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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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편집선생
2011년 09월 04일 15시 29분  조회:5819  추천:1  작성자: 김송죽

 

                                      나와 편집선생

                                             김송죽

 

   독자들은 흔히 책 한권이 출판되면 그 책과 저자의 이름은 알아두어도 그 책이 세상에 나오게끔 애써온 편집에 대해서는 잘모르고있다. 하긴 그럴범도하다. 저자의 이름은 책가위의 뚜렸한 위치에다 박아놓으나 편집의 이름은 뒤켠 한쪽귀퉁이아니면 안쪽의 별지에다 자그마하게 써놓으니.

   누군가는 문학창작이라는 이 고되고도 가치있는 사업을 하나의 거창한 군사행동으로 가정할 때 작가를 제1선에 나선 경기병이라 한다면 편집은 부대에서 후근과 같다고 말한바있고, 어떤 사람은 작가를 천리마라 할 때 편집은 그 천리마를 발견한 백락과 같다고 비유한바 있다. 과연 그러하다. 나는 내가 겪어온 사실로부터 그러한 비유들이 틀리지 않는다고 본다.

 

   아직은 “문화대혁명”이 채 끝나지 않았던 1974년 5월에 나는 나의 첫 장편소설원고를 연변인민출판사에다 투고했다. 이제 말하겠지만 나의 그 소설은 내가 목숨을 내걸고 땀이 아니라 피로써 쓴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한데 그러한 원고가 한 어리석은 자의 작간으로(자기가 검열하겠노라고) 본인도 모르게 중도에서 여러날을  깔린통에 늦어서야 출판사에 들어갔던것이다.

   내가 그런줄은 모르고 원고를 받았다는 소식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못해 편지했더니 출판사에서는 마침 방금 받았노라 알리면서 “정성껏 편집하여 보낸” 나의 그 소설원고를 “이제 시간을 짜내여 정독할 것이며 그런 후에는 륜독을 조직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편지하는 사람이 아마 편집일거라고 속짐작하면서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가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넉달이 지난후에 편지와 함께 한아름되는 나의 원고가 되돌아왔다. 편지를 보니 작품을 기본상 긍정하면서 수개하라는 편집부의 의견이였다. 수개의견은 넉장에 상세하게 밝히였는데 묵지를 대고 쓴것을 보아 한부는 편집부에 남긴게 분명했다. 쓰지 않을 소설이면 이렇게 하겠는가? 희망이 보였다. 그러면서 단번에 성공할리는 없다는걸 미리 각오하고있은 나는 편집부의 의견에 쫓아 인츰 작품수개에 달라붙었다.

   반년간 긴장한 수개작업이 있은 후 원고는 이듬해 3월에 다시 연변인민출판사로 날아갔다. 이때는 꼬박 4년간 투쟁맞고 이리저리 몰리던 내가 사업이 회복되여 이웃동네의 소학교로 전근되여 온지 3년철이 되였는데 그토록 조심스레 비밀리에 해치운다는 수개가 그만 탄로되여 하마터면 또 졸경을 치를번했다. “교학검사”를 한답시고 포위공격을 해왔던것이다. 그때 우리 집으로 잘다닌, 할빈에서 하향을 온 청년교원 하나가 있었는데 그보고선 나의 물을 절대 먹지 말라면서 “반동적인걸 적발하라”고 꼬드겼고 나보고선 “왜서 아직도 고집이 그렇게 센가? 소설을 다시쓰는건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항이다.”고 경고했던것이다. 나는 하도쓰거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여름방학이 되자 인츰 연변으로 나갔다.

 

   쟈므스(佳木斯)에서 동으로 60여리에 있는 편벽한 농촌, 북만에서 태여나 줄곧 북만에서만 살아온 내가 연변에 나가 출판사를 찾은것이 그번이 난생 처음이였다.

   하남다리를 건너니 출판사는 찾기도 쉬웠다. 한데 내가 출판사간판이 걸린 대문가에 이르러 뜨락을 들여다보니 모두들 밖에 나와 화단을 정리한다, 풀을 뽑는다, 유리창을 닦는다 벅작이고있었다. 대청결을 하는구나, 하필이면 요럴때 올건 뭐람?... 나는 잠시 망설이면서 걷잡지 못할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득나타난 이 불청객을 어떻게 대해줄지?... 하지만 천리길 넘어 여기까지 찾아온 걸음이라 일이 끝나기를 기다릴수는 없어서 나는 화단에서 풀을 뽑고있는 한 강마른 분(허해룡선생)곁에 다가가서 초인사를 하고는 찾아온 연유를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주 반색하면서 나를 웃층으로 안내했다.

   거기 한 칸에서 안경낀 50대의 근엄하게 생긴 분이 걸레로 테이블을 닦고있었는데 나를 안내한 분이

   “여보, 북만에서 작자가 찾아왔소.”하고 알리자 그는 일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다보면서

   “동무는 북만  디서 왔소?”하고 묻는것이였다.

   내가 쟈므스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는 의아쩍게 보면서 다시물었다.

   “쟈무스에서 왔다? 동무가 무슨 소설을 우리한테 보냈단말이요?”

   “장편소설입니다. <번개치는 아침>입니다.”

   “아니 뭐라오? 동무가 그래 <번개치는 아침>의 작자란말이요?”

   그는 뜻밖에도 아주 놀라면서 반신반의 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아차, 내가 속히웠군!” 하고 혼자소리로 부루짖는것이였다.

   나는 그가 왜서 속히웠다고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동무가 바로 김송죽이겠구만!”

   그는 한바탕 소리내여 웃고는 나를 걸상에 눌러앉히는것이였다.

   이분이 바로 내가 늘 속으로 점쳐오던 나의 소설의 책임편집인 강정일선생이였는데 그의 말인즉 나의 소설원고를 보고 자기는 작자가 토비숙청경력이 있고 나이가 적어도 52살은 넘었을 사람이라 짐작했다는 것이다. 한데 그해 내나이는 37살이였던 것이다.

   “지금 나이 서른일곱이라, 그럼 동문 사변나던 해에 기껏해야 일곱 살밖에 안되였겠는데 토비숙청력사는 어떻게 알고 그렇게 썼소?”

   강정일선생은 손가락을 꼽고나서 의문되여 물었다. 하여 나는 내가 그 소설을 쓰게 된 동기로부터 시작해서 그때까지 겪어온 경난을 쭉  말했다. (략)

                              관련글: 내 사유와 잊을 수 없는 일

 

   소설을 쓰자! 살이있는 내가 적들과 영용히 싸운 군인들과 렬사들의 업적을 쓰자! 이것이 나의 결심이였고 스스로 걸머진 종생의 의무라고 여겼다. 하기에 문학창작은 곧 나의 생명과도 같이 귀중했던 것이다. 그렇다. 아마 그래서 끄. 빠우스또브쓰끼가 “작가는 내부충동에 따라 글을 쓰며 또 쓰지 않을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때 나는 아직 작가는 아니되였지만 바로 그러했던것이다.         

   

   1957년, 벌리에서 근근히 초중을 졸업하고 촌에 돌아와 3년간 농사질하다가 마을 소학교의 교편을 잡은 나는 자신의 문화기초가 너무나 낮음을 통감했기에 월급을 받아서는 거의 책을 사는데 밀어 넣고 열심히 탐독하면서 끊임없이 창작지식을 련마했던것이다.

   “이도 안난녀석이 뼈다귀추렴하련다.”느니 “올라못갈 나무는 쳐다보지도말라.”느니 하고 비웃고 “권념”하는 동창이 있었지만 나는 그따위소리는 마이동풍으로 흘러버리고 결심만 굳히였다.

   나는 단편소설 한편 써보지도 않고 시쪼박만 쓰다가 어벌통크게 달려들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해에 40여만자에 달하는 장편을 써냈다. 한데 그것이 화근이 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나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얼마안되여 “작은 등척”으로 , “교원대오내에 숨어있는 주양의 졸개”로 잡혀나왔는데 촌에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고 문학리론을 학습하고 조선작가 리기영선생과 서신거래가 있은것 모두가 “가만놔둘수 없는 죽을 죄”로 되어 투쟁받았다.

  무슨놈의 “죄”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못했던 일이였다.

  公社敎員造反團을 조직한 심보고약한 한 야심가의 조종과 추김을 받은  중학교의 철없는 “맹장”들은 얼싸좋다고 사정없이 달려들어 내가 그처럼 애써 모은 1천2백여권에 달하는 책중 문턱밑에 파묻은 세계명작 16권을  내놓고는 다 빼앗아갔거니와 철저히 혁명을 해치운다면서 마구뜯고(천장),  마스고(책장),  허물고(부뚜막), 뒤집고(구들장, 새낫가리) 하여 하루낮새에 집이라는 것이 거덜이나고말았다. 나는 더 말할것 없고 겯따라 어머니와 안해와 자식들이 받은 고통과 릉욕과 멸시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치 않겠다. 그때 팔을 걷고 나섯던 맹장현대토비중에 아직까지도 그 죄를 느끼지 못하고 뻔뻔스레 노는  있는데 너도 개나 돼지아니면 느낄날이 있겠지 하고 내쳐둔다. 하여간 지랄발광네굽질이였다. 나에게 책과 대자보(大字報)를 한짐한짐 가득지우고(마을의 혁명자 둘도 한짐씩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공사내 6개마을을 돌면서 1관, 2관, 3관, 4관 전람관을 차려가며 투쟁했거니와 전 화천현(樺川縣)의 만명투쟁대회에 내세우기까지 했으니 독자는 그 정도가 어떻했으리라 가히 짐작하리라. 

   이미 써놓은 원고가 잃어지고 여러해동안 수집해놓았던 자료들도 찾을길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다시금 구상해두었다가 출옥하자마자 인츰 또 새로썼던것이다....

 

   강정일선생은  나의 이 평탄찮은 경과사를 곰곰이 듣더니 자못 침중한 기색을 지은채 말했다.

   “송죽동무, 과연 고생했소! 그러니 소설도 력사가 있구만! 지금보건대 주제도 좋고 내용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기요!”

   그때 편집선생의 그 한마디가 의지가지 할곳 없었던 나에게는 과연 크낙한 고무였다.                 

   

    이틑날 강정일선생은 나를 데리고 인쇄공장을 참관시켰다.

   “동무의 소설도 다 되면 장차 여기서 저렇게 찍어 책으로 되어 세상에 태여날것이요.”

   참관을 다하고나서 강선생이 웃으며 하시는 말씀이였다. 그때 얼마나 기쁘던지! 희망은 나의 창작의욕을 더더욱 불태웠다.

   사흗날 강정일선생은 그때 문예편집실책임으로 계셨던 허해룡선생과 함께 나를 앉혀놓고 편집부에서 나의 장편소설을 읽어본 정황과 이미 토론되였던 구체적인 수개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떠나는 날 강선생은 나를 보고 지금의 처지에서 무엇보다 공사당위의 지지를 받는것이 중요하니 돌아가거든 출판사에서 나의 소설을 장차 출판할 예정으로 아주 중시하고있다는 걸 알려주라했다. 하여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길로 공사에 들려 그때 갖부임되여 온 초면의 서기앞에서 그 말을 전달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지지해달라고했던 것이다. 당위서기는 그러마고 쾌히 응낙했다. 그레서 숨이 좀 나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번째수개에 접어들었다. 안해가 이전처럼 제발 글을 쓰지 말아달라고 애발대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4인무리”가 의연히 살판치던 때라 편견에 물젖은 사람들의 경계하는 눈이 번득였기에 잔약하고 고생많이 한 나의 안해는 의연히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작품수개가 거진되여 갈 때 나는 출판사에 편지하여 이번에는 작품합평회를 조직해줄것을 건의했다. 그랬더니 편집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사전에 사람 몇을 정해놓고 륜독하게끔하라했고 그것이 끝나 소식알리면 친히 한번 왔다가겠노라했다. 하여 1976년도 2월달에 강선생이 우리집으로 오시게 되었는데 선생은 그때 북만이 첫걸음이라했다.

   내가 쟈므스로 마중을 갔었는데 화창하던 날씨가 그날따라 별스레 눈보라를 일쿠어 새벽차에 내린 강선생을 적이 놀라게 만들었다.

   “허, 대단한데! 북만이 춥다니 웬 소린가했더니만!... ”

   “연변손님오신다고 본때를 보이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말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튼 먼길도 마다하고 오시니 나는 몹시 반가왔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7리가량되는 마을로 걸어갈 때는 눈보라가 멎었다. 강선생은 가다가 걸음을 멈추곤 무연한 벌을 둘러보더니

   “오ㅡ 광활한 북대황이여, 네가 넓으니 포부있는 작가도 태여나는구나!”하고 즉흥시를 읊듯했다.

   나의 용기를 북돋우어주느라 그러는것이였다.

 

   그날저녁 잠을 잘 때였다. 웬 일인지 강선생은 자리에 누워서도 모자벗을 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의아쩍어했더니 강선생은 아Q가 숭터를 감추지 못했던 얘기를 하곤

   “웃어도 방법없수다. 난 이렇게 번들골이요.”하면서 모자를 벗었다.

   강선생은 원체 머리카락 몇오리 찾아보기 힘든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줄을 몰랐던 나의 안해는 손으로 입을 막느라했지만 나오는 웃음을 참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같이 한바탕 웃음을 텃치고말았다.

   강선생은 합평회의를 열고 수개의견을 내놓느라 우리 집에서 10여일가량 묵고 돌아갔다. 그리곤 그후부터 우리 집 살림이 구차한것을 헤아려 출판사원고지를 보내여 그것을 쓰게했고 오두막같은 우리 집이 꿈에도 생각키운다면서

   “수개진전이 어떠한지요. 적잖게 애로들이 많으리라 믿습니다만 동무의 굳은 의지가 능히 모든 난관을 정복해나가리라 확신합니다.”하고 편지했던것이다.

   내가 장편소설을 세 번째로 수개할 때 “4인무리”가 꺼꾸러지고 력사에 류례가 없다던 “문화대혁명”도 끝났다.

   나는 겨울방학때 원고를 가지고 연변에 나갔고 이듬해여름에는 강선생께서 허해룡선생과 함께 우리 집에 두 번째 오시였다. 여지껏 작품에 3돌출을 하느라했는데 이젠 변화된 형세에서 다시한번 수개해보라고 원고를 내놓는 것이였다. 50만자도 넘는 소설이여서 한번 옮겨쓰자해도 3, 4개월이 잘걸린다. 그러니 힘에 부치는건 더 말할것 없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기꺼이 수개에 달라붙었다. 여지껏 편집부의 의사대로 3돌출에 맞추느라 쓴 소설이다보니 대수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을 알고 나는 이 네 번째수개는 시간을 썩 늘게 잡았다.

   강선생은 수시로 편지하여 나의 작품수개정황을 료해하였다. 편집부의 사상이 해방되는걸 보노라니 작자인 나는 더없이 기뻣다.

   1976년 가을에 쓴 편지에다는 류원무의 중편소설 “숲속의 우등불”을 편집하고있는 중이라면서 최택청의 장편원고 “도강전야”의 심열정황도 알려주었고 “사람들의 사상이 해방되고 정신쇠사슬이 없어지니 좋은 작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화원을 활짝 꽃피우고있소. 참 얼마나 즐거운 세상이요!” 하고 자기의 기꺼운 감정을 구김없이 토로하기도 했다.

   마침내 4번째수개도 끝났다. 한데 또한번 다시수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보고 사상을 더 해방하여 마음껏 고쳐보라는 것이였다. 나는 이번에도 군소리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이젠 기진맥진한것만은 사실이였다. 이때는 내가 소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와 단통 고중의 조선어문과교수를 맡아 하고있었는데 교재를 연구할라니 작품을 수개할라니 실로 힘에 붙이였다. 하여 나의 이러한 사정을 편집선생에게 반영했더니 편집부에서는 학교당국과 교섭하여 나에게 반년간의 창작휴가를 주도록하였다. 하여 나는 집에 들어앉아 낮에 밤을 이어 맘놓고 수개할 수 있게되였던 것이다.  그때 중학교의 교장은 오상국(吳相國)선생이였는데

   “문학도 역시 중요한 교육이요. 동무의 소설이 잘 수개되여 하루속히 세상을 보기 바라오.” 하면서 면려했다.

   얼마나고맙던지!

   편집은 어느한번 편지에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였으면 얼마나좋겠소.”라고 했다.

   편집선생도 얼마나 기진맥진했으면 이렇게 당부할가. 내가 들어앉으니 내가 맡은 고중반 학생들은 조선어문과를 배우지 못하고있었다. 하여 미안한 감정이 밀물처럼 내 가슴을 메웠다. 나는 미안한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서 더 참답고 이악스레 그 마지막번의 수개를 기한전에 끝마쳤다.

 

   1982년 5월말, 강정일편집께선 집에 있으면 이러저런 일로 찾아오는 이가 하도 많아 원고를 시름놓고 볼수 없길래 약 50여일간 북만에 들어와 편집을 하기로 나와 약속이 있었다. 하여 나는 세 번째걸음인 그를 마중하러 쟈므스로 갔다.

   연변에서 오는 객들은 새벽차에 쟈므스에 내리므로 나는 시간이 되자 개찰구로 나오는 객들을 하나하나 눈주어 살펴보았다.

   이윽고 회색여름옷 입고 차에서 내린 강정일선생이 먼저 나를 부르면서 손짓했다. 나는 그만 첫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버렸던것이다, 강선생은 원래 대머리가 아닌가. 한데 어느새 머리가 저렇게 낫을가? 알고보니 가발을 해쓰고 오시였다.

   “그러니 아주 변모를 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웬 젊은인가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젊어보인단말이지. 하하하....”

   우리는 다시한번 상봉의 기쁨을 나누면서 해뜨기를 기다렸다.

   강선생은 오신 그날만 휴식하곤 이틑날부터 나의 장편소설편집에 긴장히 보내기 시작했다. 그해따라 유달리 가물어 선생이 와있은 50일동안 비한꼬치 내리지 않고 무덥기만했다. 내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그때 우리는 이미 향소재지에 이주하여 와 향에서 처음일떠세운 교원사택ㅡ널찍한 벽돌집에 들었던 것이다.)

   선생은 늘 맨 런닝그바람에 창턱가에 놓인 원탁에서 원고를 보군했다. 이럴때 선풍기하도 한 대 있으면 오죽좋으랴... 나의 저작을 내주자고 무더위속에서 그렇게 땀흘려가면서 신고하시는걸 볼때면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한데 작가나 편집이나 제 주장을 고집하는건 꼭 같은가보다. 강선생이 나의 소설에서 두 개절이나 빼던지려 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것 같다는 것이였다. 없어도 될것이면 내가 만들었겠는가? 이것이 나의 주장이였다. 하여 우리 둘은 쟁론이 벌어졌는데 나의 안해는 싸우는줄로 알고 놀라기까지 했다. 옹근 하루시간의 격렬한 쟁론을 거쳐 나중에는 한 개절만 빼버리고 다른 한 개 절은 수개하여 그냥넣도록 “담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나하고만있은게 아니다. 나의 소설편집이 다 되자 마침 리근전선생이 우리 집에 오시였는데 닫새를 묵는 기간 그의 장편소설 “고난의 년대” 제2부의 원고를 놓고서도 작자와 편집지간에는 그같이 쟁론이 심했다. 이럴때 객관이 되어 옆에서 구경하니 그게 참 재미있기도했다.

   

   나의 소설이 출판사에 투고되여 세상을 보기까지 만 8년간! 그사이 나의 소설은 “3돌출”을 하느라 세 번, 사상을 해방하느라 두 번수개하다보니 도합 다섯 번이나 탈태환골을 한 셈이다. 그사이 편집선생이 내한테 편지한것만도 50여통 잘된다. 나도 아마 그만큼은 했으리라. 편집선생이 우리 집에 세 번오시였고 내가 연변으로 세 번나갔더랬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다가 지구적인 “교착전”에서 피로할대로 피로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간에 리해를 기리했고 우의로써 새힘을 길러낸것이다. 나는 앞으로는 더 어려운 시련도 겪어내면서 글을 그냥 써갈것 같다. 강선생은 이젠 환갑이 다 되신다. 이제 곧 리직하면 편집사업을 그만둘 것이다. 하지만 그이께서도 운명하실 그 시각까지도 문학을 영 던지지는 않을것 같다. 이건 아마 내나 편집선생의 천직인것 같다.     

 

                                          1988.12 <<천지>>

                                                  ※  문장에 몇글자 보충 
                                                 관련글: 處女作 時 <<북대황송가>>외 1수.
                                                 관련글: 에세이  “내 사유와 잊을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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