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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류치환은 어떤사람인가?
류치환은 1908년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출생. 통영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오야마중학에서 수학. 1927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31년 24살나던 해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그의 초기의 시들은 동양적인 관념을 노래한것들이 많았다. 그가 이름이 나기는 1936년에 시 <<깃발>>을 발표해서였다. (<<문학학습사전>>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그 시는 이러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먼저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 류치환은 광복후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을 주로하여 순수서정, 지적자아를 시적정신으로 노래했다. 그가 생전에 낸 시집으로는 <<청마시집>>(1940년), <<생명의 시>>(1947년),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4년), <<제6시집>>(1957년), <<류치환시선>>(1958년), <<동방의 느틔>>(1959).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년), <<미류나무와 남풍>>(1964년) 등이다. 그는 1967년 차사고로 사망되였다.
한데 이 리력서에 보면 8.15광복전의 그의 생애가 빠졌다. 작성자가 그의 그 단락의 력사를 모르거나 아니면 그 본인이 생전에 그 단락의 력사를 일부러 밝히지 않았을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부분을 내가 밝혀놓으려 한다.
청마 류치환은 유명한 시 <<깃발>>을 발표하여서 3년만인 1939년에 고향을 떠나 만주 봉천(심양)으로 이주하였고, 1940년 6월부터 북만에 들어가 살다가 1945년 6월에 귀국했다.
그는 귀국전 북만주의 빈강성(賓江省ㅡ지금의 흑룡강성)내에 있는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에다 "가신흥농회"라는 자연이민촌농장을 경영하면서 그기간에 협화회(協和會)의 지방 연수사무처(延壽事務處)의 일을 잘보았기에 1943년에 협화회(協和會) 하얼빈사무국(哈爾濱事務局)에 조동되여 근무를 했다.
하다면 협화회(協和會)란 대체 무슨조직이였는가? 그것은 1932년에 일본 관동군참모장 이시하라의 지시에 따라 오자와, 야마구치 시게지 등 일본청년들이 조직한 협화당(協和黨)이 당시 일제의 괴뢰였던 아이신줘러 부의의 비위에 맞춰서 개병(改名)을 한 것이였다. 협화회(協和會)가 하는 일이 선전선무(宣傳宣撫)였다. 바로 일제침략자의 앞잡이가 되어 항일군인들을 투항,귀순시킴으로써 변절케하여 항일진영을 와해시키는 그것이였다. 그 직책을 스스로 걸머지고 진력(盡力)한 사람이 바로 류치환이였던 것이다. 그는 시적재능이 있는 문인이였다. 시뿐이 아니였다, 그는 산문도 괜찮게 쓴걸로 보인다.
아래에 1942년 2월 6일자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발표한 네단락으로 이루어진 짧은 산문 "대동아전
쟁과 문필가의 각오"하나만 보기로 하자.
"오늘 大東亞戰(대동아전)의 의의와 帝國(제국)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와 어느 나라의 그
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것일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皇國臣民(황국신민)된 우리는(중략)....
오늘 赫 赫(혁혁)한 일본의 指導的地盤(지도적지반) 우에다 바빌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
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선일보는 1937년부터 만주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로 발행된 조.석간 일간신문으로서 1945년 광복
이 날때까지 친일성경향이 강했다.
뚜렸한바 류치환은 일본이 발동한 침략전쟁을 이같이 공공연히 미화하고 찬양하면서 춰올렸으니
그 본심이 어떠하였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다음것은 그가 한달만인 3월에 <<국민문학>>에다 발표한 가장반동적인 시 수(首)인 것이다.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고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높이 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두눈은
먼 寒千(한천)에 모호의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보고있도다
너의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였으리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熱(험열)함과 그 決意(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無賴(무뢰)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不毛(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思慧(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보다싶히 얼굴이 말라든 항일군의 머리를 내놓고 조소하면서 보아라, 그 어느누구든 시세(時勢)를 거역하고 대항하면 너도 저모양이될터이니 그러지 말고 "귀순"을 하라고 권유했다, 한수의 시로서 본심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면서 노복다운 자신의 직책을 다했으니 상전쪽으로 놓고보면 수작(秀作)을 내놓은 충신이요 그야말로 재능있는 노복이 되기에 손색이 없겠다. 그리고 청마 류치환본신으로 놓고 보면 구천에 갔어도 현시대에 이르러서까지 자기를 선양하는 괴변(怪變)스러운 노복을 길러냈으니 만족스러울 것이다.
한데 보다싶이 청마류치환의 문학은 그 본신의 신분과 걸맞게 철두철미한 한간문학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인을 기념하고있다. 도대체 기념해야 할 리유가 무엇인가? 기념하겠거든 한국에서나 소리없이 할게지 중국땅 만주(동북)에 들여다 부덕부덕 할건 뭔가? 동북ㅡ 이 땅은 항일의 봉화가 타올랐던 곳이요 지금도 곳곳에 렬사비석들이 있어서 후대들에게 력사를 잊지 않게끔 교육하고있다.
한국의 청마문학관에게 묻고싶다. 류치환이 그리좋아서 기념하겠거든 한국에서나 할게지 왜 중국에는 부덕부덕 끌어들이는가? 그 목적, 그 야심이 대체 무언지 의심스럽다. 결코 좋은행실인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당신들은 그래 중국에서 자라나는 민족후대들의 교육을 망그러놓을건가? 헝클어놓을건가? 그런다면 체면을 몰라도 너무모르는 량심없는 짓이니 그러지말고 당장 거둬치우라.
그리고 대중의 여론도 불사하고 기념행사를 부덕부덕 행사하려는 "연변동북아연구원"측도 그렇다. 내가 그러는게 과연옳은가 그른가를 한번다시 곰곰히 생각해보기바란다.
이번경축모집에 응모하려는 사람도 반드시 한번다시 실황을 알아보고 숙고해보기바란다, 평생에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이 없게 하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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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대바른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청마문학제 및 문학상에 관계되는 주당위선전부, 연변작가협회, 연변출판사, 작가협회시분과의 책임자들 그리고 최룡관은 제1회 청마문학상을 끌어들인때부터 지금까지의 행실을 하나하나 따지고 구경 무슨짓을 했는가를 밝혀야 한다. 룡관이는 <문화시대>에 친일시<수>를 수작이라는 평론을 발표하고 그것으로 한국의 청마파로부터 거액의 상까지 받아먹었다, 네티즌들이 그렇게 반발하고 꾸짖어도 안하무인격으로 또 3회진행광고를 사처에 발라놓았다. 참으로 용기와 배짱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