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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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다리 잡은 재상 댓글:  조회:1604  추천:41  2011-04-19
 사다리 잡은 재상 김호웅   요즘 여러 종류의 문학상 심사에도 참가하고 화려한 문학비 제막식이나 문학상 시상식에도 참가하고 있으나 마치 진수성찬을 대접받다가 가시를 삼킨 듯 찜찜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현상금을 내는 후원자는 후원자대로 입김이 세고 주최 측은 주최 측 대로 생색을 내고 지어는 큰 고기는 잡아 자기 망태기에 넣는 판이다. 결국 열심히 일한 작가, 예술인들에게는 국물도 차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라파엘로의 일화를 떠올리면서 쓴 웃음을 짓게 된다.     라파엘로(1483~1520)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빛낸 3대 명화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탈리아 궁정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부터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불행하게도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에는 큰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면서 비타, 페루지노에게서 그들의 감미로운 화풍을 배웠다. 특히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화면구성, 명암법을 배운 동시에 동적 및 지적 요소를 섭취함으로써 완전히 낡은 화풍에서 벗어나 라파엘로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수립했다. 1508년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청을 받고  7, 8년간 로마 최초의 대작인 바티칸 궁전 서명실(署名室) 장식에 참여해 천정화를 그린 후 사면의 벽에 《성테의 논의》, 《아테네 학당》, 《삼덕상(三德像)》등 대작을 그렸다. 1514년부터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주임의 중직에다가 로마시 고적 발굴 및 부흥계획을 추진하는 주임이 되어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3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러나 그는 짧은 생애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으며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명민하고 온후한 성품에다가 대단한 미남이여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선배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 서명실의 천정화를 그릴 때의 일인 것 같다.      라파엘로가 위태롭게도 높다란 사다리에 올라 천정화(天井畫)를 그리고 있는데 율리오 2세가 국무성 원장과 함께 그 곳을 지나갔다. 국무성은 교황의 수석보좌기관으로서 교황비서국이라고도 하는데 교황청 기구가운데서 가장 상위에 위치하여 교황청 내외의 주요업무를 총괄하고 각 기구 사이의 교량 역할도 하는 부서이다. 그런즉 국무성 원장이란 오늘의 내무부장과 외무부장을 겸한 자리이다. 일국의  재상(宰相)쯤 되는 높은 벼슬이라 하겠다.    라파엘로는 잠깐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눈인사를 할 뿐인데 교황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국무성 원장더러 사다리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라파엘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무성 원장은 민망한 눈빛으로 교황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미천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어른더러 사다리를 잡고 있으라니요?     이에 교황은 빙그레 웃으면서 한마디 던졌다.    《사다리를 잡고 있으라면 잡을 것이지 왜 꾸물거리는 거요. 국무성 원장은 임자가 아니더라도 할 사람이 많지만 이 천정화는 라파엘로가 아니면 그릴 사람이 없단 말이오.》         국무성 원장이 울며 겨자 먹기로 라파엘로가 타고 앉은 사다리를 잡았음은 더 말할 것 없다. 누구의 명(命)이라고 감히 거역하랴. 그렇지만 상상을 해 보시라, 형벌을 받고 있는 노예처럼 일국의 재상이 사다리를 잡고 진땀을 흘리는 장면을!    물론 국무성 원장이란 자는 그 후로부터는 감히 예술가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고 그들의 착실한 시중꾼으로 일했을 것이다. 아무튼 교황으로부터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예술을 숭상하고 예술가를 예우(禮遇)할 줄 알았기에 르네상스, 즉 예술의 황금기를 맞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요즘 우리 문예를 관장하는《재상》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상, 중, 하로 나누어 본다.     사다리는 잡고 있되 감 놓아라, 배놓아라 잔소리가 많은 것은 그래도 상에 속한다 하겠다. 책임성이 있고 천진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잡기는 고사하고 아예 라파엘로를 밀어내고 부득부득 사다리에 오르는 것은 그래도 중에 속한다 하겠다. 무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 열정 또한 가상(嘉尙)하기 때문이다.     하, 즉 꼴지는 사다리는 잡고 있되 일단 천정화가 완성되면 모두 사다리를 잡은 자기 자신의 공로로 치부하고 온갖 지면을 통해 라파엘로 이상으로 떠벌려 자랑을 한다. 그리고 제막식이나 시상식 잔치에 가보면 “라파엘로”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사다리를 잡고 있던 “재상”들이 오히려 생화묶음을 안고 즐겁게 웃고 있다. 이는 엉큼한 도둑놈의 짓거리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뭇새들의   예쁜 깃을 훔쳐다가 자기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선 이솝 우화의 까마귀를  연상케 한다.        이런 얌치없는 족속들이 판을 치는 한 우리 문예는 희망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정직하고 재능 있는 작가, 예술인들의 슬픔과 비애는 증폭될 뿐이다.                                        ― 2005년 10월 11일    
21    한 그루 무궁화 댓글:  조회:1538  추천:27  2011-04-13
 한 그루 무궁화 김호웅    요즘 세상살이가 어렵고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다고 하지만 가끔 빈 들판에 핀 가을 국화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이 세상이 한결 따스한 느낌이 든다. 왕유(王瑜) 교수가 바로 그러한 분이다. 왕유 교수라 하면 잘 모르실 분들이 많겠지만 이분이 바로 연변대학교의 저명한 영어교수요, 고(故) 정판룡 교수의 사모님이다.    왕 사모님은 1934년 상해에서 태어나 1953년 중경 남개중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구소련 모스크바 레닌사범학원 러시아 언어문학학부를 졸업했다. 왕 사모님은 거기서 만난 정판룡 교수를 따라 연변에 왔고 연변대학교에서 러시아어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장장 46년 세월을 하루와 같이 조선족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다.    왕 사모님은 1996년에 정년을 했고 2001년 평생의 반려요, 지기인 정판룡 교수를 여의고 외기러기 신세로 지내고 있다. 딸 홍(虹)이네 식구와 아들 진(辰)네 식구가 모두 일본에 있어 혼자 지내는 왕 사모님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기실 그는 여전히 이 가을도 지칠 줄 모르고 꽃을 피우는 무궁화처럼 일에 바쁘고 사랑을 나누기에 바쁘다.    자, 연변대학교 서대문 옆에 있는 왕 사모님네 댁으로 가보자.    호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정판룡 교수의 유상이 벽 중앙에 걸려 있는데 그 아래에는 일본에 있는 손녀, 손자 녀석들이 할머니를 위로하느라고 빨갛고 노란 크레용으로 그려 보낸 크고 작은 그림들이 붙어 있다. 토끼나 노루와 같은 착한 짐승도 보이고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뜬 호랑이도 보인다. 서툴고 우습기는 하지만 애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환상력이 꼼틀거려 볼수록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판룡 교수가 앉아있던 안락의자에는 수염이 달린 큰 인형이 비스듬히 앉아 있다. 왕 사모님의 말씀으로는 정판룡 교수라고 한다. 묵직한 테이블 위에는 큰 화분에 자란 무궁화 한 그루가 탐스러운 꽃을 떨기떨기 피우고 있다.    왕 사모님은 바로 여기서 일하고 계신다. 자서전을 쓰고 후학들의 논문을 수정하고 영어강습반 강의안을 짜기에 늘 바쁘다. 정판룡 교수가 작고한 뒤로는 무궁화를 손보아 주는 일도 왕 사모님 혼자의 몫이라 이래저래 늘 바쁘다.          오늘은 왕 사모님의 에피소드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좀 버릇없이 왕 사모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왕 사모님의 한복차림      우리 제자들은 왕 사모님을 두고 “연변의 왕소군”이라고 한다.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인데 기원전 33년 흉노(匈奴)와의 친화정책을 펴기 위해 흉노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을 갔던 절세의 미인이다.『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원제는 화공들에게 궁녀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궁녀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으나 워낙 성품이 정직한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다. 원제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왕소군을 호한야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야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게 된 원제는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흉노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그녀를 보내고는 화공들을 죽여 버렸다고 한다. 아무튼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전송되었고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다루어졌는데 원대(元代) 마치원(馬致遠)의 희곡『한궁추(漢宮秋)』를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왕 사모님을 왕소군과 동일시하는 것은 심통한 비유라고는 할 수 없다.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제물로 바쳐진 셈이지만 왕 사모님은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연변에 왔고 평생 조선족형제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 사모님은  성씨도 왕소군과 같은 왕씨(王氏)요, 자색에 있어서도 결코 왕소군에 짝지지 않으니 그녀에 비유해도 크게 어폐는 없으리라.    언젠가 왕 사모님네 댁에서 사진첩을 본적 있는데 20대의 나이에 러시아 볼가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이 사진은 요즘 왕 사모님의 자서전 『남에서 북으로 날아와 70년 세월(從南到北七十載)』에도 수록되었는데 가히 20세기 미스 차이나 반열에 올릴 만한 아름다운 용모였다.    왕 사모님은 이젠 칠십 고개를 넘은 분이지만 그냥 해맑은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간직하고 있다. 제자로서 사모님의 자색을 두고 품평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지만 우리 부모님의 회갑잔치 때 얼핏 본 그분의 백옥 같은 살결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큰형 봉웅, 셋째 형 관웅, 그리고 네째인 나까지 정판룡 교수의 문하에서 문학공부를 했는지라 우리 부모님의 환갑잔치에 정판룡 교수 부부를 모셨었다.    그 날 환갑잔치는 요즘처럼 화려한 호텔에서 한 게 아니라 연길시 광명가의 어느 널찍한 노인 독보조를 빌려서 했다. 아마도 지금의 코스모호텔 뒤에 있었던 것 같다. 환갑상을 차려놓고 어르신들을 모시는데 자연 정판룡 교수는 우리 아버지 옆에, 왕 사모님은 우리 어머니 옆에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울긋불긋 풍성한 한복들을 차려입은 우리 어머니와 안사돈들 사이에 끼인 왕 사모님의 옷매무시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수수한 남색 평복을 입고 오신 것이다.    연변박물관의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왕 사모님도 한복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구들 되는 자식들을 다 출세시킨 집안의 환갑잔치라고 사진작품으로 만들어 연변박물관에 번듯하게 걸어놓을 심산으로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에서 고풍스러운 병풍을 빌려오고 “어동육서, 홍동백서(魚東肉西, 紅東白西)요”하며 직접 환갑상을 차려온 사진작가인지라 그의 아집을 꺾을 수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난색을 지었다. 누가 감히 한족인 왕 사모님을 보고 한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권할 수 있으랴!    버르장머리 없는 비유지만,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은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왕 사모님을 조용히 병풍 뒤쪽으로 모셔내다가    “오늘 환갑상을 받는 장면은 연변박물관에 영구히 전시한답니다. 죄송하지만 사모님께서도 한복으로 갈아입었으면 하는 데요…”   하고 한 마디 조심스레 여쭈었다. 그랬더니 왕 사모님은 당신 자신의 옷매무시를 얼핏 내려다보더니   “나두 닭 무리에 오리가 끼인 격이라 생각했어. 헌데 한복이 있어야 입지.”   하고 천만뜻밖으로 한복을 입겠노라고 했다.   나는 얼씨구 좋다 하고 이 소식을 형제들에게 알렸고 누님은 득달 같이 달려가 여벌로 장롱에 넣어두었던 한복을 받쳐 들고 달려왔다. 누님이며 큰형수며가 마치 황후를 모시듯 왕 사모님을 옹위해 가지고 옆방으로 들어가는데 얼마 뒤 방안에서 아낙네들이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새여 나왔다.    “과시 미인이야!”    이는 걸걸한 성격의 누님 목소리였고    “아이구, 어쩌면 살결이 저렇게 희지요. 떡가루 같아요.”    이는 큰형수가 혀를 차는 소리였다.    나그네 귀 석자라고 나는 그 소리들을 다 들었고 호기심을 참을 길 없어 슬쩍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누님과 큰 형수가 왕 사모님에게 치마를 입히고 나서 저고리를 입힐 차례였는데 두 팔을 벌리고 얌전하게 입혀주기를 기다리는 왕 사모님은 그야말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비둘기 잔등 같은 동그란 어깨, 백옥 같은 두 팔, 이팔청춘 소녀처럼 홍조를 머금은 능금 같은 두 볼, 그야말로 화용월태(花容月態)라 눈이 부셨다.    쉰 고개를 넘어선 분이 저토록 아름다울진대 처녀시절에는 과연 얼마나 청순하고 싱싱했을까! 그래서 천하에 비위 좋고 넉살좋은 정판룡 교수도 시퍼런 대낮에는 도무지 프로포즈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지지리 못나게도 둘이 암실(暗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에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덥석 왕 사모님의 손을 잡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날 한복을 입고 앉은 왕 사모님의 모습은 참으로 한 떨기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더욱이 일개 대학교의 유명한 영어교수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족 노인네들 사이에 허물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형제들은 물론이요, 연변박물관의 사진작가도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후일 이 사진은 확대, 현상돼 연변박물관에 전시했는데 좋이 10여 년은 걸려있었다. 요즘 연변박물관이 진달래 광장 쪽으로 옮겨간 뒤로 그냥 걸어두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아무튼 남방의 대도시에서 자랐으되 뽐낼 줄 모르고, 모스크바 유학까지 한 적 있는 영어교수가 가두의 노인네들과 허물없이 앉아 있는 모습, 철두철미 한족이지만 조선족의 풍속과 습관을 존중하는 왕 사모님을 우리 형제들은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왕 사모님 마음은 열두 폭 치마      한평생 서캐를 훑어야 하는 언어학을 전공한 까닭일까, 왕 사모님은 성미가 꼼꼼하고 날카롭다. 영어로 말하자면 노(no)와 예스(yes)가 분명하다. 그녀 앞에서 근신(謹身)하지 않고 흰소리를 치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 상대가 남편이든, 교장이든, 제자이든 관계없이 따끔하게 일침(一針)을 놓는다. 우리 제자들은 정판룡 교수한테서는 별반 꾸중을 듣지 않았지만 왕 사모님에게서는 거개가 한두 번씩 코를 떼였다.        왕 사모님은 문자에 밝아 정년을 한 후에도 연변대학교의 최대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간명한국백과전서》를 비롯해《조선-한국학연구총서》의 문자수정을 맡아했는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렁뚱땅 원고를 낸 친구들은 모두 혼쭐이 났다. 원고만 수정해 연구소에 돌려주는 게 아니라 마치 소학생의 숙제검사를 하듯이 직접 당사자를 불러다놓고 깐깐하게 설명을 하고 해석을 하는지라 그네들은 진땀을 내야 했다. 왕 사모님은 설사 연변대학교의 석학으로 정평이 난 학자의 원고라 해도 새까맣게 고쳐서 되돌렸다. 그래서 왕 사모님을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실은 그의 깊은 속내를 모르기 때문이리라.    왕 사모님은 원리원칙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고 학문적인 문제를 두고는 미주알고주알 캐고 들지만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더없이 너그럽고 대범하다. 그야말로 왕 사모님의 마음씨는 열두 폭 치마라 하겠다. 남편인 정판룡 교수와의 사이도 그런 줄로 알고 있다.    정판룡 교수는 워낙 학식도 인품도 넉넉한 사람이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한 품에 안을 만한 호걸남아라 그를 따르는 여성들이 꽤나 많았다. 우리 문단의 해반주그레하게 생긴 여류작가들도 정판룡 교수를 졸졸 따라다녔고 우리 대학의 여성 교수들 중에도 은근히 정판룡 교수를 사모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한 여교수는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데다가 노래를 썩 잘 불렀고 글재주도 좋았다. 정판룡 교수도 그녀를 퍽이나 예뻐해 주는 눈치였는데 그녀는 내놓고 정판룡 교수를 감싸고돌았다.    연변대학교 남녀 교수들이 가끔씩 연길시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식당에 가서 회식을 하고 돌아오면 정판룡 교수와 그녀는 우리와 함께 연변대학교 서대문까지 왔다가는 슬쩍 자취를 감추곤 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호젓한 다방을 찾아가 밤늦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이다. 왕 사모님도 이를 모를 리 없었고 그래서 그녀를 좀 쌀쌀하게 대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2001년 가을 정판룡 교수가 결장암에 걸려 2년 남짓이 고생을 하다가 운명을 하게 될 무렵인데 그 여교수가 조용히 왕 사모님을 찾아왔다.    “사모님, 제가 정 교수님을 하루 밤만 간호하고 싶은데요. 허락해 주시겠어요?”    왕 사모님은 그만 억이 막혔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철면피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가더란다. 내 남편이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좋았기에 피골이 상접해 임종에 직면한 이 마당에 하루 밤 모시겠다고 나서는 여인이 있단 말인가. 또한 남녀관계를 막론하고 세상의 인심이란 얻어먹을 게 있으면 아첨을 떨고 애교를 부리다가도 얻어먹을 게 없으면 등을 돌리기 마련이거늘 이 여자가 무엇을 바라고 정 선생을 모시고자 하는가. 그게 바로 이슬처럼 맑은 인간의 정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그녀가 측은하게 보였고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겠다고 하는 그녀의 행실이 결코 밉지 않았다고 한다. 왕 사모님은 그녀더러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게 하였다.    물론 그 여교수는 이 일을 두고 왕 사모님을 더없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왕 사모님 또한 일생에 제일 잘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그 여교수더러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게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자는 시 300수는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고 했다. 왕 사모님이야말로 티 없이 맑은 거울과 같은 분이라 그분의 앞에 서면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넋이 맑아짐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하고 천진하지만 인간적 깊이가 있고 아름다운 천품을 지녔지만 언제나 수수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왕 사모님, 그야말로 “물은 깊으면 조용한 법”이라는 어느 명인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왕 사모님의 믿음 속에 정판룡 교수를 하룻밤 시중든 그 여교수도 정성을 다 고였을 것이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체험했으리라 생각한다.        왕 사모님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      며칠 전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문득 전화가 걸려 왔다. 연변병원에 입원한 왕 사모님의 전화였다. 사모님은 요추(腰椎) 통증으로 오래 동안 고생을 하다가 며칠 전 수술을 받고 연변병원 골과병동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후슝(虎雄)―”    왕 사모님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단 내 이름을 불러놓고    “오늘 점심 내 병실로 왔을 때 104호 병실에 있는 한 정실이라는 애를 보고 왔었지.” 하고 말꼭지를 뗐다.    “예, 그랬는데요.”    “글쎄 그 애가 엄마와 함께 방금 날 보러 왔지 않겠어. 고맙게도 음료를 사들고 말이야. 이태 전 정 선생이 만든 아동장학금을 탄 적 있다고 해. 그래서 감사를 드린다고 했어. 얼마나 착해. 헌데 엄마, 아빠가 다 하신을 잘 쓰지 못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애마저 다리를 다쳐 아홉 달째 병원에 누워있다는 거야. 여봐 후슝, 요즘 자네들이 문병을 왔다가 부조한 돈이 5천 원은 좋이 되거든. 그걸 한정실의 입원비에 보태주고 싶어. 그래도 되겠어?”    “왜 안 되겠습니까? 허지만 사모님도 입원한 신세고 이제부터 돈을 많이 써야 하겠는데요.”    “아니야, 난 입원비를 못 낼 사람이 아니야. 이 돈은 내 돈도 아니구 여러 사람들의 정성이니 이를 정실이를 치료하는데 써야 하겠어.”    막무가내였다. 일단 이 정도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한정실이란 연길시건공소학교에 다니는 소녀인데 올해 정초 이모와 함께 모아산 민속촌에 가서 눈썰매를 타고 쏜살같이 아래로 지쳐내려 오다가 그만 해묵은 소나무 등걸에 부딪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쳤었다. 정실이는 수술을 받았으나 골수염이 생겨 재차 수술을 받게 되였다. 그 애의 어머니 박금숙(45세)은 “애비, 어미 모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데 정실이마저 다리를 잃으면 어떡해요?…” 하고 쌍지팡이를 짚고 병원 안팎을 드나들며 온갖 정성을 다했고 그 애의 아버지도 불편한 다리를 끌고 목기공장에 다니면서 아득바득 입원비를 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4만원이나 들어간 입원비를 갚자면 그야말로 하늘에 장대 겨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 제작진에서는 사회에 향해 구원의 손길을 호소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 연변대학교에서는 정판룡 교수 서거 5주기(週忌)를 기념할 겸 9월 30일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 협찬을 하게 되었고 사전 준비로 나는 이 광실 기자와 함께 한정실 학생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자리에서 그 애에게 힘이 되라고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교수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 왕 사모님이 지금 115호 병실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왕 사모님의 진정어린 말씀에 그만 콧마루가 쩡해났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당신 자신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건만 한 조선족 어린이를 위해 5천 원의 거금을 선뜻 내놓으려 하는 것이다.    기실 정판룡, 왕유 부부는 1996년 KBS해외동포상으로 받은 상금 10만 원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고 2001년 정판룡 교수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제자와 벗들이 문병 차로 와서 내놓은 부조금 11만 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몽땅 장학기금에 보태주었다.《정판룡교육발전기금》설립 10주년을 맞는 오늘 이미 56명의 대학생들이 이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왕 사모님이 두 어려운 대학생을 도와준 이야기는 그 누구도 모르리라.    하나는 연변대학교 영어학과 학생인데 길림성 요원시(遼原市) 출신이다.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기고 인사성도 밝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홍반성 낭창(紅斑狼瘡)이란 몹쓸 병을 앓고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왕 사모님은 이 학생에게 모름지기 1년 학잡비 5,000원 대주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매 연변대학교 당국은 그 학생의 2년 분 학잡비를 몽땅 면제해 주는 특전을 베풀었다. 왕 사모님에게 그 학생의 근황을 물었더니 “지금 소주에 살고 있지. 몸은 여전히 아픈 모양인데 내 둘도 없는 멜 커플이지! 가끔 재미있는 이야길 주고받지. 후슝에게는 말해 줄 수가 없어.”하고 방긋 웃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호북성의 오지에서 온 토가족(土家族) 대학생인데 왕 사모님이 가만히 보매 방학마다 집에는 가지 않고 빈 교실에 앉아 공부만 하고 있었다. 왜 방학에 집에를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차표를 끊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고 했다. 차근차근 물어보니 방학에 한 번 갔다 오는데 800원이 드는데 부모님은 가난해서 그 돈을 댈 수 없고 설사 돈이 있어도 아까워서 차표를 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왕 사모님은 젊은 시절에 구소련에 가서 여러 해 공부를 했고 평생 나서 자란 상해, 무석, 중경과 수 천리 떨어진 연변에 와서 살고 있으므로 부모형제를 그리는 그 학생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왕 사모님은 그 학생에게 800원을 주어 차표를 끊고 3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상봉케 하였다. 이 학생은 이제 곧 졸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고 했다.       무궁화는 영원히 피리라       정판룡 교수의 서재에 있는 무궁화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1983년 이웃으로 살던 연변대학교 김지운(金址云) 선전부장이 정판룡 교수가 무궁화를 각별히 좋아하는 줄을 알고 자기네 자택 베란다에서 기르던 무궁화나무에서 한 가지를 베어 물병에 넣어 뿌리를 내리게 한 다음 예쁜 화분에 담아 선물한 것인데, 올해까지 23년 동안 왕 사모님네 댁에서 무탈하게 자라고 있다. 2001년 정판룡 교수가 작고했으니 18년은 정판룡 교수가 키우고 올해까지 5년 채 왕 사모님이 키우고 있는 셈이다.    요즘 왕 사모님은 썰렁한 가을바람이 불자 정판룡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여름에 베란다에 내갔던 무궁화 화분을 집안에 들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담홍색 꽃송이는 대여섯 송이 피었다가는 지고, 졌다가는 다시 피어서 온 객실에 은은한 빛과 향기를 던져주고 있다. 금시 호걸스러운 정판룡 교수가 껄껄껄 웃으며 서재에 들어와 안락의자에 앉아 구수한 이야기를 꺼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왕 사모님의 무궁화 사랑은 자별하다. 무궁화를 보면 저 하늘에 계신 남편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왕 사모님이 이토록 무궁화를 아끼는 것은 이 꽃이 바로 남편의 모국인 조선이나 한국의 국화(國花)요, 그녀 자신이 또한 조선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 그루의 무궁화를 두고 우리 제자들은 왕 사모님과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무궁화는 바로 거친 연변에 와서 뿌리를 박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왕 사모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따스한 남방의 대도시에서 나서 자랐고 남개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연변에 온 왕 사모님, 그가 겪어야 했던 고생은 그야말로 일구난설이다.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는데다가 1960년대 초반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한 쪽 신장마저 떼어버려야 했던 왕 사모님이다. 더더구나 하늘같은 남편을 잃은 이 무렵 왕 사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허전하랴. 또한 왕 사모님에게도 귀한 자식들이 있고 그들은 일본에서 고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왕 사모님은 이 모든 상처와 괴로움과 그리움을 약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조선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니 그이야말로 왕 사모님이야말로 21세기의 왕소군이요. 한 그루의 무궁화가 아닐 수 없다. 찬  바람 부는 이 가을에 온 생명을 다 바쳐 한없이 피고 또 피는 무궁화, 그게 바로 왕 사모님이다.    왕 사모님네 댁 무궁화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냥 탐스럽게 필 것이다.    왕 사모님의 쾌유(快癒)를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2006년 10월 1일, 깊은 밤에   주:    왕유, 한족, 교수, 강소성 무석시 출신. 1934년 5월 19일 상해시에서 태여나 1953년 중경 남개중학을 졸업하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 모스크바 레닌사범학원 로씨아언어문학학부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연변에 와서 연변대학교 로씨아학부와 영어학부에서 교편을 잡았고 학과 주임, 학부장 등 직무를 역임했으며 1996년 정년을 했다. 연변대학교의 영어학과 설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조선족의 외국어 교육 및 영어, 조선어, 한어 비교연구에 관한 다수의 론문과 저서를 내놓았으며 정년 후에는 조선족 문학지에 여려 편의 글을 발표했다.
20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 댓글:  조회:1548  추천:26  2011-04-13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                                                 김 호 웅       콧물이 흘러내려 동태국도 못 먹고     1970년 1월 그해 내 나이 17살이었다. 중학교에 들어와 1년도 공부하지 못하고 허울 좋은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가게 되였다. 2년 전 큰형이 대학을 졸업하고 흑룡강 북안현에 있는 군대농장으로 갔고 둘째 형은 고급중학을 채 졸업을 하지 못하고 돈화현 대산주자에 가있었으며 셋째형은 초급중학 3학년을 졸업하고 연집공사 태암촌에 가있었다.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간다는게 실은 무서운 고생을 하러 가는것임을 나는 형들의 전례를 통해 벌써 알고있었다.   둘째형이 돈화로 갈 때 담임선생님께서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학부모들을 동원하고 위안을 했다. 그이는 우리 부모님을 앉혀놓고 돈화현 대산주자를 선경처럼 이야기했다.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대산주자 아주머니들은 아침에 일어나 남편에게 이렇게 묻는 답니다. ‘오늘 아침엔 꿩고기 먹겠수? 노루고기 먹겠수?’ 남편이 ‘거 좀 시원하게 꿩고기 국을 먹고 싶구만.’ 하면 아주머니는 일단 아궁이에 도목나무를 사려놓고 솥에 물을 씽씽 끓인 다음 문을 활짝 열어놓는 답니다. 그러면 꿩들이 훨훨 날아와 죽창(竹槍)처럼 솥에 꽂이지 뭡니까? 안성맞춤으로 끓는 물에 튀를 해서 납죽납죽 썬 무에 고추장까지 듬뿍 넣어 끓이면 시원한 꿩고기 국이 되는거지요. 간혹 ‘거 오늘은 눈이 많이 와서 아무 일도 못하겠구만. 술이나 한 잔 하게 노루고기로 회나 치지.’ 하면 아주머니는 빨래 방치를 들고 절구통 같은 엉덩이를 휘두르면서 문밖에 나갑니다. 노루가 대여섯 마리나 서서 ‘나 때려 잡수.’ 하고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아주머니는 기중 살집이 좋은 놈을 보고 ‘에끼 이놈아, 오늘 우리 영감 술안주나 되어라!’ 하고 빨래 방치로 탁! 하고 노루의 정수리를 친답니다. 거 노루고기로 만든 회, 입안에서 살살 녹는게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지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게 다 새빨간 거짓말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식들을 차례로 농촌에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북안현 군대농장에 간 큰형에게서는 보이라에 불을 때다가 물통을 엎질러 발등을 데웠다는 편지가 날아왔고 둘째형이 가있는 돈화현 대산주자라는 마을은 꿩고기, 노루고기는 고사하고 일 년 삼백육십오일 돼지고기 한 칼 먹기 어려웠다고 한다. 워낙 수질이 나쁜 동네라 곱사등이가 많고 마을사람들 모두 참나무 옹이처럼 손가락 마디가 굵고 비틀어졌다. 둘째 형도 목에 창이 생기고 손목과 무릎관절이 저려서 생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젠 넷째인 내가 농촌에 갈 차례인데 우리 어머니는 제발 셋째형네 집체호에 가라고 비난사정을 했다.   “명년에는 다섯째도 농촌에 가야 할 터인데 너희 형제들이 산지사방에 널려있으니까 아버지가 힘들단다. 그리구 셋째가 가있는 태암촌은 집하고 거리도 가깝지 않느냐? 너희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셋째형네 집체호에 가거라.”   그때 우리 아버지는 연길시운수공사 8급공이라 88원 정도 월급을 받았으니 많이 받는 폭이었지만 여기저기 널려있는 자식들에게 용돈을 쪼개서 보내고 나면 그야말로 입에 풀 칠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농촌에 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삯바느질에, 이삭주이에, 자갈치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나는 우리 팔남매를 키우느라 밤낮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어머니의 당부를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학급 친구들은 모두 연길현 이란공사 명랑촌에 갔지만 나는 닭 무리에 오리 끼이듯이 셋째형네 집체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불짐을 메고 30리 길을 걸어 어슬녘에 태암 4대 집체호에 들어서니 소한추위라 개털모자에는 새하얗게 서리가 끼었지만 잔등은 물씬물씬 김이 서려 올랐다. 남성들은 모두 민공(民工)에 뽑혀 용정 쪽 공사장에 가 있었고 까투리 같은 여성들만 집체호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동태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설대목이라 생산대에서 한 사람 당 명태 두 마리씩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그때 취사담당은 주련순이라는 시원하게 생긴 여성이었는데 서둘러 밥상을 차려서 내놓았다. 누님뻘 되는 여성 네댓이 부뚜막에 앉아서 마치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이 나를 건너다보며 귓속말로 소곤소곤했다.   “아이구, 형보다 더 잘 생겼구나. 이목구비가 수려한 게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이 따로 없구나.”   “이 애가 김치국부터 마시는 것 보지. 동생뻘 되는 애를 두고 서방 비위를 하면 어떡허니?”   나는 귀뿌리가 화끈 달아올랐지만 제법 점잖게 앉아 밥상을 받고 시원한 동태찌개부터 한 숟가락 떠먹었다. 맵싸한 게 별미였다.   헌데 한겨울 30리 길을 걸어 문득 집안에 들어와 밥상을 차지하고 앉으니 얼었던 몸이 봄눈 녹듯 풀리면서 애꿎은 콧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걸 들이키자니 망신을 할 것 같았고 “잠간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바깥에 나가 코를 풀고 다시 들어와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꺽 먹어버려야지 하고 숟가락목이 부러지게 밥을 떠먹었더니 이젠 주체할 수 없이 콧물이 쏟아져 내렸다.   “금방 밥을 먹고 왔더니 배가 불러서…”   하고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부랴부랴 바깥으로 나왔다.   “힝!” 하고 코를 풀고 나니 숨통이 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새뽀얀 기름이 동동 뜨는 동태찌개가 눈앞에 언뜻거렸고 다시 들어가 그놈의 동태찌개에 밥을 말아 후닥닥 먹고 싶었지만 이젠 다 행차 뒤 나팔이었다.   사춘기 소년이라 서푼 어치도 가지 않는 체면 때문에 그 맛있는 동태찌개를 다 먹지 못한 게 지금도 한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춘기 소년소녀들을 지식청년이라고 농촌에 쫓아 보낸 “모우”라는 어르신이 원망스럽다.     구질구질 비는 오고 하도 배가 출출해서     태암촌은 연길에서 연집하를 따라 북쪽으로 20리 정도 올라가다가 남계고개를 넘거나 금성바위를 에돌아가면 나타나는 마을인데 연집하 기슭에 널어놓은 그물같은 동네다. 평봉산이 둘러앉아 새둥지처럼 포근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워낙 물이 적어 논을 풀지 못하고 밭농사만 했다. 사철 샛노란 조밥에 싯누런 된장만 먹어야 하는데 그놈의 조밥이란 재채기만 해도 숟가락에 뜬 밥이 산탄처럼 사처로 날려갔다. 농촌에 살 바에는 도목나무에 쌀밥을 먹는 동네로 가야 할 터인데 허구한 날 강마른 조밥덩이만 먹어야 하니 어머니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황차 고기 등속은 고사하고 콩기름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으니 이건 그야말로 속에 털이 날 지경이였다. 가끔 닭고기나 두부찌개에 술 한 잔 할 수 있는것은 생산대의 우차를 모는 상농꾼들이었다. 집집마다 초가을에 태암촌 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석인골에 가서 땔나무를 해놓으면 겨울에 그걸 우차에 실어왔다. 한 해 땔감을 장만하는 일이라 웬만한 집에서는 닭 한 마리 잡거나 두부를 앗아서 우차몰이들을 대접했다. 그들이 술 한 잔 대접 받고 개선장군처럼 불콰한 얼굴을 해가지고 흥얼거릴 때면 참으로 입안에 군침이 돌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늦가을이면 우리 집체호 청년들에게는 간혹 우차를 몰고 연길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황연(黃煙) 토리들을 우차에 싣고 연길 역 뒤에 있는 황연 수매소(收買所)에 바치는 일인데 그 날만은 맛있는 음식을 배가 터지게 먹을 수가 있었다. 공가의 일로 다녀오는지라 하루 수당 2원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이상 더 쓸 경우에는 빚을 내는 격이 되여 년말에 갚아야 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우리는 허리띠를 풀고 먹어주었다.   이슬이 내리는 새벽에 태암촌을 떠나 아침에 금성촌이나 용연촌에 들려 닭똥과자 한 봉지씩 사서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연길에 도착해서는 곧장 회족식당에 들린다. 지금의 성보호텔 자리인데 이른 아침부터 밀가루튀김(油條)에 콩물을 팔았다. 지금은 두 가락도 먹지 못하지만 그땐 한 놈이 일곱 가락, 지어는 열 가락씩 먹었다. 어느새 부처님처럼 두둑하게 솟아오른 배를 두드리면서 황연 수매소에 가서 줄을 섰다가 황연 토리들을 부려놓고 근을 달아 창고에 가려놓고 나면 뱃가죽은 다시 등에 가서 붙는다.   늦은 점심으로 렬군속식당에 들려 류육편(溜肉片), 지삼선(地三鮮) 같은 안주를 시켜놓고 맥주 대여섯 사발을 마시고 나서 뒷골목에 가서 아무데나 실실 소변을 본다. 다시 식당에 들어와 마파람에 게 눈 감듯이 한 놈이 국수 두 사발씩 먹어버린다. 지금은 국수 오리를 가위로 잘라서 홀짝홀짝 먹는 게 법이지만 그 때는 황소가 깔을 감아먹듯이 두어 젓가락에 후루룩 후루룩 마셔버렸다. 그때 맥주 한 사발에 20전, 국수 한 사발에 38전인걸로 기억하고있다.   다시 빈 우차를 몰고 번잡한 거리를 지나 시골길에 들어서면 아예 우차에 올라가 사지를 던지고 대자(大字)로 눕는다. 소는 영물인지라 저절로 우차를 끌고 태암촌까지 덜커덩덜커덩 찾아간다. 우차에 실려 드렁드렁 코를 골며 돌아갈 때만은 그런 상팔자가 세상에 없는것 같았다.   그때는 터밭에서 나는 감자 한 알, 호박 하나도 장에 내다가 팔수 없었는지라 태암촌 촌민들에게는 단 돈 1원이 그리웠다. 공소사(供銷社)에 가서 소금이나 미역 따위를 사도 외상 거래요, 술 한 근 받아 와도 외상 놀음이었다. 하지만 마을의 소문난 술고래들에게는 외상으로 술을 주지 않았다. 그네들은 한해가 다 저물어도 시치미를 뚝 따고 외상 빚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래서 신용을 잃은 마을의 술고래들은 촌 위생소에서 목정(木精)을 훔쳐다가 물에 타서 마시기도 했고 집체호 청년들의 보잘것 없는 주머니를 털어 술을 마시기도 했다.   어느 날 비가 구질구질 오는데 김은식 대장이 슬그머니 집체호 문을 떼고 들어와 빙글빙글 웃으면서 잠깐 보자고 했다. 문밖에 나가자 김대장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 가듯이 자기 우산 밑에 나를 잡아넣으면서   “자 가자구! 오늘 아침 산토끼 한 마리를 잡았지. 햇감자를 넣고 푹 끓이고 풋고추에 깻잎까지 썰어 듬뿍 넣었더니 천하별미야. 헌데 술이 없거든. 공소사에 가서 술 한 병 사오면 자네도 끼워주지.”   “이 장마철에 무슨 놈의 산토끼를 잡았다고 그래요.”   “아따 진짜라니까. 지금 다 끓여놓고 장임송 대장도 기다리고 있어.”   실은 김은식도, 장임송도 다 현임 대장은 아니었다. 30호 되나마나한 마을에 한두 해씩 돌아가면서 생산대장 노릇을 해오는지라 생산대장을 아니 지낸 장정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장대장이 아니면 김대장, 김대장이 아니면 박대장으로 통했다.      김은식 대장은 워낙 사람이 실속이 없고 얼렁뚱땅 남의 등을 쳐 먹기를 잘하는지라 좀 믿음성이 없었지만 말수 적고 듬직한 장임송 대장까지 산토끼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나는 한 달음에 공소사에 가서 술 두 병을 받아왔다. 장정이 셋이니 술 한 병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것 같아서 큰맘을 먹고 술 두병을 받아왔다.   그때 흑룡강 북안에 가있는 큰형은 월급 45원을 받았는데 달마다 산지사방에 널려있는 동생들에게 5원씩 부쳐 보냈었다. 김은식 대장은 동네 어른들의 생일날까지 꼬박꼬박 기억해주었다가 술 한 잔씩 얻어먹는 위인이라 아마도 내게 돈 봉투가 날아든걸 알고 있은 모양이었다.   산토끼고기는 처음 먹어보는데 역시 별미였다. 고기가 졸깃졸깃 해서 육미가 있었고 푹 익은 햇감자가 더 맛있었다. 술 두 병을 다 마시고 구수한 국물에 밥까지 비벼서 배가 터지게 먹었다. 그야말로 뜻 밖에 생일을 쇤 폭이 되였다.   헌데 이튿날 우사(牛舍)에 나갔더니 명철이 어머니가 동네 아낙들과 둘러서서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다 말고 나를 뱅글뱅글 건너다보더니   “어제 산토끼 추렴을 잘 했겠지.”   “예, 난생 처음 산토끼 고기를 먹어보았는데 별미입디다.”   “아니, 집체호 젊은이들도 오리발을 내밀긴가. 우리 고양이를 내놓아요. 남이 8년이나 기른 가족 같은 고양이를 잡아다 술안주를 하다니 이제 천벌을 받을 거야!”   하고 길길이 뛰었다.   일 년 사철 고기 한 점 먹어보지 못했던 그 시절의 농부들, 기름진 안주에 술 한 잔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남의 툇마루에 누워서 가물가물 자고있는 고양이를 잡아다 술안주를 했으랴. 고양이를 욕보이면 천벌을 받는다는 속설은 있지만, 장임송 대장은 천수를 다 누리고 몇 해 전에 천당에 갔고 김은식 대장과 나는 이 날 이때까지 천벌을 받지 않고 소처럼 든든하게 잘 지내고 있다. 백성은 밥을 하늘(民以食爲天)로 생각하는 법, 굶주린 백성이 고양이 한 마리 잡아먹었다고 하늘이 어찌 벌을 내릴 수 있으랴.              아침마다 종을 치는 대장 노릇도 해보고      1972년 봄 나는 본의 아니게 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사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을 했으니 오늘의 정치용어로 말하면 민선 대통령은 아니고 민선 대장(民選隊長)이 된 셈이다. 하지만 나는 이십사절기도(二十四節氣)도 모르는 놈이요, 밭갈이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풋내기 농사꾼이었다. 사원대회 때마다 신문을 읽고 모주석의 저작을 학습시킨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30여 호 촌민들의 생계를 맡을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신범룡 정치대장은 사원들의 간절한 요구이고 노농들이 옆에서 도와 줄터이니 한번 대담하게 해보라고 했다.   아무리 대담하게 한다 한들 농사일에 숙맥을 가리지 못하는 내가 방정하게 대장노릇을 할리 만무했다. 아침에 신범룡 정치대장과 잠간 상론을 하고 나서 우물가에 서있는 비술나무 가지에 걸어놓은 종을 두드리는 게 내 업이었다. 어디서 굴러다니던 일제 포탄 깍지를 거꾸로 달아맸는데 소리는 꽤나 맑지고 좋았다. 하지만 사원들은 한식경이나 지나서야 기지개를 켜고 껄껄 트림을 하면서 가물에 콩 나듯이 나올 뿐이었다. 신범룡 정치대장과 상론한 대로 일을 포치하고 한 떼의 인마를 이끌고 기음을 매러 콩밭에 들어서면 시시껄렁한 육담만 늘어놓는 놈, “아이고 배야!” 하고 구실을 대고 꽁무니를 빼는 놈, 먹다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밤낮 먹을 소리만 하는 놈, 도무지 일축이 나지 않았다. 밤낮 벌떼처럼 쫓아다니면서 기음을 맸지만 밭마다 풀이 성해 호랑이가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남의 일은 오뉴월에도 손발이 시리다고 호미 날을 땅에 깊숙이 박지 않고 슬쩍슬쩍 땅거죽만 긁었던것이다.     등소평의 시대를 겪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일이지만, 자고로 농자유기전(農者有其田)이라고 농사꾼은 자기 땅을 갖는 게 소원이요, 자기 땅에서 일할 때라야 힘이 나는 법이다. 해방 후 토지개혁을 해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준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나 4, 5년 만에 호조조요, 합작사요, 인민공사요 해서 땅을 집단소유, 국가소유로 만들었으니 땅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는 농민들의 원초적인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나라의 기본 제도가 잘못 된 줄은 알 리 없었다. 내 인덕과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고 그야말로 솔선수범으로 뼈가 빠지게 일했고, 그래도 안 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사원들을 무섭게 닦아 세우기도 했다.   30호의 생계를 이어가자면 무슨 방책이라도 내야 했다. 마침 자형이 연길시운수공사에서 트럭 기사로 일했는데 석인골에서 채벌한 잡목(雜木)을 실어가고 있었다. 현지에서 채벌한 잡목을 5, 6 미터씩 잘라서 무지무지 쌓아두었는데 그걸 트럭에 실어 연길역 구내에 가져다 부리는 작업이다. 아마도 그 잡목은 산해관 이남 평원지대의 탄광에 실려가 침목으로 쓰이는것 같았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우리 촌민들은 내 자형을 앞세우고 술병을 들고 가서 요행 일감을 맡아오게 되였던것이다.    일은 보통 밤중에 하게 되었다. 10여 대의 트럭에 잡목을 실은 후 팔목만큼 실한 밧줄로 든든하게 동이고 연길 쪽으로 달려가는데 우리 일꾼들은 산더미같은 잡목우에 앉아 밧줄을 잡고 위태롭게 가야 했다. 트럭이 웅덩이를 만나 덜컹 할 때 밧줄을 놓고 있다가는 허망 길바닥에 굴러 떨어져서 어깨가 박산이 나거나 엉덩이가 부수어질수 있었다.   두툼하게 솜옷을 입었지만 한겨울이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막을 길이 없었다. 우리는 아예 석인 공소사에서 빈 박스 하나씩 구해가지고 그 안에 머리를 틀어박고 칼바람을 막았다. 하지만 아랫도리는 와들와들 떨리다 못해 거의 동태가 되었다. 연길역에 가서 잡목을 부리고 하남가에 자리를 잡을 전셋집을 찾아 들어가면 뜨끈한 우거지 장국에 밥 한 그릇이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언 몸을 녹이려고 술부터 찾았다. 그때 배운 술을 나는 아직도 달게 마시고있다.   이렇게 뼈가 부수어지게 일했지만 내가 대장 노릇을 한 그 해 태암 4대는 한 공(工)에 마이너스 16전이었다. 쉽게 말하면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일한 자가 오히려 빚을 지는 폭이 되였다. 나는 대장 공수까지 받아 4대에서 최고 공수를 기록했지만 오히려 210원을 빚지고 말았다. 그 해 말,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군에 입대하는데 신범룡 정치대장은 촌민들을 데리고 연집향 공사마을까지 와서 돈 30원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사원대회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김대장이 진 빚은 생산대에서 안기로 했소. 이건 사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부조금인데 군에 가서 보태 쓰오.”   하고 허허 웃는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북받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 순진한 백성들을, 이 정직한 민초들을 배불리 먹이고 등 따뜻하게 입히지 못한 게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세월이 하 수상해 꾀를 부리고 능청을 떨지만 마음바탕은 더없이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닌가!                      민병련장의 신세는 언제 갚아야 하나      태암촌에서의 3년 생활, 한 어르신의 이야기를 마저 하지 않고는 이 글을 끝맺을수 없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름은 윤두천, 그때 태암대대 민병련장을 맡아했었다. 윤두천 민병련장이 아니었더라면 셋째형과 나는 군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 형제에게는 오늘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 시절 농촌의 탈출구는 추천을 받고 공농병학원으로 대학에 가는 길과 군에 가는 길밖에 없었다. 가끔 도시의 로동자로 추천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전반 나라경제가 파탄의 변두리를 헤매고 있을 때라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태암촌에는 상해에서 온 지식청년들도 수십 명 있었는데 맘씨 고운 촌민들과 촌간부들은 그들만을 추려서 공농병학원으로 대학에 보냈다. 그래서 우리 본토박이 지식청년으로 놓고 말하면 농촌을 벗어나 출세하는 길은 군에 가는 길밖에 없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차례지는 법, 1971년 연변군분구에서 특수병종(特特兵種)을 모집하게 되였다. 특수병종이라 해야 축구, 농구, 배구 같은 운동을 잘 하는 청년들을 물색해 뽑아 가는데 그중에 번역인재도 포함되여 있었다. 셋째형은 워낙 총기가 좋고 부지런해서 소학교, 중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농촌에 간 후에도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독학을 해서 태암촌의 박사로 불렸다. 촌민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은 더 말할 나위 없고 태암촌에서 한어로 써야 하는 보고문이나 공문은 거의 도맡아 했다. 셋째형 앞에서는 상해에서 온 청년들도 무색해졌다. 번역인재를 물색한다니 윤두천 민병련장은 덮어놓고 셋째형을 추천했다.   그 무렵 진보도반격전이 일어나면서 중소 관계가 긴장했고 급작스럽게 특수병종을 뽑았으므로 셋째형은 하루아침에 누운 소 타기로 군에 들어갈수 있었다.   세째형은 연길무장부에서 군복을 타가지고 집에 와서 바꾸어 입고 갔는데 부모님과 형제들이 배웅을 하고 돌아와 본즉 구들에 개미 같은 벌레가 종횡무진으로 기여다니고 있었다.   “오동지섣달에 이게 웬 개미냐?”   하고 어머니가 한 놈 잡아보니 그건 개미가 아니라 보리알만한 이였다. 구들이 따뜻하니까 셋째형이 벗어놓은 옷이며 내복이며 팬티에서 이들이 얼씨구 좋다 하고 벌벌 기어 나왔던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바삐 빗자루를 들고 이를 쓸어 모으는데 어머니는 셋째형의 옷을 그러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공사장에서 목욕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단벌옷을 입고 일하고 뒹굴었으니 어찌 이가 득실거리지 않으랴. 어쨌거나 나는 형이 두고 간 옷이며 신발을 물려받을수 있어 군에 가기까지는 여벌이 생겨서 좋았다.     각설하고 1972년 말 내가 군에 들어갈 때는 사정이 달랐다. 2년 남짓이 농촌에 있었으니 군에 갈 자격은 되였지만 아버지의 역사문제가 가슴에 걸렸다. 황차 특수병종이 아니라 보통병종(普通兵種)이라 심사는 늦장을 부리며 까다로운 절차를 다 받았다. “유일성분론”이 살판을 칠 때라 뭐니뭐니해도 출신성분이 좋아야 했고 사돈의 팔촌까지 청백해야 하였다.   그런데 평양 출신인 우리 아버지는 18살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에 들어와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무진 고생을 했는데, 자동차 운전기술을 배우기 위해 얼마간 위만주국 자동차부대에 들어가 있은 적 있었다. 그런데 해방 후 이게 큰 문젯거리로 되었다. 아버지는 해방되자마자 자초지종을 조직에 교대했고 일반역사문제로 락착이 되였지만 여러 가지로 괴로움을 당했고 우리 자식들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들기도 어려웠다.    나는 입오신청서(入伍申請書)를 받아놓고 아버지의 역사문제를 적을가 말가 반나절이나 망설였다. 일단 적어놓기만 하면 군에 갈 수 없을것은 불 보듯 뻔했다. 셋째형이 탈 없이 군에 들어간걸 보면 아무래도 윤두천 민병련장을 찾아가면 뾰족한 수가 생길것 같았다.   이튿날 새벽에 나는 마을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윤두천 민병련장네 댁을 찾았다. 찾아온 사연을 말씀드리고 속이 한줌만 해서 하회를 기다린즉 윤두천 민병련장은 굵직하게 담배를 말아 입에 물고 나서 득 성냥가치를 그어 불을 붙이더니   “군에 가는 게 어디 부귀영화를 누리려 가는거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가는거지. 말하자면 젊은 피를 뿌리려 가는건데 괜히 묵어 빠진 부모님 일까지 쓸건 뭐요? 잘 왔소. 어서 아침이나 먹기우.”   하고 껄껄 웃었다. 내가 마지못해 밥상에 앉은즉 윤두천 민병련장은 서둘러 안해더러 계란을 지지게 하고 바깥에 나가더니 움에 들어가 김이 문문 서리는 김치를 꺼내왔다. 그때 윤두천 민병련장의 두 아들애는 밥상에 매달려 “삼촌, 삼촌” 하고 재롱을 부렸는데 그야말로 툭 털면 먼지밖에 없었던 나는 단 돈 1원 쥐어주지 못했다.   군에서 돌아온 후 태암촌에 인사 차 찾아갔지만 윤두천 민병련장은 보이지 않았다. 연집공사에 가서 삼림관리소를 맡아본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아무 때든지 만나면 큰절을 올리고 잘 대접을 해야지 하고 나는 별렀다. 그 후 태암촌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로 자주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윤두천 민병련장은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튼 윤두천 민병련장의 깊은 궁량과 용단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두 형제는 초년에 된서리를 맞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이 지면으로나마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언간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태암촌의 종소리는 오늘도 내 귓전에 뎅겅뎅겅 들리는것 같고 이미 작고하신 장임송 대장, 술고래 김은식 대장, 그리고 우리 형제의 오늘이 있게 한 윤두천 민병련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집체호의 큰형들인 원수, 철산 형과 친구 동화와도 오래 동안 만나보지 못했다. 동태국을 끓여주었던 주련순 누님도 보고 싶다. 우리 모두 허황한 시대를 얼마나 용케 헤쳐 나왔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모우”라는 어르신은 자기의 정치적 적수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수천수만 젊은 세대들의 끓는 피와 열정을 빌어 10년 동안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을 강행했고 그 목적을 달성하자 그야말로 토사구팽 격으로 홍위병들에게 “지식청년”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주고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해 그들을 농촌에 보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10년 “문화대혁명”으로 황폐화된 국민경제의 붕괴, 이로 말미암은 수천수만 무직자들의 원성을 갈앉히기 위해 그들을 농촌으로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모우”라는 어르신의 잘못으로 수천수만의 젊은이들, 특히 나와 같이 뼈도 굳지 않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농촌에서 갖은 고생을 겪었지만,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고 그것은 분명 우리 인생의 귀중한 경험이 되었고 자본이 되었다. 그 삼간초옥에서 가졌던 아름다운 꿈과 그 험난했던 시절에 키운 쇠쪽같은 의지가 있었기에 우리 모두의 오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인생은 순풍에 돛단 격이 될수 없는 법, 오직 험난한 파도를 헤가르고 나가야만 행복의 피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20일, 연변대학교에서
19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댓글:  조회:2202  추천:29  2011-04-11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대학교입시제도회복 30주년을 기념하여                                                      김호웅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대학생활에 있어서는 새로운 친구와 스승들과 만나게 되고 새로운 책과 학문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자신을 부단히 충전하고 새로운 봉우리를 향해 도전을 하는 자만이 삶의 보람을 맛볼 수 있다.       대학교와의 만남       사실 나는 대학과는 인연이 없는 줄로 알았다. 중학교 1학년 때에《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 3년간 홍위병들의 싸움구경이나 하며 실컷 놀다가 소위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가 3년 간 농사를 지었다. 군에 입대했다가 출판사에 용케 취직을 해서 견습편집으로 고참 편집들의 다룬 원고를 베껴 쓰기를 3년, 바로 이 무렵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출판사에는 우리 또래들이 일여덟 명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대학졸업생이 귀한 시절이라 거개가 농촌에서 5-6년씩 일하다가 추천을 받아 왔거나 군복무를 마치고 운수가 좋게 입사한 젊은이들이었다. 설령 4년 후 대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출판사 같은 좋은 직장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그들은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엎어놓은 못 그릇 같은 고참편집들의 원고를 베껴 쓰는 일에 그만 신물이 났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가 없는 세월이라 원고지에 철필로 잉크를 찍어 부지런히 베껴 써야만 했다. 소학교 생도도 아니건만 하루 여덟 시간 또박또박 원고만 베껴야 했으니 재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고참편집들이 수정한 원고를 베끼는 작업을 하노라니 차차 문자에 눈을 뜨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름 석 자를 박은 책임편집으로 되는 길은 묘연하기만 했다.     대학교는 나에게 분명 새로운 세계를 약속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학교도 완전히 졸업하지 못한 주제에 그냥 허울 좋은 출판사 편집으로 눌러앉아있다는 자체가 낯 뜨거운 일이였다. 나는 아예 잠자리를 출판사에 옮겼다. 퇴근 후면 출판사는 나 혼자만의 천하가 되었다. 걸상들을 맞추어놓으면 훌륭한 잠자리가 되었다. 특히 출판사 자료실에는 안성맞춤으로 중학교와 고급중학교 교과서들이 서가에 꽂혀져 있었고 소가죽만한 대형 중국지도와 세계지도도 있었다.     약 반년 간 죽기내기로 공부했다. 하지만 첫해는 낙방거자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다시 몇 달 간 불철주야 공부를 했다. 수학은 내 기초가 너무 낮아 유리수의 가감법 하나를 풀고 고작 5점을 맞았는데, 그 대신《조선어문》,《한어》,《역사》 성적이 좋았고《지리》는 87점으로 연변에서 최고의 성적을 따낼 수 있었다. 밤마다 마치 전성사령관이나 된 것처럼 자료실의 괘도(掛圖)를 빌려다 편집실에 걸어놓고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었다.     나는 총점 319점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했다. 한편 우리 집에는 셋째 관웅이, 다섯째 철웅이, 여섯째 영웅이까지 네 형제가 한꺼번에 대학에 입학해 대경사가 생겼다. 대학입학통지서 4통이 하루아침에 날아들 때 부모님은 “다 등소평 어른의 덕택이야!” 하며 무등 기뻐했다.        친구들과의 만남       대학에 입학한 게 25살 때다. 지금 25살이면 대학 본과가 아니라 대학원과정을 졸업할 나이다. 하지만 내 나이는 학급에서 열 서너 번째밖에 아니 되었다. 《문화대혁명》으로 10년을 묵은 친구들이, 나이도 신분도 다른 친구들이 한 학급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60명 정원에 여학생은 10명밖에 되지 않는지라 아쉽게도 남녀비례는 실조(失調)인데, 아직 면도칼 신세를 져보지 못한 코밑이 감실감실한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침마다 온 얼굴에 시허연 비누거품을 일구고 벅벅 면도질을 하는 아기아빠들도 있었다. 술 냄새만 나도 가재걸음을 치는 풋병아리 같은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술고래들도 있었다.    학급의 좌상은 마흔 고개를 바라보는 태휘(太輝) 형인데, 시골집에 아내와 철없는 아들 둘을 두고 온지라 워낙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아 우리 같은 총각학생들과 어울려 밤낮 술타령을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왕 맛들인 술을 끊을 수가 없어 술병을 이불 밑에 감추어두고 숙소가 비면 한 모금씩 도둑 술을 마셨다. 이렇게 단작스럽게 놀아서 나이는 제일 많이 먹었지만 좌상 구실은 못했다.    하지만 태휘 형은 공부만은 열심히 했다. 시골집에 두고 온 아들놈들이 쓰다 던진 공책을 가져다가 다시 뒷면에 글을 쓰는데, 워낙 농촌소학교 교사 출신이라 참으로 명필이었다. 잘 여문 콩알 같이 일매진 글체인데, 태휘 형은 교수님의 강의를 거의 기침 소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기록했다. 평소 너무 열심히 강의를 듣고 기록을 하는 태휘 형을 융통성이 없는 양반이라고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일단 기말이 되면 그의 공책은 학급의 보물로 되어 너도나도 다투어 돌려보았다.     1학년 때《습작학》을 배우는데 담임은 최상철 교수였다. 그는 강의도 잘했지만 그 무렵 연변을 찾은 스톡홀름대학 조승복 교수에 대한 방문기를 발표한바 있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강의가 절반 쯤 나갔을 때 최교수가 인물과 사건을 다룬 산문을 써보라고 하기에 나는 이 궁리 저 궁리하던 끝에《산속에 핀 진달래》란 제목의 글을 써서 바쳤다. 태휘 형을 모델로 하였는데, 산속에 핀 진달래라는 메타포를 구사해 눈먼 시아버님을 공양하고 어린 자식을 키우면서 일편단심 대학생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시골 여성을 노래한 작품이었다. 헌데 이 작품이 최상철 교수의 추천으로《연변문학》 1979년 제4기에 실리게 될 줄이야! 나는 마치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었다.     내 소설의 첫 주인공 테휘 형은 공들여 닦은 지식과 재간을 다 펴지 못하고 일찍이 타계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어학에 반해 복수토 “들”만 연구해 “들박사”로 불렸던 전병선씨, 가끔 술주정을 부려 손아래 학우들의 빈축을 샀던 학급장 엄영준씨, 물 첨벙 불 첨벙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민담을 쓰고 인물전을 쓰던 박문봉. 유연산, 이민덕, 이광인씨 모두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대학원 입시제도와의 만남       그 무렵 조문학부에는 기라성 같은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세계문학강좌에 정판룡, 허호일, 서일권, 임휘 교수가 있었고 조선문학강좌에 허문섭, 이해산 교수가 있었으며 중국문학강좌에 권철, 김영덕, 김병수, 허룡구, 김제봉, 김종수, 최건 교수가 있었고 습작학강좌에 박상봉, 전국권, 최상철, 김만석 교수가 있었다. 또한 문예이론강좌에 설인, 현룡순, 임윤덕, 김해룡 교수가 있었고 언어학강좌에 최윤갑, 김상원, 김기종, 김해수, 이득춘, 유은종 교수가 있었다.    학부생시절 아쉽게도 정판룡 교수의 강의는 듣지 못했다. 허호일, 서일권, 임휘 교수가 호머로부터 세익스피어, 발자크를 거쳐 고리키까지 세계문학사 강의를 했다. 허호일 교수의 강의는 논리성과 분석력이 뛰어났고 서일권 교수의 강의는 격정이 넘치고 제스처가 멋있었으며 임휘 교수의 강의는 마치 유명한 연극배우의 명대사를 연상케 했다. 언변보다는 글재간이 뛰어난 현룡순 교수의 강의는 좀 답답한 대로 실속이 있었고 글재간보다는 언변이 좋은 임윤덕 교수의 강의는 부드럽고 조리가 있었다. 말씀은 어눌하지만 판서(板書)는 일품인 최윤갑 교수의 강의, 무미건조한 언어학을 거의 예술에 가까운 표현력으로 이야기하는 김기종 교수의 강의 또한 얼마나 좋았던가.     학부생시절 술을 즐기고 친구가 많은데다가 2학년 제2학기 결혼까지 했지만 내 성적은 줄곧 학급의 상류에 속했다. 여기에 무슨 비방이라도 있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강의를 듣고 독서를 하되 그 내용에 대해 갈래를 나누고 체계를 세워 지식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채워둔다.     둘째, 문학은 최종적으로 많이 읽은 자가 이기는 법이니 될수록 문학사에 나오는 명작을 독파한다. 시간이 딸리면 영화로라도 대리 보충한다.     셋째, 문학과 더불어 역사, 철학 서적도 읽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추고자 노력한다.     넷째, 보고 듣고 느낀 바가 있으면 글을 쓴다. 특히 학부생 시절 8번 주어지는 방학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습작을 한다.     학부생시절 성적은 좋았지만 대학원과정에 진학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출판사에 복직할 수도 있었거니와 《연변문학》과 같은 잡지사에서도 채용하겠다고 했다. 황차 그 무렵 조선문학 관련 대학원생을 받을 수 있는 분은 허문섭 교수뿐인데 전교에서 2명만을 받는다고 했다. 지원자는 20여 명이니 10대 1의 비례도 되지 않았다. 적어도 출판사에 복직할 수 있는 내가 대학원생 입학시험을 보면 다른 동창생들에게 손해를 줄 것 같아 나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 허허롭게 지냈다.       그런데 대학원 입학원서 제출기한을 이틀 앞둔 어느 날, 허문섭 교수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왜 호웅이는 연구생 시험을 보지 않는 거야?”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 아닙니까?”     “아무튼 호웅이는 연구생시험을 보라구.”     거의 명령조로 말씀하는지라 나는 한 마디 버릇없이 쇄기를 박았다.     “시험은 잘 볼 자신이 있습니다만 꼭 받아주셔야 합니다.”     허무섭 교수가 귀띔을 해주는 바람에 나는 부랴부랴 연구생시험을 보았고 한어학부의 관웅형과 나란히 2등 안에 들게 되었다. 형제 둘이 1등과 2등을 하게 되자 허문섭 교수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교수들도 “연구생 둘을 받는데 관웅, 호웅 형제가 다 차지하면 어떡합니까?” 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시비를 갈라준 분이 정판룡 교수다.      스승과의 만남      정판룡 교수를 처음 뵌 것은 1964년 겨울 우리 집에서였다.    큰형 봉웅 역시 조문학부를 다녔는데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닐 생각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에 갔었다.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는지라 우리 어머니가 큰아들을 잃어버렸다고 대성통곡을 했고 평소 우리 집에 잘 놀러왔던 김창락, 한석윤, 유은종 등 학급친구들이 정판룡 교수를 모시고 득달 같이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때 정판룡 교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였는데, 그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 허허 웃으며    “이 집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젊은이가 아닙니까? 문학을 사랑하고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사람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사나흘 지나면 반드시 자기를 참회하고 어머니 곁에 돌아올 겁니다. 제가 봉웅이 어머니 앞에서 장담을 할게요.”    하더니 김창락 등 학급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봉웅이는 이삼일 후 분명 돌아오는 거야. 내가 알았으면 됐어. 호들갑을 떨며 학교에 보고할 건 없어. 봉웅이가 돌아온 후에도 내색을 내지 말고 이전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야 해. 알겠어?” 하고 다짐을 따고 나서     “봉웅이 어머니, 애들이 정심도 먹지 않고 헐레벌떡 쫓아왔으니 정심이나 차려주십시오. 저도 이 친구들에게 잡혀오다 보니 정심을 걸렀거든요.”    하고 비위 좋게 껄껄껄 웃었다.    정판룡 교수의 말대로 큰형은 이틀 만에 돌아왔고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 때 우리 동생들은 토끼처럼 귀를 강구고 문틈으로 정주방의 동정을 살폈는데, 그 때 뵌 정판룡 교수의 준수한 얼굴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다. 큰형의 일이 있은 후 우리 형제의 눈에 정판룡 교수는 일개 교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비쳤고 우리 형제들은 정판룡 교수의 말씀을 성자(聖者)의 예언처럼 믿게 되었다…     각설하고 관웅 형과 나의 대학원 진학문제를 두고 교수들 사이에 의논이 분분한데, 나중에 형제 둘을 다 입학시키기는 어려우니 동생인 호웅이가 양보는 게 좋겠다는 의견으로 가닥이 잡혔다. 최후로 정판룡 교수의 의견을 물었는데, 유머에 능하고 메타포를 잘 구사하는 정판룡 교수는 서둘러 의견을 내놓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란다.    “<영원히 대오를 따라서>라는 소련소설을 본 생각이 납니다그려. 독소전쟁 때 사령관을 지냈던 한 장군이 전쟁을 끝내고 마흔에 첫 보선으로 대학 문에 들어섰지요. 헌데 새처럼 날렵하게 교단에 올라서는 젊은 교수를 보니까 전쟁할 때 통신병으로 지냈던 친구란 말입니다.     한편 젊은 교수도 교수안을 펼쳐놓고 휙 좌중을 들러보다가 하마터면 기절초풍을 할 뻔 했지요. 조석으로 모시던 사령관께서 학생복 차림으로 교실 뒤쪽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통신병 출신의 젊은 교수는 무슨 정신으로 강의를 마쳤는지 모릅니다. 강의를 마치자 다른 학생들은 우르르 문밖으로 나가는데, 젊은 교수는 허둥지둥 뒤쪽으로 달려와 장군에게 꾸벅 인사를 드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지요. 그러자 장군이 일어서면서 하는 말씀이 뭐겠어요.    ‘전쟁터에서는 내가 사령관이고 자네가 통신병이었지만 평화시대에는 자네가 교수고 나는 학생인 거야. 영원히 대오를 따라가자면 각자의 위치가 바뀔 수 있는 거야. 다음 시간부터는 분명 교수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강의하라구!’    학문에는 선후의 차별이 없고 성적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법이요. 공부하는 데 형제간이면 어떻고 부자간이면 어떻단 말이요? 다 자기 몫이란 말이요. 성적 순위대로 합시다.”    쾌도난마(快刀亂麻)란 말을 바로 이런 때 쓰는 게 아닐까? 정판룡 교수의 메타포 한 마디에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교수들 모두가 수긍했고 관웅 형과 나는 나란히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생이 될 수 있었다.    1982년 초봄의 일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어느덧 대학 문에 들어선 지도 30년이 된다. 우리에게 인생과 학문의 길을 가르쳤던 허문섭, 정판룡, 권철 등 교수님들도 하늘나라에 갔다. 그 대신 우리들이 가 그분들이 물려준 교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여러 스승들을 본보기로 늘 옷깃을 여미고 연구와 강의에 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만남들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리라 생각한다.                                                    2007년 10월 20일  
18    \"그 길로 갈수 없다\"를 읽고 댓글:  조회:1518  추천:39  2011-04-04
 <<해란강>> 제5부 <<그 길로 갈수 없다>>를 읽고                                 / 우상렬, 김호웅, 김관웅    <<그 길로 갈수 없다>>(<그 길>로 약함)는 우리에게 신선한 감을 줍니다. 우리 조선족 농촌에서 합작화로 나간 역사적 과정을 우리 조선족문학사에서는 처음으로 대하소설이라는 큰 스케일로 다루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익장의 기개로 민족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이 재제에 임한 점, 충분히 긍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점은 별로 신선한 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黨적 인물, 高, 大, 全식의 김철산과 그를 비롯한 선진인물 대 적대인물, 그리고 이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중간인물로 짜여진 인물구도 및 관계설정은 1950년대 중국문단에서 柳靑의 <<創業史>>를 비롯한 농업합작화를 다룬 소설의 고루한 기본 패턴을 번복하고 있습니다. 李準의 단편 <<不能走那條路>>과는 제목도 꼭 같습니다.    <<그 길>>은 초창기 조선족 농민들의 합작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합작화=사회주의, 개인영농=자본주의, 물론 당시 시대에서는 官과 民이 모두 그렇게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이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합작화는 역사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개인영농의 “그 길로 갈수 없”고 합작화의 길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시점에서 합작사운동을 다시 돌이켜 보면,  이 운동은 수천 년 간 사유제도 형태에서 농사를 지어온 농민들의 관습과 토지개혁을 통해 새롭게 토지를 획득했고 그것에 커다란 집착과 가능성을 가졌던 농민대중의 보편적 욕구를 무시함으로써 급진성, 맹목성을 띠게 되었으며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야기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한 커다란 콤플렉스를 가졌던 소련, 중국, 북한 지도자의 조급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등소평시대에 인민공사제도를 해체하고 다시 개인영농으로 돌아간 것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합작사운동은 그 아름다운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고급합작사-인민공사로 “발전”하면서 지도층의 주관맹동성에 의해 비극을 잉태합니다. 1958년 “대약진” 및 잇따라 발생한 “3년자연재해”는 이 점을 여실히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 당에서도 實事求是의 정신으로 그 점을 착오적이고 부정적인 역사의 한 폐지로 모 박고 있습니다. 그럴진대 <<그 길>>은 “정극(正劇)”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농업합작화의 전반 면모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희극이나 비극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박선석의 “농업합작화” 관련 작품이 긍정을 받는 것은 바로 그 희비극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문단의 浩然의 <<艶陽天>>이나 <<金光大道>>가 비판을 받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예술의 진실로 보여주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리고 부대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길>>에서는 호조조에도 가장 열성, 합작사에도 가장 열성, 더 나아가 농업대학(그 후의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건설에도 선참으로 나선 우리 조선족의 특성 및 그렇게 될 수 있은 민족적 전통 및 기질 같은 것을 잘 보여주어야 중국 문단의 동류 제재소설과 적어도 변별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생활모습이나 풍속 및 디테일에 있어서도 아직 민족적 색채가 짙지 못한 감을 줍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족 합작화”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면서 이야기를 전개하였으면 합니다.    고급합작화 단계에 와서 이 운동의 한계가 드러나고 주인공 김철산이 고뇌와 갈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데 이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이상 저희들의 소감을 말씀드렸습니다.                                                                               2009. 3. 25
17    [추천칼럼9] 행복이란 발견이며 느낌이다 (양박) 댓글:  조회:2288  추천:45  2011-03-06
[김호웅 추천 연변대학 연구생(한족) 칼럼9] 행복이란 발견이며 느낌이다 양박(연변대학 조선어학과 석사과정 2010년급)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날마다 찾아올 수 있고 또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의  눈빛, 하나의 밝은 표정, 따뜻한 커피 한 잔, 좋은 책 한 권 또는 그 어떤 미묘한 감정, 그 어떤 추억 한 자락 모두가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속의 행복을 위해 완강히 분투하여 왔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이 바로 행복이고 벼슬이 높을 수록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가족애, 우정과 애정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가족과 같이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요즘 지구에서 자꾸 여러 가지 재난이 생겨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비참한 광경을 볼 때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나 많은 평화롭고 행복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죽음을 당했습니까. 국가의 귀중한 재산이 불타버린 것도 아깝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죽음을 당한 것이 더 아쉽습니다. 세상의 가장 큰 행복이란 사랑하는 가족들과 단란히 모여앉아 재미있게 지내는 것이란 것을,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돌려준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사천 대지진 때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가족과 같이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부터라도 가족을 더욱 아끼고 가족과 함께 하는 행복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자 합니다. 행복은 느낌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수준은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지만 적잖은 사람들은 오히려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실은 그들이 행복을 발견할 줄 모르고 행복을 느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생활속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해 사랑을 가진다면 주변 사람들도 성실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오늘의 여러 가지 스트레스와 고생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6    [추도사] 현룡순 선생을 추모하여 (김영수) 댓글:  조회:1640  추천:28  2011-02-13
 [추  도  사]  저명한 교육자이며 작가인 현룡순 선생을 추모하여                                김영수(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학원 원장)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연변대학교의 훌륭한 중층간부이며 교수이며 우리 연변문단의 다재다능했던 원로작가였던 현룡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선생은 만년에 폐암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2009년 3월 21일 16시 30분, 82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영영 떠났습니다. 선생의 서거는 우리 연변대학교와 연변문단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은 1927년 10월 5일 길림성 훈춘현 순의촌 남진영툰의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훈춘현 순의촌 남신소학교를 다녔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연길현 조양천 농업학교를 다녔습니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는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인민해방군에 참군하여 제3차 국내혁명전쟁의 포화 속을 누비면서 용감히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1947년 6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선생은 1951년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여 1953년 졸업하였습니다. 선생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1987년 정년을 하기까지 장장 34년간 열과 성을 다해 연변대학교에서 일했는데, 선후로 수리학부 비서, 당지부 부서기, 어문학부 당총지 부서기, 조문학부 주임 등 직을 맡았습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연변대학교 인사처에서 과장, 부처장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1972년 8월 선생은 어문학부 당총지서기로 일했는데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홍위병”들에게 첫 패로 끌려나와 투쟁을 맞고 오래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선생은 다시 교편을 잡고 1979년부터 1984년까지《문학개론》,《맑스레닌주의문학리론선독》등 학과목을 맡아 강의하면서《문예의 전형을 론함》, 《형상을 론함》, 《단편소설의 인물형상》, 《전형화를 론함》, 《김창걸의 단편소설을 론함》등 우수한 론문과  문학평론 및 《조선족사화(朝鮮族史話)》수십 편을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연변대학교에서 처음 조문으로 편찬한《문학개론》의 제3, 4, 5장의 집필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 선생은 또 중국의 고전명작《홍루몽》제16회부터 20회까지, 제61회부터 80회까지 무려 46만자에 달하는 번역임무를 완수하였고 무려 52만자에 달하는《수호전》의 번역, 수정임무도 훌륭히 완성하였습니다. 선생은 1983년 부교수로 승진하였고 1987년 8월 정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학자의 인생에는 정년이 없는 법입니다. 선생은 정년을 한 후《소설창작론》, 소설집《우물집》등 여러 편의 저서를 출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장장 42만자에 달하는《연변대학교 조문학부 사――겨레의 넋을 지켜》는 선생의 역작이요, 우리 조문학부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입니다. 이 조문학부사는 초창기, 성장기, 발전시기, 동란시기, 새시기 등 5개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사(史)적인 맥락에 대표적인 동문(同門)들의 재미있는 인물 전기나 에피소드를 재치있게 엮는 방법으로 조문학부 50년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귀중한 문헌적 가치, 구순한 이야기와 유려한 문체로 하여 조문학부 후학들과 학생들의 필독서로 영원히 읽혀질 것입니다.  현룡순 선생, 오늘 우리는 선생의 유상을 우러르며 한 아름다운 교육자의 고매한 넋을 되새겨봅니다. 선생은 오척단신(五尺短身)으로 체구는 작았지만 흉금은 바다처럼 넓었습니다. 사업을 위해서는 그 어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과도 따뜻하게 손을 잡고 일할줄 알았고, 말수가 적고 말씀은 어눌한 편이였지만 연변대학교를 대표하는 문장가였습니다. 선생은 큰 벼슬은 살지 않았지만 그 어느 부서에서든지 겸허한 자세로 군말 없이 인민의 충복으로 성심성의로 일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학자의 신조를 지키면서 열심히 학문을 연찬했기에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연변대학교의 유능한 행정가요, 저명한 교수로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불같이 사랑했고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위해 모든 정열과 재능을 다 바쳤습니다. 우리는 이 시각에도 허름한 자전거를 타고 덜커덩거리면서 동료,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조사를 하고 면담을 하고 불철주야 붓을 달리던 선생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이제 선생은 갔으나 선생이 남긴 고매한 인격과 빛나는 업적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것이며 우리 조문학부 내지 조선한국학학원 발전의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생이 가꾸어놓은 터전에서 선생의 뜻을 받들고 조문학부 내지 조선한국학학원을 명실공이 국가중점학과로 만들기 위해, 우리민족의 말과 글을 비롯한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반석 우에 놓기 위해 대를 이어 노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현룡순 선생의 유가족에게 깊은 조의(弔意)를 표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현룡순 선생, 고이 잠드소서! 
15    우리민족의 자랑, 잊지 못할 영상-한창우 회장 댓글:  조회:2509  추천:45  2011-02-11
             우리민족의 자랑, 잊지 못할 영상       ― 연변대학교를 찾으신 한창우 회장님의 모습에 부쳐    두만강을 사이 두고 중국 ․ 조선 ․ 러시아가 서로 바라보는 동북아의 황금삼각주,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연길시 서쪽에 있는 와룡산(臥龍山) 언덕에 연변대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일찍 연변대학교를 찾은 한국의 저명한 풍수지리전문가인 육관도사 손석우옹은 와룡산언덕을 바라보더니 앞으로 “불이 솟을 곳”이라고 했다. 불이란 민족교육의 불씨를 뜻하는 것이겠으니 이 와룡산언덕에서 우리민족 교육의 불씨가 일어나 황황 불길처럼 타오르리라 예견한 것이다.  와룡산 명당자리에 앉은 346헥타르의 연변대학교 캠퍼스, 1949년 4월 개교된 연변대학교는 올해까지 도합 7만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들은 연변을 비롯한 중국 경내 여러 지역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지역발전과 국가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말하자면 연변대학교가 있었기에 200만 조선족형제들은 이민사 150여 년을 기록하는 이 시점에서도 자기의 말과 글을 잃지 않고 민족적 자부심이 드높은 공동체로 존속,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변대학교는 유대인의 오늘을 있게 한 야브네학교에 다름이 아니다.   현재 연변대학교는 19개 학원(단과대학)에 68개 학부를 개설하고 있고 2, 500명의 교직원에 2만 2천 여 명의 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연변대학교는 1996년 중국 “211공정” 중점건설대학으로 선정되고 2001년 국가교육부에 의해 서부개발 중점건설대학으로 선정되었으며 2005년 또다시 국가교육부에 의해 길림성정부와 국가교육부에서 공동으로 건설하는 중점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연변대학교는 1996년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사범학원, 연변예술학원, 연변과학기술학원 등 주변의 단과대학들을 통합했고 현재 와룡산기슭에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통합캠퍼스 조성공사를 벌리고 있다.  바로 연변대학교 2만 여명 사생이 일심동체가 되어 제2창업의 설계도를 그릴 때인 2006년 9월의 어느 날, 연변대학교 예당(禮堂)은 2천여 명의 대학생들과 교수들로 입추(立錐)의 여지도 없는데, 휘넓은 단상에는 훤칠한 체구에 반듯하게 정장을 한 70대의 노인이 강연을 하고 있었다. 꿋꿋한 자세, 조용하나 열띤 어조,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편력과 경영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청중석에서는 무시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올랐다. 노익장(老益壯)의 정열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연사(演士), 이 어른이 바로 우리민족의 자랑, 세계적인 거상(巨商)인 한창우 회장이다.   1945년 10월,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님이 챙겨주는 쌀 두되와 영어사전 하나만을 들고 홀로 일본행 배를 탔다. 60년이 지난 2006년 현재, 그는 불굴의 의지와 창의적인 발상으로 매출 20조 원을 눈앞에 둔 210개의 기업을 거느린 세계적인 거상으로 성장했다. 마침내 모국 한반도 영토 밖에서 가장 큰 경영성과를 창조한 한인 출신 기업인이 되었다.  60년 세월, 얼마나 혹독한 가난과 차별 속에서 지냈던가? 그는 고학으로 일본 명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경제학부를 나왔지만, 재일한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매형에게서 부도 직전의 자그마한 파친코점을 물려받았다. 그는 남다른 서비스와 고객 중심의 마인드로 좋은 평판을 얻기 시작하면서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볼링사업에 뛰어들어 1972년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볼링장을 시즈오카(靜岡)에 오픈했다. 그러나 볼링 붐은 금세 식었고, 남은 것은 60억 엔의 막대한 빚더미뿐이었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부도를 내지 않고 이 극한적인 상황을 이겨냈다. 뿐만 아니라 마루한(丸漢)을 창립하여 2005년 업계 최초로 1조 엔 매출을 달성했다.  그 후에도 마루한은 업계에서 혁명이라 불리는 거대한 변혁을 시도했다. 그것은 고객에게 진심어린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서비스혁명”과 업계에 팽배한 불투명경영을 불식(拂拭)하는 “클린혁명”이었으며 또 최고의 인재를 육성해내는 “인재개발혁명”이었다. 매출 2조 엔을 넘어선 마루한은 이미 거둔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적인 수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미래를 꿰뚫는 혜안, 백절불굴의 헝그리 정신과 도전 정신, 자신에게는 인색할 정도로 검소하지만 꼭 필요한 일에는 넉넉하고 후한 인심을 베풀고 있는 한창우 회장, 그는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하면서 널리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억 엔의 성금을 한국에 보냈고 1990년에는 3억 엔의 사재를 털어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을 설립했으며 1993년에는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제5대 회장에 선임되어 6년간 회장 직을 맡으면서 해마다 1억 엔 이상을 동포사회를 위해 썼다.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를 창설한 후 지금까지 회장 직을 맡고 다국적 민족자본을 결집하기 위해 힘차게 뛰고 있다.    외롭고 험난한 싸움에서 한창우 회장을 지탱해주고 키워준 철학과 실천은 2000명 연변대학교 사생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특히 글로벌시대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개척의 뉴프런티어 정신”을 심어주었다.    그날 한창우 회장의 강연을 들은 연변대학교 과학기술학원 경영정보학과 06년급 박혜홍 학생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소감을 말한다.  “한창우 회장님의 특강제목은 ‘나의 경영철학’이었습니다. 처음에 현수막에 실린 글발을 보고 중학교 때 정치과 수업시간에 진절머리가 났던 기억이 나서 덜컥 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두 시간을 견뎌낼 것인가? 그러나 정작 특강을 듣고 보니 저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경영학 관련 문제들을 틀에 박힌 개념과 논리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많은 생동한 실례, 특히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재미있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창우 회장님은 ‘좌절과 위기는 실패의 시작이 아니라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짜증을 내고 남을 원망하고 실의에 빠지곤 합니다. 저도 성적이 좋지 못할 때나,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 때는 고민에 빠지고 맥없이 주저앉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쉽게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앞에 놓인 곤란은 한창우 회장님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변대학교 대외언어학과 06년급 남향림 학생은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한다.   “한창우 회장님의 길은 결코 순풍에 돛 단 격이 아니었습니다. 거듭되는 실패로 하여 상상하기 어려운 좌절과 실의를 경험하기도 하였지만, ‘위기는 재생의 찬스로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칠전팔기(七顚八起), 다시 세상에 도전을 하곤 하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노력, 신용, 봉사’를 사훈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이라는 남의 땅에서 민족적 차별을 극복하고 존경을 받자면 일본인들이 8시간 일할 때 18시간 일해 반드시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하며, 일본인들보다 더 높은 지적 수준과 교양을 갖추고 그들보다 20배 이상 신용을 지켜야 하며, 거주국의 지역발전과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조선족 형제들도 중국사회에서 존경을 받자면 한창욱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노력, 신용, 봉사의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한창우 회장은 강연을 마치고 연변대학교 캠퍼스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그는 당신의 고향 경상남도 삼천포에도 와룡산이 있다고 하면서 마치 제2의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고 했다. 특히 대학가나 연길거리에 반듯하게 걸린 우리 문자로 된 간판들과 여기저기서 다정하게 주고받는 우리말을 듣고 더욱 즐거워했다.   박창우 회장은 그 이듬해에도 연변대학교를 찾아주고 수천 명 신입생들에게 좋은 강연을 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교 김병민 총장을 일본에 초청해 주시고 연변대학교의 미래상을 두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학교경영의 어려운 문제들을 일일이 묻고 나서 2억 원의 거금을 보내주었다.     올해 가을이면 새로 일떠선 통합캠퍼스에서 연변대학교는 개교 6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축제에 다시 한 번 한창우 회장을 모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가 두 번 연변대학교를 찾았을 때 남긴 귀중한 사진들을 편성해 이 영상자료를 만들었다. 애젊은 학생들과 소탈하게 대화를 나누는 한창우 회장, 연변대학교 경영진과 술잔 나누며 담소하는 한창우 회장, 연길 한식점의 한복 입은 접대부들과도 허물없이 포즈를 취하는 한창우 회장, 이 영상자료를 통해 우리 연변대학교 사생들은 한창우 회장의 사랑과 배려를 영원히 기릴 것이며 후세 교양의 산 자료로 삼을 것이다. 한창우 회장, 그는 글로벌시대 오로지 자신의 피타는 노력과 신용, 그리고 헌신적인 봉사로 민족적 차별과 기시를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우리 민족 경인인의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한창우 회장의 건승과 마루한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마루한과 연변대학교의 형제적 우의가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2009년 1월 11일
14    [추도사] 고 임윤덕 선생을 추모하여 댓글:  조회:1758  추천:32  2011-02-08
고 임윤덕 선생을 추모하여 김영수(연변대 조선학국학원 원장) 여러분: 2009년 5월 4일 오후 6시 경에 우리 연변대학교의 우수한 교수이며 저명한 문예비평가인 임윤덕 선생이 향년 76세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임윤덕 선생의 서거는 우리 연변대학교와 연변문단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저는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원 전체 교직공과 학생들을 대표하여 깊은 추모의 마음을 전함과 아울러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생은 음력으로 1933년 3월 14일 용정 로투구의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선생네 가족은 일제치하의 어수선한 시국을 피해 길림지역에 있는 연통산으로 이사를 갔고 1938년에는 다시 녕안현 황기촌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아버지와 형님을 도와 농사를 지으면서 1945년 소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선생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열 네 살 때 어머니를 사별하고 무진 고생을 겪으며 자랐으나 남다른 총명과 노력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1947년 9월 신민주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고 녕안중학교와 목단강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연변변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급중학교 때부터 문학을 사랑한 선생은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시절 고금중외의 문학작품들을 널리 독파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1955년 연변대학교 조교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조교시절부터 문학리론을 깊이 공부해 <문학개론>, <모택동문예사상> 등 학과목을 강의하였으며 1963년 전임강사로 되고 1965년 9월부터 1년간 학생들을 인솔해 가지고 안도현 석문공사에 가서 농촌사회주의교양운동에 참가하였고 1966년 5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 때 많은 고생을 하던 선생은 1970년 1월 부인과 철없는 자식들을 데리고 화룡현 룡수평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고 선후로 화룡제3중학교 교원, 룡수평중학교 교장, 두도구중학교 교원 등으로 전전하면서 9년 동안이나 농촌의 우리민족 기초교육을 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선생은 1979년 봄에야 오매에도 그리던 연변대학교에 복귀해 교단에 설 수 있었고 빼앗긴 시간을 되찾으려고 전국의 문학이론 관련 학술회의에 부지런히 다니셨습니다. 선생은 1982년 9월 상해 복단대학교에 가서 중국의 저명한 미학가 장공양 교수의 문하에서 연수를 하였으며 <문예와 정치의 관계를 논함> 등 우수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1985년 부교수로, 1993년 정교수로 되었습니다. 1986년부터는 조선문학 석사생들을 지도하였고 1987년부터는 조선문학 박사생들에게 <문예미학방법론> 등 학과목을 강의하였습니다. 1993년 5월 정년 한 후에도 1997년까지 교단을 떠나지 않았으며 특히 2000년 방광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연구와 집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임교수는 어질고 정직한 성품을 지닌 선비입니다. 선생은 동료들의 농담을 잘 받고 주변의 인간들에게 언제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으며 평생 세속의 권세와 이익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일편단심 안빈낙도의 신념으로 교육자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하지만 학계의 원리원칙이나 문단의 시시비비에는 언제나 자기의 소신을 가지고 진리를 견지하고 비정과 비리와 싸우면서 강직불아(剛直不阿)의 인격적 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임교수님은 저작등신(著作等身)의 학술성과를 쌓은 분도 아니고 평생 학부장 한 번 해보지 못했지만 학문을 사랑하고 평생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글을 쓰셨습니다. 선생은 글재주보다 말재주가 뛰어난 분으로서, 언제나 제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지니고 교수에 임하였고 심오한 미학과 문학의 원리들을 언제나 부드럽고 생동하고 조리정연하게 강의해서 제자들의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정년을 하신 후에는 물론, 병환에 계시는 동안에도 새로운 문예학이론을 널리 수렴하시고 문단의 쟁명에도 분명히 자신의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이제 선생은 가셨으나 선생께서 남기신 <문학개론>, <20세기서방문예리론>과 같은 교과서는 의연히 우리 대학교의 교과서로 이용될 것이며 선생의 지고지선(至高至善)의 학문적 열정과 강직불아, 안빈낙도의 선비정신은 영원히 우리 후학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고 임윤덕 선생이여, 고이 잠드시라! -2009년 5월 6일  
13    [페회사] 별의 시인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여 댓글:  조회:1596  추천:31  2011-02-02
        별의 시인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여― 윤동주 서거 65주기 기념 세미나 및 낭송대회  폐회사                                                                                                  김호웅     안녕하십니까?     일찍 연변의 시혼(詩魂)으로 일컬어지는 리욱(李旭) 선생은 연변의 아름다운 봄을 두고 “보랏빛 처마 끝에는 참새주둥이가 봄을 나꾸고/ 먼 뜰엔 푸른 옷 갈아입는 소리 스미다” 라고 노래한 적 있습니다. 이상기후로 시도 때도 없이 눈비를 쏟아 붓던 하늘도 오늘따라 화창하게 개었습니다. 공사다망한 가운데 이 자리를 찾아오신 연변지역의 문인들과 문학청년 여러분께 새봄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윤동주 서거 65주년에 즈음하여 연변지역의 문인들과 문학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별의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학술모임과 함께 시낭송모임을 가졌습니다.  특히 이 번 모임은 국내외에서 친일분자들이 일본의 극우세력에게 아부, 굴종하면서 민족을 팔아먹고 동아시아의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마당에 열렸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귀한 주제발표를 해주시고 사랑과 정성을 고여 윤동주 시를 읊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윤동주는 칠흑같이 어두웠던 일제 치하의 밤하늘에 빛났던 아름다운 별입니다. 그는 2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인간적인 성실성과 불같은 동포애를 가슴에 품고 주옥같은 시편들을 남겼으며 밝아올 민족의 아침을 위해 자기의 피를 조용히 뿌렸습니다.     오늘의 주제발표에서도 논의된 바 있지만, 별의 시인 윤동주의 생애와 그의 시가 가지는 의미를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강인한 저항정신을 지녔지만 이를 사춘기 소년과 같은 청순한 감각으로, 겸허하고 유연한 언어로 써나갔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저항시인이었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결코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이고 인도주의였습니다.    둘째, 그의 정신은 염치사상(廉恥思想)입니다. 염치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서 예의(禮義)와 더불어 참된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그것은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정신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 그의 사상은 정신적 순결주의이며 그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염치사상과 다름없습니다.     세째, 그가 남긴 가장 빛나는 시는 사명시(使命詩)입니다. 우리 민족 또는 온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종주의 시를 통해 순수한 동심, 겸허한 자세, 평화주의와 인도주의를 되찾을 수 있고 자기반성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윤동주를 통해서 이 세상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놀라운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민족을 위한 사명이며 세계적인 평화를 위한 사명이며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를 자각하고 실천하는 대열에 나섬으로써 진정한 삶의 목표와 가치를 찾고 긍지를 갖게 됩니다.    오늘 모임이 윤동주 연구의 새로운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면서 이 모임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주신 조성일 회장님, 김응준 회장님, 연변청년여행사 대교영업부 박응복 사장님을 비롯한 연변의 문인들과 문학청년들, 그리고 독지가(篤志家)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로써 폐회사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5월 21일
12    [추천칼럼5]인터넷쇼핑(장호연) 댓글:  조회:3363  추천:34  2011-01-30
[김호웅 추천 연변대 연구생 칼럼5]  인터넷쇼핑                장호연(연변대학 조선어학과 석사과정 2010년급)           요즘 길에 나서면 속달화물차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대학교 숙소에서 지내는데 점심시간이면 학교 정문 앞에 상품을 배달하러 온 차들이 줄줄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속달회사의 발전이 왜 이렇게 빠를까? 사실은 통신판매와 인터넷구매 덕분이다.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만 보아도 그들은 한가할 때마다 淘宝网에 많이 들어가 본다. 옷도 가방도 화장품도 인터넷에서 사면 양식도 많고 가격도 상점보다 많이 싸다. 내 옷도 50퍼센트 이상을 인터넷을 통해 구입했다.       모두들 인터넷쇼핑에 왜 이렇게 열중할까? 내 보기에는 아래와 같은 세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첫째, 현대 사회의 생활 리듬은 아주 빠르다. 대체로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이 많고 여가 시간이 적다. 하루를 비워 친구들과 함께 거리를 거닐 겨를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인터넷쇼핑이 이런 바쁜 사람들에게 쇼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직접 백화점으로 가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상품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시간을 절약하고 품도 덜 수 있다.     둘째, 같은 상품이지만 인터넷쇼핑에서는 싸게 살 수 있다. 인터넷가게를 경영하는 데는 비용이 덜 드니까 상품을 싸게 판매할 수 있다.       셋째, 선택권이 넓어진다. 인터넷쇼핑을 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가게나 백화점을 돌아볼 수 있다. 그 다음에 서로  비교하고 질 좋고 값이 싼 상품을 결정한다. 이렇게 하면 후회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인터넷쇼핑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제일 알맞는 쇼핑 방법이다.
11    조선대학교 이성연 교수를 그리며 댓글:  조회:3334  추천:31  2011-01-26
                   조선대학교 이성연 교수를 그리며                                       김호웅(연변대학교 교수)     청송컵 백일장을 두고 몇 글자 쓰자고 보니 이성연 교수의 인자한 얼굴과 조용한 목소리가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하다. 몇 해 전 병환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메일로 병문안을 했으나 회신이 없는지라 여러 번 전화를 했었다. 역시 통하지 않았다.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지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일절 회신도, 통화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썩 후의 일이다. 철새처럼 해마다 봄이면 연변을 찾아오던 이성연 교수가 영영 하늘나라 사람이 되다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이성연 교수를 처음 뵌 것은 1990년대 초반인데 여럿이 앉은 자리라 별로 대화도 나누지 못했었다. 1996년 여름인가, 그 때 연변대학교 사범학원 원장을 지냈던 김병민 현임 연변대학교 총장께서 조문학부 학부장으로 있던 필자와 고 최용린 교수를 불러놓고 조선대학교의 후원으로 청송컵 백일장을 펼치게 되었으니 잘 해보라고 부탁을 했다.     오후 조문학부를 찾아온 한국 손님을 보니 다름 아닌 이성연 교수였다. 그때로부터 이성연 교수는 백수인 교수 등과 함께 해마다 청송컵 백일장 심사차로 연변을 찾았다. 어느새 우리는 그야말로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다. 이성연 교수는 동안(童顔)에 날씬한 몸매인데 비해 백수인 교수는 중키에 미남이었으나 머리에 흰서리가 내려서 오히려 형벌되는 사람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성연 교수는 오히려 필자보다 서너 살 선배이고 백수인 교수는 필자와 동갑이었다. 약주를 즐기는 대신 말수가 적은 백수인 교수와는 달리 이성연 교수는 약주는 한두 잔 정도밖에 하지 않았지만 조곤조곤 재미있는 유머를 구사해서 좌중을 즐겁게 했다.     한 번은 가을철에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가 지프를 타고 천리림해(千里林海)를 굽이굽이를 자아 내려오는데 단풍이 든 백두산은 그야말로 거대한 칠색치마를 두른 것 같았다. 이성연 교수가 “우리가 지금 백두 여인의 속살을 헤집고 어디로 가는 거지?” 하고 우스개를 했다. 귀국할 때면 우리가 으레 “이삼일 더 놀다 가시지요.” 하고 인사를 하면 “뭘요, 가는 손님은 뒷꼭지가 예쁜 법인데요” 해서 우리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특히 시상식을 할 때면 고금중외 위인의 일화를 가지고 청소년 수상자들에게 영원히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나폴레옹의 일화나 라파엘로의 일화는 너무도 재미가 있어 나는 내 글에 슬쩍 써먹기도 했다.     청송컵 백일장은 10회를 하고 한 단락 마무리를 지었는데 연변지역의 백일장 가운데서 가장 수명이 긴 셈이었다. 조선대학교 쪽 총장님이 바뀔 때마다 이성연 교수와 백수인 교수가 천방백계로 설득을 해서 이어나간 줄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청송컵 백일장을 통해 수많은 신동(神童)들을 발견했고 글짓기 명수들을 키워냈다. 제1회 청송컵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이영실씨는 지금 연변의 명문 연변제1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수로 일하고 있고 우수상을 받은 이해영씨는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청도해양대학교에서 한국어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이성연, 백수인 교수는 연변 현지에 와서 한글의 불씨를 심는 작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교의 우수한 청년 강사들을 조선대학교에 데리고 가서 박사로 키워주었다. 현재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원 부원장으로 일하는 이봉우씨도 이성연 교수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신문학과 학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서옥란씨도 이성연 교수의 문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백수인 교수의 문하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영근씨는 광동외어외모대학교(廣東外語外貿大學校) 한국어학과 학과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중국 경내 한국학 교수와 연구의 중심 멤버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기실은 필자 자신도 이성연 교수의 신세를 많이 졌다. 서울에 갈 때마다 이성연, 백수인 교수를 뵈러 전남 광주 쪽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두 분은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이 동료교수들을 한 구들 불러놓고 진수성찬으로 대접해 주었다. 한 번은 내자와 함께 내려갔더니 이성연 교수는 사모님까지 모시고 나와 전남의 맛스러운 한식을 대접해 주었고 우리 부부를 위해 무등산 산중턱에 있는 호텔을 잡아 주기도 했다. 어느 나라 대통령도 묵어갔다고 하는데 밤에 창가에 서면 불야성을 이룬 광주시가 한눈에 깔려보였다.     필자의 내자는 연변대학교 중앙도서관 연구관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성연 교수는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 관장으로 부임하자 특별히 필자의 내자를 초청해 견학을 시켰고 부부 동반으로 제주도까지 구경시켜 주었다. “연변에서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키는 사람이니 칙사대접을 해야지요.” 하고 이성연 교수는 신바람이 나서 안내를 하고 명승고적에 깃든 일화들을 들려주시더란다.     앞에서 잠간 이야기했지만 이성연 교수는 이봉우씨에 이어 서옥란, 신철호씨를 제자로 받아 키워주었는데 실은 이봉우씨와는 한 단락 오해와 마찰이 있었다. 이성연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요, 교회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 지도자인데 그는 이봉우씨를 보고 교회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권유를 했었다. 허지만 성미가 직방배기인 이봉우씨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중국공산당 당원입니다. 교회에는 나갈 수 없습니다.” 라고 물리쳤다고 한다. 그 뒤로 이성연 교수와 이봉우씨는 알게 모르게 간격이 생기게 되었고 이봉우씨는 이성연 교수가 자기를 너무 쌀쌀맞게 대해준다고 생각하고 학업을 중도이폐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때로부터 한두 해 지났을까? 이성연 교수는 국제전화로 김선생의 제자 한 사람 추천해 주면 책임지고 박사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이봉우씨의 일로 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나는 석사학위를 받고 우리 학과에 갓 취직한 서옥란씨를 추천했고 그녀는 3년간 이성연 교수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무난히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한편 이성연 교수는 연변에 올 때마다 이봉우씨를 찾았고 막내동생처럼 이봉우씨를 아끼고 보듬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봉우씨의 부탁을 받고 흔쾌히 신철호씨를 제자로 받아주기도 했다. 오늘도 이봉우씨는 “날마다 이성연 교수께서 선물한 전기밥솥으로 지은 따뜻한 쌀밥을 먹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당돌했는가를 참회하게 됩니다. 참 훌륭한 인격자였지요.” 라고 말한다.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은 지극한 동포애, 오만과 독선이 아니라 언제나 깊은 자기 참회와 낮은 자세로 남을 섬기면서 다가오는 이성연 교수,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성연 교수가 더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이성연 교수의 정성과 지혜가 깃들어 있는 청송컵 백일장, 이 자그마한 솔씨가 다시 10년을 기약하면서 연변땅에서 낙락장송으로 커가기를 빈다.                                      2010년 7월 6일, 연길에서                   
10    [심사평]우리 삶에 대한 성찰과 지혜 댓글:  조회:1325  추천:28  2011-01-26
                       우리 삶에 대한 성찰과 지혜              - 2010년 연변일보 CJ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심사평                                               김호웅(연변대학 교수, 문학박사)         올해 심사는 장정일, 최국철, 김호웅이 맡았고 엄격한 심사와 충분한 론의를 거쳐 CJ문학상으로 채복숙의 <<고슴도치>>, 해란강문학상으로 김학송의 장시 <<혼의 노래>>, 김철호의 서정시 <<물은 칼이다>>, 리성비의 서정시 <<두만강>>, 현영애의 수필 <<항아리 이야기>>, 주향숙의 수필 <<봄은 슬프다>>를 선정했다.         이 번 수상작들을 통틀어 살펴보면 우리 현대문명의 빛과 그늘을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서로 밀접하게 련계되는 두 가지 주제를 표현하고있다.    수상작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현대문명의 명암(明暗)을 짚어보고 거침없이 무너지는 조선족공동체의 운명을 두고 혹은 만가풍의 구슬픈 음조로, 혹은 민요풍의 경쾌한 가락으로, 혹은 사시적인 화폭으로 노래하고있다.    주향숙의 수필 <<봄은 슬프다>>는 한 폭의 의미심장한 스케치요, 한 수의 구슬픈 만가(輓歌)이다. 봄이 찾아왔건만 정든 이웃들이 다 떠나간 마을은 텅 비고 사래 긴 밭이랑들만 무심히 누워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가 하릴없이 망연히 서있는데 그의 옆에는 삭아버린 수레 한 채가 있고 소는 보이지 않고 빈 말뚝만 서있다. 이처럼 이 수필은 조선족 농촌마을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화룡점정(畵龍點睛)식의 필치로 묘파함으로써 읽는이들의 가슴에 큰 파문을 준다.      주향숙의 수필은 무너지는 우리 농촌사회에 대한 만가라면 리성비의 서정시 <<두만강>>은 두만강이라는 시적 화폭 속에 아름다운 전설과 전통사회 속으로 우리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두 내외는 전설속에 묻힌 장고(長鼓)를 꺼내놓고 농악놀이 때 입던 옷가지들을 구김살 펴서 입고 조상들이 탔던 배와 그물을 점검하고 두둥실 뜨는 푸른 바다에서 한껏 장고를 울린다. 시는 안늙은이와 바깥늙은이의 대화체로 친밀감을 살리면서 경쾌한 향수의 가락을 뽑아내고있다. 그리고 “구멍 난 고기그물 별빛이 걸리게 떠봄세”와 같은 시구는 모진 세파에도 시들줄 모르는 우리민족의 꿈과 희망을 암시하고 있어 한결 밝은 시적 분위기를 창출하고있다.    민족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긍지를 안고 민족혼의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찬미한 시인은 김학송이다. 장시 <<혼의 노래>>는 백여 년의 우리 조선족 이민사, 투쟁사, 건설사를 시적 화폭으로 창조하면서 민족의 혼을 살려 “천년만년 우리 노래”를 불러야 할 당위성과 의지를 힘 있게 노래하고있다. 일부 시적 이미지들이 상투적이고 시인의 시의식이 너무 로출된 한계도 갖고있지만 우리 모두가 풍전등화처럼 흔들리고있는 민족사회의 현실을 극복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있다고 생각할 때 이런 투철한 력사의식과 현실비판의식을 내재한 장쾌한 랑송시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요청된다고 하겠다. “우린 지금 선인들의 유산을 저당 잡히고/ 피둥피둥 살지고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지금 자기의 둥지 털어 불 때며/ 따듯한 겨울을 노래하고있는지도 모른다// 너와 나 하나하나가 고향집 기둥이요 연목가지인데”. 이 얼마나 날카로운 아이러니이며 심통한 은유인가! 이 시가 국내외 여러 사이트에 올라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절찬을 받은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수상작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더불어 사치와 탐욕이 들끓고 기계문명에 의해 우리의 소중한것들이 소실되어가는 현실속에서 전통문화의 가치와 우리 모두의 바람직한 삶을 지향하고있다.    현영애의 <<항아리의 이야기>>는 현대식 아파트로 이사를 할 때 시어머님이 물려준 항아리를 가지고 갈가, 아니면 버릴가 하고 고민하는 행복한 중년주부의 고민을 수필적인 모멘트로 다루고있다. 말하자면 작자는 “울퉁불퉁하고 조금 기울어진듯 비틀어진 자세, 유약도 골고루 칠해지지 않아 해빛이 얼룩덜룩 비치는, 겉모양은 투박하다는 말은 맞을지 몰라도 절대로 우아하지 않은 조그마한 항아리 하나”를 두고 고민한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항아리, 그것은 시어머님이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다. 그래서 이 항아리를 새집에 가지고갔다면 그저 효도를 다룬 평범한 작품이 되고말았을것이다. 하지만 이 수수한 항아리를 베란다의 한구석에 놓고 그것이 그냥 아가리를 벌린 채 덩그렇게 놓여있는것이 안쓰러워 무심히 갈꽃 몇 잎을 꺾어 넣었더니 집안에 이채를 돋구어주는 디자인 포인트 1번지가 되었단다. 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환성을 지른다고 했고 작자는 다음과 같은 철리적인 의론을 전개함으로써 이 수필의 품위를 결정적으로 높여주었다.    “그러하리라. 아파트 집집마다 인터리어를 하고 이 인터리어들이 아무리 개성을 살려 독특하게 설계되고 남다르게 꾸며졌다 하여도 결국은 현대화란 시스템의 굴레에 묶여 진행되는 우리 삶의 한 편린인것을. 어느 집에 들어가 보나 거기서 거기일것이다. 그리고 집안 대부분을 차지하고있는 전자제품이나 가구들도 상가나 백화점에서 들여온것이니 누구의 눈엔들 한번쯤 뜨이지 않았겠는가. 거기에는 나만의 삶이 묻어날 수 없는것이다. 그런데 이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럭셔리한 세계에 수십년전 물건인 투박한 항아리 하나가 그것도 자연의 작품인 하얀 갈꽃 몇 잎 담고 자리를 버티고 앉았으니 어찌 눈에 확 들지 않겠는가.”    현영애의 수필에서는 현대문명의 틈바구니속에서도 여전히 빛 뿌리는 전통적인것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하고있다면 김철호의 서정시 <<물은 칼이다>>는 단순한 영물시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물은 칼이다”라는 참신한 은유를 통해 민중의 무서운 힘을 노래하고있다. 물은 쉽게 부수어지고 가장 밑으로, 가장 아래로 도망을 칠수도 있지만 모여 한 몸이 되면 칼이 되고 바람을 만나 키를 돋우면, 또는 저항에 기우뚱 몸을 흔들면 칼이 된다고 했으며 칼은 하늘아래 모두를 베일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있다고 했다. 여기서 “물”은 가장 취약하면서도 일단 모이면 거대한 힘을 가질수 있는 민중을 지칭한다고 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민중의 힘을 모르는 부패한 권력의 무지와 횡포를 은근히 비웃고있다.    김철호 서정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채복숙의 수필 <<고슴도치>>는 관습적상징의 틀을 깨고 참신한 개인적상징을 창출해 읽는이들에게 깊은 철리를 선물한다. 작자는 서로 찔리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 간격, 즉 고슴도치형 현대인간들의 “수양과 례의, 그리고 그에 걸맞는 직업적인 혹은 도덕적인 미소”에 회의와 반발을 느낀다. 그러면서 “찌르기도 하고 찔리기도 하면서 사는 그런 화끈함이 부럽다”고 했다. 개인적 상징을 통해 가식과 허위로 가득 찬 현대문명, 인정과 신뢰가 메말라가는 현대인의 삶에 일침(一針)을 놓은 깔끔한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어 수상을 축하한다.
9    [추천칼럼3] 신토불이 (양박) 댓글:  조회:3787  추천:37  2011-01-06
[김호웅추천 석사연구생 칼럼3]  신토불이      양박(연변대학 조선어학과 석사과정 2010년급)     우리나라에는 많이 슬픈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아무 곳에나 버린 쓰레기, 먼지가 뒤섞인 공기,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와 폐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건강에 해로운 것이다.     옛날 깨끗한 물가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놀고 있었던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강도 산도 다 오염이 되었다. 청정한 강과 산을 강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 정부는 현재 환경오염을 방지하고 생태를 복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한국어에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다. 이 낱말은 자연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을 담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몸과 흙이 둘이 아니” 라는 뜻이다. “신”이란 인간을 가리키고 “토”란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을 가리킨다. 한국인의 경우. 자연과 인간을 갈라 말하면 안 된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자연이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유일한 보금자리이니 자연보호활동에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 누구나 작은 노력을 들이면 행복한 미래가 도래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먼 미래의 행복을 스스로 잘라버리는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물을 비롯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8    [추천칼럼1]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곽가환) 댓글:  조회:5263  추천:32  2010-12-27
<추천자의 말>   오늘 연변대학교 조선어학과 석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칼럼 8편을 추천한다. 한족학생들이지만 몇 년 간 조선어를 열심히 공부해 듣고 읽고 말하고 쓰기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 이 번 학기 <조선어글쓰기>를 배우면서 각자 쓴 칼럼인데, 좀 미숙한 점이 많지만, 이들의 풍부한 지식과 예민한 감수성 및 참신한 가치관과 사회비판의 힘이 돋보인다. 독자 제현의 일독을 부탁 드린다.   추천인:연변대학 조선-한국학연구중심 교수 김호웅   -칼럼 1 –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곽가환(연변대학 조선어학과 석사과정 2010년급)   요즘 두 편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힘 없고 빽 없는 50대 초반의 대한민국 남자 윤모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입니다. 그 남자의 자살 이유는 "장애를 가진 아들이 복지혜택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의 아들은 한쪽 팔이 불편한 장애아입니다. 그는 일용직 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 왔지만 최근에는 일감을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불구자인 아들을 부양할 형편이 되지 못하자 "살아있는 게 가족에게 오히려 짐이 된다"고 자책했습니다. 그래서 지신이 목숨을 끊으면 불구자 아들이 고아가 되여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거나 장애아동부양수당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듯합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그는 아들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는 뉴욕에서 열린 제38차 국제 에미상 시상식에 대한민국 최초로 이 상을 수상한 '풀빵엄마' 최정미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5년간 동거했지만 거듭된 불화로 헤어진 뒤 그는 자신의 성을 따른 두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습니다. 엄마이면서 아빠인 최씨는 아이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벌고 살림을 했습니다. 5년 전부터 그는 매해 겨울 풀빵을 구워 팔았는데, 맛있다고 소문이 나 제법 매출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2007년 7월 소화불량 때문에 찾은 병원에서 위암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술대에 올랐으나 4개월 후 전이되었고 길어야 2년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최씨는 ‘아이들이 스무 살 될 때까지 반드시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그는 풀빵 장사를 그만둘 수가 없어서 새벽부터 반죽을 준비하고 늦은 밤까지 칼바람을 맞으며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 7월 30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두 기사는 다 슬프고 감격스러운 기사입니다, 하지만 저는 윤모씨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 위해서라도 삶이 힘겨울 때 필사적으로 살지 않고 난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자살로 현실을 도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정미씨는 아픔을 견디고 누구에게나 낙천적이고 희망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고 오히려 주변사람들이 그녀부터 힘을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신체가 건강하고 살림이 넉넉하고 별로 불행을 겪지 않고 잘 살지만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제일 불행스럽고 억울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이 힘겨울 때,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때, 좌절과 실패를 두려워할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삶과 죽음은 한 순간에 결정됩니다. 부모님은 몇 십년동안 우리를 애써 키워주는데 단지 한 순간의 황당한 생각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을 때 병원에 한번 가보십시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버리려 했던 목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최후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또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갖고 살아갑니다. 책임감이 있게 열심히 살아가야만 바람직한 삶,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하느님은 일정한 사명을 완성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지구에 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사명을 안수하지 못했기에 죽지 못합니다." 죽고 싶을 때 이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7    [심사평] 력사와 현실에 대한 성찰과 예술적인 탐구 댓글:  조회:1517  추천:33  2010-09-07
             력사와 현실에 대한 성찰과 예술적인 탐구          - 2009년 제30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이 번 심사는 늦여름 더위를 식히면서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연길시 팔도향 구수하(九水河) 기슭의 대우산장(大禹山莊)에서 열렸다.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5명의 중견문인들은 사전에 22편의 후보작에 대해 각기 읽어보았고 한자리에 모여앉아 충분하게 논의한 후 최종적으로 아래와 같은 작품을 수상작으로 뽑는데 합의를 보았다.     소설부분 본상에 홍천룡씨의 《호박골의 떡호박》, 신인상에 조룡기씨의《포장마차 달린다》, 시부분 본상에 김철 선생의《휴전선은 말이 없다》, 신인상에 박룡길씨의 《유리창》, 수필부분 본상에 리태근 선생의 《깨여진 고향의 반쪽 얼굴》, 신인상에 주향숙씨의 《내가 내곁에 서서》, 평론부분 본상에 우상렬씨의《현대적인 소설서정》, 그리고 신인상은 공석(空席)으로 남겼다.     모두어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모두가 관심을 가진 작품은 리태근 선생의 수필 《깨여진 고향의 반쪽 얼굴》이다. 이 작품은 30년 만에 고향을 찾은 작가의 견문과 감수를 적고있는데 외지로 돈벌이를 간 마을을 한족인 채령감네 삼형제가 지키면서 일약 부자로 된 이야기를 통해 우리 농촌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있다. 고향마을의 과거와 현실, 마을을 지키면서 근실하게 일하는 한족 농민 채령감네 삼형제와 마을을 버리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조선족농민들과의 대비를 통해 일확천금의 꿈에 뜰 떠 자기의 생존기반과 뿌리마저 잃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우리 농촌사회의 실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있다. 특히 채령감네 삼형제의 성실하고 근면하고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통해 재래의 편협한 민족의식을 극복하고 다문화주의시각을 보여주고있다.     홍천룡씨는 대학시절 약관(弱冠)의 나이에 단편소설《구촌조카》로 화려하게 등단한 작가인데 아침이슬처럼 반짝하다가 사라지는듯 싶었다. 하지만 최근 긴 “동면”에서 깨어나 수기, 수필, 소설을 무더기로 쏟아내더니 마침내 《구촌조카》의 자매편이라 할만한 중편소설《호박골의 떡호박》을 펴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종덕은 “아버지 없이 자란 과부의 아들”이다. 마을에서 찬밥에 도토리 신세로 왕따를 당하던 종덕이 우연하게 촌장으로 되여 두 쪽으로 갈라진 마을 사람들을 단합시켜 새로운 농촌건설의 설계도를 펼친다는 이야기인데, 종덕의 남다른 향토애와 헌신성 및 후덕한 인심을 잘 그려냈다. 이 작품은 종덕의 성격창조를 통해 오늘날 농촌사회의 부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본 요인을 순후한 농민대중의 자각과 헌신성에서 찾고있어 주목된다. 농촌사회의 소외되고 비틀리고 우울한 인물들이 아니라 “바보온달”과 같은 인물을 창조하고 있어 한결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김철 선생의 시정시 《휴전선은 말이 없다》는 서사적인 요소가 부족하고 편폭이 짧아 서정서사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조선반도의 통일을 지향한 작품으로는 근년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 작품은 “휴전선은 말이 없다”는 역설적인 구조속에 감정이입, 정경융합의 수법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시인의 감정을 육화(肉化)하는데 성공하고있다. 이를테면 “멀리 바라보면/ 푸른 장삼을 걸친 준령들이/ 더위 먹은 로승마냥 늘어져있고/ 초록의 강물들은 지친 혈맥인양/ 설백한 강토에 맥없이 꿈틀거릴 제…”와 같은 시련들은 감정이입을 통한 의인화의 수법으로 오랜 분단의 침울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있다.     우상렬씨는 폭넓은 독서와 부지런한 필경(筆耕)으로 최근 년간 우리 문단의 중견평론가로 떠올랐는데, 그의 《중국소수민족문학으로서의 조선족문학연구》라는 비교문학적인 글도 좋지만 특히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다룬 《현대적인 소설서정》도 일품이다. 이 글에서는 한영남, 구호준, 주계화 등 제씨(諸氏)의 소설을 치밀하게 분석하고나서 “세 작품의 공통된 특징은 우리의 감상심리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는 슈제트의 희석화(稀釋化) 및 심리적경향의 강화 등 현대소설적인 수법으로 거창한 시대주류담론보다는 세속의 세말사로 대변되는 현대적인 내용을 잘 보여주었다”고 지적한다. 문예심리학과 현대소설기법에 대한 탄탄한 리론적 소양, 간결하면서도 질감이 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톡톡 튀는 새로운 관점들을 선보인 그의 만담식의 문체가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조룡기씨의《포장마차 달린다》는 올해 《연변문학》지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라 하겠다. 대학을 졸업한 준성은 항주에서 포장마차를 경영하는데 소희라는 한국류학생이 동참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들 둘의 관계를 준성의 미혼처 춘매가 시기, 질투하고 소희의 미혼부 영민이 괘씸하게 생각하고 온갖 작간을 부리건만 준성의 의지를 꺾을 수 없고 소희 역시 요지부동으로 준성을 따른다. 새로운 도시문명의 소재, 생동하는 장면의 교차와 조합에 의한 몬따쥬식 구성과 새로운 타입의 인물형상을 통해 신세대젊은이들의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관을 보여준 재치있는 청춘소설이라 하겠다.     박룡길씨의 서정시 《유리창》은 정지용의 유명한 서정시《유리창》의 기법을 배운것 같은데, 주제는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정지용의 《유리창》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형상화하였고 동시에 차가운 유리창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박룡길씨의 《유리창》은 김관웅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리창에 빙자하여 시적화자의 절절한 짝사랑을 노래한 애정시”이다. 말하자면 유리창이란 이미지를 통해 “나”는 “너”를 그토록 갈망하지만 “너”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차가운 느낌만 준다고 하면서 실련의 아픔을 애타게 호소하고있다.     주향숙씨의 수필 《내가 내곁에 서서》는 자신을 대상화해서 보는 제2의 시각을 통해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비밀을 안고 남들과 벽을 쌓고  사는 자신을 반성한다. “내 곁에 내가 서면 내가 알립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태여나고싶어집니다. 우선 내가 내곁에 잘 설수 있도록 나를 다듬고싶습니다. 결코 얼음처럼 섬찍하지도 않은 그런 온기를 지니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또 해빛처럼 강렬하여 부담스럽지도 않은 사람의 온기를 지니고 싶습니다.” 수필은 고백과 성찰의 문학이라 할 때 참으로 자신을 성찰, 반성할 있는 시선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래서 이 수필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철리를 선물하고있다고 하겠다.     거듭 수상을 축하한다.                                            2010년 9월 7일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심사위원회
6    전환기 조선족소설문학에 대한 주제학적고찰 댓글:  조회:1879  추천:38  2010-05-16
             전환기 조선족소설문학에 대한 주제학적고찰                                                                                                  김호웅     1. 들어가는 말     중국사회는 1990년대 말로부터 사회경제적인 전화기에 들어섰다. 이른바 전환기는 경제성장제일주의에서 비롯된 관료층의 부패, 빈부격차와 지역격차, 생태파괴와 환경오염을 극복하고 서민의 수입증대와 사회복리의 향상, 계층 간과 지역 간의 균형적 발전 및 조화로운 사회분위기를 창출하는데로 전환하는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회학, 경제학 관련 학자들의 열띤 토론과 제안에 힘입어 2003년에 와서 당과 국가의 대정방침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 조선족사회는 중국 주류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안고있을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특수한 난제를 안고있다. 말하자면 조선족사회는 중국 주류사회의 변두리에 처해있는데 반해 한국과의 인적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급속히 무너지고 인구의 마이너스성장, 민족교육의 위축 등 허다한 문제를 드러내고있다.     전환기의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 우리 소설가들은 민족적 리얼리즘의 기치1)를 들고 다양한 테마를 개발하고있으며 소설문학의 공전(空前)의 부흥을 떠올렸다. 이 몇 년간 빼어난 활약상을 보인 작가는 림원춘, 류업무, 박선석, 최홍일, 우광훈, 리여천, 최국철, 김혁, 리동렬, 량춘식, 김동규, 강호원, 조룡기, 허련순, 리혜선, 박옥남, 조성희, 권선자, 리진화, 김경화, 김금희, 박초란 등을 들수 있을것이다.     이 글에서는 1990년대 말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약 십년간에 발표된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조선족소설문학의 주제들을 아래와 같은 3개 방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2. 소외계층의 고뇌와 울분, 그리고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요즘 중국사정을 보면 해마다 10% 이상의 고속성장을 기록하고있고 신문, 잡지들에서 억대부자들의 얼굴을 심심치 않게 볼수 있지만 권리 없고 돈 없는 민초들은 집장만을 하랴, 자식의 학비를 대랴 그야말로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이제는 우리 중국이 안고있는 기본문제가 빈부의 격차요, 지역격차다. 게다가 권력층의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민초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있다.     그래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일부분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져야 한다.”는 론리도 한물 가게 됐다. 다른 민족의 경우를 보아도 고향을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날품을 팔아 살고 있는 수억 민공(民工)들의 존재가 큰 문제로 되고있지만, 우리 조선족 형제자매들의 경우는 더욱 처참하다. 농촌에 처녀의 씨가 말라서 총각들이 장가를 들수 없거니와 설사 가족을 이룬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한쪽이 한국이나 러시아로 날품을 팔러 가있는 바람에 7, 8년씩 별거생활을 하기 일쑤다. 이들의 고뇌와 한, 외로움과 울분을 누가 달래줄수 있으랴?     혹자는 문학은 정치와는 관련이 없고 문학자는 사회문제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질 하등의 리유도 없다고 말한다. 애오라지 순수한 자아를 표현하면 그만이란다. 이건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수작이다. 자고로 참된 문학자는 민초의 고뇌와 울분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훌륭한 문학은 모두 민초를 대변해 원성을 터뜨렸다.     다행스러운것은 전환기 우리 소설문학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었으되 전환기 빈부격차와 지역격차에 초점을 맞추고 소외계층의 고뇌와 울분을 대변하고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함으로써 수많은 독지들의 공감대를 획득하고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에 바쳐진 작품들로는 리원길의《선녀야, 내게도 내려와 줘》, 박옥남의《둥지》, 리휘(원명 손룡호)의《울부짖는 성》, 강재희의《탈곡》등을 들수 있다.     박옥남은 우리민족의 삶의 현실에 눈길을 돌리고 우리민족의 오늘날의 실존적인 모순과 고통과 진실하게 반영하는 민족적사실주의에 확고하게 입각하여 중국 땅에서 망망대해 같은 다수자들속에 섞여서 소수자,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삶의 실태와 우리민족 문화교육이 직면한 위기상황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려고 일관적으로 노력해온 작가로서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은 그의 단편소설《둥지》이다. 이 작품은 우리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와해와 붕괴과정을 진실하게 묘사한 수작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이 작품은 도데의《마지막 수업》의 서사구조를 답습한 한계를 지니고있기는 하지만 일인칭시점에 의한 생동한 세부묘사, 속담의 적절한 사용, 아낙네들의 개성적인 대화를 통해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피폐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우리민족 어린이들이 뛰놀던 벽동소학교가 한족들에게 팔려 양우리로 변하고 \"학교간판이 도끼날에 두 쪽으로 쪼개져 교실 창문우에 거꾸로 덧박혀있\" 는 광경은 얼마나 처량한가! 둥지가 부서진다면 알인들 어찌 성하랴! 주인공 성수는 양우리로 변한 학교를 보면서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문득 저 집에 들어올 양들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있던 집도 없어졌는데 양들은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좋은 벽돌기와집에서 살게 생겼으니 말이다.\"2)― 이 얼마나 눈물겨운 역설과 아이러니인가.     150여 년 전 미국의 스토우 부인의 소설《톰 아저씨의 오막살이》(1852)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톰 아저씨라는 비천한 흑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다루고있는데 그는 깨끗한 량심의 소유자이지만 혹독한 백인농장주는 그를 이라자라는 녀성노예와 함께 다른 농장주에게 팔아넘기게 된다. 이 소설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쫓아오는 노예주를 피해 이라자가 갓 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오하이오강에서 성엣장을 이리저리 건너뛰면서 도망치는 장면이다. 흔들거리는 성에장우에서 그녀의 신발은 벗겨져서 두발은 칼날 같은 얼음부스러기에 베고 찢겨서 선혈이 낭자했지만 사생결단하고 도망을 친다. 잡혀서 다시 노예로 사는것은 차가운 강물속에 빠져서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웠던것이다. 그야말로 혹정(酷政)은 맹호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하여 이 소설은 노예폐지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페노주의자(廢奴主義者)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스토우부인을 만나서 “부인께서 남북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라고 말한것은 결코 롱담만이 아니였던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둥지》라는 소설 역시 조선족공동체의 처참한 붕괴상황을 고발하고있으니 우리 조선족공동체 살리기 또는 새 농촌건설운동의 기폭제가 될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국철은 중조 변경에 있는 도문시 량수진을 생활터전으로 잡고 이 지역의 역사와 함께 당대 농민과 도시서민의 희로애락을 소설화해온 유능한 작가이다. 그는《간도전설》과《광복의 후예들》이란 2부의 장편소설을 펴내 중견작가로서의 립지를 탄탄히 굳히고있다. 그의 단편《어느 여름날》3)은 제목부터가 비를 머금은 여름하늘처럼 무거운 감을 준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육중한 바위산 밑굽을 파서 뱀을 잡다가 큰 바위가 굴러서 내려오는 바람에 “종이장처럼 깔아뭉개졌다.” 뱀을 잡기 위해 바위산 밑굽을 뒤지다가 깔려 죽었다-- 이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왜서 뱀을 잡아야 했으며 왜서 죽기를 각오하고 큰 바위를 들쑤셔야 했을까? 말하자면 이렇게 비명횡사하게 된 인간관계와 사회적인 원인이 있다면 소설이 되는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왈룡이다. 힘은 세나 머리는 부족한 사내다. 김동인의《붉은산》에 나오는 삵이란 별명을 가진 정익호나 안수길의《원각사》에 나오는 원보를 방불케 한다. 왈룡은 저돌적이고 우락부락한 반면에 남의 충동질에 잘 놀아났다. 병신 마누라도 “마술 같은 힘으로 왈룡이를 쉬엿, 차렷을 시켰다.” 문제는 한 방면으로 왈룡 앞에서는“형님”을 개여올리는 중국인 왕싼(王山) 형제도 돈으로 왈룡의 마누라를 점하고 왈룡에게 오쟁이를 지운다는 사실이요, 다른 한 방면으로 연길의 돈 많은 량씨부자가 별장을 세우고있다는 사실이다. 타민족에 의한 생존공간의 위협, 도시화에 의한 농촌사회의 피폐라는 사회문제를 암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왈룡은 마을사람들을 대신해 량씨부자네 별장건축현장에 뛰여들어 골조와 기초돌 우에 싯누런 소똥을 매질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량씨부자의 회유책(懷柔策)에 넘어가 별장에 차려놓은 뱀탕집에 뱀을 잡아 제공을 하다가 끝내는 바위에 치여 죽은것이다. 이러한 왈룡의 형상은 타민족에게 밀려 갈팡질팡하고 도시화, 산업화에 의해 소외(疏外)되는 우리 농민들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     리휘의《울부짖는 성》2007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아내를 한국에 보낸 두 남성의 비극을 다루고있다. 주인공은 원명은 나오지 않고 “물알”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물알”이란 덜 여물어서 물기가 있고 말랑말랑한 곡식의 알을 지칭하지만 세속에서는 허우대는 크나 힘이 없는 남성을 말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물알” 역시 학교 배구대에서 쫓겨날 정도로 키 값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자식사랑은 지극해 모범 학부모로 통한다. 그는 안해가 한국에 간지 6년이나 되지만 지극정성을 다해서 아들 민호의 공부 뒷바라지를 한다. 민호는 학급에서 제일 공부를 잘한다. “물알”은 안해가 힘들게 벌어서 부쳐 온 돈을 한 푼도 헛되게 쓰지 않는다. 후에 안해가 돈을 부쳐 보내지 않아도 군말이 없이 지낸다. 그는 담임선생의 칭찬도, 친구의 부러움도 관계치 않고 묵묵히 애비 노릇만 할뿐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물알”은 학부모회의에 와서도 끄덕끄덕 졸기만 한다. 어느 날 그는 아닌 밤중에 친구 산호(별명은 개미)를 불러 가지고 맥주 여섯 병을 마시고 나서 혀 고부라진 소리로 묻는다.               “야, 개미야, 너 어데 녀자 없니?”     “물알”이 녀자를 찾는 소리는 처음이였다. “개미”는 일변 놀라고 일번 우스워서 히죽거렸다.     “야, 무랄아, 너도 녀자를 찾을 때 있니?”     “임마, 나도 남자다. 나도 좆대가 있다. 아직은 무, 무랄이 아니다.”     “이 새끼, 그럼 너네 앙깐한테 미안한 생각이 안 드니?”     “야 임마, 넌 앙깐이 금방 갔재? 난 육년이다.”     “그럼 그만 벌면 됐잖니? 돌아오라고 해라.”     “안 온다. 온다, 온다 하면서 육년이다. 미치겠다.”     “네가 아이를 잘 키웠으니 너네 앙깐이 꼭 돌아와서 너한테 사랑을 푸짐히 줄 거다. 여태껏 잘 참아왔잖아. 좀만 더 참아라.”     “개미”는 “물알”을 위로해 주었다.     “개코같다. 인생이 얼만데? 돈이 뭐야? 부부라는 게 오래동안 갈라져 있고도 부부라고 할 수 있니? 난 정말 여자 생각 나 죽겠다.”4)     “여자 생각 나 죽겠다”--이 어찌 “물알”만의 부르짖음이라고 하겠는가? 이 소설에 나오는 담임선생님의 말 그대로 56명 학생 중 어머니나 아버지가 출국한 학생이 46명이니 82%를 웃돌고있다. 80%의 부부가 장기간 별거하고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인권부재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연암 박지원 소설에 나오는 열녀 함양 박씨도 치솟는 욕정을 참을 길 없어 밤바다 동전을 매만져 그것이 다 닳아빠졌다고 한다. 성적욕망은 인간의 무의식중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며 대다수 사회인의 성적욕구불만은 사회의 불안정을 의미하기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휘의 소설《울부짖는 성》은 민초의 고뇌를 성적욕망의 억눌림과 그 위기라는 차원에서 다룬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최국철의《제5의 계절》은 소도시의 공무원으로 일하는 말단간부 탁명조의 생활난과 기구한 운명을 통해 날로 극심해가는 빈부의 격차를 고발하고 최하층인간들에게 깊은 련민과 동정을 보낸 작품이다.《제5의 계절》이라는 상징적인 제목부터가 독자들에게 현념을 던져준다. 한 해는 분명 4계절이나 가난하고 다사다난한 서민들에게는 하나의 계절이 더해진것만 같아 세월은 하루가 십년 맞잡이로 지내기가 어렵다. 아니, 이 제목은 자연의 순환과 섭리를 무시하는 사회의 비리와 비정, 서민들의 발등에 수시로 떨어지는 불행과 재난, 불합리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어려운 생존환경을 암시하고있다. 소설의 기본갈등은 착하고 성실한 인간과 불공정한 사회와의 모순에서 비롯되며 주인공 탁명조는 고골리의 소설《외투》나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 또는 중국의 녀성작가 심용의 소설《중년세대》나 지리(池莉)의《번거로운 인생(煩惱人生)》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안고있는 무서운 생활난, 설상가상으로 들이닥치는 불행―― 이러한 것들은 가뜩이나 심장병을 앓고있는 주인공에게는 견딜수 없는 생활의 부하(負荷)로 된다. 소설은 나중에 착하고 순직한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함으로써 주인공의 불운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정을 자아내고있다. 이와 같이 소설은 말단공무원의 기구한 운명에 의한 련민의 플롯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가장 큰 사회문제―― 빈부의 격차를 고발하고있는데 이는 작중 인물 장부장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있단 말이요. 다시 말하면 소득분배의 격차와 불평등에 대한 민중의 용인도가 너무 크게 저하되였다는 말이요.”5)     강재희는 료녕성 조선족산재지구의 작가이다. 그의 단편《탈곡》은 조선족 농촌사회의 병폐와 일부 우리민족 구성원들의 허랑방탕한 근성을 꼬집은 하나의 세태풍속화이다. 소설의 제목을《탈곡》이라 했는데 이는 다분히 상징성을 지닌다. 탈곡은 곡식의 낟알을 이삭에서 털어내는 작업을 말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 온갖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 뚜드려 먹고 마시는 우리 농촌사회의 현실을 암시한다. 또 그것은 껍데기는 버리고 낟알만 챙겨야 함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이 작품은 취기 어린 농담, 육담들이 오가고 도리깨가 난무하는 탈곡장을 련상시킨다. 작품은 복이네 집에서 탈곡을 하는 하루의 일과를 다루고있는데 부지런한 “되놈”과 먹고 놀기만 좋아하는 조선족농민들과의 대조를 통해 우리 조선족공동체의 치부(恥部)를 적라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제3인칭 서술시점을 취함으로써 지나친 흥분이나 섣부른 비판을 자제했고 시종일관 세부묘사에 의한 형상의 진실성을 추구했다. 온 마을사람들이 흥청망청 취했을 때도 직설적인 비판을 삼가고 능청스럽게 아이러니를 창출한다.   “모두들 점심 술에 푹 취해 버렸다. 취하지 않은것이라면 공연히 정지와 마당에서 사람들의 발길에 묻어 다니는 햇강아지 누렁이뿐이였다.”6)        박선석은 길림성 통화지구의 농민작가인데 30년간 부지런히 글농사를 해서 장편소설《쓴웃음》,《재해》등을 발표해 조선족문단의 귀재로 일컬어진다. 그의 단편《애완견과 주인》7)은 그의 대표작 《털 없는 개》의 자매편이라 할수 있는데 이 작품은 소시민의 사치한 풍조와 허영심 및 그 파탄을 꼬집은 풍자소설이다. 애완견도 생명이 있고 그놈들은 온갖 재롱을 부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니 덮어놓고 애완견사육을 질타할수는 없다. 하지만 결코 개와 사람을 동격체로 볼수 없으며 더더구나 개가 사람 이상의 대접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 아무리 생태학의 시대라 해도 언제 어디까지나 사람은 만물의 령장이기때문이다. 이 소설의 철딱서니 없는 주인공 강화자는“미미”라는 강아지를 키우고있는데 그놈을 “우리 작은 딸”이라 하면서 금지옥엽처럼 떠받든다. 남편은 한국에 나가 있고 시어머님을 모시고 있건만 시어머님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시어머님의 생일날이지만 강화자는 새까맣게 잊어먹고 “미미”의 생일잔치를 차리기에 바쁘다. 애완견동호회 회원들이 줄레줄레 모여와서 축하의 박수를 치는 마당에 시동생이 들이닥쳤고 화자는 개꼴망신을 당한다.     하지만 강화자는 회과자신을 하기는커녕 한술 더 뜬다. “미미”가 발정을 하자“신랑감”을 찾아주고 결혼을 시키고 요란스레 잔치를 베푼다. 하지만 누군가 한국에 가 있는 남편에게 고자질을 해서 강화자는 오히려 리혼을 당한다는 이야기다.     혹시 내 생일을 차리는 게 아닌가? 하고 기다리는 성녀할머니의 시점으로 사건을 관찰함으로써 소설적 긴장과 아이러니를 보장했고 “미미”의 생일과 결혼이라는 두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대조시켜 극화함으로써 읽는이들의 폭소를 자아낸다. 이러한 희극은 사람과 개의 위치가 전도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김훈은 극문학과 소설 창작에서 모두 장기를 보인 작가인데 그의 단편《또 하나의 나》는 현시대 중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실업인구의 증대와 그로 말미암은 인간의 고뇌와 사회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것만큼 우리는 우선 김훈의 작가적사명감과 치열한 현실참여의식을 긍정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성공할수 있는 비결은 인물창조를 주되는 과업으로 하고있는 소설로서, 주인공 “나”의 형상을 잘 그린데 있다. 주인공 “나”는 비정하고 허황한 현실속에 “여분의 존재”로 주어진 외롭고 고독한 실업자이다. “나”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좌”적인 정치로선으로 말미암아 “동년시절 영양실조에 걸린 구루병환자, 소년시절에 반란에 무조건 도리가 있다던 홍위병, 청년시절 광활한 천지에서 지구를 다스리던 지식청년, 중년시절 부모처자를 가진 정리해고자”이다. 그는 마치도 어항(魚缸)에 갇힌 풀개구리나 자라와 같이 불확실한 현실속에서 하나의 노리개처럼 가난에 찌들고 그 어떤 우상에 의해 희롱당하기도 하고 그 어떤 정체 모를 권력에 의해 조롱을 당하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유일한 생존수단인 직업마저 떼이고만다. “광명천지”에 그가 설 자리는 아무데도 없고  마누라에게서도 남편대접을 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처럼 세상은 황당하고 인생은 괴롭지만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고 자유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에 새로운 본질을 부여할 때 인간은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 주인공 “나”는 마침내 실의와 비애, 자기기만과 자포자기의 깊은 늪에서 솟아 나와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갈 의지와 결단을 되찾는다. 이처럼 작품은 억눌리고 소외당한 민초들의 설음과 한을 대변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초들의 소중한 자아각성의 과정을 실감이 나게 그리고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나는 언제나 기분 나쁜 련상만 주는 자라를 돌멩이 내던지듯 늪속에 던져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나’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무덤에서 나오는 기분이였습니다…”8)     작품은 실의와 고독에 빠진 “나”와 풀개구리, 자라와 같은 상징물과의 대응속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의 심리와 정서를 해학적으로 묘사하는데 성공했고 일인칭소설의 장점을 살려, 바꾸어 말하면 소외된 인간의 시점을 통해 상류층의 비정과 비리― 사회의 치부(恥部)를 신랄하게 폭로하고 “나”의 심리변화과정을 깊이 있게 파헤칠수 있었다. 또한 극작가로서의 체질적인 입심, 재치 있는 에피소드의 장면화, 그리고 참신한 주제를 상징물과의 대응을 통해 느긋한 해학과 유머 속에 녹여내는 능력도 범상(凡常)이 아니다.     3. 녀성적자각과 비도덕적이고 무능한 가부장제도에 대한 도전     리선희의《그녀의 세계》와 같은 페미니즘소설이 1980년대에도 나왔지만 1990년대 이후 권선자, 리혜선, 허련순, 조성희 등 녀성작가들이 남성작가들에 비해 강세를 보였고 페미니즘소설의 창작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열어놓았다. 특히 전환기에 와서 권선자의《엄마의 저수지》, 리혜선의 《터지는 꽃보라》, 허련순의《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등은 녀성의 자각과 함께 부권제에 도전하고 남성의 무능함과 도덕적 타락에 반기를 든 충격적인 작품이 아닐수 없다.     권선자의 단편《엄마의 저수지》9)의 주인공 금혜는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는 행복한 주부이다. 시골출신이지만 병원 원장의 후실로 들어가 그야말로 호강을 하면서 살고있다. 하지만 출근하는 남편의 양복잔등에 “길다랗게 누워있는 굽실굽실한 황금빛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며 점차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 다만 녀성이라는 리유로 남편에게 씨받이로 리용된 자신, 친정집 동생들에게도 일방적으로 베풀어야만 하는 자신, 지어는 자식들에게까지 모성은 한낱 대가없는 희생물로 되고 마는 구슬픈 사실을 발견한다. 저수지의 물도 차면 언제를 넘어 흐르듯이 여기서 금혜의 일탈은 시작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녀성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남성중심의 사회가 지니고있는 비도덕성과 허위성, 즉 현대적 삶의 불모성을 고발하고 있다. 최근 몇 십년간 쓰러지는 가정과 조선족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아무런 감정적, 경제적 보상도 받지 못하고 짐승처럼 혹사당하기만 했던 녀성들을 생각할 때 금혜의 형상은 전형성을 띤다고 해야 하겠다.     리혜선 역시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인데 그의 중편소설《터지는 꽃보라》10)는 특이한 소재와 인물, 다양한 소설적 기법과 장치를 통해 독자들을 매료하고있다. 작중인물들은 모두 진짜 이름을 쓰지 않고 닉명이나 별명으로 통한다. 오늘의 대중사회에서 개개인은 닉명으로, 기호나 수자로 존재함은 더 말할것 없다. 우리는 가끔은 현금인출기에서 비밀번호를 넣고 돈이 나올 때마다 닉명으로 통하는 자신의 실체를 실감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경우에도 작중인물들은 “오징어파티”에 “고구마”, “별난 녀자”, “안니”, “제이”로 통한다. 이러한 닉명의 조건에서 이들은 자기의 욕구를 거침없이 분출한다. 천사가 악마로 변한다. 모든 탈을 벗어던지고 추한 몰골을 드러낸다. 황차 “3.8”절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닉명의 네 중년녀인들이 쏟아내는 성적 기갈과 음담패설은 읽는이들을 포복절도케 한다. 기실 그들은 가정을 위해 한국에서 10년씩이나 허둥대면서 일했지만 일단 귀국하자 자식과 남편, 사회에 의해 소외되고마는 이방인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눈물 어린 미소를 짓게 된다. 우리 사회의 진통과 해체, 그리고 소외의 주제를 닉명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미있게 풀이했다고 본다.     이 시기 대표적인 페미니즘소설로는 허련순의 단편《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를 들수 있다. 허련순 문학의 전반 흐름은 민족적정체성의 문제와 녀성문제로 나누어볼수 있다. 그는, 자신은 이민의 력사를 가진 민족의 일원으로, 게다가 녀성으로 태여났다는것을 강조한다. 그는 문학의 근원은 결핍이며 그 자신의 문학 근원 역시 소수자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결핍 너머의 충만감이나 슬픔뒤에 숨어있는 희열을 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바로 글을 쓰는 동력이 된다는것이다. 하기에 그의 문학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정체성 찾기와 녀성의 정체성 찾기로 이어진다.   허련순의 단편《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는 녀성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소설로서, 2004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허련순은 “언어탐구와 녀성성의 창조, 그리고 존재론적 추구 등에서 새로운 나의 문학의 지혜를 모색하고 싶다”고 하면서 이 작품의 창작동기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바 있다.     “단편소설 ‘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는 나의 또 다른 탈출구가 되기를 바라면서 쓴 작품이다. 우리 조선족들의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환기하고싶었다. 타성에 빠져 반성을 모르는채 일상을 살고있는 인간들, 던져주거나 받아먹고 사는데 익숙한 ‘하수구’ 같은 인생,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혼탁한 현실에 진정한 삶의 방식과 의미를 제시하고싶었다. ‘실패한 인생을 성공’이라고 말하고 ‘죽은 령혼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역설과 혼동의 론리로 이미 사회로부터 유리되여 더 이상 정상적인 꿈꾸기가 불가능한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어나는 착시(錯視) 현상, 그런 현상으로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것을 다루고있다. 즉 자의(自意)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살아지는, 살아지는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인생을 비참하게 그리고 있다.”11)    《하수구에 돌을 던져라》는 목전 조선족사회의 극심한 진통과 위기를 보여주면서 물신주의풍조와 윤리, 도덕적인 타락상을 정신적배경으로 깔고있다. 주인공이 살고있는 동네의 남성들을 보면 땅 판 돈을 쥐 소금 녹이듯이 다 써버린다. 그들은 겨울이면 마작이나 화투를 치고 여름이면 베짱이처럼 그늘 밑에서 신세타령이나 한다. 딸이나 안해가 외국에 가 돈을 벌지 못하는 집 남성들은 작은 놀음에도 끼우지 못해 그야말로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 시어머니는 가만히 앉아만 있는 며느리를 보고 능력이 없고 융통성이 없는 년이라고 몰아붙인다. 시어머니의 성화에 며느리는 한국 가는 비자를 내려다가 돈만 날린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또 공연히 설쳐서 땅 판 돈을 날렸다고 구시렁거린다.    주인공의 남편은 조선족남성사회의 고루한 의식을 대변한다. 그는 안해가 돈을 벌어오기를 바라서 가짜 리혼을 했고 리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야 재혼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위장결혼수속을 다그치기 위해 자신의 사망신고서까지 낸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은 “그녀”가 돈을 부쳐오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이제 큰소리하면서 살게 됐소.” 하고 좋아한다. 금전만능의 풍조, 특히 남성사회의 윤리, 도덕적인 타락상을 적라라하게 드러낸것이다.    이러한 남성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상에 진절머리를 치던 녀주인공은 마침내 남성중심의 사회에 도전장을 내고 여성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녀”는 가정을 살리기 위해 출국수속을 하다가 실패한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핀잔과 야유를 이기지 못해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나 성사하지 못한다. “그녀”는 마침내 남편의 허락을 받고 위장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가게 된다. 그제야 남편은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처절함과 배신감, 그리고 질투와 분노까지 겹쳐서” 노발대발한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히 립스틱을 꺼내서 입술에 바른다. 남편이 “그녀”의 손에서 립스틱을 뺏더니 “거지같은 놈한테 잘 보일 필요는 없다니깐.”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때 “그녀”는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쏘아붙이면서 당당하게 맞선다. 이처럼 이 소설은 갖는 릉욕과 희생을 당하면서도 가정과 사회를 지켜온 “그녀”의 성장과 여성적인 자각 과정을 그림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소설은 시종 시비경우는 바르나 말수 적은 “누님”의 시점을 통해 작중 인물을 관찰하고 “그녀”의 내심독백을 차분하고 절제 있게 펼쳐보임으로써 자칫하면 남성세계에 대한 속 얕은 흥분과 비난으로 끝날수 있는 소재를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소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집 떠난 고양이라는 소도구를 적절하게 등장시켜 상징적의미를 더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위고 작은 맨발”을 여섯 번 반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복선과 조응, 상징의 미학도 창출해 전반 작품을 탄탄하게 구성하고있다.     “마치 열 살에 성장을 멈춘듯한 작은 발, 그것은 아마 바로 지금부터 커지려고 작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야 나는 그녀의 작은 발에 대한 징크스를 알것 같았다.”12)     이 한 단락의 의론은 작품의 총체적인 의미를 암시,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발은 한 인간의 육체를 땅에 세우며 그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 가게 하는 인체의 중요한 기관이다. 그러므로 작게 보이던 발이 크게 보인다고 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그녀”가 자유선택을 통해 남성세계에 도전하고 자기의 길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농촌사회와 전통적가치관의 붕괴로 특징지어지는 조선족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 남존녀비의 고루한 관습에 의해 소외되고 위축되던 한 녀성의 분노와 반발, 도전과 탈바꿈의 과정을 다양한 소설적 장치와 기법을 통해 생동하게 그림으로써 전환기 조선족문학의 대표적인 페미니즘소설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다.       김경화의 단편《원점》13)은 그 제목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우리 생활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과장과 분식(粉饰)도 없이 원점에서 원색으로 보여준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경제적 불황으로 말미암아 남성은 가정을 유지할 힘을 상실하고 녀성은 타락의 늪에 빠지기 쉬운데, 이 작품의 주인공 “언니” 역시 염치와 정조 같은 것은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다. 그녀는 설사 못난이요, 불구자라 하더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등 따뜻하게 입혀주기만 하면 그런 남자들의 품에 안겨 기생(寄生)하는 몰염치한 녀자다. 하지만  그러한 녀자의 타락을 부른 것은 지지리 못난 가난이요, 그 장본인은 라태하고 무책임한 남성사회에 있음을 이 작품은 은근히 꼬집고있다. “언니” 의 남편은 가출해 오랫동안 객지로 떠돌고있는 안해를 찾을 대신 \"빨리 돈이나 부치라고 해라. 쌀이 거의 다 떨어진다.\" 하고 소리를 치는데 이러한 루추한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김동인의 소설《감자》를 련상케 한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니”는 “가출이 아니라 어느 풀숲으로 잠간 소피를 보러 갔다”고 하면서 “그래, 그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언니는 잠시 오줌이 마려웠을 뿐이야…” 하고 능청을 떨고 있는데 이러한 아이러니는 작중인물의 도덕적타락에 대한 신랄한 야유가 아닐수 없다.      김금희의 단편《개불》14)은 “개불”을 소도구로 설정해가지고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는 몰염치한 녀인의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우리 사회 정조관념의 붕괴와 도덕적타락상을 보여주고있다. “개불”은 바다에 사는 개불과의 환형동물(環形動物)인데 몸길이는 10-30cm이고 주둥이는 원뿔꼴이며 황갈색을 띤다. 바다 밑의 모래속에 “U” 모양의 구멍을 파고 산다. 이 작품에서는 “개불”을 두고 “사람의 피부 같은 색깔에다 원통형의 몸통마저 차라리 남자의 그것과 너무 닮아있는데 게다가 그것을 만지면 꿈틀하니 수축이 되면서 제법 탄탄해진다”고 했다. 통설에 의하면 “개불”은 남성의 정기를 돕는다고 한다. 헌데 주인공 “녀자”는 “개불”을 천하일미로 생각하고있고 “개불”을 사주는 남자이면 마음도 몸도 다 허락한다.    “개불 굶은 지 벌써 다섯 달이 넘어간다.”고 했는데 이는 이 “녀자”가 얼마나 남성을 밝히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실은 남편과 좀 모순이 생겼고 그 남편이 두어 달 집을 비운 사이에 욕정을 참지 못해 “개불”을 사준 다른 남성과 통정을 했을 뿐이다. 남편이 돌아오자 이 “녀성”은 원상으로 돌아와 얌전한 아낙으로 둔갑하고 그녀의 가정에도 평화와 행복이 깃든다. 이처럼 이 소설은 “개불”이라는 소도구를 리용해 우리 사회의 편의주의(便宜主義)적인 발상과 도덕적 타락상을 고발하고있다.    박옥남의 단편소설《목욕탕에 온 녀자들》는 “공간화의 기법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을 동원하고 자기식의 개성적이고 특색 있고 신선한 언어표현의 개발과 세련된 기법의 활용을 통해 오늘날 중국조선족 녀성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려내면서 중국조선족의 인정세태를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녀자들이 실 한 오리 걸치지 않고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다 드러낸 목욕탕의 녀탕이라는 이 공간설정부터가 소설로서는 더 이상 바랄수가 없는 호기심을 돋구어준다. 그러나 이 소설의 목적은 남성독자들의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유발하려는데 있은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부동한 세대의 각양각색의 조선족녀인들의 육체적인 라상(裸像)만이 아닌 심적인 나상도 드러내 보이는데 있었다. 특히 늙은 어머니 세대와 젊은 녀성들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서 변화된 인정세태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있는 점이 돋보인다.”15)         4. 디아스포라의 삶과 민족적 정체성의 갈등에 대한 형상화     해방 후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졌고 중국공민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리행했으니 해방 전과 사정이 많이 다르다고 하겠으나 디아스포라의 아픈 기억은 여전히 집단무의식으로 작용하고있다. 그리고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의 조선족집거구는 여전히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의 주류문화 사이에 있는 경계적인 지역이요, 여기에 살고있는 작가들은 어차피 디아스포라의 성격을 다분히 갖고있다고 해야 하겠다. 황차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한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나라로의 이동 및 산해관 이남 대도시로의 이주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양산하고있다.    조선족 작가의 경우, 연변을 비롯한 동북의 조선족작가들은 중국과 조선, 한국 사이를 자유롭게 나들고있고 지어는 류순호처럼 미국에, 장혜영처럼 한국에, 김문학처럼 일본에 장기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리원길, 황유복, 오상순, 서영빈, 장춘식, 김재국처럼 조선족집거구를 떠나 중국의 수도요, 다양한 문화의 합수목인 북경에 “걸출한 변두리”를 조성해가지고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하고있다. 이들 모두의 움직임을 통틀어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것이다.     물론 조선족작가들은 이주초기부터 심각한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마음 놓고 표현할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지 못했다. 한 때 조선(한국)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애착, 조선(한국)과 중국 문화 사이에서의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의혹과 불신을 초래했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자유로운 문학의 시대를 맞아, 다원공존과 다원공생의 세계사적 물결을 타고 디아스포라의 삶과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그러한 갈등을 극복, 승화시켜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있다.     김재국의 장편수기《한국은 없다》는 작가의 진실한 체험과 아픔을 통하여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처음으로 한중 언론매체에 전면으로 부각시킨 작품이라면 허련순의 장편소설《바람꽃》이나 조성희의 단편소설《동년》은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효시(嚆矢)적인 소설이라고 본다. 이 두 작품 사이에 조성희의 《동년》, 박옥남의《마이허》,《내 이름은 개똥네》,《장손》, 정호원의《쪽빛》등 수작들이 발표되였다.     박옥남의 단편《내 이름은 개똥네》16)는 지나간 중국의 사회현실과의 대비속에서 주로 한국에 나가있는 이른바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의 애환과 고뇌를 다루고있다.     소설《내 이름은 개똥네》는 역설적인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스스로 자기 이름을 “개똥네”라고 했으니 지극히 모순되는 진술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때문이다. 이 작품은 작자가 한국에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하러 갔다가 한국체류중인 남편과 동창생들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다루고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간의 일을 쓰고있는데 비행기가 두 날개로 하늘을 날듯이 한국방문시의 견문을 서사적 시간으로 젊은시절의 이야기를 편년사적시간으로 교차시키면서 의식류수법으로 두 갈래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 플롯을 짜고있다. 전반 이야기의 관찰자, 서술자는 “나”인데 처음 외국나들이를 하는지라 절에 온 색시처럼 어딘가 촌스럽지만 야무지고 사색적인 녀성이다. 그는 비행기안에서 만난 통배추모양의 머리 스타일을 한 한국인 사내와의 문화적마찰을 경험하기도 하고 인천공항에서 통관수속을 밟을 때 서양인들과 한 줄에 서야 하는 서글픔을 느끼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은 한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불청객”임을 절감한다. 특히 그녀는 3년만에 만난 남편의 초췌한 몰골과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놀란다. 불법체류자로 숨어사는 남편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경찰을 보고 초풍하듯 놀라 벌벌 떤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꿉시절의 친구들인 철수, 연순, 을숙, 금자, 병달, 갑부, 동녀, 광식, 춘화, 진아와 만나는데 그네들은 조상의 나라 한국에 갔지만 하나같이 고된 일에 부대끼고 하나같이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동녀는 한국에 온지 10년째인데 한족들의 입국비자가 잘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호구를 한족으로 고쳐서 온 까닭에 조선족동포에게는 자진신고에 의한 재입국제도가 도입되였지만 그 혜택을 받을수 없는 몸이여서 중국에 돌아갈수가 없다. 영순이는 치매에 걸리 노인을 보살피는 보모노릇을 하면서 갖은 괄시와 수모를 다 받고있고 불고기집에서 불판을 닦고 숯불관리를 하는 병달이는 “싸가지 없는 놈들, 너희들 중국에선 이것도 못 봤지? 저것도 첨 보지? 그러면서 시까스르는데 생각 같으면 불구덕을 들어 그놈의 대갈통에 확 들씌워놓고싶을 때가 하루에도 열두번 생긴다”고 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중국에서도 살길이 없고 한국에서도 설자리가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다.     여기서 “개똥네”는 계동녀의 별명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개똥네” 그것은 의지가지없는 조선족의 대명사이며 소외된 이방인의 별칭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개똥네”라는 메타포를 동원해 “나(또는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고있으며 우리 조선족형제들의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있다.     강호원의 단편《쪽빛》17)은 한국의 어느 한 외딴 섬에 있는 공장에서 벌어진 중국동포 정호와 한국인 우반장(禹班長)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평등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중국동포와 가부장적인 수직논리에 젖은 한국인 사이에는 자연 갈등과 충돌이 생긴다. 중국동포 정호는 육중한 철판들이 부딪치고 쇠를 갈아내는 소음으로 진동하는 로동현장, 고된 로동과 변덕스러운 기후 때문에 육신은 무너질것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한국인 우반장의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훈계와 욕설을 받아야만 한다. 우반장은 입만 열면 “씨팔, 씨팔”하고 10살 손우인 정호에게 거리낌 없이 반말을 쓴다. 하지만 우반장에게서 “병신”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호는 천둥같이 노해서 쇠파이프를 들고 길길이 뛴다. 결국 정호는 사장에게 들통이 나서 해고를 당한다. 그제야 우반장이 공장을 떠나는 정호를 붙잡고 “나는 집에 로모도 없구 툭 털면 먼지라카지만두 형님은 연변에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두고 온 묌이 아닌겨?” 하고 한사코 붙잡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적절한 배경을 통해 분위기를 잡고 치렬한 갈등과 충돌을 통해 극적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나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화해를 가능케 한것은 물론 두 밑바닥인생의 가슴속에 고여 있는 따뜻한 인간애와 민족적동질성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쪽빛”인데 그것은 바다나 하늘의 색갈인 동시에 핏줄의 색깔이며 격렬한 파란(波蘭)과 충격(衝擊) 뒤에 오는 평온과 순수의 빛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치밀하게 계산한 상징을 내적 장치로 깔고있다고 하겠다.     박옥남의 단편소설《장손》을 보자. 장손은 가문의 대통을 잇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막중한 책임을 안고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족학교에 다녔고 조선음식보다 한족음식을 좋아하며 신수는 멀쩡하지만 일하기는 싫어한다. 계집을 좋아하고 여러 번 장가를 들다가 나중에는 중국녀인의 품에서 죽어간다. 하지만 여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문상객들도 장밤 마작만 놀아댄다. “장손”의 엽총은 큰처남이 가져갔고 목이 긴 구두는 둘째처남이 가져가는데 오토바이의 “주권”을 두고 막내처남과 “형수”가 옥신각신 싸운다. 청승맞은 새납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개처럼 죽어가고 뜯겨가는 장손의 모습,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퇴색한 사진액자 하나가 허접쓰레기 같은 옷가지에 휘말려 나딩굴고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주어들고 보니 설날아침이면 차례상에 모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였다. 유물을 정리한답시며 여기저기 마구 뒤지는 통에 한데 끼여 나온게 분명했다. 솜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와 앞가리마를 곧게 내여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붙인 한 할머니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있었다. 어렸을 땐 차례제를 지내면서도 무섭다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진이였다. 그러다 후에 철이 들면서 차차 익숙해져 다시 정을 가지고 대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일한 사진이였는데 이렇게 이곳에 흘려져있을줄이야.18)     조상의 영정(影幀)마저 챙기지 못하고 개처럼 죽어가는 모습인데, 이를 소설적인 허구로만 볼수 있을가? 피땀으로 일군 땅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 현실, 우리의 말과 글, 민족교육의 터전마저 지키지 못하는 현실, “장손”은 결코 허구적인 인물만은 아닐것이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사촌동생”의 시점으로 모든 인물과 사건을 관찰, 묘사, 서술하면서 절제된 평가와 의론을 통해 랭철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있다. 그리고 갈피갈피에 펼쳐지는 조선족과 한족 문화에 대한 대비적인 서술에도 작가 특유의 혜안과 재치가 엿보인다.      조성희의 《동년》19)은 몽환적사실주의 특징을 가진 수작이다. 아랫마을에는 조선족이, 웃마을에는 한족이 살고 있는데 아랫마을 조선족총각은 웃마을 한족처녀를 사모하면서 도둑련애를 한다. 한 편 웃마을 검정수캐는 아랫마을의 흰 암캐를 찾아와 짝짓기를 한다. 조선족총각은 그를 시샘하고 질투하는 한족 젊은이들에게 들통이 나서 늘씬하게 맞아 쓰러지고, 야밤중에 윗마을의 검정 수캐는 아랫마을 수캐들에게 물리고 뜯겨 죽어버린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아랫마을에서 희한한 일이 생긴다. 아랫마을의 흰 암캐가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얼룩 강아지들이란 이야기다. 두 민족 사이의 반목과 문화적인 마찰 및 그 숙명적인 공존과 융합의 생리를 인간세계와 동물세계와의 대조를 통해 그려낸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5. 맺는 말     전환기 조선족소설문학의 주제적 경향을 대표적인 중,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로, 이 시기 소설은 권력층의 부패와 빈부의 격차 및 이로 말미암은 서민계층의 소외라는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성격과 갈등을 통해 조선족공동체의 피폐상, 서민계층의 애환을 다루고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사회의 문제점들도 가차 없이 비판하고있다. 여기서 김훈의《또 하나의 나》에서 볼수 있지만 개인과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실존주의 철학에 기대고있다.     둘째로, 허련순, 리혜선, 박옥남 등 녀성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이들의 페미니즘소설은 개혁개방 후 고루한 남성사회의 희생양으로 되여왔던 녀성사회의 자각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양한 녀성형상을 창조함으로써 부권제에 도전하고 예성의 인간적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녀성세계 자체에 대한 성찰과 비판도 시도함으로써 여성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고 보다 성숙된 경지를 지향하고있다.       셋째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자각하고 민족적정체성의 갈등을 혼종성, 양가성의 원리, 말하자면 문화상대주의나 다원공존의 론리로 극복하고자 한 작품들이 돋보인다. 특히 허련순은 1996년 장편《바람꽃》20)에서 2003년 장편《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21)에 이르기까지 조선족의 정체성문제를 끈질기게 추구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하지만 장편소설에 대한 토론은 이후의 과제로 남긴다.                                        - 2009년 6월 24일 
5    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 (김호웅) 댓글:  조회:3359  추천:73  2010-05-11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4. 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석화의 시「연변 ․ 12 ― 아침에 부르는 처용가」는 신라시대의「처용가(處容歌)」를 재치 있게 패러디하고 있다.   아침 일어나보니/ 머리카락 서너 오리 베개 위에 떨어져 있다/ 이젠 내 두피와 영영 작별한 저것들을/ 지금도 내것이라고 우길수 있을가/ 지난겨울 둘러보았던/ 충남 부여의 고란사와 낙화암과 백마강이 떠오르고/ 삼천궁녀 꽃같은 치맛자락이 베개 위에 얼른거린다/ 백제는 이미 망해 간 곳이 없고/ 그를 이긴 신라도 사라졌으니/ 고구려의 높고 낮은 무덤들조차/ 북국의 차디찬 적설에 묻혀있을 뿐이다/ 어제까지 내 머리에 붙어있던 저것들/ 지난 밤 어수선하던 꿈의 조각들처럼/ 떨어져가고 흩어져가고 지워져가고/ 그리고 이제는 모두 잊혀져 갈것인가/ “원래는 내 해인데/ 앗아가니 어찌 하리요."/ 체조하는 달밤도 아닌데/ 「처용가」한 가락이 저절로 흥얼거려 진다//  이 시를 두고 “인생무상”의 시적주제를 표현했다고 볼수도 있겠으나,『연변』련작시의 총적주제와의 내적인 련관성을 념두에 두고 시 전체를 차분히 읽어나가면 시인 자신의 무상한 인생에 대한 달관의 태도와 함께 많은것을 잃고있는 조선족공동체의 현실적위기와 시인의 우환의식을 보여준다고 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백제, 신라는 더 말할것 없고 고구려의 높고 낮은 무덤들조차 북국의 차디찬 적설에 묻혀있다고 했다. 또 어디 그뿐인가. “어제까지 내 머리에 붙어 있던 저 것들/ 지난 밤 어수선하던 꿈의 조각들처럼/ 떨어져가고 흩어져가고 지워져가고/ 그리고 이제는 모두 잊혀져 갈것인가” 라고 개탄을 했으니 “시인의 머리카락 서너 오리”는 하나의 보조관념으로서 그것은 우리 겨레의 력사요, 영광이며 우리 겨레의 피붙이요, 가장 소중한 민족적 정체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소실되었고 우리 기억에서조차도 지워지고 있다고 했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앞에서 오히려 해학과 익살을 부려 체념을 하고있는것 같지만, 분명 우리 모두에게 깊은 사색을 던져주고있다.   석화 시인이 절묘한 용전(用典) 또는 패러디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의 분열과 조선족공동체의 붕괴위기를 꼬집고있다면, 박옥남은 생동하는 성격창조를 통해 민족적정체성 상실의 비극을 다룬다. 장손은 가문의 대통을 잇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막중한 책임을 안고있다. 하지만 단편소설「장손」의 주인공은 한족학교에 다녔고 조선음식보다 한족음식을 좋아하며 신수는 멀쩡하지만 일하기는 싫어한다. 계집을 좋아하고 여러 번 장가를 들다가 나중에는 중국여인의 품에서 죽어간다. 그런데 여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문상객들도 장밤 마작만 놀아댄다. “장손”의 렵총은 큰처남이 가져갔고 목이 긴 구두는 둘째처남이 가져가는데 오토바이의 “주권”을 두고 막내처남과 “형수”가 옥신각신 다툰다. 청승맞은 새납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개처럼 죽어가고 뜯겨가는 장손의 모습,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퇴색한 사진액자 하나가 허접쓰레기 같은 옷가지에 휘말려 나뒹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주어들고 보니 설날아침이면 차례상에 모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었다. 유물을 정리한답시며 여기저기 마구 뒤지는 통에 한데 끼여 나온 게 분명했다. 솜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와 앞가리마를  곧게 내여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붙인 한 할머니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렸을 땐 차례제를 지내면서도 무섭다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진이었다. 그러다 후에 철이 들면서 차차 익숙해져 다시 정을 가지고 대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일한 사진이었는데 이렇게 이곳에 흘려져 있을 줄이야.   조상의 영정(影幀)마저 챙기지 못하고 개처럼 죽어가는 모습인데, 이를 소설적인 허구로만 볼 수 있을까? 피땀으로 일군 땅을 지키지 못하는 조선족공동체의 현실, 우리의 말과 글, 민족교육의 터전마저 지키지 못하는 현실, “장손”은 결코 허구적인 인물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사촌동생”의 시점으로 모든 인물과 사건을 관찰, 묘사, 서술하면서 절제된 평가와 의론을 통해 냉철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갈피갈피에 펼쳐지는 조선족과 한족 문화에 대한 대비적 서술에도 작가 특유의 혜안과 재치가 엿보인다.    5. 맺는 말    다문화주의사회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이다. “다름”을 리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평등”을 리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조선족을 연변의 사과배에 곧잘 비유다. 연변의 사과배가 연변의 돌배나무 유전인자와 북청 배나무 유전인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듯이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정체성과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이 하나로 결합된 이중적인 정체성 또는 이중적 문화신분을 갖고있는 특수한 민족공동체이다. 이제 조선족은 더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며 아무런 경계 없이 날아다니는 박쥐도 아니다. 조선족이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곳은 중국이다. 석화 시인이「연변 ․ 7 ―사과배」라는 시에서 노래한바와 같이 조선족이라는 이 사과배나무, “우리만의 『식물도감』에/ 우리만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 "연변사과배/ 사과만이 아닌/ 배만이 아닌/ 달콤하고 시원한 새 이름으로/ 한 알의 과일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문화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은 1 : 1의 관계는 아니다. 모든 나무의 생명력은 땅속에 뻗어있는 그 나무의 뿌리에 있다. 또 나무가 말라 죽고 있는 까닭은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말라 죽어가고있기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은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고이 간직하고 자기의 말과 글을 지키며 중국의 주류민족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자립할수 있는 민족으로 거듭나야 할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잃고 주류민족에게 동화되여 버린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줄로 안다. 다문화주의 담론에 있어서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2009년 3월 25일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글싣는 순서  1. 들어가는 말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3.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5.맺는말
4    3. 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 (김호웅) 댓글:  조회:4012  추천:57  2010-05-08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3. 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디아스포라는 지역적공간이나 정신적공간에 있어서 아주 미묘한 “중간상태(median state, 中間狀態)”에 처해 있고 “경계의 공간(liminal, 閾限)”을 차지하고 있어 보다 넓은 영역을 넘나들수 있으며 그들의 작품세계는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서 양가성 내지 혼종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디아스포라문학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표현하게 되며 두 문화형태의 혼종성 또는 공존상태로 나타난다. 여기서 두 민족의 어색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공존 상황을 석화의 시「연변 2, 기적소리와 바람」에서도 볼 수 있다.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 한족말로 우(嗚) ―/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퍼~엉(風) 불고/ 조선족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새끼들조차/ 중국노래 한국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귀신 한족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월의 거리에 넘쳐나는/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이 시는 상이한 것들이 갈등이 없이 공존하는 다문화적인 혼종성,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과 한족이 연변땅에서 공존, 공생해야 하는 숙명 내지 필연성을 유머러스하게 이미지화한다. 제1연에서는 기차와 바람을 의인화하면서 우(嗚)―”와 “붕 ―”,  “퍼~엉(風)”과 “바람”과의 대조를 통해 조선족과 한족의 언어적인 상이성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제2절에서는 미물인 새들도, 납골당의 귀신들도 서로 상대방의 소리와 언어에 구애를 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두 문화형태 간의 대화와 친화적인 관계를 하늘을 날며 즐겁게 우짖는 새와 납골당에서 구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귀신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유머러스하게 표현함으로써 몽환적인 색채를 십분 살리고 있다. 제3연은 이 시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내적 구조에서 보면 “전(轉)”과 “결(結)”에 속하는 부분인데 연변의 풍물시라고 할 수 있는 “6.1” 아동절의 모습을 색채적 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논리로 자연스럽게 매듭짓고 있다.   박옥남 역시 조선족과 한족의 잡거지역, 즉 두 문화의 경계지대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소설「마이허」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2006년 한국 재외동포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마이(蚂蚁)”이란 중국어로 개미라는 뜻이고 “허(河)”란 강이라는 뜻인데 이 개미허리처럼 짤록짤록한 강줄기를 사이 두고 상수리촌이라는 한족마을과 물남마을이라는 조선족마을이 이웃해 살고 있다. 작품은 두 마을의 색다른 풍속과 습관을 비교하면서 배경을 제시한다.   민족이 다르면 언어도 다른 법이다. 그러나 말을 시켜보지 않아도 마이허가에 나와 빨래질을 하는 모습 하나만 보고도 어느 녀인이 상수리의 여인이고 어느 여인이 물남마을 녀인인줄 대뜸 알아맞힐수 있다. 먼저 빨래하러 나서는 모습부터가 다르다. 상수리의 여인들은 큰 대야에 빨랫감을 넘치게 담아 옆구리에 끼고 나오지만 물남의 녀인들은 빨랫감을 담은 대야를 똬리까지 받쳐서 머리 위에 이고 나온다. ……   한 편의 감칠맛 나는 비교문화론적인 에세이다. 좀 더 보자. 상수리촌 녀인들이 남편을 개떡 같이 여기는 습관이 있다면 물남마을 남성들은 오히려 안해를 패서 문밖으로 쫓아낸다. 상수리촌 남자들은 열에 아홉은 부엌일에 능숙하지만 물남마을 남자들은 종래로 부엌간에 들어가는 법이 없이 안해가 밥상을 챙기기를 기다린다. 상수리촌 사람들은 집짓기 전에 토담부터 쌓아올리지만 물남마을 사람들은 뜰 주위를 막는 법이 없이 이웃과 통마당을 쓴다. 상수리촌 사람들은 임자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남의 인분(人糞)이래도 자기 집 마당으로 끌어들이지만 물남마을 사람들은 도적질을 수치로 생각한다.   이처럼 풍속도, 습관도 완판 다른 한족마을과 조선족마을 사이에 청춘남녀의 사랑이 싹트나 그것은 애정의 비극으로 끝난다. 물남마을의 처녀 신옥이는 쑥색군복을 입은 퇴역군인에게 시집을 가는게 소원인데 그녀가 짝사랑을 했던 퇴역군인 총각은 방정맞게 임자가 있는지라 꿩 대신 닭이라고 상수리촌 두부방 쑨령감네 막내아들과 눈이 맞아 돌아간다. 마침내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부모에게까지 들통이 나는데, 신옥이는 아버지에게 늘씬하게 얻어맞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말리면서도 “빌어묵을 지집아가 죽을락꼬 환장이 났노? 무신놈의 망신살이 뻗쳐 해괴하게 되놈이 뭐고, 되놈이. 눈깔이 뒤집힛나? 오늘 니 죽고 내 죽고 그라고 마자고마. 이놈의 지집아야” 하고 아래턱을 달달 떤다. 이튿날 마을회관에서는 마을의 부녀들이 신옥이를 끌어다가 그녀의 “비행에 대해 침을 튕기며 공노했다.” 동네 안에 총각이 없어 하필이면 상수리의 되놈이였더냐, 시집을 못 가 바람이 났더냐, 쑨령감네 두부방에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던데 그게 정말이냐, 처녀자로서 얼굴 깎이는 줄도 모르는 년, 동네 안에 나쁜 물을 들이기 전에 마을 박으로 쫓아내야 한다느니 뭐니, 좌우지간 입 가진 아낙마다 한 마디씩 질매(叱罵)를 했다. …이튿날 신옥이는 마이허 물굽이 쪽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작품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제4장을 보면, 신옥이가 죽어간 이야기는 이제 물남마을 사람들에게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고 그들은 열에 아홉은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 마을은 다 퍼먹은 김칫독이 되었는데, 상수리촌 사람들이 들어와 헐값으로 집을 사들이고 벽돌을 실어다 텃밭 둘레에 담을 쌓기 시작한다. 처녀 구하기가 고양이 뿔 구하기보다 어렵다면서 우는 소리를 하던 와중에 물남마을의 총각 하나가 장가를 간다. 한국 가서 돈을 벌어 부쳐주는 누나 덕분에 용케도 홀아비 신세를 면하게 된 귀식이라는 총각이 상수리촌의 한족처녀를 신부로 맞아들인 것이다.   신옥이의 애정비극을 생각 할 때, 조선족총각이 한족처녀를 데려왔으니 물남마을로 놓고 말하면 어깨가 으쓱할 일이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결혼장면이 보여주듯이 한족들에 의해 조선족마을은 완전히 잠식(蠶食)을 당했고 한족 습속대로 스스럼없이 처신하는 신부에 비해 신랑의 존재는 꾸어온 보리자루처럼 무색하다. 이민족의 물결에 휩싸인 조선족신랑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래에 논의하겠지만, 박옥남의 다른 단편소설「장손」에서 답을 구할수 있을것이다.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글싣는 순서  1. 들어가는 말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3.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5.맺는말
3    1.2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김호웅) 댓글:  조회:2741  추천:58  2010-05-06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김호웅(연변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최근 다문화주의(muticulturalism) 담론이 류행하면서 그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경향이 팽배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담론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류민족 또는 중심문화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에서 비주류민족 또는 주변부문화의 목소리는 외면되고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 시혜(施惠)의 우월감에 젖어있고 후자는 전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동화(同化)의 비애를 맞보고있다. 말하자면 다문화주의담론에서 비주류민족의 정체성과 주변부문화의 존재가치에 대한 옹호와 존중은 망각되고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중국조선족 군체(群體), 이들이 모국의 문화와 중국의 중심문화 사이에서 겪는 이중적갈등과 그들의 민족적정체성 찾기는 다문화주의담론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중국 주류민족과 조선족의 갈등과 화해의 논리에 대해서만 논의해보고자 한다. 즉 조선족작가들 중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작품화해온 시인 석화와 소설가 박옥남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문화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소수자들이 어떠한 고뇌와 갈등, 어떠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고있는가를 검토해 보고 이른바 다문화사회담론의 문제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석화는 최근『연변』이라는 시집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연변”이라는 이름으로 3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기본주제는 조선족공동체의 역사와 현실 및 디아스포라의 존재양상과 진로에 대한 시적 탐구이다. 석화 이전에도 이삼월(李三月, 1033~2009)  등 시인이「접목」(1993)과 같은 시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연변”이란 제목으로 조선족의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련작시의 형태로 집중적으로 다룬 시인은 석화이다. 시「연변 4―연변은 간다」에서는 석화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그건 모르는 사람들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 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우짠지랑 같이 약간 소문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냉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 게 연변이었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동경, 북쪽으로 하바롭쓰키/ 그리고 사이판, 샌프란시스코에 파리 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인들 연변이 없을쏘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여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 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나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헷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요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족은 19세기 중반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주해 정착한 조선인의 후예들로서, 광복 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대체로 동북지역의 농촌에서 촌락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산업화와 도시화 물결과 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고 농토를 버리고 도시에 들어와 품을 팔거나 장사를 했다. 이들의 발길은 동북삼성을 벗어나 산해관(山海關) 이남의 대도시에까지 뻗어나갔고 “88”서울올림픽 후에는 한국, 일본, 러시아까지 뻗어나갔다. 워낙 이민근성이 강한 조선족의 이주는 중국 경내 기타 민족의 추종을 불허한다. 석화의 시에서 이야기하다시피 비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조선족의 이민물결, 이들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어느 구석”에도 연변사람들이 활개를 치며 걸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민열조로 말미암아 100여년간 가꾸어온 조선족마을은 텅텅 비어 있다. 이러한 실정을 조선족 산재지구(散在地區)의 현실을 소재로 가장 리얼하게, 역시 집중적으로 형상화한 작가는 박옥남이다.   박옥남의 단편「둥지」는 우리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진통과 붕괴 과정을 진실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이 작품은 진수라는 소년의 일인칭시점과 어조에 의한 생동한 세부묘사, 속담의 적절한 사용, 아낙네들의 개성적인 대화를 통해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피폐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남편을 한국에 보낸 진수 엄마와 촌장이 바람을 피우다가 들통이 나서 온 마을이 어수선한 가운데 진수네 집이 한족 왕가에게 헐값으로 팔리고 우리민족 어린이들이 뛰놀던 벽동소학교가 한족들에게 팔려 양우리로 변한다. “학교간판이 도끼날에 두 쪽으로 쪼개져 교실 창문 위에 거꾸로 덧박혀있”는 광경은 미상불 조선족농촌공동체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둥지가 부서진다면 알인들 어찌 성햐랴! 주인공 성수는 양우리로 변한 학교를 보면서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문득 저 집에 들어올 양들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있던 집도 없어졌는데 양들은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좋은 벽돌기와집에서 살게 생겼으니 말이다.” ― 이 얼마나 눈물겨운 아이러니와 역설인가. 이처럼 이 작품은 이민풍조에 의해 조선족공동체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현실, 다른 민족에 의해 우리의 생활공간이 잠식을 당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강한 민족적 우환의식을 보여주었다.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글싣는 순서  1. 들어가는 말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3.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5.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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