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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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와 김학철선생
2012년 02월 17일 22시 03분  조회:6609  추천:5  작성자: 김송죽
 수필    나와 김학철선생

 

                                    김 송 죽

 

                                      (1)

 

9월 25일은 김학철선생의 제사날이다. 그가 타계한지도 어언 11년철, 하건만 나는 지금도 그날이 돌아오면 그에 대한 그리움이 새워지군한다. 왜서일가?... 

 

내가 김학철선생을 찾아가 만나본것이 두 번. 우리의 만남은 그 어떤 인연이 따로있어서도아니였다. 솔직히 말해 문학초학자시절부터 나는 조선의 리기영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려는데서 서신거래가 있었을 뿐 김학철선생쪽으로는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저 그가  <<해란강아 말하라>>장편을 써냈고 집이 연변에 있는걸로 알고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1982년 2월, <<연변문예>>잡지사는 서사시창작을 활성화하려는데서 동북삼성의 시인들을 불러 학습반을 연적이 있다. 장소는 이전의 주정부초대소였고 기일은 10여일간이였는데 참가인원은 박화, 문창남, 김문회, 김창규, 정문준 외에  흑룡강에서 간 박철준과 나까지 해서 모두 7명이였다. 그때 그것을 장악한 이는 잡지사의 시편집이였던 황장석시인이였는데 그는 서사시에 대한 강의는 별로없이 그저 골통을 싸매고 들어앉아 써내게했다. 그랬으니 뜻대로 될리가 만무였다.

 

마지막날, 우리는 다가 방송국에 가서 자기가 지은 시를 랑송하기로 했다. 지정된 시간은 오후1시. 오전에 시간이 있는지라 나는 출판사에 갔다. 거기서 출판을 기다리고있는 내 장편소설원고의 상황을 알아볼 겸 책임편집과 미루시 작별인사를 나누자는데서였다. 그래서 출판사에  간 나는 강정일선생의 탁상우에 있는, 벽에 탄알구멍이 두 개 뚤린 책표지가 눈을 끌길래 쥐여보았다. 김학철선생의 <<항전별곡>>이였는데 장홍을이 설계한것이였다.

 

내가 혼자말로 책표지가 괜찮다고했더니 강선생은 그 소리를 잡아듣고 <<보는사람마다 좋다고 하오! 그런데 참!...>>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뽑으면서 뒷말을 삼켜버리는 것이였다. 내가 의아쩍서 마주보니 강선생은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얼굴에 적이 맹랑한 표정을 지은채 <<일을 좀 하자면 이런다니까!>> 하면서 사정을 토로하는것이였다. 다 찍기로 된건데 김학철이 쓴것이라니 우에서 내지 말라는 지시가 있다는 것이였다. 그래 별수없이 본인한테 되돌렸다는가? 

나는 리해가 인츰가지 않아 아니 문학계에서 김학철선생을 이미 평판한게 아닌가, 그래놓고서 지금도 그런일이 생기는가고 했다. 그랬더니 강정일선생은 그러게말이지 하면서 자기는 김학철선생앞에 다시한번 머리숙여야 할 짓을 하고있다면서 자괴(自愧)를 하는 것이였다. 그는 내앞에서 솔직히 말한다면서 <<20세기신화>>를 맨먼저 본것도 자기요 우에서 하라는대로만 하다보니 본의아니게 <<인재죽이기>>에 가담해서 생사람을 10여년간이나 억울하게 만들었노라면서 이놈의 편집은 못해먹을거라했다. 지난일에 대한 자아반성이였거니와 가슴아픈 후회였다.

공산당체제의 우리 나라는 외국과 한가지 판이하게 다른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어느 출판사나 잡지사, 신문사든 국가것이면 편집,기자 다가 국가공무원이기에 제 속은 비우고 우에서 내리먹이는 지시면 곰상히 그대로 받아먹어야 한다는 그것이것였다.(물론 지금은 많이 변해지고있지만)

왜 그런가? 의견이 생겨 우의지시를 거역하고 제마음대로했다가는 에누리없이 책벌을 받거나 아니면 아예 잘리워나가 밥통을  잃고말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정을 제눈으로  직접보고  어용문인의 심리적모순과 고통을 새삼스레 실감하게되였던 것이다. 

 

심히 곤혹스러웠던 강선생은 숙였던 머리를 다시치키고 나를 향해 자기가 보건대는 온 연변작가치고는 김학철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래도 그가 제일 주견이 발라서 작가다운 풍도(風道)가 있어보이니 한번 찾아가 만나보라했다. 

그한테 따라배울점이 있으리라는 것이였다. 

<<그러지요.>>

나는 그 권유를 선선히  받아들이였다. 

강정일선생은 내한테 그의 집을 찾아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리하여 뜻밖의 방문이 이루어지게되였던 것이다. 

 

나는 김학철선생을 만나자 그한테 초인사를 하고나서 선문도 없이 문득나타나게 된 연유를 말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저는 이제 어섯눈을 뜬 초학자에 불과한 소설쟁입니다. 제구실을 하는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걸 가르쳐주십시요했다.

그랬더니 그는 쏘파를 가리키며 나를 우선 거기에 편히 앉으라는것이였다. 

서재에는 중간에 차탁을 놓고 량편에 검은색나는  듬직한 가죽쏘파가  두 개 놓여있었다. 

김학철선생은 내가 앉은 바로 그 쏘파에 전날 정령이 왔다가 앉았노라면서 자기는 그 녀류작가와의 교분이 유별나게 두터움을 말했다. 그건 내가 이미들어서 어느정도 알고있은 것이였다.


김학철선생은 나를 눈여겨 훑어보더니 지금 나이 얼만가 묻고는 이제 첫 장편이 출판이 되리라니 반갑다면서 미리 축하를 한다고 했다. 나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가 내 일을 아는게 괴이쩍어 아니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는가했더니 그는 빙그레웃으며서 문단의 일인데 내 왜 모를가하고는 강정일이 알려주더라했다.

<<꿩잡는게 매야. 책을 써냈으면 작가지, 거긴 벌써 작가루된거야.>>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찬사를 듣고보니  급기야 하늘공중에 둥둥 뜨는것 같은 기분이였다. 헌데 내가 오늘의 이 기분을 맞아옴에는 치룬 대가는 적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이 앞에서 문화혁명열광기에 초학자들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고 문학공부하면서 소설은 쓴것이 화근이 되어 옹근 4년간을 투쟁받고 고초를 겪었음을 말하고는 하소를 하듯이 내가 몇해간 고생고생하면서 애를 써 써놓은 근 50여만자에 달하는 그 장편소설의 첫원고는 문화혁명이 오니 4청때의 보복을 하느라 나선 공사반란퇀의 한 혁명자녀석이 읽어보고 되돌려주마해놓고는 돌려주기는새려 어느 까마귀가 씹어먹었는지 없어지고말았다고했더니 그는 <<저런, 때려죽일놈들 봤나!>>하면서 내보다 더 격분하는것이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격분된 그 기분에 자기의 처지를 피력했는데 그것은 그가 <<20세기신화>> 때문에 10년을 옥살이를 해야했던 그 가슴에 응어리지도록 피맺힌 원한이였다. 

<<내 글은 말이야, 그건 그저 써만놨지 아직은 발표도 하않은거였다구. 다 써놓고서는 투고를 하지 않은채루였지. 뻬랍속에 깊숙이 누워 곱다랗게 잠을 자고있었단말이여. 그런걸 그 망할자석들이 달려들어 들춰가더니만 죽기내기로 야단을 떨어댄게지 뭐야.... 세상 어느 나라에서 그렇게 하는가? 그모양으루 작가를 접대하는가말이여? 나라법은 어디로 도망가버렸는지, 원!.... 혁명! 혁명! 그놈의 빌어먹을눔의 혁명! 이름좋게스리 무산계급혁명이라는게 그꼴 그모양이였어. 휑포무지한 악종들이였지!  진짜루 보복을 나서서 사람잡이를 한거지 뭐야!....>>

하면서 그는 주먹으로 상을 탕탕 쳤다. 끓어오르는 분노, 격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나는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알려주었다. 선생님이 쓴 그 소설을 맨먼저 읽어본 사람이 바로 출판사의 강정일이였다는것, 문화혁명당시 그는 공안측에서 <<20세기신화>>를 보라고 입무로 맡기니 하는수없이 받아본것이요, 그러했지만 그는 오늘도 량심상의 가책을 느끼면서 스스로 자반성을 하더라고 알려주었다.

김학철선생은 <<그래야지! 사람이면 의례 미안한걸 알아야지!>>하더니 돌연히 화제를 돌려 나보고 집요한 투로 모택동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 것이였다.

<<모택동말입니까, 그는 현대판진시황입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쏟았다.  그랬더니 그는 송엽장을 잡지 않은 다른 한쪽 메마른 손으로 나의 어깨를 툭 치면서 한결 억양을 높혀서 부르짓는 것이였다.

<<북만에도 사람이 있구나!>>

그리고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그대로 내뿜었다.

<<맞아! 면바로봤어! 그자가 바로 현대판진시황이 옳아! 말해봐, 말해보라구! 그자 그래 현대진시황아니구뭐야?... 내가 <신화>에서 그녀석을 다섯군데나 욕을 해놨어. 생각해봐, 대약진이 뭐였어? 무슨꼴이였나말이여?... 제 백성도 건사못하는 주제에 훙태양이라 떠받들려? 숱해굶겨죽이구두 그래 훙태양이라 떠받들렸는가말이여? 렴치없는 인간짝아니고뭐야?....그런 주제에....어리석게. 세상웃기는 일이야, 세상웃기는 일!>>

그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이었던 것이다.

 <<건데 말이여 중국의 백성말이여 그 꼴이라는게 대체 어떤갈 보라구. 너무너무 우매해진게 탈이야. 그러니께 그자식 죽었어도 그냥 신처럼 떠받들리는게지 뭐야. 천안문광에 자리척 차지하구서는 셈평좋게 유리집속에 누어있단말이여. 나 좀 보거라.... 이게 다 뭐겠어  아두 이나라 백성이 성근하다못해 무지 몽매해졋길래지 뭐야. 그건말이여 바로 그자가 바라거였지. 생각해봐 왜 그랬겠나?>>

<<거야 백성이 무지해 제 명령을 곰상곰상 들어주면 통치하기 쉬우니 그런게지요.>>

나는 바로 이러하다고 했다. 동감이였다.

김학철선생도 나도 우리는 다같이 모택동이 조작한 <<반우파투쟁>>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제 나라의 인재를 제손으로 잡아버리는 미런한 짓이요 전대미문의 잔악한 행위로 밖에 되지 않았으니 천대만대 용서받지 못할 짓이였다고 했다. 

 

나는 그한테 출판사에 갔다가 거기서 장홍을이 설계한 <<항전별곡>>표지를 봤다는걸 말했다.

그랬더니 김학철선생은 출판사에서 <<항전별곡>>을 찍어주마고 받아놓길래 됐구나 했더니만 얼마안가 되돌리더라면서 필유곡절이라했다.

그래놓고 그는 시정쪼로 다시말했다.

<<아마 딱한 사정 따로있겠지.>>

별다른 불감은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중앙에 있는 문정일인즉 자기와는 전우간인데 그한테 도움을 청해 나서게 했노라면서 연변출판사에서 퇴짜놓은것을 그가 흑룡강출판사에 들이밀어 그것을 거기서 찍게했노라 알려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나보고 보아하니 아마도 나의 소설이 자기것보다 먼저출판될것 같다면서 책이 나오거든 한권 달라고 했다. 자기의 이름을 적어 책을 작가협회로 보내면 거기서 집까지 갓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였다.

 

방송국에 가야겠기에 더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가려고 신을 신으니 김학철선생이 <<언제 시간있으면 또 와봐. 우리 둘이서 한번 더 속심말 나눠보자구. 나 이 학철이는 가식없는 사람을 좋아하니께 믿어도 돼.>> 했다.

나는 그러리라 대답하고 그의 집을 나왔던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올 때 목단강역에 내려 거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들리였다. 허광일총편이 나와 <<항전별곡>>출판을 걷어안게 된 연유를 알려주었는데 김학철선생이 말한것과 같았다.

내 책이 출판된것이 1983년 3월이니 그의 책보다 먼저나왔다. 그의 책은 좀 늦어서 그해의 12월에 나온것이다.

김학철선생이 나에게 증송한 <<항전별곡>>에 싸인한것이 1984년 4월이다.    

                                    

                                      (2)

 

우리들의 두 번째만남은 똑똑한 날자기록이 없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허광일총편이 리근전선생의 전달이라면서 장도전화를 걸어왔는데 내용인즉 연변작가협회에서 리사확대회의가 있어서 부르니 아무날 꼭 목단강에 들려 자기와 함께 연길에 가자는 것이였다. 나는 일개 회원일 뿐 리사도 아무것도 아닌데 왜 부르는걸가 의문이 갈마들었지만 꼭 오라니 우선 가고보자고 그번 행차를 한 것이다.

 

연길에 가보니 다른일이 아니였다. 정길운선생이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추동궁마마>>라는 텔레비젼련속극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내부에서 돌리는 판이였다. 때시걱시간이 따로없이 여러시간을 줄창봐재꼈다. 그래도 피곤한줄을 몰랐다. 우선 내 평생에서 처음보는 한국의 영상품이라 감회가 달랐거니와 제재가 좋은 력사극이여서 인상이 깊었다.

 

그 걸음에 나는 김학철선생님을 두 번째 방문한것이다. 바깟출입문을 열자고 보니 특별사정없이는 면회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적은 종이장을 내붙인것이였다. 나는 그 공시(公示)를 보고 <<허 이령감이 새전투를 시작한 모양이구나! 자기는 이젠 편히 쉴 자유가 없다면서 나와 생전에 장편하나를 더 내놓으리라더니만 되게 바삐보내는 모양이구나!>> 나는 속으로 짚으면서 문에 노크를 했다. 천리길을 온김에 만나봐야지 다른날로 미룰 형편이 못되였던 것이다. 

문두리는 소리를 듣고 집안에서 어린 남자애가 달려나왔다. 분명 그의 손자였다. 그 애가 나를 말뚱말뚱 오려다보더니만 바깥출입문에 붙인 종이장을 가리키며 알려주는 것이였다.

<<봐요, 우리할아버진 바빠서 손님접대안한대요.>>

<<오, 그래? >>

나는 웃고나서 시켰다.

<<들어가 네 할아버지께 알리거라, 북만에서 온 손님이라구.>>

손자애는 과연 쫑그르달려들어가면서 할아버지 북만에서 온 손님이래요했다.

집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소설풀란을 작성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김학철선생은 필을 놓고 송엽장을 집고 문가로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김선생왔어? 어서들어와!>>

그이는 나를 뜨겁게 맞아주었다.

사모님이 유리컵 두 개에 유차맨을 풀어갖고 들어왔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그동안 그립던 얘기부터 시작했다.

<<김선생 들어보라구, 내 여생도 많이 남은게 아니야. 그래서...>>

김학철선생은 한창 <<격정시대>>를 쓸 준비를 하고있노라했다.

<<각진소능(各儘所能)이라, 뭐든 제 능력에 따라해야하는거여, 안그런가, 김선생? 이건 로신이 한 말이야.>>

그는 이러면서 나보고  그의 <<남강북조집(南腔調集)>>을 봤는가고 물었다.

나는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로신의 잡문들을 읽어보거라, 비수같은 문장들이니 깨달음을 주니 읽으면 유익하리라했다. 이리하여 로신에 대한 말이 좀 더 길게 나오게된건데 김학철선생은 어느땐가 자기는 로신의 댁 문앞까지 가놓고도 들어가지 않아 보지못했다는 것이였다.

<<감히 들어가지를 못하겠더라구. 내가 담소자약(談笑自若)한 녀석이였지.>>

그는 자기의 처사를 이같이 자조(自嘲)하면서 그일은 평생유감으로 남았노라했다.

그는 그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은 모든 혁명자의 귀감(龜鑑)이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보고 작가는 응당 로신을 따라배워야한다고 했다.

<<듣자니 로신이 서거했을적에 그의 관을 멘 사람은 후날 다 잘못됐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물었더니 김학철선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거야 뻔하지 않는가. 그렇게 되는걸세.>> 

<<그렇게 되는거라니요? 건 왜서입니까?>>

<<모택동이라는 이 사람이 대명대방을 내놓으면서 공포하기를 일없네라 다들 두려워들말고 용감히나오거라. 말한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삼가하면 되는거다 라고 하니까 순진하게 돼먹은 사람들이 공산당이 아무렴 거짓말을 하겠는가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는 만들지 않겠지 여기고, 말하자면 그 소리를 딱 곧이듣고는 바른말들을 한게지 뭐야. 그래 어떻게들됐겠나? 잘못될 수 밖에. 생각해봐, 안그래 김선생?  인사출동(引蛇出動)이였지.>>

김학철선생은 이러면서 다들 곽말약처럼 눈치보는 재간을 갖췄더면 운명은 좋아졌을거라했다. 이에 내가 왜 그런소리는 하느냐했더니 그는 곽말약을 욕하는 것이였다. 민국때는 국민당에 들어붙어 알랑거리더니 이제는 공산당에 달라붙어 알랑거리는거지 뭐야 하면서 그는 그것도 사람인가했다.

<<김선생은 그자를 어떻게 보는거야?>>

내가 잠잫고있었더니 그는 집요한 투로 따지듯이 물는것이였다.

<<선생님은 저의 평을 듣고싶습니까?>>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따지듯 묻고나서 견해를 솔직히 피력했던 것이다.

<<그는 어용문인입니다. 아주 전형적인 어용문인!>>

 

곽말약은 대단한 사람이다. 중국은 물론 세계적인 인물로도 손을 꼽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를 놓고 내가 이같이 비하를 하는데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젠가 천극(川劇)에 등장한 배우의 낮짝같이 빨갯다 파랫다  변화무쌍한 그

태도를 보고  놀랐던 것이다. 그가 지어서 세상에 공개한 두수의 시였다.

   

    첫시는 1976년 10월 <<인민일보>>에 실리였다.

 

    친애하는 강청동지,

    그대는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좋은 본보기.

 

운을 이렇게 뗀 다섯줄의 그 단시는 그가 “아세아 아프리카 작가상설국”토론석상에서 즉흥적으로 읊은것이라해서 그때 내가 다시 봤는데 알랑수가 치사할지경 적라라하게 드러나고있었다. 그러던 그가 1976년 10월에 이르러 “4인방”이 체포되니 인차 <<수조가두(水調歌頭)>>를 써낸것이다. 그해 11월 1일자 <<해방군보>>에 실린것을 보면 “4인방”은 야심이 크다느니 음모에 궤계가 있었다느니 붉은태양을 해치려했으니 만번죽어 마땅할 죄라느니, 계승자 화국봉은 준걸이라느니 과단성있게 유지를 계승했다느니 공적이 휘황하다느니  자기는  화주석을 따르리라느니 당중앙을 따르리라느니 했다.   

분석능력이 좀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이런 시들은 비교해보고 어찌 놀라지 않으랴?...

곽말약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그의 물음에도 나는 전번때 모택동을 현대판진시황이라한것처럼 진솔하게 그는 대표적인 어용문인이라고 견해를 밝혔던것이다. 그랬더니 그는 낯빛이 확 밝아지면서 이번에도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쳤다.

 <<맞아! 대답이 만점이야! 그녀석 어용문인맞아!>>

나는 그와 속심말을 하고보니 이번에도 속이 후련했다.

김학철선생은 유차맨을 다 들고나서 이번에는 자기가 쓴 <<20세기신화>>에는 닦은 콩을 한알 두알 헤여서 파는 장면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그보고  그건 너무 과장한게 아니냐, 아무렴 연변이 그정도였단말인가고 의심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니 그럼 내가 없는 일을 그같이 허구했겠느냐고 발칵성을 내는 것이였다.  

<<거기서도 대약진 때 배를 곯은게 아닌가?>>

<<아니요. 선생님의 생각과는 달라요. 난 배를 곯지 않았습니다. 기황이 온 중국땅을 휩쓸어 주검을 쓸어냈어도 우리 홍광마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유독 북대황의 그 마을만은. 둘도없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였지요.>>

내가 이같이 말했더니 선생님은 경아하여 거 참 희한하다 금시초문인걸 했다. 

그래서 나는 바라지도않은 문화혁명이 터지자 우리 마을 홍광대대에서 <<毛劊子手>>반동구호사건이 생겼던것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모택동은 살인백정이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다. 내가 말한 그대로 우리 홍광마을 사람들은 3년재해년간에 그 누구도 배를 곯지 않고 잘지낸 것이다. 성화공사에 조선족마을이 모두 6개였는데 다른 마을 사원들은 배를 골아도 홍광마을 사원들은 누구하나 배를 곯지 않은것이다. 아마 온 전국치고 그같이 무사한 곳은 둘도없었으리라. 명실상부(名實相符) 진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였다.


그 마을 사원들이 배를 곯지 않고 무사히 지낸데는 전적으로 그 마을 생산대의 간부였던 김의철(金義哲)과 리유식(李維植) 그  두분의 덕이였다.  그들은 년년이 상부에다 량곡산량을 회보할 때면 실사구시였지 절대 허풍을 떨지 않았던 것이다. 징구량임무는 임무대로 완성하면서 사원이 소모하는 알곡은 수량을 제대로 남겼길래 굶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선 제마을 사원들을 굶기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내심 부르짖은 구호였던 것이다

이러했기에 연변과 가목사근처에서 여러세대의 이사군이 쓸어들었던것이다.

한데 문화혁명이 터지니 외지에서 온 젊은놈몇이 위대한 무산계급혁명자의 탈을 쓰고는  반란에 도리있다(造反有理)를  부르짖으면서 두 간부를 끌어냈던 것이다. 그들을 꺾구러뜨리고 권리를 잡자는게 목적이였다.

한데 투쟁대회를 열었어도 그 두 간부를 비판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비판할 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박춘일(朴春日)이라는 젊은이가 그 마을의 공청단서기였는데 렬사의 자식인 그는 성품이 활발하고 곧았다. 그는 매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끄집어내여 시달구는것을 보다보다못해 그같이 생사람잡이를 하게끔 문화혁명을 발동한 모택동에게 반감이 생겨 어느날 그 험악한 반동구호를 써 이웃 한족마을의 소학교에 다니는 처남애를 주어 길가 눈에다 써놓게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만 온 성화공사, 온 화천현, 온 화합강지구에서 “특대반혁명안건”이 되여 벅작했다. 공안이 출동하고 <<인민전쟁>>벌렷길래 조작자가 누구란게 어렵지 않게 드러났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마을의 총책으로서 여러해를 내내 촌지서에다 생산대장을 겸해온 김의철(金義哲)이 그만 바가지를 쓰고말았던 것이다. 그가 장본인인 공청단서기 박춘일이를 그렇게 하라고 추겼다는 것이다. 순 날조였다. 처음부터 촌장의 권리를 빼앗자고 든 그 외지에서 온 성이 리가인 젊은녀석이 박춘일이를 얼리고닥치고해서 끝내 물어먹게한 것이다. 너무나도 한심하고 무서운 일이였다. 김의철은 공사에 끌려가 투쟁받다가 현에 끌려가 판결을 받은건데 무기도형이였다.

 

김의철은 절대 그럴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나의 의모부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걸 너무도잘알고있었다. 그는 반무식자였다. 그가 <<劊子手>>라는 명사를 알리도 만무다. 1962년도 여름에 조선에 나간 형님으로부터 편지가 온적이 있는데 그는 그것도 볼재간이 없어서 나를 불러 대신읽게했던 것이다. 그의 형님인즉 김동철(金東哲)인데 유명을 남긴 항일간부다. 8.15직후, 북만에서 조선족부대를 조직하여(항간에서는 동철부대라했음.) 토비숙청을 하고나서 조선에 나간 그는 6.25전쟁때 빨찌산총사령이였고 그후는 철도부부장을 지내다가 김일성의 숙청에 든건데 편지에 보면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모른다고했다. 나의 이모부가 반무식쟁이긴했어도 성격만은 제형처럼 올곧고 강직한 분이였던 것이다.


나는 현에 끌려가 만인대회에서 투쟁받고는 그길로 판결에 넘겨져 미결수 감방에 같인건데 그때 거기서 내먼저 잡혀와 무기도형에 떨어진 이모부가 사망한것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판결시 죽어도 자기는 남을 추겨 반동구호를 쓰게한적이 없다고 뻗치니 악한 여럿이 달려들어 팔을 끌어다 강제적으로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그 억울함을 그 누가 알아줄가? 한심했다. 김의철은 분을 못이겨 감옥에서 단식사(斷食死)를 하고만 것이다.

내가 이 일을 말했더니 김학철선생이 자기보건대는 문화혁명기간만해도 그같은 원안(怨案)은 부지기수여서 통계를 내기조차 어려우리라면서 제가 힘들여 애써 구축한 사회를 제손으로 훼멸하는 바보독재자는 중국의 모택동을 내놓고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거라했다. 나는 그 말이 과연옳다하고나서 하건만도 그런줄은 모르고  만세소리에 귀가 멀어진 중국의 백성들은 잠을 깨지못해 아직도 그리워 동방홍을 부르니 지천이 곡할일이라 했다. 그랬더니 김학철선생이 장차 아무때든 셈평좋게 수정관에 누워있는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제대로해야한다, 그를 어떻게 볼것인가? 선지선각자는 억만군중이 인식을 바로갖게끔해야할것이라했다. 나는 그것이 맞는말이라면서 응당그래야지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어느때 다시한번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것이 다시가 아니라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줄이야 어찌생각했으랴!

 

2001년도 <<연변문학>> 11기를 손에 받아쥐던날 나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11기에 후날 한국에서 상을 준 나의 중편소설<<망매의 무도장>>이 실림과 동시에 김학철선생이 사망된 소식이 실렸던것이다.

<<이제는 만날 수 없게됐구나!....아 아, 이 일을 어쨌으면 좋은가?>>

나는 속심을 나눌수있는 지기를 잃은것이다.           

앞으로 저승에서라도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물을것이고 그러면 나는 그와 다음과 같이 말할것이다. 

 

나는 모택동을 세마디로 평한다.
혁명은 성공했고
건설은 착오가 있으며
문화혁명은 죄를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을 위대하게 볼수 있는가?
나는 그를 위대하게보지 않는다.

     

 

                                              2002. 2. 17  북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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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 ]

4   작성자 : 나 원 참
날자:2015-03-04 19:07:44
입에 번지기 쉬운대로 쓴것 같은데 그걸 꼬리잡고 들다니 원.
할일없으면 제 코구멍이나 후빌게지.
3   작성자 : 소리개
날자:2012-04-07 19:51:57
내가 먼저일수도 잇는거지머~!!!
2   작성자 : 문학도
날자:2012-04-06 21:58:33
송죽작가는 반전을 노린것 같은데!!!!! ㅎㅎ 글 쓰는 사람이 왜 그걸 생각 안했겠슴가!!!!! ㅎㅎ ㅎㅎㅎㅎㅎ
1   작성자 : 순서
날자:2012-02-18 15:06:29
"나와 김학철 선생"이라니 아무래도 순서가 바뀐 것 같아서요.
"나와 모택동 주석"이라는 제목을 본적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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