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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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걸어온 아동문학의 길 댓글:  조회:5993  추천:0  2017-08-10
내가 걸어온 아동문학의 길   김만석     나는 김만석이라고 부른다.   나는 1939년 음력 5월 21일에 태여났다 사람들이 나 보고 금년에 나이 얼마인가고 물으면 나는 우쓰깨로 39살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기 1939년생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젊어서 살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 자기 나이도 모르는 철모르기 나는 여러분들에게 특히는 아동문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약간한 도움이 되지 않을가 싶어서 내가 아동문학을 하면서 걸어 온 길을 참고로 소개하여 올리려고 한다.       1,추상적인 문학의 길   (1)우리 할아버지 김경휘공은 생전에 서당훈장으로 있으면서 성인소설을 붓으로 써서 유물로 남기였다.   그것은 고대조선어로 쓴것이여서 나로서는 읽기 힘들었다 그러나 소학교에 붙어서 나는 그 책을 들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제 나름대로 읽어주었다 그러면서 나도 커서 할아버지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그런 엉뚱한 꿈을 꾸게 되였다 .   사람에게 있어서 어릴 때부터 앞으로 커서 뭐가 되겠느냐 하는 꿈이 일생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분들은 알고있을것이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꿈이 있으면 인생에서 무지개 길이 펼쳐 지게 된다.   (2)나는 소학교에 붙어서 어문과를 좋아 하였다3학년 때 남진숙선생님이 우리를 데리고 태양소학교 동산 기슭에 올라가 작문시간을 보았다 선생님은 아지랑이 아물아물 춤추는 벌판을 가리키며 밭가는 농민을 바라 보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고 하시였다 나는 리해가 되지 않았다 기름지다면 콩기름이나 돼지곱 기름처럼 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작문시간인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들판에 달려가 농민한테 다가 갔다 농민이 갈어 엎은 땅에는 기름이 없었다 (선생님은 거짓말 하는거야!) 그래서 달려와서 선생님보고 고 하니 선생님은 호호 웃기만 하였다.   그때 나는 아직 비유와 형용어를 모르는 그런 정도의 철부지였다 그러나 이런 엉뚱한 의문은 나로하여금 문학의 길로 나아가게 한것이 아닌가 싶다.   (3)5학년 때 우리 교과서에는 라는 과가 있었다 그것은 지원군에 나간 오빠에게 편지를 시로 쓴것이였다 나는 그걸 외우고 나도 시를 써보고 싶었다 주제넘는 생각이였다  .        어느 겨울날 나는 구수하강에 나가서 얼음을 끄고 붕어를 잡았다 나는 그 붕어를 솜장갑 안에 넣어 가지고 집에 와서 큰 대두병에 물을 담고 붕어를 넣었다 붕어는 꼬리치며 좋아라 헤염쳤다 그때 나는 라는 어설픈 동시를 써보았다.       붕어가 헤염친다   꼬리치며 헤염친다     해염치는 붕어는 기선   뽕뽕 고동 빼는 기선     나는야 기선 모는   해군 해군이 될거야     이것을 본 김창범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평어를 달아주시였다   -참으로 멋지다 어쩌면 이런 시를 쓸수가 있나? 너 앞으로 글을 쓰면 될것 같다 힘 내라! 글을 써라! 성공하여라!   김창범   1951.12.4.   이 평어는 내가 문학을 하도록 고무해준 첫 칭찬이였다 나는 이 평어를 지금까지 기억하고있다 이것은 나의  가장 보귀한 재산으로 된다   (4)중학교에 입학하니 김정자선생님이 우리에게 조선어를 강의하시였다 키가 크고 양며리인 김정자선생님은 서양녀성 같았다 긴머리를 뒤로 힌들 제끼고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선생님, ,선생님께서 단문짓기숙제를 내면 나는 그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남다르게 하였다 만약 단어 5개를 내면 우선 각각 하나씩 단문을 짓고 그 다음 2개씩 짓고 그 다음 3개씩 짓고 나중에는 5개를 다 넣어서 단문을 짓다보니 단문숙제가 나에게서는 제일 많은 숙제였다 그러나 그런 숙제가 나는 좋았다 이런 방법은 앞으로 작가가 되려는 그 엉뚱한 꿈이 나더러 그렇게 하게 한것이였다   김정자선생님은 우리더러 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내가 지은 작문을 5개반을 돌아 다니며 소개하였다 나는 끄때 처음으로 이른바 자랑감을 느끼게 되였다 나의 글이 5개반 200여명의 독자를 가지게 되였다니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였다 이런 놀라움은 나더러 문학의 길로 나아가도록  크게 떠밀어준것으로 되였다   (5)나는 고중에 올라와서 문학과를 제일 좋아하였다 특히 그때 을 배우면서 우리 민족문학의 력사를 알게 되여 많은 작가와 많은 작품을 접촉하면서 나는 문학을 꼭 하 리라 다시 굳게 다짐하였다.   그때 리상화의 라는 시를 배우고 나도 시를 써보자고 창작노트까지 매였다 그리고 날마다 시를 쓴다고 긁적거리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나에게는 아직 시적 생활체험이 없고  시적기교를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였다.   그러다가 우리학굽의 유태준이 연변대학도서관에 가서 주일마다 책 한 빼크씩 가져왔다 나는 밤을 패가며 소설을 보았다 그때 고골리의 은 나를 매혹하였다  특히 제1부의 서정적인 토로와 역설은 나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리기영의 ,한설야의 ,파금의,숄로보흐의 등을 탐독하였다.   그러다가 장편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단편소설 읽기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체호브,모파쌍 그리고 중국의 왕문석의 단편소설을 많이 읽었다.   특히 고골리의을 보고 3일간의 시간을 들여 나름대로 경개를 전부 써보고 나도 장편소설을 써보자는 엉뚱한 꿈을 또 꾸게 되였다 그래서 고향 마을에서 농사하는 동창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다는 계획까지 설계하게 되였다.     이렇게 나는 고중 때까지 추상적인 문학이라는 저 하늘의 별을 동경하면서 시도 써보고 소설도 써 보려고 한 그런  들뜬  열혈청년이였다 그러나 리상에 불타서 문학을 지향한 그런 열정은 얼마나 값지였는가를 지금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2 구체적인 문학 –아동문학   (1)나는 고중을 졸업하고 신체조건으로 하여 대학교 입시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1959년 9월 18일에 여길시 중앙소학교 교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내가 교원의 길을 택한것은 1년동안 밥값을 벌어 밥을 얻어 먹으면서 대학시험준비를 하기 위한데 있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난 식사도 바로하지 못하고 강의도 하고 대학시험공부도 하다보니 신체가 말이 아니였다.   처음에 나는 급성위장염에 걸려 쓰러졌다 교장 최두혁선생님은 정규찬교수를 모셔다가 진찰시키고 그 당시 귀중한 약들을 가져다가 나더러 먹게 하였고 김명한 선생님은 자기 집에서 미시가루를 만들어 나한테 가져왔다 그래서 중앙속학교 지도부와 교원들의 괸심과 사랑속에서 나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였다.   그후 나는 급성맹장에 걸려 강의하다가 교단에서 쓰러지였다 그 때 신형국선생은 나를 업고 병원까지 갔다 학교 교원들이 살뜰한 관심과 따뜻한 사랑을을 이루 더 말할수가 없다.   더욱 놀라운것은 우리반 학생 54명이 중대기를 들고 내가 입원한 병실까지 찾아왔다 그애들은 너나없이 선물을 가지고  나의 병실을 찾아와서 나한테 소선대 대례를 하는것이였다   그애들은 닭알 한 알,과자 한 봉지,사과 한 알,지어는 손수건 한 장,연필 한 자루,고무지우개 하나…등등 을 사가지고 왔다 .         고무지우개가 나의 병치료에 무슨 효험이 있으련만 그것은 아이들이 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가득 슴배인 아이들의 지성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대학을 가자고? 이같이 사랑스럽고 이같이 귀여운 아이들을 버리고 대학을 가자고? 너도 인간인가? 나를 살려준 중앙소학교를 나는 못 떠난다 나는 이제부터 아이들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되였다 그것은 순전히 보은사상이 지배하에서 나는 몸을 내번지고 대학의 꿈을 접고 일하였다.   그래서 학교의 모범교원,연길시 모범교원,연변조선족자치주모범교원으로 되였다 오늘  와서 돌이켜보면 이것은 내가 아동문학을 할수 있는 가장 값진 생활체험으로 되였다.   그런 가운데서 1962년 난  처녀작 를 발표하게 되였다 나는 그 노래가 방송을 통하여 노래공부로 방송될 때 난 출근하다가 단풍나무를  그러 안고 감격의 소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였다 충격이였다 그것은  원자탄보다도 더 큰 충격이였다 처녀작은 문학가들에게 있어서 대 전환점으로 되는것이다 이리하여 동시 동요 ,가사 등을 발표하면서 나는 아동문학문단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창작은 리론의 지도가 없는 즉흥적인 창작단계에 머무르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추상적인 문학의 열혈청년으로 부터 구체적인 아동문학작가로 된것이였다.       3,나의   나는 1964년 8월 연길시교육국의 추천을 받고 조간생의 신분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나는 나를 살려준 정든 중앙소학교와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나 조직의 수요라고 지식을 더 배워 인민을 위하여 더 잘 복무하라는 당조직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대학문에 들어서게 되였다.   대학은 나의 생각대로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그런 곳은 아니였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 온 목적은 아동문학을 전공하기 위하여서였다.   그리하여 나는 현대조선어,중국문학,조선문학,문학개론 등 문과에 속하는 학과목을 중시하여 학습하면서나는나의을 개척하였다.   나는 화요일 저녁이면 아동문학공부를 하는 시간으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도서관에서 리재철의 과 ,장풍의 ,하의의 ,쏘련 쓰쩨빤노와의 ,조선 김일성종합대학의 과 ,   일본의 죠쇼우 이찌다로우의 등을 빌어다가 전문 학습하면서 필기하고 내 나름대로의 아동문학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였다.   목요일 오후2시부터 연길시공원소학교 운동장에 가서 아이들과 함꼐 뛰놀며 동심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였다 그리하여 와 같은 작품을 쓸수가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작품학습과 아동문학창작시간으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잡지를 창간호로부터 시작하여 그때까지의 잡지를 전부 보면서 필요부분을 필기하였다.   나는 대학굥부기간 아침마다 20분씩 시간을 짜내여 장장 10개월이란 기나긴 시간을 리용하여 리수경의 을 보면서 필요한 단어와 그 뜻을 필기하여 을 만들어냈다 돈이 없어 사전을 살수없는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가장 좋은 사전이였다  문학은 언어학이라는 이 점에서 보면 내가 문학을 위한 기초작업을 완수한것으로 되였다.   하여 대학기간 나는 나의 을 다니면서 아동문학리론체계를 건립하고 아동문학장르학 공부를 하고 아동문학사공부를 하게 되여 나는 남다른 을 졸업하게 되였다.     4,본격아동문학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배치받아 먼저 강의를 하다가 을 강의하게 되였다.   1982년 3월에 난  북경사범대학에서 꾸린 전국 대학교 에 참가하게 되였다 전국에서 23명 교원들이 참가하였다 나는 그 연수반에서 포만정교수와 장미니교수 등의 아동문학리론강의를 체계적으로 듣고 중국의 유명한 아동문학작가들인 고사기 김파,장지민 ,왕몽 등의  창작경험을 직접 듣고 아동문학창작과 아동문학연구에서 비약할수있는 날개를 달수가 있었다.   특히 고사기선생의 나에 대한 충격은 정말 대단하였다  고사기는 미국류학을 가서 의학실험을 하다가 세균의 간염을 받아 전신 마비가 되였다 .  우리가 고사기선생 댁에 갔을 때 고사기선생은 침대에 누어서 손을 겨우 움직여 우리를 보면서 흔들고 벌어지지 않는 입을 놀려 라고 알아듣기 어려운 인사를 하는것이였다.   고사기의 양아들이 도움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붓글씨를 쓰는데 가끔가다가 손을 와들와들 떨면 양아들이 그  떠는 손울 탁 쳤다 그러면  고사기는 쓰던 글자를 계속하여 쓰는것이였다 그가 쓴 글은 라는 글아였다.   이 석자의 글자를 고사기는 10분동안 쓴것이다 그렇다 글자 하나를 3분 넘어 쓴것이다 그러면서도 고사기는 계속 창작하고있지 않는가!그 유명한 과학시 같은 명작도 이렇게 쓴것이다.   그래 사지가 펀펀한 나는 무얼 했는가? 나는 반성하였다 나는 결심하였다 문학은 신체로 하는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하는것이다 정신만 살아 있으면 문학은 할수 있는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동문학을 끝까지 할것이라고 굳게 굳게 맹세 다지였다.   연수반을 끝내고 돌아와서 나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리론체계를 확립하게 되고이란 책을 출판하게 되였다   그리고 리론의 지도하에서의 본격적인 아동문학학창작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창작에서 지잔날의 격식화 도식화 개념화하던 고질에서 해탈되여 나왔다  동시대상의  다양성과 동시의 다양화를 주장하면서 형식상에서 정형률에서 뛰쳐나오고 자유률을 견지하게 되였다 그리고 감각적인 동시,이미지 동시,은유적인 상징동시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동시집,,들을 출판하여냈다.   다음 아동소설창작에서  아이들의 인격문제와 인권문제를 아동소설의 주제로 삼고 이야기와 인물형상관계를 정확히 처리하게 되였다 소설창작의 임무는 인물형상창조이다 물론 소설에서  이야기를 취급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인물형상창조의 수단으로 되여야 하지 목적으로 되여서는  절대 아니 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아동소설집과,중편소설집등을 출판하여냈다.   그 다음 우화는 아동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하고 우화에서의 시대성과 교훈의 관계를 옳게 인식하게 되였다.   이를테면 는 교훈은 시대가 변하여도 여전히 그 교훈의 가치와 의의는 여전히 값진것으로 되는것이다      인생의 교훈은 시대가 달라지면 쓸데 없게 되는것이 아니기에 그 런 교훈을 시대에 걸맞는 형상으로 바꾸기만 하면 얼마든 새시대의 우화로 될수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와 같은 우화 36편을 써보았다.   마지막으로 동화의 기본특징이 환상이라는것을 명확히 한 기초상에서 동화를 의인화동화,과장동화 환상동화,마술동화,과학환상동화로 분류하고 마술동화와 의인화동화의 장점을 결부하여 중편동화 를 창작하여보았다.   이렇게 되여 나는 본격아동문학창작에서 일정한 단맛을 보고  아동문학작가로 문단에서 활약할수가 있게되였다.    5,아동문학리론연구   나의 첫 아동문학평론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꾸린 제 1호(1982)에 발표한 였다.   두번째 평론은 북경사범대학졸업론문이였다.   나는  1983년부터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를 개설하고 전문 아동문학을 강의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전문 아동문학리론연구에 달라 붙다보니 아동문학창작은 잠시 접고 말았다.   나는 를 쓰자고 10년계획을 세우고 ,,에 달라 붙었다 그리하여 잡지의 김월성 편집과 짜고들어 륙속 이와 관련되는 론문과 평론을 수십편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에 1930-1989년까지의 ,를 발표하고 2000년도에 1920-1999년까지의 를 발표하였다.   그 다음부터 작가론,작품론,문학사론 등에 걸쳐 200여편의 론문과 평론을 발표하였다.   이런 평론과 론문에 기초하여  (1983),(1993),(2003)(1994),(2008),(2008),(2014)(2015)등 저작들을 펴냈다.   이런 연구는 개인의 성과로 이룩된것들이였다.    나는1997년 3월 21일 정판룡교수의 도움으로 연변대학조선한국학연구중심산하에 (2006년에 로 개칭)를 건립하고 소장이 된다음 임직원들과 회원들을 총동원하여 아동문학리론연구를 폭 넓게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그리하여전 6권을 편집출판하였고 을 편집출판하였으며을 편집 출판하였고 중국조선족10인 동시집와 중국조선족 10인 동화우화집를 편집출판하였고 평론집 을 출판하여냈다.   하여 나는 아동문학리론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             *             *   나는 험난한 아동문학의 길을 이렇게 힘겨웁게 걸어왔다 그러나 나는 끈질긴 노력을 경주하여 아동문학작가 리론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기지게 되였다.   그러나 이름은 영광스럽지만 내가 창작한 아동문학작품과 내가 집필한 아동문학리론과 저작들은 이름만큼한 그런 영광은 지닐수없구나 생각하니 고개가 자연히 수그러지는 감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어 정도라도  성과를 올린데는 우리 할아버지 덕분이였고 소학교때의 남진숙선생님과 김창범선생님, 중학교 때의 김정자선생님,대학교시기의 림휘교수와 정판룡교수들의  옳바른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직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인도한 리재철 교수,포만정교수,홍신도교수,장풍교수, ,장미니교수,하의교수,고사기선생,쓰쩨반노와교수,죠우쇼우이찌다로우교수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스승인 채택룡선생님,김례삼선생님.나의 동료인 김득만동무,최문섭동무,한석윤동무등의 관심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나를 아동문학작가로 리론가로 키워주신  상기 모든 존경하는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히 올리는바이다. 2017.7.7    
1    미룰수 없는 시대적과업 댓글:  조회:1012  추천:1  2014-06-04
  오늘 중국조선족 소년아동들은 대개 우리 민족의 4분의 1인 20만명으로 추산할수가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마땅히 부모들의 따뜻한 사랑속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개혁개방이래 특히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부터 우리 조선족사회 지각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고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금전만능사상의 만연과 개인주의사상의 팽창은 많은 문제점들을 초래하고있다. 사람들은 우선 살기 위하여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하여 대도시로 진출하고 외국으로 로무송출을 떠나다보니 사회의 세포단위인 가정구조가 파탄되여가고있다. 필자는 최근에 연길시신흥소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학년에서 한개 학급씩 선택하여 도합 6개 학급의 212명 학생을 조사했다. 외국에 로무송출로 나간 아버지가 66명, 어머니가 48명으로 부모가 외국으로 나간 학생수는 114명으로 집계되였다. 국내 대도시로 진출한 아버지는 8명, 어머니는 2명으로 도합 10명으로 집계되였다. 외국이거나 국내 대도시로 진출한 부모가 모두 124명으로 전체 학생수의 57%를 차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학생이 23명이고 어머니와 함께 사는 학생이 49명으로 부모와 함께 사는 학생수는 겨우 72명으로 33%를 차지하였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야 할 아이들이 이렇게 아빠 없이 자라는 아이들,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들, 아빠 엄마 모두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증가되고있다. 게다가 아빠엄마가 리혼하는통에 불행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도 증가되고있다. 이번 조사에 의하면 부모가 리혼한 학생이 32명으로 전체의 10.5%를 차지했다. 이런 원인으로 우리 아이들은 부모사랑에 굶주리는 세대로 전락되고있다. 이것은 중국조선족 아이들의 하나의 독특한 특징으로 된다. 이번 조사에 의하면 부모들이 없기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는 학생이 35명으로 16%를 차지하였다. 이런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의 교육과 교양을 받으면서 시대에 떨어진 전통교육의 피해를 받고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우리 아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부모들이 부쳐보낸 돈이 있기에 생활은 그 어느때보다 여유로운 편이여서 먹고싶은것은 다 먹고 입고싶은것은 다 입고 쓰고싶은것은 다 쓰는 그런 세대로 변화되고있다는 사실이다. 하여 지금 어린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대신 일하기 싫어하고 랑비를 마음대로 하고있으며 간고분투, 근검절약 정신이 바래져가고있다. 가정적으로 보면 외동자식이기에 너무도 자기중심적이여서 친구지간의 따뜻한 우정과 서로지간의 협조정신이 박약해가고있다. 또 가정적인 과보호영향으로 연약하고 겁이 많고 의뢰정신이 강하며 컴퓨터, 스마트폰 등의 영향으로 자기절로 머리를 써서 독립사고를 하는 능력도 점차 못해지고있다. 생활수준의 제고에 따라 아이들의 신체발육에 전례없는 가속도현상이 나타나고 게다가 전자매체의 영향으로 성에 대한 접촉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의 성의식도 놀라울 정도로 발전된 현실이다. 총적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경제적으로는 그 어느 시대 아이들보다도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있지만 사상과 의지 면에서는 그 어느 시대 아이들보다 취약하고 부족한 상황이다. 하여 우리의 아이들은 정상적인 유년과 동년 시기를 보내지 못하고있다. 하기에 중국아동문학연구회에서는 “중국소년아동들은 동년이 없는 세대들이다”라는 놀랍고도 충격적인 결론까지 내놓았다. 이렇게 21세기에 들어선 중국의 아이들은 시대적인 충격으로 준엄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세대로 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조선족아이들도 절대 례외로 될수가 없는것이다. 시대는 변하였다. 그러나 로신이 지난 시기에 제기한 “아이들을 구하자!”는 구호는 여전히 현실적인 의의를 가지고있다. 미래의 주인공들인 우리의 아이들은 마땅히 리상이 있고 포부가 크며 진취심이 강하고 창의력이 높아야 한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지식을 배우고 도덕수양을 갖추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이 예리하고 간고분투하며 악전고투하는 정신을 갖춘 그런 심신이 건전한 사회성원으로 자라나야 한다. 이렇게 하자면 부모들은 물론 학교와 사회는 모두 합심하여 우리 아이들의 실제상황부터 면밀히 연구하고 그에 따르는 알맞는 해결책을 찾아내여야 할것이다. 이것은 한시도 늦출수 없는 시대적과업이다. 우리 모두 우리 아이들의 건전한 성장을 위하여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그런 성스러운 일에 떨쳐나서자! 연변일보 6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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