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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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80) 중국 근대 최초의 녀성류학생 댓글:  조회:3713  추천:26  2016-09-0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0) 중국 근대 최초의 녀성류학생 김문학   1907년 원세개가 천진에서 창설한 북양녀의학당(北洋女醫學堂)의 초대 원장(당장 겸 총교습)으로 초빙된 인물이 중국 근대 최초의 녀성류학생 김아매(金雅梅, 1864~1934)이다.   김아매는 누구일가? 그의 이름은 일면 운매(韻梅)라고도 하는데 미국이름으로는 Yamei Kin이라고도 한다. 향항 명경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절강성 녕파의 한 예수교 장로의 가정에서 독녀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조실부모한 김아매는 중국사상 최초의 류학생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미국 뉴욕의학원 녀자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근대 최초의 공립간호학교인 북양녀자의학당의 창설자이며 중국 의학발전사에 큰 족적을 남긴 녀걸이였다.   돌이켜보면 김아매의 신세는 기구했다. 그녀가 2살때 부모들이 모두 당시 류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동년에 조실부모하고 중년에 리혼하며 자식까지 잃어버리는 인생의 갖가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신세였다.   부모를 잃은 뒤 어린 김아매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녕파주재 미국령사였던 맥케티(mccartee)에 의해 양녀로 받아들여진다.   천생 령리하고 총명한 그녀를 맥케티부부는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870년 양부는 그녀를 데리고 동경으로 떠났다. 양부가 그해 동경제국대학의 외국인 교수로 초빙되였기때문이다.   만 6살의 김아매는 나서자라던 중국 대륙을 등지고 머나먼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다. 이로부터 김아매의 기나긴 월경(越境)의 이동이 스타트를 뗀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일본에서 소학, 중학 공부를 마친 김아매는 당연히 중국사상 최초의 일본류학녀학생임이 틀림없다.   1881년 양부의 지원으로 그녀는 미국에 류학하여 의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래서 그녀는 중국 첫번째 녀자류학생으로 근대사에 이름을 새기게 된다.        1885년 최우수성적으로 뉴욕의학원 부속 녀자의학원을 졸업한다. 이는 또한 중국 근대 최초의 녀자대학졸업생이란 영예가 되기도 한다.   대학졸업후에도 김아매는 미국에 남아서 계속 연구와 실습에 정진했다. 워싱톤, 뉴옥 등 병원에서 취직하여 《뉴욕의학잡지》에다 “조직학적인 현미경촬영” 등 학술론문을 발표하였다. 현미경기술을 구사하여 진행된 연구리포터였는데 당시 미국의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류학시절 그녀는 “허심하고 학습에 노력하여 각종 의료기구를 활용한 실험을 중시하는” 녀학생으로서 주위의 칭찬을 받아오기도 했다.   당시의 중국에서 “의학”은 근근히 한의학적인 “청진, 문진, 진맥” 등 의술에 불과했다. 김아매는 예리한 안목으로 근대 서양의학의 선진도구를 활용하는데 개안했다.   그녀의 전기자료에 따르면 1887년 당시 그녀는 이미 미국 뉴욕의학계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녀의사이기도 했다.   그런 김아매가 갑작스레 귀국을 선택했다. 미국에서 선진서양문물을 향유하면서 질높은 생활을 하고있던 그녀가 귀국의 길을 택한 리유는 어디에 있을가?   유년시절 부모님이 몹쓸 병으로 인해 의료기술이 렬악한 중국에서 비참하게 돌아간 뼈아픈 체험이 “늘 가슴에 아로새겨져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귀국하여 자신의 힘이 닿는대로 조국동포의 병환질고를 해소하는것이 인생 최대의 소원이였다.   드디여 그녀는 1888년 중국으로 귀국했다. 우선 아모이(夏門)에서 교회소속의 의료시설에서 사업했다. 이듬해는 그녀 자신이 병환에 걸려 일본으로 도항해 치료를 해야 했다.   1905년에 귀국하여 성도에서 살다가 1907년 원세개의 초빙으로 천진의 북양녀자의원을 창설하여 당장 겸 총교습을 맡게 됐던것이다.   1908년 김아매가 꾸린 북양녀의학당은 천진 최초의 간호사양성학교이다. 학교 직속으로 북양녀의원이 있으며 산하에 산부인과, 간호 2개 반을 두었다.   《호리잡지(護理雜志)》연구원 강월평씨의 연구에 의하면 이 간호학교에서는 가난한 집안의 우수한 녀학생을 모집하였는데 교재도 국외의것을 사용했다. 또한 양성방법, 간호실천 등 규범에서 간호사제복에 이르기까지 서양이나 일본의 선진적인것을 적극 모방습수하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최첨단의 간호학교였다.   김아매는 몸소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의학교육사업에 혼신을 다해 노력했다. 교수와 실천을 중시했으며 서양의 선진방법을 채용하였다. 또한 영국 녀의사를 초빙하여 실습교습으로 활용하였다. 그녀가 학교교장을 담임한 8년 동안, 그리고 20여년의 림상실천속에서 중국 근대 의학발전을 위해 큰 고언을 하였다.   1934년 페염으로 인해 북경의 협화병원에서 파란만장의 생을 마감했다. 현재 북경의 오탑사(五塔寺)의 석각박물관에 가면 그녀의 묘비를 볼수 있다고 한다.   청말과 미국에 걸쳐 이어진 그녀의 인생 자체가 기구한 중국근대를 말하고있는듯 하다. 녀성의 근대화를 잘 구현시킨 인물로서 김아매는 특기할만한 녀성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 중국에서 20세기 가장 널리 퍼진말 .그런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말을 요즘은 “인민페를 위하여 복무한다”고 변했다 비굴 권위나 세력,금전앞에서 굽신거리며 상대방의 발바닥을 핥는… 성실 성실한 인간이 되라는 교훈과는 상반대로 이세상에는 기만과 거짓,사기가 발호하니 ,성실하고 어리무던,고지식한 사람은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 에티켓 “그거 난 몰라.나만 좋으면 다야.에티켓이 밥준대?” 이게 중국의 에티켓이다. 국학 ( 国学) 사실은 국가를 말아먹는 기만의 지어낸 학문. 언행 말은 영원히 행동보다 앞서는 이 사회의 원리 대사(大师 ) 이나라에서는 자칭 “대사”라는 문화인,예술인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대사가 연극에서 내뱉는 대사(台词)보다 흔하니 이 아니 괴재 ( 怪哉 )인가! 진정한 대사가 배출하는 사회적 풍토와 기후조건이 결여한데 어찌 대사가 탄생될수 있단말인가? 섣뿔리 가짜 골동같은 ,인조화같은 “대사”를 만들기보다는 대사가 생겨날수 있는 인문환경,정신적 자유의 풍토를 만드는게 급선무인가 하노라. 반시류 이 흔한 상식마저도 견지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나는 차라리 상식을 거스르는 반시류 인간이 되겠노라. 장미꽃 (1) 장미꽃을 꺾으려면 그 나무가지의 가시에 찔릴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세계의 소년소녀의 심금을 울린 “장미의 시인” 릴케는 그 죽음도 전설적이다. 장미꽃의 가시에 찔려 앓다가 죽었으니까. (2) 미국 소설가 게드루드 스타인이 이렇게 말했다.”백화방초중에 핀 장미도 장미라면 감방안에 핀 장미도 장미다” 벗(친구) 박식한 친구와 있다는것은 이채로운 책을 읽는것과 같고 풍아한 친구와 있는것은 명인시문을 읽는것과 같고 근엄한 친구와 있는것은 성현고전을 읽는것과 같고 해학적인 친구와 있는것은 전기소설을 읽는것과 같다. 의 한대목이다. 미숙 꽃은 절반핀 꽃이 제격이고 술은 약간 취함이 좋더라. 홍자성의 에서 한말이다. 그렇다.꽉 차지 않고 어딘가 빈칸이 있고 결함이 보이는 미완의 미숙이 좋다.그래서 빈칸을 메우고 결함을 극복해가는 그 과정이 의미있고 아름답지 않은가. 완숙(성) 완숙은 사물의 종식을 의미한다.마치 완숙한 홍시가 무르익어 땅에 떨어져 완숙의 죽음을 구가하는 서글픈 모습처럼.그러나 너무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남은 죽음 자체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니까. 무지 흔히 무지가 무지를 낳고 왜곡이 왜곡을 재생산한다 과거와 미래 밀란 쿤데라는 에서 이런 말을 했다.”미래는 누구나 개의치 않을만큼,가장 좋은 장소다.하지만 과거는 생기로 차있고 그 얼굴모습은 혐염스럽고 우리를 약 올리고 상처주기 십상이기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피하거나 개칠하고 싶어한다.우리가 미래의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것은 오직 과거를 개변시키기 위해서이다.” 과거,근대식민지 피지배 체험은 우리 민족에게 기나긴 슬픔의 그늘을 내리드리우고 있다.과거는 피해자,치욕과 수모,수난의 대명사다.미래를 위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과거자체를 이해하기 보다는 모종의 이념,공상과 수요로 인해 ,과거를 고정된 악과 선으로만 판가름하고 민족주의와 애국심의 용수철로 삼는다. 여기에 결여된것은 과거 자기,아니 자기 조상들에 대한 반성,재고찰과 인식이다. 전기렌지사용법 음식물을 데우는외,어떤 양반은 속옷을 말리는데 쓴다.때로는 기성의 고정적 의식,관념을 벗어나면 의외로 새로운 방법이 생기는 법이다. 만년필 100원짜리 만년필이 아무리 조정해도 1000원짜리 만년필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1000원짜리 만년필이 오히려 100원짜리 만년필보다 못한 ,질이 열악한것이 많다.오호라 위조품천국. 뇌사망 최근 무한시의 시민들이 시내의 어느 시장에서 죽은 새우만을 전문 수집,회수하는 공장이 있다고 신고했다.유관부문에서 조사해보니,죽은 새우들을 무지로 교외의 한 식품가공공장으로 운송된다고 한다. 공장책임자 해석으론 “이 새우들은 어떤것은  더러 살아있고 또 어떤것은 ‘뇌사망’일뿐이다 .죽은듯 보이지만 새우살은 탄력이 있어 충분히 식용자재로 사용될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 두 청춘남녀가 열연끝에 결혼에 골인했다면 ,이혼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유지되는 유토피아가 아닌 까닭
179    누구를 위해 비판의 종은 울리나? [장명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634  추천:52  2016-08-07
문화대담(6)   누구를 위해 비판의 종은 울리나 ? 장명(张鸣)+김문학   비판적 지식인의 사명감   김:  장선생님은 현대 중국의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 선봉의 한 사람입니다.     제가 장선생님을 포괄한 중국 체제내의 비판적 지성을 탄복하는건 체제내부에 있으면서 과감히 체제를 비판하는 용기와 슬기이에요.     비판적 지식인이란 체제와 권리의 남용과 불공평, 부조리현상을 비판 질책하고 진리와 공정,객관,진보 등 가치를 추구하는 지식인을 말합니다. 사르트르가 간파한것과 같이 “지식인의 천직은 불공평한 현상을 비판하는것이며 그것이 어디서 생기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명감이 특색입니다.     오늘 선생님과 함께 문화대담을 나눌수 있어 후배로서 영광으로 생각해요.   장; 정말 반갑습니다. 중국사회 과학원의 뢰의 (雷颐)씨와 우리 인민대학 문학학원의 손욱(孙郁)원장으로부터 예전부터 김문학씨의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동북출신의 조선족 비교문화학자, 수십권의 저작을 썼고 국제적시야를 갖춘 독특한 문화학자라는것, 나도 동북에서 살았고 조선족 벗들이 있었는데, 조선족은 “술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이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또 청결하고 부지런하고요.”     김문학씨의 출현으로 조선족인문계렬 지식인이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는 평도 있어요. 같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이렇게 “귀재”라 불린 인물과 만나게 되서 기뻐요!   김: 과찬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辛亥-摇晃的中国》을 위시로 많은 저작을 읽고 인터넷 블로그를 접하면서 당대 중국 수일의 비판적 지성, 공공지식인으로서 역사, 정치,교육, 국민성, 국제관계, 일상생활 등 여러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비판을 하고, 또 늘 정곡을 찌르는 글에 혀를 둘렀어요.     그런데 방금도 언급했지만 저야 해외 언론자유가 보장된 환경에서 비판을 전개할수 있으나 선생님은 중국인민대학이라는 국립대학중의 국립대학에 몸을 담고 있는 상황에서 용감하게 여러가지로 비판을 전개할수있다는건 일반 지식인이 다 할수있는건 아닙니다. 모두다 체제에 안주하면서 사탕발린 말이나 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세상에서 굉장히 소중한 존재이지요   장: 감사합니다. 비판적 지식인, 공공지식인이라고 했으니만큼 제 구실을 해야지요.(웃음)   이 사회에 부조리, 불공평과 죄악이 있다면 비판할수 있는건 지식인뿐이에요. 지식인은 본래부터 지식을 이용하여 불공평과 압박등에 대해서 대담하게 비판하고 정의와 평등, 인권 등 가치를 수호하는게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신해혁명이 중국근대를 혼란시켰다   김: 선생님은《辛亥-摇晃的中国》에서 기존의 신해혁명연구와 많이 다른 지적을 했습니다. 신해혁명의 준비부족이라든가 특히 “만약 신해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청조가 정상대로 입헌정치를 실시 했다면 의회제도가 조만간에 실현되었다”고 지적한것은 과연 정채로운 지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장: 사실 신해혁명은 교과서에서 미화한것과 다른 양상이지요. 그것은 준비가 잘 안된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변혁이었거든요.     혁명성공은 중국에 커다란 영향을준건 사실이지만, 그건 역효과였어요. 근대화를 추진할 대신 사람들에게 신제도에 대한 곤혹과 초조감을 주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새로운 선진적 제도를 중국에 갖다 주어야 할 혁명이 부흥과 부강의 드림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혁명후의 혼란상태를 초래했어요.   김: 그렇죠. 사실은 청말 광서신정(光绪新政)때 서양식 정치제도나 법률사상을 이미 도입했지요.   장: 맞어요. 현재 교과서적인 신해혁명의 평가가 고착되고 기호화되어서 당시의 실정이나 혁명의 많은 문제점을 호도시켰지요.     김선생의 《100년전의 중일한》에서도 밝혔듯이 신해혁명은 미완성의 혁명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볼때 신해혁명은 별 주목하지 못한 혁명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어요. 서양 정부에서는 거의 아무도 정부고관을 파견하여 신해혁명을 고찰하거나 하지 않고 당시 주청 대사들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에요.     그러나 중국인 당사자들에게 이는 굉장히 큰 혁명이었지요. 소수민족인 청나라 만주족의 제국을 뒤엎고 한족 중심의 공화국을 최초로 세웠으니까요.     그러나 공화제는 말이 쉽지 2천년동안이나 황제정치에 습관돼온 중국인에게는 지극히 곤란의 도정이었습니다. 청조 황제제도는 붕괴시켰지만, 공화제, 민주제는 설립도 되기전에 난장판인 민국이 전개됩니다.   민국은 다채로웠다   김: 선생님은 현대중국사에서 오히려 민국시대가 사상이 자유스러웠고 더욱 개방되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장: 민국사가 흥미로운것은 우리 역사의 명조, 청조사보다 더 다채로운 양상을 나타내고 있지요. 복잡하고도 전연 상반되는 얼굴이 공존하니까 재미있고 매력적인거에요. 세가지 차원에서 민국을 개괄할수 있습니다.     첫째. 제도는 점점 하강선을 긋고 있지요. 북양군벌시기 1912~1926년이고 국민당시기가 1927~1937년 항전 그뒤로 내전시기로 이어집니다. 마땅히 공화제를 실시해야 되는데 원세개는 결국 대총통취임후 황제제도를 복벽했다가 실추하고 말아요. 그 뒤 시기는 약하겠지만, 국민당시기 제도적으로 민주상황이 북양시기보다 더 못하지만 국력은 회복됩니다.   김: 그러니까 신해혁명후, 서양식의 의회제도가 중국인의 관습적 전제문화앞에서는 미약한것이지요.   장: 그래요. 민주,의회의 개념은 있었지만 실지로는 당국체제로 장개석시기는 일당,일주의 일인수령 천하였습니다.    진짜 정치적 영위는 전통적 수단이었는데, 제왕시대의 황권통치에서 군인통치와 학자가 가담한 통치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김: 민국시기 연해도시에서 민족산업이 발전되고 자주적기강산업도 어느정도 생기면서 인프라가 정비되기도 합니다.   왜 민국시대는 자유, 개방의 시대였나?   장: 이시기에 많은 신생의 직업이 탄생되고 많은 문화예술이 번영하고 대학도 진보하게 되지요. 이시기 군벌들은 주로 일본에서 군사를 배운 사람들인데 오패부(吴佩孚) 손전방(孙传芳)등은 문인기질의 양호한 군인이었어요. 염석산등도 사회건설을 하려고 애썼어요. 일본과 러시아를 배운 군벌정권하에서 물질은 현대화 요소가 많아졌지만 온 사회 사상은 제도 문화면에서 전제쪽으로 흘렀습니다.     아무튼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패배할때까지 진짜 전제를 세우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중국문화사상, 대학, 교육, 출판 지식계,예술계에 장족한 발전의 틈새를 주었습니다.     대학만 보더라도 매우 개방된 국면하에서 개설,운영해왔는데 북양시기에서부터 국민당시기까지 외국인에게 개방하고 외국인 교원전문가를 대량 초빙했어요.   김: 손문과 원세개, 장개석 지어 장작림 등 인물들 측근에 일본 전문고문을 두었으며 1898년 경사대학당(지금의 북경대학) 설립시 일본의 유명한 학자들이 많이 교육컬리큐람에 참여했습니다.   장: 맞어요. 당시 개방된 상태하에서 경제도 다원적이었고, 북양군벌시기에는 국유경제가 없었어요. 국민당시기에 국유경제가 생기는데 국가가 독점할 만큼 강대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큰 영역에는 정부의 손이 못미치는 공간이 주어졌거든요. 대학도 3종 국면 즉 국립, 사립, 교회대학 3족정립(三足鼎立)의 양상을 노정했어요.     현재의 북경사대의 전신인 보인(辅仁)대학은 천주교가 창립한것이고, 북경대는 원래 연경대학에서 발전되었는데 교회에서 만든것이지요. 협화학원(协和学院)은 당시 세계일류의 의학원이었는데 교회가 설립한것입니다. 국립대 최고는 북경대였고 국민당시기 중앙대학이 있었고 , 청화대학은 반국립, 반사립이였어요. 남개대학은 사립의 표징이었고 아무튼 민국시기 대학은 정말 훌륭했어요.     군벌들도 앞다투어 대학을 세웠는데 당계요가 운남대학, 장작림이 동북대학, 조곤도 하북대학을 창설했습니다.     당시 학술은 자유롭고 교수가 학교를 다스렸고 이게 너무 좋았어요. 대학자치에 대해 존중했는데 민국시기의 대학은 멋있었어요. 대학교수도 교편을 잡는다면 4백원넘는 월급이 보장됐으니까요.     무슨얘기냐면, 당시 경찰의 월급이 8원이었으니 교수의 경제수준이 얼마나 고수준이었는가 알만하지요!   김: 제가 중국에 와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알았는데 보통 대학교수의 월급은 아직 생각밖에 너무 적었습니다. GDP세계제2의 경제대국에 어울리지 않지요!(웃음)   장:  (웃음)그렇습니다. 그리고 민국시기 사상, 학술은 자유로왔습니다. 대학이 이처럼 자유로우니 언론자유도 보장돼 있는건 당연하지요. 잡지도 자유롭게 만들수 있었어요. 《신청년》은 개인들이 만든거고, 교과서도 다 민간에서 쓰고 출판했어.     민국사를 보면 국가가 강대했다해서 사상문화가 번영하는것도 아니고, 국가가 혼란하고 약화되었다 해도 사상문화가 같이 허약해지는건 아닙니다.   김: 그렇습니다. 민국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풍부한 시사를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공공지식인으로서 현대 중국에서도 대학, 교육, 관원의 부패에 대해 늘 무자비한 비판을 해왔어요. 지금 대학에 대해 어떻게 보고계신지요?   중국의 대학 구제불능인가?   장: 예전에도 나는 중국의 대학에 대해 많이 비판해왔습니다. 대학의 추락은 여전하고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어요. 대학이 아문(衙门)같다고 내가 자주 질책했지만, 지금의 대학은 아문보다 더 한 아문입니다.     중국 축구와 중국대학 어느게 더 희망이 있냐고 기자들이 묻는말에 나는 중국축구라고 답했어요!(웃음)   김: (웃음) 오리려 축구가 더 희망성이 높다는 말이네요. 대학이 그 정도로 추락했나요?   장: 물론 이렇게 대답한데는 홧김에 던진 말이기는 해도, 그만큼 중국대학은 중국축구만큼이나 부패하다는 얘기죠.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관료기구가 산업화로 이끈데 있어요. 그래서 거대한 이익집단의 형성하에 대학은 실지로 교육이익집단의 이익을 획득하는 제단으로 변질돼버렸습니다.     행정화가 팽창된데는 그것만이 이익집단의 최대이익화를 보장해줄수 있으며, 독점경영만이 이렇게 행정화된 대학을 유지해 나갈수 있거든요.   김: 행정화에 대한 객관적 비판시스템이 필요하지요.   장: (웃음) 말이야 듣기 좋지요. 제아무리 외부에서 비평을 해도 그냥 마이동풍격이에요. 몇년전에 발표한 《중국에는 오로지 하나의 대학밖에 없다》라는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중국의 과도한 행정화,독점화는 모종 의미에서 중국엔 대학이 하나밖에 존재 안해요. 그것은 바로 교육부대학이에요. 기타 모든 대학은 이 대학의 분교나 분부에 불과합니다. 목전 전국의 모든 도시가 획일화된 것처럼 대학도 획일화로 쏠리고 있어요.     전세계 어느 대학도 자신이 자신의 졸업증, 학위증서를 발급하는데 중국의 대학만 교육부 증서를  발급합니다. 이런 현상 자체가 계획체제의 산물이지요.     민국시대에도 북경대, 청화대, 서남련대, 이 모두가 다 자기절로 학위증서를 발급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중국 대학의 자주, 독립성은 어디 있습니까?     대학 행정에서는 교수들의 교수안도 체크하고 연구논문은 무슨 SCI 수량을 따지고 학술자유를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논문수자만 중시하니 대학이 어디 대학같아요? 무슨 기관같아요!   교육의 비만증과 소화불량   김: 중국에서 보니까 요즘 대학을 거대화시키는게 유행입니다. 대학을 주변의 작은 대학과 병합하여 비대화시키는데, 사실 저는 이상하게 느껴져요. 인간도 체통이 크고 비대하다고 해서 능력, 자질, 역량과 정비례되는것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대학도 그러하다고 봅니다.     접때 어떤 변강의 대학이, 주변 몇개 대학,전문학교와 병합해 그 지역 최대의 규모를 갖춘 대학으로 변모하긴 했지만, 결과 그 방대한 규모만큼 실력과 실제 인재양성에는 별 실효과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공정”이요, 무슨 “기요”요 하면서 분식해도 그 본질적 의미가 없지요. 대학이 무슨 잡기단, 곡마단도 아닌데 요란하게 분장할 필요가 있나요?   장: 맞는 지적입니다. 90년대후기 211공정과 985공정은 경제성장에서 부유해진 중국의 대학이 비대화해가는 표징이기도 해요. 그 방법은 주로 세가지가 있어요. 돈 뿌리기. 재력을 집중하여 소수의 수준급대학에 투자하는것 행정강화하기. 그 돈을 투자한 만큼 행정컨트롤을 강화하는것 산업화 실행. 기업관리요소를 도입해서 물량화 관리를 통한 대학교원의 대우개선 기실 이 3방면의 개혁은 결국 대학의 비대화와 함께 가장 현저한 특징이 바로 행정의 강화입니다. 그 다음은 대학의 수입비용이 10배나 증폭되고 국가도 대학생모집을 내수경제 향상 수단의 하나로 삼고, 전국에서 대학생모집에 힘을 기울였지요. 따라서 대학의 비대화에 응해 많은 도시에서 대학을 규모, 외모면에서 개선개축하고 대학도시를 건설하여 대학의 산업화는 부동산, 토지개발업과 기묘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김: 대학교육의 대약진이군요!   장: 예. 이런 대약진은 행정 주도의 대학독점회사를 형성했어요. 대학에서는 산업화의 특징을 보였는데 고액의 학,잡비를 받고 또 사회시장과 연관있는 전공을 설치하여 기초학과의 위축을 초래했어요. 이런 관영산업은 독점이기 때문에 기본상 경쟁이 없고 대학의 행정기관, 아문화, 관료끼가 넘치지요.     행정체제에서 요구하는 정액을 채우기 위해 대학과 교원들은 가짜 조작, 베끼는 등 형식으로 때우고 학생들에게도 논문을 억지로 발표하게 하여 정액의 수자를 채우는데 나서게 합니다.     편견없이 말해서 현재 중국의 대학은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됐어요. 개별적 학원, 교수외에 대학 전체가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공중에서 떨어지는것과 같아요. 솔직히 말하여 현재의 대학은 옛날의 중학교육과 유사하며, 상당히 많은 지방대학은 이름만 걸었을뿐이지요. 지금의 중국대학은 이미 대학이라 칭 할수 없어요. 김: 대학의 위기를 탈출 또는 극복하는 길은 있습니까?   장: 한마디로 개방과 개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김: 그래도 말이 쉽지 만만치 않을텐데요?   장: 아, 쉽지 않아요! 개방은 가능성이 있지만  중앙정부와  교육기득권자 사이의 결투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결투에서 성과가 있다면 진일보 개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국엔 “그러나”가 너무 많아요. 개방하여 교회에 학교운영권을 준다면 문제는 더 해결하기 쉬워집니다. 민국때처럼 교회에서 대학을 꾸린 경험을 적응하면 위기 극복의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됩니다.   노벌상 수상은 토치카를 격파하는게 아니다   김: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노벨상 욕망”은 보통이 아닙니다. 이미, 문학상과 자연과학(의학생리학)에서 중국인이 염원의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대학,인구에 비해 너무 정비례가 되지 않는다고 중국내 지식인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본은 GPD세계제2의 기간에 10여명의 노벨수상자가 나왔는데 중국은 같은 시기 비례적으로 너무 말이 아니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 중국인의 노벨상 칭제(情结)는 거국체제입니다. 근년래 정부유관부문에서 만인계획을 내왔는데, 과기인재 만명을 중점적으로 선발장려하여 그중에서 또 최우수 100명을 선발하여 집중적으로 노벨상을 공격한답니다.이런 기세당당한 방대한 공정은 실로 고무적이에요.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이런 유사한 과기인재 양성공정은 예전에도 있었어요. 다 기백이 있고 거금을 소모했지만 노벨상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지요.(웃음)   김: 과연 전제제도의 중국다운 얘기군요.   장: 거국체제의 우세는 스프츠항목의 난관을 공략하는데는 효과가 있어요. 그러나 기초과학을 이런 식으로 돌격한다는건 소련도 그랬거니와 중국에도 지금까지 효과가 없습니다     과학연구영역은 기실 한 국가의 교육과 연구체계와 연결되있는 법이지요.노벨상수상이 어디 등산과 같은 일인가요? 오른다고 해서 동반하게 되나요? 만일 전쟁에서 적진을 진공한다면 이런 집중공격은 적의 토치까를 부술수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연구, 노벨상수상은 한나라의 전체과학기술실력,사회학술환경의 뒷받침 해줘야 하지요. 노벨상 각 상에서 자연과학영역에서 수상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죄다 교육과학연구실력이 최강의 국가입니다.     현재 GDP세계제2의 대국이지만 우리의 과학,교육수준은 아직 수준미달이지요. 일본에 비해서도 많이 후진국입니다. 과학기술실력이 교육과 밀접히 관계된다만,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표준답안식이죠. 중국의 중학생이 올림픽학력경기에서 수상한는데는 문제없지만 과학연구영역,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지요. 과학연구체제도 그냥 연구항목이요,연구비요 하면서 결국 행정화 체계이니 문제입니다     노벨상 수상을 바란다면 우선 해야하는일은 그런 공정이 아니라, 교육과 과학연구체제를 개혁하고 행정주도,학벌주도를 버려야 합니다. 이게 급선무에요. 딴것은 다 쓸데 없어요. 화려한 공정(工程)은 결국 슬로건과 비슷하니까요!   “당신은 행복합니까?”   김: 과연 독설가 장선생님다운 날카로운 정곡을 찌른 말씀이십니다.     이번에는 중국인의 일상 삶의 질에 관한 화제를 여쭈고자 해요. 개혁개방 30여년이 지난 오늘 중국이 물질적으로 부를 획득했지만, 저의 관찰에는 삶의 질이 물질적 차원에서는 향상되었어요. 그러나 요긴한 정신적, 문화적 차원에서는 별 진보를 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상해, 북경 등 대 도시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아요. 목소리만 컷지 미소가 지극히 적어요. 한 나라의 종합적 소프트파워를 가늠하는데는 그 나라 국민의 만족도, 행복감 문제가 하나의 바러미터로 되는데. 중국인의 이점에 대해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장: 제가 몇년전에 글에도 썼는데요, 인민논단잡지의 임의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약세군체”(弱势群体)로 보는 사람중 지식인이 55% 당정간부가 45% 샐러리맨이 58%에 달해요. 그리고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약세군체”라 여기는 사람은 7할이라고 합니다.   김: 아, 당정간부, 지식인이라면 다 사회의 엘리트계층인데 그럴수가 있나요?   장: 글쎄 말입니다. 더욱 아연해지는것은 평시 위풍이 름름한 경찰도 기자의 인터뷰에서 자신도 약세군체이니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소연한대요. 웃끼는 얘기죠. 만약 이러한 사람들중에 어느 한사람이 농민공신분과 서로 바꾸라하면 그럴 사람이 있겠어요?(웃음)     그러나 이들의 하소연도 절대 꾸민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식인도, 관원도, 샐러리맨도 경찰도 다 고가 집가격, 고가교육비,고물가 등에 눌려 허리가 굽혀지는건 사실이거든요.     상급행정의 압력, 하급과의 처리 등 이로 최대 수익자인 관원도 빛좋은 개살구에요. 반부패의 환경하에서 “탐불가 불탐역불가”(贪不可,不贪亦不可)의 궁지에서 허덕이게 되지요.   김: “당신은 행복합니까?”의 물음에 예스라고 대답할 계층의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건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장: 사실 다 현실의 삶에 만족감, 쾌락이 없다는것이지요. 소수면 몰라도 70%나 되는 국민이, 그것도 상층엘리트층이 만족감이 없다는 사실은 큰 문제이지요.     중국 개혁개방 30여년에 경제총량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부의 증가는 행복감의 증가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뿐만아니라 더 많은 국민들이 행복감이 줄어들고 안전감도 없다고 불만입니다.    그래서 그 대안이 바로 출국입니다. 안전감이 없고 살 장래성이 없다고 느낀 많은 사람들이 개방과 함께 국외로 나가 유학하고 이민하고 정착합니다.   김: 지어 그렇게 미국에 민주, 자유가 없다고 비판하던 이른바 젊은 애국자들도 미국 남자와 결혼하는가 하면 아예 미국국적을 취득하고 마는 케이스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장: 그래요. 그러므로 제생각에는 아직 개혁을 해야 해요. 국민들의 불만의 목소리는 결국 더욱 큰 변혁을 부르는것이지요.   횡단보도는 문명수준의 눈금   김: 일상 세부의 화제인데요. 저는 일본서 오래 살다가 중국에 한번씩 오면 제일 무서운 두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변 보는일이고 또 하나는 길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입니다. 대학청사의 안에 있는 공중화장실안에도 토이렛페퍼가 비치돼 있지 않아서 늘 봉변을 당했던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건널때 또 두가지 겁나는 일이 있는데요. 하나는 행인들이 적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는게 많이 보이고 외려 청신호를 기다렸다가 건너는 사람이 소수인 경우도 늘 있습니다.     자동차역시 횡단보도를 청신호때 건너는 행인을 무시하고 스피드를 내서 질주하는 현상이 많아요. 좌우로 잡아먹을듯이 달려오는 맹수같아서 늘 마음이 조마조마 합니다.(웃음)     공중화장실이 “2.5㎡의 문명관”이란 말이 있고, 횡단보도 역시 그 나라 국민의 문명레벌의 눈금이지요.   장: 재미있는 지적입니다. 화장실에 화장지를 두지 않는건 하나는 재정문제라는 말이 있고 또 하나는 화장지를 도둑 맞치는 일이 비일비재라고 합니다.   김: GDP세계제2의 경제대국이 그 화장지도 살돈이 없다는 말은 좀 이해가 안 가는군요. 복단대학 갈검웅선생님은 중국보다 문명수준이 낮고 경제력이 가난한 아프리카주의 대학 화장실에도 대부분 화장지가 비치돼있다고 한적이 있습니다.   장: 황차 화장지까지 훔쳐가는 국민의 문명수준은 바닥이 다 드러난거죠!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은 결국 청색을 통행 적색을 스톱이란 법의 룰을 안중에 없는거죠. 그냥 촌에서 논두렁 건너는 의식으로 나만 건너가면 된다는 그런 농경문화의 습관이 남아있다고나 할까요.   김: 그러니까 해외에서는 중국인처럼 용감한 국민은 없다고 하지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적신호를 무시하니까요. 제가 늘 관찰해보면 적신호때도 부랴부랴 건너는 행인들은 무슨 급무가 있어어가 아니에요. 건너가자 저쪽에서 금방 핸드폰을 보면서 유유자적 우보로 천천히 걸어가거든요.(웃음)   장: (웃음) 그게 바로 습관이지요. 별 바쁜 일로 그런것도 아니고 옛날부터 건너는 습관이 되어서 무의식의 행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편 자동차시대라고 불릴만큼 중국거리엔 자동차의 홍수입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자동차는 보행대용일뿐아니라 돈 있는 자들의 자랑꺼리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집사는 돈을 부모가 내주고 은행대여를 해서라도 외제 고급자동차를 사지요. 벤츠, BMW 부귀와 돈자랑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자랑하기 위해서 초스피드로 운전하는데 차안에 있는 자는 차밖에 있는자를 무시하고 얕잡아 보지요.     그러니 김선생같이 해외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은 횡단보도 건너기가 전쟁터로 나가는것과 같지요. 본래는 청신호는 행인의 통행권리인데 그런 차들이 좌우양쪽에서 맹속력으로 질주해오니 인간이 차를 피하는 곤경에 빠지게 돼요.   김: 자동차가 문명의 상징물이기도 하며, 인간의 교통도구에 지나지 않지요. 자동차를 운전하는 인간의 소질이 아직 자동차라는 껍떼기에 갇혀서 그 껍떼기보다 더 중요한 인간, 내지 인간의 생명을 모르는거예요.   장: 그러니까 중국은 자동차시대만 있었지 자동차시대의 문명은 아직 없습니다.    “관강민약”의 중국문제   김: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아레시스.토크빌러의 《구제도와 대혁명》를 읽으면서 나는 18세기 후반의 프랑스가 마치 21세기 현재의 중국을 실사(实写)한 느낌을 강렬히 받았어요. 부패, 추악하고 책임감이 없는 관리와 불만에 차 있으면서도 또 무기력한 보통대중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초조와 불안하여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잡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중국 현재의 관민의 관계 및 실존양상 그 자체라 생각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중국 관민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장: 참 좋은 화제를 꺼냈군요. 중국이란 이 역사중에서 진한통일이래 수천년동안 관료형 제국국가가 유지되면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관계가 바로 관과 민이었습니다.     사회모순의 굶은 주선도 여전히 관민모순이었고 관은 사회운행의 주체였으니 어느곳에서 민의 원성이 관의 통제로 삭일수 있었지요. 한편 사회의 엘리트, 지식인도 민과 이탈돼있었고 관원과 관계가 더 밀착돼있었습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관의 권력이 너무크고 강한 까닭에 민은 거이 무슨 권력도 없이 약소한 존재였어요. 약한 민이 관의 저항으로 상급에 반영하고 매스컴이 폭로시킨다해도 결국 관의 상급도 관이기에 관의 악행을 억제시키는 길은 좁아요. 그러므로 관이 가장 두려워하는것은 매체에 폭로되는것이지만, 많은 상황하에서 일을 컨트럴 할수 있고 그것을 억누르면 민의 반항도 결국 우야무야 흐지부지해지고 말지요. 그러면 관원들은 계속하여 대담하게 권리를 확대, 남용할 길이 넓어집니다.   김: 관을 감독하는 법적 메키니즘이 정상으로 존재하지 않고 또 작동이 되지 않는 인치사회 중국에서 관의 권력에 자동적으로 굴복하는게 민의 하나의 국민성으로 고착되었습니다.     민 자체가 자신의 인권,민권과 자유를 향유하고 지킬줄 모르니 이것도 큰 사회문제이지요.   장: 체제내의 부동의견자들, 이성(理性)의 목소리를 압제하다보면 체제밖의 서민엘리트들이 궐기하며 민중을 위해 일을 할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각급 관원들은 공공적 사건처리에서 도리를 따지지 않고 강제로 압제하며 부분적 서민엘리트들이 비이성,폭력적으로 저항하게끔 만들어버려요.     그러니 이성의 목소리는 관방의 강폭속에서 민간에서는 제대로 성장할수 없게됩니다. 현재 관장(官场)에서 전례없는 권대독존(权大独尊)의 풍기가 생기고 여러 분야의 관장에 만연되고 있는데 대학도 포괄돼있어요.     자기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은 예외없이 관의 타격 배척을 당하고, 반대로 모든 관장에는 관화(官话),거짓말, 빈말과 아첨이 성행하게 됩니다.     민중의 뜻은 표달할수 없고 누가 민중을 위해 말을 하면 관의 공적(公敌)으로 되기 십상이지요.   김: 역시 무서운 관민의 관계역학입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문제 해결의 방책이 있는지요?   장: 이런 “관강민약”의 사회환경과 토양속에서 그 관계를 해결하는 묘안은 아직 없는줄로 알고 있습니다. 국가가 능동적으로 이 대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을 찾을수 있냐 없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여전히 대환경의 개혁이 필요하지요.   왜 인간의 존엄, 유린당할까?   김: 장선생님, 저는 비교문화 학자와 문명비평가로서 항상 동아시아3국인과 함께 특히 중국인의 “인간문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품고 관찰분석해왔습니다.     “국민성”이란 테제를 떠나 중국인을 세계 각국인과 비교할때 지금까지도 인간의 조건중에서도 존엄, 자유를 경시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한나 아렌트(현대 독일의 탁월한 사상가)의 《인간의 조건》《전체주의의 기원》등 명작을 읽으면서 더 많은 사고를 하게 됬었습니다. 인간은 독립사고, 적극적으로 생활하는것이 아렌트적 의미의 인간조건의 하나인데 사고와 행동이 인간의 중요한 조건이며,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존엄,자유 내지 자신의 계몽,이성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인간을 경시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요. 경찰이 농민공에 대한 형편없는 태도나 최근에 일어난 뢰양(雷洋)사건에서도 이점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장: 중국에서는 권력이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는 패턴이 많습니다. 권력이 좀 있다면 권력이 사유영역까지 침범하여 상대의 존엄을 꾸겨야 권력의 맛을 보는듯하지요. 어렸을때 선생은 일을 저지른 학생에게 벌 주기 위해 전 반급앞에서 그 학생의 프라이버시나 약점을 공개해서 프라이드를 여지없니 꺾어놓군했잖습니까.     현재 상급과 하급관계도 흔히 주노(主奴)관계로 작용하며, 마음에 안드는 부하를 여러가지 수단으로 존엄을 꺾는 일이 비일비재지요.     권력의 산생은 폭력, 정복과 갈라놓을수 없는데 이른바 정복이란 육체의 콘트럴뿐만 아니라 피정복자에 대한 정신적 유린을 의미합니다. 모종의 의미에서 피정복자의 정신, 육체적 복종은 권력실시의 실효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우리 중국사회에는 여전히 권력자의 권력의식이 DNA로서 전해왔어요. 권력자만 아니라 많은 권력자가 아닌 대중들에도 그런 권력의식, 심리가 있어서 자신들의 자식,또는 약자에게 같은 굴욕을 안기지요.    흔히 도시인들이 농민공에 대한 태도, 언어, 눈길하나에도 부지중 그런 우월자의 의식중에 존엄을 무시하는 건 일상에도 늘 있지요   김: 존엄이란 인간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덕목으로서 인간이 인간이게끔 보증하는 기본조건이기 마련이지요. 대체로 중국에서도 여전히 존엄의식이 희박하고 사람들도 존엄을 지키면서 생존하는 태도가 결여합니다   장: 부존빈비(富尊贫卑),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상의식이 중국인의 인간관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고질이지요. 인간이 존엄이 짓밟히고 또 사람마다 존엄을 무시한다면 이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니지요.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는 사회만이 정상적이고 인간다운 사회이지요.    돈키호테의 경종   김: 중국에서 비판적 지성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장교수님께서는 래디컬한 비판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대담같은 무자비한 비판을 해도 괜찮습니까?(웃음)   장: 아무렴 괜찮구 말구요. 오늘 말한 내용은 다 내가 공개발표한 글에서 쓴 내용입니다. 지금 중국도 언론자유도가 넓어져서 문화대혁명시기처럼 지식인을 공권력으로 맘대로 잡는 그런 시대는 아니니까요.   김: 선생님은 중국지식계의 “돈키호테”라 불립니다. 2007년 인민대학에서 학원원장의 교수에 대한 직함평가에서 부조리가 있다고 과감히 질책하고 결국 전국 지식계에 “장명사건”으로 파급되었지요. 당시 장선생의 지지자가 많았으며 장선생님이 정치계주임직을 박탈당했지만 지식인의 독립자유정신을 수호했다는 점에서 선생님은 더 학계의 존중을 받게되었습니다.   장: 내가 좀 과격한 비판을 하여도 내 명성때문인지 누가 감히 어쩌질 못해요. 전국적으로 파장되면 뒤수습이 두려우니까!(웃음)   김: 미술가 진단청(陈丹青)선생의 사건이 있었지요. 미국 유학하고 미국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진선생이 청화대학 미술학원에 교수로 취직했다가 교육의 고루한 방식이 싫어서 청화대 교직을 물러난 일이 사회적 사건으로 되었습니다. 중국학계에서는 더 많은 장명,진단청이 나타남으로써 현실 체제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개변할수 있는 개혁의 역량이 된다고 호응하였습니다.   장: 내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돈키호테의 방망이(펜)를 들고 경종을 울리는것은 우리 나라의 관료체제, 우리 사회안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불평등 또는 결함,폐단을 지적, 개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김선생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비판적지성으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3국에서 이렇게 하는 건 대단한 일이지요.   김: 비판적, 자유주의 지식인으로서 앎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것이, 사회에 대한 언설적 총탄의 발화행위라 믿고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말입니다.   장: 그래요! 내가 갖고있는 하나의 신조는 서재속의 학자처럼 학술을 상아탑의 정교로운 조각으로 만드는게 아닙니다.     내는 사회 비평을 하는 일은 계속 견지할겁니다. 이 사회에 선량을 억느루고 흑백을 전도시키고, 양녀를 창녀로 핍박하고, 언론 탄압을 하는 여러가지 악행이 존재하는 한 나는 내 손의 펜을 놓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실정을 알리는것은 매 하나 지식인의 거부할수 없는 책임이기때문이지요. 대학 교원으로서 더욱 그러하지요.     나는 내가 얼마나 고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양심이 불안한 까닭입니다.     내가 일을 한 뒤 그 어떤 트러블이 생겨도 령도들이 그 얼마나 노여워해도 나는 다만 양심의 지령에만 복종합니다. 이게 나의 생존방식입니다.           대담자  소개   장명(张鸣)   중국 현대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 정치학자, 역사연구자, 평론가 1957년출생 , 동북의 북대황에서 자람 청소년시기 농업기계공, 수의를 지냄 중국인민대학 대학원 졸업 현재 중국인민대학 정치학계 교수   주요 저작으로는 《辛亥-摇晃的中国》《乡村社会权力和文化结构的变迁》 《历史的会脾气》 《历史的底稿》《北洋裂变》 등 다수가 있음     
178    8.천만 사람 상인 시인 질고 법률 결혼일 약 국민성 댓글:  조회:2806  추천:36  2016-08-03
천만 “무익한 말 천만번 내뱉기보다 마음의 안착이 되는 유익한 말 한마디를 명심해 듣는게 더 낫다” 붓다의 “진리의 말”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 “나는 이제야 내자신이 이란것을 느끼게 되었다.”(파금의 ) 지금 젊은이들은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지 어리둥절해질것이다.그러나 그사람이 귀신처럼 학대받던 문화대혁명시기를 겪은 사람이라야 이말의 진의를 터득할것이다. 상인 상업을 통하여 상인( 伤人)을 하는 업자. 시인 시시콜콜 짧은 글을 쓰는 문인,그러나 좋은 시는 마치 응축된 정신영양에 키스처럼 인간정신에 지대한 영양가를 줌. 질고 3명 남자가 모여서 각자 질병에 관한 얘기를 했다.안질에 걸린 남자가 말하기를 “어젯밤 안질이 나서 전혀 보지를 못했네” 치질에 걸린 남자가 말하기를 “난 어젯밤 치질때문에 자지도 못했네” 이번에는 치통에 걸린 남자 왈 “난 또 고놈의 치통탓에 아침부터 밤까지 씹지를 못했네 “ 아이고~질환이 주는 고통은 남자를 죽이는구려! 법률 이 나라에는 모든 분야에 명문으로 밝힌 공정한 법은 있다.그러나 경우에 따라 법은 해석이 때때로 다른게 또 이 나라다. 결혼일 문:결혼일은 왜 좋은날만 택하는거죠? 답:그거야 결혼하고 난담 좋은날이 별로 없으니까요. 북경의 고속철도역에서 엿든 대화다. 약 흔히 병이 주는 해( 害 )보다 약이 주는 해가 더크다. 국민성 통상사전에서는 “한 나라의 국민이 공통으로 갖고있는 성질,성격”이라고 해석. (hand book of social-payehology.inkeles and levinso.1954년)에서 제시된 국민성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국민성이란 ,한 사회성인의 구성원사이에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상대적으로 영속적인 인격특징과 유형을 가리킨다” 한나라와 사회성원은 지리자연적 조건,역사족체험에 의하여 거이 비슷한 성격,행동양식,사고양식을 나타내게 되는 법이다. 물론 개개인의 차이는 어디에도 있지만 성향은 비슷하다. 세계 주요국가의 국민성을 동물에 빗댄 흥미로운 비교가 있다.누가 정리해낸 이야기인지 참 신통하다. 미국인:매 , 매와 같은 국민성,미국 국장(  国章 )은 매이며 세계적경찰을 자임하여 기고만장하게 세계를 휘여잡는 자세로 창공을 날면서 사냥물을 노리다가 발견하는 즉각 습격하는 매 그것이다. 독일인:말  ,말처럼 목표를 확인하면서 신중히 앞으로 질주하며 실패를 잘 안함.근엄직실한 까닭으로 벤츠와 같은 세계적 자동차를 만들어낼수 있다. 영국인:코끼리  ,온화하고 중후한 신사로서 이로써 브랜드 이미지로 세계와 접하고 있음 . 프랑스인: 사슴  ,늘 우왕좌왕하면서 로맨틱하며 타인의 눈에 띄고 그 아름다운 뿔,즉 체면있는 공허한 명예를 위하여 목숨마저 건다. 아랍인:낙타   ,열악한 자연환경하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인내와 근면성으로 일함. 인도인:개  ,충성심이 강한 까닭으로  인도에서는 충성심이 많은 하인이 양산했다고 한다.영국식민지시대 “인도충복”은 너무나 유명했다. 러시아인:북극곰  ,욕심장이로서 겉보기는 우둔해보이지만 실은 총명,교활함.그러나 어떤 목표를 위하여 또다른 중대한 일을 상실하는 면도 있음. 중국인: 메추리  ,한무리 메추리를 조롱속에 넣자마자 격투를 벌인다.종당에는 한마리만 권위로써 선출되어 조롱속을 확보한다.다른 메추리들은 전전긍긍 조롱 한구석에서 가만히 눈치만 볼뿐이다. 일본인:오리  , 한무리 오리중에서 한마리가 선두에 서서 “갸갸갸…”짖으면 모든 오리들이 일제히 따라 짖으며 온순히 따라갈뿐. 한국:토끼  ,실제로 조선반도의 지리모양도 귀를 쫑긋 세운 토끼양상을 하고있다.호랑이라고 한국인은 자랑하지만 ,정서가 폭팔될때는 호랑이 같다.그러나 강적앞에서는 토끼같이 눈치를 본다.예로부터 대륙강국과 섬나라 사이에 끼운 지정학적 원인이 있다고 본다.  
177    왜 중국의 개혁개방전망에 낙관하는가?[모우식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765  추천:55  2016-07-29
《33의 신사유》 문화대담(5) 왜 중국의 개혁개방전망에 낙관하는가? 모우식+김문학   들어가면서 모우식(茅于轼)선생님과의 대면은 지난 6월28일 오전 9시경 북경시내의 녹음이 우거진 한 주택가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였다. 모선생님은 사진에서 익숙히 보아오던 얼굴모습처럼 미남형에 신사적인 대가의 기질이 넘쳤다. 88세의 고령을 의심하도록 70대로 보였으며, 겸손하고 자애로우며 친근하여 오랜 지기같은 느낌이었다. 82세의 미인 사모님도 멋진 원피스차림으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모선생은 현대중국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대표적인 경제학자의 거물로서 국제적으로 높은 성망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다. “경제학계의 노신”으로 불리는 그는 경제학의 발견과 업적외에도 진실한 언설로 중국의 도덕, 정신세계를 이끄는 “정신적 기수”로 일반 대중과 지식인계층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그를 “한간” “민족반역자”로 비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모선생을 알게 된것은 1997년 《중국인의 도덕전경(前景)》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작년에 유명역사학자,평론가 오사(吴思)선생의 소개로 모선생과 직접 전화통화를 빈번히 하게 되었으며, 이번 대담이 쉽게 결정되었다.   “김문학선생은 젊었지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에서 제일인자로 불리는 인물이더군요. 나는 젊은 학자와 교류하기를 좋아한답니다. 김선생과 대담을 속으로 많이 기대했어요.”   우리의 대담은 자연히 친구의 대화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전개되였으며 2시간이 눈깜짝할사이에 흘러버렸다. 사모님도 가끔식 대화에 끼어들어 모선생님의 사적인 일화도 들려주어서 고마웠다. 모선생은 근현대 중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중국인의 정신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노벨상 수상급 경제학원리의 발견   김: 모선생님의 경력을 보면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학에서는 기계전공을 배우고 치치할철도국에서 기관차 기사, 공정사를 하셨고 그 뒤 철도부 과학연구소에 전근되어 기차차량연구에 종사했지요. 그러다가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산서성 대동에서 7년간 하방했으며 청장(青藏)철도건설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경제학자와 달리 경제학전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제학연구에 놀라운 실적을 쌓았어요. 어떻게 공학연구에서 경제학연구로 전향하시게 되었습니까?   모: 내가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된 이유는 계획경제시대 철도의 경제성을 어떻게 평가하는데로 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때 벌써 내가 46살이었거든요. 그때 다른 경제학자들이 《자본론》에서 구절을 따오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을때 나는 공학연구자로서 그런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날수 있있어요     사실 경제학은 추상적 개념을 늘어놓는게 아니라 수리(数理)의 기초위에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중국 경제학자들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예속당하고 있었을 무렵 나는 그런게 싫었어요. 학문은 정치가 아니니까요.   김: 선생님께서 1979년 유명한 경제학의 “택우분배원리 (择优分配原理)”개념을 제기했을때 50세였지요. 이 원리는 경제학 노벨상 수상급의 발견이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아직 폐쇄된 중국의 환경에서 선생님은 세계경제학영역의 최첨단에 서계셨어요. “택우분배원리”는 경제학, 특히 미시적경제학의 척추라고 불립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모: 미시적경제학에서 핵심적 연구주제는 바로 적은 자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분배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택우분배원리”는 바로 직통적으로 자원배치의 최량원칙이 무엇인가를 따지는겁니다.     최우분배원리는 각 영역에 배치된 자원으로 하여금 통일적인 가장자리 (边际) 수익을 거두게 하는 것이지요. 계획경제체제하에서는 이론적으로는 통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통하기 어려워요. 왜냐하면 평균수익을 변두리 수익이라고 오판하고 칼로 베버리기식의 비례관계로 국민경제건설을 지도하기때문에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조정을 막아 버려요. 결과 낭비와 저효율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러니 오로지 시장경제의 길을 가야 통해요. 택우분배원리에 따라서 시장이익을 추구하는 참여자는 항상 가격신호를 충분히 이용할수 있으며 부단히 미량적 조정을 하여 변두리수익이 낮은 투입을 변두리 효익이 더 높은 영역으로 향상시킬수 있답니다. 최후에는 모든 변두리 수입이 일치하게 되고 이상적인 분배를 달성할수있어요.   중국 “경제계의 노신”으로 되다   김: 1975년인가 소련 경제학자 L.V 칸트르위치가 “택우분배원리”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선생님은 정보가 폐쇄된 상황하에서 이 원리를 발견하신건 대단합니다. 1985년 《走向未来丛书》의 한권으로 선생님의 《择优分配原理》를 출간했는데 중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요.   모: 그때 우리나라 정보가 막힌 상황에서 나야 이런 정보를 몰랐지요.또 알수도 없었고. 나는 나대로 경제학의 미시적연구와 강의에 몰두했는데 내 학생중에 지금 유명한 장유영(张维迎) 송국청( 宋国青) 양소개(杨小凯) 등 우수한 학자들이 포괄돼있었어요. 1984년 철도부 과학연구원에서 중국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로 전근되어서 더욱 본격적으로 경제문제를 연구하게 되었고, 나는 중국경제계의 계몽을 위해 헌신할 결의를 했습니다.   김: 모선생님은 “경제계의 노신”이라고 불립니다. 미국연구소는 당시 소장으로 계신 거물 이신지(李慎之)선생님의 초빙으로 전근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모: 그래요. 내 인생을 바꿀 만큼 이신지선생님의 영향은 막대했어요. 그때 이선생은 미국경제에 관한 논문을 매년 몇편 발표하기만 하면되니까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가지라고 했어요. 정말 고마운 분이지요. 미국연구소에 있는 10년동안 내  3분의 2의 연구성과는 다 중국개혁에 관한 글이었는데 이들은 중국개혁에 다소 추진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나는 체제내에서나 체제외에서나 항상 자유주의 지식인이라 여겨왔어요. 보다 개방된 사유에서 경제영역이나 사상영역에서 계몽자로 자신해왔습니다.   김: 그래서 선생님을 “경제계의 노신”뿐만아니라 “사상,개혁의 노신”이라 칭해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아마 미국이나 일본같은 나라에서 사셨다면 노벨상 수상도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모: (웃음) 아마 그럴수도 있겠지요. 모선생 사모님 방백: 우리 모선생은 많은 분야를 걸쳐서 연구를 해왔는데 사고가 독특하고 역향(逆向)적인 사유가 많아서 늘 독창적인 연구실적을 이루어왔어요.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고 상식을 도전하는 정신이 강하지요. 그리고 고지식하고요.   김: (웃음) 그렇군요. 독창적 학자로서의 성품이 갖추어있지요. 선생님은 민간에서 최초의 싱크탱크(智库)인 천칙(天则) 경제연구소를 창립했지요. 중국 민간싱크탱크의 상징으로 꼽힙니다. 유명 싱크탱크 “천칙경제연구소” 모: 예. 1993년 내가 장서광(张署光) 성홍(盛洪) 당수녕(唐寿宁)등 학자들과 문화사업을 하고 있는 대상(大象)회사와 공동으로 천칙경제연구소를 만들었어요. 김: 그런데 궁금한건 “天则”이란 이름이에요. 모: “天则”은 《시경》의 시구 “天生丞民,有物有则”(천생승민,유물유칙)이란 시구에서 따 왔는데, 자연의 규칙을 뜻합니다. 이 명칭은 우리 경제학자들이 다 제도경제학에 공동한 관심을 품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지요. 초기에는 성홍씨가 소장을 담임했다가 1993년 가을께 미국 시카고대학 방문학자로 가는 바람에 내가 소장을 맡게 되었어요. 금년부터는 오사(吴思)씨가 이사장을 맡게 되었구요. 김: 천칙연구소는 미국의 《타임즈》나 국제적 매스컴에서 중국 민간에서 탄생된 최초, 최고의 싱크탱크라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로 어떤 일들을 하셨습니까? 모: 너무 많은 일들을 전개했지요. 중국제도변천의 연구, 경제, 인문개혁의 연구 그리고 격월천칙포럼도 개최했어요. 그리고 상아탑에서 나와 경제학 “산업화”에 힘을 기울였는데 아시아 개발은행 후드기금회와 미국국제경제연구소가 위탁한 많은 항목을 완성했어요. 모선생사모님 방백: 모선생은 사실 퇴직후에 집에서 쉬면서 글이나 쓰면되는데도 쉴줄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연구소에 매일 출근하면서 글 쓰고 강연하고 젊은 소장학자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어요.그렇다고 무슨 돈 되는 일이 아니데도 사욕은 다 뿌리치고 중국개혁을 위해 헌신을 해왔지요. 요즈음은 88고령이니까 연구소일은 관여하지 않지만 그래도 강연초청이 있으면 나가셔요. 누가 우리의 치부(致富)를 방애했나? 김: 선생님의 굵직한 신조의 하나는 “중국인이 부유해지는것”이라고 어느 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누가 우리의 치부를 방애했나?》라는 책에도 이 신조가 잘 구현되고 있었어요. 왜 중국은 가난한가? 누가 우리의 치부의 길을 방애하는가?를 미시적 실례를 들어 표현했습니다.   모: 난 지금까지 해외 선진국, 후진국을 다 돌았고 내 인생도 민국,신중국,개방개혁 3단계를 다 겪었어요.이런 와중에 경제학자로서 내가 가장 관심을 품은건 중국이 가난한것과 우리의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에 대해 캐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의 무질서, 성실하지 못한것, 소질이 열악한것도 큰 문제이며 제도도 큰 문제입니다. 사실 한 개인의 물질생활의 풍요로움은 본인이 창조한 가치량뿐만아니라 동일사회중 기타 성원의 일하는 질과 효율과도 관계됩니다.     경제학의 견해에서 바라보면 인위적인 불합리가 생산의 잠재력을 저애하고 인간의 노동을 생산에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노동성과를 상쇄하는 노력에 써버리지요.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국가의 재부를 좀 먹고 개인의 치부를 방해합니다.     치부의 길은 아무래도 제도의 창신과도 관계가 밀접하지요. 그중에서도 핵심적인것은 자유교환의 시장가격시스템으로 자원의 배치방식을 개변해야 서로가 시장에서 수입을 취득할수 있고요. 이러자면 재산소유권을 명확히 해야 됩니다.   GDP의 신화를 넘어서야   김: 저명한 경제학자이고 신자유주의 지식인의 기수로 꼽히는 하이예크는 《노역으로 향한 길》등 저작에서 경제방식과 인간성, 정신양상에 큰 역할을 한다고 지적 했어요. 국가가 과도하게 경제를 관리하여 생긴 문제를 소련의 해체를 통해서 설명하였으며 전체주의 계획경제의 큰 페단에 대해서 비판의 메스를 드리대면서 전체주의가 바로 인간을 노역의 길로 끌고가는 길이라고 지적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지 오웰의 《1984》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으며 전체주의의 결함을 비판한 자유주의지식인의 하소연을 실감했습니다.선생님은 중국의 계획경제와 GDP 추구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모: 하이예크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중국만 아니라 세계 계획경제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해 서지요. 중국이 장기간 계획경제를 한 결과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등소평이 시장경제를 실시 했잖아요. 그래서 전례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GDP는 당연히 중요해요. 플러스면에서GDP의 향상은 대중들이 돈벌이에 투신하고 돈 벌려는 욕망이 강함을 설명해요. 그러나 문제는GDP 만 추구하면서 돈을 버는 동시에 타인을 상해하는겁니다.     원래 시장경제는 타인을 상해줘서는 안되는게 룰이에요. 그러나 보세요. 현재 중국에서는 일방적으로 억지로 일하여 상대를 손해주는 일이 어디 한 둘입니까? 이것은 발달한 선진국의 시장경제와 비하여 현저한 거리가 있지요.   김: 일본에서는 상업원칙이 너 좋고 나 좋고 소비자도 좋은 3방호(三方好)원칙이 잘 관철되고 있어요. 그러니 일본의 기업이 오래 지속되고 전승되지요. 백년이 넘는 회사가 일본에 세계제일 많은데 무려 5만2천여개나 되고 200년이 넘는 기업이 4천여개가 되구요. 천년이 된 기업이 7개 그중 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회사가 오사카의 콩고구미 (金刚组)인데 1438년에 설립된 거지요.   모: 그러니 우리가 일본을 따라배워야 합니다. 타인을 상해하는GDP는 엉터리죠. 타인을 상해한다면 그건 도박이 되버려요. 내가 벌고 상대가 밑지면 별로 못 번거예요. 나도 벌고 너도 벌고 다 벌어야 GDP가 상승되지요.     시장경제의 기본특징이 쌍영(双赢)이니까 쌍영이야말로 재부를 창조하는 길입니다.   김: 좋은 말씀입니다. GDP만 올려서 풍부해졌다고 외치는 것도 유치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중국의 산업구조가 경제학자들의 지적과 같이 노동력집약형산업중심이어서 품삯만 벌어드리는 구조이지요. 설계에서 가공까지 전과정을 걸쳐얻는 수입은 몇퍼센트정도의 수익을 누적한거에 지나지 않아요. 최대 수익자는 구미나 일본같은 선진국이고 게다가 중국은 또 환경보호와 같은 코스트를 자부담해야 하지요.   모: 맞아요. 지금GDP신화를 강조하면서 경제의 활성화를 높이 올리추고 있지만, 중국인이 계획경제를 또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계획경제에서 고배를 마시고도 잘 몰라요. 나는 시간이 되면 계획경제의 페단에 관한 저작을 쓸 생각이에요.   왜 중국인의 도덕을 추궁하는가?   김: 선생님은 경제학자이면서 노신처럼 중국인의 도덕, 국민성소질에 대하여 일찍부터 추궁하고 비판하고 반성을 본업처럼 해 오셨습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을 알게 된것도 1997년 선생님의 저작 《中国人的道德前景》을 읽으면서 였지요.       경제학자들이 도덕을 관심한 실례로 아담 스미스, 칼 맑스,프리드먼,시몬, 하이예크등을 들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경제학자로서 어떻게 도덕에 관심을 쏟게 되었지요?   모: 시장경제는 법치경제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나는 더 정확히 말하여 “시장경제는 도덕경제”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의 토대위에서 성립된것이니까요. 이게 내가 도덕을 관심하는 출발점입니다.       1987년 미국방문후 귀국하여보니 중국경제는 개혁에 의해 많은 발전을 가져왔지만 문혁에 의해 파괴된 윤리도덕이 엉망이 였지요. 공산주의도덕은 신앙위기에 직면 했고 사회공덕은 여지없이 추락되었기때문에 나는 도덕이 경제발전에 적응하지 못함을 아주 고민했어요. 1989년에 《중국인의 도덕전경》을 집필했지만 당시 정치풍파로 출간이 미루게 되었다가 1996년에야 공식 출판했습니다.   김: 일반적 도덕론 저작은 흔히 설교에서 설교로 그치는데 선생님의 책은 일상 사소한 에피소드로 입각하여 도덕문제를 논하니 풍부한 시사와 함께 설복력이 강합니다. 또한 시각이 독특하기때문에 사상(事象)을 보는 견해가 유니크해요. 예를 들어 제1장 제2절에서 선생님은 뢰봉을 따라 학습하는 보도, 한 사람이 뢰봉을 따라서 호심호의로 근처의 대중을 위해 의무적으로 일상도구를 수리해주는데, 이 사람앞에 수십명이 줄서 있어요... 그런데 이 수십명은 뢰봉을 학습하여 호인호사를 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공짜를 좋아하는 인간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 그래요. 내가 의무적으로 타인의 도구를 수리해주는걸 반대하는건 무턱대고 좋은일을 하는걸 반대하는건 아니지요. 왜냐하면 한사람이 뢰봉이 된다면 수십명은 공짜를 노린거예요. 여기에 지극히 심각하고도 평범한 도리를 제시해주고 있어요. 즉 도덕의 발생함은 두가지 상황이 있다는것. 하나는 인간과 인간이 대등하지 못할때, 부자와 가난한자, 강자와 약자, 버스에 오르는자와 내리는 자 이들은 다 부대등 위치에 있어요. 그러므로 부자, 강자, 승차하는 자는 가난한자, 약자, 하차하는 사람을 방조하든가 양보해야 하지요.       의무로 도구를 수리하는 자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부대응을 이해하지 못한 과오를 범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완전히 대등해 있을때는 어떤 도덕문제가 생길까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은행이 도산한다는 유언비어를 믿고 앞다투어 그 은행의 저축금을 다 빼낸다면 아무리 성실한 은행도 하루아침에 망해버려요. 이때 은행과 대등관계에 처한 고객도 도덕이 있어야 합니다.   물진인퇴(物进人退)의 중국인   김: 선생님의 책과 관련하여 말씀 드리자면 제가 2014년에 《중국인은 진화했나?》란 책을 일본에서 출간했는데 물질진보와 함께 정비례 되지 못한, 도덕, 정신적 진화를 이룩하지 못한 물진인퇴(物进人退)의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일본과 한국 동일문화권에 비교해도 이 상황은 너무 일목요연해요. 선생님께서도 《중국인의 도덕전경》에서 “물질 향수의 특점은 곧 포화상태에 달할수 있지만 과도한 물질향수는 도리어 고통을 조성한다. 정신향수만이 인간을 고차의 경계로 이끌수 있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어요.     확실히 제가 보건대 중국인의 물질재부가 풍부해졌지만, 그와 맞먹는 정신, 도덕신앙의 추구는 오히려 퇴보했다는 겁니다.   모: 김선생님의 “물진인퇴”의 개념은 참 의미있는 발견이라 할수 있습니다. 확실히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건 물질 풍요로움뿐아니라 완미한 정신생활도 같이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사자리한 사회안에서 이러한 경지를 이룩할수 있는지 문제지요. 내가 《중국인의 도덕전경》을 쓴것이 바로 시장경제와 도덕의 융합과 충돌을 해명하고 시장경제하의 도덕관을 제시함으로써 개혁개방중 우리의 도덕관의 변화와 전망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8. 인간과 인간사이의 “등가(等价)관계”는 무엇인가?   김: 선생님의 중요한 지적의 하나가 “인간과 인간사이의 등가관계”입니다. 시장경제와 전통도덕의 관계에서 선생님은 인간의 권리, 평등, 제도등 문제인데,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모: 1997년 내가 경제학연구에서 제기한 “인간과 인간의 등가관계”는 장기간 연구끝에 탄생된 거지요. 쉽게 요약해서, 개인이란 원체 사회 맴버중의 일원으로서 그 누구도 타인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지 않아요. 수학의 집합론적 등가개념으로 인간관계를  해석한것이지요.      한마디로 “매개인이 추구하는 자신의 이익이 최대한에 도달한다면 그 한도가 곧 타인의 같은 자신의 이익이다.”이게 바로 인간의 등가성입니다. 김: 그렇다면 이 등가관계는 인간평등의 보편적가치관과 직결돼있겠습니다. 요즘 중국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에도 구현되고 있지요.   모: 그렇지요. 등가관계와 인간의 인권, 즉 생존권, 인신권, 프라이버시권, 언론권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요. 이는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모종 권리를 이용하여 인권을 무시한다면 이건 특권입니다. 특권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자의 소유지요.      그러나 일종 제도로서의 시장경제가 나타나서야 인간과 인간의 평등이 가능해질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교환은 평등, 자원의 토대위에서 성립되니까 평등이 없다면 광범한 진실적 교환관계가 있을수 없으니까요!       특권이 발호하는 불평등사회에서 특권자들이 무상, 또는 변상적으로 보통인의 노동성과를 점유하기때문에 생산력이 낮고 대부분 경제가 가난하지요.       아프리카도 그렇고 우리 나라 문화대혁명시기에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김: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도 처음부터 흑모백모(黑猫白猫)이론으로 실지 지향이어서 효율만 선택했고 공평성은 홀시 했습니다. 특권에 대한 적대감이 일반 민중들속에는 있지만, 특권을 취소하기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되네요. 물론 개혁개방 30여년을 통해 인권, 평등을 통해 중국이 인권을 확립하고 민주법치의 국가로 갈수 있나요? 선생님은 이점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9.도덕신앙의 위기   모: 불확정적이지요. 세계적으로 보았을때 성공과 실패의 사례가 다 있으니 그 경험교훈을 잘 연구해야 해요. 요약해서 말하자면 정권과 인민대중이 피차관계를 어떻게 처리개선하는가에 달렸다고 봅니다. 정부가 좀더 관용한 태세로 임하고 인민이 인내심있게 기다리면서 수십년 내지 백년이 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국이 30여년동안 개혁중에서 공전의 업적을 쌓았고 중국인이 또 지혜와 문명을 지닌 민족이니 난 중국의 인권전도에 신심이 있어요.   김: 동감입니다. 제가 졸저 《중국인은 진화했는가?》(일본판)에서도 지적했지만, 현재 부유를 거머쥔 중국인이 도리여 신앙, 정신적세계가 빈곤하다고 생각해요. 중국에 자주 엘리트지성들과 대담하면서 그들도 “신앙위기”에 똑같이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모선생님은 이점 어떻게 보십니까?   모: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 문제는 공동의 가치관이 없는것이 바로 신앙위기의 문제지요. 또한 우리는 기본적의 사실, 진실마저 승인하지 않으려고 해요.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된다는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도덕인데, 우리는 왕왕 그러지 못해요. 왜? 진실을 말할수 있는 환경이 없다면 어찌 진실을 말할수 있겠어요?   김: 선생님께서는 《중국인의 도덕전경》등 여러저작에서 도덕의 중요한 성격을 전 인류의 공동한 도덕신앙이라고 하시면서 자유, 인애,성실,관용등 덕목을 꼽았습니다. 자유와 진실(성실)만큼 인간에게서 중요한게 없지요.   10.자유. 진실의 공동가치관   모: 내가 가장 강조하는것도 자유와 진실등 가치관입니다. 자유란 무엇입니까? 바로 타인을 방애하지 않는 자유여야 해요. 누구나 타인의 자유를 방애하지 않는 세계야만 진정한 자유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부자유한것은 누가 보이게 안보이게 우리의 자유를 방애하기 때문이지요. 자유는 보편적 가치관입니다. 한때 자유를 얘기하면 이건 자산계급자유화라 외치면서 마치 맹수처럼 기피했었지요. 그러나 무산계급도 자유가 수요되지요. 무산계급도 노예를 원치 않으니까요.(웃음)   김: 자유, 독립, 진실을 추구해 온게 선생님의 전생애입니다. 신앙, 도덕위기의 근원은 어디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건 진실한 말을 못하는데 있어요. 그러니 우리사회 제일 기본적인것이 상해를 입지요. 예를 들어 진실한 말을 못한다면 이 사회가 어찌 진보할수 있어요? 진실한 말을 하자면 용기와 담력이 필요한 사회이고, 잘못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진실, 성실이런거는 다 인간의 보편적 도덕인데 그걸 막아 버리면 뭐가 됩니까?!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안되요.   김: 단테가 말했지요. “도덕신앙은 지혜의 결함을 보완할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영원히 도덕의 결함을 메울수 없다.” 제가 볼때 우리에게는 도덕 보다도 악지혜에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모: 한 사회가 거짓말로 유지된다면 이 사회가 좋아질수 있겠습니까? 물론 현재 사정은 많이 호전됐어요. 어떤 진실한 말은 할수 있으나 어떤 많은 진실은 함부로 얘기해선 안되지요. 이 사회적기본문제도 아직 해결 안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노구를 끌고 지금도 글을 써서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11.왜 온갖 비방중상에도 아랑곳 안하는가?   김: 그런 선생님을 두고 인터넷에서는 “최대의 한간” “민족반역자”라고 온갖 비방, 중상이 빗발치듯 합니다. 저 역시 유사한 체험을 갖고있는데요. 선생님은 이런데 어떻게 대처합니까?   모: 그냥 내버려 둬요. (웃음) 내게 밑거름이 되는 비판은 얼마든지 좋지만, 많이는 막무가내로 날 저주하는 내용입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불쌍해 보여요. 교양이 없고 무지하고 우매하기때문에 그럴수 있습니다. 내가 날 욕하는 인터넷 댓글이나 글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저열한 욕말이 많아요. “죽어라”든가 “개새끼”라든가 뭐 형편없는 비언속어들이지요. 이런 댓글들은 중요한 정보가 숨겨져 있어요.     첫째. 대부분 그 사람들이 문화수준이 낮고 도리를 분석하는것으로 설복할 능력이 없으니까 일언반구로 자신의 불만을 배설할뿐입니다. 인터넷 욕말에는 여럿이서 폭력싸움하는것과 흡사하지요. 그들의 주먹이 두뇌보다 한수 위입니다.     둘째. 그들은 강렬한 불만정서를 품고 있으니 가장 악독한 욕말만 골라서 표현합니다. 나를 꼭 죽이자고 그런것보다는 사회불만이 극치에 달했다고 봅니다.   김: 왜 그들이 폭력언어로 원쑤대하듯 할까요?   모: 이성이 결핍하고 사상이 간단한 까닭으로 쉽게 극단으로 향하게 돼요. 그 이유는 초등교육과 관계 된다고 봅니다. 예전부터 계급투쟁교육이었고 요즘은 무원칙적 애국주의로 인해 자기 나라에 대해서는 다 옳다고 여기고 반성이 없고 정의, 박애정신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초등교육에 타자를 존중하고 자신을 존중하는 예의 교육이 많지 않기때문에 문혁식의 유독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김: (웃음) 알만하겠습니다. 대중은 무지해서 그러지만 대학교수나 지식인들중에서 간혹 이런 막무가내한 자가 있으니 한심하지요!(웃음)   모: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기와 틀리거나 자기보다 앞서가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래서 무지한 폭한같이 폭언으로 욕하는 지식인도 더러 있어요. 하지만 그러다가 말아요. 아랑곳 안하면 그만이예요! (웃음) 내게 덕과 진리가 있으니까요.   김: 아인슈타인이 큐리부인의 추도식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일류의 인물이 시대와 역사진로에 대한 의의는 그 도덕성품면이 오히려 그 단순한 재능성과보다 더 위대하다”고. 선생님은 정말 이 시대의 최전선에 서서 지식과 덕을 친히 실행하는 모범적 군자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모: 감사합니다. 동아시아의 “귀재”가 이렇게 칭찬해주시니(웃음)   12.“나는 부유한 자를 위해 말하고 가난한자를 위해 일하리”   김: 선생님의 명언중에 세상이 널리 알려진 “부자를 대신해 말하고 가난한자을 위해 일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가난한 자를 위하여 말을 하고 동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부자를 위해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 그래요. 지금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말하는 사람은 많고 부자를 위하여 대언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한편 부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많아도 가난한 자를 위해 일 하는 자는 극히 적어요.     원인은 단순합니다. 가난한 자는 약자군체이므로 그들을 위해 대변하면 사회의 찬성을 받아요. 그러나 부자를 위해 말하긴 어려워요. 왜냐하면 부자는 우리 사회에서는 맑스의 착취리론의 영향으로 착취자로 보기가 일쑤거든요. 부자를 위해 일을 하는것은 노동보수가 많기때문에 다들 원합니다.     결과적으로 부자를 위해 말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 극히 적지요.   김: 그러니까 선생님은 사회상식을 거슬러 역행한다는 뜻이겠군요.   모: 맞어요. 물론 여기서 부자는 성실하게 치부하는 기업가나 창업자를 가르키지요. 부자들의 이익과 재부가 보호를 받아야 되거든요. 중국이 장기간 빈곤했기에 부자들을 적시하는 구부(仇富)심리가 강해서 그들이 당하기 쉽지요. 권력앞에서 부자도 가난한자와 같이 업심받고 착취당합니다. 중국은 스스로 민간의 기업과 부자를 보호하고 산업을 키워야 하며, 그들이 쌓은 부유는 긍정받고 지켜야 합니다.     한편 가난한자를 위해 말만 하기보다 진짜 그들을 위해 착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모선생 사모님 방백: 우리 모선생은 이 말때문에 온갖 욕을 다 먹었어요. 그리고 “교육산업화”를 고취하고 “일제물건을 보이코트하기”를 반대하는 말을 했다가 네티즌의 비방중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두 전혀 상관하지않고 덕으로 원념을 대하고 자신의 신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가난한 사람들께 매년마다 현금으로 몇만원씩 지원하고 자신은 또 검소하게 지내지요. 택시비도 나는 일푼도 더 안주지만 모선생은 언제나 2원씩 더 주지요. 택시기사가 기뻐한다구요…   13.중국 제일의 완인 (完人)   김: 그래서 모선생님은 중국의 제일 완인(完人)이라 불리지요. “중국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로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경제학자”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에서 어떤 인물은 지식으로 세계를 계몽하고 어떤 인물은 사업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어떤 인물은 도덕으로 세계를 감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선생님은 이 3가지 면을 다 어우르고 실천하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학자로서 진리와 진실로 사회를 계발하고 실천자로서 행동으로 타인을 도와주고 도덕모범자로서 많은 사람의 본보기로 되었다는 평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모: “인생을 향수하며 또한 타인을 도와 인생을 향수하게끔 한다”는 말과 “温良恭俭让”이 5자가 내 인생의 의의를 개괄했습니다. (모선생님은 대담이 끝난 뒤 나에게 이 5자를 붓글로 휘호해 선물해주었다)   김: 선생님의 인생에서 영향이 큰 책은 무슨 책이 있습니까?   모: 관념적으로 내게 가장 큰 영향준 책이 《논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많은 도리를 아주 명석하게 가르치는 책이지요.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어 공자는 이직보원(以直报怨)이라 말씀했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대지혜가 함축돼있는바 인간이 이를 실천에 옮긴다는건 용이한 일이 아니지요.   김: 인생88세를 사시면서 간추린 신조 또는 교훈은 무엇이 있지요?   모: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건 여전히 인간을 존중할줄 아는 것입니다. 온량, 겸허, 공손하게 타인을 대하고 타인을 허투루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나는 보통 경계심이 없어서 이용당하고 속아넘기를 잘 해요. 이용당해도 괜찮아요. 타인에게 이롭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니까요(웃음)   김: 제가 전번 전화서 선생님의 저작을 일본서 미처 못 갖고 왔다고 하자 선생님은 이미 싸인해놓은 저작을 준비해 놓았으니 염려말라고 상냥하게 말씀했잖아요. 당시 저는 너무 감격했어요. 이렇게 자상한 분이시구나 하고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것은 선생님은 중국의 개혁개방 30여년 그 미래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14.중국개혁개방의 전망은 밝다   모: 공평하게 평가하여 중국의 개혁개방 30여년은 역사상 전례없는 실적을 쌓아올렸습니다. 이면에서 중국공산당의 엘리트의 지도적 성과는 대단하다고 평가합니다.     나는 3가지 측면에서 이 위대한 성공을 평가하고 싶어요 (1) 재부가 증가된것 (2) 자유가 확대된것 (3) 개방으로 인해 중국이 세계속으로 들어간것. 모택동시대에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할수 없었지요.   김: 그럼 개혁개방의 부족점 또는 약점은 무엇인지요?   모: 첫째로는 인치에서 법치로의 이행이 아직 부족하고 두번째는 여론감독의 시스템이 아직 부족한겁니다. 세번째는 지방정부의 이익만 추구하는 페단이 있지요.     그리고 여전히 자유의 폭이 모자라는것이지요. 국제적으로 전문경제자유와 경제실적의 효율에 관한 연구기관이 있는데 인민의 자유도가 높을수록 경제성장이 순조롭고 생활수준이 높습니다.   김: 저명한 미국의 중국인 역사학자 당덕강(唐德刚)은 “역사의 3협(三峡)”개념으로 중국이 자유민주국가로 변모하려면 300년은 걸린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모: 나는 100년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과거 100년동안 중국의 변화는 매우 컸고 현재 중국은 개방된 나라로서 젊은이들도 많이 보고 사고하며 앞으로 큰 문제를 해결해 나갈수 있다고 믿어요.     내가 보건데 중국은 현재 신민(臣民)사회에서 공민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단계에 처해있어요. 지금 가장 희망성이 있는 시대라고 보고있어요.   김: 선생님은 미래 전망에 대해 낙관적이라는 얘기십니까?   모: 그래요.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중국은 서서히 평형이 잡힌 발전의 길에 들어설수 있어요.     다수 대중들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안거낙업(安居乐业)이 아닙니까? 그것을 반대하는건 무엇이지요? 특권이지요. 그러니까 현재 가장 환영받는 주장이 바로 인권, 민주, 법치,성실,자유가 아닌가요!     중국이 평등, 인간과 인간의 평등이 이뤄지면 자유의 사회에 들어설수 있습니다. 나는 아마 그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할수 있지만, 우리 후손들이 그런 장미빛미래에 살수 있다고 생가하면 희열에 벅차오릅니다   대담자 소개 모우식 (茅于轼)   당대 중국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의 한 사람 “중국경제학계의 노신”이라 불리고 있음 매스컴에서는 “당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평가가 있음. 1929년 강소성 남경 출생. 1950년 상해교통대학 졸업 기차 조종사, 기술원, 공정사(기사)역임 1984년 중국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연구원으로 되였으며 1993년 정년퇴직후 유명한 민간 싱크탱크 “천칙경제연구소”설립 초대소장으로 취임. 2012년 미국 프르드맨 촉진자유상을 수상   주요저작으로 《择优分配原理》《中国人的道德前景》《谁妨碍了我们致富》《现代经济学前洽专题》《生活中的经济学》등 다수. ----------------- 茅于轼(1929年1月14日— ),生于南京。经济学者,民间经济学者的重要代表。原北京天则经济研究所理事长,民间学术机构“人文经济学会”的理事长。2014年4月26日,茅于轼成为英国 Prospect 杂志评选的“2014世界思想家”十位获奖者之一,名列第四。 荣誉成就 编辑 ●被美国Marquis世界名人录和英国剑桥国际传记中心选为1993-1994年度世界名人。[8]  ●1997年出版的《中国人的道德前景》,于1999年获ATLAS基金会办法的该年度AntonyFisher国际纪念奖。[8]  ●2010年1月8日,《中国新闻周刊》举办创刊十周年庆典。当天,这本以“影响有影响力的人”为宗旨的周刊评选出十年来推动社会进步的各领域“影响力人物”,茅于轼先生获评知识界影响力人物。[11]  ●2012年3月,设于美国华盛顿的智库卡托研究所(Cato Institute)宣布,茅于轼获得该研究所颁发的2012年米尔顿·弗里德曼自由奖。卡托研究所认为,茅于轼是中国个人权利和自由市场的最积极倡导者之一,他倡导开放和透明的政治体制,并在中国从计划经济向自由市场经济转型过程中贡献了力量。茅于轼也是中国民间慈善和社会自助组织的实践者。[7]  ●2014年4月,入选英国 Prospect 杂志“世界顶级思想家”(World Thinkers of 2014)候选50人名单。是本年度唯一入选该候选人名单的中国人。[13]  ●所著《中国人的道德前景》一书获1999 Sir Antony Fisher国际纪念提名奖。[14]  ●2014年中国讲师500强[15]  入围讲师。 个人主张 茅于轼道德前景 中国人的道德前景:“毫不利己,专门利人”从个人动机来说是高尚的,但在普遍意义上看,提倡这种行为并不能达到提高社会道德水平的目的。“私”是人类本性,也是市场机制运行的基础。市场经济社会的道德前景并不暗淡,重要的是肯定私利,反对特权,保护个人财产,使私心从破坏力变成创造力。 茅于轼政治改革 政府和民众的关系要有一种新的调整和定位。从制度框架看,市场经济是基于公平竞争和自由选择之上的社会形态,它要求每个人在社会中有同等的权利和地位,民主政治是其中不可缺少的环节;从资源配置和经济改革效率的层面,政府职能是提供公共物品,民众的义务是依法纳税,两者之间必须建立一个开放、竞争的公共物品市场,才能实现资源配置最优的一般均衡。 政治改革不应当是个敏感话题,如此,不利于改革深入和全民参与,公民应当可以用客观、和平、建设性的论调,对“一切敏感问题”发表看法。当政治改革遇到挫折的时候,一方面政府要保持灵活务实的态度,要承认人权、清除特权;另一方面,民众要依法捍卫自己的权利,严肃地承担自己的法律和道德义务。 茅于轼快乐之学 追求快乐是人生的最高准则,财富不是。快乐是衡量个人生活和整个社会环境好坏的惟一和无上准则。助人不要给人带来负担,争取自己的快乐的同时给别人快乐,要增加快乐的总量,要不折不扣地进行帕累托改进,即确实没有任何一个人不快乐,而至少有一个人更快乐。 一个社会要有宽容精神,也要有批评,从善意出发的批评就是二者的结合。“以直报怨”是化解一切矛盾应有的态度。以直报怨包含两重意思,一是要直率地指出对方的错误,用适当的制裁对待破坏规则的人;二是要让他有改悔的机会,惩罚中有爱心。 茅于轼人物评价 在中国,一提起经济学随笔,人们自然就会想到茅于轼,他是较早以随笔的形式来阐述深奥的经济学道理的。1994年,茅的一部《生活中的经济学》,通过对美国市场的考察,阐述了市场经济的运行规律,该书一版再版,几乎成了经济学随笔的代名词,由此,茅获得了足够多的关注和支援。  著名经济学家茅于轼 随后他又推出了《中国人的道德前景》、《谁妨碍了我们致富》等著作,在国内产生了较大的影响。他又出版了《我所认识的经济学》、《经济白话》、《给你所爱的人以自由》等著作,这些著作大多以经济随笔、演讲录的形式,对农业、入世、自由、道德等一些与现实生活密切相关的问题进行探讨,他的许多观点非常与众不同,他的文风恰如一句古诗:“语不惊人死不休”。[39]  茅于轼自认是独立的、自由的经济学家,他的特点是把经济学更加平民化,纠正社会上一些人对经济学的错误认识。在研究学问上,他对自己的要求是,不仅要掌握教科书中的定理,还要找到可以说服自己的生活例证。 百度百科  
후회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한에 고집하는 성향. 그러나 다시 후회를 피면하는 사고는 게을리한다. 총명 강자앞에서는 아첨,영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는 자나 행동관습을 요즘 “총명”이라 부른다. 학위증서 여기서는 학위증서는 통상“学伪证书 ”로 해석됨. 고관이니 기업인들의 신분미화를 위한 가짜 통행증. 독서 “책에서 밥이 나오냐?”고 하는 이 사회에서 독서는 견분(犬粪)보다 못하다.견분은 약으로라도 쓰이니까. 서가 곤륜산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앞에서 오늘은 난초향이 그윽히 흐르듯하이 한국시인 신석정의 시 “서가”의 한 대목이다.서가를 곤륜산으로 비유한 장쾌함이 돋보인다.그런만큼 서재에 난초향이 흐르는듯하니 독서를 즐기는 문인재사의 감미로운 정서. 고래같은 궁궐보다 난초향이 그윽한 곤륜같은 서가가 놓인 서재 하나만으로도 나는 족하겠다. 밀고 만경창파를 주름잡는 고래를 시샘이 난 개천의 미꾸라지가 동물공화국 선전부장 앵무새한테 밀고신을 보냈다. “고래는 바다뿐만아니라 육지의 환경을 더럽히고 우리 미꾸라지족속을 중상,모독합니다” 밀고신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벼룩 벼룩은 지렁이 주름살에 앉아서 자만하기를 “아,나는 이세상의 가장 위대한 강에서 살고있다” 시간 “시간은 스폰지처럼 짜서 나오는 물이다”고 노신이 말했다. 사실은 아니다.시간은 기실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있으니 자신이 어떻게 쓰는가에 달렸다.흉중 돈지갑안의 돈처럼. 일부다처제 한남자가 동시에 여러처첩을 거느리는 혼인제도.이슬람문화권에널리 존재해있으며 ,중국, 조선 등 동아시아문화권에도 근대까지 실존했다.중국에서는 해방후 사라졌다가 요즘 성행하고 있다.고관이나 벼락부자들이 본처외에 애인,정부를 복수로 두고있는바,그명칭은 二奶,三奶라 불린다.젖가슴 유방으로 명명한것도 지극히 이나라의 특수성을 체현한것같다. 그런데 문제는 二奶 , 三奶들에게 반발을 사서 적발당해 패가망신의 지경에 이르는 고관대작도 비일비재하듯 매일 뉴스에 오른다. 취두부( 臭豆腐 ) 중국인들이 신앙대신 먹어치우는 일종의 미식. 까마귀 까욱!까욱!까욱! 인간들아,내이름 기억하라,까욱이다!내겉이 검다고 마귀라 부르지 마. 겉반반해 보이나 속은 마귀보다 검은건 너희들이다.너희들 이종오의 을 잘 정독해야 되겠다.까욱~
공기 “아아,바라옵건대 이 육체를 공기에 씼기고 거목의 푸른잎에 쌓이고 싶다”에 나오는 한 귀절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육체를 안심하고 맡길만한 신선하고 맑은 공기가 아니다.저돌하고 맹렬한 고도성장주의 아래 물질의 획득과 부유의 증폭이 앗아간것은 국민이 살아갈 맑은 공기. 오, 공기도 수입해야 하나? 엄마아빠 한 호사가 아저씨가 5살짜리 남자애한테 물었다. “엄마와 아빠 누가 더 좋니?” 남아 답왈”엄마 아빠 다 좋아!” “아니 좋은건 아는데 그중 누가 더 좋냐이거야” “다 좋다는데 .나쁜건 엄마아빠 갈라놓고 물어보는 아저씨야” 5살 유아를 얕잡아 보았다간 큰일난다. 회의( 怀疑 ) 가장 정설로 된 통념의 벽을 허무는 첫시작. 회의( 会议 ) 이미 결정된 사항을 놓고 기나긴 시간을 허비하면서 찬동만 해야하는 다과회 원칙 이 나라에서는 자유를 속박하는 수갑. 부패관료 서민을 관리하고 요리하는 직업적 백정으로서 대부분 국외에 은행저축이 있고 자식들을 해외로 유학시키는 족속 안전 요즘 입말에 가장 빈번히 오르는 말이지만 ,실속이 없음. 입증 관청에서 한 국민이 인적서류제출시, “당신이 당신 어머니의 아들임을 입증하라”고 명했다. 하도가짜,허위,위조가 만연하고있으니 그럴만도 한 사회실정을 역설적( 逆说的)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관료주의가 얼마나 번잡하고 조잡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장치인가를 스스로 노정한 호례이다. 당신은 어디를 가도 포켓속에 꼭 “내가 내부모의 자식”이란 증명서를 소지하고 다녀야 할지로다. 민족 인간을 집단으로 단합시키고 배척하는 원리가 잘 구현된 마약같은 종교의 일종 동포 같은 동포라도 사실은 구별된다. 돈이 많으면 “돈포”요,돈이 없으면 “똥포”로 취급한다. 사상 비틀어진 사상(斜想),사악한사상( 邪想 ),개인적인 사상(  私想 ),배암처럼 우불꾸불한 사상(蛇想)이라도 허용될수 있는 사상( 思想 )이라야 진짜 아량이 있는 사상의 격을 갖출수 있으리라. 의사 수술칼로 공개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유린하는 직업백정 아첨 때까치라는 ( 百舌鸟  )중국인의 애완조가 있다. 어느 중국의 노인이 때까치를 무지 애지중지한 나머지 때까치를 전문보살피는 하인 남정까지 두었다고 한다. 여름의 어느날 때까치에 목욕시키는 날이었다.노인은 거리에 용무를 보러 가면서 하인에게 신신당부한다.”자네 알었지,목욕시킬때 털오래기 빠지면 사타구니에 달린 알을 까버릴테다.” 노인이 떠난뒤,부인이 하인에게 심부름을 시켰지만 하인은 때까치에 정신팔려 여념이 없었다.부인이 영문을 따지고들자 하인은 이유를 알려줬다. 그러자 부인은 그자리에서 조롱에 손을 넣어 떄까치의 털을 한오리 남김없이 뽑아버렸다. 노인이 돌아와서 때까치의 봉변을 보고 대노했다. “대체 누가 내때까치를 이 정도로 만들었어?엉?” 그러자 부인이 큰소리로 대꾸하길 “내가 그랬는데 왜 뭐가 잘못됐어?” 이말에 고양이 앞 쥐신세로 변한 노인은 태도가 급변,머리를 연신 쪼아리며 말했다. “아,자기가 잘했어,뽑아줘야 목욕할때 옷벗은듯 시원하지!” 공처가 노인은 겁장이로서 부인앞에서는 전전긍긍,아첨을 일과로 삼았다. 세상에는 가정내 부부만 아니라 사회에도 권세와 체제에 아부하는 아첨배들이 어디 한둘인가! 질책 타인의 탓만 하는데 쓰이는 방법.기실은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말이다.
174    왜 '또 하나의 중국'을 알아야 하나? [왕학태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801  추천:52  2016-07-08
《33의 신사유》 문화대담(4)   왜 “ 또 하나의 중국”을 알아야 하나?                         왕학태+김문학   1.“또 하나의 중국”발견   김: 현대 중국 인문학계에 “3대발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왕학태선생님의“유민문화(游民文化)”와 여영시(余英时)선생의 “사문화(士文化)”,그리고 오사(吴思)선생의 “숨은 규칙(潜规则)”을 인문학의 3대발견으로 칭하고 있지요.      물론 대만 백양선생의 “장독문화”까지 넣어서 저는 “4대발견”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 되기도 합니다.     왕선생님의 “유민문화”론은 중국 지식계에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지요. 이신지(李慎之)선생님은 유민문화를 논한 저작《유민문화와 중국사회》을 평해 “또 하나의 중국을 발견했다”고 격찬했습니다.      “유민문화사회”에 관해서 선생님과 대담을 하고자 하니 많은 가르침 부탁드려요.   왕: 천만에요. 김선생도 젊은 학자로서 이미 많은 책을 내셨고 ,특히 동아3국과 중국국민성에 관한 논저들은 중국 지식계에서도 매우 주목받고 있습니다.   김: 고맙습니다. 유민문화 연구의 제일인자인 선생님께서는 역대로 중국 지식계에서 홀시해온 유민사회,그러니까 선생님의 표현을 빌면 정통사회 즉 현성사회(显性社会)의 뒤면에 있는 비정통사회,즉 은성사회(隐性社会)에 대해 체계적으로 발굴, 연구를 해냈습니다.     1999년 제가 선생님의 《유민문화와 중국사회》를 읽었을 때 큰 감명을 받은 이유가 바로 “또 하나의 중국사회”에 대한 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은성사회가 현재 중국에 미치는 영향과 앞으로 중국사회의 관련양상에 대해 풍부한 시사를 주고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유민문화를 재발견하고 책을 쓰기에 이르렀습니까?   2. 하층사회의 체험이 학문으로 승화   왕: 사실 내 인생은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난 1960년대초 북경사범학원 중문계 학부생시절에 반동학생으로 몰리웠어요. 1975년 우파로 감옥에서3년 감방신세을 지었지요. 그러니까 옥중생활에서 난 수많은 하층사회 인간을 접하고 그들의 삶, 생각, 행동양식을 낱낱이 파악하게 되였습니다. 김선생도 문화인류학자이니까 아시겠지만, 그 사회속에 깊이 들어가 체험하는건 지식인, 학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직접 이해하고 몸으로 느낄수 있으니까요.      하층서민은 마치 《수호전》의 세계와 같아서 거기에는 악한기(痞子气), 유망기(流氓气), 유민기(游民气)로 가득차있지요. 그래서 나는 《수호전》을 연구하는게 오히려 《홍루몽》을 연구하는것보다 중국사회를 이해하는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서나 현실에서나 나는 방금 말한 유민, 유망, 악당들을 너무 많이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도리고 이성이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폭력,주먹입니다.   김: 그렇죠. “폭력원리”는 중국역사를 관통해온 하나의 생존원리, 사회원리이기도 하지요.   왕: 맞어요. 그래서 나는 중국사회를 화려한 겉만 보지 말고 이런 유민들의 세계,은성세계에 대해 주목하게 됬고 마침내 전문저작을 써내게 되었습니다.   김: 일찍 1919년에 민국시기 도아천(杜亚泉 )선생이 유민문화에 대해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일본의 중국문학자 타카시마도시오(高岛俊男) 선생도 《중국의 대도적》이란 책을 간행했습니다.   왕: 도아천선생은 《동방잡지》(제16권4호)에 발표한 글에서 말했습닌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귀족문화와 유민문화는 늘 모순적으로 공존하며 교체하면서 성쇠를 이루어왔다. 즉 귀족문화가 왕성할 때는 사회가 침체부패하고 따라서 유민문화가 그것을 대체 해버린다. 그러나 유민문화가 왕성해지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귀족문화가 다시 이를 대체 해버린다. 이것이 중국사의 순환이다.”       두선생은 신해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중국이 귀족문화와 유민문화라는 양대세력에 빠져서 우왕좌왕했기때문이라고 지적했어요.     그러나 도선생은 중국사회의 역사적 진로와 결부하여 세밀한 분석,고찰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아무튼 “유민사회”를 지적한것만으로도 큰 실적이지요.   3. 아Q는 전형적 유민이다   김: 왕선생님의 중요한 지적은 아Q의 신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아Q는 농민이 아니라고 했지요.      왕: 그래요. 1980년대부터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나는 유민문제에 대해 캐기시작했어요. 내가 우선 주목한것은 노신선생의《아Q정전》의 아Q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나의 분석에 의하면 노신은 중국인의 열근성을 문학적으로 제시하려고 해서 아Q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국내 연구자들은 흔히 아Q는 낙후한 농민이라 보고 있지만, 아Q가 어디 농민입니까? 우리가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대한 분석을 누락시켰어요. 아Q는 도시와 시골에 유랑하는 유민의 전형 모델이지요. 고정직업도 주소도 가정도 종법(宗法)도 없는 유민, 그리고 그의 성씨도 뭔지 몰라요. 이게 전형적 유민이 아니고 뭡니까?(웃음)   김: 그렇네요. 노신선생은 유민을 문학적 형상, 이미지로서  재현하였지만, 이론적, 학문적으로 유민문화를 탐구하지 못했습니다.  왕선생님께서 노신선생이 미처 하지 못한 학문적규명을 하셨어요.  중국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유민과 귀족 환언하여 악당과 신사 또는 비유교와 유교계층이라는 2항대립구도를 이해나는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즉 표면사회와 리면사회의 교체가 중국사회교체의 일종 룰이기도 하겠네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유민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4.유민, 그리고 시비가 없는 세계      왕: 유민이란 말그대로 직업과 노동대상인 땅을 잃고 유동,유랑하는 사회의 무리를 말합니다.         유민이란 개념은 최초 《예기. 왕제》(礼记 . 王制)에 등장해요. 《관자》에도 나오지요.  상앙(商鞅)이 지적한 “농민이 적고 유민이 많았다”는 말과 같이 유민은 일종의 직업으로도 되였습니다.           청나라때는 유민을 무뢰한, 악당, 깡패등과 같은 취급을 했어요. 1949년 신중국 성립후 정부에서는 유민을 부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유민개조”운동을 벌이기도 했지요.    김: 그럼 유민은 굉장히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겠습니다. 선생님은 송나라때부터 유민의 군체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왕: 선진(先秦)시기부터 유민이 있었지만, 유민군체, 유민의식의 형성은 아무래도 송조때부터라고 봐야지요. 여기서 상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으나, 정치적현실과 도시제도의 변화에 따라 유민이 무리로 생기고 유민의식도 팽배해집니다.   김: 유민의 성질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  네가지 성격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스스로 이를 “유민성격”이라 명명했어요.   1.천연적인 반사회성, 천하가 대란에 빠지고 그 틈에 자신의 처지를 개변하려고 하지요   2.능동적인 진격정신, 즉 능동적으로 타자를 진공해요. 자신의 이익을 얻기위해 폭력, 무력으로 타인을 쳐서 빼았아 냅니다. 《수호전》의 세계가 그런 세계가 아닙니까   3.결속, 동맹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흔히 비슷한 사람끼리 결속하여 친구, 형제를 맺어서 같이 행동하는겁니다. 《3국연의》의 “도원3결의”가 그 간단한 형태이고 복잡한것은 비밀결사, 방회를 만드는것이지요. 그러니 폭력원리가 제일이고 “적아만 가리고 시비는 안 가린다”는 원칙입니다. 《수호전》에서도 이 점이 잘 구현되고 있어요.    4.반지성, 반문명성격, 지식, 교양, 문명을 존중하지 않고 무력,힘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 행동양식입니다.    이것은 중국전통사상의식중 가장 암흑하고 가장 야만적인 일면이지요     5.중국역사는 유민이 만들었다   김: 중국의 귀족과 유민의 권력 다툼의 역사라는 지적과 같이, 중국사회의 계층을 관철해보면, 정통사회의 질서구조에서 배제된 계층이 늘 사회전면의 원동력으로도 되었지요.       지식인들속에도 출세의 길이 끊기고 체제에서 배척당하면 유민에 가담하는 현상도 늘 있은 일입니다.     제가 약 십년전에 《중국, 국민성의 리(里)구조의 발견》을 집필할때 선생님의 저작과 해외학자들의 유민, 도적에 관한 자료들을 많이 섭렵했는데, 역시 폭력원리는 유교의 원리와 함께 중국사를 관철한 큰 테재였습니다.   왕: 옳은 말씀이에요. 사실 중국사의 농민봉기, 이를테면 역사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진승,오광이나 명조를 세운 주원장이나 또는 명조를 무너뜨린 이자성도 태평천국운동을 발동시킨 홍수전도 다 농민출신으로서 유민을 조직하여 궐기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김: 영국의 사회학자 P.R빌린그스리의 저작 《비적-중국의 변경과 중앙》(1988)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에서 비적이 창궐하였는데 1930년에는 비적총수가 적어도 2000만이나 달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때 중국의 신문,잡지에서는 “우리 나라의 국체는 상실하고 비적의 세계로 돼가고 있다”고 질호할 정도였으니까요. 나라 전체가 강호의 세계를 이룬것입니다.   왕: 나는 최근에 “강호(江湖)”라는 단어로 “유민”을 말하기도 합니다. 유민에서 나온 “강호”는 하나의 군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곤 했으니까요.       송조에 이르러 도시가 발달하자 유민도 군체의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유민의식도 송나라이후부터 통속소설등 문예스타일로 표현되였는데 역시 그 작자도 강호의 예인 (艺人)들이 창작한것이지요.   6.“강호” 사회의 중국   김:  “강호”는 중국 전통사회를 이해하는 커다란 키워드라고 생각해요.그것은 “정통”의 대극에 있는 비체재의 민중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여기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보고계신지요?   왕:  “강호”란 단어는 《장자(庄子)》에도 나오는데 재야의 반항정서와 역량도 포함돼 있다고 학자들은 말해요. 그러니까 체제내에서 나온, 또는 거기에 못들어간 재야, 민간의 세상이기도 합니다.     전통적 사대부들이 “묘당(庙堂)”에 있으면 군자를 생각하고 강호에 있으면 서민을 우려한다”고 했는데 조정내의 파벌,명예투쟁에 싫증이 난 그들이 강호에 오면 조용하고 음모궤계가 없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수 있었거든요.   김: 전통적 지식인들이 입세시에 유가(儒家)가 되고 출세(出世)시에는 도가(道家)로 되는 패턴이겠네요.   왕: 그래요. 그리고 또 하나의 강호가 바로 유민의 강호이지요, 실례를 들어 《수호전》에 영웅호걸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사회가 바로 전형적인 유민의 강호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호는 사대부의 문질빈빈(文质彬彬) 한 강호와 전혀 판이해요.     음모와 폭력과 주먹,칼부림의 피비린 내나는 도광검영(刀光剑影) 세계이지요.     이런 강호는 험악한 세계, 담력, 체력이 다 필요한 세계입니다.   김: 사실 19세기 이래 청말민국 내지 신중국성립전까지 강호세력이 체제와 결탁하여 또는 직접체제내부에 들어가서 체제를 강호로 변모시킨 일도 비일비재 했지요.     방회, 비밀결사가 민국시기의 군,경찰,금융,공상계,매스컴,문예계, 서비스업계나 최하층 쿠리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뻗어있었던것이지요.   7.왜 중국인은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가?    왕: 맞습니다. 중국인이 왜 《수호전》이나 김용의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지 아세요?   김: 중국에 확실히 강호, 비적원리의 토양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무협문예에 열중하는 심리에는 협객이 나타나서 악당을 징벌하는 그런 쾌감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중국 지식인들도 협객이나 호걸의 호방한 언행에 매료당하는 사람이 많지요. 《수호전》《3국지》나 김용소설에 이어지는 협객소설의 계보에는 중국대중의 권선징악(劝善惩恶)의 낭만적 상상력을 야기시키는건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폭력에 대한 명백한 향수가 깔려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왕: 그래요. 사실 중국인의 심리에는 비건강요소가 다분히 있어서 독립자주의 정신이 결핍합니다.     중국인이 왜 단결하자, 하나로 뭉치자고 외우는가요? 똘똘 뭉치는것은 다름아닌 내홍, 내부투쟁을 벌이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내홍을 벌일때 우리는 흔히 그 이유에 정의로운 대의명분을 씌우기를 좋아합니다.       만약 누구를 욕하고 타도하기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또는 “인민을 위하여” 하는식으로 사탕발린 말로 자신의 투쟁의 정당성, 합리성을 돌출히 내세우는겁니다.       《수호전》이나 무협소설은 죄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홍투쟁을 벌이는가 방법수단을 가르치는 거지요. 곰곰히 분석해보면 《수호전》중의 강호지주가 양산박 의사들을 압박했나요? 없지요.  다 우연한 사고로 양자의 적대관계를 조성하고 생사결판을 보는거 아니고 뭡니까?       예를 들어 양산박이 축가장을 습격할때, 축가장이 양산박을 토벌할 위험성이 있다고 핑계를 대요. 사실은 양산박 사람들이 축가장의 재물과 식량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거든요.     무협소설에서도 치고 싸우는 모든것은 다 계책, 묘략, 폭력위에다 “정의감”이라는 사탕을 발라놓고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인간을 무함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자신이 이기는가를 가르치고 있기때문에 현대 사람들이 그것을 무척이나 즐기게 되는법입니다.   8.엘리트문화 VS 대중문화   김: 대만의 사회인류학자 이역원 (李亦园) 선생이 “대전통과 소전통”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대전통은 공자를 대표로 하는 사대부, 지식인문화, 즉 정통문화고 , 소전통은 관공(关公)을  대표로 하는 인간의 문화입니다.       영국의 문화사학자 피터 버클은 그의 저작 《유럽 근대의 대중문화》에서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는 분렬 또는  대립된 문화가 아니라고 지적했어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엘리트문화가 소전통이고 대중문화가 대전통입니다. 그런데 지배자엘리트들이 대중문화가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다고 치면, 곧바로 대중문화를 억압하거나 개조해 버립니다. 이러한 통치권력하에서 대중과 유민문화는 엘리트문화에 의해 계속 조종당하거나 개조당하는 비운에 봉착한다는 겁니다.   왕: 나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대중의 사상문화와 사대부지식인의 그것은 큰 차이가 없고 세부에서 약간 이질된 표현이 있을 따름이지요.       어느게 좀 더 저속하고 또 어느게 좀 더 문명한가의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예를들어 《수호전》에 양산 호한들이 내든 “替天行道“(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라는 슬러건은 대중들속에서 나온 독창적인 의식이에요.   이는 대중의 사상이거나 또한 지식 엘리트의 사상이기도 하는 경계성에 있는 의식입니다.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하층인들이 통치자들을 저항하는 무기가 되고 엘리트들에게 있어서는 제왕을 보좌하여 왕도를 행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수호전》《3국지》등 통속적 대중문예작품이 그 뒤 사회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것을 우리는 부정할수 없지요.   김: 그러니까 이 양자는 상호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공생관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어쨋거나 피터 버클이 지적한 양자의 관계역학(力学)은 여전히 중국현실의 사회구조에 대조하여 고찰해도 적응할수 있다고 여깁니다.       제가 선생님의 노작《유민문화와 중국사회》배독하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는데요. 하지만 한가지 아쉬움이 남아있었어요. 쭉 역사적으로 귀중한 문헌자료를 구사하여 유민문화의 전모를 발굴, 분석한 업적은 높이 평가 하지만, 유감인것은 근현대 사회,오늘의 사회와 밀착시켜서 그 관계양상을 누락시킨 점입니다.   9.현대 사회 폭력   왕: 지당한 말씀입니다. 기실 김선생도 잘 아시다시피, 중국에서는 학술적으로도 여전히 공개해서는 안될 금기사항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주터 현대 민감한 금기사항은 아예 터치를 안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내 책에서는 주로 역사상 근대이전의 문헌자료를 통해 유민문화와 중국 사회의 상호관계양상을 탐구한것이니, 근현대까지는 미치지 못했어요. 나 자신도 큰 아쉬움은 남지만 어쩔수 없어요. 내 욕심같이 적나라하게 다 썼다가는 공개출판이 어려우니까요.   김: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저작이 비록 현실터치를 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유민의 “또 다른 하나의 중국”을 통해 중국역사의 입체적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의는 오늘 현실의 이해와 미래를 예측하는데 밝은 거울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여겨요.      현재 사회 민간 흑사회, 깡패조직의 폭력, 그리고 권력자, 이를테면 경찰의 국민에 대한 강제 폭력, 교정내의 어린이의 폭력,인터넷상의 만연하는 언어폭력… 이런 “폭력”이 중국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런 가슴 아픈 폭력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 내가 유민군체의 성격을 분석할때 이미 밝혔지만, 그중 “적나라한 폭력과 야만”이 하나의 큰 특징입니다.     《수호전》에서 무송이 반금련에 대한 잔인한 폭력적 살인이나 이규의 살인마같은 살인행위가 그러 하지요.     《수호전》《3국지》의 폭력,호협,의리등 요소들이 면면히 이어오면서 중국인, 특히 조폭사회, 암흑사회, 하층유민까지 영향이 큰것은 부인할수 없습니다.       한편 고대사회에서 형벌자체가 아주 잔혹하여 목숨외에도 주로 신체, 육신에 대한 비인도적인 형벌이 많았어요. 이런 잔혹함은 하층민중들로 하여금 반항할때 더 잔혹한 수단을 쓰게 했지요. 이와같이 잔혹한 폭력문화가 사회전반에 영향이 미쳤어요. 하다못해 사람을 매도하는 욕말도 “천번 칼자국 맞아야 한다(杀千刀的)”는 등 잔혹하게 표현됩니다(웃음)       사실 현대의 폭력은 옛날 사상과 조직형식이 다 똑같고 무협소설에서 배워온것이 대부분입니다.   10. 의(义)의 비교사회론     김: (웃음) 정말 그렇네요. 모종의 의미에서 유민문화는 중국의 전통문화나 국민성을 파악하는 하나의 바러미터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유민문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성격이 의(义)라고 갈파하셨는데 정곡을 찌른 지적입니다.       사실은 중국인 자체가 의를 중히 여기는 국민성을 지니고 있지요.    왕: 맞어요. 의는 여러가지 다양한 차원에서 해석할수 있는 전통도덕의 하나인데 유교에서도 의와 리(利)는 밀착되 있는거에요. 유민에게 있어서 의는 곧 리익과 직결돼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지금 일상에서 한사람을 평가할때 “쟝이치(讲义气)”가 중요한 도덕의 가치기준이 되거든요. 강호유민사회에서도 의기(义气)는 서로 사귀고  신임하는 인간관계의 접착제로서 그것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봉사, 공헌이 아니라 하나의 이익을 계산한 투자이기도 합니다.        《수호전》의 송강이 바로 의협으로서  그런 전형적 인물이지요. 송강이 금전으로 강호에서 친구를 맺는데 대해 김성탄(金圣叹)이 이를 얕잡아서 “돈으로 교유한다”(以银子为交游)고 비난했지요.(웃음)   김: (웃음) 맞는 말이네요.     제가 졸저 《중일한 3국인국민성격》(홍콩삼련출판사)에서 3국의 국민성을 비교하면서 중국인의 의(义),일본인은 화(和),한국인은 정(情)의 특질이 있다고 했어요. 비교문화론적 시각에서 같은 “의”라도 중국은 이익을 강조하는 성향이 지극히 강하지만 일본은 약해요. 인간의 화를 이루기 위해 의가 베풀어지는것이에요.  중국은 그 한자같이 羊이 我에게 얻어져야  义가 이루어지는겁니다. 羊은 전통적으로 중국인의 먹는것, 재물을 뜻하거든요. 그러니 재부가 내것이 되어야 의가 통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중국인은 이익을 우선시키는 그런 국민성이 있다고 봅니다.   왕: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그러므로”유정유의”(有情有义) 가 중국인의 선호하는 인간성이기도 하지요. 의기의 본질이 중국인이 생존을 꾀하는 도덕이라면 역시 그중에는 실제직 이익이 큰 비중을 점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중국말에 사용빈도가 높은 이런말이 있잖아요. “出门靠朋友”(밖에서는 친구에 의거한다)라는 말이라든가 “多一个朋友多一条路”(친구가 많으면 길이 열린다)는 말이 가장 집약적으로 중국인의 의리(义利)의식을 체현하고 있습니다.        옛날뿐만아니라 이는 오늘 우리 중국인의 생활의 법칙의 하나로도 정착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의리가 통하는 교제권안에서는 그대로 통하는 룰이 되고있어요.   11. 왜 중국인은 공공권에 익숙하지 않은가?    김: 또 국민성, 인간소질의 말인데요. 중국인에게 있어서 의리는 사실 자신의 가족,친구, 동료 등 아는 인간권(人间圈)에서만 작동이 되는거에요. 문화인류학에서 인관관계를 동심원(同心圆)으로 따지는 게 있는데,자신을 핵으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원을 “인정권”人情圈), 그 조금밖에 있는게 “의리권”(义利圈),그리고 제일 밖에 있는 큰 원이 곧 “공공권”(公共圈)이라고 일컬어요.       한국인이 제일 좁은데 인정권, 중국인은 바로 의리권, 일본인은 공공권에 익숙해 있습니다. 유교의 농도와 동심원의 사이즈가 정비례 되는데 한국인은 가족, 혈연주의의 유교가 가장 농후하고 다음이 중국, 일본순으로 되거든요.       그래도 한국인은 현재 민주화사회로 변모하여 중국인보다 공공의식은 많이 강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인은 여전히 인정권과 의리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때문에 공중장소에서 질서의식이 약하고 자기중심으로 방약무인의 경우가 종종 있지요. 인정권, 의리권 등 사적인 공간에서는 사덕(私德)이 강하게 존재하여 아는 사람끼리는 양보도 하고 서로 배려하지만, 공공권에서는 타인에게 그런 공덕(公德)이 없지요.그래서 공중도덕이 약하고 공중질서를 무시하고 공공서비스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왕: 참 그렇네요. 또 한가지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종법(宗法)사회에 몸을 담고 있어서 매개인의 개성이 위축되고 하나의 독립적, 성숙된 인격을 형성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송조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가족종법제도안에서 살아왔는데 한 종족의 인간들로 구성되고 일반적으로 족장은 지위가 있는 사람들중에서 선출되지요. 이 시기 행정관리와 종법이 공동으로 이같은 향토사회를 유지했습니다.       종법이란 정부적 기능이 있어서 같은 종법공동체내트웍안에서 종법성원들에게 보호와 공제하는 이중역활을 했거든요. 이렇게 되니 그 안에 있는 매개인은 개성이 줄어들고 진취심이 상실되기 마련이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현대 중국사회도 커다란 종법사회를 모방한 그 자체이지요. "문화대혁명"때 전통적인 종법사회를 모방한것은 그 실례가 수없이도 많아요. 자, 보세요, 그때 어린이들에게 “우리는 모주석의 좋은 어린이다”고 교육한것도,  “당은 친부모보다 더 가깝다”라든가 이런것들은 다 종법사회의 모방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였습니다.(웃음)       이런 관성적 사유에 물든 중국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하기보다는 늘 위에서 어떤 새로운 지시가 있나? 잘못하면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고 위축하거든요.     그러니 진정한 공민으로 되기 어렵고 공민사회와 거리가 멀게 되지요.   12. 공민사회를 지향하여야 한다   김: 좋은 말씀이십니다.     현재 중국이 개혁개방 3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한국 등 인국 동일한자문화권 나라와 비교해보면 일목요연해지는데요. 물질재부성장과 함께 인간의 소질 국민성의 향상이 정비례되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중국사회의 진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구경 어떤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지 고견 경청하고 싶습니다.   왕: 현재 하층민중들이 경제문제, 사회곤경에 직면해 있고 고층 위정자도 많은 현실과 정책 등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중외의 사정을 총화하여 가장 우수한것만 따와서 사회와 접목시키고자 하지만 어디 그런 쉬운일이 있겠어요? 결국에 왕왕 결점만 따오게 되죠. 지금 개방정책으로 굶주렸던 온 국민이 밥벌이 길에서 저돌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눈앞의 이익만 따지고 장원한 안목으로 보는 사유와 방법이 결핍해요. 그러니 늘 비극이 끊이지 않지요.   김: 아까 선생님께서는 공민의식, 공민사회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왕: 내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공민사회가 우리 나라에는 없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공민사회를 거론하고 있지만, 대부분 공민사회단체 NPO조직,자원봉사자조직이나 자선단체등을 꼽고 있어요.   김: 그중에 가장 중요한 공민의식,공민소질이 아닐까요?   왕: 바로 이거예요    광대한 민중이 기본적인 공민소질이 구비되였느냐가 가장 핵심이거든요. 왜냐하면 공민사회는 공민소질을 갖춘 공민이라야 구성될수 있기때문입니다. 공민소질이 없이 아무리 공민사회조직을 결성해봤자 그냥 조그만 활동그룹으로 끝나고 말아요. 왜? 공민사회가 아니니까요. 공민사회의 기초는 공민자각(自觉)이에요.     공민자각이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의식하는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공공사무에 적극 참여하는 공덕심(公德心)이에요.   김: 맞어요. 100여년전 양계초가 일본에서 망명했을 때 일본인과 비교하여 중국인의 공덕심, 애국심이 가장 결여하다고 한탄을 했잖습니까!   왕: 그렇습니다. 100여년지난 오늘 우리가 또 이런 같은 말을 하는자체가 하나의 비애이지만 현실이 또 그러하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공덕심을 양성해서 사회의 신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매개 중국인민은 합격한 공민으로 되며 규범적으로는 법치사회로 되어야 해요. 그리고 권리적으로는 민주사회를 세워야 하는거구요. 이거야 말로 정상한 사회라 할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습니까?   공민사회, 법치사회,민주사회만이 중국의 진로라고 생각합니다.   김: 유민사회, 비공민사회에서 공민사회로 나아가는게 중국 사회의 유일한 방향이겠습니다.       대담날자: 2016년5월25일     대담자 소개    왕학태(王学泰)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 중국유민, 유민문화 연구의 권위학자, 1942년 북경에서 태어남 북경사범학원(현수도사범대학) 중국문학부 졸업 주요저작으로는 《유민문화의 중국사회》 《중국인 음식문화간사》《감옥쇄기》 《또 하나의 중국을 발견하다》《중국고전시가요적총담》《”수호”시소록》
산 산,하면 중국인은 태산,황산같은 거룩한 오악( 五岳)을 떠올린다.일본인은 후지산,한국인은 고산준령이 아닌 낮은 산,고개다.이처럼 산(山 )의 한자는 같지만 ,이미지는 지리환경이나 역사체험에 의해 다르다. 오,산! 산은 같은 산이로되,실은 같지 아니하더라. 애(  愛 ) 사랑,애정 등 의미로서 마음으로 상대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애( 爱 ) 자는 간약되여 중간의 心자가 없어졌다.하오니 거리에서 쓰러진 노인네를 부추키지 않고 또 설사 부추겼다 해도 그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사랑의 애심아,너는 어디로 도망갔느냐?! 악인 진실이 눈앞에 널려있는데도 굳이 허위만 추구하는 인간. 호인 또는 선인(善人)이라고도 함.허위의 세상에서도 진실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 남녀 “여자는 월경에 지배당하고 남자는 월급에 지배당한다” 일본의 문화비평가 하세가와뇨제칸(长谷川如是闲)의 말이다 미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부드러운 정의 접착제. 그런데 이 나라의 서비스업 종업원들마저 웃음에 너무 인색하다.잔뜩 흐린 이곳의 하늘같이. 서점 서글픈 점( 店 ).이나라의 서점엔 온통 어슷비슷한 내용의 가벼운 서책들로 꽉 차있으니 .구하고 싶었던 책을 발견하는 재미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술 혹자가 마시면 지구가 콩알만 해지고,혹자가 마시면 콩알이 지구만 해진다. 또 혹자가 마시면 호랑이가 지렁이로 보이고 ,지렁이가 호랑이로 보인다. 아무튼 술술 일이 풀릴듯 착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마약. 골동품 서화,문방고완의 콜랙터인 나는 여러 대소도시들의 골동품시장이나 가게를 돌아보는게 큰 취미의 하나다.그런데 그 어느 골동시장이나 가게를 들러도 거의 99% 가짜나 위조물이다. 그래서 “왜 골동품이 위조품이 이렇게나 많냐”고 가게 주인에게 투덜거렸더니 되돌아오는 답 왈 “여기 어디에 진짜가 있겠소?!” 골동품은 그야말로 “골치 요동치게 아픈 위작물품”의 대명사다. 광고 널리 공개적으로 과대포장하는 상업수단. 사기성질이 있지만 법적보호를 받는다나(?) 병원 질병을 빌미로 환자에게서 될수록 많은 금전을 갈취해내는 기구. 인간 동물계에서도 예리한 이빨이 없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동족을 살해하는 유일한 동물. 인류 원류( 猿类)의 사촌으로서 고도로 진화되였으나 원류보다 동물성이 더 강하고 도덕성이 더 결핍한 족속.
172    4.불륜 정조 정치가 부패 학술논문 뻐스 똥구덩이 댓글:  조회:2627  추천:26  2016-06-22
불륜 육체의 쾌락을 찾아서,여자는 정신의 안식을 찾아서 행하는 유쾌하고 위험한 게임,잘하면 꿀이 쏟아지고 자칫하면 불똥이 튀기십상 정치가 확성기나 TV화면을 통해 국민을 위해 여차여차 헌신하겠다고 약속으로 큰소리만 땡땡치는 직업사기사. 정조 여성의 하반신에 채운 종이사슬 ,물( 物 )에 의해 쉽게 용해됨.   부패 이나라에서는 관에만 적응되는 단어가 아님.전민,전분야에 광범위하게 전염된 역병 학술논문 나는 네것을 베끼고,너는 내것을 베끼는 난륜(乱伦 )과 상간( 相奸 )에 의해서 양산되는 글 뻐스(전차,열차) 성냥깨비같이 꽉 채운채로 달리는 거대한 성냥곽.성냥깨비끼리 마찰하면 불꽃이 튀기십상.   똥구덩이 (金鳌新话)로 이름난 조선시대의 천재 김시습은 ,폭력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그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고결하게 지조를 지키면서 살기위해 중이 되어 스스로 독립인격,자유정신을 지켰다.세조가 어느날 내전에 법회를 열어 여러중들을 초대했다.그중 김시습도 초청되었지만 홀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래서 세조가 신하를 시켜 찾아오라 명했는데 김시습은 거리의 똥구덩이에 빠져 얼굴만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신하들이 빨리 나오라고 야단법석. 김시습은 “너희들같이 썩고 구린 놈들과 같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이 똥구덩이가 더 깨끗하겠다”고 소리쳤다. 아무 관직에 있지 않은 매월당 김시습은 고매한 인격으로 시류와 맞서서 자신의 신조를 지키면서 이단으로 살아왔던 지식인이다. 오늘 물욕과 금전 ,권세욕으로 충만된 우리 시대에 김시습과 같은 고상한 인격을 지킬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있으랴! 나는 같은 강릉김씨 김시습의 후예로서 긍지감을 느끼고 그렇게 살고싶도다.
171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갈검웅 김문학 대담] 댓글:  조회:3377  추천:40  2016-06-11
문화대담(3)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갈검웅+김문학     1. "중국문제군(群)"   김: 중국 현대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분인 갈선생님과 이렇게 대담을 나눌수 있어 후배인 저로서는 대단한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오늘은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고자 해요.   갈: 반갑습니다.김선생의 책을 읽었을때는 나이 듬직한 학자인줄로만 알았는데 아주 젊은 분이시군요. 동아시아 3국 문화비교는 참 정채로왔습니다..   김: 감사합니다. ”중국문제”란 개념이 있습니다. 중국 내지 중국사회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결함과 약점들, 이게 우리자신이나 세계 학자들이 중국의 앞으로의 진로를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로도 되고 있잖습니까.          예를 들면 현재 경제성장에 동반되는 환경오염문제, 정치개혁문제,도시와 농촌의 격차, 그리고 빈부의 격차,국민소질. 한족과 소수민족의 관계문제 …등등 안고 있는 “중국문제”는 방대한 “중국문제군(群)”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갈: 그렇지요. 이러한 “중국문제군”을 해결하거나 극복하는게 우리 중국 관민앞에 가로 놓은 크나큰 과제입니다.          이런 문제군을 극복하지 못하면 중국은 자칫하면 정체상태에 빠지거나 내부로부터 모순이 쌓이고 터져, 자신의 전진방향을 가로 막는 장벽으로 역작용할수도 십분 있지요.   김: 네.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중국문제군”과 관련해 선생님 전공이나 관심분야에 관해서만 담론의 화제로 삼고자 합니다.   갈: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2.  “ 중국”이란 무엇인가?   김: 중국문제를 인식하는 전제는 “중국”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재고해야 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날까지 “중국”이란 말을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다 보니깐 공기와 물처럼 익숙한 나머지, 이에 대한 생각을 잘 안했지요.        글로벌시대 세계속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생기면서 나는 누구인가?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은 세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등 아이덴티티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선것이죠.          선생님은 명작«통일과 분렬-중국역사의 계시»중에서 이념의 터브를 깨고 중국역사의 흐름속에서 “중국”과 “민족”에 관하여 많은 정채로운 발견과 지적을 했습니다. “중국”의 개념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갈: 중국의 “국(國) 자에서 알수 있듯이 국은 或(역)자와 상통하여 본래 성과 읍을 뜻했어요, 그것은 원래 한 촌락이나 종족의 거주지였지요, 상나라때 국군이 거주하는 곳이 곧 “중국”이였어요. 진시황때는 정군통치범위를 뜻하는 대명사로 되었습니다. “중국”의 “개념”이 늘 불확정,모호했으며 그 범위도 언제나 변해왔지요.   김: 그렇지요. 미국의 한학자 조셉 P.레빈슨도 고대 중국에서 나라(国)는 하나의 권력체였다고 지적햇습니다.   갈: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현재인의 개념이었지.역사 각 단계,시기나 또 동일단계내에서도 “중국”은  꼭 일치하지 않았고 누구나 다 수긍한것은 아니였습니다. 기실 “중국”이란 개념은 산생과 발전과정속에서 객관성과 주관성이 병존해왔지요. 객관성에도 4가지 부동한 개념이 있어요. 첫째. 정치성적인 중국,즉 정권과 국가, 최초의 중국은 많은 나라중에서도 중심,중원 복판에 있었던 나라를 가리켰는데, 그것은 국군이 거주한 나라였습니다. 진시황제가 6국을 멸하고 진나라를 세웠을때 그 수도와 중심구역은 중국이었고,그때 진나라의 강역도 중국이라 칭할수 있었어요. 서한에서 청말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강역을 다 중국이라 칭 할순 있었지만, 부단히 통일과 개발범위에 따라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각 조대의 정식 국명이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청나라의 정식명은 대청, 대청국이었거든요. 1912년 중화민국의 성립에 의해 중국이 그제야 우리 나라의 정식 국명이 되었습니다. 둘째. 문화성적인 개념으로서 “중국”은 종시 강열한 민족함의가 있었는데,일반적으로 한족문화지역을 가리켰거든요. 따라서 지리개념과 불일치하기도 했고, 영토의 귀속문제도 모순이 많았어요. 한편으로 아무리 먼 변강지역이라도 한족인이 많이 거주했거나 한족문화전통이 상당히 발달했다면 “중국”의 일부분으로 인정했어요. 또 한편으론 기타민족이 한족문화를 수용하여 일정한 발전정도를 보이면 한인의 인정을 받았고 이곳도 “중국”의 한 구성부분으로 승인했습니다 셋째. 민족성적인 개념, 이것은 한족의 전신인 여러 하(夏),화하(华夏)여러민족과 한족에게 동화당한 기타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비한족의 집거구는 이적(夷狄) 만이( 蛮夷  )등 외국에 속했고 중국이 아니었거든요.그런데 한족이 남방과 변강으로 집거하면서 여기에 비한족이 대량으로 융합되여 민족개념으로서의 중국도 따라서 넓어지는겁니다. 넷째. 지역성적인 중국, 즉 중원(中原) 과 같지요, 하남, 그리고 섬서,산서,하북, 산동 등지는 중원으로 칭할수 있습니다. 중원은 한 조대의 강역과 수도를 기준으로 하는데 일반적으로 수도나 정치중심일대를 가리켰으니까요.   김: 그럼 주관성적 개념은 어떤것이죠?   갈: 주관성적으로 볼때,”중국”의 개념은 시간,공간의 차이뿐만아니라 동일시공간내에도 부동한 군체나 개체들이 부동한 이해와 해석을 가할수 있었어요.      장기간 정치의 목적으로 출발하여 사학계에서는 현재 중국경내의 강역(疆域)에 대해 줄곧 “자고이래(自古以来)”를 강조하면서 중국이 마치 하,상,주나라이래 줄창 이렇게 큰것처럼 우기고, “자고이래”의 증거를 찾느라고 쌍불을 켰지요.   3. 왕조는 중국인가?   김: 갈선생님의 리론대로라면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장은 매우 복잡한것으로, “중국”이라는 이 공동체는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천하”라고 칭하는편이 더 낫겠군요.     “천하” 주변의 인간들은 중앙왕조에 대한 귀속감을 정도부동하게 갖게되였고 왕조는 기실 근대적의미의 “국가”가 아니며 중국과 등호를 칠수 없었겠습니다. 갈: 그렇습니다, 왕조는 중국과 동등하지 않지요. 춘추시대 “중국”이란 단어가  나왔을때, 황하중하류 즉 다시 말해서 중원의 몇개 제후국에 해당된것입니다. 그리고 이런것들은 단지 지역적 문화적 개념이었으며 명확한 기준이 없었지요. 중화민국이후 “중국”이 그 간약한 칭호로서 중국이란 국가적 국명이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말하는 중국은 현대적 의미의 중국이 아닙니다. 따라서 왕조는 중국과 구별되지요. 청조를 제외하고 어느 하나의 왕조의 영토가 지금의 중국전부를 포괄시킬수 있는 강역을 갖고 있지 못했던건 뻔한 사실입니다.        역사상의 통일을 판단할때 당연히 왕조의 통일을 빼놓을수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오늘날 중국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논할때, 왕조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과 꼭 같다고 말할순 없습니다.        서주말년 신민들이 “보천지하 막비왕토(普天之下,莫非王土)”란 송가를 부를때 우리는 중국이 통일됐다고 장담할수 있겠어요?없지요. 그리고 명조시기 장성을 건설할때 우리가 명조의 강역을 중국이라 할수 있겠어요?   김: 그럴순 없지요. 그러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다”는 우리의 상식처럼 된 말도 사실과 어긋나겠네요?   갈: 그렇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다”고 한다면,여기서 중국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만일 중원, 황하류역이라 한다면 그건 맞어요. 진시황이 황화류역 아니라 오늘날의 전 중국을 통일했다고 하면 그건 말도 안되죠. 진시황이 통일한 강역은 북으로는 음산산맥과 료하하류, 서쪽은 용동(陇东)고원, 서남쪽은 기껏해야 사천분지나 운귀고원에 그쳤습니다.      대만과 해남은 미치지 못했어요.   4. 통일과 분렬의 방정식   김: 우리는 보통 “중국”이 역사상 통일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었고 분렬이 짧았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통일과 분렬-중국역사의 계시》에서 중국역사상 최대강역범위의 통일시간은 근근히 82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이 저작을 읽으면서 사실 큰 쇼크를 받았거든요.   갈: 여태껏 우리는 중국역사상의 통일과 분열에 대해 인식이 부족한게 실정입니다. 이 체제는 역사상 간단없이 벌어진 과정이고 지금도 여전히 중국정치생활에서 회피할수 없는 모순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우리의 사학관은 이 문제을 정확히 해석하기를 기피했으며 오늘날까지 여기에 대해 터브가 남아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쓴 목적도 사학의 이런 터브를 깨고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때문입니다. 거대한 시공간내의 발전변화중 역사상의 통일과 분열을 규명하고자 썼지요.     내가 스승 담선생님의 《중국역사지도집》을 협조하여 수정할때 발견했는데 중국역사상의 통일분열문제에 대해 아직 터브구역이 많았어요. 그에 대한 전면적 공정한 인식이 결핍했고 전통적관념의 속박에서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역사상 왕조의 최대강역을 범위로 한다면, 그 통일시간은 82년 밖에 안된다는 통계를 냈어요. 즉 기원 1759년 건륭이 천산남북로를 장악한뒤로 부터 1840년 아편전쟁후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 다음까지지요.   김: 사실은 이 82년동안에도 세부에서 보면 지방에 따라 통일의 양상이 미진한점이 많았습니다.      만주, 즉 동북도 장기간 청정부에서 방치한 상태였고 그냥 군사주둔방역을 위주로 하고 광서말기에 이르러서야 동북3성을 설치했지요.   갈: 맞어요. 흑룡강이북, 우쑤리강이동지역이 러시아에 의해 점령당한것도 침략도 있지만 여기에 청나라에서 행정기구를 두지 않은 탓도 있어요. 러시아사학가들도 이를 침략이라 승인하지 않고 “신토지의 개발”이라고 우겨요.      신강도 내외몽골도  기본적으로 자치였고 서장에는 중앙에서 대신을 파견하였을뿐, 천하사상으로 인해, 천하가 다 우리것인데 하필 행정기구를 설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거지요.     청말시기 서양의 자극으로 영토의식에 개안하게 됩니다.     중국에 있어서 분열,분리시간이 길고 통일시간은 짧았어요. 중원왕조에 있어선 통일시간이 분열의 시간보다 약간 짧았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이전의 분열시간이 통일시간보다 길었고 원나라이후에는 기본상 통일된거죠.   김: 과연 《3국지》의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合,合久必分) 이라는 명구처럼 중국은 통일과 분열의 방정식을 풀어가면서 오늘날의 중국을 이루게 된것이네요.     제가 보건데 현대 중국인은 “대통일”을 좋아하는것 같은데, 이게 중국인의 하나의 절대적 관념으로 고착됐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통일관” 재사고   갈: 중국인이 현재의 사고방식에도 깊이 남아있는것은 중국문화라 하면 곧 유교문화, 화하(한족)문화라 하여 한족의 우월주의 사고가 많지요.     장기적으로 중국강역의 형성과정에서 아주 편면적인 관념이 있는데 중원 화하민족의 왕조에 가입해야만 통일이고 진보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분열, 반동적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한 변강정권, 지방정권이나 소수민족정권 또는 그 강역에 대해, 언제나 천방백계로 중원왕조에 귀속됐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애쓰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예 ”분열정권”이라는 감투를 씌워버리죠. 이런 사고는 문제가 있어요. 기본사실을 간과했기때문입니다. 중원왕조의 강역은 정치적으로 확장되었고, 왕조이외에도 여러 정권, 민족자치와 독립이 존재 했으니까요.      사실 어떤 변강이나 소수민족지구는 교통의 폐쇄, 간거한 조건 혹은 당사자들의 외래통지자에 대한 저항으로 중앙과 지방정권이 관할하기 싫어했던 점도 있었습니다.   김: 이런 국면은 사실 민국시대에도 존재 했습니다.   갈: 그러니 그건 분열이 아니고 지방 민족의 자치라 해야죠. 중국같은 다민족국가가 형성되는 장구한 노정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김: 일체 사물에 명암이 있듯이 통일에도 그 이폐가 병존할꺼라 생각합니다. 그 점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갈: 역사를 요약해서 말한다면, 점유와 통치를 막론하고 한 국가의 강역이 크다고만해서 좋은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연과 인문적 장애가 없다 하더라도, 한 국가가 무제한으로 영토를 확장하는건 불가능하거니와 불필요하지요. 범위가 적당한 영토라야 정권공고에 유리롭고 인민생활의 안정과 사회생산적 발전도 스무드하게 영위할수 있기때문입니다.     통일의 유리로운 점은 외적을 방어할수 있는것이고 또 하나는 강대한 역량을 결속하여 자연재해에 저항할수 있는 겁니다     통일에 의하여 한자문화권이 형성되고 일본, 조선반도 등이 공동한 문화형태를 형성한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폐단도 같이 동반되는것이지요. 역사적으로 “통일”의 폐단은 “통일”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그 통일이 전제집권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치제도 어떤 제도로 통일을 실현하고 통일을 관리하는가에 달렸다고 봐요.   6. 왜 제도 문제가 중요한가?   김: 갈선생님의 저작에서도 누누히 지적했다싶이 통일시기의 진시황은 강유력한 집권제를 실시하여 역사 발전을 추진시켰지만  인민이 주인이 되지못하고 기본적 민주를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장성은 그렇다치고 그 자신의 궁전과 능묘를 짓는데 인민의 재난을 초래하고 인민에 대한 폭행 역시 그의 역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건륭황제의 《4고전서》를  “위대한 문화공정”이라 침이 마르도록 칭송할때 수만종의 서적을 건륭제 사상과 부합안된다는 이유로 일거에 불사르고 또 많은 지식인들이 문자옥에서 아우성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의 통일에 어디 민주와 자유가 있냐고 질호했습니다.   갈: 중국사상에서 두차례나 공전절후의 학술사상 백가쟁명의 절호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차례는 춘추전국시기고 또 한차례는 20세기 신문화운동시기였지요.       아시다 싶이, 춘추전국시대는 통일된 국가정권이 아니고 대소정권이 병립한 시기였지요. 신문화 5.4 운동시기는 명의상으로는 통일된 중화민국이 존재했으나,실제적으로는 북경정부의 점령이 미친 곳은 수개성에 불과했고, 또 “국중유국”의 조계지세력도 있었으니 이런 난세중에 문화사상이 공전의 활약상을 보이고 많은 사상,문화대가들이 배출했습니다.       상대로 역사상 천하통일 태평성세를 구가했던 시기 그와 상응된 사상자유와 학술의 번영,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거장들이 많이 탄생하지 못했지요.       건륭제시기 성세를 이루었지만 문화사상자유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하고 지식인에 대해 억누른 암흑의 시기였잖습니까.   김: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제도문제가 중요하다는것이겠습니다.   갈:  맞아요. 중국의 역사가 이미 잘 증명하다싶이 통일정권은 부동한 제도를 실행할수 있으며 상당히 긴시간에 걸쳐 존재할수 있습니다. 대만,홍콩,마카오 등에서 각기 다른 제도를 실행할뿐만아니라, 대륙 각지에서도 기본제도가 불변한 상황하에서 부동한 구체적 제도를 실행할수 있거든요.       사실상, 각 특구. 해남성에서도 이미 하고 있잖습니까. 헌법이 규정한 기본제도라 해도 민주적 합법과정을 거쳐 필요한 수개도 해야 하지요.   김:   지당한 말씁입니다.   갈:  이래서 광범한 민주, 건전한 법제를 광범위하게 실행한다면 공민의 언론,출판, 학술의 자유가 보장되며 사상의 자유도 간섭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이러면 진정한 사상해방과 학술의 흥성이 통일된 국가에서 나타나고 이런 실정으로 인해 국가는 더 부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김:   그러니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치제도개혁도 경제개혁과 함께 심도있게 진행하고 언제나 구호나 슬러건으로 외치는데 그치치 않고 실속있게 실천에 옮기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말에서 끝나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중국인이 보편적으로 굳게 믿고 있는 “염황자손”신념에 대해 딴지를 걸었습니다.   7.  “염황자손(炎黄子孙)” 은 중화민족의 동의어가 아니다   갈:  현재 중국인의 세계에서는 “염황자손”이란 단어가 보편적으로 유행을 타서 “중화민족”이나 “중국인”의 동의어로 되고 있는 상황이지요. 장기적으로 해내외의 화인들은 “염황자손”으로 자칭하면서 동일 조상을 모심으로써 민족국가에 대한 귀속감 아이덴티티를 증폭시키자고 합니다. 염제, 황제 능묘를 수선하고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고 야단법석이지만, 난 여태껏 이에 반대해왔어요.     왜냐하면 국가의 명의로 어떤 하나 또는 몇개 민족의 조상을 가지고, 그것을 마치도 각 민족의 공동선조로 칭하는건 타당치 못하기 때문이지요. 《헌법》에 중국 각 민족은 평등하다고 규정했으니 한족은 당연히 염황을 본 민족의 선조로 섬길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기타 민족에게도 강제할순 없지요. 그럼 한족은 왜 칭키스칸이나 송짠깜보를 기리지 않나요? 각 민족은 각자 자신의 조상을 기려도 되지만 국가의 명의로 하면 억지죠. 이러면 소수민족의 감정에 손상을 끼칠수도 있습니다.   김:  “민족”이나 심지어 “전통”이란 사실 근대에 들어와서 유구한 역사가 있는게 아니고 발명한것입니다. “근대”와 대립적 의미에서 “전통”이란 개념을 발명하여 문화민족주의 발전의 일환으로 민족과 민족문화의 역사자신감,우월감을 형성하여 왔지요.     사실 “염황자손”이란 단어, 개념 역시 생긴지 100년에 불과  하지요. 진독수 등에 의하면 민족주의를 수립하기 위해 청나라와 맞서면서, 한족지식인들이 고안해낸 “전통”에 불과한거랍니다.   갈:  그러니 “염황자손”이란 개념은 한민족 형성발전의 역사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긴 설명을 약하겠는데 현재 약 10억이 넘는 한족중에 진짜 “염황자손”은 오히려 소수민족입니다. 왜냐하면 진한이래 북방에서 황하중하류지역으로 천입한 비 한족 흉노, 선비. 돌궐, 고려, 여진, 몽골,위글,회.민족 등 인구가 대량으로 한족으로 동화되였고 어떤 민족전체가 한족에 융합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은 오늘날 중화민족의 실제에도 부합되지 않지요. 현재 한족외에도 55개 민족이 있는데 그중 어떤 민족은 한족의 문헌에 따르면 염,  황 두황제나 그 후예와 다소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상 이것은 고대 대한족주의자들의 억단이지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미국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이지만 종래로 동일 조상을 운운하지 않고서도 공동으로 미국드림을 향하여 공동으로 나아갈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굳이 이런 일을 벌이니 이건 민족지간의 융합에 불리하고 역사를 거슬러오르는 짓이에요. 통일의 기초는 여럿이 공동한 가치관,이익이지 공동한 조상이 아니니까요. 세계조류에 맞지도 않거니와 자기기만식의 가식에 지나지 않으니 난 지금까지 그 어떤 적극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웃음)     황차 공민은 언론 신앙자유가 있으니 어떤 명칭을 쓰고 어떤 조상을 섬기든지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염황자손”은  중국인민의 대명사가 아닌것은 꼭 명확히 해야 돼요. 관방언론과 공식서류에서도 호도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8. 절대적 순수혈통의 민족은 없다   김: 1920년대 역사학 대가 고석강(顾颉刚) 이 “고사변(古史辩)”을 역설하면서 “민족의 일원(一元)출자관념을 타파”하고 “지역은 종래로 통일됐다는 관념을 타파”하고 “고대는 황금세계였다는 관념’을 타파할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대계도 등 지식인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고씨의 견해는 맞었지요. 일본에서도 메이지이후 민족심 고취를 위해 야마토민족이 단일민족이고  야마토문화가 “만세일계(万世一系) 라 그 순수성을 떠들어 대다가 패전후 그에 대한 반성이 생기고 일본문화의 “잡종성”을 자인하게 됐습니다. 갈: 세계적으로 절대적 순수혈통의 민족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있다고 하면 꼭 빨리 퇴화되어 절멸되고 맙니다.     한(화하)족이 세계적으로 가장 유구한 민족의 하나로 지금까지 세계 최다 인구의 민족으로 발전될수 있은것은 조상의 위대한 혈통이 아니라 바로 대량적으로 기타 민족을 흡수하고 각 민족의 정화를 응집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치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역량은 각 민족에서 오는바, 각 민족자체의 창조력과 그 단결력에 있지요.     중국에서 염황2제를 존중해온것은 우량한 민족전통이지만 그것은 한편 “대한족주의”의 표현이지요.     신해혁명전후에 혁명당파가 독립한 성에서 황제기년(黄帝纪年)을 사용한적있습니다. 청제국에 대한 부정이지와 또한 한족의 협애한 민족감정을 발로했지요.     황제기년도 그뒤에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9. 소수민족의 시야   김: 아까 선생님께서 “대한족주의”란 말씀을 하셨는데요. 저는 조선족지식인으로서 중국,중국문화를 바라 봄에 있어서 아마 많은 한족 지식인과 시각, 입장 또는 이해가 좀 다른면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의 궐기, 중국문제, 중국의 양식에 대해 세계가 주목하고 중국의 한족지식인들도 관심을 갖고 연구, 인식, 탐색해오고 있지만, 여기에는 절대다수가 한족역사시야의 중국이였지, 소수민족의 시야, 시각이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중화민족”이란 단어, 개념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청조의 문화유산 또는 정치유산을 전승하는것이지요. 그러나 그 내실은 한족의 역사, 문화 또는 한족이 생활하는 광활한 지역만이 아니라, 여러 소수민족이 포괄되여야 합니다   갈: 맞어요.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늘 말해왔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한족인만의 중국이 아니라 역시 50여개 소수민족의 중국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한족정권,중원정권의 유산을 계승할뿐만아니라 여러 민족의 유산을 계승해야 하고, 소수민족의 시야로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테제입니다.   김: 다민족시각하의 중국을 이해하는것은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근대적의미의 근대 국가, 즉 민족국가 ,영어로 칭하면nation-state 인데요.     루샨W. 페이가 “중국은 실질상 민족국가로 위장한 문명국가”라고 갈파했듯이 “일국일족”의 나라가 아니라 많은 민족, 문화, 종교를 포함한 방대한 국가이지요.     장족, 위글족이 바라 본 중국과 한족이 바라본 중국은 그 양상이 틀리기 마련인데, 이런 시야를 다원적으로 넣어서 중국을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선생님께 한가지 여쭈고 싶은데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세계적으로도 좋다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의 “한족화’가 빠른 스피드로 진척되고 있습니다. 이런 강유력한 한 문화중에 소수민족이 자신의 문화를 보존할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10. 소수민족문화, 어떻게 지킬까?   갈: 예리한 질문이군요(웃음)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강대한 민족의 문화우세와 정치적 지배가 약소민족의 동화와 함께 그 민족문화의 소멸을 초래했습니다.     물론 한족도 그 과장에서 이민족의 많은 장점을 흡수 한것도 사실이지요     그리고 또 자신의 문화적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소실되어버렸습니다.소실은 또 하나의 융합을 말하지요. 소실과 동화의 반복이 곧 중국역사입니다. 이런 방정식을 되풀이 하면서 오늘의 중국, 중국인이 있게 된것이지요.       그 방법에 대해 난 이렇게 생각해요. 보통 민중은 그 자신의 선택권이 있으므로 외부에서 섣뿌른 간섭은 삼가해야 합니다. 서양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생각으로 소수민족은 “영원히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보존되어야 하며 그들이 구경하고 연구하는 활화석으로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서장에 갔다온 어떤 미국학자가 나에게 말하기를 “라싸에는 지금 자동차뿐이고 우마차를 볼수 없다”는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꾸했어요. “내가 당신 나라에 가보니 우마차는 안보이고 자동차천지더라. 당신네들이 자동차를 탈수 있다면 장족들도 못탈 도리가 있냐?”     현대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소수민족의 현대화를 반대하는건 웃끼는 얘기죠(웃음) 김:  (웃음) 그렇죠.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조선족문화가 많이 보유돼 있는데 현재 한국인들이 “연변은 민족문화의 박물관인데 요즘은 너무 근대화되여 볼 멋이 없다”고 하지요. 사실 연변에 어느 정도 근대화적 생활양식을 가르쳐 준게 한국인데 말입니다.   갈: 국가적 차원이나 학문적 차원에서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성 있게 그것들을 보존하고, 보존할수 없는 부분은 빨리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지요.     그렇다고 현대화를 막는건 아니고 그 자신들이 현대화를 원하지않는다면 그건 딴 문제고.     내가 80년대 서장에 갔을때만해도 라면(方便面)이없었는데, 물론 그 단어도 없었어요. 근데 캉스푸라면이 들어가면서 장족들은 라면을 아예 “캉스푸”라고 칭해요.     문화는 그 민족의 선호하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으로서, 우리는 민족의 문화,전통을 존중하고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이야말로 민족평등의 기초이지요. 그러므로 소수민족 자신들의 선택도 존중해주는게 그들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요.   김: 저도 조선족지식인으로서 21세기 조선족 생활과 존망에 대해서 매우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선족은 동북3성의 토지를 떠나 해외로, 연해도시로 이동하고 정착중에 있어요. 조선족의 유지들이 이런 이동, 월경에 대해 “조선족의 해체”로 우려와 위구심을 나타내고 있지만, 저는 오히려 구조적으로 이동, 월경이 조선족의 특질이라고 파악하고, 이런 이동과 월경이 농경문화권에서 도시문명권으로의 정착으로써 조선족의 다양한 생활의 장(场)을 개척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으로 없어진게 아니라 A농경권에서 B의 도시문명권으로 이동을 했을 따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작《중국인구사》《중국이민사》《미래의 생존공간,자연공간》등에서 이동과 이민의 문명탄생과 전승, 전파에 대한 적극적인 역활을 거듭 지적 논증했습니다. 이동과 문명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11. 인구 이동이 문명을 살린다   갈: 방금 김선생님이 고민하는 조선족문제에 대한 견해 저도 찬동해요. 선진문명권을 지향하는 이동, 이민이 한 민족을 새롭게 탈바꿈하는 방도이지요.     수천년의 인구이동사를 통괄해보면, 중국역사상의 인구이동,천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 대가정이 있을수 없고 따라서 중국이란 이 국가적실체도 존재할수 없습니다.     현재 중국의 주요민족인 한족이 바로 그 형성과정에서 대량의 기타 민족요소를 흡수 또는 융합한 결과입니다.     사실 문화, 문명의 전파는 인구이동에 의해 진행되는 법이지요. 후진구역에 대한 개발은 인구의 이동,이민에 의해 인구 수를 늘릴뿐아니라, 기술, 도구가 같이 오며, 선진적문화, 문명을 갖고 오기때문에 문명전파의 몫을 하지요.     이를테면 동북3성이 청조의 봉금지역으로부터 중국의 중공업기지, 곡창기지로 변모된것도 많은 이민과 그에 수반되는 문화와 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아놀드 토인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명은 일종 운동으로서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영원한 항해이지 항구는 아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사학대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중국이 수천년 역사속에서 늘 멸망하지 않고 신선한 혈액을 보전할수 있은 까닭은 타민족의   침략과 혼혈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동은 인구소질자체에도 플러스 요인이 있지요.   갈: 그럼요. 인구이동은 근친, 동족간 통혼 등 소규모 범위내의 통혼을 막을수 있기때문에 인구소질에 적극적인 역활을 합니다.     그리고 이동은 인구의 문화소질 향상에도 이롭습니다. 도시의 형성은 거의 인구이동, 이민에 따른 결과인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유를 막론하고 도시의 확대는 외래인구의 대규모 이동, 천입을 전제로 하는겁니다.     근대 상해가 그 전형적인 케이스이지요. 1843년 상해가 갓 개항했을 당시 상해는 50여만 인구에 불과했으며, 영국, 프랑스 조계를 설치 한곳의 상해성밖의 농촌구역이였고 인구 역시 희소한 고장이였습니다.     그러나 1900년에 상해 인구는 100만, 1949년에는 500만으로 대폭 증가되였습니다. 상해가 강남의 한 중등현성으로부터 일약 중국 최대 아시아 최대의 모던 근대도시로 성장된데는 이민이 결정적 작용을 했습니다.   김: 인류사는 사실 인류의 이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저는 문명사적 시각에서 인류의 인구가 이동, 월경하면서 일어나는 문명의 양상,면모를 연구정리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저작이 제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갈: 좋지요. 동아시아의 월경, 이동을 문명사시야에서 다루는 연구는 새롭고 심원한 의의가 있는 연구가 되는겁니다.   김: 감사합니다. 또 한가지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것은, 현재 경제성장으로 인해 자신감이 생긴 중국에서는 “전통문화”를 회복하고 “국학”을 흥하며, 해외에 많은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등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가하십니까?   12. 전통문화와 현대   갈: 기실 전통문화라도 그 민족의 융합과 변천, 개방의 역사와 같이 고정불변으로 보진 않습니다. 중국문명이 이역문명을 흡수하여 부단히 발전시킨 역사라면 전통 역시 고유, 고정불변으로 고착시켜서 보면 안되지요.     중국이 현재 전통을 부흥시킨다는것은 쇄락했기때문에 다시 회복시킨다는것인데 왜 쇄락했냐는 이유를 분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전통문화와 전통적 지식체계가 현대성, 현실에 적응할수없은 까닭이지요.   김: 문화 자체가 곧 한 민족, 사회집단의 주어진 자연현실에 대한 적응으로서 거기서 생긴 적응상태 즉 생활양식 사고양식이 아닙니까.   갈: 그래요. 문화는 이렇게 현실에 따라 변하고 부단히 발전하는거지요. 엄격한 의미에서 말해. 우리 오늘날의 문화는 여전히 전통적 농업문명에서 산업문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과도기, 적응상태에 있다고 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애매모호한 주장이나 전통문화와 현대에 관한 태도 역시 여기서 비롯된것이지요.     문화, 전통문화에도 순수한 것이 없어요. 증류수처럼 순수한게 없지요. 여러민족이 융합,동화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 어디 순수한 전통이 있겠어요. 그러니 전통문화를 논할때 개방, 변천, 융합의 일면을 중시해야지 거기에 대해서 고정형식으로 매이면 안되지요.     국제적으로 볼때 중화문명 역시 이역, 해외문명을 부단히 흡수, 발전시킨 결과임으로 순수성이란 존재하지 않지요. 이건 영원히 그러게 될껍니다.   김: 우리의 근대, 현대는 사실 구미문명의 절대적 영향하에서 영위해 왔고 또 해가고 있지요.   갈: 그러니 전통도 현실, 현대를 떠나 운운할수 없어요. 전통이 현대에 적응할수 없는 부분이 많거든요. 그럼 어떡해야죠? 그 정화를 남기고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이 좋지요. 예전에 우리는 정화와 찌꺼기를 한꺼번에 버렸는데 이게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찌꺼기까지 긍정하고 남긴다면 그건 더 어리석은 짓이아닙니까. 그리고 중국의 현대화, 진정한 세계강국으로 되려면 중국인 관념의 현대화를 이루고 전민의 현대화를 성취하는 길이 그 첩경입니다.   김: 공사다망하신가운데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정채로운 말씀들이 독자들에 큰 지적(知的) 자극을 주고 계발을 주리가 믿습니다.   대담날자: 2015년 12월 27일 대담자 소개 갈검웅 ( 葛剑雄 )   1945년 절강 호주 출생 중국 현대 저명한 역사지리 학자 복단대학 교수. 역사지리연구 소장. 도서관장 역임 교육부사회과학위원회 역사학부 위원 중국역사지리.인구사.이민사 연구영역의 제일인자. 주요저작으로 《통일과분렬:중국역사의계시(1994년》《중국인구사》《중국이민사(1993년)》《중국인구발전사(1991년)》《우리가 해야할 반성(2015년)》등 다수가 있다.
170    3.희극과 비극,수염,직업습관,고독,의심,질투,서재,진실,방귀 댓글:  조회:3073  추천:30  2016-06-03
희극과 비극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다.세상에 비극,희극의 구별이 따로 없다.당신이 비극에서 빠져나오면 곧 희극이요,만약 당신이 희극에 빠져있다면 곧 비극으로 되는법이다. 수염 통상 성인남자의 코밑이나 입가,턱,뺨에 나는 털.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장기간 식품에 성장호르몬을 주입한탓으로 그것을 먹은 어린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나고 ,어린 여자애가 유방이 발달되고 생리가 일찍오는 일이 많이 있더라. 직업습관 구두쟁이는 행인의 구두만 눈여겨보고 안경점직원은 행인의 안경만 눈여겨보고 양복점주인은 손님의 양복만 눈여겨보고 치과닥터는 사람의 치아만 눈여겨본다 그렇다면 산부인과 닥터는 부인의 무었을 어떻게 볼까?보지도 못하고 상상으로 메우는것일까? 고독 인간에게 부여된 그 어느때 어느곳 보다 자유로운 시공간.그러나 인간들은 흔히 그런 절호의 자유를 스스로 말살하려고 하니,이 아니 어리석은가! 의심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적으로 만들게 하는 괴수 질투 플러스면으로는 자신을 향상시키는 길 마이나스면으로는 자신을 괴롭히는 약 서재 독서인,또는 지식인의 지상낙원.서책들은 낙원의 서민,서재의 주인은 곧  최고통치자.이런 의미에서 나는 너무나 독재적인 최고통치자다. 진실 이 사회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요구해서는 안되는것 방귀 "내말은 진리고 네말은 방귀”라는 말의 준말.
169    2.사랑,스마트폰,단풍잎,꿈 댓글:  조회:2508  추천:19  2016-05-30
사랑 생각컨데,사랑의 한자는 “思郎”이다.랑군님을 사모하는 정.반대로 랑자님을 사랑하는것은 “ 思娘” 이다.사랑이 诈郎/诈娘으로 될때 ,그것은 거짓사랑,사기사랑이 된다. 스마트폰 신( 神 )에게 숙이던 인간의 고개를 앗아간 악마의 발명품.인간의 노예제도가 해체된뒤 유일하게 스스로 그의 노예로 되기를 원하는 매력적 신기( 神器 ) 단풍잎 울긋불긋 단풍잎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고 시흥을 위해서가 아니다.단풍나무에서 월동하려는 벌레들에게 나는 무서운 존재라고 과시하는것이라고 생물학자 하밀튼이 말했다. 홍색과 황색의 경고를 보내는것이다. 꿈 꿈이란 말이 요즘 굉장히 유행을 타고있다.꿈이 없는 인생이란 있을수 없다.꿈이 좋은 까닭은 인간에게 목표와 이상상을 세워주기때문에 분발의 에너지로 되기 때문이다.문제는 꿈이라고 그렇게 쓰기만 하고 그 꿈이 구경 무엇인지 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꿈이다.
168    1.문학,학문,지식인 댓글:  조회:2722  추천:31  2016-05-23
문학 (1)  문학이란 문화(사회 ,민족,집단의 생활양식)를 구현,또는 재현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미술이 색채,명암을 통한 시각(视觉)의 예술이듯,문학은 文字를통한 글( 文章)의 예술이다. 예전에 고리끼가 문학은 “인간학”이라고 정의했지만 ,나는 문학은 인간학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인간학을 하는 인문학,사회학,철학,인류학 등 방대한 학문적 세계야말로 진짜 인간학을 담당할수 있는 전문영역이기때문이다. (2)   문학이란 개인,매우 개인적인 정서,사상,의식을 필봉을 통해 배설하는 행위이다.마치 화를 내듯,분뇨를 배설하듯 지극히 생리에 가까운 배설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머릿속에 찬 정서,정신적 배설물을 종이위에다 배설 나열하는… (3)  그래서 문학이 모종 체제나 이념에 영합하거나 아첨하는 행위가 됐을 경우 ,그것은 문학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이미 문학이란 라벨을 붙인 선전포스터나 ,남의 뒤를 닦아주는 토이렛페퍼로 변해버린 까닭이다. (4)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죽는날까지도 모종 체제나 세력에 아첨,영합,발라맞추는 글은 아니 쓸것이다.내 이름 답게 진정한 “문학”만 고집할것이다. 학문 문학을 꺼꾸로 읽으면 학문이 된다. 많은 독자들은 나를 부러워한다.내 이름이 바로 보면 “문학”이요,꺼꾸로보면 “학문”이기때문이란다. 둘다 하고 있다고 야단이다. 아,그런가? 학문,배워서 익혀가는 学问은 学门이다. 이 문을 나는 영원히 열고 또 열어가면서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고 개척하겠다. 지식인 자신의 지식을 통해 그 나라,사회,체제를 비판하는 몫을 담당하는 자다.이를테면 관리와 국민의 정신에 채워진 쇠사슬을 부수는 일을 학문,연설을 통해서 완성하는 직업인이다.
167    머리말 댓글:  조회:2231  추천:18  2016-05-23
  김문학의 “문학사전” 金文学的 “文学事典” 머리말 여기서 “문학사전”은 아마도“文学事典” “文学思典”이나 “文学斜典” 또는 “文学邪典”이라 해야 할것이다. 이 글은 수시수지 (随时随地)로 생각이 미치는 대로 내 개인의 즉흥적인 정서,사상을 적은 “배설물”이다. 나는 생리적으로 코를 풀듯,분뇨를 배설하듯 이 글을 오래전부터 써왔으며 지금도 써내려가고 있다. 이 단문들은 나 스스로의 진솔한 고백인바 ,때로는 자조하듯 ,때로는 세상을 비꼬고 ,때로는 편견과독단,때로는 독설(  毒舌  )과 비판으로 , 때로는 유머와 익살로 ,때로는 심술장이 같은 사견( 邪见, 私见) 으로 시사비사( 是邪非邪)하게 내 진지하고도 완동( 顽童)같은 기상천외의 사고와 공상을 믹스시켰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특별히 언명하고자 하는것은 이 글들은 조글로의 편집지침,방향과 꼭 일치하지는 않다.하오니 내글에서 혐염을 느낀 부분이 있다치면 오로지 내 개인에게만 돌리고 ,제발 조글로에 부질없는 동족상잔의 모창을 던지시지 마시길 희망하는 바이다.이점 미리 언급해두고 쓴다. 이 짧은 글들이 세인들의 애독과 함께 지적(知的)자극을 주는 구실을 했으면 저자로서는 천만다행으로 간주하겠다. 자아,그럼 이제부터 김문학의 “문학사전”을 펼쳐보시기를…
연재문화대담( 2 ) “장독문화”는 어떻게 중국인을 부식시켰는가? 백양+김문학 백양 선생   0.들어가면서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의 일이다. 2003년 신록이 짙어가는 5월,나는 일본의 대만출신의 한 지기를 통해 대만의 작가 백양(柏杨)선생님과 연줄이 닿았다.국제전화를 통하거나 서로의 저작을 우송하기도 하면서 어렵사리 맺어진 우리의 연분은 미구하여 망년지교로 되였다. 백양은 80년대 중반 《丑陋的中国人》의 저작으로 전중국의 지식인 ,학생들사이에 폭발적인 션세이션을 일으킨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지성이다. 1986년 12월 ,대학졸업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지 1년 좀 되는 나에게 있어서 이책은 충격적인 애독서였다.24살의 나는 앞날 같은 책을 써보겠다고 아이디어를 얻은 책이기도 했다. 이런 위대한 작가와 한번 만나보았으면 하는 바램도 간절했다.그러다가 일본유학길에 오른 나는 역시 《조선족개조론》《丑陋的韩国人》등 저작으로 우리 민족내부의 열근성을 비판하는 저작을 써내고야 말았다. 내가 우송해드린 《新丑陋的中国人 》(중국어원고)원제<  중국인>과 일련의 저작을 읽으신 백양선생님은 전화에서 이렇게 평가하셨다.  “정말 동아시아의 기재
165    (79) 청말의 일본본토 습격계획 댓글:  조회:4039  추천:28  2016-03-2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9) 청말의 일본본토 습격계획 김문학     근대 동아시아 백년사를 회고할 때 동아시아 동쪽 끝머리의 작은 섬나라 일본이 거대한 대륙 중국과 조선반도를 침략, 점령, 지배의 력사적사실은 있으나 대륙 중국과 반도가 섬나라 일본을 한번도 침략, 습격한적이 없는 중대한 사실이 눈에 뜨인다.   중국의 근현대 사학자들은 말한다. 사실 1937년부터 45년사이의 항일전쟁, 특히 1945년 일본 패망의 8월에 중국이 일본 본토까지 진군하여 일망타진할 기회는 있었다고.   당시 일본침략자를 중국 대륙에서 몰아내는데 결정적 작용을 한 요소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중국, 로씨야, 미국, 일본의 립장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로정하고있다. 일본인은 중국군에게 패북당한것이 아니라고 고집하며 중국인학자는 중국군, 공산당군대의 력량을 높이 평가하고있다. 물론 로씨야학자는 쏘련군의 참전을 과대평가하고 미국측 학자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최대한 결정적인소로 단정하고있다.   필자는 이 4국의 요소가 서로 종합하여 일본의 신속한 패망을 초래했다고 보는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싶다.   그런데 단 한가지 의문만은 여전히 전승국 국민들의 뇌리속에 남는다. 왜 당시 승승장구로 일본군을 무찌르던 중국이 일본 본토까지 침습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복단대학 국제관계 및 공공사무학원의 교수 곽정평(郭定平)은 “기실 당시 쏘련이 일본 본토까지 습격하려 했으나 미군의 작전이 너무 신속했기에 관두었다”고 밝힌다.   이미 물먹은 담벼락처럼 무너진 일본에 대해 전면습격작전은 무의미하며 일본 역시 촨황만 보류하면 무조건 투항하겠다고 승낙했기때문에 미국과 장개석이 상담결과 일본 본토 전면 침공을 중지했다는 학자(팽훈후)의 해석이 있다.   결과 미군의 GHQ가 일본을 7년간 점령하면서 미국식 민주국가로 일본을 개조시켜버렸다.   그런데 필자가 이 글에서 쓰려는것은 100여년전 청조말기에 1894~95년 청일갑오전쟁기간 일본 본토 습격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단서는 당시 청나라의 외교관인 송육인(宋育仁, 1858~1931)이 “일본 본토 습격계획”을 청조정부에 제출하는것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선 송육인이란 인물은 누구인가로부터 실펴보기로 하자.     《송육인 사상평전》[황종개 등 저(黃宗凱 等著)]에 따르면 송육인은 사천성 자공시 출신의 청말 “신학거자(新學巨子)”로서 유신사상가, 지식인, 외교관이였다. 그의 사상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출판, 군사, 외교, 법률 등 폭넓은 령역에 미쳤다. 1886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서길사로 승급했으며 북경에서 유신사상을 접촉하고 황준헌 등 개량파지식인과 친분을 쌓으면서 의식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   1887년, 그는 중국 근 30년의 양무운동의 파탄에 따른 반성을 했으며 양무파를 비판하고 유신변법을 주장한 《시무론(時務論)》을 집필해 중국이 개량의 길밖에 없다고 언급한다. 《송육인 사상평전》[황종개 등 저(黃宗凱 等著)]에 따르면 송육인은 사천성 자공시 출신의 청말 “신학거자(新學巨子)”로서 유신사상가, 지식인, 외교관이였다. 그의 사상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출판, 군사, 외교, 법률 등 폭넓은 령역에 미쳤다. 1886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서길사로 승급했으며 북경에서 유신사상을 접촉하고 황준헌 등 개량파지식인과 친분을 쌓으면서 의식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   1887년, 그는 중국 근 30년의 양무운동의 파탄에 따른 반성을 했으며 양무파를 비판하고 유신변법을 주장한 《시무론(時務論)》을 집필해 중국이 개량의 길밖에 없다고 언급한다.   《시무론》은 경제면에서는 민족공업을 발전시켜 외국경제의 침략을 막아야 하며 정치면에서는 유럽의 군주립헌제를 따라 배워서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제도를 실시할것을 창안했다. 뿐만아니라 군사, 문사 등 분야에서의 개량을 소리높이 주장했다.   1889년 한림원의 검토로 되였으며 혈기왕성한 그의 문장은 뭇사람의 시기를 사기도 했지만 광서황제의 사랑을 받기도 했으며 거물급 학자 옹동화에게 소개시키기도 했다.   1891년 과거시험관으로 광서를 시찰하면서 청국개혁의 절박성을 감수했다. 1892년 공친왕에게 경제개혁, 신문개방, 교육발전 등 개혁안을 제출했다.   1894년 공사를 수행하여 유럽에 출사한 그는 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정을 적극 조사, 접촉했으며 그 경위를 《채풍록(采風錄)》 4권으로 출판하여 서양의 정치, 풍습, 문화를 소개하면서 유신변법사상을 강도높게 진술한다.   청일갑오전쟁 발발 당시 런던에서 중국 주 영, 불, 이, 벨기에 4국 공사참찬으로 있던 송육인은 청나라 조정에 상서를 올려 구체적인 전략을 진술했다.   황해해전 실패후 송육인은 즉시 파격적인 전략을 구상했다. 즉 영국 등 군함을 구매, 어뢰쾌속정 10척에 외국수병 2천명을 모집하여 수군려단을 무어 외국상업단체로 가장해 일본의 나가사키와 동경을 습격하는 방안이다.   이 모략을 송육인은 청나라에 보고하여 비준을 바랐으며 당시의 실력자인 장지동, 류곤일(劉坤一)과 련락하여 지원을 청원했다. 그리고 미국, 영국 등 은행가들에게 차관하여 군함과 병사를 사고자했다. 그의 피타는 노력으로 군함, 무기와 병사모집이 이미 성사되였으며 강유력한 해군을 형성시켰다. 이를 북양수사 제독 랑위(琅威)에게 주어 인솔하게끔 했다.   그러나 당시 패북한 청나라는 이미 일본과 강화할 타산을 확고히 하고있었기에 리홍장은 송육인들의 기습작전을 철저히 부정해버렸다. 서태후 역시 송육인이 “사단을 일으킨” 죄를 문책해 송을 귀국시켰다. 1895년 3월 청나라와 일본은 굴욕적인 “마관조약”을 체결했다. 송육인은 관직이 4품직으로 떨어지고말았다.   그뒤 송육인은 《차주기(借籌記)》를 집필하여 뜻을 성사시키지 못한 울분을 기술했다.
164    (78) 100년전에 예측한 상해만국박람회 댓글:  조회:4368  추천:42  2016-03-1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8) 100년전에 예측한 상해만국박람회 김문학    올림픽과 만국박람회(世博會)는 한 국가의 경제문화적 선진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되고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는 일본(1964년)이며 다음은 한국(1988년), 그 다음은 현재 눈부신 성장을 과시하고있는 중국(2008년)이다. 이와 같이 아시아 근대 선진도 순위로 올림픽과 만국박람회가 세트로 개최되였다.   세계 제1회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곳은 1851년의 영국 런던이였다. 박람회가 주최국의 국격과 국위발양의 큰 아이템으로 되였으며 역시 서양 근대화의 거세찬 물결을 타고 동아시아에도 그 짙은 의식이 류입된다.   100여년전인 1898년 무술정변이 실패후 젊은 계몽운동가 량계초는 일본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량계초는 탁월한 지견과 아이디어를 갖춘 당대 일류급의 지식인이였으며 바로 그러한 까닭으로 명석하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두뇌를 가진 엘리트문인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배에서 일본인 선장이 건네주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소설 《가인기우(佳人奇遇)》를 읽게 된다. 이 소설은 일본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소설가, 문인인 시바시로[柴四郞, 필명 동해산사(東海散士)]가 쓴 미래를 예측한 정치환상소설이였다.   소설은 미국 류학중인 일본인 청년의 행동을 주축으로 서구의 근대혁명, 동아시아 조선, 청국, 일본의 근대 백여년을 기상(奇想)을 동원하여 서술하고있으며 각국 독립운동가, 지사들도 대거 등장한다.   이에 지대한 공명을 일으킨 량계초는 소설에서 큰 계시를 얻는다. 도일후 유명한 《청의보(淸議報)》를 창간한 그는 이 소설을 번역, 련재한다. 이리하여 일본인이 쓴 정치환상소설은 중국인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02년 량계초는 아예 스스로 환상소설 《신중국 미래기》를 집필하였다. 이 소설을 전문 발표하기 위해서 량계초는 스스로 문학잡지 《신소설》을 창간하기도 했다. 《가인기우》의 영향으로 탄생된 이 소설은 로신의 《광인일기》보다 16년이나 앞서 집필된 중국 근대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이 소설창작을 통해 “소설계혁명”을 선언한것도 량계초 본인이였다.   《신중국 미래기》는 약 9만자, 5회로 구성되였는데 미완성으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긴다. 소설은 1902년부터 1962년 60년사이의 중국의 력사적변화양상을 허구로 기술하고있다.   중국은 개혁의 방법으로 민주공화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량계초적인 명확한 사상플랭이 담겨져있다.   소설은 1912년 전국 국회가 열린다고 설정하고있으며 국명 역시 “대중화민주국”으로 되있다.   픽션으로 구성된 소설이지만 량계초는 그럼에도 1902년부터 1912년 중화민국 성립까지의 예언은 경이로을 정도로 적중시킨다. 중화민국이 1912년 남경을 수도로 성립되는것도 맞혔다.   이보다 더 경이로운것은 그가 소설에서 “상해만국박람회”를 예언했던것이다. 1962년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수도 남경에 모여 중국유신50주년을 경축하는 세계적박람회를 개최한다고 직언한다.   그런데 필자가 량계초의 예지능력에 찬탄하면서 여러 자료를 섭렵해보니 사실은 량계초보다 앞서 19세기말경에 중국의 지식인들인 정관응(鄭觀應), 강유위까지도 상해박람회를 예언했던것이다.   1893년 청말 유신파사상가 정관응은 그의 명작 《성세위언(盛世危言)》에서 “부강구국”의 사상과 함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각 분야에서의 개혁계획을 제기했으며 세계박람회를 열어서 나라를 구하는 방법도 제시했다. 또한 상해에서 개최해야 할 필요성과 의미를 언급했다.   1900년에 간행한 《진흥공예제조설(振興工藝製造說)》에서 박람회를 열어 여러 공업, 공예를 장려하는 구국방책을 내놓았다. 아마 구체적으로 세계박람회를 열어야 하는 주장을 한 인물은 정관응이 최초일것이다.    1905년 일본을 거쳐 유럽에 망명한 계몽가 강유위는 1889년에 세계만국박람회 개최시 세운 에펠철탑에 3번이나 올랐다. 그는 만국박람회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이 하늘찌른 철탑의 위용같이 프랑스의 자신과 국위에 주시했다. 그는 국가의 선전, 자신감의 중요한 의의를 여기서 깨닫게 된다.   량계초의 뒤를 이어 소설가 오연인(吳硏人)이 1905년 《신석두기(新石頭記)》를 발표하여 상해만국박람회를 예언한다.   그는 소설에서 가보옥(賈寶玉)이 다시 세상에 환속하여 구경하러 간곳이 바로 상해세계박람회였다고 쓴다. “포동(浦東)에 큰 회장을 설치했는바 이시각 여기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이 만국박람회는 백년에 한번 있을가하는 소중한 기회이므로 구경하지 않을수 없다. 집문밖을 나서자 곧 회장이였는데 각국이 자리를 차지하고 건축물을 짓고 각종 화물을 진렬했다. 중국 역시 각 성별로 회장을 설치했다.”   1910년 32세의 륙사악(陸士鄂)이 소설 《신중국》에서 100년후 상해만국박람회 개최를 예언한다.   필자는 이제 100년후 중국은 어떻게 변해있을가? 세계는 어떻게 변할가?하는 테마에 관심을 갖는다. 100년후의 인류사회를 예언하는 책을 써보고싶다.  
163    (77) 로쿠메이칸 문명개화의 꽃 댓글:  조회:4404  추천:29  2016-03-0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7) 로쿠메이칸 문명개화의 꽃 김문학            동아시아 근대사는 서양문명을 따라배운 “서양화”의 력사이기도 하다. 근대, 현대 포스트 근대 등 단어 자체가 서양의 산물인바 우리는 오늘날도 서구화의 조류속에서 살고있으며 그 또한 우리의 력사이며 우리 자신의 정신과 모습 그 자체이다.   비서구사회에서 솔선 서구화를 이루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근본원인은 우선 세계적으로도 탁월한 서구화, 국제화에 대한 지대한 정열과 실천력에 있다. 일본의 서구화 정열에 대해 그냥 “원숭이 흉내”로 비난하기는 쉬우나 그 서구하습력에 대해 리해하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일본의 근대 서양학습력을 인식하는데 상징적인 건축물이 있다.   그가 바로 로쿠메이칸(鹿鳴館)이다. 일본 문명개화의 심벌물로서 서구화의 상징적인 꽃으로 불렸다. 1881년에 착공하여 1883년에 완성된 서구 르네상스양식의 2층 건물로 된 영빈관ㅡ로쿠메이칸이 탄생된다.   록명(鹿鳴)이란 중국 《시경》의 “록명의 시”에서 따온것인데 손님을 접대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뜻에서 이 명칭을 채용했다. 1883년 11월 준공되여 11월 성대한 락성식을 거행한 이래 로쿠메이칸은 일세를 풍미한 국제사교클럽으로서 국제적명성을 날린다.   로쿠메이칸을 지은 배경에는 일본의 서구화정책이 있었다. 이와쿠라사절단의 서구순방이래 1880년대 일본 메이지정부는 급격한 서구학습으로서 구화주의(歐化主義)로 불린 구화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일본인에게는 청국처럼 서구의 반식민지로 전락되는 위기를 모면하는것은 서양을 배워 서양식근대문명을 이룩하는 길이 유일무이한 선택이라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안고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정부가 일본의 문물, 제도, 풍속, 습속 등 생활양식과 정신의식에서 서구식으로 습득하여 서구제국(諸國)에게 일본의 근대화를 피알하고자 했다.   당시의 외무대신이였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주도하여 도쿠가와(德川) 바쿠후말기 구미렬강의 강압에 못이겨 체결했던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수정시키고 동등한 위치에서 교류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훌륭한 건축물 로쿠메이칸을 통해 일본이 구미와 변함없는 문화국가라는것을 과시하며 구미렬강의 외국요인들을 초대하여 교류하는 근대적장소를 갖기 위해서였다.   동경의 중심부, 현재의 제국호텔근처에 세운 이 양식 로쿠메이칸은 동경제국대학 건축학과의 초빙교수로 재직중이던 영국인 콘들이 설계한것으로 유명하다. 그때로서는 지극히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기는 모던적 건출물이였다고 한다.   현재 필자의 수중에 있는 당시의 무도회, 연주회 장면을 활사한 그림(유명한 화가 요슈치카노부(楊洲周延)가 그린 작품)을 보아도 그 화려한 성황을 실감할수 있다.   1883년 11월 28일, 해내외의 1,200여명 인사를 초청하여 성대한 락성식이 열렸는바 일본의 젊은 미인과 부인들이 영, 미, 독 등 신사들의 품에 안기듯 서양원무곡 선률에 맞퉈 우아한 원무판을 벌였다.   연미복차림의 일본신사나 파리숙녀같은 서양장으로 화려하게 단장한 숙녀... 그뒤 련일 개최된 가면무도회, 원유회, 연주회 등 서구문명개화의 드라마를 자작자연해나갔다. “양장을 입고 양담배 권연을 꼬나물고 양주를 들이마시고 댄스를 하는”것이 전형적 일본 신사숙녀의 모습이였다.   외국인과 교제하기 위해 외국어 회화레슨도 활발히 전개되였다. 1884년 양슨이라는 외국인이 일본의 귀현숙녀의 댄스교사가 되여 댄스를 가르쳤으며 그뒤 세상을 풍미한 로쿠메이칸 가장(假裝)무도회가 빈번이 벌어졌다.   뿐만아니라 여기서는 교육자금을 모금하는 목적으로 녀자학생들이 만든 인형이나 의복을 파는 바자(자선시)도 열렸는데 이같은 자선운동은 상류계급 부인들의 사회봉사로서 류행하기도 했다.   로쿠메이칸의 무도회는 한편 정치가, 상류사회 부인들의 염문을 뿌린 스캔들의 장소로 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색가”총리로서 외교관 도다백작의 미인부인과 스캔들을 뿌린 일은 유명하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했던 로쿠메이칸시대 역시 일본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여 1887년 9월 이노우에의 외상직 사직과 함께 쇠퇴의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리고 1941년 건물 자체를 철거해 버린다.  .   서양인들은 일본인의 서구화를 극단적인것으로 보았다. 피엘. 로치는 로쿠메이칸의 무도회를 풍자하기도 한다.   기실 일련의 구화정책은 단순히 “외국숭배”가 아니고 당시 지극히 낮았던 일본의 국제적지위에 메이지정부가 위기감을 느끼고 그 해결책으로 서양문물학습의 급격한 구화정책을 택했던것이다. 그래서 일본 종래의 기능을 했던 가치까지도 부정하면서 서구적 신가치를 긍정하며 서양과 일본의 갭을 메우는것이 일본인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간주했던것이다.   이리하여 20년후 일본은 마침내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때까지 조선은 여전히 “잠자는 은둔의 나라”, 청국 역시 “잠자는 사자”를 답습하고있을 때였다.
162    (76) 중한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댓글:  조회:4102  추천:31  2016-03-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6) 중한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김문학   백여년전 중한일 근대사궤적을 조감하면 3국의 근대화 성공여부의 선로가 선명히 부상한다. 중국과 한국은 늘 자부감을 느낄 정도로 “문”의 사회였고 일본은 반대로 “무”의 사회였다는 점이 일목료연히 알린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핵으로 구성된 “문인”에 의한 문치사회와 전통적상무정신의 핵으로 이뤄진 일본의 무치사회는 지극히 대조적인 사회 및 문화패턴이였으며 그 가치관, 행동양식은 역시 대조적으로 이질적양상을 로정했다.   그런데 필자가 불가사이하게 느낀것이라면 지금껏 중한일의 이 대조적인 문, 무 세계에 대해 중국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문”이 한수 우이고 우수한 반면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문화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렬세로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근대 중국과 한국이 야만의 무사에 일시 패배한것에 지나지 않다고 오만해지며 문의 문화가 왜 무의 문화에 패배했는가 그 원인규명의 자아성찰은 거의 루락돼있다.   필자가 동아시아근대사 해독작업에서 재발견된것은 우리가 일본 무사문화를 그냥 “야만, 잔혹, 폭력”이라고 랭소적인 경멸로 일축할 사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언이페지하면 근대 조선, 청국이 경시하던(지금도 변함없음) 무사문화의 그 실속을 모르고 그것에 패북당한것이다. 이것은 근대 중, 한이 일본에 근대화경쟁에서 지게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 21세기의 진로에도 이 원인에 의해 중한일의 미래가 규정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의 행동양식, 가치관은 무엇일가? 력사에서 로정된 그 양상을 정리하면 그것은 “실무성”과 “혁명성”으로 귀추할수 있다. 우리가 늘 얕잡아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낱말로만 일축할수 없는 근대적원리가 일본의 무사문화속에 내재해있다.   이에 비교해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것이 중국과 한국의 유교정신을 토대로 한 독서인, 지식인 즉 문인문화의 “공론성(空論性)”과 “문약성”으로 귀추되는 행동양식, 가치관이며 항상 앉아서 쉽게 안이하게 이루려는 비생산적인 발상이다. 일본무사가 늘 칼을 거머쥐고 생활의 현장에서 행동적인것에 반해 중, 한의 유교신사, 선비는 늘 붓을 쥐고 탁상에 앉아 론쟁을 즐기며 생의 현장에서 행동, 실천은 기피해왔다. 생각만 하고 행동은 결여했던 치명적인 결점 즉 행동력과 혁명력의 결여 그것이였다.   상대로 일본의 무사계급은 사고한 뒤 그 플랭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이 신속히 따랐던것이다. 상징적인 력사인물을 들어보자. 서양의 충격에 의해 개국을 하게 되는데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 행동양식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등 지식인이며 무사인 그들은 당시 서양렬강에 통용된 국제법저작 《만국공법》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권총사격술도 익숙했다. 이렇게 국제지식과 실용적인 무기사용을 직접 장악할만큼 실무정신이 뛰여났다. 그러나 청국의 지식인들 즉 문인들은 책만 붙들고 탐독하면서 론쟁설전을 벌이기를 즐겼다. 위원, 엄복, 강유위 누구하나 실무적인 권총을 손에 쥘 생각조차 못했다. 조선의 선비들 박규수, 김윤식 등 당대 일류의 지식인 역시 사대주의적 공론에 치우쳐 부전의 양류체험을 거치면서도 실용적인 “무”가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제기하지 놋했다.   과거제도의 시스템에 의해 문화력을 과시해온 문인지배인 중국에서는 청말 문인관료가 2만명, 무관 7,000명이였으며 총지방관원수가 200만도 안되였으나 이 소수의 문인엘리트사회가 4억 남짓한 인구를 지배해나갔다. 당시 일본은 3,300만 인구에 무사계급 189만의 방대한 체계로 일본 전체를 지배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중국의 문인관료계급은 상대적으로 작은 수자였지만 독립자주할 필요없이 매판무역에 의해 국가의 봉록으로도 윤택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만으로 전 무사계급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무사들은 경제, 산업개혁에 지대한 열성을 보이며 서양의 모방과 함께 “물건만들기”제조업에 힘을 기울인다. 원래 실무정신이 강한 그들은 부국을 강병의 토대로 하여 식산흥업에 혼신을 다한다. 1892년 일본 산업, 기업수는 3,065개, 총투자수는 1억 6,371만원에 달한다. 그런데 청국은 “양무운동”은 1860년에 시작해  산업의 수자, 투자수에서 일본의 규모에 비교가 안된다. 1894년 통계에 따르면 제조기업이 15개, 총투자수가 2,796.6만원이다. 양무파와 민간기업수나 투자액에서 일본과 전혀 견주지 못할 저수준에 머무렀다.   무인계층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대 중국의 유신은 실무정신과 혁명성에서 모두 일본을 뒤따를수 없을만큼 박약했다. 일본의 근대 공업의 “물건만들기”제조업적인 실무형에 비해 중국의 경제모델은 과잉로동력, 인재, 기술 부족하에서 “배(船)를 만들기보다 배를 사는편이 낫고 배를 사기보다 빌리기가 낫다”는 안이한, 쉬운 사업원리를 고안해냈다. 그리하여 자기민족의 기간산업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경제산업의 현대화는 “그림의 떡”에 그쳤다.   사실 따져보면 백년이 지난 오늘도 이같은 기업원리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개혁개방 40년이 되오도록 방대한 민족기간산업이 축적, 형성되지 못하고 세계의 기업을 위해 알바를 하는 “세계공장”이란 한계를 안고있다.   그리고 근대 문인계급의 혁명, 개혁에서도 혁명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귀족계급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일본의 무사들은 새로운 서양관념과 기술에 그 실무성과 혁명성을 발휘하여 익숙히 수용하여 과학과 사상을 토대로 한 근대화모델을 터득한다. 그들이 우선 목을 벤것은 자신들의 목이였다. 혁명의 목표도 뚜렷했다. 중국과 조선은 다같이 문인계급의 결정적인 결함으로 근대혁명은 산업면이나 사상면, 사회면에서도 성사시킬수 없었다.   근대 중한일의 성공여부는 사실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됐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가지 문화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비교, 분석, 성찰할 의미는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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