 곧추 내려가는것이였다. 마지막 끝은 아츠랗게 보이였다. 아마 이 역은 지하철이 서로 교차가 되는 곳이 아닌 모양이였다. 사진(5):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한 정거장 구간이라도 지하철을 타 봤으니 그래도 평양에 왔다가 지하철을 타 봤다고 말 할수 있었다. 2분이니 다음 역에 도착하였는데 올라 올때에 보니 여전히 에스컬레이터가 꺾지않고 곧추 지상으로 경사를 지어 올라가는것이였다. 평양시내의 주요한 거리, 주요한 관광명소를 다 구경하고 지하철까지 타 보았으니 평양시의 관광은 다한 셈이였다. 산에 가서는 등산을 하여야 했고 련며칠 대부분의 시간은 뻐스에서 보냈으니 관광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였다. 다시 양각도 호텔로 돌아오니 사맥이 나른했다. 그리고 우리 관광팀에는 한국에서 카나다로 이민으로 가서 카나다에서 목사로 있다는 70대의로 로 부부가 연길로 친척방문을 왔다가 이번 금강산 관광으로 왔었는데 우리 팀의 조선 지도원은 가는 곳마다 그곳 사업일군들에게 소개를 하였는데 어디를 가나 반갑게 맞아주며 남측의 동포가 북으로 방문왔다고 그 분들에게는 특별히 관심을 돌리였다. 그 목사도 조선에서 태여났으며 어릴때에는 조선에서 자랐다는것이였다. 그러다가 조선전쟁이 폭발하기 직전에 남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 못 오고 남에서 자라 후에는 카나다로 갔다는것이였다. 60여 년만에 고향땅을 밟았으니 그들의 감정이야 더 어떻다 말할수 없고 우리 집체적 행사외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난다든가 하는 개별적인 행사도 많았다. 그럴때마다 조선의 동지들이 그들에게 여러모로 편리를 도모하여 주었다. 4박5일의 관광이라지만 마지막 날의 일정은 그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것이였다. 아침 7시 반에 뻐스에 앉아 순항공항으로 가는길에 지도원은 4박5일, 길지는 않지만 그 동안 중국동포들과 같이 지내면서 많은 정을 부치였는데 인차 갈라지게 되는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랠길 없다며 그도 눈물이 글썽하여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여 소리 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하며 노래을 부르는것이였다. 그러자 뻐스안은 또 다시 쓸쓸한 분위기였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내가 “안녕 평양! 잘 있으라 조선!”하고 그의 노래에 대하여 답사를 하자 모두들 같이 “안녕 평양! 잘 있으라 조선!”하며 그에 대한 석별의 인사를 하는였다. 뻐스가 순항공항에 도착하자 모두들 내려 조선의 지도원, 안내원들과 쓸쓸한 심정으로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공항에 들어섰다. 이번 조선관광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고 새로운 인식도 많이 가지여 얻은 수확도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그 아쉬운 점들이라면 하나는 금강산의 1만 2천봉, 세자하여도 다 셀수 없는 그 아름다운 절경들을 어찌 일일이 다 구경하랴만 그래도 이틀이란 시간이 짧았다는것이고 두번째로는 금수산에 가서 김일성주석의 유용를 참배하자고 하니 지금 김정일위원장의 유용을 함께 모시느라고 지금 한창 공사중이되여 못 들어 간다는것이였다. 세번째로는 조선의 지도원, 안내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중국에 돌아가서 이메일로 보내여 주자고 그들의 이메일 주소을 물었더니 국내에서는 이메일이 통할수 있지만 국외에까지는 안된다는것이였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나 혼자서만이 두고 볼수 밖에 없는것이다. 사진(6) 평양순항공항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다 마치니 조선시간으로 9시였다. 우리는 다시 고려항공기에 앉아 평을 떠나 연길로 날았다. 비행기가 순항공항에서 리륙하여 평양을 떠날 때 나는 다시 조선의 아름다운 강산을 내려다 보면서 속으로 “잘있으라 조선이여! 다시 만나자 조선이여!”하며 속으로 되뇌였다. 4박5일, 일생에서의 한 순간이라고 말할수 있지만 그래도 조상의 뼈가 묻히고 넋이 슴배인 고국땅을 밟은 그 기쁨, 조선의 아름다운 강산을 흔상한 그 즐거운 마음, 조선의 지도원과 안내원들과 맺은 혈육의 정, 조선의 력사와 문화를 더 한층 터득한 이번 조선려행은 나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것이다. [전문 끝] 2012년 10월 20일
29    조선관광(8) 댓글:  조회:5890  추천:0  2013-03-02
조선관광(8): 고려 옛 수도 개성   이로서 우리의 판문점 관광은 끝이 났다. 우리는 또 다시 뻐스에 올라 개성으로 향하였다. 나는 개성으로 향하는 뻐스에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 판문점, 비 무장지대를 바라 보면서 남북의 통일만 갈망하고 또 갈망하였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신라시대 후기의 행정단위를 송악군과 개성군으로 개편하면서 개경 또는 송도로 불렀다. 919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개성군과 송악군을 통합하여 개주라 하였으며 960년에는 개경, 995년에는 다시 개성부로 개칭했으며 1394년 조선 태조 리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이 날때에는 개성은 38선 이남에 있었으므로 한국에 속했으나 1953년 정전협정후에는 군사분계선 이북에 있음으로 조선에 귀속되였다. 1954년에는 황해북도에 귀속되였으나 1955년에 개성시와 개봉군, 판문군을 통합하여 개성직할시로 하였고 2003년에는 개성특급시로 하였다. 인구는 2000년 통계로 145만 명이라고 한다. 개성시는 고려시대 행정, 교육, 문화, 상업의 중심지로서 예로부터 고려자기(高丽瓷器)와 고려인삼이 유명하다. 시내에는 개성성터를 비롯하여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남대문, 선죽교 등 고려시대의 유물·유적이 많고 력사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개성은 조선의 남쪽 관문으로서 판문점과 련결되어 있으므로 시가지가 잘 정비되어 있고 문화관광도시로 개발되였다. 개성에서의 우리의 관광코스는 김일성동상과 선균관을 참관하는것이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먼저 김일성 동상이 있는데로 갔다. 동상은 개성시 북쪽 산언덕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장은 모두 화강암을 깔았으며 대단히 넓었으며 몇십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김일성의 동상인데 동상의 크기도 평양의 만수대에 있는 동상과 비슷하게 보였다. 우리가 갔을 때에 한쌍의 청년남녀가 결혼식을 하면서 동상앞에 와서 생화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 아래쪽 산기슭에서는 중로년들이 모여서 손풍금반주에 맞추어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날은 바로 조선로동단 창건 67돌 기념일이여서 하루 휴식을 하기에 이렇게 휴식의 한때를 즐긴다는것이였다. 사진(1): 개성 김일성동상   그다음으로는 개성 선균관을 갔는데 성균관은 개성시 부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992년(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원래는 고려의 별궁(別宮)인 대명궁이 있던 곳이였는데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으로도 사용되였다가 1089년에 국자감(고려 시대, 국가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을 이르던 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였다. 1304년(충렬왕 30)에 국자감의 이름을 국학으로 바꾸면서 대성전(大成殿)을 짓고, 1310년(충선왕 2)에 성균관으로 개명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복원하였다. 바로 현재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2): 고려성균관   총 부지면적이 약 만평방메이고 200여 칸에 달하는 20여 채의 집이 배치되여 있는데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하여 앞 구역과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뒤 구역으로 나눈다. 입구에는 천년 넘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이 가득하였다. 외삼문(外三门)문으로 들어오면서 정면에 명륜당(정면 5칸, 측면 3칸)이 있고 그 좌우에는 향실(동쪽)과 존경각(서쪽)이 위치해있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东斋)와 서재(西斋)가 각각 27칸이 있고 명륜당 뒤편 내삼문(内三门)을 지나 정면에는 공자를 제사지내던 대성전(정면 5칸, 측면 3칸)이 있고 그 앞뜰 좌우에 이름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던 동무(东庑)와 서무(西庑)가 각각 28칸씩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계성사와 10채의 부속건물들이 있으며 고려성균관건물은 고려시대 교육기관의 면모를 그래로 보존하고 있고 지금은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고려박물관으로 쓰고 있으며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과 불상들이 놓여있다. 박물관에는 그릇과 고려왕씨족보도, 세계 최초의 활자, 청동으로 만든 주전자 와 당시에 쓰던 기타 많은 그릇, 놀이감으로 만든 청동말, 청색의 자기(瓷器)주전자, 일본이 도굴해간 청자단지를 재일 동포들이 사서 다시 기증한 것 등 고려시대의 문물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사진(3): 고려박물관의 자기그릇들   어느 관광명소를 가나 기념품상점이 다 있었으며 그렇게 풍성하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공업품, 공예품, 보건품, 특산물, 사탕, 술, 담배들이 다 있었다. 성균관안에도 기념품상점이 있었는데 술, 인삼, 록용, 웅담, 령지버섯 등 여러가지 종류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조선돈과 인민페의 환률은 약 100 : 7정도였다. 하지만 조선돈이 없어도 인민페로 직접 교역이 되여 불편한 점은 없었다. 관광객들은 돌아가면 친척, 친구들에세 기념으로 선물하려고 자기들이 마음에 드는 기념품들을 샀다. [후일계속]
28    조선관광(7) 댓글:  조회:8612  추천:6  2013-02-21
조선관광(7) 판문점(板門店)   10일, 오늘의 관광은 판문점이였다. 오전 8시에 우리는 평양을 떠나 한 갈래의 고속도로를 따라 세시간 넘어 달려 개성에 도착하였는데 평양에서 개성까지의 거리는 160km였고 또 개성에서 판문점까지는 8km였다 판문점은 원래 이름도 없는 자그마한 산촌이였는데 거기에 남북을 오가는 손님들의 편리를 위해 널판자로 만든 주막과 점포가 있었으며 한자로 “板門店”이라는 간판이 있었으며 판문점이란 이름은 이렇게 지어진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의 이름도 들어 못 보던 자그마한 산촌이 조선정전협정이 이곳에서 진행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곳으로 되였으며 지금은 국내외 광광명소로도 되고 있다.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가는데 비 무장지대가 있다. 비 무장지대에 이르자 초소가 있었는데 지도원이 내려서 관광통행증을 내 보이자 우리 팀의 세대의 뻐스는 무사히 통과되였다. 판문점 군사분계선까지 가는데 이런곳을 세번 지나야 했다. 어떤사람들은 이런곳을 지날 때마다 긴장감을 느꼈지만 나는 그런 긴장감은 없었다. 비 무장지대에 들어서자 나의 뒤에 앉았던 연길에서 온 한 관광객이 나의 어깨를 다치면서 판문점이란것이 바로 38선인가고 물었다. 이에 나는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에 있고 38선과 군사분계선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하면서 38선과 지금의 군사분계선이 생기게 된 경과에 대하여 해석하여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에 쏘련군이 북으로부터 북위 38도선까지, 미군이 남으로부터 북위 38도선까지 들어가면서 조선반도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졌고 보통 그 경계를 38선이라고 하였으며 여기에는 북위 38도선이라는 지리적 개념이 포함되여 있으나 지금의 군사분계선은 1953년 정전협정을 하면서 당시 량쪽의 군대가 대치상태에 있던 곳을 경계로 하여 군사분계선을 그은 것이기에 지리적 개념이 내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금방 우리가 지나온 개성시도 지금은 북측에 속해 있지만 38선을 경계를 할 때에는 남쪽에 속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런 것을 모르고 자기는 지금까지 남북경계를 38선이라고 하는가 하였다고 하였다. 비 무장지대 안에는 조선인민군들이 있는 몇채의 단층집들이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한 집은 전문 관광객들에게 판문점과 군사분계선에 대하여 설명하는 곳이였는데 한 조선인민군 해설원이 우리에게 군사분계선과 비 무장지대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비 무장지대란 남북이 각각 군사분계선에서 2km 지역 내에서는 민간행사와 구제사업을 제외한 어떠한 적대시설이나 적대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되여 있고,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구간을 말한다고 하였다. 비 무장지대를 완충지대라고 하며 이 안에 들어와서 주의 할점들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는 벽에는 비 부장지대에 대한 도해(图解)를 가리키면서 설명을 하였다. 다음으로 다른 조선인민군 해설원이 우리를 데리고 그리 넓지 않은 아스팔트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가더니 나무들이 꽉 들어선 곳에 두채의 단층집이 있었는데 한집은 정전협정 담판회의장이고 다른 한집은 정전협정조인장이였다. 정전담판회의장으로 들어가는 길옆에는 “정전담판회의장”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기념사진 한장 남기였다. 사진(1): 정전담판회의장   정전담판회의장 안에는 담판회의 석상이 있었는데 담판은 1951년 7월부터 진행되여 2년간 끌어오다가 1953년 7월 27일에야 정전협정이 체결되였다고 한다. 담판과정에 조선인민군측에서는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지원군측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총 참모장 해방(解方), UN군 측에서는 미군 륙군중장 W.K 해리슨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담판회의장에서 나와 우리는 좀 큰 집으로 갔는데 그 집 문앞에 “정전협정조인장”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사진(2): 정전협정조인장 기념비   정전협정조인장 안은 아주 넓었으며 록색의 모포 (毛布)를 펴놓은 커다란 상이 세개 놓여 있었다. 들어가면서 첫 상우의 유리상자안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 꽂혀져 있었는데 조선인민군 대표의 자리이고 제일 안쪽 상우의 유리상자 안에는 UN국기가 꽂혀져 있었는데 UN군 측의 자리이고 가운데 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협정서를 교환하는 상이라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10시에 조선측에서는 남일대장, UN군측에서는 W.K 해리슨 중장이 정전협정서와 기타 관련 문서에 조인하고 그날 저녁 10시에 김일성원수는 평양에서, 련합군 사령관 크라크는 한국 문산에서 정전협정서에 조인하고 이튿날 지원군 총사령원 팽덕회는 개성에서 협정서에 조인하였다고 한다. 조선전쟁 “정전협정”의 맨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서명이 있다. 朝鲜人民军最高司令官 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元帅 金日成(签字) 中国人民志愿军司令员 彭德怀(签字) 联合国军总司令美国陆军上将 马克·克拉克(签字) 出席者: 朝鲜人民军与中国人民志愿军代表团首席代表 朝鲜人民军大将 南日(签字) 联合国军代表团首席代表 美国陆军中将 威廉·凯·海立胜(签字) 사진(3): 정전협정조인장   해설을 다 들은 다음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조인석에 앉아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나도 남일장군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기념사진 한장 찍었다. 사진(4): 남일대장의 조석에서   정전협정조인장에서 나와 우리는 뻐스에 앉아 군사분계선 련합안전구로 갔다. 정전후 조한 쌍방은 이곳에 직경이 약 800m의 “련합안전구”구를 앉히고 24채의 건물을 앉히였다고 한다. 북측에서는 “판문각”, “통일각”, 남측에서느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을 앉히여 각기 북과 남의 쌍방 련락기구를 설치하여 대화의 장소로 하고 있다. “련합안전구”의 군사분계선 우에는 낮다란 단층집이 7채가 가지런히 앉아 있는데 가운데 하늘색 나는 세채는 판자집이다. 이 구간의 군사분계선은 너비 30cm 높이 10cm 의 콩크리트 격리대로 되여 있다. 군사분계선의 총 길이는 248km, 1291개의 황색 패말이 있다. . 사진(5): 회담실로 들어가는 관광객들   사진(6): 군사분계선   가운데 판자집이 바로 쌍방의 회담실이다. 회담실은 대략 40m²되며 한 가운데는 긴 상이 가로 놓여 있는데 록색의 모포가 덮여 있고 상우에는 4대의 마이크가 놓여 있으며 그 상이 바로 군사분계선 우에 놓여 있다. 회담을 할 때에는 각기 이 가로 놓인 상에 마주 앉아서 담판을 진행한다고 한다. 회담을 진행할 때에는 엄숙하게 경계선을 넘지 못하지만 평시에는 이 집안에서만 마음대로 오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그날 그 집안에서 남북경계가 없이 마음대로 자리를 찾아 앉아서 해설원의 해설을 들었다. 사진(7): 회담실   나는 의식적으로 남북분계선을 건너 남쪽에 가 앉았다. 그 분계선을 건너는 순간 텔레비죤 화면에서 본 로무현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건너는 장면이 떠 올랐다. 로무현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은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여 모든 백성들이 이런 경계선이 없이 남북을 마음대로 오갈수 있도록 하려는 그의 념원념을 표달한 것이 아니겠는가고 생각되였다. 사진(8): 군사분계선을 건너는 로무현대통령   또 그곳의 규정에 의하면 북측에서 관광객이 그 안에 들어왔을 때에는 남측에서 못 들어오고 남측에서 관광객이 들어왔을 때에는 북측에서 못 들어 간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날 우리 관광팀은 남측에서 들어 오기 전에 먼저 들어가느라고 길을 재우쳤던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판문각에 올라 군사분계선과 비 무장지대를 내려다 보았다. 비 무장지대는 60년간 사람의 손이 닿지않은 곳이여서 풀과 나무숲으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곳은 각종 동물들의 서식지로 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분계선을 보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란 이 사람을 경악하게 하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22만평방키로메터의 그리 크지 않은 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여 우리민족이 이렇게 서로 래왕할수도 없는 리산가족으로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갈라져 살고 있지않는가? 1975년 유엔총회 제 30차 회의에서는 《유엔군사령부》를 해산하고 한국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데 대한 《조선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되지 못하고 한시도 시름을 놓을수 없는 전쟁위험이 존재하여 있다. 내가 언제면 이 분계선이 없어지고 남북이 통일되여 마음대로 서로 래왕하면서 혈육의정을 나눌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안내원이 인제는 갈 시간이 되였다면서 모두 내려 오라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 마음도 무거워졌고 판문각을 내려오는 발걸음도 가볍지 않았다. 사진(9): 판문각에서   [후일계속]
27    조선관광(6) 댓글:  조회:11072  추천:1  2013-02-12
조선관광(6) 다시 평양으로   모두들 호텔에 들어가서 자기의 짐들을 챙겨가지고 다시 뻐스에 올랐다. 처녀 안내원은 자기의 집은 여기 온정리에 있기에 곧 중국동포들과 갈라지게 된다면서 눈물이 글썽하여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여 소리 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하며 노래을 부르는것이였다. 그러자 뻐스안은 매우 쓸쓸한 분위기였다.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3일간 조선처녀와의 맺은 혈육의정, 곧 갈라지게 될 아쉬운 마음이 한데 뒤엉키면서 서로 서러운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뻐스가 온정리 마을에 이르자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가볍게 손을 저으며 “잘 가십시오 안녕히!” 하며 우리와 석별의 인사를 하며 내리는것이였다. 우리도 “잘 있어요, 다시만나요”하며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가지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뻐스가 금강산을 떠나 원산으로 향해 달리였는데 때로는 동해안 해변가를 따라 달리였는데 맑고 푸르른 바다가 끝없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없이 넓은 벌판을 달리기도 하였는데 대부분은 논이였다. 농사를 보면 우리 연변의 벼농사처럼 그렇게 굵다란 벼이삭들이 꽉 박아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선 농민들에게 풍작을 가져다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1): 주체농법   그리고 저 멀리 농민들의 주택이 보였다. 농민들의 주택이 내부구조는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볼 때 조선의 전통가옥으로서 모양을 보면 지붕, 벽체, 문 모양이 전부 똑 같았다. 지도원의 소개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도시든 농촌이든 국가에서 집을 지어 국가의 소유로 되고 입주자는 사용권만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조선에서는 백성들이 집을 사려고 아글타글 돈을 모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농촌에서도 지금 주택개혁을 하여 새로 짓는 집들은통일적으로 2층, 3층로 짓는가고 한다. 저 멀리 보면 그런 층집들이드믄드믄 보였다. 사진(2): 농촌마을의 전경   그리고 때로는 철길옆으로 따라가다가 철길을 넘기도 하였는데 지도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철길은 원산으로부터 속초까지 이어졌으며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2007년 5월 17일에 경의선, 동해선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동시 시행되였던 것이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2008년 12월 1일부터 남북철도운행이 중단되였다는것이다. 다년간 기차가 다니지 않아 철길을 보니 전부 적갈색으로 녹이 끼여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남북의 혈육을 이어놓고 정을 이어놓으며 경제명맥을 이어놓는 이 철도운행  중단으로 하여 두나라 인민들에게 가져다 주는 심리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 났다. 사진(3): 녹쓴 동해선 철도   뻐스는 두시간을 달려 원산에 도착하였는데 갈때에 들러 저녁을 먹던 해변가에 자리 잡은 송도려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사진(4): 원산 송도원려관   만수대(万寿台) 원산에서 점식식사를 하고 뻐스는 다시 4시간 달려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제일 먼저 만수대(万寿台)로 갔다. 만수대는 평양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김일성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만수대로 올라가면서 관광객들은 길옆에 설치한 꽃가게에서 생화 한묶음 (인민페 20원) 씩 사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동상앞에서 헌화를 하고 숙연히 머리숙여 묵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모두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사진(5): 만수대 동상앞에서   만수대 근처에는 만수대의사당, 조선혁명박물관, 천리마동상, 모란봉극장, 모란봉청년로천극장, 아동백화상점 등 주요 건축물들이 있다. 그중 천리마동상(千里馬銅像) 은 만수대 언덕에 우뚝 세워져 있는 조각상으로서 청동 조각상 높이는 14m, 길이는 16m이며 받침대 높이는 32m, 총높이는 46m이며 1961년4월 15일에 제막하였다. 청동 조각상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붉은 편지(높이 1.3m×1m)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남성 로동자와 벼단을 안은 녀성 농민이 날개를 펼친 천리마를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받침대는 화강암 2,500개를 붙여 제작되었다. 조국해방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들의 영웅적 기상을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6): 천리마동상 만경대(萬景臺) 그다음 뻐스는 우리를 싣고 만경대로 향하였다. 만경대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들이 있으며 푸른 소나무와 버드나무들이 울울창창하다. 산봉우리에는 돌로 쌓은 고대의 봉화대가 있으며 봉화대 아래의 벼랑은 대동강까지 깍아내려 산의 모든 경치들을 거울처럼 대동강에 반사되여 만가지 경치를 다 볼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만경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만경대 주봉인 만경봉 정상에는 만경루(万景楼)가 있는데 거기에 올라서면 평양시의 전경에 다 안겨온다. 만경봉 기슭에는 초가집 한채가 있는데 김일성의 증조부때부터 4대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주석도 1912년 4월 15일 바로 이 집에서 태여났으며 동년을 이집에서 보내였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중국동북으로 걸어서 구학하러 갔다고 한다. 그뒤 부친이 일제놈들에게 학살당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그는 또 걸어서 고향집으로 왔다고 한다. 김일성장군의 어머니와 동생 역시 혁명의 길에서 일본놈들의 총칼에 학살당하였다. 김일성장군은 조선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맞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다시 혁명투쟁의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 뒤 김일성장군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만주의 산천을 누비면서 일본제국주의와 피어린 투쟁을 투쟁을 벌려 드디여 1945년 광복의 그날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에 돌아와 군중대회에서 새조선의 탄생을 선고하고 그 이튿날로 고향집에 찾아와 친인들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생가울안에는 살림집, 창고, 외양간 그리고 다락이 있었으며 김일성 일가에서 사용하던 음식그릇, 농구, 가구와 김일성이 쓰던 책상 등 문물과 사진들이 진렬되여 있다. 사진(7): 김일성 생가   집주위에는 그네장, 군함암(军舰岩), 씨름장, 우물 등이 있으며 만경대 생가 기념비도 있다. 생가 부근의 언덕에는 만경대혁명사적관 있는데 거기에느 김일성 일가가 혁명활동에 종사해온 도편과 자료들이 진렬되여 있다. 사진(8): 김일성의 증조부모   사진(9): 김일성의 조부모   사진(10): 김일성과 그의 부모   만경봉 산기슭에는  조선인민군 만경대혁명학원과 만경대 유희장이 있다. 유희장에는 관성렬차, 대관람차, 관성단차, 회전비행기를 비롯한 40여종의 유희시설, 80여종의 전자오락기구들과 보트장, 활쏘기장 등이 있다. 사진(11): 만경대 유희장 개선문(凱旋門) 다음으로 개선문으로 갔다. 개선문(凱旋門)은 1982년에 평양시 모란봉의 개선문 광장에 김일성의 독립운동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개선문은 모란봉구의 모란봉대가와 개선대가가 이어지는 곳에 건축되였는데 이 문을 통하여 두 거리가 이어진다. 개선문은 파리시의 개선문이 모델이 되였는데 높이는 60m, 너비는 52.5m로, 파리에 있는 개선문보다 10m 더 높게 건축되였다. 남쪽 기둥에는 '1925'와 '1945'라는 수자가 새겨져 있는데, '1925'는 김일성이 조국 독립을 위해 고향집을 떠났다는 해인 1925년을, '1945'는 조국이 독립한 해인 1945년을 가리킨다. 개선문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1만500개의 화강석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개선문의 남북 량켠의 문미(門楣)에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각기 1절과 2절로 새겨져 있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자욱 /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 력력히 비춰주는 거룩한 자욱 /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사진(12): 개선문   중조우의탑 그다음으로 우리는 개선문을 지나 중조우의탑으로 향하였다. 60여년전, 134만명의 중화의 아들딸들이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들고 조선전장에서 피흘리며 싸웠고 14만에 달하는 지원군 장병들이 조선땅에서 희생되였다고 한다. 우의탑은 조선인민을 도와 피흘려 싸운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9년10월 25일에 평양의 명승고적인 모란봉의 북쪽기슭에 세운것이다. 건축지점과 건축조형은 1958년 2월에 조선 방문중이던 주은래총리가 김일성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선정하고 심사결정한것이라고 한다. 우의탑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일인 10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부분은 1025쪽의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한다. 우의탑의 총 부지면적은 12만평방메터이며 높이는 30메터이다. 그 주위에는 소나무, 전나무, 목란 등 1만9천그루의 화목들로 둘러싸여져있다. 사진(13): 중조우의탑   우의탑은 이로부터 한대 또 한대의 중조 두 나라 인민의 마음속에 뿌리 내렸다. 중국의 대표단들과 관광객들의 조선방문에서 우의탑의 참관과 헌화하는것은 거의 필수코스이다. 그리고 참전기념일이 되면 해마다 적어도 조선주재 중국대사관이 나서서 기념하고 중요한 해에는 고위급대표단이 나선다. 관광객들은 모두 꽃가게에서 생화를 사들고 조선전장에서 피어린 생명을 바친 수많은 지원군렬사들에 대한 경모의 심정으로 렬사비앞에 헌화를 하고 60여명이 집체적으로 세줄로 정연하게 서서 숙연히 세번 허리굽혀 절을 하였다. 중조우의탑은 두층의 기반과 탑신으로 구성되였으며 탑꼭대기에는 붉은 별이 반짝인다. 탑신의 앞에는 《우의탑》이란 글자가 새겨져있다. 탑기반의 1층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사진(14): 우의탑비문   기반 량측에는 중조우의와 중국인민지원군용사들의 씩씩한 자태와 중조친선을 형상화한 미술작품들이 부각되여 있다 그리고 기반 뒤에는 문이 있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약 100m²되는 탑중심 대청이다. 대청 중앙의 대리석탁자에는 지원군렬사들의 이름을 적은 인명부(花名冊)가 있고 벽에는 세편의 대형벽화가 있었는데 참전편, 전투편, 건설편으로 되여 있었다. 벽화에는 자기의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은 황계광과 물에 빠진 조선의 어린이를 구하다가 희생된 라성교의 빛나는 형상이 각별히 눈에 띄였다.  인명부는 열책으로 되여 있는데 총 22700명의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렬사들의 이름과 적관, 희생된 년월일이 기록되여있었던것이다. 해설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인명부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에서 1958년에 제공한 렬사명단에 의해 편찬한것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택동동지의 아들 모안영의 이름도 있었다. 나는 모안영의 이름을 보는 순간 한 나라의 주석으로서 자신의 아들마저 가렬처절한 전쟁마당에 보내였고 모택동 자신도 수천수만의 지원군 렬사부모들 가운데의 일원으로 되였다는 그의 위인이 됨을 다시 한번 새삼스레 느껴보게 되였다. 당시 모안영은 사령부의 로어번역으로, 지금 중국조선족으로서 가장 명망이 높은 조남기는 사령부의 조선어번역으로 한 숙사에서 같이 있었다. 조남기가 모택동주석을 만날 간절한 마음을 표달하자 모안영은 “전쟁이 승리한후 우리 아버지 만나러 함께 가자”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안영은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수많은 지원군 렬사들과 함께 조선땅에 묻혀져 있고 조남기 혼자 모주석 뵈러 갔다고 한다. 우의탑을 다 돌아보고 나는 중조인민의 피로 맺어진 우의와 피끓는 청춘을 이땅에 묻은 지원군렬사들에 대한 추모의 심정으로 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우의탑의 계단을 내려왔다. 우의탑을 내려와서 우리는 저녁식사하려 고려동포회관으로 향하였다. 여러 식당을 다니면서 먹었지만 아마 이 식당의 채들이 가장 풍성한것 같았다. 흑돼지 고기며, 물고기 튀김이며 하여튼 이름 모를 여러가지 채들이 많이 올랐다. 그리고 맥주며 기타 음료도 올랐는데 모두 무상이였다. 그러지만 배갈만은 없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무상으로 오른 맥주며 음료며 모두 신나게 마시면서 즐거움을 나누었지만 나와 김욱선생님 그래도 이런 채에 배갈이 좋다며 한병에 인민페로 30원 하는 평양술을 사서 마시였다. 식사가 거의 끝날무렵 조선의 처녀들이 하나씩 엇갈아 마이클를 들고 나와서 노래를 하는가 하면 몇이서 같이 나와 하기도 하였는데 인물도 예뻤거니와 목소리도 그렇게 청아하였다. 이때 나는 외금강호텔, 삼일포, 온정각 등 곳에서의 녀성복무원들의 모습을 련상하여 보면서 정말로 남남북녀라더니 그 말이 틀린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국에 가서의 인상이 보편적으로 남자들은 인물체격이 괞찬았지만 녀성들은 보편적으로 예쁘다하는 인상을 주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예쁜 얼굴에 꾀꼴새 같은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하니 관광객들도 너도 나도 나와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하여 중조인민들의 우정를 더한층 융합시켰다. 김일성광장 저녁식사후 우리는 김일성광장으로 향하였다. 김일성광장은 평양시의 중심구역 대동강변 서쪽에 위치하여 있었다. 1954년에 건설되었으며 면적은 약 7만 5,000㎡이다. 44만평방메터되는 천안문광장에 비하면 1/6에 거의 해당하지면 그래도 세계에서 16번째로 큰 광장이라고 한다. 광장은 직사각형이며 지면은 화강암으로 포장되였으며 중대한 정치문화활동, 경축대회, 공중집회, 열병식을 진행하는 장소이다. 광장서쪽의 건물은 인민대학습당인데 1982년에 개관되였으며 조선의 대표적인 복합문화시설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10동, 10층으로서 34개의 전통조선식의 청기와로 된 지붕으로 되여있으며 총건축면적은 10만 m²로서 집 높이는 64m, 너비는 151m, 길이는 190m이다. 인민대학습당은 5000천개의 좌석에 1만여명을 용납할수 있으며 3천만권의 도서가 있으며 600간의 열람실로 되여 있으며 녹음실, 학습실, 강의실 등 시청각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인민대학습당의 광장을 마주 한 건물은 경축대회, 공중집회, 열병식을 진행할 때에 주석대로 사용되고있다. 사진(15): 김일성광장과 인민대학습당   광장 남쪽에는 조선미술박물관이 있고 북쪽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이 있으며 동쪽은 대동강이고 대동강 건너편에 바로 주체사상탑이 있다. 사진(16): 주체사상탑의 야경     양각도 국제호텔(羊角島國際饭店) 김일성광장을 다 구경하고 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뻐스는 우리를 싣고 양각도 국제호텔로 향하였는데 지도원은 양각도 국제호텔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양각도 국제호텔(羊角島國際饭店)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지금 사용중에 있는 호텔로는 가장 큰 호텔이자 호화스러운 호텔인데 대동강 한가운데 있는 양각도(섬이 양뿔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양각도라고 부른다.)에 위치해 있으며 1995년에 개관했다고 한다. 호텔은 부지면적은 10만m², 총건축면적은 약 9만 m²에 47층으로 되여 있으며 현대화 설비를 갖춘 1000여개의 부동한 등급의 객실이 있고 한다. 사진(17): 양각도 국제호텔   지하에는 오문에서 관리하는 식당, 나이트클럽, 사우나, 도박장이 있다. 1층에는 수영장, 안마실, 사우나 보건중심, 볼링구장, 당구장, 카라OK실, 리발실, 미용실 등이 있다. 2층에는 600명을 용납할수 있는 연회청이 있으며 4개의 식당이 있는데 각기 조선료리, 중국료리, 서양료리 등을 한다. 그리고 회의청, 회담실, 동시통역회의청, 국제통신소(국제우전업무와 전자우편을 처리)가 있으며 다방, 상점, 화페태환처, 서점, 사진관도 있다. 중앙대청에는 수족관이 있는데 철갑상어, 도미 등 이름도 못 들어본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있었다. 47층은 130개 좌석의 원형 회전음식점으로서 음식을 먹으면서 평양시의 전경을 다 구경할수 있다. 밖에는 9000m²의 골프장과 뽀트놀이, 낙시터가 있다. 호텔에 숙소를 잡고 보니 정말 현대화한 설비였다. 그런데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인터넷이 련결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인터넷이 많이 공제되여 있는 모양이였다. 지도원의 소개에서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회전 음식점과 지하도박장이였다. 하여 호텔에 들어 행장을 풀어놓자마자 평양시의 야경을 보려고 인차 승강기를 타고 회전음식점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밤 10가 넘은지라 고객들이 얼마없고 띄염 띄염 2,3명씩 앉아서 커피나 기타 음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점은 회전하지 않았다. 복무원 처녀와 왜 회전을 하지 않는가고 물으니 손님이 이렇게 적을 때에는 회전를 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벽이 전부 유리로 되여 있기에 빙 돌아 가면서 평양시의 야경을 다 구경할수 있었는데 주체사상탑과 김일성광장이 가장 뚜렷이 알렸다. 평양시의 야경을 감상하고 다시 승강기를 타고 지하도박장으로 내려 갔다. 도박장 어구에는 보안일군들이 서 있었는데 도박장 구경을 왔다고 하니 한 사람이 나를 안내하여 도박장 안으로 안내하였다. 도박장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군데 군데 여러곳에서 도박을 노는데 도박을 노는데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는 도박을 노는 방법을 모르니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하면 돈을 따고 어떻게 하면 돈을 잃는지 몰라 구경을 한다 하여도 재미는 없었다. 그리하여 10여분 구경하고 올라와 서점으로 갔다. 서점에는 여러가지 책들이 진렬되여 있는데 평양지도와 조선관광을 소개한 책이 나의 눈에 들어 그것을 샀다. [후일계속]
26    조선관광(5) 댓글:  조회:7329  추천:0  2013-02-04
조선관광(5) 만물상구역   코스: 외금강호텔→ 금강산호텔→ 금강산온천→ 문주담과 곰바위 → 관음폭포→ 육화암→ 만상정(주차장)→ 삼선암(습경대)→ 귀면암→ 절부암 안심대→ 망장천→ 하늘문→ 천선대 → 안심대→ 후고대→ 천해관→ 망양대 사진(1): 만물상코스   이튿날 아침 뻐스는 만물상 구역으로 향하였다. 뻐스는 갈 지(之)자형으로 굽이를 돌기 시작하자 안내원은 해설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나는 또 극소형 록음기를 켰다. 안내원은 이 길이 굽이가 106개이고 온정령(해발857m)이라고 하며 온정리에서부터의 오름길이 18km 되는 큰 령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침략자들은 이 령에 길을 빼려고 백성들을 동원하였지만 산세가 가파롭고 험준하여 10년이 넘도록 길을 닦아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국해방전쟁 당시 이 온정령 너머에 상감령(지도를 보면 온정령 금방 너머는 아니고 그래도 70km는 되는 것 같았다.)이 있는데 조선인민들은 무기와 식량을 수송하기 위해 길닦이에 나서서 두달만에 이 106굽이 령길을 닦아내고 전선지원을 하였다는것이다. 조선전쟁에서 가장 치렬한 전투인 《상감령전투》가 바로 이 령 넘어에서 벌어졌단다. 이런 해설을 듣는 순간 어릴때에 보았던《상감령》영화의 영상들이 한편의 영화필림으로 나의 눈앞에서 돌아갔으며 피끓는 청춘을 이 땅에 바친 황계광, 양근사 등 영웅인물들의 형상이 주마등처럼 나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달리는 뻐스안에서 안내원은 차창밖으로 여기 저기 가리키면서 만물상구역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소개하면서 또 그에 깃든 전설도 이야기 하였다. 뻐스는 이 꼬부랑길을 106개의 굽이를 톱아 힘겹게 만상정 주자장까지 올라왔던것이다. 만물상구역은 또 한하계(寒霞溪), 만상계, 만물상으로 나눈다고 한다. 사진(2): 만물상 등산로 한하계(寒霞溪) 온정리에서 계곡을 따라 만물상 구역으로 올라가는데 길 왼쪽로는 온정천이 흐르고 있다. 이 온정천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하관음봉, 중관음봉·상관음봉의 관음련봉이 늘어서 있고 오른편에는 수정봉·문주봉 등이 있다. 온정천의 물줄기를 따라 육화암에서 온정리까지를 ‘한하계’(寒霞溪: 찬 안개가 낀 골짜기라는 뜻이라는데 무엇때문에 안개 '霧'자를 써서 '寒霧溪' 하지 않고 노을 '霞'자를 써서 '寒霞溪'라고 하는지 의문스러웠지만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라고 하는데 골 안의 폭이 넓고 환하게 트여 있어 장쾌한 계곡미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골짜기는 시시각각으로 그 모습이 변하는 계곡미와 아침안개의 산악미를 함께 느끼게 하는 곳이다. 상관음봉(1,227m)을 비로하여 련봉들이 늘어서 키돋음하고 눈꽃바위, 곰바위, 돌문 등 기암들이 자기의 모양을 자랑하는 관음련봉의 산악미는 특이하다.   문주담(文珠潭)과 곰바위 온정천 왼편에 있는 중관음봉 중턱 벼랑 우에는 앞발은 뻗디디고 입은 벌리고 목은 빼들고 아래골짜기를 내려다 보는듯한 자세가 흡사 곰과 비슷하다고 하여 곰바위로 불리우는 기암이 보인다. 곰의 형상을 닮은 바위 하나가 있어 이를 ‘곰바위’라고 부른다. 이 곰바위 아래에 수정같이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소(沼)가 하나 있는데, 구슬같이 아름답고 작은 돌멩이들이 소 밑에 깔려있다고 해서 문주담(文珠潭)이라고 한다. 사진(3): 문주담(文珠潭)   여기에는 이런 흥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비로봉에 살던 곰 한 마리가 봄을 맞아 먹을 것을 찾아 양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곰이 중관음봉 끝을 넘어서려는데 요란한 개울 물 소리가 들려 왔다. 내려다보니 문주담 맑은 물 속에 도토리가 수북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허기진 곰은 맑은 문주담물속에 있는 구슬같이 작은 돌들을 도토리로 여기고 중관음봉에서 단숨에 뛰여내렸다. 그런데 중턱의 절벽우에 떨어져 발이 바위틈에 빠졌다. 움직일수 없게 된 곰은 계속 입을 벌리고 문주담을 내려다 보다가 돌로 굳어졌다는것이다. 관음폭포(觀音瀑布) 문주담을 떠나서 문주교을 건너 계속 가면 중관음봉 골짜기 절벽에 길이 43m, 너비 4m인 관음폭포가 보인다. 갈라진 바위틈에 커다란 돌이 하나 끼어 있고 그 아래로 물이 쏟아지는 폭포의 생김새도 독특하다. 관음폭포는 마치 숨겨진 보물처럼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어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관음폭포 오른쪽 산줄기에는 부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중관음봉에 있다고 해서 중관음바위라로 부른다. 사진(4) 관음폭포 륙화암(六花岩) 관음폭포를 지나면서부터 골짜기는 구부러지고 숲은 점점 깊어지고 경사도 높아진다. 그 길을 잠시 오르면 한껏 좁아졌던 시야가 한꺼번에 탁 트이면서 지금까지 지나쳐온 골짜기며 산봉우리들을 둘러볼 수 있을 만한 편편한 바위가 나온다. 이곳에 륙화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륙화암이 아니라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 바위벽이 육화암이다. 금강산, 특히 만물상 구역의 기암들이 모두 그 모양새를 본따 명명된 것과는 달리 륙화암은 전혀 눈꽃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약 1백m에 이를 만큼 긴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그 빛깔이 유난히 희고 험난하다. 그 창백한 바위 절벽이 달빛을 받으면 횐 눈처럼 빛난다고 한다. 눈을 륙화라고 비유한 까닭은 눈의 모양이 륙각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금강산에 살면서 수많은 시와 일화를 남긴 양사언이 달밤에 이곳에서 맞은편 절벽을 보다가 절벽이 마치 횐 눈에 덮인 듯 눈부시게 희다고 해서 륙화암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말이 전한다. 관음련봉(觀音連峯) 올라가면서 골짜기 왼쪽에는 긴 담장처럼 뻗어 있는 높고 험준한 산에 련달아 뻗어있는 세 봉우리와 사람모양의 바위가 있다하여 관음보살에 비유하여 각각 상관음봉(1,132m), 중관음봉(892m), 하관음봉(458)이라 하였다. 관음련봉은 산세가 웅장하고 장중하기로 유명하다. 사진(5): 관음련봉(觀音連峰)   륙화암을 마주하여 길 오른쪽의 문주봉 중턱에는 범이 쭈크리고 앉아 내려다 보는듯한 범바위가 보인다. 여기에는 범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만물상에서 살던 범이 먹을것을 찾아 문주봉을 돌아내려오다가 사람들이 달빛어린 금강산의 절경에 감탄하여 시를 읊으며 흥겨워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되였다. 그리고 자기가 금강산에 사는 짐승으로서 저 사람처럼 금강산을 사랑해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곳에서 굳어져 버려 범바위가 되였다고 한다. 만상계(萬象界) 륙화암을 지나면 한하계는 끝나고 만상계로 접어들게 된다. 만상계에서 주로 만날수 있는 풍경은 기기묘묘한 바위와 그에 얽힌 전설들이다. 금강산을 지켜싸운 무사가 철갑투구를 눌러쓰고 모로 서있는듯한 ‘장수바위’, 세 아이들이 앉아있는 것 같은 ‘동자바위’, 쌍초대를 세워놓은듯한 ‘초대바위’, 말새끼가 고개를 쳐들고 주춤거리고 있는 모양을 한 ‘망아지바위’, 어미말이 뛰여가는것처럼 보이는 ‘말바위’ 등의 조각품과 같은 바위들이 수두룩하다. 이 모양들을 련결시켜 꾸민 전설들이 있다. 옛날 3명의 동자가 금강산에 들어와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들은 깊은 밤중에도 촛불로 어둠을 밝히고 글을 읽었는데 금강산에 살던 여러 짐승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불빛을 따라 동자들이 공부하는 곳까지 이끌려왔다. 어린 동자들이 밤을 잊고 공부에 정진하는 것을 본 짐승들은 그들을 방해할까 두려워 제각각 집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그런데 망아지를 데리고 왔던 어미 말은 성미가 급해 내처 달리면서 망아지를 재촉했지만 걸음이 더딘 망아지는 뒤로 처졌고 이들은 그대로 돌로 변했다고 한다. 동자바위, 촛대바위, 망아지바위, 말바위를 한꺼번에 엮어 만들어진 전설이다. 만상정(萬象亭) 뻐스는 40분 정도 거의 달려 만상정 주차장에 이르렀는데 해발 650m라고 한다. 주차장 바로 우에는 만상정(萬相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 정자는 내금강, 비로봉, 만물상과 온정령을 오르내리는 중간 길목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고 한다. 만물상 등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부터는 뻐스에서 내려 등산을 해야 했다. 이 일대의 산악미와 계곡미를 종합적으로 볼수 있다. 그옆에는 한번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맑은 샘물 ‘만상천’이 있다. 이 샘물을 마시고 주변경치를 보면 피로대신 새 힘이 솟는다. 만상정에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계속 따라 오르면 온정령을 넘게된다. 만상정에서 오른쪽 길을 잡아 오르면 만물상의 절경이 펼쳐진다. 만물상(萬物相) 만물상은 특정한 봉우리 아니고 온정령 북쪽 금강산의 오봉산 일대 기암군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이곳은 층암절벽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봉우리 군들로 이루여져 있다. 세상만물의 모형을 모두 한곳에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어서 만물상(萬物相)이라고 불렀다. 만물상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오봉산 천선대에서 만물상을 굽어보면 천태만상의 돌바위 만물상이 마치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는 듯 한눈에 안겨온다. 오봉산은 해발 1,264m의 5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여기에는 완만한 산세의 석가봉(釋迦峰), 굴곡이 심하고 둥근 모양의 라한봉(羅漢峯), 하늘을 떠받들 듯이 높이 솟은 천주봉(天柱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지봉(勢至峰), 흰 빛깔의 크고 작은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모여있는 천녀봉(天女峰)이 제각기 특색을 지닌 채 늘어 서 있다. 삼선암(三仙岩)과 독선암(獨仙岩) 삼선암은 봉우리에 얹힌 바위의 형상을 따온 이름이 아니라 3개의 봉우리 자체가 3명의 신선처럼 보여 붙여진 것이다. 높이 30m~75m 정도의 세바위가 서로 비슷하면서도 제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맨 앞의것은 창끝같이 날카롭고 가운데것은 좀 뭉툭하며 맨 뒤의것은 더 둔하게 생겼다. 옛날 하늘나라 4명의 신선이 자주 만물상에 내려와 장기를 두었다. 그런데 한 신선이 너무 얄밉게 훈수를 두다가 미움을 받아 건너편 봉우리로 쫓겨갔다. 세월이 흘러 세 신선은 한 곳에서 바위로 변했는데 이 세바위를 삼선암이라 하고 미움을 받고 쫓겨난 신선은 끝내 혼자 외롭게 세 신선이 장기를 두는 것을 바라보다가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것을 독선암이라고 한다.   사진(6): 삼선암   습경대(習景臺) 습경대는 우리 팀의 금강산 관광코스의 제일 마지막 지점이였다. 만물상의 뭇 봉우리들을 한눈에 전망하기 좋은 곳이 바로 삼선암 우에 있는 습경대이다. 삼선암 옆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2∼3분 올라가면 습경대인데 정선대 혹은 만물상 전망대라고도 한다. 이곳에 서면 만물상의 높고 낮은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것에서부터 멀리 펼쳐진 것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말로만 듣던 만물상의 험준한 바위 산맥을 직접 보는 순간, 인간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선계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하늘을 향해 뾰죽뾰죽 솟은 날카로운 봉우리, 어느 것 하나 매끈한 것 없이 세로로 섬세한 결을 이루고 있는 화강암 무더기들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 자연의 신비한 힘을 뿜어내고 있다. 우리 팀은 모두 이곳에 집결하였는데 어제는 미처 생각을 못하고 김욱선생님을 모시고 구룡폭포의 관폭정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오늘은 기어이 김선생님네 량주를 모시고 만물상전망대에 까지 올랐다. 우리는 정성대에서 마음껐 만물상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많은 기념사진들을 남기였다. 사진(7): 만물상전경 귀면암(鬼面岩) 만믈상의 경치를 구경하다보면 멀지않은 거리에 삼선암 정도 높이의 귀면암이 험악한 귀신 얼굴을 한 채가 우리를 마주 본다. 귀면암(鬼面岩)에는 이런 전설이 있단다. 천하를 유람하기 좋아하는 네 명의 신선이 있었다. 이들은 천하의 이름난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금강산에 이르렀다. 금강산의 경치에 감탄하면서 이리저리 다니던 신선들은 드디어 만물상에 이르러 천천히 경치를 감상하면서 천화대에 올랐는데, 마침 그곳에는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풍악을 울리면서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신선들은 선녀들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날이 저물자 선녀들은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 때 한 선녀가 신선들 앞에 무릎을 꿇더니 부탁이 있다고 했다. 선녀들이 경치 좋은 만물상에 수시로 와서 노닐고 싶지만 귀신들이 와서 훼방을 놓으니 그 귀신들이 오지 못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신선들은 만물상 계곡 입구에 바위로 커다란 귀신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귀면암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험상궂은지 그것을 만든 이후부터는 귀신들이 무서워서 만물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였고 대신에 천화대 쪽에는 선녀들이 내려와 노닐기 때문에 귀신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바위 모양을 하도록 하였다. 모두들 귀면암을 배경으로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여 가면 사진기의 샤타를 누르고 있었다. 사진(8): 정선대에서 귀면암을 배경으로   귀면암에서 동북방향으로 더 올라가면 절부암, 안심대, 망장천, 만물초, 하늘문, 천선대, 천녀화장호, 망양대 칠층암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기암괴석과 봉우리들이 즐비하게 있었지만 우리의 관광코스는 여기까지이기에 그외의것은 멀리 바라보면서 맘물상의 전경을 만끽하였다. 김욱선생님도 “어제는 구룡폭포를 보지못하여 유감이였지만 오늘은 만물상의 전경을 다 보았으니 인젠 원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매우 흡족해 하시였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만물상의 전경을 다 감상하고 오던 길을 따라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뻐스에 앉았다. 뻐스는 또 굽이를 돌면서 우리의 주숙처인 외금강 호텔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아츠랗게 내려다 보이는 것이 마치 비행기를 탄 것 같았다. 뻐스가 굽이를 돌때면 골짜기를 날아 넘는가 하였더니 운전수는 그래도 용케 운전대를 돌려 골짜기를 날지 않고 계속 제길로 다니는것이였다. 굽이를 돌때마다 우리는 조마조마게 가슴을 조이였는데 산기슭으로 내여 와서야 한도의 숨을 쉬면서 인제는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려오면서 굽이를 세여 보니 정말 106개더라고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천하절승의 금강산을 뒤로하면서 외금강호텔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금강산 관광은 끝이 난 셈이다. [후일계속]
25    조선관광(4) 댓글:  조회:7871  추천:0  2013-01-26
조선관광(4) 해금강구역   주창장에 와서 우리는 다시 뻐스를 타고 해금강으로 향하였다. 해금강은 삼일포구역과 해금강구역으로 나뉜다. 해금강으로 가려면 먼저 삼일포구역로 간다. 사진(1): 삼일포와 해금강코스   삼일포(三日浦) 사진(2): 삼일포 관광로   삼일포는 외금강호텔이 있는 온정리에서 12km 거리에 있는 큰 호수로 관동팔경[(강원도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락산사 (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경상북도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말하며,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侍中臺)를 넣기도 한다.]의 하나이다. 호수의 둘레는 8km, 깊이는 9~13m이다. 삼일포는 원래는 동해바다에 접한 만(湾)이었는데 남강에서 밀려온 흙과 모래에 만의 입구가 막혀 호수가 되였고, 그 안에 고여있던 바다물은 숫한 세월속에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민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네 화랑들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랑(南石郞), 안상랑(安祥郞)이 하루만 놀러 왔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3일을 놀고 갔다고 해서 삼일포라 한다. 또 금강산을 다녀간 시인묵객 중에서 삼일포를 찾지 않은 이 없고 시 한수 남기지 않은 이 없어 가장 많은 시를 낳은 곳이 삼일포라고 한다. 단풍관(丹楓館) 단풍관은 아름다운 삼일포를 배경으로 한 하얀 석조건물로 단풍이 붉게 타는 계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인 김정숙 녀사가 다녀갔던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식당이라고 한다. 단풍관은 절반 륙지에 있었고 절반은 호수우에 여러 개의 콩크리트기둥으로 받쳐 있어 한결 더 경관을 보이였다. 우리는 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그리 풍성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대지고기볶음, 꼬치구이, 생선구이, 감자전, 찐 옥수수 등 여러가지 채들이 올랐으며 봉황맥주도 무상이였다. 나와 김욱선생님은 “이런 채에 그래도 소주가 좋지”하며 평양소주를 한병 인민페로 15원(인민페도 통용되고 있었다.) 주고 사서 마시였다. 소주를 마시고 나니 한결 기분이 더 좋았다. 식사를 하고 단풍관을 돌아보니 2층은 호수안의 섬들과 풍경을 조망하는 전망대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기념품상점도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가보니 모두 예뿐 처녀들이 매장에 서서 아주 상냥한 태도로 전시품들을 소개하였다. 이때 나는 “남남북녀”라더니 정말 북쪽의 녀성들이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점에는 솔꽃가루, 령지버섯 등 조선의 특산품들과 약품, 그리고 여러가지 공예품를이 전시되여 있었다. 우리 부부는 상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령지버섯이 마른걸로 한주머니(300그람)에 인민페로 50원하니 그래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 두 주머니 샀다. 단풍관에서 호수를 내다보면 커다란 검은 바위가 보이는데 마치 돌고래가 물 우에 떠 있은것 같다 하여 돌고래바위라고 한다. 사진(3): 단풍관과 돌고래바위   호수 안에는 또 신선들이 춤을 추던 무대라는 무선대(舞仙臺), 네 명의 화랑이 노닐던 정자라는 사선정(四仙亭), 화랑들이 다녀간 흔적인 ‘술랑도 남석행(述郞徒 南石行)’ 이라는 붉은 빛을 발하는 글씨가 적인 돌과 매향비가 있는 단서암(丹書岩), 소나무가 우거진, 누워 있는 소 모양의 와우도(臥牛島)등 4개의 섬과 이름 없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호수주변으로 36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자태가 잔잔한 수면우에 담겨 있다고 할 만큼 호수는 맑고 깨끗하였다.     사진(4): 와우도(臥牛島)   사진(5): 사선정, 단서암, 무선대   그 다음은 해금강으로 가는데 도중에서 련화대, 봉래대, 장군대를 볼수 있다. 단풍관에서 호수가로 해서 걸어서 장군대를 가려면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걸어서 호수가를 거닐기도 하고 출렁다리를 건너기도 하면서 장군대로 올라가고 늙은이들은 뻐스에 앉아서 장군대로 갔다. 련화대(蓮花臺) 련화대에는 5개의 큰 바위가 서로 각이한 높이로 동그랗게 모여 섰는데 호수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그것이 련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바위들을 ‘련꽃바위’라고 하며 련꽃바위가 있는 전망대라는 의미에서 련화대라는 이름이 생겼다. 사진(6): 련화대   련화대는 삼일포에서 가장 이름난 전망대이다. 이곳에서는 삼일포의 아름다운 호수 풍경과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사진(7): 련화대와 그 아래의 풍경   봉래대(蓬萊臺)   이 전망대는 16세기의 이름난 시인이며 명필인 양사언(楊士彦 號 蓬萊)이 이곳에 와 공부했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봉래대이다. 밋밋한 넓적한 반석으로 되어 있는데 100여 명이 함께 삼일포의 절경을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봉래대 아래에는 양사언이 호수의 절경을 바라보며 공부했다는 ‘봉래굴’이 있다. 봉래대에서 장군대로 가는데는 또 출렁다리가 있다. 사진(8): 봉래대와 출렁다리     장군대(將軍臺) 이 전망대는 1947년 김일성주석과 안해 김정숙이 이곳에 왔다가 혁명을 끝까지 하려 맹세하며 권총으로 과녁의 목표물을 단번에 맞힌것을 기념하여 1974년 9월에 지은 루각인데 장군대 혹은 충성각이라고 한다. 장군대에서는 삼일포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주위 환경에 잘 어울린다. 사진(9): 장군대   해금강(海金剛) 장군대에서 삼일포의 전경을 다 내려다 보고 뻐스는 우리를 싣고 해금강으로 향하였다. 해금강구역은 삼일포에서 약 8㎞ 떨어진 남강을 따라 이어진다. 뻐스에서 안내원은 우리에게 해금강지역은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비무장지대로서 초소나 특별지역은 사진촬영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한참을 달리니 앞에는 초소가 있었는데 철조망으로 된 대문이 가로 막혔다. 지도원이 내려서 보초를 서는 두 병사와 뭔가를 이야기 하더니 대문을 열어주었다. 해금강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민통선지역이란다. 하루에 한 번씩 해금강관광을 하는 시간에만 열리는 특별한 지역이다. 해금강은 본래 고성군 해금강리 수원단으로부터 남쪽으로 해만물상, 립석, 칠성바위를 거쳐서 남강하구의 대봉섬에 이르는 남북 6km, 동서 2km 내 좁은 범위의 명승지를 말한다. 넓게는 외금강의 동쪽 해안 일대에 펼쳐진 명승 즉 삼일포와 남강하류에서 더 남쪽으로 영랑호, 감호, 화진포까지 그리고 북쪽으로 금란굴과 총석정 일대까지도 포함하는 남북 약 30km 구간을 말한다. 해금강에서 우리의 관람은 해만물상 구역이였다. 사진(10): 해금강 관광로   나는 해금강 도대체 얼마나 경치가 아름답길래 ‘바다의 금강’이라 하였을가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해만물상((海萬物相))은 바다에 솟은 만물의 형상을 가진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경관을 일컬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파도와 비바람의 풍화작용에 오랜 세월 시달리면서 여러가지 기기묘묘한 형상들을 만들어 내였는데, 그중에서도 마치 사공이 배 우에 우뚝 서 있는 듯한 사공바위를 비롯하여 배바위, 동자바위, 서적바위, 사자바위, 고양이바위, 잉어바위, 땅크바위, 초대바위, 얼굴바위, 칠성바위 등의 이름이 붙은 수많은 기암들을 볼 수 있었다. 사진(11): 해금강1 사진(12): 해금강2   사진(13): 해금강3   사진(14): 해금강4   사진(15); 해금강5   해금강에는 바다기슭의 흰 모래사장, 그 뒤에 둘러선 소나무 숲, 물결에 씻기운 절벽, 립석, 푸른 소나무로 덮인 섬바위, 그 우로 날아다니는 바다새 등 바다가의 특수한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안내원은 남쪽을 가리키며 《저 멀리 바위산이 닿는 끝에 건물들이 서있는것이 보이죠? 저곳이 바로 남조선 속초라는 곳입니다. 오늘같이 맑은 날씨에는 여기서 남조선이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어렴푸시 보이는 속초를 바라보며 ‘우리 중국동포들은 그래도 남북을 다 드나들면서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지만 조선인민들에게 있어서는 남조선, 한국국민들에게 있어서는 북한, 서로 부모형제, 친 혈육이 갈라져 있고 건너다 보면서도 갈래야 갈수없는 그리움의 땅으로 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오직 통일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 정말 가슴아픈 현실로 느껴지면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 났다. 해금강구경을 다 하고 우리는 온정리로 돌아왔다. 온정리에는 외금강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남쪽에 단층집들이 줄느런하게 있었는데 온정각, 면세관, 문화회관, 특산물전시관 등이 있었다. 면세관에는 술류, 담배, 건강식품, 특산물, 공예품 등 물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관광객들은 그래도 특산물에 마음이 끄려 거기에서 여러가지 조선의 특산물들을 샀다. 온정각에는 남북화해와 공동개발에 기여한 공신인 정주영의 다섯째 아들인 전 현대아산룹 정몽헌 회장을 추모하여 세운 커다란 화강암비석이 있었는데 거기엔 라고 씌여 있었다. 사진(16): 정몽헌 추모비문   사진(17): 정몽헌추모비   비석 왼쪽으로 하여 좀 뒤에 테두리가 화강암으로 된 장방형의 평토무덥이 있었으며 무덤 앞에는 자그만 하게 “유물안치소”라라고 씌여져 있었는데 거기에다 정몽헌의 일부 유물들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온정리에서의 관광을 끝내니 아직 저녁때는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호텔에 들어가 휴식하고 어떤 사람들은 호텥에서 동북쪽으로 한 1km 정도로 떨어져 있는 금강산 온천으로 모욕하려 갔다. [후일 계속]
24    조선관광(3) 댓글:  조회:8127  추천:0  2013-01-19
조선관광(3) 구룡연구역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주위를 빙 둘러보니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남쪽이 약간 틔여있었다. 호텔 남쪽으로 하여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높다란 층집으로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리산가족면회소라고 하였다. 리산가족들이 면회를 할때에는 남북의 한 혈육들이 이 면회소에서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사진설명(1): 리산가족사무소   우리는 8시에 관광뻐스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하였는데 관광안내원은 금강산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나는 슬며시 호주머니속의 휴대용 극소형 록음기를 틀어놓고 안내원의 해설을 록음하였다. 금강산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천하명산으로서 조선의 동해안 중부 태백산줄기 북부에 자리잡고있다.금강산구역은 세개 군의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는데 그 동서의너비는 40km, 남북의 길이는 60km에 달한다. 동서폭 40㎞, 남북길이 약 60㎞, 면적은 약 1,400km²이다. 금강산은 주봉인 비로봉(해발 1,639m)을 비롯하여1만 2천개의 수많은 기묘하고 아름다운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의 바위들로 이루어졌는데 1,5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10여개,1,000m이상 되는 봉우리는 100여여 개 된다. 금강산은 돌과 물, 나무들이 천만가지 재주를 부리고 재롱을 피우며 천하절승이 여기에 다 모인 것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 명산을 가장 굳고 빛나는 아름다운보석 금강석에 비유하여 그 이름을 금강산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사진설명(2): 금강산전경   금강산은 동북쪽으로 외금강·서남쪽으로 내금강·동쪽으로 해금강 지역으로 나뉘는데 우리의 코스는 외금강과 해금강이였다. 외금강은 또 구룡연구역, 만물상구역, 수정봉구역,천불동구역 온정구역 등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데 우리의 관광코스는 구룡연 구역과 만물상구역이였다. 사진설명(3): 외금강전경도   이날 우리는 먼저 구룡연구역으로 등산하였다. 장쾌한 산악미와 경쾌하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구룡폭포는 사시장철 푸르른 담(潭)과 소(沼) 등으로 이루어진 외금강을 대표하는 관광코스라고 한다.   사진설명(4): 구룡연 등산로   사진설명(5): 구룡연과 만물상구역 코스→: 온정리→ 신계사터→ 목란관→ 앙지대→ 삼록수→ 금강문→ 옥류동→ 연주담→ 비봉폭포→ 은사류→ 구룡폭포→ 상팔담. 흔히들 구룡연 코스는 그 아름다움이 녀성스럽고, 만물상 코스는 기암괴석 등으로 인한 산악미로 인해 남성스럽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구룡연 코스는 오르는 곳마다 계곡에 물이 넘쳐나고 비교적 험하지 않은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되여있다. 신계사(神溪寺) 외금강호텔에서 8km 가면 금강산 입구였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발길이 멈추는 것이 신계사(神溪寺)이다.신계사는 519년, 신라23대 법흥왕(法興王 514~540 재위) 때에 보운이 창건한 오랜 력사를 가진 금강산 4대절의 하나인데 그 후 여러 차례 파손된 것을 손질하였으며 1597년에 중건한 신계사에는 대웅보전, 만세루,극락전 등 2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난 조선전쟁시에 폭격당하고 3층 돌탑만 남은 것을 2004~2007년 사이에 다시 원 상태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진설명(6): 신계사 목란관(牡丹馆) 신계사에서 좀 올라가면 주차장이다. 우리는 뻐스에서 내려 이제부터는 등산을 하여야 했다. 안내원은 뻐스에서 내려 길을 안내하면서 금강산에 오면 두가지를 아끼라고 한다. 하나는 감탄사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 필림이란다. 산어구에서 감탄하며 사진필림을 다 쓰고나면 절승경개에 이르러 사진필림이 없어 입만 벌리고 만다는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진기는 디지털 카메라여서 그럴 근심은 없었다. 뻐스에서 내려 올리 등산을 하면서 보니 단풍이 그리 진하게 물들지 않았다. 나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 보고 단풍계절을 맞추어 왔는데 왜 단풍이 그리 들지 않았는가?”고 안내원에게 물으니 안내원이 하는 말이 “더 올라가면 다를겁니다. 금강산은 단풍이 우로부터 내리 드는데 여기는 산기슭이여서 그렇지 더 올라가면 단풍이 한창의 계절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차장에서 좀더 올라가면 목란관이다. 이 부근은 봄이 되면 화사한 목란이 활짝피여 절경을 이루기 때문에 목란꽃 이름을 따서 목란관, 목란다리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목란관은 일종의 휴게소이자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다. 이곳에는 조선음식으로 산채비빔밥과 랭면, 단 두가지의 메뉴뿐인 목란관은 하루 350그릇만 판매하므로 미리 식권을 구입해 두어야 맛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룡연코스 관광을 마친 후 내려오면서 점심식사로 하고있다.   사진설명(7): 목란관   수림대(樹林帶)와 앙지대(仰地帶) 목란관을 벗어나면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길이 시작된다. 목란관에서 약 200여m 오르면 삼림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숲이 우거진 빽빽한 소나무에 뒤덮혀 하늘이 안 보이는데 이곳은 금강산 지역에서 가장 공기가 맑다는 수림대이다. 수림대를 지나서 앙지교라고 불리는 다리에서 200m 가량 오르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평평한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를 '앙지대'라고 부른다 사방이 빽빽한 소나무에 뒤덮혀 산행을 하다 이곳에 서서 살펴보면 사방이 절벽으로 막혀있고 우로 하늘만 보인다 하여 앙지대라고 하였단다. 산진설명(8): 앙지대에서 안내원과 함께   안내원이 왼쪽에 높이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키였다. 올리다 보니 산봉우리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었다. 하늘나라의 토끼가 옥황상제에게 보름말미를 맡고 금강산에 왔는데 금강산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기한내에 돌아가지 못하고 뒤 늦게야 돌아 갔는데 옥황상제는 너무 노여워 네놈은 거북처럼 느지다고 거북딱지를 토끼의 잔등에 붙여 다시 내려 보냈는데 토끼는 여기에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굳어져 거북바위로 되였다고 한다. 사진설명(9): 거북바위를 배경으로   삼록수(參鹿水) 산삼과 록용은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최고의 약재로 불리여 왔다. 삼록수라는 샘물은 산삼과 록용이 녹아 흐르는 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존봉에서 흘러내리는 이 물은 정말 깨끗하기 이를데 없다. 올라갈 때 한번 마시면 10년 젊어지고 내려올 때 한 모금 마시면 또 10년 젊어지니 욕심 끝에 너무 마시면 도로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하여 관광객들은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이 좋은 세상에 태여나자.” 하며 우스개를 피우며 너도 나도 삼록수를 받아 마시느라고 야단법석이였다.   어머니가 없는 배속은 어떻게 들어 가랴만 금강산에 왔다가 한번 마시면 10년 젊어 보인다는 물을 왜 안마시랴 하면서 나도 한병을 다 마시였다. 마시고나니 정말 물맛 좋고 시원하였으며 한결 거쁜한감을 느꼈다. 사진설명(10): 삼록수를 마시다   금강문(金剛門) 삼록수를 지나 만경다리를 건너 좀더 올라가면 옥류동의 입구인 금강문에 이르게 된다. 금강문은 큼직큼직한 바위들이 길을 가로막은 한가운데 ‘△’자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돌계단으로 빠져 나오게 되여있다. 이 돌문은 가장 기묘하게 생겼으며 이 문을 나서면 새로운 금강산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여 금강문이라고 하였단다. 사진설명(11): 금강문   옥류동(玉流洞) 금강문에서 한굽이 꺾어들면 앞이 환히 트이면서 아름다운 옥류동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 하여 불러오는 이름이다. 옥류동 골짜기 안은 사면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에 의해 골안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수정을 녹여서 쏟아 부은듯한 푸른 늪이 바로 옥류담이며 무늬 고운 흰비단을 편듯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같이 흐르는 폭포가 옥류폭포이다. 옥류 폭포의 길이는 50여 미터, 옥류담의 면적은 600평방미터이며 물깊이는 5-6미터에 이른다. 사진설명(12): 옥류폭포와 옥류담   련주담 (連珠潭) 무지개 다리 옥류교를 지나 한참 가면 왼쪽 계곡에 아담한 두개의 늪이 련속 나타나는데 두개의 파란 구슬을 련달아 꿰매놓은듯 하다하여 련주담이라고 하였다. 련주담은 그 옛날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실수로 흘리고 간 두 알의 구슬이 인제는 못이 되여 구 슬처럼 파란 물이 고였다가는 다시 넘쳐 흐른다. 우의 작은 늪은 너비 6미터, 길이 10미터, 깊이 6미터 가량되고, 아래의 큰 늪은 너비 9미터, 길이 30미터, 깊이 9미터 가량된다. 손을 담그면 금방이라도 푸 른물이 들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것이 련주담이다. 올라오면서 보니 과연 안내원이 말이 틀림없었다 올라오면서 단풍이 점점 진하게 물들었는데 울긋불 긋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든 그 경치가 한결 더 아음다웠다. 사진설명(13): 련주담    비봉폭포(飛鳳瀑布) 련주담에서 100m정도를 더 오르다 보면 세존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높이 139m의 거대한 폭포가 보 이는데 이것이 바로 비봉폭포이다.비봉폭포는 구룡폭포, 옥영폭포, 십이폭포 등과 함께 금강산 4대 폭포 중 하나로 꼽힌다. 세존봉에서 샘솟아 벼랑을 따라 내려 오는 비봉폭포는 수량은 적으나 쏟아지는 모양이 갈래갈래 비단 실로 되어 흘러내리는 모습 같기도 하고 봉황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모습 같기도 하여 비봉폭포라고 한다. 비단필을 펼치듯 하던 폭포줄기가 나중에는 직경 20m, 깊이 5-6m 되는 봉황담으로 쏟아져 떨어 진다. 이 비봉폭포 우에는 높이 20m의 무봉폭포도 있다고 한다.   사진설명(14): 비봉폭포 은사류(銀絲流) 비봉폭포를 지나 좀 올라가면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골짜기의 마주선 두 벼랑사에에 기다란 허궁다리 가 걸려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노라면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춤추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무용교라고 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 오른편 서북쪽 방향으로 좁은 골짜기가 보이는데, 이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마치 가느다란 은실처럼 곱게 흐르는 같다고 하여 은사류라(銀絲流)고 하였다.   은사류에서 더 올라가면 두갈래의 길이 있는데 오른쪽으로는 상8담(上八潭)을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는 구룡폭포로 가는 길이다. 우리팀은 구룡폭포쪽으로 향하였다.  구룡폭포(九龍瀑布)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관폭정(觀瀑亭)이 있는데 구룡폭포를 마주하고 커다란 무대마냥 아츨 하게 높은 벼랑우에 건축되여 있었다. 모든 관광객들이 모두 이 정자에서 폭포를 건너다 본다고 하여 볼관(觀), 폭포 폭(瀑), 정자 정(亭)자를 써서 관폭정이라고 한것 같았다. 사진설명(15): 관폭정(觀瀑亭)   높이 74m, 너비 4m의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조선의 3대폭포로 꼽히 는 금강산 제일의 폭포이다.   폭포벽과 바닥의 못이 하나의 화강암괴로 되어 있으며, 옥녀봉의 아름다운 련봉을 배경으로 화강암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웅장하고 기세가 있다. 폭포 아래에는 거센 물줄기로 패여 자연 형성된 깊이 13m 정도의 구룡연이 있는데 옛날 이 못에서 금강산을 지키던 9마리의 룡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설명(16): 관폭정에서 내리 찍은 구룡폭포   관광객들은 모두 비단처럼 곧게 드리운 구룡폭포를 바라보며 너도나도 정말로 절승경개로구나 하며 서로 구룡폭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여 카메라 샤타를 찰칵찰칵 누른다. 그러다가 어느 연길에서 왔다는 중년패들이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아”하며 노래를 부르자 전체 팀원들은 너도 나도 같이 흥에 겨워 이 무대와 같은 관폭정에서 “금강산골안에는 보물도 많네/ 비로봉밑에서 산삼이 나고/ 옥류동 골안에는 백도라질세/ 아-인민의 금강산/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네”하면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폭포 우에는 바로 올라오면서 갈라진 상팔담(上八潭)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나무군총각과 선녀”의 전설이 바로 이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옛날 금강산 아래에 나무군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살림이 어려워서 날마다 금강산에서 땔감을 해 팔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깊은 산 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사슴 한 마리가 사냥군에게 쫓기어 총각이 있는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었다. 총각은 얼른 사슴을 자신의 나뭇짐 속에 숨겨 주었다. 잠시 후 사냥군이 와서 사슴의 행방을 묻자 다른 방향을 가르쳐 주어 그를 따돌리고 사슴을 살려주었다. 그러자 사슴은 “저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보아하니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신것 같은데, 이 달 보름께 상팔담으로 가보세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한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면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총각과 결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뒤 아이가 셋이 생기기 전에는 절대로 날개옷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나무군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상한 마음에 사슴이 말하던 그날 밤 상팔담으로 가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총각은 얼른 날개옷 하나를 감추고 큰 나무 뒤에 숨어있었고 시간이 흘러 선녀들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한 선녀가 자신의 날개옷을 잃고 우는 것이었다. 총각은 그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아이도 둘이 생기자 나무꾼은 이제는 사실을 말해 주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날개옷을 감춘 것이라는 얘기를 하자 선녀는 날개옷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나무군이 숨겨둔 날개옷을 보여주자 선녀는 날개옷을 입어보는 체하다가 아이들을 양팔에 하나씩 끼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사슴이 아이를 셋 낳기 전까지는 절대로 날개옷을 보여주지 말라고 한 이야기를 잊었던 것이다. 한순간에 안해와 자식을 잃고 넋이 나가 있는 나무군 앞에 어느날 옛날의 그 사슴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자 나무군은 사정 얘기를 하자 사슴은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참 안됐군요.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름달이 비추는 날밤 상팔담으로 가보면 한밤중에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올 것입니다. 날개옷을 잃어버려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제는 하늘에서 직접 선녀들이 내려오지 않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목욕을 합니다. 그 두레박이 내려왔을 때 그곳에 올라앉으십시오. 그러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슴의 말대로 나무군은 그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안해와 아이들을 만나 선녀와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나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해 나무군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금강산에 내려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상팔담 주위에는 화강암의 암추(岩錐)와 계곡이 어우러져 폭포의 절경을 더해주고 있어 금강산의 여러 승경 중에서도 가장 맑고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구룡연 등산로를 보면 관폭정에서 좀더 올라가 서쪽으로 돌아 내려오면 세존봉, 1167봉, 목란담, 합수목, 동석동으로 하여 다시 원 주차장으로 내려올수 있는데 우리의 등산로는 관폭정까지여서 올라오던 길로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우리 팀에는 연변출판사에서 퇴직한 김욱선생님(79세)네 량주가 따님의 배동으로 이번 관광길에 오르셨는데 그도 글을 쓰는 분이라 우리 둘은 그 팀에서도 특별이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관폭정에 오르고 보니 그이가 보이지 않았다. 내려 오면서 보니 그이는 관폭정을 한 200m 사이두고 너무 지쳐 못 올라 오셨던것이다. 금강산에 왔다가 금강산의 제일 폭포를 못 구경하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감스러운 일이였다. 그다음부터 나는 아무리 험한 봉일지라도 꼭 이 선생님을 모시고 기여 오르리라고 마음 먹었다. 후일 계속
23    조선관광(1) 댓글:  조회:9157  추천:0  2013-01-12
조선관광[1] 평양에 도착 주청룡   중국에서 나서 중국에서 자라 수도 북경과 여러 대 도시들을 가보고 중국의 제일 명산 태산에도 가 보았으며 조선족으로서 고국인 한국의 수도 서울, 한국의 최대의 관광명승지 제주도에도 가 보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국인 조선의 수도 평양과 세계적인 명산으로 불리는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여 어느때 꼭 기회를 타서 가 보려고 하였는데 마침 금년 7월부터 연변천우국제려행사에서 전세기편 평양-금강산 관광을 개발하였다. 하여 우리 부부는 관광의 제일 좋은 단풍계절을 택하여 10월 7일 연길공항에서 고려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는 11시에 리륙하였는데 그날 마침 날씨가 좋아 비행기에 않아 조선의 산천들을 다 구경할수 있어 내려다 보니 온통 산으로 되여 있었으며 산마다 경사도가 약한 곳은 개간지로 만든 곳이 많았으며 평안남도에 들어서면서부터 평지로 되여 논과 밭이 보였다. 비행기는 약 한시간 반 날아서 평양시간으로 오후 한시 반에 평양순항공항에 착륙하였는데 입국수속을 다 마치고 공항을 나서니 조선의 관광안내원들이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하였으며 금강산국제려행사의 3대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뻐스에 앉으면서 보니 우리 관광팀은 60명으로 구성되였다. 뻐스는 관광객들을 싣고 평양시내로 들어섰는데 우리 뻐스에는 전체 관광팀을 책임진 남성 지도원과 처녀안내원이 같이 앉았다. 지도원은 조선과 수도 평양의 개황에 대하여 약간 소개를 하였는데 나는 안내원의 소개를 하나도 빼놓을세라 노트를 꺼내여 하나하나 적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면적은 123,138 km²로, 전체 조선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토의 약 80%가 산지라고 하였다. 인구는 약 2,500만 명이라고 한다. 수도 평양의 면적은 약 1,100㎢이며 시내로는 대동강이 흘러 지나는데 강 너비는 400m라고 한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약 325만 명이였으나 2010년 행정 구역 축소에 따라 250만 명 선으로 줄었다고 한다. 순항공항에서 평양시내까지는 16km였으며 약 20분 달려 평양시내에 들어섰다. 뻐스가 시내에 들어서면서 지도원은 주체사상탑, 류경호텔, 개선문, 삼대헌장기념탑, 5.1경기장 등 주요건축물들을 소개하였다. 주체사상탑(主體思想塔) 사진설명(1): 주체사상탑   주체사상탑(主體思想塔)은 평양 시내 대동강기슭에 있는 김일성주석이 창립한 주체사장 을 상징하는 탑으로서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맞추어 1982년  4월 15일에 완공되였다고 한다. 높이는 17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라고 한다. 탑신은 150m 높이로 화강암 으로 만들어졌으며 승강기로 150미터까지 올라갈 수 있고 평양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최상부의 20m 정도에는 홰불 모양의 붉은색 봉화가 있어, 밤에는 빛이 나는 한편 불빛이 흔들거리기 때문에 마치 실제 불길과 비슷하다고 한다. 또 주체사상탑의 정면에는 분수가 있는데, 높이 170미터의 분수를 뿜어 올리고 있다고 하였다. 류경호텔(柳京大厦) 사진설명(2): 류경호텔   류경호텔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봉화거리에 위치하여 있는데 '류경(柳京)'은 '버드나무의 도시'라는 의미로 조선새대에 평양에 바드나무가 많아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평양의 옛이름의 하나이기도 하다. 류경호텔은 삼각 금자탑식의 건축물로서 경사도가 75도이고 높이는 330m이며 105층에 총 부지면적 43만㎡, 총 건축면적은 36만m², 3,000개의 객실 일곱개의 회전식당, 2000석 규모의 대 회의장과 연회장, 프레스센터(新闻中心) 등의 부대시설을 갖춘 수용인원 6,000명 규모의 대형 건축물로 설계되였는데 이미 내부장식까지 다 하였지만 개업은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한다. 3대헌장기념탑(三大憲章紀念塔) 사진설명(3):3대헌장기념탑 3대헌장기념탑의 정식명칭은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祖國統一三大憲章紀念塔)”인데 평양의 관문인 락랑구역 통일거리 입구에 있는 기념탑으로서 평양시와 개성시를 련결하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높이는 30m, 너비는 61.5m인데 너비 61.5m는 6.15 남북 공동선언을 뜻한다. 이 기념탑은 2001년 8월 14일 준공되였다. 여기서 말하는 조국통일3대헌장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1980년 10월 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결의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1993년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채택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말한다. 조각상은 한복(조선옷)을 입은 남(대한민국)과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명의 녀성이 조선반도 지도가 그려진 구를 마주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기념탑은 60kg이 넘는 화강암 2,560개를 붙여 제작되였다고 한다.   릉라도 5월1일 경기장(綾羅島 5月1日競技場) 사진설명(4): 릉라도 5.1 경기장   릉라도 5월1일 경기장(綾羅島 5月1日競技場)은 대동강 가운데 섬인 릉라도에 있는 경기장으로 1989년 8월에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해 1989년 5월 1일 완공되였다. 5.1 경기장이라는 이름은 준공식이 5월 1일 국제로동절에 진행된 점을 감안한데서 비롯되였다고 한다. 이 경기장의 지붕은 16개의 화판을 방불케 하며 경기장 면적이 2만5,000 m², 잔디면적이 8,300 m², 총 건축면적은 20만 7,000 m²로서 15만명의 관중을 용납할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목적 경기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80개의 출구가 있어 15만명이 15분이면 전부 나올수 있다고 한다. 체육장은 8층으로 되여 있으며 1,300여개의 칸이 있는데 체육훈련실, 수영장, 초음파욕실, 증기욕실, 휴식실, 체육과학연구실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뻐스를 타고 평양시내 가로 찌르면서 차창밖으로 평양시내를 내다보면서 말타고 꽃구경식으로 스쳐지나갔다. 조선관광(2) 금강산으로 가다   뻐스는 평양시내를 벗어나서 3대헌장 기념타을 지나 강원도 소재지 원산으로 향하였는데 리정표를 보니 원산200km라고 씌여 있었다. 뻐스가 원산길에 들어자 지도원은 우리 함께 노래 부르며 즐겁게 보내자고 하였는데 모두 만장일치로 박수를 쳤다. 그런데 오락장소라면 뒤구석부터 찾는 내가 지도원의 해설을 빠짐없이 필기를 하다니 지도원에게 주목되여 나를 보니 어쩌면 자기가 대학을 다닐 때의 선생님의 모습과 비슷하다며 나부터 부를것을 제의 하였다. 그러자 나를 아는 분이 나를 선생님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모두 나부터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박수를 치는것이였다. 내가 못하겠다고 하자니 처음부터 정서를 흐리우는것 같아서 못하는 노래지만 “동포여러분 형제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 얼싸안고 좋아 웃음이요 절싸 안고 좋아 눈물 일세”이렇게 부르자 지도원이 중국동포들을 끌어 않고 춤까지 추었다. 그러자 모두 같은 동포의 심정으로 너도 나도 다 같이 부르다니 결국은 합창으로 되였다. 이렇게 시작되여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하여 뻐스안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번씩은 다 불렀다. 이때 나는 뻐스안의 간단한 오락판을 통하여 우리 중국동포들은 조선, 한국을 다 다니면서 서로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는데 조선반도의 분단으로 하여 조선과 한국은 서로 리산가족을 이루고 있는 그 안타까운 심정, 언제 전체 반도가 통일되여 자유로이 래왕하면서 서로 끌어안고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무거워 났다. 달리는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밭은 얼마 보이지 않고 대부분 산들이였으며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다. 뻐스는 장장 네시간 달려 조선의 항구도시이며 강원도 소개지인 원산에 도착하였는데 오후 7시가 되였다. 우리는 원산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그리 풍성사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돼지고개 볶음 물고기튀김 김치 등 여러가지 반찬들이 올라 입맛에 당기였다. 저녁 8시에 다시 뻐스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뻐스는 동해안을 따라 달렸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져 바깥경치를 구경할 수는 없었다. 원산과 금강산의 거리는 100km였는데 두시간 달려 외금강호텔에 도착하니 저녁 10시가 되였다. 외금강호텔은 지하 1층, 지상 12층으로 1984년도에 "김정숙휴양소"로 이름지어 조선의 공무원들이 연수원으로 사용하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이후 2006년에 내부시설을 개조하면서 "외금강호텔"로 이름지어 지금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는데 시설이 매우좋았다. 사진설명(6):외금강호텔 (후일계속)
22    집안 고구려유적지를 찾아서 댓글:  조회:7755  추천:0  2012-12-07
집안 고구려유적지를 찾아서 주청룡   지난 8월 20일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에서 집안 고구려유적지 탐방을 조직하였다. 나도 이 탐방팀의 일원으로 함께 가게 되였는데 탐방팀은 회장 김현순, 부회장 권중철, 비서장 황희숙, 사학자 허성운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으로 구성되였는데 이러고 보니 우스개말로는 4명의 군관에 한명의 졸병으로 조직된 셈이였다. 8월 20일 오전 9시 반에 뻐스가 연길에서 떠나 안도, 돈화, 정우, 백산, 통화를 지나 장장 10시간을 달려 저녁 7시 반에야 집안에 도착하였다. 뻐스에서 내려 숙소를 찾느라고 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하여 승리로를 거닐고 있노라니 조양거리와 교차되는 지점에 커다란 돌에다“高句麗遺址公園”라고 새긴 글씨가 눈에 띄였다. 이것을 보는 순간 이곳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고 온 고구려수도의 옛터이였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하지만 이미 밤이 되였는데다 장장 10시간 뻐스를 탄 피로로 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먼저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부터 하여야 하였기에 고구려유적지 공원 구경은 이튿날로 하기로 하였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본지 사람들에서 알아본데 의하면 개방한 고구려 유적지로는 국내성, 환도산성. 호태왕비, 태왕릉, 장군총, 우산귀족묘지(五盔坟이라고 한다.) 등 곳이며 국내성터는 이 성 안에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시민들의 레저활동을 할수 있는 공원으로 되여 있어 원래의 면모는 찾아볼수 없지만 회손된 일부 성벽은 볼수 있다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9인승 소형뻐스를 세를 내여 고구려유적지를 탐방하였다. 국내성   사진설명(1): 고구려(국내성)유적지공원   국내성은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건립한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서 기원3년에 고구려의 제 2대 국왕 유리왕(琉璃王)이 수도를 료녕성 卒本川(오늘의 료녕성 환인현)의 흘승골성(紇升骨城)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국내성(지금의 집안시)로 이사해 와서 기원 427년에 고구려 제20대왕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에 옮길 때까지 장장 425년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였다 국내성은 압록강과 통구하가 합류하는 통구분지의 서부일대로 북쪽(1km)에 우산(禹山), 동쪽(6km)에 용산(龍山), 그리고 통구하를 건너 서쪽(1,5km)에 칠성산(七星山)에 있어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천연 요새이다. 오늘날 국내성내의 고구려 건축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사라져 버렸고.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시민들의 레저활동을 할수 있는 공원으로 되여 있기에 고구려 시대의 성안 시설물 포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성안의 서북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주추돌과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나온것으로 보아 당시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말하여 주고 현존의 많이 회손된 성벽들의 흔적을 보아 국내성의 대략적인 규모를 추측할수 있다. 국내성은 방형이지만 각 변의 길이는 서로 다르다고 한다. 1980년에 조사, 측정된데 의하면 국내성은 동벽이 555m, 서벽이 665m, 남벽은 750m, 북벽은 715m로서 총 길이가 2,685m인 방형으로 된 성이다. 원래는 성벽의 높이가 5 ~ 6m, 밑부분의 너비가 10m, 성안벽 높이가 3~5m이다. 성문은 총 6개였는데 동쪽은 집문문(輯文門), 서쪽은 안무문(安武門), 남쪽은 금강문(襟江門)이였다고 한다. 국내성은 우로부터 가로로 선을 그어 성의 내부를 3구역으로 구분하였으며 궁전지역은 방어를 위하여 궁성의 제일 안쪽, 북벽에 붙여 지었고 한다. 위급한 경우에는 우산으로 올라가거나 환도 산성으로 쉽게 대피할수 있게 한것이다. 그 다음에는 공공건물과 관청구역이 있고, 마지막 남벽에 가까운 곳에는 일반인들의 거주지역과 시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국내성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이 일정하지 않으나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서벽의 남쪽 부분은 높이가 3∼4m가 되고 북벽은 2m정도이나 서쪽으로 갈수록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사진설명(2): 국내성 성벽   국내성은 2001년 6월 25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국내성은 지금은 공원으로 되여 나무숲이 우거지고 각종 화초들이 어여쁨을 자랑하고 각종 운동기재들과 문화오락시설들이 있어 시민들의 레저활동공간으로 되고 있어 옛날의 그 모습을 회손된 성벽외에는 찾아 볼수는 없지만 국내성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옛날에는 나라지간의 싸움이 많았으므로 도읍을 앉힐 때에 담벽을 튼튼히 높이 쌓는것으로서 적의 침입을 방지하였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사진설명(3): 고구려유적지 공원    환도산성 사진설명(4): 환도산성 문물보호비   환도산성은 국내성 북쪽 2.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서로 보완(相輔相成) 할수 있도록 건축한것이며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환두산성은 전시 때 사용하는 산성이라고 한다. 위치와 지형으로 보아 환도산성은 방위성(防衛城)으로서 가장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천험의 요새로 되였다. 동서북 3면의 성벽은 평면으로 보면 둥근 릉선 우에 쌓았는데 성밖은 깎아 내린듯한 절벽이고 성안은 비교적 넓은 경사지로 되여있다. 남쪽은 통구하(通溝河)가 흐르고 지세가 비교적 낮지만 밖에서 성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는 산성이다. 환도산성은 국내성과 압록강까지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동태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공격로는 남문 한 곳 이다. 성벽들은 대부분 무너져 내려 않았지만 동쪽, 북쪽서단, 서쪽 북단이 비교적 보존이 잘 되여 검푸른 이끼가 화강암들 틈새에 끼여 있는 5~6m 높이의 성벽을 볼수있다. 성의 규모는 동벽이 1,716m, 서벽이 2,440m, 남벽이 1,786m, 북벽이 1,009m로서 총길이가 6,951m에 달한다. 성문은 모두 5 개인데 동과 북에 각각 2개씩, 정문 겸 남문은 1개 그리고 서벽에는 워낙 지세가 험해서인지 문이 없었다고 한다. 성안에는 샘물이 두곳이 있는데 한곳은 서북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동쪽 산기슭에 있는데 다 통구하로 흘러 들어간다. 성안에는 건축터 3개, 저수지 1개(저수지는 전망대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약간한 흔적으로 보인다.)가 있는데 3개의 건축터 가운데 하나는 동쪽 산기슭에 있는 궁전터(남북이 92m, 동서가 62m 인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이고, 하나는 점장대 [(点将台)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城), 보(堡), 둔(屯), 수(戍) 따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 터이며, 하나는 전망대(瞭望台)이다. 전망대는 남문 안의 200m되는 곳에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12m이고 정단부분(顶部)는 매변의 길이가 약 6m되는 평대(平台)로 되여있었다. 사진설명(5): 환도산성 전망대   전망대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집안시(국내성)와 앞록강이 다 내려다 보이였는데 당시에는 적정을 아주 똑똑히 관찰할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성안에 고분(古墳)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37기(基) 만이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산성아래 골짜기와 산기슭에는 수많은 돌로 쌓은 고분들이 군데군데 많이 있었다. 사진설명(6): 산성아래 고분군(古墳群)   1982년 2월 23일에 환도산성을 전국 중점보호단위로 비준하였다. 우리는 환도산성을 돌아보면서 정말로 삼면이 깍아지르듯한 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은 통구하가 있어 정말로 군사상에서 천연요새로 되며 평시에는 국내성에서 생활을 하다가 위급한 시기에는 이 산성에 올라 와서 적들과 싸웠구나 하는 생을 갖게 되였으며 옛 무덤들을 돌아보면서 옛날 귀족들은 죽은 다음의 무덤에 대하여 아주 중히 여겼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그리고 그때의 궁전은 다 허물어지고 지금은 밭으로 변하였지만 점장대, 전망대 같은것들은 기본상 완연한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우산귀족묘지 사진설명(7): 5회분 5호묘 문물보호비   우산귀족묘지(禹山貴族墓地)는 집안역(集安站) 북측에 다섯 개의 높고 큰 봉토석실묘가 동서로 배열되여 있다. 본지 사람들은 큰 봉토분 다섯개가 동서방향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마치 투구 (예전에, 군인이 전쟁 때 갑옷과 함께 갖추어 쓰던, 쇠로 만든 모자.)같다 하여 '투구 회'자를 붙여 5회분(五盔墳)이라고 한다. 그 중 다섯번째 묘가 바로 5호묘(五號墓)이다. 5호묘는 이 일대의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다섯 무덤중의 하나이며, 5회분 가운데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5호묘는 4호묘와 정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일명 '쌍둥이묘'라고도 한다. 5호묘는 1945년 이전 일본인 학자에 의한 1차 조사와 1962년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에 의한 전면 발굴 및 조사가 있었는데 집안의 20여 기의 고분 벽화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개방 되였다. 무덤은 널길[(羨道) 고분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과 묘실[(墓室) 옛 무덤 속에 관이 들어 있는 네모형의 방. 유해(遺骸)와 함께 부장품도 들어 있으며 무덤 안에 길을 내어 밖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으로 묘실의 방향은 동남향이다. 널길은 남북길이 3.56m, 동서너비 4.37m의 장방향이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94m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은 잘 다듬은 화강암제 판석으로 쌓았다. 널방 천장구조는 크기가 다른 삼각석을 겹으로 쌓아 올린 2단의 삼각굄 구조이다. 묘실에 들어서 계단을 세 걸음만 내려가면 시원함이 느껴지고, 벽, 천장이 모두 습기 때문에 물이 배어 있었으며 벽화에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부에는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있는데 피장자(被葬者)를 사이에 두고 부인과 첩의 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묘실에 들어서자 관광안내원이 손전지를 비추어 가면서 벽화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나는 극소형의 유대용 록음기를 틑어놓고 안내원의 해설을 전부 록음하였다. 벽화는 석면에 직접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널길의 좌우벽에는 묘실을 지키는 문지기 힘장수를 그렸다. 묘실 네 벽의 사신은 모두 오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였다. 동쪽 벽의 청룡[(靑龍) 四 神 의 하나로 동쪽 방위를 맡은 태세신(太歲神)을 상징하는 짐승. 룡 모양으로 무덤속과 관의 왼쪽에 그렸다.]과 서쪽 벽의 백호[(白虎) 서쪽 방위의 金 기운을 맡은 太白神을 상징하는 짐승]는 널방 입구를 향하여 덮쳐내리며 포효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였고 남쪽 벽의 한쌍의 주작[(朱雀) 남쪽 방위를 지키는 신령으로 여겨진 짐승. 붉은 봉황으로 형상화하였다.]은 커다란 련화좌(련꽃 모양으로 만든 불상의 자리) 우에서 막 날아오르려는 자세로 묘사되었다. 북쪽 벽의 현무[(玄武) 북쪽 방위의 물 기운을 맡은 태음신을 상징하는 상상의 짐승.]는 서편을 향하여 우뚝 서 있으며 몸이 얽힌 상태에서 머리를 틀어 서로 마주보는 거북과 뱀의 입에서는 불꽃이 뿜어나오고 있다. 사신이 표현된 공간배경은 인동무늬, 불꽃무늬, 연꽃무늬가 들어 있는 사방연속무늬로 장식되였다. 묘실 네벽 모서리는 우로 치솟는 자세의 룡면인신(龍面人身)과 괴수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우로 젖힌 룡이 만나면서 이루는 기둥형태의 그림으로 장식되였다. 묘실 천장부는 주로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신앙과 관계된 표현들로 채워졌다. 굄받침에는 교룡무늬(交龍紋)와 릉형(菱形)무늬가 이어지고 있다. 3각굄 제1단의 각 삼각석 밑면에는 활짝 핀 련꽃무늬를, 옆면에는 각기 해와 달을 받쳐들고 있는 복희녀와형 일월신(伏羲女媧形日月神), 하늘세계의 신선들, 상서로운 동물 등을 묘사했다. 굄석 동북면에는 일월신을, 서북면에는 면류관을 쓴 채 룡을 타고 하늘을 나는 천인(天人)과 깃발이 달린 창을 든 채 기린(麒麟)을 타고 그뒤를 따르는 천인을, 서남면에는 수레바퀴를 다루는 제륜신(製輪神)과 절구질을 하는 천인(賤人), 씨뿌리는 천인(賤人)을 묘사했으며 동남면에는 신농(神農)으로 여겨지는 소머리에 사람몸을 한 천인(賤人)과 춤을 추는 천인(賤人)을 표현했다. 3각굄 제2단 각 삼각석 밑면에는 힘있게 꿈틀거리는 룡을 그렸고, 옆면에는 룡을 탄 채 비파, 거문고, 피리, 장고 등의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기악천(伎樂天)과 해·달·별자리들을 표현했다. 천장석에는 청룡과 백호가 서로 감기고 얽힌 채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그렸다. 벽화 중의 상서동물과 일부 짐승머리 천인의 눈은 본래 청옥(靑玉)과 같은 푸른 보석류로 상감하고 벽과 천장굄부 곳곳에 금빛 꽃장식을 했으나 현재는 소머리 천인의 오른쪽 눈에 상감된 록송석(綠松石)과 금빛 꽃장식의 흔적만 남아 있다. 5회분 5호묘는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사진설명(8): 5호묘실의 벽화 (복희녀와)   우리는 이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풍부한 문화와 생활을 상상할 수 있었으며 묘실안이 그렇게도 습하여 천정과 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있었지만 1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그림들이 선명하게 나나타나는 것은 그때의 벽화기술이 얼마나 높았게는가하는 것을 알수 있었다. 호태왕비(好太王碑) 호태왕비는 집안시구역에서 동북쪽 4km지점 우산(禹山)기슭 통구(通沟)평원에 자리 잡고있는데 4면이 유리벽으로 된 사각형 기와집안에 장중히 세워 있었다. 비는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여 있으며 비의 모양은 불규칙한 장방형 기둥 모양으로 되어 있고 높이는 6.39m, 면의 너비는 1.34 ~ 2.00m이고, 측면은 1.35m~1.46m 이며 무게는 약 37톤이나 된다고 한다. 이 비는 고구려 제 19대 왕 광개토왕이 사후 2년 뒤에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비로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하였는데 광개토왕비라고도 하며 “동방제1 비(东方第一碑)로 불리운다. 사진설명(9): 호태왕비   비의 4면에는 예서체(隶书体)로 된 44행 1775자에 달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여 있는데 서두에는 서문격인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건국설화,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 대왕까지의 세계(世系)와 략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고, 그 다음은 신라 내물왕을 도와 왜구를 격퇴하는 등 대왕의 령토 확장에 관한 주요 내용이 년도별로 새겨져 있으며, 국경 지대의 통치권 확인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끝으로 대왕의 릉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비는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보하였다. 우리는 이 비를 보면서 당시의 그 생산력수준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37t이나 되는 돌을 운반하여 오고 세웠는가 하는것은 수수께기로 남아 있었다. 태왕릉(太王陵) 호태왕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는데 고구려 제 19대왕 호태왕의 릉묘이다. 호태왕은 기원391년,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사망하였으며 즉위 22년동안 고구려력사에서 전례없던 발전을 가져왔으며 강대한 경제와 군사실력으로 동정서벌하면서 고구려의 령토를 확장하였다. 릉묘는 기원 391년에 건축되였으며 현존하고 있는 고구려왕릉가운데서 유일하게 건축년대가 똑똑히 알려져 있는 왕릉이다. 1984년 집안시 박물관에서 왕릉의 환경을 청리 할 때에 출토된 벽돌과 기와에 새겨진 문자로부터 호태왕의 릉묘라는 것을 단정하였다고 한다. 왕릉은 고구려의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서 방형(方形)계단식 석실묘(石室墓 돌로 널방을 만들고, 널길을 갖춘 고대의 무덤)로 되여 있으며 묘실 제 8급 계단에는 묘실치옥형 석곽 (墓室置屋形石椁)이 있으며 안에는 두구의 석관상(石棺床)이 있고 묘성(墓城)에는 조약돌이 넓게 깔려 있으며 동쪽에는 대형의 제단이 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6m이며, 높이 약 14.8m이며 태왕릉이라는 명칭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벽돌에 새겨진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에서 따 온것이라고 한다. 사진설명(10): 태왕릉   장군총(將軍塚) 사진설명(11): 장군총 문물보호비   장수왕릉은 호태왕비에서 동북쪽으로 약 2km 가량 떨어져있는 룡산(龙山)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안에는 고구려 제 20대왕 장수왕의 돌로 쌓은 무덤이 있는데 장군분(將軍坟)혹은 장군총(將軍塚)이라고도 하며 이집트의 금자탑과 비슷하다고 하여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리우고 있다. 무덤은 22 층의 화강암 장대석(長臺石 계단의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이는 네모지고 긴 돌. )으로 일곱계단의 금자탑모양으로 방형석실묘(方形石室墓)를 쌓았다. 제4계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돌방[石室]을 설치했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3.1m, 밑변 한 변의 길이는 31.58m, 밑면적 997㎡. 묘꼭대기의 면적은 27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고 한다. 무덤축조에 쓰인 석재의 부피는 총 6,000㎥에 이며 무덤의 기초부는 지면을 깊이 5m가량 파내고 자연석을 다져넣은 후, 그 우에 큰돌을 깔았는데 제1층 기단부의 바깥으로 4m가량 나오게 하여 무덤돌이 내리누르는 힘에 견딜 수 있게 했다. 무덤의 제1층은 4단으로, 2~7층은 모두 3단으로 장대석을 쌓았다. 이중 제1단에 쓰인 장대석 중 큰것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0m 무게는 32톤 좌우라고 한다. 천장돌의 넓이는 약 60㎡, 무게는 50t가량이다. 묘실은 다섯번째 계단의 중간에 있으며 안에는 두구의 석관상(石棺床)이 있으며 제1층의 각면에는 무덤이 빗물이나 기타 외부압력에 인하여 밀려나거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5m가량의 대형 석재로 세개씩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지탱하게 했는데,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사진설명(12): 장군총 앞에서의 탐방팀원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묘실 내의 귀중한 문물들이 잃어졌다고 한다. 무덤둘레에는 잔자갈을 깔고 그 바깥에 돌담을 둘러 묘역을 구분했다. 돌담은 모두 무너져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묘역의 북편 50m 지점에는 동서로 나란히 5기의 배총(陪塚. 한 무덤 옆에 딸려 있는 조그마한 무덤)이 마련되였으나 현재는 1개의 후궁묘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장군총은 1961년 3월 4일에 국무원에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다. 우리는 장군총을 돌아보면서 그 건축구조가 이집트의 금자탑과 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정말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리우기에 손생이 없구나하는 생각과 당시의 생산력수준으로 어떻게 이런 구조를 설계하고 그 많은 커다란 돌들을 특히는 50톤이나 되는 천장돌을 어디에서 어떻게 운반하여 쌓았는가하는 것은 호태왕비와 함께 수수께기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상 고구려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를 더욱 깊이 료해를 하였으며 또 지금 풀수 없는 적지 않은 수수께기를 남긴채 고구려유적지 력사탐방을 마치고 시내로 내려와서 압록강반에서 조선 만포시를 바라보면서 고구려유적지에 대한 탐방소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차로 귀로에 올랐다. 사진설명(13): 앞록강변에서 2012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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