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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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4. 黃-趙 정체성 論爭’의 함정 댓글:  조회:5269  추천:33  2010-07-02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4. 黃-趙 정체성 論爭’의 함정김문학  최근 전개된 황유복 선생님과 조성일 선생님의 ‘조선족 정체성(아이덴티티) 논쟁’, 그 논쟁의 無意味보다도 ‘아이덴티티’를 사고하고 인식하는 우리 지식인의 한계를 재인식하게 한 계기가 된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논쟁의 주인공인 黃 有福 先生님과 趙成日 先生님은 필자에게 있어서는 學問적 대선배이며 同胞의대선배라는 의미에서 모두 다 존경하는 지식인들이다.    황교수님은 조선족연구의 제1인자로서 사회인류학적 방법으로 조선족 연구의 선구자적 업적을 남긴 조선족 연구의 프로패셔널이다. 趙先生님은 비록 문학평론이 전공이지만 특히 7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老益壯하여 전공부문이 아닌 문화연구 領域으로도 진입하여 조선족 文化   의 논진을 펼치는 용기와 그 연찬정신에는 가히 감복할 만 하다. 하여 아마추어도 전공영역 밖에서 연구할수 있다는 케이스를 잘 보여준 인물이시기도 하다.    이런 두분의 개인적 경력을 전제로 하여 필자는 ‘황조논쟁’에 대하여 개인적인 인상적인 담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족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담론하게 된 것은 개혁개방 후 인구이동과 월경(越境)적 활동, 한국과의 조우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중국’을 재인식하면서 이 모든 중층(重層)의 他者성을 전제로 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족의 아이덴티티 자각은 이 여러 중층의 他者와의 경계성에서 비롯되며 예전 1,2세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돌출해지고 클로즈업 된다.   黃趙論争의 포인트는 한마디로 이 他者性에 맞춘 (또는 그에 의한 재규명, 규정되기도 하는) 理解, 認識의 차이점에서 기인한것이다. 황교수가 지적했다시피 ‘디아스포라’의 한갈래로서의 조선족이 중국(중국인)과 한국(한국인)이란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족들이 자기 정체성(아이덴티티)을 확보할것이 큰 문제다.    그는 학자로서의 연구경험을 축적하면서 내린 결론은 ‘조선족은 바로 조선족이다’는 ‘100%조선족’설을 주장한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한국)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한)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그는 미국하버드대에서 ‘한국계미국인”연구업적을 비교분석하면서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탈 한국적인 미국 코메리칸 문화의 창출을 ‘한국계미국인’의 독자성으로 인식하고 같은 차원에서 중국의 ‘조선족문화’도 창출 해냈다고 역설한다. 중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조선족’의 독자적 아이덴티티를 예리하게 석출해냈다. 그리하여 황교수는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아이덴티티) 때문에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소리높이 주장하기에 이른다.    황교수의 지론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신과 후대가 주류사회진입을 위한 그런 민족적 조선족적인 아이덴티티가 확고한데 또 무슨 우왕좌왕이 필요한가”는 현재의 조선족의 아이덴티티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석출했다.   조성일선생은 조선족이 과경(跨境)민족으로서 당연히 그 중성민족이고, 또 그 문화는 전통적인 고유의 조선반도에서 온 조선문화와 생활국인 중국문화가 어우러져 그 중성을 띠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며 ‘이중성문화’의 민족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디아스포라의 특징으로서 조선생의 지론은 새로운 내용이 없으며 지나치게 조선의 시원(始源)을 강조함으로써 그 이중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여기서 결락된 것은 시원이 아닌 現代 우리 조선족이 ‘조선족’으로서 수립될수 있는 한국과도 아주 이질된 그런 조선족의 현재의 내실인것이다.    시원을 강조하는 조선생과 시원을 이미 넘어서 새로운 ‘조선족’이 창설됐다는 분기점은 여기서도 서로 대립된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조선생은 조선족의 문화패턴(型) (그것은 문화인류학의 개념으로서 아무리 작은 집단사회에서도 그 독자적 文化를 그 집단 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미국 여류 인류학자 루즈•베네딕트의 이론) 즉 이중성 문화형을 그대로 조선족의 아이덴티티에 적용시켰으나 문화패턴과 아이덴티티는 꼭 100%로 合致하지는 않는다.    아이덴티티는 집단성원내의 무수한 개인의 아이덴티티도 포괄되는데 그 얼굴은 문화의 패턴보다 더 무수히 부수적이고 복잡다단하다.   이밖에 필자가 지적하고싶은 또 한가지는 조선생은 황교수의 ‘100%의 조선족’에 대한 개념에 대해 몰이해 했고 또 착각을 한 측면이 컸다. 황교수의 ‘100% 조선족’은 ‘조선족’개념이기도 하며 아이덴티티에 직결된 카테고리로서 거기에는 조선민족의민족적 특질이 이미 내포된 것을 의미하는 ‘중국속의 조선족’의 정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논쟁도 확실한 결론이 없이 不毛의 무의미한 논쟁 그것만으로 막을 닫는다.    황교수는 조선생의 그 ‘‘황교수의 논조가 우리 조선족을 이른바 중국을 이탈하는 무엇으로 몰아부치려 하는지 우려를 떨쳐 버릴수가 없다. 문화대혁명기간에 8.2. 8.4의  터무니없는 사건을 조작하여 우리 조선족을 叛国暴乱의 반역자로 매도한 참안이 문득 필자의 눈앞에 떠오른다’’는 말에 질리고 만다.    ‘‘왜냐면 조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아직도 조성일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황교수는 한탄분노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말장난보다는 지성인들이 해야할 사회적, 실천적 노력을 힘을 모드자’’고 황교수는 호소하고 있다.   황교수님의 분노는 학술문제를 정치문제로 에스컬레이트 시키는 조선생님의 자세에 대함에서 였다. 필자는 그 분노를 잘 이해하고 있다. ‘조선족 개조론’의 저자를 학문적 견해를 넘어서 왜곡, 중상했던 장본인 역시 조선생님등 좌파지식인들이 였다고 한다.    필자 역시 무차별로 당해야만 한 아픈 드라우마를 안고 있으며 이런 저질적인 고루한 구습을 21세기에서 다시 근절해야 생각했는데 역시 그 ‘발톱’은 존재하는 한 늘 상습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만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이러한 不毛의 논쟁은 오히려 조선족을 혼란에 빠지는 ‘함정’을 만들고 있다. 깊고 깊은 미스터리의 함정에 빠져 아이덴티티 의식이 미약한 조선족에게 아이덴티티의 커다란 혼란성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황교수님은 그 혜안으로 爭論의 無意味를 간파하고 그뒤 무시한것은 아주 적절한 판단이였다고 사료된다.    ‘‘우리 조선족 지식인들이 좀더 학술에 접근한 논쟁이 있어야 되는데…’’    오호! 痛哉로다.
20    (3)"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김문학) 댓글:  조회:5721  추천:35  2010-07-01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3)"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김문학   서울 서대문구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 있다. 유명한 독립문은 바로 역에서 도보로 얼마 안 걸어 간 곳에 초연히 솟아 있다.  그런데 이 유서깊은 “독립문”, 대체 그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한국인의 90%이상이 일본으로부터의, 식민지지배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필자가 한국에서 만난 주위의 지식인, 공무원, 회사원, 학생들속에 이같은 착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십상팔구였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이나 또는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에게 질문을 해보았는데 역시 절대 다수가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 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왜냐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장장 35년을 몸으로 체험해야 했던 우리가 “독립”하면 아마도 그 극악무도의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나름대로 착각 할수 있는것도 당연 할지도 모른다.  또한 포스트콜로니아리즘사회에서 식민지의 후예로 살아 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1945년 8.15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해방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심장한것이 아닐까. 역시 식민지 “후유증”의 하나라 할수 있다.  그럼 이 “독립문”이 상징하는 독립이란 대체 그 누구로부터의 독립일까? 정답은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청일전쟁후 1895년 3월 체결된 《마관조약》의 제1조목이 “조선의 독립”에 관한 내용이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청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국가임을 확인 한다. 고로 위의 독립자주를 손해주는, 조선국이 청국에 대한 공헌전례(贡献典礼)등은 금후 전부 폐지할지로다”  일본이 청국과 개전이유로서, 청국과 조선의 종속관계를 영원히 폐하고 그것을 명문화시킴으로써, “독립자주의 나라”조선의 보장을 선언했던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일본의 연속궁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할것은 우리의 기억속에서는 희미 하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기본 구도는 중국대륙과 주변국가의 조공(朝贡) 및 책봉관계였다.  대륙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풍부한 문물과 선진문명을 과시하면서 변방 여러민족과 지역에 제국의 힘을 행사해왔다. 그중 일본이 당나라의 쇠락기엔 894년에 스가와 라미치자네(管原道真)는 견당사파견 중지를 요망한데서 견당사파견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뒤 13년후인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되고 60년뒤인 960년에 송나라가 통일왕조를 세운다. 일본은 좋은 타이밍에서 대륙의 중국권위로부터 거리를 적당히 두고 “자주독립”에 성공한다.  일본은 바다라는 장벽을 여과장치로 중국의 문명을 좋은것만 따먹는데 성공시켜 외래문명 흡수의 우등생다운 본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일찍 문명으로서는 독립을 달성했기에 서양문명을 배우는데 용이했으며 그 점이 조선과의 큰 갭을 만들었다.  조선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접속된 지근거리에 있었으므로 아무런 여과장치도 없이 중국문물을 수용, 하물며 청국에서 멸한 명나라의 중화를 동아시아에서 대신한 “소중화”로 스스로 자부했을만큼 중국물에 푹 젖어있었다. 일본에서는 수용하지 않는 중국의 환관, 궁녀, 전족, 과거제도 등을 조선이 고스란히 수용하고 정착시킨것이 그 좋은 례가 된다. 아무튼 조선은 조야를 불문하고 대륙 청국의 종속국으로서 거부반응을 보이면서도 또한 거기에 순응해온 속국으로서의 역사를 수백년 이어왔다.  모택동은 1939년 그 저술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국주의 제국(诸国)은 중국을 패북시킨뒤, 중국에 예속했던 각국을 점령했다. 일본은 조선, 대만, 류구, 팽호도, 여순을 점령하고 영국은 필리핀, 부단, 향항을, 프랑스는 안남을 점령했다. ”  전근대의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중화제국이 근대서양과 일본제국에 의해 속국을 많이 빼앗긴 사실을 모택동은 언급했다. 그리고 모택동의 말에서 또한 중화제국의 아시아질서를 붕괴당했다는 뉴앙스도 느낄수 있다. 鲁迅도 일본인 작품을 번역한 역사서문에서 일본에게 합병당한 조선을 두고 “원래 우리의 속국이였다”고 언급했다.  이렇게 청국의 속국에서 독립을 맞은 영구한 기념으로 독립문을 세운것이다. 높이 15미터, 너비 12미터, 화강암으로 구축된 이는 파리의 개선문 (높이 50미터)을 본따서 설계 한것이다. 그보다 키는 낮지만 위엄을 자랑하는 웅위로운 모습이다.  독립문의 고안자는 고명한 독립운동가 서재필이다. “독립협회”의 창시자의 한사람이기도 한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1880년 17세에 일본에 유학해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도를 받기도 한 그는 김옥균을 도와 갑신정변(1884년)을 주도하지만 실패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뒤 미국으로 재망명, 10년간 체류중 고학으로 서양의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딴다.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미국시민권도 획득한다.  민비(명성황후는 그뒤 추임한 명칭) 암살(1895년 10월 8일)후 청일전쟁과 때를 같이 하여 조선혁신을 추진하던 김홍집 총리가 1896년 1월 서재필을 조선으로 불렀다. 외무대신직을 의뢰했지만 서재필은 고위관리직을 탐하지 않고 사절했다.  그는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그해 4월 7일 창간하여 독립활동을 벌인다. 지금 한국에서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 된 연유는 여기서 기인된것이다. 7월 2일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활약한다.  이어서 1896년 11월 착수한것이 이 독립문이다. 당시 중국사절을 맞은 “영은문(迎恩门)”(은인인 중국인을 맞는 문)과 “모화관(幕花馆)”(중화를 숭모하는 관)이 서울 의주로에 설치되여 있었는데, 이 두 시설을 짖부스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의미는 심장하다. 그리고 모화관 자리에는 “독립관”을 세웠고 그것이 독립운동가의 활동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그것이 1897년 11월이다.  그러나 근대사를 돌이켜보면 이 “독립”의 내실은 일본주도의 “독립”이 불과 했던 한계가 보인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성립에까지 이르지만 국내 보수파의 무함으로 인해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1898년 11월 폐지되고, 그 간부들도 체포된다.   결과적으로 내부적인 독립의 최후의 기회를 잃게 된다. 이리하여 결국 청국을 몰아낸 일본에게 큰 기회를 준다. 조선독립자주는 청국의 영향을 배제한 일본의 조선지배로 기울어간다. 그야말로 “호랑이를 몰아내고 승냥이를 끌어들인”격이 되었다. 
19    13.조선족에게 정체성은 있는가 댓글:  조회:3812  추천:28  2010-06-29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3.조선족에게 정체성은 있는가김문학   ‘포스트개조론’이래 조선족 지식인들에 의한 ‘우리는 누구인가’하는 자아동일성인식에 대한 담론이 전례 없이 펼쳐지고 있다. ‘자아동일성’인식은 조선족에서는 보통 ‘정체성’으로 통한다. ‘정체성’은 문화인류학(심리인류학)에서는 ‘아이덴티티(ldentity)’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필자도 이하 졸고에서는 ‘정체성’이란 용어를 부분적으로 사용하겠지만 주로는‘아이덴티티’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면 ‘정체성’이란 용어는 우선 ‘아이덴티티’란 용어에서 알수 있듯이 서양개념이며 ‘정체성’으로 그 내포한 함의를 다 담기에는 좀 역부족이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여 우리가 우리자신에 향해 던져진 질문 – ‘우리는 누구이냐’하는 아이덴티티적 의식을 자각적으로 갖춘 때는 사실 그리 오라지 않다. 조선반도에서 대륙에 이주 한뒤, 자신의 의지로 남아서 ‘조선족’을 형성해온 우리의 선 대 1,2세들 소수민족의 일개 멤버로 중국국민에 편입되면서 ‘중국에서 살아간다는 우 리자신’에 대해서 아이덴티티적 사유는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선대들의 정신사에서의 아이덴티티적 고민의 흔적은 뚜렷하지 않으며 ‘중국에서 사는 조선민족’이라는 자아인식이 막연하게 실존했을 뿐이다. 또한 그 의식이 당연한 것으로 특별히 심각하게 사유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중국에서 살아가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지식인이면 몰라도 보통 조선족대중들이 아이덴티티에 대해 자각, 사색을 안해도 될 요소였으며 그보다 살아가는 생존, 생활의 격투가 항상 우선적이였다. 이러한 아이덴티티를 에워싼 민족의식, ‘민족’의 담론이나 사유에 대한 지식인, 대중의 격차는 지금 현재에도 별 다름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필자가 위에서 설정한 소제목 ‘조선족에게 정체성(아이덴티티)은 있는가’는 이러한 조선족의 대중적인 보편적 사유를 두고 한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에게 아이덴티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설정이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다.   조선족 지식계에서 조선족정체성(아이덴티티)을 담론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2000년에 들어서서부터다. 그전에 조선족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연구와 담론은 있었지만 명확한 ‘아이덴티티’의 의식의 자각으로 행해진 것은 매우 빈약했다. 일반론적인 조선족 문화의 양상, 이를테면 연변의 鄭判龍선생 등 선대연구자들이 ‘며느리’패턴, ‘사과배’ 접목식 문화라는 문학적 비유에 의한 제시는 흥미롭지만 조선족 아이덴티티를 的确(적확)한 의식으로 석출함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문제는 ‘정체성’담론은 정체성(아이덴티티)이 무엇인가 하는 담론이 없이 그냥 ‘조선족 문화는 이중성’인 까닭으로 그 ‘정체성도 이중성이 아닐수 없다.’는 거치른 유추의 방법으로 유도하는 식은 어딘가 우습꽝스럽기만 하다.   아이덴티티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조차도 결여 한채 아이덴티티를 담론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경솔함’과 ‘치졸함’, 그리고 ‘무지함’의 질타에서 자유로울수 없을수 있다. 물론 개인의 지(知)적인 레벨과 교양과 안목에도 관련된 사연임으로 한마디로 그런 지식인에 대한 비난, 비하하기 보다는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연유를 파는것이 더 우리 모두들에게 유리롭다고 사료된다.
18    12. 월경하는 ‘신조선족’의 新生活文化圈 댓글:  조회:3834  추천:26  2010-06-27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2. 월경하는 ‘신조선족’의 新生活文化圈 김문학   평론가 최삼룡선생님이 2009년 5월 ‘니카’에 발표한 ‘重绘中国朝鲜族文化地图’는 신선한 감각의 논고다. 그의 논고에서 펼친 언설적 주장은 바로 필자가 ‘개조론’이래 구상해온 ‘신조선족’사회의 전개와 一致했던것으로 필자에게는 반가운 글이였다. 최선생님은 ‘조선족문단의 劉再復’으로 불릴만큼 1980년대부터 조선족문학의 이론적 헤게모니를 거머쥔 개명파 이론가이다.   그리고 최선생님의 이 논고가 ‘니카’에 게재된 것 역시 의의가 아주 크다. 필자는 ‘21세기의 라스트 수공업자’로 自嘲할 정도로 컴맹이며 아직도 입력을 못하고 홈페이지를 볼줄 모르는 위인인데 친구의 도움으로 작년 가을경 ‘니카’의 인터뷰를 받고서부터 ‘니카’를 가끔 들어가 보게 되였다.   공정히 평가하면 국내의 모든 신문매체나 잡지가 게재, 기획하고 취급할수 없는 신사상, 신감각, 신문학, 신사조 등을 ‘니카’가 민간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신조선족’의 언설적 표징으로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젊은 ‘신조선족’의 언설적 집결지이며 근거지의 하나이다.    당연히 아직 여러가지 원인으로 그에는 많은 미숙함과 결함들이 존재하지만 ‘신생’의 인터넷지로서 앞으로 보완되고 극복해나가길 바란다. ‘니카’가 내건 슬로건 ‘境界의 소멸을 꿈꾸는 境界者들의 이야기’는 바로 경계와 국경을 넘는 ‘신조선족’의 ‘세계적인 사상, 세계적인 인식, 세계적인 시각’의 특징을 대변하는 말이 아닌가.   다시 최선생님의 논고에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여러 종류의 ‘조선족문학사’의 집필진의 멤버로 활약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오늘날 문학사에 대한 결점을 발견한다. ‘문학발전의 공간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홀시’한 결함을 지적하면서 드디여 ‘조선족문학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는 신선한 결론에 이른다.   1980년대이후 조선족사회의 인구이동에 따른 신문학권의 형성과 그에 상응된 문학지도를 그리는 것은 필자의 ‘신조선족’사회의 탄생과 그 ‘異时的文化群’과 一致한 취지의 견해이다.    최선생님은 이렇게 갈파한다.   “중국조선족문학의 지리적공간의 확장은 결코 문학의 표면현상의 변화가 아니다. 도시는 농촌과 다른 자연경관과 인문환경이 있으며 소도시는 대도시와 현대화수준이 다르며 집거구는 잡거구와 언어환경이 같지 않다. 외국은 중국과 통치제도와 주류의식형태가 틀린다. 이런 구별은 필연적으로 문학작품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느때부터인지 연변에 거주하는 작가들에 의하여 나온 작품과 연변외의 도시나 연해지구의 작가들에 의하여 나온 작품들이 차이가 보인다. 중국의 56개 민족중 주체민족인 한족의 문학작품을 많이 수용하는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과 한족의 문학작품을 많이 수용하지 않는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된 작품들의 차이가 보인다. 한국에 자주 나들며 한국문학을 많이 공부하는 작가에 의하여 씌여진 작품과 한국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작가에 의하여 씌여진 작품의 차이가 보인다.’’   “요즘에는 미국의 뉴욕에 가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열띤 작품활동을 벌리는 류순호의 작품과 한국, 일본에 오래 체류한 김재국의 작품, 일본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작품활동을 벌리는 김문학의 작품, 그리고 한국과 러시아의 생활체험이 두터운 장혜영의 작품이 제나름의 특색으로 독자들속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있다.’’   “그리고 연해지구의 문학은 집거구보다 상대적으로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문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아울러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인, 문화인들과의 조화속에서 생성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눈에 띄운다.’’   그리고 논고의 결말 부분에서 최선생님은 조선족의 2009년 현재의 ‘문학지도’를 그려야 하는 이유를 천명하시면서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만약 누가 1945년 8월에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그렸다면 중국의 동북지도를 놓고 신경(지금의 장춘)과 연수와 통화와 녕안과 교하와 룡정과 연길과 조양천과 도문과 안도만 찾아놓으면 되였을것이다. 신경에는 ‘만선일보’가 있었고 최남선, 박팔양, 황건이 있었고 연수에는 류치환, 통화에는 김영팔, 교하에는 박영준, 룡정에는 윤동주, 강경애, 안수길, 김창걸, 연길에는 리욱, 조양천에는 김조규, 도문에는 현경준, 함형수, 안도에는 천청송 등이 있었다.’’   “만약 누가 1976년 10월초에 중국조선족의 문학지도를 그렸다면 세계지도도 필요없고 중국지도도 필요없고 연변지도만 보고 연길만 찾으면 되였을것이다. 김학철, 정길운, 리근전, 김창걸, 리욱, 최정연, 황봉룡, 채택룡, 김례삼, 김철, 임효원 등이 모두 연길에서 살았다.’’   “만약 누가 2009년 4월에 중국조선족지도를 그린다면 연변지도만 가지고 안되며 동북지도만 가지고 안되며 중국지도만 가지고 안된다. 세계지도가 있어야 한다.’’   “연길, 룡정, 훈춘, 길림, 장춘, 할빈, 목단강, 심양, 대련, 북경, 천진, 청도, 항주, 상해, 소주, 란주 등 국내도시들외에 서울, 평양, 도쿄, 뉴욕, 모스크바, 베를린 등 세계적인 도시들도 찾아야 할것이다. 그 도시들에 누구의 이름을 써넣겠는가? 이 문제의 해답은 필자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중국조선족문학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에 우리 문학을 관심하는 모든 석학이 힘을 합쳐 풀이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선생님의 혜안에 의해 걸러낸 결론에는 필자도 전적으로 찬동한다.   그러면서 ‘文學’에만 구애되지 말고 필자가 이 글에서 누누히 창도해온 ‘신조선족’의 生活文化圈으로 확대하여 그 文化圈지도를 그리는 것이 더욱 요망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精神史를 정리하는데 지대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   현재 조선족은 정착 100년의 역사에서 미증유의 이동, 변모, 변용을 겪고 있으며 이런 변화된, 또는 되가고 있는 조선족을 정신사적 조감도에 의한 이론적 정리가 필요하며 안고있는 문제점을 파악하는것과 함께 변모된 조선족사회를 재발견하고 재규명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17    11. ‘신조선족’의 국제적위상과 의미 (김문학) 댓글:  조회:4170  추천:30  2010-06-25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1.'신조선족'의 국제적위상과 의미김문학   그리고 강씨는 사이드나 재미교포2세작가 이창래를 거론하면서 필자의 활동은 서구가 아닌 일본을 무대로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비판했다고 처음으로 지적한다.   "사이드나 재미교포 2세 작가인 이창래는 모두 복수 문화의 경계에서 활약하는 아웃사이더이다. 김문학은 서구가 아닌 동양, 특히 옛날 제국주의 지배자였던 일본에서 활동하며, 한중일 3국 문화의 경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단지 사이드가 서구제국주의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면, 김문학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대조적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상대를 어설픈 비난으로 폄하하기 보다는 우리 안의 약점, 병증을 비판함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높여 상대와 동등한 공존을 기하고자 하는 것이 김문학의 궁극적이면서도 유일한 목적이다."   이어서 강씨는 이런 투철한 지적을 하면서 해외에서 활약중인 ‘조선족’지식인의 위상을 규명하는 의의와 필요성을 언급한다.   "사이드가 서양에서 오만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 받는것과 김문학이 우리 안에서 비난, 왜곡당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보수적인 미국의 지식인들은 사이드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맹렬히 비난, 반발했는데 그 배경에는 사이드의 이론이 폭로한 서양 제국주의의 치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배여있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 안에서 김문학을 비난, 비방하는 이면에는 그의 책들이 드러내는 우리 안의 많은 치부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위에서 보아온 김문학의 진정어린 자체 비판의 건설적인 담론과 그 진면목을 미처 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오해, 왜곡은 상당히 안이하고 조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 진면목에 대한 인식 없이 행해지는 과도한 평가나 감정적인 비난, 폄하 역시 다 난센스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동포지식인의 위상을 규명하는 작업은 글러벌 시대를 살아가고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객과화 시켜 바라보는데 더 없이 적절하고 필요한 거울이 된다."   같은 책에서 심훈은 같은 유학체험을 바탕으로 근대문화를 회고하면서 신조선족의 경계를 넘은 글쓰기에 대한 위상을 신선한 각도로 피로 한다.   "김문학은 일찍 20대 나이에 중국을 떠나 일본과 국외에서 유학을 하면서 의식구조나 세계관에서 철저한 변화가 생겨난다. 그는 문화인격으로서는 코스모폴리탄형의 ‘세계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 변신에 대해서는 본인 역시 자부심을 느끼면서 늘 자랑하고 있을 만큼 의식적인것이다.국경을 초월한 코스모폴리탄형의 정신적 세계에서 국경이나 고향의 경계선은 없어지며 타자의 조국과 고향도 자신의 조국과 고향같이 상대화시켜 볼 수 있는 그런 넓은 의미의 시각이다."   "타인의 고향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할 수 있고 내 고향도 타인의 고향 같이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세는 해외에서의 오랜 체험 없이는 완성되기 어려운 일이다. 필자도 일본에서 유학과 취직생활을 통해서 김문학식의 코스모폴리탄의 시점을 이해하는데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됐다."   "세계 근대문화사를 둘러다 보아도 중국, 조선의 문단을 보아도 유학생의 근대문학, 인문학에 대한 공헌은 이루 형언할수 없이 크다. 중국의 노신, 곽말약, 주작인, 주양이나 호적, 임어당, 양실추, 하연이나 조선의 이광수, 최남선을 위시로 한 근대 문학의 대가들의 지도자적 역할이나 최근 유학생의 지식계에서의 위치를 보아도 실감할 수 있으리라."   "김문학의 독특한 위치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들과도 또 한층 다르다. 그는 계속 이(異)문화속에서 자리를 지키면서 이문화의 위치에서 자기 민족문화를 객관화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인물은 우리 조선족에게는 처음의 경험이며, 신선한 문화적 공기와 지적인 자극을 주게 된다는 면에서 의의는 매우 크다.미처 느끼지 못한 이 중요한 의의를 더 이상 무시하고 가벼운 생각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잇따라서 국경을 넘은 ‘신조선족’의 글쓰기에 대해 속단은 금물이며 김학철선생이 지적했던것과 같은 지적을 하면서 정면에서 색깔과 편향없는 환원작업이 필요하다고 일갈한다.   ''아직도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젊은 그를 두고 이미 성취한 것보다는 앞으로 성취할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볼 때 그를 오늘의 안목으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어쩌면 경솔한 행동일 것이다.''   ''그의 맨탤리티와 조선족 문화사에서 차지할 위치에 관해서는 그와 맞먹는 역량의 평론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의 글을 읽고 그를 편견없이 색깔을 버리고 환원시키는 일이다.''   신생의 ‘신조선족’글쓰기에 대해 2003년의 시점에서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그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예견 할수 있는 것은 탁견이 아닐수 없다. ‘신조선족’의 ‘발견’은 그 시점에서 시작된것이다.‘신조선족’의 등장으로 조선족이란 작은 마이어리더, ‘고착된 분지적인 文化型디아스포라’가 국제무대에 알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적 무대’란 세계 조선민족의 네트웍보다 더 넓은 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가리킨다.   이제 머지 않아 주요 세계 선진국에서 ‘신조선족’의 존재적 가치는 날로 커질것이며, 그 위상이 자리잡으면서 최 前線에 선 ‘조선족’의 표상으로서 정착될것이다. 필자는 그 근미래를 예견한다. 그것은 10년~15년이면 족할것으로 추찰된다. 
16    10. 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 (김문학) 댓글:  조회:4393  추천:45  2010-06-23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10. 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김문학   국경을 넘고 경계를 넘어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는 ‘신조선족’을 그 ‘글쓰기’를 통해 그 지적(知的)양상을 가늠해보기로 하자.    국경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글쓰기를 해온 ‘신조선족’의 ‘선구적인 인물’로서 국제적으로 필자를 평한 책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지성 김문학 읽기’ (강원석 편저 2003년, 한일문화교류센터 간행)가 그것이다.    이책에는 ‘조선족의 월경하는 글쓰기’를 처음으로 정면에서 다루면서 필자에 대한 국제적 평가, 논평, 해독문, 비판 등을 다양하게 집성하여 ‘신조선족의 글쓰기’에 대해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으로 본다. 물론 ‘자화자찬’의 빈축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얘기하자면 필자 개인이 아닌 또는 필자를 통해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의 디아스포라적 의미를 인식하는 자료를 제공하고싶다. 이를 계기로 독자여러분의 ‘신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켰으면할 따름이다.    필자와 ‘조선족’의 ‘국경을 넘어 글쓰기’에 대해 본격적인 조명은 최삼룡선생을 비롯한 조선족평론가와 한국, 일본의 지식인들과 매체였다.    한국의 강원석은 연변조선족의 일부지식인의 김문학글쓰기에 대한 편견, 왜곡을 지적하면서 그 내실을 이렇게 밝히고있다.     '김문학은 많은 오해를 받고있는 인물이다. 오만하며 ‘친일적’이라는 등. 그러나 그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들은 사실 경계를 넘나드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자유로운 글쓰기에 대한 오해에서 유래된다. 소위 ‘김문학현상’으로 불리는 일부 네티즌이나 지식인들에 의한 그의 국제적 글쓰기에 대한 비난, 왜곡에서 그의 참모습을 곡해한 부분이 매우 많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동포지식인으로서 아마 김문학처럼 찬반양론으로 대립된 평가를 받는 사람도 그리 흔치 않을것이다. 그 역시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충돌속에서 국제적 명성을 확보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여러가지 차원에서 김문학은 ‘조선족’이라고만 한정시켜서 규정짓기는 어려운, 때로는 좀 거북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조선족’이란 좁은 테두리에서 벗어나 국경을 뛰어넘어 국제적으로 문화활동을 벌이고 있고 또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국제적인 평판, 특히 조선족 안에서나 한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찬성과 부정, 비방, 왜곡까지 가미된 논란을 제3자의 입장에서 나는 오랫동안 방관해왔다.'    이어서 강씨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활동하는 김문학을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비교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나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활약하는 김문학을 바라보면서 미국에서 영어로 활동하고있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Siad)를 연상시킨다. 사이드와 김문학은 유사한 점이 많다. 그 유사성은 바로 ‘아웃사이더’와 ‘경계를 넘는 글쓰기’라는 단어로 축약할수있다. 사이드의 명작 ‘오리엔탈리즘’, ‘문화와 제국주의’는 두가지 문화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아웃사이드’적 의식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오리엔탈리즘’등의 책들은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화해로 이어주는 아웃사이더의 연결작용을 극명하게 완성한 이론으로, 탈냉전 시기를 맞이한 오늘날에 세계적 필독서로 평가 받고 있다. 동서양의 동등한 공존을 주장하는 사이드의 논리는 두 문화 사이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자신이 그 둘 중 하나에만 속하기 보다는 그 두 세계에 다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나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를 때, 그것은 슬프거나 박탈당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제국이 분리해 놓은 그 두 세계에 다 속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두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서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그는 자신의 그 포지티브한 ‘아웃사이더’적 특성에 대해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했다.    ‘하나 이상의 역사와 그룹에 속해있다는 느낌이 한 문화와 한 나라에만 충성심을 느끼는것보다 더 나은 대안이 될수 있다.’    그는 서양에 대해 분노와 복수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남겨놓은 장점을 이용해 서로의 동등한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편이 낫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세계화 시대를 맞은 오늘날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이 되었다.      
15    (2) 근대 한중일의 첫 문명충돌 (김문학) 댓글:  조회:6080  추천:31  2010-06-21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2)근대 한중일의 첫 문명충돌김문학근대 동아시아 3국의 직접적인 근접적 교섭은, 공교롭게도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문명과 문명사이의 충돌, 또는 문화지간의 충돌은 늘상 전쟁이 그 역할을 하게 되는것이 역사다. 문명사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전쟁은 정의냐 불의냐 하는 도덕적 가치기준의 판단에 앞서 이문화사이의 교섭, 교류의 큰 팩터로서 역사의 큰 주제이기도 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근대 중국(그때는 청국)과 일본은 대규모적인 지근거지의 접촉, (첫 접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이 바로 1894년의 청일전쟁(갑오중일전쟁)이다. 전쟁의 이유는 무엇인가?불행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조선반도를 둘러 싼 일본과 청국의 쟁탈전이 그 내막의 본질이다. 이렇게 대륙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운 민족은 역사상 늘 양측에서 습격해오는 분쟁과 문명의 바람을 다 맞아야 하는 운명은 어쩔수 없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본과 청국의 뒤에는 또 러시아가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세계의 지정학자들은 이를 통털어 “지정학적인 숙명”으로 조선같은 운명을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최근 “지정학”을 서양중심주의적 학설이라고 비판의 화살을 맞기도 하지만, 영국의 지리학자 맥킨더가 1904년에 창시한 이 학설은 관념론이나 숙명론으로 일축할수 없는 정책과학의 하나다. 지정학은 지구전체를 늘 하나의 단위로 보며 그 동향을 괴얼 타임으로 포착해 거기서 현재의 정책에 필요한 제안을 하는 학문이다. 아무튼 타자에 의해 칼도마에 오르는 타률적인 위치에서 우왕좌왕하는 조선의 그것은 “비운”이란 낱말이 늘 뒤따르게 된다. 19세기말, 명치정부가 조선에 대한 기본정책은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국교를 맺는것을 바랐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또한 지금껏 종주국으로서 군림해 왔던 청국의 권한을 공연히 부인하는것으로 이어졌다. 이리하여 일본은 명치 9년 즉 1876년 강화도조약(일조양국수호조약)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청국과 대립해 왔다. 1890년 제1회 제국회의에서 당시의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具有朋)는 조선반도의 이익을 확보키로 결정하였다. 그뒤 이윽하여 6월에 동학운동이 발발, 조선정부가 청국에 농민봉기를 탄압하기 위한 원병을 요청했다. 이도 히로부미 등 점진파들의 신중론을 누루고난 정부 급진파들은 대부대의 육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청국과 조선에 있어서의 권력의 발란스를 노렸다. 청일양국의 파병으로 동학당봉기는 진압했지만, 양국의 군대는 철수하지 않은채로 주둔을 견지했다. 일본은 청국을 격퇴할 전쟁계획을 획책하고 7월 25일 아침 풍도에서 북양함대 일부대를 습격했다. 4일후 경성의 남부에 포진한 청군과 싸웠다. 결과적으로 해전, 육전에서 청국군은 대패북, 일본은 첫 근대전쟁의 대승을 거둔다. 중국측의 전쟁에 대한 기술은 이미 교과서 등을 통해서 알수 있으므로 여기서 구구한 서술은 약하기로 하고 일본측의 전쟁양상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일본측의 문헌자료들을 점검하면서 놀라운 일은 청국은 일본과 싸운 일도 모르는 민중이 많을 정도로 무관심했지만 당시 일본은 거국 일치로 전쟁을 찬성하고 응원의 파도가 파죽지세로 팽배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유명지식인인 도쿠도미소호(이광수의 스승이기도 하다), 미야케세츠레이는 물론, 코스모폴리탄 사상가로서 저명한 우치무라간조(内村镒三)와 같은 지식인까지도 《대표적인 일본인》등 저술을 통해 청일전쟁이 명예로운 “의전(义战)”이라고 례찬했다. 그 유명한 명치의 계몽가 일만엔 지폐에 오른 후쿠자와 유키치는 즉각 1만엔을 기부한다. 현재시가로 환산하면 1억엔어치의 거액이다. 더구나 일본은 당시의 모든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스컴을 총동원하였다. 현장 종군기자, 화가, 작가를 파견하여 일단위로 전쟁을 보도했다. 당시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아시아 최대 대국인 청국을 두려워 했으며, 북양군벌 이홍장과 또 그 이상으로 남방의 세력의 최대권력자 장지동을 경계했으나, 장지동은 대만의 화재를 구경하듯 구경만으로 수수방관 했다.청국의 국가관념과 함께 애국의식은 박약했던것이 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전쟁에 있어서 누구나가 “당사자”의 자세로 임했다. 온국민이 전쟁에 열광하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전쟁의 체험자였다. 많은 대중들은 앞다투어 의연금을 기부하고 돈없는 젊은이들은 종군지원에 나섰다. 일본신문에는 전쟁의 영웅 미담과 함께 의연금 기부, 전쟁을 계기로 나라에 봉사하는 국민의 미담도 지면을 채웠다. 일청전쟁이란 콘텐츠는 독자를 열광시키고 신문잡지에 의한 세계인식하는 습관을 온 일본사에 정착시켰다. 신문매체의 힘은 이렇게 파워가 크며 동일가치관으로 내보는 위험성도 구비하고 있으면서 이런 배경아래서 대중사회가 이루어졌다. 100여년전의 일본과 청국이 조선의 이익을 위해 벌인 전쟁에서 이런 재발견을 할수 있다. 전례없는 근대전쟁으로, 그것은 중국에게는 당시 국민의 부재와 국민국가의 미완성, 국가 의식의 결여성을 노정했으며, 일본에게는 전사회의 극변을 가져오며, 전례없는 “국민”이란 의식과 함께 국민을 탄생시키고 진정으로 근대국가로 탈바꿈을 이룩한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동아시아의 국제적 질서를 전례없이 동요시켰으며, 동아시아에 군림하던 청국의 제국적인 리드체계가 하루 아침에 실추한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귀추하면 일본같은 “국민국가”의 일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그것이다. 우리가 “근대”라고 칭할수 있는 근대는 사실 청일전쟁을 경계선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전근대와 근대의 분수령이다. 1895년 이토히로부미와 이홍장에 의해 체결된 “마관조약”에서 청국은 조선 종주국에서 이탈하고 대만을 할거당함으로써 “반식민지대륙”으로 낙인된다. 청국에 대해서는 막대한 치욕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일본이 청국대신 동아시아의 소위”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청국 수하에서 빼앗은 조선을 마음대로 식민지 유린 할수 있는 스타트라인에 선다. 청국과의 싸움에서 형성된 국민국가적 공동체의식을 청국은 또 거기서 배우게 되고,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국은 멸망, 손문에 의해 새로운 국민국가적 공화국이 성립되게 된다.  
14    (1) 동아시아지도를 꺼꾸로 보면 (김문학) 댓글:  조회:6546  추천:38  2010-06-17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1)동아시아지도를 꺼꾸로 보면김문학 세계지도속의 아시아지도를 펼치자. 그리고 꺼꾸로 바라보자.이제 우리는 흔히 지도를 바로 바라보는것과는 달리, 아주 신선한 느낌과 함께 이제껏 없었던 새 발견을 하게 된다. 중국과 한국(조선반도), 일본의 방위가 정반대로 배열된다.우선 일본이 지도에서 제일 서방 위치에 배치돼 있고, 그리고 조선반도, 중국대륙은 동방에 서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아시아에서도 일본이 지리적으로 기실 서양의 미국아메리카대륙과 제일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된다.다음으로 동아시아의 3개의 반월형 판도를 발견할수 있다. 일, 한, 중은 각기 사이즈 차이는 있어도, 크고 작은 반월형(半月形)지형으로 서쪽에서 동으로 3개가 배열된느것이 눈에 뜨인다. 물론 대륙은 반월이기보다 거대한 만월이라해야 하는것이 옳겠다.그리고 섬나라와 반도와 대륙 사이에 끼인 바다 발해, 황해, 동해, 남해는 대륙과 열도에 둘러싸인 내해(内海)라는 점을 확인하게 될것이다.더우기 일본지도에서 흔히 “일본해”로 표기돼있는 동해는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옛날 육지와 연결되었던 잔재로서, 마치도 큰 호수처럼 보인다.하나 더 빼놓을수 없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지도를 꺼꾸로 놓고 조망하노라면 새우처럼 생긴 일본 지형은, 바다를 경계로 대륙과 다른 지역에서 멀리 동떨어진 바다위에 떠있는 고립무원의 “외로운 섬”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첫눈에 뜨이게 된다.따라서, 일본이란 섬나라는 기실 아시아대륙의 드넓은 북방과 남방을 이어놓는 큰 교량이라는 점이 부각된다. 뿐만아니라 아시아 (동양)의 제일 서쪽끝에 (정면지도에서는 동쪽 끝0극도이라고도 함) 자리잡고 서양 북이대륙 등 사이에 놓은 거대한 교량인것이다.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근대 한중일 동아시아를 살펴 볼 때, 솔선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문명의 교량”적인 구실을 제대로 못했다는것이 근대의 큰 “악의 꽃(恶之花)”이다.1868년 명치유신이후, 서양식의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바다가 인적 교류를 하는 무대라는것 대신 바다가 곧 구경(国境)이라는 관념을 국민들에게 세뇌를 하고, 고립무원의 외로운 섬을 지키자면 해외로 지향하여 식민지점령을 해야 한다는 무서운 선택을 한다.세계 중, 근세사에서 15~16세기 역사의 주역은 대륙제국으로부터 해양제국으로 바뀐다. “바다를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하는 시대”가 바로 대항해시대를 거쳐 다가온 근대다. 근대의 서양적 문명과 기술로 바다를 주름잡던 근대 세계의 식민지지배 원리가 바로 서양을 중심으로 한 해양제국의 가장 큰 화두였다.영국을 중심으로 불, 독, 이태지 그리고 러시아 미국 등 제국주의의 바다를 건넌 식민지침략과 강점, 약탈은 당세 세계 강자의 “약육강식”의 절대적 원리였다.1840년 아편전쟁의 패북에서 크나큰 충격을 받은것은 청국이 아니라 오히려 섬나라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서양의식민제국의 식민지지배를 면하는 방법은 오로지 스스로 “부국강병”,”문명개화”를 실시하여 아시아의 “서양”이 되는 활로뿐이라고 신속히 알아챘다.동양 3국의 개국(开国)양상을 비교하여도 일본이 얼마나 “서양”적인것에 민감하고 솔선적으로 서양의 흉을 낸 “원숭이”라 비난받을만큼 잘 따랐는가를 알수있다.아편전쟁후, 중국은 황제를 주축으로 한 “천하”관념에 사로잡혀 공맹의 유구한 문화전통만 고집하면서 되려 그 육중한 자신의 문명에 짖눌려, 결국 근대화를 외면하는식으로 근대화의 “낙제생”이 된다. 여전히 대륙제국의 그 관성에서 탈피하기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아편전쟁에서 청국보다 더 큰 우려를 느낀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의 “흑선(黑船)래향”에서부터 유연히 대처하여 불과 15년후인 1868년에는 서양식 개혁, 명치유신을 성공시켜 근대화 국가를 정립한다.조선은 어떠 했는가? 1866년 병인 양유(丙寅洋扰) 1871년 신말양유(辛未洋扰)이후 1875년 9월 일본은 강화도에 침입하여 운양호(云扬号)사건을 조작한다. 최근에 발굴된 사료에 의하면 운양호 사건은 순전히 미국의 페리제옥의 행동을 본따서 조선영토를 침범한 일본의 도발이었다. 1876년 2월 “일조수호조약”이 체결, 부산 외 두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의 “통상왕재”등을 유리하게 보장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서양 제국과 같은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小西洋“소서양”을 자처하면서 군립한다. 조선은 서양과 일본 양축의 업악속에서 비자주적 개국을 시작하게 된다.물론 역사가 “인류의 삶의 세계를 시간관 공간의 두 축으로 일개인이 직접 체험한 범위를 넘은 척 도로 파악, 해석, 설명, 서술하는 영위”라는 점을 감안해, 일, 중, 한의 역사적 시간(발전속도)과 역사적 공간(지리풍토)의 이질감을 이유로 백번 양보해도 일본의 아시에 대한 “탈아입구”식 또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한 침략, 식민지화는 그 표방이나 속은 어떻든 당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용납할수 없는, 또는 굴절된 업악이 아닐수 없다. 아무리 역사사상(事像)을 도덕기준으로 평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점은 절대 당사자들의 피해자적 입장에서는 미덕이나 칭송의 가치로는 되지 못하는것이 인지 상정이 아닌가.1940년대에 중반까지 지속된 일본의 아시아지배와 침략전쟁은 무모한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엄청난 광란의 극치로 치달았는바, 결국 바다를 뛰어넘은, 아니 바다의 양상을 무시한 “대공영권”의 미몽은 참담한 패배로 종연된다.이제 다시금 곰곰히 지도를 응시해보자. 지리는 결국 심리(心理)이며, 심리는 곧 인간이며, 인간은 곧 文化이다. 그리고 역사는 바로 인간이 만든 문화에서 규정된다. 그 어떤 국가적 영략으로 무리하게 행해지는 의지(意志)라 해도 문화를 무시하고 지리를 무시한다면 종당엔 파탄으로 끝나고 말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무자비한것이다.
13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머리말 (김문학) 댓글:  조회:5537  추천:33  2010-06-11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김문학) 김문학머리말 금년 2010년 (8월)은 한일병합 100년, 내년 2011년 (10월)은 중국신해혁명100주년으로 동아시아근대사의 획기적인 대전환을 이룩한지 100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가 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근대 동양(아시아)의 문명개화(근대성)는 서양의 충격에 의해 시작된다. 중국과 한국, 일본은 서양적 근대화를 지향해 토끼와 거부기식 경쟁을 벌이고, 불행하게도 명치유신을 통해 동양에서 솔선 서양적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제국의 침투와 더불어 근대사의 격투가 전개된다. 근대 동아시아 문화, 사상, 사회는 이 행불행(幸福幸)의 역사적 배경하에서 불가피적으로 억압·저항 및 적응의 다층적 구도를 구축하면서 그 명암(明暗)을 이룩해왔다. 지정학(地政学)적으로 대륙과 섬나라의 틈새에 낀 우리 조선반도는 문명사가들의 말대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격”으로 심한 고통과 변화를 겪으면서 역사의 한가운데 서있었던것이다. “역사는 겨울이며 교훈”이라는 옛 가르침은 참으로 그른데 없다. 이같은 시점에서 100년전 근대의 명과 암에 대해 재점검, 재조명함으로써 재발견, 재사고하는것은 앞으로 미래지향의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모두에게 자못 중대하고도 심원한 의의를 갖고있다. 역사란 무엇일까? 어제를 끈끈한 뉴대로 밀착시킨 오늘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백년전의 근대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갖고 있을까? 중국의 근대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이 그 인식의 바탕에 있지만, 우리 민족 자신의 근대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또 밀접한 상토영향관계에 있는 이웃 일본의 근대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품고 있을까?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에도 문제가 있는것 사뭇 안타깝다. 경직되고 단순한 그 불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좀더 다양하고 유연한 시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교롭게도 역사란 그 어떤 특정적인 목적론, 인식론에 의해 전개되는것이 아니라, 개인과 민족, 집단 사회, 나라를 굴횡무진으로 얽히면서 시공을 누비는 과정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상, 이쪽과 저쪽, 자타가 서로 영향, 조화를 이루거나 아니면 반목, 격투하면서 지극이 복잡다단한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역사란 드라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자아와 타자(他者)들로 복합적이다. 타자가 거울이 되어 자신의 모습을 비껴주는 구실을 하는것 그 자체가 역사의 참모습이 아닐까. “남을 알아야 나 자시니을 알수 있다”는 진라와 같이 100년전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교, 조감적으로 바라보는것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다. 오랫동안 동아시아비교연구에 투신해온 필자가 본 연재글에서 근대의 3국양상을 중대사건, 문화, 예술, 사회, 일상, 풍속, 민중의 삶에 이르기까지 MRI식으로 횡당면으로 잘게 잘라서 클르즈업 환원 시킨다. 그동안 우리가 미처 잘 몰랐거나 망각했던 또는 스쳐지났을 역사의 장면들을 재발견하고 사색을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나간 군대의 벗과 그림자를 보아낼수 있으며, 포근하고 또한 차거울 근대의 체온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일국사적 시각에서 벗어나 다원, 다층의 시각에서 우리와 주위를 성찰한것이 필자가 노린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그동안 연구과정에서 부지런히 수집해온 사진과 그림, 만화자료를 같이 붙여서 소개한다.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기탄없는 교시를 바라마지 않는다.
12    김문학 프로필 댓글:  조회:8615  추천:128  2010-06-09
김문학 프로필   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 작가. 독자적으로 중일한 비교문화 영역을 개척한 제일인자. 1962년 9월 심양에서 조선족 3세로 출생. 1985년 동북사대 일어일문과 졸업. 1991년 아시아 최우수성적으로 “니이지마장학금” 획득후 일본유학, 同志社大学大学院,京都大学大学院(연구생) 히로시마대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비교문화 및 문화인류학 석, 박사과정 수료. 현재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 특임교수 및 동경, 서울, 북경, 대만 여러대학, 연구기관의 객원교수, 객원연구원, 중국 중신출판사 전속 계약작가. 2010년 6월 현재까지 한중일 3국어로 출간한 저작은 58종에 이르며 그외 학술논문, 평론, 산문, 서평, 소설, 시, 대담, 수백편에 이른다. “월경하는 글쓰기”를 전개한 문인으로서 “신조선족 지성의 기수””국제파 귀재””동양비교문화의 작은 거인” 으로 국제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그의 저작들의 총판매량은 250만부를 기록하고 있다. “국제적 시야, 해박한 지식, 탁발한 사고, 참신한 아이디어, 신랄평명한 文体,文風”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수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김문학팬클럽”도 있다. 김학철이 “鬼才”, 정판룡이 “怪才”, 어어령이 “秀才”,중국지식인들이 “奇才” 일본지식인들이 “异才”로 평가를 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과 중국에서 “일본국제기금교류상”,”연변일보문학상””요녕신문문학상””장백산 모아모드 문학상”등 문화, 문학상 다수 수상.소속 학회로 문화인류학회, 동아시아비교문화국제회의, 일본중국학회, 해외KOREA연구회, 동아시아사학연구회, 국제안중근기념협회 등 다수. 글쓰기외에도 TV방송출연, 강연으로 동아시아 언론계, 논단, 방송계에서 폭 넓은  문화활동으로 일본에서는 “전후 가장 환영 받는 외국명인 100명”중 18위로 부상. “노상 동시대를 일보 앞선 지견과 사상으로 그의 사상과 견해, 문화활동자체에 대해 몰이해에서 기인되는 조선족 일부에서 왜곡, 평가절하 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고 평자들이 지적 하기도 한다. “그는 조선족 문인의 ‘最初’와 ‘最多’의 기록을 그 자신의 작품과, 활동 및 평가로 창출해내고 있는 독보적인 존재”라는 평도 받고 있다. 主要著作소개 (1)《벌거숭이3국지》(1997)조선족이 쓴 작품으로서는 가장 많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품으로서 동아시아 한자권 및 구미에서 전재, 연재, 번역소개되면서 “동아시아 신세대를 영향준 저작”이란 평이 있다. (2)《반문화 지향의 중국인》(1999)조선족 최초의 중국문화비평서로 “중국인의 국민적 열근성을 문화적시각으로 비판한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3)《한국이여, 상놈이 돼라》(1999)비교문화의 시각으로 쓴 한국문화비평서, 조선일보에 의해 “일본이외의 외국인이 쓴 대표적 한국, 한국인론10”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도 “한국이해의 필독서”로 베스트셀러로 되었다. (4)《조선족대개조론》(2001)조선족백년사의 전무후무의 찬반양론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奇书로서, “조선족 문화지도를 바꾼 책”. (5)《反日에 열광하는 중국 友好로 영합하는 일본》 (2004) 원제목 《중일근현대사의 허위성론》,중일근대사의 교과서적 “정설”의 허구에 도전한 충격적인 역사비평서, 해외중국인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면서 지지를 받은 책이었다. (6)《天馬의 크로니클》(2005) 전후 조선족 최초의 일어장편소설, 원고지 1200매분량. 이성과 이문화를 통해 “월경하는 조선족 지식인”을 여러가지 표현수법을 동원하여 쓴 조선족 최초의 유학생(留学生)문학. (7)《중국인.일본인.한국인》(2000)월경하는 글쓰기의 저자와 “바라본 체험적인 동양3국인론”으로 3국인의 국민성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비교문화3국지”로 정평이 있다. “벌거숭이 3국지”와 함께 한중일 대학에서 교재로서도 산이기도 한다. (8)《裸恋》(1993)문혁후 조선족 최초의 중문수필집, 중국평론계에서 “진솔하고 자유롭고 분방한 文体로 20대의 팡세를 표현한 지성적에세이”로 평가받은책. (9)《신. 추한 일본인》(2007) 원제목 《일본국민에게 고함!》 일본, 일본문화에 대한 심충사고, 그에 대해 비판을 가한 일본문명비평서, 일본과 중국에서 지식인과 대중의 환영을 받은 “일본인론”. (10)《混의 중국인》(2008)원제목 《중국 국민성의 裏구조의 발견》,중국국민성, 정신구조의 심충을 문화인류학, 비교문화론적 방법으로 해명한 저작, 일본에서 대반향, “중국국민성이해 최량(最良)의 저작”으로 평가됨. (11)《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2010) 중국인의 성과 에로스를 文化史적으로 다룬 성문화사적인 저작. (12)《대륙근성.반도근성.섬나라근성》(2007), 풍토론, 인류학적 접근방법으로 한중일 3국문화를 이질성을 비교한 “비교문화론”저작. 현재 집필중에 있는 저작으로는 《신조선족 越境论》(탈고),《近代재발견》,《사상가 안중근》(일본어)외, 금후 출간예정인 책으로 이어령박사와의 문명대담 《동아시아 문명론의 방정식》(가제),《전전(战前) 일본인의 “중국론”게보》(일본어) 《일본인의 일본인론》(중국어) 《김문학 동아문화, 문명논총시르즈》(중국어),《한중일 3국인의 성격》가 등이 있다. ※ 이 프로필은 북경 시대화어도서문화공사에서 작성한것을 번역했음.  
11    9. 동아시아의 3국어 사용자 (김문학) 댓글:  조회:4765  추천:31  2010-06-01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9. 동아시아의 3국어 사용자 – 식민제국의 언어적 기억김문학   ‘디아스포라’에서 다시 생성된 디아스포라 – ‘신조선족’의 국제적, 국내적 경계를 넘은 등장은 조선족 100년사의 새로운 한페이지를 열어놓은 대희사이다.    조선족정신사에서는 전례없는 특기할만한 현상이다. 이제 잠간 담론의 무대를 일본에서 유학, 정착하고있는 ‘신조선족’으로 옮겨보면서 그 다중 언어적 실력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현재 일본에 살고있는 조선족, 중국에서 건너와 유학, 취직 또는 무역, 대학교수, 회사원, 지식인, 학자, 술인 등으로 활동하는 일본속의 ‘신조선족’이 일본사회에 可視化되고 갈수록 주목을 받고있다.    절대다수가 중국국적을 소지하고있으며 성명(姓名) 자체에서는 보통 ‘중국인’의 성명과 똑같게 일본식으로 읽혀지기에 그 존재가 표면에 나타나기 어려울 듯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조선족’이란 명칭이 일본인사회에서 이제 낯설지 않다.    일본인들이 조선족에 대해서 제일 경탄을 금치못하는 사항이 바로 조선족이 ‘3국언어 사용자’라는 언어실력이다. 보통 일개국밖에 구사하지못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동아시아 일,중,한 3국언어를 유창히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경이로운 실력이기도 하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도 한족들에게서 ‘2중언어사용자’로서 선망의 상대가 되고있지 않은가. 물론 연변조선족은 여전히 그 소분지형 문화의 소산으로 한어를 유창히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비례적으로 74%나 된다는 통계를 본적이 있다. (물론 구사할수있으나 정통하거나 유창하지 못한 사람의 비례는 농촌인구를 포함하면 그정도는 될것이다. 실제로 내가 사귀던 동북사대시절의 연변친구들속 거의 한어를 못하거나 유창하지못한 사람이 대수였다. 대학입학 첫 건강진단때 화룡에서 온 K씨는 팔에 예방주사를 맞을 때 한어를 잘못 알아듣고 바지혁띠를 풀고 엉덩이를 내보여 주위에서 웃음통이 터진 실례도 있다.)    그러나 유창정도야 차이가 있지만 재일중국조선족은 3개국어 사용자로서 주위의 일본인, 중국인이나 한국인의 선망의 상대가 되며 취직률도 상대적으로 높다.    그리고 중국에 있을때는 거대한 한족앞에서 작은 마이너리티(소수민족)인었으나 일본에서는 중국인과 한국인과 다 같은 일본사회의 마이너리티란 점에서 동등한 위상으로서의 심리적 우세도 주어져있다.    조선족의 일본 유학생이 많은 이유는 100년전 일본제국의 식민주의피지배자였다는 역사적 기억과 밀접히 연계성을 갖고있다.    대만, 만주와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배권에서 일본제국의 언어정책은 그 민족의 독자적 언어문자에 대한 배제를 특히 1940년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으로 실행했다.    일본학자들 자신의 표현을 빌면 ‘조선, 대만, 만주 등 근대 일본제국이 품어안은 식민지는 ‘국어(國語)’ 즉 일본어가 얼마만큼의 영역으로 확대시킬수있는가의 실험장이었다.    만주, 간도에서 이 실험장안에 있었던 조선인들은 모국어인 조선어와의 유사성으로 인해 일본어를 가장 우수하게 마스터했으며 그런 연유로 한족들의 시기를 살 정도로여서 때로는 ‘二鬼子’로 불리기도 했던 역사적 체험을 가지고있다.    반세기전의 식민제국언어의 일본어는 개혁개방후 조선족 학교교육의 조선어, 중국어와 함께 외국어로 우선 배우기 쉬운 언어로 일본어가 선행되였다.    식민제국 언어의 ‘기억’이 재생되여 조선족 외국어 교육이 자연 선택되였다. 지금은 영어교육도 보급되고있으나 일본어는 여전히 그 같은 식민의 기억으로 제일 습득하기 용이한 언어로서 조선족이 늘 선택하는 외국어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제국식민정책에 의해 나(라)를 좇겨 중국에 온 조선족의 후세대가 다시금 식민지제국이였던 일본으로 찾는 그런 ‘회전’이 글러벌화속에서 아무 거부감없이 행해진것이다.    그래서 그 덕으로 중국의 마이너리티로서 중국이란 이 거대문화의 모습에 가리워졌던 조선족이 선참으로 선을 보이게 된곳이 한국이 아닌 일본이였다.    20년전 필자가 처음 일본에 유학생으로 도일했을 때 아주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대학선배 한,둘이 일본에서 유학경험을 거쳐 ‘조선족은 일본어를 너무나 완벽하게 잘하는 인재’라는 표상이 따랐던것이다.    그런제 지금 일본에는 일본어를 무기로 일본이란 사회무대에서 일본인이나 한국인, 중국인 뒤지지않게 활약하는 우리 조선족동포들이 각 분야에 존재하고있으며 우리 조선족의 위상을 알리는데 성공한 지식인도 적지않다.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 파워실력을 발휘하여 그 위상을 국제적으로 과시한 것은 바로 30~40(년)대의 ‘신조선족’이다. 국내에서 조선족들이 역설(力說)하던 조선족의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일본에서 국경을 넘은 ‘경계인’들이 실현한것이다.    일본에서 활약중인 ‘신조선족’과 함께 그뒤에 이어진 미국, 유럽, 그리고 수자적으로 가장 방대한 만의(?) 재한조선족, 이 같은 ‘신조선족’을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정체를 규명하여 ‘조선족정신사’의 볼륨있는 새장을 열어야 한다.
10    8.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 (김문학) 댓글:  조회:4660  추천:39  2010-05-30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8.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김문학   그럼 ‘디아스포라’의 개념, 카테고리부터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기로 하자.    사실 ‘디아스포라’의 개념은 복잡하고 그 개념 정리는 ‘문화’개념과 유사한 다층성을 나타내고있어 그 기본적의미를 우선 파악하고저 한다. 1970년 이래 세계 탈식민주의문화이론에서 문화인류학의 용어로 쓰인 ‘디아스포라’를 원용함으로써 1990년대에 기본상 정착되면서 2000년이후에는 그에대한 개념카테고리의 해석이 계속 증식되고있다.    ‘파종’(씨뿌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어에서 유래된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이 팔레스티나에서 ‘이산(離散)’을 주로 가리키는 용어로 되였으며 비록 이산은 되였지만 종교, 텍스트, 문화에의해 연결됐다. 유대의 ‘디아스포라’는 완결성(integricy)과 동질성을 나타내기위로 사용되였던것이다.    시초부터 유대적 종교의미로 각인된 ‘디아스포라’가 일반화되여 서로 다른 공간, 나라, 사회속으로 진출하여 경계성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간이나 집단을 가리키게 되였다. 이처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디아스포라’는 국외추방자, 난민, 외국인노동자, 망명자, 在外同共体, 宗教共同体,등 영역으로 확대된 용어로 되어 그 양상이 복잡중층적이되있는것이 추세이기도하다. 로빈 • 코엔의 ‘글러벌 • 디아스포라’은 또한 ‘피해자디아스포라 • 노동디아스포라 • 제국디아스포라 • 교역디아스포라 • 문화디아스포라’로 분류시킴으로써 디아스포라현상을 유대적독점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 개념적 공간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R • 브루베이커(Rogeres Brubaker) ‘디아스포라’의 기준을 (1) 이산 (2) 고향지향성 (3) 경계의 유지 이 3가지로 규정짓는다. (1), (2)는 기본이고 (3)은 디아스포라의 불가결의 중요한 기준인데 생활하는 호스트사회에대한 독자적 아이덴티티의 보유를 의미하며 또한 그 역동성으로 이종혼효성, 유동성, 크레올화, 혼합주의 요소가 강조되기도한다.    늘 인용되는 슈트아트 홀은 ‘디아스포라경험은 본질이나 순수함 등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종성(異種性)의 인식에 의해 규정된다. 차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차이와 함께 차이를 통하여 살아가는것 같은 ‘아이덴티티’의 개념, 즉 이종혼교성에 의해 나타난다고 언급했다.    ‘디아스포라’의 복잡한 개념을 중국의 조선족 특히 ‘연변조선족’에 적용시켜 조선족의 위상과 정체성(아이덴티티)등을 해명하려는 동기는 좋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하고싶은 서양적학문의 개념용어를 적용시키는데는 그에 상응된 방법이 따라야한다고 여긴다. ‘이민자’, ‘망명자’, ‘독립운동가’로서 중국에 이주하며 살아온 초기의 조선족은 ‘디아스포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소분지내부’에서 ‘고착돼버린’ 과거의 ‘디아스포라’이다.    따라서 지금 3~4세, 21세기를 살고있는 조선족사회를 ‘방법으로서의 디아스포라’로 포착하는 것이 요망된다. 즉 1990년이래, 2000년이후 형성된 국내의 경계를 넘은 월경적 조선족, 그리고 해외로 국경을 초월한 조선족 이들을 필자의 명명인 ‘신조선족’으로 설정하고 ‘디아스포라’로 해명하는 것이 타당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자신을 디아스포라로 자칭한 것 역시 21세기 글러벌상황하에서 일어나고있는 신현상, 조선족으로 말하면 월경하는 ‘신조선족’이란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임을 밝히고자 한다.    조선족 또는 연변의 소분지형 문화속에서 ‘고착된 디아스포라’에서 다시 증식된 2000년이후의 ‘신조선족’ 이들을 해석하고 관망하는 작업은 즉 다시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를 환원시켜 조선족의 신패턴사회를 해독하는 방법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족(특히 연변조선족)은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원용하여 말하자면 소분지형 문화에서 고찰해본듯이 ‘디아스포라’ 요소를 무의식적으로 억압시킨 또한 디아스포라의 ‘경계성’, ‘경계인’을 스스로 액체나 고체덩어리같이 응고시켜 그 파워나 가능성을 발휘할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오히려 오늘 21세기의 ‘신조선족’, 연변이란 조선족중심에서 이탈된, 이역시 필자의 명명이지만 ‘탈변입중’(脫边入中)의 인구이동에 따른 조선족에 적응시켜서 보면 ‘신조선족’의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상(像)이 뚜렷해진다고 보고있다. (이음)일본 히로시마에서
9    7. 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디아스포라’ 댓글:  조회:4824  추천:31  2010-05-24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 7. 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디아스포라’   김문학     ‘경계성’, ‘양가성’, ‘혼효성’ 등 키워드는 반드시 현재 많이 유행하고있는 ‘디아스포라’와 직결된다. 최근 조선족학계나 문단에서도 ‘디아스포라’가 조선족을 해석, 해독하는 하나의 개념으로서 빈번히 소개, 담론되기도 한다. (김관웅, 김호웅 등)    조선족 지식인으로서 처음으로 필자가 ‘디아스포라’의 문화인류학적 개념을 소개했고 또 스스로 자신을 ‘디아스포라, 월경의 디아스포라’라고 자칭했다.    아침 식사는 북경의 레스토랑에서 우롱차에다 기름빵을 먹는다. 그리고 정오에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서울 시내로 달려가서 삼계탕에 들큰한 동동주 한사발을, 저녁은 어느새 도쿄에 날아와서 신선한 생선회에 기린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런 3국 동시 체험이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된지도 오래다. 도쿄의 아담한 선술집에 홀로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어떤 기묘한 꿈속에 있는듯한 착각을 느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일까 하는 자문자답을 수도없이 해보았다.    나에게는 이런 ‘혼란상태’가 오히려 하나의 낙인것이다. 나는 스스로 자신을 일종의 ‘분열인간’이라고 부른다. 내가 감히 ‘분열인간’이라고 자랑삼아 큰소리 칠수있는 까닭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 항로와 밀착된 체험이 있기때문이다.    중국에서 태여나 어릴때부터 한국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규사하며 2중 언어의 문화생활을 해온 내가 20대가 끝나는 무렵에 일본으로 유학와 일본문화를 피부로 느끼며 생활한지도 벌써 10년이 가까워 온다. 그리고 또 모국인 한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모국문화를 거듭거듭 체험해왔다.    게다가 해마다 중국에는 두세번 꼴로 일시 귀국해 현지 생활을 느끼고 온다.    내 가슴속에는 중국문화와 일본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라는 동양 세 나라의 문화에다 조선족문화까지 비빔밥같이 온통 엉키고 뒤섞여 내입에는 가장 맛있는 문화 비빔밥이 있다. 이처럼 자기자신을 분열시키고 복합화시키는 체험없이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지향한다는 것은 허위적인 슬로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 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벌써 50여년전에 미국의 사회학자 E.V. 스통키스가 그의 저서 에서 경계인(境界人)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경계인이란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지않고 복수의 집단에 소속되긴 하나 어느 한 집단에도 완전히 빠져버리지않으며 그 귀속이 분명하지않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경계선, 이 사회와 저 사회의 경계선을 의식하지않고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최근 문화인류학에서 빈번하게 제기되는 디아스포라가 이에 해당된다. 원래 유태인의 ‘이산’이라는 뜻에서 온것인데, 자기 문화에도 이문화에도 소속되지않고 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창조의 에너지로 삼는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동과 이산을 뜻하던 네거티브 개념이 국제화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없이 소중한 포지티브 개념으로 바뀌었다… (‘나는 즐거운 越境人’ 1999년)    인용이 길어져서 죄송하오나 필자가 최초로 제기한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맹렬히 비난하던 연변의 일부지식인들이 지금에 와서 오히려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조선족문화코드를 푸는 필수적 무기로 삼고있으니 아이러니를 느끼며 또한 ‘상전창해’를 느끼게 한다.    그토록 필자의 인격모욕까지 병행하면서 ‘디아스포라’를 사갈(蛇蝎)시 하던 분들이 아무튼 학문적인 개안(開眼)을 이루었다는 것은 경하할만한 사연이며 학계의 ‘진보;를 노정한 일이니 필자 역시 만열(滿悅)하다.  
8    6. 小盆地型 문화 (김문학) 댓글:  조회:4707  추천:26  2010-05-22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6. 小盆地型 문화 김문학  조선족의 고향, 민족적 구심점인 연변의 문화를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해명해봄으로써 그 내실과 함께 연변이 안고 있는 장점, 결점을 석출해보기로 하겠다.   ‘조선족개조론’의 연변에 대한 그 결함을 비판을 한 ‘이미지 선행’으로 아마 필자가 연변에 대하여 혐오하고 부정적 표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심양에서 태여난 나는 강원도 강릉 출신의 후예로서 조선족이 집결된 연변에 대해 어릴 적부터 막연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지금껏 40이 넘도록 나는 겨레가 같이 모여사는 지역에서나 나라에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70년대 초 소학교를 다닐 때 ‘조선어’교과서는 요녕성교육학원에서 편찬한 ‘漢字’어가 섞인 ‘朝漢混用’의 문장들이었다.    그 뒤 차츰 출판되는 교과서로 바뀌면서 ‘연변’이란 지명을 알게 되었다.   연변에서 살아온 동포들은 아마 실체험이 없어서 잘 느낌이 안 올 수도 있는데 늘 이민족과의 경계에서 살아온 필자가 연변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동북사대시절에 나는 연변에서 온 동포들과 늘 사귀고 축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연변의 ‘사과배’의 미미(美味)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최초로 연변을 방문한 것은 1987년 봄이었다.   연변의 조선족 민속을 알아보고자 혼자서 찾았다.   연변 경내에 들어서자 열차 안에서는 조선어 방송이 시작되었다. 연길 역에 하차했을 무렵 치마저고리차림에 머리로 짐을 이고 가는 할머니, 연길역 앞의 조선족여성의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조선어간판, 조선말, 억양이 좀 투박하긴 했으나 재밌었다. 이런 연변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나는 생각을 뇌리에 떠올려보았다.   필자의 어머니도 2년 전 별세하기까지 ‘한번 연변에 가보았으면 얼마나 좋으랴!’하고 되뇌이시군 하셨다. 이 같은 심리적 동경심을 아마도 ‘피는 못 속인다’는 말로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의 민족적‘구심적’, 겨레의‘고향’ 그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연변 서시장에서 이쁘장한 아줌마가 ‘맛보이소’하면서 건네주던 감자떡이 먹고 싶어지군 한다.   고향과 핏줄, 이런 것은 추상적 관념이나 의식보다도 실 체험에서 느낀 그 따스한 겨레의 손길에서 받는 체온에서 표상화되는 것이다.   이런 연변, 이런 우리조선족의 중심이며 고향인 연변의 문화적 양상을 이제 다시 바라보면서 필자는 그것을 추상적인 이론으로 접근하려한다.   지금까지 나는 수차 연변을 방문했는데 연변의 그 지형적 특징이 오늘도 선명히 기억에 강인돼있다. 연길시는 주변에 높고 낮은 구름이나 산에 포위돼있으며 그 시내에는 물줄기(강)이 흐르고 전형적 소형盆地(분지)이다.   이 폐쇄된 공간속에 공예품같이 정교로운 도시가 생겼고 이 분지 내에서 조선족이 조선족일 수 있는 한족과 이질적인 조선어(함경도방언)를 구사하면서 조선족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연길시 밖으로 자동차로 용정과 도문으로도 가보아도 역시 사방 산에 둘러싸인 크고 작은 분지가 올망졸망 연결돼있었다. 연변은 이렇게 산과 산속에 묻힌 소분지의 세계였다.   이 같은 소분지안에서 영위돼온 작은 공동체, 그 작은 공동체 안에서 조선족겨레끼리만 무어서 형성된 민족집합공동체. 여기에는 모든 외부세계와 단절시키거나 또는 그렇게 멀지않은 공동체와 꼭 산 고개를 넘어야하는 연결성이 있었으므로 옛날에는 교류가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인류학자 요네야마(米山俊直)가 쿄도의 분지를 ‘소분지우주’로 칭하고 일본문화의 다양성을 이 ‘소분지우주’로써 포착한 것은 아주 흥미롭다. 그의 개념대로 따르면 연변의 소분지 역시 하나의 특수한 ‘소분지우주’로 그 속에서 인간들의 세계관, 동질성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그리고 바로 이 소분지형 지리로 인해 조선족이 분지 내에서 함께 빼곡이 모이면서 그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조선족문화의 ‘소분지형문화’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이 소분지형문화는 연변조선족의 장점이다. 동시에 또한 그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정교롭고 아름다운 그리고 귀여운 분지속의 도시 연길, 그리고 도문, 용정 … 이런 중호형도시가 소분지로 돼있다. 그리고 산을 사이 두고 연결돼있다. 연변전체가 큰 분지의 연합체이다. 소분지의 세계 안에서는 소분지적 민족공동체가 폐쇄된 공간에서 존속되기는 쉬운 한편 외래의 문물을 흡취하는 데는 불리한 면이 있고 경계를 넘는 문화적 창조하기엔 불리한 것이다.   더욱이 연변이 1990년대까지 북동아시아 중, 러, 조가 인접된 트라이앵글지역으로서의 역할을 하지못한 것은 그 변경적인 지연적‘우세’를 망각하고 ‘변경인’으로 자각하며 오픈된 사고를 갖고 있지 못한 것도 이유의 하나겠다. 그리하여 적극 외부를 유치하기보다는 외부에서 들어오기까지 기다리는 그런 수동적 자세를 보였다. 여기서 노정된 사고자체가 ‘변경인’을 자인한 연변동포들의 한계였다.   연변은 경계를 사는 ‘경계성’이 있다고 요즘 연변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언급하는 담론의 화두가 되고 있으나 필자는 그런 주장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얼마만한 내용이 현실적인가 회의스럽다.   왜냐면 중국 속에서 소분지문화를 형성하면서 그 상대적으로 외부와 차단시킨 ‘조선족생활권’을 만들어 생활양식은 거의 ‘조선족’ 그것이었다. 환언하자면 중국속의 ‘小朝鮮’적인 분지였을 뿐이다.   이속에는 재일교포가 일본어와의 갈등속에서 격투하는 번뇌와 경계를 사는 심리적, 민족적인 그런 ‘싸움’에서 유인되는 교차로적 ‘경계성’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조선어 단일언어만으로도 충분히 통하는 연길‘소분지’내지어 구태여 중국인과의 ‘경계’에서 오는 그런 고뇌, 격투는 거의 생략되었거나 필요로 할 여지가 크지 않다.   100년 전 이주 당초에는 현지중국인들과의 이 같은 ‘경계’에서 겪어야 할 접전적격투는 빈번했지만 그것이 점차 3세대, 4세대로 백년을 지속됨으로서 하나의 독자적인 외부와 차단시킨 文化, 民族的空間으로 ‘고착’돼버렸다. 그리하여 앞에서도 지적한 것같이 민족의 거울이며 살아있는 교과서라는 조선족(연변조선족)의 文學에는 他者로서의 중국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그런 중요한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성인의 학문적인 고차의 민족자화상표상에도 이런 팩터는 결여돼있다.    자는 조선족(특히 연변조선족)의 전래적 표상을 ‘경계의 공간’ 他民族과의 인접된 교차공간에서 생성되는 양가성(Ambivalenz)이나 혼효성(Hybriaity)같은 것은 호의적인 ‘허구성’이 아닐까고 생각되기도 한다.      당연히 100%의 ‘허구성’은 아니다. ‘연변분지’에도 다소 존재하나 ‘안쪽’으로 진입하면서 중국인과 완전히 지근거리에서 인접되 사는 ‘산재지구’라 불린 광대한 지역의 조선족이 더 앞에서 말한 ‘경계의 공간’에서 ‘경계성’을 띠고 있다고 봐야한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7    5.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 (김문학) 댓글:  조회:4805  추천:46  2010-05-16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5.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김문학 이렇게 ‘방법으로서의 조선족’을 방법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면 또 하나의 큰 ‘결함’이 발견된다. 무슨 결함인가? 우리의 ‘중국조선족’에는 ‘중국’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도 ‘중국조선족’이라고 자칭한다. 그것은 중국 속에서 살고 있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 명칭이기도 하다. 우리 지식인, 문학인, 정치인, 언론인에서 보통 농민대중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삶의 장(場)일뿐만 아니라 그 장속에서 삶을 이어가면서 (문화인류학적인 용어로서는 경계를 살아간다고 한다) 나름대로 민족문화를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경계에서 ‘경계인’으로 생활자로서 조선족의 정체성, 자기인식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 그 ‘중국文化’와 경계에서 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에게는 그토록 밀접한 관계상대로서의 이 같은 ‘중국’이 결여한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 제도로서의 유대만이다. 그것은 또한 부득불 중국국민으로서 살아가는 제도적국민(시민)으로서 패스포트적인 동일감을 느끼려 한다. 그리고 정치, 제도외의 조선족은 기본적으로 민족적 겨레로서의 조선족 음식, 음악, 습속예절(유교적 예의)면에서는 즉 생활양식=文化적면에서는 한족文化에 대해 아무런 연결성이나 또 그만큼  關心이 박약한 채 ‘끼리끼리 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연변이 이런 현상이 가장 보편적이고 강도 높고 점차적으로 ‘안쪽’으로 내려오면서 그런 양상이 담박해지는 실상을 보인다. 즉 반대로 연변외의 조선족이 중국, 중국인과의 관계, 환경 속에서 밀접한 생활양식 및 사고양식을 노정하고 있다. 아무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조선족은 중국에 살면서 그 경계의 인접한 ‘중국’의 팩터를 정치적제도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이면서 교우적, 언어적 및 습속적 차원에서는 ‘우리 조선족’것만 선호하는 그런 양식을 고집하고 있다. 필자가 이 현상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조선족의 삶의 양식을 지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국, 중국문화에 대한 인식, 그에 대한 접근 양상의 결함 그 자체를 거론하자는 것이다. 중국이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는 훌륭한 타자(他者)이지만 조선족은 이 타자를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대중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언설적으로도 지극히 결여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의 문제에서 유발되는 것이기도 한데 흔히 조선족내부에서 그냥 안일하게 ‘우리조선족’하는 방식으로 단선적사유로 통했으며 한족과의 비교문화론적인 방법이나 문화인류학적인 비교의 접근도 우리는 게을리해왔다. 우리는 한족이나 여타 소수민족보다 우월하고 교육열이 높다는 ‘자화상’으로 안일하게 표상화시키면서 ‘되놈’ 아니면 무슨 놈 하면서 차별화해온 성향이 많았다. 일본은 ‘왜놈’이고 서양인은 ‘양놈’이고 하는 식으로 그냥 있는 대로 불러주는 것 이질문화를 상대화시키는 시각이 결여했다. 오늘 ‘한국인’에 대한 지칭 역시 흔히 ‘한국 놈’으로 통한다. 문화의 상징적 표상인 문학의 글쓰기에서도 한족과 경계에서 살아가는 ‘경계인’으로서의 조선족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학에는 한족과의 관계양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족과의 관계, 마찰, 교류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조선족이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문학은 우리의 ‘조선족’이 ‘조선족’으로서만 외로운 ‘간도(間島)’에서 살아간다는 그런 의식이 강하며 한족 등 중국인 중국과의 경계의식이 박약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경계인’, ‘디아스포라’적의 고민과 번뇌, 컬쳐쇼크 등이 제게된 우리의 ‘중국 없는 조선족’, 중국과 괴리를 한 실상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이나 일본, 브라질 등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문학에는 호스트국(살고 있는 나라)의 현지인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과 갈등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현지의 호스트국어로 집필하여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러나 조선족작가들 속에 중국어로 창작집필할 수 있는 자가 극소수이며 그 영향력을 아직 과시하지 못하고 있다. 십년 전 ‘조선족 개조론’에서도 이 현실을 지적했지만 아마 그것을 정면으로 수용할 자세나 토대가 미 준비 상태인 듯 하여 유감스럽기만 하다. 요컨대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정면에서 중국을 우리와 직결된 자화상으로서의 ‘타자’라는 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류를 하며 우리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어필하고 한족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대도시의 조선족이 그런 환경이 주어진 이상 노력만하면 전망은 아주 밝을 것이다. 주위의 많은 타자들과 깊숙히 파고들어가 어울리고 주류사회에로 진입하는 방법도 조선족의 파워와 문화를 전파하고 살아남는 길의 하나라는 인식을 이제 포지티브하게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와있다. (다음 계속) 일본 히리시마에서
6    4. 조선족의 異時代的文化群 (김문학) 댓글:  조회:4649  추천:39  2010-05-13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4. 조선족의 異時代的文化群 김문학1988년 ‘조선족문화의 반성’이란 논고에서도 필자는 우리 조선족을 조감하여 ‘연변을 하나의 중심으로 탈중심적인 선형(扇形)으로 조선족 文化圈이 형성’되며 그 문화권을 구별화시켜 분석조명하고 ‘입체적인 조선족의 全体像’을 포착해야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다.조선족사회를 ‘동질성’이란 관념의 틀에서 넘어서서 타자화시켜 바라보고 여러 ‘문화권’으로 分化시켜 상대화하여 바라보는 것이 필자가 창도하는 ‘방법으로서의 조선족’방법이다.‘무지개이론’이란 개념이 있다. 무지개는 보통 칠색령롱한 색채로 매우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선을 끌고있다. 하지만 그것은 멀리서 바라볼때만 있는 모습이다.좀더 가까이에서 접근하면 사실 그것들은 한방울 한방울의 미립적인 물방울이다. 이것은 물방울을 보기 위해서는 근접적거리에서 치밀한 분별작업이 요망된다. 예와 같은 원리로 조선족이라는 이 무지개의 근원적인 본질을 인식할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아릿다운 그 ‘무지개’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면 화려한 모습이 아닌 물방울을 체감할수 있듯 조선족을 연변, 흑룡강, 길림, 장춘, 심양 그리고 대련, 청도, 북경, 상해, 심천 지어는 절강, 해남도 … 그리고 해외 여러 나라 … 이렇게 文化圈, 生活圈을 분화시켜 바라보고 점검하는 方法이 필요하다.1990년 이전 특히 2000년대에 형성, 고착화 되고있는 ‘多元的 조선족 사회권’을 냉철히 比较分析하는 시각과 方法이 절박히 요망된다. 최삼룡선생의 ‘조선족 文化地图를 다시 그려야 한다’는 논고는 바로 이러한 절박한 상황을 아주 적시적으로 간파한 무게있는 글이다. 그 역시 경계를 넘는 조선족의 새로운 사회양상을 혜안으로 포착하고 그에 따른 분석, 대응의 일환으로 이점을 지적했다. 안일하게 반박할수있지만 그러한 방법은 지금의 다원적 조선족양상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2010년 현재에서 区分化하여 바라본 조선족사회는 그 특점을 필자는 ‘共時적 이질문화권’이라고 지칭한다. 즉 연변과 심양, 대련, 청도, 장춘, 하얼빈, 북경, 상해, 서울, 뉴욕, 동경, 파리 … 이런 文化圈속에 삶을 영위하고있는 조선족의 중층 다원적인 空间은 이미 원래 전통적의미의 조선족으로 일괄하기에는 무리이다.時間적으로 日歷적으로 共時적 삶이지만 그 空间적, 즉 生活圈, 文化圈의 조선족의 ‘文化的落差’는 共時적이 아닌 양상을 노정하고있다. 지극히 단적인 예를 들어 연길, 훈춘의 문화와 북경, 뉴욕, 동경의 문화는 큰 낙차가 실존하며 근대 (지어는 전 근대적 요소도 있는)적 시간과 후근대적 시간 및 공간의 낙차가 엄연히 존재하며 또한 그속에서 사는 조선족일지라도 그 사고양식과 가치관을 보면 이질적인 면이 다소 존재한다.물론 ‘민족’적인 겨레로서의 음식, 감정전달 양식과 같은 요소는 통하지만 고차원의 文化的요소에서 큰 격리감을 생성시킨다. ‘조선족 개조론’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했던 배경에는 바로 연변의 일부 전근대, 근대적 사고양식과 기타지역 조선족 文化圈의 근대적, 후근대적 사고양식의 상식적인 대결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었다.이리하여 필자는 오늘의 조선족사회를 ‘조선족의 異時代的生活文化群’으로 그 낙차를 표징하는 표상으로 지칭하고저 한다.따라서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족이 아주 이질적인 ‘이시대생활문화군’을 이루면서 이질성을 보이므로 그에 상응한 구별化, 상대化시키는 方法으로 인식을 다시하고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5    3. 방법으로서의 조선족 (김문학) 댓글:  조회:4207  추천:46  2010-05-11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3. 방법으로서의 조선족 김문학우리가 우리 자신 조선족에 대하여 향해지는 또는 구사하는 인식론 그 자체(여러 형태로 접근하여 수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으며, 특히 우리 조선족의 연구의 제1인자 황유복선생을 비롯한 학자와 연변의 지식인, 작가, 언론인들 연구실적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가 모종의 결함을 지니고 있음을 우선 필자는 지적하고자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방법은 삶에 있어서 방식이기도 하며, 삶의 기술로써의 "방법" 그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만갈래 길이 로마로 通한다"는 말은 로마로 가는 길. 즉 그 방법이 여러 종류 있는데, 그 종류에 따라 로마에 도달하는 시간적 효과가 천양지별의 차이로 이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길"을 곧 "방법"으로 치환할수 있다. 좀 더 근접적 거리에서 환언하면, 삶의 방식(생활방식=방법)은 그 사회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방법이 하나의 동질적 방향으로 흘러 생활양식 (방식)=문화를 형성한다. 이 같은 "방식"은 목적보다 더 중요하며, 또한 목적이 없는 방식도 있을수 없다. 그런데 "방법으로서의 조선족"이란 무슨 의미인가? 먼저 이 말부터 해석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直言하면 이 같은 제목은 조선족을 바라보는 방법, 인식론을 제시하기 위한 장치로서 명명한 타이틀이다. 그 어떤 신비로운 고명한 견해도 아니라는 것을 미리 얘기하고 싶다. 이것은 일본의 동아시아를 바라본 학자들이 제시했던 방법을 필자가 원용한 것이다. 1961년 일본의 저명한 노신연구자이며 중국학 연구의 중견 학자인 타케우치 요시미(竹內 好)가 그의 논고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 제시한 일본인의 아시아인식, 중국인식에 대한 비판의 장치로서 사용된 것이다. 그 "방법"이란 것은 일차적으로 무매개(無媒介)나 무비판적인 몰입도 아닌 또 한편 "실체화"와도 이질되는 "아시아, 중국"에 대한 인식, 대응방법인 것이다. 다케우치에게 있어서 아시아나 중국을 유럽적 "세계"와 객관적인 상대화시키는 "방법"이며, 근대 유럽, 일본을 상대화시키는 "방법"론적 관점을 정립하는 의미였다. ("일본과 아시아" 1966) 이 시점을 이어서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란 현대 중국사상연구가는 "방법으로서의 중국" (1989년) 이란 책을 출간한다. 미조구치는 다케우치의 관점을 비판적 계승을 통해, 일본의 중국 인식에서 노정된 유럽과 일본보다 열악하다는 기본인식의 틀을 깨고,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해 중국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오히려 어떻게 중국을 인식할 것인가는 "중국을 방법으로 하는" "중국학"을 창도한다.                         일본인은 중국인식에서 근대 명치유신후로부터 고심해왔으며, 국가주의적 중국인식이란 목적론도 전쟁시기 창궐했지만, 지식인의 일그러진 인식을 탈피하는데 노력해왔다. 필자의 체험이나 근대 일본의 중국인식사를 섭렵해보아도 알수 있는 것은 국가차원에 이용되는 "중국인식"은 전후에는 크게 인기를 상실했으며, 그 민족적인 진지함에서 비롯된 진지한 연구를 거듭해오고 있는 것은 필자도 체감할수 있었다. 따라서 한편 중국인의 일본인식은 전후 60여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맥락에서 규정당하는 치명적 결함에서 큰 탈피를 못하고 있는 점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환언하자면, 근대사를 포괄하여 중국은 일본을 "왜국"으로 폄하, "소일본"의식으로 가볍게 비아냥거리는 근대적 의식에서 여전히 이탈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그 자체의 결함인 동시에 자신들에게 "대방을 아는" 인식에 있어서는 지대히 불리적인소로 되돌아오게 된다. 최근 북경의 지식인들과 대화를 하면서 필자는 그런 결함을 많은 지식인들도, 정부에서도 이미 깨달음과 동시에 "일본 재인식"에 박차를 가하고 일본과 새로운 우호관계를 맺고 지적 공유(知的共有)를 토대로 한 "공동체"의 길 모색에 가열중이라고 들었다. 이는 한중일을 "지적 공유"로 이어놓을수 있는 21세기 새로운 "동양화합"의 대안을 모색하는 결실로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한화 휴제하고, "방법으로서의 조선족"으로 되돌아오자. 우리 조선족 지식인이 조선족을 바라보는데는 많은 효과적인 방법과 시각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적 프리즘에는 큰 결함, 함정이 있다는 것을 필자는 "발견" 했다. 즉 환언하면, 우리는 언제나 "조선족"을 하나의 지대한 동질성을 구현한 "동일체"의 덩어리로만 간주하고 "조선족" 그 카테고리에 대한 동일성속의 "이질성" 팩터에 대해 거의 무시했거나 방치해왔다는 점이다. 물론 감성적 인식으로는 연변이나 안쪽사람으로 구별되는 낱말에서 나타내는 뜻의 "이질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문적 고차원적인식으로 그것을 구체화시켜 분별화시키는 노력이 결핍했다. 그 이유는 "연변 VS 안쪽"의 대립구도를 안일하게 대립시킨다는 인식으로 일축당할 편향성을 두려워 했던 것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조선족 개조론"에서 구별화를 제기했다가 "조선족을 분열시킨다"는 일부 식자들의 지대한 반발을 사기도 했던 체험을 하기도 했던 장본인이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4    1. 신조선족의 탄생 (김문학) 댓글:  조회:5922  추천:76  2010-05-06
 《신조선족》 월경론(越境论) 1.신조선족의 탄생 김문학금년 (8월)은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중대한 역사적 의미의 해이다. 청말로부터 시작된 우리 조선동포의 중국 이민이 본격적인 피크를 이루는 것은 바로 100년전 일제 강제합방과 때를 같이 한다. 조선족의 100년 (물론 청말의 이주를 포함하여 150여년), 이를 계기로 우리 조선족의 삶과 그 정신사(精神史)를 비롯하여 100년에 걸쳐 변화, 변모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현대의 넓은 시야와 프리즘으로 바로보는 것은 매우 필요하며 심원한 의의를 갖고 있겠다. 특히 1980년 대륙의 개혁개방후, 1990년대 초반 한중수교이후의 조선족의 인구이동에 따른 생활권, 문화권의 변동과 사고양식과 세계인식적 가치관 등의 지대한 변화는 오늘도 세계로 이동을 추진중인 우리의 참모습을 점검하는 중요한 팩터이다. 그중에서도 2000년 새천년에 들어서 오늘까지의 10년은 조선족 정신사에 있어서 전례없는 생활권, 문화권의 다원(多元)적 형성은 "신조선족"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는 아주 지대하다. "신조선족"은 필자가 명명한 명칭이다. 이 신조어의 특징은 "조선족"이란 우리를 가리키는 지칭 앞에 "新"자가 붙은 것이다. 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마디로 용이한 해석을 하면 새로운 생활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 시각을 갖춘 조선족의 새로운 패턴(型)의 탄생을 말한다. "신조선족"은 국내에서는 대도시, 연해의 근대화문화, 산업의 도회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젊은 조선족 (물론 나이와는 상관없이 중, 장년, 노인도 포괄), 그리고 해외 세계 각 대도시들에서 일하며 공부하며 또는 정착하여 삶을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들, 이들은 국경을 넘은 越境者들로써, 신형의 디아스포라로써 "경계"를 살아가면서 문화적 창조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들 "신조선족"은 조선족이 낳은 전례없는 신형의 디아스포라의 모델이다. "디아스포라"의 개념이나 그 가테고리에 대하여서는 이 글속에서 뒤에 자상히 소개하기로 하고, 이들은 해외 포스트 근대국가들, 미국, 일본, 한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제국(諸國)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패턴의 조선족을 파생, 그 조선족의 위상을 세계에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신조선족"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뒤로 미루기로 하면서 2000년 이후 10년의 조선족의 양상을 정신문화적 궤적에서 고찰, 조감하면서 우리의 변화된 양상, 또한 변하지 않은 양상이 무엇인가부터 발견하고자 한다. (계속)일본 히로시마에서
3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3) 댓글:  조회:3430  추천:50  2010-03-30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3) 김문학                                        7  그의 여러 종류 전기를 섭렵해보면 그가 한복을 즐겨입고 한복차림으로 공식장소에 나타나는 등 행동으로 “한국통”을 자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조선식민지통치정책을 스스로 미화시킬수는 없는것이다. 더구나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들을 감화시킬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토의 이름과 그의 유묵 또한 한학의 교양에서 느낄수 있는것은 동아시아는 원래 유교, 한자문화 등으로 공유할수 있는 부분이 너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일국의 식민통치책으로 인해 그 끈끈한 뉴대성을 파괴시켰던것이다.   한국 계명대 이성환교수 등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이토 역시 안중근과 같은 “동양평화”를 제창했으나 그 행동양식으로서 정반대의 지향성을 실천으로 행하고있었다. 이토는 동양평화를 위한 명목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런 이토를 한국침략자로서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첫걸음으로 보고있었던것이다. 립장의 다름에 따라 두 인물의 사상과 행동은 천양지별의 양상을 보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당시 량국의 립장을 극명히 상징함과 아울러 두 인물의 량립할수 없는 사상적대립을 여실히 증명하고있다. 그리고 일본의 동양평화는 동양제패의 꿈에 불과했으며 안중근의 예언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는가.                            8  이토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란 죄명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우리의 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특히 그 주위에 안중근을 잘 알고있는 일본인들이 안중근을 동정하고 감동을 느끼고 공명하며 감화될수 있는 사실은 안중근의 인격과 함께 그의 견식, 사상이 일본의 원훈보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포들은 그점을 너무나 모르고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의 안중근숭모의 미담을 소개하기로 한다. 앞에서 로씨야검사의 증언에도 등장하는 타나카 세이지로의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하다. 남만철도주식회사의 리사로 있던 그는 안중근이 이토 저격당시 이토곁에 있다가 안의사의 총탄에 부상을 입은 인물이다. 그뒤 안중근이란 인물을 알게 되면 될수록 타나카는 그 위대한 성품과 견식에 빨려들어 팬이 되여버린다.   어느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지금껏 만난 인물중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들가운데서 누가 제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유감스럽지만 그건 안중근입니다.” 하고 타나카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자신을 총탄으로 쏘아 부상까지 입힌 철천지 원쑤를 감히, 솔직히 위대한 인물의 제일인자로 칭송하는 그 담력뒤에는 역시 안중근의사의 감화력의 파워가 있기때문이란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또 하나의 감격적인 미담을 소개하자.   당시 려순감옥에서 헌병상등병으로 안중근의 감방간수역을 맡았던 치바토시치라는 젊은이 역시 안중근의 극렬팬이였다. 직책상관계로 안중근과 일상적 접촉이 잦았던 치바는 당시 25세, 안중근보다 6살 년하였다. 그는 안중근을 처음에는 명치의 원훈 지도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여기고 경계했지만 차츰 접촉이 깊어지면서 안중근의 깊은 교양과 고고한 인격적 포용력, 활달하고 효자다운 효도성, 그리고 일당백의 당당한 태도에 점차 감복되고 나중에는 그에게 감화당하게 된다. 치바의 친척이 되는 변호사 가노씨의 저술에 의하면 어느날 치바가 안중근에게 “왜 꼭 이토공을 저격해야만 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독립은 물론 일본과 청국(중국)을 포함한 동양의 평화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토공이 추진하고있는 병합정책을 용서할수가 없었어요.        이토공의 정책은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행위였기때문이지요. 나는 자신을 조국에 바치는 몸이라고 죽을 각오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내 행동이 내 뒤를 이을 우국지사들의 궐기를 환기하기 위함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니 나는 이토공에 대한 개인적 원한같은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한일 두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불행한 쪽으로 흐르는것도 이토공 한 인물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력사란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움직여지는게 아니니까요. 내 거사가 장차 우리 동포들의 독립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수 있기만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편판단은 후세 력사의 심판에 맡기고 나는 소중한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국을 위해 이슬로 사라질것을 결의했던겁니다. 하나님이 준 이 목숨은 죽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돼있고 인연이 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여나는것입니다. 이 모든건 하나님께 맡기고 유구한 한국력사의 하나의 조약돌로 될수 잇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이런 고결한 생각을 품은 안중근이였기에 사형선고를 받고도 상급법원에 상소를 포기하고 그대신 법원 원장에게 사형기를 한달 미루어 자기가 뚯한 동양평화의 원대한 구상을 저술하기로 작심했던것이다.   그뒤 치바청년은 안중근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이 더 살수만 있다면 기필코 한국을 어깨에 짊어질수 있는 거물이 되기에 틀림없겠구나. 이런 인물이 사형당하여 한점의 찬이슬로 돌아가게 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고 한탄했다고 한다.                                 9   1910년 3월 26일. 작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거사날에서 옹근 다섯달 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다. 안중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머니가 지으신 결백한 명주 한복정장을 차려입고 기도를 하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기다리고있었다.   사형장으로 나아갈 시간이 림박하고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감방앞에 서있는 치바를 불렀다.   “치바상, 전번에 부탁받은 글을 써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하면서 치바는 부랴부랴 흰 비단천과 필묵을 갖고왔다.   안중근은 자세를 바르게 취하고 단숨에 붓을 날렸다.   “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로다”   그리고는 숨을 죽여 약지가 절단된 왼손에 먹을 듬뿍 묻혀 이름석자 밑에 힘있게 찍었다. 치바는 “감사합니다”하고 깍듯이 대례를 올렸다.   안중근의 최후의 사형장면은 어떤 모습이였을가?   10시 정각, 미조부치검찰관, 구리하라전옥, 그리고 소노기통역이 려순감옥 형장감시실에 착석했다.   “사형을 집행한다. 남길 유언은 없는가?” 라는 구리하라전옥의 질문에 안중근은 조용히 대답한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단지 동양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동양평화 만세’ 3창을 부르고자 합니다.”   결국 “동양평화 만세”가 안중근의 유언으로 되였다.   오전 10시 20분, 교수형으로 안의사는 숨을 거둔다.   그날 소기노통역은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하고있다. “오늘 안중근은 어제밤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 조선복(웃옷은 백색, 바지는 검은색)을 입고 가슴엔 성화를 품고있었는데  그 태도는 너무나 침착하여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이상없이 태연자약하게, 떳떳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장한 우리 영웅의 최후의 순간이였다.    (5면에서) 그는 방금전 자신이 휘호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계속하여 치바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뒤 치바는 제대되여 고향 미야기(똫냘)에 있는 시골로 귀향하였다. 그는 54세로 죽는날까지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불단에 정중히 모셔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한일량국의 영원한 평화친선을 빌었다고 한다. 치바씨가 사망된 뒤에도 부인은 97세의 고령으로 세상뜨기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 안중근과 치바를 같이 기렸다고 한다.   1979년 안중근의 탄신 100돐기념에 치바씨의 후손들이 동경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선생을 통해 서울안중근기념관에 유묵을 기증했다.   안중근과 치바부부의 한일우호를 상징하는 미거를 표창하기 위해 1981년 치바의 유골이 잠든 대림사(댕주凱)에 안중근, 치바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도 대림사주지와 함께 일한 인사들이 한일평화를 기리는 합동추도법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이야말로 안중근과 이토의 원한구도를 넘어선 한일량국의 경하할만한 생동한 평화도가 아닌가!                               10   시다라씨네와 작별을 고하고나니 벌써 저녁무렵이였다. JR전차에 몸을 실은 나는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오늘은 내 생에서 그야말로 뜻깊은 하루가 된다. 안중근의 친필유묵,  그것은 내게 있어선 안중근 본인이였다.   이제 돌아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돐기념일이 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독립ㅡ동양평화ㅡ투사ㅡ문인ㅡ천주교도ㅡ사상가∼이런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속에 떠오른다. 어둠이 잠기기 시작한 차창에는 붉은 노을이 비낀다. 창가에 문득 안중근의 얼굴이 나타났다. 31세의 청년이 아닌 131세의 백발이 성성한 로숙한 성자(?諒)의 모습이였다. 나는 이 성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자네가 내 유묵을 보았다니 반갑네. 이렇게 우리 후예들이 일본에도 마음대로 류학하고 거주할수 있는 세상이 되였구만, 허허∼”   “반갑습니다. 안할아버지는 금년 벌써 131세지요. 할아버지의 유지는 우리 세대가 이어가고있습니다.”하고 나는 깍듯이 대답했다.   “며칠전 하늘나라에서 말이지, 글쎄 이토와 만났구나. 여전히 옛날 모습이여서 놀랐지만 우리는 화해를 했단다. 그래야 우리가 쌓았던 원념들이 담벼락이 돼서 자네 세대가 동양평화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뭇는데 지장이 아니되니까.”   “역시 안할아버지의 탁견이십니다.”   “뭐, 그런건 아니고 하루 빨리 EU보다 앞선 동아시아공동체를 뭇기를 바란다네. 허허허∼”   성자 안중근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안공!∼”내가 다급히 불렀으나 안의사는 벌써 하늘나라로 행적을 감춘 뒤였다.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였다. 꿈인지 생신지 나는 알길이 없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안공의 혼백과 만나 경희하기만 했다.   나는 생각한다. 안중근공의 세계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평화사상, 공동체관에 대해 깊은 연구와 넓은 공감대의 확산이 요망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평화사상,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있다. 안공의 기념활동도 좋지만 형식차원을 릉가한 실천적, 건설적 차원으로 그의 사상을 활용하고 실현해야 한다.   천부적인권론, 개화사상, 기독교사상, 유교, 불교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안공의 사상체계는 21세기형이다. 그러므로 이제 안중근은 단순히 우리 민족 한국인만의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적 안중근이다. 그의 세계적 보편가치성을 갖고있는 사상체계가 그것을 확보해준다.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은 우리보다 100년 앞을 달리는 렬차에 탄 유일무이의 사상가이다. 이제 동양평화 실현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것인가? 이것이 사상가 안중근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준 크나큰 과제다.            2010년 2월 28일 일본에서(료녕조선문보에서)
2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2) 댓글:  조회:3479  추천:42  2010-03-26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2) 김문학                                                  5안중근의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난다음 이토의 시신을 밟고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를 세번 목놓아 부른다. 그리고 로씨야병사들에게 결박당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간결하고 판에 박은 묘사로 돼있는것이 많다. 어딘가 조잡하고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어서 아쉽다.   이제 그날 의거에 대해서 한번 객관적으로 기술해보자. 안중근에 대한 일본측의 취조기록, 로씨야측의 증언기록이 다수 있어 이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쓰자면 적어도 단행본 한권의 분량이 된다. 편폭의 제한도 있고 그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여기다 제시하기도 어렵기때문에 나는 제3자 즉 일본측도 한국측도 아닌 로씨야측의 보고를 중심으로 서술키로 한다.  이토가 1909년 6월 1일 한국통감을 사임한 뒤 추밀원의장을 맡았는데 원래 대만 식민지경영 경험이 있는 현 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 고토신페이의 권유로 만주의 리익을 확보하기 위해, 로씨야의 대장상 코코프체프와 면담하기 위해서 만주를 일주, 할빈으로 왔던것이다.   10월 26일 아침 9시에 이토가 탄 특별렬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자 코코프체프, 콘스탄티 미텔 등 로씨야측 일행이 이토가 있는 귀빈차량에 올라 인사를 나누고 20분정도 회담을 했다. 그런후 코코체프가 플래트홈에서 로씨야철도수비군 의장대의 열병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토는 정장을 갖추지 않았다는 리유로 거절했으나 상대의 간청에 이기지 못해 응하여 9시 25분쯤 차에서 내렸다. 그때 동석했던 로씨야국경재판소 검사 콘스탄티 미텔은 안의사의 의거장면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토공이 로씨야의장병을 사열하고 5보내지 7보 걸어서 일본인 집단환영대렬에 다가갔을 때 로씨야의장병사이에서 몇차례나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 두차례 발사소리가 난 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총을 발사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범인으로 보여지는 자가 왼손으로 오른 팔을 받쳐들고 의장병앞을 지나가는 이토공을 향해 또 한발 쏘았다. 그리고는 급히 뒤돌아서서 이토공을 뒤따르고있는 수행자들에게 발사했는데 아마 3, 4발인가 발사했다. 마지막 발사는 땅을 향해 쏜것 같은데 생각컨대 이 총알이 타나카 세이조(만주철도 리사)를 맞혀 부상시킨것 같다.(중략)   발사가 끝나자마자 동청철도회사 철도경찰서장대리 기병대위 니키트로프가 2회 발사때 범인에게 덮쳐들었으나 범인의 완력이 하도 강해 쓰러뜨릴수 없었다. 격투끝에 다른 장교의 도움으로 권총을 빼앗았다. 그때 범인은 로씨야어로 “코리아 우라”하고 세번이나 웨쳤다. 범인의 발사시간은 30ㅡ40초가 넘지 않았다. 정거장에 있는 철도경찰의 숙직실에서 안정을 되찾은 범인은 자신의 흉행에 대한 동기를 진술했다. 약 20분뒤에 이토공의 사망을 알려주자 범인은 미친듯이 기뻐하며 숙직실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편 이토는 어떻게 되였는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은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무로다 요시아야 등에 의해 부추켜 렬차안으로 운송되였다. 급기야 이토를 쏘파에 눕힌후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에 응급처치를 감행했다.          당시 수행의원으로 처치를 했던 코야마 여시(鬼??)의 중언에 따르면 피탄된 흉부와 복부에서 선지피가 샘솟듯 했으며 이미 치명적인 상임을 즉각 알았다고 한다. 정신이 좀 들라고 코야마가 전해주는 브랜디 두컵을 마시고난 뒤 혈색을 잃고 안색이 종이장같이 창백해진 이토는 3번째 컵은 끝내 들이마실 기력마저 없었다. 통역한테서 한국청년이 저격자라는 말을 듣고 이토는 “바보같은 자식!”하고 한마디 뱉고는 더이상 말을 못했다. 그리고 피탄 30분만인 10시에 절명했다.                               6    그러나 안중근의사는 결코 이토가 숨지기직전에 남긴 “바보”가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일본인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근대 일본의 건국원훈을 암살한 “테러리스트”이며 “바보”같이 용맹한 적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사의 일면만 알았지 그 리면에 있는 문인, 선비, 지식인다운 인물상에 대해서는 아직 깊은 인식을 못하고있다.  이것은 일본인만 탓할바가 못된다. 우리 자신도 사실 안중근의 “투사”를 넘은 위대한 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있는가?   이번 3월의 나의 특강은 안중근의 평화사상 및 사상가적인 심층의 안중근을 알리고자 행해지는것이다. 그리고 나는 금년안으로 《사상가 안중근》이란 제목의 책을 펴낼 예정으로 지금 일본어로 집필중에 있다.   한마디 아쉬운 소리 더 부언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의 많은 동포들도 안중근을 단지 상무정신이 강한, 용맹무쌍한 독립투사로쯤 표면적인식에 머무르고있을뿐이다. 문인이자 사상의 동서를 통찰한 선각자로서의 심층적인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 인식이 결여하다.   이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단선적이면서도 피상적인 리해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는 “독립”유묵과의 만남을 통하여 단순히 만용만 자랑하는 투사 안중근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독립자주지향으로 내세웠던 사상가 안중근선각자와 만나는 실감을 느꼈다.   사상가 안중근, 그는 구경 누구인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모르고있던 안중근의 리면, 심층에 대해 재리해를 해야할 시점에 와있지 않은가. 나의 이 졸고에서 안중근의 위대한 사상가의 전체상을 다 표현하기에는 미치지 못할것이오나 총체적, 개략적인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안중근의 31년의 짧은 인생은 한손에 붓, 또 한손에 총을 쥐고 우선 민족교육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을 일깨웠고 단지동맹으로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향했다.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는 적의 리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려순감옥에서 5개월간 공판투쟁끝에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고 순국한다. 개괄하면 안중근은 단순히 무인, 군인, 투사로서 독립을 이룩하는 위업에 헌신했을뿐아니라 교육자, 문인, 지식인, 평화주의자, 천주교신도, 유교와 불교사상을 종합시키고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하고있는 사상가, 선구적인 예언가이기도 하다.   그는 려순감옥의 심문에서 “한 나라라도 독립자주하지 못하면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수 없으며”, “모두가 독립하는것이 평화를 달성하는것이다”고 소리높이 주장한다. 독립자주평화는 안중근의 유일한 화두이며 그가 평생 겨냥했던 리상이다. 그의 사상이 가장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발로한것이 바로 이 “독립”유묵이 아니였던가!   안중근은 또 일본검사의 취조중 한중일 동양 3국을 세형제로 비유한 우화를 술회하면서 셋째동생 일본이 둘째아우 한국을 향해 악행으로 괴롭히고있다고 비유하면서 지금 동양의 평화가 깨여진 결과는 이토의 강제정책이 렬악했기때문이라고 규탄하였다. 또 이토 본인을 간웅(쇤衿)이라고 지탄, 그를 제거한것은 동양평화실현을 위한 행위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더우기 1909년 1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당시까지 그는 개인전기인 《안응칠 력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사상을 구상화한 후자 저술은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는것이 너무 아쉽고 가슴아픈 일이다. 결국 3월 25일까지 써서 서문부분에만 그쳤는데 고등법원원장 히라이시(틱柯)와의 면담내용을 기록한 《청취서》 등을 종합하면 그 전면모를 대강 알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5면에서)    안중근의 사상, 전략은 아래와 같다. 동아시아의 최대 분쟁의 중심은 려순을 중립지대로 개방하고 한, 중(청), 일이 공동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관리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지역을 아시아평화의 근거지로 만드는것이다.   동아시아평화회의의 재정확보책으로 원만한 금융을 위해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 공통류통의 공용화페를 발행하는것, 그리고 3국의 청년들이 2개국 3개국 언어를 배우게 하고 우방, 형제적 제휴련맹관념을 형성시킨다. 그뿐만아니라 3개국 공동기술개발센터와 동아시아 동양평화군대를 창설할것까지 제안한다.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지역의 동쪽끝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 서양의 로마교황청에 각국 대표를 파견하여 서양과의 협력관계를 도모할것을 권유한다. 이래서 세계적시야에서 신뢰를 얻을수 있고 평화의 유지를 이룩할수 있다고 신념을 수립한다.   그는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일국중심의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의 동아시아평화정책의 제한성을 간파하고 일본제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를 파괴하고 로씨야, 미국으로 전쟁을 확장시킨다면 일본 자신의 괴멸을 기필코 초래한다고 그 시점에서 이미 예언한다. 결과적으로 안중근의 예언은 너무나 적중하지 않았던가!   안중근은 사상뿐만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탁월한 예견적안목을 갖춘 예지에 찬 예언가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 당시 제안한 동아시아의 제휴, 련대적인 동아시아평화회의, 공동개발체계, 다중언어교육체계, 공동은행개발책, 공용화페제도 이같은 구상은 너무나도 탁월한 견식이며 선구적인 구상이였다.   력사를 돌이켜볼 때 일본은 동아시아공영권을 소리높이 주장했지만 일본 중심의 일국내셔낼리즘적인 강제적 정책이였기에 동아시아의 공명을 일으키기에는 력부족, 결국 1945년 8월 15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무산되고 말지 않았던가! 현재 유럽의 EU련합이나 동아시아가 추진중인 동아시아공동체나 APEC 등 세계적인 공동체제휴의 흐름추세를 안중근은 그 탁견과 예지력으로 이미 100년전에 발안했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중근은 유럽공동체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모네보다. 중국근대의 국부로 추대된 손중산보다, 그리고 아시아평화의 리더였던 칸트보다 더 선구적인 대사상가, 대정략가임이 틀림없다.   안중근, 그는 100년앞을 내다본 영지(亶列)의 사나이다.                                 7   정오가 되자 이시마루회장은 시다라로인과 나를 위해 일본료리정에다 푸짐한 오찬을 마련했다.   식사중 우리의 화제는 당연히 안중근에 관련된 내용으로 꽉 차있었다.   “왜 안중근이 일본의 원훈을 암살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려순감옥에서 그렇게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았을가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당당한 신앙심에 매료된다는겁니다. 그래서 법원과 감옥, 통역사 그리고 일반 관리들까지도 다 일본인인데 안중근에게 글을 써달라고 요구했답니다. 려순옥중에서도 안중근에게 상등백미밥에다 끼니마다 반찬에 맛있는 과일이 배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에 한번씩 목욕도 시키고 리발도 해주고∼ 일본의 최고실력자 원로를 죽인 범인에 대한 존경이 이렇듯 깍듯했다는것은 정말 경탄할 일이지요.”   화제는 또 안중근의 품위있는 유묵으로 되돌아왔다. 1910년 2월 14일 사형판결이 난 뒤 주위의 일본인중 비단이나 일본화지를 지참하여 안중근에게 휘호(?봐)를 요구한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안중근은 번마다 상대를 고려하여 어구를 선택하고 정성껏 써주었다고 한다. 생각컨대 안중근은 이 기회를 일본인에게 자신의 품은 뜻을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1910년 3월, 안중근은 옥중에서 “박학어문, 약지이례”(널리 학문을 배우고 례로써 자신을 단속한다)라는 《론어》[옹야편]의 문구를 한 일본인 관리에게 써준적이 있는데 기하게도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 박문은 이 론어 옹야편에서 두 글자를 따온것이라고 한다.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이토는 유교의 한학에 조예가 깊고 한시에 능했으며 서예가로서도 일본 근대서예사에서 능서가로서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소장하고있는 몇점의 이토 유물을 보면 그는 행서나 초서에 능했는데 성격같이 활달한 글씨를 썼다. 한국통감, 인감이 찍힌 그의 유물은 또한 일본식민지화의 생생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조선의 유교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당시 일본의 여느 정치가보다 깊었으며 조선유교문화가 일본문화보다 앞섰다고 거듭 말했다.     (료녕조선문보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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