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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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혈 제3부 21.
2012년 06월 30일 02시 03분  조회:4511  추천:0  작성자: 김송죽
 

21.

 

   일제의 잔인무도한 횡포가 기록을 남기고 끝맺은 3.1운동!

   그러나 그것은 실상인즉 끝난것이 아니라 깨여지지 않은 얼을 가지고 속으로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뜻있는 이들은 끈질긴 지하운동으로 파고들어갔고 많은이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여기 만주는 의지하러 찾아온 우국지사들로 장을 이룬 것이다.

   이런때에 正義團단에서 순 조선글로 찍어내는 <<일민보>>와 <<국보>>는 애독자가 많아 환영을 받았다. 서일은 정민호가 왕청에 오자 그가 나어린 강위를 데리고 함께 신문사에 들어가 總責인 金星을 도와 발행을 돕게끔했다. 하여 그 두 신문은 기자, 편집, 발행인을 합해 직원이 어느덧 12명이나되였던 것이다.

   어느날 서일은 金星을 불러 신문발행정황을 알아보았다. 金星은 지장(紙帳)정황이 여의치 않아 발행량이 제한되지만 상해에 있는 臨時政府는 물론 북간도지역에 있는 大韓正義軍政司, 義軍府, 光復團, 義民團, 野團, 軍備團, 太極團, 大震團등에 어김없이 지속적으로 배달되고있으며 지어는 基督敎界의 北間島國民會에까지도 신문을 첫기부터 빼놓지 않고 여러부를 받아보게하는 상황이라 했다.

  《그래 반응은 어떠하오, 기독교측의 ?》

  《아직은 없습니다.》

  《달다쓰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 말인가?... 정녕 그렇다면야 좋겠는걸! 속담에 집안이 결단나면 생쥐가 춤을 춘다했소.》

   서일은 이러면서 그쪽에서 방해만하지 않으면 다행이라했다.

   본시 이질적인 종교여서 분기와 마찰이 불가피하고 그럼으로 하여 옹추간이 될수도 있지만 공동의 목적인 독립운동을 선위에 놓아야하는 이때인것만큼 대의를 봐서라도 되도록 서로간에 상(傷)을 주지 말자는게 서일의 원이였다. 

   서일은 신문선전과 발행 정황을 료해하고나서 이어서 어떻게 하면 무기를 조속시 구입해들일수 있을가고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초 重光團때부터 團을 무장시킬 궁리였건만 력량을 正義團으로 확대발전시켜 어제까지의 통계를 보면 순 결사대인원수만도 천을 넘겼건만도  총은 한자루도 더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團이 무장을 하지 않고서야 그게 허깨비와 다를게 뭔가? 빈주먹을 들고 육탄혈전을 한단말인가? 그런다면 개를 웃길 일이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여 자조(自嘲)를 하게 된 서일은 다시금 형세를 분석해보았다. 일본은 조선을 병탄(倂呑)하고나서 지금은 여기 이 만주땅을 노리고있는  것이다. 그렇건만 만주의 관리들은 일본의 그같이 팽창되는 야욕을 제대로 간파나하고있는지? 간파한다면 어떨가? 그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가? 그렇다면?... 그들의 속심을 진단해내야 한다.        

   이때의 적측상황은 이쪽에서 짐작한것과 같았다.

   조선총독부는 <<국경방면의 배일파침입상보>>에다 홍범도, 구춘선, 서일, 최진동, 량하청은 배일선인(排日鮮人)들의 두목이라 지적하면서 이들의 세력이 자라지 못하게 두절해야한다고 적어놓았던 것이다.

   3.1운동이후 급속히 증대되는 만주의 독립군에 대해 일본은 점차 불안하게 되었다. 특히 국경지방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의 활약은 너무나 맹열하여 담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북경에 주재한 일본대사관의 오하라공사는 어느날  낯빛갈이 프르뎅뎅하여 중국측의 외교총장대리를 찾아가 중국정부가 자국내에서 자라나고있는 반일무장력에 대해서 방임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일본을 반대하는거나 다름없다고 항의했다. 현대식무장으로 장비한 일본군이 창피스러운 꼴을 더 보이지 않으려는데서 고안해 낸 꾀스러운 전략ㅡ중국측은 독립군무장을 어서빨리 취체하라는 위협적인 압력이였던 것이다.

   일본제국의 외무대신이였던 그 자신이 입수한 정보로부터 추리해 낸 결론인즉은 홍범도의 무장보다는 더 급속히 자라는 서일의 무장에 의해 일본군은 장차 애를 더 먹으리라는 그것이였다. 하기에 그는 그같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국정부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장대해지는 반일력량을 속히 진압하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일본군은 홍범도에게서 당하는 참패보다 더 큰 규모적인 험한 역습을 당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였다.

 

   한데 독립군을 취체함에 들어가서 만주로 불리우는 여기 동북3성 지방관리들의 태도는 달랐던 것이다. 길림성 성장 서정림(徐鼎林)이 말했다.

  《불령선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범이므로 중국으로는 이들을 토벌할 리유가 없는 것이다. 또 가도방면에서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지방에서는 큰 소요가 없는 것 같고 특히 여기에 대한 취체는 이미 규정을 만들어 도윤이하의 관원들이 실시하게하고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그를 따버리리려고 동분서주했다.

  이때 동북의 왕으로 부각되고있었던 토비출신의 장작림(張作霖)과 그의 심복인  포귀경이 일본에 추파를 던지고 있었지만 길림성 독군 장작상(張作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음을 언녕부터 보아내고 미워했던 것이다.

   서일은 그에 대해 좀더 깊히 알아봄으로써 파악이 있게 되었다. 당년에 40세에 나는 장작상(張作相)은 동삼성육군강무당(東三省陸軍講武堂) 제1기졸업생으로서 대가 곧은 사람이였다. 그는 구식의 군사훈련을 받았어도 신식을 접수함이 빠르거니와 열정이 충만되여 자기의 직분을 훌륭히 지켜낸다고 평가가 좋았던 것이다. 그가 전에 군사기술을 배웠던 그 강무당은 학제(學制)를 여러번 바꾸어 오다가 장작림(張作霖)이 1918년에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로 되어 동북의 군대를 정돈하면서부터 그의 장악하에 전문 육군군관을 배양하는 학교로 되어버린 것이다.

   서일은 장작림(張作霖)은 믿을 수 없지만 장작상(張作相)은 믿을 수 있다고 여겨 그의 손에서 무기를 구해볼 궁리를 하게되였다.

   그러자면 그와 교섭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나서야하는가?

   자기가 직접나서자니 되지 않을 일이였다. 아직은 한어(漢語)구사능력이 모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내세운단말인가?...자그마한 키에 차돌같이 단단하게 생긴데다 동그란 검은테안경을 코등에 건 지식인타입의 사나이ㅡ 중국말을 할라치면 얼음판에 표주박밑듯이 줄줄인 날파람있는 사나이가 떠올랐다.

   박찬익(朴贊翊)이다.

   서일은 전부터 그에 대한 인상이 각별했다. 1884년도생이니 서일보다 3살이 아래인 그는 경기도 장단군 태생이다. 1906년에 신민회에 가입했던 그는 서일보다 한해먼저 만주로 망명하였는바 북간도에서 이상설, 라철, 백순 등의 지도로 대종교에 투신했다. 그는 1912년에 화룡현 삼도구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1916년까지 애국사상을 고취했고 동년 상해에 있는 신규식(申奎植)의 지령으로 북간도와 로령의 동지들과 련락을 취했으며 그해의 2월 27일에는 길림에서 조소앙, 여준, 김좌진 등과 손잡고 大韓獨立義勇軍을 세운 것이다.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서 이시영, 이동녕, 신규식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들 모두가 독실한 대종교도들이였다.

   박찬익(朴贊翊)은 대종교가 중광할 때 공업학교 동교생을 전부 인솔하고 대종교를 신봉한 기적을 창출한 것이다. 대종교를 위한 그의 공적을 보면 그뿐만이 아니였다. 홍암대종사가 청파호에서 포교할 때 일본총령사의 교섭으로 말미암아 간도일대에서 신설교당 10여처가 일시에 봉페되는 화를 입게 되었는데 당시 룡정에 살고있었던 그는 대종사의 명의를 받들어 동변도대(東邊道臺) 도빈(陶彬), 길림성장 진소상(陳昭常)과 동삼성주변사 장병린을 교섭한 결과 봉쇠되였던 교문을 다시열게끔 한 것이다.  

   백락일고(伯樂一顧)라했다. 길고 짧은건 대봐야 해. 되든 안되는 맏겨보자하고 보낸건데 일은 생각과 같이 되었다.

   서일의 파견을 받고 간 박찬익(朴贊翊)은 장작상(張作相)을 만나 협상한 결과 뜻대로 무기를 얻어온 것이다.   

   보총 300자루, 권총 10자루. 수류탄 150개, 퇀환 5,000발이였다.

  《찬익이는 천성이 외교감이야!》

   서일은 흡족하여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이였다. 

   무기가 안전하게 도착하여 기쁘기가 한량없는지라 그날 학교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온마을 사람들이 밤늦도록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동포들아 일어나자 용감하게

   적수공권 뿐이라도 두려울소냐

   정의 인도 광명이 비치는 곳에

   원쑤의 천군만마 능히 이기리

   독립 만만세...

   (임정 제23호로 갖지정된 7.5조의 <독립운동가>였다.)

 

   어느새 새벽이 가까왔다.

   모닥불이 다 꺼지고 사위가 조용한데 체대가 좀 메마르고 단단하게 생긴 어른이 계화, 채오와 같이 이날밤 우등불놀이 뒷수습이 제대로 되였는가를 검사하고있는 서일을 찾아왔다. 로씨야를 드나들며 재봉기 여러틀을 구해옴으로하여 단(團)의 옷공장을 훌륭하게 꾸려놓은 김기철(金基喆)이였다.

  《곤하실텐데 주무시지요.》

  《그놈아가 생각나 잠이 오지를 않네그려.》

  김기철어른이 하는 말이였다. 그는 전날에도 한번 이같이 뇌인적이 있다. 

  서일은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그러는지를 알고 있었다.

  김좌진(金佐鎭)이였다.

  그는 김좌진(金佐鎭)의 아버지 김형구(일명 형균)와는 자치동갑이거니와 소시적부터 유별한 사이라 좌진이를 친자식같이 여기는데서 여직한번도 잊은적이 없었다. 항상 가까이서 함께 지내고푼 마음이였는데 여지것 손에 목각총을 잡고 도수련습이나해오던 수백명 정의단 단원들이 오늘 이같이 손에 진짜총을 잡으니 그 의용이 름름해보이는지라 좌진이를 새삼스례 사무치게 그리게되였던 것이다.

  《걔가 글쎄 그 엄동 이른새벽에 웃동을 벗어메치고 칼을 휘두르며 웨치지를 았겠수. “왜놈아, 나를 보라! 왜놈아 나를 보라!” 하고 말이요. 어떻게 보내는지?...》

  《지금 봉황성에 있다지요?》

   서일은 이시각 지나간 일을 새삼스례 머릿속에 떠올렸다. 무오년이던 지난 1918년 11월, 그날 모여온 이들이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만방에 성명을 발표할 때 그 서명자가운데서도 그는 유표했기에 인상이 깊었다. 숱많은 하이칼라에 검은 팔자수염의 장대한 체구에 기강이 름름한 그는 일견하여 장군감이였다.

   서일은 그가 전에 로백린이 요구하는 군자금에서 부족금을 마저마련하느라하다가 백주창탈 강도로 몰려 옥살이를 한것이고 만기석방이 돼서는 광복단 박상진(朴相鎭)의 지령으로 만주로 건너와 거기에서 大韓獨立義軍府를 만들고는 그 자신이 군사부장을 이 되였다는걸로 알고 있었다.

   한데 김기철어른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쪽은 지금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하여 서일은 그와 말한 것이다.

  《여기로 오라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바로 그같은 인재가 수요됩니다. 군사를 통솔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겁니다. 당장!》

  《그래볼가! 내가 갔다오지!》

   김기철은 무등 기뻐하면서 자진해 나섯다.

 

   이틑날 서일이 써준 <<초청장>>을 갖고 봉천쪽 鳳凰城을 향해 떠난 김기철이 닷새만에 왕청으로 돌아온건데 과연 사람을 데리고왔다. 양금택목(良禽擇木)이라 김좌진(金佐鎭)은 이렇게 서일의 수하 장령이 된 것이다.

  《서단장님의 주장이 천만지당합니다. 오로지 혈전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입니다.》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 초면이지만 스스럼없이 이러면서 마음맞춰주던 그였데 오늘 다시만니 또 그 소리니 서일은 기뻣다.

   무오독립선언이 있은 직후에 김좌진은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중국 단기서(段祺瑞) 정부에 <<東北韓僑致軍府電>>을 보내여 제1차 세계대전이 결속 된 후 약소민족은 자치를 요망하고있는 추세를 말하고 조선은 견결히 독립하련다는 태도를 강력히 표명했으며 각국의 동정과 지지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정부가 조선교민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줄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중국은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거니와 처음부터 조선의 독립혁명을 지지하는 태도였다. 이는 애국적인 지성인들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서일은 믿음직한 그를 다시보면서 손을 굳게 잡았다.

  《우리 같이 힘을 합쳐서 본때있게 해보기오!》

 

   김좌진이 오자 서일은 그의 제의에 의하여에 正義團을 軍政府로 개편하고 그를 軍團의 총사령으로 임명했으니 때는 8월 7일, 이때로부터 무장단은 임전태세로 돌입하게 되였다. 

   <<...우로 신성의 영광을 조정에 돌리려거든 아래로 노예의 욕됨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으려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이 몸을 생각하지 말라. 한몸을 순(殉)하여 1백몸이 속죄함은 인도의 원훈(元勳)이니라.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림은 정의의 공덕이니라. 누가 살려고 하지 않으리오만은 노예로 사는 것은 생의 치욕이요. 누가 죽을것을 싫어하지 않으리오만은 신성하게 죽는 것은 사(死)의 영광이니라. 

    ... 우리 동포 대한의 남매여! 지모가 있는 자는 지모로, 용기가 있는 자는 용기로, 기예가 있는 자는 기예로 각자 능력을 다하여 나서며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를, 량미가 있는 자는 량미로, 금전이 있는 자는 금전으로 각자 힘을 다하여 내놓아서 공적(公賊) 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을 씻으며 우리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며 만세에 영광을 남기리...>>

 

   이는 정의단이 독립무장단체인 군정회를 조직하면서 발표한 창의문이였다. 열열하고 절절하며 따라서 매력적인 강한 호소력을 갖고있는 이 창의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구국성전에로 불러일으키면서 그네들을 자기의 두리에다 굳게 묶어세웠다.

   서일이 지난해에 연길현 국자가에서 대종교를 중심으로 세운 비밀결사단체 자유공단(自由公團)의 그 15,000여명중 끌끌한 젊은이들이 손에 무장을 잡자고 용약나섯던 것이다.   



  軍政府는  이같이 항일독립운동단체 가운데서도 가장 강유력하고 전보다 더욱 강력한 무장독립군을 보유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동시에 行政府를 겸비한 명실상부한 軍政府로 개변, 발전하고 있었다.

  《무기를 계속구입하자!》

  《기능을 갖춘 군인을 조속히 배양하자!》

   서일이 김좌진과 같이 내놓은 구호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정한 이 분투목표를 적이 모르게 되도록 빠른시일내에 실현하고자 노력을 경주하기로 굳게 맹세했다.

   이때의 중심인물로는 徐一, 玄天黙, 金佐鎭, 桂和, 李章寧, 金奎植, 李範奭, 曺成煥, 朴性泰, 鄭信, 金燦洙, 朴斗熙, 洪忠熹, 李鴻來, 尹昌鉉, 羅仲昭, 金星 등이였다.

 

   한편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뒤에도 탄압과 압제를 늦추지 않았다. 한국민은 그 어느민족보다도 독립의욕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은 항일투쟁열의를 막아보려고 력사상 유례없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이른바 철저한 무단정치(武斷政治)를 행하였던 것이다. 그 실례로 의병진압을 빙자한 지사들의 대량학살이나 105인 사건, 안악(安岳)사건 등을 조작하여 한꺼번에 민족의 지도자들을 투옥한 그것이다.

   이리하여 독립운동의 전열(戰列)이 한때 크게 무너졌고 지사들은 지하에 숨어든 것이다. 허나 그것으로 운동이 끝난것은 결코아니였다. 거족적인 3.1만세시위가 바로 조선민족의 얼은 깨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제가 이에 대처하여 꾸며낸 것이 이른바 文化政策인것이다.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거니 그 누구를 속일가! 조선사람은 일본의 이같은 회유책을 역리용하여 보다 광범한 저항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각종의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거니와 곳곳에서 비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국외에서는 무장독립군이 조직되여 일제를 응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좌진이 서일의 부름을 받고 왕청에 온건데 그가 온지 한달이 채안되여 어느날 한가지 놀라운 소식이 왕청골에 쫙 퍼졌다. 강우규(姜宇奎)가 새 총독으로 오는 사이또오의 목숨을 끊어버리려했다는 새 신문이였다.

   일본은 3.1운동에 대해서 이번 한국민의 행동은 현총독 하세가와 개인을 반대하는 것이지 결코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양언(揚言)하면서 사이또오를 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사이또오는 문화정책이라는 간판을 내세우고 1919년 9월 2일에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오후 5시정각, 19발의 례포가 울리는 가운데 해군대장의 제복을 입은 사이또오가 제 부인을 데리고 南大門驛(지금의 서울역)에 내리였다. 프랫트홈에 내린 사이또오는 자기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은 각계요인과 인사를 나눈 후 귀빈실로 들어갔다.

   귀빈실밖에는 총독부에서 마련하여 대기시켜놓은 마차와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귀빈실에서 나온 사이또오 일행이 각기 차에 나뉘여 오른 후 총독과 부인이 탄 마차가 출발하려고 몇발짝 띄였을 때 그 마치와 7보앞에 폭탄이 투적되여 요란한 폭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주위에 있었던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 중 3개의 파편만이 마차뒤를 관통하여 사이또오의 혁대와 군복을 조금씩 태웠을 뿐 목숨을 빼앗기는 새려 상도 입히지 않은 것이다.

   놀란 왜경들은 즉시 흩어져 범인을 잡자고 혈안이 되었지만 놀란 인파가 우왕좌왕 하는데다 너무나 돌발적인 사건이라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채 헛물만켜고말았다.

   모두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여 알고는 거 참 시원한 일을 했다고들 하는데 유독 한사람만은 머리를 달달 털면서 아주 맹랑해 하였다.

   《젠장, 또 실팬가! 그게 누여? 내같은 바보였군! 한발짝만 좀 더 뿌릴게지! 에에에... 쯔, 쯔, 쯔!》

   월경의병장 리홍래(李鴻來)였다.

   라철과 함께 5적을 죽이려다가 실수를 하여 하나도 없애지 못한 통분함이 아직도 가끔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괴이고 있었던 것이다.

   두주일이 지나자 불행한 소식이 날아왔다. 서울역에서 거사를 했던 강우규가 왜경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이다.

   그후 목격자로부터 범인의 인상착의를 청취한 왜경은 이를 단서로 수색망을 폄으로써 보름만에 가회동 82번지 장익규의 집에서 범인을 체포한 것이다. 그런데 범인은 나이 65세나 된 턱수염과 머리가 하얀 백발노인이였다.

   이 소식에 자극을 제일 심하게 받은 사람역시 이홍래(李鴻來)였다. 가끔 저돌적인 행위가 버릇처럼돼버린 그는 자기도 살아서 한번이라도 세상을 놀래울만한 일을 해야겠노라하더니만 새해 즉 1920년을 잡자 간다온다는 말없이 훌쩍 사라졌다.

   동해자 하나 없었다. 김규식과 자기는 할빈에 한번 피끗 가봐야 할 일이 있다면서 홀홀단신으로 왕청을 떠나간 것이다. 폭탄을 구하지 못해 거기에 있는 일본총령사관을 폭파는 못할망정 수류탄으로라도 한번 되게 소란을 피워놔야겠다고 맘먹은 것이다.

   한데 팔자소관이였는지 아니면 재수가 붙지 않아서인지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거니와 아까운 제 생명마저 잃고 만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송화강 남안이요 중동철로의 중심이자 북만주의 수부로서 이때 벌써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우기 시작한 할빈(哈爾賓)은 번창했다. 각국의 령사관이 들어앉으면서 서로 주인행세를 했다. 일본이라고 그저 얌전히 구경꾼노릇을 할리없었다. 철길이 서에서 동으로 도시중심을 꿰질렀는데 일본총령사관은 도시를 꿰지르는 그 철길위에 가로놓인 제홍교(霽虹橋)이남인 남강(南崗)구역에 있었다. 검스레한 아담진 2층건물이였다. 남향하여 출입문이 중간에 있고 량켠에 꼭같은 크기의 창문이 3개씩 모두 12개였다. 창턱이 높아서 밖에서는 웬간한 꺽다리아니고는 안을 근본 들여다볼 수 없었다.

   바야흐로 어둠이 깃드는 어슬녘, 이홍래는 그런데다 품에 감추고 간 수류탄 두 개를 꺼내여 련거퍼 뿌린것이다. 그런데 첫개는 유리창을 깨며 들어가 터졌지만 두 번째 뿌린것은 창문살에 맞아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밖에서 멋없이 터지고 말았다.

   그통에 소동이 생겼다. 경찰들이 그를 붙잡자고 동원한 것이다.

   이홍래(李鴻來)는 북쪽을 향해서 냅다뛰였다. 제홍교(霽虹橋)를 건너면 중앙대가를 경계로 해서 서쪽이 도리(道里)고 동쪽이 도외(道外)였는데 그 철길다리를 건넌 이홍래(李鴻來)는 도외(道外)의 17도구 빈민거리에 들어서면서 자기를 바싹 추격해 온 일본형사 國吉正을 사살하고는 추격해 온 단른 경찰이 쏜 권총에 맞아 불행히 목숨을 잃고말았다. 이날이 3월 6일이였다.

   이쪽이서는 여러날이 지나서야 지방신문에 난 소식보도를 보고 시체를 찾아다 장례를 지냈는데 그가 희생되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의병출신의 젊은이들이 눈물을 더 많이 흘리였는데 그 누구보다 비통하여 절규(絶叫)한 사람은 김규식(金奎植)이였다. 그는 같이 손잡고 싸우자 약속하고 데려다놓고는 전쟁한번도 못해보고 어쩌면 그렇게 멋없이 혼자먼저가느냐면서 통곡했던 것이다.

    

        대절의 미진멸 한치 말어라

        최후의 성공을 우리 담당해

        용진무퇴한 대한 남아야

        광복할 그 날이 멀지 않았네

   

        신령이 재천에 감응하소서

        용사의 충혼을 위로하소서

        영웅의 위훈을 竹面에 옮겨

        빛나는 이름을 기리전하리.

   

   軍政府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그의 산소를 가까운 북산에다 썻다.

   

   강우규가 사이또오에게 수류탄을 던져서부터 이홍래(李鴻來)가 할빈(哈爾濱)일본총령사관에 수류탄을 뿌리는 사건이 발생하는 사이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는  괄목할만한 軍團이름이 하나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北路軍政署였다.

   1919년 4월, 상해의 大韓民國臨時政府는 국체(國體)를 共和制로 선언한바있는데 軍政府도 大韓民國臨時政府산하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해의 12월에 <<국무원 제205호>>정신에 립각하여 명칭을 大韓軍政署로 고쳤다. 그리고는 서로군정서와 대칭으로 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가졌다.

   이는 구성원전체가 대종교도들로서 복벽적 민족주의가 주류를 이루고있었지만 시대의 수요와 발전에 따라 그들도 의식에 점차 변화가 생기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보통사람의 머리로는 예상못할 궤변(詭辯)이 빈발(頻發)하는 세월이였다.

   이러구러 4개월이 지나 1920년 7월이 되니 강우규로인의 거사모양으로 뭇사람의 한번다시 가슴을 달구는 격동적인 사건이 하나 가까운데서 나타났다. 義烈團員 윤준희(尹俊熙), 최봉설(崔鳳卨), 임국정(林國貞), 한상호(韓相浩)가 길회선(吉會線)부설을 위해 朝鮮銀行會寧支店에서 용정(龍井)에 이송중인 현금 15만원을 화룡현의 동양리에서 탈취 한 것이다.

   모두들 꿈밖이지였지만 몇사람은 조만간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알고있었으니 그는 군정부의 최고통솔자 서일을 비롯한 김좌진, 조성환 등 그 몇몇이였다.

   그 의열단은 北路軍政署에 속하는 것이였다. 언젠가 한상호(韓相浩)가 서일을 찾아와 용정의 은행을 털겠노라고 한 후로부터 그들은 자진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목적으로 한 이 극비밀의 조직을 北路軍政署소속으로 받아달라고 자청을 한 것이다. 하여 그들에게는 軍政署特派員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건데 조직자 윤준희(尹俊熙)이가 대장에 임명된 것이다.

   그들은 15만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탈취하고서는 그것을 무사히 울라디보스톡으로 가져갔다. 거기의 신한촌을 근거로 그들은 무기를 구입하여 이쪽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10원~20원이면 총1자루를 살 수 있었다. 한즉 北路軍政署는 이같이 거액의 돈이 생겼으니 군자금을 걷지 않아도 무기를 얼마든 사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왜 기쁘지 않으랴, 누구나없이 다 기뻐한건 더 말할 것 없었다.

  《하려면 저렇게 해야 해! 잘했어! 잘했어! 참 잘했어!》

   찬탄이 련발했다.

   한데 잘된것 같던 일이 찬탄을 무시하고 그만 뒷탈리고말았다. 12월에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최봉설(崔鳳卨) 하나가 탈주하고 한상호(韓相浩), 윤준희(尹俊熙), 임국정(林國楨) 세사람은 우라디보스톡에서 그만 일본헌병에게 붙잡히우고 만 것이다.

   돈없이 이제 무기를 어떻게 구입한단말인가?...

   그렇다고 맥을 놓을 수는 없었다.

  

   레닌, 게렌스키에 의하여 제2차의 혁명이 일어나 백계(白系)니 적계(赤系)니 하여 크게 두파로 갈라져 류혈투쟁을 버렸을 때였다. 그 틈을 타서 씨비리야에 있는 동포들이 쌍성(雙城)에서 모임을 가지고 전로한인회 중앙총회(全露韓人會中央總會)를 설립한게 아닌가!  그때만하여도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사상은 없이 오로지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는 민족주의단체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때 다른 또 하나, 제1차세계대전 때 로씨야군에 종군하였던 교포 70여명중에 살아 돌아온 청년들이 조국애를 더욱 굳히여 쌍성에다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는 한편 하발포(哈發浦)에 로병회(老兵會)를 설립했다. 당시 이 로병회의 회장은 김기룡(金起龍)이였다. 한편 한국의 육군참령(陸軍參領)이였던 이동휘(李東輝)는 김립(金立), 김일(金一)등과 협력하여 그 로병회(老兵會)를 육성하면서 게렌스끼의 사회당(社會黨)과 유기적인 련계를 맺어왔다.

   1919년 2월에 中央總會를 大韓國民會라 개칭하고는 윤해(尹海), 고창일(高昌一)을 대표로 하여 파리의 강화회의에 보내여 한국의 자유독립을 웨치게 했다.

   

   그때에 로씨야경내에 조직된 조직들의 정황을 보면 이러했다.

   (1) 전국청년련합회(소왕영 韓民學校內), 1919년 8월 조직. 회원수 500명.

   (2) 로인단(울라디보스톡 신한촌 덕창국), 회원수 50명. 목적 決死報國.

   (3) 소년애국단(우라디보스독 신한촌) 회원수 40명. 목적 決死愛國.

   (4) 부인회(울라디보스톡 신한촌) 회원수 50명.

  

   당시 적측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바 있다.

   <<1919년 3월 7일, 朝鮮獨立黨의 유력자 2명은 경성으로부터 옴스크에 도착한 바 이들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그윽히 경성을 탈출하여 육로로 露領내에 들어가 옴스크로부터 우라얼을 돌파하고 파리로 향하는 도중이다.

   목하 조선독립당의 근거지는 露領의 치따시에 있으며 옴스크에 약 400명의 韓人이 있고 일크츠크에 있는 安重根일파의 한인 약 700명이 주재하여 각지에서 비상운동을 하고 있다.>>

 

   1919년 10월에 로씨야혁명이 일어나 게렌스키정부가 무너지고 볼세비키정부가 수립되고 그해에 새수도인 모스크바에 제3인터내쇼날이 수립되였다. 그러자 로씨야에 있는 교포들은 표면만이라도 공산주의를 따라야 생존할 수 있으리라 여겨 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 당은 1920년 3월에 울라디보스톡에서 설립되였는바 사회주의에 의한 새국가건설을 “슬로간”으로 하였다.

   회장 장도정(張道定), 부회장 김진(金震), 로무부장 조장원(趙璋元), 선전부장 김일(金一)이였다.

   上海臨政은 시베리야교포들의 이같은 활약에 불안을 느껴 안공근(安恭根)과 왕삼덕(王三德)을 수차 보내여 그것을 해산시키려했으나 로씨야관헌의 출면으로 하여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1920년 4월에 왜군은 씨베리야에 출병하느라 울라디보스톡에 오른 기회를 타서 韓民學校와 韓民報舘을 불사르고 무고한 교포 70여명을 체포했거니와 몇사람은 반일(反日)을 주동분자라 하여 살해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지만 로씨야에서 무기를 구 하기는 그 어디보다 쉬웠다.

   그곳에는 1919년 8월에 로시아에 입적한 조선사람들로 조직한 원호회(原戶會)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그 단체의 목적은 전문 大韓獨立軍에 무기구입을 소개하고 공급하는 것이였다.

   회장ㅡ 니그라치.

   부회장ㅡ 꼬냐.

   11곳에 대표가 있었다.

   활약을 보면

   (1) 쏘치풍에 근거를 둔 진단산 무장활동계획으로 본회에 무장구입의뢰를 해왔음으로 3명이 나서서 각지방으로부터 소총 150정과 탄환 7,000발을 모연(募捐)하여 길림의 산채구로 운반하던 도중 중국관헌에 3명이 체포되고 무기는 압수당하였다. 진단산은 보위용으로 구입하는 것이라 교섭하여 9일만에 전부찾게되였다.

   (2) 1920년 3월, 광복단(光復團)에 소총 90정, 탄환 90발, 탄환 4000발, 단총 9정, 까자크검 3자루를 구입하여 주었다.

   (3) 의군부(義軍府)에 소총 500정, 탄환 90발, 단총 20정, 탄환2000발, 수류탄 10개, 까자크검 10자루, 첵코만원경 1개를 구입하여주었다.

   독립단(獨立團), 국민회(國民會), 산포대(山砲隊), 군정서(軍政署) 등 독립운동단체는 이 원호회((原戶會)의 소개없이는 임의로 무기를 구입못했다. 그리하여  3명 의렬단원은 체포되기 전에 로시야에 가자마자 원호회((原戶會)부터 찾아가 무기를 구입하려고 신속히 서둘렀던 것이다. 

   첫째는 일본돈을 우선 로씨야화페로 바궈야했다. 그리하여 거액이 준비된것인데 쓰자고 보니 화페개혁이 되어 이미 바꾼 그것이 그만 몽땅 페지로되고 만 것이다. 통분한 일이였다.

   이런차 한면으로 왜경은 끈질기게도 로씨야의 연해지방까지 수사망을 펼치여 경부선부설용 15만원략탈용의자를 기어코 붙잡자고 들기에 의열단의 그 네사람은 은신처를 숨기느라 원호회(原戶會)와의 련락마저 끊어버렸다. 그들은 제1차로 근근히 체코병에게서 산 장총 125자루와 탄알 4,500발만 먼저 한번 보내고서는 그만 엄인섭의 밀고로 끝장을 보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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