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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불쾌한 회억
지난여름의 일이다. 왕부정서점(王府井書店)의 책꽂이에서 살책을 고르고있던 나는 우연히 전해에 팔달령(八達嶺)에서 면목알게 된 동갑의 로류(老劉)를 만났다. 그는 40여년간이나 줄창 국가지질국 한곳에만 붙박혀 사업하다가 퇴직한 만족이였는데 오래간만에 보는지라 무척반가와하면서 나를 자기와 동행한 사나이에게 소개했다.
<<랑랑이, 인사하라구! 이분도 자네같은 글쟁이야. 조선족 작가인데 내친구야!>>
로류(老劉)는 이러곤 나를 향해 다시 입을 여는 것이였다.
<<이치는 성이 장가일세. 이름은 랑랑이구. 나이를 따지면야 우리보다 세 살이나 어리지. 그러니 당연히 우릴 형님이라 불러야 해.>>
저쪽은 과연 허리를 꿉석하면서 나를 형님이라 불렀다.
우리는 웃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 나는 그의 손을 맞잡은채 곱잡아뇌였다.
<<장랑랑이라? 장랑랑이라?>>
그랬더니 친구가 나보고 1960년대 북경에 지하문예쌀롱이 있어서 문화대혁명때 되게 왁자하게 떠든 걸 모르는가 하면서 내 눈앞에 나타난 이 사나인즉 바로 그때의 그 태양종대(太陽縱隊) 조직자 우두머리(頭頭)인 장랑랑(張郞郞)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오, 그렇지!>>
나는 그를 다시보면서 감탄했다.
북경지하문화쌀롱하면야 내가 왜 모르랴. 한때 말밥에 오르고 칼도마에 올랐던건데!
똑같은 60년대초였다. 구석진 북방 저 머나먼 가목사동쪽에 있는 북대황의 마을ㅡ 한때 정이 들어 내가 몸을 두고 살아왔던 홍광촌에서도 여기 북경의 “태양종대”나 “X사”모양의 문예쌀롱인 문학크루쇼크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 문학크루쇼크는 내가 조직한 것이였다. 운명의 고약한 희롱이랄가, 장랑랑이나 내나 지나간 신세를 보면 너무도 흡사했다. 그래서인지 지난일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리노라니 쓰라려나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장랑랑이나 내나 우리는 다가 “위대한 사회주의조국”에서 살고있음으로 하여 자호를 느끼면서 가슴에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젊은이였지 결코 본성이 이질적인 그 어떤 나쁜분자는 아니였던 것이다. 하건만 이른바 “위대”하다는 “문화혁명”이 오니 우리는 다같이 억울함을 당해 가슴심처에 지을 수 없는 상을 입은것이다. 왜? 왜서 우리는 <<혁명의 대상>>이 되어 그 꼴 그 신세로만돼야 했던가? 왜? 왜서?.... 우리가 잘못한 것이 뭐고 지은 죄가 대체 무엇이였길래? 우리는 다가 문학을 사랑했길래 작가, 시인으로 되려했을 뿐이다. 그래 우리에게 그렇게 될 자유마저 없었단말인가?... 과연 저주로운 사회, 망할놈의 세상이였다! 꿈엔들 생각이나했으랴, 랑랑이나 내나 우리는 다가 위대하다고 자부해 온 내조국이 그같이 무지한 광란속에서 암흑해질줄은 정말몰랐던 것이다!
1960년대 북경에서 제일활약이적이였던 지하문예쌀롱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곽말약의 아들 곽세영(郭世英)이 조직한 “X社”고 다른하나는 장랑랑(張郞郞)이 조직한 “태양종대(太陽縱隊)”였다. 그들은 중국문예부흥초기의 꿈을 이뤄보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공중루각이되고말았다. 문화혁명이 오니 아름다웠던 리상은 유리조각같이 산산히 부서지고 만 것이다. 원대한 포부에 자유를 추구한것이 죄가 되어 곽세영(郭世英)은 투쟁받다가 두팔이 묶인 그채로 층집에서 떨어져 죽고 장랑랑(張郞郞)은 “태양종대”를 조직했다하여 1968년에 “현행반혁명죄”로 몰려 투쟁받다가 1970년 3월 5일에는 사형으로 판결이 내린건데 총살을 당할 림박에 주은래가 그 일을 알고는 쪽지 한 장으로 목숨을 살려 유기도형 15년으로 개판(改判)을 했다가 1977년에 이르러서는 가석출옥(假釋出獄)을 한것이고 그런 후에는 해외로 떠돌이를 하다가 돌아온 것이다.
비명에 죽은 곽세영의 아버지 곽말약이 어떤 인물이란건 세상이 다아는바니 더 말치않고 제애비처럼 문학가가 되려했던 그의 아들 곽세영에 비하면 운세대통((運勢大通)이랄가 목숨을 건져냈길래 오늘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장랑랑(張郞郞)을 보기로 하자.
장랑랑(張郞郞)은 1943년에 연안의 중공중앙병원에서 태여났는데 그의 아버지 장정(張仃)은 저명한 화가, 미술교육가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진포문(陳布文)은 건국후 60년대초에 중앙미술학원의 문학과선생으로 교편을 잡은것이다. 그녀는 젊어서 한때 중앙총리판공실에서 기요비서(機要秘書)를 지낸적이 있었다. 하지만 입이 무거운 그녀는 그일을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기에 당안관리자를 내놓고는 래력을 아는 이가 거의없었다고 한다.
장랑랑(張郞郞)은 머리가 좋았다. 그는 1962년에 시험을 쳐 북경제101중학에 붙었다가 후에 북경외국어대학부속중학에 전학을 한건데 천성이 시쓰기를 즐기고 격정이 오르면 그것을 읊기좋아했다. 그의 그러한 재질이 또래 친구들을 흡인한 것이다. 하여 그같은 시애호자가 7~8명된건데 그 구룹빠가 곧바로 문예쌀롱으로 발전 한 것이다. 그들은 학교규률을 위반하지도 사회치안을 요란하지도 않았다. 사회주의를 반대하거나 공산당을 반대하는 일은 더더구나 없었고.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다가 착하고 좋은 학생들이였던 것이다.
어느날 그들은 <<불타는 마음>>이라는 장시를 격정높이 읊고나서
“이 시대에 문학작품다운 작품이 있느냐?... 없다! 이제 우리가 생기를 불어넣어 중화민족의 문화를 부흥시켜보자!”고 하면서 문예쌀롱을 조직하고는 그 이름을 “지하종대(地下縱隊)”라 지은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것이 작난이나 놀음이 아닌 정식행동이라는 뜻에서 장정(章程)과 선언(宣言)과 종지(宗旨)를 내온 것이다.
“그렇게 조직한게 벌써 큰 죄로 된다는걸 우린 몰랐지. 후에야 비로서 그걸 알게되였습니다.” 장랑랑이 하는 말이였다.
“주모자”라 하여 “현행반혁명죄”로 사형판결이 내렸을 때 그는 나이가 27살이였다. 이제는 고래회가 된 장랑랑이가 지난때 자기가 즐겼던 시를 읊었다.
나는 승냥이처럼
관료주의를 씹어버릴테다
위임장을 도무지
존중히 여기지 않아
어떤 종이장이나
저갈데로 다 가라
그러나 이것만은....
마야꼽스끼의 시 <<쏘베트공민증>> 첫부분이였다.
60년대초 내가 조직한 문학크루쇼크의 정식성원은 다해봤자 나와 김인세(金寅世), 김성일(金成日) 이렇게 모두 셋뿐이였는데 김인세가 마야꼽쓰끼의 그 <<쏘베트공민증>>이 무척 맘들어서 외웠고 김성일이는 조기천의 <<휘파람>>을 외웠던 것이다.
오늘저녁에도 휘파람 불었다오
옥순이네 집앞을 지나며
벌써 몇 달채 휘파람부는데
휘휘... 호호...
그리도 그는 몰라준다오
날마다 직장에서 보건만
보고도 다시나 못 볼듯
가슴속엔 불이 붙소
보고도 또 보고싶으니
참 이 일을 어찌하오
............
이 시는 5개절로 된건데 그는 그 시를 좋아하면서도 무척 애를 써서야 외워낼수 있었다. 공부를 제일많이했다는 내가 초중졸업생이고 그 둘은 소학교문을 나온 신세였던 것이다.
내가 좋아한건 제목이 그저 <<단시>>로만 되어진 바이론의 시였다.
국내에서 싸울자유없다면, 사나이여
이웃 나라에서 싸움터를 찾아라
희랍과 로마의 승리를 본받아
자유를 짓밟는 자들의 흉계를 짓부시라
인류를 위해 몸 바침은 장한 일이로다
언제나 고상한 이름이 따르리라
자유위한 싸움터는 어디에나 있거니
총탄과 교수대에 쓰러진다하여도, 사나이여,
영예는 너의 것이 되리라.
이 시를 나는 지금도 의연히 좋아한다.
그때 우리는 한주에 한번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에 쌀롱을 했는데 정해진 장소는 나의 독방인 자그마한 서재였다. 그때는 내가 장가들기 전이였는데 우리는 우선 문학지식부터 공부했다. <<문학론초고>>였다. 그것을 교재로 사용했는데 강의는 내가 자진 맡아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1954년에 조선서 상,하 두권으로 출판이 된 <<중화민족해방운동사>>였는데 화강이 지은 것이였다. 그것도 역시 내가 강의를 책임지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문학지식과 력사공부를 함께 하면서 습작을 한 것이다. 우리 셋은 다가 자기의 습작품을 내놓고 허심히 평을 받았다. 그런데 다들 열심스레 쓰느라했건만도 그게 맘과 같이 돼주지를 않았다. 배운 밑천이 너무도 짧아 수평미달이였던 것이다. 우리는 가차없이 서로 툇방놓는걸 표준으로 삼다보니 결국 벽소설 한편도 성공못했다. 고작 발표됐다는 것이 내가 쓴 쥐꼬리만한 시 몇수뿐. 그러면서도 내나 인세나 성일이나 우리는 다가 문학을 팽가칠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다. 작가가 되려고 실로 무진히 애를 썼던것이다.
우리 문학크루쇼크에도 강령이 있고 준칙이 있었다.
강령ㅡ 십년내에 자습하여 작가수평에 오른다.
준칙ㅡ 쌀롱때는 꼭 습작품을 갖고온다.
그저 이럴 뿐 다른건 더 없었다. 하건만 “문화대혁명”이 오니 문학크루쇼크가 강령이 있고 준칙이 있다하여 나쁘게 보았다. 그리고 그 “죄”라는 것이 무한상강(無限上剛)을 해서 온 성화공사, 온 화천현, 나아가서는 온 합강지구에서도 “전형적인 반동철증”이 되여 현행반혁명집단으로 몰아댄 것이다. 그 조직자였던 내가 투쟁대에 올라 끌려다니기를 옹근 4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에 보면 <<공민은 언론, 출판, 결사자유가 있다>>고 밝히였다. 그렇다고 고지식하게 그것을 믿은 내가 너무도 유치하고 어리석었던 것이다!
보복할 기회를 만났다고 얼싸좋아하면서 열성을 다한 “혁명자”가 만들어 내한테 씌운 “죄”를 보면 저그만치 10가지나 되였는데 그가운데 “외국과 내통한 죄”라는것도 하나 있었다. 내가 조선에 나가 문학공부를 하여 작가로 돼보려는 욕심에 리기영선생과 서신거래가 몇 번 있은건데 집이 털리워 거덜날 때 리기영선생의 편지마저 발각되여 함께 압수된거다.
그때는 중국에서 조선을 수정주의로 보았으니 당연히 적국이였다.
길지는 않았다. 내가 현간수소의 미결수감방에 같혀있은것이 45일간. 그 기간에 판결을 위한 예심을 4차례나 벌렸지만 “혁명자”들이 법원에 기소한 10가지 “죄악”중 어느 하나도 성립되는것이 없었기에 판결을 못한 것이다. 원인이 다른게아니아니다. 허무한 날조로 생사람을 잡자니 그꼴인게 분명했다. 이제는 “외국과 내통한 죄”를 놓고 막판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이럴때 주은래가 고맙게도 조선을 국사방문해서 량국간의 모순과 대결은 드디여 풀리게 되었으니 때는 1972년 4월이였다.
어느날, 얼굴이 도리암직한 왕간수장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너는 주총리께 감사를 드려라.”하면서 법원도장이 박힌 종이장을 주길래 펼쳐보니 <<無罪釋放>>란 네글자가 또렷이 씌여진 판결서였다.
그같이 그모양으로 멋없이 갇혔다가 무죄석방이 되여 집에 돌아온 나는 이틀간을 쉬고나서 빼앗겨 잃어진 첫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비밀리에 다시쓰기 시작한 것이다.
20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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