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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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천불지산 지명은 천불붙이 댓글:  조회:6698  추천:9  2015-07-19
사학자 허성운선생의 요구에 의해 그의 연변지명과 방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천불지산 지명은 천불붙이   원래 연변의 산 강 그리고 마을 지명들은 순수한 고유어로 다양하게 불리여 왔다. 그런데 지명이 지 금처럼3∼4자의 한자어로 고착 되여 버린 것은 조선말과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많은 이름 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천불지산 동쪽 삼합진 북쪽에 자리 잡은 증봉산을 덴노후지산 (天皇富士山)이 라고 외곡 되여 불리여 왔고 천불지산 서남쪽에 위치한 큰 쓰레산 작은 쓰레산 지명 도 원래 함경도 방언 쓰레 (쓰레 라는 말은 빗물 따위에 쓸리어 나가 경사가 진 비탈을 가리키는 말이 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난 시기 연변의 많은 잡지 신문들에서는 큰 쓰레산을 한자어 표 기에 따라 그 지명을 공사령 孔石列 혹은 쿵스레 昆石列라고 잘못 적어 왔었다. 천불지산 지명도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오래 전부터 천불지산을 천 불붙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에서 천불은 스스로 일어나는 산불을 말하고 천불붙이는 산간 지대에서 천불로 하여 풀과 나무가 불살라진 자리에 밭을 일구는 땅을 뜻한다. 일찍 일제 식민지 시대에 고유 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 (天佛指山)이라는 이름이 만들어 지여 옛 간도지도에 天佛指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룡정현지명지 해석에 따르면 하늘 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 왔다기에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고 적고 있다. 천불지산이 국가급자연보호구로 선정되고 룡정시 천불지산송이문화관광절을 펼쳐가 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국내외 각종 신문 방송 언론매체들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 못된 지명 풀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확대 재해석하고 있다. 일부 학자와 문인들은 이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억지로 꾸며가며 천불붙이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왜곡하고 있다 . 이 런 현실 속에서 원래의 천불붙이 지명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여 가고 있다. 이는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땅을 개척해온 선조들의 후손으로서는 너무나도 부끄 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명은 사회문화적인 존재다. 지명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백여 년 세월을 훨씬 뛰여 넘어 뼈아픈 역사가 묻혀있는 연변. 그리고 그 땅 우에 아로새겨져 있는 지명들을 이제 하나 둘 우리 역사에 올바르게 기록해가야 한다. 천불지산 지명도 그 동안 연변 각 현시 지명지 (地名志)와 연변대학 교수들의 논문과 자료에서 적지 않게 언급 되여 왔다. 하지만 이런 책과 논문들 에서는 모두가 한자의 뜻에만 몰입하여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되풀이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어 아 직도 천불지산 지명에 대한 조사 연구는 미흡한 점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천불지산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계기로 이름이 지어진 것인지 기타 지역 지명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당지에 살던 토박이 노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오늘 날 와서 이 에 대한 조사사업은 시급히 이루어지어야 마땅한 것이다. 일본어에서는 밭을 하다게畑라 적고 불(火)와 밭(田)로 이루어 졌는데 화전은 오래전부터 동북 아세 아 지역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나타고 있다. 조선반도에서는 화전의 시초를 북방변경에서 생활하 고 있던 재가승들이(在家僧) 산간벽지에 은거하여 화전경작을 한데서 찾는다는 주장이 있다. 함경도 에는 심산의 원시림을 불태우고 개간하여 만든 화전(火田)을 이용하는 이른바 화전농법이 다른 어느 도에 비해서도 가장 많은 편이다. 1928년의 화전민을 지역분포별로 볼 때 북부지방이 80.1만 중부지 방이37.5만 남부지방이 6.3만이며 그 가운데 북부지방은 전체의 70% 이상을 점유하여 화전경작의 집중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화전은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부 터 학정에 시달린 백성은 산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임꺽정 같은 소설이 되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화전을 부대기 부대밭을 일군다고 말한다. 천불지산 북 쪽에 자리 잡은 지신 성남의 불 붙이 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옛날 그곳에 살던 노인들은 부대밭을 불대기(부덱이 火德)밭으로 풀이하여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체로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시기에 불을 지르거나 혹은 가을에 벌채해 두었다가 이듬해 해빙기에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 사람 들은 꽉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파종의 경우 주로 꽉지로 대충 골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고 묻는데 이것을 포지라고 말하며 이런 골 지명을 포지골 이라고 불려왔다. 그때 이런 밭에서 모기가 극성부리기에 쑥대를 길게 묶어 허리좌우에 뻗쳐 차고 두 끝에 불을 태워 모기를 피하군 하였다. 민 초들 가운데 북빼기집(농막의 일종)을 짓고 여름 내내 부대밭을 일구며 농사짓는 떠돌이 날농군들이 많았다. 화전 밭은 숙전과는 달리 밑거름으로 투입하지 않고 나무나 풀이 타서 남긴 재와 낙엽이 쌓 여 생긴 부식토로 지력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몇 년간은 경작하다가 떨어진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여 휴경한다. 이렇게 몇 년간 밭을 묵혀두었다가 다시 일구는 이런 밭을 묵밭을일군 다고 말한다. 화전농업은 이런 단계가 반복되다가 차츰 소와 쟁기를 사용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늘게 되고 따라서 계곡 경사면이거나 산기슭에 있는 농지를 경작하면서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된다. 이렇 게 화전에 의거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을 화전민이라고도 불렀는데 최초의 함경도 이주민들을 화전민 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몇 백 년 전 두만강 이북 천불지산은 울창한 원시림으로 가득 찬 망망한 임 해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하루 하늘에서 원인 모를 불똥이 떨어 지여 불이 났으며 이렇게 불에 탄 나무들이 있는 곳은 화전을 일구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되였다 거기에 사회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산지를 도피 은거하는 백성들이 많아지면서 화전은 근세사회에 들어오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비탈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어 가며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함경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천불지산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의식주 해결과 겨울이면 폭설로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천불지산은 그래도 개척민에게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무릉도원이 되여 왔다. 그리고 그 땅에서 수확한 보리 메밀과 감자로 차려진 밥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수성찬이 나 다름없었다. 산세가 부드럽고 조망이 좋은 천불지산 정상에 서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 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뭇 봉우리들이 마치 두만강 물결처럼 굽이굽이 정상에 흘러와 뉘연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천불지산 정상은 북쪽의 오봉산과 서남쪽의 큰쓰레산과 달리 산세가 급하지 않고 부드 럽다. 산정상의 뉘연한 능선 사이로 여러 갈래 냇물들이 숲 속으로 흘러 내려가는 곳에 크고 작은 산 길들이 뻗어나 있다. 그 중에서 서래골로 뻗은 경우가 가장 많고 서남쪽 능선을 타고 중마래 하마래 로 내려갈 수도 있다. 북으로는 노름바위와 노루메기 작수동 범동 등 마을 거쳐 달라자로 가는 길이 있고 서북으로는 동쪽골로 원동 덕수로 이어지는 갈들이 뻗어있다. 천불지산 화전민의 취락은 음달진 북면이나 서면의 산허리보다 햇볕이 잘 드는 남면이나 동면의 지 역이 더 발달 되여 있다. 여전에는 삼합 공암동에서 서래골을 따라 올라가면 석마골어귀 돌루게골 동 경장 버므장고래 하촌 중촌 상촌 싸리밭데기 수영자 등 자연부락을 단위로 마을들이 옹기종기 들어 앉아 있었다. 1880년 서래골 농막수가 50- 60호로 적혀 있고1894년에는 346명으로 기재 되였으며 20세기30~40연대에는 농가 300가구 넘게 산재해 있었다고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사람 들은 산비탈에 귀틀집 땅막집을 짓고 화전 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40년대 초에 접어들어서 산골이 깊 어서 비적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부분적인 산재호들을 이주한적도 있었다 해방 후 1958년도에 이르러 마을들을 통합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학교가 먼 서래골 마을들에서는 차츰 학교가 있는 청천 혹은 공사 마을과 수전이 있는 타지방으로 이사하는 집들이 많아 61년도에는 10여호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70년대초에 와서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90년대에 청천저수 지가 들어서면서 서래골 마을 흔적은 서서히 역사 속에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와 닿지 않은 서래골 마래골 계곡 구석구석을 온종일 누비며 헤쳐보아도 이젠 그 옛 날 화전민이 일구었던 화전 밭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만고풍상에 시달린 노송아래 파란 이끼가 두 텁게 내려앉은 바위위에 앉아 땀을 들이노라면 희미한 꿈결처럼 저 멀리 구불구불 길게 뻗어간 오솔 길로 지게를 지고 함지를 이고 하얀 옷을 입은 화전민들이 당금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 아득히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불지산은 원시림으로 빼곡히 들어선 망망한 임해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불명의 천불을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함경도 이주민들이 서래골 마래골로 밀려 들어와 화전 밭을 일구면서 천불지산의 역사가 시작 되였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치열한 삶을 살아왔 던 함경도 화전민들의 파란만장 했던 역사는 아니러니 하게도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 것을 꽁꽁 숨기 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신비한 천불의 발생 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사람들의 기 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연변 역사는 어느 한 위인이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서있는 연변 땅 곳곳에서 땀 흘 리며 살아왔던 평범한 백성들의 흔적 하나하나가 가로 세로 촘촘히 엮이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우 에 연변의 문화가 소박하게 이름 없는 꽃으로 피여 나온 것이다 . 보잘 것 없고 초라하고 하찮다고 생 각한 민초들이 천불지산에 흘린 땀의 기록은 진실성을 갖고 있기에 진실한 역사로 기록 되어 남아야 한다. 오늘날 와서 우리가 적어도 천불붙이란 이 진실한 지명에 의지하고 또 적어도 이 진실한 지명 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지켜 나간다면 선조들의 원초적인 삶의 흔적이 아로 새겨진 이 지명은 많은 연변 사람들의 살과 뼈에 녹아들어 똑 마치 그 옛날 천불붙이 화전 밭에 심었던 감자 메밀 보리의 씨 앗처럼 우리 삶속에 새로운 희망 싹으로 움터 자라 날것이다. 천불지산의 역사는 화전민이 개척해온 피눈물의 역사이며 천불지산 지명은 함경도 이주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아로새겨 놓은 이름이다. 연변지명에서 이처럼 이주민들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묻어나는 지명이 과연 또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처럼 너무나도 쉽게 잃고 있거나 이미 까마 아득히 잃어버린 소중한 지명유산은 얼마나 될까 ... 지금 천불지산은 똑 마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 절을 흘러 보내고 담담해진 연로한 할아버지처럼 너그럽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앉아 유유 히 흘러가는 두만강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한테 다가가서 그의 진 실한 이름을 불러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허성운  
60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끝] 댓글:  조회:5609  추천:0  2014-03-10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3-03 10:42:47 ] 클릭: [ ] 국부기념관 계속하여 우리는 국부기념관을 참관하였다. 국부기념관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손중산(1866—1925)선생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관으로 대북시 신의구인애로4단(信义区仁爱路四段)505번지에 자리잡고있다. 국부기념관은 총 부지면적이 110,788평방메터, 높이가 30.4메터, 네변의 길이가 각각 100메터인 정방형모양의 중국궁전식 건물로 건축면적은 29,464평방메터이다. 중산기념관 기념관 1층의 중앙대청에는 손중산선생이 쏘파에 앉아있는 동상이 모셔져 있는데 동상의 높이는 5.8메터이고 무게는 17톤이다. 여기에서도 중정기념관과 마찬가지로 륙해공 3군 의장대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 시간마다 교대의식을 하고있었다. 국부기념관 중앙대청 대청 동서 량측에는 국부사적전시관이 있는데 동쪽은 중산선생과 중화민국을 주제로 한 중화민국건립 관련 자료를 전시하였고 서쪽은 중산선생과 대만을 주제로 한 손중산선생의 활동과 대만 관련 활동사적, 진귀한 사료들을 전시하였다. 국부기념관 1층 북쪽에는 2,500 좌석의 대강당이 있다. 강당의 면적은 2,844평방메터로서 중요한 경축행사와 시상식을 진행하며 평일에는 국내외 예술단체가 표현하는 연극, 음악, 무용 등을 공연한다고 한다. 1층에는 또 강연실, 중산강당, 일선책방이 있다. 2층에는 중산국가화랑과 손일선박사도서관이 있다. 중산국가화랑은 국제적인 화랑으로 국제급전시회 및 국내외 예술계에 명성이 높은 유명 예술가의 작품전시회를 자주 개최한다고 한다. 손일선박사도서관은 중산학술사상, 근/현대사, 각 대학의 중산학술과 석/박사 론문, 사회과학 및 대만연구 관련 도서 그리고 신문, 잡지 등이 소장되여 있다. 3층에는 일선예술화랑, 덕명예술화랑과 일선방영실이 있다. 국부기념관을 다 참관하고 저녁이 되자 우리는 면세점으로 갔다. 면세점은 전문 경외인원을 대상하였기에 대만의 가이드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면세점에는 전자제품, 시계, 금은보석, 화장품, 복장, 가죽제품, 술, 담배 등 각가지 상품들이 가득 진렬되여 있었다. 나는 대만으로 올 때에 친구들로부터 대만에 가면 대만 특산인 금문고량주(金门高粱酒)를 갖고 오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그 술을 샀다. 금문고량주는 36도로부터 58도에 이르기까지 부동한 도수의 술이 다 있었는데 나는 58도술을 택하였다. 58도술은 한 포장에 750밀리리터짜리 술이 두병이 들어있는데 인민페로 214원이였다. 그것도 해관검사에서 한 사람이 두병 밖에 휴대를 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네병을 샀는데 령수증만 주고 술은 공항에 가서 출경수속을 마친 다음에야 찾는다는것이였다. 면세점에서 산 물건은 일률로 령수증을 갖고 공항에 가서 찾도록 되였다. 그것은 면세점의 상품이 밖으로 나와 당지 사람들에게로 넘어가는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튿날(5월 8일)은 대만에서의 마지막 날이였다. 우리가 든 호텔은 마침 신북시 만리구(万里区)의 해변가에 있는 비취만휴가촌(翡翠湾度假村)이여서 환경이 아주 좋았다. 호텔내에 온천욕장이 있고 호텔앞은 해수욕장이여서 오전의 활동은 온천욕도 하고 해수욕도 하는 자유활동이였다. 비취만휴가촌 나는 대만에 와서 온천욕이나 해수욕을 여러번 했기에 해변가를 산책를 하면서 비취만의 자연풍경을 감상하기로 하고 연길에서 온 한 친구와 같이 해변가를 산책하였다. 비취만 해변가에서 해변가를 산책하다가 한 낚시군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한어를 하는것을 보고 그 낚시군은 중국에서 왔는가고 물었다. 내가 우린 모두 중국사람이 아닌가고 말하자 그는 자기는 대만 본토 사람으로서 종래로 대만을 중국에 속한다고 여기지 않았다는것이였다. 나는 그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이드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대만에는 3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조국통일을 갈망하고 민진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만독립을 부르짖으며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통일을 하든 독립을 하든 관계치 않는다고 하였다. 총적으로는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것이였다. 가이드는 전적으로 통일을 갈망하는 편이였다. 이번 대만관광에서 인상적인것을 들라면 인구가 가장 밀집된 대북시에 대중교통수단인 뻐스나 승용차가 연길시보다 퍽 적었고 오토바이가 많았다는것이다. 사거리에 붉은 등이 켜졌다가 푸른 등으로 바뀔 때면 오토바이부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대만의 오토바이는 모두 한 공장에서 찍혀 나왔는지 색갈이 조금씩 다를뿐 모두 답판식(踏板式)오토바이였다. 가이드와 어찌되여 차량이 적고 오토바이가 이렇게 많은가고 물었더니 대만은 길이 좁아 차량들이 다니기에 불편하고 주차장도 없어 차를 세워놓을 곳이 없다는것이엿다. 그러기에 교통수단이 오토바이가 가장 적합하다는것이였다. 내가 다녀본 가운데서 길이 가장 좁은 도시는 향항이였고 그다음으로는 대북시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만의 토지는 개인소유이기에 길을 넓히려면 개인들로부터 토지를 사들여야 하고 그러자면 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기에 그렇게 하기 곤난하다는것이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1시가 되여 도원비행장으로 향하였다. 《대만지구입출경허가증》은 대만을 출경할 때에는 해관에 바쳐야 한다.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기념을 남기려고 그것을 미리 복사해 거기에 장개령(張凱羚)이라는 자기의 도장과 전화번호를 찍어 넣고 앞뒤면을 비닐박막으로 압착하여 우리에게 주는것이였다. 나도 이후 그와 련결을 하려고 이메일주소를 교환하였다. 비행장에 도착하여 출경수속하는 곳까지 우리를 안내하여 주고 갈라지게 되는 순간 가이드는 눈물이 글썽하여 있었다. 그렇다. 대만에서의 8일,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중국동포라는 믿음으로 8일간 정을 붙이고 함께 유람하면서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우리는 석별의 정을 않고 아쉬운 심정으로 갈라졌다. 대만 도원비행장에서 비행기는 오후 3시 20분에 리륙하였는데 나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이번 대만관광으로 하여 흡족한 마음을 안고 기창으로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대만도를 내려다보았다. 《대만이여 잘 있으라! 대만이여 안녕히!》하며 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나의 인사를 뒤로 남기고 비행기는 구름속으로 날아들었다. 비행기는 오후 5시에 광주에 착륙하였고 우리는 이튿날 10시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오후 3시 반에 연길에 도착하였다. 주청룡특약기자 [전문 끝]
59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0] 댓글:  조회:6323  추천:0  2014-03-0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0]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24 10:24:44 ] 클릭: [ ] 대옥보석박물관 800여만원짜리 미륵보살(弥勒佛) 이튿날(5월 7일) 우리는 먼저 대옥보석박물관(大玉宝石博物馆)을 참관하였다. 화련현 수풍향(寿丰乡)의 풍전(丰田)과 서림(西林)지구에 뱀무늬 돌층은 부분적으로 연옥대(软玉带)를 함유하고 있었는데 초기의 저장량이 60만톤에 달하였다고 한다. 품종으로는 주요하게 람석(蓝石), 묘안석(猫眼石), 취옥(翠玉) 7색옥(七彩玉) 등이였으며 통털어 《대만옥(台湾玉)》이라고 하며 그 빛깔이 정밀하고 아름다워 세계 명옥의 하나로 불리우고있다. 2008년 북경올림픽 동메달에 박힌 옥이 바로 이곳의 옥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0년 상해세계박람회 때 대만관(台湾馆)의 대리석장식에는 모두 이 화련현의 대리석이 사용되였다고 한다. 화련현은 풍부한 석재와 돌조각예술로 하여 《돌의 고향》, 《돌예술의 고향》으로 불리고있다. 대옥보석박물관에서는 이곳의 아름다운 옥돌을 가공, 수장, 전시판매하고있었다. 박물관에는 수천가지의 옥돌 가공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크게는 몇톤으로부터 작게는 몇그람짜리도 있었다. 그 색갈 또한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분홍색 등 각가지 색갈로 되여 눈부실 정도였다. 그중에서 크고 가장 비싼것은 황옥으로 조각한 미륵보살(弥勒佛)이였는데 대만화페로 3,980만(인민페로 847만)원이였으며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것은 칠색옥 꽃병이였는데 대만화페로 158만(인민페로 33만6천)원이였다. 칠색옥꽃병(七彩玉花瓶) 우리 팀에서도 인민페로 몇백원에서 몇천원에 이르는 반지, 팔찌, 목걸이 등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연길에서 온 한 녀성은 인민페로 4천원짜리 칠색옥꽃병이 욕심나서 손에서 놓지 못했지만 돈이 아름차서 끝내 사지 못하였다. 그런데 상해에서 온 한 관광객은 칠색옥꽃병을 인민페로 3만 8,000원에 사는것이였다. 경제가 발달한 지역과 발달하지 못한 지역의 차이를 느끼는 대목이였다, 대만에서 최남단인 간정국가공원으로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 오른쪽은 동해안이고 왼쪽은 전부 높다란 산이였는데 바로 중앙산맥이였다. 그러니 평지라고는 찾아볼수 없었고 산과 바다사이에 단 한 갈래의 철로와 한 갈래의 성급도로뿐이였다. 해안의 바위들은 전부 검은 회색이여서 가이드와 물어보니 그것이 바로 산호초(珊瑚礁)이라고 하였다. 기차려행 대옥보석박물관에서 나와 우리는 계속 북상하게 되였는데 이곳 북포(北埔)로부터 소오(苏澳)까지 약 65킬로메터되는 거리는 도로가 너무 험하기에 안전을 위하여 기차를 탄다는것이였다. 부지중 우리가 탔던 뻐스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부질없는 걱정이 생겼는데 가이드는 우리 생각을 알아맞히기라도 한듯 우리는 지금 역시침 방향으로 북상하고 다른 한팀은 순시침방향으로 남하하는데 이 뻐스는 소오에서 기차로 이곳까지 와서 남하하는 관광객을 받아싣고 다시 되돌아가며 우리는 기차로 소오까지 가서 저쪽 관광객을 싣고 온 뻐스를 타고 대북으로 간다는것이였다. 그러니 뻐스와 뻐스가 서로 손님을 바꾸어 싣고 되돌아서 달리는것이였다. 북포역(北埔站) 우리는 북포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작은 정거장이였다. 기차도 낡은 기차였는데 차바곤 련결부분으로 레루장과 침목이 다 내려다 보이였으며 자칫하면 발이 빠질것만 같았다. 밖을 내다보니 산세는 매우 험하였다. 약 65킬로메터 달리는데 길고짧은 턴넬이 8개나 있었고 크고 작은 다리는 너무도 많아 셀수 없었다. 1시간 20분 달려 의란현 소오에 도착하였다. 소오역 역시 그리 크지 않은 정거장이였지만 그래도 북포역보다는 많이 컸다. 소오역(苏澳站) 기차에서 내리니 수십대의 관광뻐스가 대기하고있었는데 우리는 지정된 뻐스를 타고 대북시로 향하였다.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여기로부터는 대단히 넓은 평원이였다. 이곳은 대만에서 동북부에 속하는데 동부와 북부에서 가장 큰 벌판이라고 한다. 전부 수전이였으며 농촌집들을 보면 농가마다 모두 2, 3층으로 되여 있었다. 대륙의 강소, 절강일대의 농가와 비슷하였다. 이 평원을 지나 신북시(新北市)경내에 들어서면서 점차 산이 많아졌다. 오후 2시가 되여 대북시에 들어섰다. 이렇게 5월 3일 대북시를 떠나 서부, 남부, 동부로 하여 대만도를 한바퀴 돌아 다시 대북시에 돌아왔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 대북시에 돌아와 우리가 향한 곳은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대만에서는 총통부라고 함)였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는 대북시 중정구중경남로(中正区重庆南路)와 개달격란대로(凯达格兰大道)가 교차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대만 강점시기 대만총독부청사로 지은것이다. 총독부는 1912년 6월 1일에 착공하여 1915년 6월에 주체공사가 완성되고 몇년의 시공을 거쳐 1919년 3월에 마침내 준공되여 일본의 대만총독부로 사용되였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미군의 폭격으로 많이 훼손되였다고 한다. 대만광복후 대만성행정장관공서(行政长官公署)에서는 이 《총독부》를 장개석의 생신 60주년을 맞이하여 1946년에 수건을 시작하여 1948년에 준공한후 정식으로 《개수관(介寿馆)》으로 명명하였다. 1949년 장개석정부가 대북에 이주하여 장개석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면서 대만에서 명의상의 《중화민국총통부》로 되였으나 간판은 그냥 《개수관》으로 있다가 2006년 민진당이 집정하면서 진수편의 지시에 의하여 간판을 《총통부》로 고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주체건물이 5층이고 중앙탑이 12층으로 높이가 60메터인데 원래의 설계는 6층이였으나 일본식민통치의 권위를 돌출이 하기 위하여 12층으로 높이였다고 한다. 이 청사는 몇곳에 보초병은 있었지만 담장은 없었으며 청사앞에서 마음대로 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앞에서 [후일 계속] 주청룡특약기자
58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9] 댓글:  조회:6485  추천:0  2014-02-24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9]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17 10:00:00 ] 클릭: [ ]   북회귀선기념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또 다시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여 태로각국가공원으로 향하였다. 태로각국가공원을 가려면 2시간 넘어 걸린다면서 가이드는 대륙의 가요프로를 틀어놓았는데 텔레비화면에 제일 첫 곡으로 우리 나라에서 대형행사를 할 때마다 부르는 《오성붉은기 휘날리고(五星红旗迎风飘扬)》라는 노래가 나왔다. 대만에서 이 노래를 들으니 대륙에서 들을 때와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대륙에서 들을 때에는 그저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였지만 대만에서 듣는 순간 부모처자를 대륙에 두고 장개석을 따라 대만에 온 국군장병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름할수 없는 애절함에 목이 메였다. 그토록 대륙을 그렸고 또 죽어서도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한채 외로운 이 섬에서 무주고혼이 된 국군장병들을 생각하니 그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억제할수 없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노래는 《남니만》, 《연안송》 등 항일가요와 현시대 가요들이 있었는데 번체자가 자막으로 나오는걸 보면 대만의 민간에서는 이런 노래가 많이 불린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가이드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뻐스안은 춤판으로 번져갔다. 가이드는 주동적으로 대륙동포들을 끌어안고 춤을 추었는데 대륙동포를 끌어안은 그의 심정은 아주 격동되였다. 그리고 팽려원이 《전우여 안녕!》이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자 《우리의 국모가 부르는 노래가 나온다》고 말하면서 더욱 격동된 모습이였다. 나는 가이드의 일거일동에서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태로각국가공원(太鲁阁国家公园) 노래와 춤판으로 시간이 가는줄 몰랐는데 어느덧 태로각국가공원에 도착하였다. 태로각국가공원(太鲁阁国家公园)은 대만의 유명한 관광명소로서 대만 동부 화련현(花莲县), 대중시(台中市), 남투현(南投县) 이 3개 행정구내에 있다. 공원내에는 대만에서 첫 갈래로 되는 동서를 가로 찌르는 중횡공로(中横公路: 대만 동부와 서부를 이어놓는 공로로, 해발 3000메터의 중앙산맥과 협곡을 가로 뚫고 지난다.)가 있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리석 협곡이며 20킬로메터의 길이로 길게 뻗은 U형협곡이 있으며 립무계(立雾溪)가 주류로 흐르고 있으며 공원 총면적은 92,000헥타르로서 옥산 다음으로 대만에서 두번째로 큰 공원이라고 한다. 태로각국가공원에는 연자구(燕子口), 구곡동(九曲洞), 장춘사(长春祠) 3개의 경승지가 있다. 연자구는 U형 협곡으로 량안은 깎아찌르는 벼랑으로 되여 있으며 기봉이 하늘 높이 솟아 산세가 높고 험하다. 협곡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물안에서 밖을 내다보는듯한 감을 느낀다. 벼랑밑은 푸른 파도가 출렁이고 대리석으로 된 암석에는 여러가지 아름다운 무늬가 나 있었다. 절벽에는 또 동굴이 가득하여 제비들이 이곳에 와서 둥지를 틀고 하늘을 날아예며 고요한 협곡에 생기를 보태여 준다고 하여 연자구(燕子口)라 부른다고 한다. 연자구(燕子口) 연자구에서 차를 타고 더 앞으로 가면 구곡동(九曲洞)에 이른다. 구곡동은 더욱 험준하여 사람을 경악하게 한다. 구곡동에는 오솔길이 있는데 여러개의 동굴과 공로를 이어져 동굴안에 동굴이 있고 동굴밖에 기이한 경치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룬다. 그런대로 연자구는 겨우 차량으로 이동했지만 구곡동은 길이 있어도 차를 드리댈수 없다. 길 오른쪽은 곧바로 깎아지르는 절벽이기때문이다. 너무 위험하여 모두 내려서 걸으면서 자연경관을 감상하였다. 이곳은 산세가 너무 험하여 관광객들이 여기를 지날 때에는 안전모를 써야 한다. 구곡동(九曲洞) 구곡동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의 태로각 맞은켠 벼랑에 장춘사(长春祠)가 있는데 장춘사에는 중횡공로 시공과정에 순직한 225명의 병사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서 그들의 위패(灵位)가 모셔져 있다. 이곳의 길은 모두 깎아 찌르는듯한 절벽가운데 있으며 국민당 로병들이 1956년 7월에 시공하여 1960년 5월에 통차하기까지 3년 9개월이 걸렸으며 턴넬을 뚫고 길을 닦았는데 마치 당년의 우공이산과도 같았다고 한다. 턴넬을 뚫을 때에는 병사들은 마치 사자입안의 고기덩이 신세로 수시로 삼키울 위험을 느꼈다고 한다. 중횡공로(中横公路)턴넬 당나라 풍격의 장춘사는 태로각 협곡의 벼랑에 들어 앉아있으며 아담하면서도 장엄하게 건축되였고 새맑은 광천수가 벼랑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와 일년 사계절 《장춘폭포》로 비단필을 드리워 중횡공로의 경관으로 되고있다. 장춘사는 1958년에 건설되였는데 1979년에 지진으로 하여 붕괴되자 3년후에 수건하였고 1987년 제2차 지진으로 완전히 붕괴되자 이듬해에 원래의 지점에서 왼쪽으로 옮겨 다시 건축하였다고 한다. 장춘사를 올라가는데는 갈지자(之)형의 길이 있으며 380개의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관음동(观音洞)에 이르는데 굴안에는 관음석불(观音石佛)과 중횡공로의 시공전체지도(施工全图)가 있다. 풍경이 수려한 장춘사(长春祠) 아미문화촌 태로각국가공원을 다 구경하고 계속 북상하면서 아미문화촌에 이르렀다. 아미문화촌(阿美文化村)은 화련현 관광명소의 하나이다. 촌에는 높이가 22메터 되는 높다란 신상(神像)이 있었는데 관광객들은 그 신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아미족의 가무표현 타미무(打米舞)   촌에는 또 아미족(阿美族:고산족의 한개 족군)의 원시가옥, 관광기념품, 장식품, 대리석그릇, 일용품, 복장, 토산물, 고기잡이공구, 고산족들이 가장 일찍 고기잡이에 사용하던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아미족의 전통 가무표현도 있었는데 혼례무, 농경무, 타미무(打米舞), 아리족의 영웅기개를 표현한 영웅무 등 표현이 있어 유람객들이 아미족의 문화에 대하여 료해할수 있었다. 주청룡특약기자 [다음 계속]
5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8] 댓글:  조회:6169  추천:0  2014-02-1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8]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06 10:03:48 ] 클릭: [ ] 기려산호박물관(绮丽珊瑚博物馆) 이튿날(5월 6일), 우리는 먼저 대동역 맞은켠에 있는 기려산호박물관(绮丽珊瑚博物馆)을 참관하였다. 기려(绮丽)란 아름답다는 뜻이므로 아름다운 산호박물관이라고 리해하면 될듯싶다. 박물관 해설원의 소개에 의하면 세계에서 산호는 주로 지중해, 미드웨이섬(中途岛: 북태평양의 작은 산호도)해역과 동남아해역에서 나는데 세계 80%의 산호가 대만에서 나며 대만의 80% 산호가 대동에서 난다고 한다. 산호는 10년에 1센치메터씩 자라고 300년에 1킬로그람씩 증가되며 일반적으로 몇백년, 지어 몇천년 자라야 하나의 나무가지 모양으로 된다고 한다. 대만산호는 품질이 좋기에 거의 99%가 수출되며 《산호왕국》의 칭호를 받는다고 한다. 홍산호(紅珊瑚) 비록 산호는 산호충의 분비물로 형성된것이지만 고대 로마사람들은 일종 재화를 막고 사람에게 지혜를 갖다주며 지혈과 열을 제거하는 기능을 갖고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산호를 불교칠보(七宝)가운데의 하나로 넣기도 한다. 때문에 산호는 장식물과 일종의 길상물로 패용(佩戴)되고있다. 남산호(蓝珊瑚) 이 박물관에 전시된것은 110메터~1800메터의 심해에서 캐여낸 산호들이였는데 진홍색, 분홍색, 자색, 남색, 록색, 황색, 백색 등 여러가지 모양을 가진 가지각색의 산호들이 다 진렬되여 있었다. 황산호(黃珊瑚) 산호박물관내에는 또 산호장식품 상점도 있었다. 상점에는 산호를 가공한 여러가지 장식품들이 진렬되여 있었는데 푸른색 목걸이는 3만 7000원(인민페), 붉은색 목걸이는 12만 3400원(인민페)이였다. 우리 팀에서도 몇백원 혹은 1~2천원씩 하는 목걸이와 팔찌를 사는 녀성들이 적지 않았으며 안해에게 대만기념 선물로 사는 남성들도 있었다. 연길에서 간 한 녀성은 친정어머니께 드리려고 1500원짜리 홍산호목걸이를 샀는데 산 다음에 생각하여보니 시어머니가 알면 언짢게 생각할가봐 시어머니것도 똑같은걸로 샀다고 했다. 기관(奇观) 산호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대동현 동하향 도란촌(台东县东河乡都兰村)으로 갔는데 이곳에는 물이 《거꾸로 흐르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奇观(기관)》이라고 씌여진 비석에는 《‘사람은 올리 톺고 물은 내리 흐른다.’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물이 거꾸로 흐르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믿지 못하겠으면 여기에서 한번 감상하시라.》 라고 씌여 있었다. 기관 비문 이곳에는 농경지에 물을 대는 한갈래의 물도랑이 있는데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물이 올리막으로 거꾸로 흐르고있다.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올리 흐르고있었다. 자연현상으로 말하면 이는 어떻게든 성립될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사람의 눈에 물이 올리 흐르는것으로 보이는가? 가이드도 물이 거꾸로 흐를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그 현상에 대하여 해석은 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확실한 답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물이 올리 흐르고있다   나도 정말 의혹스러웠다. 하여 어찌하여 이런 현상이 생길수 있는가 하면서 지형을 관찰하여 보니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물도랑이 사람의 시각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리막이였으며 같은 방향으로 물도랑 오른쪽은 경사도가 강한 내리막길이였다. 이렇게 보면 아래에 내려와서는 길과 물도랑사이의 상대고도는 매우 차이가 많았는데 물도랑이 길보다 많이 높았다. 이리하여 길과 물도랑 사이에서 보면 시각적으로 물이 올리 흐르는 착각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누가 과학적으로 해석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여전히 수수께기로 남을수 밖에 없다. 북회귀선 표지탑 다음은 계속하여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북회귀선 표지탑을 구경하는것이였다. 차가 화련현 풍빈향(花莲县丰滨乡)에 이르렀을 때 높다란 흰 원주형 탑이 보였는데 운전수가 차를 그곳에 세웠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그 탑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바로 북회귀선표지탑이라고 하였다.     북회귀선 표지탑 지구에서 북위 23°27′선을 북회귀선이라 하고 남위 23°27′선을 남회귀선이라고 하는데 태양이 하지에 북회귀선에서 직사를 하고 동지에는 남회귀선에서 직사를 한다. 바로 이 회귀선을 계선으로 온대와 열대가 갈라진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바로 북회귀선이 동서로 지나는것였다. 그러니 우리가 서있는 곳의 북쪽은 온대에 속하고 남쪽은 열대에 속한다. 그러므로 지금 북회귀선 우에 서 있는것도 이번 대만관광에서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한가지였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대만에는 북회귀선표지탑이 모두 3개인데 하나는 서반부의 가의현 수상향(嘉义县水上乡)에 있고 다른 두개는 동반부의 화련현 서수향(瑞穗乡)과 풍빈향(丰滨乡)에 있는데 우리가 보는것이 바로 풍빈향의 북회귀선표지탑이였다. 풍빈향의 탑은 높이가 20메터인데 탑에는 세로로 《北回歸線(북회귀선)》란 네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탑 밑부분에는 《北纬(북위)23°27′4.51〃》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40분간 놀면서 북회귀선 기념탑을 배경으로 여러장의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후일계속] 주청룡특약기자
56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7] 댓글:  조회:6033  추천:0  2014-02-0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7]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27 11:04:08 ] 클릭: [ ] 간정국가공원(垦丁国家公园) 이튿날(5월 5일), 우리는 대만 최남단인 간정국가공원(垦丁国家公园)으로 갔다. 간정국가공원은 병동현(屏东县)경내에 위치한 항춘반도(恒春半岛)에 자리잡고있다. 륙지면적은 18,084헥타르이고 해륙총면적이 33,249헥타르로서 모두 열대에 속한다. 간정국가공원은 삼면이 모두 맑고 푸른 바다이며 동쪽은 태평양, 서쪽은 대만해협, 남쪽은 바스해협(巴士海峡)과 잇닿아 있으며 지질변화가 복잡하여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간정국가공원 묘비두(猫鼻头)풍경구는 서쪽끝에서 뿔처럼 남쪽으로 바시해협을 향해 뻗어 나왔고 아란비(鹅銮鼻)공원은 동쪽끝에서 남쪽으로 바시해협을 향해 뻗어 나왔는데 뿔모양으로 된 이 두 곳은 대만도 최남단이 된다. 묘비두풍경구 묘비두(猫鼻头)풍경구는 대만해협과 바시해협의 분계점에 있으며 묘비두에는 바다절벽에서 떨어져 내린 산호초암이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고양이가 쫑그리고 앉아있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묘비두라고 하였단다. 묘비두는 전형적인 산호초해안침식지형으로서 산호초들이 지각운동으로 하여 해면에 로출되여 장기적으로 파도에 씻기고 풍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둥, 그릇, 주름치마, 동굴 등 기이한 모양을 이루어 산호초해안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묘비두픙경구 묘비두 대만의 최남단인 간정국립공원은 유명한 풍경구라 볼것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하루로 제한되여 그곳을 일일이 다 돌아볼수 없었다. 하여 서쪽끝에 있는 묘비두공원에서 자연경관들을 감상하면서 여러가지 배경을 선택하여 멋진 포즈를 취하면서 많은 기념사진들을 남기였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동쪽끝에 있는 아란비공원으로 가면서 창밖으로 공원해안의 자연경관들을 감상하였다. 묘비두공원과 아란비공원사이는 만(湾)으로 되여 있었는데 이것을 남만이라고 불렀다. 륙지와 바다사이는 대부분 벼랑으로 되여 있고 바다의 산호초로 형성된 기암괴석과 수백종의 열대식물들이 서로 어울려 바다가 없는 우리 북방의 연변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하여 모두 《야~ 경치가 좋구나!》 《야! 멋있다!》는 감탄사가 저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아란비공원 뻐스가 아란비공원에 도착하여 공원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오후에는 아란비공원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실컷 놀았다. 공원에는 산호초, 석회암이 사처에 널려있고 기암괴석이 가득하였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연변사람들에게 이런 기회가 몇번 찾아오랴. 이런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모두들 물속에 첨벙첨벙 뛰여들었고 나름대로 자맥질에 흥이 났다. 헤염칠줄 모르는 사람들은 옅은데서 물장난을 하였고 헤염 깨나 하는 사람들은 좀 깊은 곳에 들어가서 헤염재간을 피웠다. 그런데 한 사람은 계속하여 헤염쳐 들어갔다. 너무 안으로 깊이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은 저러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인젠 그만 들어가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 사람은 정말 헤염재간이 대단하였다. 몇백메터 헤염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나왔다. 그제야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였는데 그 사람은 아무일도 없는듯이 태연스레 오래간만에 이렇게 헤염을 쳐 본다면서 자못 흐뭇해 하는것이였다. 알고보니 그 사람은 본래 어릴때부터 도문의 두만강가에서 살았으며 헤염재간을 많이 익혔다고 했다. 아란비공원 아란비등탑 공원안에 있는 아란비등탑은 아란비의 표징이였다. 19세기 중엽에 각국의 배들이 아란비의 근해를 오가면서 암초에 부딪쳐 자주 전복되군 하였다. 청정부는 미, 영, 일 렬강들의 압력하에 1883년에 아란비등탑을 웠는데 당시에는 세계상의 유일한 무장등탑으로 되였다고 한다. 갑오중ㅡ일전쟁(1894년)후 청군이 철거하면서 이 등탑을 폭파하였는데 1898년에 다시 건축하였다. 대만팔경 아란비 표지석 등탑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무장등탑으로서 백색의 원주형철탑으로 되여 있으며 높이가 24.1테터이고 둘레의 길이가 110메터로 모두 5층이다. 1층은 석유를 저장하고 2층은 그린포(格林炮)를 장치하고 3층은 휴게소며 4층은 용림포(榕林炮)를 장치하고 5층에는 광원(光源)이 있다. 아란비등탑은 포대(炮台)로 되였는데 탑을 둘러싼 담벽에는 화구들이 있었으며 담벽 주위에는 또 전호(战壕)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군의 포격을 당해 파괴된것을 후에 신식 대형 4등급 회전식 렌즈전등으로 수건하여 10초에 한번씩 번쩍거리는데 비추는 거리는 27해리(50킬로메터)이며 목전 대만지구에서 불빛이 가장 강한 등탑이라고 한다. 온천수영장 간정국가공원에서 실컷 논 우리는 오후 4시가 되여서야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였다. 저녁 7시 반이 되여 대동현(台东县)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숙소를 잡은것은 바로 온천호텔이였다. 호텔은 산밑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산에서 솟아나오는 온천을 끌어들여 온천욕장, 온천수영장을 만들었단다. 이 호텔에 들게 되면 온천욕, 온천수영은 면비로 되여 있어 우리팀원들은 모두 저녁식사가 끝나자 려로의 피로를 풀기 위해 온천욕장으로 갔다. 욕장과 수영장은 모두 호텔 뒤울안에 있었는데 온천수는 몇길 잘 되는 절벽에서 넓다란 폭포수로 떨어졌다. 그전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온천욕을 하였지만 로천온천욕장은 처음이였다. 지난 해 금강산에 가서도 온천욕을 하였는데 로천온천욕장이 있다고 하면서도 개방은 하지 않아 매우 서운하였는데 이번에 대만에 와서 산에서 직접 퍼붓는 온천폭포를 맞으면서 온천욕도 하고 수영도 하니 기분이 한결 더 좋았다. [후일 계속]
55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6] 댓글:  조회:6213  추천:0  2014-01-2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6]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22 11:51:44 ] 클릭: [ ] 오전에 아리산 관광이 끝나고 오후에는 남하하여 고웅시로 갔다. 고웅시로 가면서 보니 대만의 서해안은 평원이 많았는데 벼농사가 위주였다. 대북의 논에는 벼가 모살이를 방금 끝내고 분얼하는 시기였는데 중부에 이르니 벼모가 우썩 커있었고 좀더 내려가니이삭을 올리밀기 시작하더니 남부에 이르니 벼이삭이 누렇게 되였다. 대만섬의 남북의 길이는 400킬로메터도 되지 않지만 벼의 생장차이가 이렇게 큰것을 보면 남북의 기온 차이가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와 물었더니 남북의 기온차이는 보통 3,4도 혹은 4,5도 차이가 나며 북부는 2모작, 남부는 3모작을 한다고 소개하였다. 고웅시(高雄市) 뻐스는 3시간가량 달려 4시에 고웅시에 도착하였다. 고웅시에 들어서면서 대북시와 많이 다르다는 감이 들었다. 대북시는 거리가 좁고 오랜 건물들이 많아 좀 어두운 느낌이라면 고웅시는 거리가 넓고 새로운 건물들이 많아 아주 깨끗하였다. 대만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고웅시(高雄市)는 2010년 12월에 원 고웅시와 고웅현을 합병하여 면적이 2,947평방킬로메터, 인구가 278만에 달하며 당전 대만경내에서 면적이 제일 크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직할시다. 고웅은 19세기말에 항구를 건설하였고 일제통치시기에 항구도시와 군사요충지로 발전, 20세기중엽 후에는 대만 남부의 정치, 경제, 교통중심으로 되었다. 지금 고웅시는 중공업을 위주로 한 중요한 항구도시이며 대만남부에서 바다길로 통하는 대문으로 되고 있다. 고웅시에 들어서서 우리는 애하(爱河)를 따라 내려가면서 애하량안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애하우에 가로 놓인 다리, 애하량안의 유보도 그리고 고층건물과 나무숲은 애하량안의 경치를 한결 더 아름답게 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애하는 고웅시를 동서로 가르면서 고웅항으로 흘러들었다. 고웅시의 음료수는 주로 이 애하의 물로 해결하기에 이곳사람들은 애하를 생명의 강이라고 부른다. 서자만에서 상해지식청년을 만나다 우리는 애하를 건너 항구가 있는 서자만(西子湾) 갔다. 서자만은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였다. 동쪽은 그리 높지 않은 반달모양의 산이였는데 산에는 빠나나를 비롯한 이름 모를 열대식물들이 가득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층집들이 들어섰는데 상점, 사찰, 영국령사관 관사 등이 있었고 벼랑같이 생긴 산 밑에는 한갈래의 넓은 길이 있었는데 길 한 가운데는 노란색으로《國立中山大學》(국립중산대한)이라고 새긴 적갈색의 커다란 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탑에서 길을 따라 약간 굽이돌아 들어가면 바로 중산대학이라고 한다. 길 서쪽이 바로 서자만인데 서자만이 바로 고웅항이였다. 고웅항 서자만은 유람객들로 붐비였다. 우리는 산이며 부두며 중산대학 간판으로 세워진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거기에는 우리 팀 외에도 대륙의 길림, 산서, 광서, 상해 등 여러 지방에서 온 관광팀이 있었다. 나는 서자만의 경치를 다 구경하고 걸상에 앉아 쉬면서 옆에 앉은 60대의 남성과 이말 저말 대화를 나누었다. 상해에서 왔다는 그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길림에서 왔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길림 어디에서 왔는가고 바싹 묻는것이였다. 내가 연변에서 왔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알고보니 그는 지난 세기 60년대에 연변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이였다. 그는 자기 옆에 앉은 녀인을 가리키면서 자기들은 부부간인데 자기는 화룡현 남평에 하향하고 안해는 룡문에 하향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변은 자기들의 제2고향이며 연변에서 온 나를 만나니 매우 반갑다는것이였다. 그렇다! 그시절 그들은 어린 나이에 연변의 농촌마을에 내려와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연변에 대해 짙은 감정을 키웠고 연변을 제2고향으로 간주하며 연변을 잊지 않고있다. 나는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우리 팀을 따라 산우에 있는 따꺼우영국령사관(打狗英国领事馆官邸)으로 갔다. 따꺼우영국령사관(打狗英国领事馆官邸) 따꺼우영국령사관은 고웅시 고산구(鼓山区)에 서자만(고웅항) 북안의 높은 언덕우에 있었는데 북쪽으로는 산과 린접하였고 동, 남, 서쪽은 모두 깍아찌르는듯한 벼랑으로 바다와 잇닿아 있었다. 령사관내에는 진귀한 고웅의 력사자료, 도편, 실물 및 모형들이 진렬되여 있어 일명 고웅사적문물관이라고도 부른다. 따꺼우영국령사관은 대만에서 제일 먼저 건축한 2층으로 된 양옥이며 높은 언덕우에 있기에 항구와 고웅시를 내려다 볼수 있었다. 따꺼우영국령사관 1858년 천진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이 체결된후 대만은 점차 통상구를 개방하였다. 이때 영국은 대만무역의 경제리익을 확장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이곳에 령사관을 설치하고 상무와 지방교섭사무를 대행하였다. 1894년 갑오전쟁후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면서 일본사람들이 따꺼우영국령사관을 고웅해양관측소로 고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비행기의 폭격으로 파손되고 수차례 태풍의 습격을 받아 페허로 된것을 1985년에 복원하고 1987년에 2급고적에 넣고 고웅사적박물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따꺼우(打狗)》란 대만의 원 주민들이 이곳에서 참대를 많이 생산하면서 생긴 지방 이름이라고 한다. 평포족어(平埔族语)로 《takau》는 죽림(竹林)이란 뜻인데 한어 음역으로는 《打狗》로 되여 이 지방을 따꺼우라고 부른것이지 영국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모욕하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일본강점기에 일본인들은 《打狗》란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이 지명을 《高雄》(고웅)이라고 고치였다. 애하의 야경 저녁에는 야시장을 구경하면서 고웅시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나는 야시장을 한바퀴 돌아보고 서점에 들어가 보았는데 대만지도와 관광안내 책들이 있기에 그것을 사가지고 애하강변에 가서 량안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후일계속] 주청룡 특약기자
54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5] 댓글:  조회:6188  추천:0  2014-01-22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5]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11 15:17:06 ] 클릭: [ ]   이튿날(5월 4일)에는 대만의 명산 아리산으로 향했다. 뻐스가 아리산을 향해 발차하자 가이드가 아리산의 개황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였다. 아리산은 대만의 유명한 풍경구로서 대만성 가의시(嘉義市)에서 동쪽으로 75킬로메터 되는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옥산(해발 3952메터)과 린접하여 있다. 아리산은 18개의 높은 산으로 조성되였는데 옥산산맥의 지맥이라고 한다. 제일 높은 곳은 대탑산(大塔山)으로서 해발 2663메터이고 총면적이 1,400헥타르로서 신목(神木: 아리산의 회목군), 벚꽃(樱花), 운해(雲海), 일출(日出) 이 네가지 아름다운 경치로 하여 세상에 널리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때문에 《아리산에 가보지 않으면 대만의 아름다음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아리산은 기후가 상쾌한데 년평균기온이 섭씨 10.6도이고 여름이 평균14.3도, 겨울이 평균 6.4도라고 한다. 아리산 명칭의 유래를 보면 이 산에는 원래 추족(邹族: 고산족의 13개 족군가운데의 하나)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약 250년전에 이 부족을 이끌었던 아바리(阿巴里)라고 하는 추장(부족두령)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했으며 사냥도 잘 하여 덕망이 매우 높았는데 추족들은 그를 경모하여 그의 이름으로 이산을 아리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산으로 올라가는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구릉지대는 주요하게 열대활엽림이였다. 대만 아카시아나무(相思樹), 닥나무(构树: 뽕나무과에 속하는 활엽관목), 빠나나나무, 빈랑(檳榔)나무, 참대 등이 위주였고 해발 800메터로부터 1,800메터 사이에는 녹나무(樟树), 단풍나무(枫树), 참대, 참나무과의 난온대식물이 위주였으며 1,800메터부터는 아리산의 5목으로 불리우는 붉은 전나무(紅檜), 대만측백나무(台湾扁柏), 대만삼나무(臺灣杉), 철삼나무(鐵杉), 화산송(華山松) 등 침엽수들이 대량으로 생장하였다. 아리산의 천년 회목군(檜木群)은 대만에서 가장 밀집된 거목군(巨木群)이라고 한다. 뻐스는 계속하여 갈지(之)자로 허위허위 산을 톱아 올랐는데 앞의 뻐스가 우리의 머리꼭대기로 지나가고 뒤의 뻐스가 우리의 발밑에서 기여가고있었다. 산중턱부터는 구름이 우리가 탄 뻐스와 삼림을 할기작거리며 스쳐지나갔고 산꼭대기에 거의 오르니 구름이 우리의 발밑을 핥으며 흘러가고 있었다. 산중턱을 많이 넘어서부터 산꼭대기를 거의 올라갈 때에 드문드문 농가가 보이고 차밭이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아리산차라는것이였다. 아리산 처녀들이 한창 차잎을 뜯고 있었다.   차잎을 뜯고있는 아리산 녀성들   우리는 뻐스로 신목(神木)역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소철을 타고 다음역인 아리산역까지 가게 되였다. 기실 뻐스는 아리산엮까지 갈수 있었지만 아리산의 소철을 타보는것도 관광코스의 하나라고 하였다. 신목역과 아리산역에는 모두 해발고도가 표시되여 있었는데 신목역의 해발고도는 2,138메터이고 아리산역의 해발고도는 2,216메터였다. 아리산의 소철 가이드와 물어보니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역은 소평역(沼平車站)이며 해발 2,274메터라고 하였다. 아리산의 직선거리는 15킬로메터밖에 안된다. 그러나 한층한층 라선형으로 타래쳐 올라가는 철로는 그 길이가 72킬로메터이며 산꼭대기에 거의 올라가서는 갈지(之)자형으로 올라가는데 3시간 15분이 걸린다고 한다. 일본침략자들은 아리산의 목재를 략탈하기 위해 1899년부터 시작하여 아리산에 최대 경사도가 6.25도, 최소 반경이 40메터되는 소철을 부설하기 시작하여 1924년에 해발 30메터의 가의역(嘉义車站)으로부터 해발 2,216메터의 아리산역까지 총길가 71.4킬로메터의 철로를 부설하였다. 이 철로에는 49개의 턴넬, 77개의 철교, 21개의 정거장이 있다. 각 삼림구는 지선으로 련결되였는데 총길이는 1,000킬로메터고 82개의 턴넬중 가장 긴 턴넬은 1,300메터에 달한다고 한다. 아리산철로는 인도의 대길령(大吉嶺)로부터 희말라야산까지의 철로, 칠레로부터 아르헨띠나의 안데스산까지의 철로와 더불어 세계 세갈래의 등산철로라고 한다. 나는 가이드의 이런 소개를 듣고 일본침략자들의 욕심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하는것을 다시한번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우리나라 동북지역에서도 지하자원과 삼림자원을 략탈해 가기 위하여 많은 철로를 부설하였고 여기 대만에도 역시 삼림자원을 략탈하기 위해 이렇게 높은 고산철로들 부설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또 조어도까지도 자기네 령토라고 주장을 하는것을 보면 군국주의 그 본질은 개변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산역에 내려 우리는 아리산삼림공원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대부분 붉은 전나무들이였는데 모두 난생처음 보는 몇아름씩 되는 거목들이였다. 아리산에는 원래 높이 60메터, 직경이 6.5메터되는 붉은 전나무(紅檜樹)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세계상에서 발견한 제일 큰 붉은 전나무였다고 한다, 그런데 1997년 7월 1일에 넘어지면서 세계 제1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우리가 본것도 특별히 컸는데 그 옆의 표시판을 보니 《樹種: 紅檜 (수종: 붉은 전나무), 胸圍: 12.3m (흉위: 12.3m), 樹高: 45m (수고: 45m), 樹齡: 約2300年 (수령: 약 2300년)》이라고 씌여 있었다. 둘레의 길이가 12.3메터이니 나무의 직경이 3.92메터가 되는 셈이였다. 나무가 너무도 굵으니 우리 팀의 녀성들이 팔을 벌리고 나무를 둘러쌌는데 8명이 팔을 쭉 펴야 둘러쌀수 있었다. 아름드리 붉은 전나무(紅檜樹) 아래서 아리산에는 또 자손3대가 한자리에서 자란 나무들이 있는데 제 1대가 늙어서 넘어진 다음에 제2대가 거기에서 자라고 제 2대가 늙어서 넘어진 다음 제3대가 또 다시 거기에서 자라 자손 3대가 한자리에서 자란다고 하여 3대목(3代木)이라고 하였다. 3대목(三代木) 아래서 아리산에는 또 아리산박물관도 있었다. 박물관 안벽에는 일본침략자들의 목재를 략탈해간 죄악적 사실들이 적혀 있었고 그때 당시 철도 로동자들이 쓰던 공구, 전화 등이 전시되여 있었으며 당시에 사용하던 기관차와 지금에 사용하는 기관차 모형도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일제가 쓰던 기관차모형 내려오면서 우리는 모두 차점에 들어서 대만기념으로 아리산차를 샀다. 아리산에 와서 나는 일생에서 타보지 못하였던 소철도 타보았고 아리산 박물관 그리고 직경이 4메터 거의 되는 거목과 더불어 삼림의 경치를 쭈욱 감상하였다. 하지만 아리산은 또 벚꽃과 일출, 일몰이 그렇게도 아름답다고 하는데 계절과 일시가 맞지 않아 큰 유감으로 남길수밖에 없었다.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5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4] 댓글:  조회:6213  추천:0  2014-01-1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4]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08 10:46:50 ] 클릭: [ ] 이튿날(5월 3일)부터는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유람하게 되였다. 가는 도중에 안내원은 동영상으로 대만의 력사에 대하여 간단간단하게 소개하였다. 간추리면 1624년부터 1662년까지 38년간은 화란이, 1662년부터 1683년까지 21년간은 정성공(명나라)이, 1683년부터 1895년까지 212년간은 청정부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간은 일본이, 1949년부터 1975년까지 25년간은 장개석(국민당)이, 1978년부터 1988년까지 10년간은 장경국(국민당)이, 1988년부터 2000년까지 12년간은 리등휘(국민당)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8년간은 진수편(민진당)이 통치했고 2008년부터 현재까지는 마영구(국민당)가 령도하고 있다는것이다.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부분이고 행정구역으로는 중국의 한개 성이며 중국의 보배섬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대만은 아직 완전히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있다. 언제면 엄격한 관문이 없이 자유롭게 래왕할수 있는 그날이 올수있을가, 나는 착잡한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짐을 느꼈다. 중대선사(中台禪寺) 우리의 관광코스는 대만 중부의 중대선사, 일월담, 아리산 등이였는데 중대선사가 첫코스였다. 중대선사(中台禪寺)는 중대산(中台山)이라고도 하는데 남투현포리진(南投县埔里鎮)에 자리잡고있었으며 유각(惟觉)스님이 1994년에 창설한 불교사원이다. 집의 높이는 136메터이고 37층으로 되여 있는데 목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높은 불교사원이다. 대만에 80개 분원이 있다고 한다. 중대선사(中台禪寺) 사원안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사천왕전(四天王殿)이다. 사천왕은 불법의 신명(神明)으로서 각기 《동방지국천왕(东方持国天王)》,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长天王)》, 《서방광목천왕(西方广目天王)》, 《북방다문천왕(北方多闻天王)》으로서 그들의 손에는 각기 풍조(风调), 우순(雨顺), 국태(国泰), 민안(民安)을 상징하는 법기(法器)들이 쥐여있었다. 사대천왕의 신상은 산서의 화강암으로 조각하였고 높이는 모두 12메터이고 무게는 100톤이였으며 커다란 기둥과 같이 전당의 네 모퉁이에 받혀 새워져 있었다. 사천왕전(四天王殿) 사천왕전은 중대선사의 주체전당으로 미륵보살(弥勒菩萨)이 전당중앙에 모셔져 있다. 미륵보살(弥勒菩萨) 미륵보살의 뒤에는 갑옷을 입고 두손으로 검을 쥔 베다보살(吠陀菩萨)이 있었다. 사천왕전에서 넓다란 계단을 걸어 2층으로 올라가면 대웅보전(大雄宝殿)인데 대웅보전은 대사원에서 불상을 모시는 정전(正殿)이다. 정전에는 인도의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한 석가모니상이 전당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유람객가운데서 불교신도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가족의 행복이나 자신의 앞날에 대한 소망을 안고 불상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나는 비록 기도는 하지 않았지만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대하여 리해가 가면서 그것도 일종 불교사원에 들어와서의 례의가 아닌가 싶었다. 석가모니불상(释迦牟尼佛像) 사원에는 이외에도 대장엄전(大庄严殿),대광명전(大光明殿), 만불전(万佛殿), 보살전(菩萨殿), 삼세불전(三世佛殿), 원명전(圆明殿), 선당(禅堂), 강당, 등이 많았는데 사실 불교문화를 모르고 보다니 그저 말타고 꽃구경하는식으로 어디에 가나 여러가지 형태의 불상들이 많았다는 인상밖에 남지 않았다. 중대산박물관(中台山博物館) 중대산박물관은 불교문물을 주체로한 박물관으로서 중대선사(中台禅寺)옆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009년 10월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창설인은 유각(惟觉)스님이였고 그 취지는 종교를 널리 선전하고 《불법의 예술화》를 락실하며 불교력사문화를 보존하고 계승발전하며 연구하여 불교예술을 발양하려는데 있다고 한다. 안에는 근 200년의 중국내지, 서장, 인도 등 삼대지역의 력대 불교문물과 석상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일월담(日月潭) 오후에는 일월담으로 갔다. 일월담은 대만도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구로서 대만서부의 남투현어지향(南投县鱼池乡)에 있으며 대만에서 가장 큰 천연호수이며 옥산과 아리산사이에 단렬된 분지에 모인 물로 형성되였다고 한다. 호수 둘레의 길이는 35킬로메터이고 면적은 7.7평방킬로메터, 수심은 20메터내지 30메터이고 수면은 항주 서호(6.5평방킬로메터)보다 크며 수심은 서호(2.27메터)의 10배를 넘는다고 한다. 일월담은 본래 두개의 단독섬으로 되였는데 후에 발전(发电)의 수료로 하여 두 섬을 련결시켜 놓았다고 한다. 호수의 북반부는 해와 같이 좀 둥글게 생겼고 호수의 남반부는 좀 반달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일월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일월담전경 호수안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진주가 물우에 떠 있는것같다고 하여 《진주섬》으로 불리우며 일명 라루도(拉鲁岛)라고도 한다. 일월담주위에는 많은 정자루각, 사당, 옛탑이 있고 산허리에는 현장사(玄裝寺), 문무묘(文武庙) 등 여러개의 명승고적이 있다. 호수주위가 산으로 둘러있으며 호수가 잔잔하고 맑아 주위의 산과 건물들이 호수에 비껴 마치 거울같았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일년 사계절, 아침과 저녁에 호수에 비끼는 풍경이 변화무쌍하여 전설가운데의 선경이라고 한다. 겨울의 평균기온이 15℃이상이고 여름기온이 22℃로서 사계절의 기온이 사람에게 적합하여 아주 좋은 피서지이며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되고있다. 일월담은 원래 경치가 좋은데다가 장개석과 송미령도 이곳을 자주 찾아 다니면서부터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우리는 호수의 남쪽대안에서 유람선을 타고 호수가운데의 진주섬을 지나 북쪽대안의 산에 올라가서 여러 명승고적과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많은 기념사진들을 남겼다. 나는 명승고적과 호수와 호수주위의 뭇산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보배섬이 하루속히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후일계속]
52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3] 댓글:  조회:6310  추천:0  2014-01-0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3]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2-27 14:05:57 ] 클릭: [ ] 다음으로는 대북의 101빌딩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안내원은 텔레비죤을 켰는데 호금도주석과 국민당영예주석 련전이 악수하는 장면, 그리고 온가보총리와 대만당국지도자 마영구가 회담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만약 량안관계가 긴장한 상태에 있다면 내가 어찌 이 대만으로 올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런 지도자들이 있어 량안관계를 개선하였기에 오늘 내가 이 대만에 와서 유람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1빌딩 차가 대북시에 들어서자 안내원이 차창밖을 내다 보며 《저 멀리 보이는 것 101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밖을 내다보니 정말 공장건물가운데 우뚝 솟은 굴뚝처럼 시내의 수풀같이 들어선 건물 한 가운데 하나의 건물이 굴뚝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101빌딩은 별칭으로는 대북국제금융쎈터(台北国际金融中心)인데 대북시 신의구(信义区)에 위치해 있으며 총 부지면적이 30,278평방메터이고 건축면적은 28.95만 평방메터, 탑 꼭대기의 높이는 509메터, 층집의 높이는 449메터, 지하 5층, 지상 101층으로 되여 있다. 이 빌딩은 1999년 7월에 시공, 2004년 12월에 준공되였는데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였다. 그 후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탑 (哈利法塔: 162층 높이 828메터)와 광주탑(广州塔: 600메터)에 밀리워 지금은 세계 3위다. 101빌딩앞에서. 이 빌딩은 쑈핑쎈터, 식당, 레저오락, 회의쎈터, 국제금융쎈터, 사무실, 전망대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설비용은 대만화페로 580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쑈핑쎈터에는 시계, 전자제품, 금은보석, 화장품, 의복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명품들이 다 진렬되여 있으며 식당도 세계 여러 나라 음식들을 다 맛을 볼수 있다고 한다. 101빌딩 89층은 전망대였는데 거기까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승강기문이 닫혀 얼마 안된것 같은데 전망대에 도착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벌써 올라왔는가고 하니 안내원이 이 승강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승강기로서 초속이 16.83메터, 89층까지 올라오는데 39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망대는 사면이 다 유리벽으로 되여 있어 한 바퀴 빙 둘러보면 대북시의 전경을 다 내려다 볼수 있었다. 대북시는 분지로서 사면이 산과 구릉지대로 둘러싸여 있었고 시안에는 고층건물들이 콩크리트숲을 이루었으며 한가운데로 담수하(淡水河)가 흐르고있었다. 시내를 내려다보면 가장 눈에 띄우는것이 굽이쳐 흐르는 담수하였다. 전망대에서 본 대북시 일각(멀리 담수하가 보인다). 중정기념당 중정기념당은 부지면적이 25헥타르로서 주체건물은 중정기념당이고 그 주위는 각종 나무와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화초로 된 공원이다. 기념당 남쪽정문 앞은 자유광장이고 광장남쪽에는 《자유광장》패방(牌坊)이 있다. 광장동쪽에는 가극원, 서쪽에는 음악청이 있는데 중국궁전모식으로 지었는데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자유광장》패방의 높이 30메터 너비 80메터, 6주5문(6柱5门) 11개 지붕으로 되여있으며 중정기념당으로부터의 거리는 470메터이다. 자유광장패방앞에서. 자유광장은 넓은 면적에 주위 건축물들이 웅위롭고 아름다워 대만 민중들의 레저광장으로 사용되고있으며 각종 집회도 이곳에서 진행되는 등 관광명소로 되고있다. 중정기념당에서 내다본 자유광장. 중정기념당은 장개석(이름 중정, 자 개석)의 이름으로 명명한 기념당으로 대북시 중정구 중산남로 21번지에 위치하여 있다. 장개석이 1975년 4월 5일에 병사하자 대만당국은 중정기념당을 지을것을 결정짓고 1977년에 시작하여 1980년에 준공하고 동년 4월 5일부터 대외에 개방하였다. 2007년 5월 민진당정부에서 《중정기념당》을 《대만민주기념관》으로 고치고 간판도 고쳤는데 2008년 5월 국민당이 다시 집정하자 그것을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고치고 2009년 7월 간판도 《중정기념당》으로 다시 걸었다고 한다. 기념당의 정문으로 올라가는데는 화강석으로 된 층계가 89개가 있는데 장개석이 89세까지 향수(享壽)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중정기념당 중정기념당 안에는 기념대청, 문물전시실, 중앙복도, 강연청, 회은화랑(怀恩画廊), 중정기념도서관, 중정기념실 등이 있다. 기념대청은 기념당의 중앙부분으로서 1,2층을 통칸으로 하여 높이 6.3메터, 무게가 21.25톤이 되는 장개석이 쏘파에 앉아있는 모양의 동상을 커다랗게 모셔놓았다. 그리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의장대가 매 시간마다 근무교대의식을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도 교대의식을 하였다. 호위근무는 한 조에 5명씩이였는데 교대의식을 하는 것이 총창을 빼들고 여러가지 표현동작을 하면서 하였는데 10분도 더 되였다. 중정기념대청 중정기념실에는 장개석의 사무실을 원 모양대로 장식하여 놓고 밀랍상(蜡像)으로 장개석이 사무를 보는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문물전시실에는 장개석의 일련의 활동사진과 문헌들이 있었고 장개석이 입던 군복과 례복들이 진렬되여 있어으며 중앙복도에는 장개석이 타고 다니던 캐딜락(凯迪拉克)승용차가 전시되여 있었다. 장개석의 사무실 강연청에는 학자, 전문가들의 강의를 청취하는 장소로 쓰고 있었다. 회은화랑(怀恩画廊)에는 예술가들이거나 예술단체의 예술작품전람을 하는 장소로 되고있었다.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51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2] 댓글:  조회:6370  추천:3  2013-11-21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1-18 15:38:37 ] 클릭: [ ] 사림관저(士林官邸) 고궁박물원을 둘러본후 우리는 사림관저(士林官邸)로 갔다. 사림관저는 대북시 사림구 복립로(台北市士林区福林路)에 위치해 있는데 원래 장개석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대북시의 생태공원으로 되여 있다. 사림관저공원 사림관저는 일본 강점시기에 일본총독부의 원예소였다. 광복후 대만성 정부 농림청에서 농업실험소로 접수하여 사림원예실험분소를 성립하였다. 장개석이 대만에 오기직전에 당시의 대만성 정부 주석인 진성(陈诚)이 친히 이곳을 장개석의 관저로 정하고 1949년에 짓기 시작, 1950년 5월에 준공하여 장개석이 입주했다고 한다. 이곳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 좋고 물 맑으며 환경이 수려하다.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이 사망하자 9월에 송미령이 미국 뉴욕에 갔고 그로부터 이 관저는 비여 있다가 1996년에 대외에 개방했다. 지금은 관광명소와 시민들의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소로 되고있다. 사림관저는 산구와 평지로 나누는데 약 20헥타르의 산구는 경비지대이며 평지는 5.2헥타르다. 원내에는 고목이 하늘을 치솟고 가지각색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경치가 수려하고 그윽하다. 이곳은 광주와 같은 위도선에 놓여 기후가 광주와 비슷하였으며 식물종류들도 광주와 비슷하다. 사림관저는 밖으로부터 안으로 외화원, 내화원, 관저 몇개 구로 나눈다. 외화원에는 온실 분재구(盆栽区)와 장개석과 송미령이 즐기는 매화나무, 장미원, 망과, 다래 등 꽃과 나무들이 있어 련인들이 산책을 즐길수 있는 좋은 곳이라고 한다. 내화원은 중국식 정원과 서양식정원이 있으며 서양식정원의 묘포, 꽃꽂이예술, 조각, 못 등은 모두 서양풍정이 넘쳐나며 중국식 정원에는 아치교, 정자, 구불구불한 못, 물의 흐름 등은 동방정원의 조경이 고대 중국을 방불케 하고있다. 장개석과 송미령은 각자 다른 풍격이 있었는데 송미령은 서양화에 흠뻑 빠진 지성(知性)적 녀인이고 장개석은 봉건유교사상이 남아있는 관료였다. 관저정방(正房)은 2층 콩크리트구조로 외벽은 청회색으로 되었다. 1층은 큰 객실이고 2층은 침실, 식사칸, 송미령의 화실 등이 있다. 건축은 비록 서양식으로 하였지만 내부 장식은 중국전통풍격을 살리였다. 관저정방 식사칸에는 긴 상과 둥근상이 있었는데 사람이 적을 때에는 둥근 상을 사용하고 사람이 많을 때에는 긴 상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장개석은 음식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았으며 평시의 식사는 아주 간단하였다고 한다. 정관대문에 들어서면 복도에 4폭의 송미령의 친필국화가 있다. 책상과 걸상 역시 중국식과 서양식을 결합하여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암홍색의 주단을 깔았다. 송미령이 대만에 온후 중국화에 집착하여 국화대사 장대천(张大千)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란초, 참대, 산수화를 그리는데 정신이 팔렸다고 한다. 외계에서 송미령의 그림이 다른 사람이 대필한것이 아니냐 하는 여론이 있었는데 송미령은 공자의 탄생기념일에 여러 국화명가들을 요청하여 식사를 하고 식사후 손수 붓을 날려 그림재주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후 다시는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객실벽에는 장개석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의 유화유상이 걸려 있었다. 원내에는 또 례배당도 있는데 장재석은 원래 교를 믿지 않았지만 송미령과 결혼할 때에 송미령의 어머니가 기독교신자가 되여야만이 혼인을 허락한다는 조건에 의하여 장개석도 기독교를 믿게 되였다고 한다. 야류지질공원 (野柳地质公园) 이튿날(5월 2일)에는 먼저 야류지질공원(野柳地质公园)으로 갔다. 야류지질공원은 신북시만리향(新北市万里乡)에 위치해 있으며 북해안쪽으로 뻗은 좁고 긴 모습을 한 해갑(海岬)이다. 천백만년의 침식, 풍화작용으로 버섯바위, 초대바위, 생강바위, 호혈(壶穴),해식동굴 등과 같은 지형이 점차 형성되였는데 전체 길이는 1,700메터에 달한다. 야류지질공원은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지질공원이 되였고 또한 주변의 풍부한 해양생태, 어촌풍경 등의 다양한 풍경들이 더해져 교육, 관광 그리고 휴양지 기능을 갖춘 관광명소로 되고있다. 이곳에는 버섯바위, 촛대바위, 벌집바위, 생강바위, 바둑판바위, 피아노바위, 두부바위, 새바위, 아이스크림바위, 코끼리바위, 땅콩바위, 구슬바위, 락타바위, 여왕머리, 선녀신발, 화석, 해식절벽, 해식평대, 절리(암석에 비교적 규칙적으로 생긴 금), 해식동굴(海蝕洞), 해식골짜기 등이 있다. 지질공원 일각 표고버섯 모양을 한 버섯바위의 형성과정은 암층이 해수면 우로 로출되여 밤낮으로 해수의 침식을 받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암(砂岩)속의 단단한 결핵이 천천히 드러나게 되였다. 여기에 다시 바람과 해빛, 비물, 파도 및 동북계절풍의 강한 영향을 받아 목이 굵은것, 목이 가늘거나 목이 부러진 각기 다른 형태의 버섯바위가 형성되였다고 한다. 이 지질공원에는 이러한 버섯모양의 바위가 180여개나 된다. 녀왕머리바위 벌집모양의 바위의 형성원인을 보면 암석표면의 생물파편들이 용해되여 깎이고 다시 그 구멍들이 해수로 인해 용해되고 깎이게 되면서 구멍이 숭숭난 모양을 가지게 되였다고 한다. 초대바위 생강바위는 암층가운데의 비교적 단단한 칼슘성분의 돌덩이에 그 주변은 비교적 부드러운 암층으로 되여 있어 오랜 기간 동안 해수로 인한 일어나고 떨어지는 과정을 거듭하였다. 거기에 지층이 밀려오면서 가로 세로 교차된 균렬까지 더해지면서 형성되였다고 한다. 표범바위 신바닥바위 해식동굴은 해갑이 해수면 우로 상승하면서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암층이나 자연적으로 생긴 파렬면을 파도가 날마다 쓸어내면서 오목한 벽이 생기고 결국 파도의 끈질긴 힘으로 그것이 해식동굴로 되였다고 한다. 주청룡특약기자 [다음계속]
50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 댓글:  조회:7594  추천:0  2013-11-1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1-11 11:41:11 ] 클릭: [ ] 지난 4월 30일, 우리 부부는 연변문화국제려행사에서 조직한 대만관광을 떠났다. 5.1절 련휴기간을 리용하여 대만관광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 팀은 34명이였다. 연길-광주-대만 코스를 리용한 우리는 오후 4시에 연길공항을 떠나 저녁 10시에 광주에 도착하였다. 우리 연변에는 아직 복숭아꽃, 살구꽃도 피지 않은 이른 봄이였지만 광주는 빈랑나무, 빠나나나무, 야자수 등 열대식물들과 이름 모를 상록교목이 우거진 록색세계였다. 이튿날(5월 1일), 광주에서 12시에 떠나 대만 도원(桃园)비행장에 도착하니 1시 반이였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니 대만 평화려행사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40대 초반의 녀성 안내원(가이드)이 《조국대륙에서 오시는 관광객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热烈欢迎祖国大陆来的游客们)》며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하였다. 나는 《조국대륙》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대만인민들이 대만을 중국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대륙을 그리고 조국의 품속을 그린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 후에도 안내원은 《대륙》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꼭 《대륙》앞에 《조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였다. 나는 이것이 바로 그들이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마음의 구체표현이라고 느껴졌다. 우리를 태운 차는 대북시로 향하였다. 뻐스에서 안내원은 대만과 대북시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대만은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대만해협, 남쪽으로는 바시해협(대만과 필리핀의 바탄제도 사이의 해협), 북쪽으로는 동해사이에 있는 섬으로서 광주와 같이 북회귀선 우에 놓여 있으며 전체 대만도서(台湾岛屿)의 면적은 36,200평방메터, 대만 본섬은 남북길이가 가장 긴곳이 394킬로메터, 너비가 가장 넓은 곳이 144킬로메터이고, 면적은 35,800평방킬로메터였는데 우리 연변(43,474평방킬로메터)보다 작다. 대만의 전체 인구는 2,320만명인데 그중 한족이 98%, 소수민족이 2%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수민족은 대만의 원 토착민으로서 주로 산구에서 산다. 대륙에서는 고산족이라 하지만 대만에서는 고산족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고산족을 13개 족군(族群) 나눈다. 대만은 행정구역을 5개 직할시[대북(台北), 신북(新北), 대중(台中), 대남(台南), 고웅(高雄)], 3개 성할시[기룽(基隆), 신죽(新竹), 가의(嘉义)]로 나누었다. 사진(1): 대만지도 대만은 산이 많은데 고산지대와 구릉지대가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하며 동부는 산맥이 많고 중부는 구릉이 많고 서부는 평원이 많은것이 특징이다. 대만은 5대 산맥, 4대 평원, 3대 분지로 되여 있다. 5대 산맥으로는 중앙산맥(中央山脉), 설산산맥(雪山山脉), 옥산산맥(玉山山脉), 아리산산맥(阿里山山脉), 대동산맥(台东山脉)이고, 4대 평원으로는 의란평원(宜兰平原), 가남평원(嘉南平原), 병동평원(屏东平原), 대동종곡평원(台东纵谷平原)이며, 3대 분지지로는 대북분지(台北盆地), 대중분지(台中盆地), 포리분지(埔里盆地)이다. 기후는 북부는 아열대기후이고 남부는 열대기후이며 산구를 제외한 지역의 년 평균기온은 22℃,년강수량은 2,000미리메터 이상에 달한다. 대만의 농업은 경작지가 전체면적의 1/4이며 주로 벼를 생산하는데 일년에 2모작, 3모작을 하며 미질이 좋고 생산량이 높다. 주요경제작물로는 사탕수수와 차다. 이외에 채소와 과일도 종류가 많다. 대북시는 대만북부의 대북분지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길이 28킬로메터, 동서너비는 20.5킬로메터 면적은 272평방킬로메터. 인구는 267만 6천명으로 대만의 정치, 경제, 문화, 상업 및 언론의 중심이다. 대북 고궁박물원 우리는 대북시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대북고궁박물원으로 갔다. 대북고궁박물원은 대북시 사림구외쌍계(士林区外双溪)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북고궁박물원은 총 부지면적이 16헥타르로 산과 물을 끼고 기세가 웅위롭고 푸른 기와 황색벽은 중국 전통적인 궁전색채를 띠였는데 1962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65년에 준공하고 1966년에 개관하였다. 대북고궁박물원. 고궁박물원의 주체건물은 4층으로 되였는데 남경국립중앙박물원, 북경고궁, 심양고궁과 승덕의 열하행궁(热河行宫) 등 곳에서 가져온 문물과 해내외 각계 인사들이 기증한 문물 도합 67만 7,609건이 수장되여 있다. 1층은 사무실, 도서관, 강연청, 2층은 서화전람, 청동기, 도자기, 후가장(侯家庄)공원묘지모형 및 묘에서 출토한 문물, 3층에는 서화, 옥기(玉器), 법기(法器: 부처 공양에 쓰이는 기구), 조각, 도서, 문헌, 비첩(碑帖), 수놓이, 4층에는 여러가지 특정주제전람(主题展览)이다. 문물은 서주시기의 상형문자로부터 시작하여 각개 시기의 문물들이 다 있었는데 옥으로 만든 명청시기의 공예품들이 많았다. 많은 문물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박물관의 규정에 의하여 사진을 한장도 찍지 못하였다. 박물원 앞 광장에는 여섯개의 흰 돌기둥에 푸른 오지기와를 얹고 《천하위공(天下为公)》이란 글을 새긴 커다란 패방이 있었다. 《천하위공》은 천하는 여러 사람의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손중산선생은 《천하위공》으로 《민권주의》를 해석하였는데 국가는 응당 국민이 공동소유해야 하는바 이것은 사람마다 평등한 정치적 리상이라고 하였다. 나는 손중산선생의 이 정치적 리념을 가슴에 안고 박물원과 이 패방을 배경으로 여러장의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천하위공(天下为公)》 패방 [후일계속]
49    두만강변에서 오미자를 따다 댓글:  조회:6655  추천:0  2013-10-17
[려행수기]두만강변에서 오미자를 따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0-17 13:24:46 ] 클릭: [ ] 두만강변의 오미자재배기지(저 멀리로 조선의 산이 바라보인다). 국경절련휴 마지막날인 10월 7일, 룡정시통신련합회의 부분적인 회원들은 백금향 백금촌 1대에 자리잡은 오미자재배기지로 로동체험을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이날 아침 일행 7명은 2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앉아 기지로 떠났다. 승용차가 지신향 승지촌 남쪽 륙도하다리를 건너서자 길옆에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기념비와 《5.30폭동지휘부》 옛터 기념비가 있었다. 회원들은 기념비의 비문을 읽으면서 연변의 조선인 반일무장투쟁에 대한 사료를 학습하는 시간을 잠간 가졌다.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기념비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기념비는 룡정시 3.13기념사업회에서 1990년 3월 30일에 세운 기념비다. 1920년 1월 4일에 일본금융기관인 조선은행 회령지행으로부터 조선은행 룡정출장소에 길회철도부설 자금 15만원을 현금으로 수송한다는 정보를 장악한 조선인반일지사들이 이곳에 매복해있다가 그 돈을 탈취했다고 한다. 《5.30폭동지휘부옛터》기념비는 룡정시정부에서 2010년 5월 30일에 세운것인데 1930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연변의 조선족인민들이 중공연변특위의 령도하에 벌린 반제반봉건투쟁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였다. 거기에서 10여리를 더 달리니 대신저수지가 보였다. 대신저수지는 언제의 길이가 453메터, 높이 30메터, 총 저수량이 1900만립방메터인 룡정시에서는 제일 큰 저수지로서 룡정시내의 음료수와 세전이벌 2만무의 논에 관개수를 공급하고있다. 저수지옆으로 뻗은 길을 따라 푸른 물결 넘실대는 저수지풍경과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가을산 경치에 흠뻑 취했다. 한시간 넘게 걸리는 려정이 따분하지 않았다. 백금에서 삼합방향으로 15리가량 달리자 두만강변도로 왼쪽켠으로 오미자기지가 나타났다. 오미자기지의 리주운(52세)사장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는 회원들에게 오미자기지에 대하여 소개해주었다. 이곳은 인민공사때에 백금 1대라고 불리였는데 지금은 당지의 농가들이 모두 이사를 나가고 리사장이 혼자서 그 촌의 14헥타르의 밭을 전부 양도받았는데 3헥타르에는 2000여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2헥타르의 면적에는 오미자를 재배하고있었다. 사과는 묘목을 심은지 3년째되여 금년에 사과가 열리기 시작하였고 오미자는 재배한지 5년이 되는데 작년부터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리사장은 우리더러 먼저 사과밭을 돌아보면서 좋은 사과를 골라서 맛을 보라고 하였다. 과수원은 모두 애나무들이여서 많이 달리지는 않았지만 새빨갛게 탐스럽게 열렸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들고 즐겁다는 어린이. 오미자밭에는 새빨갛게 익은 오미자가 주렁주렁 탑스럽게 열려있었다. 탐스럽게 열린 오미자 우리는 기지의 장기술원과 같이 오미자를 뜯으면서 그에게서 오미자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오미자는 산골짜기 특히 전석지(轉石地)에서 자라는 목란과에 속하는 락엽성 덩굴식물로 열매는 오미자라고 한다. 꽃은 붉은빛이 옅게 도는 황백색을 띠며 열매는 8-9월에 붉은색으로 익는데 씨가 열매당 1-2개씩 들어있다. 열매는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가지의 맛을 고루 갖추고있다고 하여 오미자라 하는데 그가운데에서도 신맛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기술원이 우리더러 맛을 보라고 하여 맛을 보았더니 정말 신맛이 어찌나 강한지 온몸이 오싹 떨릴 지경이였다. 오미자는 약재로 쓰인다는것을 알았지만 어떤 병에 쓴다는것은 잘 몰랐는데 그날 기술원에게서 상세하게 들었다. 오미자는 대뇌신경을 흥분시키고 강장작용을 하며 심장활동을 도와서 혈압을 조절하고 간장에 들어가서는 간장의 대사를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효능은 성신경의 기능을 향진시키므로 유정(遺精), 몽정(夢精), 유뇨(遺尿), 정력감퇴 등에 효과가 좋으며 특히 기침에 효과가 매우 좋다고 한다. 기술원은 또 오미자의 생장습성을 소개하였는데 약산성부식토에서 잘 자라고 비옥하고 배수가 잘되는 곳에서 잘 자라며 다른 나무에 감아 올라가면서 자라는데 일반적인 덩굴식물들은 오른쪽으로 감아올라가면서 자라지만 오미자만은 왼쪽으로 감아올라가면서 자란다고 하였다. 오미자는 8월 하순부터 10월 상순사이에 익는 족족 따들여 말리는데 해빛에 말리거나 건조실에서 말리는데 해빛에서 말리면 색갈이 좀 검지만 건조실에서 온도를 조절하면서 말리면 색상이 곱다는것이다. 건조실에서 말릴 때에는 처음에 60℃좌우로 조절하고 오미자가 절반쯤 말랐을 때에는 온도를 40℃—50℃로 낮추며 8할 정도 말랐을 때에는 실외에 내놓아 해빛에 완전히 건조시킨다고 한다. 기술원의 소개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미있게 오미자를 따다나니 시간 가는줄을 몰랐다. 오미자 따는데도 학문이 있었다. 오미자송이를 잡아 아래로 당기면 잘 떨어지지 않지만 우로 살짝 당기면 가볍게 떨어졌다. 우리가 한참 신나게 따는데 리사장이 식사시간이 되였다고 알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1시 반이 되였다. 오미자를 따고있는 회원. 우리는 자기가 뜯은것을 모두 건조실에 날라갔고 기술원과 함께 오미자를 조심스레 건조실에 넣었다. 건조실에서 3일이면 건조작업이 끝나고 그때에 다시 오미자를 뜯는다고 하였다. 점심식탁에는 개고기, 돼지고기, 북경오리구이와 백금의 구수한 두부 그리고 여러가지 산나물들이 올랐다. 술은 당연히 오미자술이였다. 아마 우리가 로동체험간다고 해서 미리 준비한 모양이였다. 리사장은 수고하였다고 우리에게 돌아가면서 술을 권하였고 우리도 힘든 일은 아니지만 통신협회의 활동으로 산에 와서 현지로동체험을 한 재미에 너도나도 흥이 도도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권커니작커니 술잔을 들었다. 농촌의 시원한 가을공기를 마시면서 열심히 일한 끝에 먹는 오미자술맛은 달기만 하였다. 술을 마시면서 금년의 작황에 대하여 물었더니 리사장은 금년 오미자 수입을 약 십만원으로 내다보고 옥수수, 콩 등 작물에 사과수입까지 합치면 밥벌이는 된다고 겸손하게 말하는것이였다. 리사장은 또 사과는 래년이나 후년부터 많이 열릴것이라면서 그때가 되면 한국에 가서 벌기보다 몇배 높은 수입을 올릴수 있을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도 지키고 높은 수입도 올리는 리사장이 돋보이기만 하였다. 오후에는 할 일이 없었다. 글 쓰는 귀한 분들이 멀리까지 찾아와 방조해주니 대단히 감사하다며 리사장은 집에 가서 맛을 보라며 사과, 오미자, 호박, 무우 등을 우리 차에 실어주었다. 이날은 룡정통신협회 회원들에게 아주 뜻깊은 하루였다. 도시에서 따분한 글이나 긁적이던 우리가 현지로동체험을 통해 많은것을 배우고 또 단풍 든 가을풍경속에서 변화되여가는 농촌의 모습과 풋풋한 인정세태를 료해하였으니 이 아니 뜻 깊을손가.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48    동남아려행기[18] 댓글:  조회:6160  추천:0  2013-09-16
 동남아려행기[18]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16 10:53:11 ] 클릭: [ ] 말레이시아독립광장 10월 4일, 우리는 말레이시아독립광장으로 갔다. 록색진주초가 깔려있는 8헥타르 면적의 독립광장은 원래는 경기장이였는데 말레이시아독립을 기념하여 웅위로운 독립광장으로 고쳤다고 한다. 1957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가 영제국주의 통치로부터 독립하면서 이곳에 말레이시아국기가 처음으로 게양되였다. 광장남단에 있는 국기게양대는 높이가 103메터로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게양대라고 한다. 광장 한켠에는 화란(네덜란드)식의 건축물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이슬람교풍격의 건축물들이 있었다. 매년 8월 31일이면 말레이시아국민들이 여기에 모여 국가의 독립을 경축한다고 한다. 독립광장 국가영웅기념비 국가영웅기념비는 호빈공원(湖滨公园)맞음 켠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기념비는 높이는 15.54메터이고 황동으로 제조하였으며 기념비에는 《1914-1918、1939-1945、1948-1960》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14-1918、1939-1945는 각각 제1, 2차 세계대전을 의미하고 1948-1960는 말레이시아의 내전을 의미하는데 말레이시아력사에서 《비상시기》라고 한다. 말레이시아는 16세기로부터 선후로 뽀루뚜갈, 화란(네덜란드), 영국의 침략을 받았고 1911년에 영국식민지로 전락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때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1957년 8월 31일 영국식민지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독립전후 말레이시아에는 여러 차례 내전이 발생하여 많은 용사들이 희생되였다. 나라에서는 그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1966년에 세웠다. 국가영웅기념비(国家英雄纪念碑) 기념비 안쪽에는 또 대리석 기반우에 청동으로 주조한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7명 군인들의 조각상이 있는데 용사들의 기백과 풍채를 보여주었다. 그 주위에는 분수못이 있고 못 옆에는 반달형의 주랑(柱廊)이 있다. 영웅조각상(英雄塑像) 국가이슬람교사원(国家清真寺) 말레이시아 국가이슬람교사원은 꾸알라룸뿌르시의 중심지구에 있으며 세계에서 이름있는 이슬람교사원이며 동남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사원이고 이슬람건축예술의 걸출한 대표이다. 이 사원은 1957년에 말레이시아의 제1임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의 창의하에 착공하였으며 1965년에 전부 중공하였다고 한다. 이 사원은 건축조형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외관과 장식이 아랍이스람건축형식과 현대식을 서로 결합하였다. 사원의 주요 건축들로는 례배대전(礼拜大殿), 선례첨탑(宣礼尖塔), 릉묘와 사원 사무청사이다. 례배대전은 높고 넓으며 8,000명이 례배를 할수 있어 중대한 종교행사는 여기에서 거행한다. 건물우에는 49개의 크고 작은 꽃봉오리 모양의 둥근 지붕이 얹혀져 있으며 매 지붕은 18쪼각으로 조성되였는데 18은 이슬람교의 《5공(五功: 认、礼、斋、课、朝)》과 말레이시아의 13개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건물 우에는 또 뾰족한 탑들이 여러 개 있는데 이는 무슬림은 현대과학을 중시한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73메터이며 승강기와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국가이슬람교사원(国家清真寺) 오후에는 지방특산물상점, 보석상점들을 돌아보았는데 화페는 싱가포르 화페도 통용되였으며 환률은 인민페 대 말레이시아화페가 2.5:1이였다. 이로서 말레이시아 관광은 끝나고 다시 해관이 있는 신산시(新山市)로 향하였다. 이번 동남아려행에서 생각밖으로 인상 깊은것이 말레이시아가 도시나 산과 들, 도로 등 어디라 할것 없이 환경이 매우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이나 구릉지대에 비가 내려 물이 몰려내리는 곳이면 가로세로 전부 콩크리트로 물도랑을 만들어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수토류실이 없이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원래 나의 생각에는 말레이시아인들이 갈색인이고 하니 환경도 그냥 그럴테지 하고 생각하였는데 이번 려행길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였다는 인상을 갖게 되였다. 이때 나는 피부색갈이 검다하여 환경도 어지러울거라는 너무 어리석은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끼였다. 호텔에 들어 행장을 풀고 텔레비죤을 켜니 북경에 큰 눈이 내려 불도젤로 눈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곳은 35도의 무더운 날씨인데 북경에는 벌써 큰 눈이 내리다니? 11월 초에 북경에 큰 눈이 내리기는 력사상 보기 드문 일이지만 그래도 큰 눈이 내렸다는것은 벌써 겨울에 들어섰다는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이라지만 세상은 넓고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에서는 눈이 내리지만 한쪽에서는 꽃이 피고, 나는 이때 《장백산에 눈이 오고 오지산에 꽃이 피네》란 노래가 떠 올랐다. 그렇다 우리 나라를 놓고 보더라도 북방에서는 눈이 내리지만 남방에서는 꽃이 피고 있는데 전 지구적으로 놓고 볼때에 더 말할나위가 있겠는가? 이것도 이번 려행에서 나의 머리속에 추억으로 남아있을 하나의 자연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튿날 (11월 5일)아침 우리는 일찍 해관을 건너야 했다. 가이드는 우리를 해관까지 바래다 주었으며 갈라질 때에 중국동포들에 대한 석별의 정이 듬쁙 담겨 있었다. 이번 려행에서 3개 나라의 가이드들은 모두 화인 후예들이였다. 그들은 비록 중국을 떠나 나른 나라에서 살지만 그래도 모두 중화민족의 피를 타고 난 민족이라 중국이 번영발전할것을 바랐고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하여 감정이 깊다는것을 읽을수 있었다. 바로 향항가수 장명민이 부른 《나의 중국마음(我的中国心)》노래에 담긴 그런 감정이 그들의 마음에도 다 담겨 있다는것을 심심히 느낄수 있었다. 싱가폴공항에서 8시반에 비행기가 리륙하여 12시 반에 심수에 착륙하였다. 심수에서 오후 2시에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6시에 심양에 도착하니 심양에도 눈이 많이 내려 활주로를 제외한 곳에는 모두 새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이번의 려행길에 14일이란 시간이 그리 길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우리는 그 동안 모두 정이 들어 이후 서로 련락을 하려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면서 아쉬운 심정으로 《안녕! 안녕!》하면서 갈라졌다. (끝)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47    동남아려행기[17] 댓글:  조회:5478  추천:0  2013-09-09
동남아려행기[17]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09 09:50:52 ] 클릭: [ ]    쌍둥이빌딩 태자성의 유람을 다 끝내고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꾸알라룸뿌르로 갔다. 꾸알라룸뿌르시내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우는 것이 88층짜리 쌍둥이빌딩이였다.  이 빌딩은 말레이시아 석유공사의 종합사무청사로서 1998년에 준공되였는데 부지면적이 40헥타르, 높이가 452메터, 건물이 차지하는 지면이 28.95만평방메터이며 안에는 14만 평방메터의 쑈핑쎈터, 645칸의 동방문화호텔, 75만 평방메터의 사무실, 5500명이 기도할수 있는 이슬람교사원, 그리고 천연가스로 랭수를 제조할수 있는 랭각쎈터가 있는데 시내에 랭각공기를 공급한단다. 또 4500대의 차를 세울수 있는 지하 주차장, 하나의 석유박물관, 하나의 음악청 및 복합매체 회의쎈터를 갖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쌍둥이빌딩 이 집을 지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집이였으나 6년후에 대만에 101빌딩이 일어서면서 제1위를 자랑하던 자리에서 밀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목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쌍둥이빌딩이며 세계에서 네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또한 꾸알라룸뿌르의 표징이고 도시경관의 하나로 말레이시아의 경제발전이 상징이기도 하다. 소흑인박물관 오후에 우리는 소흑인박물관으로 갔다. 말레이반도의 밀림에는 아직도 3만명의 소흑인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원시적인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키는 매우 작은데 일반적으로 성인 남성의 키는 150센치메터 이하이고 녀성의 키는 142센치메터 이하이다. 피부는 짙은 갈색이며 머리가 크고 둥글며 코가 납죽하고 입술이 두터운 그들은 아직도 반원시적인 생활을 하고있다. 박물관에는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사진과 그들을 목각한 인형 그리고 그들의 생활도구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 진렬한 소흑인의 사진 박물관에 전시된 소흑인의 생활도구 국가박물관 이어 우리는 국가박물관을 참관하였다. 관내에는 4개의 전람관이 있는데 말레이시아의 력사와 경제사료, 말라이 풍속, 당지의 열대식물과 동물표본 등이 전시되여 있다. 전시품들 가운데는 또 16세기 말라이반도 남부에서 발굴한 중국도자기와 15세기에 전문 이슬람교 교도를 위해 만든 명나라 도자기들이 전시되여 있었으며 또 명나라 항해가 정화가 말라까에 들렀을 때의 문헌복제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그리고 로천전시구에는 옛날의 증기기관차, 대포 등이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증기기관차 그다음으로는 국가황궁으로 갔다. 지금의 황궁은 2011년에 새로 건설되였는데 지금의 국가원수가 바로 여기에서 등극의식을 하였다고 한다. 대문 량쪽에는 흰색제복을 입은 호위병이 각각 한명씩 총을 다리에 붙이고 차렷 자세로 경위를 서고있었다. 황궁은 대외에 개방하지 않기에 유람객들은 황궁의 밖에서 황궁을 들여다 볼뿐이였다. 그렇지만 호위병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는 있어 많은 유람객들이 호위병과 같이 사진을 찍는것이였다. 국가황궁 운정고원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우리팀은 계속하여 운정고원으로 향하였다. 운정고원은 말레이시아에서 새로 개발한 관광피서명승지이며 수도 꾸알라룸뿌르에서 약 50킬로메터 되는 곳에 있었다. 해발 2,000메터인 운정고원의 면적은 약 4900헥타르로서 동남아에서 가장 큰 고원피서지이다. 운정산 산장으로 올라갔는데 해발 800메터까지는 뻐스로 올라가고 그 곳으로부터는 공중삭도를 타고 올라갔다. 삭도를 타기전에는 비가 약간씩 내렸는데 삭도를 타고 구름우로 솟아오르니 구름이 발밑에 있었고 비도 발밑에서 내렸다. 삭도를 타고 산에 오르면서 보니 뭇산들이 첩첩이 둘러있고 나무와 화초들이 무성하였다. 운정산장 이곳에서는 변화무쌍한 운해(云海)를 만끽할수 있었으며 맑게 개였을 때에는 천하를 다 내려다 볼수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동쪽으로 아침해살에 붉게 물든 운해를 감상할수 있단다. 운정고원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산우의 오락시설도 구전하다. 산꼭대기에 인공호수가 있어 배놀이를 할수 있으며 온수 수영장, 호수주위를 도는 아동렬차, 골프장 등 시설들이 다 있다. 운정산의 건축군은 모두 해발 1772메터 되는 곳에 있다. 산우에는 18층이 되는 세채의 호텔, 국제가극원, 국제회의쎈터, 도박장 등이 있었다. 이곳의 도박장은 말레이시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도박장으로서 주말에는 24시간 영업을 하지만 평시에는 오전 4시부터 10시까지 영업을 중지한다고 한다. 우리 팀에서도 두 젊은이가 도박을 놀았는데 처음에 땄지만 결국에는 몇백원씩 잃고 나앉았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46    동남아려행기[16] 댓글:  조회:5244  추천:0  2013-09-03
동남아려행기[16]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03 11:28:53 ] 클릭: [ ]   다음날(10월 3일), 우리는 말라까해안으로 갔다. 말라까해협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서북쪽)과 서말레이시아, 타이반도(동남쪽)사이에 있는 해협으로서 인도양과 태평양을 이어놓는 수로이다. 해협의 전체 길이는 800킬로메터이고 가장 넓은 서북단의 너비가 249킬로메터이며 동남단의 가장 좁은데는 37킬로메터, 물의 깊이는 25~113메터에 달한다.     말라까해협에서 해안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인도네시아가 건너다 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도네시아를 건너다 보면서 사진도 찍고 마음껏 놀고 다음으로는 화란홍옥으로 향했다. 말라까하 동안(东岸)에는 정결한 광장이 있는데 광장주위에는 모두 화란(네덜란드)식의 붉은색 건물이 있다. 이런 건물들은 화란사람들이 동방에 보존하여온 가장 오랜 건물들로서 화란홍옥(荷兰红屋)이라고 부르며 대략 기원 1641년부터 1660년좌우에 건축한것이다. 그중 가장 크고 오랜 건물은 화란식의 텔레포터레드하우스(Stadthuys)이다. 이 집은 300여년래 줄곧 정부기관소재지로 있다가 1980년에 말라까박물관으로 고치였다. 집안에는 말라까의 각 시기의 력사유물들이 있는데 화란의 고대병기, 16세기이래의 뽀르뚜갈인 복장, 말레인들의 혼인복장, 금은장식품 등 수공업품 그리고 말라까항구에 정착했던 고대 배들의 도편들이 있으며 고대의 화페와 우표들도 수장되여있다.   화란홍옥 뽀르뚜갈성산(葡萄牙城山)은 말라까시 서남쪽 말라까하에 접근해있다. 명성조(明成祖)는 일찍 이 산을 《진국산(镇国山)》이라고 하였으며 후에는 《세인트폴언덕(圣保罗山)》이라고 불렀다. 산기슭에는 하나의 옛 보루가 있었는데 《싼띠아고 또치까 (圣地牙哥碉堡)》라고 부른다. 이것은 당시 뽀르뚜갈식민통치자들이 격패된 말라까왕국 군대의 반격을 막기 위해 건축한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지고 끊어진 담벽과 옛 요새의 성루(城楼)만이 우뚝 서있었으며 당시 쓰던 포들도 걸려있었다. 싼띠아고 또치까 (圣地牙哥碉堡) 높이 30여메터의 성루벽에는 당년 뽀루뚜갈군대의 허다한 도안들이 조각되여있으며 성루안에는 몇개의 비석이 완전히 보전되여있었다. 그리고 교외의 해변가에는 아직도 뽀르뚜갈건축풍격의 촌락이 완전히 보전되여있는데 뽀르뚜갈인의 후예들이 살고있으며 그들은 지금도 16세기의 뽀르뚜갈말을 하고있다. 말라까에서의 유람이 끝나고 다음으로는 130킬로메터 떨어진 태자성으로 향했다. 태자성(太子城)으로 가는 길에 밖을 내다보니 전부 구릉지대였는데 이름 모를 수종과 대면적의 종려나무를 볼수 있었으며 도로옆에는 인공재배로 된 많은 꽃들이 있었다. 싱가포르보다 꽃이 더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는 길에 또 안내원과 말레이시아 농업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농업인구는 137.59만명으로서 전국 취업인구의 16.8%이고 경작지면적은 414만 헥타르이며 농업은 주로 공예작물을 위주로 하고있는데 주요하게 고무, 기름야자(油棕), 후추, 코코아(可可), 열대과일이며 입쌀 자급률은 76%에 달한다고 하였다. 차는 1시간 45분 달려 태자성에 도착, 10시 반이 되였다. 태자성은 말레이시아의 새로운 행정도시로서 수도 꾸알라룸뿌르에서 남쪽으로 25킬로메터 떨어져있으며 면적은 264평방킬로메터에 달한다. 사면이 원시림으로 둘러싸여있는 태자성은 중심의 평원지대에 자리잡고있으며 인공강과 호수가 사면을 에돌고있다. 주요한 건물을 련결하여 놓아 하나의 작은 배로 수상부로부터 각개 부문으로 다 갈수 있다. 태자성의 이름은 이로 해 지어졌다고 한다. 태자성 광장중심에는 가지각색의 생화들로 장식된 분수못이 있으며 가운데 말레이시아국기가 높다랗게 게양되여있었다. 못주위에는 13개 주를 대표하는 주 기발들이 나붓기고있었다.   태자성광장   전반 태자성 행정중심은 수상부, 국가이슬람교사원(国家清真寺), 태자교(太子桥), 수상관저, 수상관저대교, 태자회의센터, 담맘식물원((达曼植物园) ) 등이다. 말레이시아정부는 2020년에 가서 태자성을 초세계적인 대도시로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그때 가면 태자성은 진짜 말레이시아의 행정중심이 되고 꾸알라룸뿌르는 말레이시아의 경제중심으로 된다고 한다. 광장 북쪽에는 수상부가 있었는데 담장도 경위인원도 없었다.  수상부 수상부를 중심으로 왼쪽은 국가재정청사이고 오른쪽은 수상이슬람교사원(水上清真寺)이다. 광장에서 비스듬히 마주보이는 곳에 수상이슬람교사원의 정문이 있었는데 이 사원은 4분의 3이 호수우에 건축되여있어 수상이슬람교사원라고 하며 말라이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교사원이라고 한다. 이 수상이슬람교사원은 최고로 1만 2000명의 교도들을 수용할수 있는, 국가종교의식을 하는 장소이다. 수상이슬람교사원이 가관이다. 광장 남쪽에는 길이가 약 5킬로메터되는 큰길이 있는데 길 량켠에는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있고 가로수 량쪽과 태자호반에는 각이한 풍격의 국가행정 사무청사, 회의중심 및 호화주택과 더불어 울창한 숲과 호수 그리고 푸른 산이 어우러져 경치가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주청룡특약기자 [후일 계속]
45    동남아려행기[15] 댓글:  조회:6514  추천:0  2013-08-19
동남아려행기[15]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8-18 14:33:36 ] 클릭: [ ]   싱가포르의 려행을 끝내고 오후에는 말레이시아로 가게 되였다. 정심식사를 하고 싱가포르해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2시 반이 되였다. 싱가포르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싣고 말레이시아의 신산시(新山市)에 입경하였는데 싱가포르 해관에서 검사를 마치고 뻐스에 앉아 바다우에 놓인 그리 길지 않은 다리 하나를 건너니 말레이시아였다.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에 입경하는 해관검사는 그 어느 해관검사에 비하여 간단하였다. 우리들의 려행용 트렁크의 짐들은 해관검사를 어떻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싱가포르의 관광뻐스가 싣고 직접 말레시아에 입경하였고 사람만 해관검사를 하였는데 출입경 해관검사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 들어서니 그 나라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남성안내원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우리는 뻐스에 앉아 말레이시아의 력사적인 옛도시인 말라카(马六甲)로 향하였는데 거리는 약 200킬로메터이고 4시간 가량 걸린다고 하였다. 안내원은 우리와 인사를 나눈 후 말레이시아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8월 31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로서 13개 주와 3개 련방직할구로 조성된 련방제국가이며 공식명칭은 말레이시아련방이며 면적은 329,847평방킬로메터, 인구는 28,334,135명(2010년)이다. 수도는 꾸알라룸뿌르(吉隆坡)이지만 행정중심은 태자성이며 점차적으로 수도를 태자성으로 옮긴다고 한다. 정치체제는 립헌군주제이고 의회형태는 량원제이며 국가원수는 국왕으로서 왈 리드 알-잼 • 샤 압둘 할림(阿卜杜勒·哈利姆·穆阿扎姆·沙阿)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인 지브 압둘 라자크(纳吉布·阿卜杜尔·拉扎克)이다. 주요 종교로는 이스람교, 불교, 도교, 인도교이고 공식언어는 말레이어이며 주요 민족으로는 말레이족(60%), 화인(25%), 인도인(7%)인데 부유계층에서 80%가 화인이며 말레이시아의 70%경제가 화인들에게 장악되였다고 한다. 표준시간대는 중국,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UTC+8였다. 말레이시아는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650km 떨어져 있는 서말레이시아와 동말레이시아 두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이반도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면적 131,598㎢)는 길이 약 800km, 폭 325km이며 북쪽은 타이, 남쪽은 싱가포르, 서쪽은 말라카해협, 동쪽은 남중국해를 경계로 한다. 보르네오섬 북서부를 차지하는 동말레이시아(면적 198,160㎢)는 길이 약 1,075km, 폭 384km로 사라와크주와 사바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쪽은 남중국해, 동쪽은 셀레베스해, 남쪽은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섬과 접한다. 사라와크 주의 령토 안에는 영국 보호령이던 이슬람왕국 브루네이(文莱)가 있다.   말레이시아지도에서 본 말라카 말레이반도는 주로 산악 지형이다. 동말레이시아에는 해안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이 평야는 언덕 쪽으로 높아지다가 산악지형의 중심에 다다른다. 말레이시아는 대부분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수목작물, 특히 종려유, 야자유와 고무는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이다. 쌀도 주요한 산물이다. 석유채굴 및 생산과 주석채굴은 제1의 외화 획득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4시간 동안 말라카를 향해 달리면서 밖을 내다보니 전부 구릉지대였는데 다른 나무가 한그루도 없다고 할 정도로 어데라없이 전부 종려나무 수림이였다. 나는 안내원에게 어찌하여 종려나무를 이리도 많이 심었는가고 물었더니 종려수는 전반 말라이시아 경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로 기름을 짜서 식용유도 하고 유지공업의 원료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종려나무 말라카는 말라카주(州)의 수부도시이다. 말라카는 말라카해협에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옛도시이다. 말라카하가 가로 지나가는 말라카는 일찍 1403년에 말라카왕국의 수도로 되였고 1511년에 뽀르뚜갈식민지로 되였다가 1641년에 네덜란드에 점유되였으며 1826년에는 영국의 해협식민지(이전에 동남아시아 말라카해협의 옛 영국직할식민지를 통틀어 이르던 말)의 일부분으로 되였다. 삼보묘(三保廟)와 삼보정(三保井) 말라카에 가서 제일 처음으로 삼보묘에 갔다. 3보묘는 1673년에 건축되였는데 1405~1435에 7차나 항해한 중국명조 3보태감 정화를 기념하여 세운 사원이다. 정화가 매번 항해할 때에 여기에 머물렀으며 당시 말라카국 수령이 25차나 중국을 방문하였다. 1411년, 말라카 국왕부인과 540명의 수행인원이 중국남경으로 우호방분을 하였는데 명성조 주태(明成祖朱棣)가 봉천문에서 연회를 차려 환영하였으며 그들에게 허다한 진귀한 중국특산을 증정하였다. 그가 1년반 있다가 돌아갈 때에 명나라 정부에서는 그에게 특별히 한척의 배를 만들에 증정하였다. 1943년에 말라카국왕 잽싸다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열정적인 접대를 받았다고 한다. 삼보묘 주위는 큰 나무들로 둘러져 있었으며 대문에는 전포를 입고 위풍이 당당하게 손에 칼과 도끼를 든 두 장군의 그림이 있고 문 량켠에는 《五百年前留圣迹,四方界内显英灵》란 주련이 씌여져 있고 사원 중앙에는 정화의 초상화와 군복, 칼 등이 있었으며 우에는 《정화삼보공(郑和三保公)》란 표어가 걸려있고 량쪽에는 허다한 문관과 무관들의 신상(神像)들이 배렬되여 있었다. 이 사원은 1673년에 세워졌는데 처마의 네 귀가 뿔처럼 올리 쳐들고 붉은 기둥, 흰 벽, 검푸른 기와 등은 중국의 건축풍격이 다분히 들어 있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모든 건축재료들, 이를테면 한장의 벽돌, 한장의 기와들이 모두 중국에서 운반되여 온것이라고 한다. 사원안에는 향불이 가득 하였으며 사원 문어구에는 한쌍의 금사자가 있었는데 온몸이 금빛으로 눈부시였지만 사자머리 웃부분만 금빛이 약간 벗어져 이었다. 그것은 원래 신도들은 사자옆으로 지나갈 때에 사자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깃든다고 여겨 너무 쓰다듬어 그렇다는것이였다. 삼보정(三保井) 삼보묘에는 또 삼보정(三保井)이 있다. 정화가 7차례나 항해할 때에 모두 이곳을 지났는데 당시 이곳에는 우물이 없어 모두 산에 가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정화는 이러한 정경을 보고 처음으로 이곳에 우물을 팠다. 정화는 모두 7개의 우물을 팠는데 지금은 2개만 남아있다. 하나는 삼보묘 왼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삼보묘 뒤에 있다. 말라카 력사에서 여러 차례 심한 가물이 들어 다른 우물은 다 말랐지만 이 두 우물만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지 사람들은 이 우물을 신의 우물(神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나라의 귀중한 재산으로 우에 철사그물을 씌워 사용을 금지하고 문물을 보호하고있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44    동남아려행기[14] 댓글:  조회:4794  추천:0  2013-08-11
동남아려행기[14]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8-11 12:41:22 ] 클릭: [ ] 다음날(2일) 오전, 우리는 멀라이언(鱼尾狮)공원으로 갔다. 멀라이언공원은 엘리자베스공원이라고도 하는데 싱가포르강변 금융구에 위치해 있다. 공원의 주제는 8.6메터 높이로 우뚝 세워져 있는 멀라이언(鱼尾狮)조각상이고 또 그 축소판인 작은 멀라이언 조각상이 있다. 큰 멀라이언은 여러가지 음악에 맞추어 물을 내 뿜어 수막을 형성하며 레이저를 수막에 쏘면 음악의 절주에 따라 부단히 변화되는 오색령롱한 수막을 볼수 있는데 마치 립체영화를 보는것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구경할 때에는 그런 수막이 없었고 분수만이 있었다. 멀라이언(鱼尾狮)공원 상반신 사자와 하반신 물고기의 몸으로 된 멀라이언은 싱가포르의 상징이다. 상반신의 사자는 싱가포르 국명의 유래인 싱가(산스크리트어로 사자를 뜻한다)를 뜻하고 하반신의 물고기는 싱가포르가 하나의 작은 어촌으로부터 발전하였음을 뜻한다. 싱가포르가 사자도시라는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있다. 기원 4세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왕자가 탄 배가 폭풍을 맞아 이곳까지 표류하여 오자 이들은 이 섬에 등륙하였는데 뜻밖에 한 마리의 기이한 짐승을 발견하였다. 왕자가 저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니 수행원이 사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로부터 사람들은 이 섬을 사자성(狮子城)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멀라이언공원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작은 공원으로서 크게 구경할 것은 없지만 1972년 9월 15일, 리광요 수상이 제막 버튼을 눌러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멀라이언 조각상과 싱가포르강 우에 놓인 다리 그리고 강 량안의 이색적인 건축물들과 그 주변 길가의 꽃들로 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싱가포르는 도시미화가 잘되여 화원도시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화원의 도시라고 하지만 꽃이 어디에나 다 그리 많은것은 아니였다. 오래전부터 들어오던 화원도시였는데 나의 상상속의 그런 꽃도시는 아니였다. 그리하여 안내원과 화원도시라고 하는데 왜 꽃이 그리 많지 않은가고 물었더니 여러가지 화초와 꽃나무가 있으면 화원이 아닌가? 이런 화초와 꽃나무들이 계절에 따라 꽃이 피기에 늘 꽃으로만 있을수 없다는것이였다. 정말 맞는 말이였다. 여러가지 꽃이 피여있는 교목들도 있었는데 그런 꽃들이 일년사계절 그냥 피여 있을수는 없는것이다. 화원도시의 한 모퉁이. 멀라이공원 맞은 켠은싱가포르 고등법원과 국회청사였다. 국회청사 그다음 우리는 스리 마리암만사원(马里安曼兴都庙)으로 갔다. 스리 마리암만 사원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인도교(힌두교)사원으로 차이나타운 중심에 자리잡고있으며, 전염병과 질병치료의 녀신으로 알려진 마리암만을 위해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 사원은 1819년 무역상인 나라야 필라이(Narayan Pillai)가 스탬포드 래플즈경과 함께 싱가포르에 발을 디뎠던 력사적 사실과 련관이 있어 1823년 이 땅을 얻게 되였고 1827년 목재와 억새를 리용해 지붕을 만들어 사원을 세우게 되였다. 현재 보고있는 벽돌건축물의 사원은 1862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사원 입구의 탑은 인도교도들과 싱가포르 현지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지표로서 자리매김하고있다. 이 사원는 인도의 옛 건축풍격을 띠고있었다. 사원의 높은 탑은 금자탑모양으로 색채가 다양한 미술조각들이 있다. 인도교에서 이름이 있는 시바(湿婆: 인도교 3대신의 하나)와 남신(男神), 그리고 제일 지위가 있는 비슈누(毗湿奴: 인도교의 세 주신의 하나) 및 여러가지 각이한 조형들과 아릿다운 자태를 가진 녀신들, 코끼리와 원숭이 등 인도교의 동물신이 탑에 조각되여 있어 빈틈없이 조예가 깊고 정채로웠으며 웅장하였다. 스리 마리암만사원1 사원 입구우에는 방울이 달려있는데 들어가 참배를 하기전에 전문인원이 방울을 울려 신령에게 참배를 암시한다. 준칙에 의하여 신을 벗고 사원으로 들어가니 인도신화의 세계에로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사원안과 마당주위에는 벽에 모두 화려한 조각예술들이 있었다. 웃도리를 벗은 승려, 사리(纱丽: 인도의 녀성들이 평소에 입는 민속 의상. 재단하지 않은 기다란 면포(綿布)나 견포(絹布)로 허리를 감고 머리를 덮어씌우거나 어깨너머로 늘어뜨려 착용한다)를 입은 인도녀인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그러자 어떤 관광객들은 향을 피우고 두손을 열십자로 하고 무릎을 꿇고 례배를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사원을 돌아보면서 구경만 하였다. 스리 마리암만사원2 인도교는 농후한 신화색채를 띠였는데 사원안의 신상(神像)조각들은 모두 인도교신화와 련관되여 있다고 한다. 허다한 신상들은 삼두륙벽(三頭六臂: 세개의 머리와 여섯개의 팔을 가지고있다)으로 손에 련꽃을 든것, 칼, 창을 들고 사자나 거북을 탔거나 여러가지 괴수로 변신한것을 볼수 있었다. 나는 이런 벽화나 조각예술에 대하여 인도교의 똑똑한 함의는 모르지만 그 예술가치를 갖고 있다는것만은 알수 있었다. 스리 마리암만사원3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 계속]
43    동남아려행기[13] 댓글:  조회:5529  추천:1  2013-08-01
동남아려행기[13]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31 12:40:05 ] 클릭: [ ] 11월 1일 오전에 타이 5세황 티크행궁(五世皇柚木行宫)을 다 참관하고 오후에는 비행기를 타고 싱가포르로 갔다. 비행기가 방코크에서 리륙하여 약 2시간 반 정도 날아 싱가포르에 도착하니 거의 5시가 되였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다 마치고 나오자 향항려행사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있었고 남성 안내원이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하여 뻐스에 오르도록 하였다. 안내원은 우리와 인사를 나눈 다음 뻐스가 시내로 들어가는 사이에 싱가포르의 개황에 대하여 말하였다. 싱가포르는 말라이반도 남단에 위치해있는 하나의 섬으로서(주변의 여러 개의 부속섬을 포함) 1965년 8월 9일에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면적은 715.8 평방킬로메터이고 인구는 531만명이며 민족으로는 화인(77.3%), 말레인(14.1%), 인도인(7.3%), 그외 유럽인과 기타 종족(1.3%)이며 언어는 국어로는 말레이어로 하고 영어, 중국어, 타밀어(드라비다 어족에 속한 언어. 타밀족의 언어로, 스리랑카 공용어의 하나이다.)도 사용하고있다. 주요 종교로는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 인도교이고 정치체제로는 의회제와 공화제이며 대통령에 진경염(陈庆炎),총리에 리현룡(李显龙)이였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대통령은 어느 민족이든지 다 선거될수 있지만 총리만은 반드시 한족이여야 한다는것이다. 그 원인은 싱가포르의 부유계층은 대부분 화인들인데 그만큼 화인들이 머리가 좋다는것을 설명하며 총리는 정부수반으로서 머리가 좋은 화인이 맡아 하여야 싱가포를 잘 령도할수 있다는것이였다. 지금의 제3임 총리 리현룡은 제1임 총리 리광요의 아들이라고 한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이며 주로 금융업, 가공업, 해상운수업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금융업은 세계 금융쎈터지수의 순위에 따르면 런던, 뉴욕과 향항의 뒤를 이어 제4대 국제금융중심이다.   공업은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주도력량이며 주로 공업과 가공업을 하는데 공업으로는 렌즈생산과 전자공업인데 전자공업은 세계전자공업중심의 하나이다. 가공업으로는 주로 물가공, 생물가공, 기름가공을 하며 이미 세계 제3대 기름제련국으로 되였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태평양과 인도양사이에 있는 말라카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은 반드시 싱가포르 항구를 지나는데 3일(72시간)은 세금이 없이 머무를 수 있으며 서로의 화물교환과 매매를 할수 있는데 72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세금을 내거나 화물을 부리워야 한다는것이다. 부리운 화물을 싱가포르에서는 저렴하게 사들여 싱가포르 국제시장에 내놓는다고 한다. 이렇게 싱가포르의 해상운수업은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안내원이 싱가포르의 표준시간대를 말하면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UTC+8라고 하면서 타이에서 왔으니 시계를 다시 한시간 앞당겨 놓으라고 하였다. 안내원이 싱가포르의 개황을 소개를 하는 사이에 뻐스는 어느덧 화파산(花芭山)밑에 와 섰다. 이번 관광의 첫 코스가 바로 화파산에 오르는것이라고 하였다. 화파산은 싱가포르에서 부킷티마(武吉知马: 163메터) 다음으로 두번째 높은 산으로서 115메터의 작은 산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내가 해발고도로 말하는가 아니면 상대고도인가고 물으니 안내원은 싱가포르가 바로 바다가운데의 한 섬이기에 곧 바로 해발이 되므로 구태여 해발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럼 왜 가장 높은 부킷티마산에 오르지 않고 이 산에 오르는가고 물으니 부킷티는 구릉(丘陵)으로서 시내 중심에 위치하여 있고 그 주위에 그보다 높은 층집들이 가득하여 항구를 볼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해안을 볼수 없다는것이였다.   화파산에서 내려다 본 싱가포르 화파산은 바다옆에 있으며 높지 않아 쉽게 올랐는데 정말 오르고 보니 고층건물이 숲을 이룬 싱가포르 시내와 항구도 다 보일 뿐만아니라 바다건너 서쪽으로 인도네시아 해안이 어렴프시 보이고 북쪽으로 말레이시아해안을 비교적 똑똑히 볼수 있었다.   화파산에서 내려다 본 싱가포르항 저녁에는 센토사(圣淘沙)쑈핑쎈터와 백화점에서 관광쑈핑을 하는데 인민페 대 싱가포르화페 환률은 5:1이였다. 나는 쑈핑에는 흥미가 없었고 싱가포르의 야경에 매혹되여 그것을 구경하는데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싱가포르야경 싱가포르야경 싱가포르야경 싱가포르야경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42    동남아려행기[12] 댓글:  조회:5326  추천:0  2013-07-22
동남아려행기[1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7-22 10:28:37 ] 클릭: [ ] 31일 저녁은 타이에서의 마지막 저녁이였다. 그리하여 타이에서 가장 고급음식으로 불리는 황제음식(皇帝餐)을 먹기로 하였는데 각자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물론 자기돈으로 사서 먹는데 여러가지 음식가운데서 자기 마음대로 골라 사 먹기였다. 메뉴를 보니 제비둥지(燕窝)와 상어지느러미(鱼翅)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에서 제비둥지와 상어지느러미는 중국에서 가장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고급식탁에만 오르는 료리라는것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였다. 값은 제비둥지와 상어지느러미가 인민페로 각각 350원이였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700원을 내고 그 두가지를 올리였다. 상어지느러미는 맹물에 푹 삶은것 같았고 제비둥지는 야자 웃부분을 자르고 야자안에 제비둥지를 넣고 야자수와 함께 익혔는데 숟가락으로 저으니 다 녹아 액체가 되였다.  황제음식 제비둥지 황제음식 상어지느러미 제비둥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명조때의 대항해가 정화가 기원 1405부터 1433년 사이에 7번 항행하였는데 그중 한차례 그의 선대가 항행하는 도중 큰 폭풍을 만나 할수 없이 말라이군도의 한 무인도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련 며칠 갇히워 있다니 먹을것이 거의 떨어졌는데 바다의 한 벼랑에 허다한 백색의 제비둥지가 있는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선원들을 시켜 그것을 뜯어다가 맹물에 푹 삶아서 허기를 채웠다. 며칠후 선원들이 모두 혈색이 좋아지고 정신이 활기를 띠였다. 그리하여 정화는 돌아올 때 이 제비둥지를 가지고 와서 명성조 주태(明成祖朱棣)에게 바치여 황제로 하여금 대단히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 두가지 료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것이 문제였다. 황제음식이라니 당연히 특별히 맛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정작 먹어보니 그저 슴슴한 외에는 아무런 맛도 못 느꼈다. 우리가 먹을 줄 몰라서 그런가 아니면 본래 그런 맛인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황제음식을 먹어봤다는 점에서는 뿌듯하였지만 700원을 내고 별맛을 느끼지 못하고 먹었다는 점에서는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다음날(11월 1일) 오전, 우리는 타이 5세황 티크행궁(五世皇柚木行宫)을 참관하였다. 티크(柚木)는 목재로 쓰는 나무이름이고 행궁(行宫)은 예전에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무르는 별궁(別宮)을 말한다. 행궁을 참관할 때에 관광객들이 주의하여야 할 점들은 이곳도 대황궁과 마찬가지로 옷단장이 정결하여야 하고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녀성들은 짧은 치마를 입지 못하며 밖에서는 사진을 찍을수 있지만 안에서는 찍는것이 엄금되여 있었다. 티크행궁은 라마5세시기 1900년에 시작하여 지은 집으로서 원래는 세창도(世昌岛)에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것은 이미 방코크시 교외로 옮겨 온 행궁이란다. 이 건물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목조건축물로서 전부 티크나무구조로 된 행궁이다. 5세황 티크행궁(五世皇柚木行宫) 이 행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있다. 5세왕에게는 극히 총애를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특별히 세창도에 한채의 티크행궁을 지어 이 왕자로 하여금 병치료를 하면서 휴양을 하게 하였다. 세창도의 그윽하고 우아한 환경에서 왕자의 병은 약을 쓰지 않고서도 나았다. 5세왕은 너무 기뻐 왕자를 방코크로 데려왔는데 뜻밖에 얼마 안가서 돌연적으로 사망하였다. 5세왕은 너무 상심하던 끝에 세창도의 티크행궁을 방코크로 옮겨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창도에는 그 행궁유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전부 티크나무를 재료로 사용한 이 티크행궁의 특점은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지었고 건축풍격은 많이 구라파(유럽)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래도 타이의 전통풍격에 따라 지었다는것이다. 티크나무는 특별히 기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고온과 비바람에 잘 견디고 이 나무의 기름은 벌레의 침습을 막는 작용도 하여 아주 좋은 건축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행궁내에는 백년전의 왕실의 귀중한 일용품과 장식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장식품과 가구들은 구라파식으로 되여 있어 유람객들로 하여금 왕실의 화려한 생활을 료해할수 있었다. 행궁내에는 5세왕이 사용하던 타이의 제일 첫 실내욕실과 타이문자 타자기 그리고 타이도자기, 구라파가구가 있었는데 인상이 가장 깊은것은 대량의 거형 상아와 상아제품 그리고 왕실사진들이였다. 그외 티크나무로 된 틀에 백색건반은 상아로, 검은 색 건반은 서우뿔로 만든 피아노도 인상적이였는데 보는 사람들은 경탄하게 하였다. 5세왕은 젊었을 때에 구라파류학을 하고 돌아면서 민주정치와 구라파의 선진기술을 가지고 왔으며 재위 42년간에 노예제를 페지하고 서방의 문화를 인입하였으며 교육위생개혁을 실행하여 타이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국부(国父)》로 불리웠다. 이 행궁은 지금 라마5세의 박물관으로 되어 관광명소로도 되고있다. 행궁은 은기실(銀器室), 문서실, 취사방,왕의 방과 침실, 왕후의 방과 침실 등 30여 칸으로 되였다. 안에는 력대 군왕의 사진과 생활용품들과 진귀한 예술품들이 있었고 5세왕의 사무청과 침실의 일체 시설과 용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어 참관가치가 컸지만 안에서 사진촬영이 금지되여 한장도 못 찍었다. 사진/글 주청룡특약기자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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