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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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던가?
2013년 10월 29일 21시 10분  조회:5575  추천:3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던가?

 

나는 전에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면서부터 한가지 의문이 종시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였는가? 그것은 항일은 장개석의 국민당이 하지 않고 공산당이 했다는 주장 그것이였다. 과연그럴수가 있는가?.....

1962년 7월 민족출판사에서 제1판으로 출판한 양장본 <<모택동선집>> 제4권에 있는 첫문장 “항일전쟁승리후의 시국과 우리의 방침”이라는 글을 보면 “일본투항의 결정적인소는 쏘련의 참전이다..... 항일전쟁은 한 개 력사계단으로 말하면 이미지나갔다.”고 하면서 “우리 해방구의 인민과 군대는 8년래 외부원조가 조금도 없는 정황하에서 완전히 자기의 노력으로 광대한 국토를 해방하였으며 대부분의 침화 일본군과 거의 전부의 위군을 항격하였다.”고 했다. (1733페지)

정녕 그러하다면 하나의 커다란 의문부호를 던지게 된다. 장개석이 지휘한   국군(國軍)은 그지간에 무엇을 했단말인가? 아미산에 올라가있으면서 공산당토벌만을 꿈꾸면서 항전이 끝나면 항전승리의 과실을 제가 딸 궁리만을 했단말인가? 

 

80년대 초중교과서에도 쓰기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후항일에서 80%이상의 일본군을 항격하였는바 항일전쟁에서 튼튼한 기둥이였노라고했다. 그러면서 이같이 기술한 것이다.

“.......8년항전에서 중국국민은 일본군을 150만을 섬멸하고 118만의 위군을 섬멸함으로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멸망하려던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버린  것이다. ......”
공산군이 기둥이되여서? 국군의 항전은 언급하지 않은것이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세계의 반파시스전쟁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중국 전장은 세계반파시스의 동방전장으로서 일본륙군총병력의 3분의 2이상을 항격하고 견제했던 것이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쏘련, 미국 등 동맹국의 밀접한 배합으로하여 일본군국주의의 지배적야심을 철저히 분쇄했으니 그것은 세계반파시스전쟁승리에서 결코 마멸할 수 없는 공헌으로 되는 것이다. 중국항일전쟁승리는 또한  여러반파시스맹국의 강력한 지원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     

여기서도 국군의 항일에 대해서는 일자반급도 언급하지 않았다.
“......팔로군, 신사군과 항일무장력량은 점차 전국항일주력이 되어 170만이 넘는 일위군을 섬멸한 것이다. 8년항전을 거치면서 19개성이 해방구로 되었는바 그 면적은 100만 평방킬로미터, 인구는 1억이 넘으며 인민의 군대는 130넘어발전했고 민병도 260만에 이른것이다. .....”

교과서를 만든 학자가 불어도 체면없이 불어댔다.   


 8년항전에 일본군을 도대체 얼마나섬멸했는가? 도대체 누가 주력이고 기둥이였던가? 국군인가? 아니면 공산당군대인가? 량당은 제가끔 표현이 다르나.

1984년도에 商务印书馆에 의하여 출판된 일본의 조시로 핫토리의 <<대동아전쟁전사(大东亚战争全史)>> 제4권 1799페지에 밝혀놓은것을 보면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일본군이 전사한 정확한 수자는 1858811명이다. 일본에서 2001년에 출판한 력사교재에다는 “2차대전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약 186만이고 평민은 66만이다.”라고했다. 조시로 핫토리가 쓴것과 맞아떨어진다. 사망된 그 일본군인중 125만명은 미국군에 의하여 격사된 것이라한다. 그렇다면 공산군은 싸움을 얼마하고 일본침략군을 대체 얼마나 섬멸했는가?  똑똑한 수자가 없다.


<<1937-1945 국민당군대항전비망록(国民党军队抗战备忘录)>>에 보면 이러하다.

대회전(大會戰) 23차.

중요전역(重要戰役) 1117차.

                              1115차는 국군(國軍).

                              2차가 공군(共軍). 즉 “백퇀대전”과 “평형관대전”이다.

중요전투 40000여차였는데  그중 200여차가 공군.

8년항전에서 국군이 사망된 인수 321만 1419명.

장군사망 203명. 중장이상 34명.

공군에서는 좌권부참모장  1명.

무엇을 보여주는가? 8년항전에서 도대체 누가주력이였는가?


전쟁사를 연구해 보면 그어떤 전쟁에서든 적후항전이 결정적인 작용을 노는건 아니였다. 나는 좁쌀에 보총으로 비행기, 대포를 격패했다는 따위의 소리는 믿지 않는다. 맛서봤자 폭격에 고기덩이로나 되고말게 뻔한데..... 코빠는 애들이나 곧이듣겠는지. 공산군 유격대가 항일전쟁에서 주력이고 기둥이 되였다는건 천방야담으로밖에되지 않는다!

실속없는 거짓말은 듣는이를 해칠뿐이다.

국가는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력사교육을 제대로 옳바르게해야 희망이 있다.

보충글:  모택동의 비밀지령


1937년에 항전이 폭발했는데 8월에 모택동은 섬북락천(陝北洛川)회의에서 아래와 같은 비밀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랭정해야한다. 전선에 나가 항일영웅으로되려니말아야 한다.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일본군후방에서 유격전을 하면서 방법을 다해 팔로군을 확충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며 천방백계를 다해서 당의 무장력량을 저축하고 장대시켜야 한다. 정부측에서 전선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대여 밀어버려야 한다. 일본군이 국군을 많이 많이 살상한 후에야만이 우리는 비로소 모든 항일과실을 얻고 국민당의 정권을 탈취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응당 항일을 많이해야 애국이라하는데 그 사랑은 장개석나라사랑이다. 우리들 공산당사람의 조국은 전세계공산당사람공동의 조국 즉 쏘베트(쏘련)다. 우리들 공산당사람의 방침은 일본군대가 땅을 많이 차지하게함으로서 장(蔣), 일(日), 우리(我) 삼국지(三國志)를 형성케하는 것이다. 그같이 해야 우리한테는 유리한 것이다.” 

 

“우리당의 무장력량을 발전장대시키고 전쟁후에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기위해서인것이다. 우리당이 반드시 엄격히 준수해야하는 총방침은 1푼항일,  2푼응부,  7푼자기발전이다”. 그어떤 사람, 그어떤 조직도 이 총방침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모택동이 1937년 9월에 산서(山西)에서 싸우고있었던 팔로군제11사독립단단장 양성무(楊成武)에게 지시한것을 봐도 “중일간의 전쟁은 본당이 발전하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결정한 정책은 백분의 70은 자기를 발전시키고 백분의 20은 타협하는 것이며 백분의 10은 대일작전인 것이다”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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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念8.15- 谁是抗战中流砥柱?" 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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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6 ]

16   작성자 : 아직도
날자:2014-01-03 15:53:03
아래 8번아. 아직도 너같이 깨지못한 사람이잇다는게 과연놀랍구나.
15   작성자 : 아래8번미래
날자:2013-12-13 17:27:03
미친개달보고짖는구나.
14   작성자 : 알짜바보
날자:2013-12-07 16:51:30
아래8번미래는 알짜바보구나.반동이뭔지도모르다니? 저런사유갖고서야....
13   작성자 : 과연누구였던가?
날자:2013-11-01 19:07:13
중국에서 항전이 승리한 후 “산에서 내려와 승리의 과실을 빼앗은 사람”은 과연누구였던가?

서안사변 후 장개석은 핍박에 못이겨 10년내전을 종결짓고 공산당과 제2차합작을 한 것이다. 1937년 七七사변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드디여 합작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이루었는바 장개석은 중국군대를 지휘하여 화북과 송호전선(淞沪前线)에 나아가 일본침략군을 저항했다. 그는 선후 송호회전, 태원회전, 서주회전, 무한회전 등 중요한 전역을 치른것이다. 광대한 애국장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적을 무찔렀다. 하였기에 1938년에 이르러서는 45만에 이르는 일본군을 전멸함으로써 속전속결(速战速决)로 죽국을 멸망시키려던 일본의 침략전략을 분쇄해버렸던 것이다.
12   작성자 : 동북의 항일
날자:2013-10-31 23:37:51
동북의 항일을 공산당만이한게 아니다. 주도기는 했지만 공산당이 전적으로한건 아니였다.
이점은 명확한 것이다.
11   작성자 : 항일련군
날자:2013-10-31 20:39:30
공산당의 항일에 있어서 특히 동북항일련군의 업적과 역활에 대해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혹한의 동북땅에서 외부의 지원도 없이 일본군 최정예부대인 강대한 관동군과 피어린 혈전을 벌림으로써 80만(최고로 100만명)의 관동군을 동북땅에 묶어둠으로서 괜내의 항일투쟁에 거대한 공헌을 한것이다. 만약 항일련군의 투쟁이 없었더라면 70~80만 관동군이 관내로 내려갔다고 하면 어떤 결과였을까는 말치않아도 뻔하다.
10   작성자 : 국공합작
날자:2013-10-31 16:06:07
장개석이 초기에는 항일에 매우 소극적이였던건 사실이다. 동북을 고스란히 내여주고 ...
일본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황하제방뚝을 터뜨려 수십만을 몰살시킨 "공로"도 있다.
"서안사변" 및 전국 인민들의 성세호대한 항일요구, 그리고 미국의 압력에 의해 떠밀려 항일했던 것이다. 장개석은 이른바 "곡선구국" 즉 먼저 공산당을 소멸하고 국내를 안정시키고 항일한다는 방침이였는데 이는 공산당과 전국 각 당파,인민들의 비판을 받았고 미국도 반대했다. 미국은 국공이 합작하여 항일하도곡 설득했다.

당시 국민당군대와 공산당군대의 현격한 역량대비로 인해 항일의 주요성과는 국민당군대가 달성한 것이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국민당군대는 정면전장에서 일본군의 진군을 막았고 많은 일본군을 살상하고 그 자신 또한 큰 희생을 냈다. 공산당군대는 좁쌀에 보총으로 얼마 안되는 역량으로 후방에서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8년 항일기간 공산당군대는 비록 국민당군대의 제8로군으로 편입되였지만 항상 국민당의 경계대상으로 되여 탄압을 받았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합작으로 항일을 하는 동시에 서로 또 견제하고 티각태각 찧고박고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물론 과거 극좌노선일때 국민당의 항일에 대해 축소발표하거나 언급을 하지 않은건 사실이지만 개혁개방후 국민당의 항일에 대해서 재조명하고 그 공로와 성과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렷다. 국민당항일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제작되였고 큰 반향과 인기를 일으켯다.
9   작성자 : 미래놈 좀보거라
날자:2013-10-30 18:51:48
鐵血軍事> 鐵血歷史論壇> 中國歷史>
“紀念8.15- 谁是抗战中流砥柱?"

내용
8   작성자 : 미래
날자:2013-10-30 15:43:00
반동놈 반동글만 쓰네
7   작성자 : 바로잡기
날자:2013-10-30 11:23:05
밑에 넉두리분께:
몇가지 력사사실을 자세하게 잘 소개하여주셨지만 아주 큰 력사문제를 하나 호도하고 있군요.

전국의 도시를 거의 모두 차지하고있던 장개석이 진짜로 항일했더라면, 장학량에게 무저항명령으로 동북을 내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주력군인 중앙군을 다 동원하여 항일했더라면 일본군은 중국을 점령하지 못했을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것은 이미 중국 관방에서도 공개적으로 발표한바 있습니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연구원 양천석이 이미 중앙텔레비와 홍콩의 봉황위성에 나와 장개석은 무저항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장학량 본인도 직접 동북을 잃은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9.18 만주사변이 발생하는 날에 장개석은 홍군을 토벌하러 강서성 남창으로 가는 배에 있었으며
동북 심양에서 사변이 발생한 사실조차 모르고있었습니다.
이것은 장개석의 일기에서도 그대로 다 밝혀졌고 이 일기의 사료적 가치와 진실성에 대하여ㅛ
중국 관방의 력사연구가들이 모두 나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중국 관방에서도 당초에 장개석이 직접 장학량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는 풍옥상의 생전에 부관에게 한 이야기를 그 부관이 회고문장으로
전국 정협에 제출하였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회고문장의 사료적가치는 1차적 사료가 아니고 또 풍옥상 본인도
1931년 만주사변 당시의 장학량의 신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당사자가 아니므로
제1차적 사료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증언이 제1차적 사료가치를 가지는가?
당사자는 장학량과 장개석 본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두 사람은 모두 제1차적 사적증거를
남기였으며 현재 중국 관방에서는 이 증거를 반론할만한 또 다른 사료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는
30만 동북군이 일본관동군에 동북3성을 빼앗긴 죄는 장학량 본인에게 있다고 기본상에서 판단하고 있고 이와 관련한 허다한 론문들이 발표되였습니다.
능히 이렇게 말할수가 있습니다.
동북을 잃어버린것은 장학량의 죄이지 장개석의 죄가 아닙니다.
후에 장학량은 서안사변을 일으켜 중국공산당에게 리로운 일을 하였지만
그가 동북3성을 일본침략자에게 내준 실수는 큰 죄이며
서안사변의 공로를 가지고 그의 이 큰 죄가 면죄되지 않습니다.
해외에 나와보면 중화민족에게 가장 큰 재난을 안긴 죄인들속에 장학량의 이름이 넣고있는
학자들이 적지않습니다.
6   작성자 : 넉두리
날자:2013-10-30 09:24:44

항일전쟁시기에 공산당(팔로군, 신사군, 유격대 등)은 큰 전역은 적고 주로 유격전을 하면서 일본군과 싸웠고 국민당은 몇몇 큰 전역에서 일본군과 크게 싸웠습니다.


1937년 12월 3일에 국민당군 제23집단군(사천군) 총사령을 겸한 사천성정부 주석 류상(劉湘)이 지휘한 사천군은 350만명이 항일전선에 나갔는데 장개석의 지원을 받지 못해 장비와 탄약이 부족하여 전투중 64만여명이 장렬하게 생명을 바쳤습니다. 제3차 장사전역에서만 해도 사천군은 용감하게 싸워 일본군 제9려단을 전부 섬멸했습니다.

국민당 4성상장 리종인(李宗仁)과 백숭희(白崇禧)는 대아장회전(檯兒莊會戰)을 지휘하여 국군항전중 첫 중대한 승리를 취득했습니다. 그해 6월에 백숭희는 무한회전을 지휘하여 일본군 15만명을 소멸했고 1940년 2월에 계남전역을 지휘하여 두번이나 일본군을 패배시켰습니다. 대아장회전에서 국민당군 4만 6000명이 참가했는데 일본군 1만 6000명을 섬멸하고 국민당군 7500명이 사망되였습니다.

그 시기에 중원을 지키면서 “중원왕(中原王)”이라고 불리웠던 국민당장군 탕은백(湯恩伯)도 대아장전역을 비롯해 일본군과 여러번 교전하면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국민당4성상장 송철원(宋哲元)은 1933년에 제29군을 지휘하여 장성요새의 희봉구, 라문욕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렸습니다. 송철원이 거느린 제29군 소속의 대도대(大刀隊)는 일보군과 박투를 벌려 일본군 6000여명을 소멸했습니다.


국민당도 후에 군사세력을 보존하여 공산당에 대항하려는 장개석의 방침에 따라 소극적으로 항일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에게 북경, 상해를 다 빼앗기고 수도 남경까지 내주었으며 장사, 무한…모두 잃었습니다. 전국의 도시를 거의 모두 차지하고있던 장개석이 진짜로 항일했더라면, 장학량에게 무저항명령으로 동북을 내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주력군인 중앙군을 다 동원하여 항일했더라면 일본군은 중국을 점령하지 못했을것입니다.


좁쌀에 보총으로 비행기, 대포를 격패했다는것은 사실입니다. 처음에 홍군은 보총과 칼을 들고 유격전을 벌렸습니다. 이건 코빠는 유치원생이든 대학생인든 곧이 듣고 안듣고 할일이 아니라 틀림없는 력사사실입니다. 후에 해방전쟁시기에는 인민해방군의 장비가 국민당군에 못지 않았습니다.


5   작성자 : 공평저울
날자:2013-10-30 07:10:42
항일전쟁의 전면전은 국민당이 치렀다는것은 이미 호금도주석이 대만의 국민당 주석 련전과 만났을때 인정했던 바다. 최근에 수없이 제작되고 있는 다라마들에서도 보면 일본군과의 대전역들은 모두 국민당군이 치렀다. 그리고 이런 전역들에는 국민당군이 한개사단 한개 군단 또는 한개 집단군씩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사상자도 국민당군대가 훨씬 더 많았다는것은 부정할수 없는 력사적 사실이다.

그렇다고 팔로군과 신사군의 항일투쟁업적도 전무한것은 아니다.
후방교란작전도 적지않은 성과를 걷우었다.
지뢰전과 갱도전같은 영화에서 묘사한 일본군 교란작전은 대부분 사실이다.
물론 소소한 규모에서 항일전쟁을 했던것은 규모상에서 팔로군 신사군의 부대가
작았으므로 어쩔수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항일하지 않았다고 몰아붙일수는 없을것이다.
동북에서 10여년 넘게 항일투쟁을 견지한것도 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련군이였지
국민당이 령도하는 부대가 아니였다.
항일전쟁은 전면전과 후방교란전 다 같이 주요했다.


4   작성자 : 대찬성
날자:2013-10-30 07:03:47
아래 분에게
기록은 승자가 하지만
승자의 기록은 승자의 현실적 집단의식이 좌우하는 현실에서만
잠깐 가치를 발할 뿐이다.
맑스주의 력사관은 승자의 기록에 치중하고
현실적 집단의식에만 국한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였다.
맑스주의 력사사관의 문제점은 사실실증주의 력사사관에 의해
이미 철저하게 부정되고 있는 추세다.
력사는 이제 승자만이 쓰는것이 아니다
력사는 승자와 패자가 함께 쓰고있다.
많은 경우 력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사적 가치는
패자들의 기록에서 더 많이 발굴되고 있다.
그리고 패자들의 기록이 더 높은 사적 가치도를 인정받고 있다.
이를테면 김송죽선생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대로
일본군 사상자의 숫자는 승자였던 공산당이 발표하고 있는 숫자와
국민당이 발표하고 있는 숫자보다
오히려 패배하고 투항한 일본이 스스로 발표하고 있는 숫자가
훨씬 더 사료적 가치가 높다.
때문에 일본군과의 어느 전역에 대한 역사연구를 진행할때
일본군이 스스로 발표하고 있는 사상자 숫자는
가장 사실에 근접하고 있다고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정론이 나있는바다.
어느것을 믿을것인가?
그리고 왜 김송죽선생님은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이런 글을 쓰는데 대하여 불편해하는 아래 분의 의중이 더 의아스럽다.
모르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되고,
또 그동안 줄곧 기만당해왔던 력사의 진실을
하나 둘씩 알아가는 일이무엇이 나쁘단말인가
이렇게 좋은 글을 많이 써주시기 바란다.



3   작성자 : 력사
날자:2013-10-29 23:23:38
력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약자에게는 력사가 없습니다.
나는 선생의 독도나 조어도 그리고 서사군도에 대한
견해를 알고 싶습니다.
미국은 누구 땅인가요/
주은 사람이 임자입니다.
나는 선생께서 왜서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참고하십시오
2   작성자 : 력사
날자:2013-10-29 22:29:55
사실은 웅변을 이긴다

거짓말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진실은 이렇게 사실 앞에서 다 밝혀지게 되여있는 법이다.

1   작성자 : 감탄
날자:2013-10-29 22:25:16
너무 좋은 자료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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