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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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에세이 김일성의 당내숙청 댓글:  조회:7468  추천:2  2013-11-01
  에세이 김일성의 당내숙청   1950년6월25일부터 1953년7월27일까지 진행되였던 조선전쟁은 우리 조선민족의 력사상에서는 너무나도 크나큰 비극이였다. 그 전쟁은 구가할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전쟁을 해서 남북은 통일을 가져오지 못했거니와 오히려 불필요한 죽음만을 내면서 하나의 나라가 의연히 두동강이 된채 제민족ㅡ남북동포들에게 깊은 원한과 고통만을 더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당시 조선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은 자기의 신변에 있는 원로급인물들에 대해서 타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56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정식으로 당내의 “친중파(연안파)”와 “친쏘파”에대한 대숙청을 시작하엿던바 그것이 1958년도에 이르어서야 이른바 “승리”로 끝난 것이다. 그 일이 이미오래전에 공개되기는했지만 시간이 오래니 잊어지고있다. 나이많은 이들도 그 내막을 잘모르거니와 더구나 지금의 젊은이들은 거의가 “당내숙청”이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것 같아 오늘 그에 대해서 언급하련다.    박헌영(朴憲永)집단숙청   박헌영(1900년ㅡ 1955년)은 위망이 높았던 정치가였다. 그는 19살때에 “3.1운동” 에 참가한 일로하여 일본경찰들이 붙잡으려하니 중국의 상해로 망명을 한 것이다. 1945년에 조선이 독립을 하게되자 그는 조선공산당령도자의 신분으로 당활동을 활발히 했다. 같은해에 김일성도 쏘련에서 조선으로 건너가 서울에 있는 박헌영의 령도를 접수하는 한편 따로 조선공산당북방국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준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세운것이여서 서울중앙의 비평을 받은것이다. 북방 함경도당조직에서는 지어 한때 북방국의 령도는 받지도 않겠다고하면서 맛서기까지 했다.   1947년도에 이르러 남조선공산당은 미국이 진압하기에 당중앙이 하는수없이 서울을 떠나 북으로 들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되자 남북쌍방은 일치한 의사에 따라서 련합회의를 열고 조선로동당을 세우게된것인데 당수는 김일성이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이 위원장이고 박헌영이 부위원장이였다.      조선전쟁이 일어난 후 박헌영이 남방의 당조직을 책임지고 기의를 일으키기로한건데 전쟁에서 실패하는바람에 남방당의 실력은 크게 감소되고말았던 것이다. 조선로동당내에서는 남방의 로동당은 해방전쟁에서 인민기의를 발동하여 인민군과 배합작전을 하지 못했으니 계획이 파탄된것이라면서 그 책임을 남방로동당의 당수였던 박헌영에게 들씌웠던 것이다. 1953년 3월, 사법부장이였던 리승엽(李承燁), 중국주재대사 전오직(全五稷), 제1계최고인민의원 김오성(金午星), 남조선해방유격제10지대장 맹종호(孟種鎬), 로동당련락부장 박승원(朴勝源), 부부장 배철(裵哲), 로동당사회부장 강문석(姜文錫), 내무성간부 백형복(白亨福) 등 10명을 사형하고 다른 두사람은 각기 15년, 12년의 유기도형에 떨구었던 것이다.   당시 로동당의 두 번째인물이였던 박헌영(朴憲永)마저도 불행을 면치못하고 1955년 12월 15일에 처결되였다. 상술한 사람들은 다가 “미제국주의고용간첩”이라는 근본 있지도않는 날조된 죄명으로 기소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이 많은 코치는 감히 다치지 못했다.    조선전쟁이 폭발한 후, 김일성의 륙군주력은 38선을 돌파하고 남쪽으로 나갓는데 그 인민군의 주력은 중국에서 건너간,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두 개의 조선족사와 중국인민해방군 각 야전군에서 복역중이였던 조선족관병과 쏘련에서 귀국한 쏘련려에 있었던 교민들이였던 것이다.     소련려에 있었던 대부분의 교민들은 땅크병이였다. 그러하였기에 김일성의 륙군주력과 그 장갑부대는 아주용맹했던것이다. 한즉 그가 거느리고 건너갓던 유격대의 능력같은건 근본 운운할 처지도못되였다. 한편 남북통일에 조급해난 김일성은 쏘련에다 보고하기를 미국은 출병하여 간섭하지 않을것이라고했던 것이다. 하여 쓰딸린은 김일성의 군사행동에 대해 묵허(黙許)를 한 것이다. 한데 결과는 어떠했는가? 김일성의 서투른 지휘로인히여 부산까지 밀고나갔던 인민군주력은 맥아더가 지휘한 미군이 인천에 등륙함으로 하여 퇴로가 막혀 기본상 전멸되다싶히 한 것이다. 근 11만에 달하는 인민군이 포로되고말았다. 그런 상황속에서그래도 부통수였던 최용건(崔庸健)이 형세를 파악하고 신속히 소부대를 이끌고 돌진하여 필사적으로 싸웟길래 김일성은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를 않았더라면 김일성도 아마 포로가 되어 미군의 포로영에 갇혀 거기서 빵이나 씹는 신세가 되었을지 모른다.    최용건(崔庸健)은 정직한 장령이였다. 그는 항일전쟁 때 동북에서 일제와 싸워 탁월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쏘련에 가 있었던 김일성이 거기서 조선으로 건너갈 때 최용건은 가지 않고 동북에서 그기간 자기가 한 사업을 회보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내부파렬로 기능을 잃음으로하여 유명무실하게되자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의해 해산되자 곧바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다. 김일성이 조선으로 먼저건너갓다. 그때 만약 최용건도 너갓다하더라도 친쏘파가 아니니 쏘련군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을건 물론 최용건자신도 쏘련에 빌붙고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야심이 없는 사람이였다. 그의 고귀한 인품과 숭고한 위망으로 하여, 더구나 목숨걸고 자기를 구해준 은공이 있음으로하여 김일성은 시종 그를 감히 어쩌지 못한것이다.      연안파와 친소파에 대한 대규모적인 숙청   조선전쟁이 결속되였지만 중국군대는 인차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조선군내부의 지도급인물을 볼것같으면 두 개의 파로 나뉘여있었는데 하나는 친쏘파고 다른하나는 중국파 즉 중공이 연안에다 설치한 간부훈련반을 나온 사람들이였던 것이다.       1956년2월에 쏘련의 지도자인 흐루쇼브가 쏘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쓰달린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그 기회를 빌어 조선은 지금 김일성에 대해서 개인숭배를 대단히하고있다고 질책했던 것이다. 4개월후에 김일성이 쏘련을 방문했는데 흐루쇼브는 김일성더러 개인숭배를 거두라고 충고했다. 당시 조쏘량당의 담화를 기록한 내부문건을 보면  “쏘공은 조선동지에게 조선로동당은 엄중한 착오를 범하고있다고 충고했다. 그것은 김일성이 개인숭배를 하는네 대해서였다. 김일성은 쏘공의 제의를 접수했는바 조치를 대여 결점을 고치겠다고 했다.”고 썻다.   쏘련의 그러한 태도에 고무를 받은 “연안파”는 암암리에 김일성을 비판할 계획을 짯던것이다. 사실 아무모로보나 김일성은 연안파의 박일우와 비하고 무정과 비하고 방호산과  비해봐도 조선의 최고수령으로되기에는 자격미달이였던 것이다. 1956년8월29일, 조선로동당에서는 쏘련과 동구라파에 갓다온이들의 귀국보고회를 가지게되였는데 친쏘파의 박창옥(朴昌玉)과 연안파의 최창익(崔昌益)등은 김일성을 향해서 공개적으로 도전을 했던 것이다. 1960년대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조선의 전부총리였던 오기완(吳基完)이 증실한것인데 연안패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경과를 보면 이러했다ㅡ 한 연안파성원이 중앙회의에서 발언하자 당장 김일성의 유격대파에서 왁작떠들면서 욕지걸이를 하는바람에 회의장은 그만 란장판이 되고만 것이다. 하여 연안파사람들은 더는 발언할 기회가 없은 것이다. 기실 김일성이 비밀리에 배치해놓은 이들이 연안파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잽싸게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걸려든 연안파성원들을 모두 출당시켰다. 연안파인 상업부장 윤금흠(尹金欽)과 직업동맹위원회 위원장 술휘(戌輝)는 당장 그날밤으로 중국으로 도망쳐왔고 최창익(崔昌益)과 박창옥(朴昌玉)은 체포되여 8월에 중앙전회때 이름이 당에서 긁히우고만것이다.   얼마안되여서 쏘련의 제1부총리인 미꼬양, 중국 국방부부장 팽덕회가 선후로  조선을 방문했는데 두사람 다 친쏘파와 연안파사람에 대한 처분을 철회할것을 제의했던것이다. 그리하여 9월의 중앙전회에서 최창익과 박창옥은 중앙위원의 신분을 회복하게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일성의 숙청이 끝난건아니였다. 1956년말에 이르러 조선로동당에서는 새로운 당증을 내준것이다. 그것이 실제는 청당운동(淸黨運動)이였던 것이다. 1957년도에 김일성은 이 기회에 연안파, 친쏘파와 남조선로동당계통의 잔여들을 일망타진을 한 것이다. 연안파의 끝장이 불명확했고 친쏘파는 쏘련국적을 그냥 보류하고있었길래 모두 쏘련으로 되건너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같이 들끓는 숙청운동이 끝나 1958년3월에 이르러 조선로동당은 제1차대표대회를 연건데 김일성은 그 이벤트의 시리즈를 “대승리”라고 형용했다. 그때로부터 김일성의 유격대파가 조선에서의 령도권을 독점하게되였던 것이다. 통계를 보면 1961년9월에 열리였던 4차대표회의에서 선출된 85명의 중앙위원중 원래 3차대대회때에 선거되였던 중앙위원이 71명이던것이 남은건 28명뿐이였다. 43명의 연안파와 친쏘파는 숙청되고만 것이다.      김일성은 그러고도 사상숙청을 했다. 쏘련의 비밀적인 내부문건에다 김일성의 숙청과정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가 한달내에 2천명넘어 숙청했는데 그중의 4백명넘는 사람을 조선의 정치체제를 반대했다는 죄를 씌워 공개총살을 한 것이다.   련결: 북조선혁명원로의 끝말        金日成(自然死)     崔庸健(自然死)     洪命熹(自然死)     白南云(自然死)     朴宪永(死刑)     李承烨(死刑)     张时雨(死刑)     朱宁河(死刑)     许成泽(死刑)     李炳南(死刑)     李 镛(死刑)     朴文圭(不详)     金 策(疑问死)     许 宪(事故死)     金元凤(临政系,死刑)     朴一禹(延安派,死刑)     金武亭(延安派,自然死)     金枓奉(延安派,死刑)     金 雄(延安派,死刑)     崔昌益(延安派,死刑)     朴勋一(延安派,死刑)     方虎山(延安派,生死)     张平山(延安派,死刑)     朴孝三(延安派,死刑)     金汉中(延安派,死刑)     李益成(延安派,死刑)     李芳南(延安派,不详)     许贞淑(延安派,自然死)     许嘉谊(苏联派,自死)      나에게 60년대초에  북조선에서 숙청자료를 공개한 자료를 한데묶은 책이 있었다. 박헌영, 리승엽 등 여럿은 사진과 함께 판결된 죄상들이 있었는데 "문혁"때 이건 왜 보관하느냐면서, 나를 반동이라면서 사진들을 뜯어 전람을 시키면서 나를 온 공사내 돌림투쟁을  했던 것이다. 그 자료들은 없어졌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것은 조금있다. 거기에다 인터넷에 난 자료들을 더해서 이 글을 쓴다.  쓰는 목적은 지난날 가혹했던 권력과 정치투쟁의 모습을 다소나마 보이기위해서다 (武亭将军) (“朝鲜甘地”曹晚植) (金日成与战友金策).    (左起:金雄大将、朴一禹、金日成,彭德怀、陈赓、甘泗淇)               金日成与朴宪永(中戴眼镜者)                 金日成与朴宪永(右二)           ) (左起:朴昌玉、李济深、金科奉、朱德、金日成、阿里斯托夫(苏联政府代表)、朴正爱、崔庸健。)                                                    (延安派崔昌益)               (金枓奉(左二)、朱德、金日成、滕代远)                       (朴金喆与周恩来)                       幸运的崔光上将(1995年晋升元帅)   (正中为南日大将,右二为“八月宗派”事件中留苏联政治避难的延安派李相朝)                  (金日成的弟弟金英柱) 叔侄争位:金正日成功当上继承人金日成亲弟金英柱遭清洗 (金正日成功接班金日成)                                     
57    에세이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던가? 댓글:  조회:5574  추천:3  2013-10-29
  에세이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던가?   나는 전에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면서부터 한가지 의문이 종시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였는가? 그것은 항일은 장개석의 국민당이 하지 않고 공산당이 했다는 주장 그것이였다. 과연그럴수가 있는가?..... 1962년 7월 민족출판사에서 제1판으로 출판한 양장본 제4권에 있는 첫문장 “항일전쟁승리후의 시국과 우리의 방침”이라는 글을 보면 “일본투항의 결정적인소는 쏘련의 참전이다..... 항일전쟁은 한 개 력사계단으로 말하면 이미지나갔다.”고 하면서 “우리 해방구의 인민과 군대는 8년래 외부원조가 조금도 없는 정황하에서 완전히 자기의 노력으로 광대한 국토를 해방하였으며 대부분의 침화 일본군과 거의 전부의 위군을 항격하였다.”고 했다. (1733페지) 정녕 그러하다면 하나의 커다란 의문부호를 던지게 된다. 장개석이 지휘한   국군(國軍)은 그지간에 무엇을 했단말인가? 아미산에 올라가있으면서 공산당토벌만을 꿈꾸면서 항전이 끝나면 항전승리의 과실을 제가 딸 궁리만을 했단말인가?    80년대 초중교과서에도 쓰기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후항일에서 80%이상의 일본군을 항격하였는바 항일전쟁에서 튼튼한 기둥이였노라고했다. 그러면서 이같이 기술한 것이다. “.......8년항전에서 중국국민은 일본군을 150만을 섬멸하고 118만의 위군을 섬멸함으로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멸망하려던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버린  것이다. ......” 공산군이 기둥이되여서? 국군의 항전은 언급하지 않은것이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세계의 반파시스전쟁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중국 전장은 세계반파시스의 동방전장으로서 일본륙군총병력의 3분의 2이상을 항격하고 견제했던 것이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쏘련, 미국 등 동맹국의 밀접한 배합으로하여 일본군국주의의 지배적야심을 철저히 분쇄했으니 그것은 세계반파시스전쟁승리에서 결코 마멸할 수 없는 공헌으로 되는 것이다. 중국항일전쟁승리는 또한  여러반파시스맹국의 강력한 지원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      여기서도 국군의 항일에 대해서는 일자반급도 언급하지 않았다. “......팔로군, 신사군과 항일무장력량은 점차 전국항일주력이 되어 170만이 넘는 일위군을 섬멸한 것이다. 8년항전을 거치면서 19개성이 해방구로 되었는바 그 면적은 100만 평방킬로미터, 인구는 1억이 넘으며 인민의 군대는 130넘어발전했고 민병도 260만에 이른것이다. .....” 교과서를 만든 학자가 불어도 체면없이 불어댔다.     8년항전에 일본군을 도대체 얼마나섬멸했는가? 도대체 누가 주력이고 기둥이였던가? 국군인가? 아니면 공산당군대인가? 량당은 제가끔 표현이 다르나. 1984년도에 商务印书馆에 의하여 출판된 일본의 조시로 핫토리의 제4권 1799페지에 밝혀놓은것을 보면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일본군이 전사한 정확한 수자는 1858811명이다. 일본에서 2001년에 출판한 력사교재에다는 “2차대전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약 186만이고 평민은 66만이다.”라고했다. 조시로 핫토리가 쓴것과 맞아떨어진다. 사망된 그 일본군인중 125만명은 미국군에 의하여 격사된 것이라한다. 그렇다면 공산군은 싸움을 얼마하고 일본침략군을 대체 얼마나 섬멸했는가?  똑똑한 수자가 없다. 에 보면 이러하다. 대회전(大會戰) 23차. 중요전역(重要戰役) 1117차.                               1115차는 국군(國軍).                               2차가 공군(共軍). 즉 “백퇀대전”과 “평형관대전”이다. 중요전투 40000여차였는데  그중 200여차가 공군. 8년항전에서 국군이 사망된 인수 321만 1419명. 장군사망 203명. 중장이상 34명. 공군에서는 좌권부참모장  1명. 무엇을 보여주는가? 8년항전에서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는가? 전쟁사를 연구해 보면 그어떤 전쟁에서든 적후항전이 결정적인 작용을 노는건 아니였다. 나는 좁쌀에 보총으로 비행기, 대포를 격패했다는 따위의 소리는 믿지 않는다. 맛서봤자 폭격에 고기덩이로나 되고말게 뻔한데..... 코빠는 애들이나 곧이듣겠는지. 공산군 유격대가 항일전쟁에서 주력이고 기둥이 되였다는건 천방야담으로밖에되지 않는다! 실속없는 거짓말은 듣는이를 해칠뿐이다. 국가는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력사교육을 제대로 옳바르게해야 희망이 있다. 보충글:  모택동의 비밀지령 1937년에 항전이 폭발했는데 8월에 모택동은 섬북락천(陝北洛川)회의에서 아래와 같은 비밀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랭정해야한다. 전선에 나가 항일영웅으로되려니말아야 한다.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일본군후방에서 유격전을 하면서 방법을 다해 팔로군을 확충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며 천방백계를 다해서 당의 무장력량을 저축하고 장대시켜야 한다. 정부측에서 전선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대여 밀어버려야 한다. 일본군이 국군을 많이 많이 살상한 후에야만이 우리는 비로소 모든 항일과실을 얻고 국민당의 정권을 탈취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응당 항일을 많이해야 애국이라하는데 그 사랑은 장개석나라사랑이다. 우리들 공산당사람의 조국은 전세계공산당사람공동의 조국 즉 쏘베트(쏘련)다. 우리들 공산당사람의 방침은 일본군대가 땅을 많이 차지하게함으로서 장(蔣), 일(日), 우리(我) 삼국지(三國志)를 형성케하는 것이다. 그같이 해야 우리한테는 유리한 것이다.”    “우리당의 무장력량을 발전장대시키고 전쟁후에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기위해서인것이다. 우리당이 반드시 엄격히 준수해야하는 총방침은 1푼항일,  2푼응부,  7푼자기발전이다”. 그어떤 사람, 그어떤 조직도 이 총방침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모택동이 1937년 9월에 산서(山西)에서 싸우고있었던 팔로군제11사독립단단장 양성무(楊成武)에게 지시한것을 봐도 “중일간의 전쟁은 본당이 발전하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결정한 정책은 백분의 70은 자기를 발전시키고 백분의 20은 타협하는 것이며 백분의 10은 대일작전인 것이다”라고 했다. .........   鐵血軍事> 鐵血歷史論壇> 中國歷史>  “紀念8.15- 谁是抗战中流砥柱?" 를 보라. 
56    에세이 그렇게 고쳐서야?... 댓글:  조회:4824  추천:2  2013-10-25
  그렇게 고쳐서야 안되지!   재작년 7월의 일이다. 어느날 내 한족친구 로류(老劉)가 나보고 "문사출판사"에 다니는 아들이 오래간만에 확건된 국가박물관이 문을 열렀다고 알려주는데 자기와같이 가보지 않겠느냐 했다. 국가박물관은 인민대회당과 마주하여 천안문광장동쪽에 있다.   그것이 해방후에 나진게 아니다. 1782년에 이미생겼으니 력사가 있는것이다. 동남아의 여러나라치고는 규모가 제일커서 참관객의 발길이 늘 끊지를 않는다. 나는 1992년도여름 소수민족작가필회때 가보고는 다시가지 않았다. 그사이 확건을 했다니 대체 어떤모양인가 보고도싶었다. 하여 이틑날 나는 로류(老劉)와 같이 천안문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던 것이다.   국가에서 그지간에 국가박물관을 과연 잘 확건했다. 그날 우리와 함께 참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속에는 외국인도 끼여 있었다. 한데 나는 그날 그 국가박물관을 가보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박물관 중앙대청에 걸어놓은 커다란 유화 두폭을 보고서였다.  그것은이였다. 그것은 1952년도에 37살의 나이였던 젊은화가 동희문(董希文)이 그린 유화의 복제품이였는데 피끗보아 같은것 같지만 자세히 비해보니 달랐다.     모택동의 뒤 첫줄을 보면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주덕, 류소기, 송경령, 리제심, 장란, 고강이다.   그런데 고쳐그린 이 유화에는 고강이 빠지고 없다. 치렬한 정치투쟁냄새가 풍긴다. 문화혁명기간에는 류소기마저 지워버렸다고한다. 그랬다가 다시그려넣고. 왜 이러는가?   은 1949년10월1일의 그날을 고정시켯을뿐만아니라 기록해놓았으니 중국사람은 그 력사를 회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953년9월27일, 는 첫면에다 유화 을 냇거니와 그 그림은 또 많이 인쇠되여 이미 년화로 팔리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중소학교과서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됐는가?   거폭의 그 이 중국혁명박물관에 진렬해서 겨우 3년을 보내고 “고요사건(고강,요수석)”이 생겼던 것이다. 국가부주석이자 정치국위원이였던 고강은 1954년에 직무를 철소당하자 8월에 자살하고말았던 것이다. 그는  죽은 후인 1955년 3월에 이르어 당적마저 긁히우고말았다. 그렇다하여 때  몸이 있고 얼굴이 있은것마저 없애버리면 대체 뭐로되는가?    그 유화를 보고 국민은 물론 외국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것인가? 정치는 정치고 력사는 력사인 것이다.  자라는 후대들에게 거짓말을 해서야 어디되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같이한건 유치하거니와 대단히 비렬한 짓임이 분명하다. 박물관측도 아마 그 두폭을 비해보면서 누구나 깨닫고 각성하라 내놓은것 같았다.  
55    수필 감미로운 추억 댓글:  조회:5356  추천:1  2013-10-24
  수필 감미로운 추억   올년초의 일이다. 흑룡강성 밀산시의 전임시장 맹고군((孟高君)씨가 손수 싸인까지 해서 두툼한 책 두권을 내한테 보내왔다. 와 였다. 전혀 면목도 모르는 분이 그같이 보낸게 뜻밖이거니와 고맙기가 그지없다. 그가 보낸 책 두권중 첫권 는 이제 아무때건 체계적으로 정비된 우리 중국조선족의 력사총서가 다시금만들어질 때면 빼놓지 말고 꼭 올려야 할 귀중한 사료들이고 두 번째권인 는 밀산시와 직접적으로 인연을 가진이들이 쓴 여러편의 글들을 한데묶은 문집이였다.  그 책의 수필편에서 맨우에 수록된 수필 “은사님(외3편)”과 시편 첫머리의  “목릉강반은 내고향(외3수)”을 쓴 리상각은 나의 스승인것이다.   나는 벌리조선중학(초중)을 나왔는데 내가 중학에 붙던 해인 1954년도여름에 리상각선생님도 18세살나이에 상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사업배치를 받아 벌리중학교로 왔던것이다. 그해 그렇게 온 젊은선생이 여럿이다. 내가 1학년때 4반의 반주임이였던 안영곤과 다른 과목을 가르쳣던 최명숙선생이 그와 동창이고 내가 졸업때 반주임을 맡았던 황동철선생님과 물리교원 김천유선생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벌리학교로 분배되여 오신건데 그들다가 그때는 리상각선생처럼 생기있는 팔팔한 젊은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초중에 입학해서 졸업할때까지 옹근 3년간을 나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면서 친부모같이 지극히 보살펴준 홍기종교장선생님도 상지사범학교에서 교도주임을 지내다가 리상각선생과 같은시기에 벌리학교에 오셨던 것이다. 그는 내가 렬사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어느날 교장실로 불러다놓고 국가는 혁명렬사의 후대들은 각별히 관심하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나라의 동량지재가 되라고 해놓고는 나더러 할빈에 있는 조일만학원과 평양에 있는 만경대학원은 전문 렬사자식들만 받아서 공부시키는 좋은 곳이니 생각해보고 가고싶으면 가라면서 추천은 교장인 자기가 한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 생각을 더깊이 하지 않고 아무리좋아도 나는 여기를 떠나 다른데는 가지 않겠노라고했던 것이다. 원인은 희생된 아버지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벌리를 보면 저 남쪽 두만강가의 도문으로부터 북쪽의 송화강남안의 가목사까지 일직선이 되게 곧게 뻗은 도가선(圖佳線)에 놓여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현정부소재지다. 역전동쪽에 위치한 단층집 조선중학교는 교실이 열몇칸에 이르었는데 널다란 운동장을 가운데다 놓고 ㄱ자모양으로 길다랗게 새로지은 흰벽돌집였다. 그리고 학교동쪽으로 1리도 못가서 남북으로 뻗은 널다란 연자하가 흐르고있는데 다리를 건너 더들어가면 인가가 모여 붐비고 복대기치는 번잡스러운 시가지였다. 연자하를 건너는 큰다리가까이 이쪽 큰길북켠에 바로 사문동토비를 숙청하다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한, 동철부대의 17명렬사의 시체가 묻힌 렬사릉원이 있었던 것이다. (“문혁”직후 서산으로 옮겨짐) 17렬사기념탑바로 뒤쪽 맨앞줄중간에 참모장 김해정묘와 나란히해서 나의 부친의 묘가있은 것이다. 합강성정부에서 수립한 그 비석에 참모장 김해정이하 16명렬사라 씌였는데 그 16명중에서 1명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된 전사가 아니라 마침 그때 병으로 사망한 녀병사였던 것이다. 영평강전투에서 전사한 그들은 동철부대의 두 개 정찰반이였는데 제1반의 반장이 바로 나의 부친이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데든 가지 않고 거기서 중학을 졸업하리라 맘먹었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나의 이름을 松竹이라 지은분이자 항일간부였던, 아버지와 함께 열평강전투에서 희생된 참모장 김해정의 딸 대분이도 벌리에 와서 학교를 같이다니게되였는데 청명절이 돌아오면 우리는 커다란 꽃다발을 받쳐들고 전교생대렬앞에서 렬사묘참배를 갓던 것이다.   나는 벌리중학에서 3년간 공부면서 조학금특급을 받았거니와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전체선생님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그야말로 남달리 행복스레  자랏다. 부친의 생전소속부대에서 자란 3년과 초중을 3년간다닌 그때가 내 평생에 제일뜻깊고 행복한 시절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그때는 내가 자기 종생의 리상이였던 문학의 싹을 키우고 그것을 보듬어 자래웟으니 비유하면 글농군의 시절이기도했던 것이다. 한반에서 공부하는 학생 박억만역시 나처럼 문학을 즐기였다. 그리고 내가 소학때의 친구였던 조용환이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는 가정형편이 여의치않아 중학을 다니지 못하고 훗날 조선으로 나가버렸는데 그가 조선으로 가기전, 내가 초중을 다니는 기간 함께 문학쿠르쇼크를 조직하고는 마치도 지하혁명자가 활동하듯이 “붉은띄”라이름지은 편지로 서로련계하면서 문학공부에 열중했던 것이다.   솔직히말해 나는 그 기간에 저지른 한가지ㅡ 남이 알면 불민스러운 일이라 할수도있는 한가지 일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오르면서 추억을 뚜지기에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 그건 내가 리상각선생한테서 책을 빌려다보고서는 그것을 돌려주지 않은 일이였다. 선생님은 아마 그일을 언녕 가맣게 잊었을수도있다. 내가 그한테서 빌린 책은 였다. 초중에 붙은지 얼마안되여 나는 교도처일을 보는 리상각선생님이 문학을 하거니와 학교도서실도 관리한다는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문학서적이라고는 한권도 없었다. 그러니까 학교에 도서실이 있는게 내같은 빈털터리 애숭이문학도에게는 그야말로 행운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날 책빌러 도서실에 갓다. 마침 리상각선생이 거기서 책을 보고있었다. 대체 무슨책이길래 학생이 들어온것도 모르고 저리도 열심일가하면서 내가 눈주어 여겨보니 거울이 누름하고 얍다란 책이였는데 였다. “선생님 책빌러왔습니다.” 나는 그가 책을 다볼때까지 기다릴수는 없어서 온리유를 말했다. 선생님은 그제야 머리를 치키고 나를 보면서 동무는 무슨책을 보자하는가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서슴치않고 시들을 한데묶어놓은 시집을 빌리련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나보고 “동무도 시를 즐기오?”하고 묻는 것이였다. 나는 쑥스러워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나를 다시한번 눈주어 훝어보고는 자기손에 쥐여있는 그 책을 주면서 이건 마야꼽쓰끼의 시들을 묶은건데 시들이 박력이 강해서 독자에게 격동을 충분히 주니 좋다면서 보라고했던 것이다. 나는 얼른받아쥐고 기뻐하면서 거기를 나왔다. “다보고는 가져와야해.” 그가 당부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에 미처응답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다보고서는 의례돌려줘야지했다.  그런데 숙사에 돌아와 다시보니 책표지에도 속지에도 그것이 누구해라는 것을 밝혀놓지 않은 책이였다. 도서실도장을 찍지 않았으니 학교것이 아닐거고  리상각이라는 이름도 도장도 찍지 않았으니 그의것도 아니라생각했다. 마치도 임자없는 사과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 같서 나는 짝짜꿍을 쳣던 것이다. “찾으면 돌려주고 안찾으면 내거다. 책도적은 도적이 아니라더라!” 이렇게 되여 책의 임자는 바뀌우고 만 것이다.    그 책을 편집은 延邊文聯籌委會가 하고 출판은 延邊人民出版社에서 한것인데 속지첫면에 라고 쓴 쓰딸린의 제사가 있고 후면에는 >라고 쓴 편자의 글이 있는데 그 책에는 마야꼽쓰끼의 “당은”, “소베트 공민증”을 비롯하여 7수의 장시가 수록된 것이다.    그 는 초중때는 물론 졸업해서 농촌에 돌아와서도 역시 내가 조직한 문학쿠르쇼크성원 셋이 다 즐겨보는 애독물(愛讀物)이였다. 나는 촌에서 소학훈장을 지내면서 월급을 받아서는 거의 책사는데다 밀어넣으면서 독서를 걸탐스레했다. 그러느라니 도서가 근 1200여권에 이른건데 “문화혁명”이 오니 생전 낯도 코도도 모르는 중학교홍위병들이 들이닥쳐 나의 목에다 “반당분자”라 쓴 패쪽을 걸어 투쟁하고는 거침없이 우리집을 들이쳐 닥치는대로 들부시고 욕심나는 물건은 도둑질해갓던 것이다. 그날은 비가 약간내렸는데 그래도 사람이라 량심쪼박이 있었던지 그들은 까래를 펴놓고는 이불과 옷견지들을 창밖에 내던졌거니와 책들을 말끔히 내버리고는 책장을 뚜드려 마사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작란을 하고서도 그 애들은 재미가 모자랐던지 아니면 그놈의 대담무쌍한 본때를 보이느라그랬는지 천정을 말끔히 뜨어버리고 구들장을 뒤번지고 부뚜막을 마스고 물단지를 깨버리고 감자굴까지 헤쳐놓고는 나중에는 뒷출입문에다 판자로 x 표를 쳐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못까지 쳐놓고 가버렷던 것이다. 그런판에 그래도 조선에서 출판된 10권에 6권, 8권, 4권만은 재난을 용케면했다. 그전에 1964년도 “4청”때 나보고 “시를 써 발표하고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료를 받아 학교에 들여놓지 않고 혼자쓰는건 자본주의사상행위다.”하면서 우습게 놀았다가 내한테서 “그렇게 공산을 부르짓겠거든 어디 네녀편네를 내놓아 공산으로 만들어보라”는 힐난을 들어 도루망신을 당했던자가 공사의 “교원쪼판퇀”을 조직하더니 다른 한 심보나쁜자와 같이 내가 써놓은 첫장편의 원고와 일기책들을 보고는 돌려주리라면서 걷어갔던 것이다. 꼴을 보니 나를 잡자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들이닥칠 재난에 대비해 몇년간수집해둔 각가지 소설자료들은 길건너 이붓자식과 같이있는 어머니보고 건사해달라 맡기고는 10권은 바로 뒷출입문턱밑을 파고 거기다 파묻어 감추었다. 그 외의 다른책들은 어쩔 수 없어 그대로나둿던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책들이 거의 다 화형당하고 도적질해가서 잃어졌다. 그런판에 들은 발각되지 않은거고 6권은 너무두터우니 어쩔 수 없어서 내쳐버린것 같고 이나 들은 까딱잘못건드렸다나는 도루잘못될게 빤한지라 그들이 어쩌지 못하고 남긴것 같았다. 그런데 20권은 어느 개명치않은 빈하중농사원이 제집에 갖고가서 색솔대로 오래동안 뒤지로 잘 사용했다. 나는 그들의 너그럽고도 불필요한 감시하에 사상개조를 하느라 몇해간 마을의 뒷간을 돌아가며 치다보니 그일을 알게되였던 거다. 진짜무산계급혁명자가 알면 볼기짝을 맞을 짓이 아니겠는가! 나의 책들이 그같이 액운을 면하기어려었던 그 분주하고도 험악한 란시속에서도 리상각선생이 빌려준 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건 내가 잘 건사해서가 아니였다. 문학쿠르쇼크의 한 성원인 김인세가 “쏘베트공민증”을 외우느라 내한테서 빌려가고는 돌려주지 않고있다가 “문혁”이 다 끝나서야 안심하고 내놓았던 것이다. 그 수호자에게 응당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다.   어느핸가 리상각선생이 탕원에 회의를 같다가 지나는 길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허광일총편과 함께 우리집에 들리였다. 그때 나는 내가 초중때 빌려온 를 제때에 돌려드리지 못하게 된 연유를 말하고 아깝지만 고스란히 내놓려했다. 그런데 리상각선생이나 허총편이나 두분다가 나를 만나자 먼저 나보고 연변에 가지를 말거라 거기서는 가짜 김송죽이 나타나 제가 장편소설 을 쓴 작가라면서 후라이를 치면서 나돌아 민분을 일으키고있다는 얘기를 해서 듣고 웃다나니 내가 먹엇던 생각은 그만 가맣게 잊고말았던 것이다. 그날저녁 리상각선생님은 록음기를 틀어놓으라 해서는 춤곡이 나오니 우리집의 노랗고 반들서리는 기다란 캉들우에서 오가며 딴스를 쳤다. 참으로 즐거원던 밤이다. 우리집 사람은 요즘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 선생님은 참으로 유쾌한 분이야!”  하고 뇌인다. 내가 김학철옹을 두 번째만나러갓을적이다. 선생님이 나보고 그래 아침식사는 어디서 치럿는가고 묻길래 내가 리상각선생댁에서 먹고 오는 길이라했더니 선생님은 “그랫어? 사람이야 맑고 바르지!”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세영이 거 과연 참한 여자야!”하고 리상각선생의 부인을 칭찬했던것이다. 김학철옹은 나와 자기가 알건대는 그 험악한 세월(문화혁명)에도 제민족의 복장차림으로 거리에 의젓이 나다닌 녀성은 온 연길시내바닥에 세영이밖에 없었을거라면서 그는 우리 조선민족녀성들은 다가 따라배워야 할 좋은 본보기라고 말했다.  리상각선생은 그러한 녀인이 타계하여 곁에 없은지 오래니 어찌 정막하지 않으랴. 나는 원지에서 전화로나 어쩌다 안부를 알뿐이다. 그저 동창더러 자주가보라한다. 내가 연길에 갈 기회가 생기겠는지?....이제만난다해도 책을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것을 기념으로 그냥갖고있으련다. 아마 그러는게 더 좋을것 같다.                           
54    에세이 어두운 편견의 장벽 댓글:  조회:3849  추천:0  2013-10-23
  에세이 어두운 편견의 장벽       세상을 살아가노라니 별의별 눈꼴사나운 인간을 다 보게된다. 내가 교단을 떠나 퇴직한 이듬해의 여름, 송화강이북에 있는 신화(新華)에 갔다가 거기서 당한 일이다. 그곳 물비료공장의 권주임과 함께 거리에 나가 한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있는데 성이 장가인 30대반의 갱핏하게 생긴 웬 한족젊은이가 먹던 술과 두부볶음채접시를 들고 우리 상으로 건너와갖고는 나를 향해 아무리봐야 본지의 사람같지 않은데 어디서 왔느냐며 말을 거는것이였다.   권주임이 그에게 화천(華川)의 성화향이라는데서 왔는데 작가라 알려주었다. 장가는 아 그런가 헌데 성화향이란건 어떤 곳이냐고 묻기에 나는 성화향은 가목사에서 40여리가량 떨어진 시교에 있는 농촌이라 알려줫다. 그러니 장가는 집이 촌에 있다구? 하면서 고개를 찌붓하더니만 나를 다시금 여겨보면서 그럼 너에게 작가증이 있느냐고 캐묻는것이였다. 나는 “작가증”이라는건 없고 “회원증”이있다고했다. 그랬더니 그가 아 그런가, 그렇다면 그걸 좀 보여줄 수 없겠느냐, 여기는 전에 정령이 와서 로개를 하다가 돌아가고는 다른 작가가 와있다는 소리는 제가 못들었노라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는 나이 설흔을 넘어먹도록 여직 “작가증”이 어떻게 생긴건지도 모르는데 그걸 좀 보여줄 수 없겠는가고 했다.   나는 비싼물건도아닌진라 별다른 고려없이 보겠으면보라고 몸에 지니고있던 성작가협회의 회원증을 꺼내놓았다. 그랬더니 장가는 쥐여 여겨보고서는 돌려주지 않고 생각밖에 그것을 제 호주머니에 넣어버리는것이였다. 나는 무례하기 짝이없는 그를 여겨보면서 아니 너가 왜 그러냐, 남의걸 해서는 뭘하는가 돌려달라했다. 그랬더니 장가는 지금은 돌려줄수없다면서 찾겠거든 자기와 함께 가자는것이였다. 내가 어디로 가자느냐 물으니 장가는 자기를 따라오면 이제 알게될거라면서 밖으로 먼저나가는 것이였다. 한쪽에서는 돌려달라느니 한쪽에서는 안주겠다느니.... 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자와 승갱이질하기싶지 않거니와 창피스러워 따라갔다. 이러는 장면을 지켜보고있었던 음식점주인은 그제야 쯔쯔 혀를 차면서 권주임한테 알려줫던 것이다.   “애먹게됐구만, 저자식은 감옥밥먹고 방금나온 망나니라니까.”   밤이 다 된지라 행길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드믈었다. 나는 그녀석을 따라 휑뎅그렁한 대통로를 걸었다. 좀 있으려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뒤쫓아왔다. 권주임이 나의 안전이 몹시 우려되여 급히 달려가 젊은공인 10여명을 제꺽동원시켰던 것이다.   성이 장가라는 그 녀석은 아느새 가더니 나를 길남의 불밝은 뜰악으로 데리고 들어가는것이였다. 벽에 붙은 패쪽을 보니 “신화진파출소”였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 그런데 이자식이 나를 여기로는 왜 끌고왔을고 하고 의문스러워했다. 우리가 가자 나이 지긋한 사람이 나타났다. 파출소 소장이였다. 그는 먼저 나보고 무슨일에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저치가 나의 작가협회 회원증을 보여달라기에 보여줬더니 보고서는 제호주머니에다 집어넣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온거라 했다. 그랫더니 파출소소장은 장가쪽을 향해 네가 정말 이분의것을 가졌는가 묻고는 그걸 내놓으라했다.   장가는 오섭서리 내놓았다. 파출소소장은 펼쳐보고나서 그를 향해  헌데 네가 남의걸 봤으면 돌려줄게지 왜서 제호주머니에다는 넣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니 장가가 하는 말인즉은 지금은 “문혁”때가 아니지 않는가, 녀작가 정령도 여기서 로개를 하다가 “문혁”이 끝나니 제가있었던 도시로 되돌아갔는데 작가가 옳다면 도시에 있지 않고 왜서 이런데는 와서 고생스레 공장일을 하겠는가 하면서 자기는 아무리봐야 이 사람은 작가같지 않다, 아무리봐야 허풍치고 다니는 사기꾼같아서 조사해보고 붙잡으라고 데려왔다는 것이였다.   보아하니 제딴에는 립공속죄를 한다는게 그꼴이였다. 《야 이 더러운자식아! 네가 대체 뭔데 그분의 신분증에다 함부로 손을 대는거냐?》 소장은 말을 더않고 노기서린 눈길로 그를 쏘아보다가 귓뺨을 한대갈겼다. 그러고나서 그는 나를향해 사과했던 것이다. 《과연 미안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저자식을 제대로 관제못해서 공연히 불쾌하게 욕을 보는군요. 과연 미안하게 됐습니다. 사과합니다!》   돌아오면서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여다볼라니 파출소민경여럿이 그를 방바닥에 엎놓고 언말똥굴리듯 걷어차고있었다. 그자가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멀리오도록 들려왔다...... 그자가 매맞은게 속시원했지만 나는 일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왜 쓸데없이 여기와서 이같이 불쾌한 변은 당하게되는가?.... 그후로부터 나는 다시는 그따위 “신분증”은 갖고다니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앞에서 “나는 작가요” 하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봤자 리익되는 일이란 하나도없었다.   북경에 이사와서도 마찬가지다. 여러해를 지나도록 남들은 내가 그저 중학교선생질을 하다가 퇴직한줄로만알고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내집에 놀러왔던 이들이 책장몇개에 책이 꽉 차있는것을 보고, 그속에 내가 쓴 책도 꽂혀있는 것을 보고서는 드디여 내가 글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우리 로인회의 70여명 회원들은 지난해겨울 내가 회장의 부탁에 의해 로인회회가의 가사를 쓰고 최의광선생이 곡을 지어 그것을 부르게되면서야 내가 작가라는 것을 알게되였던 것이다. 연길법원계통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하고  북경에 온, 악기를 잘다루는  구형서선생이 그 노래를 배워주면서 조글로에 오른 나의 글과 프로필을 보고는 공개를 해서 다가 내가 소설가인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문혁"때 부친의 “렬사증”과 함께 나의 “초중졸업증”마저 개같은 혁명자손에 빼앗겨 찟기우고말았다. 렬사증은 훗날 현민정에서 다시냈어도 졸업증은 다시내지도 못하는 형편이니 어디가서 내가 그만큼한 학력이라도 가졌다고 떳떳이 내놓고 말할수도 없는 신세다, 물론 쓸데는 없지만. 나는 내가 아는대로 글을 썻더니 "학자도 아닌 주제에 아는척한다"는 비웃음의 소리를 들은지 벌써다. 듣자니 지금은 돈을 써 원핑(文凭)을 밭는 일도있다는데 나는 엎디여 기는 신세가 됀대도 그러고는싶지 않았다.   국가와 사회가 내 노력을 승인하고 알아주고있으니 그보다 더 고마운일이 없는가한다. 국가는 내가 자습인재라 하여 중히 봐주고있다. 아마도 이 일에 유관되는 일 한가지를  말해야겠다. 륙조의 고도 남경에 있는 "中山文學院"(영어이름:Zhongshan School of Arts)은 1999년초에 중국민주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의 손녀 손수방박사(孙穗芳博士)가 중화의 문화를 부흥시키고 사회문명을 촉진하며 문예창작을 번영시키자는 목적에서 성립한 것이다. 그 문학원은 해마다 기자와 문학인을 배양해내고있다. 학원에서는 내가 밑바탕이 초중졸업생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를 객원교수로 초빙했던 것이다. 놀랍고 반가운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한번 랭정히 나자신을 해부해보았던 것이다. 좌담회같은데는 얼마든 참가하고 조직도 할 수 있지만 나더러 교단에 올라 강의를 하라면 안된다. 우선 한어구술력이 모자라니 제로인 것이다. 하여 나는 학원측에서 보낸 "客座敎授登記表"를 받아놓기는 했어도 여지껏 답변을 하지 앟고있는거다. 주제넘는 짓은 하지 못하겠다는 나다.   한데 수준이 나보다 별로높지도 않은 주제에 나를 제멋대로 경시하고 놀리는 것을 보면 좋지 않다. 썩 오래전에 알게된 한가지  일이다. 연변작가협회에서는 한국에 나가보지 못한 회원들을 한패한패씩 조직해서 견학을 보낸적이있는데 북방의 시인이자 연변작가협회의 리사였던 리삼월선생이 회의를 한다고 부르니 갓다는가, 그 회의에서 한국견학을 보낼 사람을 선정하길래 리삼월선생이 나 이 김송죽이를 보내는게 어떠냐고 제의를 했더니 당시 그를 주관했던 우아무개가 “화성이도 못가는데 뭐” 하더라는가. 그 소리를 리삼월선생이 돌아와 했다. 이전의 령도면 말을 그정도로는 하지 않았을 건데?..... 인맥이 없이는 일이 안된다는것을 알게 된 나는 그때부터 회비를 내지 않았거니와 아예 연변작가협회를 자퇴하고만 것이다.   中國作家協會創聯部에서 書記處의 결정이라면서 원회원증을 거두고 국제류형양식의 새 회원증으로 바꾸니 원회원증을 아무날까지 보내라는 것이였다. 나는 보낼 수 없었다. 회원이 아니여서 회원증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여러날지나 또 편지가 왔었다. 내가 작가협회에 가입했으면 필경 소개인이 있을텐데 나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내는 창작통신을 받아 보면서도 시종 회원수속은 밟지 않은거다. 중요치않다. 작가는 글을 쓰면 된다는 생각이였다.     내가 국가로부터 자습인재칭호를 받기에 이르기까지는 외려 여러 한족지성인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더 많았다. 나의 첫장편이 출판되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목사시방송국”의 오련상(吳蓮湘), “가목사신문사”기자 호회군(湖會軍)은 여러번이나 와서 채방하고는 나를 방송과 신문에 맨먼저소개했거니와 옹군한책의 편폭이 되는 장편방문기를 써 성작가협회의 “作家創作通信”에다 내기도 했다. 그리고 “三江晩報”기자 장지평(張志平)과 왕소선(王小蝉)은 지어 “乡野高人金松竹”라는 과분한 표제까지 달아 신문에 내여 나를 소개하기까지 한 것이다. 시작가협회와 문련에서는 "선진작가"칭호를 주면서 내앞가슴에 커다란 붉은꽃을 달아주었거니와 그것을 텔레비에 전집보도로 내기까지했던 것이다. 요란한 찬사에 얼굴이 뜨거울정도지만 아무튼 지극히 감사한 일이였다. 나는 그일로하여 해마다 시작가협회아니면 시문련에서 여는 회의아니면 성작가협회, 성문련에서 여는 좌담회거나 대표대회에 많이 참가하군했던 것이다. 지어는 현총공희의 추천과 성총공회의 심사와 추천을 거쳐 국가로부터 "우수자습인재"칭호를 받기에까지 이른것이다. 나는 내 노력이  헛되이되지 않았음에 자호감을 갖는다. 한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글을 많이 써도 빈축을 받아야하는가?   요즘 조글로에 보면 누군가는 네가 쓴 책을 누가 보기나 하느냐면서 나더러  호들갑을 피우지말라 훈계를 해가며 주제넘게 이래라저래라니 개가 달을 보고 짖는것 같아 과연꼴불견이다. 사촌이 기와집을 지어도 배아파한다고 과연 속담그른데없나보다. 고리끼도 한때 “대학자님”들로부터 그러루한 비꼬움을 받은적이 있는 것이다. 인재명 호재피(人在名 虎在皮)라 그것을 귀감으로 삼앗다가 숱한 고애를 겪고 줄똥을 쌋지만 맘먹바를 이루고야말았으니 나는 유감이 없다. 아직 써야할 글이 많으니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그러니 읽어보고 관점이 다르면 어디 반론을 써 제 이름을 밝히면서 정정당당히 나오기를 바란다. 그어지를 않고 그냥 익명이나 바꿔가면서 나를 해치려들면 나는 그런 인간은 비렬한 졸부 암해군으로 치부할테다. 진정 사나이라면 정정당당하게 나오라. 나는 굴복을 모른다!  
53    에세이 일본의 후안무치한 짓거리 댓글:  조회:3984  추천:1  2013-10-20
  에세이  일본의 후안무치한 짓거리   일본은 1932년에 군심을 온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세상이 다 알고있는 “위안부”라는것을 만들어 “복무”를 제공한 것이다. 중국과 아세아의 기타 다른 여러나라들을 침략했던 일본은 1938年에 이르러서는 3개군에다 “위안부복무”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러자고 보니 위안부의 수자가 태부족이였던 것이다. 하여 일본은 얼리고 채가는 등의 방법으로 사처에서 위안부를 모집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통채로 일본에 삼키여 식민지로 되버렸길에 사냥물대상은 무고한 조선녀성들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2차대전기간에 대략 8~20만이 끌려가 일본파시스의 성노리개가 되어 지옥살이나답지 않은 고통을 겪은것이다. 이는 엄연한 력사사실이다. 하건만 일본에서는 지금 아베를 대표하는 우익세들이 “전쟁때 매춘부들은 일본병사들로부터 고액의 돈을 받으면서 ‘복무’를 한것이다. 한국은 진상을 무시한다”고 했다. 진상을 무시하는게 과연 누군가?  일본인가 아니면 한국인가?     한국녀성가정부부장 조윤선은 근일 련합국 제3기위원회의때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제출했는데 그는 위안부는 인권을 엄중히 위반했다고 강조하면서 상관국가가 아직도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이같은 태도에 일본의 우익은 외려 불만스러워하고있다. 의 에스 zakzak인터넷의 10월 17일자 보도를 보면 한국대표가 련합국에서 한 발언은 “말도안되여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실로 똥뀐놈이 제사성내는 격이니 후안무치하기 짝이없는 일본이다! 조윤선은 일본에서 반인도적인 행위가 반복적으로 생기는데는 자기가 범한 착오를 허심히 반성할줄을 모르고 철저히 사죄할줄을 모르기때문이라면서 그 실례가 바로 위안부문제에 대한 처리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Zakzak인터넷은 되려 한국이 반성할줄을 모르는 나라라면서 일본을 비평할 자격조차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놓기를 지난 월남전쟁기간 한국군대가 월남녀성과 자서 아이를 낳고서는 제나라로 가버렸으리 어떻게 봐야하는가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대통령은 일본은 고의적으로 “한국군대의 명예를 모욕한다”고 통박했다.   내가 보건대도 일본은 과연 허심하지 못한 나라다. 어언간에 48년철이 흘러갔다. 나는 청년시절 마을에서 소학훈장노릇을 할 적에 일본군에 “위안부”라는것이 있었다는 알고는 그의 진상을 알아보려는데서 두 녀인을 찾아가 각기 만나본적이 있다. 그 두녀인이 위만때 끌려나가 위안부노릇을 했다는 것은 내가 남한테 들어서 알게되였던 것이다. 들어보니 그들이 격은 고통이 과연 일구난설ㅡ 과연 말이 아니였다. 그 둘이 꼭같이 하는 말인즉은 “일본군대가 어디 사람인가 굶은 짐승이지”였다. 내가 그래 보수는 어느정도 받았느냐 물었더니 그들은 둘다 보수라니 웬소린가 하면서 먹는것만은 괜찮았다고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둘다 자기가 치룬 경난을 세상이 알면 망신이라면서 제발 글을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것이다. 하여 나는 그러마고 응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두 녀인의 모색과 이름이 지금까지도 내기억에 또렷하다. 하지만 말할수는 없다, 내가 그들앞에서 죽을때까지 그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노라 대답했으니.              당시 위안부의 처경의  한장면    력사는 국가를 바로세우고 국민의 정신을 진작함에 있어서 지극히 필요한 거울이 되고 지침이 되는 것이다. 하기에 력사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그 어느나라나 다 마찬가지다. 후대를 옳바르게 이끌려면 더말없이 자국의 력사부터 제대로배워줘야 한다. 몇해전에 한일공통력사교재제작팀이 손잡고 를 만들었는데 그건 아주잘된일이다.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일본과 한국의 량심있는 교육자들은 우선 한일공통력사의 견고한 초석이 되기를 목적해 손잡고 일본의 현대사도 그것처럼 사실그대로 다시써냈으면 하는 바램이다.  
52    한 녀시인의 죽음으로부터 댓글:  조회:4429  추천:0  2013-10-19
  한 녀시인의 죽음으로부터   로시야의 녀시인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는 1892년에 태여나 1941년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50살도 채되지 않았다. 그러한 그를 기념해서 소연상(邵燕祥)은 그의 시들을 한데묵어 >이라 이름을 달아 광서사범대학출판사에 넘겨 세상을 보게한 것이다. 그런것을 가 또 이라는 주제명을 달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시번역자 소항(蘇杭)은 머리말을 써 메리마리 트세타예와가 외국에서 17년간이나 떠돌이를 하다가 1939년 6월 18일에 제 조국이라 그리워서 쏘련으로 되돌아오긴했지만 환경이 여의치않아 자살에 이른것이라면서 그 경위를 밝혀놓은것이다.   가족이 모두 한데모인지 겨우 두달되여 액운이 트세타예와의 머리에 떨어졌다. 8월 27일이였다. 그녀보다 두달먼저 고향에 돌아왔던 딸 아리아가 돌연스레 체포되였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보다 먼저온지 한달반도 안되였는데 병을 앓고있었던 그애의 남편마저도 잇따라체포되였다. 생각밖에 덮쳐드는 그같은 타격에 트세타예와는 고통스로운나머지 그만 절망하여 생의 의욕마저 잃고만 것이다. .....   트세타예와는 딸과 사위를 구해내려고 사처로 뛰여다녔고 한편으로는 또 당장굶어죽게 된 상황에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시가번역을 하여 겨우겨우 명을 잇구었던 것이다. 허나 그보다 더한건 지지리 참기어려운 고독이였다. 시를 쓰기는했지만 발표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번역에 달라붙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감이 떠오르면 그는 시를 썻다. 그래서 몇수는 세상을 본것이다. 그러한 상황이였다는건 소항(蘇杭)이 그의 시를 번역하다보니 발한견이 것이다. ..... 트세타예와는 조국으로 돌아온지 2년도안되는 사이 암담한 생활속에서 심리상 커다란 압력을 받았다. 그럼에도 밚은 번역을 해놓았다. 소항(蘇杭)은 트세타예와가 자신이 번역한 시작자의 이름을 라렬해놓은것을 보고 감탄했다고 했다. “정신상에서나 체력상에서나 그렇게 무거운 압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낸것을 보면 과연놀랍다!” 이러면서 그는 이어서 녀시인의 조우(遭遇)에 대해 자신의 불평을 토로했다. 트세타예와가 제일 견디기 어려운건 조국이라 돌아왔건만 일년이 되도록 몸을 둘데조차없은 그것이였다. 하여 그는 분한 것이다. 그는 작가협회책임자 파자예브를 찾아가 사정해봣지만 대답은 방 한평도 줄수 없다는 것이였다. 하여 트세타예브와는 아들과 함께 최하층의 나날을 지겹게 보내야했던 것이다. 그는 어느 한 편지에다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는 내 감정을 떨어버릴 권리가 없다. 우리는 모스크바에다 다 바쳤건만 그들은 우리를 버리고있다  쫏아내고있다.(전에는 루맨챠푸거리 박물관에 우리집이 세채나 있었다. 할아버지의 것, 어머니의 것, 그리고 아버지의 것들)..... 전쟁이 일어났다. 모두 국난에 빠졌을 때 유독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만은 작가협회의 버림을 받았다. 이로하여 그의 명줄은 끊어진거나답잖게 되고만 것이다. 1941년8월8일, 그는 16살난 아들 무어를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나 8월18일에 딸따르로 갔다. 그러니 가족성원들은 저마끔 다 흩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뒤에 잇따른것은 일자리 하나 얻기어려운 고생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외국의 시를 번역하는 것 뿐이였다. 한데 그것도 아무런 쓸모없게되였다. 잡지사들마다 독자가 없다면서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하여 그는 8월26일에 모스크바작가협회의 소재지였던 제스토보에 가 자기를 여기로 이사시키고 작가협회기금회에서 꾸리고있는 식당에서 그릇씻는 일이라도 하게해달라고 사정해보았다. 하건만 작가협회는 그의 그 최저의 요구마저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그는 되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로부터 그의 정신은 그만 완전히 붕괴되고만 것이다......그녀는 절망 끝에 아들을 다른사람께 맏기고는 8월31일 집주인과 자기는 일요일에 외출할것이라하고는 자살하고만 것이다.   “나는전에 쏘련의 걸출한 소설가 플라토노프가 쏘베트전선의 현실생활을  반영하였다가 비판받고는 우울해져서 작가협회의 울안을 쓰는 청소공의 신세로 돼버린것을 보았다. 그는 얼마지나지 않아 처결되였다. 쏘려정부와 그가 관리하는 어용적인 작가협회는 정말 이같이 재질이 있는 문화인들을 못쓰게 만들거니와 모욕하다가 학살하고있다. 걸출한 시인 Tsvetaeva가 죽음을 당한것도 마찬가지다. 허다한 작가, 시인들이 ‘문자옥’에 살아나지 못하고있는 것이다. 왜서 이런가? 과연 혹독한 제도다!”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가 남긴 유서였다. 번역자 소항(蘇杭)은 같은 녀자로서 “문자옥”을 당한 가련한 불우의 녀시인 메리마리나 트세타예와를 동정해 안식을 비는데서 이 글을 썻노라했다.                      
51    에세이 죽음에 대한 모택동의 태도 댓글:  조회:5000  추천:3  2013-10-17
     에세이 죽음에 대한 모택동의 태도     1951년 1월 21일, 모택동은 상해시위에 보내는 전보에서 지시하기를 “상해같은 이런 크 도시에서는 금년내에 아마 2,000명은 처결해야 문제가 해결될것같다. 춘기에 300~500을 죽여 적의 기염을 꺾어놓고 민기(民氣)를 높혀야 한다. 3월 18일, 모택동이 천진에서의 반혁명진압에 관한 보충비준을 보면 ”반드시 참답게 연구하고 주밀하게 포치하여 몇번 많이죽여야 문제가 초보적으로 해결될것 같다 ....금년내에 1,500명을 죽여야하는데(이미죽인것 150명)  4월말전에 먼저 500명을 죽여 계획을 완수한다면 우리는 곧 주동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큰도시와 중등도시들에서도 따라서 모두 반혁명분자를 몇차례 많이 붙잡고 많이 죽이라고 “요구”했던것이다.    3월24일,모택동은 요수석(饶漱石)에게 전보로 “상해와같이 이렇게 큰 대도시에서는 몇 번 많이 붙잡고 많이 죽여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4월13에 남경시위에다 반혁명진압에 관해 비준한 것을 보면 “지난때 거기서는 손이 너무나작아 살인을 크게 과시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철저히 전변해서 아주좋다. 성적이 커 앞자리에 섯다.”고 칭찬했다. 모택동은 살인을 “과시”하지 않으면 “손이 작다”고 엄하게 비평하면서 여러번이나 손이 크게 많이죽여야한다고 독촉했던 것이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그 후과가 어떠리라는건 모택동도 아는지라 많이 붙잡고 많이 죽일때는 잘못붙잡고 잘못죽이는 현상이 없게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3월30일,모택동은 산동분국에다 보내는 반혁명진압지시에 “반혁명을 일찌기죽이건 늦게죽이건 큰관계없다..... 하지만 무모하게 잘못죽인다면 영양이 매우좋지 않은것이다.”고 했다. 이런말을 후에 기등규(纪登奎)와도 하면서 “죽이지 않아도될건 되도록 죽이지 말아야한다”고 했던것이다. 자료출처   그러나 건국초 토지개혁때나 반혁명진압때를 보면 붙잡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붙잡아 잘못죽인것이 적지 않다. 례를 들면 문화명인 김용(金庸)의 아버지   사량용(査良鏞)의 부친 사추경(查枢卿), 량우생(본명은 陈文统)의 부친 진신옥(陈信玉), 주자청(朱自清)의 아들 주매선(朱迈先)같은이들은 인민을 위해 좋은일을 했다. 혁명에 자금을 조달하고 공산당간부를 엄호했던것이다. 그들중에서 주매선(朱迈先)은 고중을 다니던 1936년도에 비밀리에 공산당에 들었거니와 당을 위해 적잖은 일을 한것이다. 그럼에도 1951년 토개와 반혁명진압운동때 “불법지주”, “반혁명죄”를 날조하여 처결한 것이다.       김용(金庸),  량우생, 주자청(朱自清)은 다가 지명인사다. 모택동은 주자청(朱自清)을 높이평가했고 김용(金庸)과 량우생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등소평, 료승지 등 국가령도들이 청하여 접견을 받은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잘못된 그 억울한 안건에 대해서는 30여년이나 질질끌다가 사인방(四人幇)이 꺽꾸러져 80년대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평판을 한 것이다. 백성들이 그래 사람을 그같이 되는대로 붙잡고 죽이면 억울하다는것을 모르는줄알았던가?   세상에서 제일귀한것이 사람이고 제일귀한 생면도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 인생은 한번밖에 없다. 한데도 자기가 권리를 잡앗다해서 운동이라는 이름을 빌어 사람을 함부로 마구죽인다면 그것은 죄악으로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문제를 놓고 모택동은 벌써 섬북에 있을때부터 깊은조사연구도 없이 마구죽이면안된다면서 무고한 생명을 빼앗으면 그건 죄악이라했다. 그러면서 해결방안을 내오기도했던 것이다.     새정권을 세운 후에도 그는 여전히 많이 붙잡고 많이 죽이였는데 역시 마구붙잡고 마구죽이지 말아야한다는 따위의 말을했다. 그러면서 잘못죽이면 영향이 아주나쁘다고도 말했다. 허나 속은 달랐던 것이다. 하기에 그의 물음에 기등규(纪登奎)가 자기는 사람을 잘못죽였다했건만 그는 왜서 사람을 잘못죽였는가고 캐묻지 않았거니와 잘못죽인 사람에 대한 사후처리에 대해서도 한번도묻지 않았던것이다. 모택동이 그같이 따져묻지 않으니 기등규(纪登奎)도 역시 잘못죽인 사람에 대한 평판문제같은건 아예 생각조차하지 않았거니와 누가 물으면 그저 건성으로 “긴급한상황에서 사람을 죽인거야. 조사할새나있어야지.”했던 것이다. 그가 한마디 더할수 있는 댓변이였다면 “그랬어, 내사 사업을 잘하지 못했지.”였다. 그같은 태도는 제손에 죽은 자의 원한이 어떤지를 근본모르거니와 추호의 죄책감마저도 느끼지 않는, 인성을 떠난 랭혹이였다!                 우리 중국에서는 력차의 운동에서 억울하게 목숨잃은 원혼(冤魂)을 어느때야 제대로 다 안위(安慰)하고 달랠지?  생각하면 오로지 슬퍼지는 마음뿐이다. 날조된 죄명으로 직접 박해를 받은 사람, 다시말해 억울하게당한 사람의 고통이 진정 어떤지는 그 본인을 내놓고 다른사람은 잘 모른다. 나역시 칠성판에 올랐다내린 사람이여서 그 맛을 안다. 죽지 않은게 천만다행인가한다. 모택동이 섬북에 있을 때 처럼 문화혁명때도 그냥 “사람의 머리는 염지처럼 베여도 다시자라는게 아니다”고 가르쳤더라면 해방후 수차의 정치운동에서부터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그같이 수백만에 이르는 원혼(冤魂)이 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택동은 수정주의를 막아내기 위해서 “문화혁명”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게 뭔가? “문화혁명”이 그래 백성에게 복리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가?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모주석을 의연히 신처럼믿고있다만 그를 어찌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하겠는가? 문제는 아무런 리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혁명은 해서는 뭘하냐 그거다. 그는 수정주를 막는다고했다. 그래 그것을 막아서는 뭘하는가? 좋은게 대체 뭐였는가?  모택동 그는 흐루쇼브를 때려죽일 놈 수정주의두목이라 미워하면서 중국의 백성은 모두가 자기를 따라 그를 철천지원쑤로 여기고 죽도록 미워하라고 이끌었다. 그래 그러지를 않았던가? 헌데어떤가? 오늘에 와 따져보면 쓰딸린의 독재를 폭로하고 비판한 흐루쇼브의 비밀보고는 절대 망언이 아니였다. 한데도 우리가 그를 수정주의자요 뭐요하면서 지어는 붉은 공산진영의 죄인으로 몰아버린것은 대단히 잘못된일이였다. 그것이 그래 어디 실제와 부합되는일이였던가? 쏘련공산당에서 바로 쓰딸린의 착오를 규정하려고 애쓰는 때에 우리는 그들을 방해한 것이다. 한편 중국은 되려 쓰딸린을 전반긍정하다보니 전에는 형제였던것이 등을 지고 갈라지고말았으며 두나라당간에는 론전을 크게 하게되였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됐는가? 중쏘지간의 대론전이 결국은 모택동이 쓰딸린의 독재기풍을 담습하게하여 마침내는 세계사에 전대미문의 대재난ㅡ문화대혁명을 끌어냈으니 중국으로놓고보면 그이상 더 큰 불행이 어디있는가?..... 없다! 침통한 교훈이다.   모택동이 발동한 문화혁명은 사람을 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때리는 것으로 끝나고말았다. 흐루쇼브는 모택동을 수탉처럼 싸우기를 좋아한다고 웃었는데 그 조롱하는 비유가 과연들어맞는다. 왕명(王明)이 좋은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 나는 잘 모르는데 그도 모택동을 호투뻔즈(好鬪分子) 라 했다. 그는 그러면서 모택동을 “당대진시황”라 했다. 과연 내생각과 같은 말이였다. 모택동은 언젠가 스스로 제 호매로운 기개를 뽑낸바있다.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우니 기쁘기 한량없다” 바로 싸우기를 좋와하는 그의 심태를 적라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진시황이 다 뭔가, 왔다가 울고갈지경이였다.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은 유사들이 옛것으로 오늘의 것을 반대하며 사학(私學)을 통하여 조정을 비방하니 금지시켜야한다는 승상 리사의 말을 듣고는 외의 다른나라의 력사책과 민간에서 사사로이 류행되고있는 , 등 책들은 전부몰수하여 소각하고 460여명의 방사와 유생을 생매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은대체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이였지 모택동이 지식분자를 죽인 수자는 그의 몇백배도 더되는 것이다. 국가간부로부터 일자반급도 없는 보통백성에 이르기까지..억울하게 목숨잃은것이 몇천만이니 지천이 놀랄일이 아니고뭔가?!   그는 공산국제의 령수로 돼볼려고 꿈꿧다. 주제넘게 남의나라일까지 간섭할건 뭔가? 제가 대체뭔데?..... 등소평이 생전에 중국은 이제부터는 “혁명”을 수출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모택동이 혁명을 수출해서 잘된게 뭔가? 캄보쟈에서에 일어선 “폴포트기념관”을 거기사람들은 “모택동죄행관”이라고도 한다. 왜서그렇게 되는가는 이제 다음글에서 차츰 밝히겠다.     우리는 한때 흐르쇼브를 히질기게 욕했다. 그런데 이제와 알고보니 그한테 죄없다. 우리는 어리석게 남을 타매했던 것이다. 왜서? 그것은 그가 내가봐도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와서 보면 그는 개혁파였다는 것이 알린다. 그는 서방의 자본주의국가에 비해 뒤떨어지는 쏘련의 경제를 일떠세우려고 개혁을 설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응당 흐루쇼브를 붉은공산진영의 개혁선줄군으로 봐야 옳았을 것이였다. 그때 중국의 9평은 쏘공의 “3화와 2전” 즉  “화평공처, 화평경쟁, 화평과도. 전민의 국가, 전민의 당”을 나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게 뭐가 잘못되였단말인가? 다른게아니다. 모택동은 국제공산운동의 령도권을 제손에넣으려고 극좌의 면모로 출현하여 쏘련공산당을 비판했던 것이다. 남을 그같이 비판하고 반대하다보니 결과 중국은 스스로 대재난으로 점철된 문화혁명의 길을 걷는 운명이 된게 아니였던가!?  과연슬픈일이다!       문화혁명은 너무나도 많은 비극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발광이 좀만적었어도, 인간의 존엄을 조금만 존중했어도, 인간의 생명이 아까움을 좀만알았어도 “황제의 발끝”에 있는 북경의 대흥현(大兴县)이나 호남도현(湖南道县)모양으로 그어떤 법적인 절차도 없이 많은 “오류분자”의 자손ㅡ이제 젓을 빠는 유아에 이르기까지 제맘대로 칼로 목을 자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노끈으로 목죄여죽이고, 생매장을 하는 야만적인 살인극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리성이 좀만있어도 젓먹는 애까지 두동강내는 참극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 중국에서도 그 재난의 기록이 될 “문화혁명기념관”이 일떠서고야 말 것이다. 움직임이 보인다. 그때면 그것이 또 누구의 무슨관이 되겠는가?........  모택동을 3ㅡ7로 보라는데 그건 공산당의 저울이다. 력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지 그 어느 당이 쓰는게 아니다.      
50    에세이 뼈에 사무치는원한의 구호 댓글:  조회:5721  추천:5  2013-10-12
   에세이 뼈에 사무치는원한의 구호   “그 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시고말테다!” 이것은 “문화혁명”초기 홍위병들이 학술권위와 지식분자면 몰밀어 자산계급분자라 여기여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그들을 영원히 번신하지 못하게 꺽꾸러뜨려야한다고 주장하다보니 부르짖게되였던, 가장 반인륜적이고도 지독한 구호였던 것이다. 그당시 “홍위병”들은 학술권위와 지식분자라면 “사류분자”, “오류분자”나 별반다름없다고 여겨 몰풍스레 증오하고 적대시했는데 그들이그러는원인을 보면 다른게 아니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발동하기 전에 진작 중국의 지식분자는 후대들에게 존경이 아니라 경시를 받겠끔 인도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11여년 전이였던 1957년에 모택동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지식분자가 대략 5백만되는데 그 중에서 2백만가량의 지식분자는 자산계급학교를 나왔으니 다가 자산계급지식분자인 것이다 라면서 우리는 그들을 단결, 개조, 리용해야한다고 했다. 그것은 틀리지 않는 말이요 명랑한 태도라 말할 수 있다! 한데 그가 리치에 맞는 말은 그렇게 듣기좋게 해놓고나서 취한 행동을 보면 판판달랐던 것이다. 그가 요긴하고도 고귀한 의견을 들어보겠다해놓고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반우파”운동은 확대화되여도 형편없이 확대화되여 결국은 전국 5백만에달하는 지식분자의 가슴을 전부 얼음장같이 얼게 만들었던 것이다. 응당 적진에나 던져야 할 살상력이 강한 수류탄을 자기의 진영에다, 말하자면 인민내부ㅡ자기를 믿고 따르는 순진한 사람에게다다 던졌던 것이다. 그랬으니 그게 잘된것이였던가? 꼴이 어떻게 되였는가? 그는 시종 그번의 “반우파투쟁”은 응당하고 잘된걸로 여겼다,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대로 지식분자들을 반항못하는 순복공구로 만들어놓앗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신은 실제상 지식분자들에게서 언영 신용을 잃어버렸거니와 저주를 받는다는것은 죽을때까지 철저히 깨닫지는 못한것  같다.   그 무슨 고린내나는 첫째요 둘째요... 몇째요 했다. 보아하니 아마 “문화혁명”이 다 끝나서야 지식분자에 대한 그따위 반갑잖은 멸칭(蔑稱)이 없어진것 같다. 나는 당시 소학교선생이였다. 그런데도 “고린내나는 하홉째”라는지 “고린내나는 스믈한번째”라는지 듣기가 과연 역겹고도 저주로운 그놈의 별명을 하사받은 신세였던 것이다. 마치도 히틀러가 2차대전때 유태인의 앞가슴에다 허연표식을 달게했던것 처럼 그가 우리들한테 딱지를 붙여주니 기분이 대단히 잡치는 일이였다. 대체 왜서 그랬는가? 모택동을 보면 그 본인역시 지식분자였는데 그가 지식분자를 그토록 경멸하고 멸시한게 과연 리해되지 않았다. 왜서 자기를 믿고 애대하고 따르면서 성의를 다하는 지식인에게마저 굳이 그따위 듣기싫은 이름은 달아놓고 “사상개조”를 시켰지? 도대체 왜서 선생들을 제가 배워주는 학생들에게마저 존경보다 멸시를 더 받게했는지 그게 지금까지도 전혀 풀리지 않는 일이다.   “그 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시고말테다!” “문화혁명”이 오자 “홍위병”들은 증오가 하늘을 꿰찌를지경인 그따위 사나운 구호를 웨쳐대면서 우선먼저 자기에게 글을 배워주었던 선생부터 잡아내여 투쟁하는것으로서 동란의 서막을 열었다. 그때의 표현구로는 “계급투쟁뚜껑”을 열어제낀 것이다. 때는 바로 “문화혁명”초기ㅡ 모택동이 천안문에 올라 붉은완장을 낀 팔을 쳐들어 저으면서 련거퍼 10여차나 전국각지에서 북경에 쓸어들어드는, 자기의 용모를 한번만이라도 보자는 따촨랜대오를 접견함으로 하여 혁명기세가 충천할지경 들끓어번지기 시작했던 1966년 8월이였다. 관방의 통계자료를 보면 그 한달에만도 북경에서 중학생들이 자기를 배워준 선생을 끌어내다 투쟁하고는 무자비하게 때려죽인것이 1,772명에 이르는 것이다. 피비린내풍기는 살기찬 그 바람은 쉬사리 전국에 파급되였던 것이다. 위만시대에 태여난 내가 소시적 8.15해방을 맞앗던 북방의 도시ㅡ 송화강을 끼고있는 쟈므스(佳木斯)에서도 그러했다. 의과대학(?) 홍위병들은 두패싸움을 하면서 선생하나를 서로빼앗아다 투쟁하는 놀음을 했는데 나중에는 홍무니에 칼을 박아 그의 목숨을 앗아낸 것이다. 죽일때 발가벗긴 그대로였는데 당시 나도 그 정경을 “참관”하러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소름이 내돋는 끔찍한 참경이였다. 위대한 분이 손수 일으키고 지휘한 중국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ㅡ 그것은 형상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참혹한 대내란이였지 진정 다른 그 무슨 거룩한 행동은 절대아니였다. 홍색공포에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변해버린 그런세월에다다 어찌 “혁명”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붙일 수 있으랴. 그것은 그야말로 비극을 자초하고 혼란을 자초한 세상웃기는 짓이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혁명이 아니라 아이들의 작난이였다고 평가하고있다.  중국은 그 놀음을 며칠몇달을 하고 제꺽거둔것이 아니다. 장장 10여년간의 세월을 고통스런 광란에 모대기친 것이다. 잘된게 뭔가? 일호반점도 없다. 하마터면 나라가 없어질번한 끔찍스런 대재난이였을 뿐이다. 이래도 옛구성(救星)이 그리워 "동망홍"을 지금도 넋두리하듯 흥얼거리는 사람을 보면 다시보게된다. 어쩌면 그리도 무지할가?!    김학철선생이 말을 잘했다. 제가 힘들여 애써구축한 사회를 제손으로 훼멸하는 바보독재자는 중국의 모택동을 내놓고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택동이 혁명은 성공했어도 건설은 착오가 있고 문화혁명은 죄를 지엇다고 한거고 그런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보지 않는다고 한거다.   문화혁명과 같은 그런 대비극이 왜서 우리 중국에서, 모택동의 몸에서 발생했가는 앞으로계속 더  깊이 연구해야 할 바라고 본다.   문화혁명에 온 나라가 대체 무슨꼴이 되었는지를 한번디시 돌아보자.  억만인민이 다같이 부르는 이른바 영명한 수령이라 하여, 대구성이라 하여, 마음속의 붉디붉은 태양이라면서 그 하나만을 지고무상한 성인(聖人)으로 하늘높이 떠받들어 올리다보니 이 나라는 민주와 법제가 결국은 그한사람의 욕구에 따라서 짓밟혀 유린당하고말았던 것이다. 따져보면 중국공산당은 당내의 민주를 잃은데다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를 더 허용하다보니 큰 실수를 한것이요 민중은 다가 지나치게 들끓어오르는 열애심에 지배자를 성인(聖人)으로만 여기고 받들어 숭배하다보니 그 어른을 한심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잔폭한 군주(君主)로 만들어버리고말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수천년간을 경천법조(敬天法條)로 삼아오던 모든 풍속과 질서가 여지없이 짓밟힌 것이다. 지어는 수천년간 대대손손 지켜 내려오던 부모자식간의 골육의 정마저도 헝크려졌거니와 개별적인 현상이라 하겠지만 지어는 가정에 대한 가치관념마저 전부 깨지고 으깨지고 부셔지고말았던 것이다. 그 반면에 머리를 치켜든것이란 영웅의 권능에 대한 지나친 기대였다. 그렇다보니 오직 모택동 그 한사람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발광적인 숭배열이 한심할지경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 숭배의 열을 맨먼저 일으킨 사람은 바로 당장에 마저 후계자라 명문으로 밝혀놓기까지 했던 림표였던 것이다. 1966년 8월 18일에 있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그가 한 강화가 새삼스레 상기된다.  불과 1000여자밖에 안되지만 그 내용이 과연 희한했다.      “위대한 령수”      “위대한 통수”      “위대한 창거”      “위대한 승리”      “가장가장 위대한”      “가장가장 강대한”      “가장가장 예리한” 불어도 분수있지 이것들은 피끗들어도 아첨하는 문구들이였다. 보면 그가 모택동사상을 가장정통했고 모택동혁명로선에 가장충성하며 모주석을 가장열애하는 것 같았다. 하긴 수를 잘썻다. 수억만이 그를 따라 그모양으로 모택동 그 한사람을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신처럼 높이높이 떠받들게 만들었으니! 사실그랬다. 억만백성이 림표를 따라서 그 모양으로 숭배했으니 세상에 그보다 더 놀랍게 무지한 짓이 어디있으랴! 모택동이 만년에 이르러 더 큰 실수를 한데는 각성못한 백성모두의 책임도 있는 골고루있는 것이다. 노예적인 아첨숭배는 언녕내동댕이쳐야한다. 하건만 아직도 상급만 만나면 허리도 못펴고 깝신거리는 사람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욕지기가 생긴다. 병신같은 짓은 그만하는게 좋다.   모택동이 맑스주의를 진정 잘 알았던가? 그런것같지 않다. 그가 깊이연구한건 맑스의 저작이 아니고 “자치통감”이였다고 한다. 이건 20여년간을그의 비서로 지내다가 버림받게 되니 서재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 전가영이 남긴 말이다. 내가 언젠가 "참고소식"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는 지어 모택동은 세상에서 제일허심하지 못한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모택동 그는 지고무상한 현대의 황제노릇을 하고싶어했던 것이다. 1957년후부터 개인숭배를 반대하면 제 권위를 수립함에는 저촉되고 해롭다는 것을 심심히 느낀 모택동은 1958년 3월에 열리였던 성도(成都)회의때 벌써 개인숭배에 대한 제 개인의 관점을 내비친바있다. 그후 1964년가을,  쏘련에서 쓰딸린의 생전독재를 청산했던 흐루쇼브가 권좌에서 물러났을적에 미국기자 스노가 모택동을 만나 그와 “쏘련사람들은 지금 중국에서는 개인숭배를 하고있다고들 말하는데 그게 사실인가?”고 물은바있다. 이에 모택동은 “흐루쇼브가 내려앉은건 개인숭배가 너무없었기때문이다. 중국에는 확실히 개인숭배가있다. 개인숭배는 좀 있어야한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과연  전당, 전국민이자기를 숭배하게끔 노력한 것이다. 문화혁명이 끝나자 주덕의 비서가 적발한것을 보면 모택동은 1950년도 국경절경축구호를 선정할 때 자신이 “모택동만세!”구호를 가첨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택동의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욕구는 건국직후부터 이미 생겨 쓰딸린과마찬가지로 뿌리박았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벽초부터 림표가 그의 심정에 맞춰서 마치 신을 모시듯이 전국민이 모택동을 숭배하여 받를게끔 운동을 일으켯던 것이다. 로산회의(庐山会议)후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는 열조가 전국범위에서 일어났다. 여러판본의 모택동저작이 나와서 대량적으로 발행되였거니와 전국일판에서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는 열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국일판에 모택동의 동상, 석상이 수풀같이 일떠섯고 매일마나 "동방홍"노래소리울리고 충성무가 생겨나 그것이 군중성적인 운동으로 되였다. 어디 그것뿐인가, 지어는 내가 소시적에 직접 목격했던, 일본이 망하면서도 하던 짓거리 궁성요배모양의 삼경삼축(三敬三祝)은 모택동을 신화(神化)했으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한심해서 부끄러운 짓이였던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들으면 그젯날에는 어쩌면 그같이 무지한 일도 다 있었느냐며 웃기나 할 일이였다.   위에 이미 서술된바와 같이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북경의 고등학교와 중학교들에서는 학생들이 자체로 홍위병을 조직하고는 저들을 가르친 학교령도와 선생부터 진공하기 시작한건데 그 대부분이 폭력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다 모택동은 부채질을 한 것이다. 1966년 8월 1일, 모택동은 청화대학의 부속중학홍위병들에게 편지로 그들이 사람을 붇잡고 때리고 짓부시는 투쟁행위에 대해서 “열열히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거니와 “북경뿐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문화대혁명운동을 함에 있어서 그와 마찬가지의 ‘반란행위’에 대해서도 일률로 열렬히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던 것이다.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들을 접견할 때도 “우리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타도하고 자산계급반동권위를 타도하며 일체 자산계급보황파를 타도하고 요물잡귀들을 타도해야한다”고 했다. 하여 그후부터 전국각지에서 홍위병들이 그 누가 전정대상이라 생각되면 쪼판유리(造反有理ㅡ반란에 도리있다)를 웨쳐대면서 제마음대로 사람을 붙잡아 때리고 들부시고 빼앗는 날강도식의 "혁명"을 정식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북경에 있는 어느 한 중학교는 학생이 무려 천여명이 되였는데 그들은어느날 교장을 비롯한 선생들을 전부끌어내다가 운동장에 줄을 세워놓고는 투쟁을 한 것이다. 학생들은 선생마다 머리에다 종이로 만든 높다란 고깔모자를 씌웟고 목에다는 앞가슴을 가리우는 커다란 판지패쪽을 걸었는데 고깔모자와 판지패쪽마다에 그 선생의 성명과 정치죄명이 씌여있었다.     한손에다 작은홍보서(小红书)ㅡ “모주석어록”을 쥔 쪼판파사령(造反派司令)이 “투쟁대회를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홍위병들은 뒷이어서 높은 목청으로 구호를 웨쳐댔다. “혁명에는 죄가 없다!” “반란에는 도리가 있다!” “모든 반동적인것은 타도해야한다!” “먼지는 쓸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다!” “홍색공포만세!” “그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그의 개대갈통을 까부실테다!”  등등. 당시 그것은 보편적인 형상이였던 것이다. 홍위병사령이 높이웨쳣다. “홍위병전사들, 동학들여! 우리가 그래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보황파, 반동권위, 요물잡귀들이 우리들의 홍색진지를 더럽히게 가만놔둘수있는가?”  그러면 천여명되는 홍위병들이 일제히 웨치였다. “가만놔둘수없다!” 홍위병사령은 이어서 높은 목청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해야하는가?” 전체홍위병들은 운동장이 들성하게 웨쳐댔다. “그자들의 개대갈통을 까부시자!” “땅에다 꼭그라뜨리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꼭그라뜨리자!” “영원히 번신못하게 만들어놓자!” 이같이 종교식의 의식을 한바탕 이루고나서 그들은 잔혹한 투쟁을 시작햇던 것이다.... 대표적인 실례를 보이는 장면이다.   엽영렬(葉永烈)이 쓴 이란 글을 보면 당시 용기가 오른 홍위병들은 배짱이 자랄대로 자라나 지어는 공청당중앙까지 쳐들어가 공청단령도자인 세 호씨(胡氏)ㅡ 호요방, 호극실, 호기립을 붓잡아놓고는 “너희들은 왜서 모택동의 위대한 사상을 높이추켜들지 않았느냐?” 트집잡으면서 투쟁했는데 그자들이 가죽피대로 어찌나 호되게 때렸던지 호요방은 참지 못해 몸부림치고 딩굴었다면서 매질을 한 홍위병들이 그때는 완전히 리성을 잃은것이였다고 호극실은 말했다. 모택동이 일으킨 홍위병들의 작태가 바로 그러했다. 횡행천하(橫行天下)에 당할자없거늘 과연 무법천지로 돼버린 험악한 야만의 년대였다!  刘源上将忆父刘少奇:他被自己塑造的神坛轧死>" />   >" /> >" /> >" /> >" /> >" />      
49    일본녀작가 야마자키 도요 별세 댓글:  조회:4646  추천:1  2013-10-08
        일본녀작가 야마자키 도요 별세   "베이징시간보"에 따르면 방금지난 9월 29일(2013년), 장편소설 을 세상에 내놓음으로 하여 이름을 더 크게 낸 일본의 녀작가 야마자키 도요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떳다.  야마자키 도요는 생전에 대표작으로 되는 말고도 , 을 비롯하여  여러권의 장편을 썻는데 그것들은 다가 영화로 찍거나 아니면 텔레비극으로 각색되여 일본사회에 파문을 크게 일으킨 것이다.   일본의 소식통들은 야마자키 도요는 몹시쇠약해진 심장피로로 인하여 사망되였노라고 보도했다. 1924년에 오사카에서 내여난 그녀는 스므살나던해인 1944년에 교토녀자전문학교(지금의 교토녀자대학)에서 국문계를 다니고는 사에 들어가 문예부기자노릇을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편 저명한 작가이자 문예부부장이였던 이노우에 야스시의 지도를 받으면서 창작활동을 활기차게 계속했던 것이다. 그의 처녀작은 1957년에 발표한 으로서 그 소설은 그 이듬해에  수많은 경쟁자를 젯히고 제29계 나오키상을 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을 내놓았는데 그 소설은 한 녀인이 주인이 되어 손수경영하고있는 한 곡예장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 소설역시 나오자마자 자석마냥 많은 독자들을 끌었던 것이다.  야마자키 도요의 초기작품들은 대부분이 주로는 배와 관련되는 오사카의 풍토와 인정을 묘사한 것이다.             1963년, 야마자키 도요는 장편소설 을 문예지에다 련재하기시작했는데 연출가 지로타미야의 중시를 일으켜 그것이 영화로 각색되었거니와 여러편의 텔레비극으로 꾸며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가 쓴 , , , , 등이 재판되였거니와 그것이 영화로 각색되기도했다. 야마자키 도요가 쓴 소설들의 특색이라면 다가 일본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쳐 예리하게 분석하고 질타한 그것이다. 하여 일본에서는 그녀를 “사회소설가”라 불러온 것이다. 야마자키 도요의 작품들은 다가 치밀한 조사를 거쳐서 씌여진 것이기에 그 내용들이 아주풍부하고 또한 그럼으로해서 독자들을 쉽게 소설에 매료되게끔 하는 것이다. 대표작 은 의학계의 어두운 면과 의료실수를 문제삼고 그를 기탄없이 폭로한 것인데 그것이 영화로 까지 찍혀 나오자 반응이 더더욱 대단했던 것이다. 야마자키 도요의 다른 한 소설 은 2차세계대전때 중국에 남은 고아의 운명을 다룬건데 그는 친히 중국에 와서 소재를 얻어간 것이다. 그것이 후에 중일 두나라가 합작에 의하여 텔레비련속극으로 만들어진건데 반영이 아주좋다.   우리 중에는 그같이 걸출한 녀류작가 나오지 못할가, 기대하게 된다.           야마자키 도요           사망직전모습   아래에 야마자키 도요와 다른 이름있는 녀류작가의 대표작도 알리니 참고하기바란다.   1. 야마자키 도요  소설ㅡ 2. 쿠니코  소설 ㅡㅡㅡㅡㅡ 3. 요코모리  소설ㅡㅡㅡㅡ 4. 키타가와 에리코  소설ㅡ 5. 지앙카오리  소설ㅡㅡㅡ 6. 무라야마유카  소설ㅡㅡ 7. 아이코  소설ㅡㅡㅡㅡㅡ 8. 리우미리  소설ㅡㅡㅡㅡ 9. 사쿠라바 카즈키  소설ㅡ 10. 미우라  소설ㅡㅡㅡㅡㅡ 11. 카와카미 에이코 소설ㅡ        
48    에세이 얼굴있는 명성황후 민비 댓글:  조회:4050  추천:0  2013-09-29
    에세이 얼굴있는 명성황후 민비     어느날 일본공사관에서는 극비의 회의가 열리였다. 참가자는 모두 5명. 미우라 고로오와 시바시로외에 오까모도, 서기관 스기무라와 구세스였다. 구세스는 일본공사관의 무관이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모의한 끝에 아래와 같은 최후방안을 내왔다.   (1) 임금측의 간신을 제거하고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왕후를 죽여버린다. (2)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인들이 정변을 일으킨 듯 가장한다. (3) 행동의 전위대로는 일본랑인들을 앞세우고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수비대가 담당한다. (4) 대원군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한 일본경찰을 동원한다. 《우리들의 이번 작전을 이라 이름짓는다. 천황과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충성다하리라 맹세했으니 각자 부끄러움과 유감이 없도록 행동하라!》 미우라 고로오는 이같이 지시하고나서 지체없이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10월 10일에 여우사냥을 하리라는 전보를 쳤다.   랑인들이 민비를 살해하자면 그의 모색을 알아둬야 했다. 하여 미우라는 미찌꼬를 시켜 왕과 왕비를 비롯한 일가족의 사진을 찍게 했다. 이 일로 해서 미찌꼬는 미우라 고로오의 흉계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것이 민비의 각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었다.   미우라 고로오는 자기의 음모가 탈로난 것 같은 감각이 들자 여우사냥을 돌연스레 2일 앞당겨 10월 8일밤중에 단행키로 맘먹었다.   한편 미찌꼬는 자기의 소행을 미우라가 눈챘거니와 공관의 삼엄한 감시를 벗어나 평관(平關)의 민비한테도 전할수도 없게 되자 그만 절망 끝에 자결하고말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 일본불량배 60명, 일본군인 50명, 일본경찰대 30명, 훈련대 1,000여명으로 무어진 강도단이 "여우사냥"을 개시했다. 이때 미우라 고로오는 초불을 밝혀놓은 널찍한 방안에 홀로 남아서 무릎꿇고 앉아 두손을 합장하고는 격정에 잠겨 뇌이였다. 《미우라 그는 무사였다! 일생에 단 한번 두려움을 느껴본다! 내 일생의 걸작품! 생각만해도 피가 끓어오른다!》   푸름푸름 새날이 밝아옴을 보고 미우라 고로오는 밖으로 나왔다. 왕궁쪽으로부터 총성이 몇번 들리다 끊어졌다. 훈련대를 앞세웠으니 궁전위병과 충돌이 일어났으니라. 이 시각 그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는 거사를 이루고 있다는 그 하나의 자부에 가슴이 쁘듯할 뿐이였다. 《조선의 가을하늘은 밝기도하구나! 력사란 무엇인가, 력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이때 평복한 순사 자객 등 60여명이 오까모도의 지휘하에 공덕리 아소정에 가 대원군을 억지로 옹호(擁護)해 갖고 경복궁으로 몰려들어왔다. 위병들은 항거하다가 살상된 자가 많았고 련대장은 일본에 매수된 훈련대가 란입하는 것을 꾸짖다가 일병(日兵)손게 피살되고말았다. 자객 수10여명은 칼을 뽑아 들고 전(殿)에 올라갔다. 고함치고 날뛰였다. 혹은 왕의 팔을 잡고 이끌며 혹은 어체(御體)에 비슷이 향하여 권총을 쏴댔다. 궁인들을 왕앞으로 끌고 가 란타(亂打)하면서 중전마마가 어데있는지 대라했다.   궁내대신 리경직(李耕稙)은 어전에서 죽음을 받았다. 어떤 자는 태자를 붇들어서 머리털을 움켜 잡고 단도로 위협하면서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 했다. 외국인사 파진(巴津)은 호위대장으로 전정(殿庭)에 있다가 여러번 힐문을 당하였으나 대주지 않아 몹시 위태했었다.   각 방을 수색하던 자객들은 한 방에서 마침내 왕후를 찾아내여 살해하고는 증건을 없애느라 비단꽃이불로 싸서 널판에 올려놓아 궁궐뜰로부터 록원수림(鹿園樹林)속에 옮겨다 장작을 쌓고는 석유를 뿌려 시체를 태워버렸다.     이윽고 미우라 고로오가 궐내로 들어가 왕을 배알하면서 자객과 일본군인들은 궐밖으로 퇴출시켰다.   봉변을 당한 왕ㅡ리희는 넋이 떨어진 눈으로 그를 멍하니 볼뿐이였다.   명성황후의 몰골은 잃어지지 않았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양딸 미찌꼬가 찍은 사진이 내가 갖고있는 “韓國獨立史”에 있으니 장차 기회가 되면 올릴것이다. 독자는 더 상세히 알려거든 내가 쓴 대하력사소설 제1부에서 9절을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컴푸터조정이 잘못되여 지워졋길래 다시올림)  
47    수필 사생지간 댓글:  조회:3604  추천:3  2013-09-29
  수필 사생지간   우리 몇은 술상에 둘러앉았다. 대학가는 학생집에서 청했으니 여느술판과는 달랐다. 고마움과 희망, 축복과 기대의 감정이 서로 안고 도는 즐거운 장소라 하겠다. 학생은 잔에 술을 부어 들고 “오늘 저는 여러 선생님덕분에 대학가게됐습니다.”하고 말했다. 헌데 학생이 부어주는 그 인사의 첫잔을 누가 받아야 옳은가 하는 문제를 놓고 롱담절반 진담절반 옥신각신하던 중에 내곁에 앉았던 동창생ㅡ 소학교장이 먼저 채여 대접받았다. 계몽스승은 중학선생이 아니라 그래도 소학선생이니 술잔이 먼저 차례지는건 당연하다는 주장이였다. 좌중은 별 시비없이 웃고말았다. 하긴 그럴법도하니까. 우리 모두는 이럴 때 내가 진정 너 대학생의 계몽스승이였으면 작히나 좋으랴 하는 심정이였다. 한 사람이 나라의 동량지재로 자라남에 있어서 계몽스승의 작용은 자못 크거니와 영광스럽고도 존경할만한 위치에 놓여있게되는게 아닌가!   쏘련 까자흐초원의 한 궁벽한 마을에 듀이센이라는 젊은 공산당원이 파견되여 마구간을 학교로 꾸리고 거기서 무지한 마을 사람들을 설복해 가면서 무식한 애들에게 처음으로 글을 가르쳤다. 그런 아이들 중 알찌나라는 녀학생이 후에 모스크바에 가 대학공부를 하고 철학박사로까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마을에도 중학교가 일떠서 새학교입학식이 있게되였을 때 마을에서는 크게 출세한 그녀를 모셔다 제일 귀빈석에 앉히였다. 허나 그 녀인은 쏘독전쟁 때 죽은줄로만알았던 그의 첫스승이자 계몽자인 듀이센이 지금까지 살아있거니와 보통꼴호즈원이며 우편통신원으로 있다는걸 알았을 때는 자기가 받아서는 안될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묵과할수도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는 그만 결연히 떠나가버리고만다. 여기서 우리는 그 철학박사녀인의 참으로 인간다운 자각ㅡ 세월이 흘러가고 지위가 높아졌어도 계몽스승에 대한 경모의 심정만은 의연히 변함없는 갸륵한 성품을 읽을 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고상한 풍도가 아니겠는가! 헌데 공부많이하고 출세한 사람이라 해서 다 그녀처럼 고상한건 아니다. 준마가 망아지 때 자기를 길러준 사양원을 알아못보듯 어섯눈을 틔워준 스승을 잊고있는 사람은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제자가 잘될것을 바라고 잘되면 반가와하지 않을 스승이야 어디있으랴. 누가 만약 출세하면 “그인 내가 배워준 학생이였어.” 하면서 스스로 만족과 자랑감에 잠겨 되뇌여보는 것이 바로 스승이다.   내가 벌리에서 중학을 졸업한지도 어언 30년이 넘는다. 하건만 그때 나를 배워줫던 선생님들 중 지금도 의연히 교단에 오르고있는 이가 몇분계신다. 지금 일어를 배워주고있는 안영곤선생님과 교도주임사업을 하고있는 황동철 이 두분선생님은 내 초중때의 담임선생님인데 인젠 다 로인줄에 올라 머리가 반백이 되었다. 재작년그러께 겨울, 연변작가협회의 회의때 내가 귀향길에  모교에 피끗들렸었는데 모교에서는 모처럼 나를 위해 연석을 베풀엇던 것이다. 그때 황선생님께서 “송죽동무가 학교다닐때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더니만 끝내 성공했구만! 나는 스승으로서 이처럼 리상을 실현한 제자를 만나니 과연 기쁘기가 한량없소!” 하면서 손수 술을 부어 축복해주니 목이 메이도록 감격스럽던 일을 두고두고 잊을것 같지 않다. 자기에겐 푼전 한 잎 차례지는 것도 없건만 제자의 양광스러운 앞길을 성심으로 바라고 기뻐하는 것ㅡ 그것이 바로 스승의  감정이 아니겠는가. 헌데 사람마다가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경모의 감정은 대체 어느만큼이나될가? 나는 내가 목석같이 무감각하고 불민한 인간으로 되지 않은게 참으로 다행인가싶다. 어느해인가, 동생잔치에 상객으로 화남현 풍기촌에 갓을 때 나는 그곳에 내가 소학다닐 때 교장이였던 강현풍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차에서 내리자바람 찾아가 “선생님, 그간 옥체무강하셨습니까, 저는 선생님의 제자 김송죽이 올시다.” 하고 절을 올렸더니 선생님은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야, 이거 참 오래간만이구나! ‘문화혁명’에 고생많이했다는 소식을 내가 들었네라. 그래 몸은 일없게 됐는가?” 하고는 눈물짓는것이였다. 나도 그러했다. 회포인들 적었으랴. 격세해있은 그 몇 년간 가슴속에 묻어왔던 사생간의 그리움은 상봉의 그 시각 실로 진지한 동경과 반가움으로 부풀어올랐던 것이다.   엄해룡과 변태국이는 소학시절 내가 배워준 제자인데 지금도 의연히 한 향내에 살고있다. 1974년 겨울철의 어느날, 그들은 무죄판결받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내가 이웃마을에 조동되여 다심금 교편을 잡게되자 술근을 받아갖고 일부러 보러왔던 것이다. 여러해나 굴리우면서 짓몰린 끝에 교단에 다시오르기는했지만 아직도 “혁명자”들의 은근한 적대적인 감시속에 들어있은 나한테는 그네들의 그 “스승은 어디까지나 스승입니다.” 하면서 과감한 용기를 냈던 위문이 얼마나 고맙던지! 오는 정, 가는 정ㅡ 그래서 위안과 믿음속에 굳어지는 정. 사생간의 정도 실은 부모자식간의 정만 못지 않건만 그 가치와 귀중함을 사람들은 왕왕 몰라서 놓지거나 잃고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난생 처음 글이라고 써낸것은 두 개의 소절로 꾸며진 “땅크병형님”이라는 짤막한 아동시였는데 그것이 어느 소년간물에 발표된것이 조선전쟁이 바야흐로 끝나고있었던 1953년도 여름이였으니 소학5학년때의 일이다. 나한테 그같이 문학을 열애하게끔 이끌고 아름다운 리상의 싹을 틔워준 계몽스승은 김창민선생이다. 이젠 환갑이 다 되었을 그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묘연하여 나는 지금도 가끔 그리워지군하는 마음이다.                                        1990. 3. 31                           
46    에세이 류치환은 어떤사람인가? 댓글:  조회:6923  추천:13  2013-03-27
    에세이 류치환은 어떤사람인가?     류치환은 1908년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출생. 통영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오야마중학에서 수학. 1927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31년 24살나던 해 에 시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초기의 시들은 동양적인 관념을 노래한것들이 많았다. 그가 이름이 나기는 1936년에 시 을 발표해서였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그 시는 이러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먼저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 류치환은 광복후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을 주로하여 순수서정, 지적자아를 시적정신으로 노래했다. 그가 생전에 낸 시집으로는 (1940년), (1947년), (1948), (1949), (1951), (1954년), (1957년), (1958년), (1959). (1960년), (1964년) 등이다. 그는 1967년 차사고로 사망되였다. 한데 이 리력서에 보면 8.15광복전의 그의 생애가 빠졌다. 작성자가 그의 그 단락의 력사를 모르거나 아니면 그 본인이 생전에 그 단락의 력사를 일부러 밝히지 않았을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부분을 내가 밝혀놓으려 한다.             청마 류치환은 유명한 시 을 발표하여서 3년만인 1939년에 고향을 떠나 만주 봉천(심양)으로 이주하였고, 1940년 6월부터 북만에 들어가 살다가 1945년 6월에 귀국했다. 그는 귀국전 북만주의 빈강성(賓江省ㅡ지금의 흑룡강성)내에 있는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에다 "가신흥농회"라는 자연이민촌농장을 경영하면서 그기간에 협화회(協和會)의 지방 연수사무처(延壽事務處)의 일을 잘보았기에 1943년에 협화회(協和會) 하얼빈사무국(哈爾濱事務局)에 조동되여 근무를 했다.  하다면 협화회(協和會)란 대체 무슨조직이였는가? 그것은 1932년에 일본 관동군참모장 이시하라의 지시에 따라 오자와, 야마구치 시게지 등 일본청년들이 조직한 협화당(協和黨)이 당시 일제의 괴뢰였던 아이신줘러 부의의 비위에 맞춰서 개병(改名)을 한 것이였다. 협화회(協和會)가 하는 일이 선전선무(宣傳宣撫)였다. 바로 일제침략자의 앞잡이가 되어 항일군인들을 투항,귀순시킴으로써 변절케하여 항일진영을 와해시키는 그것이였다. 그 직책을 스스로 걸머지고 진력(盡力)한 사람이 바로 류치환이였던 것이다. 그는 시적재능이 있는 문인이였다. 시뿐이 아니였다, 그는 산문도 괜찮게  쓴걸로 보인다.   아래에 1942년 2월 6일자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발표한 네단락으로 이루어진 짧은 산문 "대동아전 쟁과 문필가의 각오"하나만 보기로 하자. "오늘 大東亞戰(대동아전)의 의의와 帝國(제국)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와 어느 나라의 그 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것일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皇國臣民(황국신민)된 우리는(중략).... 오늘 赫 赫(혁혁)한 일본의 指導的地盤(지도적지반) 우에다 바빌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 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선일보는 1937년부터 만주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로 발행된 조.석간 일간신문으로서 1945년 광복 이 날때까지 친일성경향이 강했다. 뚜렸한바 류치환은 일본이 발동한 침략전쟁을 이같이 공공연히 미화하고 찬양하면서 춰올렸으니 그 본심이 어떠하였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다음것은 그가 한달만인 3월에 에다 발표한 가장반동적인 시 수(首)인 것이다.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고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높이 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두눈은 먼 寒千(한천)에 모호의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보고있도다 너의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였으리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熱(험열)함과 그 決意(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無賴(무뢰)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不毛(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思慧(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보다싶히 얼굴이 말라든 항일군의 머리를 내놓고 조소하면서 보아라, 그 어느누구든 시세(時勢)를 거역하고 대항하면 너도 저모양이될터이니 그러지 말고 "귀순"을 하라고 권유했다, 한수의 시로서 본심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면서 노복다운 자신의 직책을 다했으니 상전쪽으로 놓고보면 수작(秀作)을 내놓은 충신이요 그야말로 재능있는 노복이 되기에 손색이 없겠다. 그리고 청마 류치환본신으로 놓고 보면 구천에 갔어도 현시대에 이르러서까지 자기를 선양하는 괴변(怪變)스러운 노복을 길러냈으니 만족스러울 것이다.     한데 보다싶이 청마류치환의 문학은 그 본신의 신분과 걸맞게 철두철미한 한간문학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인을 기념하고있다. 도대체 기념해야 할 리유가 무엇인가? 기념하겠거든 한국에서나 소리없이 할게지 중국땅 만주(동북)에 들여다 부덕부덕 할건 뭔가? 동북ㅡ 이 땅은 항일의 봉화가 타올랐던 곳이요 지금도 곳곳에 렬사비석들이 있어서 후대들에게 력사를 잊지 않게끔 교육하고있다. 한국의 청마문학관에게 묻고싶다. 류치환이 그리좋아서 기념하겠거든 한국에서나 할게지 왜 중국에는  부덕부덕 끌어들이는가? 그 목적, 그 야심이 대체 무언지 의심스럽다. 결코 좋은행실인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당신들은 그래 중국에서 자라나는 민족후대들의 교육을 망그러놓을건가? 헝클어놓을건가? 그런다면 체면을 몰라도 너무모르는 량심없는 짓이니 그러지말고 당장 거둬치우라. 그리고 대중의 여론도 불사하고 기념행사를 부덕부덕 행사하려는 "연변동북아연구원"측도 그렇다. 내가 그러는게 과연옳은가 그른가를 한번다시 곰곰히 생각해보기바란다. 이번경축모집에 응모하려는 사람도 반드시 한번다시 실황을 알아보고 숙고해보기바란다, 평생에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이 없게 하려거든!  
45    에세이 아이들은 죄없다. 댓글:  조회:4572  추천:4  2013-03-26
  에세이 아이들은 죄없다. 1966년, 바로 국민경제조설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여 국가가 제3차5개년계획을시작할 때에 의식령역에서의 비판운동이 점차 정치운동으로 번지면서 방향을 당의 령도층에 돌리였다. 하여 장장 10여년간이나 당과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다준 문화대혁명”이 터지게되였던 것이다. 모택동은 문화혁명초기 8차나 천안문에 올라 100여만명의 홍위병들을 접견했는데 그 시간을 라렬하면 아래와 같다. 1966년 8월18일, 8월 31일, 9월 15일, 10월1일, 10월 18일, 11월 3일, 11월 10일, 11일, 11월 25일, 11월 26일. 그중에서 11월 10일, 11일과 11월 25일, 26일은 거리가 짧으니 한차례씩으로 계산했다. 모택동의 접견을 받은 대학이나 중학교의 학생들은 다가 돌아와서는 “수정주의를 뒤엎는다”면서 짧은기한내에 “홍위병”을 조직하여서는 학교령도와 선생들을 끄집어내여 투쟁했기에 당정기관들은 충격을 받게되였던 것이다. 하여 그 운동은 재빨리 당내로부터 사회에 퍼짐으로 하여 급속히 전국성적인 사회동란이 시작되였던 것이다. 1966년 11월, 상해공예미술학교와 상해희극학원의 홍위병들은 저희들을 배워준 교원과 교장선생을 투쟁하면서 그 장면을 사진찍어 전국에 널어놓았다.  그와같은 일들이 전국의 각처에서 벌어졌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당령도층내에서는 광대한 간부군중이 “좌”경착오와 극좌적인 사조에 대해서 시종 정도부동한 형식으로 제지하고 항쟁했다. 제지와 항쟁의 표현은 비판에 대한 표현과 조판(造反)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즉 각자가 자기의 강위에서 사업과 생산을 견지하거나 아니면 우도우(武斗)에 항의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착오적인 작법을 엄하게 비평한 그것이다.... 허지만 문화혁명기세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문화혁명은 이른바 네가지 낡은것을 쓸어버는 거세찬 퍼쓰쥬(破四舊) 기세를 일킴으로 하여. 그시절을 산 람들에게 큰 재난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중화의 문명이 이루헤아릴수없이 손실을 보았다. 공자(孔子), 악비(岳飛)를 비롯한 많은 선인(先人)들의 능묘(陵墓)가 파괴되고 문물들이 털리우고 훼손되였다. 중화민족의 고유한 경천법조(敬天法祖)의 문화전통은 그렇게 훼멸되였던 것이다. 탈권을 놓고 벌린 패투쟁이 전국에 만연되였다. 전국의 각지에서 조판패(造派)들이 서로 제가 권력을 잡자는데서 패거리를 뭇다보니 분쟁과 충돌이 심했다. 무단적인 투쟁은 잔혹하했거니와 격화되였던 것이다. 하여 곳곳에서 상망자를 적잖게 낸것이다.  1967년가을, 그러한 형세였음에도 사부치, 왕력, 강청 등은 그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공(公), 검(檢), 법(法)을 철저히 부숴버리라”면서 “문공무위(文攻武衛)”를 해야한다는 구호를 내놓고 투쟁을 선동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경에서는 지어 국제법을 어기고 야만스레 영국대판처(英國代瓣處)에 불을 지르는 미런한 짓을 하기까지한 것이다. 그해의 몇 달은 “문화대혁명”이 전국적으로 발동되면서 가장격렬했던바 사회재난이 가장 업중한 계단이였다. 1967년에는 지어 향항에서마저도 문혁시위가 있은것이다.      문화혁명을 하면서 그 어디의 홍위병이나 다가 국가의 령도자들을 참혹하게 투쟁했다. 1968년 10월 13일부터 31일, 당의 9차대회를 열기위한 준비로서 8계 12중전회를 열었는데 당내의 생활이 극히 불정상적인 상황에서 강청, 강생, 사부치가 꾸며만든 류소기문제에 관한 “심사보고”를 통과했다. 그자들은 류소기에게 근본 있지도않는 “반역자, 내부간첩, 공인역적”이라는 죄명을 씌워 “그의 당적을 영원히 지워버리고 당내외의 일체직무를 철소한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류소기의 딸의 회고록을 보면 그날은 바로 류소기의 70세 생일이였던 것이다. 이날 류소기는 억울함을 못이겨 집에서 통곡했다. 1년후 병을 앓던 류소기는 치료도 제대로못받다가 가슴에 깊은 원한을 품은채 사망하고만 것이다.    그 외에도 팽덕회를 비롯한 국가의 고급간부 다수가 그같이 억울하게 투쟁받고 사망한 것이다. 억울한 투쟁과 죽음은 지어 청해의 핵기지에까지 감염이 되어 4,000여명에 달하는 사업일군이 박해받았고 다섯사람은 미묘하게 총살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중국의 첫 번째 “동방홍1호위성”이 예정된 비행궤도를 보면 파키스탄, 예멘, 우간다, 잠비아 등 제삼세계의 수도를 지나게끔 되어진건데 주은래총리가 기술인원들에게 지시하기를 위성이 각국의 수도위를 날아지날때는 우리 위성이 보내는 노래소리를 명확히 들을 수 있게끔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 위성의 이름이 “동방홍”이니 당연히 “동방홍”을 부르기로되였다. 한데 모택동을 하늘높이 떠받들고 숭배하는 때라서 어떤 사람이 제기하기를 탄도에다가 모택동의 상장을 박아놓자고제의했다. 그런다면 모택동을 열애하는 표현이 충분히 알리게되리라는 것이였다. 그러자 그 제의에 반대하는 사람이 나졌다. 반대리유인즉은 모택동의 상장(像章)을 박아넣는다면 무계가 엄중히 무거워지면서 위성자체의 의기가 내는 열을 정상적으로 발산못해 고장날 수 있기에 안된다는 것이였다. 그래도 쟁론을 하다가 나중에는 이 문제를 주은래총리에게 회보했더니 그가 다음과같이 말한것이다. “당신들 보라구,정치상 숭엄한 인민대회당에마저도 모주석상장을 걸어놓았으니.... 과학을 하는 사람이면 과학적인 태도를 가져얄게 아니겠는가. 객관규률을 존중하는게 좋겠다” 하여 달았던 상장을 뜯어버린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 첫위성이 만약시 고장나면 공중에서 자폭자멸하게끔만든 것이다. 인조위성까지 만들어 낸 그들의 공적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다. 하건만도 그들중 적잖은 과학가들이 문화혁명기간에 참혹한 박해를 받은것이다. 대호가 221인 청해핵기지에서는 중국의 첫 원자탄은 물론 수소탄도 만든것이다. 그런 상황이였는데 1969년 10월 림표의 “1호명령”에 의하여 221기지는 급속히 3선으로 이동하게되였다. 한데 221은 기지를 옮기는 과정에 뜻밖에도 두차례나 폭발사고가 생겼던 것이다. 그것이 본래는 일반적인 안전사고였다. 하건만 그것은 승급을 해서 국내외의 계급의 적이 짜고서 일으킨 반혁명파괴활동이라면서 “파안하면서 대오정리”를 시작한건데 류학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특무로 몰리우고 사업상 생활상 가까이지냈던 사람은 반혁명집단으로 몰아버렸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지의 80%넘는 차간의 과(科)실(室)이상간부, 90%의 고(高)중(中)급인원이 심사를 받고 박해를 받은 것이다. 1971년 9월 13일까지의 2년사이 4,000명에 달하는 직공이 심사, 박해를 받았은것이 되는데 그중 310명이 욕질과 매질에 시달림받아 잔페가 되고 40명넘는 직공이 원을 품은채 자살했다. 그리고  다섯사람은 똑똑한 죄명도 없이 총살을 당하고만 것이다. 그야말로 가슴터지는 원안이였다. 그런것이 1974년에와서야 한차레의 억울한 안건으로 정책락실을 받았다.    (《北京晚报》、《中华传奇》) 그 썩 전에 북경에서만도 홍팔원(紅八月) 그 한달사이 홍위병들의 손에 매맞아죽고 자살한 지식분자가 1,700이 넘는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북경의 어떤 홍위병은 개국원수의 귀뺨을 때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거니와 팽덕회원수에게 발길질을 했고 국가를 지은 작사자 전한선생에게 오줌을 먹이였다. 어떤 녀홍위병은 송경령의 머리를 깍아버리겠다고 날쳤거니와 할빈의 한 녀홍위병은 리범오성장을 투쟁하면서 가위를 들고 달려들어 머리를 깍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기까지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철없는 홍위병들은  조일만의 남편을 때려죽이였다 그러니 아들은 고통을 덜기위해 목을 매여 자살해버렸다. 홍위병들은 증국번(曾國藩)의 외손녀를 동뭉치달린 피대로 때려죽였다. 원인은 다른게아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예전의 력사인물이라는데서.   당시 모택동을 접견했던 홍위병들의 그 한사람에 대한 개인숭배는 신통히도 1932년에 독일에서 대의멸친(大義滅親)을 부르짖으면서 생겨났던 히틀러청년단이 그 파시스 히틀러를 숭배하고 신을 믿듯이 떠받들던 그모양으로 일종의 발광적이고도 야만적인 종교형상이 되어 그 기세가 최고봉에 올랐던 것이다. 그들은 담이커질대로 커져서 그야말로 안하무인격이였다. 마구때리고 뚜드려마스고 빼앗고 지어는 사람을 죽이면 그것이 혁명이고 충성인줄로 알았다. 그러니 그 일대의 충성이란 기실은 단순히 리해된 계급투쟁인식으로부터 생겨진 맹동이였을 따름이지 기실은 혁명성과는 1만8천리나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하길래 어떤 학자는 “홍위병”들의 행위를 "다른게아니다. 인간성과 리지를 잃은 한차례의 무모하고 미친작난질이다."라고했다. 그 애들이 어떻게 되어 그같이 망나니짓을 할수 있었던가? 한번다시 돌이켜 깊이생각해 볼바가 아니겠는가?.... 아이들은 죄없다!  
44    에세이 반우(反右)와 문혁(文革)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4387  추천:5  2013-03-23
  에세이 반우(反右)와 문혁(文革)에 대한 단상 나에게 성이 권씨인 옛친구가 하나있는데 나보다 몇 살 손우인 그는 현위생계통에서 사업하다가 나이가 되니 퇴직을 했다. 내내 우파모자를 쓰고 숱한고생을 한 그도 청년시절 한때는 내같이 문학에 뜻을 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만건데 그가 한번은 나에게 자신의 경험이라면서 심심히 권유하는 것이였다. 나더러 그 누구건간에 그가 만약 공산당원이라면 그런 사람앞에서는 천만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였다. 그건 왜선가고 내가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인즉은 그들은 다가 머리에 뿔난거야 김선생이 자기맘만큼믿고 고려없이 아무말이나했가는 뿔에 떠밖혀 작살이 나는거야 하는 것이였다. 공사병원의 같은 우파 김의사도 그렇게 말했고 내가 초중시절 벌조중(勃朝中)에 다닐때 존경하고 가깝게보냈던 지리교원 리성실(李成實)선생님도 언젠가 나에게 그같이 일깨워준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이나 그제나 내생각이 어떠면 어떤대로 내뿜는 성질인 나는 당시 내가 나이어렷기에 반우투쟁에 말려들지 않은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그것이 대체 어떤 운동이였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겁을 주었을가했다. 돌이켜보면 사실 자기생각 자기견해라해서 맘놓고 다 토로 할 수 없었던 것이 지난날 중국사회의 실정이였던 것이다. 그들의 권유에 일리가 있는지라 나는 각별히 말을 조심하면서 한때 흥미를 가지고 반우파투쟁에 대해서 연구했다. 1957년의 반우파운동은 모택동이 친히 계획하고 발동하였는바 그것은 중국의 지식분자들에게 지우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잎힌 일대의 재난성적인 잘못된 운동이였던 것이다. 원 사장 이였던 호기위(胡紀偉)의 말을 들어보면 호요방이 당중앙주석이 되자마자 우파들을 모두 평판해야한다고 했다는거다. 그런데 등소평이 동의하지 않았다나?  알고보니 원인이 있었다. 당시 당중앙의 반우파운동령도소조 조장이 바로 등소평이였으니 반우파운동은 그가 집행했던 것이다. 1957년 그때에 중앙통전부장이였던 리유한(李維漢)은 자기의 회억록에다 다음과같이 썼다. “공상좌담회기간에 어떤 사람은 진정한 자본가라야 다해봣자 얼마안되니  대표성이 크지 않다했다. 그래서 규모를 부단히 늘구었는데 북경에서 오금수(吳金粹), 천진에서 동소신(董少臣), 상해에서 리강년(李康年) 등을 찾아 그들더러 명방(鳴放)을 하라해놓고는 우파로 몰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는것을 ”인사출동(引蛇出洞)“이라했다. 적대투쟁방법을 그같이 인민내부에 써먹었으니 그것은 곧바로 적아를 뒤섞어놓은 것이다” 1957년에 모택동은 전적으로 그같이 전쟁때나 쓰기 적합한 이른바 “유적심입(誘敵深入), 취이섬지(聚而殲之)” 즉 적을 깊이끌어들이여 섬멸한다는 따위의 책략을 썼으니 그건 그가 많은 자기사람들을 완전히 적으로 인정하고 반우파투쟁이라는 명의로 한차례 전쟁을 발동하듯이 잔인한 소멸전(掃滅戰)을 했다는것을 말한다.                                   ( 第13輯) 모택동은 반우파운동을 발동하면서 말하기를 “우파는 극소수다. 전국적으로 다해봤자 몇천명, 많아봣자 몇만명밖에 않될테니 그네들이 세상을 뒤엎지는 못할것이다”했다. 그런데 결국은 우파가 55만에 이르었으니 반우파운동이 확대되여도 기막히게 확대되였던 것이다. 그때의 “숙청방법”이라는 것을 보면 지어는 지표를 내와서는 그 지표를 아래에다 떨구는 따위의 현실적이 못되는 야만적인 수법을 쓴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세상 그 어느 나라에서 자국의 지식분자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잡아먹은적이 있었던가? 과연 지천이 들어도 통탄하여 분노할 일이아니고뭔가!  알아야 할 것은 그때 모택동은 방침을 내놓았을 뿐 구체적인 사무는 보지 않고 등소평에게 맏겨버렸다는 그것이다. 55만의 우파가 어딘가! 등소평, 그역시 생전에 그같이 대원안(大怨案)을 만든적이 있었다면 그누가 쉽게 믿으랴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인 것이다 모택동의 인치(人治)주장을 마감까지 과감히 반대하면서 법치(法治)를 주장해온 고집스러운 그였지만 모택동이 사망하고 “사인방”이 꺾꾸지자 “잘못을 바로잡는 형세”에는 어쩌는 수 없이 우파를 평판해서는 안된다는 제 고집을 접고만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게 과연옳았다. 아니그러고 고집부렸다면 뭐가되겠는가? 그랬다면 그역시 쌓은 공이 얼마였던지간에 국민의 빈축을 영원히 면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깨달음과 뉘우침은 그야말로 귀한 것이다. “모택동은 1957년이후부터 착오가 점점 더 많아졌다.” 이것은 등소평이 한 말이다. 그의 그러한 평가는 옳은것이다. 총적으로 보면 1957년이전에는 모택동이 령도하는 것이 옳았지만 57년반우파투쟁을 해서부터는 점점 망태기를 캐기시작한 것이다.   “반우파운동은 정치상 한길을 걷는 사람, 합작하는 자를 배척했거니와 문화예술계의 으뜸가는 인재들을 쓸어버렸고 사상계의 철인들을 요절시켰으며 조국건설에 깁급히 수요되였던 수많은 지식분자들의 전도를 망쳐버림으로 하여 중화민족과 공화국에 아주침통한 국상(國殤)을 입힌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더한것은 계급적인(실상은 진정한 무산계급도 아닌) 전면적전정을 야기시킨 그것이였다."                            (2010年10月30日. 文汇报. 读书周报)   단번에 55만에 달하는 우파분자를 만들어내여 그들을 엄벌에 처했는데 그 대다수가 로동개조를 하다가 문화혁명이 끝나서야 비로서 명예를 회복했다. 거의가 일생을 망치고만것이다. 생명을 잃은이는 또 얼마였겠는가!.... 나는 반우파운동을 보고  문화혁명을 친히 겪으면서 깨달은바가 있다. 무엇인가? 국가에서는 건국이래 약간의 력사문제의 결의에 대한 선전을 중시해야한다는 것, 문혁의 잔얼들을 깨끗이 숙청해야 한다는 것, 문혁기념관을 세워야한다는 것,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뉘우침이 없다면 력사는 또다시 반복될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하야 한다는 것 등이다. 투서기기(投鼠忌器)라고 기물을 깰까봐 쥐를 때려잡지 않아서야되겠는가, 요새 인터넷을 보면 어떤 네지튼들은 공공연히 반우파투쟁은 옳았다느니 문화혁명을 다시해야한다느니 뭐니 나발분다. 그따위 나쁜놈은 견결히 잡아버려야 한다. 내가 말하려는건 국가가 대중이 바라는 법치(法治)는 중시하지 않고 그 어느 한 개인이 세도를 부리는 인치(人治)를 하게 놔둔다면 차례지는건 오로지 전국민이 이미 맛볼대로 맛본 재난이 다시돌아올뿐이니 국가는 전면적인 교육을 일으킴으로써 공화국내에 다시금살아날 수도 있는 황권사상(皇權思想)을 그 어느때든 꼭 철저히 매장해버려야한다는 그것이다. 강조하거니, 국민모두가 지난때의 “반우(反右)”는 중국의 원기(元氣)를 훼멸했고 “문혁(文革)”은 중국의 령혼(靈魂)을 훼멸했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43    에세이 인치(人治)와 법치(法治) 댓글:  조회:4868  추천:3  2013-03-18
  에세이 인치(人治)와 법치(法治)   모택동은 법치(法治)를 버리고 인치(人治)로 국가를 건설하고 백성을 다스려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그릇된 주장을 그가 혼자서 발명한건 아니였다. 일찍이 레닌이 로씨아공산당(후에 볼세위크로 고침)을 창건하여서는 폭력으로 제정로시야를 뒤엎은 후 당, 정, 군을 최고도로 통일시켜놓았거니와  그 기초에서 모든 곳의 당권리가 최고로 되는 당국가(黨國家)체제를 일떠세웠던것이다. 중국에서는 손중산이 자기가 이끈 혁명이 거듭되는 좌절을 격게되자 로씨야쏘베트의 당국가(黨國家)체제를 중국에 끌어들이였으니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그때로부터 중국에서도 쏘련모양으로 당이 나라를 다스리는 본새가 나오게 되였던 것이다. 그뒤를 이어서 장개석이 “하나의 주의, 하나의 정당, 하나의 령수”라는 로선을 내놓음과 동시에 집정당이 정부와 군의 대권을 한손에 거머쥐었고 국민모두가 수령인 자기에게 충성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국민당의 당문화(黨文化)가 나오게 된 것인데 독재통치를 하다보니 국민당의 그 당문화(黨文化)는 불가피적으로 파란곡절을 겪기도 한 것이다. 장개석의 설법을 보면 국민당이야말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당”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의 모든 권력을 국민당혼자가 틀어쥐어야한다는 것이였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장개석은 손중산의 정치유산을 이어받았고 그런후에는 그를 리용하여 “당이 나라를 다스린다”는것과 이른바의 그 “삼계단론법”으로서 극권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세워 철저히 독재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여서는 공산당역시 그 본새를 답습했다. 바로 모택동이 그러했던것이다. 특별히는 1957년 “반우파투쟁”에 뒤에 열린 제4계사법공작회의후 정법기관이 당의 “절대적령도”를 강조함으로 하여 한개당이 단독으로 집정하는 당국가(黨國家)란 개념이 모든 국민의 머리속에 인식으로 굳어지고말았던 것이다. 모택동은 1958년 8월 24일에 열린 북대하(北戴河)회의석상에서 말하기를 “많은 사람을 법률로 다스리려니는 생각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따위건 믿지도 않는다. 주로는 결의에 의거해야 한다. 한해에 회의를 네 번은 열어야한다. 민법에 의거말고 형법으로 질서를 유지케해야한다. 우리들의 매차의 결의는 다가 법이다. 회의를 한번열어도 역시 하나의 법이 되는거다.” 라고 하면서 그는 또 말하기를 “인치(人治)를 해야지 법치(法治)를 하지 말아야 한다. 사론한편이면 전국에 집행이 될건데 법률이 무슨소용있는가?”   류소기가 말했다. “대체 인치(人治)를 해야하는가 법치(法治)를 해야 하는가? 법률이란건 그저 일을 처리함에 참고로나  될 뿐. 당의 결의면 곧바로 법이다.” 그가 말한 그따위의 론단이 바로 이당치국(以党治国)론의 극단적인 표현이였던 것이다. 그런 주장은 당권이 이미 무한히 팽창되였음을 말하거니와 실제상에서 법제를 파기하는 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공산당내에는 그 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시종 제주견을 품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등소평이였다. 그는 일찍이 1941년에 벌써 공산당도 국민당모양으로 당, 정, 군의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당수(黨首)에 의하여 혁명을 하고 나라가 다스려져야한다는 론조가 생기자 그런다면 그건 틀리는 것이라면서 그 론조를 비평한 것이다. 그해의  4월 15일에 쓴 글을 보면 “어떤 동지가 주장하는 ‘이당치국(以党治国)’관념은 국민당의 악렬한 전통이 우리 당내에서의 구체적인 반영이다”면서 “이런 동지는 당의 우세에 대해서 오해하는것같다. 당원이 모든 것을 도맡기만 하면 그것이 우세로 되는줄로 아는지 진정한 우세는 군중의 옹호에 따라서 표현이 된다는것을 모르고있다. 그 우세가 권력에서 세워진 것이라면 그것은 믿을바가 못되는 것이다.” 하면서 그는 또 덛붙이기를 “모든것을 당이 도맡아 결정한다면 정부는 해서 뭘하겠는가, 정부의 모든 법령이 당의 법령이라면 결국 정부가 잘못될 때는 그 잘못은 기필코 다가 당의 착오로 되고 말 것이니 그래서야 어디되겠는가. 그런다면 정부는 위신이 납작하게 되거니와 당은 결국 군중을 리탈하고 말 것이다. 세상에 그보다 더 미런한 머저리가 어디있는가!” 라고 했다.           등소평은 그러지 말고 나리와 백성은 마땅히 국법(國法)으로 다스려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방략까지 내왔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지어 이당치국(以党治国)은 국민당이 남긴 유독이라면서 그것은 우리 당을 마비시키고 부식시키고 파괴하며 군중과의 관계를 리탈시킬수 있기에 그 유독이 우리 당내로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했다.   오늘와보면 그때의 그 주장은 과연 현명하거니와 틀림없는 것이였다. 어찌 탄복하지 않으랴! 그의 그러한 언론과 주장으로부터 우리는 비록 체구는 작아도 그 누구보다 포부가 드넓은 그이야말로 원견이 있는 책략가이며 출중한 당의 지도자였음을 심심히 느끼게되는 것이다. 등소평은 “4인방”이 꺾꾸러져 몇해안되여 일거에 성공적으로 최고의 권력을 거머쥔 최고의 당수가 되었거니와 10년내란에 의하여 엉망이 된 상태를 정리하면서 개혁개방로선을 내놓음으로 하여 국가가 륭성하는 궤도에 건듯이 올라서게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이 왜서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재난을 겪게되였던는가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총결지으면서 지나온 경험으로부터 당과 국가의 령도제도에 대해서와 당이 정부를 대체하는 문제에 대해서 마땅히 개혁할 필요가있다고 생전에 수차말한바있다. 그러했으니 후계자는 물론 모든 공산당원, 모든 국민이 응당 계발을 받아야 바이겠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집정당이 된 혁명당은 의례 법제부터 건전히 하면서 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걸어야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응당 일찍부터 전국민들 단결시키고 튼튼히 묶어세워 국민모두가 평화로운 분위기속에서 서로믿고 이끌면서 안거락업을 하는, 그래서 사회주의건설에 이바지하는 화기롭고도 조화로운 환경속에서 맘놓고 살아가게끔만들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를 않았다. 여러 가지 구실로 지속되였던 계급투쟁은 사람을 히질기게 지겹게 만들었을 뿐 아무런 리익도 없었다. 당이 나라를 다스려야 응당하다는 그 하나의 굳어진 관념에다 나라건설보다 계급투쟁을 우선에 놓고 그것을 본분으로 여기다보니 당원개개를 훌륭한 “건설자”로보다는 피투성이 되게 싸움질잘하는 “투사”로 길러냈던 것이다.    계급투쟁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도를 훨씬 넘어 너무도 지나쳤던 것이다.   반성이 비교적 허심하고 철저한 이는 국가주석이였던 류소기다. 그는 1962년 1월에 열린 7,000명대회에서 전국성적인 험한 재해가 발생된 원인을 분석할적에  “3푼자연재해에 7푼인화”라고 했다. 즉 7푼은 사람으로 인한 화(禍)였다는 것이다. 같은해의 5월, 류소기는 1958년이래의 정법(政法)집행정황을 총결지으면서 명확하게 말한 것이다. “이 몇년간 정법공작의 총적인 경험교훈을 보면 두가지 부동한 성질의 모순을 뒤섞어놓은 것인바 주요하게는 자기사람을 적으로 잘못보고 타격면을 넓혀놓은 그것이다.” “어떤 당정책임자는 공안국이나 검찰원은 안중에 두지도않고 사람을 제맘대로 붙잡게 비준했다. 지어 어떤 공사나 공장, 공지에서마저 사람을 함부로 붙잡는 일이 발생하기도했다.” “자기사람의 문제를 처리할적에도 적대계급에 향해 사용하는 전정의 방법으로 했으니 그것은 근본적으로 착오인 것이다. 이런것은 공산당작법이 아니고 국민당의 작풍으로서 인민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서서 인민에게 압박을 가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법원이 독립적으로 심판하게 하는것이 맞다. 헌법에다 그렇게 규정하지 않았는가. 당위와 정부는 응당 안건에 간섭말아야 한다.” “법기관은 각급당위의 령도에 복종해야한다는 말을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 지방당위의 결정이 법률, 중앙정책과 맞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상황일 때는 법률에 복종하고 중앙정책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어떠했던가? 결국은 제멋대로 전정을 부리고 정치숙청을 계속했으니 온 나라가 무사할 사이없었던 것이다. 백성이 언제 태평가를 불러나봤던가? 지속되는 그 계급투쟁에 말려들어 억만백성이 해만입었으니 결국은 집정당자신이 자기의 형상에마저 손상을 크게 입혀서 그 꼴이 볼품없게 되버린 것이다.   중국에서는 법치(法治)를 무시하고 인치(人治)를 해온 그 대가로 받아진것이 결국은 중국의 력사는 물론 세계사에까지 기록이 되는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 10년간의 대재난이였다. 국가주석 류소기는 그 자신이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채 타도되였거니와 모진 박해속에서 원을 품은 채 비참히 죽고말았다. 그랬으니 그것은 공화국의 력사상 가장큰 대원안으로 되는 것이다. 어디 그이 한사람뿐이였는가, 그의 죽음과 같은 원안은 헤아릴 수가 없이 하도많아서 일일이 라렬불능이다. “문혁”때 인원수가 제일많은 대원안(大寃案)은 아마 “내몽고내인당(內人黨)” 안(案)일 것이다. 최고인민검찰원특별검찰청에서 제공한 기소서(起訴書)에 보면 그 안건에 걸려든 간부가 무려 34.6만이 넘는데 터무니없이 박해받아 죽은 군중이 16,222명이나 된다.  그 외에도 이 안건에 련류된 무고한 백성이 10만인데  죽은사람이 1.6만여명! 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면 그같이 많은 사람이 박해받고 귀한 생명을 잃을 수 있었을가? 이따위 소름끼치는 참안은 오직 법을 무시하고 전횡독단하면서 인치(人治 )를 주장한 잔인한 독재자가 존재했던 중국에서나 생길 수 있는 일이였다! 선량한 국민은 모두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각성해야 한다, 이 땅에서 그런 비극과 재난이  진정 다시금 재연되지 않게 하려거든!          
42    에세이 미국에 탐관이 없는 원인 댓글:  조회:3996  추천:2  2013-03-15
  에세이 미국에 탐관이 없는 원인   첫째는: 주장, 시장이 시정건설과 반공물품을 사들임에 결정권이 없다. 재정지출에 관계되는 모든 항목들은 주, 시의 의회가 집체토론에서 심의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주장, 시장은 그것을 집행만 하지 결정권이 없다. 그러니 부패해질려해도 부패해질 조건이 안되는것이다. 미국은 그같이 제도를 내옴으로써 그 어떤 개인이든 권리를 리용하여 사리를 도모할수있는 길을 철저히 막아버린 것이다.   둘째: 미국은 사법이 독립했다. 법원은 그 어느 정당이나 정부책임자의 지도를 받지 않으며 그 어떠한 사람의 "보호산"으로도 돼주지를 않는 것이다. 세인이 다 알다십히 지난날 크린턴총통의 혼외정사문제마저도 검찰관이 관여를 해서 세상에다 밝혀놓은 것이다.    셋째: 미국은 신문이 몹시 자유롭다. 모든 정부관원이 신문매체의 감독속에 들어있는바 그 어느누구건간에, 례를 들면 급이야 높던낮던간에 가림이 없이 일단 고압선에 맛다들기만 하면 넋살을 먹거나 여론에 배겨내지 못해 끝장을 보고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인간이 어찌 사심(私心)이 없으랴. 거의가 한본새로 사심은 다가 있는것이다. 솔직히 말해 미국사람이라해서 중국사람보다 반푼어치도 인간적으로 더 낳은건 없다. 속담에 "황금이 흑사심"이라했다. 미국의 관원이라고 다가 탐오를 하고싶지 않을가? 공금으로 먹고 마시고싶지 않을가? 공금으로 려행을 하고싶지 않을가?.... 하지만 그들은 감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인성(人性)에는 탐욕과 아름다움이 병행(竝行)한다는 것을 보아낸 미국의 개국원로들은 인성의 추악한 면은 베여버리고 아름다운것을 살려내기 위해 알심들여 연구한 끝에 마침내 그같이 훌륭한 정치제도를 내온 것이다. 내가 보게도 그것은 아주좋은 것 같다.   한데 중국은 어떠한가? 주류가 아니고 일면이기는 하나 당정기관에서 부패분자가 많이 배출됨으로 하여 국민은 경악하고 저주하면서 령도에 대한 신뢰가 실락하고있는 것이다. 전에 써먹은 위인민복무(爲人民服務)라는건 하나의 방패막에 불과한 보기좋은 패쪽으로 그려졌을 뿐 실효를 잃은지 오래다. 어느때부턴지 중국에는 “有權有錢”, 즉 권리가 있으면 돈이 있다는 성어가 생겨나 류행되고있다. 권리를 손에 쥐였을 때 머리만 잘쓰면 돈은 얼마든지 생기겨 부자가 되어 복을 누리거니와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극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고약한 배짱과 더러운 물욕이 암류로 되었다는 거다. 그래서 어떠한가? 살펴보면 이 몇해간에 아름다운 인성(人性)은 지키지 않고 스스로 탐욕만을 맘껏 자래우다보니 결국은 부패할대로 부패해져 적발된자가 줄줄이고 손목이 쇠고랑이에 채워 끌리워가는 자도 줄줄이다.   만약 부정부패를 효과있게 다스리지 못한다면 당은 인민들의 신임과 지지를 다 잃고 말 것이다. 당정기관내의 부정부패분자들을 척결하지 않는다면 결국 당이 스스로 망해버리거니와 나라는 다시금 재난을 만나 훼멸되고 말 것이다. 하기에 당중앙에서는 정신을 부쩍차리고 장구적인 주요과업으로 부정부패척결에 칼을 댄 것이다.   중국공산당에서는 박희래(薄熙來), 진량우(陳良宇), 류지군(劉志軍), 두세성(杜世成), 정소유(鄭筱萸), 진소기(陳紹基), 왕화원(王華元), 황송유(黃松有), 왕익(王益), 강일신(康日新), 황요(黃瑤), 허종형(許宗衡) 등 한무리의 요안을 처리한 뒤를 이어서 2007년 10월 9일부터 12일까지 개최되였던 중공제16계중앙위원회 제7차전체회의에서는 를 거쳐 중앙정치국은 그의 당적을 긁어버리는 것으로 처분을 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2008년 4월 11일에는 천진시제2중급인민법원에 넘겨진 진량우(陳良宇)가 수뢰죄와 직권람용 두가지 죄명에 의하여 도형 18년에 떨구었거니와 개인재산 30만원이나 몰수를 한 것이다. 경제문제에 대한 처리뿐이아니였다. 2011년 2월 26일, 전국인대회의에서는 철도부부장 류지군(劉志軍)의 직무를 긁어버렸고 12월 28일에 있은 국무원상무회의에서는 “7.23” 특별히 중대한 용언선(甬温线) 철도교통사고를 처리할것을 결정했거니와 지난해 즉 2012년 5월에는 엄중한 기률위반이라하여 그의 당조서기직무를 해임함과 동시에 당적마저 박탈해버린 것이다.  이상 몇가지만 례를 드는데 지금보다십히 그같은 처리가 가차없이 계속되고있으니 백성은 통쾌하여 갈채를 보내고있다. 시원하고 좋은 일이다!   한데 그보다 더욱 필요한것은 무엇보다 당정기관의 권력자가 제 권력을 믿고 죄를 짓지 않게끔 조취를 취하는게 아닐가? 바로 미국에서처럼! 남은 그같이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왜 없겠는가? 인대(人大)와 정협(政協)은 절대적으로 공산당을 따르며 옹호하고 있다. 이는 13억이 넘는 전국민의 한결같은 마음인것이다. 모든일에 공산당인이 독단하려하지 말고 믿을건 믿어야 한다. 나라의 중요공정으로부터 기관들의 재정행사권만이라도 당과 인대와 정협 세집에서 공동히 가지면안되겠는가? 쓸데없는 지나친 간참이라여길지 모르겠지만 일개 문학자의 솔직한 걱정이다.         
41    에세이 중국식의 필부대(筆部隊) (2) 댓글:  조회:3829  추천:2  2013-03-05
            에세이 중국식의 필부대(筆部隊) (2)   나는 앞글에서 대자보를 언급했다. 지난때의 일을 살펴보면 대자보(大字報)나 소자보(小字報)나그것들은 다가 선전공구로서 하나의 공동한 점이라면 남을 폄하하고 헐뜯는 고약한 습성과 본능을 갖고있었다는 그것이다. 그것들의 차이란, 대자보가 대중에게 선전을 널리하는데 비해 소자보는 대부분이 어떤 요원의 내막을 적발, 폭로하는 정도에 이르는 글이라는 점이다. 현세(現世)에 들어 중국에서 대자보(大字報)와 소자보(小字報)가 활개를 친것은 6~70년대 즉 대약진운동, 반우파운동과 문화대혁명때였다. 대개는 문장을 꾸밀줄을 아는 사람이 일본의 필부대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필을 잡고 글을 썻는데 문맹을 내놓고는 그 시대를 살면서 글자를 좀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아마 거의다가 그것들을 읽어봤을 것이다. 그러했으니 대자보건 소자보건 그건 다가 그년대 중국식정치생활의 한 본새를 잘 보여준 것이다.   모택동은 1958년 3월, 성도(成都)회의때 “대자보는 춘추시기에 벌써 나왔으니 력사가 오래다”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중국에서 발명된 이것을 버리지 말고 농촌에서도 널리사용하게끔 해야한다고 했다. 하여 그것이 에 들어가게 되였던 것이다.   대자보(大字報)가 처음으로 많이쓰이기는 1957년도 반우파투쟁때였는데 바로 그것이 그번의 “운동”을 엄중하개 확대시켜놓았던 것이다. 그당시의 대자보들을 보면 많이는 되도록 색깔이 같잖은 종이를 썻는데 형식도 여러가지였다. 짧은글, 잡문, 구호에다 만화까지 동원되여 종이면들을 채웠던 것이다. 반우파투쟁에서 대자보가 널리사용되면서 따라 대변론이 벌어지군한건데 그때는 그것이 많이는 남을 헐뜯고 공격하는 무기로 리용되였던 것이다. 한데 우수운건 어떤사람은 대자보를 썻다가 우파로 몰리고 어떤사람은 대자보의 적발에 의하여 우파로 되몰리우고 만 그것이다. 대자보를 정치무기라 하지만 따져보면 그것이 실상은 무산계급에도 자산계급에도 유익한건 아니였다. 례를 들어 반우파투쟁이 겉보기에는 대자보에 의하여 “승리”한것 같지만 기실은 그 “승리”로 인하여 치룬 대가는 너무나도 엄중했으니 말이아니였다. 55만에 이르는 지식분자가 우파모자를 썻으니 어딘가! (어떤 사람은 실제수를 300만으로 까지 보고있다.) 우파로 몰린통에 그들의 운명이 처참하게 된건 제쳐놓고 그네들이 소유했던 유능한 기능마저 제대로 발휘 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으니 그로인해 국가가 입은 손실은 얼마나컷던가? 이 세상에서 제나라의 지식분자를 그같이 기를 펴지 못하게 눌러놓고 박대한 나라는 아마 중국을 내놓고는 더 없을것이다! 지난때의 반우파투쟁은 그 무슨 휘황한 “승리”인것이 아니라 력사에 꼭 치욕으로 기록이 돼야 할 대원안(大寃案)인 것이다!   더 중요한것은 당이 계급투쟁을 진행함에 있어서 그 후에도 실제를 엄중히 탈리하여 무릇 지식분자면 “고린내”난다면서 지어는 몇째 몇째라는 딱지를 붙이였거니와 평생 “개조대상”으로 결정해놓았기에 군중속에서의 위신을 형편없이 크게 실추시킨 그것이다. 그런다고 로동계급대오가 더 건실하고 공고해졌던가? 아니다!  이만큼 각설하고 지나간 “문화대혁명”을 보기로 하자.  본래는 모택동이 길어야 3년내에는 끝내려는 생각이였지만 그의 재간으로서도 도저히 수습할 수 없어서 10년간이나 지속되였던 그 대내란은 따져보면 “대자보”가 지속적으로 작용하면서 혼란을 조성한데도 원인이 있는것이다.   “문화대혁명”이란건 어떻게보나 근본 하나의 혁명이 될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반혁명”이라할수도 없는것이다. 근본적인건 모택동이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과 타산이 틀린데있은것이다. 모택동의 위신은 중국혁명이 승리함으로 해서 나날이 높아갔던바 그 자신에게 교오하는 정서가 생기였고 개인적인 독단이 발전하여 당내의 민주와 법제를 파궤하였기에 결국은 불행한 후과를 초래하고말았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본래 정치, 경제, 문화가 락후한축이였다. 그렇다는것을 알면서도 혁명이 승리한 후 제때에 그런 상태를 벗어메체지 못한것이다.  그리고  문화, 교육, 지식분자 에 대한 여러방면의 장기적인 편향도 있었으니 그런것들 다가 “문화대혁명”을 일으킴에 비상히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이다. 봉건전제주의류독으로하여 영향이 있는데다 공산당은 집정후 성숙된 리론과 효과적인 감독이 결핍했고 반수방수(反修防修)를 맞지 않게도 국내, 당내에다 확대했거니와 공상적인 사회주의목표를 세우고는 그것을 추구한것이다. 이런것들 다가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동된 주요원인으로 되였던 것이다.(胡喬木: “文革”不是革命,是內亂!) 하건만 그 진가를 도저히 알수없었던 수억만의 중국백성은 모택동을 붉은태양으로 여겼고 그가하는 일이면 모든것이 다 옳다면서 하늘높이 떠받든 것이다. 그를 숭배함이 지어는 신을 믿듯이 열광적이였으니 국민의 무지를 더 말해 무엇하랴!  “갈수록 수미산”이라 온 사회의 인간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으면서 점점더 험한 가시밭으로 이끈것이 바로 도처에 나붙은 대자보와 구호였던 것이다. “모주석은 영원한 태양!” “모주석을 목숨으로 보위하자!” “누가 모주석을 반대하면 우리는 그의 개대가리를 까부실테다!” “문화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등등. 온 사회의 분위기가 그러했기에 만약 그 누가 그와 당에 대한 티끌만한 회의나 불만을 품어도 끝장을 보는 판이였다. 대자보가 곧바로 대민주를 발양하는것이라 했다. 과연그러했단말인가? 1978년 12월 13일 중공중앙사업회의 때 엽검영이 선포한 통계수자 한토막만이라도 한번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잔혹하게 박해받은 사람이 1억이니 전국인구를 9억으로 칠 때 그 비례는 9분의 1이 되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자 2천만을 넘고 손실본 국민경제는 인민페로 8천억원에 달한다.”   중국은 문화혁명때 명실공히 세상어느 한 나라도 따를 수 없는 방대하고 튼튼한 필부대(筆部隊)를 갖고있었던 것이다. 대재난을 만듬에 “대자보”가 100프의 작용을 했다. 그렇다면 손에 붓을 잡고 그것을 직접 쓴 사람은 어떻게 봐야하는가? 1980년 9월, 5계전국인대3차회의는 제45조의 이른바 “4대자유”라는것을 취소하기로 결정했고 두해지나 1982년 11월하순부터 12월상순에 이르는 사이에 개최된 5계전국인대5차회의에서는 수개된 을 통과했는데 “4대자유”에 유관한 조문(條文)이 철저히 지워지고말았다.   대자보는 끝내 력사의 흔적이 된 것이다.
40    에세이 중국식의 필부대(筆部隊) (1) 댓글:  조회:4365  추천:0  2013-03-04
   에세이 중국식의 필부대(筆部隊) (1)   지난세기 한때 10여년간이나 중국대륙에서 벌어져 수습하기어려웠던 그 “문화대혁명”은 이른바 중국식의 적극적인 대민주표현이라던 “4대자유” 즉 대명(大鳴), 대방(大放), 대변론(大辯論), 대자보(大字報)에 의하여 진행되였던 것이다. 한즉 그것이 그 당시는 혁명자들이 쥐고 놓을 수 없었던 필수무기였던것만은 사실이다. 한데 그 무기들에서 지금까지도 사람의 눈에 뚜렷이 각인(刻印)이 된 실존물(實存物)은 바로 대자보(大字報)인 것이다. 하다면 대명, 대방, 대변론의 직접적표현물인 대자보(大字報) 그것은 도대체 어떤물건짝이였던가? 스산한 가을철 가랑잎이 흩날리듯이, 매서운 겨울날 눈보라를 일쿠듯이 중국땅 온 천하의 그 어느 한 구석도 빼놓을세라 나붙고 흩날릴것이 바로 대자보(大字報)였으니 그 수가 도대체 얼마였는지는 귀신이나 알지 통계를 해낼수도 추측을 할수도 어려울지경인 것이다. 하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66년 5월 25일, 북경대학철학계당총지서기 섭원재(聶元梓)를 비롯한 철학계의 다른 6명의 선생이 련명으로 대학교식당벽에다 “송석, 륙평, 팽패운은 문화혁명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가?”하는 대자보를 내붙이였다. 모택동은 그것이 “전국의 첫마례주의대자보”라 했다. 하여 그때로부터 대자보바람이 온 대륙에 불어치기 시작한 것이다. 6월 1일, 중앙인민방송국은 그 대자보의 전문을 방송했다. 하여 전국성적인 쪼판운동(造反運動)이 일어나게 된건데 6월 2일, 강생(康生)은 북경대학에 가 섭원재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면서 그가 발표한 대자보는 “파리공사식선언”이라 했다. 그러니 그것은 가장 무산계급적인 것으로 높이 평을 받은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맨먼저 시작되였던 당시 북경의 24개 고등학교를 보면 10,211명학생이 “우파”로 몰리였고 2,591명의 선생이 “반혁명”으로 몰리였던 것이다.  류소기는 기층에서 일으킨 그같은 혁명정서를 늦춰보려는데서 공작조를 파견하여 문화혁명령도권을 중앙에서 장악하려했다. 한데 이로하여 섭원재 등 그 몇몇 쪼판파((造反派)의 반항에 부딧친 것이다. 얼마안가서 류소기가 파견한 공작조는 모택동에 의하여 철소되고말았다.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계중앙위원회 제11차전체회의때였다. 5일날 모택동은 신문지의 여백에다 연필로 “사령부를 포격하자ㅡ 나의 첫대자보”라는 것을 썻는데 는 당날에 그 전문을 실었다. 그런 후 이틀만인 8월 7일에 모택동은 그것을 정서하여서는 섭원재 등 그 일곱사람이 쓴 대자보와 함께 인쇄하여  회의장에 널어놓았던 것이다.   그 대자보에다 류소기, 등소평의 자산계급사령부를 향해 “포격”한다고 했다. 무엇을 가리키는가? 더말할것 없이 이는 그와 류소기지간의 모순과 충돌이 이미 조화될 여지가 없이 첨예하여졌음을 공개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등소평은 훗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계회의 때 모주석이 내놓은 대자보는 바로 류소기동지와 나 두사람의 사령부를 포격한 것이다.” 류소기도 등소평도 다가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위원이였다. 하지만 모택동의 그 “대자보”가 나와서부터는 그 두사람은 령도강위를 떠나 적발과 비판의 지위에 놓이고 말았던 것이다. 당내의 지위로 보면 2번째였던 류소기가 8번째로 밀리였고 그대신 6번째 아래자리에 있던 림표가 2번째자리로 뛰여올라갔던 것이다.   1967년 1월 1일, 북경 고등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은 천안문광장에서 집회를 가지고 류소기, 등소평의 “죄행”을 “성토”했다. 그리고는 그 뒤를 이어 그해의 상순에 북경의 신화서점과 운수련합공사가 련합하여 천안문광장에서 많은 군중이 보는데서 류소기와 등소평의 화상(畵像)을 불태우고는 이어서 류소기와 등소평을 비판투쟁하라는 전보를 전국각지에다 공개적으로 날린것이다. 1968년 10월 13일부터 31일사이에 중공은 북경에서 8계 12중전회를 열고는 “자본주의길로 가는 첫 번째인물” 류소기를 영원히 당에서 축출한다고 선포했고 등소평은 모택동이 간여하에 당적을 겨우 보류했다. 그야말로 한심하게 번져가고있는 세상이였다!   류소기는 철딱서니없는 홍위병들의 야만스러운 투쟁과 무함으로 기껏 날조된 온갖의 죄명하에 혹독하기 그지없는 박해를 받았다. 중병에 걸려 모색마저 알아보기 힘들지경이 된 그를 접수했던 합비시병원의 한의사가 토로한것을 보면 “그 병자는 혈관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어서 주사도 놔주지 못했다”는 거다. 집을 떠나서, 처자를 떠나서, 자신을 변호도 할수없이 엄밀히 감금된 상태에 병들고 지친 몸이 되였던 류소기는 1969년 11월 12일 새벽 6시 40분에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일개 국가의 당당한 주석이였건만 아무런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천고의 원안이 아닐 수 없다! 모택동은 바로 자기가 쓴 “대자보”하나로 그렇게 류소기를 잡은것이다!   1987년 4월 30일 등소평은 서반아공인사회당 부총서기며 정부부수상이였던 거라를 회견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던것이다.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이 10년이나 끌었는데 그건 한차례의 대재난이였습니다. 그때는 많은 로간부들이 박해받았는데 그속에 나도들어있습니다. 나는 류소기다음 부번째가는 자본주의길로가는 집권파였으니 통수는 류소기였고 나는 부통수였지요. 그 십년사이에는 별의별 괴상한 일들이 다 생겼던겁니다.”   등소평의 말과같이 중국에서는 별의별 괴상한 일을 다 꾸며만들면서 사람잡이력할을 충분히 한것이 바로 대자보였던 것이다. “중국식의 필부대”는 바로 그렇게 생긴 것이다.      모택동의 대자보:   炮打司令部——我的一张大字报   全国第一张马列主义的大字报和人民日报评论员的评论,写得何等好啊!请同志们重读这一篇大字报和这篇评论。可是在五十多天里,从中央到地方的某些领导同志,却反其道而行之,站在反动的资产阶级立场,实行资产阶级专政,将无产阶级轰轰烈烈的文化大革命运动打下去,颠倒是非,混淆黑白,围剿革命派,压制不同意见,实行白色恐怖,自以为得意,长资产阶级的威风,灭无产阶级的志气,又何其毒也!联系到1962年的右倾和1964年形“左”而实右的错误倾向,岂不是可以发人深省的吗? 毛泽东 一九六六年八月五日                                        
39    에세이 천죄만악의 필부대(筆部隊) 댓글:  조회:4515  추천:1  2013-02-24
  에세이 천죄만악의 필부대(筆部隊)   남경에 가면 29개나 되는 갖잖은 석재로 만든 침화일본군 남경대도살기념비(侵華日本軍 南京大屠殺記念碑)가 남경성 각처에 널려있다. 어떤 비석들에는 사망자의 성명을 빼곡이 써놓기도 했다. 그 앞에 마주서면 30만에 달하는 무고한 생명이 아수라같은 일제침략자의 손에 무참히 학살되던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자연히 소름쳐서 주먹을 부르쥐게 되는 것이다. 그런 참혹한 비극이 왜 중국에서 생기였던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1936년 12월 13일에 남경을 점령했던 그 마쓰이 이와네 15사단이 6개월간에 저지른 죄악이라는 것을 알고있지만 그 부대를 따라다닌 다른 하나의 색다른 소부대ㅡ 손에 무장을 들지 않고 필(筆)을 든 자들로 무어진 필부대(筆部隊)의 죄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는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남경대도살은 실제상 이른바 일본의 사상가, 작가, 기자, 승려로 무어진  종군무리였던 그 필부대(筆部隊)가 조장한것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을 걸으면서 점차 천하를 삼키려는 야심을 길러 결국은 조선을 병탄하고나서 중국대륙마저 차지하려는데서 침략전쟁을 발동한 것인데 그렇게 됨에는 무엇보다 문화인들의 작용이 매우컷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침화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되면서 “전쟁문학”이 생기였다. 필(筆)을 무기로 삼은 사상가, 작가, 기자, 승려들이 대외확장주의를 적극적으로 미화하면서 침략전쟁을 고취했던 것이다. 바로 문화인인 그들의 열광적인 선동에 의하여 많은 일본사람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인간의 선의를 저버렸거니와 변태적인 희생정신을 갖고 방대한 전쟁기계에 말려들고말았던 것이다.   따져보면 1937년 7월 7일후부터 일본군부(日本軍部)에서는 특수한 필부대(筆部隊)를 창설할 목적에서 작가, 기자, 시인, 화가, 음악가들을 물색하기시작한건데 이듬해의 8월에 이르러서는 정식으로 모집을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그달의 어느날이였다. 도오꾜의 허다한 작가와 기자들은 당시 일본문단의 “황제”로 떠받들린 키쿠치 관(寬)의 청첩을 받았다. 일본문예가협회 회장인 그가 내각정보부의 명의로 작가와 기자들을 수상관저에다 집합시켜놓고서는 이것은 국가의 수요거니와 군부(軍部)의 각별한 기대라면서 문화인들은 손에 필을 잡은 그대로 몸소 전쟁판에 뛰여들어야한가고 호소했던 것이다. 하여 그 즉석에서 "애국적인 피끓는 호응”이 생긴것인데 키쿠치 관(寬), 하야시 후시코 등의 저명한 작가를 선두로 한 한패의 작가, 기자가 먼저 군부(軍部)에서 발급한 보조금을 받고는 군복입고 칼을 차고는 정식으로 부대를 따라 중국땅에다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 첫패의 필부대(筆部隊)는 제구실을 했다. 중국에 들어 온 그들은 얼마안되여 떠나올 때 황궁을 향해 맹세한대로 종군기(從軍記)를 비롯한 보고문학, 소설, 시를 무더기로 써냄으로써 재빨리 전쟁문학을 고조에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1941년에 진주항사건(珍珠港事件)이 생기면서 필부대(筆部隊)는 규모가 썩 더 커졌는바 그것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에까지 종군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운것이다.  필부대(筆部隊)의 사람들은 싸움에서 공을 세운 군관과 병사들을 바싹따라가 채방하고는 “황군의 영웅적사적”을 대서특필하여 신문과 방송에 냄으로서 전방에 있는 군인과 후방에 있는 국민들의 용기를 크게 북돋우어준 것이다.   침화일본군(侵華日本軍) 필부대(筆部隊)의 한 성원이였던 하야시 후시코는 일본의 여러 필부대(筆部隊)에서도 유일한 종군녀류작가였는데 그녀본신은  비천한 출신이였다. 그러니 전형적인 “로동인민”이라 하겠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소시적에 집이 구차해서 고생스레 자란 그가 본래는  저하층의 백성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많은 녀인이였다. 그렇던것이 1938년 11월에 일군(日軍)이 무한(武漢)을 점령해서는 마치도 침략자의 강심제(强心劑)를 맞은것 같이 아주 영 딴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본시 마음이 연약했던 아야시 후시코는 제 눈으로 일본군인이 무고한 중국백성들을 학살하는것을 직접보았건만 동정심이란 추호도 없이 “나는 그이들(일본군)을 잘알고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건 마땅하며 그리 잔혹한것 같지 않다”고 종군기(從軍記)에다 공공연히 썼던 것이다. 이로하여 일본의 모든 매체들이 그녀를 “육군에서 첫손꼽는 공신”이라면서  굉장히 춰올렸다. 그지간에 인간성을 말끔히 잃어버리고 만 그녀의 온 몸에는 포악한 파시스의 넋이 그같이 푹 배였으니 그야말로 놀라운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필부대(筆部隊)에서 그녀보다 더 이름난것은 히노였다. 일본군 제14사단에  있으면서 직접 총을 놓아 백성을 살해하기까지 한 그는 을 내놓음으로 하여 “아쿠타카와 龍之介文學賞”을 타고나서 련이어 “朝日新聞文化賞”과  “후꾸오카 매일신문상”을 탓다. 하여 그는 천황이 제일좋아하는 어용문인이 되였거니와 결국은 일본의 제일 악질적인 전쟁고취자로서 락인이 되여 전쟁이 끝나자 “文化戰犯”으로 판결을 받은것이다.   다른 한 사람 이시카와達山역시 “아쿠타카와 龍之介文學賞”을 탓다. 그는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에 잡지사의 파견을 받고 남경에 온건데 그때는 일본군이 남경의 무고한 백성들에 대한 대도살을 방금끝낸 뒤라 피비린 도살을 감행한 병사들 다가  야수적인쾌감에 흥분되여 들떠있는 때였던 것이다. 이런판에 남경에 온 그는 행장을 풀념도하지 않고 살인에 혈안이 되어 날뛰였던 병사들을 일일이 채방하고는 돌아가 을 써 내놓은건데 침화일본군인이 남경에서 대도살을 감행한 기형적이고도 변태적인 인성(人性)을 아주 생동하게 그리였다. 한데 그것이 불을 종이에 싸듯이 어리석게도 피비린 대도살을 숨겨보려고 내린 일본군의 금령에 저촉되는 것이여서  그는 그만 감옥에 갇히우고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작가필화사건”이라는것이 생겼는데 따져보면 그건 닭을 잡음으로서 원숭이를 놀래우는 작용을 적시에 한 것이다. 이시카와達山은 "빨리뉘우치는 표현이 보인다"하여 10여일만에 감옥에서 풀려났고 그길로 무한(武漢)에 가 이번에는 일본군인은 여차여차 세상에서 문명한 군인이길래 포로들을  박해하지도 학살하지도 않는다고 꾸미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아주 정당한 것으로 선전하고 노래했던 것이다. 일본군이 과연 그러했단말인가?....  작가면 우선 량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건만 필부대(筆部隊)의 일본작가들은 어떠했던가? 전혀그렇지 않았다!  사상가, 기자, 승려들 다가 마찬가지 본새였다!    단지 사람의 신분만으로는 선악(善惡)을 가려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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