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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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람
2011년 09월 26일 08시 17분  조회:5021  추천:1  작성자: 김송죽
   수필                                                      나의  요람   

                                                                      김송죽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창조하는 것이지 결코 순히 맞이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끈질긴 분투가 제 운명을 창조함에 첫째로 중요하겠지만 객관의 방조를 받는것 역시 자못 중요한거다. 나는 내가 흑룡강신문사와의 접촉에서 이 점을 심심히  낀것이다. 사의 직원도 아닌 나를 작가로 키워준 요람이 바로 흑룡강신였다.

이제는 오랜일이다.

1962년 7월, <<흑룡강일보(조선문보)>>의 진달래부간에 나의 처녀작 시 <<북대황송가>>가 실리였다. 그때 신문지면 가운데 곱게 선을 그어 실어준 시작(詩作)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문화대혁명 때 원본을 빼앗겨 잃어졌는데 고맙게도 박철준시인이 전에 스크랩프하여 두었던 것을 주어 나는 그것을 외워두게 됐다. )

그때 문예편집으로 계섰던 리병철선생이 고맙게도 축하편지까지 보내와 나를 격려해주었던 것이다. 그후 편집선생은  <<풍녕의 노래>>, <<봄노럐>>, <<눈길>>  등 나의  다른시들도 흑룡강신문에서 실어 세상에 얼굴을 보이게 하였다. 그같이 내가 문단에 오르느라 첫발을 붙인 곳이 바로 흑룡강신문이였던 것이다.

속담에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글도 변변히 읽지 못한 내가 글을 쓴다고 너덜대는게 눈꼴사나왔던지 아니면 사촌이 기와집을 지어도 배가 아파하는 병이 도져 그랬던지 나를 보고 투기적으로 돈벌이를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뒷소리를 하더니만 <<4청>>이 오자 기회를 빌어 벼르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자는 신문사에 가있는 나의 원고들을 전부 압수하려고들었다. 어떻게 하나 끈을 달아서 나를 패보려는 고약한 심사였다.  그때 신문사의 윤응순사장과 리병철편집선생은 편지답변에(종근이 당안으로 남아있음) 투고자의 원고심사권은 신문사에 있으니 념려하지 않아도된다고 어리석은 그자를 준절히 타이르면서 나를 보호해주었다. 과연 고마운 일이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들어닥치자 나는 액운을 면치 못했다.  내가 전혀 있지도 않은 필화(筆禍)를 입고있다는 것을 안리병철선생은 그기간 세 번 내있는 고장 一  성화공사(星火公社)를 찾아왔었는데 첫 번은 상봉할 기회를 가졌으나 그 다음의 두 번은 만나지도 못하게   해서 그이는 내 일을 근심하며 되돌아갔다.  

1972년 봄, 신문사에서는 << <강화>발표 30주년응모>>가 있으니 용약투고하라는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그때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온지 3일밖에 안되였다. 그 편지가 나에게는 더없는 믿음과 힘을 주엇다. 나는 소설을 쓰고야말리라 강심먹고 다시 필을 들었다.  당날로 나는 길건너 서켠 맞은켠 코앞에 합작사(合作社)가 있고 종이를 팔았지만 안해를 비밀리에 8리 거리가 되는 뒷족 한족마을에 가 종이를 한아름 사오게 했다. 그리고는 꼬박 한달밤을 패가며 악전고투하여 마침내 근 50여만자에 달하는 <<최후의 결전>>을 써냈다. 그때 문예편집을 담당했던 홍만호선생은 직접 나의 그 장편소설원고를 안고 연변에 나가 <<연변문예>>에다  심열을 위탁했다.  그것이 후에 모진 진통 끝에 탈태환골을 하여 끝내 연변출판사에 의하여 출판이 된 나의 첫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이다.

<<흑룡강에서는 사람을 참 아껴준다니까!>>

이 일을 알고있는 연변분들은 나를 만나면 이런 말로 신문사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1978년도에야 <<정책락실>>을 받았다. 그때 문에편집이였던 김순호선생은 나의 오두막집에 찾아와 밤을 새워가며 회포를 풀었고 여러면으로 위안을 주면서  앞을 내다보고 용기를 내라고 면려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신문의 톱에다 내가 치룬 경난과 현황을 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잊을수 없는 고마움이였다.  

나는 이듬해 할빈에 갓다. 신문사가 첫걸음이였다. 글에서 이름만 익혔을 뿐 초면인 그들이 그렇게 뜨거운 분들일줄이야!...  나는 나를 알아봐주는 친구와 벗들이 이렇게도 많았구나 생각하니 용기가 한결 북돋아졌다.

지금은 나의 큰아들 성해가 신문사미술편집으로 사업하고있다. <<마음먹고 실속있게 사업을 잘하거라.>> 만나면 이 부탁밖에 없다. 내가 입은 은혜 내 힘으로는 못다갚겠으니 대신 보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무엇보다 외성으로 출장갔다가 흑룡강신문을 알아주는 말들을 들을 때면 나는 마치 내 일이 잘되여 칭찬받는 것 처럼 흐믓하다.  <<흑룡강신문>>, <<우리 신문>>...  과연 정답게 부르고만 싶은 <<흑룡강신문>>이다! 나는 우리의 이 신문이 독자들의 기대와 축복속에서 날로 잘 꾸려지기를 두손모아 빈다. 
(작자는 작가. 화천현문화관 창작실에서 문학창작에 종사하고 있음)  

  1991. 9. 4.  <<흑룡강신문>>



                                                   관련글: 나의 처녀작 詩  <<북대황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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