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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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잃어진 사진 댓글:  조회:4120  추천:5  2012-12-06
      잃어진 사진         아깝게 잃어진 사진 두장을 찾고있습니다. 문화혁명 때 책과 사진을 걷어다 공사내 여섯마을에 전람관을 꾸려가면서 돌림투쟁을 하고서는 사진 두장을 돌려주지 않아 잃어졌길래 지금이라도 그것을 찾고자 이 광고를 냅니다.      내가 찾고자하는 첫사진은 1947년겨울, 화남현 영평강전투에서 토비들손에 희생한 동북민주련군 합강성정부 조선독립영 참모장 김해정이하 16명렬사추도식장면을 찍은 8촌짜리 큰 사진입니다. 장소는 벌리(勃利) 광화소학교운동장.  좌측에 당시 조선학교의 커다란 층집건물이 보이는데 그 운동장에 17구의 시체를 담은 관이 줄을 지었고  그 앞에는 커다한 화환이 하나씩 놓였습니다. 수많은 조객이 모여 머리숙이고 믁도를 하는 추도식장면인데 높다란 장대기끝에는 모택동의 필체로 라 쓴 흰 명정이 날리고 외투를 입은 어른분이 허리를 90°되게 꺾고 례를 드리고있는 장면이 찍혀있습니다.      내가 찾고자하는 둘째사진은 조선에서는 력사상 맨 처음으로 촬영한 영화 의 한 장면을 찍은것인데 냇가의 우거진 버들방천에 통나무를 무은 대우에서 한쌍의 청춘남녀가 내건너 저멀리에 시선을 보내고있습니다. 흰옷에 검정조끼를 입고 두건을 친 사나이가 등에다 쪽지게를 지었는데 오른손을 들어 저 멀리 앞쪽을 가리키고있습니다. 그곁에 흰치마저고리를 입고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은,  바구니를 옆에 낀 녀인이 거의 다가붙듯 몸을 가까이하면서 사나이가 가리키는 쪽을  눈여겨보고있는 서정적인 장면입니다.      남주인공인 그 사나이가 바로  씨나리오를 쓰고 연출에 연기까지 한 나운규본신이랍니다.      그것은  크기가 손바닥만큼한 사진입니다.  흘러간 세월이오래되건만도 그때까지도 사진이 별로 퇴색하지를 않아서 인물들의 표정이 똑똑히 알리는데 그 사진은 고향 평남도 순안에서 3.1만세시위대오를  이끈일로 하여 지명수배를 받게되니 하는수없이 제자아홉과 함께 식솔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와 대종교에 입교하고는 신민부의 파견을 받아 북만의 의란일대에서 학교 네개소를 세워가면서 거의 광복이 될때까지 계몽운동을 계속했던 할아버지께서 사망되기 몇달전에 잘건사하라 부탁하면서 남긴 유물이여서 잃어졌으니 더구나 몹시 아깝고 죄스럽습니다.      이 사진들을 찢어버리지 않고 아직도 갖고있는 분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돌려주십시오.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거니와 되려 행운으로 받아들이고 고마와서 후한 례를 드리겠습니다.      선색이 좀 있는데 나운규의 모습이 담겨진 사진은 한국에 나가 경매되였을 수도 있습니다. 가히 그럴수도 있다고 리해되니 그 경위를 솔직히 알려만준다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지를 않고 조사해서 불순했던  진상이  밝혀질경우에는 법적책임을 지울텝니다.      그때가서 나를  너무 인간답지 못하게 무자비하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약속입니다.                                   김송죽  2012. 12. 6. 북경에서.
17    북녘의 용사ㅡ 김정국 댓글:  조회:5762  추천:11  2012-12-02
                북녘의 용사ㅡ 김정국                             험한 절벽에 수목이 우거지고                    광풍폭우 몰아치는데                    거친벌 물가에 전마가 호용하네                           .......                    일떠나 용감히 돌격하자                    왜적을 몰아내고 동북을 찾자                    동이 트면 찬연한 빛 솟아오르리      이것은 동북항일련군이 수빈일대의 소택지구에서 원정을 해야만했었던 극히 어려운 시기 리조린, 우천방, 진뢰가 함께지은 다.    그 나날에 얼마나 많은 항일투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보귀한 자기의 생명을 서슴없이 바쳐 싸웠던가! 그들의 이름가운데는 동북항일련군 제11군 정치부위원이였던 우리 조선족청년 김정국(金正國)의 이름도 들어있다.    김정국(金正國)은 원명이 김상주(金相珠)인데 1912년 3월 조선 함경북도의 례천군 호명면 산합동에서 태여났다. 그는 4살 때 부모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료녕성 관전현의 한 산골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부모들은 중국지주의 소작살이를 하다가 김정국(金正國)이 10살나던 해인 1922년에 다시 그곳을 떠나 북만으로 깊숙이 들어와 지금의 탕원현에 정착했다.    그때는 조선땅에서 3.1봉기가 있은 직후여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동포계몽에 힘쓰는 한편 항일구국투쟁을 활발히 벌리고있었던 것이다.    나어린 김정국(金正國)은 학교를 다니면서 선진적인 선생의 영향하에 항일구국의식이 움트게 되어 반일삐라를 뿌리거나 표어를 붙이는 등의 혁명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던것이다.      1929년, 소학교를 졸업하자 김정국(金正國)은 진보적인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직접 동포계몽에 진력코저 마을에서 교편을 잡았고 18살 어린나이임에도 용약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었다.    1930년도, 9.18사변이 일어나자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으로 인하여 일제는 불과 닷새도안되는 사이에 료녕, 길림 두성을 점령하여버렸다. 하여 지금의 흑룡강성 탕원지구도 그자들의 마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1932년 2월의 어느날, 중공탕원현위에서는 전체당원과 군중을 조직하여 항일구국에 떨쳐나서라는 만주성위의 지시를 관철집행하기위하여 학립진북쪽의 칠호툰(지금의 신화역전)에서 각 구위와 지부서기회의를 열고 항일구국선전과 무장투쟁을 조직할 문제를 연구했다. 그때 나이 20세였던 김정국은 탕원현위에 전근되여 당비서로 사업하고 있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발동하고 각계인사들을 조직하는 등 의 항일구국사업에 적극뛰여들었다.    이해의 여름에 이르러 반일동맹조직들이 여러곳에 세워졌다. 탕원현의 와구, 각금하, 태평천, 와단하와 라북의 압단하. 부금의 안방하. 통화의 통화구 등에는 비교적 튼튼한 항일조직들이 있게되였다.    1932년 쌍십절을 계기로 탕원현위는 반재하(지금의 보안촌)에서 베르단총 1자루, 새우총 1자루, 기관총 1정, 목갑권총 2자루와 토양포 2자루외에 칼과 창으로 유격대를 건립하였다. 대원은 40명. 모두가 끌끌한 조선족과 한족젊은이들이였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족녀성도 3명있었다. 그러나 이 유격돼는 경험부족으로 하여 불시에 달려든 토비들에게 무장을 전부 빼앗겨 심한 좌절을 받은것이다.    하지만 전반 탕원군중의 항일정서는 의연히 높아가고있었기에 반일동맹은 계속 발전하여 인원수가 어느덧 5,000여명에 달했고 항일투쟁에서 골간이 될 당원과 단원만도 1,000여명에 달했건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항일열화를 꺼버리려고 대량의 병력을 탕원에 집결시켜 피비린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간, 특무들의 발광적인 활동과 반역자의 밀고로 하여 현위서기 리녕을 비롯한 20여명의 우수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여 생매장을 당했다. 하여 탕원중심현위는 엄중히 파괴되고 만 것이다.      이때 김정국(金正國)은 자기처럼 겨우 살아남은 당원들과 함께 탕원북산의 량자하에 땅굴 두 개를 파고 한동안 숨어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탕원의 항일투쟁이 극난에 처한 시기였다.    엄동이 지나갔다. 3개월간이나 땅굴에서 숨어지낸 60명당원들은 다시 분연히 떨쳐나섯다. 그들은 학강동쪽 황하강(黃花岡)자위단의 무기를 지혜롭게 빼앗아 자신들을 무장했다.    1934년 김정국(金正國)은 부금현 안방구위서기 리춘만(李春萬) 등 3명의 동지들과 함께 각 촌의 지주들이 대지주 고대관에게 음력설세배를 하는 기회를 타서 고가네집에 들어가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려하였다. 그런데 예상밖에 고가네 호위대가 총을 쏘는바람에 쌍방은 맏불질을 하게되였는데 그 혼전가운데서 지주 셋을 쏴죽였으나 이쪽도 리춘만(李春萬)을 비롯하여 3명이 희생되고 김정국(金正國)만이 보총 한자루를 빼앗아 들고 담장을 뛰여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것이다.    1934년 겨울, 탕원현반일유격대는 탕원반일유격총대로 개명하고 대오를 200명으로 확대하였다. 현위서기는 유격대의 정치사업을 틀어쥐기 위하여 김정국(金正國)을 그 유격총대의 정치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1933년 여름, 화천현(지금은 화남현에 속함) 타요자금광의 나젊은 금점꾼 기치중(祁致中)이 일제의 압박에 반항하여 자기와 같은 신세의 금점군 6명과 함께 금광을 지키는 일본군의 총을 빼앗고 는 동북삼림의용군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이 무장조직을 명산대(明山隊)라 명명했다. 명산대(明山隊)는 항일을 견지하면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굴곡적인 투쟁가운데서 기치중(祁致中)은 마침내 깨달음이 생겨 탕원현위를 찾아가 자신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였으며 자기의 대오를 개편하고 군사정치간부를 파견해줄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935년에 김정국은 현위의 파견을 받고 명산대(明山隊)에 가게 된 덧이다. 그는 명산대(明山隊)에 가자마자 싸움에 앞장섯거니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신이 짊어지는 등의 실제적인 행동으로 여러사람의 신임을 얻게되였으며 그 속에서 300여명의 당원을 발전시킨 것이다. 기치중(祁致中)과 그의 령도하에 이 대오는 재빨리 화천현일대에서는 전투력이 제일강한 항일무장으로 성장했다.    1936년 5월 20일, 의란현 제 3구에서 상급당위는 명산대(明山隊)와 다른 몇 개의 삼림대를 합쳐서 동북항일련군독립사를 편성하고 기치중(祁致中)을 사장으로, 부진성을 정치부주임, 김정국(金正國)을 지도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김정국(金正國)은 정치부주임직을 담임하였다.      김정국(金正國)은 후방기지건설에 큰 중시를 돌리였다. 그는 화천현남부의 칠성라자산속에다 소형피복공장과 련패간부를 배양해내는 군정학교를 세웠으며 후에는 병기공장까지 앉히였다. 이 병기공장에는 총제조직장, 탄약직장, 무기수리소도 있었다. 그리하였기에 그들은 자체로 권총 100여자루를 생산해냈거니와 돌격총시험제작에도 성공했다. 하여 경제상 북만당조직의 부담을 크게 덜어줬거니와 본보기가 되여   상급의 표양까지 받은것이다.    한편 김정국은 1936년 가을에 려장인 장치국과 함께 100여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화천현 래재하에 있는 위대패대(僞大牌隊)를 습격하여 적 20여명을 격살하고 170명을 포로했으며 200여자루의 총과 많은 탄약을 로획했다. 그런후 1937년 가을, 김정국(金正國)은 또다시 부대를 거느리고 화천현 맹가강(孟家崗)뒤의 부라자산기슭에서 적 10명을 격살하고 4대의 황금운반차와 군수물자운반차를 중도에서 탈취하여 보총 100여자루와 황금 수백량을 얻은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그들은 맹가강에서 흑석부대 기병 700여명을 유인하여서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격전을 벌리였는데 적 300여명을 섬멀하고 보총 200여자루와 기관총 10정을 로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1937년 11월, 그의 독립사는 항일련군 제11군으로 개편되였는데 기치중(祁致中)이 군장으로, 김정국이 정치부위원 겸 제1려 정치부주임을 맡게되였다. 당시 이 부대는 기병대까지 갖춘 1,500여명의 호호탕탕한 무력으로  발전하였는봐 그들의 주요활동지구는 화천, 부금, 동강일대였다.      1938년은 불온의 해였다. 이해에 적의 로 말미암아 전동북의 항일전쟁은 가혹한 시련을 겪게되였던 것이다. 송화강하류의 여러 항일련군은 적의 포위를 벗어나 새로운 항일유격지구를 개척해야했다. 이런때에 김정국(金正國)은 따로 200여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천현의 래재하지구에서 단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해 봄, 일제는 기병 1,000명과 저들의 제4교도대의 병력  500여명을 집결하여 항일련군 11군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적아쌍방의 력량대비가 현저했다. 이런 상황에 김정국(金正國)은 장치국과 함께 제1려를 지휘하여 화천현의 영평강으로부터 철퇴하여 대화갑산에 이르었으나 끝내 적의 포위에 들고말았다. 가렬처절한 싸움 끝에 려장 장치국을 비롯한 80여명 전사가 희생되였다. 이같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김정국(金正國)은 나머지 선사들과 함께 포위를 간신히 뚫고 칠성라자밀영에 이르었다.    항일은 끝지 말고 계속이어해야했다.    김정국(金正國)은 부대의 실력을 확장하려고 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다시금 화천현 동부에 전이하여 그곳의 군중을 발동하였다. 무서운 타격과 좌절앞에서도 나젊은 그는 그야말로 굴할줄을 모르는 강철의 의지를 튼튼히 다지고있는 용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란 그야말로 예측키어려운것이였다.    1938년 5월상순의 어느날, 뜻하지 않은 액운이 떨어질줄이야 어찌알았으랴. 전쟁판도 아니였다. 이날 화천현의 리귀툰에서 군중을 발동하고있던 김정국(金正國)은 불행하게도 부대에 잠복해있은 반역자의 손에 살해 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 무엇을 바라고 그는 그같이 청춘의 열혈(熱血)과 목숨을 다 바쳐 싸웠던가? 그 정신, 그 업적이 후세에 망각되여서는 아니될 일이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리고 따라배워야 옳을것이다.     相关资料      1937年冬, 十一军各部进行了英勇的游击活动, 给敌以重大打击, 我军也有相当损失. 11月初, 日伪军破坏了我七星砬子密营, 二旅旅长胡文权在战斗中牺牲. 在此期间, 十一军协同 五, 六, 八军等部队共同进行了破坏敌人"集团部落"的战斗. 1937年12月下旬, 金正国设计击毙了关东军司令部特务, 三江省协会特别工作部部长金东汉.    (常好礼 / 著: "东北抗联路军发展史略" 239页)      第十一军在明山队时期的后方基地在桦川县南部的大梨树沟, 并由此扩展到桦, 依边界一带.  (同书 241页)      화천현(樺川縣)은 내가 근 50여년간을 산곳이요 그 남쪽의 따리수거우(大梨树沟)는 내가 소년시절을 보냈으니 잊지못할 고장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골안에는 명실공히 돌배나무가 많거니와 땅속에 금이 있어서 지금도 황금몽을 품고있는 금점꾼이 떠나지 않고 "복사씻기"를 하는 고장이다.   거기서 동쪽으로 장대 몇 개를 넘으면 영평강(永坪崗)인데 그곳은 1947년겨울 토비숙청을 다니던 나의 부친(金丙念)이 참모장 김해정을 따라 정찰임무를 맡고 나섯다가 반원전체와 함께 혈전 3여시간끝에 희생 한 곳이요, 그 저쪽으로 40여리 더가면 바로 기치중(祁致中)이 명산대(明山隊)를 조직하여갖고  항일을 나섯던 타요자(駝腰子)인 것이다. 그곳은  큰 금광구(金鑛區)다.     나의 어머님은 성명이 최정순. 8살에 쏘련에서 건왔다. 나의 부친을 알게되여 약혼을 했던 그해 나이 16살이였는데 쏘련제재봉침으로 하루에 철띠 70개씩 만들어 유격대에 보내면서 그들의 일을 힘껏 도왔다고 한다. 하건만 문화혁명이 오니 이 불초자 때문에 일호반점의 죄도없이 억울함만당하고.... 이 글은 어머님생전회억에 근거하여썻다. 다년간 력사를 추적하고 자료를 모아 증실하면서 쓴 것이기에  틀림이 없으며 다소나마 무마가 되라여겨져 원한을 못다풀고 돌아가신 나의 어머님의 령전에 드리는바이다.              
16    에세이 눈물겨운 노벨상 댓글:  조회:4573  추천:2  2012-11-29
                                  에세이 눈물겨운 노벨상      지난달 중순, 나는 인터넷을 통해 작가 막언(莫言)이 올해의 노벨문학상을 받아안은것을 알게되였다.        그야말로 생각밖에 문득 접하는 일이요 마치 제일같이 기쁘기도한지라 이제는 아예 만성병에나 걸린것 같이 하루도 빼놓지 못할지경 술에 절어버린 나는 이날 혼자서 축배의 술까지 몇잔 더 들다보니 숙취(熟醉)했다.      10월 17일, 막언(莫言)이 상을 받은지 6일만에 노벨문학상평심위원회의 주석 펠 위스트백은 환구시보(环球时报)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문학원의 원사로 지내온 16년간 누구도 그이처럼 나를 격동시키지는 못했다”면서 “막언은 중국의 위대한 작가일뿐만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얼마니 희한한 일인가!    펠 위스트백은 그 본신이 워낙 유명한 작가인 것이다. 1933년에 태여나서 15살때에 벌써 라는 첫 소설책을 세상에 내놓음으로 하여 천재적인 기능을 과시한 그는 스웨덴에서는 제일 큰 신문인 문화면의 책임을 지고있다가 1997년에 스웨덴문학원 원사로 선거받은건데 2005년도부터 시작해서 올해까지 7년간 련이어서 노벨문학상평심위원회 주석을 지내고있다.      그가 한 말인데 노벨상의 취지가 무엇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막언(莫言)의 대표작 4권중 훙꼬량(紅高粱)이 첫손꼽히는데 나는 영화로 각색된 그것을 본 인상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가 쓴 글은 다가 “명품”으로 인정되여 독자를 끌고있기에 재판이 되면서 불티나게 팔리는 추세다. 여기 북경만봐도 여러 서점을 비롯한 책시장들이 전에 없이 활기를 띄면서 마치도 거대한 자석마냥 독자를 끌어서 막언(莫言)은 조만간에 억만부자로 부상하고있는 것이다.       좋은일이다. 응당 그렇게 돼야한다.     1955년 2월 17일에 태여나 소시적에 재알거리면서 말하기를 너무좋아해서 어머니한테 심한 꾸중을 듣고는 이제부터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 도슬려 맘먹고 이름을 지금의 것으로 고쳐지은 막언(莫言)은 본명이 관모업(管謨業)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고 돌아오자 즉각 성명(聲明)과도 같은 말을 한것이다.        중국사람으로서 노벨상을 받은것이 막언(莫言) 하나뿐인가?   아니다!   그외에도 8명이나 된다. 순중국사람으로서 제 조국인 중국땅에서 태여나 자라나 노벨상을 받은것이 6명이나되는데 부모가 중국사람이지만 외국에서 태여나  상을 받은 자 2명까지 합하여 순위대로  렬거해 보면 아래와같다.         李政道:1926年生于上海 美籍华人,1957年获诺贝尔物理学奖,时年31岁;    杨振宁:1922年生于安徽 美籍华人,1957年获诺贝尔物理学奖,时年35岁;    丁肇中:1936年生于美国 美籍华人,1976年获诺贝尔物理学奖,时年40岁;    李远哲:1936年生于台湾 美籍华人,1986年获诺贝尔化学奖,时年50岁;    朱棣文:1948年生于美国 美籍华人,1997年获诺贝尔物理学奖,时年49岁;    崔 琦:1939年生于河南 美籍华人,1998年获诺贝尔物理学奖,时年59岁;    达 赖:1935年生于西藏 中国国籍,1989年获诺贝尔和平奖,时年54岁;    高行健:1948年生于江西,获奖的同年加入法国籍,2000年获诺贝尔文学奖,时年52岁。      이들 중 달레이라마 한사람을 내놓고는 다가 애국심이 있는 과학가 작가였다. 그들은 왜서 제가 태여나 자란 고향이나 조국에 있으면서 자랑스레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조국을 떠나 이국에서 받아야만했던가?  그 기분인들 어떠했겠는가?...   눈물겨운 일이여서 이마살이 구겨지니  이역시 한번다시 숙고해볼 일이 아니겠는가?!
15    반도의 혈 제3부 21. 댓글:  조회:4456  추천:0  2012-06-30
  21.      일제의 잔인무도한 횡포가 기록을 남기고 끝맺은 3.1운동!    그러나 그것은 실상인즉 끝난것이 아니라 깨여지지 않은 얼을 가지고 속으로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뜻있는 이들은 끈질긴 지하운동으로 파고들어갔고 많은이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여기 만주는 의지하러 찾아온 우국지사들로 장을 이룬 것이다.    이런때에 正義團단에서 순 조선글로 찍어내는 와 는 애독자가 많아 환영을 받았다. 서일은 정민호가 왕청에 오자 그가 나어린 강위를 데리고 함께 신문사에 들어가 總責인 金星을 도와 발행을 돕게끔했다. 하여 그 두 신문은 기자, 편집, 발행인을 합해 직원이 어느덧 12명이나되였던 것이다.    어느날 서일은 金星을 불러 신문발행정황을 알아보았다. 金星은 지장(紙帳)정황이 여의치 않아 발행량이 제한되지만 상해에 있는 臨時政府는 물론 북간도지역에 있는 大韓正義軍政司, 義軍府, 光復團, 義民團, 野團, 軍備團, 太極團, 大震團등에 어김없이 지속적으로 배달되고있으며 지어는 基督敎界의 北間島國民會에까지도 신문을 첫기부터 빼놓지 않고 여러부를 받아보게하는 상황이라 했다.   《그래 반응은 어떠하오, 기독교측의 ?》   《아직은 없습니다.》   《달다쓰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말인가?... 정녕 그렇다면야 좋겠는걸! 속담에 집안이 결단나면 생쥐가 춤을 춘다했소.》    서일은 이러면서 그쪽에서 방해만하지 않으면 다행이라했다.    본시 이질적인 종교여서 분기와 마찰이 불가피하고 그럼으로 하여 옹추간이 될수도 있지만 공동의 목적인 독립운동을 선위에 놓아야하는 이때인것만큼 대의를 봐서라도 되도록 서로간에 상(傷)을 주지 말자는게 서일의 원이였다.     서일은 신문선전과 발행 정황을 료해하고나서 이어서 어떻게 하면 무기를 조속시 구입해들일수 있을가고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초 重光團때부터 團을 무장시킬 궁리였건만 력량을 正義團으로 확대발전시켜 어제까지의 통계를 보면 순 결사대인원수만도 천을 넘겼건만도  총은 한자루도 더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團이 무장을 하지 않고서야 그게 허깨비와 다를게 뭔가? 빈주먹을 들고 육탄혈전을 한단말인가? 그런다면 개를 웃길 일이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여 자조(自嘲)를 하게 된 서일은 다시금 형세를 분석해보았다. 일본은 조선을 병탄(倂呑)하고나서 지금은 여기 이 만주땅을 노리고있는  것이다. 그렇건만 만주의 관리들은 일본의 그같이 팽창되는 야욕을 제대로 간파나하고있는지? 간파한다면 어떨가? 그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가? 그렇다면?... 그들의 속심을 진단해내야 한다.            이때의 적측상황은 이쪽에서 짐작한것과 같았다.    조선총독부는 에다 홍범도, 구춘선, 서일, 최진동, 량하청은 배일선인(排日鮮人)들의 두목이라 지적하면서 이들의 세력이 자라지 못하게 두절해야한다고 적어놓았던 것이다.    3.1운동이후 급속히 증대되는 만주의 독립군에 대해 일본은 점차 불안하게 되었다. 특히 국경지방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의 활약은 너무나 맹열하여 담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북경에 주재한 일본대사관의 오하라공사는 어느날  낯빛갈이 프르뎅뎅하여 중국측의 외교총장대리를 찾아가 중국정부가 자국내에서 자라나고있는 반일무장력에 대해서 방임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일본을 반대하는거나 다름없다고 항의했다. 현대식무장으로 장비한 일본군이 창피스러운 꼴을 더 보이지 않으려는데서 고안해 낸 꾀스러운 전략ㅡ중국측은 독립군무장을 어서빨리 취체하라는 위협적인 압력이였던 것이다.    일본제국의 외무대신이였던 그 자신이 입수한 정보로부터 추리해 낸 결론인즉은 홍범도의 무장보다는 더 급속히 자라는 서일의 무장에 의해 일본군은 장차 애를 더 먹으리라는 그것이였다. 하기에 그는 그같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국정부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장대해지는 반일력량을 속히 진압하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일본군은 홍범도에게서 당하는 참패보다 더 큰 규모적인 험한 역습을 당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였다.      한데 독립군을 취체함에 들어가서 만주로 불리우는 여기 동북3성 지방관리들의 태도는 달랐던 것이다. 길림성 성장 서정림(徐鼎林)이 말했다.   《불령선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는 이들을 토벌할 리유가 없는 것이다. 또 가도방면에서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지방에서는 큰 소요가 없는 것 같고 특히 여기에 대한 취체는 이미 규정을 만들어 도윤이하의 관원들이 실시하게하고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그를 따버리리려고 동분서주했다.   이때 동북의 왕으로 부각되고있었던 토비출신의 장작림(張作霖)과 그의 심복인  포귀경이 일본에 추파를 던지고 있었지만 길림성 독군 장작상(張作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음을 언녕부터 보아내고 미워했던 것이다.    서일은 그에 대해 좀더 깊히 알아봄으로써 파악이 있게 되었다. 당년에 40세에 나는 장작상(張作相)은 동삼성육군강무당(東三省陸軍講武堂) 제1기졸업생으로서 대가 곧은 사람이였다. 그는 구식의 군사훈련을 받았어도 신식을 접수함이 빠르거니와 열정이 충만되여 자기의 직분을 훌륭히 지켜낸다고 평가가 좋았던 것이다. 그가 전에 군사기술을 배웠던 그 강무당은 학제(學制)를 여러번 바꾸어 오다가 장작림(張作霖)이 1918년에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로 되어 동북의 군대를 정돈하면서부터 그의 장악하에 전문 육군군관을 배양하는 학교로 되어버린 것이다.    서일은 장작림(張作霖)은 믿을 수 없지만 장작상(張作相)은 믿을 수 있다고 여겨 그의 손에서 무기를 구해볼 궁리를 하게되였다.    그러자면 그와 교섭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나서야하는가?    자기가 직접나서자니 되지 않을 일이였다. 아직은 한어(漢語)구사능력이 모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내세운단말인가?...자그마한 키에 차돌같이 단단하게 생긴데다 동그란 검은테안경을 코등에 건 지식인타입의 사나이ㅡ 중국말을 할라치면 얼음판에 표주박밑듯이 줄줄인 날파람있는 사나이가 떠올랐다.    박찬익(朴贊翊)이다.    서일은 전부터 그에 대한 인상이 각별했다. 1884년도생이니 서일보다 3살이 아래인 그는 경기도 장단군 태생이다. 1906년에 신민회에 가입했던 그는 서일보다 한해먼저 만주로 망명하였는바 북간도에서 이상설, 라철, 백순 등의 지도로 대종교에 투신했다. 그는 1912년에 화룡현 삼도구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1916년까지 애국사상을 고취했고 동년 상해에 있는 신규식(申奎植)의 지령으로 북간도와 로령의 동지들과 련락을 취했으며 그해의 2월 27일에는 길림에서 조소앙, 여준, 김좌진 등과 손잡고 大韓獨立義勇軍을 세운 것이다.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서 이시영, 이동녕, 신규식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들 모두가 독실한 대종교도들이였다.    박찬익(朴贊翊)은 대종교가 중광할 때 공업학교 동교생을 전부 인솔하고 대종교를 신봉한 기적을 창출한 것이다. 대종교를 위한 그의 공적을 보면 그뿐만이 아니였다. 홍암대종사가 청파호에서 포교할 때 일본총령사의 교섭으로 말미암아 간도일대에서 신설교당 10여처가 일시에 봉페되는 화를 입게 되었는데 당시 룡정에 살고있었던 그는 대종사의 명의를 받들어 동변도대(東邊道臺) 도빈(陶彬), 길림성장 진소상(陳昭常)과 동삼성주변사 장병린을 교섭한 결과 봉쇠되였던 교문을 다시열게끔 한 것이다.      백락일고(伯樂一顧)라했다. 길고 짧은건 대봐야 해. 되든 안되는 맏겨보자하고 보낸건데 일은 생각과 같이 되었다.    서일의 파견을 받고 간 박찬익(朴贊翊)은 장작상(張作相)을 만나 협상한 결과 뜻대로 무기를 얻어온 것이다.       보총 300자루, 권총 10자루. 수류탄 150개, 퇀환 5,000발이였다.   《찬익이는 천성이 외교감이야!》    서일은 흡족하여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이였다.     무기가 안전하게 도착하여 기쁘기가 한량없는지라 그날 학교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온마을 사람들이 밤늦도록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동포들아 일어나자 용감하게    적수공권 뿐이라도 두려울소냐    정의 인도 광명이 비치는 곳에    원쑤의 천군만마 능히 이기리    독립 만만세...    (임정 제23호로 갖지정된 7.5조의 였다.)      어느새 새벽이 가까왔다.    모닥불이 다 꺼지고 사위가 조용한데 체대가 좀 메마르고 단단하게 생긴 어른이 계화, 채오와 같이 이날밤 우등불놀이 뒷수습이 제대로 되였는가를 검사하고있는 서일을 찾아왔다. 로씨야를 드나들며 재봉기 여러틀을 구해옴으로하여 단(團)의 옷공장을 훌륭하게 꾸려놓은 김기철(金基喆)이였다.   《곤하실텐데 주무시지요.》   《그놈아가 생각나 잠이 오지를 않네그려.》   김기철어른이 하는 말이였다. 그는 전날에도 한번 이같이 뇌인적이 있다.    서일은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그러는지를 알고 있었다.   김좌진(金佐鎭)이였다.   그는 김좌진(金佐鎭)의 아버지 김형구(일명 형균)와는 자치동갑이거니와 소시적부터 유별한 사이라 좌진이를 친자식같이 여기는데서 여직한번도 잊은적이 없었다. 항상 가까이서 함께 지내고푼 마음이였는데 여지것 손에 목각총을 잡고 도수련습이나해오던 수백명 정의단 단원들이 오늘 이같이 손에 진짜총을 잡으니 그 의용이 름름해보이는지라 좌진이를 새삼스례 사무치게 그리게되였던 것이다.   《걔가 글쎄 그 엄동 이른새벽에 웃동을 벗어메치고 칼을 휘두르며 웨치지를 았겠수. “왜놈아, 나를 보라! 왜놈아 나를 보라!” 하고 말이요. 어떻게 보내는지?...》   《지금 봉황성에 있다지요?》    서일은 이시각 지나간 일을 새삼스례 머릿속에 떠올렸다. 무오년이던 지난 1918년 11월, 그날 모여온 이들이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만방에 성명을 발표할 때 그 서명자가운데서도 그는 유표했기에 인상이 깊었다. 숱많은 하이칼라에 검은 팔자수염의 장대한 체구에 기강이 름름한 그는 일견하여 장군감이였다.    서일은 그가 전에 로백린이 요구하는 군자금에서 부족금을 마저마련하느라하다가 백주창탈 강도로 몰려 옥살이를 한것이고 만기석방이 돼서는 광복단 박상진(朴相鎭)의 지령으로 만주로 건너와 거기에서 大韓獨立義軍府를 만들고는 그 자신이 군사부장을 이 되였다는걸로 알고 있었다.    한데 김기철어른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쪽은 지금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하여 서일은 그와 말한 것이다.   《여기로 오라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바로 그같은 인재가 수요됩니다. 군사를 통솔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겁니다. 당장!》   《그래볼가! 내가 갔다오지!》    김기철은 무등 기뻐하면서 자진해 나섯다.      이틑날 서일이 써준 을 갖고 봉천쪽 鳳凰城을 향해 떠난 김기철이 닷새만에 왕청으로 돌아온건데 과연 사람을 데리고왔다. 양금택목(良禽擇木)이라 김좌진(金佐鎭)은 이렇게 서일의 수하 장령이 된 것이다.   《서단장님의 주장이 천만지당합니다. 오로지 혈전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입니다.》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 초면이지만 스스럼없이 이러면서 마음맞춰주던 그였데 오늘 다시만니 또 그 소리니 서일은 기뻣다.    무오독립선언이 있은 직후에 김좌진은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중국 단기서(段祺瑞) 정부에 을 보내여 제1차 세계대전이 결속 된 후 약소민족은 자치를 요망하고있는 추세를 말하고 조선은 견결히 독립하련다는 태도를 강력히 표명했으며 각국의 동정과 지지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정부가 조선교민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줄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중국은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거니와 처음부터 조선의 독립혁명을 지지하는 태도였다. 이는 애국적인 지성인들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서일은 믿음직한 그를 다시보면서 손을 굳게 잡았다.   《우리 같이 힘을 합쳐서 본때있게 해보기오!》      김좌진이 오자 서일은 그의 제의에 의하여에 正義團을 軍政府로 개편하고 그를 軍團의 총사령으로 임명했으니 때는 8월 7일, 이때로부터 무장단은 임전태세로 돌입하게 되였다.           이는 정의단이 독립무장단체인 군정회를 조직하면서 발표한 창의문이였다. 열열하고 절절하며 따라서 매력적인 강한 호소력을 갖고있는 이 창의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구국성전에로 불러일으키면서 그네들을 자기의 두리에다 굳게 묶어세웠다.    서일이 지난해에 연길현 국자가에서 대종교를 중심으로 세운 비밀결사단체 자유공단(自由公團)의 그 15,000여명중 끌끌한 젊은이들이 손에 무장을 잡자고 용약나섯던 것이다.      軍政府는  이같이 항일독립운동단체 가운데서도 가장 강유력하고 전보다 더욱 강력한 무장독립군을 보유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동시에 行政府를 겸비한 명실상부한 軍政府로 개변, 발전하고 있었다.   《무기를 계속구입하자!》   《기능을 갖춘 군인을 조속히 배양하자!》    서일이 김좌진과 같이 내놓은 구호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정한 이 분투목표를 적이 모르게 되도록 빠른시일내에 실현하고자 노력을 경주하기로 굳게 맹세했다.    이때의 중심인물로는 徐一, 玄天黙, 金佐鎭, 桂和, 李章寧, 金奎植, 李範奭, 曺成煥, 朴性泰, 鄭信, 金燦洙, 朴斗熙, 洪忠熹, 李鴻來, 尹昌鉉, 羅仲昭, 金星 등이였다.      한편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뒤에도 탄압과 압제를 늦추지 않았다. 한국민은 그 어느민족보다도 독립의욕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은 항일투쟁열의를 막아보려고 력사상 유례없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이른바 철저한 무단정치(武斷政治)를 행하였던 것이다. 그 실례로 의병진압을 빙자한 지사들의 대량학살이나 105인 사건, 안악(安岳)사건 등을 조작하여 한꺼번에 민족의 지도자들을 투옥한 그것이다.    이리하여 독립운동의 전열(戰列)이 한때 크게 무너졌고 지사들은 지하에 숨어든 것이다. 허나 그것으로 운동이 끝난것은 결코아니였다. 거족적인 3.1만세시위가 바로 조선민족의 얼은 깨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제가 이에 대처하여 꾸며낸 것이 이른바 文化政策인것이다.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거니 그 누구를 속일가! 조선사람은 일본의 이같은 회유책을 역리용하여 보다 광범한 저항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각종의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거니와 곳곳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국외에서는 무장독립군이 조직되여 일제를 응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좌진이 서일의 부름을 받고 왕청에 온건데 그가 온지 한달이 채안되여 어느날 한가지 놀라운 소식이 왕청골에 쫙 퍼졌다. 강우규(姜宇奎)가 새 총독으로 오는 사이또오의 목숨을 끊어버리려했다는 새 신문이였다.    일본은 3.1운동에 대해서 이번 한국민의 행동은 현총독 하세가와 개인을 반대하는 것이지 결코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양언(揚言)하면서 사이또오를 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사이또오는 문화정책이라는 간판을 내세우고 1919년 9월 2일에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오후 5시정각, 19발의 례포가 울리는 가운데 해군대장의 제복을 입은 사이또오가 제 부인을 데리고 南大門驛(지금의 서울역)에 내리였다. 프랫트홈에 내린 사이또오는 자기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은 각계요인과 인사를 나눈 후 귀빈실로 들어갔다.    귀빈실밖에는 총독부에서 마련하여 대기시켜놓은 마차와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귀빈실에서 나온 사이또오 일행이 각기 차에 나뉘여 오른 후 총독과 부인이 탄 마차가 출발하려고 몇발짝 띄였을 때 그 마치와 7보앞에 폭탄이 투적되여 요란한 폭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주위에 있었던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 중 3개의 파편만이 마차뒤를 관통하여 사이또오의 혁대와 군복을 조금씩 태웠을 뿐 목숨을 빼앗기는 새려 상도 입히지 않은 것이다.    놀란 왜경들은 즉시 흩어져 범인을 잡자고 혈안이 되었지만 놀란 인파가 우왕좌왕 하는데다 너무나 돌발적인 사건이라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채 헛물만켜고말았다.    모두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여 알고는 거 참 시원한 일을 했다고들 하는데 유독 한사람만은 머리를 달달 털면서 아주 맹랑해 하였다.    《젠장, 또 실팬가! 그게 누구여? 내같은 바보였군! 한발짝만 좀 더 뿌릴게지! 에에에... 쯔, 쯔, 쯔!》    월경의병장 리홍래(李鴻來)였다.    라철과 함께 5적을 죽이려다가 실수를 하여 하나도 없애지 못한 통분함이 아직도 가끔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괴이고 있었던 것이다.    두주일이 지나자 불행한 소식이 날아왔다. 서울역에서 거사를 했던 강우규가 왜경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이다.    그후 목격자로부터 범인의 인상착의를 청취한 왜경은 이를 단서로 수색망을 폄으로써 보름만에 가회동 82번지 장익규의 집에서 범인을 체포한 것이다. 그런데 범인은 나이 65세나 된 턱수염과 머리가 하얀 백발노인이였다.    이 소식에 자극을 제일 심하게 받은 사람역시 이홍래(李鴻來)였다. 가끔 저돌적인 행위가 버릇처럼돼버린 그는 자기도 살아서 한번이라도 세상을 놀래울만한 일을 해야겠노라하더니만 새해 즉 1920년을 잡자 간다온다는 말없이 훌쩍 사라졌다.    동해자 하나 없었다. 김규식과 자기는 할빈에 한번 피끗 가봐야 할 일이 있다면서 홀홀단신으로 왕청을 떠나간 것이다. 폭탄을 구하지 못해 거기에 있는 일본총령사관을 폭파는 못할망정 수류탄으로라도 한번 되게 소란을 피워놔야겠다고 맘먹은 것이다.    한데 팔자소관이였는지 아니면 재수가 붙지 않아서인지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거니와 아까운 제 생명마저 잃고 만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송화강 남안이요 중동철로의 중심이자 북만주의 수부로서 이때 벌써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우기 시작한 할빈(哈爾賓)은 번창했다. 각국의 령사관이 들어앉으면서 서로 주인행세를 했다. 일본이라고 그저 얌전히 구경꾼노릇을 할리없었다. 철길이 서에서 동으로 도시중심을 꿰질렀는데 일본총령사관은 도시를 꿰지르는 그 철길위에 가로놓인 제홍교(霽虹橋)이남인 남강(南崗)구역에 있었다. 검스레한 아담진 2층건물이였다. 남향하여 출입문이 중간에 있고 량켠에 꼭같은 크기의 창문이 3개씩 모두 12개였다. 창턱이 높아서 밖에서는 웬간한 꺽다리아니고는 안을 근본 들여다볼 수 없었다.    바야흐로 어둠이 깃드는 어슬녘, 이홍래는 그런데다 품에 감추고 간 수류탄 두 개를 꺼내여 련거퍼 뿌린것이다. 그런데 첫개는 유리창을 깨며 들어가 터졌지만 두 번째 뿌린것은 창문살에 맞아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밖에서 멋없이 터지고 말았다.    그통에 소동이 생겼다. 경찰들이 그를 붙잡자고 동원한 것이다.    이홍래(李鴻來)는 북쪽을 향해서 냅다뛰였다. 제홍교(霽虹橋)를 건너면 중앙대가를 경계로 해서 서쪽이 도리(道里)고 동쪽이 도외(道外)였는데 그 철길다리를 건넌 이홍래(李鴻來)는 도외(道外)의 17도구 빈민거리에 들어서면서 자기를 바싹 추격해 온 일본형사 國吉正을 사살하고는 추격해 온 단른 경찰이 쏜 권총에 맞아 불행히 목숨을 잃고말았다. 이날이 3월 6일이였다.    이쪽이서는 여러날이 지나서야 지방신문에 난 소식보도를 보고 시체를 찾아다 장례를 지냈는데 그가 희생되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의병출신의 젊은이들이 눈물을 더 많이 흘리였는데 그 누구보다 비통하여 절규(絶叫)한 사람은 김규식(金奎植)이였다. 그는 같이 손잡고 싸우자 약속하고 데려다놓고는 전쟁한번도 못해보고 어쩌면 그렇게 멋없이 혼자먼저가느냐면서 통곡했던 것이다.              대절의 미진멸 한치 말어라         최후의 성공을 우리 담당해         용진무퇴한 대한 남아야         광복할 그 날이 멀지 않았네             신령이 재천에 감응하소서         용사의 충혼을 위로하소서         영웅의 위훈을 竹面에 옮겨         빛나는 이름을 기리전하리.        軍政府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그의 산소를 가까운 북산에다 썻다.        강우규가 사이또오에게 수류탄을 던져서부터 이홍래(李鴻來)가 할빈(哈爾濱)일본총령사관에 수류탄을 뿌리는 사건이 발생하는 사이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는  괄목할만한 軍團이름이 하나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北路軍政署였다.    1919년 4월, 상해의 大韓民國臨時政府는 국체(國體)를 共和制로 선언한바있는데 軍政府도 大韓民國臨時政府산하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해의 12월에 정신에 립각하여 명칭을 大韓軍政署로 고쳤다. 그리고는 서로군정서와 대칭으로 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가졌다.    이는 구성원전체가 대종교도들로서 복벽적 민족주의가 주류를 이루고있었지만 시대의 수요와 발전에 따라 그들도 의식에 점차 변화가 생기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보통사람의 머리로는 예상못할 궤변(詭辯)이 빈발(頻發)하는 세월이였다.    이러구러 4개월이 지나 1920년 7월이 되니 강우규로인의 거사모양으로 뭇사람의 한번다시 가슴을 달구는 격동적인 사건이 하나 가까운데서 나타났다. 義烈團員 윤준희(尹俊熙), 최봉설(崔鳳卨), 임국정(林國貞), 한상호(韓相浩)가 길회선(吉會線)부설을 위해 朝鮮銀行會寧支店에서 용정(龍井)에 이송중인 현금 15만원을 화룡현의 동양리에서 탈취 한 것이다.    모두들 꿈밖이지였지만 몇사람은 조만간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알고있었으니 그는 군정부의 최고통솔자 서일을 비롯한 김좌진, 조성환 등 그 몇몇이였다.    그 의열단은 北路軍政署에 속하는 것이였다. 언젠가 한상호(韓相浩)가 서일을 찾아와 용정의 은행을 털겠노라고 한 후로부터 그들은 자진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목적으로 한 이 극비밀의 조직을 北路軍政署소속으로 받아달라고 자청을 한 것이다. 하여 그들에게는 軍政署特派員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건데 조직자 윤준희(尹俊熙)이가 대장에 임명된 것이다.    그들은 15만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탈취하고서는 그것을 무사히 울라디보스톡으로 가져갔다. 거기의 신한촌을 근거로 그들은 무기를 구입하여 이쪽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10원~20원이면 총1자루를 살 수 있었다. 한즉 北路軍政署는 이같이 거액의 돈이 생겼으니 군자금을 걷지 않아도 무기를 얼마든 사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왜 기쁘지 않으랴, 누구나없이 다 기뻐한건 더 말할 것 없었다.   《하려면 저렇게 해야 해! 잘했어! 잘했어! 참 잘했어!》    찬탄이 련발했다.    한데 잘된것 같던 일이 찬탄을 무시하고 그만 뒷탈리고말았다. 12월에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최봉설(崔鳳卨) 하나가 탈주하고 한상호(韓相浩), 윤준희(尹俊熙), 임국정(林國楨) 세사람은 우라디보스톡에서 그만 일본헌병에게 붙잡히우고 만 것이다.    돈없이 이제 무기를 어떻게 구입한단말인가?...    그렇다고 맥을 놓을 수는 없었다.       레닌, 게렌스키에 의하여 제2차의 혁명이 일어나 백계(白系)니 적계(赤系)니 하여 크게 두파로 갈라져 류혈투쟁을 버렸을 때였다. 그 틈을 타서 씨비리야에 있는 동포들이 쌍성(雙城)에서 모임을 가지고 전로한인회 중앙총회(全露韓人會中央總會)를 설립한게 아닌가!  그때만하여도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사상은 없이 오로지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는 민족주의단체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때 다른 또 하나, 제1차세계대전 때 로씨야군에 종군하였던 교포 70여명중에 살아 돌아온 청년들이 조국애를 더욱 굳히여 쌍성에다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는 한편 하발포(哈發浦)에 로병회(老兵會)를 설립했다. 당시 이 로병회의 회장은 김기룡(金起龍)이였다. 한편 한국의 육군참령(陸軍參領)이였던 이동휘(李東輝)는 김립(金立), 김일(金一)등과 협력하여 그 로병회(老兵會)를 육성하면서 게렌스끼의 사회당(社會黨)과 유기적인 련계를 맺어왔다.    1919년 2월에 中央總會를 大韓國民會라 개칭하고는 윤해(尹海), 고창일(高昌一)을 대표로 하여 파리의 강화회의에 보내여 한국의 자유독립을 웨치게 했다.        그때에 로씨야경내에 조직된 조직들의 정황을 보면 이러했다.    (1) 전국청년련합회(소왕영 韓民學校內), 1919년 8월 조직. 회원수 500명.    (2) 로인단(울라디보스톡 신한촌 덕창국), 회원수 50명. 목적 決死報國.    (3) 소년애국단(우라디보스독 신한촌) 회원수 40명. 목적 決死愛國.    (4) 부인회(울라디보스톡 신한촌) 회원수 50명.       당시 적측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바 있다.          1919년 10월에 로씨야혁명이 일어나 게렌스키정부가 무너지고 볼세비키정부가 수립되고 그해에 새수도인 모스크바에 제3인터내쇼날이 수립되였다. 그러자 로씨야에 있는 교포들은 표면만이라도 공산주의를 따라야 생존할 수 있으리라 여겨 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 당은 1920년 3월에 울라디보스톡에서 설립되였는바 사회주의에 의한 새국가건설을 “슬로간”으로 하였다.    회장 장도정(張道定), 부회장 김진(金震), 로무부장 조장원(趙璋元), 선전부장 김일(金一)이였다.    上海臨政은 시베리야교포들의 이같은 활약에 불안을 느껴 안공근(安恭根)과 왕삼덕(王三德)을 수차 보내여 그것을 해산시키려했으나 로씨야관헌의 출면으로 하여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1920년 4월에 왜군은 씨베리야에 출병하느라 울라디보스톡에 오른 기회를 타서 韓民學校와 韓民報舘을 불사르고 무고한 교포 70여명을 체포했거니와 몇사람은 반일(反日)을 주동분자라 하여 살해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지만 로씨야에서 무기를 구 하기는 그 어디보다 쉬웠다.    그곳에는 1919년 8월에 로시아에 입적한 조선사람들로 조직한 원호회(原戶會)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그 단체의 목적은 전문 大韓獨立軍에 무기구입을 소개하고 공급하는 것이였다.    회장ㅡ 니그라치.    부회장ㅡ 꼬냐.    11곳에 대표가 있었다.    활약을 보면    (1) 쏘치풍에 근거를 둔 진단산 무장활동계획으로 본회에 무장구입의뢰를 해왔음으로 3명이 나서서 각지방으로부터 소총 150정과 탄환 7,000발을 모연(募捐)하여 길림의 산채구로 운반하던 도중 중국관헌에 3명이 체포되고 무기는 압수당하였다. 진단산은 보위용으로 구입하는 것이라 교섭하여 9일만에 전부찾게되였다.    (2) 1920년 3월, 광복단(光復團)에 소총 90정, 탄환 90발, 탄환 4000발, 단총 9정, 까자크검 3자루를 구입하여 주었다.    (3) 의군부(義軍府)에 소총 500정, 탄환 90발, 단총 20정, 탄환2000발, 수류탄 10개, 까자크검 10자루, 첵코만원경 1개를 구입하여주었다.    독립단(獨立團), 국민회(國民會), 산포대(山砲隊), 군정서(軍政署) 등 독립운동단체는 이 원호회((原戶會)의 소개없이는 임의로 무기를 구입못했다. 그리하여  3명 의렬단원은 체포되기 전에 로시야에 가자마자 원호회((原戶會)부터 찾아가 무기를 구입하려고 신속히 서둘렀던 것이다.     첫째는 일본돈을 우선 로씨야화페로 바궈야했다. 그리하여 거액이 준비된것인데 쓰자고 보니 화페개혁이 되어 이미 바꾼 그것이 그만 몽땅 페지로되고 만 것이다. 통분한 일이였다.    이런차 한면으로 왜경은 끈질기게도 로씨야의 연해지방까지 수사망을 펼치여 경부선부설용 15만원략탈용의자를 기어코 붙잡자고 들기에 의열단의 그 네사람은 은신처를 숨기느라 원호회(原戶會)와의 련락마저 끊어버렸다. 그들은 제1차로 근근히 체코병에게서 산 장총 125자루와 탄알 4,500발만 먼저 한번 보내고서는 그만 엄인섭의 밀고로 끝장을 보고 만 것이다.         
14    에세이 사람과 짐승의 차이 댓글:  조회:6321  추천:5  2012-04-06
    지난해 말 한국 대구에서 “독립군총재 백포서일기념 국제포럼”이 열린바있다. 나는 주최측으로부터 꼭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수차나 받았고 그 모임에만은 꼭 가리라했다. 그런데 정작 때가 되고보니 공교롭게도 집사람 병이 갑자기 더 위중해지는통에 대답한대로 응하지 못하고 아쉽게도 사론(史論)만 한편 써 보내고는 끝내  결석을 했던 것이다. 과연 불가피한 사정이였다.    일이 그같이 공교롭게 되니 새해들어 회의주최측이였던, 대구에 설립된 그 “백포서일기념회”의 추상호 계획실장이 불참한 나에게 출판된 론문집을 우편으로 보냈거니와 나를 만나보러 일부러 북경에 왔던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왕징(望京)에 있는 민박에서 초면인 그를 접견하게된거고 그한테서 서훈회장으로부터 보내는 따뜻한 위문을 전달받음과 동시에 연4일간을 지하철로 다니면서 “백포기념회”가 이제 바야흐로 활발히 벌리게 될 가지가지의 일들인 독립군에 대한 심층깊은 연구와 더불어 백포서일의 일대기로 되는, 이미 인터넷에 올려 공개되고있는 나의 미완성작품ㅡ 대하역사소설 과 더불어 다른 모든 저작들의 재판을 위한 여건으로서의 출판사설립 등 여러 중요사항들을 내놓고 진지한 토론이 있게되였던 것이다.      지금 조글로에 발표되고있는 내 글이 권태를 주는지 누군가는    “좀 현실적인것을 쓰시오 다 지나간것을 자꾸써서 뭘하오 지금은 이런걸 보지 않수다”고 선의적인 권념을 해왔다. 그래서 내가 서운한 감이 들기도한건데 그 반대로 “백포서일기념회”에서는 내 글의 가치를 인정하고 각별히 중시하니 나는 웃음이 나오면서 내가 오래동안 헛짓을 한건 아니였다는데서 힘이 생긴다. 나의 주장인즉은 지성인은 물론 그 누구나 제민족의 력사는 알아야한다는거다.      추상호선생이 왔다가자 이어서 이달초는 한국 國學硏究所의 김동환박사와 임창경 두 박사가 기여히 만나자고 제의를 해와서 나는 접견을 했던 것이다. 헌데 이번역시 중병을 앓고있는 노친의 병구완을 내가해야겠기에 기일은 3일간이라지만 각박하게도 오후 짧디짧은 몇시간이였다. 부득한 사정이였지만 그같이 귀한 손님들을 내가 제대로 접대를 못해서 몹시 안스럽다.      이번 역시 우리의 만남은 지극히 필요했거니와 적시적인것이였다.     우리는 민족의 수난기였던 지난세기의 력사에서 중대사로 거론이 되고있는 몇가지 주요사건을 내놓고 견해와 관점을 기탄없이 피력했거니와 또한 그렇게 함으로하여 기껍게도 공통한 인식을 갇게된것이다. 자칫 역사가와 소설가사이 불필요한 마찰과 혼선을 빚을수도있는 일을 우리는 동댕이친 것이다.         약정한 3일간의 대담을 끝내고 두분은 어제 곧바로 연변 화룡으로 향했다. 거기 청파호ㅡ 대종교의 라철, 김헌, 서일 삼종사가 잠든 성지(聖地)를 참배하고 환국(還國)하려는 것이다. 좋은 기회였건만 그들과 동행못하니 안타까움이 그지없다. 나는 20여년전 백포서일(白圃徐一)이 조천(朝天)한 밀산당벽진은 가봤지만 청파호는 마음에 그릴뿐 여지껏 한번도 가보지 못한것이다. 서일의 일대기를 쓴다는 사람으로서는 자격지심이 드는 일이아닐수 없다.      김동환, 임창경 두박사는 우리 집 노친의 병치료에 보태쓰라면서 2천원을 기어히 내놓앗거니와 굳이 지하철역까지 나를 배웅하면서 부디 오래오래 앉아좋은 글을 완성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같은 직심스러운 축복을 거듭거듭 받고보니 스스로 내 존재의 가치가 새삼스레 느껴지면서 전날 나를 해친 두 악한의 몰골이 눈에 밟혀 이 글을 쓰게된다.      나를 해친 두 악한은 정장송(鄭長松)과 장동화(張東華)였다. 그 둘은 “문화혁명”때 내가 써놓은 첫장편소설원고와 일기책을 빼앗아 간 것이다. 옹군4년간이였다. 그자들의 작간에 의해 나는 지옥에 떨어졌거니와 온갖의 비인간적인 학대속에서 상상키어려운 곡경을 치룬것이다.      내가 반생을 넘어 살아온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향은 지금도 6개마을로 이루어진건데 1960~70년대는 “성화공사”라 불렀거니와 6개 마을의 6개소학교와 중학교는 하나의 련합지부가 되어 공청단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때 중심소학의 교도주인이였던 정장송이 공청단지부서기를 맡고 소선대총보도원이였던 내가 공청단선전을 맡았더랬다. 우리는 같은해의 같은날에 학교당지부에다 입당지원서를 써바친 것이다. 그런데 정장송은 인차 입당이 되었어도 나는 종시되지 않았다. 알고보니 내가 렬사의 자식이고 사업을 잘하긴해도 아버지가 생전에 력사문제가 있은거로해서 나는 입당은커녕 외려 등때기에 검은딱지가 붙었던 것이다.      1964년 여름이였다. 촌에서 벌어진 이른바 “정치를 맑게하고” “경제를 맑게하고” “사상을 맑게하고” “조직을 맑게한다”는 4청운동이 학교까지 온건데 정장송이 온공사의 교원회의를 열고 자기는 입당을 했길래 스스로 “당의 화신” 으로 자호를 한다하고는 “계급투쟁뚜껑을 여는 첫포”를 한학교의 김용천(金龍天)선생을 향해 쏘는 것이였다. 그가 적발한 “죄”인즉은 김선생이 10여근 되나마나한 싸래기를 주머니에 넣어 쟈므스(佳木斯)시내에 갖고가 아는집에다 팔마먹은 것이였다. 나는 그가 그러는것을 보다못해 아니 같이 이사를 온 “연변내기”로서 그러면 그건 너무나 몰인정스러운게 아니냐, 애가 앓아 돈이 바쁘서 싸래기를 팔았다는데 그걸 자산계급사상이요 자본주의길로 가오 하면 이 세상에 바른사람이 대체 몇이나되겠느냐, 너무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정장송은 눈살을 곤두세우면서 “당신은 왜서 4청을 반대하는가?”, “계급의 적을 공공연히 비호할텐가?”하면서 당장 화살은 내한테 돌렸던 것이다. “원고료는 액외의 수입이니 받으면 학교에 들여놔야지 그걸 혼자쓰는건 철두철미한 자산계급사상이다.”라는 것이였다.      너무나도 유치한 소리라 나는 하도 쓰거워 말도하지 않고 참았다가 회의후에 그를 불러 정면으로 그것도 말이라구하는가, 그렇게 공산(共産)을 부르짓겠거든 어디 당신의 녀편네를 내놔서 공산(共産)으로 만들어보라했다. 그랬더니 그는 낯이 단통 지지벌개지면서 이를 쁘드득 가는 것이였다. 그리고나서는 “김송죽이 투고한 원고는 다 돌려보내라, 우리가 검사하겠다.”는 어리석은 편지를 신문사에 했거니와 “문화혁명”이 오니 “맛이 어떠냐?”면서 얼싸좋다고 보복을 한 것이다. 종당에는 판결에 넘겨진 내가 무죄로 결판이 나니 정장송은 “김송죽을 무죄로 판결하면 성화공사 5000명 반란파는 문화혁명을 헛한게 아닌가, ‘그물에서 빠진 우파분자’라는 모자라도 씌워달라“고 했다. 과연 히질게 물고늘어지는 박해광이였다.      성화향백성들이 다가 나를 배척하면서 혹독하게 군건 아니였다. 절람관을 차려가면서 돌림투쟁을 했을 때에 성광마을의 로지서 장우곤(張宇坤)댁에서는 맛좋은 음식을 푸짐히 차려놓고 나를 많이먹어라했고 성화촌의 건설원로(建設元老) 리재근서기는 마지막에 나가면서 “억울해도 참고 견디시오, 절대 굽어들지 말고!”하고 조용히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내 책이 나와서였다. 성화향운동대회날이였는데 전에 한때 향장을 지냈다가 현으로 간 장영무로인은 일부러 술병을 들고 나를 찾아와 술잔에다 기여히 가득부어주면서 지난일을 량해하라했고 공사당위서기로 오래있다가 화천현에 현장으로 조동된 선우승(鮮于承)은 마취도 하지 않고 강다짐으로 맹장수술을 받은 내가 소염제한알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였을 때 와보고는 페니실린 24병을 갖다주어 위험고비를 무난히 넘게했거니와 책이 나오니 축하를 한다면서 나를 힘껏 포옹했던것이다. 내가 홍광마을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한건 공사당위서기였던 그에게 청시하여 그의 정식비준을 받은것이였다. 그러했지만 나는 “자본주의집권파”로 몰리우는 그를 련루시키지 않으려는데서  시종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처사에 감격했던 그였다.                 사람축에도 못가던 내가 끝내 문학에 성공하여 신문꺼리가 되니 한족기자들마저 련줄찾아오니 한때 온 성화향은 들썽했다.    정장송은 그제야 가슴이 찔리는지 아니면 인성(人性)이 부활해서인지 두 번이나 우리 집을 찾아와 자기 때문에 나는 하지 말아야 할 고생을 숱해했거니와 여지껏 입당도 못한거니 “죄를 미봉하는 셈”소개인이 되여 나를 꼭 입당시켜주겠노라하는 것이였다.    나는 아무응대없이 속으로 웃고말았다.     “자식, 교활하기는 원....입당이 뭐 교환물인가? 네놈은 과연 여우대갈꼬깔이나 쓰고 살 놈이로구나.”                내노친이 저새끼가 어쨌다구 우리집에는 또 바라오느냐, 보기만해도 눈에서 불이 나는데 하면서 입당만해보라, 아예 이혼하고말테다고 성명을 내렸던 것이다. 정장송은 60도못살고 어느핸가 위장암으로 죽고말았다. 아무튼 그렇게라도 사과를 표시했으니 더 욕을 더하지 않겠다.      그러나 장동화는 다르다. 나는 조물주가 오망을 써서 짐승의 동체에다 사람의 깜지를 씌워 그를 만든게아닌가 한다.    다 지나간 일인데 에라 잊고말자했다. 그러나 그가 자진해서 사단을 일으키니  가만둘수 없다. 내가 그곳을 떠나기 전이였는데 하루는 그가 성화향직공로인회 회가를 지어서 들고와 나보고 봐달는것이였다. 그래서 보게된건데 곡은 그만하면 되었어도 가사는 형편없었다. 무슨 공산당의 빛발아래 어떻구어떻구한것이 그대로 문화혁명때의 구호를 토막쳐 라렬한 것이였지 로인회가가 되여 입에 올라 불려지기는 도무지 어려운것이였다. 그래서 내가 아니 장선생, 지금이 어느땐데 아직도 이런 글을 씁니까했더니 그가 나보고 그러면 가사는 차라니 김선생이 맡으라는 것이였다. 그래서 내가 고쳐쓴건데 그 원문이 이러하다.                   송화강구비치는 성화벌이                 정들어 한생을 살아왔는가                  머리에 흰서리 내린 우리들                 황혼이 손을 저어                 락원에 모였네                 아, 여생도 보람차게 가꾸며                 즐겁게 살아갑시다                   흐르는 세월이야 멎으랴만                 한생의 복락은 빛과 같아서                 고생을 참으며 겪은 우리들                 황혼이 손을 저어                 락원에 모였네                 아, 여생도 보람차게 가꾸며                 즐겁게 살아갑시다      노래는 인츰불리워졌거니와 다른마을 론인회에까지 보급되였다. 향소재지의 직공로인회에서는 음악을 아는 소학교퇴직녀교원 한금옥선생이 손풍금을 띠워가면서 배워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선생이 그만 자기는 여직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어진 가사를 처음본다고 말해서 그만 예상밖의 사달이 생기고말았던 것이다. 장동화가 그 말을 잡아듣고는 왜서 가사를 잘썼다하면서 곡을 잘썻다는 말은 하지 않는가고 걸고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툼이 생긴건데 그것이 어느덧 두집사이의 싸움으로까지 번졌던것이다.       며칠안되여 년말이 되였길래 로인회에서는 일년간의 총결을 짓고 음식을 쓴건데 그날 한상에 마주앉은 내가 장동화보고 “아니 장선생, 그깟 갖지도않은 문젤같고 쩨쩨하게 두집 싸움까지 할건 뭡니까? 더 웃기지 마십시오.”했다. 그랫더니 그가 하는 대꾸안즉 “김선생만 칭찬하니 그러는게지.”였다.     이건 뭐 유치원애의 발상인가! 나는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한마디 더했던 것이다.    “아니, 장선생님! 한금옥선생이 나를 좀 칭찬해주는게 그리도 듣기싫습니까? 선생님은 지난일을 생각해서도 어쩌면 이렇게 까지야..... ”    그랬더니 장동화가 더 뻔뻔스레 나오는것이였다.    “내가 어쨌다는 말인가? 난 당신한테 미안한 일 한게 하나도 없어.”    량심을 때여 개를 먹였는가? “무죄석방”이 된 내가 이웃마을에 전근하여 소학생을 가르치면서 빼앗겨 잃어진 첫장편소설을 비밀리에 다시썻더니 그걸 어떻게 냄새맡고는 또 잡자고들었던 자였다. 교학검사를 한답시고 와서는 우리 집에 잘다닌 하향지식청년더러 나의 반동적인 언행을 적발하라했거니와 “송죽이! 왜 또 글을 쓰는가? 전공사 군중이 몇해간이나 동원되여 사람이 되라고 도와줬건만 지금까지 글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니 정말 너무 악질적이다.”고 하였던 그였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모양이니 나는 더 참을수 없었다.    “아니, 장선생! 내한테 미안한 일을 한게 하나도 없다? 정말그런가? 장선생은 내 일기책을 가져가면서 뭐라했는가? 보고서는 돌려준다고 했지? 그래 한권이나 돌려줬습니까?....” 하니 그가 또 하는 말인즉은    “그랬는데는 어쨌말인가? 그래 문화혁명에 불만이 있는가? 쏸좡(算帳)을 하겠거든 모택동하구하라구!” 였다.    세상에 원, 이렇게 뻔뻔스런놈도 있단말인가? 너무나도철면피했다!    나는 소가죽같이 두터운 그의 낯짝을 쏘아보면서 한마디 내뱉었던 것이다.    “그것도 말이라구하는가?”    그랫더니 그가 자기가 하는게 말이 아니면 그래 뭔가하면서 채접시를 쥐여 뿌리는것이였다. 나는 날아오는 그것을 잽싸게 피하고 일어나면서 여기서 싸우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했다. 그래 격전장이 옮겨진건데 모두들 깜짝놀래서 밖으로 우루루 나왔다. 그는 밖에나와서도 나에게 그냥 발질주먹질을 해댔다. 이래도 내 손은 그냥 참고 놀아야하는가? 격분이 끊어오른 나는 더는 인(忍)을 지켜낼 수 없어서 끝내 한 대  답새기고말았다.     그자의 코등에서 안경이 날아났고 얼굴반쪽이 단통 피멍이 들면서 벌겋게 변해갔다. 평생처음이다. 이건 내가 어려서 군인들한테 배운 솜씨를 보여준것이다. 생각밖에 가해진  타격에 악연해진 그는 그만 얼빠진 개같이 반항을 잃고말았다.    이틀지나 그는 마을에서 사라졌다. 짝작얼굴을 해들고는 나다니기 창피했던 모양이다. 저 북쪽 흑룡강가 어디선가 음식집을 꾸리는 딸집에 피해갓던 그는 한달만에야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향사법조리에게 신소장을 올리였다. 나 이 김송죽이가 공산당원인 자기를 함부로때린건 문화혁명에 대한 보복이니 엄하게 처리해달라는 것이였다. 여지껏 자기를 스스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왔으니 삶아놓은 소대가리가 웃을일이였다. 언젠가 한국가서 돈팔아가며 제딸같은 젊은녀의 믿구녕을 뚜지고와서는 그걸 자랑이라고 입끝에 달고다닌  물건짝이다.  아무렴 그렇게까지 부끄러운줄모르다니?  나는 그를  사람이 아니라 시궁창에 바라다니는 더러운 부덕쥐로 본다.     투구나신(鬪毆裸身)이라했다. 인원수만 많으면 위력이   세지는걸가? 아니다! 공산당은 신성한 조직의 명예에 똥칠을 하는 그따위 부패분자를 제때에 사출하여 척결함으로써만이 군중의 위망과 실력을 확보할수 있을것이다.                                                     2012년.4월 3일.                    
13    수필 나와 김학철선생 댓글:  조회:6608  추천:5  2012-02-17
 수필    나와 김학철선생                                       김 송 죽                                         (1)   9월 25일은 김학철선생의 제사날이다. 그가 타계한지도 어언 11년철, 하건만 나는 지금도 그날이 돌아오면 그에 대한 그리움이 새워지군한다. 왜서일가?...    내가 김학철선생을 찾아가 만나본것이 두 번. 우리의 만남은 그 어떤 인연이 따로있어서도아니였다. 솔직히 말해 문학초학자시절부터 나는 조선의 리기영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려는데서 서신거래가 있었을 뿐 김학철선생쪽으로는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저 그가  장편을 써냈고 집이 연변에 있는걸로 알고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1982년 2월, 잡지사는 서사시창작을 활성화하려는데서 동북삼성의 시인들을 불러 학습반을 연적이 있다. 장소는 이전의 주정부초대소였고 기일은 10여일간이였는데 참가인원은 박화, 문창남, 김문회, 김창규, 정문준 외에  흑룡강에서 간 박철준과 나까지 해서 모두 7명이였다. 그때 그것을 장악한 이는 잡지사의 시편집이였던 황장석시인이였는데 그는 서사시에 대한 강의는 별로없이 그저 골통을 싸매고 들어앉아 써내게했다. 그랬으니 뜻대로 될리가 만무였다.   마지막날, 우리는 다가 방송국에 가서 자기가 지은 시를 랑송하기로 했다. 지정된 시간은 오후1시. 오전에 시간이 있는지라 나는 출판사에 갔다. 거기서 출판을 기다리고있는 내 장편소설원고의 상황을 알아볼 겸 책임편집과 미루시 작별인사를 나누자는데서였다. 그래서 출판사에  간 나는 강정일선생의 탁상우에 있는, 벽에 탄알구멍이 두 개 뚤린 책표지가 눈을 끌길래 쥐여보았다. 김학철선생의 이였는데 장홍을이 설계한것이였다.   내가 혼자말로 책표지가 괜찮다고했더니 강선생은 그 소리를 잡아듣고 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뽑으면서 뒷말을 삼켜버리는 것이였다. 내가 의아쩍서 마주보니 강선생은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얼굴에 적이 맹랑한 표정을 지은채 하면서 사정을 토로하는것이였다. 다 찍기로 된건데 김학철이 쓴것이라니 우에서 내지 말라는 지시가 있다는 것이였다. 그래 별수없이 본인한테 되돌렸다는가?  나는 리해가 인츰가지 않아 아니 문학계에서 김학철선생을 이미 평판한게 아닌가, 그래놓고서 지금도 그런일이 생기는가고 했다. 그랬더니 강정일선생은 그러게말이지 하면서 자기는 김학철선생앞에 다시한번 머리숙여야 할 짓을 하고있다면서 자괴(自愧)를 하는 것이였다. 그는 내앞에서 솔직히 말한다면서 를 맨먼저 본것도 자기요 우에서 하라는대로만 하다보니 본의아니게 에 가담해서 생사람을 10여년간이나 억울하게 만들었노라면서 이놈의 편집은 못해먹을거라했다. 지난일에 대한 자아반성이였거니와 가슴아픈 후회였다. 공산당체제의 우리 나라는 외국과 한가지 판이하게 다른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어느 출판사나 잡지사, 신문사든 국가것이면 편집,기자 다가 국가공무원이기에 제 속은 비우고 우에서 내리먹이는 지시면 곰상히 그대로 받아먹어야 한다는 그것이것였다.(물론 지금은 많이 변해지고있지만) 왜 그런가? 의견이 생겨 우의지시를 거역하고 제마음대로했다가는 에누리없이 책벌을 받거나 아니면 아예 잘리워나가 밥통을  잃고말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정을 제눈으로  직접보고  어용문인의 심리적모순과 고통을 새삼스레 실감하게되였던 것이다.    심히 곤혹스러웠던 강선생은 숙였던 머리를 다시치키고 나를 향해 자기가 보건대는 온 연변작가치고는 김학철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래도 그가 제일 주견이 발라서 작가다운 풍도(風道)가 있어보이니 한번 찾아가 만나보라했다.  그한테 따라배울점이 있으리라는 것이였다.  나는 그 권유를 선선히  받아들이였다.  강정일선생은 내한테 그의 집을 찾아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리하여 뜻밖의 방문이 이루어지게되였던 것이다.    나는 김학철선생을 만나자 그한테 초인사를 하고나서 선문도 없이 문득나타나게 된 연유를 말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저는 이제 어섯눈을 뜬 초학자에 불과한 소설쟁입니다. 제구실을 하는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걸 가르쳐주십시요했다. 그랬더니 그는 쏘파를 가리키며 나를 우선 거기에 편히 앉으라는것이였다.  서재에는 중간에 차탁을 놓고 량편에 검은색나는  듬직한 가죽쏘파가  두 개 놓여있었다.  김학철선생은 내가 앉은 바로 그 쏘파에 전날 정령이 왔다가 앉았노라면서 자기는 그 녀류작가와의 교분이 유별나게 두터움을 말했다. 그건 내가 이미들어서 어느정도 알고있은 것이였다. 김학철선생은 나를 눈여겨 훑어보더니 지금 나이 얼만가 묻고는 이제 첫 장편이 출판이 되리라니 반갑다면서 미리 축하를 한다고 했다. 나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가 내 일을 아는게 괴이쩍어 아니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는가했더니 그는 빙그레웃으며서 문단의 일인데 내 왜 모를가하고는 강정일이 알려주더라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찬사를 듣고보니  급기야 하늘공중에 둥둥 뜨는것 같은 기분이였다. 헌데 내가 오늘의 이 기분을 맞아옴에는 치룬 대가는 적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이 앞에서 문화혁명열광기에 초학자들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고 문학공부하면서 소설은 쓴것이 화근이 되어 옹근 4년간을 투쟁받고 고초를 겪었음을 말하고는 하소를 하듯이 내가 몇해간 고생고생하면서 애를 써 써놓은 근 50여만자에 달하는 그 장편소설의 첫원고는 문화혁명이 오니 4청때의 보복을 하느라 나선 공사반란퇀의 한 혁명자녀석이 읽어보고 되돌려주마해놓고는 돌려주기는새려 어느 까마귀가 씹어먹었는지 없어지고말았다고했더니 그는 하면서 내보다 더 격분하는것이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격분된 그 기분에 자기의 처지를 피력했는데 그것은 그가 때문에 10년을 옥살이를 해야했던 그 가슴에 응어리지도록 피맺힌 원한이였다.  하면서 그는 주먹으로 상을 탕탕 쳤다. 끓어오르는 분노, 격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나는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알려주었다. 선생님이 쓴 그 소설을 맨먼저 읽어본 사람이 바로 출판사의 강정일이였다는것, 문화혁명당시 그는 공안측에서 를 보라고 입무로 맡기니 하는수없이 받아본것이요, 그러했지만 그는 오늘도 량심상의 가책을 느끼면서 스스로 자반성을 하더라고 알려주었다. 김학철선생은 하더니 돌연히 화제를 돌려 나보고 집요한 투로 모택동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 것이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쏟았다.  그랬더니 그는 송엽장을 잡지 않은 다른 한쪽 메마른 손으로 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한결 억양을 높혀서 부르짓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그대로 내뿜었다. 그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하다고 했다. 동감이였다. 김학철선생도 나도 우리는 다같이 모택동이 조작한 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제 나라의 인재를 제손으로 잡아버리는 미런한 짓이요 전대미문의 잔악한 행위로 밖에 되지 않았으니 천대만대 용서받지 못할 짓이였다고 했다.    나는 그한테 출판사에 갔다가 거기서 장홍을이 설계한 표지를 봤다는걸 말했다. 그랬더니 김학철선생은 출판사에서 을 찍어주마고 받아놓길래 됐구나 했더니만 얼마안가 되돌리더라면서 필유곡절이라했다. 그래놓고 그는 시정쪼로 다시말했다. 별다른 불감은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중앙에 있는 문정일인즉 자기와는 전우간인데 그한테 도움을 청해 나서게 했노라면서 연변출판사에서 퇴짜놓은것을 그가 흑룡강출판사에 들이밀어 그것을 거기서 찍게했노라 알려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나보고 보아하니 아마도 나의 소설이 자기것보다 먼저출판될것 같다면서 책이 나오거든 한권 달라고 했다. 자기의 이름을 적어 책을 작가협회로 보내면 거기서 집까지 갓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였다.   방송국에 가야겠기에 더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가려고 신을 신으니 김학철선생이 했다. 나는 그러리라 대답하고 그의 집을 나왔던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올 때 목단강역에 내려 거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들리였다. 허광일총편이 나와 출판을 걷어안게 된 연유를 알려주었는데 김학철선생이 말한것과 같았다. 내 책이 출판된것이 1983년 3월이니 그의 책보다 먼저나왔다. 그의 책은 좀 늦어서 그해의 12월에 나온것이다. 김학철선생이 나에게 증송한 에 싸인한것이 1984년 4월이다.                                                                                (2)   우리들의 두 번째만남은 똑똑한 날자기록이 없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허광일총편이 리근전선생의 전달이라면서 장도전화를 걸어왔는데 내용인즉 연변작가협회에서 리사확대회의가 있어서 부르니 아무날 꼭 목단강에 들려 자기와 함께 연길에 가자는 것이였다. 나는 일개 회원일 뿐 리사도 아무것도 아닌데 왜 부르는걸가 의문이 갈마들었지만 꼭 오라니 우선 가고보자고 그번 행차를 한 것이다.   연길에 가보니 다른일이 아니였다. 정길운선생이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라는 텔레비젼련속극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내부에서 돌리는 판이였다. 때시걱시간이 따로없이 여러시간을 줄창봐재꼈다. 그래도 피곤한줄을 몰랐다. 우선 내 평생에서 처음보는 한국의 영상품이라 감회가 달랐거니와 제재가 좋은 력사극이여서 인상이 깊었다.   그 걸음에 나는 김학철선생님을 두 번째 방문한것이다. 바깟출입문을 열자고 보니 특별사정없이는 면회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적은 종이장을 내붙인것이였다. 나는 그 공시(公示)를 보고 나는 속으로 짚으면서 문에 노크를 했다. 천리길을 온김에 만나봐야지 다른날로 미룰 형편이 못되였던 것이다.  문두리는 소리를 듣고 집안에서 어린 남자애가 달려나왔다. 분명 그의 손자였다. 그 애가 나를 말뚱말뚱 오려다보더니만 바깥출입문에 붙인 종이장을 가리키며 알려주는 것이였다. 나는 웃고나서 시켰다. 손자애는 과연 쫑그르달려들어가면서 할아버지 북만에서 온 손님이래요했다. 집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소설풀란을 작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김학철선생은 필을 놓고 송엽장을 집고 문가로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그이는 나를 뜨겁게 맞아주었다. 사모님이 유리컵 두 개에 유차맨을 풀어갖고 들어왔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그동안 그립던 얘기부터 시작했다. 김학철선생은 한창 를 쓸 준비를 하고있노라했다. 그는 이러면서 나보고  그의 을 봤는가고 물었다. 나는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로신의 잡문들을 읽어보거라, 비수같은 문장들이니 깨달음을 주니 읽으면 유익하리라했다. 이리하여 로신에 대한 말이 좀 더 길게 나오게된건데 김학철선생은 어느땐가 자기는 로신의 댁 문앞까지 가놓고도 들어가지 않아 보지못했다는 것이였다. 그는 자기의 처사를 이같이 자조(自嘲)하면서 그일은 평생유감으로 남았노라했다. 그는 그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은 모든 혁명자의 귀감(龜鑑)이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보고 작가는 응당 로신을 따라배워야한다고 했다. 내가 물었더니 김학철선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김학철선생은 이러면서 다들 곽말약처럼 눈치보는 재간을 갖췄더면 운명은 좋아졌을거라했다. 이에 내가 왜 그런소리는 하느냐했더니 그는 곽말약을 욕하는 것이였다. 민국때는 국민당에 들어붙어 알랑거리더니 이제는 공산당에 달라붙어 알랑거리는거지 뭐야 하면서 그는 그것도 사람인가했다. 내가 잠잫고있었더니 그는 집요한 투로 따지듯이 물는것이였다.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따지듯 묻고나서 견해를 솔직히 피력했던 것이다.   곽말약은 대단한 사람이다. 중국은 물론 세계적인 인물로도 손을 꼽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를 놓고 내가 이같이 비하를 하는데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젠가 천극(川劇)에 등장한 배우의 낮짝같이 빨갯다 파랫다  변화무쌍한 그의 태도를 보고  놀랐던 것이다. 그가 지어서 세상에 공개한 두수의 시였다.         첫시는 1976년 10월 에 실리였다.       친애하는 강청동지,     그대는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좋은 본보기.   운을 이렇게 뗀 다섯줄의 그 단시는 그가 “아세아 아프리카 작가상설국”토론석상에서 즉흥적으로 읊은것이라해서 그때 내가 다시 봤는데 알랑수가 치사할지경 적라라하게 드러나고있었다. 그러던 그가 1976년 10월에 이르러 “4인방”이 체포되니 인차 를 써낸것이다. 그해 11월 1일자 에 실린것을 보면 “4인방”은 야심이 크다느니 음모에 궤계가 있었다느니 붉은태양을 해치려했으니 만번죽어 마땅할 죄라느니, 계승자 화국봉은 준걸이라느니 과단성있게 유지를 계승했다느니 공적이 휘황하다느니  자기는  화주석을 따르리라느니 당중앙을 따르리라느니 했다.    분석능력이 좀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이런 시들은 비교해보고 어찌 놀라지 않으랴?... 곽말약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그의 물음에도 나는 전번때 모택동을 현대판진시황이라한것처럼 진솔하게 그는 대표적인 어용문인이라고 견해를 밝혔던것이다. 그랬더니 그는 낯빛이 확 밝아지면서 이번에도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쳤다.   나는 그와 속심말을 하고보니 이번에도 속이 후련했다. 김학철선생은 유차맨을 다 들고나서 이번에는 자기가 쓴 에는 닦은 콩을 한알 두알 헤여서 파는 장면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그보고  그건 너무 과장한게 아니냐, 아무렴 연변이 그정도였단말인가고 의심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니 그럼 내가 없는 일을 그같이 허구했겠느냐고 발칵성을 내는 것이였다.   내가 이같이 말했더니 선생님은 경아하여 거 참 희한하다 금시초문인걸 했다.  그래서 나는 바라지도않은 문화혁명이 터지자 우리 마을 홍광대대에서 반동구호사건이 생겼던것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내가 말한 그대로 우리 홍광마을 사람들은 3년재해년간에 그 누구도 배를 곯지 않고 잘지낸 것이다. 성화공사에 조선족마을이 모두 6개였는데 다른 마을 사원들은 배를 골아도 홍광마을 사원들은 누구하나 배를 곯지 않은것이다. 아마 온 전국치고 그같이 무사한 곳은 둘도없었으리라. 명실상부(名實相符) 진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였다. 그 마을 사원들이 배를 곯지 않고 무사히 지낸데는 전적으로 그 마을 생산대의 간부였던 김의철(金義哲)과 리유식(李維植) 그  두분의 덕이였다.  그들은 년년이 상부에다 량곡산량을 회보할 때면 실사구시였지 절대 허풍을 떨지 않았던 것이다. 징구량임무는 임무대로 완성하면서 사원이 소모하는 알곡은 수량을 제대로 남겼길래 굶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내심 부르짖은 구호였던 것이다 이러했기에 연변과 가목사근처에서 여러세대의 이사군이 쓸어들었던것이다. 한데 문화혁명이 터지니 외지에서 온 젊은놈몇이 위대한 무산계급혁명자의 탈을 쓰고는  반란에 도리있다(造反有理)를  부르짖으면서 두 간부를 끌어냈던 것이다. 그들을 꺾구러뜨리고 권리를 잡자는게 목적이였다. 한데 투쟁대회를 열었어도 그 두 간부를 비판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비판할 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박춘일(朴春日)이라는 젊은이가 그 마을의 공청단서기였는데 렬사의 자식인 그는 성품이 활발하고 곧았다. 그는 매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끄집어내여 시달구는것을 보다보다못해 그같이 생사람잡이를 하게끔 문화혁명을 발동한 모택동에게 반감이 생겨 어느날 그 험악한 반동구호를 써 이웃 한족마을의 소학교에 다니는 처남애를 주어 길가 눈에다 써놓게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만 온 성화공사, 온 화천현, 온 화합강지구에서 “특대반혁명안건”이 되여 벅작했다. 공안이 출동하고 벌렷길래 조작자가 누구란게 어렵지 않게 드러났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마을의 총책으로서 여러해를 내내 촌지서에다 생산대장을 겸해온 김의철(金義哲)이 그만 바가지를 쓰고말았던 것이다. 그가 장본인인 공청단서기 박춘일이를 그렇게 하라고 추겼다는 것이다. 순 날조였다. 처음부터 촌장의 권리를 빼앗자고 든 그 외지에서 온 성이 리가인 젊은녀석이 박춘일이를 얼리고닥치고해서 끝내 물어먹게한 것이다. 너무나도 한심하고 무서운 일이였다. 김의철은 공사에 끌려가 투쟁받다가 현에 끌려가 판결을 받은건데 무기도형이였다.   김의철은 절대 그럴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나의 의모부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걸 너무도잘알고있었다. 그는 반무식자였다. 그가 라는 명사를 알리도 만무다. 1962년도 여름에 조선에 나간 형님으로부터 편지가 온적이 있는데 그는 그것도 볼재간이 없어서 나를 불러 대신읽게했던 것이다. 그의 형님인즉 김동철(金東哲)인데 유명을 남긴 항일간부다. 8.15직후, 북만에서 조선족부대를 조직하여(항간에서는 동철부대라했음.) 토비숙청을 하고나서 조선에 나간 그는 6.25전쟁때 빨찌산총사령이였고 그후는 철도부부장을 지내다가 김일성의 숙청에 든건데 편지에 보면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모른다고했다. 나의 이모부가 반무식쟁이긴했어도 성격만은 제형처럼 올곧고 강직한 분이였던 것이다. 나는 현에 끌려가 만인대회에서 투쟁받고는 그길로 판결에 넘겨져 미결수 감방에 같인건데 그때 거기서 내먼저 잡혀와 무기도형에 떨어진 이모부가 사망한것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판결시 죽어도 자기는 남을 추겨 반동구호를 쓰게한적이 없다고 뻗치니 악한 여럿이 달려들어 팔을 끌어다 강제적으로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그 억울함을 그 누가 알아줄가? 한심했다. 김의철은 분을 못이겨 감옥에서 단식사(斷食死)를 하고만 것이다. 내가 이 일을 말했더니 김학철선생이 자기보건대는 문화혁명기간만해도 그같은 원안(怨案)은 부지기수여서 통계를 내기조차 어려우리라면서 제가 힘들여 애써 구축한 사회를 제손으로 훼멸하는 바보독재자는 중국의 모택동을 내놓고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거라했다. 나는 그 말이 과연옳다하고나서 하건만도 그런줄은 모르고  만세소리에 귀가 멀어진 중국의 백성들은 잠을 깨지못해 아직도 그리워 동방홍을 부르니 지천이 곡할일이라 했다. 그랬더니 김학철선생이 장차 아무때든 셈평좋게 수정관에 누워있는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제대로해야한다, 그를 어떻게 볼것인가? 선지선각자는 억만군중이 인식을 바로갖게끔해야할것이라했다. 나는 그것이 맞는말이라면서 응당그래야지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어느때 다시한번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것이 다시가 아니라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줄이야 어찌생각했으랴!   2001년도 11기를 손에 받아쥐던날 나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11기에 후날 한국에서 상을 준 나의 중편소설이 실림과 동시에 김학철선생이 사망된 소식이 실렸던것이다. 나는 속심을 나눌수있는 지기를 잃은것이다.            앞으로 저승에서라도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물을것이고 그러면 나는 그와 다음과 같이 말할것이다.    나는 모택동을 세마디로 평한다. 혁명은 성공했고 건설은 착오가 있으며 문화혁명은 죄를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을 위대하게 볼수 있는가? 나는 그를 위대하게보지 않는다.                                                       2002. 2. 17  북경에서.                 
12    에세이 불쾌한 회억 댓글:  조회:5317  추천:4  2012-01-26
    에세이  불쾌한 회억     지난여름의 일이다. 왕부정서점(王府井書店)의 책꽂이에서 살책을 고르고있던 나는 우연히 전해에 팔달령(八達嶺)에서 면목알게 된 동갑의 로류(老劉)를 만났다. 그는 40여년간이나 줄창 국가지질국 한곳에만 붙박혀 사업하다가 퇴직한 만족이였는데 오래간만에 보는지라 무척반가와하면서 나를 자기와 동행한 사나이에게 소개했다.        로류(老劉)는 이러곤 나를 향해 다시 입을 여는 것이였다.        저쪽은 과연 허리를 꿉석하면서 나를 형님이라 불렀다.   우리는 웃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 나는 그의 손을 맞잡은채 곱잡아뇌였다.      그랬더니 친구가 나보고 1960년대 북경에 지하문예쌀롱이 있어서 문화대혁명때 되게 왁자하게 떠든 걸 모르는가 하면서 내 눈앞에 나타난 이 사나인즉 바로 그때의 그 태양종대(太陽縱隊) 조직자 우두머리(頭頭)인  장랑랑(張郞郞)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나는 그를 다시보면서 감탄했다.    북경지하문화쌀롱하면야 내가 왜 모르랴. 한때 말밥에 오르고 칼도마에 올랐던건데!   똑같은 60년대초였다. 구석진 북방 저 머나먼 가목사동쪽에 있는 북대황의 마을ㅡ 한때 정이 들어 내가 몸을 두고 살아왔던 홍광촌에서도 여기 북경의 “태양종대”나 “X사”모양의 문예쌀롱인 문학크루쇼크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 문학크루쇼크는 내가 조직한 것이였다. 운명의 고약한 희롱이랄가, 장랑랑이나 내나 지나간 신세를 보면 너무도 흡사했다. 그래서인지 지난일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리노라니 쓰라려나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장랑랑이나 내나 우리는 다가 “위대한 사회주의조국”에서 살고있음으로 하여 자호를 느끼면서 가슴에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젊은이였지 결코 본성이 이질적인 그 어떤 나쁜분자는 아니였던 것이다. 하건만 이른바 “위대”하다는 “문화혁명”이 오니 우리는 다같이 억울함을 당해 가슴심처에 지을 수 없는 상을 입은것이다. 왜? 왜서 우리는 이 되어 그 꼴 그 신세로만돼야 했던가? 왜? 왜서?.... 우리가 잘못한 것이 뭐고 지은 죄가 대체 무엇이였길래? 우리는 다가 문학을 사랑했길래 작가, 시인으로 되려했을 뿐이다. 그래 우리에게 그렇게 될 자유마저 없었단말인가?... 과연 저주로운 사회, 망할놈의 세상이였다! 꿈엔들 생각이나했으랴, 랑랑이나 내나 우리는 다가 위대하다고 자부해 온 내조국이 그같이 무지한 광란속에서 암흑해질줄은 정말몰랐던 것이다!            1960년대 북경에서 제일활약이적이였던 지하문예쌀롱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곽말약의 아들 곽세영(郭世英)이 조직한 “X社”고 다른하나는 장랑랑(張郞郞)이 조직한 “태양종대(太陽縱隊)”였다. 그들은 중국문예부흥초기의 꿈을 이뤄보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공중루각이되고말았다. 문화혁명이 오니 아름다웠던 리상은 유리조각같이 산산히 부서지고 만 것이다. 원대한 포부에 자유를 추구한것이 죄가 되어 곽세영(郭世英)은 투쟁받다가 두팔이 묶인 그채로 층집에서 떨어져 죽고 장랑랑(張郞郞)은 “태양종대”를 조직했다하여 1968년에 “현행반혁명죄”로 몰려 투쟁받다가 1970년 3월 5일에는 사형으로 판결이 내린건데 총살을 당할 림박에 주은래가 그 일을 알고는 쪽지 한 장으로 목숨을 살려 유기도형 15년으로 개판(改判)을 했다가 1977년에 이르러서는 가석출옥(假釋出獄)을 한것이고 그런 후에는 해외로  떠돌이를 하다가 돌아온 것이다.    비명에 죽은 곽세영의 아버지 곽말약이 어떤 인물이란건 세상이 다아는바니 더 말치않고 제애비처럼 문학가가 되려했던 그의 아들 곽세영에 비하면 운세대통((運勢大通)이랄가 목숨을 건져냈길래 오늘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장랑랑(張郞郞)을 보기로 하자.    장랑랑(張郞郞)은 1943년에 연안의 중공중앙병원에서 태여났는데 그의 아버지 장정(張仃)은 저명한 화가, 미술교육가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진포문(陳布文)은 건국후 60년대초에 중앙미술학원의 문학과선생으로 교편을 잡은것이다. 그녀는 젊어서 한때 중앙총리판공실에서 기요비서(機要秘書)를 지낸적이 있었다. 하지만 입이 무거운 그녀는 그일을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기에 당안관리자를 내놓고는 래력을 아는 이가 거의없었다고 한다.      장랑랑(張郞郞)은 머리가 좋았다. 그는 1962년에 시험을 쳐 북경제101중학에 붙었다가 후에 북경외국어대학부속중학에 전학을 한건데 천성이 시쓰기를 즐기고 격정이 오르면 그것을 읊기좋아했다. 그의 그러한 재질이 또래 친구들을 흡인한  것이다. 하여 그같은 시애호자가 7~8명된건데  그 구룹빠가 곧바로 문예쌀롱으로 발전 한 것이다. 그들은 학교규률을 위반하지도 사회치안을 요란하지도 않았다. 사회주의를 반대하거나 공산당을 반대하는 일은 더더구나 없었고.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다가 착하고 좋은 학생들이였던 것이다.    어느날 그들은 이라는 장시를 격정높이 읊고나서    “이 시대에 문학작품다운 작품이 있느냐?... 없다! 이제 우리가 생기를 불어넣어 중화민족의 문화를 부흥시켜보자!”고 하면서 문예쌀롱을 조직하고는 그 이름을 “지하종대(地下縱隊)”라 지은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것이  작난이나 놀음이 아닌 정식행동이라는 뜻에서 장정(章程)과 선언(宣言)과 종지(宗旨)를 내온 것이다.    “그렇게 조직한게 벌써 큰 죄로 된다는걸 우린 몰랐지. 후에야 비로서 그걸 알게되였습니다.” 장랑랑이 하는 말이였다.       “주모자”라 하여 “현행반혁명죄”로 사형판결이 내렸을 때 그는 나이가 27살이였다. 이제는 고래회가 된 장랑랑이가 지난때  자기가 즐겼던 시를 읊었다.      나는 승냥이처럼    관료주의를 씹어버릴테다    위임장을 도무지    존중히 여기지 않아    어떤 종이장이나    저갈데로 다 가라    그러나 이것만은....      마야꼽스끼의 시 첫부분이였다.       60년대초 내가 조직한 문학크루쇼크의 정식성원은 다해봤자 나와 김인세(金寅世), 김성일(金成日) 이렇게 모두 셋뿐이였는데 김인세가 마야꼽쓰끼의 그 이 무척 맘들어서 외웠고 김성일이는 조기천의 을 외웠던 것이다.        오늘저녁에도 휘파람 불었다오    옥순이네 집앞을 지나며    벌써 몇 달채 휘파람부는데    휘휘... 호호...    그리도 그는 몰라준다오      날마다 직장에서 보건만    보고도 다시나 못 볼듯    가슴속엔 불이 붙소    보고도 또 보고싶으니     참 이 일을 어찌하오    ............      이 시는 5개절로 된건데 그는 그 시를 좋아하면서도 무척 애를 써서야 외워낼수 있었다. 공부를 제일많이했다는 내가 초중졸업생이고 그 둘은 소학교문을 나온 신세였던 것이다.      내가 좋아한건 제목이 그저 로만 되어진 바이론의 시였다.      국내에서 싸울자유없다면, 사나이여    이웃 나라에서 싸움터를 찾아라    희랍과 로마의 승리를 본받아    자유를 짓밟는 자들의 흉계를 짓부시라      인류를 위해 몸 바침은 장한 일이로다    언제나 고상한 이름이 따르리라    자유위한 싸움터는 어디에나 있거니    총탄과 교수대에 쓰러진다하여도, 사나이여,                     영예는 너의 것이 되리라.           이 시를 나는 지금도 의연히 좋아한다.       그때 우리는 한주에 한번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에 쌀롱을 했는데 정해진 장소는 나의 독방인 자그마한 서재였다. 그때는 내가 장가들기 전이였는데 우리는 우선 문학지식부터 공부했다. 였다. 그것을 교재로 사용했는데 강의는 내가 자진 맡아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1954년에 조선서 상,하 두권으로 출판이 된 였는데 화강이 지은 것이였다. 그것도 역시 내가 강의를 책임지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문학지식과 력사공부를 함께 하면서 습작을 한 것이다.     우리 셋은 다가 자기의 습작품을 내놓고 허심히 평을 받았다. 그런데  다들 열심스레 쓰느라했건만도 그게 맘과 같이 돼주지를 않았다. 배운 밑천이 너무도 짧아 수평미달이였던 것이다. 우리는 가차없이 서로 툇방놓는걸 표준으로 삼다보니 결국 벽소설 한편도 성공못했다. 고작 발표됐다는 것이  내가 쓴 쥐꼬리만한 시 몇수뿐. 그러면서도 내나 인세나 성일이나 우리는 다가 문학을 팽가칠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다. 작가가 되려고 실로 무진히 애를 썼던것이다.       우리 문학크루쇼크에도 강령이 있고 준칙이 있었다.   강령ㅡ 십년내에 자습하여 작가수평에 오른다.   준칙ㅡ 쌀롱때는 꼭 습작품을 갖고온다.   그저 이럴 뿐 다른건 더 없었다. 하건만 “문화대혁명”이 오니 문학크루쇼크가 강령이 있고 준칙이 있다하여 나쁘게 보았다. 그리고 그 “죄”라는 것이 무한상강(無限上剛)을 해서 온 성화공사, 온 화천현, 나아가서는 온 합강지구에서도 “전형적인 반동철증”이 되여 현행반혁명집단으로 몰아댄 것이다. 그 조직자였던 내가 투쟁대에 올라 끌려다니기를 옹근 4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에 보면 고 밝히였다. 그렇다고 고지식하게 그것을 믿은 내가 너무도 유치하고 어리석었던 것이다!    보복할 기회를 만났다고 얼싸좋아하면서 열성을 다한 “혁명자”가 만들어 내한테 씌운 “죄”를 보면 저그만치 10가지나 되였는데 그가운데 “외국과 내통한 죄”라는것도 하나 있었다. 내가 조선에 나가 문학공부를 하여 작가로 돼보려는 욕심에 리기영선생과 서신거래가 몇 번 있은건데 집이 털리워 거덜날 때 리기영선생의 편지마저 발각되여 함께 압수된거다.     그때는 중국에서 조선을 수정주의로 보았으니 당연히 적국이였다.       길지는 않았다. 내가 현간수소의 미결수감방에 같혀있은것이 45일간.     그 기간에 판결을 위한 예심을 4차례나 벌렸지만 “혁명자”들이 법원에 기소한 10가지 “죄악”중 어느 하나도 성립되는것이 없었기에 판결을 못한 것이다. 원인이 다른게아니아니다. 허무한 날조로 생사람을 잡자니 그꼴인게 분명했다. 이제는 “외국과 내통한 죄”를 놓고 막판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이럴때 주은래가 고맙게도 조선을 국사방문해서 량국간의 모순과 대결은 드디여 풀리게 되었으니 때는 1972년 4월이였다.    어느날, 얼굴이 도리암직한 왕간수장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너는 주총리께 감사를 드려라.”하면서 법원도장이 박힌 종이장을 주길래 펼쳐보니 란 네글자가 또렷이 씌여진 판결서였다.    그같이 그모양으로 멋없이 갇혔다가 무죄석방이 되여 집에 돌아온 나는 이틀간을 쉬고나서 빼앗겨 잃어진 첫장편소설 을 비밀리에 다시쓰기 시작한 것이다.                                    2012.1.16     
11    史論   당벽진참안과 서일의 조천 댓글:  조회:6485  추천:3  2011-12-03
    史論         당벽진참안과 서일의 조천              (當壁鎭慘案 与 徐一朝天)                                       김 송 죽      1. 서일이 찾은 구국방략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형제자매여, 단군황조(檀君皇朝)께서 상제좌우(上帝左右)에 명을 내리시여 우리에게 기운(機運)을 주셨다. 세계와 시대와는 우리에게 복리를 주자고 한다. 정의는 무적(無敵)의 칼이므로 이로써 하늘에 거스리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4천년 조종(朝宗)의 영휘(榮輝)를 빛내고 이로써 2천만 적자(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면 2천만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것이냐, 힘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옥토는 자가소유(自家所有)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형제자매여! 국민된 본령을 자각한 독립인것을 명심할것이요,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의 자립인것을 명심하도록 황천의 명명(明命)을 받들고 일제의 사악(邪惡)으로부터 해탈하는 건국(建國)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은 무오년(戊午年)인 1918년 11월 13일에 서일이 길림 화룡의 삼도구 총본사에서 대종교 제2세교주 김교헌(金敎獻)을 비롯한 윤세복과 김동삼,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김좌진, 리시영, 리상룡, 신채호, 리동녕 등과 함게 대종교중진을 주축으로 하여 39명의 서명자를 모아 만주와 로령, 미주의 유지일동이란 명의로 세상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인 것이다. 중광단(重光團)의 발기로 발표했다하여 혹은 “중광단선언”이라고도 하는 이  “무오독립선언”은 일제에 항쟁한 거족적인 3.1운동의 선언서는 물론 일본 동경류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보다도 선구적으로 썩 앞섯거니와 그에 기폭제로 되였기에 무엇보다 력사적인 의의와 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무오독립선언”은 이같이 민족종교인 대종교바탕위에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것은 조국을 광복시키고야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코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깨우치면서 일떠나 항일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만민에게 열혈이 끓게하는 이 구호를 제일먼저 내놓고 웨친 사람이 곧바로 서일이였다. 이는 그가 내놓은 철두철미한 구국방략이였던 것이다!      그뿐아니였다. 그는 그같이 자기가 조직한 중광단의 위력으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침략자를 향해 공개적인 선전을 했을뿐만아니라 이듬해의 8월 7일에는 자기가 건립한 대종교의 대한정의단을 대한군정회로 재조직하였고 그러면서도 다시한번 의미깊고 값진 창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열열하고 절절하며 따라서 매력적인 강한 호소력을 갖고있는 이 창의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구국성전에로 한결 더욱 불러일으키면서 그들을 자기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웠던 것이다.      그당시의 북간도지역을 놓고 보면 기독교계의 북간도국민회를 비롯하여 대한정의군정사, 의군부, 광복단, 이민단, 야단 등 무려 40여에 이르는 각종 단체들이 많았지만 거개가 아직은 무기는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백포종사 서일(徐一)이 주도한 군정부는 대종교도들을 기반으로 행정구역을 획정하고 자기의 군정부를 수립하고는 무기를 구입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당시 다른 독립단체들은 생각못한 것이였다. 군정부는 대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한편 무기구입을 계속 다그치면서 재만동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대중교섭(對中交涉)을 했고 일제와 결사전을 하기 위한 작전방안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전(實戰)이였던 청산리회전에서 멋진 효과를 낸 것이다.      이로보아 지난세기 상반기 조선의 독립운동사상에서 서일이 이룩한 공적과 위훈은 광채로우며 그 어느 누구에 비해도 절대 짝지지 않는것이다. 사실이 증명하고있있지 않는가! 어디 내놓고 말해보자, 탁상공론이 그래 망해버린 내 나라를 살려낼 수 있었으며, 식민지로 전락된 내 나라를 독립하게 만들 수 있었던가? 세상에 자비한 침략자란 없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다시생각해봐도 그가 민족의 얼인 대종교를 바탕으로 만주땅에다 발을 붙이고 전민이 대동단결하여 일떠나서 “육탄혈전으로써 독립을 이룩하자”고 한것은 옳았거니와 그 구호는 정확했던 것이다.      독실한 대종교도며 출중한 문무겸비의 수령급인물이였던 그는 생전에 자기가 내세운 방략을 실천에 옮기면서 그를 완수하기 위해 혼신의 힘과 열정을 다한 것이다.      허나 그리했음에도 예상밖에 덥쳐든 만주토비의 잔인무도한 횡포(橫暴)로 인하여 그는 그처럼 바라고 바라던 광복을 보지도못한채 너무나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독립진영의 크낙한 손실이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자신이 비명에 세상을 떠나야했으니 억울하고 맹랑하고 애석하기가 더 말할것 없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감이라면 오로지 그것일거다. 역사연구에서, 평론계에서 혹자는 그가 독립혁명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결했다는 그 하나를 리유로 꼬리잡고 그의 공로를 무시하고 인격마저 품하한다면 그것은 조사가 깊지 못한 저질적인 연구며 틀리는 것이다. 그렇게해서는 안된다. 하나의 사물이 변화 발전함에는 그 자체만의 당당한 리유를 갖고있는것이다. 그러한즉 그것의 기본적인 인소와 원인을 찾아 밝혀냄으로써만이 판단은 명확하고 정확해질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물변증법인것이다.      하다면 서일을 어떻게 볼것인가?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였던가?      한마디로 말해 그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서렬에 서는 위인인것이다. 무엇을 거성(巨星)이라하는가? 바로 이런 사람이 거성인 것이다. 그는 그 어느누구보다 명철한 구국방략을 세웠거니와 그를 선도(先導)한 총재였고 실제상 통수(統帥]였던것이다. 헌데 그러함에도 력사는 유감그럽게도 그를 거의 망각하고있었다. 왜서였던가? 사람들은 그를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다. 이 거성은 제 빛을 빛내게해야 한다. 이는 후세의 사명이거니와 신성하고도 값진 작업인 것이다.     2. 밀산지주(密山地主) 송곰보      필자는 이 면을 빌어 주요하게 당벽진참안(當壁鎭慘案)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백포종사가 조천(朝天)하게 된 리유를 규명하려한다.     먼저 당벽진(當壁鎭)이 대체 어떤곳인가부터 알아보자.      당벽진은 현재 중국의 동북(옛적의 만주) 흑룡강성에서는 동남쪽구역에 들어있는 한 자그마한 촌마을로서 앞에는 흡사 망망한 바다와도 같은 흥개호(興凱湖)가 활짝 펼쳐져있다. 해변가의 풍경을 방불케하는 그 일망무제의 커다란 호수가에 자리잡은 이 촌락은 서남쪽으로 호수에 흘러드는 자그마한 냇물을 국계로 하여 로씨야땅과 중국땅이 거이맞붙는다. 가믐이 좀만들어도 내의 수심은 정갱이를 넘지 않으니 웬간한 절름발이도 저켠땅을 밟을수 있는 것이다. 명색이 국경인 그 졻고도 얕다란 내를 건너 남쪽으로 몇리를 안가서 저켠 이국인 로씨야국토의 뚜리로그정거장이 있는것이다. 그 뚜리로그정거장은 1916년부터 통차(通車)가 시작된 철길ㅡ 로씨야의 중심부를 지나 멀리 원동으로 뻗은 그 기나긴 씨비리아대철도가 북쪽의 하바롭쓰크에서 남쪽으로 꺾이여 이만(伊曼)을 경유하면서 멀리 남쪽끝 해변가도시인 울라지보스톡으로 가다가 서북으로 겯가지를 오리변자모양으로 꼬블꼬블 뻗은 다른 한갈래철길의 맨 말단역이 되는 것이다. 맑게 개인날 언덕에 올라서면 그 자그마한 도회지의 정거장을 육안으로도 볼수있다.       이 당벽진에는 1889년부터 인가가 생겨났는데 그때는 여기를 쾌당별(快當別)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12년부터 이사호가 점점 늘어나면서 자그마한 가계방도 생겼고 1917년부터는 조선서 건너온 피난민들이 여기에 한 집 두 집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닥 높지 않은 야산을 내놓고는 황량한 들판이였지만 미개간지가 많았고 토지는 비옥했다. 그래서 제고향에서 그냥살자니 왜놈의 꼴이 보기싫고 가혹한 착취에 배겨내지 못해 농사를 지어먹어도 좀 편안히 지어먹으며 살아보자는 생각에 남부녀대로 솔가도주를 한 이사호들은 이곳에 와서는 이사짐을 푼것이다.      그리멀지 않은 거리다. 여기서  북쪽으로 곧추 50여리 들어가면 밀산(密山)이다.      밀산(密山)은 본명이 봉밀산(蜂密山)인데 역사가 유구하거니와 그때 벌써 주민도 근 만여호에 달하는 큰 부(府)였다. 그런것을 1913년에 이르어 부(府)를 페지하고 이곳에다 행정기관인 현(縣)을 세운것이다. 한족, 만족, 허저족의 이사호가 점점 많아감에 따라 당벽진과 마찬가지로 밀산현내의 다른마을인 하량자(下亮子), 삼성촌(三成村), 향양촌(向陽村), 영안촌(永安村), 복전촌(福田村), 북하촌(北河村), 기성촌(箕城村) 등 마을에도 조선족호수가 늘어났던 것이다.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하여 기분좋고 힘도났지만 수백리 머나먼 안쪽밀산의 당벽진까지 여러날을 행군하고보니 서일역시 다른 여늬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시름놓고 쉬지는 않았다. 그럴 형편이 못되였던것이다.      이곳은 대종교 동이도본사관구(東二道本司管區)였다. 서일은 전해에 한기욱(韓基昱ㅡ壬戌3月15日解任)선생에게 여기 밀산일대의 대종교사업을 맡긴바있다. 고맙게도 그가 책임지겠다고 자진해나섯던 것이다. 대종교의 사업 역시 무장투쟁과 마찬가지로 중히 여기면서 시종 교세확장을 강조해 온 서일은 이곳에 와서도 의연히 전투적인 긴장한 태세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우선 한기욱선생을 데리고 함께 여기 당벽진(當壁鎭)에 거주하고있는 백여호의  동포집부터 하나하나 찾아 방문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살아가는 형편을 제대로 료해하고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교당이 적극적으로 나섯다. 이 마을의 주민은 다가 대종교도들이였는데 그들이 자진하여 제마을에 오는 독립군의 주숙과 작식을 책임지마고했던 것이다. 허나 고맙긴해도 그건 현실적이 되지 못했다. 하루이틀이면 몰라도 시일이 얼마걸릴지 모를 3,500명넘는 사람의 입을 그들이 담당해낼수 있을가? 말도되지 않는 일이였다. 그래서 잠을 가가호에 나누어 자기로 하고 식사는 몇군데 장소를 잡아 모여하기로 했으며 매일 독립군이 소모하는 다량의 식량은 밀산시내에 있는 량점(糧店)의것을 사오기로한 것이다.        그런데 그 량점의 주인은 전해에 한번 소작료인상문제로 인하여 서일과 불쾌한 마찰이 있은 쑹마즈(송곰보)였다. 그의 땅은 밀산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 지역을 벗어나 멀리 왕청에도 얼마 가량 있어서 대리인을 내놓고 세도를 부리며 사는 대지주였던 것이다.        그는 령황지주(領荒地主)에다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를 겸하는 자였다.        무엇을 령황지주(領荒地主),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라고 하는가? 당시 북만의 지주는 대체로 세가지 부류로 나뉘였는데  황무지를 헐값으로 사서 령황토(領荒土)를 비준받은 자를 령황지주(領荒地主)라 하고  관리의 가족이거나 친척으로서 세력을 믿고 령세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였거나 관부에서 땅을 재일 때 뢰물을 먹이고 면적을 적게 매기여 많은 땅을 차지한 자를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라 했다. 그밖에 토지를 사지 않고도 묘한 수단으로 토지대장(土地臺帳)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런자를 점황지주(占荒地主)라 했다.    속담에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메운다했다. 밀산의 송곰보는 두가지를 겸한 지주였건만도 소작농의 고혈을 좀이라도 더 빨아먹자고들었다.      근년의 일이였다. 그가 왕청소작농들의 소작료를 인상하려하자 서일은 한말(韓末) 젊었을적에 중국사신(中國使臣)으로 경성(京城)에 와있었던 원세개(袁世凱)를 생각하고 용정촌(龍鼱村)에 있는 이동춘(李東春)선생을 찾아가 이 일을 하소하고 그의 방조를 받은바있다.. 이동춘선생은 전에 한때 원세개(袁世凱)의 통역관으로 일을 보아주었기에 그와는 누구보다 교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동춘(李東春)선생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한 장 써갖고 서일과 같이 북경에 갓다. 그때 총통의 보좌에 올라앉았던 원세개(袁世凱)는 상소문을 보고나서 종이에 몇글자 적어 봉투에 넣어 합봉한 후 그것을 호명신(胡明臣)비서에게 주면서 동반하여 봉천의 군무독리(軍務督理)이자 길림, 흑룡강 두 군무독리를 겸한 진안상장군(鎭安上將軍) 장석란(張錫鑾)에게 갓다주어 처리하게끔 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밀산의 송지주는 찍소리못했다.   그러나 때가 지나 지금에 이르러는 달라졌다. 하다면 이때는 형편이 어떠했는가?   만주행정기구(滿洲行政機構)를 볼 것 같으면, 광서(光緖) 33년에 길림장군(吉林將軍)이 길림성(吉林省)으로 바뀌고 선통(宣統) 3년 즉 1911년에는 그 아래에다 서남, 서북, 동남, 동북 등 4道를 두어 11府, 1州, 5廳, 18縣을 관할케했는데 밀산은 본래 영고탑부도통(寧古塔付都統)에 예속되여 있다가 광서(光緖) 33년(1907년)에 갈라져 나와 밀산부(密山府)를 설립한 것이다. 한데 신해혁명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 되었다가 대총통의 직위를 절취한 원세개(袁世凱)가 북경에다 지주매판련합독재의 북양군벌정권을 세운후 내전을 일으키면서 약법을 뜯어고치고 독재전제를 실시하고자 국회를 해산시키는 한편  1914년 5월 1일에는 (“民三約法” 또는 “新約法”이라고도 함)을  공포했다. 그 약법은 법률상 총통의 극대(極大)의 권리를 보장하는것인바 원세개(袁世凱)가 처음부터 꾸어 온 황위(皇位)의 꿈을 실현키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는 성(省)을 다시금 장군부(將軍府)로 고쳐버렸다. 중앙은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제를 이같이 자꾸 개변하는지라 바람부는데 따라 낯짝이 변해가는 구관료들의 손에 조종되고있는 아래의 기관들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불온한 세상이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악착스런 흡혈귀로 변해버린 밀산의 송지주는 량식값을 올려놓고 독립군에 팔면서 값을 깔축없이 받았다. 독립군의 돈을 많이 버니 웃음집이 흔들흔들했다.      3. 청보산토비 진사해       밀산(密山) 송곰보의 가원은 웬간한 황궁못지 않게 으리으리했다. 송곰보는 밀산(密山) 본토배가 아니였다. 10살나던해에 산동(山東)에서 들어온 이주민의 자식인 것이다. 조상의 뫼(墓)를 잘써서인지 아니면 부지(敷地)가 좋았던지 어른이 되여서는 숱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된 것이다. 그는 여러 세대가 모여사는 세가이다 보니 권속이 근 백여명에 이르었다. 그는 관리도 아니였는데 무슨재간에 권세렴토지주로는 되였겠는가? 물론 관리는 아니였지만 처남 둘중 큰처남이 현장의 부원이고 작은처남은 인원이 근 300명이나 되는 청보산토비(靑寶山土匪)였던 것이다. 그자가 성명이 진사해(陳四海)였는데 그가 은근한 뒤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곰보의 아들 둘중 큰것은 방량(方亮)무리의 새자(崽子)였던 것이다. 급이 없는 하졸토비를 가리킨다. 방량패는 인원이 30명도안되는 토비였다.      당시 항간에는 이런 노래가 나돌았다.          한가마밥먹어야 친할까       토비와 군대는 한형제라네       서로좋고 배가 맞아       두바지 갈아입으며 살아간다네       나라의 군대와 토비는 가리지 못할 지경으로 한통속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이였다.      토비가 소털같이 많은 만주땅에서 송가모양으로 버젓이 살아갈려면 부모가 자식을 최소한 다섯형제정도는 출산하라했다. 그래서 자라면 하나는 군인, 하나는 마적, 하나는 관리, 하나는 상업, 하나는 집지킴을 한다는 것이였다. 형제가 그같이 군인, 마적, 관리, 상업, 집주인으로 되어 엉켜 붙으면 만일의 경우 불의의 사고가 생겨도 상호 련계가 되어 맺히는 고리를 푸는것이다.          인간세상이 대체 얼마나 넓고 생사변역(生死變易)하는 존재 또한 얼마나 될가? 옛기재에 보면 360항업(恒業)이라 했지만 그것만이아니였다. 어느때부턴지는 알수는 없지만 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는 비적(匪賊)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직업이 생겨낫던 것이다. 이를 어떤 지방에서는 호자(胡子)라 했고 어떤 지방에서는 향마(響馬) 또는 봉자수(棒子手), 마적(馬賊), 강도(强盜)라 불렀다. 해를 거듭하고 대를 내려오면서 그 한무리도 점차 자라고 성숙해져 자체의 조직기구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의 두목을 내오는 방식이 있게 되었으며 종교와 신앙이 있어서 토템과 숭배가 있게 되였고 자기들만의 언어와 규률과 풍속이 따로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존재로 뚜렷이 자리잡은 것이다.         류자(綹子)수가 거의 300명이나 되는 청보산(靑寶山)이 웅거하고있는 산채(山寨)는 완달산完達山)의 심처에 있었는데 진사해(陳四海)는 그 청보산토비무리에서 수이샹(水香)의 자리에 있었다. 수이샹(水香)이라면 산채(山寨)에서는 물론 출정시 초소(哨所)를 포치하고 초병을 관리하며 전반 류자(綹子)들의 규률을 제정하고 장악하는 직책을 맡은 자인 것이다. 토비를 통털어 류자(綹子)라 부르는데 새자(崽子)라 하면 일자반급도 없는 일반 류자(토비)를 말한다. 류자(綹子)가 수백명 천에 달하는 무리에서는 그 수괴(首魁)인 따당쟈더(大當家的ㅡ큰형님)아래에 리쓰량(里四梁)과 외쓰량(外四梁) 즉 8대금강(八大金剛)이 제대로 갖추어진다. 그같이 조직구성이 째이고 조직화된 규모를 갖춘 큰 토비무리에서 수이향(水香)은 네 번째 자리에 있으니 주인급인 땅쟈더(當家的)줄에 드는 것이다.       맛두령인 따당쟈더(大當家的)아래 여덟금강(八大金剛)은 포토우(炮頭), 량타이(梁臺), 수이샹(水香), 반둬둬(翻垜的), 양즈방(秧子房), 화서즈(花舌子), 챠챈더(揷千的), 즈좡(字匠)이다. 포토우는 전반대오를 이끄는 코치고 량타이는 량식관리, 수이샹은 기률, 화서즈는 련락, 챠챈더는 정찰, 즈좡은 문서(文書)를 맡은 것이다.       어떤 일로 마찰이 생기면 원쑤되기 쉽고 그러면 복수가 따르기에 피비린 살육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과는 예측키 어려운것이다. 오늘 어우렁더우렁 지내다가도 밤자고나면 심기일전하여(心機一轉) 서로 등을 돌릴때도 있으니 약육강식(弱肉强食)을 하는 것이 바로 북만토비사회였던 것이다.      4. 독립군의 역경        여러 독립군이 다 모이자 로시야로 이전해야 한다는 설계가 나온것이다. 당시 연해주방면에 동포한인(韓人)은 30여만에 이르었다. 그리고 그곳 한인조직들은 이쪽에서 건너가면 기꺼이 맞아주리하는 태도를 보이기도했다. 하자만 그곳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자체가 믿음성이 당당치는 못했으니  사실상 그것은 현실을 떠나 리상적이 되지 못한것이였다.       국경너머의 땅에서 볼세비키와 꼴챠크지간의 전쟁이 끝났다하여 이쪽에서 바란것과 같이 평화로워진건 아니였다. 당시 로씨야의 원동지방을 놓고 보면 그곳을 영원히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출병한 일본무력의 부축으로 세워졌던 치따의 쎄묘노브정권이나 아무르주 해란포(海蘭泡) 즉 블라고베쉔스크(자유시)의 리노브정권이나 그리고 흑용강과 우쑤리강의 합수목에 있는 큰도시 하바롭쓰크에 세워졌던 백계정권이나 다가 홍군무력에 의하여 하나하나 붕궤되였다.       두해전이던 1918년 11월의 일이다. 꼴챠크가 씨비리아의 옴스크(鄂木斯克)에다 제일큰 괴뢰정권인 꼴챠크정권을 세우고는 쎄묘노브정권, 리노브정권과 카르미꼬정권을 령도한다고선포했었다. 허나 그것은 명의였지 실질은 아니였다. 1920년 1월에 이르러서는 원동지방에서 한때 기염이 대단히 높았던 그 꼴챠크정권이 결국 쏘련홍군에 의하여 분쇄되였거니와 그 두목들은 2월 6일에 처단되였던 것이다.      볼쉐비크는 승리했다. 하지만 그러했음에도 볼쉬비크주권이 세워진 쏘련은 제구실을 못했다. 민족해방을 절절히 바라는 약소국을 구원해준다고 선포했지만 불손한 자들이 신의를 저버림으로 하여 약소국가를 해치여 되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못한 일이였다.        이에 앞서 그 어떤 예감이였다할가 서일은 비록 여러수뇌자들의 일치한 요구에 의해 새로 결성된 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는 되였지만 제 주장을 세움에는 맥을 그리쓰지 못한것이다.  여러날을 두고 의논했건만도 부대를 살리려면 쏘련으로 건너가야한다는 주장이 우세였기때문이다. 그는 끝내 하는수없이 제 주장은 보류하기로 하고 대다수의 의견에 따르었을 뿐, 처음부터 그의 주장은 의연히 독립군단이 피전책(避戰策)으로 일시 로시야 원동지방으로 넘어갈수는 있으되 그곳 쏘련공산당계 조선사람의 무장대와 합치거나 완전편입되는데는 동의하지 않는 태도였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나오게 된것은 신생한 쏘련공산당 즉 볼쉐비크가 약소국가의 운명에 대해 지극히 동정하고 관심을 한다고 태도를 표시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정권이 공고하지 못하거니와 따라서 너무나 생소해서 믿음이 가지 않았던것이다. 서일은 태도가 그러면서 지어는 말못할 두려움까지 느끼고있은것이다. 그 두려움은 어디서 생긴것이였던가? 그것은 한고향사람으로서 숙친했던 최재형의 죽음으로부터 생긴것이였다.      로씨야로 이주한지 오랜 최재형은 제1차세계대전기간에 로씨야군의 육류용달상노릇을 해서 거부가 된 사람이였는데 로시야에 건너간 동포치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없다고 한다. 최재형은 부유했다. 그는 그들을 제집식구같이 여기면서 안치(安置)하고 생활을 돌봐줬거니와 계몽교육에 직접 투신하기도했던 것이다. 그랬은즉 그의 그 헌신성이야말로 본받을것이요 우러러 탄복이 가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볼쉐비크는 정권을 틀어쥐자 전에 그가 짜리로부터 훈장을 받은 일이 있었다하여 주의주장이 달랐다면서 이라 몰아서 없애치운것이다. 때는 1920년 4월 5일.  체포된 인원을 보면 블라디보스톡에서 76명, 니크리에서 51명이였는데 그들은 다가 조선동포사회에서는 손꼽는 지도급인물들이였다.       최재형은 다른 세사람과 함께 총살을 당한것이다.      서일은 도만(渡滿)하기전 고향에 있을적부터 최재형은 동포애가 지극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치는 좋은사람이라 들었고 그 자신이 연해주에 갔다가 제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던 것이다. 하여 그는 그를 일반사람을 초탈한 위인으로, 덕망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보고 마음속 깊이 존경해온 것이다. 한데 그런 사람이 죄를 쓰고 죽다니?  왜 죽어야하는가?       1921년 1월, 엄동설한이였건만 새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은 밀산의 당벽진(當璧鎭)을 떠나 동북쪽의 호두(虎頭)에서 국경선인 우쑤리강 얼음판을 걸어 이만(伊曼)으로 갔다. 지금은 로씨야원동지방에서 주요한 군사요지로 되고있는 이만(伊蔓)이 그 당시는 원동수부인 하바롭스크에서 남으로 뻗은 씨비리대철도선에 있는 그리 크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도시로서 서로 적대가 되는 쏘련군과 일본군의 완충지대에 놓여있은것이다.       그때 서일자신은 국경을 넘어가지 않고, 형세를 봐가면서 차차 움직이기로 작정하고 밀산남쪽의 당변진에 남은 것이다. 자기까지 떠난다면 그곳을 잃을것만 같아서였다. 하여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은것이다. 만일의 경우 쏘련으로 건너간 이들이 돌아온다해도 몸둘곳은 있어야할게 아닌가. 여기 당벽진(當璧鎭)에서 논을 풀고 농사질을 하여 월경한 군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리라했다. 그것역시 그가 기여히 당벽진(當璧鎭)에 남게된 주요원인의 하나였다. 그는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장차 독립군이 다시 모이면 둔병제를 실시할 타산이였다.  그가 당벽진에 데리고 남은 인원이 많지는 않았다. 다해봤자 40여명이였다.        밀산의 당벽진에 모이여 새로결성된 독립군단은 다가 로씨야로 건너갔다.      원 북로군정서의 사병 천여병도 건너갔다.      그런데 운명이 고약한 희롱질을 한다고나 할가. 새로 정비된 부대가 월경함으로 하여 앞길은 열려지는게 아니라 생각과 다르게 점점 막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쏘련은 그들이 희망을 품었던것과 달랐다. 이쪽을 대해줌이 처음과 같지 않고 변해갔던 것이다. 갈수록 수미산이니 꿈밖이였다.         부대를 이끌고 월경한 장령중 맨먼저 각성이 된 사람은 김좌진이였다. 그는 쏘련의 한인(韓人) 볼세비키측에서 군사훈련지도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니 그에 응해 경위원 몇을 데리고 자유시쪽으로 갓다가 되오고말았다. 가보니 교련을 받게되여있는 상대가 전부 로시아에 와서 태여난 후대들이였는데 로시야말만 번질줄을 알았지 제 민족어는 한마디도 할줄을 모르니 기구멍이 막히는 일이라 너무도 한심해서 실망하고는 에라 나는 못해내겠다 그만 이만(伊蔓)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쏘련측대표 카라한과 중국주재 일본공사 요시사와 사이에 캄챠카반도 부근의 해상어업권에 관한 문제를 놓고 담판이 있더니 형세가 묘하게 변해버렸다. 김좌진은  볼세비키측이 독립군을 향해 무장해제를 강요해오자 분노하여 자기가 거느리고왔던 원 북로군정서대오를 되돌려 우쑤리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가 자유시로 가지 않고 그렇게 이만(伊曼)에서 밀산으로 되돌아온것은 과연 현명한 결책이였던 것이다. 그가 그같이 행동했기에 원 북로군정는 처참한 자유시사변을 모면한 것이다.      한편 쏘련의 처사에 불만이 생겼던 서일은 김좌진이 대오를 이끌고 분연히 되돌아온것을 참 잘했다고 환영하면서 새로운 행동을 모색했다.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가, 원견이 있다고 할가, 그는 중광단설립초부터 정처가 불온하여 류랑하는 구의병(舊義兵)을 적극 끌어모았거니와 만주에 거주하며서 북로군정서의 관할내에 든 동포주민들을 상대로 하여 징병제를 실시해 자체의 병력을 멋지게 키웠던것이다. 그러했기게 만약 경우 부대가 부득불 해산될시 그들은 흩어져도 몸둘곳이 있는것이다. 쏘련에 대한 믿음이 희박했던 서일은 지금에 이르러 황차 쏘련이 배신을 하고있으니 더는 믿을바가 못돼서 훗날 부르면 다시모이기로 약속하고 자기가 데리고 당벽진에서 농사짓고 있는 그 40여명만 그전대로 그냥남아 농사를 계속짓게하고는 그 외의 원 북로군인원들을 모두 해산시켜 그곳을 떠나도록했다.      김좌진은 서일의 의견에 쫓아 밀산에도 당벽진에도 남지 않고 대원 몇만 데리고 독목하(獨木河)에 갔다. 그는 거기서 지내면서 시기를 보아 동산재기(東山再起)를 할 생각이였던 것이다.    서일이나 김좌진이나 이 처사도 잘된 것이였다. 그렇게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적을 겨루고 싸움도, 훈련도 할 수없는 상황이였는데 군량도 충족히 장만한 것이 없어갖고 그냥 집결해있어서는 뭘하는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수도 없었던 것이였다.        5. 횡래지액(橫來之厄)      조선의 독립운동사상 대비극으로 기록이 된 자유시사변!    전사자 272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된자 917명, 만주로 되건너오려고 흑룡강에 뛰여들었다가 익사한자 31명.      발생한 시간은 1921년 6월 28일!        그것은 독립군단의 총재였던 서일의 탓도 그 누구의 탓도 아니였다. 사건전반을 모두어 분석해보면 원인은 곧바로 쏘련의 오하묵같은 한인(韓人)볼쉐비크분자들이 리성을 잃을지경으로 정권욕, 군권욕이 극도로 팽창됐기 때문이였다. 그들은 저들을 믿고 건너간 이쪽의 그 3천명넘는 독립군을 보자 마치 굶주린 하이네가 먹이를 만나 서로 빼앗듯이 암투를 벌렸던 것이다. 그런자들이 이만에 간 독립군을 블라베쉔스크(자유시)로 오라고 할적부터, 한데모이라고 할적부터 군권욕은 팽창할대로 팽창해 극에 오르고있었건만 이쪽은 누구도 그것이 빚어낼 후과를 예상못했으니 그것은 그들을 대함에 경각성이 너무 무디고  신중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대방에 대한 그 믿음이라는 것이 지어는 무감각할지경 어리석었으니 독립군은 앙화(殃禍)를 입기 마련이였던 것이다.         자유시사변에서 패잔병의 신세가 된  이들은 저마끔 국경을 넘고 길을 간신히 찾아 밀산의 당벽진(當璧鎭)에 다시 모여들었다. 여기를 내놓고야 누가 그들을 용납할가, 다른 어디로든 갈곳이 없는 그들이였다.       아직은 곡식이 익고있어서 수학을 할 수 없는 계절이였다. 황차 이런때였으니 어느 농가면  여량식이 족했으랴? 제 구복도 달래기 어려울지경 집집이 거개가 량식은 각박하고 지어 내먹을것도 없을지경 극난일 때였다. 한즉 동정은 하면서도 함께 굶어죽자 할 사람은 없었다. 형편이 그러했으니 흩어져서 살길을 찾아 헤매이는 그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부담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속담에 “절간의 중도 사흘굶으면 빈대를 잡아먹는다”고 했다. 철같이 굳던 군규(軍規)는 언녕 허물어지고말았다. 있어도 아사지경(餓死之境)에 이른 그들이였으니 그것에 속박되여죽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살아보려했다. 그래서 구걸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죄한 백성을 해치면 죄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막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유한 집을 대함에는 달랐다. 주지 않으면 빼앗아 먹었다. 그러다 그들은 어느날 총을 들고 상점에 뛰여들었고 밀산의 량점(糧店)을 털었다.      리유야 어떠했던지간에 그들은 이미 다른 일종의 사나운 인간ㅡ 흉악스런 략탈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막바지에 이른 그들은 눈에 달이 올랐던 것이다.      이일로하여 밀산시내는 혼잡해졌고 어젯날 정의롭게 뵈였던 한국독립군이 반전(反轉)하여 한족(漢族)들의 눈에는 도적놈, 략탈자, 강도로 변해버려 증오의 대상이 되고만 것이다.       그들은 송곰보가 차린 량점(糧店)을 털어먹은 것이다. 그러했으니 송곰보가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보복하려하지 않을리 있는가? 당연한 일이였다.       송곰보의 큰아들은 량점(糧店)이 독립군의 습격을 받아 털리웠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는 당장 저의 방량패 따당다쟈더에게 고발해서 저의무리를 끌고 와서 보복을 하겠노라 했다 . 그러자 송곰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시 방량패(方亮覇)는 기국(起局)한지는 꽤오라지만 류자(綹子)수는 다해봤자 모두 30명도 되지 않았다. 우선 송곰보가 아들이 직접 보복에 나서는것을 꺼려했다. 독립군이 자유시사변을 당하여 비록 볼꼴없는 거지모양의 무리가돼서 구걸을 하다가 나중에는 략탈을 하고있지만 아무튼 그들은 군인이고 손에 무장이 쥐여있으며 인원수도 거의 300명에 이르는 것이다. 자칫하면 그깟 30여명의 방랑패(方亮覇)같은건 되녹아나고말것 같았다. 송곰보는 아들보고 “급한 개 당장 뛰여넘고 문다”면서 보복을 하자면 청보산(靑寶山)이 나서야한다고했다. 청보산(靑寶山)은 류자(綹子)가 300명에 이르니 독립군수자와 같아 대비가 되는 것이였다. 그리고 그 무리의 수이샹(水香)은 쑹마즈의 둘째처남인 것이다.      1921년 8월 27일 밤중에 진사해는 완달산(完(達山)에 있는 그 무리를 휘동하여 당벽진을 습격했다. 굶고 지쳐 곤하게 자고있던 독립군들은 얼마 반항도 못해보고 하나하나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다. 그것은 한입으로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참경이요 어쩌지 못하고 당한 참혹하고도 잔인한 대살육이였던 것이다!     독립군들은 신변보호를 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장을 제대로 갇추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이 거의 그것을 다룰 맥조차 없어서 버렸거니와 생에 대한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와서 적수공권이나 다름없는 꼴이니 살인에 미쳐 맹호같이 달려드는 자들을 어찌 당해내는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 독립군은 그렇게 면양모양으로 거의 반항도 못해보고 죽음을 당하고만 것이다.       이틑날이였다. 포교일로 여러날 당벽진을 떠나 다른마을에 가있은 서일은 당벽진에서 참변이 생겼다는 소리에 놀라 달려와 보니 과연  소문과 같은지라 억장이 무너졌다. 온 마을이 불에 타 없어졌고 살아남은 몇이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훼멸성적이였다. 자기를 따라서 함께 당벽진에 남아서 농사를 짓고있었던 젊은 군인과 자유시사변을 겪고나서 분산적으로 되건너온채 다른 어디로든 가지 않았던  젊은 군인들이 거의 다 죽고만 것이다. 그결에 주민이 죽은것도 여럿되였다. 눈에 보이는것이 그러했은즉 서일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자유시사변이 지난지 이제 두달인데 독립군은 또 그런 참사를 곱잡아당했으니 무엇을 의미하는가. 총재였던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을건 더 말할것 없고 비감과 절망은 극에 달해 더 살 용기를 잃었을것이요 그럴수록 자기의 책임이 중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흘만에야 사람들은 뒷산에서 돌을 베고 곧바로 누운채 숨을 거운 그를 발견했다. 그 자태가 줄을 그은것같이 두팔을 곧게 드리우고 눈을 조용히 감았으니 그로보아서 사람들은 그역시 대종사 라철이 구월산에서 조천할때의 모양으로 한얼이 되야만이 쓸수있다는 페기법으로 자결했음을 알았다. (당시 대종교도들의 분석이다.)       6. 원인분석    (1) 처째, 서일은 자유시사변에 너무나 큰 타격을 받았다.      전혀 예상밖이였다.      그런일이 왜서 발생했는가?        아래것은 자유시사변대한 격토문(擊討文)의 한구절인데 이것만 보아도 그 발생원일을 얼마든 알수있는 것이다.      “이 대한의용군에 참가한 단체는 싸하린군대 , 이만군대, 로령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혈성대 등으로서 중령(中領)에서 넘어간 독립군 3천여명이며, 로령에서 살던 우리 교포로 군인에 입대한이가 4천여명 도합 7천여명이 박일리야 박그레고리가 령도하였고, 이청천, 이종, 채영, 최진동, 안무, 조욱, 오광선, 강남일 등 15명이 참모부원으로 있었으나 이청천 등 중령(中領)에서 넘어간 간부들은 사건발생 3일전인 동년 6월 25일 자유시를 탈출하여 흑하에 나와있었다. 그런데 로령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의 자치기관인 한족회는 전대한민의회라 고치고 그 수령으로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 등은 자기의 세력발휘를 위하여 대한의용군의 존재를 악마와 같이 생각하던바 이들의 음모와 오하묵과 박일리아와의 불화가 이 참극을 연출하였다. ....”       (2) 그렇다면 당병진참안은 어떠한가? 그 참안은 왜 발생했는가?      그에 대해서는 조사보고도 격토문(擊討文)도 없다. 보고자료도 뚜렸한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목격자의 진술과 분석으로 규명할수박에 없다.      서일은 멀리 앞을 내다본 기초에서 방략을 세우고 전진을 모색한 것이다. 시급히 로시야로 건너갈것이 아니라 시세를 좀 더 관망하자고 한 그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거니와 독립전쟁시행과 교세확장을 병행시키면서 밀산을 쉽사리 버리지 말자는 생각, 그냥 눌러있으면서 그 지방을 장기적인 근거로 하여 농사를 짓고 둔전양병하면서 장차 새로운 격전을 맞이하자고한것은 옳은것이였다.       (3) 토비에 대한 서일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그의 큰할아버지 서장록은 토비손에 죽은것이다. 말을 달라는 토비를 마주해 뻔뻔스럽다면서 장기쪽을 낯에다 뿌렸던 것이다. 그래 토비은 총을 놓아 그의 귀한 생명을 빼앗은것이다.       그는 토비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지는않았지만 토비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 몇 토비는 중광단의 말을 억다짐로 빼앗지도 도적질도 하지 않고 몇필 달라고 했다. 그런것을   큰할아버지 서장록은 뻔뻔스럽다면서 장기쪽으로 낯을 때린것이다.    훗날 그는  그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이런말을 했다.    “달라면 줄게지 장기쪽은 왜 뿌리려, 그놈은 토빈데.”.      토비가 강도질하는건 천직인 것이다. 그렇다고 토비면 다가 막짓을 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화룡에서 왕청으로 오는 도중 그를 동반한 일행은 뜻밖에 토비 한무리와 조우하게 된다. 행패를 부리자고 드는 자가 석현의 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살았던 자였다. 그를 알아본 서일은 다른말없이 종이에 장송린(張松麟)이라는 석자를 써서 주었다. 그랬더니 토비는 그것을 보고 더 시끄럽게 굴지 않고 그만 물러갔다. 그 석자는 석현지주의 이름이였던 것이다. 토비는 서일이 제 주인과는 좋은 사이임을 알고 행패를 부리지 않은것이다.      토비면 그저 다가 마구잡이로 략탈하고 살인을 도락으로 삼는게 아니다. 처음해먹는 막잡이 떨거지를 내놓고는 그들도 도덕에 위배되는 짓은 하려하지 않거니와  그런짓을 하는 자는 영향이 나쁘다고 미워하고 없애버린다. 그러니 자칫잘못했다가는 되려 제 생명을 잃고마는 것이다. 큰 토비무리는 헌병이 되어 작은토비무리를 감독하고 지배하는바 말을 듣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비지간 싸움도 가끔 생기는 것이다.  떨거지 막잡이를 내놓고 규모를 일정하게 갖춘 무리의 류자(綹子)들은 10계률을 지켜야 한다.       일반백성의 우마차를 털지 않고     신혼의 가마를 건드려 강간을 하지 않으며     상가의 령전을 다치지 않고     우편차를 건드리지 않으며     나룻배를 건드리지 않고     나돌의 의사를 털지 않으며     도박군의 돈을 빼앗지 않고     도붓장사의 짐을 털지 않으며     대차점(大車店)을 털지 않고     승려나 도가의 물건을 빼앗지 않는다.     등등.       토비가 소털같이 많은 만주땅에 발을 붙이고 살자면 우선 그들을 알아야 하고 지혜있게 대처할줄을 알아야한다.      7월이 다가고있던 어느날, 마적두목 당산(唐山)이 고등군사반이 있는 고산자분교(孤山子分校)에 돈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부하 70여명을 이끌고 와서 갑자기 습격하여 윤기섭이하 박옥산 등 8명을 랍치해갔던 것이다. 이 학교에 군자금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그것을 빼앗자는 궁리였던 것이다. 그 군자금은 최형구(崔亨球)가 만들어서 준것이였다.      마침 이때 만주의 독립군상황을 료해하느라 안정근이와 함께 순회를 하고있던 조성환이 고산자분교를 찾아가다가 날이 저믈고 비도 내리는지라  통화현내에 있는, 고산자의 하동과는 거리가 불과 5리밖에 안되는 한 산간의 중국마을에 들려 그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공교롭게도 꿈밖에 이러한 변이 생긴 것을 알게되였다.     사람을 랍치할 때는 필시 어떤 교역을 하자는 것임을 알아챈 조성환은 위험을 무릅쓰고 토비굴을 찾아들어가 직접 그 수괴(首魁) 당산을 만나 그와 마주앉아 그자들의 불의한 행실을 조리있게 질책함과 동시에 군자금 8천원이 어떻게 모여진건가, 나라독립을 쟁취하려고  국민이 한푼두푼 모으고 지어 가산을 팔아가며 지원해 모여진건데 너희들이 아무런 리유도 없이 그것을 빼앗아가면 뭐가 되는가, 이건 어린애 코에 묻은 밥알까지 갈퀴질하는게 아니냐 하고는  무도의한 일제의 침략본질에 대해 중오를 품고 말하니 당산은 곰곰이 듣더니 동정심이 생기고 잘못이 느껴져 다시 더 돈을 내라는 말이 없이 인질로 잡아둔 사람들을 내놓으면서 이 일은 없었던셈 치자고 량해를 구하기까지 한 것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당황해말아야 한다. 담략과 지략만 있으면 그 역경을 돌릴수도 있는것이다. 자유시사변을 겪고 만주로 되건너온 이들이 밀산(密山) 고지주의 량점(糧店)을 털어먹었는데 막부득한 사정뿐이였던가? 달리 더는 생로를 찾을수 없었단말이가? 량점(糧店)주인이 누구였고 그 배경이 어떠하였는가를 좀만 알았어도 한끼 배불리자고 목숨을 전당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당벽진참안이 발생하게된데는 패잔병의 본성 그대로 자유시사변에 분산된 독립군인들이 규률을 무시하고 극도로 물란해진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부록     ① 최형구(崔亨球)ㅡ 정주인이며 1910년 대전에서 대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1912년군자금을 모집하고 자기 재산을 팔아 금(金) 6천700원을 만주 림관호(林寬浩), 장관선(張寬善) 등에게 송금하여 독립운동자금조달과 남만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 8천원을 모집하여 한진석(韓晉錫) 등에게 송금하고 사유재산처분금과 모집한 군자금 5천3백원을 휴대하고 도만(渡滿), 한진석 등 동지에게 수교(手交)하고 1920년 3월 리승훈(李昇薰)의 련락으로 전주, 선천, 철산, 양평, 신의주 등에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고 삼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새배달신문사 주필로 활약 1920년 의용단을 조직활동하다가 왜적의 밀정 박춘하(朴春河)의 야습(夜襲)으로 체포되여 가배산록(家背山麓)에서 피살되였다.                                                     (韓國獨立史 805쪽)        ②  토비를 통털어 류자(綹子)라고 부르는데 그들 중 일자반급도 없는자를 새자(崽子)라 한다. 전통적인 이런 토비무리의 류자면 누구나 다 목에다 불상을 걸어야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이다. 포대화상은 18라한 중 17번째 라한인데 일명 달마다라(達摩多羅)라고도 한다. 달마는 보디달마의 략칭인데 이역으로는 도법(道法)이다. 기원 527년에 숭산 소림사(小林寺)에 와서 벽을 마주하고 종일 말한마디 없이 앉아있기를 9년이여서 벽관(壁觀)이라했다. 리입(理入)과 행입(行入)의 수행(修行)방법을 내놓았는바 그는 서천(西天) 선종(禪宗) 제 28조와 동토(中國) 선종초조(禪宗初租)였다. 그러한 그가 바로 만주의 토비들이 조상으로 모시고 떠받들면서 숭배하는 신(神)이 된 것이다.      ③ 군벌혼전에 나라가 치정(治定)이 안되니 그 무슨 대성(大成)이요 오합군(五合軍)이요 쌍양호(双陽好)요 서패천(西覇天)이요 하는 이름을 버젓이 내걸고 료략질을 해먹으니 그놈의 토비성분이 과연 복잡하기도했다.       전문 가난한 백성집을 돌아가며 터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알짜강도였다. 그런자들은 거개가 기와가마는 감히 다치지 못하면서 보통백성을 인질로 잡아가거나 생활이 중축이 아니면 그보다 못한 집의 재물만 노리는 것이다. 민간에서 호자(胡子)라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런자들이다. 그들은 인원수가 많아야 7~8명, 지어는 혼자서도 이름을 달고 료략질을 해먹었다. 백성들은 이런자들을 제일증오하고 저주했다.      억강부약(抑强趺弱), 살부제빈(殺富濟貧)의 깃발을 들고 전문 기와가마(富者)를 털고 때로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도 하는 류자가 있는데 이런 토비는 우의것과 성질이 완연히 달랐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인원수가 많고 무장이 갗추어졌으며 우두머리는 담략이 있고 총잘쏘며 리외사량(里外四梁) 팔주(八柱)는 모두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기와가마를 들부시는 외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 자질구레한 비도손에 잡혀간 인질을 되찾아주기도했다. 이런 큰 무리의 토비는 자연히 정부측과 겨루면서 관계를 발생했는바 왕왕 대량의 경찰대거나 군인무장의 습격을 받아 숙청될 위험이 있길래 자체를 보호할 무장력을 장대시킴과동시에 산채의 안전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를 돌리였다.       염왕산토비가 바로 이러했다.       염왕산의 개척자는 위삼포(魏三浦)의 아버지 위록산(魏錄山)인데 그는 본래 청나라 장교출신이였다. 청나라때 생겨난 흑룡강장군아문(黑龍江將軍衙門)은 완전히 군정통치를 위해 설치된것으로서 그것은 하나의 엄격한 군사조직이였거니와 흑룡강장군휘하의 조직형식이였던 것이다.       동치(同治) 2년(1863)이후 흑룡강장군은 팔기병(八旗兵)중에서 꼴꼴한 자들만 선발하여 따로 팔기련병(八旗練兵)을 편성해 자기 관할하에 두면서 광서(光緖) 8년(1882)에는 봉천(심양)에서 교습(敎習)을 청해오고 천진에서 대포를 가져다 7년간 기계화훈련을 했다. 이 기간 흑룡강의 치치할, 후룬벨, 무얼근, 훅호트 등 성(城)의 훈련군은 보병 74개소대, 기병 16개중대, 포병 4개중대였는데 병력은 도합 4,700여명이였다.          그때 기병소대장이였던 위록산은 나이 이미 50세를 넘겼고 처자까지 있는 몸이였지만 대중이 공인하는 출중한 기마술과 용감성으로 하여 퇴대하지 않고 중대장으로 승급하게 되였다. 그런데 그와 암암리에 지위를 다투던자가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조정에 있다가 반역죄로 몰려 관동에 추방되여 온 이왕지사를 새삼스레 들춰내여 그것을 상급에다 밀고하는바람에 위록산은 그만 관문에 올랐다가 나떨어지고말았다. 이에 앙심을 먹은 위록산은 기회를 노리던 중 어느날 밀고자를 칼로 찔러 죽여 머리와 밸을 병영의 대문에다 걸어놓고는 그 자리로  부대를 뛸쳐나와 산에 들어가 록림객이 되고말았던것이다.        한 번 들여놓은 길에서 발길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그후 그는 이 산을 근거지로 삼고 관동일판을 횡행하기시작했다. 그러다가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그해의 7월에 그도 자기의 류자들을 거느리고 구국성전에 나섰다. 그는 봉천에서 모집해 온, 축로공과 파산된 농민으로 조직된 의승군(義勝軍)과 함께 흑룡강의 청나라군대인 진변군(鎭邊軍)을 협력하여 싸하로브소장이 지휘하는, 하바롭쓰크로부터 송화강을 거슬러올라오는 로씨야침략군을 항격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러다가 이듬해의 봄에 새자를 거느리지 않고 외지로 나갔던 그는 전에 한차례 지반쟁탈로 인하여 마찰이 있었던 밀산일대의 토비습격을 돌연히 받아 목숨을 잃고말았다.     그때 아들 위삼포가 나이 31세였는데 그는 창졸간에 사랑하고 애대하던 아버지를 잃고나니 구곡간장이 끊어질 듯 절통하여 련며칠을 울음속에 파묻혀있다가 분연히 떨쳐나가 싸워 끝내 적패를 섬멸하고 원쑤를 사로잡았다. 위삼포는 산채에 돌아오자바람으로 원쑤에게 을 시켰다. 은 토비들이 쓰고있는 형벌중 가장 잔혹한 형벌이다. 위삼포는 새자(崽子)를 시켜 굵기가 팔뚝만한 백양나무를 한길만큼 남기고 우를 자르게 한 다음 웃끝머리를 뾰족하게 깎게 했다. 그리고는 붇잡아 온 자를 알몸뚱이되게 발가벗겨 들어서 그 우에 올려놓았다. 나무가 믿구멍으로 들어갔다. 자체의 육중한 몸무계에 의하여 굵은 나무가 몸속에 점점 깊이밖혔으니 그 정도가 어떠했겠는가. 위삼포는 그렇게 원쑤를 죽여서는 목을 잘라 아버지의 제단에 올려놓아 제를 지낸것이다.      ④ 부드러움이 위삼포의 성품인건 절대아니였다. 신의 권능(權能)으로도 어쩌지 못한다는 북만토비의 거두 위삼포는 문무겸전(文武兼全)하여 감히 어깨를 겨룰자가 없거니와 용력과 지모가 난당이요 억강부약(抑强扶弱), 살부제빈(殺富濟貧)을 부르짖어 후덕(厚德)을 과시하나 잔인함은 상상키 어려워 동당들의 경탄과 악명을 함께 날리고 있었다.      ⑤ 류자들은 꿈을 대단히 중히 여긴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을 꼭 해몽했고 그런후에야 행동했는데 특히 맏두령이 더 그러했다. 만일 아이들이 나가는 상여를 붙잡고 우는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길한 징조로 여겼고 큰 바람이 부는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바람이 재산을 날려보낼 징조라면서 산채밖을 나가지 않았다. 꿈에 늙은 범을 보았어도 산채밖을 나가지 않았다. 늙은 범은 산신령나으리였는데 나가기만 하면 강자를 만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욱히는 개가 사람쫓는 꿈을 꾸었거나 나무에서 사람이 뛰여내리는 꿈을 꾸었다면 절대 가마마스러 나가지 않거니와 새자들이 개별적으로 산채를 나가는것 조차도 허락치 않았다. 그따위 꿈은 경찰이나 군대가 류자를 잡는 흉몽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한즉 두령이 꾸는 꿈은 실제상 산채의 모든 행사를 결정하고 모든 류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지휘봉이나답지 않았던것이다.      ⑥ 진사해는 도부상을 잡아세워놓고 몇푼안되는 돈을 말끔히 털냈다. 그리고는 그가 자기의 눈두덕에 난 흉터를 보았으니 아무때건 소문이 나서 시끄러우리라 여기고는 아예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기까지했던 것이다. 산채에서는 호인풍의 사나이란 평을 받아온 그가 밖에 나와서는 바로 이러했다. 자기가 간담상조하게 된 사람이 실은 사람을 파리잡듯해온 진짜살인광임을 황보재(黃寶才)는 미처몰랐던것이다.. 그가 청보산패에 있을 때였다. 사람의 생간을 먹으면 처음은 눈이 빨개졌다가 점차 파래지면서 나중에는 해리의 눈처럼 밝아진다는 말을 주어듣고는 거울까지 갗춰놓고 들여다보면서 련거퍼 다섯사람이나 죽이고 간을 빼먹었다. 온 관동땅을 들썽케했던 《당벽진참안》을 빚어냈을 때는 방향잃고 헤매는 나젊은 조선독립군전사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깨고 대골을 빼먹었다. 그런짓을 했길래 그는 민호를 볼때마다 자기가 그때 저질러놓은 죄행이 다시금 상기됐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잡치군했다. 한 것은 눈이 밝아지기는 커녕 그후부터 이뿌리가 통세나는 무서운 병만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따위짓은 다시는 하지 않고있는건데 어쩐지 민호가 자기를 뒤쫓고있는 독립군의 유령같기도해서 내가 과연 아무때건 저놈의 손에 잘못되지 않을가 하는  무서움에 가슴이 떨려나기도했던것이다.         산채에는 전에 진사해의 절름발이 할애비가 다 호적질을 해먹었다는 사이비한 얘기가 나돌아 심심해죽자는 류자들의 무료증을 풀어주고 있었다.      전에는 로씨야에서 정배살이하는 죄인들이 적잖게 변경지대에 몰려와있으면서 그곳의 한인(漢人)도적과 배가 되어 료략질을 해먹었다. 한데 그 이방인들은 동양인과는 유전인자가 달라서인지 거의가 붉은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어서 퍼그나 이색적이였다. 그렇다해서 항간에서는 그자들을 몰잡아 홍호자(紅胡子)라불렀다. 수염이 붉은 마적이라는 거다.     함풍(咸豊)년간(1831년ㅡ1861년)에는 악질토호들이 사사로이 검객을 모아 그들이 붉은수염을 달고다니면서 백성집을 털게 했다.      진사해의 할애비도 그렇게 살고싶었다. 그런데 사지가 남처럼 성하지 않고 절름발이가 돼놔서 처음에는 퍼그나 고민했다. 내가 왜 이렇게 병신이 됐느냐고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팔자를 원망하기도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떤 벌이로 생계를 유지하고푼 맘은 없어서 머리통을 다시굴려본 끝에 결국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나도 한 번 홍호자노릇을 해보자고 맘을 먹었던것이다.      ⑦ 염왕산류자들은 식량만은 략탈하지 않고 여지껏 제 돈을 주고 삿다. 자금은 주로 아편을 팔아 마련되였다. 그러나 식량을 구매하자면 해마다 미리 잘 연통해야했다. 관방에서 토비에게 먹을 것을 대여주면 《통비범(通匪犯)》으로 론죄하여 가차없이 목을 잘랐기 때문이다. 형편이 그러했건만 농사군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정부를 속여가면서 제가 지은 낟알을 한근이라도 토비에게 팔아먹으려 했다. 그들이 그같이 위험불구하고 량식을 파는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가? 다른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염왕산은 언제나 쌀값을 후하게 줫거니와 뒷수습을 잘해주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쌀판 이들이 후환이 없게끔 해주었다는 그거다. 위삼포는 만약 어느 마을에 고발자가 나지기만 하면 에누리 없이 그의 가족을 도룩냈다. 징계가 그러했길래 그들은 서로 감싸면 감쌌지 남을 물어먹는 짓은 절대 하려하지 않았다. 위삼포는 이같이 염왕산 주변에 있는 마을들을 어렵잖게 제 식량공급기지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을들은 실제상 그의 보호권내에 들어 다른 토비들의 위협을 적게 받았으니 편안히 보낸셈이다.      ⑧ 진사해의 끝장   밀산과 동녕에다 정보망을 두고있은 청보산패는 “당벽진참안”을 일으켜 독립군을 무수히 살해한 일로 하여 여러 토비무리에서 분별없이 너무 잔인했다는 비난을 들었거니와 실력이 그닥잖으면서 남을 깔보았다. 그리하여 만주 여러 무리의 미움을 사게됐고 북만에서는 첫손을 꼽는 장광재령의 염왕산토비 위삼포(魏三蒲)를 잘못건드렸다가  그의 손에서 녹아나고말았다. 300명중 그 잔여 50여명은 당벽진참안을 일으킨 이듬해 겨울에 동강 고태자(古太子)에서 무고한 허저인 장년 40명을 살해하였다가 동강아문(同江衙門)에서 조직한 허저인복수대손에 끝끝내 전멸당하고말았다.  그 두 참안을 조작한 흉범 진사해(陳四海)는 살길을 찾아 염왕산에 들어왔다가 암암리에 자기를 6년간이나 끈질기게 추격한 독립군전사 정민호(鄭民鎬)손에 끝내 죽고만다. 정민호는 자유시사변 때 흑룡강에 뛰여들었다가 싸할린의용대전사와 함께 허지인의 손에 구원된 독립군전사였다. 그를 구원해준 사람이 바로 나의 채방을 받은 허저인 로인 나쟈(那加)다.       ⑨  연구과제      (1) 서일이 사망을 그린 같잖은 서술.      (2)당벽진참안에 사망된 구체적인 수자?      ⑩ 자료출처     나는 근 30여년간 전문 만주의 토비만 연구했다. 나의 첫장편소설 과 세 번째 장편소설 은 다가 토비운명을 다룬것이다.      1987년도 겨울에 나는  과외편집작가신분으로 임무를 맡고 성정부에서 떼여준 소개신을 갖고 요하(饒河)에 가서 요하항일유격대와 최용권, 리학만에 관한 력사자료들을 수집했다. 5일간 당안관에 파묻혀있노라니 일부 독립군의 이름이 비치였다. 그에 앞서 썩 몇해전엔 나는 이라는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력사를 추종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10월달에 나는 동강(同江)에 갔다. 거기서 나는 허저족(혈철족)의 력사상ㅡ1922년 동강근처의 고태자마을(이미 없어졌음)에서 40명허저족이 토비손에 살해된 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잘알수있는 혈철족을 찾기시작한것인데 면바로 한사람을 발견했다. 나쟈(那加)라는 사람이였는데 그해 그는 나이가 이미 86세의 고령에 오른 늙은이였다. 그는 동강아문(同江衙門)에서 을 일으킨 토비는 이라 하여 그것이 존재하는 한 백성은 안녕할 수 없다면서 꼭 숙청해버려야한다고 하자 허저인(혈촐족) 복수대(復讐隊)를 조직하고 그 대장이 되어 토비숙청에 나섰던 사람이다. 그의 부친 가싼다(세습향장) 유만진이 고태자에 갔다가  토비손에 참살을 당한것이다. 허저인(혈철족) 복수대는 1922년겨울에 조직되였는데 그 이듬해인 1923년겨울에 이르러 청보산토비무리를 끝끝내 숙청해버린 것이다.      나는 “청보산”토비정황을 아는것만큼 더 알려줄수 없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완달산에서 50여명의 “청보산”무리를 끌고 나와 고태자에서 자기 아버지 가싼다 유만진을  포함한 허저인(혈철족)장년 40명을 살해한 주범은 청보산의 진사해(陳四海)였다면서 그는 그전에 당벽진에서 항일을 하는 조선인(朝鮮人)을 그만큼 살해했노라 알려주었다. 살해된 수자가 정말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내가 물어보았다. 그러니 그는 자기가 알기에는 허저족장년이 죽은 수자와 같았다면서 그자들이 사람을 그렇게 죽인게 그 어떤 산신제(山神祭)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위하연(魏夏演)이가 그 일을 자기보다 더 잘아는데 했다. 위하연이라는 사람 역시 그와 동족의 허저인(혈철족)이였는데 내내 독신으로 지냈다면서 그는 동강아문(同江衙門)에서 모집한 토비숙청대내의 “허저인복수대”에서 저격명수들로 따로 조직된 “포수대”의 대장질을 한 사람이였는데 청동매를 길러 집승잡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껏 살아있으면 아마 백살이 넘을거라했다. 그러면서 나쟈(那加)로인은 나보고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그건 알아서 뭘하느냐했다. 나는 내가 작가니 소설을 쓰자고 그런다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그녀석을 놓쳐버려 맹랑해했더니 그녀석은 위삼포(魏三蒲)손에 죽었다고 하면서 지벌을 입은거야 지벌을 입은거야했다. 내가 누구를 놓고 그러냐 물었더니 그는 자기 집의 배를 빼앗아간 진사해(陳四海)를 말한다면서 청보산무리에서는 가장 지악한 놈이라했다. 하여 나는 “당벽진참”이 발생하게 된 연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되였던 것이다.      그 허저인(혈철족) 로인이 알려줘서 나는 그한테 조선족 매부가 있었다는 것도, 그는 자유시사변때 그의 손에 구원된 독립군인 정민호(鄭敏鎬)였다는것도 알게되였다. 그가 제공한 자료를 소재로 하여 쓴것이  나의 세번째 장편소설 인 것이다.  
10    반도의 혈 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19 댓글:  조회:5677  추천:0  2011-11-02
대하역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3부  19.          산촌마을의 아침 대기는 참으로 맑기도하다.   《그 적삼 벗지. 땀에 절었는데 씼어야지.》    서일의 처 채희연은 롱짝에서 차곡히 개여진 흰 광목적삼을 꺼내여 남편앞에 내놓으면서 갈아입게 하고는 식솔들이 입던 옷가지들을 거두어 함께 함지에 담아갖고 빨래하러 앞내가로 나갔다.       어제까지 正義團 무장대원들의 옷을 빨래해준 그녀다. 마을에는 지난해 가을부터 계화와 정해식이 로씨아에 가서 좁쌀 5마대를 주고 바꾸어 온 재봉기(裁縫機) 다섯틀로 피복공장(被服工場)을 세워 전문 대원들이 입을 복장을 만드는 외 20여명의 부녀로 조직된 자원봉사대가 따로 있어서 그들의 빨래까지 전문 담당하고 있었다. 채희연이는 제집의 농사일을 비롯하여 가무(家務)를 혼자 떠메다싶히 하면서도 짬만 나지면 자원봉사에 나서군했다.     나이가 어느덧 11살이 된 아들 윤제는 네 살 위인 누나 죽청이와 여러해동안 마을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보살핌을 받았다. 한데 죽청이가 중학반을 졸업했으니 이젠 누나의 보살핌을 전처럼 받을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건 없었다. 이제는 소학교 5학년생이 됐으니까. 윤제는 총명한 애였다. 명동학교에도 漢文課가 설치되여 학생들이 넙적글을 배우고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차지 않은지 윤제는 늘 옥편을 펼쳐가면서 기타의 서적들을 즐겨보았다.    이날은 방학첫날이였다. 학교로 가지 않고 집에서 놀게 된 윤제는 제 아버지가 손수 지은 이 눈에 띠이자 그것을 쥐여 펼치였다.      夫施不適量 非仁也, 裁不中度 非智也, 行不稱權 非勇也.  《부시불적량 비인야, 재불중도 비지야, 행불칭권 비용야.》    윤제는 한글자 한글자 뜯어 읽었다. 소경이 담벼락을 만지는 격이였다.     죽청이가 옆에 있다가 귀담아 들어보니 구절구절을 생생하게 되새겨지는지라 아버지가 번역해준 그대로 뇌이였다.   《대저 베풀되 되질에 맞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요 자로 재되 되질에 맞지 않으면 지혜로운 것이 아니며 행하되 저울질에 맞지 않으면 날램이 아니네라.》   《누나야, 건데 이건 어떻게 번역하나?》    죽청이는 동생이 손가락으로 짚는 글자들을 읽으면서 번역한다.   《   그러므로 작은 것을 미루어 큰것에 미침은 용서함이 지극한 것이요,       굽은 것을 바루어 곧게 함은 분별함이 자세한것이요,    가벼운 것을 버리고 무거운 것을 가짐은 옳음의 결단이니라.》    그는 아래에 이어진 문구마저 계속읽으면서 번역했다.   《되질함은 범위가 있고 잣대질함은 거리가 있고 저울질함은 표준이 있나니 범위를 정함은 중심을 세움에 있고 거리를 미루어 아는 것은 위아래 사방을 맞춤에 있고 표준을 세움은 중간을 잡음에 있느니라.》    윤제는 두눈을 크게 뜨고 제 누나를 대견스레 보는 것 같더니 머리가 엉뚱하게 돌아져 어디 얼마나 아는가 볼까고 등사로 초판된 경서의 전부를 한 장 한 장 번져가면서 다 읽고 번역을 외우라고 했다. 그랬다가 그는 되려 요 괘씸한 애야 모르거든 허심하게 배울 념은 안하고 왜 버릇없이 노는거냐 하고 꾸중을 듣고말았다.    윤제는 힛죽 웃어 무안스러움을 뭉때리면서 물었다.     《누나야, 이건 아버지께서 지은거 맞지?》   《맞잖구, 백포 서일지음이라잖았니.》   《듣른사람 이걸 제대로 번역하자면 무척 힘들꺼야, 그렇지?》   《물론이지. 직접 지은이를 내놓고는.》    어느덧 시간이 가서 어머니가 빨래함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죽청이는 그제야 어머니의 일손을 돕지 안았다는걸 깨닫고는 스스로 미안해하면서 밖으로 달려나가 씻어 온 빨래를 함께 바줄에 널었다.   《오늘 왠지 그 사람이 자꾸 눈에 삼삼하구나.》    희연이가 빨래를 널면서 은연중 내뱉는 소리에 딸이 의아스레 놀란다.   《누굴 그래요, 어머니?》   《최삼용이란 사람을 말이다. 내 간밤꿈에 그이를 또 봤네라.》   《아니 어머니두 어쩜! 호호호....친분이 깊었던 남잔가요?》   《요 발칙한 년 보지 원!》    딸이 엉뚱하게도 의심을 품는지라 어미는 힐끗 가로보고나서 알려줬다.   《네 아버지 소시적 딱친구였네라. 길웅의 아버지랑 민수의 아버지랑 다같이. 짜개바지 시절부터 고향서말이다.》   《그렇다면 죽마구우겠네요! 그렇지요? 오, 알만해요! 아버지랑 소시적 한서당서 공부했다는 네 친구중 그 사람아닌가요? 맨먼저 장가가 자식보고....인천이라던가, 어디서 장사를 한다던 그 아저씨!》   《그렇네라. 네가 어릴적에 우리 집에 왔다간적도 있네라. 기억나느냐? 늘 인간삼락을 주장해서 동무간에 놀림받더니만....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있는지....간밤의 꿈애기를 했더니만 네 아비도 언젠가 꿈에 몇번  봤다면서 오래도록 소식막혀 답답하다 하시는구나.》    과연 최삼용은 이런 불안스런 세월속에 어떻게 살아가고있는지?....    “일민보”가 이번 기미운동에 관해서 중국신문이 발표한 몇가지 통계수자를 그대로 옮겨 실었다.        기미운동에 국내에서만:    시위운동참가자ㅡ 1353, 768명.    현지피살자ㅡ 6, 679명.    부상자ㅡ 14, 610명.    수형자ㅡ 18, 359명.    소각된 건물ㅡ 5, 678호.                          이무렵 상해임시정부 내무부는 7월 한달에만도 비밀리에 특파원을 함남, 경북, 서울, 충북, 평남, 강원, 황해 등지에 파견했고 교통부, 통신부에서도 활약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련통제가 실시되면서 남만의 獨立團에서 완고한 늙은 선비의 집합체인 紀元獨立團이 점차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그것이다. 상해임시정부 기관인 평안북도 독판부와 독립단체본부에서 김승학(金承學), 백의범(白義範), 백기준(白基俊) 등 세사람을 국내에 특파원으로 파송하여 련통제와 독립단지부를 조직케 했다. 백의범과 백기준은 용천, 의주 등지에 잠입 활동하고 김승학은 편안남도와 황해도일대에 밀행하면서 연통제와 독립단 지단설치에 노력한 결과 80여개소의 지부를 설치하고 수백명의 청년과 많은 액수의 군자금을 모집해갖고 남만 독립단본부에 돌아온 것이다. 이로부터 紀元獨立團은 공화적민주주의를 제창하는 상해입시정부를 반대하여 정면으로 맛서오던 종전의 태도와 립장을 고치게 된 것이다....    명동학교 운동장의 한쪽모퉁이다. 창격훈련을 하다가 쉬는참.   《통화현서 우리 교포 객주집이 왜경의 수사를 받았다며?....》   《평안도 선천 태산면장이 사살됐다는구나!》   《그 사건에 이광혁이란 청년이 잡혔다잖아. 한데?....》   《방금 그쪽서 새소식이 또 하나왔어. 그 사건을 획책한 일행 몇사람  기차타고 평양가서는 백주에 시가전을 했다는구나. 왜경을 총살하니 관공리가 크게 근신하는데 함일이라구 하는 우리 사람이 잡혔다나, 젠장!》   《또 있어. 고관면에 가서 주구배를 토벌했다는가. 그건 희소식이지.》   《그거 다 남만 독립단에서 해낸 전공아닌가, 부러워!》    이러저런 소식에 정의단 무장대원들은 속이 다시한번 들쑤셔났다.   《남은 그러는데....우린 이러고만있을건가?》      《아따, 서단장각하가 하신 말씀 벌써 잊었나, 때가 오면 싸우리라던.》    한 대원이 충고하는 것 처럼 붙는 불에 키질했다.    바로 이런 때에  성묵이 채오화 함께 나타났다. 그 둘은 근일 왜의 주구배로 전락된 자들이 간도에 있는 일본제국총려사관의 사촉에 의하여 동간도와 북간도에다 일민단(日民團)과 보민단(保民團), 강립단(强立團)을 세우려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여 이를 미연에 제거하기 위한 방책을 의군부(義軍府) 지도부와 함께 연구하러 화룡현 신봉동 명월구에 간지 3일만에 곧바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대원들의 흥분 된 얼굴을 먼저발견한  성묵이 무언가 다른 감촉이 느껴져 방금 무슨 얘기를 그리들 진지하게들 하고있었느냐 물었다. 그러자 방금전에 입을 놀리던 대원이 숨기지 않고 남만주 독립단이 적과 싸우는 얘기를 했노라 하고는 불만스러움을 토로했다.      《남은 나가 싸우는데 우린 언제까지 이러고만있을건가요?》    그 장소에 훈련감이자 무장단의 부단장인 라중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못들은척 우선 잠자코있었다. 대원들이 갑갑함을 못이겨 가끔 불만을 토하는건 자연스러운거라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는 다 말했느냐, 참 잘했어 하듯 빙그레 웃고나서 일어나 말문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적의 포위속에서 몇해째 훈련을 계속하고있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어느때건 한번 크게 겨뤄 볼 전쟁을 맞이하기위해서가 아니냐. 한데도 인내가 부족한 조급증에 견디지 못해 서둘러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생각해보았는가?.... 결국 허점만 드러나 위험하게 될것이라면서 그는 이야기를 하나 할테니 어디 들어들 보라했다.   《내 이 얘기는 방금끝난 세계대전기간 영국군과 토이기군이 싸울때의 일이다. 영국군 사령은 밀정을 보내여 토이기 병사들의 상황을 알아오도록했다. 그래서 토이기군은 생활의 궁핍으로 시달림을 몹시받고있음을 알게됐다. 이같이 탐지가 되자 영국군사령은 즉시 궐연 12만보루를 만들게 하여 그것을 비행기에 실어 토의기군의 진지에다 투하했다. 토이기군인들은 배가 고픈데다 한창 담배초기까지 들던차라 그놈의 이 하늘에서 떨어지는지라 이 게 웬 이냐 얼싸좋다고 덤벼치면서 서로 빼앗아 피웠다. 한데 그놈의걸 피운자는 모두 그만..... 생각들해보라, 어떠게 됐을가?》    모두들 량미간을 끌어 모으는데 한 대원이  남먼저 무릅을 탁 친다.   《그렇지, 모두 취했어! 취한거야! 그 담배속에는 아편이 들어있었을거야!》   《바로 그렇지. 그래서 토이기군은 녹작지근 맥을 못쓴거고 영국군의 진격해오니 방선이 어떻게 됐겠는가, 홍수에 토담무너지듯  개꼴이되고만거야.》    라중소는 말을 마치였다.   《라부단장님!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경각성을 잃고있었습니다.》    한 대원이  깨달음이 생겨 자아반성을 이렇게 했고 다들 훈련을 게으름없이 하리라 스스로 결심하게됐다.     성묵이도 전쟁얘기를 해서 기분을 돋구었다.   《천팔백 공 오년에 있은 일이라 한다. 불란서가 오지리와 싸울 때 나폴래온이 오지리군대를 오래도록 포위하고도 섬멸할수 없었다. 대치상태에서 오지리군이 포위를 돌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폴레온은 오랜 생각 끝에 간첩을 오지리군내부에 들여보내기로 맘먹었다. 간첩은 이태리군의 맥커통수를 찾아 라고 나발불었다.    맥커통수는 그말을 곧이듣고 그만 경각성을 늦추고말았다. 그래 어떻게 되었는가? 불란서군이 성밑까지 온 것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서 깨달은 것이다. 허나 때는 이미늦었다. 오지리군은 불란서군의 강력한 공세에 배겨내지 못하고 투항하고말았다. 맥커는 자기의 칼을 나폴레온에게 바친것이다.》   《나폴레온이 간첩전을 멋지게 해냈군!》   《맥커장군이 너무도 무경각했지. 머리는 뭘할려구 달고있었나?  그것이 혹 날조된 요언이나 아닐가 의심하고 조금만이라도 경각성을 높혔더래두 맥커장군은 그런 꼴은 되지 않았을거다.》    대원들은 이야기를 듣고 너한마디 나한마디 소감을 말했다.    단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장방형의 펼쳐진 태극기가 걸려있고 왼쪽벽에는 액틀에 넣은 檀君神租畵像이 걸려있는데 그 위에 눈에 확 안겨드는, 는 한글구호가 희칠을 한 반듯한 벽에 송조체의 커다란 먹글씨로 또렷하게 씌여있 는 아래에 正義團이 제정한 4대강령과 7대규약, 3대부신(符信)이 있었다.        4대강령    ㅡ. 정대한 의리의 찬양.    ㅡ. 정당한 의무의 이행.    ㅡ. 정직한 의무의 장려.    ㅡ. 정순한 의리의 찬동.    7대규약    ㅡ. 서약을 반드시 실천함.    ㅡ. 명령을 반드시 집행함.    ㅡ. 양민을 침범하지 말 것.    ㅡ. 다른 단(團)을 간섭하지 말것.    ㅡ. 규율을 반드시 준수할 것.    ㅡ. 역무를 반드시 부담할 것.    ㅡ. 망언을 하지 말 것.    3대 부신(符信).    ㅡ. 단장의 인증 또는 증권의 호수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복종하지 않을 것.    ㅡ. 단장의 수집명령에 의하여 굴기(屈期) 집행할 것.    ㅡ. 서약서와 동호의 증권이 있지 않으면 단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 단 증권을 분실했을 때는 보증연서로서 청원함, 또한 본 증권의 호수를 비밀로 할 것.      커다란 탁상을 중심에 놓고 량켠으로 나무의자 10여개가 놓여있는, 그리 너르지 않은 방안은 해광이 잘들어와 늘 밝고도 정결했다.    正義團의 團長室은 서일의 집무실이면서 중진들이 매일 모이는 회의실이기도했다. 중요인물들인  계화 , 라중소, 이홍래, 채오, 량현 등은 단장실옆방에서 각기 제사무를 보았다.    이날 오후 명동학교의 널직한 마당에서 500명 무장단원의 집회가 있었다. 일본의 침략과 조선의 현상황에 대한 서일단장의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를 부르짖으면서 린근의 약소국들을 삼키는 철두철미한 침략자인 것이다. 그자들은 천방백계를 다하여 침략의 리유를 찾고있는데 때로는 침략을 당하는 자 본신의 나약과 무능함에도 주요한 원인이 있으니 마땅히 잘 반성해 필요가 있는것이다.    일본이 류쿠를 삼킨 것을 보기로 하자. 당시 류쿠(琉球)군도는 때로는 중국에 조공했고 때로는 일본에 조공했다. 그들은 주권이 분명하지 못하여 어느 국가에 귀속한다고 딱 잘라 말한적이 없었다.    1873년 이 섬의 어선이 대만동안에서 좌초되였는데 어선의 어민들이 대만의 포수들에 의하여 피살되고말았다. 이때 일본정부는 중국정부에 향하여 대만의 포수들을 처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그 요구를 거절하고말았다. 그 리유란 간단했다. 대만의 내부와 동부는 중국의 관할내에 있는 것이 아니니 관계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혼동스럽기 짝이 없는 정부의 말이였다. 일본은 대만을 점령할만한 리유를 얻은 것이다.    이듬해에 일본은 정식으로 출병하여 대만의 주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점차 대만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 것이다.    그후 4년내에 일본은 공공연히 류쿠를 점령하고말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대만과 다르고 류쿠와도 다른 것이다. 우리 나라는 완전한 주권국으로서 력사가 유구한 것이다. 하건만도 서방의 제국주의, 이를테면 영국같은 나라는 고의적으로 대한이란 국가가 엄연히 존재하였음에도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강국들도 이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의 대한은 일본의 칠성판에 오른 고기덩이가 되어버린것이다.    미국은 어떠했는가? 1905년 루즈벨트대통령은 루드를 국무경으로 임명했다. 우리가 그의 도움을 받자고 하자 루드 국무경은 시간이 없다면서 우리 나라의 특사를 접견하지도않았다.....타인의 핍박에 의하여 고생하면서도 다른사람으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함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이것은 루즈벨트의 말이다. 우리의 대한이 과연 독립할 힘마저 없는 나라였단말인가? 그야말로 외국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언론인것이다......    일본은 1873년부터 이미 원대한 안목을 가지고 침략준비를 위한 밀모를 해온 것이다. 일본이 이 기간동안 침략한 곳을 보면 남쪽으로는 대만, 류쿠, 팽호이고 북으로는 싸할린섬을 차지하고 우리 나라를 합병한 것이다. 이제 또 만주와 씨베리아를 점령하려하니 46년간 계획해 온 원래계획의 절반은 이미 실현한 셈이 된다.》    서일은 이것이 바로 를 부르짓고있는 일본의 작태라 점을 찍으면서 조선에 대한 그자들의 행동을 아래와 같이 구술했다.   《일본은 한 때 정책을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그래 변화시켰던가? 실제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세상사람들도 과연 그런줄로만 안다. 허나 그것은 외면적인 현상이였지 내막은 그렇지 않아 결국 모르는것이라 하겠다.    첫째, 일본은 정책을 변화시킨다고 하였지만 이는 공언이요 실은 아무런 진척도 없었다.    둘째, 정책을 변화시킨다해도 한국사람의 원한은 삭일수 없는 것이다.    셋째,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미전부터 일본사람은 믿지 않는 것이다.    넷째, 한일 량민족은 너무도 깊은 원한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이제는 화해의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서일은 숙연히 귀담아 듣고있는 대원들을 일별하고나서 말을 다시이었다.   《모두 알아야 한다. 깊어진 원한때문에 화해의 여지조차 없다는것을. 그렇지 않은가?.... 하기에 일본이 자기들의 정책을 변화시킨다 해도 때는 이미 늦은것이요 실상 변화시키더라도 문제는 근본 해결할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 2천만 겨레의 가슴속에는 일본을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감정밖에 없다. 한일합방때로부터 굳어지기 시작한 이 감정은 뿌리가 깊으니 세대를 이어 풀릴 것 같지 않다. 물론 일본도 과거의 정책에 시행착오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가 요구하는건 다만 두글자뿐이다! 가령 우리가 왜정의 시기에 독립을 성취못하더라도 독립에 대한 마음은 종족이 멸할때 까지 이어질 것이다.》      서일은 잠간 숨을 돌리고 나서 계속이었다.   《한국이 독립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그래 만국회의가 약소국가를 구원하는 법률을 세웠는가?.... 한국이 독립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국제에 내놓고 론할 문제도 아니며 더구나 구걸해서 해결될  문제는 더욱 아닌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국제적인 권고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도 아닌것이다. 왜서 아니라는가? 한마디로, 이는 단순한 인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적인 원한문제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기에 나는 타인이 우리의 운동이 옳이니 그르니 평가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이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를뿐이다.》    연설은 청중의 열열한 갈채를  받았다.     “일민보”와 “ 신국보”는 일제히 그의 연설요지와 함께 평론문장까지 실어서 독자들을 널리 교육했다.    사흘이 지나 7월 10일. 서일은 뜻밖의 손님을 하나 맞이하게 되었다.    이날은 그가 있는 단장실에 정신과 계화를 비롯하여 孔敎會의 김 붕, 김일봉과 김성 등 전날 일본총리 하라기요우를 서힐(書詰)한 그 여섯사람이 한자리에 다시 모여 형세를 연구하고있었다. 근일들어서 在間島日本總領事館은 동만과 북만일대에 있는 기독교나 다른 어느 교단체보다도 특히 大倧敎와 孔敎會의 활동을 더 엄밀히 주시하면서 이 두 교가 합치여 조직한 正義團의 활동 그리고 이미전부터 이 지방에다 자리잡고 은밀히 자라온 독립군무력에 대해서 정황을 탐지해내려고 신경을 쓰고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여 그들은 이를 대처할 방법을 재삼론하고있었다. 물론 이일로 이미  성묵이와 채오가 義軍府를 찾아가 동조협조의 방법으로 친일조직들을 제거하기로했지만 세심한 조사와 대응책을 세우는 것이 실제적으로 더 필요했던 것이다.                 왕청, 용정, 화룡은 물론 밀산, 동경성에 대종교도가 많아 웬간한 친일세력이 아니고는 발을 붙이기 힘든 것이다. 다시말해 이런 지방에서는 적의 세력이 민간에 까지 뿌리내려 지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적의 령사관이나 경찰서가 있기는 해도 여기서는 그것이 통치력이 없었기에 日民團이니 保民團이니 强立團이니 따위를 세워 점차 저들의 세력을 구축하려 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데 그것이 남만같이 되기는 어려운것이였다.    그럼에도 적은 온갖수단을 다해서 그것들을 세우려 하면서 밀정을 배양하여 들이밀려할 것이다.    모인 사람들은 正義團은 정신차려야 한다면서 단원각자는 물론 교도들에게 립장에 흔들림이 없이 경각성을 한결 높일 것을 강조하는 한편 支團은 전주민을 책임지고 발동하여 자기 마을을 자각적으로 지키게끔했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에 경비대장 이교성이 단장실에 들어와 서일에게 귀속말로 최삼용이라는 손님이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뭐라? 최삼용이가!》   《예. 서단장님과 막역친구라면서....막상 그렇다해도 안그렇습니까?》    이교성은 신원이 확인되기 전에는 조사를 해봐야겠기에 경비실에 앉혀놓고 우선 먼저 알린다고했다.   《교성이! 인자 뭐라구했소? 최삼용이라했지? 그가 왔다는 소린가? 어데 있는지 이리루 데려와야잖아. 그인 또한 내친구기도해.》     성묵이가 자리에서 벌꺽 일어나 서일을 향해 만나자는 뜻을 내비치는데 흥분된 목청이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이교성이 물러간지 이윽하여 허활이 최삼용이를 데리고왔다. 보아하니 그들은 마을에 들어서는 그를 경비실에 잡아놓고 조사를 아느새 한 것 같았다. 이쪽에서는 뜻밖의 상봉이라 기쁨보다 외려 놀램이 더 많았다.    《어이구! 친구만나기가 이리두 힘들줄이야, 원!》    최삼용은 반가움절반 불만절반이였다. 자기는 서일의 친구라 밝혔는데도 보초선에서 막무가내로 억류하고 이것저것 지지콜콜 캐물으면서 선선히  대면시켜주지 않는것이 저으기 유감스럽다는거다.    《왜놈들만 경비할줄을 알까. 우리도 제도가 있어서 무릇 낯선 손님이면 누구를 분문하고 의례 조사를 받는거니 그리 알고 노여움을 삮히라.》    서일은 그에게 이정도로 타이르고나서 다른사람과 인사를 시켰다.    다들 서일단장의 친구라니 각별한 친절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인사를 마친 최삼용의 거동은 거북살스레도 부자연스웠다. 눈길은 단군화상과 태극기와 벽에 새겨진 구호에 자주날려가는데 어굴에는 긴장한 빛까지 어린다. 아마 숭엄함이 친절을 망각한 압박감을 안겨주는 모양이다.    《바깥벽에다는 라 간판을 걸어놓구서는?....》   《뭐가 잘못된 것 같다는말인가? 내가 이 학교를 세우고 여적지 교장노릇을 하고있다는걸 모르고왔나보지? 이건 교장실이야. 태극기하고 천조영정을 대하니 어때? 아마 본지도 아득할거야. 그렇지?....자, 집에 가자!》    서일은 최삼용을 제집으로  끌었고   성묵은 친구가 온 것을 박기호에게 알리느라 저켠 교무실쪽으로 달려갔다.   《처랑 아이들이랑 다 무사하니? 그지간 어떻게 보냈냐? 》    서일은 친구를 데리고 단장실을 나와 집쪽으로 걸음을 놓으면서 말을 꺼냈다.    최삼용은 그지간 어떻게 보냈느냐의 물음에 대답이 언죽반죽이다.    (이자식 오장이 바귀지 않았나?)    “까마귀날자 배떨어진다”고 적이 정의단의 동태를 탐지하려고 애쓰는  이때 그가 돌연히 나타났으니 서일은 자연히 의문이 갈마들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예전모양으로 친절히 대했다.    서일의 처 희연이는 전날 꿈에 본 얘기까지 하면서 최삼용을 반겨맞았다. 최삼용은 정말 그랬느냐 기뻐하면서 제 둘째아들놈과 동갑인 윤제의 머리를 쓰듬어주면서 너도 제 애비를 닮아서 총명이 과인가겠구나했다.        죽청이가 말했다.   《네가 죽청이지? 이젠 제법 처녀꼴이 나는구나!》   《기껏 먹어야 올해 열다섯살인데요 뭐. 중학을 방금 졸업했어요. 이제 개학이 되면 이웃마을가서 거기학교 선생노릇할거얘요.》    희연이가 알려주었다.          오누이는 정주간으로 나가서 을 다시펼치였다.   《사람의 낳는 것이 마치 싹이 흙에 있음과 같아 때는 일르고 늦음이 있으며 흙은 기름지고 메마름이 있어 혹은 알곡이요 혹은 쭉정이라 알곡은 좋은 땅에서 되고 쭉정이는 굳은 땅에서 되는것이니 오직 중간땅에서 알곡과 쭉정이가 섞이니라.》   《누나야, 그럼 이건 어떻게 번역하나?》   《좋은 땅에 박히면 상등뿌리가 되고 굳은 땅에 박히면 하등뿌리가 되나니 상등뿌리는 밝은이요 하등뿌리는 어리석음이니라.》    웃방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귀를 재고 듣고있던 최삼용은 질끔 놀랬다. 어쩌면 그들이 자기를 들으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과연 서일이 의심품고 속으로 건너짚은대로 오장이 바뀐 사람이였다. 인천에서 3.1시위에 참가했던 그는 경찰에 잡혀가 취조를 받았다. 취조과정에 경찰은 그가 대종교의 주요인물이자 만주 독립운동진영에서도 지도급인물로 부각되고있는 서일과는 어려서부터 막역지우(莫逆之友)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를 넘겨받은 조선주둔일본군의 정보기관에서는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군의 실태를 탐지해 바치는 것을 교환조건으로 그와 그의 식솔들을 살려주기로 했다. 하여 최삼용은 그자들의 첩자신분으로 밀파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쪽 세친구는 전혀 무감각한 듯 화기애애한 분위속에서 지나간 옛일들을 회억했고 파란만장한 세월속에서 어떻게 하면 무난히 살아갈가 하는 화제를 내놓아 최삼용이 또한번 “인간삼락”을 부르짖게했다.      서일은 마을경비용의 총외는 일체무기를 모두 감추도록 밀령을 내렸다.  그래서 최삼용은 대원들이 經書나 한자를 배우고 체육시간이라 하여 빈주먹에 도수련습이나 하는 모양을 약 3일가량 구경하다 그만 돌아가버렸다.  
9    나의 요람 댓글:  조회:5005  추천:1  2011-09-26
   수필                                                      나의  요람                                                                          김송죽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창조하는 것이지 결코 순순히 맞이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끈질긴 분투가 제 운명을 창조함에 첫째로 중요하겠지만 객관의 방조를 받는것 역시 자못 중요한거다. 나는 내가 흑룡강신문사와의 접촉에서 이 점을 심심히  느낀것이다. 사의 직원도 아닌 나를 작가로 키워준 요람이 바로 흑룡강신문이였다. 이제는 오랜일이다. 1962년 7월, 의 진달래부간에 나의 처녀작 시 가 실리였다. 그때 신문지면 가운데 곱게 선을 그어 실어준 시작(詩作)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문화대혁명 때 원본을 빼앗겨 잃어졌는데 고맙게도 박철준시인이 전에 스크랩프하여 두었던 것을 주어 나는 그것을 외워두게 됐다. ) 그때 문예편집으로 계섰던 리병철선생이 고맙게도 축하편지까지 보내와 나를 격려해주었던 것이다. 그후 편집선생은  , ,   등 나의  다른시들도 흑룡강신문에서 실어 세상에 얼굴을 보이게 하였다. 그같이 내가 문단에 오르느라 첫발을 붙인 곳이 바로 흑룡강신문이였던 것이다. 속담에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글도 변변히 읽지 못한 내가 글을 쓴다고 너덜대는게 눈꼴사나왔던지 아니면 사촌이 기와집을 지어도 배가 아파하는 병이 도져 그랬던지 나를 보고 투기적으로 돈벌이를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뒷소리를 하더니만 이 오자 기회를 빌어 벼르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자는 신문사에 가있는 나의 원고들을 전부 압수하려고들었다. 어떻게 하나 끈을 달아서 나를 패보려는 고약한 심사였다.  그때 신문사의 윤응순사장과 리병철편집선생은 편지답변에(종근이 당안으로 남아있음) 투고자의 원고심사권은 신문사에 있으니 념려하지 않아도된다고 어리석은 그자를 준절히 타이르면서 나를 보호해주었다. 과연 고마운 일이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들어닥치자 나는 액운을 면치 못했다.  내가 전혀 있지도 않은 필화(筆禍)를 입고있다는 것을 안리병철선생은 그기간 세 번 내있는 고장 一  성화공사(星火公社)를 찾아왔었는데 첫 번은 상봉할 기회를 가졌으나 그 다음의 두 번은 만나지도 못하게   해서 그이는 내 일을 근심하며 되돌아갔다.   1972년 봄, 신문사에서는 >가 있으니 용약투고하라는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그때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온지 3일밖에 안되였다. 그 편지가 나에게는 더없는 믿음과 힘을 주엇다. 나는 소설을 쓰고야말리라 강심먹고 다시 필을 들었다.  당날로 나는 길건너 서켠 맞은켠 코앞에 합작사(合作社)가 있고 종이를 팔았지만 안해를 비밀리에 8리 거리가 되는 뒷족 한족마을에 가 종이를 한아름 사오게 했다. 그리고는 꼬박 한달밤을 패가며 악전고투하여 마침내 근 50여만자에 달하는 을 써냈다. 그때 문예편집을 담당했던 홍만호선생은 직접 나의 그 장편소설원고를 안고 연변에 나가 에다  심열을 위탁했다.  그것이 후에 모진 진통 끝에 탈태환골을 하여 끝내 연변출판사에 의하여 출판이 된 나의 첫 장편소설 이다. 이 일을 알고있는 연변분들은 나를 만나면 이런 말로 신문사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1978년도에야 을 받았다. 그때 문에편집이였던 김순호선생은 나의 오두막집에 찾아와 밤을 새워가며 회포를 풀었고 여러면으로 위안을 주면서  앞을 내다보고 용기를 내라고 면려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신문의 톱에다 내가 치룬 경난과 현황을 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잊을수 없는 고마움이였다.   나는 이듬해 할빈에 갓다. 신문사가 첫걸음이였다. 글에서 이름만 익혔을 뿐 초면인 그들이 그렇게 뜨거운 분들일줄이야!...  나는 나를 알아봐주는 친구와 벗들이 이렇게도 많았구나 생각하니 용기가 한결 북돋아졌다. 지금은 나의 큰아들 성해가 신문사미술편집으로 사업하고있다. 만나면 이 부탁밖에 없다. 내가 입은 은혜 내 힘으로는 못다갚겠으니 대신 보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무엇보다 외성으로 출장갔다가 흑룡강신문을 알아주는 말들을 들을 때면 나는 마치 내 일이 잘되여 칭찬받는 것 처럼 흐믓하다.  , ...  과연 정답게 부르고만 싶은 이다! 나는 우리의 이 신문이 독자들의 기대와 축복속에서 날로 잘 꾸려지기를 두손모아 빈다.  (작자는 작가. 화천현문화관 창작실에서 문학창작에 종사하고 있음)     1991. 9. 4.                                                     관련글: 나의 처녀작 詩     
8    수필 노란울금향 댓글:  조회:5124  추천:1  2011-09-20
  수필                                                        노란울금향                                             김송죽      그날도 나는  강변공원의 벤취에 홀로앉아있었다. 그것은 한백옥으로 만든 석상가까이에 있는 철제의 흰색나는 벤취였다. 아침단련을 시작하면서부터 구역의 조련장에서 로인디스꼬를 추고는 그것이 끝나는 길로 장거리보행을 하여 이곳까지 와서는 담은 몇분이라도 앉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이젠 나의 습관된 소일이며 일과였다. 도도히 흐르는 송화강의 철석이는 소리를 듣노라면 왜선지 잡념과 번뇌가 가셔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어서 나는 좋았던거다. 젖빛안개에 쌓여있는 아침의 강변은 조용했다. 내가 한창 저 아래로부터 웅글진 고동소리를 틀어올리면서 올라오고있는 륜선에 눈을 팔고 있는데 은연중 웬 녀인이 나타나 말을 걸어오는 것이였다. 고개돌려 보니 귀밑머리 희슥희슥한 부녀였다. 여기서 문득 제 동포를 만나고 보니 미상불 반가운 일이라 나는 그렇다고 알려주고는 례모를 차리느라 일어나 그녀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남성의 고유한 호기심을 갖고 슬적 눈빛질해보았다. 미모의 바탕이여서 아직은 그리 역겨울정도아니지만 환갑줄을 넘긴 녀인이였다. 우리는 서로가 초면이지만 별로 거북스러워 함이 없이 벤취에 나란히 앉았다. 대개 이런 경우면 대화가 자연스레 이뤄지는 법이다. 그는 성이 선우씨요 올해 나이 62세, 자기도 한때 아침단련을 했건만 고혈압병이 심해져 지금 치료중이라 자아소개를 했다.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나도 자아소개를 했다. 헌데 내가 내 성명과 나이를 대고나서 내내 촌에서 살다가 아들따라 몇백만 시민이 붐비는 이 대도시로 온지 인제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고했더니 그녀는 웬 일인지 아, 그런가요! 하고 적이 놀래면서 낯빛이 굳어진채 나를 이윽토록 눈밖아보다가 그만 아무말도 없이 일어나 훌쩍 가버리는 것이였다. 아니 왜 저러는거냐? 내가 실례한게 뭐길래?... 나는 그녀의 저돌적인 행동을 도무지 리해할 수 없었다.   이틑날도 나는 로인디스꼬가 끝나자바람 여전히 강변공원으로 가서 그 철제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어제의 그 녀인이 혹시 다시나타나지나않을가 사위를 은근히 살폈다. 어제 그녀가 왜 그같이 리해하지 못할 거동을 피우고 사라져버렸는지 그걸 몹시 알고팠던거다. 헌데 내앞에 다시나타난건 어제의 그 귀밑머리 희슥희슥한 녀인인것이 아니라 미끈한 몸매에 청춘의 생기가 흐르고 있는 30대의 매력있는 아가씨였다. 저쪽에서 먼저 물어보는 말이였다. 내앞에 나타난 아가씨의 모색이 어제의 녀인을 닮은데가 있는것 같아 나는 속으로 넌  아마  그녀의 딸이겠구나 짚으면서 머리를 갸웃했다. 과연 아가씨가 자기는 내가 어제 여기서 만났던 그 녀인의 딸인데 리향숙이라 부르고 나이는 32살이며 어느 한 보험회사에 출근한다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생명부지의 이 젊은아가씨가 나를 알고있는게 이상한지라 다시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경아해남을 감출 수 없었다. 녀인은 그래서 어제 놀램이 가득한 낯색으로  나를 그토록 눈여겨본거로구나! 그런데 나를 잘 안다면 왜서 한마디 말도 더 없이 그모양으로 훌쩍 가버린단말인가? 대체 누군데 왜서?... 어쩌면 내가 그녀를 어디서 딱 본것같기도하고.  그러나 언제 어디서 봤던지 도무지 생각나지를 않았다. 풀기어려운 의문만 착잡하게 갈마들어 나는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었다. 이럴 때 향숙이가 입을 다시열어 무지하게 깜깜해진 나의 머리를 틔워주었다. 나는 아까보다 더 놀랬다. 선우! 미영!... 두자성, 두자이름ㅡ 그것이 거대한 굴착기모양으로 우르릉거리면서 내 가슴깊이에 묻어둔지 너무도 오래고 오래서 이제는 퇴색해버린 추억을 다시금 뚜져냈다.   내가 중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8년도 여름이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연변에서 북대황건설을 지원한다면서 달려온 한패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중에 뽈을 괜찮게 찬다는 성이 리씨인 청년 E가 있었다. 그와 나는 잘아는 사이가 아니였다. 한데 어느날 반양머리에 준수하게 생긴 그가 느닷없이 나를 찾아와 자기는 연변 도문에 사는 고모댁에 놀러갔다가 거기서 사범학교를 다니는 녀학생 하나를 보고 그만 반해버리고말았는데 나더러 자기를 대신해 련애편지를 써달라는 것이였다. 이런 제길할! 제앞코도 못닦는  주제에 싱겁게 그따위짓을 해?  나는 첫마디에 거절해버렸다. 그랬더니 E가 이틑날도 사흗날도 나를 찾아와 애를 먹였다. 그래도 안될것 같으니 나중에는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사정하는 것이였다. 그녀자를 얻지 못하면 자기는 정말 죽고말리라면서. 상사병이 걸려도 단단히 걸린 사람이였다. 말이 아니게 축가는 꼴을 보니 정말 죽을것만 같아 나는 그만 그럼 써주마고 대답하고말았다.   내입에서 련애편지를 써주리란 대답을 받아내고야 만 그는 녀사범생의 사진을 내놨다. 문학초학자였던 나는 그때 쏘련작가 아델 구뚜이의 를 읽어본지라 거기것을 인용해가면서 련애편지를 멋들어지게 썼다. 저쪽에서도 반응을 보였다. 그래 나는 다음의 편지를 련속날려보냈다. 그러는 사이 내가 그만 사진에 박힌 그녀의 미모에 반해버리고말았다. 그러니 이름이 E것이였지 기실은 내가 그 여자와 련애를 해버린 셈이였다. 열 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없다고 E는 끝내 목적을 이루어 이듬해봄에 북방을 떠나 연변의 그 처녀한테 장가를 갔다. 먹기는 발장이 먹고 뛰기는 말더러 뛰란다더니 내가 무슨꼴이 됐겠는가. 우리는 10년만에 다시만났다. 그때는 문화혁명이 한창 열기를 뿜어대던 시기였는데 E는 공가(公暇)에 우리 마을에 들렸다가 로 끌려나와 조리돌림당하면서 공공변소를 치고있는 나를 보더니 난 네덕에 장가를 잘갔건만 넌 신세가 이렇게 됐구나 탄식하고는 내가 몹시 궁금해하던 제 집의 형편을 알려주었다. 내가 쓴 련애편지의 작간으로 약혼이 되자 E는 약삭바르게도 금과(禁果)부터 따먹었다. 그래서 배가 불러진 녀인은 하는 수 없이 학업을 중도이페지 하고 서둘러 그렇게 잔치를 했던거다. 한데 지내고 보니 남편이란것이 허울만좋았지 원체가 판무식쟁이요 자기는 속히워도 대단히 속히운지라 그만 절망하고말았던거다. 선우미영은 타락하여 5년간이나 집도 전혀 거두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어찌하여 아직 장래가 먼 내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각오를 해서 내가 남편의 눈을 티워줘야지 결심하고는 깔고들어앉아 글을 배워주었다. 그래서 남편은 마침내 무식을 면하게 됐고 입당까지 하여 거기 마을서 지부서기로 사업하고있었던 것이다. E는 그때 자기처는 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라도봤으면 한다고 했다. 사실말해 그녀의 전도를 망쳐먹은건 E인것이 아니라 나였다. 하기에 나는 그녀를 만날가봐 무서워했다. 한데 그녀가 인생의 석양을 안고 내앞에 돌연히 나타났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가!?...  향숙이는 자기 아버지는 간암으로 10년전에 작고한 것이고 그가 저세상사람이 되자 딸인 자기가 지금 어머니를 모시는중이라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어제 여기서 전혀 생각밖에 나를 문뜩 만나고보니  감회(感懷)가 너무도 사무쳐 그만 드러눕고말았노라 알려주는 것이였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어떻게 만나야할지 생각이 미처 돌지 않았다. 나는 떨떠름하여 말을 더 잊지 못했다. 꽃말에 붉은 울금향은 바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아닌가!  헌데 얘가 왜서 제 어머니한테 그 꽃을 꼭 가져가라는건가? 내가 우유부단하니 향숙이가 하는 말이였다. 이거야말로 딸이 공개적으로 나서서 과부어머니를 짝맞춰주자고하는게 아니고 뭔가.  참 지금의 젊은이들은!... 나는 로친이 있는 사람이다.  과부집문턱이 말이 많다고 소문이나 나면 내가 무슨꼴이 되겠는가. 로맨스 그레이를 하고싶지 않은 나였다. 하여 나는 붉은 울금향은 커녕 감히 찾아가보지도 못했다, 군자의 도덕을 지키느라고.   이러구러 3일이 지나 아침에 강변공원에서 향숙이를 다시만나게됐는데 그 애가 울어서 눈이 부어 있었다. 얘가 왜 울었을가?...  의문이 머리를 때리는데 향숙이가 나보고 하는 말이 자기 어머니는 간밤에 뇌익혈로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몹시 악연했던 나는 노란 울금향을 사들고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후회가 그지없이 골풀이치기 시작했다.  내가 왜서 그녀의 생전에 붉은 울금향을 들고 가지를 않았던가?  도덕, 도덕, 무슨놈의 개떡같은 도덕이란말인가?...  나는 그녀앞에 다시한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만 것이다.                                                                                            2000. 1. 28                    튤립ㅡ 울금향        꽃말ㅡ 붉은울금향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노란울금향 (끊어진 사랑)                                       
7    나와 편집선생 댓글:  조회:5775  추천:1  2011-09-04
                                        나와 편집선생                                              김송죽      독자들은 흔히 책 한권이 출판되면 그 책과 저자의 이름은 알아두어도 그 책이 세상에 나오게끔 애써온 편집에 대해서는 잘모르고있다. 하긴 그럴범도하다. 저자의 이름은 책가위의 뚜렸한 위치에다 박아놓으나 편집의 이름은 뒤켠 한쪽귀퉁이아니면 안쪽의 별지에다 자그마하게 써놓으니.    누군가는 문학창작이라는 이 고되고도 가치있는 사업을 하나의 거창한 군사행동으로 가정할 때 작가를 제1선에 나선 경기병이라 한다면 편집은 부대에서 후근과 같다고 말한바있고, 어떤 사람은 작가를 천리마라 할 때 편집은 그 천리마를 발견한 백락과 같다고 비유한바 있다. 과연 그러하다. 나는 내가 겪어온 사실로부터 그러한 비유들이 틀리지 않는다고 본다.      아직은 “문화대혁명”이 채 끝나지 않았던 1974년 5월에 나는 나의 첫 장편소설원고를 연변인민출판사에다 투고했다. 이제 말하겠지만 나의 그 소설은 내가 목숨을 내걸고 땀이 아니라 피로써 쓴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한데 그러한 원고가 한 어리석은 자의 작간으로(자기가 검열하겠노라고) 본인도 모르게 중도에서 여러날을  깔린통에 늦어서야 출판사에 들어갔던것이다.    내가 그런줄은 모르고 원고를 받았다는 소식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못해 편지했더니 출판사에서는 마침 방금 받았노라 알리면서 “정성껏 편집하여 보낸” 나의 그 소설원고를 “이제 시간을 짜내여 정독할 것이며 그런 후에는 륜독을 조직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편지하는 사람이 아마 편집일거라고 속짐작하면서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가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넉달이 지난후에 편지와 함께 한아름되는 나의 원고가 되돌아왔다. 편지를 보니 작품을 기본상 긍정하면서 수개하라는 편집부의 의견이였다. 수개의견은 넉장에 상세하게 밝히였는데 묵지를 대고 쓴것을 보아 한부는 편집부에 남긴게 분명했다. 쓰지 않을 소설이면 이렇게 하겠는가? 희망이 보였다. 그러면서 단번에 성공할리는 없다는걸 미리 각오하고있은 나는 편집부의 의견에 쫓아 인츰 작품수개에 달라붙었다.    반년간 긴장한 수개작업이 있은 후 원고는 이듬해 3월에 다시 연변인민출판사로 날아갔다. 이때는 꼬박 4년간 투쟁맞고 이리저리 몰리던 내가 사업이 회복되여 이웃동네의 소학교로 전근되여 온지 3년철이 되였는데 그토록 조심스레 비밀리에 해치운다는 수개가 그만 탄로되여 하마터면 또 졸경을 치를번했다. “교학검사”를 한답시고 포위공격을 해왔던것이다. 그때 우리 집으로 잘다닌, 할빈에서 하향을 온 청년교원 하나가 있었는데 그보고선 나의 물을 절대 먹지 말라면서 “반동적인걸 적발하라”고 꼬드겼고 나보고선 “왜서 아직도 고집이 그렇게 센가? 소설을 다시쓰는건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항이다.”고 경고했던것이다. 나는 하도쓰거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여름방학이 되자 인츰 연변으로 나갔다.      쟈므스(佳木斯)에서 동으로 60여리에 있는 편벽한 농촌, 북만에서 태여나 줄곧 북만에서만 살아온 내가 연변에 나가 출판사를 찾은것이 그번이 난생 처음이였다.    하남다리를 건너니 출판사는 찾기도 쉬웠다. 한데 내가 출판사간판이 걸린 대문가에 이르러 뜨락을 들여다보니 모두들 밖에 나와 화단을 정리한다, 풀을 뽑는다, 유리창을 닦는다 벅작이고있었다. 대청결을 하는구나, 하필이면 요럴때 올건 뭐람?... 나는 잠시 망설이면서 걷잡지 못할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득나타난 이 불청객을 어떻게 대해줄지?... 하지만 천리길 넘어 여기까지 찾아온 걸음이라 일이 끝나기를 기다릴수는 없어서 나는 화단에서 풀을 뽑고있는 한 강마른 분(허해룡선생)곁에 다가가서 초인사를 하고는 찾아온 연유를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주 반색하면서 나를 웃층으로 안내했다.    거기 한 칸에서 안경낀 50대의 근엄하게 생긴 분이 걸레로 테이블을 닦고있었는데 나를 안내한 분이    “여보, 북만에서 작자가 찾아왔소.”하고 알리자 그는 일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다보면서    “동무는 북만  어디서 왔소?”하고 묻는것이였다.    내가 쟈므스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는 의아쩍게 보면서 다시물었다.    “쟈무스에서 왔다? 동무가 무슨 소설을 우리한테 보냈단말이요?”    “장편소설입니다. 입니다.”    “아니 뭐라오? 동무가 그래 의 작자란말이요?”    그는 뜻밖에도 아주 놀라면서 반신반의 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아차, 내가 속히웠군!” 하고 혼자소리로 부루짖는것이였다.    나는 그가 왜서 속히웠다고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동무가 바로 김송죽이겠구만!”    그는 한바탕 소리내여 웃고는 나를 걸상에 눌러앉히는것이였다.    이분이 바로 내가 늘 속으로 점쳐오던 나의 소설의 책임편집인 강정일선생이였는데 그의 말인즉 나의 소설원고를 보고 자기는 작자가 토비숙청경력이 있고 나이가 적어도 52살은 넘었을 사람이라 짐작했다는 것이다. 한데 그해 내나이는 37살이였던 것이다.    “지금 나이 서른일곱이라, 그럼 동문 사변나던 해에 기껏해야 일곱 살밖에 안되였겠는데 토비숙청력사는 어떻게 알고 그렇게 썼소?”    강정일선생은 손가락을 꼽고나서 의문되여 물었다. 하여 나는 내가 그 소설을 쓰게 된 동기로부터 시작해서 그때까지 겪어온 경난을 쭉  말했다. (략)                               관련글: 내 사유와 잊을 수 없는 일      소설을 쓰자! 살이있는 내가 적들과 영용히 싸운 군인들과 렬사들의 업적을 쓰자! 이것이 나의 결심이였고 스스로 걸머진 종생의 의무라고 여겼다. 하기에 문학창작은 곧 나의 생명과도 같이 귀중했던 것이다. 그렇다. 아마 그래서 끄. 빠우스또브쓰끼가 “작가는 내부충동에 따라 글을 쓰며 또 쓰지 않을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때 나는 아직 작가는 아니되였지만 바로 그러했던것이다.                 1957년, 벌리에서 근근히 초중을 졸업하고 촌에 돌아와 3년간 농사질하다가 마을 소학교의 교편을 잡은 나는 자신의 문화기초가 너무나 낮음을 통감했기에 월급을 받아서는 거의 책을 사는데 밀어 넣고 열심히 탐독하면서 끊임없이 창작지식을 련마했던것이다.    “이도 안난녀석이 뼈다귀추렴하련다.”느니 “올라못갈 나무는 쳐다보지도말라.”느니 하고 비웃고 “권념”하는 동창이 있었지만 나는 그따위소리는 마이동풍으로 흘러버리고 결심만 굳히였다.    나는 단편소설 한편 써보지도 않고 시쪼박만 쓰다가 어벌통크게 달려들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해에 40여만자에 달하는 장편을 써냈다. 한데 그것이 화근이 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나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얼마안되여 “작은 등척”으로 , “교원대오내에 숨어있는 주양의 졸개”로 잡혀나왔는데 촌에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고 문학리론을 학습하고 조선작가 리기영선생과 서신거래가 있은것 모두가 “가만놔둘수 없는 죽을 죄”로 되어 투쟁받았다.   무슨놈의 “죄”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못했던 일이였다.   公社敎員造反團을 조직한 심보고약한 한 야심가의 조종과 추김을 받은  중학교의 철없는 “맹장”들은 얼싸좋다고 사정없이 달려들어 내가 그처럼 애써 모은 1천2백여권에 달하는 책중 문턱밑에 파묻은 세계명작 16권을  내놓고는 다 빼앗아갔거니와 철저히 혁명을 해치운다면서 마구뜯고(천장),  마스고(책장),  허물고(부뚜막), 뒤집고(구들장, 새낫가리) 하여 하루낮새에 집이라는 것이 거덜이나고말았다. 나는 더 말할것 없고 겯따라 어머니와 안해와 자식들이 받은 고통과 릉욕과 멸시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치 않겠다. 그때 팔을 걷고 나섯던 맹장ㅡ 현대토비중에 아직까지도 그 죄를 느끼지 못하고 뻔뻔스레 노는  자가 있는데 너도 개나 돼지아니면 느낄날이 있겠지 하고 내쳐둔다. 하여간 지랄발광네굽질이였다. 나에게 책과 대자보(大字報)를 한짐한짐 가득지우고(마을의 혁명자 둘도 한짐씩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공사내 6개마을을 돌면서 1관, 2관, 3관, 4관 전람관을 차려가며 투쟁했거니와 전 화천현(樺川縣)의 만명투쟁대회에 내세우기까지 했으니 독자는 그 정도가 어떻했으리라 가히 짐작하리라.     이미 써놓은 원고가 잃어지고 여러해동안 수집해놓았던 자료들도 찾을길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다시금 구상해두었다가 출옥하자마자 인츰 또 새로썼던것이다....      강정일선생은  나의 이 평탄찮은 경과사를 곰곰이 듣더니 자못 침중한 기색을 지은채 말했다.    “송죽동무, 과연 고생했소! 그러니 소설도 력사가 있구만! 지금보건대 주제도 좋고 내용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기요!”    그때 편집선생의 그 한마디가 의지가지 할곳 없었던 나에게는 과연 크낙한 고무였다.                          이틑날 강정일선생은 나를 데리고 인쇄공장을 참관시켰다.    “동무의 소설도 다 되면 장차 여기서 저렇게 찍어 책으로 되어 세상에 태여날것이요.”    참관을 다하고나서 강선생이 웃으며 하시는 말씀이였다. 그때 얼마나 기쁘던지! 희망은 나의 창작의욕을 더더욱 불태웠다.    사흗날 강정일선생은 그때 문예편집실책임으로 계셨던 허해룡선생과 함께 나를 앉혀놓고 편집부에서 나의 장편소설을 읽어본 정황과 이미 토론되였던 구체적인 수개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떠나는 날 강선생은 나를 보고 지금의 처지에서 무엇보다 공사당위의 지지를 받는것이 중요하니 돌아가거든 출판사에서 나의 소설을 장차 출판할 예정으로 아주 중시하고있다는 걸 알려주라했다. 하여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길로 공사에 들려 그때 갖부임되여 온 초면의 서기앞에서 그 말을 전달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지지해달라고했던 것이다. 당위서기는 그러마고 쾌히 응낙했다. 그레서 숨이 좀 나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번째수개에 접어들었다. 안해가 이전처럼 제발 글을 쓰지 말아달라고 애발대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4인무리”가 의연히 살판치던 때라 편견에 물젖은 사람들의 경계하는 눈이 번득였기에 잔약하고 고생많이 한 나의 안해는 의연히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작품수개가 거진되여 갈 때 나는 출판사에 편지하여 이번에는 작품합평회를 조직해줄것을 건의했다. 그랬더니 편집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사전에 사람 몇을 정해놓고 륜독하게끔하라했고 그것이 끝나 소식알리면 친히 한번 왔다가겠노라했다. 하여 1976년도 2월달에 강선생이 우리집으로 오시게 되었는데 선생은 그때 북만이 첫걸음이라했다.    내가 쟈므스로 마중을 갔었는데 화창하던 날씨가 그날따라 별스레 눈보라를 일쿠어 새벽차에 내린 강선생을 적이 놀라게 만들었다.    “허, 대단한데! 북만이 춥다니 웬 소린가했더니만!... ”    “연변손님오신다고 본때를 보이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말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튼 먼길도 마다하고 오시니 나는 몹시 반가왔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7리가량되는 마을로 걸어갈 때는 눈보라가 멎었다. 강선생은 가다가 걸음을 멈추곤 무연한 벌을 둘러보더니    “오ㅡ 광활한 북대황이여, 네가 넓으니 포부있는 작가도 태여나는구나!”하고 즉흥시를 읊듯했다.    나의 용기를 북돋우어주느라 그러는것이였다.      그날저녁 잠을 잘 때였다. 웬 일인지 강선생은 자리에 누워서도 모자벗을 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의아쩍어했더니 강선생은 아Q가 숭터를 감추지 못했던 얘기를 하곤    “웃어도 방법없수다. 난 이렇게 번들골이요.”하면서 모자를 벗었다.    강선생은 원체 머리카락 몇오리 찾아보기 힘든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줄을 몰랐던 나의 안해는 손으로 입을 막느라했지만 나오는 웃음을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같이 한바탕 웃음을 텃치고말았다.    강선생은 합평회의를 열고 수개의견을 내놓느라 우리 집에서 10여일가량 묵고 돌아갔다. 그리곤 그후부터 우리 집 살림이 구차한것을 헤아려 출판사원고지를 보내여 그것을 쓰게했고 오두막같은 우리 집이 꿈에도 생각키운다면서    “수개진전이 어떠한지요. 적잖게 애로들이 많으리라 믿습니다만 동무의 굳은 의지가 능히 모든 난관을 정복해나가리라 확신합니다.”하고 편지했던것이다.    내가 장편소설을 세 번째로 수개할 때 “4인무리”가 꺼꾸러지고 력사에 류례가 없다던 “문화대혁명”도 끝났다.    나는 겨울방학때 원고를 가지고 연변에 나갔고 이듬해여름에는 강선생께서 허해룡선생과 함께 우리 집에 두 번째 오시였다. 여지껏 작품에 3돌출을 하느라했는데 이젠 변화된 형세에서 다시한번 수개해보라고 원고를 내놓는 것이였다. 50만자도 넘는 소설이여서 한번 옮겨쓰자해도 3, 4개월이 잘걸린다. 그러니 힘에 부치는건 더 말할것 없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기꺼이 수개에 달라붙었다. 여지껏 편집부의 의사대로 3돌출에 맞추느라 쓴 소설이다보니 대수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을 알고 나는 이 네 번째수개는 시간을 썩 늘게 잡았다.    강선생은 수시로 편지하여 나의 작품수개정황을 료해하였다. 편집부의 사상이 해방되는걸 보노라니 작자인 나는 더없이 기뻣다.    1976년 가을에 쓴 편지에다는 류원무의 중편소설 “숲속의 우등불”을 편집하고있는 중이라면서 최택청의 장편원고 “도강전야”의 심열정황도 알려주었고 “사람들의 사상이 해방되고 정신쇠사슬이 없어지니 좋은 작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화원을 활짝 꽃피우고있소. 참 얼마나 즐거운 세상이요!” 하고 자기의 기꺼운 감정을 구김없이 토로하기도 했다.    마침내 4번째수개도 끝났다. 한데 또한번 다시수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보고 사상을 더 해방하여 마음껏 고쳐보라는 것이였다. 나는 이번에도 군소리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이젠 기진맥진한것만은 사실이였다. 이때는 내가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와 단통 고중의 조선어문과교수를 맡아 하고있었는데 교재를 연구할라니 작품을 수개할라니 실로 힘에 붙이였다. 하여 나의 이러한 사정을 편집선생에게 반영했더니 편집부에서는 학교당국과 교섭하여 나에게 반년간의 창작휴가를 주도록하였다. 하여 나는 집에 들어앉아 낮에 밤을 이어 맘놓고 수개할 수 있게되였던 것이다.  그때 중학교의 교장은 오상국(吳相國)선생이였는데    “문학도 역시 중요한 교육이요. 동무의 소설이 잘 수개되여 하루속히 세상을 보기 바라오.” 하면서 면려했다.    얼마나고맙던지!    편집은 어느한번 편지에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였으면 얼마나좋겠소.”라고 했다.    편집선생도 얼마나 기진맥진했으면 이렇게 당부할가. 내가 들어앉으니 내가 맡은 고중반 학생들은 조선어문과를 배우지 못하고있었다. 하여 미안한 감정이 밀물처럼 내 가슴을 메웠다. 나는 미안한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서 더 참답고 이악스레 그 마지막번의 수개를 기한전에 끝마쳤다.      1982년 5월말, 강정일편집께선 집에 있으면 이러저런 일로 찾아오는 이가 하도 많아 원고를 시름놓고 볼수 없길래 약 50여일간 북만에 들어와 편집을 하기로 나와 약속이 있었다. 하여 나는 세 번째걸음인 그를 마중하러 쟈므스로 갔다.    연변에서 오는 객들은 새벽차에 쟈므스에 내리므로 나는 시간이 되자 개찰구로 나오는 객들을 하나하나 눈주어 살펴보았다.    이윽고 회색여름옷 입고 차에서 내린 강정일선생이 먼저 나를 부르면서 손짓했다. 나는 그만 첫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버렸던것이다, 강선생은 원래 대머리가 아닌가. 한데 어느새 머리가 저렇게 낫을가? 알고보니 가발을 해쓰고 오시였다.    “그러니 아주 변모를 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웬 젊은인가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젊어보인단말이지. 하하하....”    우리는 다시한번 상봉의 기쁨을 나누면서 해뜨기를 기다렸다.    강선생은 오신 그날만 휴식하곤 이틑날부터 나의 장편소설편집에 긴장히 보내기 시작했다. 그해따라 유달리 가물어 선생이 와있은 50일동안 비한꼬치 내리지 않고 무덥기만했다. 내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그때 우리는 이미 향소재지에 이주하여 와 향에서 처음일떠세운 교원사택ㅡ널찍한 벽돌집에 들었던 것이다.)    선생은 늘 맨 런닝그바람에 창턱가에 놓인 원탁에서 원고를 보군했다. 이럴때 선풍기하도 한 대 있으면 오죽좋으랴... 나의 저작을 내주자고 무더위속에서 그렇게 땀흘려가면서 신고하시는걸 볼때면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한데 작가나 편집이나 제 주장을 고집하는건 꼭 같은가보다. 강선생이 나의 소설에서 두 개절이나 빼던지려 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것 같다는 것이였다. 없어도 될것이면 내가 만들었겠는가? 이것이 나의 주장이였다. 하여 우리 둘은 쟁론이 벌어졌는데 나의 안해는 싸우는줄로 알고 놀라기까지 했다. 옹근 하루시간의 격렬한 쟁론을 거쳐 나중에는 한 개절만 빼버리고 다른 한 개 절은 수개하여 그냥넣도록 “담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나하고만있은게 아니다. 나의 소설편집이 다 되자 마침 리근전선생이 우리 집에 오시였는데 닫새를 묵는 기간 그의 장편소설 “고난의 년대” 제2부의 원고를 놓고서도 작자와 편집지간에는 그같이 쟁론이 심했다. 이럴때 객관이 되어 옆에서 구경하니 그게 참 재미있기도했다.        나의 소설이 출판사에 투고되여 세상을 보기까지 만 8년간! 그사이 나의 소설은 “3돌출”을 하느라 세 번, 사상을 해방하느라 두 번수개하다보니 도합 다섯 번이나 탈태환골을 한 셈이다. 그사이 편집선생이 내한테 편지한것만도 50여통 잘된다. 나도 아마 그만큼은 했으리라. 편집선생이 우리 집에 세 번오시였고 내가 연변으로 세 번나갔더랬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다가 지구적인 “교착전”에서 피로할대로 피로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간에 리해를 기리했고 우의로써 새힘을 길러낸것이다. 나는 앞으로는 더 어려운 시련도 겪어내면서 글을 그냥 써갈것 같다. 강선생은 이젠 환갑이 다 되신다. 이제 곧 리직하면 편집사업을 그만둘 것이다. 하지만 그이께서도 운명하실 그 시각까지도 문학을 영 던지지는 않을것 같다. 이건 아마 내나 편집선생의 천직인것 같다.                                                  1988.12                                                   ※  원문장에 몇글자 보충                                                   관련글: 處女作 時 외 1수.                                                  관련글: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6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댓글:  조회:6244  추천:1  2011-09-01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김송죽     세상에 생명가진 동물이란 동물은 다 자기가 갖고있는 눈, 코, 귀, 혀, 살갓따위로 아품이며 차가움이며 닿음같은 것을 알아낼줄을 안다. 말하자면 감각기능을 갖고있다는거다. 동물만이 그러한게 아니다. 원산이 남미주이고 콩과에 속하는 함수초는 동물이 아니고 식물이지만 분명 감각기능을 갖고있다. 감응초 혹은 미모사라 부르기도 하는 그 식물은 잎을 좀만 건드려도 곧 아래로 늘어지고 소엽도 꼭 닫아버려 마치 부끄러움을 타는것 같아보인다. 그런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거다. 이런 종류의 식물을 감각식물이라 부른다. 어떤 사람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이를테면 산, 바위, 집같은 부동의 물체마저 감각이 있는게 아니냐면서 거기에다 생명의식을 부여한다. 나역시 감성론자이긴 하지만 무생물의 감각유무(感覺有無)까지 놓고 구태여 옴니암니캐면서 론하고싶지는 않다. 그건 생물학자들이나 연구할 일이니까. 내가 오늘 똑똑히 밝혀두고싶은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 역시 움직이고 말하는 동물ㅡ 사람인것만큼 감각기능을 갖고있는거고 감각기능이 있으니 감정이 있고 감정이 있으니 사유가 있다는 그거다. 사유를 불교에서는 대상을 분별하는 일로 해석하고있다. 즉 성질을 인지하고 판단한다는 말이 되겠다. 사람마다 자기의 감각과 사유가 있고 그것은 또한 분량이 있다. 하다면 나의 감각과 감정, 사유는 도대체 어떠하고 어느정도일가? 그것을 천평우에 올려놓고 달아보긴 어려운일이지만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록화를 풀어보면 대략 알수있다.   나는 쟈므스(佳木斯)에서 “광복”을 맞았다. 제정때 징병에 뽑혀나갔던 나의 부친님이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훈련을 끝내고 쟈므스철로경호대에 배치되여 근무하다보니 우리는 바로 거기서 살게되였던것이다. 그때 내나이 7살이였다. 한쪽으로 쏘련군이 쳐들어오고 일본군은 도망을 치고 도시는 불바다가 되고... 그야말로 혼란하기 짝이 없는 란장판이였다. 그때 쟈므스철로경호대에는 꼭같은 신세의 동포가 다섯있었다. 그들은 하는수 없이 할빈쪽으로 내빼는 일본군을 따라 차에 올랐다. 그랬다가 그들은 그자들을 그냥 따라가면 끝장이 좋지 못할게 뻔한지라 눈짓으로 서로 약속하고는 차가 도시구역을 채 벗어나기전에 그만 모두 뛰여내렸던것이다. 쏘련군은 차에서 뛰여내린 후 아직 미처 군복도 벗어던지지 못한 나의 부친을 체포했다. 그리고는 총살해버리려고 송화강변으로 끌고갔다. 그런데 말을 시켜보니 조선사람인지라 죽이지 않고 나주었다. 부친은 이렇게 목숨을   건진것이다.   일본이 망하고 만주국이 붕괴되니 토비가 끓기 시작해서 시국은 더구나 어수선산란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토비들은 조선사람은 “작은일본놈”이라면서 북만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로라령을 넘기지 않고 모조리죽여버리리라 했다. 그래서 인심은 더구나 황황 불안해났던 것이다. 이같은 형편에서 그해의 9월을 잡자 내 이모부의 형님이자 항일간부였던 김동철(金東哲)이 역시 자기와 같이 항일을 했던 다른 한 사람 숙친한 김해정(金海靜)과 함께 동포들을 재난의 와중에서 건져내고 보호할 목적으로 손잡고 쟈므스와 벌리, 화남, 의란, 보청 등지에서 600여명의 끌끌한 조선청년들을 모집 동원하여 동북인민자치군 합강군구 1퇀 2영을 창건한 후 토비숙청에 나섰는데 전사들은 싸움마다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쳐 소문이 멀리났거니와 군중의 애대를 몹시 받았다. 항간에서는 이 부대를 습관상 “조선독립영”혹은 “동철부대”라 했다.   당시 중공중앙에서 파견되여 온 장문천(張問天)동지가 녕안에 있으면서 합강, 목단강 두 성의 토비숙청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광복”나던 그해의 8월부터 12월까지는 북만토비숙청의 첫단계로서 전략은 자체의 실력을 확충하면서 토비의 반란을 공제하는 것이고, 둘째단계는 이듬해인 1946년 1월부터 7월까지 력량을 집중하고 련합하여 토비를 강력히 소멸해버리는것이였다. 합강군구는 방강사령원(方强司令員)의 지휘하에 의란(依蘭)에서 정편(正編)과 훈련을 다그쳐 끝내고 1월 12일부터 토비숙청에 나섰다. 나의 부친은 일본군에서 정기적인 훈련을 받았고 사격술이 좋았기에  교련(敎鍊)이 되어 자기가 소속해있는 독립영의 훈련을 맡아서 지도했고 그것이 끝나자 정찰반장이 되어 부대와 함께 토비숙청에 나섰다. 그때 공산당은 립장이 돌아선 그의 과거를 더 캐지 않고 믿어주면서 이같이 립공속죄할 기회를 주었던것이다.   아군은 토비숙청을 벌린 두 번째 단계내에 “중앙군(中央軍)”이요 “선견군(先遣軍)”이요 “정진군(挺進軍)”이요 하는 딱지를 붙인 토비 근 2만여명을 섬멸해버림으로써 한시기 북만을 독천장으로 삼고 살판치던 그들의 기염을 꺾어놓았거니와 계획대로 주력을 기본상 숙청했다. 악명높던 41개의 크고 작은 도당들은 모두 붕괴되였고 그자들의 “4개큰깃발”이라 자랑하던 사문동, 리화당, 송영구, 장우신은 목숨을 살려보려고 잔당을 끌고 산속에 깊이 숨어버렸다. 이해의 8월부터 년말까지 세 번째단계였는데  아군은 구역을 나누고 떼여맡는 방법으로 숨어버린 잔여를 계속 추격, 사출, 소탕하는것이였다. “동철부대”는 상급지시에 쫓아 화남현에 주둔하면서 금광과 화력발전창을 보위하였다. 11월 16일, 나의 부친은 참모장 김해정의 인솔하에 다른 한 형제반과 함께 적정을 저찰하러 자기 반을 거느리고 영평강(永平崗)에 갔다. 영평강은 완달산중에 있는 자그마한 금광촌이였다. 엄한이 스며드는 그날밤 전사들은 마을과 2리가량 떨어진, 지주가 버리고 달아난 빈집에 들었다. 헌데 리화당(李華堂)비도가 그 마을 고지주의 밀고를 받고는 이틑날 새벽에 잔존기병 100여명을 끌고 와 달려들었다. 이쪽은 포위에 들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허지만 과불적중(寡不敵衆)이요 적은 워낙 수자가 몇배나 많으니 력량이 근본 대비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생사결전을 벌린 전사들은 영용히 반격하면서 3시간남짓이 견지했다. 적은 나중에 집에다 불을 질렀다. 이쪽은 사망자가 많은데다 탄알마저 떨어졌다. 하여 17명은 모두 불타는 집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원쑤들은 그야말로 단말마적인 발악으로 최후의 보복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후 림구쪽으로 달아난 리화당(李華堂)은 한달도 못되여 12월 12일에 산속에서 아군에게 체포되여 나오다가 말을 놀래여 마차를 뒤번짐으로써 밑에 깔려 자살했고 사문동(謝文東)은 그보다 먼저 붇잡혀 3일에 벌리(渤利)에서 처형되였으며 장우신(張雨新)은 15일날 조령에서 총살당했고 손영구(孫永久)는 명이 좀 더 길어 이듬해의 4월 1일에 벌리에서 처단되였다. 이상의 네 토비두목을 보면 사문동과 리화당은 워낙 항일을 하다가 왜놈앞에 무릎꿇었던 변절한이고 장우신은 한간이며 손영구는 상습비도였다.   부친이 희생된 후 우리는 영평강과 장대를 몇 개 사이한 리수거우(돌배나무골)로 갔다. 거기에 부친이 소속했던 한 부대가 주둔하고있었던것이다. 어머니는 재봉기로 군인들의 옷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래서 나는 옹근 3년간 그들과 함께 지냈다. 말하자면 부대가 나를 아들같이 자래운것이다. 나는 군인들한테서 글을 배우고 노래를 배웠는데 그들의 전투얘기를 더 듣기 좋아했다. 그때 부대에는 군마가 여러필있었다. 그게 아마 1948년도 봄이라 생각된다. 어느날 앞골이 푸르러지자 사양원아저씨가 털빛이 붉은 절따말 한필을 나한테 주면서 끌고나가 방목하라고 했다. 나는 좋와하면서 말을 끌고 앞골로 갔다. 그리고는 진종일 말잔등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켠이 되어 돌아오니 엉덩이껍질이 다 벗겨져 아파죽을지경이였다. “야 이놈아, 그 말은 앓아서 등때기가 칼등된건데 네가 그걸 타고 진종일 놀았으니 그놈의 엉치가 무사할리 있겠냐, 이놈!” 군인아저씨들은 내 꼴을 보고 혀를 차면서 웃고 놀려주었다. 그래도 나는 이젠 말을 안먹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양원아저씨는 이틑날부터 아예 안장까지 지워주면서 나더러 타고다니며 풀을 뜯기라했다. 나에게는 길이가 한발이나 되는 번쩍거리는 칼 한자루있었다. 그것은 군도가 아니고 자루에 사쿠라꽃을 새긴 일본제의 격검용 장검이였는데 나의 부친이 어느 한 전투때 토비손에서 로획한 것이였다. 그런것을 내가 어머니, 둘째고모와 함께 부고를 받고 부친의 시신을 보러 멍쟈강(孟家崗)에 갔을적에 부대에서 유물이니 두고 기념하라면서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1953년도, 타요자금광국에서 연극을 논다며 빌려가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죄꼬만 녀석이 제키만큼한 칼을 옆꾸리에 척 차고는 말까지 타고 꺼들거리니 보는 사람마다 “허, 그놈!”하고 탄사를 냈다. 나는 그럴때마다 으쓱했고 그러는 멋에 말타기를 더 좋아했다. 했지만 나는 마을을 나와서는 곧 말에서 내리군했다. 병든 말이 불쌍해서였다. 그 절따말은 총상을 세 번이나 입었는데 엉덩이에 박힌 탄알은 그때까지도 빼내지 못했다고한다. 모두들 하는 말이 그 말은 병들기 전에 아주 용맹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더 측은했고 어느덧 정이 깊어갔다. 나는 말이 병이 났기를 빌었거니와 신선한 풀을 많이 뜯어먹고 어서 풀살이 오르기를 바랐다. 어느날인가는 내가 먹자고 싸간 반합의 샛노란 강냉이밥을 먹이기까지 했다. 헌데도 웬일인지 말은 종시 푸들념을  하지 않고 점점 더 앙상하게 여위워만갔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의 어느날 그 절따말은 끝내 죽고말았다. 저절로 죽은것이 아니라 사람이 총으로 쏴서 죽인 것이다. 누가 그랬는가? 낯에 마마자국이 덮힌 패장아저씨가 그랬던거다. 그 아저씨는 별명이 “꽃쟁반”이였다. 토비들이 곰보를 “꽃쟁반”이라했다. 편지를 “해엽자”, 양말을 “동동자”, 술을 “반강자”라 하는 것 처럼 그것도  토비들사이 사용하는 은어(黑話)였다. “빌어먹을 꽃쟁반! 어디보자!” 불쌍한 애마가 그렇게 죽어 속이 끓어올랐던 나는 혼자 울며 음질을 쓰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먹둥구미에다 썬 여물을 담아갔고 가서 낮잠자고있는 그의 머리에다 콱 부었다..... 그것은 감미로운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나의 소년시절이였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은 내 인생에 고초를 안겨주면서 속절없이 흘러갔다. 세인이 다 알고있는 10년동란시기를 나는 그야말로 악몽속에서 흘러보내면서 목숨을 간신히 건지였다. 력사에 류례없다는 그번 “혁명”을 발동한 위대한 분이 눈을 감은 이듬해에야 나는 동란에 곡경을 치르고 제 마을에서는 그냥 살기 어려워 치타이허(七臺河)에 이사간 어머님을 보러 갈 수 있었다. 헌데 그번걸음에 내가 꽃쟁반아저씨를 다시만날줄이야! 그때 그분은 이미 70고령이 다 된 늙은이였는데 우리는 꼭마치 생리사별(生離死別)을 당했던 부자간모양으로 부등켜안으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이게 몇해냐, 30년!... 너를 보니 내가 병념이를 다시만나는 것만 같구나!” 나의 부친의 명함이 병념(丙念)이다. 면면한 회포가 가슴을 채웠다. 그날밤 우리는 한이불속에서 자면서 밤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저씨는 내한테 여물벼락을 맞던 일과 상급의 비준도 없이 자기가 병든 말을 고칠수 없으니 아예 죽여버려 후에 처벌받은 일도 빼놓지 않고 회억했다. 그 일을 어찌 잊으랴. 아저씨가 말했다. “듣자니 넌 네 아버지의 력사문제 때문에 더 고생했다더구나.” “예, 그랬습니다. 계급이색분자라구요. 렬사증까지 빼앗기구...” “미친 녀석들이지!” 아저씨는 몹시 격분하시였다. 그때 혁명열의가 충천했던 “반란자”들은 렬사증만 빼앗은게 아니라 꼭괭이를 들고가 벌리렬사릉원에 있는 나의 부친의 묘를 당장 파던지겠노라 왁작 떠따고우더니 웬 일인지 가지 않고 제풀에 물러앉고말았다. 아마 감히 그럴 담량은 없었던모양이다. “문화혁명”후에 벌리현에서는 시내안에 있던 17명렬사릉을 다른렬사릉과 합치느라 서산에 옮기면서 나의 부친의 묘에다 높이가 한키나되는 비석(碑石)까지 세워놓았다. 그리고 해마다 청명절이 돌아오면 학생들은 잊지 않고 찬배를 가고있다.   나는 내가 “반혁명분자”란 커다란 패쪽을 목에다 걸고 이웃마을에 가 투쟁받던 일을 죽어도 잊을수 없다. 아낙네 하나가 달려나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이놈아, 네 애비 어떻게 죽었니?” “토비를 숙청하다가 죽었습니다.” “네 애비 잘 썩어졌다, 잘 썩어졌어!”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손에 쥐고 나온 꼬챙이로 내 입을 쑤셔놓았다. 지독한 악녀였다. 토비를 잡느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는데도 그렇게 치떨린단말인가? 이 무지막지한 쌍년아! 너도 그래 사람의 새끼냐? 개보다못한 년!... 숨이 넘어갈 듯 아파난 나는 입안에서 흐르는 피를 뱉으면서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개는 그래도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 3년전 여름. 전국소수민족작가회의가 있어서 북경에 갔던 나는 회의기간 새로사귄 작가친구들과 함께 개공원을 가보고 놀랬다. 처음이다. 거기에는 내가 평생구경못한 수백종의 개가 있었던것이다. 우리 여기 중국종의 발바리로부터 프랑스 알사스가 원산인 세퍼트, 영국이 원산인 바스티브, 불독, 콜리... 하여간 없는것이 없었다. 털빛이 하얀 세인트버너드란 개는 검고 커다란 귀가 아래로 축 쳐졌는데 다른 개보다 트대가 유별나게 굉장히 컷다. 내가 지금 이런 개를 자래워서는 뭣에 써먹겠느냐했더니 집이 신강 우르무치에 있는 위글족 녀류작가 비리커무 싸디크가 거기 패쪽에다 써놓은 설명문을 먼저보고나서 왜 써먹을수 없다구요, 이 개는 생긴것과 같이 힘이 센데다 후각이 특별히 발달하고 인내력이 있어서 훈련만 잘 시키면 구명견(救命犬)으로 훌륭히 쓴다는군요 하고 알려주었다. 개가 조난당한 사람을 구함에 제 생명을 바칠줄을 아니 어찌 미물이라하랴! 우리 마을에는 동란이 일어나기 두해전에 쟈므스시내에서 이사를 온 집이 하나 있었는데 잔밥이 많은데다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오자부터 쌀과 남새를 대주었다. 나는 그네들을 가엽이 여기고 무척 동정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가까운 사이로 되었다. 그런데 지내보니 그 호주가 워낙 유별나게 손꿉놀리기 싫어하는 건달이였다. 바탕이 그런 사람이 “문화혁명”이 일어나니 어찌하여 마을에서 “반란파”, “지도급인물”에 들어 머리를 내젓기 시작했다. 과연 소웃다 꾸레미터질 일이였다! 그는 나에게 나를 비판하는 “대자보(大字報)”며 빼앗기운 원고며 일기책이며 소설책들을 한짐 가득 지우고는 온 공사 6개의 마을을 조리돌림하면서 투쟁했다. 지난날의 정을 봐서라도 어쩌면 그렇게까지야?....제법 말할줄을 알고 시집장가를 갈줄도 아는 사람의 새끼를 만들어낸걸 보면 그가 결코 미물같지는 않았다. 헌데도 어쩐지 나는 개만 보면 오래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그를 다시다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사람의 깝지를 쓰고 어쩌면 그렇게까지야?....(리성도란 자도 있다. 그역시 외지ㅡ 송화강건너 어느마을에서 이사를 왔으니 초면이였다.)   말대갈상의 계집년하나는 이웃에 살면서 아들의 “소설자료수집노트”를 감춰준 나의 어머니를 보황파라 고자질하여 이루형언키 어려운  릉욕, 곤욕 을 당하게 하고는 그게 너무도 깨고소해서 깔깔거리며 춤까지 추었다. 한쪼각의 인성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추태를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했다. 남의 불행을 자기의 락으로 삼고 거기서 행복을 줏자고 드는 그런 악인에게 무슨 락이 있으며  행복이 있겠는가? 방치돌을 달아매도 늘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신통히 현실이 그것을 잘 증명해주는것 같기도하다.   나는 학교를 초중밖에 다니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 문학을 시작한 나는 마을의 초학자들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해서 주일날이 돌아오면 꾸준히 리론을 학습했고() 겨울이면 연출대를 무어 연극을 놀았다.(, , 등) 그러다가 내 생각에 기초가 일정하게 닦아졌다고 여겨지자 1965년도에 내 평생숙원인 토비숙청을 제재로 한 첫장편을 집필하기 시작했던것이다. 헌데 그것이 남을 그토록 격분시키고 지어는 반당, 반사회주의, 자본주의를 복벽하는 “죄악”으로 되어 투쟁대에 오를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무지의 락원에서 나는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모란 수모는 다 받아보았다. 나도 감각이 있고 감정이 있고 사유가 있는 사람이다. “야 이놈아, 거꾸로 들고 쪽 훑어봐야 똥밖에 나올게 없는 주제에 네가 소설을 써? 야, 야, 메스껍다!” 마을에서 “참모”노릇을 하는 유식하다는 사람이 이러면서 나를 투쟁했다. 사람의 배속에서 똥이 나오지 않고 그래 꿀이 나오겠는가? 인간에 대한 학대가운데서 가장 나쁜것이 남의 인격을 헐뜯는 것이다. 속담에 “관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말라”했다. 원쑤진 일도 없건만 산사람을 세워놓고 어쩌면 그렇게까지 막말을 한단말인가?... 능구렁이같은 그 령감쟁이는 아직 살수있는 나이건만 내 가슴에 박아놓은 못을 빼지도 않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물론 죽음이 모든걸 속죄는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지나간 일인데 잊어버리란다. 잊다니? 당신이면 그래 잊을수있단말인가? 부처님이나 그걸 잊겠는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부처님으로 태여나지 못했다. 지난날 나를 못살게 군 사람을 다소 용서할수는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심한 마음의 상처니 잊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본능을 떠난다면 그건 다 가짜가 되고만다. 그렇지 않은가? 뒤늦게라도 내한테 잘못을 사죄하는 사람이면 그래도 한쪼각의 량심이라도 있어서 고마운거고... 더 쓸라치면 장편이 될 것 같아서 그만둔다.                                            1996년        보충글: 광복직후 정치토비들은 북만 각 현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열의가 높아 혁명대오에 용약참가하니  아니꼽게보고  잔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5월 14일 밤중에 왕소정(王小丁)비도 200여명은 목단강시 북쪽에 있는 팔달구촌(八達溝村)에 달려들어 그 마을의 촌장 장정국(張正國)을 비롯한 농회위원 김남수(金南洙) 등 4명을 살해하고 군중 10명에게 중상을 입히면서 현금 7백만원과 옷 1천여견지를 략탈했거니와 촌자위대의 무장을 전부 거두어갔고 달아났다.   1946년 5월 26일, 곽흥전(郭興典)토비 700여명이 東安市(지금의 密山市)에 달려들어 하루새에 무고한 조선족주민수백명과 한족간부를 학살했다. 내가 조사해봤는데 이웃의 마음좋은 한족이 마른 우물과 천정에 숨겨주고 제 자식인양 옷을 갈아입히고는  낯에 검댕이를 발라 위장해서 겨우살려낸 그 몇몇  어린아이와 어른을 내놓고는 몸을 빼지 못한 동포 300여명이나 생명을 잃은것이다. 곽흥전(곽털보)비도는 그들을 학교에다 몰아넣고는 기관총을 갈겨 무더기로 죽이였는데 붉은피가 도랑물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를 혹은 이라고도 한다. 그것뿐아니다. 1946년 6월 16일밤에  곽(郭), 랑(郞) 두 비도무리는 결탁하여 팔면통(八面通)에 달려들었는데 그곳 보안대(保安隊)를 격파하고는 또 다시 동안에서의 모양대로 무고한 조선족을 여럿이나 살해한 것이다. 이같이 참사가 련이어 발생하자  황황불안해난 북만의 우리 동포들은 피땀을 흘려 개간한 땅과 여지껏 살아온 집을 버리고 쟈므스, 무단쟝, 하얼빈, 치치하얼 등 도시로, 아니면 연변으로 고난의  피난을 시작했던 것이다.      보충글:  김동철, 김해정과 나의 부모님들은 숙친한 사이였다. 그 두분은 다 동립운동가들로서 항일때 동북항일련군 제8군 군장 사문동을 알고 마희산도 알게되었던 것이다. 김해정은 독립운동을 해온 나의 할아버지와는 결의형제를 맺은분으로서 의형제 다섯중 할아버지가 첫째, 그는 망내였다. 나의 이름은 그가 松竹이라 지어준 것이다.  나는 사문동을 본것이 모두 세 번. 두 번은 무리를 끌고 우리 마을 복가툰(福家屯)에 들어왔을 때고 마지막은 붙잡아 벌리에서 처단 할 때였다. 마희산은 그가 죽어서야 보았다. 그의 머리를 떼여  손영구, 정운봉, 손팡유, 곽흥전, 장락산(독수리)의 머리와 함께 벌리시장에 달아놓았던 것이다. 사문동의 머리는 기차에 달고 다녔다. 한때 살벌한 재난을 몰로고와서 동북인민을 공포속에서 떨게했던 천죄만악의 토비가 이제는 다 숙청되였으니 안심을 하라고 알리는 이쪽ㅡ 공산당의 공시였던 것이였다.        (관련글)   合江軍區一團二營 : 1945年 9月, 在共産黨的領導下, 由金東哲, 金海靜等人動員佳木斯市和渤利, 樺南, 依蘭, 寶淸等縣600名朝鮮族靑年參軍, 創建了東北人民自治軍, 合江軍區一團二營. 營長柳坤(從延安來的漢族), 敎導員金東哲, 參謀長金海靜. 人們稱這支隊伍爲 “朝鮮獨立營” 或 “東哲部隊”. 他們在消滅謝文東, 李華堂的剿匪鬪爭中, 不怕犧牲, 英勇戰鬪, 屢建戰功, 多次受到表揚.     (徐基述主編:  “黑龍江朝鮮民族” 87頁)      永平崗戰鬪 : 1946年秋, 合江軍區一團二營進駐樺南縣, 保衛金鑛和火力發電廠. 11月16日, 營參謀長金海靜率2个班的戰士去永平崗偵察敵情. 傍晩, 寒風凜冽, 戰士們住進離屯2里外的逃亡地主的空房子里. 爲警戒敵人, 一夜沒合眼. 17日拂曉, 匪首李華堂得知我方是一支小部隊, 便派100多名騎兵迂廻包圍(延邊軍分區安玉均回憶彔). 戰鬪打響后, 我戰士在金海靜的指揮下英勇抵抗, 堅持了3个多小時, 但因敵衆我寡而失利. 房子被燒, 子彈斷絶, 多人犧牲, 最后剩下的7个人也殘遭殺害. 爲悼念17名勇士, 在渤利縣城建立了 “參謀長金海靜以下16位烈士紀念碑”    (徐基述主編:  “黑龍江朝鮮民族” 97頁)
5    로 당 익 장 댓글:  조회:4952  추천:0  2011-08-30
                        로 당 익 장   사전에는 로당익장이란 어휘를 낡투라했지만 나는 아직 얼마든 쓸만하다고 생각된다. 어떤때는 그걸 내놓고는 합당한 어휘를 찾기 어려우니까. 재작년그러께다. 내가 큰아들을 그림공부나 시켜볼가해서 연길로 데리고 갔다. 그전에 여러번 간적은 있었으나 번마다 소설원고때문에 안달아하다보니 번번히 만나봐야 할 분들을 만나못보고 돌아오군했었다. 한데 그번만은 경우가 달라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이름있는 여러 선배작가들을 만나볼수 있었다. 연길에 도착한 이틑날 나는 출판사의 강정일편집을 따라 로작가 정길운선생님이 계시는 아빠트로 갔다. 후리후리한 키에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가 우리를 반겨맞았다. 혈색좋고 근력도 있어보이는 정로인의 목소리는 자못 걸걸하였다. 이분이 바로 , , 등 여러권의 민간이야기집을 세상에 내놓은 분이로구나 생각하니 나는 인차 정감이 들었다. 정로인은 내일같아나 우리와 함께 시내를 한바퀴돌고나서 기여히 자기 집으로 가자고 끌었다. 하여 나는 강선생과 함께 그의 집에다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왔다. 거리에 나가 몇잔씩 걸친데다 또 맥주를 둬병씩 마시고보니 놀기가 안성마춤이였다. 그래서 자연 오락판이 벌어졌는데 정로인은 손자를 얼싸안고 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귀염둥이 내 손자야    내사랑 귀염둥아    요것보지 내 손자놈    할배 입맞추잔다    어화둥둥 내 손자야    귀염둥이 내 손자야   즉흥적으로 지어 넘기는 그의 타령가락이 자연스럽거니와 멋들어져서 우리는 웃었다. 정로인은 춤을 다 추고나서 나더러 타령을 해보라했다. 이런! 타령이라구야 알아야 하든지 넘기든지 하지. 나는 난생 처음 진땀을 뺐다. 정로인은 허허 웃더니 책장에서 방금 출판한 한권을 뽑아 저자싸인을 해서 나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내가 도리여 송구스러워했더니 정로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이는 실로 소탈한분이였다. 솔직한 뉘우침, 가식없는 맹세ㅡ 여기에 바로 작가적인 고귀한 풍도가 있으리라.   멀리 흑룡강에 있는 나는 오늘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군한다. 나이를 따져봐도 상거 20년! 기껏해야 아들벌밖에 안되는 젊은이와 대담히 도전을 걸고 나서는 백발성성한 로인을 다시금 상기하노라면 저도모르게 정신차리게 될 때가 많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있는가? 성공에 자만하는건 아닌가? 늙은이가 도전했다. 당해낼만한가? 하고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창작에서 가끔 해이해지려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사정없이 채찍을 안기면서 마력을 뽑군한다. 아, 얼마나 좋은 편달이고 고무인가. 몸은 비록 늙었어도 정열만은 식지 않아 젊은이와 내기를 걸고있는 정로인이 지켜보고있길래 나는 좋다. 우리 민족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선배작가들 모두가 정로인처럼 후배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었으면 얼마나좋으랴.                              1984년?   해란강(제376기)   
4    나의 處女作 “북대황 송가” 댓글:  조회:4704  추천:1  2011-08-30
    處女作 “북대황 송가” 외1수   예로부터 사람들은   북대황은 쓸쓸하다     살기를 꺼렸건만       내고향 북대황은          정녕 그런곳은  아니라네   넓고넓은 흥안령은   망망한 림해요     고대광실 기둥감 베내는        벌목공의 노래는           듣기좋아 주옥이라네   학강의 석탄은 기름탄이요   쌍압산의 석탄은     빛좋아 흑금이라        천년을 캐낸들          이 보배 다 캐랴   모래금, 덩이금   흑하, 애훈의 황금은     예로부터 그 명성 높았거늘       북경성의 찬란한 오각별도         이 금으로 만든거라네   하늘 끝에 닿는 땅이 있으니   봄이면 푸른 비단이요     가을이면 황금물결이라        만년을 풍년든다고             북대황은 곡창이라네   하늘에 은하수 흐르고   내고장에는 송화강이     굽이쳐 몇천리        기쁨한짐 그득 싣고          고기배, 짐배 달리네   구만리장천에 태양이 떳고   이 땅에 당이 있어     수천년 고된잠에서 깬 내고향은       기계의 소란한 음향속에         철갑을 떨쳐입었네   오, 장하도다, 네 모습!   내 너의 품속에서     네 운명과 더부러 고이자라거니       이름없는 이 어린 시인도         내 고향을 소리높이 노래하노라!         (1962. 7. 21 “흑룡강일보” 진달래)                  내 앞에서 별이 빛나   나는 반생을 달려왔다 인생종점은 어디? 꼬부라진 의문부호 앞에 던지고 나는 다시 신들메조인다   내 심장에서 설설 끓는 피 동토대의 천년설도 녹이려니 천산만악이 그냥 앞을 막아도 나는 가리라, 내가 갈길을   얼음같이 차가운 랭소 엄한보다 혹독한 인정 무슨 맛이면 보지 않았더냐 담즙같이 쓰거운 나의 생로   하지만 내 앞에서 별이 빛나 마음은 하냥 희망속에서 웃어 용기는 장엄한 맹세 이루더라 용사답게 살다 죽으리라는   오, 그때가 되면 내 한몸 한줌의 재로 되어도 내 이름도 류성으로 남을가 태공을 가르는 빛이 되어.   (1988.1.16. “흑룡강신문” 진달래)             
3    무지한 폭정(暴政)이 사람잡는다 댓글:  조회:5287  추천:3  2011-08-26
                                     에세이                               무지한 폭정(暴政)이 사람잡는다                                                     김송죽                                                                (1)       미학적인  각도에서  볼 때  각을  놀려가며 몸을  움직이는  춤은  노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면서  또한 일종의  운동으로도  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을 가진 모든 동물이 공유하고있는 생리상의 욕구(慾求)라 하겠다. 그러한즉 두말할것 없이 그 어떠한 제한도 구애도 받을 필요가 없고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어느  정당이  그것마저  유해(有害)한  것으로 여겨  그것에다  그  어떤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붙여  제압하고 금지시킨다면 뭐가 되겠는가?  구실이야  어떻던지간에  그것은  인간최저의 생존방식마저  모르는  답답하고도  저주로운  무지(無知)에다  폭정(暴政)을  가했을  뿐이지  다른  어떤  좋은것으로는  절대  해명도  평가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여나면서부터  누구나  다  제  공간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날에  위대하다는 “사회주의국가”에서  살아온  우리들ㅡ 전체국민은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가져나봤던가?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이켜보고  한번다시  랭정히  사고할 필요가 있겠다.   이른바  “무산계급혁명”이라는  미명(美名)하에  발동했던  그 세계력사에서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운동”은  근본  위대하다거나  거룩하다는  이름을  붙일  자격을 못가진 일대  아이들의  작난이였다.  그것은  그 결책자가  지망한것과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무지(無知)의 10년동란(動亂)”,  “폭정의 10년내란(內亂)”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무수한 원안(怨案)이  호곡(號哭)하는  그  혹심한  재난을  어디에다  비기며  언제 다 말하고  청산하랴!  당시 집계된  전국인구를 보면  8억이였는데 력사가  유구한  이 세계의  인구대국은  그  지루하고도  무지한  광열적인  운동으로  하여  만신창이  되어버렸건만도  충성심에만  길들여진 순진한  국민들은  아직도 채 깨여나지를  못해  그것을  감각조차하지 못하고있었으니  엉망이  되어버린  뒷수습은  그  후임자들이 감당해야만했다.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  책임은  응당  누가져야했던가?                                         (관련글: 65)                                                                  (2)   이건  목격자가  나에게  한  말이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보니  단조로운  만세소리와  충성무(忠誠舞)에  시달림을  받아온  북경의  몇몇  젊은이들은  머리가  남먼저  틔여  보다 자유로운  제 목소리를 낼수있는  문화생활을  대담하게  추구하기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사교무(交谊舞)를  우리도  춰보자는 발상(發想)에서 대담히  행동을  했으니  그날은  정확히 1980년도  청명절.  장소는  원명원(圓明園)이였다.  청년예술가이자 시인이였던 북도(北島),  다른 한 시인 망극(芒克),  그리고  젊은 연출가  하군(何群)이였다.  그들  셋은 그곳에 가  놀면서 한담을  하다가  시를  읖고는 그 격정에 사교춤을  췃다.  매일 그모양 그멋으로  놀았는데  뜻밖에 그에  흡인되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것이다. 노래소리를  토해내고있는것은  그때값으로는  260원되는 록음기였다. 구경군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그곳은  어느덧  로천무도장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곳은  고정적인  남녀청년들의  모임장소로, 밀회장소로, 사상교류장소로 되였던것이다.  그같이 모이다보니  신분이  각각이요  그속에는  별사람  다  있었다.  모여온 사람들이 입은 옷맵시도 전과는 점점  달라갔다.  세월이  변했길래  새  시대멋을 냈던것이다.  북경에 온 외국손님은 중국에는 여지것 보지 못햇던 이런 경상을 희구하게  여기는지  그것을  갖고온  카메라의  렌즈에 담았다. 그리고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북경의 다른 한  곳  앵도구(櫻桃溝)에서도  사교무를 추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거기는 거개가 처녀나 젊은각시들이였다. 그들은  모이면  사교무를 췄고 옷색갈을  뭐로  바꿰입으면  좋을가고 의논도 했다.  전에는  있어본적이  없는 새  경상이였다. 이와함께  북경에는 가정무용회도 생겨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그해  즉  1980년 6월달에  와서는  갑작스레 사라지고말았다. 공안부와  문화부가  련합으로  를  내렸던것이다.     당시  공안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큰도시들에서는  공원,  광장,  려관,  가두  등  공공장소에서  남녀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사교무를  추는  현상이  나타났는바  어떤데는  지어 구경군만도 근 만여명에  이르길래  사회치안에   골칫거리라는 것이였다. 그  를  보면  사교무는  저속한  것이여서  사회풍기를  흐리운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취체할것을  견렬히  희망해  영업성적인 무도회를  열었던  주모자는  에  따라  그 엄중성을 가려  “사회질서관리방해죄”로  형사책임을 추궁해야한다“고  했다.                                                                 (3)   80년대초, “가정무도회“는  따져보면  그  래원이  북경의  고급관리자녀군체가  발기한것으로서  짧은시일내에  전국범위에  만연되었던것이다. 1982년에  공안부와  문화부는  이라는  문건에서  가정무도회도 취체해야하거니와 각급령도간부는  이신작칙하여  제  자녀들이  가정무도회를  열지  못하게끔  교육해야한다고  했다.   그때  서안(西安)에  마연진(馬燕秦)이라는  녀인이  있었는데  춤추기를 좋아했다.  당지의  파출소에서는  그녀를  불러다가  춤추는  정황에 대해서  따져물었다.  마연진은  별로  개의치않고  춤을  같이  춘  남녀 100여명의  이름을  쭉  댔다.  그중  어떤  남자는  그녀와  관계가  더  밀접했다.  원래  파출소에서는  너무  제멋대로놀지  말라고  경고를  하자고한건데  마연진은  코방구를  뀌면서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처벌할  조건이  안되거니와  다른  리유를  붙일  방법도 없는지라  그만  돌려보내고  만  것이다.   그런데  1983년에  들어서  “얜다(嚴打)”가  시작되였다.  마연주는  중점타격대상이 되었다.  하여  그녀는  감옥에  들어갔거니와  잇따라서 그녀와 같이  춤을  춘  사람  300여명이나  줄줄이  잡혀나와  그것이 온  섬서(陝西)를  들성케  한  특대안건으로  되었던것이다.  는  여러차나  첫면에다  이 안건의  상황을  보도했다.  그  안건은  끌려든  사람이  많거니와  련루면이  넓어  심사하는데 하도  어려움이  많길래  “얜다(嚴打)”고봉기를  지나  19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낼수 있었다.  내막을  잘아는  사람이  말한것인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그나마  고봉기를  념겻으니말이지  그러지를  못했다면 적어도  열몇은  사형이  되였으리라는것이였다.  해도 고봉기를  그같이 넘겼음에도  마연주를  비롯하여  사교무를  적극적으로  춘 사람 3명이 총살당하고  3명은 사형유예집행,  2명은 무기도형에 떨어졌다. 무죄는 적고  도형에  떨어진  사람이  너무나도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남(濟南)의 일이다. 산동경극원의  연원인  장우태(張于太)역시  가정무도회에 가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늘  산동성군구사령원의 아들  경애평(耿愛平ㅡ별명 “耿三”),  산동성부성장의 아들  무위첨(武衛尖ㅡ별명“武二毛”),  산동여극극단회계의 아들 박국영(博國營),  제남 어느 한 병원의 의사 서춘생(徐春生) 그리고  시민 차립군(車立君)등을 데리고 다녔다.  그랬더니  1983년 얜다(嚴打)기간에  갱삼,  무이모,  박국영,  서춘생,  차립군  등  10여명은  “건달무리” 주요성원이라  몰아  총살해버렸다.  남을 추기고 끌어  함께 춤판에  들러서게한것  밖에  다른  큰죄는  없었다. 장우태도  역시  체포되였는데  그의체포는  아주  희극적이였다.  그때는  산동경극단에서  바로  하북의  한  현에  가서  연출을  하고있었는데  그  극의  중간에  이르러서는  그의  연기가  끝나는지라  그는  화장을  지우고는  극조의  다른  연원들과  함께  술마시러 갔던것이다. 그는  술을 마시다가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술좌석에서  돌연스레  제 가 끼고있던  손목시계를  벗겨  자기보다  나이어리고  같은  극조에서 자라난  녀배우에게  주면서  “이 오빠는  어느때  일이  날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이걸  기념으로  주니 넌 받거라.”  했다. 대방이  어찌  닁큼  가지랴.  이쪽이  재삼말해서야  그녀는  마지못해 받고는  웃으며  말했던것이다. “좋아요.  그럼  내가  건사하는  셈  치고  받겠어요.” 이때는  밤  12시좌우였다. 제남에서  온  경찰차가  그를  잡아갔다. 진짜희극은  아래에  있다. 1995년에  장우태는  형기가  만기되여  출옥했는데  바로 그가 출옥한  그  한해에만도  중국은  영업이  허가되여  등기된  가무청(歌舞廳)이  20,662개였고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224,938명이나되였다.  그가  갇겨서  옥살이를  해온  12년사이에  중국은  변화가 많았다. 많아도 너무나많았다.                                                         2011.8.26                                                       (관련글: )                                                 
2    무도장에서 댓글:  조회:4312  추천:2  2011-08-24
               무도장에서                         김송죽   얼음 도시ㅡ 할빈! 엄한에 얼어붙은 송화강을 잠재우는 여기, 북켠에 송화강을 끼고 일어선 우의궁전은 꼬박 닷새동안 환락의 도가니에 잠겼다. 전성 제2차문학예술일군대표대회, 그것도 제1차대표대회가 있었던 그때로부터 상거(相距) 26년만에야 열리는 회의였으니 안그럴리 있는가! 낮이면 새파란 유리기와들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우의궁전이 밤이면 현란한 전등불빛속에 웅장한 그 자태를 우렷이 드러내는데 가슴을 사뭇 들먹이게 하는 흥겨운 멜로디가 밤정적을 깨뜨린다. 여기 우의궁전에서는 밤마다 무도회를 열고있었던 것이다. (대표증만 있으면 자유통과라는데 저기나가볼가.) 춤이란곤 출줄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되어 이렇게 마음이 동했는지 모르겠다.   관악석에서 악대가 연주하고있는데 온 무도청을 빙 돌아가면서 붉운색, 푸른색의 벽등들은 관악의 진동에 따라 무시로 명멸하여 들끓는 무도장을 현란케 한다. 그런속에서 수백쌍의 젊은이들이 사교무를 추고있지 않는가. 친절과 사랑속에 활기롭고 자유롭게!  나는 부러웠다. 그러면서 한편 자격지심이 생기였다. (춤출줄도 모르는 주제에 여기룬 왜 들어왔나. 에익, 못난 바보다.)   이젠 중년을 훨씬 넘어 장년줄에 오르고있는 내가 아닌가. 저렇게 춤한번 춰보지도 못하고 멋없이 지내보낸 젊은시절을 생각하니 아깝기 그지없고 후회역시 없지 않았다. 허지만 이젠 되찾을수도 없는 인생이 아닌가. 나는 그만 돌아서 나와버리려 했다. 그런데 저이는 누군가? 몸집이 실팍한 대머리의 늙은이가 사교춤을 추고있길래 다시보니 성정협에 계셨던 왕일륜주석이였다. (저렇게 년로한 분도 여생을 즐거히 보내는데 내라고 왜?...) 다시금 마음이 동한 나는 그길로 성조선족가무단의 리단장을 찾아가 얘기했다.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이라 함께 출판사의 허총편을 찾아 끌어내여 우리 셋은 무도회의 단골손님으로 되었다.   두 청춘남녀가 추고있는 디스꼬가 무도장의 활기를 버쩍 돈우어주었다. 나의 말에 리단장도 허총편도 동감이였다.   내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젊은 한족녀인은 잡지의 편집이며 지난해에 장편소설 을 세상에 내놓은 리한평이였다. 그녀는 여직 사업과 창작만을 생각하다보니 춤한가지 출줄 모르는 병신으로 되고말았노라면서 후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춤을 춘다고 쓸 글을 못쓸것도 아니니 앞으로는 조건을 마련하여 춤을 꼭 배우겠다는것이였다. 나의 청에 그녀는 선듯 손을 잡았다. 우리 작가들도 생활을 즐길줄을 알아야 한다. 번중한 사업, 긴장한 창작에서 생기는 고뇌와 피로를 오락으로 풀줄을 아는것ㅡ 이역시 생활의 비결이 아니겠는가! 무시로 명멸하는 현란한 불빛, 흥겨운 반주, 명쾌한 녀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군들 속에서 무도장을 돌고있는 나는 여느때없이 즐거웠다.                               1985. 1. 26                 
1    리성을 잃어 야만이 된 인간들 댓글:  조회:6694  추천:2  2011-08-13
  에세이                  리성을 잃어 야만이 된 인간들          (8.15광복 때 치안공작반이 저지른 죄악)                             김송죽        나는 쟈므스(佳木斯)에서 8.15광복을 맞았다. 지금까지도 전기를 생산하고있는 옛 발전창(發電場)과 거리가 그리멀지 않은 시내동쪽구역이다. 한갈래의 자그마한 강물이 북쪽의 송화강에 흘러들고있는데 우리는 그 강 서쪽 십여동(棟)의 단층집이 모이여 두줄로 행렬을 지으면서 동네를 이룬 동포집거지에 있었다. 그때 내 나이 7살이였다.        1945년 8월 9일 이른새벽, 우리는 폭음에 놀라 깨여났다. 그 전날 대일선전(對日宣戰)을 한 쏘련홍군 비행기가 역전근처 물땅크에다 첫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이때 쏘련군은 세길로 나뉘여 만주로 진군하고 있었다.      10년넘는 사이 일위(日僞)는 쟈므스(佳木斯)에다 허다한 군정기관(軍政機關)을 세웠지만 이 도시의 운명을 진정 거머쥐고 흔들어 온것은 “쟈므스관동군육군특무기관”이였다.    그 기관은 1939년에 설치되여서부터 1945년 광복이 날때까지의 사이에 두목을 다섯이나 갈았는데 그때마다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는 그 벼슬자리에는 번번이 일본관동군의 군계요원이 앉았다.      흑룡강성공서(黑龍江省公署)의 당안을 보면 마지막 반년간 위삼강성(僞三江省)의 지방보안국리사관을 지낸것은 시마무라라는 자였다. 그는 당시 “흑룡공사(黑龍公司)”를 장악하고있었다. 피끗들어 별것같지 않지만 그 실체는 생각과 아주 영 달랐던것이다. 그것은 경제기구도 정치기구도 아니였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였는가? 그것은 쏘련에다 특무를 밀파하고 항일하는 사람을 투항시키는 첩보기구였다. 자기의 비밀감옥까지 몇개 갖추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소름기치게 하는 복마전(伏魔殿)이였던 것이다.      “흑룡공사(黑龍公司)”의 제일 큰 비밀감옥은 쟈므스(佳木斯)에 있지 않고 시내와 거리가 좀 뜬 만발툰(萬發屯)에 있었다. 그 감옥은 “삼도리화연구소(三島理化硏究所)”라는 듣기좋은 간판을 내걸었지만 벽돌담을 높이 쌓고 그우에 전기철조망까지 쳐놓아 백성은 얼씬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전문 공산당과 국민당항일분자와 쏘련의 첩보인원을 가두는 곳이였던것이다. 안에서 무엇을 연구했는가? 산사람을 놓고 연구한것이다. 그 연구항목이란 유항(誘降) 즉 유혹으로 꾀여서 항복을 받고 정보를 알아내는것이였는데 그러다 되지 않으면 죽여버렸던 것이다.       일제의 패망은 1945년 8월초에 이르러 이미 결정짓고 있었다.              바빠맞은 시마무라는 후사를 처리하느라 상급의 지령같은건 기다릴 념을 하지 않고  돌아쳤다. 그는 우선 위만시공서(僞滿市公署) 각 기관과 학교에 있는 일위(日僞) 직원들에게 두달월급을 앞당겨 발급했다. 그러면서 각 학교마다 일률로 방학을 선포하여 학생들은 제집에 가있게하는 한편 대화려관, 미룬신발상점, 흥아양행, 춘생객점, 영화관, 사진관 등 20여곳에 오래동안 잠복해있으면서 특무활동을 해온 수하인원들에게 후한 상금을 뿌려주었고 그런 후에는 지흥가와 일심가 두곳 수용소에 갇혀있는 “범인”들을 전부 “삼도소(三島所)” 수용소에다 몰아넣었다. 그러면서 쏘련첩보인원과 항일련군인원인 대로가(大老賈ㅡ공산당원), 국민당길림성 108구분부조직서기(一0八區分部組織書記) 리광덕(李廣德)은 제팔찰실(第八察室)에 끌어다 각각 따로 가두었다. 그러고나서 마지막으로 창씨개명을 해서 일본말로는 다다끼라 부르는 조선사람 박성호(朴成鎬)를 불러다 자기가 도시를 떠나면 곧 그가 책임지고 치안공작반을 동원하여 뒷감당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하다면 시마무라의 그 지시를 곰상히 받아안은 다다끼 즉 박성호는 대체 어떤자인가?    그는 김동한이 죽자 그 후임으로 치안공작반의 총책이 된 특무였다        하다면 김동한은 어떤 인물이였는가? 우선 그부터 알아보기로하자.      김동한(1893ㅡ1937)은 조선 함경북도 단천군에서 출생.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짜리러시아군관학교, 사관학교를 다녔다. 졸업후 러시아 이리크스크 보병 제27연대소위로 되었고 10월혁명후 모스크바에서 공산당에 가입했고 고려공산당 군사부위원, 고려여단 검사단위원, 적위군 조선혁명군 장교퇀 퇀장(연대장과 같음)이였고 1920년 6월 20일 반유태인운동에 참가한 죄로 당에서 제명되였고 해삼위감옥에 들어갔다.    1921년 석방된 후 군벌 오패부(吳佩孚)휘하에 들어가 제3차 직봉전쟁동방토역군(直奉戰爭東方討逆軍) 중쏘변경지구 제1육군 사령관에 임명되였다. 1924년 쏘련군에 포로되였으나 해삼위에 주둔한 일본영사관에 의해 조선으로 압송되였다. 거기에서 손기환(孫基煥) 등 13인과 함께 일제에 충성할것을 맹세하고 간도로 왔다.    1934년 간도협화회를 설립하고 본부회장이 되었다. 그는 일본헌병대와 배합하여 항일부대와 항일군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3년간에 그의 지휘하에 죽이고 체포하고 투항하게 한 수가 수천명이나 되었다. 이로하여 1936년 7월 10일 (훈공3명중에서 첫 번째)을 받았고 1936년 12월 간도협조회와 협화회가 합병된 후 협화회 삼강성 특별공작대 부장에 임명되였다.   (延吉縣志)      김동한의 최후에 대해서 권립, 김춘선은 (제3집 183페지)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1937년 겨울, 김동한은 항일련군 8군1사 정치부주임 김근(일명 김정국)을 유항(誘降)시키려고 그와 면담할것을 제기하였다. 김근은 그의 비루한 수작을 간파하고 12월 7일 그와 면담할 것을 동의한다고 알리고 부대를 매복시켰다. 김동한이 매복권에 들어서자 항일련군전사들은 죄악이 가득찬 이 민족의 망나니를 정의의 탄알로 처단하였다.       치안공작반이란 바로 김동한이 생전이던 1934년 9월 6일에 간도성 연길에서 조직한것인데 주요성원은 모두가 이미 변절한 공산당항일간부와 변절한 독립운동자들이였다. 이들은 모두 일제특무기관의 특별훈련을 받았으며 헌병대와 수비대의 직접적인 장악하에 있었다.    치안공작반은 엄밀한 조직망을 갖고있었다. 그 본부는 처음에 연길에 있었는데 명월구와 왕청에 지부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 10개 구회(區會)와 총반(總班)과 반(班)들이 있었다. 그들은 관동군토벌대와 배합하여 반일대오내부의 반란을 책동하고 투항을 선동하며 정보를 탐지하여 일본관동군에 제공했다. 직책이 그러했던것이다.      만주의 항일은 의연히 발랄했다. 크고작은 각가지 명색의 항일무장들은 중국공산당의 장악하에 하나의 통일된 무력으로 점차 이루어졌는바 이 통일된 무력체인 동북항일련군은 11개군으로까지 발전장대했던것이다.        이에 경황해난 일제는 1937년도부터 6만명에 이르는 대병력으로 를 만들어 항일부대들을 북만의 삼강평원(三江平原)에다 몰아넣고 비행기까지 동원시켜 집중섬멸할 타산을 하면서 연변에 있던 치안공작반을 북만으로 끌어왔던것이다.    본부를 쟈므스(佳木斯)에다 잡은건데 인원은 모두 100명이였다.       당장 패망에 이르렀건만 야마도의 혼이 풀떡풀떡 살았다고 공성계(空城計)를 쓰고있는 시마무라. 그자의 3부곡은 특무를 잠복시키고 살인하고 방화하는 것이였다. 그는 그것을 획책하고는  사태의 발전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쏘련군비행기가 폭탄을 던진 바로 이틑날인 8월 10일에 쟈므스(佳木斯)에 주둔하고있던 한 개 련대의 관동군은 시민들에게는 전선으로 싸우러 나간다면서 철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의 첫 장편소설 첫페지의 글이다.            8월 11일날 밤중에 시마무라는 연회에 참가하느라 비밀통도로 한데 모인 위만일경과 특급간수들에게 술을 잔득먹여놓고는  오ㅡ시마, 후꾸시마와 함께 여기 “삼도리화연구소”는 물론 시내에 있는 다른 감옥들에 여지껏 갇혀있은 정치범들을 처리할 대책을 토론했다.    한데 마침 그날밤에 심한 고문을 당하고있던 국민당흑룡강당판(國民黨黑龍江黨辦)의 장인천(張人天)과 하가훈(何家訓)은 불시에 정전(停電)하는바람에 기회가 온줄알고 취조실을 뛸쳐나와 철조망을 넘어 도망쳤다.    그야말로 천만중다행스러운 운수였다.      새벽부터 대도살이 시작되였는데 시마무라, 오ㅡ시마, 후꾸시마 그 셋의 휘동하에 술기운에 용기가 올라 인간의 자비심이란 꼬물만큼도 없이  싹 잃고만 인면수심의 살인귀들은 그야말로 발광적으로 미쳐날뛰였다.    그자들은 이른바 “자유범”으로 불려온 사람은 모두 원내의 뜨락에다 무릎꿇이여서는 칼로 싹 다 목을 잘라죽였고 감방에 갇혀있는 사람은 전부 기관총을 갈겨 죽이였다.    이런판에서도 생존자가 둘이 더 나졌다. “제8찰실”에 갇혔던 국공량당 당원인 리관덕(李廣德)과 대로가(大老賈)였다. 그 둘은 몸에 총상을 여러군데나 입었지만 치명적이 아니였길래 백성들의 보살핌을 받아 간신히 구원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다다끼라 창씨개명을 해서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 되어버린  박성호가 이끄는 치안공작반의 그 100명의 역적들도 인간의 리성을 잃고 죄악적인 망나니짓을 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저들 인원으로 몇 개의 “파괴대(破壞隊)”를 조직한 그자들은 먼저 군용창고와 은행, 전매서(轉買署) 그리고 일본사람이 경영해왔던 기업을 여러개 접관했다. 그리고나서는 매사람이 “원장토(原獎土ㅡ아편)” 를 100량씩 나눠가진 다음 저가끔 14식권총 한자루와  일본군도  한자루로 자신을 무장했다.    12일 밤, 그들 각 파괴대(破壞隊)는 일제히 행동했는데 먼저 일본사람의 상점 “등선화(登善和)”에다 불을 질러놓고는 이어서 큰집들인 “은좌통(銀座通)”, “대륙려관(大陸旅館)”, “고강호(高崗號)” 등 기업들에 불을 질렀다. 그통에 온 시가는  급기야 화광이 널름거려 숨막히는 불바다로 변하고말았다.    그야말로 지랄발광네굽질이였다.        어찌잊으랴, 나어린 이 가슴을 공포에 떨게했던 그 참상을 나는 죽는날까지 잊을것같지 않다. 죄악의 폭행은 본시 야만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고 저세상에 간것이 몇이나 되는지?.....                                          2011. 8. 13.  북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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