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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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5. 대중들은 “思想”한다 (김문학) 댓글:  조회:4552  추천:30  2010-08-23
《신조선족》월경론 25. 대중들은 “思想”한다   김문학     연변조선족 내지 조선족 전반적 “해체위기설”에 대한 언설과 사상은 지식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종의 의미에서 우리 조선족의 고고한 언설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 자신이 착각하듯이 고명한것이 아니라 “탁상공론”이란 질타에서 自由로울수 없는 면들이 많이 존재한다.   필자는 오히려 삶의 최기층과 최전선에서 몸으로 땀으로 체험을 하고 있는 광대한 우리의 대중들, 비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더 실제적이고 현실에 밀착된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같은 느낌은 아마 필자 혼자만이 아닐것이다.   개혁개방 중반에 이르러 중국 지식인의 지적(知的) 탐구는 체재내의 위에서부터 부여하는 물질적 생활, 조건의 향상으로 편향되고 안일한 환경의 혜택을 듬뿍 향유하면서 “사색”과 “사상”은 일종의 정신적 나태로 변형되고 매우 “물질적 인간”으로 변용되어버렸다.   환언하면 일종의 “俗物的知識人”이 물질적 배경하에서 탄생된 셈이다.   국내 조선족의 체제적 혜택을 충분히 향유하고 있는 지식인 역시 이같은 유사한 지식인이라는 점에서는 중국 한국 속물적 지식인과는 구별되지 않는다.   조선족 지식인은 思想했는가?란 질문에 필자는 부득불 부정적인 답안을 준비해 둘수밖에 없다. 思想을 여기서 動詞적 의미로 사용한것은 사상을 하나의 실천으로 향하고 또는 실체험에서 대중적 기반의 진실성이 반영되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함에서다. 우리 지식인은 기실 “思想”도 없거니와 “사상”도 하지 않았다.   사상 내지 지식은 개성적 지식인, 사상가들에 의해서 명시되는것만은 아니다. 일반 대중의 지식, 현실인식 상태도 “사상”의 한가지 형태로 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사상은 대중적 집단에서 생성되는 코멘센스(良識)로서 되려 대중의 지식, 언설에서 반영되게도 한다.   1990년대 이래 최근 10년 조선족 비지식인의 인터넷상의 활발한 언설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양식(良識)적인 “사상”을 노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변대학의 김강일 교수가 2009년 6월에 조글로에 발표한 “조선족사회는 왜 해체위기를 맞고 있는가”에 대한 대중들의 리플방식으로 발설된 언설들은 우리 지식인의 “공론적” 현실파악의 결함과 한계성을 갈파한 의미에서 그들의 “사상”을 읽을수 있었다.   “미래안”이란 네티즌은 연변이 조선족 대중에게 흡인하는 매력이 없는 점을 11조의 항목으로 분석, 나열했다. 매우 정곡을 찌른 정확한 지적이다.   “매력적 연변의 공간”을 호소하는 너무나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근거를 제공한 면에서 이 11조 항목은 의의가 크다.   네티즌들은 연변공동체의 “해체”를 다른 시각에서 포착하면서 세계적으로 신공동체의 형성 “사상”을 피력한다.   연변조선족 공간의 해체를 꼭 마이너스로만 보지 않고 월경민족으로서의 구조를 활성화시켜 새로운 도시 공간 문명의 창설을 주장하는 “思想”이 잘 반영된다.   이 “사상”은 실생활체험에서 “人間”으로서의 대중들이 주장하는 21세기에 적응시킨 신조선족의 비전이 될것이다.      
40    사실무근의 "오마이뉴스" (김문학) 댓글:  조회:3619  추천:26  2010-08-20
무근무실의 “오마이뉴스”   ■ 김문학     세상 사람들은 10년에 걸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나 개인에 대해 여러 가지 행태와 목적, 의도로 관심, 주목하고 있는데 대해 당사자인 나는 감사하는 한편 때론 어처구니없고 당혹할 때도 가끔 있다.   오늘 정오, 또 독자들의 제보가 들어왔다. “김정룡 선생이 쓴 <김문학의 반대파 수용>이란 글이 나가자 폭발적인 클릭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 글에다 단 댓글에 ‘태산’이란 익명의 네티즌이 오마이뉴스 보도랍시고 김문학선생이 ‘일본우익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가 다시 일본의 영토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는 보도를 올렸다. 그럼 김문학선생은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가?”   나는 독자들의 전화를 받고 앙천(仰天)했다. 그야말로 속담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 민다”더니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고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독자가 가르친 대로 “태산”이란 익명의 네티즌이 쓴 댓글을 찾아보았다. 그 골자는 주로 이러한 내용이었다.   “김문학은 요미우리신문의 시사잡지 ‘야마이노 특보’ 4월호에 실린 인터뷰 내용에서 한국이 식민지 지배를 받을 때는 행복했고”, “한국인 스스로 주권행사, 영토를 가질 자격이 부족하다”고 했으며 “한국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다시 일본의 영토로 지배해야 한다”고 했다는 등등이다.   직접 이 댓글을 읽는 순간 나는 아연했다. 나는 진짜 요미우리 신문사에 “야마이노특보”란 잡지가 있는 줄도 모르며 이 잡지사의 인터뷰를 받은 적은 더구나 없다.   참으로 기괴천만의 미스터리, 불가사의의 조작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이 소식은 100% 날조, 위조이다!   내실을 잘 모르는 광범한 독자 제현들이 보면 진짜 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고 믿겠다싶으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뉴스보도”가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마이뉴스가 왜 내 개인에 대해 이런 무중생유, 무근무실의 보도까지 날조해가면서 나를 “악자”로 몰아붙이는지 모를 일이며, 그게 진짜 오마이뉴스의 보도가 옳기나 한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광범한 독자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나는 부득이 이 무근무실의 소식이 날조임을 밝히는 바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대듀마는 자신에 대한 비방, 중상에 대해 이런 명언으로 대응했다고 전해진다--   “도도한 강물에 한, 두 사람이 방뇨를 아무리 줄기차게 해댄다 하더라도 강물이 오줌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김문학은 여전히 김문학일 뿐이다! 진실을 말하는 월경하는 자유지식인, 이게 나다.  2010.8.18 
39    (11). 이토 히로부미와 무술변법 (김문학) 댓글:  조회:5450  추천:23  2010-08-18
<장련련재>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1)   이토 히로부미와 무술변법   김문학1898년 9월 21일. 이날은 어떤 날인가?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흑했던 하루, 무술변법이란 유신혁명이 서태후를 위수로 한 수구파 세력에 의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날이다.   “무술변법”으로 칭하는 이 혁명은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 “무술유신”이었다. 이 역시 또한 1895년 청일갑오전쟁에서 대패를 당한 청국의 부득불한 유신이라는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과 싸워 이기자”고 외치던 주전파 관료들도 전쟁의 패북으로 그 청나라적 대국의 오만한 사고양식을 전환시킬 계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독서인(지식인)들이 이미 양무운동의 실패에서 얻어낸 교훈을 정치지배시스템을 개혁하고 일본식의 “국민국가”로 변신하지 않았기에 서양은 물론, 작은 동양의 섬나라에게도 여지없이 완패하는 망신을 당했다는 점이다.   남방 해남의 고양파 대가로 명성을 날린 지도자 강유위는 일찍 1888년 《일본변정고》를 집필하여 일본명치유신에 따라배우자고 광서황제에게 상서하지만 보수파 관료들에게 각하당하고 만다. 그러던 1895년 4월 “마관조약” (일청강화조약)체결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에서 과거시험을 보려던 강유위와 전국에서 운집해온 거인들 603명을 소집하여 연명으로 유명한 “공거상서”를 감행한다. “공거상서”는 과거수험생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헌상하는것으로써 “명치유신을 따라배워 청국을 부국강병으로 이끌자”는 개혁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약관 27세의 광서황제는 명치천황과 같이 실권이 없었고 서태후 등 수구파를 움직일 력량도 결여했다. 1884년 조선의 젊은 개화파의 리더가 지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듯 무술유신도 기껏해야 백일천하로 막을 거둔다.   명치유신과 무술변법 그리고 조선의 갑신정변 이 삼자를 비교해보면 유독 명치유신이 왜 성공할수 있는 결정적인 원인은 색출해낼수 있다. 무술변법이나 갑신정변은 주위의 인재, 환경에 유연(柔软)하게 대처할 유연성이 결필했으나 명치유신은 그것이 확보돼 있는 유연구조, 명치천황과 그 주위의 영재들인 오오쿠보(大久保),기도(木戶) 가츠(勝)등이 가변성과 다의성을 갖고 동일한 행동을 보였기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유신은 상하의 유연성 있는 연합이 결여했고 “강경한 구조”로 일방통행으로 감행됐기에 꼭 목 잘리고 피흘리는 비극으로 종말짓기 마련이다.   두나라의 유신패자들이 다 같이 일본으로 망명한 것 역시 일본은 동아시아 혁명의 중심이었다는 유연한 구조의 땅이었다는것을 설명해준다.   당시 중국이 무술유신에서 성공할 찬스는 있었다. 그런데 그 찬스를 중국은 스스로 잃어버렸다.   베일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 하나를 이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역사를 읽는 묘미의 하나가 바로 베일에 가려졌던 모르던 역사의 장면을 캣치해 내는 그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무술변법의 특징은 곧 1868년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것인바, 명치유신으로 국민국가를 완성시키고 일본 최초의 근대헌법을 제정한 최초의 총리대신 이토히로부미는 그때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젊은 유신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선망의 대정치가이기도 했다.   마침 무술변법이 한창 백열화로 진행중인 1898년 6월 이토는 제3차 이토내각을 사임하고 일청전쟁후 3국정세를 알고보고자 7월 조선을 거쳐 9월 14일에 북경에 이르렀다. 그런 동아시아의 유명 정치가인만큼 이토는 유신파 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때 신문보도를 보아도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어 이토의 지도를 받고자 면회를 요망했다.   더우기 강유위의 발안으로 이토를 청국정부의 수상 (또는 정부 최초 정치고문)으로 초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토가 확실이 응했는지는 기록에 없어서 불투명하다.   그무렵 이토는 적극적으로 유신파들과 만나 많은 조언을 주었다.   “성급하게 표면적인 개혁을 피하고 계획있게 점차적으로 진행하도록 농.공.상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선 교육을 정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토는 또 9월 15일 총리아문을 방문하여 “이 나라 대신, 관료들이 나라 정치보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황제에게 솔직한 진언을 못하는것이 안타깝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9월 20일 광서황제를 배알한 이토에게 황제가 “개혁의 순서나 방법에 대해 총리아문의 5대신들에게 지도해주십소”하는 요망에 “귀국을 위해서라면 성심 성의를 다 하겠나이다”고  이토가 답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21일, 서태후 등 보수파들은 이토까지 가세했다는것을 눈치채고 무술유신을 일거에 짓부순다.   만약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란 전제가 금물이지만) 이토가 청국유신의 최고 고문으로서 혁명을 지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무척 흥미로운 가설이다. 가설이긴 하나, 이토의 방법대로 순조롭게 유신변법이 추진됐다면 근대사의 새 페이지를 썻을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그뒤 이토가 일본공사관에 머므르고 있을때 서태후의 쿠테타를 피하여 비호를 요구하여 뛰어든 양계초를 이토가 보호해주었다. 이토는 일본공사관 직원에게 “양계초같은 유능한 인물을 살려주어야 한다”고 부탁하여 마침내 강유위와 함께 일본의 배에 타고 망명에 성공한다.   그들이 일본을 제2의 혁명근거지로 맹활약하게 된것도 이토의 도움이 있었기때문이다.  
38    24. 조선족은 “행복”했는가 (김문학) 댓글:  조회:4266  추천:29  2010-08-17
《신조선족》월경론24. 조선족은 “행복”했는가 김문학  우리 조선족 지식인,학자들의 “조선족論”에 조선족의 사회, 공간의 “해체위기”의 언설은 수없이도 등장한다. “조선족들이 이미 정든 고향을 떠나 국내나 해외로 나갔다는 결론”을 일괄 하면서 거기에 절락된것은 그럼 왜 조선족이 고향을 떠나게끔 했는가? 그 본질적 근원과 배경을 추구하는것이다.그 본질적 근원이란 “조선족 대중들이 조선족고향 (집단 공간)에서 행복했는가?”하는 중대한 사실이다. 솔직히 직언하면 연변과 같은 조선족사회가 조선족의 다수 (대중)을 진짜 “행복”하게 했는가? 고향을 굳이 떠나면서도 “행복”을 추구한 조선족 대중의 욕구 (물질적 정신적)를 만족시켜줄만큼 사회가 그것들을 제공했는가?이같은 본질적인 생존문제가 대중들에게는 “민족”이란 개념의식보다 더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다.기득권층으로서의 지식인과 우리의 다수의 대중 사이에는 이런 심각한 갭이 위기 의식만큼이나 크게 존재한다.필자의 관심사의 하나가 역시 이 “조선족은 ‘행복’했는가?”하는 문제다. 이것은 조선족의 “월경”이 전개되는 20세기말 시점에서 당시 필자가 안고 있던 번뇌문제군의 하나이기도 했다. 20세기가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라고 질문해도 진보, 발전이란 개념은 적용시킬수 있어도 “행복”이란 허들 앞에서는 엉거주춤 할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 한다.왜냐면 전인류 하는 거시적 시점이 아닌, 인간의 매개인이란 미시적, 충감적으로 바라본 개개인은 다 평등하게 균질한 “행복”을 이룬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우리 조선족의 다수는 이제껏 뿌리 박고 삶을 영위 해온 중국이란 사회와 “행복”을 밀접히 연관 되있는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럼 우선 중국은 어떤 상황이었나?필자는 이 “중국”이란 자체가 꼭 대중들을 “행복의 낙원”으로 이끌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이 추구해온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 건설이 개혁개방을 통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로 나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빨간”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도입되고 경제가 활성화되었다.지금까지 10% 성장률을 계속하여 보전하는 경제성장은 세계의 독보적 위상을 유지하며 중국 사회주의 발전의 대국적 표상을 선명하게 과시하고 있는것에 대해 필자는 경희를 느끼며 조선족들도 그 혜택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받게 된것을 행운으로 생각 된다.그러나 경제의 활성화에 따라 생산력 향상과 함께 부유가 일부분 관료와 기득권 세계에 집중되면서 “빈부의 차이”가 천양지별의 양상을 노정시켰다. 외국의 중국관찰가들은 “유럽과 아프리카가 동시에 공존하는 나라”라고 중국의 현실을 풍자하기도 한다.일본의 중국연구가 키다무라 미노루교수는 “빈부차이”,”탕관오리”,”부패의 만연” 등 키워드를 구사하여 “중국이 성급하게 사회주의 이데올리기를 도입하여 그것을 잘 저장하지도 않은채 사회에 적응한 결과 전통의 변혁도 이루지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사회주의의 실현도 이루지 못하는 소화불량상태가 발생했다”고 회의한다. 그 의도는 자명하다. 중국은 인민대중을 평등한 행복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것이다.이 중국속의 작은 변경인 마이너리더로서의 조선족은 “행복”했던가 하면 필자는 역시 회의적이다. 정도 차이나 현실적인 차이는 있어도 여전히 중국사회의 그 상태가 조선족 사회에 그대로 존재한다.그런데 다수의 중국 한족들이 생각은 있어도 실행하기 어려운 월경, 특히 해외로 (한국 등 나라)  진출하는 월경은 행운스럽게도 조선족에게 주어진 호조건이었다.조선족사회 공간에서 찾지 못한 행복 (물질적 부와 정신적 개방성)을 찾아 조선족들을 그야말로 풀을 찾는 양떼와 같이 고향을 떠나 해외로 모험의 길을 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조선족에게 핏줄기인 동시에 젖줄기였다. 부와 정신적 가치의 풍요한 乳源이었다.필자는 “조선족 개조론”에서도 “한국이 있기에”란 소제목을 달고 언급했었다. 아무튼 국내 연해도시 내륙으로 또는 해외로의 진출은 조선족사회에서  부여받을수 없는 행복을 찾아 떠난 모험의 월경이었다.
37    23. 잡식성, 양떼같은 신조선족 (김문학) 댓글:  조회:4560  추천:34  2010-08-10
《신조선족》월경론 23. 잡식성,풀을 찾아 모험하는 양떼같은 신조선족   김문학 필자가 조선어를 “잡초성”으로 지침한 이유는 사실 다른 의도가 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언어구조를 통해 우리 자신의 문화구조, 국민성에 대해서 사색하고자 하는것이다. 또 그것을 통해 신조선족의 역량을 가늠하는 의도에서였다. 우리 언어의 “잡초성”은 모든 文化의 요소를 다 수용할수 있는 그런 왕성한 호기심에 의한 모험심리가 투영(投影)되어있는것이다.  “잡초성”을 또 한면 동물로 비유하면 “雜食性”으로 표현을 바꿀수도 있는데 아무거나 다 먹는 왕성한 식욕, 이문화, 이질세계로 풀을 찾아나아가는 양떼와 같이 우리 조선족, 신조선족의 모험진취적인 월경활동이 반영되고 있다. 조선어의 잡초성, 잡식성, 또는 잡종성 이같은 구조는 “신조선족”에게 가장 적용되는 문화적 모험진취심을 바탕으로 한 개방심리이리라. 세상에 100%로 순수한 언어가 없듯이 100%로 고유한 문화, 민족이란 존재할수 없다. 일본문화를 그 언어에서도 볼수 있는 바와 같이 (한자, 가다카나, 히라카나 등)언어구조가 복합하듯 문화도 잡종성을 이룬다. 그들은 이런 잡종성으로 세계에서 자신들이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것이다. 필자가 우리 조선족의 언어구조의 잡종성은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고 평가하는것은 신조선족에 의해 문화구조를 월경으로 활용시켜 “모험의 시대”, 즉 획기적인 신조선족 시대를 개척했기때문이다. 구조주의를 사상사적으로 개척한 세계적인 언어학자 Saussure(소셀)은 인류에게 있어서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명칭)을 붙인것이 아니라 이름이 생긴것으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속에 존재하게 됐다”고 갈파했다. 언어가 이렇게 관념을 낳는, 한 민족의 사상- 즉 사고방식, 세계인식방법을 농후하게 포함하고 있는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외국어를 모국어 어휘에 수용, 차용하는것은 관념을 낳는 민족의 사상을” 섭취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조선족의 조선어에는 다양한 어휘, 단어가 수용, 차용되는것은 언어의 “순결화” 운운하는 눈물겨운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부작용적인 마이너스로 보이지만 필자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넚은 세계의 공간으로 진입하면서 풀 따라 이동하는 양떼와 같이 살길을 찾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00년전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우리에게 울려주는 경종같이 좋은 사례가 있다.  “서양의 충격”에 의해 근대화에 대응한 한중일 동양3국의 방법은 그대로 언어에서 반영되었다. 복합적 언어의 우등생인 일본인이 서양의 근대화 개념,이를테면 “민족, 국가, 관념, 이성, 현상, 철학, 주관, 객관, 과학… ”등 수천개의 단어를 한자어로 (신조어)로 만들어 그속에 내포된 근대사상을 솔선 터득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중국은 청말에 그같은 실천이 불가능했다. 한자만 사용한 이들은 기존 한자세계에 없는 개념, 술어를 신조어로 만들어 추가하는것은 자신의 언어로 기술할수 없는 의미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것을 시인하는 “굴복”으로 간주했던것이다. 그래서 늘 외래어를 음역하지만 또 한자가 내포한 뜻이 있기에 그 진의를 이해하기에는 힘겨운 일이었다. 조선의 태도 역시 대륙과 유사한데가 있었던것 역시 우리 100년사의 가장 큰 통절 (痛切)한 아쉬움이다. 결국 늦게나마 일본유학을 통해 청나라나 조선은 일본의 신조선어를 역수입해 일부의 여파를 거친 서양수용을 이룩한다. 현재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의 조선어는 한자만 사용하면 일본어 이상의 복합적 체계의 언어로 될수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여 버렸다고 하는 편이 났다. 조선어의 일견 투박해보이나, 곰곰히 보면 무수한 야생적 또는 원초적인 풀대와도 같은 공생의 사상, 경계를 넘고 어우르는 그런 요소들이 포함돼있다는것을 우리 자신이 자각(自觉)해야 할것이다. 조선어가 제3의 조선어 형태로서, 조선족의 문화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 문화의 풍부성과 바레이션, 가능성은 “신조선족”의 발랄한 활동에 의해서 현현될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신조선족”의 사고, 지식체계 및 세계관 만이 현현시킬 요소가 듬뿍 충만돼 있는 까닭이다. 세계의 이질문화를 몸으로 피부로 흡수하고 있는 그들이 조선족의 문화공간을 확장시킴과 동시에 조선족 문화의 풍부성, 복합성, 유연성의 생성에 전례없는 공헌자라는 인식을 절실히 해야 한다. 세계의 풀을 찾아 모험의 월경을 하는 “양떼”들에게서 우리 조선족의 또 하나의 새로운 미래상을 예견하게 된다.  
36    (10)일본인의 중국인 멸시풍조(김문학) 댓글:  조회:5870  추천:19  2010-08-06
<장련련재>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0) 일본인의 중국인 멸시풍조김문학   청일전쟁이 치열하던 1894년 8월 24일 《동경아사히신문》에 “지나인 3명 아동에게 습격당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8월 22일, 청국상인 3명이 동경의 아카사카다거리를 걸어가고있을 무렵, 학교에서 귀가하는 어린 학생들이 “야~.챵챵한이 왔다. 이놈들은 조선 아산전투에서 도주한 놈들일거야.”하면서 청국인 3명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돌멩이는 운 나쁘게 청국인들 앞을 걷고있던 근위제3련대의 보병 두명을 명중하여 되돌아본 보병들은 바로 뒤에서 걸어오고있던 청국인이 돌을 던진줄 오해하고 그들을 타고앉아 구타를 안겼다. 크게 놀란 청국인들은 “나 투석한거 아니야”고 변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에서도 사람들이 욱 몰려들어 란리가 났다. 경찰서에 연행되여 취조를 받았으나 어린이들의 장난인것을 판명하고보니 그 청국인들이 너무 가여워서 경찰관이 치쿠지의 거류지로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청국인에게 동정했지만 투석한 어린이들에게는 비난도 질책도 없었다.   이 짧은 기사는 어린이들이 장난끼로 인해 벌어진 작은 “사건”이긴 하지만 100여년전 청일전쟁을 계기로 승전에 도취된 일본인의 중국인 멸시 내지는 아시아 멸시풍조를 노정했다.   당시의 일본 신문 잡지를 보면 어린이들이 노는 놀음에도 일본 소학생들이 전쟁놀이를 언제나 즐겼는데 동군과 서군으로 짝을 갈라서 “청국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주종이였다. 어린이들은 헌 등롱 밑굽을 박취하여 거기다 길고 굵은 검은 끈을 접착시켜 돈미(豚尾) 즉 돼지꼬랭이로 삼고 청국군노릇을 했다. 조선 아산에서 완패한 청국군병을 포로하여 일본군앞에 무릎꿇리고 바줄로 포박하여 처형하는 “전쟁놀이”. 청국의 변발마저 교묘하게 고안해낸 아이들의 머리속에는 아마 실제로 일본군에게 포로돼 일본에까지 연행된 모습을 보고 떠올린것일것이다. 전쟁 그자체가 아이들의 놀이에 재현된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에 체류하고있던 청국인이 귀국하였다고 보도한다. 8월 4일《요미우리》에 보도된데 의하면 요코하마시내의 수도에 독약을 뿌린 “비열하고도 나쁜 지나인”이 당장에서 체포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러한 신문매스컴의 보도는 일청전쟁에서 보인 일본 전국민의 거국의 정열과 지어는 열광에 가까운 중국인 멸시관으로 치닫는다. 승전으로 교만해진 일본인은 일본에 살고있던 청국인을 향해 “일본 이겼다. 지나 졌다.”,“챵챵깍아머리”, “챵고로(청국인 중국어발음인 칭궈런의 변형이다)”, 돼지꼬리 등 멸시어로 매도했다. 특히 “챵고로”란 매도어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을 싸잡아 욕하는 일반용어로 고착돼있다.   하지만 일본이라고 다 중국을 무턱 폄하하고 멸시한것은 아니다. 일본인의 중국관 및 조선관은 고전문헌의 중국세계에 대해서는 숭경하고 동경에 갈망할 정도로 집착하고 연구하고 호감을 품었다. 고전의 공맹, 사서오경이나 삼국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더욱 투철하게 연구, 활용해온것이 일본인쪽이다.   그런데 명치이래 문명의 스승을 중국에서 서양으로 전환시킨 일본은 중국, 조선을 멸시, 모멸하는 감정이 양성되고 청일전쟁 승리를 경계로 그것이 일본대중사회로 급속히 전파된다. 특히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사회에는 “돼지꼬랭이 지나인”의 차별적인 표상이 전 사회에 감염되면서 중국과 조선을 멸시하는 풍조가 형성되였다.   근대, 현대 일본을 조감해보면 일본인의 중국표상 즉 이미지, 관념은 5차례의 고조를 이루는데 제1차고조는 명치유신전까지, 제2차는 바로 1894년부터 1904년의 러일전쟁의 10년기간, 제3차는 1912년부터 1945년 패전까지, 제4차는 1970년 수교전후부터 1980년까지, 제5차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고도성장의 중국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다. 지금 이 글의 해당시기가 제2차고조시기인것이다.                                                일본은 서양으로부터의 충격을 통해 서양을 발견함과 동시에 “잠자는 사자” 중국(청국)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재발견”은 보다 건전하고 객관적인 중국인식에 접근하다가 청일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의 “약체적본질”에 대해 경악하고 따라서 경멸로 기울어진다. 1894년 8월 22일 《동경아사히》신문에는 “지나인의 미집(迷执)”이란 제목아래”지나인은 상하를 불문하고 풍수미신을 맹신하고 있으며 청나라와 조선은 풍수상 아주 강한 연고관계가 있다”고 쓰면서 “바보를 치유하는 약 없다는데 지나인은 바로 그런 인간들이다”고 경멸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태양》잡지에 늘 특집으로 중국인(한국인도)을 표상화시켰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들이다. “지나는 국가관념이 없고”,”고대와 같이 구태의연하게 전제 정치를 실시하며” 언어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불결하고 “지나인에 비해 조선인은 그래도 청결하나 일본인에 비하면 돼지우리같이 더럽다. 청결이야 말로 일본인의 특질이다” “지나인은 성격이 악렬한것은 세인이 다 아는 바인데 과히 자존, 보수하고 국가의식 담박히고 자사자리하며 교활산만, 야비인색, 고식우매하고 허례허식에 구애되여 있고 또 더럽다”“그러므로 오늘날 일본이 지나인을 리드하고 그 4억만 인민을 교육하는 스승으로 된다. 이래서 일본이 선생으로 되며 중국은 동생,제자로 되야 한다.” “국가관념””근로관념””청결관념”이 일본인이 아시아 여러나라를 앞선 특질이며 이것으로 일본은 근대를 달성했다고 고취한다. 사실 곰곰히 따져보면, 중국, 한국을 비하시키면서 그 민족성으로 나열한 결점 역시 과거, 최근만 해도 일본인에게 엄연히 존재했던 결함이 아닌가. 일본인의 오만함은 서양을 원숭이 흉으로 졸속히 이룩한 “근대”의 오만이며 서양에서 받아오던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을 역으로 이용하여 같은 이웃 동아시아 중국, 한국에 대한 행해진 “역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 청일전쟁의 열광을 통해 일본은 이미 비문명적인 야만국으로 추락된 대국청국이란 이미지를 정착시킴으로써 그것을 후광으로 자신들의 “문명”, ”발전된 자화상”을 고안하고자 했던것이다. 이같이 형성된 중국, 조선표상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35    22. 조선족 언어의 雜草性 댓글:  조회:4542  추천:40  2010-08-04
《신조선족》월경론 22. 제3의 조선어- 조선족 언어의 雜草性    김문학   연변과 조선족문화를 좋아하는 일본인 친구가 있다. 그는 해마다 연변을 비롯하여 동북 조선족지역을 수차례나 드나드는 조선족 팬이기도 했다. 어느날 그가 필자에게 조선어에 대한 소감을 들려주었다. “연변 조선족이 사용하는 조선어는 마치도 요란한 폭죽소리에 기관총소리를 합친것과 같다. 서울 한국어는 한강물과 같이 흐름이 부드러운 리듬이 있는데 연변 조선어는 투박한 리듬이다. 이 양자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흥미롭다” 친구의 “조선어평”을 들으면서 필자도 동감이어서 같이 웃었다. 확실이 서울 한국어나 북조선어의 평양 억양에 비해서도 연변 조선어는 억양이나 톤이 너무 강하고 기복이 심하여 리듬 역시 “폭죽식”이다. 리듬뿐이 아니라 조선족 언어는 조선어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수 없을 만큼 2중, 3중의 복합적 단어가 겹치면서 찹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상용어에서 사용되는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오늘 집사람이 싸주는 벤또를 가지고 단위에 쌍발 했는데 정심참에 글쎄 퉁쓰가 근처 레스토랑에서 시찬을 한턱 칭커하는 바람에 잘 먹었어. 피주에다 위스키까지 잇빠이 했단말야. 근데 옆상에 있던 쭝국 사람이 괜히 시비를 걸어서 깐짱했어. 타마디 한판 승부 걸었다 이거야...” 그  승부가 어떻게 됐는지는 필자는 관심 없지만 이 흔히 사용되는 조선족의 조선어속에는 조선어(한국어) 어순의 구조를 베이스로 삽입된 단어가 그야말로 다종다양하다.   “벤또, 피주, 잇빠이”는 그대로 일본어이고 “쌍발(上班),퉁쓰(同事),시찬(西餐), 칭커(請客),깐짱(干仗=싸움),타마디(他媽的)”는 중국어음독(音読)“레스토랑, 위스키”는  서양의 외래어다. 그리고 단위, 승부, 시비는 한자어이다. 마치도 세계 언어의 박람회를 연듯하다. 우리의 조선어는 100년의 중국과 문화접촉을 거치면서 북조선어와도 이질적이고도 다른 “제3의 조선어”로 변용되였다는 점이 괄목할만 하다. 그리고 우리의 조선어내부를 보면 연변의 함경도방언, 길림과 흑룡강성의 경상도, 평안도방언, 요녕성의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방언 등 조선반도의 동북, 서남, 동남, 서북 방언이 그 근저에 반거하고 있는것도 특징적이다. 중국 조선어에는 시초부터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한 표준어, 중부방언이 결여돼 있었다. 동북3성조선어문사업위원회가 1977년 작성한 “조선어규범”과 1984년에 수정, 개정판에 의해 북조선평양말을 토대로 정해진것이지만 그것은 현실사회에서 이미 한물 간 “서류”에 지나지 않는다. 북조선식 언어에서 일탈하여 이미 “조선족언어”로서의 “조선어” 즉 제3의 조선어가 구성되었으며 거기에는 1980년이후 특히 1990년이후 서울의 표준어 억양과 단어가 홍수같이 주입되고 있다.. 조선족의 신문, 잡지에도 이같은 복잡한 현상이 반영되고 있으며 “서울로 갈까요 평양으로 갈까요”란 노래제목과 같이 방향성을 잃은듯 하기도 한 제반 언어현상이 현재화(顯在化 )되고 있는 실정이다. 목하 조선어는 투박, 순박, 질박한 “3박”의 양상을 이루고 그것에 또 조잡,복잡,착잡의 “3잡”상태가 가세된다. 그것을 필자는 조선어의 “雜草性”으로 표현하고저 한다. 누군가 손길이 닿지 않고 가꾸지 않은 초원의 원시적 풀 같이 무성하게 자라기만 한 상태, 거기엔 쥐며느리풀도, 난초도, 민들레도, 냉이풀도 개불알꽃도 다 자라나고 있다. 그야말로 백화방초가 경쟁하는 “풀의 세계”다. 필자는 언어학자가 아니므로 그 영역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의 조선어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사실 우리 조선족에겐 1990년대 이래 전반 조선족에 공통한 언어와 그 언어집단으로서의 결속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재다시 조선어-(우리 문화의 표징으로서의 언어)를 표준어체계에 귀속시키는 작업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참고로 필자는 ①漢字使用을 극력 주장하며 ②서사체계, 서면어는 서울어 표준어체계로 맞춰야 한다는것 ③그리고 일상 회화에서는 각기 자기가 익숙한 방언을 구사해도 되는 자유가 있고 ④그런 회화 역시 문화접촉과 변용을 통해 자연히 변할 가능성이 크다는것 ⑤따라서 중국조선어를 서울어, 평양어보다 이질적인 특징을 이룬 언어체계로 학문적, 정책적,규범적 정립이 필요하다는것을 강조한다. 「조선족 개조론」에서도 이 같은 아이디어를 제기했으나 묵살당한것이 십분 유감이다.    
34    (9).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3국인의 얼굴 (김문학) 댓글:  조회:6977  추천:30  2010-08-03
<장편련재>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9)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3국인의 얼굴   김문학   백년전, 근대화과정에 있는 한중일 3국인,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묘사된 얼굴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18~19세기에 걸쳐 명암법과 원근법을 구사한 서양의 회화는 이민족의 자료를 수집하는데 활용되였다. 정보수집에 사용된 그림은 오늘날의 사진, 비디오, 영상, 항공사진 등에 해당하는 구실을 했다.                              그림의 장르에는 스케치, 동판화, 유화, 수채화, 만화, 극화로 다양했는데 될수록 이국의 사물과 인간의 표정, 윤곽, 동작에서 풍경, 건물, 도로, 풍속습관 등을 시각화하여 타자에 대한 이해와 기억의 필수적인 수단으로 되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비약의 선진국을 구축한 서양은 자신들의 문명체계를 비서양사회에도 강제하기 시작했다. 사이드가 예리하게 비판하다싶이 그들은 오만한 “오리엔탈리즘”시각으로 동양을 경멸하였으며 자신들의 과거 어느 시점에 대응시키는 열등한 이미지로 표상했다. 13세기의 마르크 폴로, 16세기의 마테모 리치의 뒤를 이어 동아시아의 땅을 밟은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초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도 그 무렵 서양의 근대에 비해 후발된 중국, 일본과 조선의 표상이 수없이도 등장한다.     중국부터 보기로 하자. 선교사 아서 스미스의 고전적 명작 《중국인의 성격》에서도 저자 스미스는 중국인의 열악한 민족성에 대해 22종으로 분석나열하면서 지어 곰이나 거미류의 짐승에 빗대는 발언도 한다. “더럽고 무지한 미개인”의 중국인의 이미지가 난무했다. 중국인이 서양인을 “양구이즈(洋鬼子)”라 하고 그뒤 일본인을 “동양구이즈”라고 한것과의 대극에서 서양인은 중국인을 “돼지”로 본것이 그 전형적 패턴(格局)이다. 청국인이 변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을 “돼지꼬랭이”로  비하시키고있다. 누런색 얼굴에 가늘고 우로 치켜올라간 교활해보이는 눈매, 그리고 유표한 뻐드렁이는 “청국인(지나인)”의 전형적 얼굴이다.   다음으로 일본인의 얼굴을 보기로 하자. 동시기 서양인의 그림에 나타난 일본인의 모습은 안경, 길게 우로 치켜올라간 눈, 앞으로 세게 툭 튀여나온 앞니, 왜소한 체구   이런것들이 스테레오타입(鉛版)의 일본인 얼굴이였다. 명치시대 서양인 화가 G.비고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바로 “원숭이 흉내내는 일본인”이란 타이틀의 그림이다.  문명개화기  로쿠메이칸(鹿鳴館)의 무도장의 거울앞에 선 일본인 남녀(부부?)의 얼굴이 거울에서는 영락없이 원숭이로 나타난다.     이 그림을 그대로 해석이라도 하듯이 그때 일본을 찾은 프랑스인 P.로치는 그의 저술 《가을의 일본》에서 “에도의 무탑회”라 제목한 글에서 서양정장을 한 모습이 일본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꼬면서 “왠지 일본인들은 모두가 내눈에는  원숭이로만 보인다”고 풍자하고있다.      일본여성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었던만큼 일본을 사랑한 프랑스 화가 G.비고 역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의 우월성 의식에서 탈피되지는 못했다. 서양에 비해 아직 미개하고 비근대적인 면이 많은 표상을 서양에 전달하기 위하여 이 그림을 제작했던것이다.     이  “원숭이 흉”그림으로 지금까지 서양은 물론 같은 동양에서도 일본인의 표상적 특징이 “원숭이”, “동양의 원숭이”로 고착돼 있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은 어떠했는가를 보기로 하자. 서양인이 조선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표상화시킨 때는 1866년 병인양요부터이다. 조선은 19세기말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은밀한 나라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최후의 동양”의 나라였다. 최초로 “한국의 남녀”라는 서양인이 그린 그림(프랑스 화가 셍 쏘베 1806년 채색판화)을 보면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동남아의 소수민족의 옷차림과 비슷한 모습이여서 경이롭기만 하다.     사실 조선이 세계사에 알려지게 된 때는 1894~95년 청일전쟁과 1904~05년 로일전쟁에서부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차례 전쟁의 싸움터가 된 까닭에 서양인들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담론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     1888년 12월 22일, 영국의 잡지 《그래픽》에 게재된 조선인의 모습에는 “잼과 빵을 처음 먹고있는 조선인”이란 제목이 붙었다. 그때 영국인 려행가, 선교사들이 가지고있던 서양 잼, 통조림, 빵과 뻐터 등을 처음 접했을 때 조선인이 몰려들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접하는 얼굴표정을 활사하고있다. 아직 낯설었지만 신기하고 특별한 서양문명은 탐나는것이였다. 당시 조선인의 서양문명과의 충돌을 실감할수 있는 력사의 기억의 귀중한 한페이지다.     그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모습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흰옷”이고 또 하나는 조선남자의 상투에 쓴 “모자”였다. 백의민족의 상투를 중히 여기는 모자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이 한국인이게끔 하는 특징적인 표징이 아닌가.     “조선인은 인방인 청국인이나 일본인과도 현저하게 달랐다. 얼굴모양은 아주 다양했는데 의복이 획일적이였기에 눈에 뜨이며 눈끝이 우로 올라간 몽골로이드의 눈모양… 관골은 높고 이마는 모자에 가리워져 있었지만 노출된 그것을 보았을 때는 넓고 지적인 이마가 많았다. 표정은 느긋하고 당혹감이 약간 섞인다. 얼굴새에서 관찰되는것은 힘이나 의사력보다도 명민(明敏)함이다. 조선인은 실로 얼굴생김이 아름다운 인종이다… 체격도 좋다. 남녀를 막론하고 어느 계층의 사람이든 손발이 작고 흰물가리에 고운 모양을 하고있었으며… 지능면에서 조선인은 스콧트랜드에서 ‘흡수가 빠르다’는 말에 해당되듯 천생 이해력이 빠르고 명민함은 외국인 교사들도 인정하는것이며 외국어를 즉각 습득하는면에서는 청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유창하고 퍽 우수한 악센트로 얘기한다. 그들은 동양의 악벽인 의심증(猜疑心), 교활, 불성실함이 있으며 남자들끼리는 신용하지 않고 녀자는 칩거하며 지극히 열세의 지위에 있다.”     인용이 다소 길어졌다. 이말은 영국의 여성여행가 이자베라.숍(하드)이 1894년 조선을 돌아보고 1897년에 쓴 600페지에 이르는 장편보고 《조선기행》의 한 대목이다.     아무튼 100년전 서양인이 활사했던 동양3국의 이미지는 서양의 우월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의 프르지를 통과하면서 “불결, 가난, 교활, 추악, 탐욕, 야만, 수성(獸性)” 등 미개인과 비근대적 이미지 표상으로 충만돼있었다.     하기는 우리 동양인의 눈에 비친 서양 역시 그와 유사했던 표상이 있었던건 역시사실이  아닌가.  
33    21."신조선족"의 邊境力 (김문학) 댓글:  조회:4348  추천:48  2010-07-30
《신조선족》월경론 21. "신조선족"의 邊境力  김문학   조선족의 내재된 “변경력”은 사실 최근 신조선족의 등장으로 그 위력을 세계적 범위내에서 “발사”하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조선족은 변경성 민족의 조선족에서 탄생된 배경을 감안하면 중층적 “변경성인(邊境性人)”으로서의 성격을 쉽게 인지할수 있다. 환언하면 변경인에서 나온 또다른 변경인인것이다. 직접 프스트 선진국가의 문화권속으로 배낭을 메고 파고들어감으로써 그 큰 외부문명권안의 변경인으로 살면서 원유의 공간과는 이질된 신변경인으로 거듭난다. 국내이동으로 대도시에 진입한 신조선족의 변경인 역시 국외 변경인과 같은 경우를 몸으로 체험, 갈등, 소화시키면서 “신변경인”으로 변동해 간다. 중국근대사를 조감하면 발견되는 역사적 사실은 중국의 혁명은 늘 변경에서 시작되어 중앙으로 침투되면서 활력을 주입시킨다는것이다. 요즘 「근대 재발견」이란 책을 집필하면서 필자가 재인식한것은 홍콩, 상해, 대만 이같은 세개 지역은 근대중국세계의 주변부에 위치한 “변경성”지역이었다. 식민지 또는 조계지로서 외국의 지배하에서 異文化의 교류가 일상화된 공간이었고 “근대”중국을 상징하는 “근대적 실험장”이었다. 이곳은 근대 중국이 배제된   그러나 가능성이 집약된 공간이었다. 여기서 생활한 인간들은 중심의 중국인들보다 시각, 사고, 행동 등 면에서 앞서 달리는 “변경인”이었다는 점에서 특기 할만하다. 상해가 혁명의 근거지, 중공이 탄생된 이유도 이런 배경이 있은 까닭이다. 말이 중도에서 약간 새어나갔는데 이제 다시 본제로 돌아오자. 국내 북경, 상해, 청도나 산재지구의 신조선족이든 해외에서 살고있는 신조선족의 주위에는 흡인력이 강한 문화, 문물들이 현란한 황홀경을 이루면서 신조선족을 빨아들인다. 본이 학습력, 지적 탐구욕이 강한 변경인 출신답게 신조선족은 자신이 밟고 있는 이국문명을 거대한 스펀지같이 탐욕스럽게 흡수하여 걸러내기도 갈등하기도 또한 소화불량을 경유하여 자신의 “변경성”에 충족한 영양분으로 만들어 낸다. 필자 자신의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필자의 많은 지견, 사상, 가치관, 세계에 대한 인식등을 솔직히 고백하여 이 월경하는 삶,“변경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환경(일본등)에서 획득한것이다. 20년전 독일, 덴마크, 스에덴 등 서구나라를 일주하고 최초로 일본 땅을 밟았을 때의 心境은 오늘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싱그러운 일본녹차의 청향이 비강을 자극하는 그것은 바로 이문화 이해, 이문화 지식에 대한 본능적인 체질적인 자극 그 자체였다. 필자는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조선족의 위상을 알리는 글쓰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중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변경인””세계인”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사고하는 “월경인”의 경계를 살겠다고 스스로 결의를 내렸다. 노신이 일본에서 환등 슬라이드를 보면서 중국 국민성을 각성시키겠다내린  그같은 비장한 심경이 20대인 나에게 각인되었다. 필자는 노신과 비견할만한 문화거인 임어당과 호적을 숭배해왔다. 그 이유는 모두 다 국경을 넘어 월경인, 변경인으로 문화의 창조적 삶을 영위하고 불후의 업적을 쌓아 올린 지식인의 본보기었기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역할에서 조선의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일본의 후쿠자와유키치, 니토베이나조와 같은 文化巨物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면서 당시 필자가 발견한것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자신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인이 있었는데 유감천만하게도 우리 조선족에겐 그런 인물이 결여했다는 점이다. 사실 필자에 대한 쇼크가 매우컸다.  임어당은 「吾國吾民」이란 중국인을 알리는 책을 영문으로 집필하여 서양에서 중국인의 존재를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다. 니토베 역시 영문으로 「武士道」를 써서 일본인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한다. 필자가 조선족 문화인으로서는 일본유학의 선구자적 자리에 섰다면 그 유익한 조건을 십분 활동하여 일본어로써 우리 조선족의 위상을 알리고자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쓴 일본어책을 일본인들이 읽는 모습을 전차안이나 도서관에서 볼수 있기를 바랬다. 지금 그런 소망이 이미 현실로 됐다는것으로 滿悅하지만 이같은 꿈을 꼭 필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삼룡선생이 지적한듯이 지금 월경하는 글쓰기는 미국의 유순호씨, 한국의 장혜영씨, 그리고 류연산씨, 김재국씨 등 많은 “신조선족”에 의하여 실천되고 또 주목되고 있는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글씨기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문, 자연과학 등 분야에서 많은 “신조선족”이 이국타향에서 그 조선족의 특질인 “변경력” 을 발휘하여 조선족 위상을 객관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신조선족의 변경력의 최대 특징의 하나는 그 사고, 발상의 “유연구조”에 있다. 목표가 다이내믹할뿐아니라 유연한 복합적 시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자 하며 그 문명적 사고에서 이탈하여 아이엔티티도 중층성을 이룬다. 세계의 “선진성”문명을 흡수하고 조선족에 전달하는 첨병으로서 귀중한 존재들이다. 조선족이 내재한 변경성, 변경력 (이중. 3중의 문화력도 포함하여)은 오늘 새천년후 “신조선족”의 탄생과 더불어 발휘할수 있는것은 우리 조선족의 現狀과 함께 연구해야 하는 과제로 클로즈업될 시점에 와 있다.  또한 이런 “신조선족”이 고향에 되돌아와 고향을 재건설, 재편성하는 주력적 힘이 되는 그날도 크게 기대된다.  
32    20.邊境性 재발견 댓글:  조회:4012  추천:33  2010-07-28
20.邊境性 재발견김문학 일본인의 “변경성”콤플렉스는  특별하다. 근대래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수 없는 포스트근대 대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중국문명에서 탈퇴해 “일본형문명”을 구축한 오늘 날까지 일본인은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적 특질을 “변경성”에서 찾고 있다.최근까지도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이야 말로 세계의 최후의 비경(秘境)일것이다”고 서슴없이  말하면서 “일본인 변경이며 일본인의 국민성, 사고나 행동은 그 변경성에 의해 설명하는 일본 변경론”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지식인층을 초월하여 광범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고 있다.한국인 역시 중국대륙의 “변방”이란 의식이 강열하며 지금도 국제정세를 담론할때 꼭 빠지지 않고 번번이 등장하는것이 “변방”(변경)민족으로서의 自觉이다.변경성이라는것은 단지 지리적 조건, 위치만 아니라 거기에 기인되는 문화적 의미를 말한다. 일본의 지대한 변경성 콤플렉스는 “모든 우수한 문화, 문명은 바다건너 저쪽중심에서 흘러오는것”으로 간주했다. 외부에서부터 들어오는 모든 문물에 대해 그들은 엉청난 호기심과 에네르기를 동원하여 수용, 소화시킴으로써 “일본문명”이란 이질적인 “잡종형문명”을 탄생시킨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문명”은 세계사적 흐름에 있어서의 일종 거대한 실험의 埸이었다고 할수 있다.같은 시각에서 이제 우리 조선족의 고향인 연변을 다시 바라보자. 그것은 말할 나위도없이 중국대륙의 동북단에 위치한 “변경”이다. 1980년대 20대였던 필자가 연변을 문화답사 했을때 받았던 충격은 오늘도 기억속에 선명하다. 그것은 말그대로 “동아시아 최후의 秘境”그 자체였다. 이같은 비경이기에 조선족의 “순수성”,”단일성”이 제일 강도높이 보장될수 있는 지리적 환경이 주어졌다는 인심을 그때 나는 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어디 지리 조건에만 그치랴. 우리 조선족 전체가 그 문화 특질이 바로 “변경성”이란 용어로 해석할수 있지 않은가. 중국이란 거대한 중앙, 중심의 변두리에서 “경계인”으로 문화를 영위하고 있는 “변경인”. 이런 “변경성”이 바로 또한 우리의 “정신성”을 긍정짓는 하나의 중심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우리 고국인 한국인도 그러했듯이 우리는 한번도 세계의 “중심”이란 “우세”를 가져본적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것은 행인지 불행인지 수미일관하게 “변경성”의식 뿐이다. 그리고 그 “변경성”의 콤플렉스에서 오는 “반발심”이란 용수철적인 심리장치를 우리는 또 튼튼히 소지하고 있다.바꾸어말하면, 그것은 콤플렉스를 용수철로 삼아서 생활의 분발하는 원동력으로 활용한다는것이다.약소민족에 변경성 민족의 2중마이너리티가 할수 있는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있는 에네르기를 배우고 아는것으로 전환시켜 그것을 지적인 힘으로 바꾸는것, 이것이 우리에게 恨을 푸는 방법이였으며 “소 팔아서도 자식 공부시키는” 눈물겨운 분발의 에네르기 그 자체였다.필자는 우리 조선족의 “변경성”을 우리 정신사에서 차지하는 큰 팩터와 구조의 하나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변경성은 즉 일족의 정신성이기도 하며 그것은 우리의 지정학적, 정신적 단점인 동시에 우세이기도 하다고 재인식한다.조선족이 전국최고의 교육보급률과 전국 학력의 최고수준을 이날까지 보전하고 있는 원천은 바로 이 변경성에서 유발되는 恨의식의 반작용에서 생기는 엄청난 구지욕, 학습력이다. 学习力(학습력), 이 조어 역시 필자의 창조이다. 배움의 힘, 배우려고 하는 의욕의 힘, 그리고 거기에 주입된 전 가족, 전민족적인 에네르기는 오늘도 식지 않고 있다.이것이 우리 조선족 변경성의 무서운 파워이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했던 이유도 그네들의 호기심과 학습력이 뒷바침되었기때문이다. 한국 역시 변경민족의 소국으로서 일본에 뒤지지 않는 변경성의 에네르기를 자각하고 분발하는 힘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던것이 아닐까.조선족의 학습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연변의 “대중적 코미디”로서 널리 알려진 일화를 들어보자. 연변 시골에서 온 조선족 할머니가 생선을 연길시내의 시장에 힘겹게 이고 와서 팔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물고기 생선을 한어(중국어)로 뭐라 하는지 몰랐다.그때 응급으로 고안해낸것이 「水肉(수이러우)」라는 단어였다. 「물고기」이니까, 물은 水(수), 고기는 肉(육) 이렇게 두 단어를 조립시켜 하나의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드디어 시장에 그 푸접좋고 머리좋은 우리 할머니의 큰 목소리가 신명나게 울려버린다.”买水肉啦~!”(물고기 사세요~!)그냥 우스갯 소리로 흘려보내면 그만 이지만 필자는 웃고 본뒤 하나의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 할머니의 발상은 천박해 보이지만 깊이 사색해보면 그 자신의 학습 활용력이 살아숨쉬고 있는것이었다. 옅은 한어지식으로 그는 물고기라는 한어식의 새로운 단어를 창조했던것이다. 물고기의 육신 역시 일종의 고기(肉)임은 생물학적으로도 통한다.변경에서 사는 우리 할머니의 창조적 신조어에서 발견되는것은 우리 민족의 “창조성”그 자체이다. “변경성”을 하나의 “文化性”으로 파악할때 우리에게는 ①변경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분발의 역량으로 전환시키는 용수철같은 역동이 있다는것, ②주위에 대한 불안감 또는 자기 위치 확인감에서 오는 왕성한 호기심, 에네르기 ③그 에네르기를 변경성 해소의 학습력으로 변용시키는것 ④중심, 중앙문명에는 결핍된 유연구조의 사고 ⑤주변과 중심의 요소를 복합시키는 봅합력, 이러한 5개의 큰 우세를 갖고있음을 自觉해야 한다.필자는 이 5개의 힘을 “邊境性”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31    19. 연변조선족의 ‘19세기 말기증세症勢’ 댓글:  조회:4219  추천:30  2010-07-26
19. 연변조선족의 ‘19세기 말기증세症勢’김문학   세계적인 중국연구의 석학 J·K·Fairbank (中國名費正淸)는 19세기 서양세력의 문명이 중국 및 아시아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웨스턴·인팩트’(서양의 충격)으로 추상화시켜 잠자던 중국이 이 충격에 대응하여 갈팡질팡 하면서 근대화를 구축하려고 한 중국과 아시아의 근대를 파악하려고 했다.  ‘서양의 충격’에 대처하여 대국 중국과 변방의 소국 조선의 대응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는 표현으로서 ‘19세기 말기 증후(또는 증세)’라는것이 있다. 중국에 대한 서양의 충격은 전례없는 유교문명체제에 대한 도전이였으며 ‘천하’관념으로 이어진 중화적 가치관세계의 봉괴를 촉구한것이다. 19세기말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의 수구파들은 ‘조상의 종법은 절대 개변시킬수 없다’는 절대적 전제하에서 ‘중체서용’이란 기괴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변혁을 시도했기는 했으나 그것은 구조적 개혁이 아니었기에 패북으로 종식되고 말았다.   조선에서도 역시 민씨 황후를 비롯한 실질적 수구파들이 조선왕조란 ‘조상의 종법을 개변시키지 않는 전제’하에서 중국세력과 러시아 및 일본의 세력에 사대주의로 우왕좌왕하다가 개혁은 이루지 못하고 이미 앞서 철저한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섬나라 왜국(倭國)의 일본에게 식민지로 먹히우고 만다.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정세를 조감할 때 청국과 조선같이 서양의 충격에 적시적인 적응을 보이지 못하고 고루한 전통적 가치세계를 고집하면서 근대화에서 지연되고 제국의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병적인 양상을 19세기 말기 증후로 일컫는다.   이 말기 증세를 좀더 지근 거리에서 관찰하면 그 내부의 개혁파, 유신파들의 신사상, 신사고, 신가치는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으며 강유위, 양계초나 김용호, 서재필 등 신세대 개혁파들은 수구파들에 의해 철저한 탄압을 당하고 개혁은 물거품으로 종연되는것이다.   수구파들은 물론 백프로로 개혁을 단절시킨것은 아니다. 그들도 역시 ‘유신’과 ‘개혁’을 입에 걸고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자신의 기득패권을 보전하기 위한 위장한 간판에 지나지 않았던것이다.   필자는 지금 연변의 일부 지식인의 고루한 사상과 행동속에서 어쩐지 그 ‘19세기 말기증세’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21세기 세계적 글러벌의 월경적 배경하에서 조선족, 특히 연변조선족공동체공간은 ‘세계화의 충격’을 직면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중국, 조선 동아시아국가들이 직면했던 ‘서양의 충격’과도 유사한 현상이다.   100여년전 강유위, 양계초나 김옥균, 서재필 등 젊은 세대들에 의한 생기발랄한 미증유의 혁신을 서태후들 수구파, 민씨 인척의 전통수호자들의 세력을 필사적으로 부정, 진압했던 역사적 기억이 연변의 일부 지식인들속에서 생생한 현실로 재연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해외에서 장기간 생활한 필자는 그것에 더는 침묵할수 없었다.   오늘날 ‘월경의 시대’를 정면에서 맞아온 연변은 중국, 한국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월경에 의한 침투로 그야말로 새로운 연변으로 거듭나야 할 격동의 변동기에 서있는것이 아닌가.   종래의 ‘전통적 공간’으로서의 연변이 이제 그것을 고집할수 없는 새로운 ‘복합적 공간’으로서의 연변이 생성되고 있는것이다. 이 작은 공간에도 봄이 오면 진달래가 만발하듯 당연하게 여러 가지 신생의 의식, 가치관, 이데올로기의 문화들이 들어오고 침투되고 있다. 여러 문화가 모여드는 거대한 문화의 비빔밥이 여기서 현재 제작중이다.   그러나 연변의 일부 조선족 지식인은 연변이 겪고 있는 변혁, '고루한 조선족의 사고와 가치관'에 대한 ‘신조선족’의 비판을 그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문화적 또는 언설적 권력, 권세를 이용하여 절대시하고 철저한 탄압을 감행해왔다.   심지어 그들은 서태후, 민비식의 19세기말 통제방법으로 철저히 대중을 기만하고 날조하고 외곡, 중상하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신조선족’의 참신한 혁명, 사고, 가치관을 공격하고 탄압으로 수미 일관 해왔던것이다. 이같은 양상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컬하게 ‘19세기 말기의 증세’와 오버랩되는것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것이다.   필자는 그런 19세기의 말기 증상이 21세기 연변조선족 사회안에서 일방통행으로 통했다는 사실에 말그대로 또 하나의 ‘웨스턴 인팩트’를 느꼈다. 그 충격속에서 ‘조선족개조론’발표로 불구대천의 원쑤로 몰렸던 필자는 뼈저린 아픔과 함께 큰 드라우마까지 안게 되었다.   물론 필자는 그들의 입장과 시각이 이해된다. 왜냐면 ‘신조선족’과는 매우 이질된 사고방식과 가치관(고루한 의식)에 젖어있는 그들로서 보면 ‘신조선족’이 쓴 비판적 글, 월경하는 글쓰기는 ‘이단’이며 철두철미한 ‘반역’으로 보일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이 밉지가 않다. 그리고 역시 그들을 존중한다. 필자는 문화상대주의자를 표방하는 ‘신조선족’ 지식인의 한사람이기 때문에 사고방식과 가치관, 의견은 달리 할수 있어도 그것이 상대를 완전히 적대시하고 박멸해야 할 지극히 공포스럽고 테러와 같은 발상이 산출돼서는 안된다고 인식한다. 그것은 서태후식 내부탄압의 비극이 아니였던가.   전조선족이 해체나 붕괴의 위기설에 팽창된 ‘절체절명’의 운명에 직면한 이때, 일심동체로 화합해도 성차지 않겠는데 우리 민족의 신생을 위해 적극적인 비판과 의견을 발설하는 신세대에 대해 ‘테러로 저격해야 할’ 적으로 보는것은 백번 양보해도 苦笑밖에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보다 필수는 극복대안을 모색하는것이 급무라고 생각한다. '19세기말기 증세'를 극복하는 대안은 한가지밖에 없다.  異見과 見識은 틀려도 배척 배제가 아닌 이해, 조화의 '공생'이다.   필자는 이글을 빌어서 호소하고자 한다. 연변, 장춘, 할빈, 북경, 청도, 상해 그리고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남미, 한국... 모두가 '신조선족'의 시야와 사고로 화합하고 새로운 조선족 文化를 창출해나가자고. 
30    (8)근대 “중국어”의 탄생(김문학) 댓글:  조회:6536  추천:60  2010-07-21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8)근대 “중국어”의 탄생김문학  1910년 8월 16일, 상해에서 차이나호 객선이 미국으로 향하여 출항했다. 그 객선에 탄 70여명의 젊은 중국인 유학생들속에 영리해보이고 잘생긴 한샘한 청년 호적이 끼여 있었다. 도미후 호적은 코넬대학에 입학, 농학부생에서 다시 문학부로 전학, 1915년에는 컬럽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유명한 세계적 철학자 듀이에 사사, 1917년 귀국하여 북경대학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노신과는 달리 한자문화권이 아닌 서양의 신생공화국 미국에서 서구문명의 바다속에서 청춘시절을 보낸다.   노신과 호적, 중국 근대문화사에 희유의 공적을 남긴 이 두 문화거두는 성격이나 사상, 생의 노정이 각기 달랐지만 그들사이에는 동질성이 두개나 있었다.  하나는 모두 문화의 경계를 넘은 “세계인”이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근대의 신문화운동의 리더로서 근대 중국어 탄생의 비조였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서구의 근대문학의 교양을 미국학생과 같은 레벨로 섭취한 호적은 중국 고전한문(문언문)은 있는대로의 사물 뜻을 표현할수 없다는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한나라이래의 고전적 낱말과 문법을 토대로 하는 문언문의 전통은 형식적인 수사, 레토릭 성향이 가장 강할뿐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전달, 표달방식이나 그 능력이 미약하다는것을 의식하게 된다.   국민국가로 변하려면 역시 미국의 근대영어체계와 같이 언문일치의 구두어문 즉 백화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호적은 큰 발견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미의 진화론을 원용하여 중국의 전통적인 언어의식을 전변시켜 새로운 언어 즉 국어양식을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사대부계층=문언문, 민중계층=백화문(즉 구두어문)”이라는 전통적언어가치구조를 역전시켜 새로운 구두어 즉 새로운 국어로 진화시키는것이 젊은 호적의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그가 1916년 집필하고 이듬해 《신청년》에 발표한것이 바로 중국을 진감한 “문학개량추의”라는 논문이였다. 그리고 그뒤 1918년 5월 노신의 근대의 첫 백화문소설인 《광인일기》의 등장으로 중국에는 본격적인 근대 “중국어”(언문일치의 백화문체계)가 탄생한다.   물론 1913년 일본의 국어개혁 영향으로 문언문사대부언어의 전통적 상징인 과거제도의 페지를 뒤이어 교육부에서는 독음통일회의를 소집하여 북경어를 바탕으로 표준어 제정을 시도했다. 호적과 노신의 이론적 지도와 문학적 실천이 없었다면 근대“중국어”는 대폭 지연됐을것은 뻔하다.   호적은 또한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의 백화문시집 《상시집》을 1920년에 출판하여 자신의 이론을 직접 실천한다. 노신의 근대 중국어(백화문)의 실천은 사실 일찍 일본어의 영향으로 시작된다.   노신의 일본유학생활에 대해 모든 연구자들은 그와 일본과의 연관을 사상이나 문학만으로 보고자 한다.그러나 생활자로서의 노신과 일본어 내지는 그속에서 기인되는 노신의 백화문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결락돼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에서 유학하는 노신은 중국의 문언문에 비해 대중이 용이하게 이해, 접근할수 있는 근대 일본어같은 문체, 언어야말로 중국인이 택해야 할 국민언어라는것을 터득했다. 그의 전집을 실제로 읽으면서 발견되는 표현, 단어, 문법 등은 일본어 요소가 너무나 많이 발견되며 단순히 노신은 일본어를 통해 세계를 내다보는 강유력한 수단이였을뿐만아니라 일본어는 노신의 문학과 사상의 피와 살이 돼있었다. 노신이 남긴 장서속에 일본어 서적이 큰 비중을 차지한 사실도, 죽기전까지도 상해 우치야마서점에서 일본서적을 적극 구입했다는 사실도 이를 립증하고있다.   노신이나 노신보다 선배인 양계초 역시 일본의 신소설, 문체에서 배울것이 많다고 1920년에 요코하마에서 창간한 《청의보》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장했던 배경에도 노신과 동일한 일본어인식에서부터였다. 문화교류란 본시 일방통행이 아니고  착작한 교차로마냥 상호적인 흐름이 그 특징이다. 근대전까지만 해도 일본에게 문화를 배워주던 “사제관계”에서 역전돼 중국은 일본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일본유학을 통해 대륙으로 밀물같이 역수입된 일본제 한자단어, 언어들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상용되고있는 사회, 인문, 철학, 과학 등 분야의 70%이상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다. 1911년에 출판된 《보통백과신사전》, 1915의 《맹인할마지신명사》나 1958년 고명개(高名凱), 유정염 공편저의 《현대한어외래어사 연구》, 《현대한어중 일본에서 착용한 어휘》에 의하면 근대중국어의 언어, 문자,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법률, 풍속, 군사나 일상용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일본어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력사, 민족, 국가, 종교, 신용, 자연, 침략 등 어휘들도 일본에서 수입된것이다.   그리고 “화(化)”를 단 성경성향을 나타내는 “민주화”, “혁명화”, “근대화”, “현대화”, “기계화”, “과학화”, “세계화” 역시 일본에서 수입한것이다. “성(性)”, “식(式)”, “형(型)”, “관”, “력(力)”, “계(界)”, “적(的)”이 붙은 표현이나 단어 역시 일본어이며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일본어 신명사, 신조어가 너무나 방대하기때문에 “왜색어”로 경계하는 운동까지 일어났던것이 아닌가. 청말 개화파의 지도자 장지동이 이에 대해 어느 서류에다 “신명사를 쓰지 말자”는 글귀를 썼는데 수하의 학자 고홍명이 “‘신명사를 쓰지 말자’는 글귀의 그 ‘명사’란 단어가 바로 신명사입니다. 일본서 수입한것이지요. 장대감님.”하고 말하며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손문은 반청독립봉기를 수차 일으켰는데 그는 그 봉기를 “조반(造反)”이라 했다. 어느날 일본신문을 본 부하인 진소백이 “지나혁명당 손문”이란 글귀를 손문에게 보여주니 손문은 그 표현의 신선함에 감명을 받고 “옳거니! 이제부턴 ‘조반’이라 하지 말고 ‘혁명’이라 해야지.”하면서 무릎을 쳤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근대 한국어(조선어)의 형성에도 일본어의 신명사, 신조어들이 중국과 같이, 아니 더 이상으로 피와 살이 되였다는것은 아마 잘 알려지지 않은듯 하다. 지금도 조선족들은 아예 “벤또”, “리어카”, “앗싸리” 등 일본어를 아무런 거부감없이 우리 말로 사용하고있다. 사실 이미 우리 말로 굳어버린것이다.                         외래어 단어가 수입되여 이미 우리의 일상어로 정착, 고정됐을 때는 그것은 이미 하나의 문화와 살점으로, 피덩이로 돼버린것을 의미한다. 단어가 의사를 담은 문화의 표징물이라면 그 단어자체는 한 민족과 나라의 엄연한 문화와 함께 사고양식, 행동양식을 규정짓는 정신적재부인것이다.  
29    18. 想像으로서의 연변 조선족 ‘2중성說’ 댓글:  조회:3788  추천:28  2010-07-20
 18. 想像으로서의 연변 조선족 ‘2중성說’ 김문학조선족의 최대 집단공동체인 연변을 관찰 할때 특히 외부에서 연변을 하나의 객관체로서 관찰할 때 어려운것은 ‘상상으로서’의 연변문화 ‘2중성說’과 현실의 연변상(像)을 어떻게 타협시킬까 하는 문제에 봉착 한다.   필자는 연변에 가서 이몸으로 연변을 수차례 체험하면서 연변조선족의 ‘2중성설’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으며 그 언설과 현실의 갭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통 연변조선족 하면 ‘2중문화’, ‘2중민족’으로서 그 ‘2중성설’은 의식화되고 고착되버려 우리 뇌리속에 당연한, 일정의 회의의 여지도 없는 고정관념으로 뿌리박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진짜 그럴까? 하는 의문, 자문(自問)조차 없고 아무런 반추마저도 결여된채 단순화 시킨지도 오래된다. 마치 오렌지를 사과로 의심하지 않는듯한 그런 당연한 이치로써 여기에는 학문적, 언설적 저작(詛嚼)마저도 생략되버린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오늘날 월경하는 신조선족을 발견하면서 이와 대조적인 연변조선족의 종래의 의미의 ‘2중성설’에 대해 다시금 재발견, 재사고 할 계기를 얻었다.   사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상식으로 통하는 诸事像에 대해 의문의 자세로 충감(蟲瞰-새가 위에서부터 지면을 바라보는 조감'鳥瞰'과 대조적으로 개미가 지면을 기면서 주위를 바라보는것은 충감도 라고 함)하면 그 상식의 구조속에 있는 가상(假像)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필자의 지론을 펼치기에 앞서 용이한 이해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 해외 학자들이 간파한 '中國思想'의 일부 정설(定說)의 허구성을 실례로 들어보겠다.  근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동양사학자이며 중국연구의 거물인 교토대학의 대학자 나이토고난(内藤湖南 1866~1934년)은 일찍 그의 논고 '청조쇠망론'에서 중국인 자신이나 동아시아인들이 꼭 그럴것이다고 생각하는 중국사상이 현실과 괴리돼있다는 점을 까발리면서 그 사례를 이렇게 들고 있다.   ‘중국인은 그 가르침과 실제가 평상 일치하지 않은것이 있다. 이를테면 중국인은 아내를 비상히 무서워 한다. 怕内나 胃内라는것이 흔히 통하는 말인데 중국의 여자는 사실 기가 세다. 그러나 그 가르침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사회상의 위치로서의 부인(婦人)들이 사회에 뛰쳐나와서는 안된다는것을 강조하고 있다.’   흔히 정설로 된 '중국사상'의 픽션성에 대해 든 실례는 실로 정곡을 찌른 예지(叡智)의 섬광이 반짝이고 있다. 실제로 현재 중국의 신예학자들은 나이토고난의 역사적 학설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안고 연구, 흡수하고 있다. 학문의 국경을 넘은 월경은 이미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이제 필자의 지론을 간단히 기술하겠다. 연변 조선족 지식인들이 소리 높이 강조하고 있는 연변조선족의 '2중성(文化,民族의 2중성 포괄)설'은 이날까지 아무런 자문, 반문적인 회의도 없이 일방통행으로 행해진 하나의 ‘상식’으로 되여버렸다.   그것을 주장하는 지식인의 인식에는 중국땅에 이주해온 조선의 후예로서 당연히 중국적인것과 조선민족적인것의 '2중성'이라고 간단히 도식화시켜 보는 '그러할 것이다' 또는 '그렇게 되야 한다'는 당연지사로 일괄해버린 점이 도사리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확실치 않은 '개연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필연성’이 있는가에대해서는 필자는 회의적이다.   적어도 개혁개방전까지 또는 신조선족 등장의 최근까지도 그 필연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소리높은 언설대로 다 찬동하기는 어렵다.   필자가 발견한것이 그 이중성관념과 현실적 사이에는 갭이 존재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충감으로 바라본 그속에는 허구성(픽션성)이 내재되여 있으며 개연성을 무한히 확장시킨 일종의 '상상적 표상'이었다는것이다.   연변 조선족의 2세의 실례를 들어보자. 내가 조사한 A씨는 1930년대생(2세에 해당)으로서 그의 일상생활은 언어는 조선어(함경도방언을 기초로 한 연변식 조선어)였으며 그 조선어 사용도는 한어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조선어와 한어의 비례 9:1정도라고 함)였다. 식사도 중국식이 아니라 조선식(백미밥에 김치, 된장국 등) 그의 日常生活,思考,行动,習俗 문제반 文化적 요소는 거이 '조선인'(조선민족)적인 것이 절대적이였으며 지배적이었다. 한족(중국적)요소는 그 자신도 표방하듯 거의 보이지 않으며 또 굳이 한족언어를 사용하거나 한족 친구를 사귈 필요성, 또 한족습속을 따라서 할 필요적 요소나 여지성이 없었다.    1940년대생, 1950년대생 그리고 1960년대생 등 (2.5세, 3세) 연변조선족에 대한 조사에서도 반영된것은 물론 A씨 2세보다는 한어사용면에서 약간 빈도가 높았으나 여전히 '조선족'의 요소는 절대적 부동의 위치에 있었다.   1992년 8월 ‘제1차 연변대학 조선족 文化研究 학술토론회 논문집’에 연변대학 강순화선생의 흥미로운 연과 결과가 나와있다.   '목전 연변조선족의 문화풍습'의 제목으로 1992년 8월 현재의 시점에서 연변조선족을 조사분석한 자료로서 그 당시 90년대의 조선족 文化양상 파악의 호자료이다.  아래 연변 조선족 언어사용실태에 대한 조사상황을 인용해보자.   ‘과학적으로 선택한 전 연변 40개 지점의 도시와 농촌에서 2000호 주민을 조사통계한데 의하면 민족언어 사용정황에서 아래와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도시 조선족주민중 550호를 선택하였는데 한 가정에 한 분씩 550명 가운데 일상용어가 조선어라는 사람이 408명으로 74%를 점하고 한어만 사용한다는 사람이 77명으로 14%이며 한어와 조선어를 병용한다는 사람이 65명으로 12%를 차지하였다. 농촌의 조선족주민들을 보니 선택한 1450호의 1450명 응답자중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1387명으로 95.6%에 달하였고 한어를 사용한다는 사람은 27명으로 1.9%, 두가지 언어를 똑같이 사용하는 사람은 36명으로 2.5%를 차지하였다. 이 수자에서 볼수 있는 바 조선족이 집거하고 있는 향촌의 일상용어는 기본상 조선어이며 성시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조선어를 사용하는 비례도 비교적 높은데 이것은 연변지구의 민족집거구 언어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응답자의 년령구조 또한 홀시할 수 없는 요소로 되고 있었다. 우리가 조사한 대상은 모두 기혼자로서 물론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다수가 중로년이였기에 그 평균년령이 47세에 달하였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본인 혹은 부모들의 출생지가 조선인 사람이 적지 않으며 평생 조선말을 써왔기에 자기 민족과 민족어에 감정이 깊고 사회생활에서나 가정에서의 주요한 교제공구가 조선어였다. 이들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이전에 조선족중소학교를 졸업한 분들로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계통적으로 배웠고 사용도 능란하였다.’   보다시피 74%의 조선족, 농촌주민의 95.6%가 조선어만 사용하고 있는 통계수자는 경이스럽다. 조한 2중언어를 똑같이 사용할수 있는 조선족은 2.5%에 불과하다. 실제로 내가 연변에서 접촉했던 지식인이나 지인들도 조사과정에서 걸러낸 결과 역시 이같은 언어의 ‘단일성’경향이 ‘2중성’경향보다 월등 높았으며 연변의 조선족은 굳이 ‘2중성’을 필요로 하지 않은 실상을 알아낼수 있었다.   물론 정치성 경향은 ‘중국국민’으로서의 그 자세는 중국 정치의 수준에 적응시키고 맞추어야 하는 그런 성향은 강했다고 반영되었다.   아무튼 90년대 초반 지어 2000년 초기까지도 연변조선족 ‘2중성설’은 언설과 그 ‘상상’의 개연성으로서는 있었지만 그 내실적 현실은 조선족자신들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文化的으로 한족과 거리를 두고 조선족 ‘단일성’을 확보했다는것이 사실이었다.   연변이 연변일수 있고 조선족 고향, 최대집단일수 있게금 보장한것은 2중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조선족 단일성이다. 따라서 단일성만이 연변적인것을 확보해주는 중요한 구성부분이며 단일성이 타자의 침투로, 월경으로 부단한 공간의 축소와 의식의 확장으로 ‘2중성’의 요소가 개연성에서 필연성으로 구축된것은 2000년이후의 사정이라고 필자는 인식한다.   연변조선족의 최대집단이 그동안 늘 그 자신들도 언성을 높여 주장하는 ‘2중성’의 우세가 발휘되지 못한것은 공교롭게도 ‘2중성’이 결핍된 까닭이다. 좀 더 느슨한 표현으로 말한다면 ‘2중성’요소가 존재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적 요소가 박약했으며 따라서 2중성‘우세’를 발휘하는 말은 ‘가능성’이란 말로 그쳤다는것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종래의 연변의 ‘2중성’에서 강조되는 ‘2중성’담론의 대상은 연변이기보다는 안쪽 산재지구의 조선족(할빈, 장춘, 심양, 북경, 청도, 상해, 등)이어야 했다.   적어도 2중성 담론의 상대로서 산재지역 조선족의 2중언어적 文化는 연변조선족권보다 비례적으로나 질적으로도 월등 강도가 강하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이중문화의 우세를 발휘하여 중국내에서 조선족의 괄목할만한 실적을 쌓으면서 그 위상을 주류사회에 인식시킨 큰 역할을 했다. 그 환경으로나 조건으로도 보아 연변적인 변경성적‘단일성’ 편향문화보다 우세가 주어진것 또한 역연한 사실이 아닐까!   이리하여 필자가 이 ‘2중성설’을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연유는 연변에 대한 폄하도 비판도 아니다. 이런 지적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것은 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등장으로 실질적으로 담론의 ‘상상성’에 그친 그 ‘2중성’이 이미 연변에서 형성되었다는것이다. 현재 3세, 3.5세의 연변조선족의 조사를 통해 역시 언어상에서 조한혼용이나 2중언어의 동일한 수준의 구사 등 면에서 속속이 입증되고 있다.    신조선족의 탄생이 연변에서의 ‘2중성’을 실질적으로 ‘상상의 표상’이 아닌 현실로 구축한것은 연변조선족의 하나의 큰 가는성(우세)을 시사하고 있다.    필자는 신조선족의 ‘이중성’에 대해 큰 기대를 건다. 그리고 연변땅에서 조선족 문화를 지켜온 지식인들과 대중들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격변의 시기에 조선족 문화의 변용을 겪어야 하는 와중에 생기는 번뇌, 고충도 이해한다. 민족적인 단일성을 재형성하여 2중성, 3중성으로 재편성, 재구축하는 과정에 있는 연변조선족은 진정한 2중성, 3중성 우세를 발휘할수 있는 문화로 되는 날이 연변조선족의 신생의 날일것이다.
28    (7)방황하는 노신(김문학) 댓글:  조회:6990  추천:37  2010-07-16
<장편연재>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7)방황하는 노신 김문학  중국 근대의 언어, 문학을 개척한 위대한 문호 노신이 주수인에서 노신으로 되기까지는 사실 기나긴 방황과 사색의 터널을 거쳐야 했다. 노신 년보를 보면 그가 7년간의 일본유학을 접어두고 귀국하여 항주, 절강 양급사범학당의 생리화학교원으로 되는 때가 1909년 8월 해빛 따가운 한여름이었다. 이로써 노신의 문학생애에서 긴 침묵과정을 통해 “주수인”으로부터 “노신”으로 비약하기 위한 조주단계에 들어선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노신이란 인물은 중국 근대사 그리고 일본의 근대와 떼어버릴수 없는 상관관계에서 삶을 영위해온 중국의 대표적인 국민작가일뿐만아니라 보다 보편적 의미에서 근대정신사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인물상은 간단하게 위대한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라는 장식어로 규정짓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적 성격을 띤, 국경을 뛰여넘은 그는 우선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갖춘 “세계인” 그것이다.                                           노신에 관한 연구는 중국에서도 최근들어 활발해지고 있으며 신예학자들에 의한 “노신비판”역시 예리한데 있지만 노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연구는 오히려 노신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작가로 높이 떠받드는 일본학계의 그것이 더 심도있다고 해야 할듯하다. 원노신박물관 관장이며 노신연구의 중견학자인 손욱도 필자와의 대담에서 동감을 표한적 있다.   필자가 노신을 통해서 관찰된것은 하나는 노신이 왜 일본유학을 중도 하차하고 귀국한 뒤 소침해지고 침묵을 지키며 갈팡질팡 정신적으로 방황기를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왜 그토록 각골통한의 정념으로 중국, 중국인의 국민성의 열악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또한 시종 이것을 그의 성스러운 사명으로 삼았는가?   이런것들에 대한 중국내의 학자나 저널리스트에서도 정확히 말해서 중핵을 찌른 그 확답을 못찾고있다. 이데올로기나 혁명가 정신 차원으로 기울어져 표피화되고 또 그것은 하나의 규정짓는 고정적 틀이 되여버렸다. 그렇듯 노신은 그 깊은 속을 헤아리기에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귀국이후의 노신의 행적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그의 장장 7년반동안 일본유학의 삶에 대해서 비교고찰하기로 하자. 1902년부터 시작된 일본유학생활은 그에 있어서는 과연 생애의 황금시절이였다. 22세부터 29세의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그는 일본의 선진문물에 큰 컬쳐쇼크를 받게 되고 일본적인 서구문명에 개안한다. 일본에서 그는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잘 신었는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의 중화요리집에서 중국훠투이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산적이 없다.” “동경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마루야마 노보루 《로신》 1965년)   노신이 평생기른 수염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는 일본에서부터 기른 수염양식을 죽을때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철저하게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 하는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세계의 높이로 승화시킨다.   노신이 가장 존경한 사람 역시 일본인 스승 후지노선생이였고 평생 친구로 사귄 외우 역시 우치야마 간조였으며 아들과 자신이 수진한 의사 역시 일본인이였고 지어 그가 죽기직전 남긴 절필도 일본어였다. 그는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으며 그런 친일적경향은 모두 일본의 생활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런 성향은 그 개인의 성격에서 나온 사생활이므로 지탄 할바 못되지만 일본의 삶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것은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의 일본체험을 다룬 연구를 보면 노신이 “국민성 개조”에 뜻을 두게 된것은 시초 일본에서 아스.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이나 일본인이 쓴 국민성 비판서나 잡지 특히 명치말기와 대정초기의 데모크라시 열풍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서양학설, 철학서를 로신은 많이 접했다. 노신은 중국일본유학생이 창간한 《절강조》, 《하남》 등 잡지에 《마라시력의 설》(1907년)  발표하여 유럽에 대한 중국의 갭을 지적하면서 개혁을 호소했다. 젊은 노신은 동생 주작인과 함께 외국번역소설도 내고 잡지도 창간하다가 실패하지만 그는 언설적, 문학적 면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런데 귀국한뒤 노신은 “적막”과 소침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실제적으로 일본류학에서 학사나 석사, 박사따위 학위라는것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홍문학원과 센다이의학교의 학력증명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대학에서 교수직으로 있기에는 학력부족이였다.   1912년부터 1926년사이 북경정부의 교육부 과장직으로(공무원) 친구 서수당의 알선으로 취직한다. 유학시절과 대조적으로 1918년 5월 《신청년》에 《광인일기》를 발표하기까지 그는 거의 무명의 주수인으로 통했다. 실의에 빠져 고서를 베끼거나 탁본을 정리하는것이 그의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문학으로 국민을 각성하겠다고 센타이의학전문학교시절 결의했던 그답지 않게 그는 너무 의기소침, 방황에 자신의 신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스쳐지나 버린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의 비교연구 끝에 찾아낸 답안은 이러하다.   그때의 노신은 본국 동포들에 대한 “후진성”에서 무한한 절망감과 지어 혐오감마저 들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형성된 “국제인”이다. 국제인의 심중에는 언어나 복수문화체험의 기억적 장치가 있는데 상대도 그런 장치가 구비되지 못할때에는 상대에게 큰 절망과 실의를 느끼게 된다. 또한 그는 경계를 사는 “경계인”이기도 했다.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물이였다. 그가 중국에서 다시 본 동포의 후진된 모습은 아마도 역적인 컬쳐쇼크를 초래했을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중국을 바라보는 프리즘에는 “열등”, “후진”, “추루”,  “아큐” 등 비판적인 개념과 이미지로 충만되어 있어  다른 이미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것이다. 즉 일본인의 눈으로 중국인을 바라보았던것이다. 서거 수일전에도 일본조계지에서 그는 일본 벗 우지야마에게 한 말이 “중국은 미래에 사막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의 중국인에 대한 절망감은 국제인의 안목을 갖춘 노신자신의 큰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성비판의 최대의 작가로 부각시킨 결정적 장본인이기도 했다.  
27    (6)100년전의 일본 유학붐(김문학) 댓글:  조회:6036  추천:32  2010-07-15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6) 100년전의 일본 유학붐김문학   갑오청일전쟁 이듬해인 1896년 음력 3월, 중국인 일본유학생 13명이 일본에 파견된다. 청국주일공사 유경은 청정부에서 모집한 13명의 청년을 일본문무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위탁하였는데 그는 도꾜고등사범학교교장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에게 일임시켜 받아들이게 했다.   이것이 근대사상 최초의 중국인 일본유학생이였으며 이로부터 중국인의 일본유학사의 첫 페이지를 연다. 기실 1862년경 근대 중국 유학생의 선구자인 용굉의 권유로 1872년 120명의 학동을 미국에 유학생으로 파견했으나 그뒤 1880년대에 중지시키고 유학운동은 좌절당한다.   13명의 중국청년을 정열적으로 맞아들인 가노 지고로는 저명한 교육자, 유도가로서 중국근대사의 거물인 황흥, 로신, 진독수와 같은 인물을 제자로서 가르쳤던 일화는 유명한데 그가 유학생에게 용의주도한 배려를 한 미담도 많다..   그뒤 육속 일본에 홍수와 같이 중국유학생이 밀려갔는데 1902년에 500명, 1904년에는 1,300여명, 1905년 과거제도 폐지에 후에 7,000명으로 급증, 1906년에는 7,285명(왕향영(汪向荣)의 통계에는 7285명, 사네토 게이슈의 《중국인 일본유학사》에는 8,600명, 진청지(陈青之)의 《중국교육사》의 통계는 12,000명)의 경이로운 숫자에 이른다.   이는 당시 세계문명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유학붐이였다. 1896년~1906년사이에 동경에는 중국류학생을 위해 설립한 일본어학교만 해도 홍문학원(弘文学院), 성성학교, 도꾜동문서원 등 20개가 넘었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최초로 중국여자유학생을 받아들인 시모다 우다코(下田歌子)가 설립한 실천여학교는 중국여자교육사에서 참신한 일장을 펼친것으로 특기해야 할 교육기관이다. 유학생들은 중국에서 배울수 없었던 일본어, 수학, 리과, 체조 등 신식과목과 함께 경제학, 교육학, 자연과학 등 근대적 학문, 교육체계를 습득했을뿐만아니라 “국민국가”를 위한 “국민교육”의 관념을 익히게 된다. 일본에서 배운 유학생에는 중국근대, 현대사의 쟁쟁한 거물중진들이 집중돼있다. 그 인물리스트를 간단히 나렬하자. 陈独秀,李大剑,黄兴,蔡锷,章太炎,鄒容,陈天花, 宋孝仁,蒋介石,汪兆铭,周恩来,董必武,周佛海,秘瑾,胡汉民,鲁迅,郭沫若,周作人,郁达夫,成仿吾,胡凤,李叔同,同扬,夏衍,田汉,高冠花,孙平化,李登辉… 그리고 유학생은 아니나,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했거나 일본의 지원을 받은 또는 일본의 서적을 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갖추었던 인물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를테면 孙文(中山),康有为,梁启超,黄尊宝,戴秀涛,张之洞, 毛泽东, 王周维,罗振玉,溥仪,溥杰… “모택동도 일본의 영향”하면 고개를 갸웃둥 할것이나 모택동 자신의 말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친중파 지식인 다케우치미노루(竹內實)의 《모택동노트》(1971년 간행)에 의하면 1960년 중국방문중인 일본문학대표단에 대하여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전파는 일본이 중국보다 앞섰지요.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나는 일본으로부터 입수하여 일본책으로 공부했습니다. 교또제국대학의 교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가 쓴 책은 지금도 우리에게 참고서로 되고있습니다…”   그런데 100년전 중국은 왜 서구화를 지향하면서 서구가 아닌 일본을 유학지역으로 택했을가? 일본이 같은 동양에서 제일 먼저 서구화에 성공한데도 있지만 또한 큰 이유는 지리적, 문화적 지근거리에 있었으므로 코스트가 쌀뿐만아니라 실용적으로 중국에 대해서 편리했던것이다. 저명한 교육자, 양무파의 리더였던 장지동은 일본류학에 가장 열심히 제창한 인물로서 1898년 3월에 저술한 그의 《권학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에 필적하는 명저로 10일간에 3쇄, 대륙에서 2백만부나 불티나게 팔린 롱베스트셀러였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있다. “유학이라면 서양보다 동양(일본)이 좋다. 그 이유는 거리가 가깝고 경비도 절약할수 있으며 대량으로 파견할수 있다.”“일년 양행(유학)하는것은 양서를 5년 읽는격이 되고 외국 학당에서 1년 배우면 중국학당에서 3년 배우기보다 낫다.”   청나라 정부나 식자들은 일본류학의 절박성,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일본유학을 과거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유학정책을 실시했다. 일본측 역시 청국유학생, 조선류학생에 대해 정부나 민간차원에서 열정적이였고 “청국이 근대화하고 서구렬강에 대항할수 있다면 같은 동양(아시아)에 대해서도, 일본에 대해서도 반가운 일이다”는 사고가 근저에 있었다.   조선유학생이 일본에 유학하게 된것은 중국보다 20년 앞선 1876년이다. 그해 조선정부가 일본에 파송한 신사유람단과 때를 같이 한다. 류대치, 어윤중 일행과 함께 도일한 유길준(25세)과 류정수, 윤치호(16세) 등이 유학생으로 남는다. 그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 머물면서 케이오의숙에 유학한다. 유길준은 한국근대 일본유학의 제1호이며 또한 미국류학 제1호 인물이기도 하다. 나중에 김옥균과 같이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기도 하는 근대 한국의 대지식인, 정치가 그리고 실업가로 성장한다.   조선은 1880년대 들어 일본에 유학생을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시작, 이들 도일류학생은 한국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전까지 김옥균은 세차례 일본에 다녀오는데 60여명 유학생을 이끌고 갔던적도 있다. 손병희도 일본 망명시 유학생 수십명을 데려갔으며 일제강점 직전에 최남선도 국비유학생의 한사람이였다. 지식인, 작가, 시인으로서 이광수, 이인직, 정지용, 오상순, 윤동주… 쟁쟁한 인물로 이룬 이들은 한국근대의 “일본유학정신사”를 이룩하고있다. 《일본외무성 기록문서》 등 여러 자료에 의하면 한국류학생은 1910년 병합시 420명, 1920년초 2,000명, 1930년대는 5,369명, 그리고 1940년대초에는 29,427명으로 피크에 달했다. 중국과 한국 근대의 일본류학은 근대 량국의 문물, 사상, 정치, 문학, 교육, 예술 등 다분야에서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자체가 중한일 삼국 “근대사”의 축도이기도 하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도 일본류학의 붐이 식지 않고있는 “류학정신사”는 물론 100년전보다 파워나 질에서는 떨어진다 해도 어떤 영향이 있을가는 자못 흥미있는 과제가 다.             
26    (5)문명의 “중심”과 “변경” 교체된다(김문학) 댓글:  조회:5504  추천:34  2010-07-12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5)문명의 “중심”과 “변경” 교체된다김문학    동아시아 근대를 해독 할때 발견되는것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기에 걸쳐 일본문명이 근대중국문명의 생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사상(事像)이다.        환언하면 동아시아의 문명권 중심은 중국 대륙으로부터 일본으로 이동한다는 문명사적인 대전환이 형성된다. 근대사에 들어 특히 1894년~1895년에 치른 청일갑오전쟁에서 패북의 고배를 만끽한 청국이 눈을 뜨게 된것은 “일본이 문명에서 이미 우릴 초월했다. 일본을 배우자”는 뼈져린 인식이였다. 양무파 리더인 장지동, 이홍장은 물론 유신파의 강유위, 량계초, 장병린은 모두 입을 모아 일본문명에 경탄하고 서슴없이 일본 명치유신과 그에 따른 모든 서양문물사상을 습득하자고 노력을 경주한다.   근대 동양사학의 최고 석학의 한사람으로 불린 교또대학의 대학자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의 그 유명한 “동양문화의 중심이동설”을 들먹일 필요없이 중국 당대의 제1급 정치가, 사상가, 지식인, 교육자들이 동양문명의 “중심”에서 “변경”으로 전락되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지면서 “서양화”붐을 일으킨다. 그때가 바로 1890년대 청일전쟁후부터 1920년대다. 그 동시대의 일본류학붐이 식지 않은 역사사실을 절대 경솔하게 평가할수 없다. 모든 “국민국가”, “근대성”의 언설과 사상은 모두 그시기 일본유학을 통해 중국 대륙으로 흡수된다.   최근에 와서 중국 신세대 학자들도 “근대의 일본문화가 동시대의 중국문화를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리유도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은 기(奇)하게도 20세기초기에 나이토 고난이 발설했던 “일본문화는 중국이라는 문화의 ‘서슬’이 있었기에 마침내 두부가 생기듯이 탄생됐다”는 말과 逆적인 의미에서 동일한 상황을 이야기하고있다.    4천여년동안 중국대륙안에서 면면히 맥을 이어온 한자를 공용어로 한 한족의 역사적자부심은 정말 무서운데가 있다. 하지만 극동의 변경 소국에 불과하던 근대 일본문명에 뒤져 아시아문명의 “변경”으로 밀려난데 대한 한족 지식인의 프라이드가 쉽게 그 사실을 시인하지 않은 거부감을 낳기도 했으나 력사는 프라이드만으로 풀어지는게 아니다.    중국 대륙에서 전개한 유구한 역사를 오감해 보아도 한족은 한자 서술체계를 위시로 복잡하고 고도로 발전된 농경사회를 구축했지만 늘 한족인구의 5%~10%밖에 안되는 이민족(소수민족)에게 정복당하고 문명의 변경에 놓인 사례가 한두번이 아니다.    가장 한족문명에 동화되지 않은 몽골민족이 창설한 몽골제국은 모택동이 가볍게 읊조린 활을 당겨 매를 쏘는데만 능했던것만은 아니다. 최근 세계적인 몽골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전세계의 드넓은 땅을 차지했던 몽골제국은 세계화의 추진자였고 세계의 중심이였다. 당시 최고의 정보전달시스템, 지페, 패스포트 등 최첨단의 기술과 시스템을 갖고있었다.    중국은 한문화가 주변 변방민족에게 어떤 문화적 혜택을 준것만 언급하고 외려 그쪽에서 문화를 흡수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무시하든지 인식하기조차 린색해있다. 이것이야말로 심리적인 “폐쇄자”이며 문화적인 “변경인”을 스스로 자연하는것이 아닐가.638  그런데 주변 이민족에서 근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중국에게 큰 충격을 준것이 일본이고 중국은 처음으로 아편전쟁시기에 없었던 위기의식을 품게 되는것이 모두 일본이란 “변경”의 역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과 주변의 조선반도는 그나마 행운스럽게도 일본이란 이 작은 문명의 근대 리더가 나타나주어 분발하는데 역동력이 되었다.    1860년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서양화를 가속하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명치”란 말은 중국 고전 《역경》의 “圣人面前充天下,向明而治”(성인은 남쪽을 바라고 천하를 듣고, 밝은 곳을 향해 다스린다)의 구절을 따온것이다. 중국이란 이 문명의 “중심”이 없었다면 일본이란 작은 “변경”도 명치 유신이후의 도약은 아마 불가능했다.     여기서 부득불 후쿠자와의 그 유명한 《탈아론》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그는 그 논문에서 일본이 이탈해야할 아시아(조선,중국)에 대해 “아시아의 고루”, “고풍구습”, “유교주의”, “음양오행”, “인의례지”, “외견의 허식”, “잔혹불렴치”, “고풍스런 전제”, “무법률의 나라”  등 단어로 형용하고있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김옥균 등)가 참담한 좌절을 당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킨 말이지만 이같은 “고루한 아시아”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일본도 망하고 만다고 언급, 일본은 그로부터 성급한 탈아론에서 도약하여 재빨리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다.    그러나 21세기가 10년이 지난, 한일병합에서 100년이 지나고 신해혁명으로 성공한지 100년이 다가오는 오늘날의 동아시아정세를 살펴보면 일본만이 앞서고 중국, 한국이 뒤졌다는 구도가 바뀌고 있지 않은가.          이제껏 일본인들의 인식에서 낙후하다고 생각했던 중국이 어느새 근대화를 이루어 이미 동아시아의 그 100년이상 잃어버린 문명의 중심적 위상을 탈환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물방아처럼 돌고 교체되는것일까. 일본이 리드해왔던 아시아 “근대의 우월”은 이제 서서히 무너지고있다.  이 상태에 대해서 일본의 당대 중국학 연구의 중진학자 전 도꾜대의 교수인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중국의 충격”으로 일본인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미조구치는 그의 저서 《중국의 충격》(2004년)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중국의 충격’이란 제명을 사용하는것은 그 아편전쟁이래의 이른바 ‘서양의 충격’을 암묵의 전제로 하고있는것이다.”  그는 일본,중국 양국의 서구화=근대화 과정은 시간적 선후차이보다는 실은 양자의 근대화과정의 타입(형태)의 차이라고 지적 하면서 일중의 우열관계는 뒤엎어진다고 단언한다.    동아시아문명의 “중앙”과 “변경”이 백년내지 백년이상의 단위로 교체되는 리면에는 문화의 “우렬구도”를 초월한 다원화, 복합의 아시아상을 재인식 하게끔하는 풍부한 시사가 숨겨있다.  
25    17. 新조선족의 越境하는 重層의 아이덴티티 댓글:  조회:4751  추천:35  2010-07-08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7. 新조선족의 越境하는 重層의 아이덴티티김문학   ‘구조적인 越境’, ‘방법으로서의 조선족’을 원용하여 우리 조선족의 越境으로 일어나는 诸事像•现状들을 바라보면 자칫 간과했거나 미처 보아내지 못한 ‘新’자 라벨이 붙은 ‘新조선족’이 새로 부상된다. 편폭의 제한으로 상세한 논술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조선족의‘월경’으로 현현된 诸现状•事像의 양상을 필자는 以下 요약정리 해본다.    필자는 이것을 조선족의 ‘7대 新변용’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O 연변조선족, 동북조선족(산재지구)의 에스닉공간의 축소와 변용   O 감소해가는 조선족 인구   O 조선족 공간의 미디어 공간의 변용 (한국적인것과 조선족인것의 충돌과 통합경향)   O 관내와 북경 및 연해 대도시의 신조선족 생활문화권(新에스닉공간)의 구성   O 한국속의 조선족 공간의 형성   O 일본, 미국 등 서양선진국가의 新조선족 文化공간의 형성   O 新조선족의 越境하는 重層의 아이덴티티의 형성(또는 형성중)   조선족은 그 월경적 구조로 分析하면 시초부터 마이너리티(소수민족)이며 디아스포라이기도 한 重層적 ‘마이너리티’이였는바 그것이 90년대以後의 대규모적인 越境적 이동을 통하여 重層 마이너리티, 디아스포라로 변용을 이룬다.     필자는 조선족의 월경적 아이덴티티에 대해 그 重層적 양상을 区別化하여제시함으로써 조선족의 多樣化, 多重的 新모습을 이해하는 하나의 바러미터와 시각을 제공하기로 하겠다. 필자의 이같은 시도는 처음 하는 分析작업인 까닭에 難度도 높을뿐만 아니라 지탄받을 가능성도 크지만 그만큼 切实히 필요하기에 빈축을 살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감행할수 밖에 없다.   그럼 연변으로부터 동북 산재지구조선족, 관내, 연해도시 그리고 해외조선족에 대한 그 아이덴티티의 重層적 양태를 그려보기로 하자.   (1) 延边의 사과배型   연변의 지식인들 (김관웅, 김호웅 등)은 연변조선족의 정체성(아이덴티티)을 연변의 ‘사과배’라는 메타포를 동원하여 규정짓는다. 연변특유의 과일로서 ‘연변조선족’의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흥미로우며 따라서 필자도 그 해석을 원용한다. 필자는 조선족의 고향인 연변에 대해서 이 拙稿에서 ‘중국이 없는’ 고착된 디아스포라 공간으로서 연변의 독특한 민족공간으로 인식, 해독해왔다.   사실 알아보니 ‘사과배’는 연변 용정의 돌배나무(接本)에 북조선 북청 배나무가지를 접수시킨것이다. 연변지식인 스스로도 메타포적 상징으로 표상화한 그것은 따져보면 결국 연변+북한 북청 그것이였다.   어디까지나 그 내실은 ‘중국’적인 탈락된 연변조선족과 조국(고향) 북한의 접목이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것을 연변인들이 정체성으로 삼았는데 역시 조선민족의 함유량이 가장 높은 边境性적인 특징을 구유하고 있다고 볼수있다.   따라서 조선족에서도 가장 조선족적인 민족적인것이 많이 보전하고 있는 것 역시 연변조선족이다. 이는 조선족의 시원(始原)적 아이덴티티의 고향이기도 하며 조선족이라는 自覺이 가장 순결도 강한 양상을 나타낸다. 그것을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한다.(그림 참조-1)   그러나 이도식은 지식인의 해석이며 연변대중들속에서 이 도식을 넘어 관내로 연해 중국으로 이동한 성원들은 이 패턴에서 이탈된 성원들이다.(2) 散在지구의 올리브型  중국 한족의 공간에 깊숙히 파고 침투하여 조선족 공간을 형성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것은 직접 한족공간과 교차를 이룬 교접방식으로 노정되며 연변에 비해 그 교차의 면적(즉 境界面)이 넓고 따라서 중국적인 것이 많이 침투당하기도 한다. 언어적 영역에서도 중국식 조선어가 더 특징적이고 중국어를 조선어와 같이 병행시켜 구사하는 성원이 많다. 대중들속에는 특히 연변조선족보다는 중국적인것, 문화를 그대로 선호하거나 거기에 동감을 느끼는 성원이 많다. 여기에는 또한 개혁개방이후 동북을 떠난 조선족 이 북경, 상해, 청도, 대련 등 넓은 중국속으로 진입하면서 산재지구 원유의 오리브형 아이덴티티가 더 확장되면서 자칫하면 조선족보다 한족에 편향하여 同化하거나 할 可能性이 더 크다.   그 아이덴티티는 조선족이라 自覺하면서도 政治文化면에서 중국 한족으로 주류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의식 역시 연변지구보다 더 월등 강하게 나타난다. 아래 그림도식으로 보면 그 넓은 오리브형 경계성이 일목요연하게 안겨온다. (그림 참조-2)   중간 교차면의 그 부분은 올리브에 흡사한데서 필자는 올리브型으로 명명한다. 그 중간의 회색부분이 산재지구 신조선족의 올리브형 아이덴티티의 양상이다. 조선족을 지키려하는 동시에 한족의 중국속에 침투, 주류로 진입하려는 의지로 自覺으로 이 境界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살아가고 있다.   (3) 海外의 양파型   월경으로서 해외에 나온 조선족의 아이덴티티는 좀 더 중층적이라고 보여진다. 원래 자신이 자각하고 있던 ‘조선족’이란 핵이 있고 또 중국적인 요소가 그 핵의 테두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누구나 자명하다.   한국 같은 ‘조국’에서 아이덴티티를 찾으려 했으나 그 마죠너리티로부터 마이너리티로 취급받아 文化충돌 또는 내새널적인 충돌, 업압을 받으면서 다시 ‘조선족’, ‘중국국민’으로 귀속감을 느끼는 성원은 매우 많다.   일본, 미국 등 선진국들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도 역시 유사한 경우를 조우하면서 적극적으로 선진문화, 문물을 섭취하며 그 아이덴티티에는 시간이 갈수록 이국적인 새 테두리가 더 붙게 된다. 그럼으로 중국에서 태여난 조선족+살고있는 호스트국의 요소 들이 加味된다. 여기서 정착되면서 그 성원의 2세, 3세들은 同化되거나 언어적으로도 3국어를 구사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기도 하면서 더더욱 중층적인 모습을 노정시킨다. 이들은 중국 조선족을 최전선에서 알리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면서 조선족의 ‘문화 戰士’들이다. 그 양상을 같은 원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그림 참조-3)   양파와 같은 모양을 한 그것은 표피로부터 한층 한층 박취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최 중핵(中核)에 도사리고 있는 ‘조선족’이다. 이로부터 아이덴티티란 그 자신의 ‘自覺’하는 것이 중요하며 자각한다면 그 표피가 중층적으로 돼 있다해도 궁극에는 그 자각의 중핵만 남는것이다.   이 같은 중층적 아이덴티티를 소유한 해외 조선족을 섣뿌른 편견이나 무지로서 폄하, 적대시 하는것은 전근대적 시각이며 백해 있어도 일익은 없을것이다.   요컨대 조선족의 월경하는 아이덴티티를 이상 중층적으로 유형化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認識의 편리를 위한 방법이었다. 기실 이 3개패턴은 또 서로 얽히고 융합된 패턴으로도 노정된 경우도 있으며 그 안으로 깊숙히 파고 들면 또 더 중층적 양상이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이렇다. 조선족이 월경을 통하여 ‘신조선족’이 形成되면서 그 양태도 다층적이며 전례없는 풍부한 바레이션을 노정하고 있다. 아이덴티티 역시 고착된 것이 아니라 여러 바레이션을 펼치면서 중층적으로 노정되는데 다만 소극적으로만 파악 할 사항이 아니다.   이러한 월경의 ‘新조선족’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탄이나 비관론 보다는 이 풍부하고도 중층적인 조선족의 ‘가능성’에다 주목하여 그것을 分析, 연구, 파악, 이해하며 조선족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살리는것이다. 우리 조선족 지식인, 문화인 그리고 모든 대중과 함께 이 ‘신조선족’을 새롭게 인식하 고 거기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자는 사명감, 이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 필자가 졸고에서 노린 신과제이다. 
24    16. "구조"로서의 조선족 越境 (김문학) 댓글:  조회:3577  추천:29  2010-07-04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6. "구조"로서의 조선족 越境 김문학  필자는 ‘移動하는 고향’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사람들은 보통 고향을 하나의 고정된 ‘고착물’로서 고착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離散’하여 他者속에서 생활하는 越境人들에게 있어서 고향 또한 移動하는 고향이기도 하다.   등진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살다보면 고향으로 되는 법이다. 필자는 ‘고향을 늘 포켓속에 넣고 다닌다.’고도 표현하기도 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타향살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애수가곡이 무수히도 많은 것은 예로부터 고향을 떠나 경계를 넘어 살았다는 배경이 있는 까닭이리라.    ‘조선족’은 전형적 의미의 越境者, 디아스포라의 사회다. 그런데 개혁개방후, 특히1990년대 이래 조선족의 고향을 떠난 타향의 越境은 국내 연변, 동북3성에서 관내로, 연해도시로, 해외로 이동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또 다시 시작된 민족의 ‘大越境’이었다.   국내 많은 지식인과 유지들은 이 대월경적 移動에 대해 ‘민족집단공간의 해체’라는 네거티프한 우려를 자아내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같은 목소리는 지극히 지당한 ‘민족위기’에 대한 우려이며 전조선족이 심사숙려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는 시점을 달리하여 보면 이것 자체가 네거티프한것만은 아닌것이라 보고 싶다. 네거티브한 이미지와는 달리 포지티브하게 文化모험을 감행하는 時代적 조류이라면 그것을 단지 소극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미 월경의 민족으로서 신월경으로 다시 새로운 복수의 文化와 사회, 공간에 소속하면서 그 모두와 어울리거나 거리를 둔채 여러 갈래의 價値觀을 갖고 자유롭게 ‘경계’를 살아가는 라이프스타일은 고착된‘디아스포라’에 신선한 공기를 주입한것으로도 통한다. 아니 새로운 삶의 경계를 재구축한 그것이다.    조선족의 구조적 특징의 하나가 ‘越境이다. 하다면 막을수 없는 역사적 흐름인 글러벌화세계에서 이 월경 역시 조선족의 구조를 재편성시킨 의미는 지대하다고 인식해야 할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하나 자칫 간과하기 쉬운 비교지정학 및 비교마이너리티론적 상황을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다. 조선반도가 대륙과 해양세력에 끼인 틈새로서 역사적으로 늘 양대세륙의 발란스 불균형에서 오는 침습을 받았으며 그것은 지정학적 숙명으로 깊이 낙인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반도의 선대들 역시 우왕좌왕하거나 스스로 또는 억압적으로 이동, 월경을 택해왔다.   이 같은 ‘월경’의 긴 역사를 조감하면 월경은 오늘날만 있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월경의 간단없는 ‘레슨(훈련)’을 축적하여 근대 100년전 월경을 통해 이룩한 우리 조선족은 이미  ‘월경’이 그 구조적 내실의 하나로 된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조선족의 구조는 역시 ‘월경적 구조’로 재편성되는것도 자연적이며 운명론적 시점을 투영시킨다면 그것은 불가피면적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래서 필자가 말하려 하는 것은 조선족의 월경은 중국의 티벳, 위글족, 몽골족, 묘족 … 55개의 소수민족, 마이너리티 사회에 비교하여 관찰해보면 아주 행운적이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일본에서 또는 국내에서 만났던 티벳, 몽골, 위글, 그리고 운남성에서 온소수민족 지식인들은 다 이구동성으로 ‘조선족들은 발달된 선진국 한국이란 조국이 있으니 국내 소수민족사회, 지어 한족보다도 일찍 해외로 나가 부(富)를 입수할수 있었을뿐만아니라 그 文化-文明을 접촉하고 흡수할수 있었다. 그대들이 부럽기만 하다. 중국56개 민족중 유일하게 유대인과 견줄수 있으니까 진짜 월경 민족이다.’고 선망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구조로서의 월경’을 조선족 사회를 바라보는 바러미터로 삼는다면 그 포지티브한 조선족의 월경, 그에 잇따라서 생성, 탄생되는 모든 ‘新’字가 부착되는 ‘신조선족’,‘신조선족  生活文化圈’, ‘신조선족 아이덴티티’등 전례없는 새로운 境界를 발견할수 있다. 이래서 조선족이 직면한 ‘민족공동체위기’를 단지 ‘민족공동체 공간의 해체위기’라는 인식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월등 넓고도 고차의 시야에서 그 대안을 모색할수 있게 된다. 이 과제에 대해 국내나 해외의 유지와 지식인들이 같이 고민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23    (4) 청일전쟁때 조선은 누구의 편? (김문학) 댓글:  조회:5890  추천:31  2010-07-03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4)청일전쟁때 조선은 누구의 편?김문학    “H의 구조”란 언설이 있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루이스 • 할레가 그의 저서 《역사로서의 냉전》(1970년)란 명저에서 조선의 역사구조에 대해 정채로운 이론을 펼친다. 그는 동아시아역사는 반도를 에워싸고 천수백년동안 특이한 역사적구조를 이루면서 전개된다고 하면서 “H의 구조”설을 제시한다. 저자는 조선반도를 “H”자모의 중간에 낀 “-”횡선으로 비유하고, 이 횡선은 늘 양측의 두 장대한 종선, 즉 중국대륙세력과 바다에서 습격해오는 해양세력에 의해 사이에 끼여서 우왕좌왕하는데, 양대세력의 어느 한쪽이 강성해져서 H자를 전부 지배하려고 할 때 우선 이 횡선인 조선반도를 지나서 팽창하게 되는 역사적 필연적인 구조를 제시한다. 청일전쟁이 대륙과 해양 두 세력의 조선반도를 통과한 그 충돌이다. 이때 청국과 일본에 대해서 질책 또는 비판을 가하는 우리의 지식인이 많으나, 외려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H자모의 “횡선”이 된 우리가 대체 청과 일 누구 편이었을까? 필자가 새삼스럽게 이 의문을 던지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H구조”를 통해 재발견되는 역사의 침울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한것은 1894년 8월 1일, 그 12일후인 8월 13일, 당시의 무츠(陵奥)외상은 오오토리(大乌)공사에 대한 훈령에 “조선이 청국에 선전포고 하든지 아니면 대신 일본과의 동맹을 공표하게끔 조선정부와 교섭하라”고 명했다. 일본측에서는 일청량국의 교전에 조선이 “중립같은 짓”을 취하면 “타국의 간섭을 초래하기 십상이며 일본정부가 대병을 조선에 파견하는 명분이 상실됨으로” 조선이  일본편에 서기를 적극 바랬다. 바랬다기보다 제편에 서기를 무리하게 강요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당시 정세로 보아 이 파워게임에서 강대국 청나라가 꼭 승전할것이라고 세계 각국이 짐작했던것이다. 물론 예상치 않게 섬나라가 대국을 대패시키지만, 역사는 늘 이렇게 예정된 코스로만 흐르지 않는 괴물인가보다.  대원군은 청국의 승리를 확신했으므로 일본의 요구에 반발했으리라 짐작된다.   8월 20일에는 일본과 조선사이에 “조선국의 자유독립을 공고시키고” “양국의 무역진흥, 국교친밀을 위해”《잠정합동조항(暂定合同条款)》을 체결하고 26일에는 《대일본대조선량국맹약》이 조인된다. 오오토리공사와 김윤식외상이 체결한 이 조약에는 “일본국은 청국에 대해 공방의 전쟁에 나서며 조선국은 일병의 후퇴 및 그 식량준비를 위해 되도록 편의를 도모할것이다”고 규정한다. 이것이야말로 틀림없는 공수동맹규약으로서 조선을 일본편으로 서게 한 계책이였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조선에서 마음대로 인마와 군량을 징발시키고 정부차원에서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편에 서게 했다. 그 당시 찰영된 사진을 보면 우의 맹약에 따라 조선정부군이 일본군에 종군하여 청군병포로를 감시하는 장면이 있다. 장엄한 모습을 하고있는 조선정부군의 표정과 대조적인것이 청군포로병의 겁에 질린, 수심에 찬 표정이 돋보인다.   여기에 또 잘 알려지지 않은 문헌자료가 있다. 영국 종군기자이며 화가였던 후리프가 영국 《그래픽》잡지에 1895년 3월 9일에 쓴 기사가 있다. “힘없고 불운한 조선인에 대한 청국의 태도는 대단히 고압적이였다. 그들은 조선인을 마치 정복국의 주민을 대하듯 위협했다. 특히 청일전쟁초기에는 무자비한 강간과 략탈을 감행했다.” 후리프는 기사와 함께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하여 증언하고있다. 그림에는 청군병사가 조선인을 마구 격살하고 송아지를 강탈하는 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청국군이 진정으로 조선인을 사랑하고 돕고자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을 완전히 뒤엎는 생생한 기사와 그림이다. 일본군이 어떻게 용맹하게 싸웠고 또 청군이 전쟁에서 완패 했다는 사실만 막연히 관심 했을 뿐, 청군이 동포들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관해서는 아예 생각도 못했을것이다.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거기에 대한 비판, 질책으로 일관했던 우리의 시각에 반성을 추궁하는 대목들이다. “당시 청국군의 병참모부는 조직 등 여러분야에서 아주 락후하였다. 그들은 병사들에게 조선 현지 주민들로부터 식량 등 필요 군자재물자를 자체로 조달하게끔 명했다. 그래서 이에 대해 반항하는 주민들은 즉석에서 총살당하는 등 참혹한 현실이 전개됐다. 또한 청군들은 오합지졸이었고 병사로서 전쟁에 대한 관심도 부족 한것처럼 보인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있었으나 전투에서 나타낸 전투력은 허약하기만 했다.” 1910년 일한합병의 국치를 참지 못해 자결한 지식인 황현은 유명한 《매천야록》이란 저술을 남겼다. “청병은 음행과 략탈을 자행하여 날마다 뢰물을 요구하므로 공청과 민가를 막론하고 모두 곤경에 빠져 그들을 원쑤처럼 여겼다. 심지어는 그들이 평양에서 포위되였을 때 가산을 다바쳐 일본병을 인도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들이 패전하여 도주할 때 백성들은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다 가르쳐주었으므로 그들은 포위망을 벗어난 사람이 드물었다.”  “이 전투가 전개될때 일본병들은 모두 군수품을 자국에서 운반하고 심지어 시탄(柴炭)까지도 본국에서 운반하여 사용하였으며 일군이 가는 곳마다 음료수까지도 돈으로 사서 마셨다. 그들의 군령은 이처럼 아주 엄숙했으며 우리 나라 백성들은 그들에게서 병사라는 느낌마저도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그들을 도와 향도(길잡이)가 되는것을 기쁘게 여기고있었다.” 일본군과 청국군의 우렬구도를 잘 그려낸 대목이다. 또한 바로 이러했기에 정부의 조약이나 맹약에 관계없이 당시 조선의 인민들은 청군에 실망하고 질서정연한 일본군에게 호감이 가고 스스로 그 편에 서게 된것이다.  이같은 감정은 아마 지금도 한국인의 심층심리에 자리잡고 있는듯 하다. 역사적 체험에서 자발된 민족의 심리이며, 일본은 거부하면서도 한편 근대화를 일본을 통해 수용한 근대의 한국인의 심성 그 자체이다.  
22    15. 아이덴티티와 脫아이덴티티 (김문학) 댓글:  조회:3942  추천:37  2010-07-03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5. 아이덴티티와 脫아이덴티티김문학     이제 조선족의 ‘아이덴티티’를 관찰 하기 위하여 ‘아이덴티티’의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보기로 하자. 사실 identity는 한국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로서 self-identity는 자기동일성으로 genden-iidentity는 自己認識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신체나 생리적 유아단계로부터 8단계의 성장기로 이행하는데 그 단계에 있어서 개인적 ‘자아’의 양상은 특정된 역사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습관에 따라 나타나는 행동 양식으로 적응해간다. 이런 자아의 적응발전 결과 개인 내부에 ‘자기’상이 형성되는데 이 ‘자아상’에 통합된 연속적동일성(Persistent sameness)를 엔마크계 미국인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아이덴티티라고 칭했다. 자기동일성=아이덴티티는 ‘나는 언제나 나이다’는 연속성과 ‘나는 타인이 아니다’라는 것에 지탱된 사회적 자기의식이며 자아동일성(ego-identity)은 자기동일성의 기초로 되며 이를 유지하는 자아 통합기능을 가리킨다.      개인적 아이덴티티는 자신이 남성인가 여성인가 하는 생리적 사회문화적 특성에 대한 자각이나 특정집단, 민족성원이라는것을 자각(group identity, ethnic identity)을 포함된다.   집단적 아이덴티티는 집단성원에 공통된 신체특징, 집단의 기원과 역사, 국적, 언어, 종교, 가치관, 지리적환경 등 총체와 함께 他者집단과의 力學關係나 정치, 경제적, 사회 적인 현재조건 등 요소에 의해 특히 중요시 된다. 쉽게 말하면 민족, 집단 등에 대한 일종의 귀속의식을 가리킨다.    ‘아이덴티티’에서 중요한 요소는 개인이 ‘나는 누구인가’하는 답안을 찾아 어느 집단, 민족 등에서 귀속감을 추구하는것이며 그러한 자각(自覺)이 있느냐 없느냐도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그 집단이 안정되고 우월감을 과시했을 때는 아이덴티티도 안정해 있 으나 타자성에 관련을 갖고 타자와의 경계속에서 있을때는 아이덴티티 역시 동요하거나 확장, 또는 자기 독자성만 주장하거나 또는 타자성과의 협조 등을 주장하는 불확실성, 불투명성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조선족아이덴티티’는 시초부터 越境에서 시작돼 중국내에서 정착하면서 형성된 또는 지금도 형성하고 있는 불투명체이다. 그것은 현재 세계적 이동, 월경, 타자와의 만남과 충돌속에서 다시 정리되고 정립되는 과정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황유복선생의 ‘조선족’아이덴티티설은 이 같은 혼효, 경계성속을 살고 있는 조선족의 자아 동일성, 귀속감 의식을 강열히 의식하는 사명감에서부터 출발된 아이덴티티의 정립을 호소한것이라 할수 있다.      현재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아이덴티티’에 대한 담론은 활발해지고 있으며 그 자체가 모종의 형적이나 틀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간단히 언어로서 표현 할수 없는 무의식적 영역에 있는 모종의 감각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그것은 자기와 他者를 가르는 척도이며 긴 인생의 도로표식이며 침묵의 전도사로 간주하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것 또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역시 구름같이, 무지개같이 실체가 없는 말랑말랑한 유연성의 ‘불확실성’그것으로 비유된다.      또 흥미로운 言說이 있다. 즉 아이덴티티는 이미 상미기한이 넘었으며 여기저기 많이 존재하는 아이덴티티에 대해 다시 재고하고 도전하는 움직임까지도 보인다. 어떤 지역과 나라에서는 아이덴티티의 개념마저도 확립되지 못한대로 아이덴티티를 이탈하는 포스트모던적인 언설자체가 近代自我가 확립되지 못한 사연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현대 그런 ‘아이덴티테’에 강박된 상황이야말로 냉철히 분석해야 할 상대라는 담론도 튀어나오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는 ‘아이덴티티’가 꼭 특별히 강요되지 않는 법도 있지만 우리 조 선족같이 작은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 경계를 산다면 사정은 또 달라진다. 물론 조선족 출신으로 꼭 굳이 ‘나는 조선족이다’는 아이덴티티 주입을 강요당하지 않고 또 자각하지 않고 살겠다면 그건 별도로 취급해야 할 의제이다. 그러나 ‘조선족’으로 자각하고 그것으로 귀속감을 기탁하고 살아가는 조선족 다수 성원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진지하게 사유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현재 脫연변, 脫중심의 시대에 조선족이 국내 큰 도회지에서 新집거지인 ‘新생활문화권’을 형성시키면서 살아가고 또한 해외에서 까지 월경적 ‘新디아스포라’로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아이덴티티’는 더 두드러지게 현현되고 있다. ‘두드러지게 현현되고 있다’고 한 의미는 조선족 ‘아이덴티티’가 단순한 양태에서 多樣하고 重層의양태로 변용 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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