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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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5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댓글:  조회:6568  추천:42  2014-05-0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김문학            1, 일본에 2, 이등박문이란 사람이 3, 삼천리금수강산을 4, 사방에서 바라보고 5, 오적을 매수하여 나라를 앗아갔기에 6, 륙연발권총으로 7, 칠발 쏘아서 8, 팔도강산을 다시 찾으니 9, 구사일생의 왜놈들은 10, 십만리밖으로 뺑소니치네.   한국통감으로 사실상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할빈역두에서 조선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조선인들이 지어불렀던 수자풀이노래였다. 한국통감 이토의 지배에서 받았던 그 울분의 한을 이렇게 민중들은 풀었던것이다.   “한국통감부 통치의 명과 암”에서 기술했듯이 1905년 제2차 일한협약(日韓協約,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한다. 당시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보호정치가 시작된다.   최근 한국과 일본 및 서양학자들의 연구(한명근, 이토 유키오, beasley)에 따르면 이토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하여 “자치육성정책”을 실시하며 일본이 실권을 쥔 지배방식을 시도했다. 따라서 그는 의도적으로 한국인에게 친한(親韓)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썼다.   《대구물어(大邱物語)》(가와이(河井朝雄), 1929)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일본전권대사로 한국에 온 그는 한성근처의 안양에서 유렵을 즐긴적이 있다. 프록코트를 입은 이토는 백발이 성성한 한국의 농민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천진란만하게 담화를 즐겼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같이 한복차림으로 로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 행동에는 자신이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일본과 한국은 한집안이라는 정치적은유가 숨어있다.”(최재묵)   《이등박문전(伊藤博文傳)》(춘무공추송회(春畝公追頌會.1940)에 그가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1906년 1월 이지용, 박희병 및 그들의 부인들과 나란히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이토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서 이토의 왼쪽 앞줄에 앉은 녀성이 이토의 부인 우메코(梅子)인데 역시 한복차림을 하고있었다.   한복이 한민족 전통의 상징이며 민족의 심벌이기도 하다는것을 이토는 숙지하고있었기에 그는 한복을 입고 한국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표상을 적극 자작하였다. 그의 각종 전기, 회상기를 섭렵해보면 이토는 명예욕과 자부심이 유난히 강했는데 자기현시욕과 그 표현력이 강한 성격의 인물이였다.   금전욕에는 담박했으나 색욕과 현시욕에는 출중했다고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자연히 그런 이토가 한복차림으로 자신의 “친한(親韓), 지한(知韓), 애한(愛韓)” 표상수립에 적극 자작자연했을것이리라. 영남대학 최재묵교수의 말을 빌면 “한복을 입은 이토의 행위는 한국의 제도나 전통을 존중하며 일정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시늉)였다. 그것은 한국 민심향배(向背)에 부심한 일종의 계산된 정치적연기이기도 했다.”   “한복차림의 이토”, 문인답고 선비다운 풍모를 1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느낄수 있는 사진이다. “한국침략의 선두주자”란 한국 교과서의 기술은 맞다. 그런데 침범하여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구체적내용에 대해 우리 자신도 모호하다. 그리고 “극악무도”의 인물이란 평은 사실과 어긋난다. 최근 속속 등장되는 이토연구서나 전기에 의하면 필자는 우리 동포가 표상으로 막연히 인식하고있는 이토의 인물상은 너무나 조잡하고 편향적이다는것이다.   이토가 중요한것은 한국식민의 설계자적인 위치의 대극에 있은 원쑤이기때문이다. 따라서 민족교육의 “신성한” 차원에서 이토는 반드시 “악의 상징”으로 평가절하해야 하고 지어 왜곡해도 무관하다는 태세다. 력사는 단순히 민족정서나 민족의 뜻으로 풀이되는것이 아니라는 룰을 우리는 짓밟고있다.   필자가 새로 발견한 이토의 인물상, 한일관계에서 로정된 이토는 “극악무도”로 일축할 인물이 아니며 안중근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듯 그 역시 일본의 근대를 만든 영웅적거물이며 또한 일류의 정치가, 사상가, 정략가란 당대의 대표적 인물이란것이다.   이토의 이름 박문(博文)은 《론어(論語)》의 “군자박학어문, 약지이례(君子博學於文, 約子以禮)”에서 따온것이며 문을 숭상한 문인, 시인형 정치인이였다. “문명(文明)”, “립헌국가(立憲國家)”, “국민정치(國民政治)”가 그가 노린 평생의 리상이였으며 한국통치의 정치적철학은 “일본국민을 문명의 민으로 계몽하듯이 문명정치를 한국에서 실시하고싶은것”이였다.   1906년 그는 니이토베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은 대단하다. 이 나라 력사를 보아도 그 진보는 일본보다 월등 앞선다. 이런 민족이 나라를 스스로 경영하지 못할 리유가 없다...인민이 나쁜것이 아니라 정치가 나빴기때문이다. 나라만 잘되면 인민은 량과 질에 있어서도 부족점은 없다.”(니이토베전집 5권)   이토는 한국의 기존 질서, 가치관을 되도록 존중하며 점진적 문명국으로 전환시킬 꿈을 안고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국 유교소양에 애착을 갖고있었으며 한국 유림을 활용하려했으나 한국 유교적사상이 하나의 보수사상으로 한국의 개혁을 막고있는 보수파라는것을 실감한다. 마치 중국 무술변법시 유교적인 보수파층과 같이 한국에도 중압적인 존재가 되였다. 유교에 대한 회유책을 시도했으나 드디여 실패한다. 그의 “문명화”는 유교권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채 흐지부지해진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전통과 민족성에 대해 관심을 돌려 한국에서 교육에 종사한 일본인 교사들에게 한국국민성 존중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통치구상에서 새로 발견된 메모에 다음과 같은 플랭이 보인다. “① 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衆議院)을 조직한다. ② 한국 문무량반중에서 각 50명 원로를 호상 선출하여 상원(上院)을 조직한다. ③ 한국 정부대신(大臣)은 한국인으로 조직하고 책임내각을 구성시킨다.  ④ 정부는 부왕(副王)의 수하에 속한다.”(《말송자작가소잠문서(末松子爵家所箴文書)》)   이토는 1909년 4월에야 한국병합을 인정하며 병합후에도 한국의 정치자치를 주장했으며 의회정치를 통해 한국의 문명화를 실현하여 장래 한일동맹을 구상했다고 밝혀졌다. 그런데 이토의 암살로 그의 플랭은 일편의 종이쪼각으로 남고말았다. 이토가 자신을 저격한 인물이 조선청년이란것을 알고 절명직전에 남긴 “바보같은 자식”이란 말의 뒤에는 자신의 진의를 모르고 자신을 원쑤로 저격했다는 뜻이였을가? 그뒤 합방이 정식 이뤄지고 이토의 구상과는 달리 데라우치(寺內) 초대 조선총독의 가혹하고 강압적인 무단(武斷)정치에 들어선다. 이토가 살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가? 상상으로 그 공백을 메울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이 이토의 진의를 몰랐다해도 그의 죄가 아니다. 죄는 수단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민족을 지배하려 했던 이토에 문책해야 한다.   
140    (55) 백년전 중국인이 발견한 “일본문명” 댓글:  조회:4468  추천:32  2014-04-26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5) 백년전 중국인이 발견한 "일본문명" 김문학            아놀드.J.토인비, 사무얼. 헌팅턴, 버그비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문명사가들은 일본을 “하나의 나라로서 하나의 문명권을 이룬다”고 독특한 일본론을 전개해 왔다.   일본이 중국의 주변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문명권에 귀속시킬수 없는 이질성, 독자성을 그들은 “일본문명권”으로 귀추시켰다. 1990년대 초반에 《문명의 충돌》에서 사무얼.헌팅턴은 세계를 8대 문명권으로 분류하고 일본을 중국형 유교문명권이 아닌 “일본문명권”으로 간주했다. 일본은 일본만으로 “하나의 유니크한 정신세계ㅡ문명권”을 구축했다는 주장의 계보에는 도인비, 슈펭글러, 버그비 그리고 일찍 100년전 일본에서 뼈를 묻은 라프케디오.헌[즉 고이즈미 야구모(小泉八雲)]도 있다.   그는 일본 동경대 영어교수로 부임되면서 20세기초의 일본에 매료되며 일본 녀자와 결혼을 하기도 한 인물로서 “일본통”이였다. 그는 《일본》, 《마음》(1904년) 등 저작을 통해 일본인의 내면세계, 미(美), “일본문명의 진수”를 발견한다.   같은 시기 서양인이 발견한 일본문명과는 달리 중국인은 류학을 통해 일본땅을 밟으면서 또다른 모습의 일본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지식인이 중국문명의 이질성에서 독자적 일본을 “발견”한데 반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문명의 련관성에서 중국과 동질적인 일본을 “발견”하는것이 흥미롭다.   로신은 이렇게 술회한다. “당시의 류학계에서 혁명사상을 품은 자가 상당히 있었다. 실제적으로 운동에 뛰여든 자외에 신문을 낸 자도 있었으며 옛서적을 필사하는 자도 있었다. 베낀것은 거의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금서로 내용은 대체로 명말청초의것으로서 청년들에게 맹성(猛省)을 독촉하는 계기가 되였다.”(《략담향항(略談香港)》)   일본이란 이 동문(同文)의 린국에서 로신은 “회구(懷舊)의 념을 술회하고 옛것을 생각하는 정을 발하며 조상의 깊은 령(靈)을 빛내고 대한(大漢)의 천성(天聲)을 울리고자”하는 자유를 만끽한다.   그의 동생 주작인은 아예 일본을 중국옛날이 살아있다고 한다. 《일본지재인식(日本之再認識)》에서 주작인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서 받은 감각은 절반은 이역(異域)이고 절반은 고석(古昔)이며 그것도 이 고석은 우리 나라가 아닌 이역에 건재하고있는것이다.”    주작인의 회억에 따르면 그는 동향의 선배들이 동경의 거리를 거닐 때면 늘 일본집이나 가게의 간판의 서체에서 “여전히 당나라의 유풍이 존재하는것”을 느꼈다고 한다.   100년전 중국지식인들이 일본에서 발견한 일본문명은 중국 옛 “당나라의 유풍”이 의연히 남아있고 당나라의 중국옷이 “기모노”로 그대로 보존돼있는 습속전통이였다.   그런데 더 중요한것은 일본의 가시적(可視的)인 중국풍습보존뿐만아니라 중국의 고전문헌, 자료, 사료들이 무진장하게 남아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지대한 충격을 받는다.   일본에는 중국 청국에서는 이미 실종되였거나 자취를 감춘 금서, 기서, 희소본의 고전서적들이 잘 보존돼있었다. 견당사, 견수사 이래 중국에서 가져온 방대한 량의 고전서적을 완벽히 보존하고있었다.   중국에서는 력대 왕조의 정책에 의해 금서, 분서 처분을 늘 진행해왔으며 이데올로기에 의해 서적은 늘 피해를 받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수양제의 분서 또는 청조때 중국고전문헌을 집대성한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시에도 반청적 한족의 사상이 깃든 서적을 금서로 3천종 67만권이나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전란과 자연재해로 서적의 소실, 분실, 파손이 엄중했다. 그리고 도둑이 들어 분실된 책도, 서양련합군에 의해 불살라버린 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수입한 한서책을 소중히 보관했으며 따로 필사본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이 중국보다 전란이 적었던것 역시 하나의 리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일본인은 중국서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보관하였으며 특히 한적한 절에다 보존했다. 보존의 천재인 그들은 필사를 할 때는 좋은 일본지를 골라서 베꼈으며 진흙과 대나무로 쌓은 쿠라(일종의 창고)에 보존했는데 불, 물, 습기에도 강한 쿠라는 좋은 보존고였다.   1880~1890년대 일본에서 발견되는 중국고전서적을 찾아서 중국의 지식인들이 일본에 몰려들었다. 하여장을 따라 일본공사로 된 유명한 황준헌은 일본이 중국고전의 보물고라는 발견에 경악하며 적극 발굴, 구입하기도 한다.   제2대 일본공사 려서창(黎庶昌)은 부하이며 지식인인 양수경(楊守敬)에 명하여 수년간 일본에 산재한 고전을 발굴, 수집하게 한다. 그는 《고일총서》란 제목으로 그 책서목을 집결했다. 그리고 4년여동안 당, 송시기의 귀중본, 문헌자료 3만권이상이나 구입했다. 그중에는 《주역》 6권, 《상서자전(尙書子傳)》 잔본 5권, 《고문상서(古文尙書)》 13권, 《례기(禮記)》 20권이 포함된다.   유명한 지식인 동강(董康, 1867~1947)의 일본 방서(訪書)행적은 많은 업적을 쌓았다. 관료, 정치가, 법학가인 그는 량계초와 예전에 《시무보(時務報)》를 경영한적이 있으며 유신사상가이기도 하였는데 책을 목숨처럼 사랑한 인물이였다. 그는 1902년부터 1936년사이 무려 8차례나 일본에 가서 일본에 있는 중국서적을 수집, 구입하였는데 일본의 저명한 학자 나이토고난 등 많은 지식인과 교류하였으며 고서목록학을 위해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밖에 당시 청국류학생들에게 청조가 발금한 서적들 《양주10일기(楊州十日記)》, 《가정도성기(嘉定屠城記)》, 왕선산(王船山)의 《황서(黃書)》, 황종희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은 귀중한 반청혁명지침서로 되였다.   근대 중국인의 고전서적 발굴, 수집에 대해 중국의 현대 사회학자들은 “문헌보급, 문물재현, 학술련의”에 지대한 의의가 있다고 언급한다.(趙欒)   그리고 또 하나 특기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일본 근대 사상, 서적들이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일본발 학지(學知)가 중국에 “신학(新學)”으로 수입되면서 중국 근대의 서양적문명개화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한것이다.   이 일본문명에서 발신되는 학지를 수용한데서 형성되는 중국 근대문명에 대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도하지 않다. 단지 우리가 그에 대한 인식이 결여했을뿐이지 그 영향은 안일한 정서로 덮어감출수 없다. 고대 중국이 일본을 영향준것만큼 근대 중국, 조선은 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139    (53)“문명개화”에 시작된 일본인의 육식 댓글:  조회:5052  추천:21  2014-04-1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3) "문명개화"에 시작된 일본인의 육식 김문학          메이지유신전까지 절대적으로 문명의 스승으로 모시고 수용했던 중국문명중에서 일본인이 자주적으로 결락시킨 “3대 아이템”이 있다. 그것은 거세(환관), 전족과 과거제도였다. 이 역시 일본인이 외국문명을 흡취할 때 그 좋은것만 따먹는 수용의 천재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3대 아이템” 외에 또 한가지를 첨가해야 한다. 즉 고대 일본인이 중국에서 전형적 가축을 수용할 때 중국 고전 《순자(荀子)》, 《주례(周禮)》에 있는 가축 우(牛), 마(馬), 양(羊), 돈(豚), 견(犬), 계(鷄) 이 6축에서 양과 돼지(豚)를 루락시키고 대신 원숭이(猿)를 넣어 “5축”으로 했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중국에서 수용한 12띠갓(干支)에서도 돼지띠 대신 메돼지(野猪)가 있다. 그리고 일본 화투(花札)의 칠월 홍싸리밑에 그려진 동물 역시 돼지가 아닌 무서운 긴 이빨을 드러낸 메돼지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書記)》에도 돼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속일본기》에도 천황이 돼지사양을 가르쳤다는 기사가 등장되지만 실제적으로 돼지를 비롯하여 소, 양 등을 육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에도시대에 와서야 돼지가 중국에서류구(琉球)를 거쳐 사츠마에 전해진다. 사츠마지역(일본 서남부)에서는 양돈과 함께 돼지고기를 먹었던것으로 추측할뿐이다.   일본인이 고대부터 육식을 기피하거나 절제한 대신  그들은 스스로 미(米)식과 “채식민족”으로 칭할 정도로 거기에 고집해왔다.   중국인과 한국인에게는 인류학적으로 기마민족, 목축업민이 혼혈되여 육식의 력사가 유구하며 어렸을 때 돼지 멱따는 장면이나 소를 죽이는 도살장면은 가끔 본 체험을 갖고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인에게는 가축도살장면은 볼수 없었다. 돼지와 소를 잡아먹는 일이 농촌에서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만큼 목축문화는 일본인에게 익숙한 문화가 아니였다.   일본의 육식은 근대 서양문명의 도입에서 시작된다. 한마디로 말해 서양인의 건장한 체격과 투지는 육식(소고기)에서 기인됐다는 인식이 있었던것이다.   1872년 궁중에 소고기가 납입되여 궁중주도형 육식이 스타트를 뗀다. 오츠카(大塚滋)박사에 따르면 1862년 요코하마 선술집을 경영하던 이세(伊勢)라는 남자가 소고기냄비탕집을 경영하여 육식제1호이라고 한다.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젊은시절 오사카에서 무나카다(緖方洪庵)의 서생으로 있던 시절 소냄비탕집주인이 돼지를 죽일 때 돼지다리를 붙잡았다는 일화를 회술한다.   당시 짐승을 죽이는것은 잔혹한 행위이며 가축을 살생하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고가 일본인들속에 강유력히 존재했다 한다.  1872년 궁중에 소고기가 납입되여 궁중주도형 육식이 스타트를 뗀다. 오츠카(大塚滋)박사에 따르면 1862년 요코하마 선술집을 경영하던 이세(伊勢)라는 남자가 소고기냄비탕집을 경영하여 육식제1호라고 한다.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젊은시절 오사카에서 무나카다(緖方洪庵)의 서생으로 있던 시절 소냄비탕집주인이 돼지를 죽일 때 돼지다리를 붙잡았다는 일화를 회술한다.   당시 짐승을 죽이는것은 잔혹한 행위이며 가축을 살생하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고가 일본인들속에 존재했다 한다. 그러나 소고기는 “문명의 약”이였다. “천효만능의 쓴 약을 먹는것이 이 소고기탕을 한냄비 먹는것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류행했다.   나가사키나 사츠마에서는 돼지고기도 소고기의 류행과 함께 대거 육식으로 보급됐다.   “육식은 문명개화의 심벌”로 굳어진다. 1877년 신수도 도쿄에서는 “소고기육식은 천자의 식탁에서 아래로는 인력거군의 립식(立食)에 이르기까지 상하사회의 류행이 되였으며 오로지 소고기가 귀하고 이것을 먹는 일이 날로 성해졌다.”(《로문진보(魯文珍報) 》)   당시 궁중은 물론 일본에서 육식의 일반 코스요리로서가 아니라 소고기냄비탕이 주체였다. 그것은 지금의 스키야기(불고기)와 비슷했다.   《동경번창기》에는 일본인이 급격히 소고기를 선호하고 소고기를 문명으로 받아들인데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소고기는 인간에 대해 개화의 약방이고 문명의 량제(良劑)다. 그 정신을 양성하고 그 위장을 건장히 하며 그 혈맥을 도와주고 그 피육을 비(肥)하게 한다…”  메이지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초년에 이른(1911~1915)사이 일반 일본인의 평균 육류소비량은 3.6그람이였다. 당시 “부국강병”의 슬로건아래 륙군은 인평균 매일 50그람, 해군은 160그람 정도의 육류를 부식으로 소비했다고 한다.(사바다토요유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렇게 많은 량이 아니였다. 또한 육식은 “서양풍”이 아닌 일본식으로 아렌지한 “샤부샤부”(소고기냄비) 등이 위주였다.   영양학시각에서 보아 육식이 일본인에게 진짜 영양을 공급한것은 제2차세계대전후였으며 전후 경제부흥과 경제고도성장기인 1970년대에 이른 식생활의 서양화가 강력한 용수철이 되였던것이다. 1980년대에는 영양과잉으로 됐으며 현재 일본인의 평균신장(身長)이 중국과 한국을 추월하여 다시는 “소일본(小日本)”이 아니다.   소고기육식과 함께 우유 역시 일본 문명개화의 하나의 식문화아이템이였다. 1853년 미국의 총령사로 일본에 온 하리스는 “일본에는 아직 우유마시는 습관이 없으며 양우 역시 농경이나 운반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1863년 미국의 무역사무관 라이스가 혹카이도에서 유우(乳牛)로 일본인에게 착유법을 가리킨다.   1870년 동경에서 야마카다(山縣有朋) 등 정부고관이 목장경영과 착유법을 개시하며 1873년 《우유착취인심득규칙》이 동경에서 발포된다. 그리고 우유배달도구로 석으로 도금한 부리키깡통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1882년에 우유에 당분을 넣은 콘텐츠밀크제조에 성공하여 우유소비량이 급속히 증폭되여 전 일본에 보급된다. 1900년대초에는 각지에 밀크홀이 서고 커피와 함께 우유를 많이 소비하게 된다.   이렇게 일본의 문명개화에 성급한 정부에서는 구미문명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 육식을 장려하고 우유섭취를 창도하여 일본인의 서양화에도 박차를 가해갔다.   일본의 육식은 정치에 좌우지되였으며 국민들 역시 양고기를 안먹는 “온순한 양”처럼 정부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였다.  “문명개화”의 근대적정책이 일본인에게 갖다준 식문화의 혜택은 육식과 우유의 정착이였다.  
138    (52) 근대 국기디자인에 숨겨진 력사문화 댓글:  조회:4777  추천:32  2014-04-0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2) 근대 국기디자인에 숨겨진 력사문화 김문학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는 근대의 산물이다. 아시아의 국기는 역시 서양의 웨스턴인팩트로 자신의 나라를 상징하는 로고표징을 기발에 담았는데 타국과 이질된 자국의 아이덴티티의 표상이였다.   근대 일본의 국기가 1870년에 일장(히로마루)로고로 탄생된데 비해 조선은 1880년까지 국기가 없었다. 근대 국제의 관례로 한 나라의 상선, 군합 등이 령해나 타국의 령해를 지날 때 반드시 국기를 게양하는것이 있으나 조선은 1875년 강화도사건때 조선의 “개국”을 목적으로 침범한 일본군함 운요(雲楊)호가 달고있던 일장기의 의미를 잘 몰랐다.   한국의 사학자이며 성공회대학 교수 한홍구는 “태극기는 정말 민족의 상징인가”라는 글에서 “조선은 원래 국기가 없었다. 그러니 일본이 일본국기를 단 운요호에 조선이 발포한것을 문제삼는것을 리해할수 없었다.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 조선은 문호개방을 강요받았다”고 지적한다.(《대한민국사》2003)   조선에서 국기제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론의된것은 1880년 일본에서 귀국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주일공사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오면서부터라고 한다. 이 책에 로씨야의 침습을 막기 위한 조, 청의 련합을 강조하면서 최초로 조선 국기도안에 대해 언급, 청국의 속국이라는 점을 현현화시키고자 청국의 룡의 도안을 사용하자고 권장한다. 그뒤 리홍장은 조선정부에 청국의 황룡기를 쓰되 룡의 발톱을 하나씩 적은 4개짜리 룡을 그리라고 했다.   1882년 4월 청의 마건충(馬建忠)과 김홍집이 회담하였는데 그 필담내용을 기록한 《청국문답》에 따르면 마씨는 조선인이 즐기는 백색과 관리복인 청색, 왕복의 적색을 고안하여 “백저청운홍룡(白底靑雲紅龍)”도안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마씨는 흰 바탕에 태극도안을 사용하고 주위에 8괘를 첨가하는것이 좋다고 권장했다.   회담 7일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는데 제물포조약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대관을 파견하여 사죄하게 된다.  박영효의 《사화기략(使和記略)》에 따르면 일본으로 향한 배안에서 조선주재 영국 총령사 애스턴과 선장 제임스가 박영효에게 조언을 한다. 이에 따라 8괘에서 간단명료하게 4괘는 빼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 남겼다. 이렇게 태극기가 일본행 배안에서 탄생한다.   8월 14일 코베에 도착한 그들은 숙박지에다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22일 태극기의 제정을 본국에 보고한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 발행의 《해상국가의 기발》이 2004년에 발견되였는데 그속에 박영효 이전에 이미 태극기가 있었다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아무튼 한홍구교수의 말을 빌면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국적의 배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여난 조선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전에 일본에 나붓기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것이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근대국가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외세가 깊게 개입했을뿐아니라 그 내용도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이 아닌 중국의 〈주역〉에서 빌린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한교수는 한탄한다.   근대 중국의 국기는 어떠한가? 근대 중국사의 변천을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국기만큼 대표적인것이 있을가? 청나라의 국기는 주지하는바 황색바탕에 5개 발톱의 천자를 상징하는 청룡이 붉은 해를 삼키는 모양이 디자인되여있다.   그러다가 1906년 국민당의 전신인 손문의 중국혁명동맹회가 그 전해(1905) 동경에서 탄생하여 “청천백일”도안을 장차 설립될 중화민국의 국기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때 황홍은 일본의 일장기와 류사한데다 너무 단조롭다는 리유로 반대했다. 그리하여 류영복(劉永福)의 안해가 고안한 국기원안의 하나를 참고하여 손문이 붉은 바탕을 첨가하여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을 완성시켰다. 최초로 청천백일을 고안해낸 창안자는 손문의 동료인 륙호동(陸皓東)이였다. 그는 혁명봉기초기 광주에서 희생하였다.   1919년 성립된 중국국민당 당기로 제정되면서 청천백일은 1925년 최초의 국민혁명군의 군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1912년 중화민국건국후 림시 대총통으로 된 손문은 “청천백일만지홍”을 국기로 채용하려 했으나 림시참의원에서 불통과시키고 대신 예전 청나라 해군기를 기본으로 5색기(적황청백흑)를 국기로서 통과시켰다. 결국 “청천백일만지홍”은 민국 해군기로 채용되였다. 그리고 5색기는 1931년 만주국설립시 만주국기로 채용되면서 중국 국기는 복잡한 경유를 겪게 된다. 1928년 장개석남경정부때 다시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국기로 된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전통적국기를 일소시키고 5성붉은기를 중국 정통의 국기로 한다. 한편 대만에서는 여전히 장개석 전래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국기”로 되고있다.         중국은 조대교체가 근대에도 빈번했으며 번마다 전조대를 철저히 부정하는 “역성(央姓)혁명”의 양식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국기 역시 빈번히 바뀌고 갱신되는 양상을 루정한것은 그 력사의 변천을 그대로 상징하였다.   일본의 히노마루, 일장기는 세계에서 제일 심플하고 명료한 로고로 알려져있다. 흰바탕에 붉은 해.  근대 이후 아시아침략시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나붓긴 네거티브한 기억으로 아시아인에게 인상은 역시 좋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있어서 일장기는 자신들의 국가적상징이며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수나라 황제에게 보낸 사신에서 당시의 성덕태자가 “해뜨는 곳의 천자”라고 밝혔듯이 “일본”이란 “태양이 뜨는 나라”였으며 태양에 대한 일본인의 신앙은 지대했다. 645년에 이미 일장기가 등장하며 1635년대에 히노마루기발이 사용되였다. 1854년 일미화친규약체결시 일본의 표식으로 선박에 달기도 했다. 이것이 국기의 탄생인데 서양인들은 당시 편지봉투를 밀봉하는 빨간 밀랍 같이 보인다고 비웃기도 했다. 1870년 2월 27일 국기로 제정되며 2월 27일이 “국기의 날”이다.   근대 한중일 국기의 배경에는 그 력사문화가 숨겨져있다. 일본의 죽 전승해온 문화력사의 일직선양상이 그대로 고대의 심벌마크가 수백년을 내려오면서 국기로 되였고 한국은 외세에 끼인 력사체험과 같이 외세에 의해 국기가 제정된다. 중국은 전란과 정부의 교체가 빈번했듯이 국기의 변동도 빈번했다.   국기가 상징하는것은 그 나라의 걸어온 력사와 문화이다.  
137    (51) 일한 근대의 "기폭제"가 된 한권의 중국책 댓글:  조회:4084  추천:19  2014-03-2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1) 일한 근대의 "기폭제"가 된 한권의 중국책 김문학          근대사에서 발견되는 한가지 사상(事象)은 “근대”라는 이미지, 표상이 중한일의 3자가 각기 이질적이라는것이다. 근대(modern)라는 말에 일본에서는 메이지시대의 “문명개화”란 4자숙어를 떠올리면서 하이칼라, 양복, 로쿠메이칸(鹿鳴館), 양풍건축에 철도, 과학, 학교 등 탐욕스레 흡취한 서구문명과 자본주의시스템은 풍요와 흡족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않다. 아편전쟁의 패북으로 시작된 “근대”는 굴욕적인것과 함께 네거티브한 이미지가 우선 떠오르며 서구렬강의 침략과 식민화의 억압에 신음해야 했던 기억은 육중하고도 암울하다. 한국 역시 중국과 거의 비슷한 “근대”이미지로 뇌리들속에 깊숙이 각인돼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되는 아시아의 근대사, 또 하나 “발견”되는것은 아편전쟁에서 서양렬강의 근대문명에 굴복해야 한 충격은 당사자인 청국인이 아니라 되려 바다건너 동쪽에 있는 섬나라 일본인들이였다는것이다.      굴욕적인 《남경조약》으로 반식민지로 전락됨에도 불구하고 중국근대사연구 제일인자 서중약(徐中約)의 말대로 “아편전쟁은 중국인을 각성시키지 못했으며 중국인 스스로도 자신들의 후진성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명한 “림측서도 적과 대항할 기회가 있는데도 사임당한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패북정보는 당시 나가사키에 있는 중국상인들의 “풍설서”를 통해 이내 전달된다. 일본 바쿠후와 지식인, 일반대중에 대한 충격은 지대했다. 필자가 접한 당시 1849년에 출간된 아편전쟁을 기술한 저서 《해외신화(海外新話)》[무네다(嶺田楓江)]를 비롯해 《해외여화(海外余話)》 등은 그야말로 경이로울만큼 전쟁의 일화, 내막 등 정보가 듬뿍 실려있다. 당시 이런 책들은 일반서민들까지도 애독했다고 한다.       물론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으며 요코이 코난(橫井小楠), 사이토(齊藤竹堂), 사토오(佐藤信淵), 타카시마(高島秋帆) 등 당대 수일의 학자들이 저서를 펴내 아편전쟁의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일본 역시 교훈을 섭취하여 해방(海防)을 강화하고 서양제국의 식민지화에서 리탈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높이 주장한다.   1842년 사쿠마(佐久間象山)는 《해방8책(海防八策)》을 제출하여 청국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자고 창안하며 타카시마는 정부에 포술을 개진하고 해방(海防)강화의 구체안을 제출한다. 그리고 청국병이 패한 리유는 공론(空論)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섬나라근성”의 특징의 하나가 곧 천생적인 “위기의식”이 강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필자가 근대사를 읽으면서 재발견한것은 이같은 위기의식은 일본인의 “정신적구조”의 하나이며 평화시기인 오늘도 “위기설”은 지식인과 대중사회에서도 끊이지 않는것이다. 지금도 매년 홍수같이 쏟아지는 “일본위기설”의 저서가 서점가를 달구는 실례가 곧잘 그것을 립증한다. 이것은 또한 중국인의 태평한 “형세대호(形勢大好)”적 무경계의식과 대조적이다.   당시 일본 전국이 아편전쟁에서 충격을 받고 서양의 침식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는 해방(海防)의식이 팽배해진데는 하나의 특기해야 할 기폭제가 있은것이다.   그 기폭제로 된것이 바로 청국의 위원(魏源)의 명작 《해국도지(海國圖志)》란 책이다. 아편전쟁의 패북으로 인해 정부는 대응이 미미했지만 그래도 소수의 개명적인 지식인이 세계에 개안하고 서양지식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당시 1841년 여름 림측서가 파면되여 신강 이리쪽으로 좌천되면서 자신이 수집번역한 육필원고와 서양자료를 벗인 위원에게 맡기면서 연구하여 꼭 신저작을 써내라고 당부한다.   청말 일류의 사상가, 사학자답게 위원(1794~1857)은 림측서에게서 받은 《사국지》를 바탕으로 수집, 연구를 가하여 1842년 12월 《해국도지》 50권을 탈고, 인쇄출판한다. 1847년에는 60권으로, 1852년에는 전간 100권의 대작으로 보완시킨다. 책의 내용은 세계 5대주 수십개 나라의 력사지리지식과 해방(海防)전략전술 및 서양조선, 조포기술에 관한 론술과 도설 10여권이 포괄된다.   근대 중국인이 쓴 최초의 력사지지저작으로서 “서양의 장기로 서양을 제어하는(師夷之長技以制夷)” 사상이 돌출히 로정돼 있었다.   그무렵 같은 맥락에서 복건성 순무 서계여(徐繼LI)가 편찬한 《영환지략(瀛環志略)》 10권도 출간되였다.   그러나 위원의 이 위대한 저작은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지만 일본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의 오오니와(大庭修)교수에 따르면 《해국도지》가 일본에 수입된것은 1851년인데 1859년에는 그 지명도로 수입이 대폭 증대하여 일본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이 책을 앞다투어 번역, 출간, 평론하며 1854~1856년 3년사이에 출간된 각종 판본의 《해국도지》가 42종에 달했으며 이는 일본출판사에서도 전례없는 다양한 판본의 양상을 보였다.   이 책은 일본지식사회에 지대한 충격과 함께 귀중한 “보물”로 추대됐고 그들의 시야를 넓혔으며 바쿠후말기 해외리해의 문화지도, 길잡이로 되였다.   일본지식인들은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웨스턴 인팩트(서양충격)하에 서양사정 리해와 함께 중국아편전쟁의 교훈으로 “해방”의식을 키웠다. 바쿠후말기의 저명한 사상가, 개국론의 창시자인 사쿠마조잔은 《해국도지》를 읽고 공명을 일으키며 “위원이야말로 나의 해외의 동지로다”고 감탄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한 메이지유신의 선구적 사상가, 혁명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사쿠마의 학생이기도 한데 그는 1855년 위원의 책을 탐독하고 크게 개안하며 감동받는다.   근대의 길목에 들어선 일본에 《해국도지》는 근대화의 길잡이로 되였으며 바쿠후말기 유신사상형성에 큰 기폭제가 되였다. 일본의 식자들은 《해국도지》는 일본을 서구렬강의 식민지화전략의 위기에서 구해준 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근대 조선에도 1845년 《해국도지》가 조선의 사자를 통해 국내에 류입했는데 당시 조선지식인의 지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세계인식 및 국가의식확립에 기여한다. 실학파 거두인 박계수는 이에 대해 보배로 여기며 그의 제자들에게 읽도록 추천한다.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 리더들도 이 책을 통해 세계인식에 개안하게 된다. 그리고 황준헌의 《조선책략》도 조선지식인에게 읽히면서 지대한 충격을 주게 된다.   중국내에서는 사실 큰 주목을 못받은 위원의 《해국도지》는 주변의 일본과 조선에 큰 영향을 과시하면서 근대에서 서양을 대응하는 지침으로 된 사실에서 근대 동양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찾을수 있다. 또한 근대화대응에 지연된 중국의 세계인식수준과 양상이 재발견되기도 한다.   
136    (50) “인간”과 “자아”의 발견 댓글:  조회:4723  추천:12  2014-03-0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0) “인간”과 “자아”의 발견 김문학           동아시아 근대를 해독(解讀)하면서 필자는 최근 하나의 작은 “발견”을 했다. 그것은 중국에 근대에도, 현대에도 “인격(人格)”이란 단어가 사전에 없다는 사실이다. 1840년 출간된 고대낱말을 대집성한 《사원(辭源)》에도, 1980년 새로 출간된 대표적 중국어사전인 《사해(辭海)》에도 찾아볼수 없다.   왜 없을가? 중국어권에서는 “인격”을 왕왕 한자적의미로 “인품”, “인간의 품격” 등으로 안이하게 리해했기때문에 “인격”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버렸거나 내지는 착각하여 인품, 성품의 동의어로 인식했던것이다.  “인격”은 서양의 산물로서 영어로는 “personality” 즉 퍼서낼리티이다. 우리에겐 란삽한 용어이긴 하지만 그것은 문화인류학에서 인간의 성격, 심리특징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며 개성, “개인의 존재적 상태”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독립적 개성을 갖고있다면 그 인격은 건전한것이며 그것을  “독립적인격”으로 칭하고 그와 상반되면 “의존적인격”으로 개인적인격의 미숙, 미완성상태로 리해한다.   인격이 중격에 수용된후 흔히 문자의 뜻을 취하여 그냥 막연하게 “인간의 품격”으로 동등화시켜 도덕적가치판단의 척도로만 간주하였으며 그가 가진 본래의 의미를 망각해버렸다.    근대 동아시아 정신사, 사상사를 조감하면 중국과 일본, 한국은 거의 동시기에 독립적 인격, 개성을 가리키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며 “자아”에 개안하게 된다.   1907년 일본에서 류학하던 로신은 일본어를 통해 서양사상을 수용하면서 인간의 개성, 독립성격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해 그는 “문화편지론”이란 론고에서 이렇게 밝힌다. “정신현상은 인류생활의 극치이며 이것을 발휘하지 못하면 인생의 미완성이다. 개인의 인격을 펼치는것이야말로 인생의 제일덕목이다.” “우선 인간을 수립해야 하며 인간이 서면 일이 거사될수 있다. 개성을 견지하고 정신을 발양하는것이 중요하다.”   1910년이후 특히 5.4신문화운동은 과학과 민주와 병행하여 인간의 발견에 따른 “개성해방”을 창도한다.   신문화운동의 또 하나의 기수였던 진독수는 《1916년》에서 중국국민에게 독립인격이 결여하다며 청년들에게 “개인의 독립자주적 인격을 준중하고 타인의 부속품이 되지 말자”고 호소한다. 그가 《신청년》발간 권두언에서 제기한 6대 희망사항의 첫번째 항목이 바로 “노예적이 아닌 자주적 인격”이였다.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해방 운운하는것인즉 노예의 기반(굴레)에서 리탈하여 자신의 자주자유적인격을 완성하는것이다. 내 수족이 있으니 스스로 의식을 해결하며 내 구설이 있으니 호악을 말할수 있으며 내 심사(心思)가 있으니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절대로 타인의 도마에 오르지 않고 노예로 되지 않는다. 자신이 독립자주의 인격이 있다면 모든 소행, 권리, 신앙은 자신의 처신대로 하며 단연코 타인에 예속되고 맹종할 도리가 없다.”    문호 로신은 1907년께 스스로 창도한 “인간”, “독립적자아”를 유럽근대문명의 배후에서 그 “정수”로서 포착했다. “인간”의 발견에 따라 그는 “인간”은 “다수”와 “물질”의 지배를 극복하여 “개성”과 “자아정신”을 회복하는것으로서 비로소 “인간이 수립(立人)”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모두 “인간”으로서 “서”며 공동된 “인간의 나라”를 창건하여야 중국도 처음으로 세계에 설수 있다고 그는 사색한다.    10년후 《광인일기》가 창도한것이 바로 그의 “립인(立人)”사상이였다. 근대 중국문학사에서 “인간의 각성”은 5.4의 반전통주의의 본질이며 그시기 계몽주의의 특징을 로정했다. “인간의 발견”은 당시 최하층의 인간들, 이를테면 녀성, 아동, 농민에 눈길을 주면서 그들의 “해방”을 창도한것이다. 이것은 또한 같은 맥락에서 로신의 동생인 주작인이 주장한 “인간”의 발견으로서의 “인도주의”, “인간존중”에 이어지면서 근대 중국인의 인간성립에, 인격성립에 지대한 힘으로 밀어준다.        1910년 8월, 일본의 魚住影雄은 평론 “자기주장 사상으로서의 자연주의”를 발표하면서 어설리티(권위)를 “국가”와 “가족”에서 찾으며 청년들의 자아확장의 공통의 적이라고 지적한다. 일청전쟁후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은 이 권위를 거스르는것을 통해 근대적 “자아”의 창출을 시도하고 고민했다.      유명한 근대시인 이시카다 다쿠보쿠(石川啄木)는 평론 “시대적 페속의 현상태”에서 魚住의 론점을 비판하면서 청년들이 이 시대적페쇠에서 탈피하려면 “국가”와 싸워 자아, 독립한 개인의 자유를 신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근대 민주주의적 사회관계는 독립한 개인의 자유, 평등한 관계로서 리념화되였으며 개인의 권위가 향상되였다.      따라서 자기에 대한 인식은 주체화, 내면화를 통해 행해졌다. 일본은 당시 전쟁의 세기에 돌입하면서 국가와 가족의 기존질서가 전례없는 권위와 중압으로 개인에 덮쳤으며 자아와의 사이에서 심각한 불협화음 또는 충돌을 양성하였다.     특히 일청전쟁을 겪으면서 국가, 국민국가의식이 팽창되였고 1904년 이래 청일전쟁시기에 국가주의에 일체 개인을 영합, 희생시키는 “개인무시”, “자아억압”은 절정에 이르기도 한다. 또한 언론자유에 대해 통제가 강화되고 국민의 전쟁에 대한 불만이나 비전론 등 언설은 철저하게 탄압, 통제가 행해졌다.    전쟁후 동아시아의 정신, 지적 결절환으로서 일본에서 발한 근대 사상, 의식은 신조어와 함께 청국, 조선에 련쇄현상을 일으키며 아시아는 인간과 인격, 자아실현에 각성을 이루게 된다.
135    (49) 한국통감부 통치의 명과 암 댓글:  조회:4399  추천:17  2014-03-0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9) 한국통감부 통치의 명과 암 김문학              100년전인 1905~1910년사이 10년간을 한국의 통치자로 군림했던 한국통감부(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통치, 그것은 식민지병합직전의 조주단계 또는 준비단계라고 해야 한다.   필자가 100년전의 한중일 근대사공부를 하면서 느낀것은 거기에는 항상 우리가 상상했던것보다 더 다양한 명암(明暗)이 존재했으며 그런 명암에 대한 인식, 발견은 오늘 우리의 력사인식문제에 지대한 의의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한국통감부의 10년의 통치, 즉 이토의 한국통치에도 명암은 그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이제 문제시해야 한다.                                                이토가 초대 한국통감으로 한국에 부임된것은 1906년 3월 2일이였다. 통감은 천황 직예의 권한을 갖는 직책으로 외교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한몸에 안은 절대적 권력자였다. 3월 9일 황제를 배알하고 국서를 헌상하여 28일 피로연을 성대히 개최한다. 1907년 서울 남산기슭의 외성대(현재의 예장동)에 신축한 한국통감부청사가 락성된다. 조선통치의 심벌적 건물의 탄생이였다. 화려하고 위엄있는 통감복에 훈장을 달고 검을  쥔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 사진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최근 한일사학계의 신연구에 따르면 두종류의 새로운 발견이 있다. 즉 하나는 이토는 통감으로서 래한했을 당초에는 한국을 보호국으로서 통치하여 근대화시킬 플랜(計劃)을 갖고있었으나 병합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는것, 또 하나는 1910년 8월 이토암살후의 한국병합에 따라 전개되는 사실은 이토의 병합구상플랜과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점이다.(이토 유키오)   당시 이미 64세의 고령인 이토는 장기간 정치권력의 중추에 있는 피로로 왕년의 패기가 상실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통감을 맡은 리유는 한국인들의 지지를 얻고 한국 근대화를 되도록 적은 코스트로 이룩하려고 했다.   한국 계명대교수 이성환씨는 통감부통치를 “독립과 식민지사이”의 표징으로 설정하고 이렇게 지적한다. “특히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이른바 통감부통치기(편의상 보호정치기로 불린다)는  한국 근대화와 식민지의 련관성을 사고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호국’내지 ‘보호정치’는 주의상 량의성을 품고있다. 한편으로 병합=식민지로의 리정표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독립으로의 희망을 내포하고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일본의 식민지화와 한국의 독립이란 상반되는 두 측면이 첨예한 충돌을 이룬다. 이는 명치초기이래 일본이 리념으로 들고온 한국의 근대화 내지 독립부조와 실질적 정책목표로서 추진해온 한국의 식민지화가 착종한 형태로 혼재한 양상을 보이고있다는것을 의미한다.”(《이토 히로부미의 한국통치와 한국내셔낼리즘》) 이어서 이성환교수는 “이는 이토에 있어서는 한국의 문명화와 한국의 식민화라는 상반된 현실로서 로정되는것으로 된다. 또한 이것은 명치국가 일본이 안고있는 디렌마이며 그 설계자인 이토의 자기모순이기도 했다”고 갈파한다.   이같이 이교수의 지적에서 로정되는것은 디렌마속에서 나타난 한국통감부 이토통치리념의 모순이며 그것은 현실의 명과 암을 이룩한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되는 이토의 보호기통치는 우리가 흔히 상상해온, 또는 교과서적기술의 절대적 마이너스, 악으로만 포착할수 없다는 사실이며 또한 이중적 양상으로 그것은 한국인을 억압한것이기도 했고 반대로 한국인의 독립해방운동을 촉진시킨 “상호련관성”이다. 경제, 문화, 의식, 법체계 등 면에도 “상호련관성”을 인정할수 있다.   이토의 강연,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회의”문서와 측근의 회상, 증언 및 외교문서에서 나타나는 한국보호플렌을 보면 한국의 사법제도의 근대화, 치안보전, 교육개혁, 사대주의와의 결별, 인재등용, 유교적인 공론을 개조하는것, 지페개혁, 산업발전 등 다방면에 걸친것들이였다.   그의 정치사상가로서의 력량을 과시한 정치사상은 “문명, 립헌국가, 국민정치” 이 3가지 슬로건에서 집약되며 그 자신이 동아시아 최초의 립헌국가를 세운 경험에서 한국도 역시 일본과 같은 수준의 자주독립국으로 되는것이 그가 표방해온 통치철학의 주내용이였다.   개인적으로 유교적 한학(漢學)소양이 깊은 그는 문인, 시인적인 기질의 소유자였으므로 전근대적 유교의 유학이 국가통치기구를 석권한것을 한국의 페단으로 보았으며 근대적 법치주의,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탈바꿈하기를 한국에 기대했다.   그는 이렇게 한국에 근대적 지적 향도자로서 자처하며 한국을 병합시키려는 일본내부의 급진적 사상에 반대하면서 “한국을 병합하는것은 상당히 시끄러운 일이다”고 발언을 하면서 늘 온화하고 점진적인 태세를 보였다.  이성환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897년 대한제국이후 고종의 전제군주제하에 한국의 정치사회적 페쇄상태가 지속되였다. 일로전쟁후 한국통감부치하에서 한국의 애국계몽운동이 확산되여 그 페쇄적구조가 타개되기 시작했는데 근대국민국가의 설립을 겨냥한 계몽운동은 전제군주제를 약체화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통감부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시킨 효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통감부는 계몽운동이 반일을 창도하지 않는한 그것을 억압할 리유가 없었으며 신문언론에 대해서도 비교적 완화한 조치를 취했다. 이같은 온건한 정책은 한국의 정치활동공간을 확장시켰는바 이것은 이토가 거듭 강조한 “한국의 문명화”와 합치했던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통감부도 한국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계몽단체의 활동을 “장려”했으며 회유책을 썼다. 이를테면 1906년 3월 25일 고종이 “일진회”를 취조해야 한다는 의견에 이토는 반대한다. 이무렵 “대한자강회”는 원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 및 윤효정, 장지연 등이 중심으로 문명계몽운동에서 맹활약하며 한국에 설립된 사립학교가 1906년에 63개나 늘어나며 한국사회에 예상 이상으로 교육이 보급된다.   그러나 이토가 1909년초 보호정책에서 식민정책으로 방향전환을 하는것은 당시 한국인의 애국계몽운동에 따라 팽창된 애국심, 애국주의에 경계를 했기때문이다.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한 애국주의를 이토는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타민족문화, 국민성을 무시했던 이토는 그 자신이 일본에서 성공시킨 모델을 그대로 한국에서 이식하려 했지만 그는 실패한다.    “민족없는 문명화”의 실패였다. 역시 당시 식민주의적 리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이토통감의 큰 한계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쓰러져야 한것이 실패를 립증하는 순간이였다.
134    (48) 통곡하는 한국 댓글:  조회:4929  추천:12  2014-02-2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8) 통곡하는 한국 김문학            1905년 11월 17일은 한일근대사상 영원한 “기억”으로 기록된 날이다. 일본의 강요로 제2차 일한협약이 체결된 날이다. 보호조약이란 미명아래서 맺어진 이 조약이 바로 한국력사상 치욕적인 “을사조약”이다.       그해 9월 5일 로일 량국의 강화회담이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열려 포츠머스강화조약이 조인되였다. 로씨야를 격파한 일본은 조선반도에서의 우월권을 승인받으며 일본의 한국점령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 되였다. 여태껏 한국의 “자주독립”을 “보호했던” 한일의정서를 페기한 일본은 실질적으로 조선지배권을 획득하는 계획에 착수한다.   이리하여 1905년 11월 9일 조선반도 접수의 사명을 걸고 특명전권대사로 이토 히로부미가 주일공사 하야시(林)와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를 앞세우고 을사조약 체결에 착수한다.   이 조약체결에 대해 고종이 반발했기에 이토는 “한국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더욱 곤난한 경우에 빠지게 될 각오를 하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11월 16일 이토는 정동의 손탁호텔에 8명의 한국 대신을 모여놓고 조약의 가결을 요구했다. 한편 하야시공사는 박제순(朴齊純)외상을 불러 일본정부의 조약안을 공식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한국 대신으로는 참정(參政)대신(총리격) 한규설, 외무대신 박제순,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 탁지대신 민영기(閔泳綺), 군무대신 이근택(李根澤), 법무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무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대신 권중현(權重顯)이였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처음부터 거절했으며 사임할 배짱으로 당장 퇴장했다. 민영기도 명확히 반대를 표시했다. 나머지 이완용, 이하영,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5대신이 이토가 거느린 일본 포병중대, 기병련대 총칼의 위협에 동의하거나 가까스로 동의하였다. 이토가 군대를 동원하여 위협한 사실은 니시요츠츠지(西四遷公克)가 쓴 《한말외교밀화(秘話)》에서 기술된 에피소드에서 비롯됐는데 그는 당시 보병대위로서 현장에 있지 않았고 들은 소문에 의해 편찬했다고 밝히고있듯이 사실여부는 분명치 않다는 사학자들의 지적도 있다.   아무튼 이토가 협박적언사로 한국 대신을 핍박하여 강박적으로 체결한것은 사실이리라.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이토의 협박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것을 보면 분명 실재한 사실일것으로 추정된다. 황차 고종이 거부하고 회피한 시점에서 이토의 강박은 칠지했을것으로 보인다.   이 유명한 조약이 곧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을사조약”이며 조약에 찬동한 5대신이 바로 매국노의 대명사로 된 “을사오적”이다.   11월 20일, 서울에서 발행하고있던 《황성신문》의 주필이며 민족운동가인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이야 말로 소리놓아 대성통곡해야 할 날이다”고 제목을 단 사설을 발표한다. 협약체결에 대해 통한의 극치에 달해 일떠나 반대해야 함을 절절히 조선민중들에게 호소한다.   “4천년 불불(沸沸)히 흘러온 국민정신은 일야(一夜)에 망했으니 통재로다 한(恨)재로다, 동포여, 동포여!” 하고 망국의 슬픔을 통탄한다. 장지연은 즉일 체포되여 3개월이나 투옥생활을 하게 되며 시종무장관 민영환은 자결로 항의를 표한다. 의정부 의정이며 특진관인 조병세(趙秉世)도 계약페기상소문을 하야시공사에게 제출한다.   11월 17일 밤, “을사오적”의 한사람인 이완용의 사택을 조선민중들이 불사르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 불길이 충천했다. 다음날 18일, 황궁정문 대한문에 모여든 민중들의 울음소리가 거리를 진감했고 22일, 하야시공사와 같이 교외에 나간 이토의 렬차가 조선인들의 투석을 당해 이토는 얼굴에 경상을 입었다.   이 을사조약을 둘러싸고 지금도 “무효론”, “유효론”으로 한일 량국의 지식인들사이에 공방전이 펼쳐지고있으나 아무튼 일본의 이 협약은 “당시의 국제법에 따라 당초부터 효력을 발생했다”고 보고있다. 일로전쟁을 통한 일본의 한국점령지배목적은 이것으로 달성했던것은 사실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국”계보는 그 세번에 걸친 보호조약의 흐름을 보면 쉽게 해명된다. 제1차 일한협약은 1904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되는데 일본이 한국의 “재무감독”,  “외교고문”  및 외교특권행사시 사전에 일본대표자와 협의하는 내용들이다.   이렇게 사실상 “보호국”명의로 한국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점차 실천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의 2차조약의 주요골자는 한국에 통감부 설치, 통감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관리하며 경성에 주재하며 친하게 한국황제와 접촉할수 있는 권한을 유지하며 한국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는 등 5개 항목으로 되있다. 주로 한국통감이 한국을 지배하는 합리적구실을 만든것이 이 조약의 취지였다.   통감부는 실질상 한국식민통치의 최고권력기구로 조선 외교와 내정감독의 기구였다.(통감부에 대해 다른 글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1907년 7월 고종이 이토통감의 재가없이 물래 헤이그세계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일이 발생한다. 이때 이토는 격노하여 고종이 배신행위를 했다고 질책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로 7월 18일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신황제로서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가 되는 순종을 즉위시킨다.   그리하여 이 틈을 리용하여 이토는 “이 기회를 타서 제국정부는 한국내정을 전권장악할것을 희망”하여 7월 23일 제3차 일한협약을 체결한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정말7조약(丁末七條約)이라 불리는 조약이다. 이토와 하야시외상이 작성한 이 조약은 한국의 국내정권을 전면적으로 장악하는 내용으로서 통감의 지도아래 법령제도, 립법, 행정권의 근간을 전부 통감이 직접 장악하는것으로 규정시켰다.   신황제 순종은 1897년 이미 “독차사건”으로 지적장애가 생기며 판단능력을 상실한 인물이였다. 이토가 두뇌가 명석한 고종을 퇴위시키고 이 지적장애인을 황제로 내세운 목적은 역시 한국정부의 최고지도자를  “꼭두각시”로 삼은것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실질상 한국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한 이토가 “한국황제”나 다름없었다.   잇따라 한국군대를 해산하는것으로 일본은 완전히 한국을 일본의 수중에 넣게 된다.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133    (47) 아시아의 "공적"으로 전락한 일본 댓글:  조회:4876  추천:10  2014-02-16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7) 아시아의 "공적"으로 전락한 일본 김문학            동아시아 근대를 읽으면서 발견되는 일본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악(惡)”으로만 일축하지 못할 긍정적인 일면과 역시 백번 강조해도 과언이 아닌 “악”이 엇갈리면서 아시아 근대무대에 로정되는것이다.                                                         환언하면 일본이 서양에 비해 “후진적”인 아시아에서 솔선 근대화에 개안함으로써 그 성공에 따른 지(知)적 결절환(結節環) 으로서 아시아를 련결시키고 유신, 개혁, 서양문물수용, 근대사상, 독립의식, 애국주의 등 인류의 학지(學知)를 아시아에 전퍄, 련결시킨 축면은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이 책에서 필자가 노린 포인트의 하나가 동아시아의 100년 근대를 일국이 아닌 토탈적인 복합체계로서 감안할 때 아시아의 최선진국이였던 영향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향하에 있었던 우리 자신의 과거적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부정하는 “우(愚)”를 범하게 될것이다.   한국의 현대 문명비평가이며 작가인 복거일씨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직언한다. “1854년대의 개항이후로 일본의 발전은 그대로 눈부셨다. 1867년 봉건체제인 바쿠후정권을 무너뜨리고(중략)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크게 성공해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쉽게 승리했다.          환언하면 일본이 서양에 비해 “후진적”인 아시아에서 솔선 근대화에 개안함으로써 그 성공에 따른 지(知)적 결절환(結節環) 으로서 아시아를 련결시키고 유신, 개혁, 서양문물수용, 근대사상, 독립의식, 애국주의 등 인류의 학지(學知)를 아시아에 전퍄, 련결시킨 축면은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이 책에서 필자가 노린 포인트의 하나가 동아시아의 100년 근대를 일국이 아닌 토탈적인 복합체계로서 감안할 때 아시아의 최선진국이였던 영향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향하에 있었던 우리 자신의 과거적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부정하는 “우(愚)”를 범하게 될것이다.   한국의 현대 문명비평가이며 작가인 복거일씨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직언한다. “1854년대의 개항이후로 일본의 발전은 그대로 눈부셨다. 1867년 봉건체제인 바쿠후정권을 무너뜨리고(중략)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크게 성공해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쉽게 승리했다. 이어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단숨에 국제무대의 주역들가운데 하나가 되였다. 로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이 얻은 국제적 명성과 지위는 20세기 동아시아의 력사전개과정을 리해하는데서 본질적 중요성을 지닌다.”(복거일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로일전쟁의 승리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지대했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 인도의 독립운동가 리더 네일은 물로 토이기, 벌가리아, 웽그리아, 핀란드, 아프리카 여러나라의 사람들에게 큰 고무격려가 되였다. 영국의 사학자 찰스 플러는 《서양전사》에서 “유색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우위에 도전함으로써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일깨웠고 모든 식민제국들에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가했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일본의 승리는 거의 모든 식민지국가들에서 독립운동을 환기시켰다는것이 주목된다.   세계 근대사료를 두루 보아도 알수 있지만 당시 로일전쟁에서 로씨야를 전승한 일본에 대한 표상은 월등 긍정적, 고무적이였다는것이다. 지금껏 백인종의 우월성에 짓눌린 유색인종들, 그리고 로씨야의 압박을 지속적으로 당해온 주변국가들, 또한 로씨야내부에서의 민족적, 종교적 억압을 받아온 유태민족이나 이슬람교도들에 대해 일본의 승리는 희망을 안겨준것이였으며 이런 증언과 사례는 무진장히 존재한다.   청년시절의 모택동이 어드워 스노에게 술회한 “황해해전”의 노래를 일본귀국 류학생교원에게 배워 일본에 동경심을 품었다는 에피소드나 필리핀에서 명치천황을 “황색인종의 영웅”으로 례찬한 소리가 높았다는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립헌제가 전제국가에 대한 승리로 인식한 청국의 지식인들이 제창한 “일본학습”은 량계초나 강유위의 신문, 언설에서도 잘 표현되고있으며 지어 무술변법탄압의 장본인인 서태후 역시 의화단운동후 국가체제의 변혁이 청조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수단이라고 깨달았으며 일련의 개혁, 이를테면 1905년의 과거제도페지, 일본의 학문을 관리등용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립헌제를 배워 자유와 개인권리존중의 노력이 일본인의 애국심향상에 이르고 결과 일청, 일로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리해가 생성된다. 이를테면 김진성(金振聲)은 “립헌은 문명부강의 주물(主物)이며 또한 문명부강은 립헌의 종물이다”고 말한다.(대한흥학교(大韓興學報) 제4호)   그러나 그뒤 일본의 행위는 아시아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1905년 로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로씨야를 막아버리고 대신 조선을 보호국화의 미명으로 손아귀에 완전히 넣고 지배하게 된다.   “보호국”이란 대체 무엇인가? 일본 사학자 운노 후쿠쥬교수에 따르면 근대 제국주의의 보호국지배란 전근대의 종속관계와는 이질되며 전통적 종속관계를 부정하는것으로 출발한다. 청국이 그동안 종속관계적인 보호국이였으나 일본이 행한것은 근대 제국주의적인 보호국지배로서 보호를 해주는 나라(일본)가 피보호국의 외교권의 일부나 그 전부를 박탈하고 외교기능을 대행하는 관계이다.   국가의 국제법에서의 최대의 주권으로서의 외교권의 상실은 결국 그 국가주체의 상실과 함께 본질상 “독립국”이 아닌것이였다. 1905년 조선보호국화에 이어 일본은 1906년 만철회사를 선봉으로 만주에 진출한다.   이에 대해 아시아사람들은 착잡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당시 동경에서 류학중인 유명한 진천화(陳天華)는 “솔직히 고백하여 일본의 이번 전쟁은 동아에 있어서 전혀 공로가 없은것은 아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즉각 일본과 동맹하려는것은 중국을 조선식으로 하는것이며 일본과 분리시키려는것은 동아시아를 멸망시키려는것이다”고 지적한다. 조선을 망국화시키고 중국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경계하면서 구미렬강의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일본의 군사력을 무시할수 없다는 고삽한(씁쓸한) 비평을 한다.(《절명서》1905)   진천화가 위구했던대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동아시아에서 식민침식적인 권익확대에 서슴지 않는다. 1907년 청정부를 리용하려 한 일본정부는 손문을 국외추방시키고 기관지 《민보》의 발행을 정지시키는 명을 발한다.          불과 2년사이에 일로전쟁의 승리로 아시아 및 세계 식민지독립운동을 고무격려했던 일본은 1907년에는 구미렬강의 식민제국과 손잡고 아시아에서의 식민제국으로 자진해나선다.   일본이 조선에서 행사한것은 로씨야제국이 기도했던 식민화를 대신해서 한것이며 중국 만주 등에서 선택한 길은 결국 구미렬강과 같이 “영국의 국기를 휘두르며” 감행한 국미제국의 식민지 분할의 길이였다.   이리하여 당시 일본에서 류학중인 류사배(劉師培)는 1907년 이렇게 갈파한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조선의 적일뿐만아니다. 이제 인도, 윁남, 중국, 필리핀의 공적(公敵)이다.”(《아주현세론(亞洲現勢論)》)   로일전쟁을 계기로 세계적렬강의 반렬에 올랐다고 오만해진 일본은 웃으면서 칼을 휘두르며 아시아의 맹주, 왕자로 군림한다. 에누리없이 아시아의 “희망”으로부터  “공적”으로 전락된 순간이였다.  
132    (46) 근대 아시아 학지의 도가니 일본 댓글:  조회:4737  추천:12  2014-02-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6) 근대 아시아 학지의 도가니 일본 김문학  우선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학지(學知)”란 단어부터 해석하기로 하자. “학지”는 근년 일본지식사회와 론단에서 사용빈도가 높은 어휘인데  “학문과 지식”이라는 사전(辭典)적인 해석으로 통한다. 메이지이후 개국시기 서양 학문, 지식을 수용, 인입하여 전근대까지 중국학문에 얽매였던 학문적해방을 구가하는(또는 비판적성찰의 생경적뉴앙스가 다분히 스며있는) 이 단어는 근대 일본인의 조어이다. 물론 아마 그 어원을 따지면 필자의 속단으로는 《중용(中庸)》 제20장의 한 구절 “학지리행(學知利行)”(인간이 밟아야 할 인륜의 길을 후천적으로 배워서 행한다)에서 따온것으로 추찰된다. 그러나 근대 “학지”에는 중국학문을 차단시키고 또는 그것을 추월하여 독자적 근대 서양학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학문, 언설 체계를 이루어 새로운 일본의 학지중심을 아시아에서 수립했다는 자부심이 담겨있다.     메이지시대 전후(前后)의 일본 국학자들은 확실히 “해뜨는 나라”  일본이 드디여 중국을 리탈하여 아시아문명의 중심으로 탈바꿈했으며 세계의 학술문화도 일본으로 집결된다는 의식이 짙었다. 이에 반해 중국의 근대는 자신의 전통에 고집하여 천하의 신학문을 포용할수 없었기에 문화의 변경으로 추락됐다는 인식도 역시 자타(自他)에 다 존재했다.     당시 중국의 장지동, 리홍장 등 양무파 정치인, 지식인이나 강유위, 량계초 등 유신파 지식인, 황준헌, 엄복, 왕유국 등 거물급 지식인들도 일본이 중국을 추월한 아시아의 문화의 집결지이며 “일본학습”이 서양식근대의 첩경이라고 력설, 주장했다.     현대 중국의 신예학자들도 근대 중국이 일본에게 추월당하고 근대국민국가에 성공하지 못한채 반식민지로 전락된 배경에는 일본과 같은 메이지유신에 따른 일련의 근대적개혁이 따라가지 못한 사실과 함께 학문과 지식체계에서 중국의 구습을 답습하고 세계적인식이 늦어짐과 함께 그런 고루한 지식, 사상들이 개혁자체의 육중한 걸림돌이 되였다고 지적한다.     바꿔 말하면 일본적인 근대 학지의 도가니가 결핍했던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누르고 아이사 학지의 집결지, 도가니를 형성하여 새로운 문화중심으로 된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같은 집결지, 도가니는 어떻게 형성됐으며 중국과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문제에 준비된 답안은 한권 내지는 몇권 분량의 방대한 기술이 소요된다. 지폭의 관계상 그 궤적흐름을 간단하게 짚어보는것으로 대체하련다.     아편전쟁이후 청국이 의연히 서양의 선진문물을 “기기음교(奇技淫巧)”라고 취급하면서 서양학습에 멸시했을 때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거쳐 참신한 메이지정부가 탄생되며 “문명개화(文明開化)”의 슬로건을 걸고 서양문물을 적극 배운다. 그리하여 1870년대에 영국, 프랑스, 독일형의 메이지사상이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류 사상가들에 의해 탄생되며 1880년대, 90년대에는 근대 민족주의, 평민주의, 국민주의사상이, 1900년대에는 기독교적사회주의, 독일, 프랑수류의 사회주의가 생성된다. 그것은 《일본인》, 《태양》 등 유명잡지들에 의해 사회에 신속히 전파된다. 문학에서도 서양문학의 번역이 류행되고 정치소설, 사실주의, 랑만주의, 자연주의 및 반자연주의의 “백화제방”의 시기에 들어선다.      학문, 학술에서도 독자적인 동양사, 일본사, 지리학, 법학, 철학, 의학, 약학, 물리학, 지진학, 천문학, 식물학과 인류학, 민속학이 정립되면서 그 자체가 아시아 특히 중국, 조선에 류학생을 통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청일, 로일 전쟁이후 일본의 인문학, 사회과학 체계는 철학, 론리학, 력사학, 민속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분야에서 와츠지 데츠로(和遷哲郞),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太郞) 등 세계적 석학을 배출하며 아시아의 웅(雄)이 된다. 또한 의학, 금속학, 공학, 수학 등 자연과학분야에서도 방대한 업적을 쌓으며 아시아를 리드한다.            근대 교육제도의 확립, 교육의 발달에 따라 국민의 식자률이 전례없이 높은 수를 보이며 대중문화수준도 신문, 사진, 방송, 활자, 활동사진(영화)을 통해 아시아 최고수준에 이르며 음악, 미술, 연극, 조각, 건축 등 분야에서 아시아가 배울 모델을 제공하게 된다.     이렇게 근대 일본은 중국을 추월하여 서양문명을 상대화시키고 동등화시키는 립장에서 구(舊)아시아적 중화의 질서에서 자립하여 새로운 학지적문명의 도가니로 탈바꿈을 하게 되였다.     북경대학의 중일관계사 연구자 왕효추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근대에 이르러 중일교류의 방향은 역전을 이룬다. 중국 청정부의 부패와 보수로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된데 반해 일본은 메이지유신후 서방을 배워 유신개혁을 통해 독립국으로 거듭났을뿐만아니라 세계자본주의렬강의 반렬에 끼였다. 중일갑오전쟁후 진보적인 중국인은 일본침략을 지탄하는 동시에 일본에 학습하자며 유신을 주장한다.”     군말할것 없이 근대 중국인의 일본류학사는 그대로 일본을 통해 서양학문과 사상 등 학지를 습득하게 된 그대 정신사의 단면이기도 하며 역시 조선이 근대 류학을 통해 근대 지성사를 정립하는데 루락할수 없는 영향을 받게 된다. 1910년대 500여명이던 일본류학생이 1940년에는 3만명으로 증폭되면서 조선 근대정신사에 특기할 공헌을 하게 된다.     당시 류학중이던 중국 근대의 거울 채악(蔡鍔)은 중국이 “문명모국”이였는데 반해 일본은 동양사상 유일무이의 “진취를 멈추지 않은 모국”이라고 일본을 례찬한다. 로신은 “모든 류학생들이 일본에 가서 우선 추구하는것은 대저로 신지식이였다”고 일본학습의 실질을 이야기한다.     망명초기 량계초는 많은 사상을 배우고 “뇌속의 심(芯)까지 변화시킨 사상, 언론, 전과 판이한 인간이 되였다”고 자신의 일본영향을 고백한다.     저명한 청년지식인 혁명가 추용(鄒容)은 동경 동문서원에서 류학중이였는데 그는 《혁명군》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문명국에 있는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을 최대한으로 향수하여 과목공부는 저리가라는 격으로 신사상 섭렵과 흡수에 여념없었다.”     일본에서 형성된 “아시아의 학지적 도가니”, 이곳에서 근대 중국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서양문물과 사상, 지식을 흡수하여 자국의 근대건설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일본의 학지적 도가니는 사실 100년후인 오늘날도 아시아의 리드적지위를 상실하지 않고 또다시 아이사의 젊은이들에게 지적자극을 주고있다.  
131    (45) “국혼”은 어떻게 탄생되였는가 댓글:  조회:4801  추천:30  2014-02-0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5) "국혼"은 어떻게 탄생되였는가 김문학              인류력사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상(事像)중 전쟁을 통한 문명, 문화의 충돌이 이(2e)문화교류, 이문화접촉, 전파의 가장 빠른 구실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자 헤러글테이트스의 말대로 “전쟁이야말로 문화의 아버지이다.”   20세기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로일전쟁은 그것을 계기로 일본이 대폭 세계에 알려지며 따라서 조선이란 이름도 세계에 지명도가 19세기보다 높아졌다. 일본이 로씨야제국을 격파한 계기로 일본인의 “무사도(武士道)”가 그 국민성을 제시한 키워드로 인식되기도 한다.   1899년 니이토베이나조(新渡戶稻造)의 영문저작 《무사도》의 영향은 지대했다. 이 책은 무사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아니라 로씨야에게 이긴 일본정신의 근저를 서양의 기사도와 비교함으로써 무사도정신이야말로 일본의 국혼(國魂)이며 일본정신이라는 점을 서양인에게 알리고저 한 비교문화론격인 “일본론”이였다.    영일동맹으로 당시 일본과 가장 친숙한 관계에 있던 서양의 대표 영국이 일본인의 “무사도”적 국민성에 공명을 일으켰다. 이안 하밀튼은 “겸허”와 “엄청난 자존심”으로 무사도를 칭찬하는가 하면 1904년에는 《일본인이 쓴 일본》이란 론집을 낸 영국인 식자도 있었다. 《타임즈》, 《자판메일》  등 신문에서도 일본정신의 “고결함”을 례찬하는 글을 대폭 실었다.   그러나 사실 서양인을 향해 발사한 “무사도”정신은 메이지시대 “충효”나 “충군애국”을 골자로 만들어낸것이지 본래의  “무사도”와는 이질적이였다.   사상사연구자이며 교또대학 인문연구소 교수 야마무로(山室信一)는 일본 “무사계급의 론리가 ‘신국(神).)’으로서의 전통탓으로 국민성이 되여 뿌리박은것이라는 의론자체가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고 설파한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다시 당시의 동양으로 돌려보면 일본내에서 “무사도론”이 류행처럼 일세를 풍미하고있을무렵 일본에는 중국에서 온 많은  젊은 류학생들과 량계초 등 정치망명한 젊은 리더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 강대국 로씨야에 전승할수 있은 리유와 일본이 급속히 아시아 최강의 근대국으로 탈바꿈할수 있은 까닭을 일본 “국민성”으로서의 무사도나 애국심에 있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일본을 따라배우자”란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에 온 류학생과 망명정치가들은 청국의 전쟁의 배북, 무술변법의 좌절에서 일본만 성공할수 있은 비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품고 “일본학습”의 공전의 붐을 일으켰다.   류학직전 북경에서 로일전쟁의 개전을 알게 된 추근(秋瑾)은 일본의 용무(勇武)와 독립정신을 칭송하는 시를 읊는다. 그뒤 1904년 일본땅을 밟은후 집필한 “우리 동포에게 경고(敬告)한다”는 글은 당시 류학생의 공통된 심경을 토로했다.    “정말 무척 부러웠던것은 일본의 어린이들이 큰 아이 작은 아이 할것없이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웨치는 광경이였다. 실로 사랑스러웠고 너무 부러워 죽을 지경이였다. 우리 중국에서 언제면 이런 정경을 볼수 있을가? 일본인들은 이렇게 한마음같이 군인을 존경한다. 오늘 로씨야라는 대국이 작은 섬나라 일본에 패한것도 이것때문이리라.”   당시 중국류학생들이 일로전쟁 출정시 “전사를 기원한다”고 씌여진 기발을 들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군인을 배웅하는 열렬한 광경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한 중국의 풍토에서 “진짜 남아는 병사로 되지 않는다”는 속담과 같이 군대를 경시한 습속이 있었다.   그때 량계초가 일본에서 발견한것이 “일본혼”이라는 “국혼().魂)”이였다. “일본인이 늘 말하는것으로 일본혼이란것이 있다. 무사도라는것도 있다.”    그는 《중국혼》이란 책을 집필하여 일본 성공의 리유가 “대화혼(大和魂)”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일본을 다라배워 중국인도 “중국혼”을 갖고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해혼(山海魂), 모험혼, 군인혼, 평민혼(平民魂), 사회혼” 등 다양한 “중국혼”설을 전개하였다.(왕민(王敏) 《중국인의 애국심》)   량계초는 중국인으로서 최초로 1899년 10월 15일 《청의보》에서 “국민”이란 단어를 사용한 인물이며 “애국주의”,  “애국심” 을 창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본체류기간 그는 애국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애국가 4장(四章)”을 요코하마중화대동학교의 창설자로서 학교의 학생들에게 부르게 한다.(야마시타 신이치)   량계초가 애국교육으로서 창도한 “덕육, 지육, 채육” 3방침은 일본에서 본을 뜬것인데 그것이 그뒤 모택동을 통해 신중국에도 이식된다.   그리고 량계초가 쓴 《중국혼》은 장지연에 의해 1906년 조선에서 번역출간되면서 같은 맥락에서 “조선혼”을 창출하고저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는것이 괄목된다.   최석하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조선혼》을 창출할 중요성을 설파하며 박은식(朴殷植)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력을 갖춘 “한국혼”양성설을 전개한다.   그리고 신채호는 “국민혼”, 신규식은 “한국혼”을 보급시킬 필요성을 력설한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자주를 회복시키는데서 루락시킬수 없는 국혼, 국민혼 사상이 일본을 통해서 수용, 전파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애국적핵심사상으로 간주되였다. 이리하여 장래 국혼과 애국심을 발양하여 국가를 앗은 일본을 타도하는 정신적 힘을 기르자는 인식이 형성, 정착되여간다.   당시 일본류학중인 로신이 발표한 《소파르타의 혼》이란 글에는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정신을 례찬한 모티브가 설정된것이 그 시대의 조류를 반영한것임을 알수 있다.   일본을 통해 배운 무사도의 상무정신, 국혼, 애국심 등 사상의식은 후날 중국이 일본과 싸운 항일전쟁에서 발휘되였던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에도 이같은 국혼, 애국심이 동원된것도 일본에 대한 아이러니이며 이 역시 근대력사의 아이러니였다. 일본에서 배운것을 일본을 무찌르는 예리한 무기로 활용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영훈교수는 또 이렇게 지적한다. 백두산을 민족의 성지로 한것 역시 민족을 발견하고 가시화하는 상징물의 생성에서 비롯되며 박두산을 신성시한 최초의 인물은 최남선이다. 그는 백두산에서 발생한 “불함문화”야말로 조선문명의 근원이라는 학설을 펼치며 그것을 증명하려고 1927년 백두산에 오르기도 한다. 그뒤 백두산 성지화는 해방후 남북한에서 결쟁을 벌이며 전개시킨데는 “민족”이란 두터운 의식이 안받침되여있다.   일본이 전쟁시기 “야마토민족”을 신성시하고 아시아가 야마토민족이 이끄는 “대동아공영권”으로 편입되여야 한다고 한 주장 역시 “민족신성화”의 창궐한 행위에 불과했다.   안생 백년의 “민족”, 그것은 종잡을수 없는 100살의 기이하고 복잡다단한 의식체(意識體)이다. “민족”은 과연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임이 틀림없다.
130    (44) 백년전 일본인의 치밀한 중국내막 분석 댓글:  조회:5008  추천:22  2014-01-26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4) 백년전 일본인의 치밀한 중국내막 분석 김문학            1910년 일본에 《거인 아라오 세이(荒尾精)》란 전기가 출판되며 독서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 “거인”으로 불린 아라오는 누구일가? 아라오(1859~1896)는 일본 19세기말의  “아시아주의”자로서 “지나와 우리 나라는 순치상이, 보차상보의 관계”로 인식하며 “동양의 대사는 일중량국이 일심협력하여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청말시기 중국인식, 중국리해를 목표로 삼고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에 건너온 “동방지사중 태산북두”(《동아선각자지사 렬전》)로 평가받는 거물이였다.   그러나 중국측으로 보면 그는 스파이였으며 근대 일본첩보의 리드적역할을 한 인물이였다. 그가 저서 《흥아책》 등에서 제창한 아시아주의는 일중량국 “흥아”주의의 고전저작으로 되였으며 량계초의 공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1886년 륙군참모부의 지시로 중국에 온 그는 중국정보 수집분석의 스파이활동에 적극 투신한다. 일본의 한학의 거물인 기시다 긴코(岸田吟香)(1833~1905)가 당시 상해에서 악선당(樂善堂)서점을 경영하면서 눈약을 판매했는데 기시다는 장지동과도 친분이 깊었으며 역시 근대 일본의 저널리즘의 거두이기도 했다. 기시다의 협력으로 아라오는 한구에다  “악선당”지점을 세우고 전국에 종횡으로 뻗은 첩보망을 만든다. 뿐만아니라 상해에다 “일청무역연구소(日淸貿易硏究所)”라는 간판으로 스파이양성학교를 설립하여 간첩을 다수 양성했는데 청일갑오전쟁에서 이들 첩보활동이 크게 일본군을 위해 기여한다.   아라오가 편집출간한 《대청의견》(1894), 《대청변망》(1895), 《청국통상총람)》(1895) 등 저서는 그들이 중국에서 수집한 정보 및 그 분석으로서 그 섭렵한 범위, 치밀성, 심각성은 세인의 찬탄을 자아냈다. 1889년 아라오는 “악선당”설립이래의 정보를 분류, 집성한 보고서 《복명서(復命書》를 륙군참모본부에 제출한다. 그 보고에서 아라오는 청국은 이미 말기상태에 들어서 부패가 만연하여있기에 일본이 선제전을 일으킴으로써 중국을 서양과 대항시키는데 활용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라오의 후배인 네츠치(根津一) 등이 편집정리한 《청국통상총람》은 2천여페지에 달하는 보고서로서 그 내용은 청국의 사회, 경제, 정치, 교육, 산업, 지리, 민속, 풍습, 문화, 국민성 등 제반분야에까지 이르며 당시 일본의 중국정보파악의 지남서로 지목당할만큼 대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대륙침략의 지(知)적 정보로 활용되였던것이다.   1859년에 태여난 아라오는 1896년 37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다. 그는 림종때 “아, 동양이…”라는 말만 남기고 끝을 못맺었다고 한다.   부패한 청조가 일본에 의해 일청전쟁후 붕괴됨으로써 중국대륙에 새로운 개명인사들이 이끄는 신중국이 나타나며 억압받는 민중이 해방되리라고 《대청의견》에서 말한 그는 최후로 무엇을 말하려했을가?    필자가 근대 중일한의 력사사료를 섭렵하면서 늘 느끼는 점은 100년전의 일본인들은 중국에 대해 여러가지 방법수단을 동원하여 인식, 리해하고 그 정보를 파악, 분석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만큼 철저했고 치밀했다는것이다.   아라오보다 5년 후배인 1864년생의 일본인 무나카타 고타로오(宗方小太郞)(1864~1923)란 인물이 존재한다. 그는 당대 “지나통 제일인자(支那通第一人者)”로 일본사회에서 불려질만큼 중국정보수집에 철저한 스파이의 전형적인물이다. 《동아선당지사기전》, 《대지회고록》 등에 의하면 중국에서 한생을 보낸 무나카타는 일본에서 미야자키를 통해 손문과도 교우(交友)관계가 있는 인물이가도 하다.   1884년 청불전쟁시기 중국에 건너온 무나카타는 1890년부터 해군사령부의 위탁으로 중국정보를 제공하는 간첩으로 활동한다. 일청갑오전쟁시 해군의 방침은 그가 제공한 청국정보를 토대로 제정한것이 많으며 특히 위해위 요새(要塞)의 치밀한 정보와 북양함대의 소재를 밝힌것은 일본의 승전으로 이끈 지대한 요인이라고 한다. 하여 무나카타는 전쟁후 명치천황의 알견을 받기도 한다.   한문소양이 깊고 한어를 잘한 무나카타는 치밀하고 섬세한 성격으로서 술 한방울을 입에 안댔다고 한다. 그는 중국이름을 “宗大亮(종대량)”으로 하고 청국식변발을 늘어뜨리고 중국옷차림으로 “완벽한 지나인”으로 중국 각지에 잠복하여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정보 수집분석에 종사했다.   그는 생애를 중국의 중부, 남부 특히 상해에서 지냈으며 아라오의 수하에서 수년 같이 활동했는데 만년에는 상해에서 동방통신사(€{1方通信社)를 설립하였다. 그 수집정보는 남방이 많으며 동북지역은 많지 않다. 그는 또 《민보)》, 《한보)》 등 신문도 경영하였으며 1923년 사망한다.   필자가 소장한 《무나카타 고타로오 문서》는 그의 부인이 소장했던 자료를 전후 정리편집한 저서로서 무려 1,500페지의 상하 두권으로 돼있는 방대한 저작물이다. 그가 해군성에 정기적으로 보낸 이 보고서는 내용으로 보면 중국의 당시의 정치, 군사, 경제, 지리, 사상, 민중운동, 풍속, 문화, 민족성 등 전 분야에 걸쳤는데 그가 파악한 군항, 포대의 위치, 총분포의 지도 그리고 기본적군사 조사는 너무나 치밀하고 상세하였다.   그뒤 후기에 그는 중국의 정치형세나 민중사정에 대한 보고가 증폭되는데 이를테면 청조내부 관료의 모순, 궁정깊이의 광서황제와 서태후와의 옥신각신사정, 광서황제의 유페암살내막, 원세개의 사망원인 등 공개되지 않은 극비정보가 많이 들어있어 경악케 한다.   특기해야 할것은 그가 당시 청조말기상태의 전국의 부패사정을 파악하고 예언한것은 실로 엄청난 분석이였다. 그는 당시 “년도재정수입이 9,074만냥 은에 523석 쌀로 분석하며 청국의 상황으로 보아 이는 매우 비정상적이며”, “수뢰, 부패로 극을 치닫고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당시 청국이 혁신으로 궐기하며 세계 최대 강국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크다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있었으나 무나카타는 그것을 부정한다. “인심부패”, “치국의 법은 있으나 치국지사가 결핍한것”, “천하관인이 전부 부패한것” 등 키워드로 부패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면서 10년내지 30년안으로 청국이 “지리파쇄(支離破碎)”하는 대변화가 일어난다고 예언한다. 그것은 결과 적중하여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국의 멸망을 선고하지 않았는가.          그뒤 1910년대에 들어서 죽을 때까지 무나카타의 보고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당시 측근에게 “나는 너무 복잡한 최근 지나의 정세를 잘 리해할수 없다. 그리고 장래의 예측도 하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백년전 일본인의 중국정보 파악,  분석은 경이로운 치밀성과 투철성을 로정했다. 그들이 청일전쟁, 로일전쟁에서 이긴것도 이같은 정보력,  분석력이다.  우리도 상대와 라이벌관계를 유지하고 이기자면 이러한 정보력,  분석력이 우선되여야 한다. 유치한 정서적인 슬로건보다 상대 리해,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한 팩터이다. 력사는 이 점에서 실로 “거울”의 구실을 하고있지 않은가.
129    (43) 근대 공원ㅡ식민지문화의 이식공간 댓글:  조회:5309  추천:8  2014-01-1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3) 근대 공원 - 식민지문화의 이식공간 김문학           1910년, 일본식민지지배와 함께 조선에 남산공원이 생긴다.  “대중에 공개한 정원”이라는 뜻으로 생긴 공원DL란 말은 일본어이기도 하다. 일본이 이무렵 조선신사를 이 근처에 세울 기획으로 남산공원을 신설했던것이다.   조선의 대표적 근대 공원의 또 하나인 창경원 역시 식민지시대 1910년과 때를 같이한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명칭이 바귀면서 동, 식물원을 병립한 시민공원으로 변한다. 일본은 1910년에 이름을 창경원으로 개칭하고 벚꽃나무를 많이 심고 일반시민에게 공개하였다.   “공원”은 지금이야말로 국민의 휴식터, 만남의 장소, 청춘남녀의 련애의 터로 리용되고있지만 기실 백년전 “식민지 근대화의 산물”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남산공원은 1912년에 지은 조선신궁이 1945년 광복후에야 철거되였던것이니 남산공원의 력사는 식민통치의 상징인것이다. 현재 남산공원터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들어선것은 식민지문화의 기억을 누르려는 한국의 의도가 짙게 깔려있는것이다.   일본의 근대 공원에서 가장 유명한것은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과 히비야(日比谷)공원이다. 메이지 6년(1873)에 생긴 우에노공원은 칸에이지(寬永寺)라는 절을 공원으로 개축한것이다. 근대 도시계획에 의해 생긴것이 하비야공원이며 원래 륙군히비야련병장자리에 도시개정사업의 일환으로서 공원으로 지은것이다.   1900년 “일본식과 양식의 두종류 유원을 만들어 4계절 화초를 심고 산, 못, 음악당 등 설비를 갖춘 경비 50만, 5년의 계속적사업”으로 만든 히비야공원은 1901년에 공개하기 시작한다. 양식은 독일공원을 본따서 서양화단이나 가스 등으로 야간조명을 설치했다.   1882년 동경 아사쿠사(淺草)에 아사쿠사공원을 만들었다. 긴자(銀座)가 생기기전에는 동경 제일의 번화가이기도 했던 아사쿠사에 대중오락장소로서 근대 공원의 대표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1951년 도시건설의 일환으로 이 공원은 해지되였다.   원래 공원은 서양 근대문화의 산물로서 그 루트는 서양문화에 있다. 19세기중반 왕공귀족의 대정언이 차츰 일반 대중에 공개하면서 “근대 공원”이 탄생된다.    이를테면 영국의 하이드 파크, 프랑스의 부아 드 볼로뉴, 트쇼묭과 독일의 티르가르텐 등이 그렇다. 도시환경의 개선과 함께 록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도시민에게 쾌적한 환경과 휴양의 장으로 제공하기 위해 대거 공원을 설립하게 된다.   중국에 근대적의미의 공원이 최초로 생긴것은 1868년 8월 영국조계 공상국이 상해조계지경내에 설립한 외탄공원이다. 당시 공원은 “공가화원(公家花”이라 불렀는데 1903년 일본류학생이 잡지 《절강조》에다 일본공원을 소개하면서 이듬해부터 중국에서 “공원”이란 명칭으로 전부 사용하게 되였다.(민걸(閔杰) 《중국근대사회문화변천록》)   이렇게 상해는 중국 근대 개방도시였을만큼 “공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많은 외국인 교민이 식민지침투와 함께 상해에 운집하면서 번화한 “10리양장”을 설립하였다.    1880~1938년사이에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이딸리아, 로씨야 등 조계에서 10개나 되는 각 식민지국가의 상징과 문화특색을 보인 공원을 설립했다.   1868년 외탄공원을 이어 1895년 곤산(昆山)공원, 1880년 홍구해대도(虹口海大道)화원, 빅토리아공원, 아사히공원, 와카마츠공원, 신마치공원, 후카야마공원 등이 줄지어섰다.   그리고 로씨야, 일본이 만주의 대련, 심양, 장춘, 할빈 등 대도시에 공원을 만들어 그 자신들의 “문명”의 생활양식의 상징으로서 중국에 이식시켰다.   이를테면 대련의 니시공원, 덴키공원, 려순 식물원, 동물원, 장춘의 니시공원, 심양의 요시노공원, 할빈의 공립공원 등을 들수 있으며 일본인이 만든 공원에는 일본식건축양식과 함께 일본식정자 등이 배렬돼있었다.                                                   서양인이 만든 공원에는 근대의 공공성, 공중성과 휴식성이 구현되였으며 분수대, 서양식정자와 함께 잔디밭, 화원, 상록수 등이 특징적이다.   서양인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서양의 문명공간을 그대로 중국땅에 설치함으로써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서양인이 조계에 만든 공원내의 유람안내문에 씌여진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라는 문구는 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식민지배의 인종차별, 민족차별의 기억으로서 중국인의 드라우머로 되고있기도 하다.   일본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 벚꽃나무를 청도의 아시히공원과 단동의 진(금)강산공원에 일본에서 옮겨다 천여그루나 심었다. 공원을 통해 모국문화를 식민지공간에 복제시키는것을 시도했던것이다.   그뿐만아니다. 일본인들은 공원에다 일본신사를 짓고 전쟁에서 사망된 병사를 기리는 목적으로 “충훈비”, “기념비”를 대거 세웠다. 또한 인물동상도 세움으로써 일본문화 및 일본군국주의적 정신의 기둥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일찍 1880년 영국인이 외탄에 《중영연태조약》을 체결한 마가레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수립하였으며 1907년에 그 기념비를 외탄공원경내로 이동시켰다.   사회학자 프코는 “공간은 모든 권력영위의 토대”라고 갈파했다. 그가 “공간위치 및 건축설계는 특정한 력사시대적 정치책략중 중요한 각색을 맡는다”고도 지적했다싶이 근대 중국땅에 설립된 공원의 공간은  식민주의 지배문화의 현지에서의 “공간”복제로서 그 문화를 복제된 실물로서 프러패건더를 통해 주입, 강요하는 역할을 했다. 이픈 기억과 쾌적의 공간을 준것이 서양인이 남긴 공원이다.   따라서 이문화가 이렇게 침투되면서 피지배공간에서 복제된다는것은 다 마이너스적이지만은 않다. 이문화 또는 문명은 이렇게 침략, 지배를 통해 전파되는것은 인류력사상 늘 있는 전파양식의 중요한 팩터였다. 백년이 지난 우리가 공원문화, 공원놀이를 만끽하게 된것은 식민문화가 남겨준 이문화를 자주적으로 리해, 습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는것을 망각할수 없다.  
128    (42)“성욕연구”라는 이름의 학문 댓글:  조회:6517  추천:12  2014-01-0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2) "성욕연구"라는 이름의 학문 김문학         동양3국의 성과 에로스에 관한 전통은 주로 소설, 시 등 문학이란 장르를 통해 근대에도 방대한 작품을 양산하면서 면면히 이어져왔다. 그런데 《금병매》, 《홍루몽》이나《겐지물어(源氏物語)》 등 기서(奇書)들을 탄생시킨 동양에서 성, 특히 인간의 “성욕”에 대한 연구는 근대에 들어 1910년경에야 시작된다.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백년전 “성욕”을 연구한 시대에 대해 살펴보자. 1907년 일본의 자연주의문학의 대표적 소설가 타야마 카다이(田山花袋)가 유명한 소설 《이불》을 발표한다. 작가자신의 모델로 실재했던 녀제자에게 성충동을 느끼는 고백적소설로서 대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불》이 일본 근대의 성욕력사에 결정적이였던것은 성욕이란 억압된것을 ‘발견’했기때문이다. 그전에 ‘색정’은 있어도 ‘성욕’은 없었다.” 성욕을 고백하고 내면의 진리로 말할수 있었다고 일본 인류학자들은 지적한다.  “성욕연구”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것은 자연주의문학이 표방한 “성욕만족주의” 등을 야유했던 1910년 대쇼기에 들어서서였다.   사실 일본의 성 및 성과학에 관한 연구는 명치이전부터 성행했으며 방대한 연구업적을 쌓아왔다. 그중에서도 1910년대의 사와다 쥰치로, 하부토 등이 대표적이다. 사와다는 그의 저작 《성욕론강화》(1912년)에서 “성욕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세인들도 역시 지대한 취미를 가지고 그 학설을 잘 듣는것은 기본 사회현상이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성욕연구가 성병방지, 불륜, 청년남녀의 타락과 자살방지, 국민의 건강, 경제적빈곤을 구제하는 색정에서 생기는 범죄예방”으로 그 의의를 갈파한다. 성욕을 사회와 결부시킨 《성욕에 의한 사회범죄사》(1914년)도 흥미로운 저작이다.   조금 지나 하부토가 《일반성욕학》(1920년)을 출간한다. 목차를 보면 “성욕과 성욕학, 성욕학 총론, 련애론, 매음론, 결혼론, 성욕심리론, 응용성욕학, 성욕교육론”이 망라되였으며 “생식기” 역시 새론운 “발견”이였는지 그에 대한 론술이 많이 보인다. 이 책은 당시 일반의 성적관심사를 집대성시킨 량서로 호평이였다고 한다.(이시하라 치아키)   왜 “성욕”을 연구하는가에 대해 하부토박사는 “성욕은 생물계의 량성의 본능이며 량성간의 감정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연구하는 대상으로 한다고 밝힌다. 지금까지 성을 쉬쉬하며 금욕했던 유교의 성억압에 대한 “해방”이기도 했다.   《남녀의 연구》, 《자연계의 량성의 비밀》, 《남녀성의 결정론》, 《일반성욕학》, 《량성의 성욕과 그 차이》 등 많은 저작이 홍수같이 “성욕학”의 계보를 이루며 쏟아지였다. 남녀의 성차이와 성욕차이를 분석비교하면서 “어떤 성욕을 갖추어야 하는가”고 설문하고 그에 답안을 제시해간다.   일본인으로서 규범의식을 만들어내려고 한 시대인만큼 성욕 역시 그 틀안에 규정시켜서 연구해석하려고 한것이 당시의 연구자들의 기본 자세였다.   “남성은 발동적이고 녀성은 수동적이다”는 성차이에 립각하여 “적당한 성교를 해야 하며 과도한 성교는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은 당시에 있어서도 “상식”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1920년대에 학교교육의 성교육과 결부시킨 “성욕교육론”이 성행하며 《최신성욕교육》(1921), 《성욕교육의 연구》(1925) 등이 간행되였다. 당시 “성교육”이란 말은 “성욕교육”으로 되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례는 1905년 일본의 “성욕론”이 청조의 상해에 진출한 일본인에 의해 “미개한 청국의 개명을 위해” 한문으로 쓰여진 《남녀위생신론》이 간행된다. 흥미로운것은 그 책에는  “도리에 어긋나는 음사”로 “수음”,  “계간”,  “수간” 등을 론하며 “과도한 오나니가 남녀의 불임을 자초한다”고 지적하면서 대일본제국의 성모럴을 대륙 청국에까지 수출시키고저 한것이다.   중국에서 성욕연구 및 세소로지(성과학)이 본격적으로 탄생하는것은 1920년대이다. 중국의 에로스문화를 돌이켜보면 청조와 중화민국시대에 정신적금욕주의가 전반 사회에 침투되여 성을 추악한, 부끄러운것으로 터브시했으며 그런 분위기가 농후하게 양성되였다.   이런 와중에 장경생(張竟生)이 프랑스의 박사학위를 따고 1920년대 귀국하여 북경대학에서 당시 백안시했던 성행위 및 성심리, 성욕에 관한 강좌를 개설하였다. 당시 이는 파격적인 “성욕연구”였다.   1926년 그는 《성사(性事)》란 타이틀의 중국근대 첫 성연구리포트를 출간한다.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다. “원래 남녀의 성기란, 성적충동이란 사상(事像)은 과학적인 사연이다. 성기는 우리의 체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서 그 구조를 리해하면 인체생리학의 다수를 해명할수 있다. 또한 성의 인체에 대한 영향을 연구하는것은 인간의 여러 행동원리, 우생학 등과 관련된다.”    본문은 일반 민간인의 성체험을 이야기하고 그에 대해 저자가 조언을 하는 매우 생동한 문체로 되여있다. 본문에서 장경생은 “우리 나라에서는 수천년래 낡은 도덕을 중시하였는바 남녀성기는 장애물로 간주하여 모두 생기를 잃고있다. 성기의 퇴화, 성에 대한 흠미의 저하는 태여나는 어린이의 체력과 지능저하로 통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1948년에 발간된 미국 성과학의 유명한 《킨제이 보고서》보다 22년이나 앞서며 세계 최초의 성체험연구리포트로서 세계적명성이 높다. 일본에서는 수차례나 번역, 번안하기도 하여 장경생의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1926년 《성사》의 출판으로 구식도덕에 연연하는 당시 사회풍조하에 벌금처분을 받게 되고 저자 역시 북경대학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뒤 상해로 탈출한 장경생은 상해에서 서점을 설립하고 월간지 《신문화》 편집, 발간하는데 성적 번뇌의 상담, 성체험리포트도 게재했으며 당시 최대부수의 《생활주간》을 추월하여 환영받는 잡지로 일약 성장한다. 그러나 상해 관헌의 눈은 의연히 엄했으며 가정적인 일로 결국 상해에서의 활동은 2년여로 좌절당한다.   근대 중국의 탁월한 성심리학자, 교육자인 장경생은 만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다가 1970년 82세로 절명한다. 현재 그의 고향 요평현에는 성과학연구의 선구자로서 그를 기념한 묘비가 세워졌고 그의 전집이 1998년 광주출판사에서 출간되였다.
127    (41) "만철"은 무엇이였나? 댓글:  조회:7293  추천:102  2013-12-1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1) "만철"은 무엇이였나? 김문학         왜 일본인이 대거 만주로 진출, 침략했는가? 왜 일본이 식민제국 “만주국”을 설립했는가?  근대 한중일 력사문제에서 이같은 소박한 물음은 루락할수 없는 테마이다. 물론 이 테마는 책 한권 또는 그 이상의 방대한 분량이 소요되지만 그 답안으로서 마련된것이 바로 일본인이 설립한 “만철”주식회사에 대한 근대사적리해이다. 이를 리해하는것이야말로 만주침략리행의 첩경이다.  사실 우리는  “만철”  또는 “남만철도”라는 말을 화제에 담거나 기억에 떠올리긴 하지만 그에 대한 리해는 의외로 어둡다.   만주는 일로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일본의 “특수지역 및 권익”으로 간주한다. 만일 일로전쟁에서 일본이 패했다면 당연 로씨야의 손아귀로 들어갔을것이다. 1905년 9월 5일, 일로강화조약(포츠마조약)에 의해 장춘이남의 남만주경영을 시작하게 된다. 일로전쟁후 일본은 로씨야가 한대로 만주점령지행정을 계속하여 관동주 수비군과 민정 일반을 통괄하는 관동총독부를 설치했으나 1906년 사이몬지(西園寺)수상에 의해 군부통치를 철페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그해 8월 총독부를 철페하고 려순에 관동도독부를 세우면서 군정에서 민정으로 바뀐다.   이런 배경하에서 1906년 1월에 발족한 “만주경영위원회”는 륙군대장 고다마(兒玉源太郞) 가 대만식민지경영의 경험이 있는 인물 코토 신페이(後藤新平)를 책임자로 추천하여 만주철도경영을 맡기기로 한다. 1906년 6월 일본정부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설립의견”을 공표하고 뒤이어 12월 7일 반관반민성격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정식 설립된다.   초대총재는 코토 신페이가 추대되였다. 코토는 대만식민지경영에서 성공을 거둔, 식민지경영의 재질을 갖춘 인물로서 인정받는 인지(人智)이기도 했다. 그는 고다마의 비전대로 “양으로는 철도경영의 가면을 쓰고 음으로는 백반(百般)의 시설을 실행하는”것을 만철의 전략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또 “문장(文裝)적인 무비(武備)”로 칭하고 철도부속지란 명목으로 식민지경영을 실천했다.   1907년 본부를 동경에서부터 대련으로 옮긴 만철의 조직은 총재아래 총무, 조사, 운수, 관산업, 지방 등 5개 부를 설치하고 대련병원과 무순탄광도 그 산하에 두었다. 그리고 안산제철소, 항만, 전력공급, 농림목축업, 호텔(야마토호텔)경영, 시내로면전차, 가스회사 등등 폭넓은 대종경영을 전개했다. 뿐만아니라 청국을 설득시켜 만철연선의 넓은 구역을 속속 침투하여 군대의 주류, 경찰, 사법, 징세, 교육, 사업인가 등 권익을 취득하였으며 이어 상사, 영화, 방송통신, 조사회사 등 제반사업에서 “만철제국”을 성립했다. 그 내실은 사업투자상대회사가 80개나 되는 방대한 “식민회사군”이였다.   당시 코토가 만철총재직을 인도받는 조건으로 (1) 일본정부직원(관리)이 재직한채로 만철사원이 되는것 (2) 만철총재가 관동도독부의 고문으로 되는것 등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246명의 일본정부관원이 만철에 입사했으며 “국책”적성격을 많이 띠게 된다. 그리고 만철창립당시 만주근무자의 봉급이 실질상 본 봉급의 수배나 되는 수당을 받았다는것이다.   만철에서 특기해야 할 두개 부분이 있다. 하나는 “만철조사부”이고 또 하나는 “만주영화주식회사”이다.    1907년에 발족한 “만철조사부”는 만철경영을 위한 토지, 자연조사로 시작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중국 만주지역의 정치, 경제, 지리, 민속, 문화 등 기초적 조사연구를 진행하는 방대한 조직이였다. 그리고 그뒤 일본식민의 중국진출을 위해 조사상대와 범위를 만주를 넘어 중국 관내지역으로 확산시켰으며 본격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그 동경지사는 1908년 설립되면서 동아시아경제조사국, 만주 및 조선 력사지리조사부를 설치하고 조선에 대한 문화, 력사, 풍습연구도 병행시킨다. 1918년 설립된 대련도서관도 만철조사부의 일환이기도 했던것이다.   주요 조사활동을 보면 1908년~1914년의 만주, 조선 력사지리조사, 일본 동양학 창시자들인 시라토리(白鳥庫吉), 츠다 사유기치(津田左右吉) 등이 참가하며 동양학의 기초자료를 발굴하기도 한다. 이어 화북자원조사(1935년), 지나항전력조사(1939년), 화중관행조사(1940년), 전시경제조사(1941년), 남방점령조사(1942년) 등등 방대한 조사는 중국과 조선인식의 기초적데이타, 정보를 제공하며 일본식민지침략에 원용되기도 한다.   그뿐만아니라 《만철조사월보》, 《만몽사정》, 《북경만철월보》, 《서향(書香)》, 《북창(北窓)》 등 잡지간행물을 펴내여 당시 중국의 지(知)적상황, 문화, 경제를 리해하는 불가결의 귀중한 기초자료를 남겼다. 그리고 만철에 있던 인물은 대부분 일본의 전후 산업, 학술, 정계에 진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1937년에 창립한 “만영(만주영화협회)” 역시 만철영화부를 토대로 만주의 유일한 영화회사이며 식민지국책의 선전을 목적으로 맹활약을 한다. 당시 간판스타로서는 리향란(李香"? 즉 가와구치 요시코(山口淑子)가 활약했으며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스타였다.   국책영화회사의 “만영”이 남긴 방대한 기록영화의 필림은 당시 만주를 리해하는 소중한 영상자료이다. 필자가 소유하고있는 당시의 31권의 “만영기록영상”에는 만주의 민속, 문화, 사회, 뉴스 등이 생동하게 기록되고있다. 지금의 장춘영화제작소는 바로 만영을 그대로 인수하여 재건한 중국의 첫 영화제작소였다.   만철은 장춘ㅡ대련의 표준레루를 부설하는 등 만주철도망건설에 공력을 들였는데 그런것을 토대로 해방후 동북철도교통의 정비는 전국 최고의 수준이였다.   그러나 “만철”이 건설했던 철도를 비롯하여 유감스럽지만 일본식민지, 일본제국주의의 중국대륙침략에  “길안내”역할을 한것은 그 역시 “침략자, 식민주의의 최전선의 첨병”이란 오명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식민침략은 흔히 이렇게 철도라는 길을 통한 기차에 실려오는것이다. 이 역시 근대식민침략의 길이기도 했다는 특징을 시사해 준다.  
126    (40) 100년전 일본인의 조선 중국 려행붐 댓글:  조회:4941  추천:10  2013-12-10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40) 100년전 일본인의 조선 중국 려행붐 김문학                     일본인의 해외 동경, 특히 서양에 대한 동경심은 전근대에도 엄청컸다. 서양으로 간다는 “양행(洋行)”이란 신조어까지 탄생시키면서 막말(幕末)로부터 붐이 됀 서양행은 일본인이 보편적으로 품고있는 “서양동경심”을 잘 로정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있어서 서양은 동경해도 당시의 도항사정, 경제사정으로 려행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양려행 대신 만족시켜준것이 바로 조선, 만주(중국대륙) 려행관광이였다. 당시 이를 “동아려행권(圈)”으로 불렀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동아려행권은 서양권과 비교해 아직은 미개발상태였으나 일로전쟁직후인 1906년부터 동아려행의 붐이 시작된다. 왜 일거에 조선과 만주중국려행관광의 붐이 형성됬을가?   그 리유로는 일로전쟁승리의 력사적배경이 있다. 1905년 9월 일로전쟁승전에 의해 일본은 로씨야로부터 청국의 “만주남단, 관동주의 조착권”과 “동청(€{1C?철도의 대련ㅡ장춘사이의 권익”을 양도받는다. 일본정부에서도 이 지역 보호국으로 조선에 일본국민의 려행주유를 개방하였기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리유는 1906년부터 조선이나 만주로 통한 철도가 개통되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려관들도 많이 생긴것이다. 특히 1906년 설립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이라 략칭했음)의 설립으로 철도설비가 구전되며 철도연선의 구역에도 일본인관광에 편리를 도모한 인프라가 정비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만철회사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함)   “가자, 가자, 바다로 나갈바엔 인천항, 대련항, 아직 보지 못한 곳으로 나가보자. 보라, 보라, 산을 구경할바엔 만주전토, 한반도, 보지 못한 산봉우리를 보러 가자.” 유아사라는 시인이 1906년 6월 22일 동경 아사히신문에 쓴 “만한순유가”의 한토막이다.   그해 아사히신문에서 선국적인 기획 “일청, 일로 전적견학 단체려행”을 조직하여 처음으로 일본대중들이 조선, 만주땅을 밟게 된다. 그리하여 7월 25일, 특별선으로 요꼬하마를 떠나 만주에 도착하자 려순, 봉천 전장터, 무순탄광시찰, 만주의 넓은 땅을 그들은 친눈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조선, 만주 려행의 선코를 떼자 잇따라 붐이 형성된다. 당시 만주, 조선의 산업, 지리, 국토, 력사, 교통, 민속, 동식물채집 등 실정파악과 력사학습의 목적으로 관광이 전례없는 호황을 이룬다.   1909년 9월 3일부터 30일까지 실시된 “만한관광단” 일행 34명은 1개월동안 만주, 조선에 대한 려행시찰을 통해 이듬해 《만한관광단지》라는 려행체험담집을 간행한다.   그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만주, 조선에서 그 어디를 가도 국빈급 환대를 받았으며 일반 현지인들과 직접 회화를 하기도 , 교류를 하기도 했다고 쓰고있다. 인천에서 일본인들은 일로전쟁시 드리야투호전함이 침몰된 장소를 돌아보고 신사참배를 했으며 평양에서는 일로전쟁 전사자의 묘지를 참배하기도 했다.   실업가, 민간인의 만주, 조선 관광은 로일전쟁승전의 전적지를 관광함과 동시에 이곳에다 관민이 협력하여 식민개척을 하며 일청, 일로전쟁에서 승리를 취득한 일본의 지대한 자존심을 확인하여 미개의 나라, 후발국 조선, 만주를 식민지로 하는 필연성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 한국병합후 조선반도에 려행한 일본인의 수자가 급격히 늘어나며 만주뿐만아니라 북경, 상해, 천진 등 대도시에도 많이 드나들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유명 문사들의 조선, 중국려행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것도 특기할만 하다. 일본 근대의 국민적작가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만철의 초대로 조선, 만주를 려행하고 유명한 체험기 《만한 이곳저곳》을 발표한다. 유명 문사들의 필을 빌어 만주철도회사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뒤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등 유명 작가들이 만주려행의 길에 오른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당시 학생들의 수학려행으로 조선, 만주를 택한것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교육에서 학생들의 “원족”은 군인의 “행군”을 본따서 행해진것인데 1884년 7월에 벌써 “생도의 원족”이 탄생한다. 지금까지 일본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수학려행, 원족은 사실 백여년전의 전통을 갖고있다.   1906년 7월 문무성과 륙군성이 공동으로 주최한 “전국중학교 합동만주려행”이 실행되였는데 그 목적은 역시 일로전쟁 전적지 순방이였다. “장래 국민교육에 종사할 인물, 미래의 교사들에게 일로전쟁승리의 자존심과 제국일본령토의 광대함을 체험하고 제국신민을 육성하는”  려행이였다.(이양희) 조선으로의 수학려행은 1920년대에 들어서 대폭 증가한다. 1920년 7월 《조선》에 의하면 그해 5월, 1개월간 기차리용 단체객이 21,408명인데 그중 학생단체가 16,900명이였다. 당시 만주,  조선이 일본려행자들의 인기를 끈 리유는 섬나라 일본에는 없는 광활한 지평선이 보이는 대자연이였다. 당시의 일본인 만주려행체험에는 “기차의 차창을 통해서 바라본 만주평원”의 묘사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료양, 길림도 좋고 려순도 좋았으나 당시 려행체험에서 보아낼수 있었듯이 일본인의 최고인기의 려행지점은 대련, 봉천, 신경(장춘),  할빈 이 4대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최고인기도시는 할빈이였다고 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이중이국정서가 풍기는 도시였기때문에 일본인들이 선호했던것이다.   1930년대에 만주려행은 철도의 정비에 의해 세계 최고속의 “아시아”특급이 달리고 시내에는 관광뻐스가 질주하는 등 사정으로 보아 피크에 달한다. 특히 1932년대 “만주국”창설과 전시체제하에 일본군화의 발걸음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일본인의 만주도항은 급증한다. 1936년부터 히로다내각의 “만주이민계획”책으로 32만의 일본인이 북만을 중심으로 정착한다. 1945년 155만의 일본인이 만주에서 살고있었다.(군인과 민간인 합계)   오늘 일본인의 중국동북려행과 한국려행의 뿌리는 100년전의 “동아시아려행권”에서 비롯된것임을 발견하면서 그 식지 않는 려행의 열에서 일본인의 또다른 “이문화 동경심”을 읽을수 있다.  
125    (39) “련애”의 발견 댓글:  조회:5396  추천:12  2013-11-30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9) “련애”의 발견 김문학       "련애”하면 오늘날 공기와 물 같이 지극히 당연지사로 보편화된 말이지만 그 관념과 단어는 근대화과정에서 서양에서 수용한것이다.   “련애”라는 단어는 1847년~48년 메드 하스트에 의한 《영화사전》에 가장 일찍 등장한다. 그러나 그 말이 정착된것은 1887년경 일본에서였다. 일제한어로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일본을 통해 수입되는 때가 대력 20세기초기라고 전해진다.   중국 상해출신의 재일 비교문화학자 장경교수는 “련애는 서양의 근대와 함께 중국과 일본에 수용되였으나 일본의 근대화가 빨랐던것과 같이 ‘련애’의 수용도 일본측이 역시 앞섰다”고 지적한다.(《련애의 중국문명사》 1993년) 장교수는 중국이 늦어진 원인을 이문화사고체계의 도입은 중국 전통존중의 리유로 배척했다고 판단한다.    “련애 수용을 보면 일본에서는 메이지 20년(1887년)에 후타바테이(二葉亭四迷)의 《부운(浮雲)》과 같은 치밀한 구성을 갖고있는 근대소설이 증장하며 서양의 련애에 대한 리해의 깊이와 흡수의 조기적양상을 로정했으나 동시기 중국에서는 근대소설은 아직 생성되지 못했다. 중국 최초의 본격적 서양소설의 번역마저도 일본의《부운》보다 21년이나 뒤늦어 발간된다. 량국의 문화인은 전기나 가스 등 문명개화의 혜택을 받으면서 인문과학, 우선 문예면에서는 이문화를 어떻게 수용할것인가란 점에서는 결정적인 이질성을 보여주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효시인《부운》은 일본 근대의 시대적특징이 포함되 있으며 당시 일본사회가 남녀교제를 장려하고 자유련애를 제창한 사실을 알수 있다. 1890년대의 리혼률이 매우 높았으며 외국 식자들도 주목할 정도였다. 신녀성의 발랄한 등장과 더불어 일본의 근대련애는 문화인을 중심으로  “련애결혼”을 리상으로 간주하면서 련애결혼을 동경하는 녀서오가 보수적부모사이의 갈등도 생겼다.   당시 문화인과 미인, 선생과 녀학생사이의 련애, 결혼이 류행병처럼 퍼지면서 근대 일본의 “련애”혁명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일본과 같이 중국에 전달된 서양의 련애는 하나는 문학작품에 나타난 정서적표현의 세계, 또 하나는 서양의 문화습속으로서의 련애였다. 20세기 초기까지 서양인의 “련애”는 지극히 불가사의한 세계였으나 서서히 련애를 수용하기 시작한다.    서양의 문명에 밝고 녀성의 자유와 련애의 자유를 추구한 일부 지식녀성, 신녀성들속에서 련애는 서양수용의 좋은 문화현상이였다.   일본류학을 통해 개안한 혁명가 추근 역시 서양의 자유로운 련애관념을 수용하면서 리혼하게 되며 신녀성으로서 녀성해방과 청조타도운동에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일본과는 비교적 늦게 “련애”를 수용한 중국에서는 서양적련애에 대해 문화풍습으로 인정한 때는 20세기에 들어서였으며 특히 지식인사회와 부유층 계급에서 녀성의 사교자유와 련애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부모가 정해준 결혼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많이 나타나고서부터였다. 중국 근대의 련애가 “혁명”과 밀접히 련계돼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손문은 로정모라는 고향의 녀성과 결혼이 정해졌으며 결혼하여 아이까지 몇명 낳지만 결국 “서양의 자유련애사상의 세례를 받은” 그는 리혼하고 그뒤 송경령을 배우자로 맞는다. 신문화운동의 거장인 호적 역시 전족녀성과 결혼하고도 미국류학시절 웰리암이란 미국녀학생과 련애하다가 귀국한다. 결혼후 1921년 10세년하의 녀학생 조패성과 련애에 빠지기도 한다가 안해 강동수에게 들켜 식칼을 들고 죽고살자는 강씨의 해프닝이 벌어진다. 대만에서 1962년 뇌출혈로 죽었을 때 독신으로 있은 그 애인 조패성은 여전히 중국대륙에서 독신녀로 기다리고있었다.  로신 역시 어머니가 정해준 전족녀성 주안과 결혼했으나 한번도 곁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북경녀자사대에서 강사로 출강할 때 17세년하의 제자 허광평과 련애하게 되며 상해에서 동거하는 때가 1927년이다. 자유련애의 생활을 만끽하던 문호는 당시 국민정부의 법률에 의하면 중혼죄에 걸린다고 한다.(후지이 쇼조)   곽말약, 림어당, 서지마, 파금 등 문단의 거물들이 실천했던 소탈한 “련애”는 중국 근대문학사뿐아닌 근대사의 련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있다.   근대 조선에서도 “련애”사정은 중국이나 일본과 류사한 양상을 나타낸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젊은 남녀의 생활패턴을 가장 크게 바꾼것이 바로 자유련애와 결혼문화다. 당시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조혼제도는 이러한 자유련애와 결혼을 가로막았고 근대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신녀성들은“로라”의 길이나 “제2의 부인”의 길을 택해야 했다.” (신명직)    조선에서는 1910년 식민지문화수용을 통해 “련애”가 수용, 실천되면서 근대 련애리론은 여전히 일본의 구리야가와 등 련애론이였으며 김동인 같은 련애의 달인형 문인들도 속속 등장하기도 한다.   1920~30년대의 신녀성의 등장으로 자유주의 련애, 결혼이 근대사회의 볼만한 풍경으로 자리매김된다.    련애가 결혼문화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난 큰 변화는 일본도, 중국도 그러했지만 조선에서도 상품화된것이다. 자본주의적 금전, 경제관이 침투되면서 금전관계를 매개로 련애와 결혼이 이루어지기가 일쑤였다. 사회주의립장에서 허정숙 등 신녀성들이 금전화된 련애결혼을 비판하였다.    오늘날의 련애, 결혼에도 금전, 경제적 공지의식이 상당히 침투되였는데 100년전의 자유련애와 결혼 역시 비슷했다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백년전의 련애자유와 결혼으로 전근대적 결혼양상이 변용하여 안해나 녀자가 “상위”로 부상되며 “남녀평등”이 상식으로 급변해간다.                   100년이 지난 현재 남녀평등이 페이니즘의 극으로 승격하여 녀성이 절반 하늘을 떠멨다는 모택동의 근사한 말이 이미 동아시아사회에 실천되고 보편화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뿌리는 바로 백년전에서 기인됨을 재발견할수 있다.  
124    (38) “신녀성”의 발랄한 등장 댓글:  조회:6111  추천:11  2013-11-2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8) “신녀성”의 발랄한 등장 김문학       한중일 동아시아에서 “신녀성”이란 말이 등장하는것은 백년전 1910년이다. 한국병합과 때를 같이하며 일본의 대정(大正)시대와 중국의 민국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무렵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신녀성”은 “새로운 근대사의 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냐면 지금가지 력사의 “주인공”은 당연히 남성이였으며 그 절대적인 지배적영향에 가리운 녀성은 왜소하기만 했기때문이다.   “신녀성”이란 개념, 의식이 생성됨에 따라 그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것은 1911년 일본에서 창간된 녀성잡지 《청답(靑踏)》에서였다.    “원시(元始), 녀성은 기실 태양이였다. 진정한 사람이였다…” 그해 8월하순 창간된《청답》의 창간사에서 젊은 녀성 히라츠카 라이데우가 선언한다. 5명의 젊은 녀성이 창간한 잡지는 일본 근대의 녀성의 각성을 선고하였으며 그 녀성해방의 기발아래서 기성 가족제도에 대한 반역, 현모량처의식에 대한 대결을 통해 “자아”를 추구하고 사랑과 성의 자유를 추구실천한 “신녀성”이 형성된다.   당시 일본 최고의 작가로 불린 츠보우치 쇼요(坪內逍遙)의 연극론 “소위 신녀성이란것”이란 글에서 “신녀성”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지금까지 “신부인(新婦人)”으로 일컬었던것이 일약 뉴우먼(New Woman)이란 의미로 일본사회를 석권하는 키워드로 승격된다. “신녀성”은 우에서 말한 특징의 새로운 타임의 녀성을 긍정하는 용어로서 정착된다.   히라츠카 역시 “나는 신녀성이다”고 소리높이 주장하면서 그 리론과 함께 과감히 주장을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츠보우치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론하면서 신녀성의 문제는 “부인(婦人)의 해방, 자유의 문제이며 첫째 대우, 둘째 재산, 세째 교육, 네째 직업 등에서 어디까지나 남자와 동등의 위치를 희망하는것”이라고 진술한다.   그리하여 “신녀성”은 신선하고 충격적인 양상으로 일본사회에 등장하면서 “근대인의 특색으로 녀성을 표현한  신녀성”이 광범한 활약상을 과시하게 된다.   따라서 신녀성의 씩씩한 모습은 그 걸음걸이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 나라 녀성에 대해 관찰해도 대저 그 걸음걸이에서 신사상이 가미된 녀성이라고 즉각 판단된다. 신사상 영향을 받은 녀성은 발걸음도 씩씩하고 그 태도, 용자 역시 어쩐지 기세찬 멋이 있다”고 신녀성을 묘사한 남성 지식인이 있었다.   녀성의 지위가 비천했던 동아시아에서 “신녀성”의 등장은 말그대로 근대 “녀성의 혁명”이였으며 사회의 혁명이였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도 지적하다싶이 한국의 근대가 “식민지적모더니티”로서 일본의 영향을 받은 특징이였다면 “일본화된 서구화”(력사학자 박용옥 등)의 일환으로 녀성이 받은 일본의 영향을 배제하기 어렵다.   1909년 4월 경희궁에서 거행된 “녀성류학생 환영회”에 700~800명의 하객이 운집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학업을 수료하고 귀국한 3명의 녀성류학생 즉 박에스터, 하란사, 윤정원을 환영하는 모임이였다. “그러나 이 세 녀성엘리트에 대한 사회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들의 뜻을 펼치기에는 당시 시대는 너무나 암울했다.”(조선일보, 2009, 12, 4)   조선에 “신녀성”이 등장하고 활약하는 때는 민족운동이 륭성하던 1920년대였다. 일본의 “신녀성”을 조선식민지의 류학생들이 감화를 받고 귀국하면서 조선에 전파시킨다.   자유주의녀성해방론자 김명후, 나혜석은 1910년대 조선류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녀성판인 《녀자계(女子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신녀성”의 선구자가 된다. 김일엽은 1920년부터 《신녀자》를 발간하며 전통적도덕을 부수고 녀성의 자기실현을 소리높이 주장한다.   그들은 “신녀자주의”를 표방하면서 일본을 통해 수용한 서구자유주의, 자아(自我)주의의 련애관을 흡수하고 창도하였다.(김혜숙) 실제로 1920~30년대 서울거리를 활보하는 모던걸(摩登女郞, 신녀성)이 모던보이(신남성)와 함께 패션이나 차림새에서 조선식민자의 신선한 풍경을 이루었다.(신명직 《모던보이, 경성(京城)을 거닐다》)  “신녀성”은 근대사회의 심벌이기도 했다. 백년전 미국과 일본을 류학한 중국의 “신녀성”을 꼽자면 “중국녀자류학생의 제1호”인 김아매(金雅妹)를 루락시킬수 없다. 1872년 의부인 미국인 교수를 따라 일본 동경대학, 미국에서 의학을 배운 그녀, 중국 최초의 북양부인과병원 원장으로 성장한다.    1906년 청국교육부체계에 들어선 녀성교육이 1908년에는 500여개의 각급 녀학당이 설립되며 “녀국민”이 대량적으로 훈육된다.    김천핵이 저술한 《녀계종(女界鍾)》은 녀성의 혁명사상을 주장한 책으로서 중국 녀성해방주장의 최초의 문헌으로 지목된다. 책에서 녀성의 학습, 교육의 권리, 영업, 재산소유의 권리, 출입자유의 권리, 혼인자유의 권리를 창도하며 녀성은 단순히 안해나 어머니가 아닌 독립적인간으로서 인정한다.   근대 “신녀성”의 대표적 인물하면 당연히 혁명가 추근(秋瑾)이다. 1877년 절강태생의 그녀는 1904년 일본으로 류학하게 되며 녀성의 전족페지를 강렬히 주장하며 1905년에 손문이 주도하는 동맹회에 가입하여 활약한다. 남편과 과감히 리혼을 한 그녀는 소흥에서 《중국녀보》를 창간하여 남녀평등사상을 널리 제창하였다. 그뒤 호남성에서 혁명당을 이끌고 봉기를 하기도 하며 혁명에 투신하다가 1907년 7월 청정부에 체포되여 사형당한다.   1920, 30년대 민국시기에 이르러 상해에서 근대적의미의 모던걸이 대거 탄생, 활약하면서 사상 및 용모, 패션에서 “신녀성”이 형성, 정착된다. 이는 동시대 일본식민지에 종속된 한국의 “신녀성”과 오버랩되는 면이 있어 흥미롭다.   서구의 문명을 수용하면서 근대화의 포로세스에서 탄생된 100년전의 “신녀성”은 동아시아사회의 주역으로 점하던 남성과 같이 사회무대에 등단하여 소리높이 “자아”를 웨치면서 또 하나의 절반하늘을 떠멘 주역으로 정착된다. “본시 녀자는 태양이였다”는 히라츠카의 선언과도 같이.  
123    (37) 100년전 일본의 사회주의운동 댓글:  조회:5530  추천:6  2013-11-16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7) 100년전 일본의 사회주의운동 김문학      로일전쟁 당시 질풍노도같이 성행했던 일본의 “주전론”,  “로시야징벌론”의 와중에도 전쟁을 정면에서 반대한 “반전론”,  “비전론자”들이 존재했다.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일본의 “국민국가”가 형성, 성숙되였으며 따라서 신문, 매체의 저널리즘도 성숙되였다.   당시 《요미우리신붕》, 《아사히신붕》외에도 특히 유명한것이 1892년 11월에 창간된 《만조보(萬朝報)》였다. 사회적정의를 호소한 사회개량의 중요한 론진을 펼쳤다.   1902년에서 1903년에 결쳐 일로간의 긴장이 팽창하는시기 사회주의사상가 코오도쿠 슈우스이(幸德秋水),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기독교신자이며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등이 만조보에서 전쟁반대의 반전, 비전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코오도쿠 슈우스이(1871~1911)는 청년시절 저명한 사상가, 자유민권운동가인 나카에 쵸민(中江兆民)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배우면서 메이지관료국가 권력에 대해 늘 비판적립장을 견지했으며 사회주의 실현을 인생의 목표로 걸어온 인물이다.   만조보를 퇴사한 그는 1903년 10월 평민사(平民社)를 결성하여 평민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반전, 비폭력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11월 5일 창간한 주간지 《평민신문》은 평균 4,000부 발행, 일본의 본격적인 반전운동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전개되는것이 특색이였다. 코오도쿠는 인도주의, 평등, 박애로 군국주의를 칼도마우에 올려놓고 비판하면서 효과적인 반전론을 펼친다.   잠간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 사상에 대해 그 력사의 뿌리를 돌이켜보자. 일본의 사회주의로동운동은 미국에서 로동운동을 체험했던 다카노 후사타로(高野房太郞)가 1897년 4월 동경에서 로동문제에 관한 연설을 하고 로동조합을 결성한데서 시작된다. 그 한달전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선각자인 가타야마 센(片山潛)이 다카노와 함께 로동조합기성회를 창설하였으며 1901년 코오도쿠와 같이 최초의 사회주의정단ㅡ사회민주당을 결성한다. 이것은 중국 사회주의정당인 공산당보다 20년 앞선다.   코오도쿠는 1904년 1월 17일호 평민신문의 “비전론특집”에서 사설 “나는 어디까지나 전쟁을 비인(非認)한다”를 발표, 1904년 12월 18일호에는 “비전론을 멈추지 않는다”를 발표하여 전쟁을 규탄, 반대한다.       그뒤 1905년 1월 《평민신문》은 발금처분을 받고 페간된다. 일로전쟁에서 그가 사카이, 우치무라 등과 함께 론진을 펼친 반전평화론은 앞서 말했지만 사회주의사상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괄목된다.   1904년 3월 코오도쿠는 《평민신문》에 “로시야사회당에 보내는 글”을 발표하여 “제군(諸君)은 우리와 동지이며 형제이며 자매이다. 단연코 싸울 리유가 없다”고 절절히 호소한다.   이에 대해 로씨야의사회민주로동당의 마루토브파의 기관지 《이스쿠라》는 로씨야의 만주지배와 일본의 조선지배를 반대한 립장에서 “평화만세”를 창도하면서 코오도쿠의 상기 문장을 소개했다. 그뒤 레닌은 로씨야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고난다음 군국주의, 제국주의를 규탄하며 일로가 싸울 리유가 없었다고 결론짓는다.(《전제와 프로레타리아》 레닌)
122    (36) 로일전쟁때 일본에 협력한 청국 댓글:  조회:5157  추천:12  2013-11-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6) 로일전쟁때 일본에 협력한 청국 김문학     로일전쟁은 청일전쟁과 함께 100여년전 중국과 조선반도를 정장터로 한 제국주의시대의 대리전쟁이였다. 일본의 배후에는 재정적으로 원조를 제공한 영국과 미국이 있었으며 로씨야의 배후에는 역시 후원해준 독일과 프랑스가 존재했다.   2005년 국제학회에서 발표한 로씨야 학자 루코이야노브씨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사료로 보아 여전히 립헌군주제를 기피한 제정로씨야가 일본측보다 더 전쟁에 적극성이 높았으며 일본은 오히려 처음에는 전쟁을 안하고 협조관계를 도모”했으나 로씨야의 창궐한 도발에 역시 주전론으로 기울어진다. 더구나 등뒤에서 힘차게 밀어준 영, 미, 독, 불 서방렬강의 후원에 전쟁은 마침내 발발한다. 때가 바로 1904년 2월 6일이였다.   그런데 청국은 어떤 립장을 취했는가? 속말로 “자기집 문전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는데” 청정부는 2월 12일“국외중립”을 선포하고 지어 “피차 모두 우방(友邦)이다”고 리유를 댄다.   량국의 전쟁터가 대련, 려순, 봉천(심양), 금주 등 당시의 만주지역에서 치렬한 공방전이 전개됨에 따라 많은 청국주민들이 본의 아닌 전화에 말려들어 뜻하지 않은 재화를 입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청정부는 이런것에 개의치 않고 방치한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청국내의 정치적력량은 립헌파, 혁명파 및 청국왕조의 3자가 정치무대에서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전례없는 격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로일전쟁의 발발은 아직은 미약했던 립헌운동에 지대한 자극을 주는 구실을 하게 되며 1905년을 시발점으로 청국내의 립헌운동은 해외 일본립헌파망명자들의 여론선전에 의해 더 격렬하게, 장대하게 벌어지게 된다.   1904년 로일전쟁이 갓 시작된 시점에서 청국내의 상술한 3종 정치력량은 이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냐에 대해 더 큰 흥취를 가지고 전황에 대한 예측을 하면서 그 결과가 초래하는 청국의 영향에 대해 관심을 품었다.   아직은 박약한 립헌파는 “이 전쟁의 결과는 국민들의 사상을 정치개혁에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킬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쟁에 대해 더없이 주목했다.   군주립헌제의 나라 일본이 군주독제주의의  짜리로씨야를 꼭 전승할것이라고 예측했던것은 다름아닌 청국의 립헌파들이였다. 예측하기보다는 그 결과를 간절히 바랐던것이다.   로일전쟁의 3일만에 립헌파의 론설진지인 《중외일보》는 즉각 사설을 발표한다. “지금까지 백인종이 근대화를 빗대고 황인종민족을 억누르고 비백인종세계에서 식민지국가의 시스템(제도)이 그 승패를 결정한다”고 력설한다.   립헌파지식인들은 또 이렇게 직언한다. “전제냐 립헌이냐 하는 문제는 중국 최대의 문제이다. 만약 로씨야가 이기고 일본이 진다면 이것은 우리 정부의 바라는 뜻이다. 중국이 빈약한것은 헌정이 립(立)하지 않은 탓이 아니라 전제가 완벽하지 못한 탓이리라고 정부는 생각한다.”     이렇게 립헌파들은 일본의 승전을 기원했으나 청국왕조와 수구파들은 로씨야가 승리하기를 바랐다. (뢰의 《력사의 틈》)   그런데 청국의 행동을 곰곰히 살펴보면 그 양상은 불가사의한데가 있었다. 청일전쟁후 로씨야를 협조해온 청국이 전쟁도중에서 변동이 생긴다.   동경대학 교수이며 사학자 카토 요코(加藤陽子)씨와 미국인 사학자이며 현재 훗카이도대학 스라브연구소 교수인 디빗트.우르프씨의 연구에 따르면 밝혀지지 않았던 총국의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로씨야가 자금지원한것은 기쁘지만 로씨야에만 붙어있다가는 나라를 탈취당하기 쉽다”고 여긴 청국은 일본이 주장한 “만주개방”에 공감하며 로씨야보다 약한 일본과 협조하여 만주의 문호개방을 하게 하는것이 더 유리롭다고 여기여 일본에 접근한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처음 “중립”을 선포했지만 청국은 일본군과 로씨야군이 싸울 때 일본에게 돈을 기부한다. 청국의 지방관료들이 일본군에게 의연금을 거네주기도 한다. 원세개도 일본에 상해은 1만냥을 보내주기도 한다. 더욱 흥미로운것은 전쟁터에서 일본군에 대한 청국측의 협력이다.   주지하다싶이 당시 전쟁터는 물론 만주였다. 조선외에도 려순, 대련, 금주, 봉천, 철령, 창도 등등 만리장성이북 동북지역에서 전쟁이 전개된다.   만주에서의 첩보전은 일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였다. 그 리유는 어디에 있을가? “중립”이라고 하면서도 일본을 적극 지원한 지방관료의 백업이 그 배경에 있었기때문이다.   지역의 지리사정에 밝은 현지 청국인(주로는 농민)이 일본군의 첩보전에 적극 뛰였다. 농민들이라 문맹이 많았으나 로씨야군이 마필이 얼마되고 군대가 어떤 번호를 달았냐 하는 정도는 잘 알고있었다.   이렇게 일본군은 상당히 정확한 정보, 이를테면 철도연선에 배치된 로씨야군의 실전을 파악할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소박한 청국 농민들의 첩보전지원이 일본군이 로일전쟁에서 200:16의 강대한 로씨야군을 격파할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로 추정한다.   전쟁승리후 포츠마스조약의 체결은 로씨야외의 모든 제국주의에게 “만주개방”의 구실을 주었으며 일본의 “조선식민지화”에 직결시켰다.   또한 일본의 승리는 청국에서 팽배하던 립헌혁명에 지대한 고무격려가 되였다. 립헌파들은 환호작약하며 이를 계기로 1905년 8월 손문, 황흥 등의 “동맹회”가 창건되기도 한다. 그리고 청국왕조의 수동적인 변혁, 이를테면 과거제도의 페지 등 개혁이 1905년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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