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도층 인사들의 한국사관련 망언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은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일본인들의 그릇된 역사의식과 역사의식의 결핍에 있다고 하겠지만 의도적인 것도 없지 않다고 본다. 일본인들의 역사의식 결핍과 의도적인 타국사 폄훼는 일부 학자들의 논문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관료들의 妄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妄言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구보다(久保田貫一郞) 망언’ 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일본 지도층 인사들의 망언을 살펴보겠다. 이것은 일본인의 한국사 및 한국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당시 구보다 간이치로 :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푼 점이 있으며, 만약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식민지화하였을 것이다.
◎ 1963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수상 :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다.
◎ 1963년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 :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 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신페이(後藤新平)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 1965년 다카쓰키 신이치(高杉晋一)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 : 36년간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 1965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 :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사로 이 조약(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 : 과거 일본과 조선반도의 합방시대가 길었지만, 그 후 한국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면 긴 합방의 역사에서 지금도 민족의 마음에 심어져 있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김 양식을 가지고 와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일본의 교육제도, 특히 의무교육제도는 지금까지도 지켜가는 훌륭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정말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세아 5개국 순방에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 1979년 사쿠라다 다케지 經團連 회장 :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 36년 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 데 있다. 당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고있다. 깊이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혁명정부의 경제발전은 일본교육의 결과이다. 일본은 한국인의 문맹 퇴치에 기여한 바 크다. 소학교 1학년 때, 한일합방 축하행렬에 붙어서 일장기를 흔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 1982년 마쯔노(松野幸泰) 국토청장관 :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일병합도 한국에서는 일본이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의 당시 국내정세 등도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일본으로서도 정확히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1986년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문부상 : 한일합방은 형식으로나 역사적 사실로나 합의로 성립된 것이다. 한국에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 한일합방이 없었다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한반도에 손을 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닌가.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識者率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다. 물론 례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 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니다.
◎ 1994년 사쿠라이(櫻井信) 환경청장관 : 일본이 침략전쟁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된다. 전쟁결과 아시아 국가들은 독립을 얻었으며 교육이 보급되어 유럽국가가 지배했던 아프리카국가들보다 문자 解得率이 높아졌으며 경제부흥도 이루었다.
◎ 1995년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외무장관 :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한일합병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 1995년의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총무장관 : 다만 한일합병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 도장을 찍은 수상 이완용.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이다. 일본도 나빴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했으니까,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결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1주일 후에 (조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 고등농림학교를 세웠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힌 것이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정비, 산에 나무도 심었다. 그러나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창끼개명.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2001년 노로타 호세(野呂田芳成) 자민당의원 : 우리가 2차 대전에 참전해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을 아시아에서 몰아냈다. 동남아시아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일본 덕분에 독립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 2003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郞) 도쿄도지사 : 우리는 결코 무력으로 침범하지 않았다. 한일합방을 100% 정당화 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들(조선인)의 선조에게 책임이 있다. 식민주의라고 해도 매우 앞선 것이었고 인간적이었다.
◎ 2003년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자민당 정무조사회 회장 :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된 것, 한글문자는 일본인이 가르쳤으며 의무교육제도도 일본인이 했다면서, “옳은 것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 2004년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 문부과학상 : 문부과학상이 돼서 맨 먼저 본 게 역사교과서였다. 최근 이른바 종군위안부나 강제연행 같은 표현이 줄어든 것은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 역사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잘못한 것은 반성해야 하지만 모두 나빴다는 自虐史觀에 입각한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후손들에게 자신의 민족과 역사, 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살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망언을 분석해 보면, 첫째 19세기 말 20세기초에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러시아나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 둘째 일본이 한국을 무력, 불법적으로 강점한 것이 아니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병합했다는 “한국병합 합법론”, 셋째 강점후 식민지 한국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통치 미화론 또는 식민지 시혜론” 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불법 강점한 사실과 민족말살을 감행한 사실을 부정하는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주장하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에 입각한 “조선침략정당화론(朝鮮侵略正當化論)”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에는 “아시아 해방론(解放論)”도 점차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또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公營圈)”이라는 기만적인 슬로건 아래 일으킨 만주침략(滿洲侵略), 중일전쟁(中日戰爭)과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아시아인을 구미제국주의자(歐美帝國主義者)들로부터 구하기 위한 “해방전쟁(解放戰爭)”이었다고 정당화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망언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60년동안 이루어져 왔기에 더 이상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러한 정치인들의 역사의식의 결여에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학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망언이 과거와는 다르게 지금의 일본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망언과 최근의 망언이 우리에게 서로 다른 무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의 서술은 약함 글쓴이 이만열
출처 : 국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