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조선족소설문학에 대한 주제학적고찰
김호웅
1. 들어가는 말
중국사회는 1990년대 말로부터 사회경제적인 전화기에 들어섰다. 이른바 전환기는 경제성장제일주의에서 비롯된 관료층의 부패, 빈부격차와 지역격차, 생태파괴와 환경오염을 극복하고 서민의 수입증대와 사회복리의 향상, 계층 간과 지역 간의 균형적 발전 및 조화로운 사회분위기를 창출하는데로 전환하는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회학, 경제학 관련 학자들의 열띤 토론과 제안에 힘입어 2003년에 와서 당과 국가의 대정방침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 조선족사회는 중국 주류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안고있을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특수한 난제를 안고있다. 말하자면 조선족사회는 중국 주류사회의 변두리에 처해있는데 반해 한국과의 인적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급속히 무너지고 인구의 마이너스성장, 민족교육의 위축 등 허다한 문제를 드러내고있다.
전환기의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 우리 소설가들은 민족적 리얼리즘의 기치1)를 들고 다양한 테마를 개발하고있으며 소설문학의 공전(空前)의 부흥을 떠올렸다. 이 몇 년간 빼어난 활약상을 보인 작가는 림원춘, 류업무, 박선석, 최홍일, 우광훈, 리여천, 최국철, 김혁, 리동렬, 량춘식, 김동규, 강호원, 조룡기, 허련순, 리혜선, 박옥남, 조성희, 권선자, 리진화, 김경화, 김금희, 박초란 등을 들수 있을것이다.
이 글에서는 1990년대 말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약 십년간에 발표된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조선족소설문학의 주제들을 아래와 같은 3개 방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2. 소외계층의 고뇌와 울분, 그리고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요즘 중국사정을 보면 해마다 10% 이상의 고속성장을 기록하고있고 신문, 잡지들에서 억대부자들의 얼굴을 심심치 않게 볼수 있지만 권리 없고 돈 없는 민초들은 집장만을 하랴, 자식의 학비를 대랴 그야말로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이제는 우리 중국이 안고있는 기본문제가 빈부의 격차요, 지역격차다. 게다가 권력층의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민초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있다.
그래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져야 한다.”는 론리도 한물 가게 됐다. 다른 민족의 경우를 보아도 고향을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날품을 팔아 살고 있는 수억 민공(民工)들의 존재가 큰 문제로 되고있지만, 우리 조선족 형제자매들의 경우는 더욱 처참하다. 농촌에 처녀의 씨가 말라서 총각들이 장가를 들수 없거니와 설사 가족을 이룬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한쪽이 한국이나 러시아로 날품을 팔러 가있는 바람에 7, 8년씩 별거생활을 하기 일쑤다. 이들의 고뇌와 한, 외로움과 울분을 누가 달래줄수 있으랴?
혹자는 문학은 정치와는 관련이 없고 문학자는 사회문제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질 하등의 리유도 없다고 말한다. 애오라지 순수한 자아를 표현하면 그만이란다. 이건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작이다. 자고로 참된 문학자는 민초의 고뇌와 울분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훌륭한 문학은 모두 민초를 대변해 원성을 터뜨렸다.
다행스러운것은 전환기 우리 소설문학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었으되 전환기 빈부격차와 지역격차에 초점을 맞추고 소외계층의 고뇌와 울분을 대변하고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함으로써 수많은 독지들의 공감대를 획득하고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에 바쳐진 작품들로는 리원길의《선녀야, 내게도 내려와 줘》, 박옥남의《둥지》, 리휘(원명 손룡호)의《울부짖는 성》, 강재희의《탈곡》등을 들수 있다.
박옥남은 우리민족의 삶의 현실에 눈길을 돌리고 우리민족의 오늘날의 실존적인 모순과 고통과 진실하게 반영하는 민족적사실주의에 확고하게 입각하여 중국 땅에서 망망대해 같은 다수자들속에 섞여서 소수자,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삶의 실태와 우리민족 문화교육이 직면한 위기상황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려고 일관적으로 노력해온 작가로서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은 그의 단편소설《둥지》이다. 이 작품은 우리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와해와 붕괴과정을 진실하게 묘사한 수작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이 작품은 도데의《마지막 수업》의 서사구조를 답습한 한계를 지니고있기는 하지만 일인칭시점에 의한 생동한 세부묘사, 속담의 적절한 사용, 아낙네들의 개성적인 대화를 통해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피폐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우리민족 어린이들이 뛰놀던 벽동소학교가 한족들에게 팔려 양우리로 변하고 \"학교간판이 도끼날에 두 쪽으로 쪼개져 교실 창문우에 거꾸로 덧박혀있\" 는 광경은 얼마나 처량한가! 둥지가 부서진다면 알인들 어찌 성하랴! 주인공 성수는 양우리로 변한 학교를 보면서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문득 저 집에 들어올 양들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있던 집도 없어졌는데 양들은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좋은 벽돌기와집에서 살게 생겼으니 말이다.\"2)― 이 얼마나 눈물겨운 역설과 아이러니인가.
150여 년 전 미국의 스토우 부인의 소설《톰 아저씨의 오막살이》(1852)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톰 아저씨라는 비천한 흑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다루고있는데 그는 깨끗한 량심의 소유자이지만 혹독한 백인농장주는 그를 이라자라는 녀성노예와 함께 다른 농장주에게 팔아넘기게 된다. 이 소설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쫓아오는 노예주를 피해 이라자가 갓 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오하이오강에서 성엣장을 이리저리 건너뛰면서 도망치는 장면이다. 흔들거리는 성에장우에서 그녀의 신발은 벗겨져서 두발은 칼날 같은 얼음부스러기에 베고 찢겨서 선혈이 낭자했지만 사생결단하고 도망을 친다. 잡혀서 다시 노예로 사는것은 차가운 강물속에 빠져서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웠던것이다. 그야말로 혹정(酷政)은 맹호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하여 이 소설은 노예폐지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페노주의자(廢奴主義者)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스토우부인을 만나서 “부인께서 남북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라고 말한것은 결코 롱담만이 아니였던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둥지》라는 소설 역시 조선족공동체의 처참한 붕괴상황을 고발하고있으니 우리 조선족공동체 살리기 또는 새 농촌건설운동의 기폭제가 될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국철은 중조 변경에 있는 도문시 량수진을 생활터전으로 잡고 이 지역의 역사와 함께 당대 농민과 도시서민의 희로애락을 소설화해온 유능한 작가이다. 그는《간도전설》과《광복의 후예들》이란 2부의 장편소설을 펴내 중견작가로서의 립지를 탄탄히 굳히고있다. 그의 단편《어느 여름날》3)은 제목부터가 비를 머금은 여름하늘처럼 무거운 감을 준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육중한 바위산 밑굽을 파서 뱀을 잡다가 큰 바위가 굴러서 내려오는 바람에 “종이장처럼 깔아뭉개졌다.” 뱀을 잡기 위해 바위산 밑굽을 뒤지다가 깔려 죽었다-- 이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왜서 뱀을 잡아야 했으며 왜서 죽기를 각오하고 큰 바위를 들쑤셔야 했을까? 말하자면 이렇게 비명횡사하게 된 인간관계와 사회적인 원인이 있다면 소설이 되는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왈룡이다. 힘은 세나 머리는 부족한 사내다. 김동인의《붉은산》에 나오는 삵이란 별명을 가진 정익호나 안수길의《원각사》에 나오는 원보를 방불케 한다. 왈룡은 저돌적이고 우락부락한 반면에 남의 충동질에 잘 놀아났다. 병신 마누라도 “마술 같은 힘으로 왈룡이를 쉬엿, 차렷을 시켰다.” 문제는 한 방면으로 왈룡 앞에서는“형님”을 개여올리는 중국인 왕싼(王山) 형제도 돈으로 왈룡의 마누라를 점하고 왈룡에게 오쟁이를 지운다는 사실이요, 다른 한 방면으로 연길의 돈 많은 량씨부자가 별장을 세우고있다는 사실이다. 타민족에 의한 생존공간의 위협, 도시화에 의한 농촌사회의 피폐라는 사회문제를 암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왈룡은 마을사람들을 대신해 량씨부자네 별장건축현장에 뛰여들어 골조와 기초돌 우에 싯누런 소똥을 매질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량씨부자의 회유책(懷柔策)에 넘어가 별장에 차려놓은 뱀탕집에 뱀을 잡아 제공을 하다가 끝내는 바위에 치여 죽은것이다. 이러한 왈룡의 형상은 타민족에게 밀려 갈팡질팡하고 도시화, 산업화에 의해 소외(疏外)되는 우리 농민들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
리휘의《울부짖는 성》2007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아내를 한국에 보낸 두 남성의 비극을 다루고있다. 주인공은 원명은 나오지 않고 “물알”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물알”이란 덜 여물어서 물기가 있고 말랑말랑한 곡식의 알을 지칭하지만 세속에서는 허우대는 크나 힘이 없는 남성을 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물알” 역시 학교 배구대에서 쫓겨날 정도로 키 값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자식사랑은 지극해 모범 학부모로 통한다. 그는 안해가 한국에 간지 6년이나 되지만 지극정성을 다해서 아들 민호의 공부 뒷바라지를 한다. 민호는 학급에서 제일 공부를 잘한다. “물알”은 안해가 힘들게 벌어서 부쳐 온 돈을 한 푼도 헛되게 쓰지 않는다. 후에 안해가 돈을 부쳐 보내지 않아도 군말이 없이 지낸다. 그는 담임선생의 칭찬도, 친구의 부러움도 관계치 않고 묵묵히 애비 노릇만 할뿐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물알”은 학부모회의에 와서도 끄덕끄덕 졸기만 한다. 어느 날 그는 아닌 밤중에 친구 산호(별명은 개미)를 불러 가지고 맥주 여섯 병을 마시고 나서 혀 고부라진 소리로 묻는다.
“야, 개미야, 너 어데 녀자 없니?”
“물알”이 녀자를 찾는 소리는 처음이였다. “개미”는 일변 놀라고 일번 우스워서 히죽거렸다.
“야, 무랄아, 너도 녀자를 찾을 때 있니?”
“임마, 나도 남자다. 나도 좆대가 있다. 아직은 무, 무랄이 아니다.”
“이 새끼, 그럼 너네 앙깐한테 미안한 생각이 안 드니?”
“야 임마, 넌 앙깐이 금방 갔재? 난 육년이다.”
“그럼 그만 벌면 됐잖니? 돌아오라고 해라.”
“안 온다. 온다, 온다 하면서 육년이다. 미치겠다.”
“네가 아이를 잘 키웠으니 너네 앙깐이 꼭 돌아와서 너한테 사랑을 푸짐히 줄 거다. 여태껏 잘 참아왔잖아. 좀만 더 참아라.”
“개미”는 “물알”을 위로해 주었다.
“개코같다. 인생이 얼만데? 돈이 뭐야? 부부라는 게 오래동안 갈라져 있고도 부부라고 할 수 있니? 난 정말 여자 생각 나 죽겠다.”4)
“여자 생각 나 죽겠다”--이 어찌 “물알”만의 부르짖음이라고 하겠는가? 이 소설에 나오는 담임선생님의 말 그대로 56명 학생 중 어머니나 아버지가 출국한 학생이 46명이니 82%를 웃돌고있다. 80%의 부부가 장기간 별거하고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인권부재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연암 박지원 소설에 나오는 열녀 함양 박씨도 치솟는 욕정을 참을 길 없어 밤바다 동전을 매만져 그것이 다 닳아빠졌다고 한다. 성적욕망은 인간의 무의식중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며 대다수 사회인의 성적욕구불만은 사회의 불안정을 의미하기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휘의 소설《울부짖는 성》은 민초의 고뇌를 성적욕망의 억눌림과 그 위기라는 차원에서 다룬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최국철의《제5의 계절》은 소도시의 공무원으로 일하는 말단간부 탁명조의 생활난과 기구한 운명을 통해 날로 극심해가는 빈부의 격차를 고발하고 최하층인간들에게 깊은 련민과 동정을 보낸 작품이다.《제5의 계절》이라는 상징적인 제목부터가 독자들에게 현념을 던져준다. 한 해는 분명 4계절이나 가난하고 다사다난한 서민들에게는 하나의 계절이 더해진것만 같아 세월은 하루가 십년 맞잡이로 지내기가 어렵다. 아니, 이 제목은 자연의 순환과 섭리를 무시하는 사회의 비리와 비정, 서민들의 발등에 수시로 떨어지는 불행과 재난, 불합리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어려운 생존환경을 암시하고있다. 소설의 기본갈등은 착하고 성실한 인간과 불공정한 사회와의 모순에서 비롯되며 주인공 탁명조는 고골리의 소설《외투》나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 또는 중국의 녀성작가 심용의 소설《중년세대》나 지리(池莉)의《번거로운 인생(煩惱人生)》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안고있는 무서운 생활난, 설상가상으로 들이닥치는 불행―― 이러한 것들은 가뜩이나 심장병을 앓고있는 주인공에게는 견딜수 없는 생활의 부하(負荷)로 된다. 소설은 나중에 착하고 순직한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함으로써 주인공의 불운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정을 자아내고있다. 이와 같이 소설은 말단공무원의 기구한 운명에 의한 련민의 플롯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가장 큰 사회문제―― 빈부의 격차를 고발하고있는데 이는 작중 인물 장부장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있단 말이요. 다시 말하면 소득분배의 격차와 불평등에 대한 민중의 용인도가 너무 크게 저하되였다는 말이요.”5)
강재희는 료녕성 조선족산재지구의 작가이다. 그의 단편《탈곡》은 조선족 농촌사회의 병폐와 일부 우리민족 구성원들의 허랑방탕한 근성을 꼬집은 하나의 세태풍속화이다. 소설의 제목을《탈곡》이라 했는데 이는 다분히 상징성을 지닌다. 탈곡은 곡식의 낟알을 이삭에서 털어내는 작업을 말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 온갖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 뚜드려 먹고 마시는 우리 농촌사회의 현실을 암시한다. 또 그것은 껍데기는 버리고 낟알만 챙겨야 함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이 작품은 취기 어린 농담, 육담들이 오가고 도리깨가 난무하는 탈곡장을 련상시킨다. 작품은 복이네 집에서 탈곡을 하는 하루의 일과를 다루고있는데 부지런한 “되놈”과 먹고 놀기만 좋아하는 조선족농민들과의 대조를 통해 우리 조선족공동체의 치부(恥部)를 적라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제3인칭 서술시점을 취함으로써 지나친 흥분이나 섣부른 비판을 자제했고 시종일관 세부묘사에 의한 형상의 진실성을 추구했다. 온 마을사람들이 흥청망청 취했을 때도 직설적인 비판을 삼가고 능청스럽게 아이러니를 창출한다.
“모두들 점심 술에 푹 취해 버렸다. 취하지 않은것이라면 공연히 정지와 마당에서 사람들의 발길에 묻어 다니는 햇강아지 누렁이뿐이였다.”6)
박선석은 길림성 통화지구의 농민작가인데 30년간 부지런히 글농사를 해서 장편소설《쓴웃음》,《재해》등을 발표해 조선족문단의 귀재로 일컬어진다. 그의 단편《애완견과 주인》7)은 그의 대표작 《털 없는 개》의 자매편이라 할수 있는데 이 작품은 소시민의 사치한 풍조와 허영심 및 그 파탄을 꼬집은 풍자소설이다. 애완견도 생명이 있고 그놈들은 온갖 재롱을 부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니 덮어놓고 애완견사육을 질타할수는 없다. 하지만 결코 개와 사람을 동격체로 볼수 없으며 더더구나 개가 사람 이상의 대접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 아무리 생태학의 시대라 해도 언제 어디까지나 사람은 만물의 령장이기때문이다. 이 소설의 철딱서니 없는 주인공 강화자는“미미”라는 강아지를 키우고있는데 그놈을 “우리 작은 딸”이라 하면서 금지옥엽처럼 떠받든다. 남편은 한국에 나가 있고 시어머님을 모시고 있건만 시어머님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시어머님의 생일날이지만 강화자는 새까맣게 잊어먹고 “미미”의 생일잔치를 차리기에 바쁘다. 애완견동호회 회원들이 줄레줄레 모여와서 축하의 박수를 치는 마당에 시동생이 들이닥쳤고 화자는 개꼴망신을 당한다.
하지만 강화자는 회과자신을 하기는커녕 한술 더 뜬다. “미미”가 발정을 하자“신랑감”을 찾아주고 결혼을 시키고 요란스레 잔치를 베푼다. 하지만 누군가 한국에 가 있는 남편에게 고자질을 해서 강화자는 오히려 리혼을 당한다는 이야기다.
혹시 내 생일을 차리는 게 아닌가? 하고 기다리는 성녀할머니의 시점으로 사건을 관찰함으로써 소설적 긴장과 아이러니를 보장했고 “미미”의 생일과 결혼이라는 두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대조시켜 극화함으로써 읽는이들의 폭소를 자아낸다. 이러한 희극은 사람과 개의 위치가 전도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김훈은 극문학과 소설 창작에서 모두 장기를 보인 작가인데 그의 단편《또 하나의 나》는 현시대 중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실업인구의 증대와 그로 말미암은 인간의 고뇌와 사회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것만큼 우리는 우선 김훈의 작가적사명감과 치열한 현실참여의식을 긍정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성공할수 있는 비결은 인물창조를 주되는 과업으로 하고있는 소설로서, 주인공 “나”의 형상을 잘 그린데 있다. 주인공 “나”는 비정하고 허황한 현실속에 “여분의 존재”로 주어진 외롭고 고독한 실업자이다. “나”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좌”적인 정치로선으로 말미암아 “동년시절 영양실조에 걸린 구루병환자, 소년시절에 반란에 무조건 도리가 있다던 홍위병, 청년시절 광활한 천지에서 지구를 다스리던 지식청년, 중년시절 부모처자를 가진 정리해고자”이다. 그는 마치도 어항(魚缸)에 갇힌 풀개구리나 자라와 같이 불확실한 현실속에서 하나의 노리개처럼 가난에 찌들고 그 어떤 우상에 의해 희롱당하기도 하고 그 어떤 정체 모를 권력에 의해 조롱을 당하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유일한 생존수단인 직업마저 떼이고만다. “광명천지”에 그가 설 자리는 아무데도 없고 마누라에게서도 남편대접을 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처럼 세상은 황당하고 인생은 괴롭지만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고 자유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에 새로운 본질을 부여할 때 인간은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 주인공 “나”는 마침내 실의와 비애, 자기기만과 자포자기의 깊은 늪에서 솟아 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갈 의지와 결단을 되찾는다. 이처럼 작품은 억눌리고 소외당한 민초들의 설음과 한을 대변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초들의 소중한 자아각성의 과정을 실감이 나게 그리고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나는 언제나 기분 나쁜 련상만 주는 자라를 돌멩이 내던지듯 늪속에 던져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나’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무덤에서 나오는 기분이였습니다…”8)
작품은 실의와 고독에 빠진 “나”와 풀개구리, 자라와 같은 상징물과의 대응속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의 심리와 정서를 해학적으로 묘사하는데 성공했고 일인칭소설의 장점을 살려, 바꾸어 말하면 소외된 인간의 시점을 통해 상류층의 비정과 비리― 사회의 치부(恥部)를 신랄하게 폭로하고 “나”의 심리변화과정을 깊이 있게 파헤칠수 있었다. 또한 극작가로서의 체질적인 입심, 재치 있는 에피소드의 장면화, 그리고 참신한 주제를 상징물과의 대응을 통해 느긋한 해학과 유머 속에 녹여내는 능력도 범상(凡常)이 아니다.
3. 녀성적자각과 비도덕적이고 무능한 가부장제도에 대한 도전
리선희의《그녀의 세계》와 같은 페미니즘소설이 1980년대에도 나왔지만 1990년대 이후 권선자, 리혜선, 허련순, 조성희 등 녀성작가들이 남성작가들에 비해 강세를 보였고 페미니즘소설의 창작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열어놓았다. 특히 전환기에 와서 권선자의《엄마의 저수지》, 리혜선의 《터지는 꽃보라》, 허련순의《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등은 녀성의 자각과 함께 부권제에 도전하고 남성의 무능함과 도덕적 타락에 반기를 든 충격적인 작품이 아닐수 없다.
권선자의 단편《엄마의 저수지》9)의 주인공 금혜는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는 행복한 주부이다. 시골출신이지만 병원 원장의 후실로 들어가 그야말로 호강을 하면서 살고있다. 하지만 출근하는 남편의 양복잔등에 “길다랗게 누워있는 굽실굽실한 황금빛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며 점차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 다만 녀성이라는 리유로 남편에게 씨받이로 리용된 자신, 친정집 동생들에게도 일방적으로 베풀어야만 하는 자신, 지어는 자식들에게까지 모성은 한낱 대가없는 희생물로 되고 마는 구슬픈 사실을 발견한다. 저수지의 물도 차면 언제를 넘어 흐르듯이 여기서 금혜의 일탈은 시작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녀성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남성중심의 사회가 지니고있는 비도덕성과 허위성, 즉 현대적 삶의 불모성을 고발하고 있다. 최근 몇 십년간 쓰러지는 가정과 조선족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아무런 감정적, 경제적 보상도 받지 못하고 짐승처럼 혹사당하기만 했던 녀성들을 생각할 때 금혜의 형상은 전형성을 띤다고 해야 하겠다.
리혜선 역시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인데 그의 중편소설《터지는 꽃보라》10)는 특이한 소재와 인물, 다양한 소설적 기법과 장치를 통해 독자들을 매료하고있다. 작중인물들은 모두 진짜 이름을 쓰지 않고 닉명이나 별명으로 통한다. 오늘의 대중사회에서 개개인은 닉명으로, 기호나 수자로 존재함은 더 말할것 없다. 우리는 가끔은 현금인출기에서 비밀번호를 넣고 돈이 나올 때마다 닉명으로 통하는 자신의 실체를 실감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경우에도 작중인물들은 “오징어파티”에 “고구마”, “별난 녀자”, “안니”, “제이”로 통한다. 이러한 닉명의 조건에서 이들은 자기의 욕구를 거침없이 분출한다. 천사가 악마로 변한다. 모든 탈을 벗어던지고 추한 몰골을 드러낸다. 황차 “3.8”절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닉명의 네 중년녀인들이 쏟아내는 성적 기갈과 음담패설은 읽는이들을 포복절도케 한다. 기실 그들은 가정을 위해 한국에서 10년씩이나 허둥대면서 일했지만 일단 귀국하자 자식과 남편, 사회에 의해 소외되고마는 이방인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눈물 어린 미소를 짓게 된다. 우리 사회의 진통과 해체, 그리고 소외의 주제를 닉명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미있게 풀이했다고 본다.
이 시기 대표적인 페미니즘소설로는 허련순의 단편《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를 들수 있다. 허련순 문학의 전반 흐름은 민족적정체성의 문제와 녀성문제로 나누어볼수 있다. 그는, 자신은 이민의 력사를 가진 민족의 일원으로, 게다가 녀성으로 태여났다는것을 강조한다. 그는 문학의 근원은 결핍이며 그 자신의 문학 근원 역시 소수자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결핍 너머의 충만감이나 슬픔뒤에 숨어있는 희열을 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바로 글을 쓰는 동력이 된다는것이다. 하기에 그의 문학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정체성 찾기와 녀성의 정체성 찾기로 이어진다.
허련순의 단편《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는 녀성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소설로서, 2004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허련순은 “언어탐구와 녀성성의 창조, 그리고 존재론적 추구 등에서 새로운 나의 문학의 지혜를 모색하고 싶다”고 하면서 이 작품의 창작동기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바 있다.
“단편소설 ‘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는 나의 또 다른 탈출구가 되기를 바라면서 쓴 작품이다. 우리 조선족들의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환기하고싶었다. 타성에 빠져 반성을 모르는채 일상을 살고있는 인간들, 던져주거나 받아먹고 사는데 익숙한 ‘하수구’ 같은 인생,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혼탁한 현실에 진정한 삶의 방식과 의미를 제시하고싶었다. ‘실패한 인생을 성공’이라고 말하고 ‘죽은 령혼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역설과 혼동의 론리로 이미 사회로부터 유리되여 더 이상 정상적인 꿈꾸기가 불가능한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어나는 착시(錯視) 현상, 그런 현상으로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것을 다루고있다. 즉 자의(自意)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살아지는, 살아지는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인생을 비참하게 그리고 있다.”11)
《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는 목전 조선족사회의 극심한 진통과 위기를 보여주면서 물신주의풍조와 윤리, 도덕적인 타락상을 정신적배경으로 깔고있다. 주인공이 살고있는 동네의 남성들을 보면 땅 판 돈을 쥐 소금 녹이듯이 다 써버린다. 그들은 겨울이면 마작이나 화투를 치고 여름이면 베짱이처럼 그늘 밑에서 신세타령이나 한다. 딸이나 안해가 외국에 가 돈을 벌지 못하는 집 남성들은 작은 놀음에도 끼우지 못해 그야말로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 시어머니는 가만히 앉아만 있는 며느리를 보고 능력이 없고 융통성이 없는 년이라고 몰아붙인다. 시어머니의 성화에 며느리는 한국 가는 비자를 내려다가 돈만 날린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또 공연히 설쳐서 땅 판 돈을 날렸다고 구시렁거린다.
주인공의 남편은 조선족남성사회의 고루한 의식을 대변한다. 그는 안해가 돈을 벌어오기를 바라서 가짜 리혼을 했고 리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야 재혼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위장결혼수속을 다그치기 위해 자신의 사망신고서까지 낸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은 “그녀”가 돈을 부쳐오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이제 큰소리하면서 살게 됐소.” 하고 좋아한다. 금전만능의 풍조, 특히 남성사회의 윤리, 도덕적인 타락상을 적라라하게 드러낸것이다.
이러한 남성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상에 진절머리를 치던 녀주인공은 마침내 남성중심의 사회에 도전장을 내고 여성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녀”는 가정을 살리기 위해 출국수속을 하다가 실패한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핀잔과 야유를 이기지 못해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나 성사하지 못한다. “그녀”는 마침내 남편의 허락을 받고 위장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가게 된다. 그제야 남편은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처절함과 배신감, 그리고 질투와 분노까지 겹쳐서” 노발대발한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히 립스틱을 꺼내서 입술에 바른다. 남편이 “그녀”의 손에서 립스틱을 뺏더니 “거지같은 놈한테 잘 보일 필요는 없다니깐.”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때 “그녀”는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쏘아붙이면서 당당하게 맞선다. 이처럼 이 소설은 갖는 릉욕과 희생을 당하면서도 가정과 사회를 지켜온 “그녀”의 성장과 여성적인 자각 과정을 그림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소설은 시종 시비경우는 바르나 말수 적은 “누님”의 시점을 통해 작중 인물을 관찰하고 “그녀”의 내심독백을 차분하고 절제 있게 펼쳐보임으로써 자칫하면 남성세계에 대한 속 얕은 흥분과 비난으로 끝날수 있는 소재를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소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집 떠난 고양이라는 소도구를 적절하게 등장시켜 상징적의미를 더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위고 작은 맨발”을 여섯 번 반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복선과 조응, 상징의 미학도 창출해 전반 작품을 탄탄하게 구성하고있다.
“마치 열 살에 성장을 멈춘듯한 작은 발, 그것은 아마 바로 지금부터 커지려고 작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야 나는 그녀의 작은 발에 대한 징크스를 알것 같았다.”12)
이 한 단락의 의론은 작품의 총체적인 의미를 암시,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발은 한 인간의 육체를 땅에 세우며 그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 가게 하는 인체의 중요한 기관이다. 그러므로 작게 보이던 발이 크게 보인다고 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그녀”가 자유선택을 통해 남성세계에 도전하고 자기의 길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농촌사회와 전통적가치관의 붕괴로 특징지어지는 조선족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 남존녀비의 고루한 관습에 의해 소외되고 위축되던 한 녀성의 분노와 반발, 도전과 탈바꿈의 과정을 다양한 소설적 장치와 기법을 통해 생동하게 그림으로써 전환기 조선족문학의 대표적인 페미니즘소설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다.
김경화의 단편《원점》13)은 그 제목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우리 생활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과장과 분식(粉饰)도 없이 원점에서 원색으로 보여준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경제적 불황으로 말미암아 남성은 가정을 유지할 힘을 상실하고 녀성은 타락의 늪에 빠지기 쉬운데, 이 작품의 주인공 “언니” 역시 염치와 정조 같은 것은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다. 그녀는 설사 못난이요, 불구자라 하더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등 따뜻하게 입혀주기만 하면 그런 남자들의 품에 안겨 기생(寄生)하는 몰염치한 녀자다. 하지만 그러한 녀자의 타락을 부른 것은 지지리 못난 가난이요, 그 장본인은 라태하고 무책임한 남성사회에 있음을 이 작품은 은근히 꼬집고있다. “언니” 의 남편은 가출해 오랫동안 객지로 떠돌고있는 안해를 찾을 대신 \"빨리 돈이나 부치라고 해라. 쌀이 거의 다 떨어진다.\" 하고 소리를 치는데 이러한 루추한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김동인의 소설《감자》를 련상케 한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니”는 “가출이 아니라 어느 풀숲으로 잠간 소피를 보러 갔다”고 하면서 “그래, 그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언니는 잠시 오줌이 마려웠을 뿐이야…” 하고 능청을 떨고 있는데 이러한 아이러니는 작중인물의 도덕적타락에 대한 신랄한 야유가 아닐수 없다.
김금희의 단편《개불》14)은 “개불”을 소도구로 설정해가지고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는 몰염치한 녀인의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우리 사회 정조관념의 붕괴와 도덕적타락상을 보여주고있다. “개불”은 바다에 사는 개불과의 환형동물(環形動物)인데 몸길이는 10-30cm이고 주둥이는 원뿔꼴이며 황갈색을 띤다. 바다 밑의 모래속에 “U” 모양의 구멍을 파고 산다. 이 작품에서는 “개불”을 두고 “사람의 피부 같은 색깔에다 원통형의 몸통마저 차라리 남자의 그것과 너무 닮아있는데 게다가 그것을 만지면 꿈틀하니 수축이 되면서 제법 탄탄해진다”고 했다. 통설에 의하면 “개불”은 남성의 정기를 돕는다고 한다. 헌데 주인공 “녀자”는 “개불”을 천하일미로 생각하고있고 “개불”을 사주는 남자이면 마음도 몸도 다 허락한다.
“개불 굶은 지 벌써 다섯 달이 넘어간다.”고 했는데 이는 이 “녀자”가 얼마나 남성을 밝히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실은 남편과 좀 모순이 생겼고 그 남편이 두어 달 집을 비운 사이에 욕정을 참지 못해 “개불”을 사준 다른 남성과 통정을 했을 뿐이다. 남편이 돌아오자 이 “녀성”은 원상으로 돌아와 얌전한 아낙으로 둔갑하고 그녀의 가정에도 평화와 행복이 깃든다. 이처럼 이 소설은 “개불”이라는 소도구를 리용해 우리 사회의 편의주의(便宜主義)적인 발상과 도덕적 타락상을 고발하고있다.
박옥남의 단편소설《목욕탕에 온 녀자들》는 “공간화의 기법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을 동원하고 자기식의 개성적이고 특색 있고 신선한 언어표현의 개발과 세련된 기법의 활용을 통해 오늘날 중국조선족 녀성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려내면서 중국조선족의 인정세태를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녀자들이 실 한 오리 걸치지 않고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다 드러낸 목욕탕의 녀탕이라는 이 공간설정부터가 소설로서는 더 이상 바랄수가 없는 호기심을 돋구어준다. 그러나 이 소설의 목적은 남성독자들의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유발하려는데 있은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부동한 세대의 각양각색의 조선족녀인들의 육체적인 라상(裸像)만이 아닌 심적인 나상도 드러내 보이는데 있었다. 특히 늙은 어머니 세대와 젊은 녀성들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서 변화된 인정세태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있는 점이 돋보인다.”15)
4. 디아스포라의 삶과 민족적 정체성의 갈등에 대한 형상화
해방 후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졌고 중국공민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리행했으니 해방 전과 사정이 많이 다르다고 하겠으나 디아스포라의 아픈 기억은 여전히 집단무의식으로 작용하고있다. 그리고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의 조선족집거구는 여전히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의 주류문화 사이에 있는 경계적인 지역이요, 여기에 살고있는 작가들은 어차피 디아스포라의 성격을 다분히 갖고있다고 해야 하겠다. 황차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한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나라로의 이동 및 산해관 이남 대도시로의 이주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양산하고있다.
조선족 작가의 경우, 연변을 비롯한 동북의 조선족작가들은 중국과 조선, 한국 사이를 자유롭게 나들고있고 지어는 류순호처럼 미국에, 장혜영처럼 한국에, 김문학처럼 일본에 장기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리원길, 황유복, 오상순, 서영빈, 장춘식, 김재국처럼 조선족집거구를 떠나 중국의 수도요, 다양한 문화의 합수목인 북경에 “걸출한 변두리”를 조성해가지고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하고있다. 이들 모두의 움직임을 통틀어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것이다.
물론 조선족작가들은 이주초기부터 심각한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마음 놓고 표현할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지 못했다. 한 때 조선(한국)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애착, 조선(한국)과 중국 문화 사이에서의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의혹과 불신을 초래했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자유로운 문학의 시대를 맞아, 다원공존과 다원공생의 세계사적 물결을 타고 디아스포라의 삶과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그러한 갈등을 극복, 승화시켜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있다.
김재국의 장편수기《한국은 없다》는 작가의 진실한 체험과 아픔을 통하여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처음으로 한중 언론매체에 전면으로 부각시킨 작품이라면 허련순의 장편소설《바람꽃》이나 조성희의 단편소설《동년》은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효시(嚆矢)적인 소설이라고 본다. 이 두 작품 사이에 조성희의 《동년》, 박옥남의《마이허》,《내 이름은 개똥네》,《장손》, 정호원의《쪽빛》등 수작들이 발표되였다.
박옥남의 단편《내 이름은 개똥네》16)는 지나간 중국의 사회현실과의 대비속에서 주로 한국에 나가있는 이른바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애환과 고뇌를 다루고있다.
소설《내 이름은 개똥네》는 역설적인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스스로 자기 이름을 “개똥네”라고 했으니 지극히 모순되는 진술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때문이다. 이 작품은 작자가 한국에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하러 갔다가 한국체류중인 남편과 동창생들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다루고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간의 일을 쓰고있는데 비행기가 두 날개로 하늘을 날듯이 한국방문시의 견문을 서사적 시간으로 젊은시절의 이야기를 편년사적시간으로 교차시키면서 의식류수법으로 두 갈래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 플롯을 짜고있다. 전반 이야기의 관찰자, 서술자는 “나”인데 처음 외국나들이를 하는지라 절에 온 색시처럼 어딘가 촌스럽지만 야무지고 사색적인 녀성이다. 그는 비행기안에서 만난 통배추모양의 머리 스타일을 한 한국인 사내와의 문화적마찰을 경험하기도 하고 인천공항에서 통관수속을 밟을 때 서양인들과 한 줄에 서야 하는 서글픔을 느끼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은 한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불청객”임을 절감한다. 특히 그녀는 3년만에 만난 남편의 초췌한 몰골과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놀란다. 불법체류자로 숨어사는 남편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경찰을 보고 초풍하듯 놀라 벌벌 떤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꿉시절의 친구들인 철수, 연순, 을숙, 금자, 병달, 갑부, 동녀, 광식, 춘화, 진아와 만나는데 그네들은 조상의 나라 한국에 갔지만 하나같이 고된 일에 부대끼고 하나같이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동녀는 한국에 온지 10년째인데 한족들의 입국비자가 잘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호구를 한족으로 고쳐서 온 까닭에 조선족동포에게는 자진신고에 의한 재입국제도가 도입되였지만 그 혜택을 받을수 없는 몸이여서 중국에 돌아갈수가 없다. 영순이는 치매에 걸리 노인을 보살피는 보모노릇을 하면서 갖은 괄시와 수모를 다 받고있고 불고기집에서 불판을 닦고 숯불관리를 하는 병달이는 “싸가지 없는 놈들, 너희들 중국에선 이것도 못 봤지? 저것도 첨 보지? 그러면서 시까스르는데 생각 같으면 불구덕을 들어 그놈의 대갈통에 확 들씌워놓고싶을 때가 하루에도 열두번 생긴다”고 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중국에서도 살길이 없고 한국에서도 설자리가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다.
여기서 “개똥네”는 계동녀의 별명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개똥네” 그것은 의지가지없는 조선족의 대명사이며 소외된 이방인의 별칭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개똥네”라는 메타포를 동원해 “나(또는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고있으며 우리 조선족형제들의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있다.
강호원의 단편《쪽빛》17)은 한국의 어느 한 외딴 섬에 있는 공장에서 벌어진 중국동포 정호와 한국인 우반장(禹班長)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평등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중국동포와 가부장적인 수직논리에 젖은 한국인 사이에는 자연 갈등과 충돌이 생긴다. 중국동포 정호는 육중한 철판들이 부딪치고 쇠를 갈아내는 소음으로 진동하는 로동현장, 고된 로동과 변덕스러운 기후 때문에 육신은 무너질것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한국인 우반장의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훈계와 욕설을 받아야만 한다. 우반장은 입만 열면 “씨팔, 씨팔”하고 10살 손우인 정호에게 거리낌 없이 반말을 쓴다. 하지만 우반장에게서 “병신”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호는 천둥같이 노해서 쇠파이프를 들고 길길이 뛴다. 결국 정호는 사장에게 들통이 나서 해고를 당한다. 그제야 우반장이 공장을 떠나는 정호를 붙잡고 “나는 집에 로모도 없구 툭 털면 먼지라카지만두 형님은 연변에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두고 온 묌이 아닌겨?” 하고 한사코 붙잡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적절한 배경을 통해 분위기를 잡고 치렬한 갈등과 충돌을 통해 극적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나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화해를 가능케 한것은 물론 두 밑바닥인생의 가슴속에 고여 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민족적동질성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쪽빛”인데 그것은 바다나 하늘의 색갈인 동시에 핏줄의 색깔이며 격렬한 파란(波蘭)과 충격(衝擊) 뒤에 오는 평온과 순수의 빛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치밀하게 계산한 상징을 내적 장치로 깔고있다고 하겠다.
박옥남의 단편소설《장손》을 보자. 장손은 가문의 대통을 잇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막중한 책임을 안고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족학교에 다녔고 조선음식보다 한족음식을 좋아하며 신수는 멀쩡하지만 일하기는 싫어한다. 계집을 좋아하고 여러 번 장가를 들다가 나중에는 중국녀인의 품에서 죽어간다. 하지만 여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문상객들도 장밤 마작만 놀아댄다. “장손”의 엽총은 큰처남이 가져갔고 목이 긴 구두는 둘째처남이 가져가는데 오토바이의 “주권”을 두고 막내처남과 “형수”가 옥신각신 싸운다. 청승맞은 새납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개처럼 죽어가고 뜯겨가는 장손의 모습,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퇴색한 사진액자 하나가 허접쓰레기 같은 옷가지에 휘말려 나딩굴고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주어들고 보니 설날아침이면 차례상에 모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였다. 유물을 정리한답시며 여기저기 마구 뒤지는 통에 한데 끼여 나온게 분명했다. 솜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와 앞가리마를 곧게 내여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붙인 한 할머니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있었다. 어렸을 땐 차례제를 지내면서도 무섭다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진이였다. 그러다 후에 철이 들면서 차차 익숙해져 다시 정을 가지고 대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일한 사진이였는데 이렇게 이곳에 흘려져있을줄이야.18)
조상의 영정(影幀)마저 챙기지 못하고 개처럼 죽어가는 모습인데, 이를 소설적인 허구로만 볼수 있을가? 피땀으로 일군 땅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 현실, 우리의 말과 글, 민족교육의 터전마저 지키지 못하는 현실, “장손”은 결코 허구적인 인물만은 아닐것이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사촌동생”의 시점으로 모든 인물과 사건을 관찰, 묘사, 서술하면서 절제된 평가와 의론을 통해 랭철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있다. 그리고 갈피갈피에 펼쳐지는 조선족과 한족 문화에 대한 대비적인 서술에도 작가 특유의 혜안과 재치가 엿보인다.
조성희의 《동년》19)은 몽환적사실주의 특징을 가진 수작이다. 아랫마을에는 조선족이, 웃마을에는 한족이 살고 있는데 아랫마을 조선족총각은 웃마을 한족처녀를 사모하면서 도둑련애를 한다. 한 편 웃마을 검정수캐는 아랫마을의 흰 암캐를 찾아와 짝짓기를 한다. 조선족총각은 그를 시샘하고 질투하는 한족 젊은이들에게 들통이 나서 늘씬하게 맞아 쓰러지고, 야밤중에 윗마을의 검정 수캐는 아랫마을 수캐들에게 물리고 뜯겨 죽어버린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아랫마을에서 희한한 일이 생긴다. 아랫마을의 흰 암캐가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얼룩 강아지들이란 이야기다. 두 민족 사이의 반목과 문화적인 마찰 및 그 숙명적인 공존과 융합의 생리를 인간세계와 동물세계와의 대조를 통해 그려낸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5. 맺는 말
전환기 조선족소설문학의 주제적 경향을 대표적인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로, 이 시기 소설은 권력층의 부패와 빈부의 격차 및 이로 말미암은 서민계층의 소외라는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성격과 갈등을 통해 조선족공동체의 피폐상, 서민계층의 애환을 다루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사회의 문제점들도 가차 없이 비판하고있다. 여기서 김훈의《또 하나의 나》에서 볼수 있지만 개인과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실존주의 철학에 기대고있다.
둘째로, 허련순, 리혜선, 박옥남 등 녀성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이들의 페미니즘소설은 개혁개방 후 고루한 남성사회의 희생양으로 되여왔던 녀성사회의 자각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양한 녀성형상을 창조함으로써 부권제에 도전하고 예성의 인간적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녀성세계 자체에 대한 성찰과 비판도 시도함으로써 여성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고 보다 성숙된 경지를 지향하고있다. 셋째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자각하고 민족적정체성의 갈등을 혼종성, 양가성의 원리, 말하자면 문화상대주의나 다원공존의 론리로 극복하고자 한 작품들이 돋보인다. 특히 허련순은 1996년 장편《바람꽃》20)에서 2003년 장편《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21)에 이르기까지 조선족의 정체성문제를 끈질기게 추구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하지만 장편소설에 대한 토론은 이후의 과제로 남긴다.
- 2009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