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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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35.준비중 댓글:  조회:3043  추천:0  2013-11-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5) 준비중
120    (34) “동양”의 발전과 “동양학”의 륭성 댓글:  조회:5512  추천:12  2013-11-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4) "동양"의 발전과 "동양학"의 륭성 김문학   “동양”이란 단어, 가치관은 근대 일본지식인들이 “동방”이란 의미로 사용하면서 보급되였다. 현재 일본과 한국에서는 동방내지 동아시아, 아시아를 동양으로 통칭하는것은 하나의 통설로 정착되였다.   중국에서는 오늘날도 “동양”은 일본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동영(東瀛)과 같이 일본의 별칭으로도 사용한다. 《후한서》나 《3국지》의 위서에 기재된 “동남대해의 건너편에 왜국이 있다”는 문구와 함께 “동양”이란 말이 에도시대까지도 일본 역시 “일본”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됐으나 그 의미가 “아시아”적 “동방”의 의미로 전환되였다.    당연히 동양은 서양(occident,thewest)의 대극 개념으로서 서양인이 대항해시대에 “발견”된 동양을 원용하여 토이기로부터 동아시아 전역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며 이슬람사회의 지역인 중동 또는 동아시아로부터 극동이라 불린 지역을 통털어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 “동양”이 아시아와 동일지역과 문명적 전통적 가치심벌로서 정착된것은 바로 1894년 청일갑오전쟁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사실 한국에서 현재까지 쓰이는 “동양” 역시 일본에서 고스란히 수용한 개념이다.   례외적으로 좀더 이른 사례도 있으나 일본에서 신문, 잡지 매체나 언론계의 오피니언 리더 및 정치가들이 자주 “동양”을 사용, 정착시킨것은 청일전쟁때부터였다. 주지하는바 일청전쟁은 한중일 3국의 동아시아적 질서를 동요시켰을뿐만아니라 일본정신사의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구미렬강이 강요한 불평등조약을 일본이 철페한 대신 일본이 서양을 본받아 청국과 조선에 서양식 불평등조약으로 억압한 지대한 력사적전환기였다. 메이지유신까지의 한학존중, 중국에 대한 동경심이 이 전쟁을 통해 일거에 역전되면서  중국경시가 일본사회에 하나의 조류로써 풍미한다.   이 시기 “동양”이란 단어가 동양인 일본이 대륙을 전승함으로써 서양적인 의미의 “동양”이 일본이란 좁은 의미를 일약 뛰여넘어서 서양에 대치되는 “가치있는 동양”으로 탈바꿈을 이룬다.(카토유조 《동양의 근대》)  일본인들이 “아시아”란 단어보다 “동양”을 선호한 배경에는 이러한 사상적, 세계인식적인 요소들이 들어있었다. 지금도 기업명칭을 보면 일본에는 아시아란 기업명칭보다 “동양”자가 붙은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에도 “동양”이 붙는 기업명칭이 여전히 적지 않다. 중국에 동양이란 단어가 보급돼지 않은 리유는 “일본”이란 의미가 전쟁을 통해 더 악화되였기때문이다.   서방을 의미하는 “서양”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동양”보다 일찍 탄생하지만 그에 대립된 “동양”이 메이지이후의 청일전쟁까지 때를 기다려야 한데는 지리적개념을 넘어선 가치적인 의미가 앞섰기때문이리라. 일본인은 근대화초기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예”란 말로 근대화의 방법을 표현하기도 했다. 서양의 일류국가 영국에 대해 동양의 일류국가 일본이란 구도로 대치시킨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던것이다.   일청전쟁후 일본류학생을 통해 중국에 수입된 “동양”이란 단어도 민구시대에 서양에 대립된 개념으로 사용되였다. 1946년의 《사해(jq海)》에도 동양을 동방이라는 해석문이 나온다. 압도적인 일본문화수용의 시대에 나타난 현상이라겠다.   일본에는 “동양”이란 개념과 함께 동양을 연구하는 학문체계로서 “동양학”이라는것이 유난히 발달돼있다. 일청전쟁, 의화단운동의 렬강진압 등을 거쳐 1901년 “동양의 사정은 동양인이 연구하며 서양제국주의에 유린당한 정치와는 달리 학문으로는 동양학에서 서양을 릉가해야 한다”고 력설한 동경대 사학과 교수이며 근대 동양학의 대가인 시라토리(白鳥庫吉)의 말과 같이 유럽의 동양학개념을 수입하면서 그것을 릉가한 유니크(유일무이)한 동양학연구로 성장한다. 에도시대의 한학의 편협과 편향성에서 사료, 문헌 해독을 벗어나 새로운 체계, 정확한 중국연구체계를 수립한 공적은 중국은 물론 서양의 그것을 리드해왔다.   전근대의 메이지이전의 일본의 동양학은 주로 중국학연구에 중점을 두었는데 그 전통문화에 대한 지식, 정보, 연구업적은 수적이나 질적으로 서양보다 앞섰다. 근대에 들어와 중등교육에 1894년 “동양사학”과목을 설치하여 보급될 정도였으며 중국을 인식하고 연구한 “지나학”,  “중국학” 업적은 경탄할만 하다.   중국인의 일본연구에 비해서도 일본의 중국연구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 력사, 문자 등 여러 령역에서 심도있고 치밀한 연구를 쌓아왔다. 근대 탁월한 동양학자로서는 시라토리, 구와바라, 나이토오, 한토리, 가노, 이케우치, 야노 등 학자를 꼽을수 있다.   이런 동양학의 계보는 제국주의의 진출과 식민지지배와 함께 연구가 병행하면서 20년대, 30년대에 연구업적이 폭발적으로 증폭된다. “만철”주식회사의 중국 연구, 조사 자료만 해도 무려 수만여종에 이르며 필자가 수집한 전전 중국사정, 중국사회 중국국민성의 연구서, 일반서만 해도 천여종에 달하며 그 분석에는 옥석혼효도 있으나 투철한데가 많다.   그 연구실적에 대해 지폭의 한계로 상세히 진술할수 없으나 전전의 일본인의 중국연구업적은 현재 중국의 인문, 사회학자들도 감탄한다. 시라토리박사와 츠다(津田左右吉)교수 등으로 구성된 “만주조선력사지리조사부”에 이어 조선합병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진행된 조선 문화, 력사의 연구도 동양사학의 일환으로서 옥석혼효로 로정됐지만 그중에는 여전히 민속학, 인류학적 연구에서 가치있는 업적이 존재한다. 
119    (33) 왜 조선이 청일, 로일전쟁의 전장터로 되였나? 댓글:  조회:5221  추천:13  2013-10-2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3) 왜 조선이 청일,로일전쟁의 전장터로 되였나? 김문학         백년전 한중일 근대사를 회고해볼 때 동아시아에서 치른 량대전쟁(즉 청일갑오전쟁, 로일전쟁)의 전장터가 모두 조선반도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왜 조선인이 그 전쟁의 주인공이 아니였는데 조선땅이 일본, 청국, 로씨야 3자 전쟁의 싸움터로 되였는가?   우리의 일반적인 인상 또는 인식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의 야망과 그 행위에 직접원인이 있으며 따라서 일본만 탓하고 규탄하는 성향이 강하다. 물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을 만들만큼 우리 조선민족이 “약소민족”으로 즐겨 표현되듯이 일본을 비롯한 외세 렬강들의 침습과 강압에 또는 그들사이에 벌어진 싸움가운데서 가늠할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인식은 십분 타당하다.   그러나 이같은 타당한 인식에 안주하는 우리에게는 랭철히 사색하면 두가지 결정적 사고의 결함이 발견된다.   하나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조선보다 강대한 렬강들의 모순충돌은 결국 우리에게는 그들지간의 “합작”으로서 조선을 쟁탈하는 공동목표의 지배적 드라마로 로정되였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같은 렬강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력량이 결핍했으므로 중립을 지켜야 했으나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고 대국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시계의 추같이 그 진촉의 극에는 항상 사대주의(事大主義)가 기다리고있었다는 점이다.   이상의 견해에서 추이하면 일본외에도 청국, 로씨야 등 렬강이 그 양상은 달라보여도 사실은 같이 조선반도를 억압하고 괴롭힌 “공범”이란 점은 틀림없으며 우리가 규탄한다면 이 3자를 공동으로 규탄, 비판하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만일 렬강의 책임을 추궁한다면 이들의 모두에게 추궁하는것이 타당하다.   당시의 력사적사료들을 섭렵하면서 필자가 주목한것은 조선이 그토록 “독립자주”를 내발적으로 절망(切望)하고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신예혁명가들이 리드했던 갑신혁명 역시 조선조내부에서 민시를 위시로 한 수구파들이(외래의 힘을 빌어) 박멸했다싶이 스스로 “독립”의 길, 근대화의 길을 차단시킨 우(愚)를 범한다. 갑신혁명은 근대사에서는 조선 근대화를 성공시키는 마지막 찬스였으나 그것이 실패한 탓으로 일본에게 아득히 뒤떨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고만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때의 충격으로 조선이나 청국과 같은 전근대를 고수하는 고루한 나라들과 절교하고 유럽같은 선진적문명을 수용하여 아시아의 근대화를 실현하는 대안을 제시한것이 바로 유명한 “탈아입구론”이였던것이다.    만일 김옥균의 혁명이 그대로 성공하여 그 개혁방안들을 그대로 실행했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과 많이 떨어지지 않았을것이며 독립자존을 통해 부강한 조선으로 부상되여 오늘의 분단도 미리 막앗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청일갑오전쟁의 원인의 하나로 꼽는 1894년 1월, 정봉준이 지도한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조선정부의 대처방법도 청국과 일본군을 끌어들인 장본인이였다. 만여명으로 팽창된 동학농민군을 정부군으로 도저히 진압할수 없어 고종과 민씨정부는 원세개를 통해 청국에 진압군파견을 요청한다. 원세개가 슬그머니 리홍장에게 청군을 요청한 사실을 새로 발견했지만 그것을 조선정부는 묵인하며 또 인가한다. 청군은 “천진조약”에 의해 일본에게 청국군파견을 사전에 통고한다.   이에 응해 일본도 청국에 사전 통고를 하고 일본공사관과 일본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리유로 인천에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을 에워싸고 청군과 일군의 충돌이 청일전쟁의 발발을 초래했던것이다.   갑신혁명이후 조선을 무대로 청일의 대립이 격화되자 로씨야도 조선의 권리를 겨냥하여 만주국경을 개방시키고 영국도 동양함대를 파견하여 거문도에 포대를 짓고 점령한다.   이대부터 사대주의의 한계를 느낀 조선의 엘리트들은 렬강과 일선을 긋고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중립화”구상을 하게 된다. 독립협회의 유길준, 서재필의 노력이 그것이였다. 그 구상단계에서 1904년 1월, 고종이 로일전쟁직전에 급급히 “중립선언”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청, 영, 불, 독, 이 등이 승인했으나 일본과 로씨야, 미국도 무시하여 국제적효력이 미미한것으로 끈났다.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일, 로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억울하게도 일, 로가 령토침범할 당시 단연코 막을수 있는 군사력이 조선에는 결여했다. 군사력은 근대화에 함께 병행하는것이나 자주독립의 근대화의 길을 스스로 끊어놓은것 역시 그 자신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선이 아닌 세계를 보면 그 당시 유럽렬강사이에서 아우성치던 네델란드는 “중립국”으로 선포하고 1898년 “전민개병”을 실시하여 제1차 대전대는 군사력을 강화시켜 “중립국”을 견지했다.   스위스 역시 1815년 윈회의에서 “영세국외중립국”의 승인을 받고 그뒤 알프스의 천연적장벽을 리용하여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중립국”으로서 성공한 나라의 모델로 발전되였다.   조선이 백여년전 훌륭한 “중립국”비전을 갖고 그것을 적극 실행했다면 오늘의 분단도 없었을것이라고 추찰된다.   필자는 오늘의 동아시아정세가 마치도 백여년전의 국가주의적 내셜내리즘이 팽창하던 그 시기와 류사한 양상을 로정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글로벌화속에서 경제적성장을 이룬 근대의 대국 중국도, 여러 민족 문화를 단위로 독립된 로씨야(구쏘련)와 그 주변의 국가들, 그리고 조선, 한국, 일본의 국가주의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후 60여년을 거쳐 강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조선반도, 한국이 세력균형의 발란스를 잡는 “교량적역할”을 도모하고 싸움터가 아닌 문명화합의 중간지대적 교량으로 탈바꿈하는 비전은 전례없이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118    (32) 준비중 댓글:  조회:3062  추천:0  2013-10-28
준비중
117    (31) 준비중 댓글:  조회:2990  추천:0  2013-10-2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1)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입구”의 심층 김문학    
116    (30)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입구”의 심층 댓글:  조회:4796  추천:9  2013-10-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0)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입구”의 심층 김문학    일본의 만엔짜리 지페에 그 초상화가 오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를 떠나서 일본 근대를 리해할수 없다. 근대 일본의 최대의 계몽사상가, 교육자, 저널리스트, 문명비평가로서 후쿠자와는 중국으로 말하면 강유위, 량계초와 엄복 이 3자를 복합시킨 인물이라 볼수 있다.   “하늘은 인간우에 인간을 만들지 아니하고 인간아래 인간을 만들지 아니한다”는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한 명언들을 뿌리면서 《학문의 권장》, 《서양사정》, 《문명론의 개략》 등 명저들을 통해 메이지시대의 일본의 사상가, 계몽지식인의 제1인자로 부상한다. 그의 사상은 래디컬하지만 “메이지유신”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일본인의 서양인식 및 아시아니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근대화를 정신적으로 리드해 나갔다.   후쿠자와에 대한 한국이나 중국인의 인식은 지금까지도 그 “탈아론”에만 편향되여 “아시아멸시”의 장본인으로서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사실은 후쿠자와의 사상체계와 인물상은 그 하나만으로 결정지으려 하는것은 너무나 편협하다.    일본인으로서는 가장 빠른 시기, 26~34세에 무려 세번이나 유럽과 미국땅을 밟으면서 그 서양문화체험의 소스가 후쿠자와의 “서양문명기준”에 맞춰서 습득해야 한다는 개명적사상을 형성시킨다.   그는 일본인으로서는 세계사적시야에서 일본과 아시아를 바라본 최초의 사상가, 문명비평가였다.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그는 유명한 “문명의 류형론”을 전개한다. 그는 유럽, 미국 문명은 “최상의 문명국”,  토이기,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나라는 “반개명의 나라”로, 아프리카 등을 “야만의 나라”로 칭한다. 그 문명정도에 따른 문명류형은 현상을 돌파하는 향상심의 유무가 원인이며 아시아, 중국 등이 개혁에 등한시하고 자기자만에 빠져 세계적 력사의 리얼리즘을 망각하여 야랑자대(夜郞自大)에 질주한 결과 현실의 정체를 자초했다고 지적한다. 즉 세계사에서 자신을 탈락시켜 스스로 자기중심에 빠진 결과 쇄퇴의 인소가 되였다고 갈파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에 있어서의 문명국인 자본주의적인 명암을 진보와 해외에는 침략이라는 발톱을 뻗쳤다고 랭철히 분석하기도 한다. 백인에 의한 식민지화가 류행병을 전파하여 저항력이 약한 현지 인민구를 감소시켰다고 기술한다.   이런 의미에서 후쿠자와는 단순 “탈아론자”는 아니였다는것을 다시 발견할수 있다. 그는 중국에 대해서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됨을 예언한다. “지나와 같이 국토도 광대하여 아직 그 내지에까지 침투하진 못했지만 서구인의 족적은 해안지역에만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금후의 흐름을 추찰하면 지나제국도 그야말로 서구인의 전원으로 전락될것이다. 서구인이 미치는 곳은 마치도 토지의 활력을 끊고 초목도 그 성장을 멈출것이다. 심지어는 인종이나 인구조차도 절멸될 가능성이 있다.”  당시 후쿠자와는 그 예리한 통찰력을 구사하여 아편전쟁을 통해 국토가 영불군에 의해 점령되기 시작한 중국이 “서구인의 전원”으로 떨어지는 반식민지의 미래를 예견하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난 다음 후쿠자와는 일본이 현재 다행히도 대외관계에서 극단적피해는 받지 않았지만 역시 우리가 아시아의 일국이라는것을 망각하면 서양제국주의에게 당할 재난은 엄청 지대할것이라고 경고한다.   예지와 서양문명에 대한 견식, 그리고 세계사적 흐름에서 아시아 및 일본을 바라본 후쿠자와의 관찰에는 많은 탁월한 사상과 지견이 들어있었다.   후쿠자와가 지적했던 일들은 마치 그의 각본대로 연출되는 드라마같이 중국과 아시아에서 식민제국의 식민지배가 속속이 전개되지 않았던가.   이제 그가 발안한 “탈아입구(脫亞入毆)”에 대해 다시 고찰해보자. 1885년 3월 16일자 그 자신이 창간한 《시사신보》에 유명한 “탈아론”을 발표한다.   “오늘의 목적을 위해서는 우리 나라는 린국의 개명을 기다려 같이 아시아의 흥성을 기하는 여유는 없다. 오히려 거기서 리탈하여 서양문명과 진퇴를 같이해야 한다…악우를 친하게 사귀는것은 악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아시아동방의 악우(지나, 조선)를 사절해야 한다.”   그러면서 후쿠자와는 문명동참을 “홍역”으로 비유하면서 중국, 조선은 “그 홍역을 대처하기 위해 외면하면서 페쇠를 고집하고있다”고 지적한다.   당시 세계사를 아시아사와 결부시켜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고있는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문명동참을 거절하는 량국의 “고루”,  “페쇄”는 한스러웠을것이다. 그리고 이 “탈아론”의 발표는 자신이 지지했던 조선개화파의 제자 김옥균이 비참하게 살해되고 또 그 시체까지 릉지처참 당하는 직후에 후쿠자와의 중국, 조선에 대한 철저한 실망감에서 발해진것이다. 단지 단순히 중국, 조선을 “멸시”하여 발안한 론설이 아니였다. 그리고 그의 탈아론을 단순히 아시아침략의 원초적 사상으로만 한정시키는 견해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후쿠자와의 일생에서 창도했던 일본의 선택은 바로 청국중심의 고루하고 페쇄된 조공체계에서 리탈하여 서구형 문명국가로 탈바꿈하는 길이였다.   “탈아입구”의 선택은 바로 아시아의 서구화, 근대화의 대안이였던것이다. 다시 랭철히 분석해보면 후쿠자와의 령지는 일본을 근대화로 성공시켰으며 역시 그보다 20년 뒤져 중국에서 추진했던 근대 유신파 강유위, 량계초들의 모델이 되였다. 사실 중국의 근대화의 100년, 조선의 근대화의 100년 그 본질은 후쿠자와가 창도한 아시아적 “탈아입구”사상을 실현하는 프로세스였다.   “독립자존”의 슬로건을 걸고 일본의 독립자존과 함께 조선의 독립자존을 후쿠자와는 그 자신의 정치적과제로 삼았으며 김옥균 등을 물심량면으로 지지하지만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 김옥균이 리드했던 조선개화파혁명의 실패와 그의 살해에 그는 격분한다.   희유의 사상가이며 근대 일본의 정신적기수였던 후쿠자와는 일로전쟁 3년전인 1901년 2월 동경에서 뇌출혈 재발작으로 6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의 일생을 접는다.     
115    (29) 안중근의 의거, 이토암살은 미리 예언했다 댓글:  조회:6546  추천:15  2013-10-1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9) 안중근의 의거,이토암살은 미리 예언했다 김문학     1909년 8월말. 할빈역에서 안중근의사에 저격당할 때까지는 아직 두달 남았다. 6월 14일로 한국통감을 사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의장으로 피선된다. 8월 1일부터 그는 한국 황태자 이은(李垠)을 데리고 일본 동북, 북해도 지방을 순회했는데 이은의 견문을 넓힘과 동시에 이은을 중히 여긴다는것을 일본국민과 한국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삿포로 시찰을 마친 그날 이토는 이은을 수행에게 맡기고 삿포로의 다카시마(高島)농장을 방문한다. 북해도까지 왔다면 꼭 농장에까지 와달라는 다카시마의 청탁을 받았기때문이다.   다카시마하면 근대 일본의 유명한 실업가로서 독자적인 역술(易術ㅡ점치는것)인 다카시마역단(高島易斷)의 창시자로서 메이지시대 정국을 역학으로 점쳐온 역학의 대가였다. 그는 일본 근대사의 대사건, 이를테면 일청갑오전쟁, 로일전쟁 등 명치일본의 국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정국, 전국(5遡?의 행방을 점치고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 공표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역학의 “적중률은 거의 백발백중”이라는 정평이 나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다카시마는 출타중이여서 이토는 지배인 호소노에게 농장을 안내하게 하고 농장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그날 이토는 칠언절구 한시를 쓴다.   이 몸을 버려서 국난에 대하고(蹇蹇匪躬何念歸)   만천에 싸인 안개 려장을 적신다(滿天風露濕征衣)   석수산에서 본 가을꿈은(秋宵石狩山頭夢)   흑룡강을 넘은 사명으로 완수하리(尙尙黑龍江上飛)   북해도에서 돌아온 그는 10월 12일 오아미산장에 있는 다카시마를 다시 방문한다. 만주에 가기전에 꼭뵙자는 다카시마의 청을 들어준것이다. 이토를 만난 다카시마는 이번 만주행을 중지할수 없냐고 화제를 꺼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토는 즉석에서 자신의 만주행에 관해 다카시마의 역점결과가 상서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불안감을 억누르며 이토는 그에게 역점결과를 물었다. 다카시마는 이토 히로부미와는 사돈지간이였으며(이토의 아들 박방(博邦)과 다카시마의 딸 결혼) 일생동안 절친한 지교이기도 했던터라 기탄없이 결과를 직백했다.    “결과는 간위산(艮爲山)이란 3자였다.” 이 점괘는 “피차 각각 사상을 달리하여 서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시기다. 고로 이 간(艮)의 시기에는 추호도 희망을 품지 말것”이라는 의미였다. 즉 전개시키자면 이토가 제아무리 한국의 자주독립을 입에 달고 모색한다 하더라도 한국은 반발할뿐 호결과가 없다. 또한 스스로 스톱하면 좋지만 계속 나아가면 실패와 죽음을 의미한다.    다카시마는 이 점괘에는 이토의 암살되는 뜻이 있다고 직언했다. 그뒤 이 점괘는 과연 적중했다. 그리고 “간(艮)”은 즉 안중근(安重根)의 “근(根)”을 의미했다는것이 알린다.   그날 다카시미는 이토와 작별하면서 주위의 뭇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토의 손을 꼭 쥐였다고 한다. 다카시마는 이것이 금세의 최후의 리별이라는것을 확신했기때문이리라.   이토의 사위가 된 외무성관리였던 코마츠 미도리 저서 《춘무공과 함설공》에 의하면 이토는 “점괘를 리유로 국교문제의 최고 책임자가 외교적방문을 중지할수 없다”고 하며 암살의 예언을 아랑곳않고 만주로 떠난다. 춘무(春畝)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이고 함설(含雪)은 야마키다 아지토모의 호이다.  아마 이토는 죽음을 각오하고 만주행을 실행했는지도 모른다. 이토 신변에 있던 비서관 후루타니(古欲綱)는 만주를 이어 그가 수개월후 “북경에 가려고 했다”고 회상하고있다. 한국에게는 적장이였지만 일본에게는 이토는 자신의 사명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정치가였다.   코마츠의 회상기에 따르면 이토는 다카시마의 역을 백프로로 믿지는 않은듯 하며 늘 자신의 처신을 우선시킨 충실한 정치가였던것이다.   이토 측근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저택을 이토는 “창랑각(滄浪閣)으로 명명했는데 만경창파를 헤아리고 전진한다는 뜻이였다고 한다. 그가 창랑각에서 생활할 때 언제나 암살이 두려워 침대우에서 취침하지 않고 침대밑에서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암살을 두려워했던 그가 할빈에서 안의사에게 암살당하고마니 이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기(奇)하게도 1909년 9월 15일자 미국동포들이 발행하던 《신한일보》에 “안중근의 의거”를 예언하는듯한 시사만화가 게재된다.   삼천리 강토모습이 그려진 옷을 입고 태극문양의 권총을 머리에 쓴 조선인이 두손으로 천도(天道)와 공법(公法)이란 어휘가 새겨진 십자가를 쥐고있는데 맞은켠에는 태양의 얼굴을 한 일본인이 서있는데 두손에 쥔것은 법과 무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쇠망치였다.    일본인이 “먹을수록 맛이 좋아 나머지마저 먹겠다”고 말하자 한국인이 “옛다, 자 받아라. 하나, 둘, 셋,넷” 웨치면서 4발의 총탄을 쏘는 모습을 만화로 의인화하고있다.   이 만화에서 한국인은 마치 안중근의사의 표상이고 태양의 얼굴을 한 일본인은 마치 이토 히로부미의 표상인듯 하다. 일본제국의 한국보호의 미명으로 행해졌던 식민지지배에 경고한 만화로서 신통히고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미리 예언한 감을 준다.    1909년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 재미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의 기관지적 구실을 한 《신한일보》는 타향에서 자유롭게 일본비판을 전개했으며 그후 연해주와 청국의 땅에서도 읽히였다고 한다.   사실 이 만화가 게재된지 한달 좀 지나 할빈역두에서 의병장 안중근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는 그 파란만장의 생을 접는다. 안의사가 그해 실제로 《신한일보》를 읽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을것이다.    
114    (28) 일본에서 단련된 장개석 댓글:  조회:5557  추천:6  2013-10-1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8) 일본에서 단련된 장개석 김문학   백년전의 1909년 6월, 장개석과 손문은 일본에서 첫 상봉을 이룬다. 호놀룰루에서 일본을 거쳐 싱가포르로 가게된 손문은 진기미의 소개로 장개석을 만난것이다.   중국 근대사의 두 거물의 첫 상봉은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당시의 사실에 대한 자상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그 실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중화민국사의 특기할만한 상봉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손문은 그날 만났던 장개석에 대한 인상담을 진기미에게 이렇게 술회한다. “우리 혁명운동에는 장개석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그는 장차 꼭 혁명가로 성장할것요.”    장개석과 일본의 인연은 손문만큼 두텁다. 근대 일본과 중국관계사의 “산증인”으로서 일본인들은 오늘까지도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높으며 지대한 존경의 마음을 품고있다. 장개석은 일본에서 두번 류학하며 수차례 망명, 방문했는데 일본문화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독특한 부분이 있었다.     1905년 청년 장개석은 일본에서 근 일년 류학한다. 처음 일본으로 향한 배우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지 않고 손수건이나 티슈에 뱉어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청결한 일본인 인식이 각인된다고 자신이 고백한다. 첫번째 류학기간은 짧았으나 그는 국민당 원로의 한사람인 진기미를 알게 되고 진씨의 조카들인 진과부, 진립부 형제 등 많은 혁명지사를 알게 된다.   그해 겨울 귀국한 장개석은 1906년 수석으로 보정(保定)륙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기실 그가 여기에 입학한 목적은 바로 일본으로 재차 류학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1907년 구정을 쇠고난 그는 총망히 대련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동경의 진무학교(振武.A校)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청국류학생의 군사학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의 륙군예비교로서 유명했다. 중국 근현대의 저명한 군수장, 도독(都督)들이 거의 이 학교 출신이였다. 염석산(閻錫山), 채악(蔡鍔), 리렬균(李烈均), 오록정, 장백리, 풍옥상 등 수백명의 리스트가 줄짓는다.   장개석은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륙군에 편성되여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니이카터현 타가다(高田)포병련대에서 근무한다. 당시 24세의 장개석은 신장 169센치메터, 체중 59.2킬로그람, 최하위 2등병으로서 일본군의 “무사도”적인 규칙아래 렬악한 환경과 엄격한 군기하에서 심신을 단련한다.      1905년 청년 장개석은 일본에서 근 일년 류학한다. 처음 일본으로 향한 배우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지 않고 손수건이나 티슈에 뱉어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청결한 일본인 인식이 각인된다고 자신이 고백한다. 첫번째 류학기간은 짧았으나 그는 국민당 원로의 한사람인 진기미를 알게 되고 진씨의 조카들인 진과부, 진립부 형제 등 많은 혁명지사를 알게 된다.   그해 겨울 귀국한 장개석은 1906년 수석으로 보정(保定)륙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기실 그가 여기에 입학한 목적은 바로 일본으로 재차 류학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1907년 구정을 쇠고난 그는 총망히 대련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동경의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청국류학생의 군사학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의 륙군예비교로서 유명했다. 중국 근현대의 저명한 군수장, 도독(都督)들이 거의 이 학교 출신이였다. 염석산(閻錫山), 채악(蔡鍔), 리렬균(李烈均), 오록정, 장백리, 풍옥상 등 수백명의 리스트가 줄짓는다.   장개석은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륙군에 편성되여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니이카터현 타가다(高田)포병련대에서 근무한다. 당시 24세의 장개석은 신장 169센치메터, 체중 59.2킬로그람, 최하위 2등병으로서 일본군의 “무사도”적인 규칙아래 렬악한 환경과 엄격한 군기하에서 심신을 단련한다.    겨울에는 설국이라 불린 타카다의 병영에서 일본군과 같이 랭수에 세수를 하고는 또 군마를 씻는 작업, 변소청소 등도 해야 했다. 식사사정도 백미밥은 있었으나 일본식 “오니기리”(주먹밥)에 다쿠앙(무우김치류) 세쪼각이였다.   당시 일본군영에서는 간거한 훈련방식으로서 검소한 생활을 지향하고 정신적소양과 심신의 단련을 통해 육체와 의지의 일체화를 노렸던것이다.    장개석은 바로 이같은 군대의 훈련체험을 통해 치욕과 간거한 심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苦)를 락으로 삼으며 높은 사상의 경계에 도달했다고 많은 식자들이 보고있다.   그뒤 장개석은 실생활에서도 일본식 검소한 식사를 즐겼으며 담박한 일본식 생활을 지향했으며 부인 송미령의 사치한 생활양식과는 판이했다. 그가 언제나 “장까까머리”란 별명이 붙을만큼 삭발을 즐긴것도 일본식 군대의 삭발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은 까닭이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진충보국의 전통정신을 숭경하며 또한 부모를 존경하고 스승을 높이 모시고 협과 의를 중히 여기는 일본민족성을 사랑한다. 일본은 나에게있어서 제2의 고향이다.” (1970년 외국인 기자 회담)고 장개석은 솔직히 고백한다.   장개석은 일본의 무사도와 중국의 사도(士道)를 모두 중국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학설의 실천으로 보고있었으며 중일 량국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932년 《중국의 립국정신》)   1934년 장개석이 전국민에게 호소한것이 유명한 “신생활운동”이다. 그 운동의 골자는 바로 장개석이 20대 젊은 시절 일본에서 형성된 정신세계의 일부분이였다. 일본에서 배운 “례의렴치”를 슬로건으로 중국 국민성을 개조하고 문명인, 문명국으로 탈바꿈을 지향한것이 장개석의 꿈이였다. 도덕과 지식교양의 향상을 호소한 이 운동은 중국 민국정신사에서도 평가절하시킬수 없는 한 대목이다.   장개석은 일본국민성과 비교하여 중국국민성을 “오예(汚穢), 랑만(浪漫, 산만, 규률이 없음), 라타, 퇴당(頹唐, 정신위축, 체격취약, 불량취미 등)” 등 4대 렬근성으로 꼬집고 그 치료약이 바로 “례의렴치”의 생활방식이라고 지적하며 그 실행법으로서 “정제,  청결,  간단, 소박(朴素)”의 국민성정립이라고 력설한다.   장개석의 일본인식에는 청년시기 일본에서 실체험을 바탕으로 한 “일본적정신”이라는것이 자리잡고있었다. 그는 1934년 신생활운동에 관하여 수차례 강연을 하면서 “나는 일본륙군에서 배웠으며 그 학교교육, 군대교육을 받았다. 일본인의 생활은 례의렴치에 통한다. 그것으로 일본은 부국강국으로 되였다. 우리 중국인은 포연탄우속에서 일본인과 싸우기전 일상생활에서 이미 지고있다”고 국민성 결함을 지적한다.   장개석이 창도했던 “신생활운동”은 70년대 박정희가 한국에서 대거 전개했던 “새마을운동”과 같은 맥락으로서도 포착할수 있다. 일본을 배워 문명인, 문명국으로 거듭나자는 동아시아의 “일본학습”의 형태이기도 했다. 사실 21세기의 오늘에도 장개석의 “신생활운동”의 골자는 여전히 유효하며 부유와 물질추구에 편향된 오늘 중국국민의 결함을 시정하는 정신적 “약”으로 될수 있다.   장개석의 일본인식, 일본문화 리해에는 중국 정치가치고는 투철했다. 그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숙지하고있었기에 항일에 있어서는 섣부른 “암석에 계란 던지기”가 아닌 “일면교섭 일면저항”의 전략을 사용했으며 “지구전론” 역시 모택동보다 수년앞서 제기해왔던것이다.  
113    (27) 베일에 가려진 서태후 레이프사건과 의화단의 사후처리 댓글:  조회:6716  추천:11  2013-09-30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7) 베일에 가려진 서태후 레이프사건과 의화단의 사후처리 김문학   력사에는 베일에 가려진 은페된 사실(史實)이 무수히도 많이 존재한다. 필자가 력사공부를 해오면서 한중일근대사 100여년전에도 이같은 은페와 허구가 많았다는것을 발견하면서 노상 경악하군 했다. 력사교과서나 영화 《원명원을 불사르다》, 《수렴청정》에 의해 널리 각인된 8국련합군의 만행과 의화단의 애국적저항 및 서태후의 도벽행위(西巡)는 주동의 정설로 돼있다. 그러나 필자가 일본에서 발견한 사료기술에는 서태후가 사실 광서황제와 같이 피난을 가지 않고 자금성에서 100여명의 환관들과 눌러앉아있었던것이다. 영화에서는 1900년 8월 10일, 8국련합군이 북경으로 습격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청국 궁정에서는 서쪽으로 탈출하는 “서순(西巡)” 즉 서태후, 광서황제 일행이 8월 15일 새벽 자금성을 나서 10월 26일 서안에 도착하는것으로 돼있다. 그리고 서태후도 광서황제도 한족의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겨우 도벽에 성공하는 우여곡절이 전개되여 비장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광서황제만 피난하고 서태후는 자금성을 지켰는데 그것이 그녀의 비운을 초래한다. 《력사독본》 1992년 11월호 《선향의 불》(마스이 유키오(增井經夫), 1987년 간)의 증언에 의하면 8국련합군이 북경에 입성하여 롱성(籠城)하고있던 외국인, 중국인을 해방시키고 북경에서 야만적인 략탈과 폭행을 감행하였다. 그런 와중에 자금성에 란입한 미국병사가 서태후의 거실까지 습격하여 64세의 서태후를 레이프(강간)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대청제국의 최고실력자인 64세의 로파를 정복했다는 상징적의미로 그런 만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이 사태에 경악한 청국은 미국에 항의하였으며 미국 역시 사과했으나 그 긴급교섭에 통역으로 입회한 인물이 일본의 유명한 작가 핫토리 우노기치(服部宇之吉)교수였다. 당시 그는 동경제국대 교수로서 북경류학중에 의화단사건에 조우하여 북경롱성에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뛰여나게 잘한 그를 량국정부가 제3국의 통역으로 림시 요청했던것이다. 청국에 사죄한 미국정부는 의화단의 사후처리로서 청국으로부터의 배상금을 중국인을 미국으로 류학시키는 류학자금으로 하는 등 청국교육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것으로 매듭진다. 당시 청국과 미국 량측으로부터 핫토리교수는 “이 사건을 30년동안 입밖으로 새나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막음다짐을 받았다. 핫토리는 그 약속을 지켜 30년동안 아무에게도 루설하지 않았다. 그가 동경대학 동아사연구실에서 당시 그의 제자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노하라 시로오(野原四郞), 마스이 유키오 등 인물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이 세사람은 현대 일본의 력사학, 고고학 분야의 쟁쟁한 학자로 성장한다. 마스이교수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일본 군부와 기자들속에 이 사건을 알고있는 인물이 다수 있었으며 단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뿐이라 한다. 핫토리교수는 일본의 중국학의 거물이며 1902년 북경대 전신인 경사대학당 창건시기 교습으로 최빙돼 물심량면으로 공헌한 재질과 덕을 겸비한 야심적인 학자였다. 그의 부인은 또 추근(秋謹)을 일본으로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며 그의 막둥이 딸의 회상에 의하면 부인도 이 사건을 알고있었다고 전해진다. “국모릉욕사건”은 그 사건이상으로 “청국을 릉욕한” 상징적 사건이였고 중국의 반식민지의 치욕적인 근대사의 한 장면이였다. 그 배경에는 “의화단운동”이 있었으며 외국인의 “북경롱성”이란 력사사실이 있었다. 그럼 의화단운동은 왜 발생했을가? 19세기말 아편전쟁이후 제국주의렬강의 중국진출은 문화적으로 기독교 포교활동으로 전개되였다. 하여 많은 청국인들이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는데 신도들과 중국 평민들의 충돌도 빈발하였다. 드디여 반양(反洋)교운동이 장강류역, 화북에서 과격화되며 결국 의화단운동의 단서로 된다. 의화단은 의화권술에서 온 명칭인데 권술과 주문을 터득하면 그 어떤 총칼도 막는다는 불사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민간신앙을 베이스로 발전되여 1899년 산동에서 흥기하고 1900년에는 하북으로 전파되였다,. 봄에 의화단이 북경에 입성하여 6월 20일부터 동교민항이라 불린 외국공사관구역 및 성내 북부구역에 8국 외국인과 청국신도 4천여명이 “북경롱성”의 막을 열었다. 의화단은 의화권술에서 온 명칭인데 권술과 주문을 터득하면 그 어떤 총칼도 막는다는 불사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민간신앙을 베이스로 발전되여 1899년 산동에서 흥기하고 1900년에는 하북으로 전파되였다,. 봄에 의화단이 북경에 입성하여 6월 20일부터 동교민항이라 불린 외국공사관구역 및 성내 북부구역에 8국 외국인과 청국신도 4천여명이 “북경롱성”의 막을 열었다. 일본 외무성 서기생과 독일공사가 의화단에 의해 살해되면서 의화단과 8국 렬강과의 전투가 전개된다. 지금까지 의화단에 대해 진압군을 파견하면서도 탄압할가 지원할가 망설이던 청국정부는 6월 21일 8국렬강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의화단을 전투력으로 활용하려했던것이다. 8월 8국련합군은 북경을 습격한다. 련합군은 치렬한 싸움끝에 북경에서 갇혀 “롱성”하던 외국인과 청국신도들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8국련합군은 북경성에서 교과서에서 기술한 “필설을 다할수 없는 살인, 방화, 강간, 략탈”을 거듭하면서 원명원에 있는 국보진품, 문화재를 강탈한다. 이런 와중에 궁중에 남은 서태후가 그 만행을 당하게 된것이다. 서구군대와 대조적으로 당시의 문헌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규률을 지키고 자금성을 보호하는데 기여했던것이다. 리홍장의 심복이였던 성선회(盛宣懷)는 “일본군은 로씨야군과 달라서 신뢰할수 있으며 자금성을 지켜줄것이다”고 주장한다. 서구군대들이 자금성을 포격하자고 한것을 일본군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청국에 동정했으며 자금성을 보호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노력으로 자금성은 략탈을 면했고 성벽에 탄환 하나 맞지 않고 수비되였다. 우리가 배운 력사에는 이런 력사의 구체적인 실상들이 탈락돼있다. 의화단이 어떻게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며 비장히 희생됐다는 표층적인 사실만 강조하며 그런것을 모두 “애국적행위”로 활용한 “사후기술법”이 허다하다. 여기서 발견되는것은 서태후의 청국정부가 의화단을 애국적방패로 삼아 서구렬강과 결승전을 감행하는 첨병으로 리용했던것이 큰 우(愚)였다. 결국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격으로 서구렬강의 침략을 북경으로 깊숙이 침투시킨 악과를 자초했던것이다. 서구의 근대무기앞에서 주문과 칼이 무슨 소용있으랴. 1901년 11개국 렬강에 의해 맺은 《신축조약》은 청국의 반식민지화를 진일보로 가속화시켰다. 근대문명을 무시한 력사의 아이러니였다.
112    (26) 얼굴없는 국모ㅡ명성황후 댓글:  조회:6066  추천:31  2013-09-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6) 얼굴없는 국모 - 명성황후 김문학   근대 조선사에서 가장 참혹한 회상사를 당한 인물은 김옥균과 명성황후를 꼽아야 한다. 개화파 수령 김옥균은 민비(즉 명성황후)가 파견한 동족암살자에게 상해에서 총탄에 쓰러지지만 민비는 일본인에게 참살을 당한다.    “력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으로 칭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한일량국의 근대사 및 동아시아 근대사의 루락할수 없는 일대 사건이였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5시반, 경복궁 담을 넘어 광화문을 열어젖힌 괴한들은 북단의 건천궁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고종의 처소인 장안당과 왕비(명성황후)의 처소인 곤녕합을 점령한다. 고종이 그 괴한들을 가로 막지만 그들은 왕까지 밀쳐버리고 방약무인으로 전진한다. 곤녕합에서는 한 녀인이 궁녀들과 함께 장안당과 련결된 복도에 나타났다. 이때 뒤를 쫓던 괴한중 하나가 그녀의 덜미를 잡고 뒤뜰안으로 끌어내린 뒤 힘껏 칼로 내리쳤다. 비명속에 쓰러진 녀자는 바로 왕비였다.  그 칼을 휘두른 자가 일본 륙군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였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일왕의 명령에 따른 일본군부가 을미사변을 일으킨것이다.”(2010년 1월 11일 조선일보) 서울대 이태진명예교수가 현장에서 명성황후의 살해된 상황을 설명한 말이다.   그뒤 괴한들은 왕비의 시신을 곤녕합의 옥호루로 옮겨 사진과 얼굴 대조를 마치고는 그중 한 남자가 “동포로서는 차마 쓰기 거북한 행위를 감행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민비암살》(1988년)을 집필한 일본 녀류넌픽션작가 츠노다 수하코(角田房子)씨가 기술하고있다. 그 쓰기 거북한 행위란 바로 시간(屍姦)=시체릉욕을 가리킨다. 이렇게 약소국의 조선의 국모는 죽어서도 릉욕을 당하는 비운을 면치못했다. 참 슬픈 일이다.    “이어서 시신을 곤녕합 옆의 록산(鹿山)으로 운송되여 나무더미를 쌓고 그우에 올려 불로 태웠다. 타다남은 시신의 일부분을 건청궁앞 련못 행원정에 던졌지만 곧 수면으로 떠올라 다시 거두어 록산기슭에 묻었다.”(이태진. 전게신문) 최근 재일교포이며 녀류사학자인 김문자(金文子)씨가 풍부한 외교자료와 군부자료를 섭렵하여 펴낸 연구서 《조선왕비살해와 일본인》(2009년 2월)에서 지금까지 일본의 랑인, 장사(壯士)들이 민간차원에서 추진했다는 정설을 뒤엎고 일본의 군부 참모부가 관여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구명했다.    이 사건에는 당시 참모본부의 지휘관 가와가미(川上操六)와 조선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결탁하여 면밀한 계획하에 그것을 이토 히로부미수상, 무츠(陸奧宗光)외상이 묵인승인후 륙군의 일부, 해군 첩보장교 그리고 민간의 “장사”를 동원하여 정예군단을 결성해서 결행했던것이다. 즉 군부, 정부가 획책한 모략사건이였다는것을 실증하였다. 필자가 이 책을 통독하면서 느낀 감상은 철저한 실증주의의 립장과 방법으로 력사의 진상을 밝히는 연구자의 진지한 태도였다. “지금까지 륙군중장인 조선공사 마우라를 수모자로 한 우발적사건으로서 치우쳤던 사건이 실은 일본 정부와 군부의 합작에 의한 용이주도한 음모사건이였다는것을 실증한 이 책은 일한 량국의 근대사 연구에 큰 투석으로 되여 이 사건을 근대 한일관계를 사색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력사사건을 바라봄에 있어서 사건만큼 중요한것이 왜 그 사건이 발생했냐하는 원인, 리유 규명이다. 1895년 10월이라면 일본이 청일갑오전쟁에서 승전을 거둔직후라는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일본이 승리했지만 “3국간섭”으로 인해 료동반도를 다시 로씨야측에 양보하고 로씨야와의 대립이 가시화되였다.    한편 당시 조선의 반일기운이 세차게 일어났으며 궁정과 정부에서도 반일움직임이 보이면서 왕비를 비롯한 조선은 로씨야쪽으로 인심이 기울어지고 친로정권이 탄생되였다. 왕비에게 추방당한 친일파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왕비를 제거하는 모략을 획책하게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으로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의 수모로 일본군과 친일세력이 함께 계획, 실행하게 된다. 왕비가 청국의 서태후와 비슷한 모략에 뛰여난 인물이라는 평도 있을정도이니 일본측에게 있어서 그녀는 자신들의 조선지배책을 가로막는 중심인물인것은 사실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어난것이 참혹한 왕비시해사건이다.    1897년 대한제국선포후 왕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며 지금 우리가 흔히 아는 “명성황후”가 탄생된다.    서태후와는 달리 명성황후는 우리 민족에게는 그 얼굴 모습조차도 확인되지 않은,  “얼굴없는” 국모다. 교과서나 많은 서적, 자료에 “민비”,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게재되군 하는 사진은 김누자씨나 여러 사학자들이 고증에 의하면 실은 황후 본인이 아니라는것이 판명되였다. 미국, 프랑스, 이딸리아에서 출판된 서적, 잡지까지 추궁하여 본 결과 그 최초의 게재 잡지는 일청전쟁중 발행한 일본의 사진화보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 촬영된 녀성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궁정의 궁녀였음이 판정되였다.    명성황후의 모습이라고 지칭된 사진이나 그림은 여러장 있으나 그 진가에 대한 론난 역시 치렬하지만 지금까지 황후의 진짜 얼굴을 확인할수 없다. 황후가 살해된후 고종이나 조선황실에서 그녀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어 수소문했으나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황후를 가까이에서 접견했던 언더우드녀사는 “얼굴이 갸름하며 약간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반짝이는 총명스런 눈빛이 인상적이였다. 시선을 끄는 미모는 아니였지만 지적이고 예리함이 풍기는 용모였다”고 그녀의 체험기 《상투와 함께 15년》에서 황후의 모습을 묘사하고있다.   비숍녀사 역시 “약간 창백한듯한 얼굴에 몸매는 마른편인데 날카로와보이는 용모에 예리한 통찰력의 눈매는 강한 개성이 있었다”고 기술하고있다.  100여년전 유린당한 민족과 나라와 같이 얼굴모습도 확인되지 못한채 잃어버린 얼굴로 남아있는 국모의 용모, 조선민족의 깊은 슬픔을 대변하고있는듯 하다.   
111    (25) 이토 히로부미 암살 “2중저격설” 댓글:  조회:5371  추천:22  2013-09-1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5) 근이토 히로부미 암살 "2중저격설" 김문학 근 10년동안 필자가 일본에서 과외로 안중근의 사상연구에 착수하면서 섭렵한 수많은 자료, 문헌중 조우하게 된것의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 2중저격설”이였다. 즉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인물은 안중근의사외에 또다른 제3자가 존재했다는 언설이다. 물론 필자가 소학교시절에 자칭 만주마적단에서 활동했다는 90여세의 중국인 로인에게서 “이등박문을 암살한 사람은 안중근 말고 또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적 있으나 어른들끼리 취중에 한 말이라 어린 필자는 별관심이 없었다. 30여년후인 지금 필자가 그 중국인 로인의 이야기를 다시 먼 기억에서 회생시킨것은 일본의 “2중저격설”과 조우하면서 그 이미지가 오버랩(互搭)됐기때문이리라. 하다면 일본사회의 이토2중저격설의 책원지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최초로 “2중저격설”을 제기한것은 이토의 측근이였던 관료, 실업가인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란 인물이다. 1938년 그가 생전에 구술한 책 《무로다 요시아야옹담(翁譚)》이 출간된다. 무로다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암살되는 날까지 이토의 신변에 있었던 인물로서 그의 구술로 된 회상기가 일본사회에 “2중저격설”을 전파하는 산파의 구실을 한다. 필자가 그 책을 읽어보았는데 “이토 2중저격설”의 주제는 “안티안중근저격설”이였다. 무로다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이토를 쏜 인물은 이 키작은 남자가 아니였다. 역사(驛舍) 2층식당에서 아래로 경사지게 향한 불란서기병총으로 쏜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토암살의 진범인이다.” 무로다가 증언하는 이토의 피탄은 (1) 프랑스카빙총(기마총)에 의한 저격 (2) 사입(射入)각도가 오른편 우에서 경사지게 아래방향으로 된것 (3) 이토의 총상은 3발이 모두 다 기병총탄환이였다는것. “또한 3발 다 2층에서 발사한 총상이며 단연코 로씨야병의 고간에서 권총을 빼들고 쏜것이 아니며 특히 키작은 남자(안중근)는 권총을 소지했는데 이토의 암살은 프랑스기병총으로 저격한것이다”고 우긴다. 무로다는 이 주장을 평생 꺾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의 손녀딸에게도 노상 이 이야기를 외웠다고 한다. 무로다는 1909년 11월 20일, 시모노세끼구재판소의 검사 타무라(田村光榮)의 청취에 대해 그가 내놓은 안의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 남자가 로씨야군대사이에서 한발자국 나서서 단총을 들고 자신(무라다)에 겨냥하고 발사했다는것을 인정한다”고 진술하며 “이토공작을 저격한 자는 사진의 사람(안중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수행의원이였던 주치의 코야마가 법정에 제출한 심문조서에는 이토의 총상은 무로다설과 일치하지만 무로다의 사입각도가 경사진 하향(下向)인데 반해 코야마는 수평선을 주장한다. 무로다의 증언은 그뒤 일로관계악화와 범인확정의 장기화, 복잡화를 리유로 야마모토(山本權兵衛) 해군대장(그후 1913~14 수상)에게 입막음을 당하게 되며 흐지부지 무력화해진다. 그뒤 1960년 야마구치현립의대의 법의학연구자들인 키무리(木村孝子), 스에모토(增本寬)가 야마구치현립박물관에 소장된 이토가 피탄당시 입었던 속내의의 피탄흔적, 혈액 등을 분석한 론문이 발표되는데 제1, 제2탄의 저격자와 제3탄의 저격자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암시하는 결론을 내리지만 역시 유력한 증거는? 하는 질문에 정면 확답을 제시하지 못하고있다. 1966년 일본 《공학원대학연구론총》 5호에 히자가와(平川紀一)교수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둘러싸고”라는 론고가 발표되는데 기본상 무로다의 의견으로 경사진 결론을 내리고있다. 이 론고 역시 무로다의 증언을 증명하기 위한 언설을 펼치지만 유력한 증거물은 제시하지 못한채 끝나고만다. 최근 2000년이후 륙속 공표되는 “이토와 안중근”관련 연구는 “누가 진범인가”하는 테마를 둘러싸고 진행되온것이 특징적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 4종을 소개하기로 한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교수 가미가이(上垣外憲一)의 《암살. 이토 히로부미》(2000년) , 넌픽션작가의 대하실기 《이토 히로부미암살사건ㅡ어둠속에 사라진 진범인》(2003년)과 일한관계사 연구자인 윤노(海野福壽)교수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병합》(2004년), 교또대학 교수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근대 일본을 만든 사나이 이토 히로부미》(2009년). 최근 2000년이후 륙속 공표되는 “이토와 안중근”관련 연구는 “누가 진범인가”하는 테마를 둘러싸고 진행되온것이 특징적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 4종을 소개하기로 한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교수 가미가이(上垣外憲一)의 《암살. 이토 히로부미》(2000년) , 넌픽션작가의 대하실기 《이토 히로부미암살사건ㅡ어둠속에 사라진 진범인》(2003년)과 일한관계사 연구자인 윤노(海野福壽)교수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병합》(2004년), 교또대학 교수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근대 일본을 만든 사나이 이토 히로부미》(2009년). 이토 저격의 진범인설을 이들은 아래와 같은 추측으로 펼치고있다. (1) 일본국내 군부와 우익세력설 조선식민지정책로선에서점진파인 이토와 대립한 야마가다(山縣有朋), 가츠라(桂), 테라우치(寺內), 고토(后藤) 등이 막후에서 조종하여 일본군부경찰을 동원하여할빈역 2층식당에서 저격했다는 설. (2) 일본군부와 우익랑인(浪人)의 사촉하에 연해주 및 만주의 조선인 항일유지가 조선인별동대를 결성하여 집단으로 실행했다는 설. (3) 안중근은 그 조선별동대의 한 성원이였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할빈역플랫폼에 저격자로 현장에 있었기에 여전히 그의 범행설은 성립된다는것. 특히 “안중근+그 동지설” 또는 “별동대설”은 이토 암살범인 추정으로서 꽤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있다. 즉 “진흉범은 안중근의 성공과 함께 도망했다”는 당시 소네아라스케 한국통감이 카프라수상에게 송전한 전보문은 범인복수설 냄새가 농후하단것을 시사해주고있다. 당시 25명의 항일혁명가가 체포블랙리스트에 오르는데 이토암살을 안의사 단독행위가 아닌 복수성원의 계획적인 행동이였다고 일본정부에서도 간주했던것이다. 이는 최근 연변의 조선족 저널리스트 리광인씨의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에서 제기한 “안중근 동지설”과 합치되기도 한다. 안의사가 현장에서 체포된 뒤 려순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할 때까지 5개월동안 당당하게 이토를 비판하고 자신의 저격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주장한 그 대의가 일본인들을 감복시킨다. 동경국제한국연구원장 최서면선생은 한마디로 “무로다설은 근거없는 날조”로 일축하지만 필자는 력사의 진실은 무조건 단순히 부정할만큼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다는 생각을 하고싶다. 필자는 2중설의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했다는것에 의미가 있다고 인식한다. 왜냐면 홀로 그 추운 할빈역두에 섰던 안의사의 배후에는 항일투사의 동지들의 협력이 있었다는, 기뻐해야 할 민족의 힘이 있었음을 확신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인내부에도 조선지배를 에워싸고 지대한 모순갈등이 실재했다는 력사의 일면을 발견할수 있는것도 수확이 아닌가.
110    5-4. 나는 왜 반론을 안 하는가? 댓글:  조회:8068  추천:55  2013-08-17
준비중
109    5-3. 내 손이 말 한다 댓글:  조회:5473  추천:6  2013-08-11
3. 내 손이 말 한다   나는 손이 유달리 작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은 것과 손이 작은 것은 나의 신체적 양대 콤플렉스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핸디캡으로 내 생에 따라다닌 그림자와도 같았다. 여성들까지도 내 손을 보기만 하면 “아이고, 손이 참 작기도 하네요! 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 한 것처럼 탄성을 지른다. 누구 말마따나 옛적부터 남자들은 “기생의 손을 쥔다”는데, 나는 오히려 “기생한테 손을 잡히운다”. 실제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빠 같은데 가면 호스티스들은 나의 손을 보고 귀엽다고 하며 자기의 손보다도 야들야들 하다고 감탄한다. 나의 손을 본 여성은 나의 “닭도 잡을 힘이 없는 손으로부터 결코 강탈할 위협이 없으니 안심 한다” 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심하고 내 손을 누구에게 맡길 수 없다. 세상사람 들은 수상(手相)을 잘 보는데 나는 상대의 손금은 잘 보아주지만, 내 손금은 보여주기 꺼려한다. 이유는 작은 손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작은 손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가 따로 있다. “남자는 손이 작으면 보배를 잡고, 손이 크면 풀을 쥔 다” 라는 중국의 속담이 그렇게 감미롭게 들릴 수가 없다. 우리의 속담에도 “남자는 손이 고우면 귀하고 여자는 손이 고우면 천하다” 라는 말이 있다. 아마 손이 고운 여자가 천하다는 얘기는 옛날부터 화류계의 기생이나 또는 창녀를 가리키는 전통적 조선의 가치관에서 온 말 일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매일 노동과 가사에 시달려 소나무껍질같이 투박한 손을 한 농민의 여자가 귀하다는 逆說이 될 터 인데, 그렇다면 찬성하기 어렵다. 전통적 관념으로 말하면 내 작은 고운 손은 샌님(先員)의 손이다. 망치와 괭이나 삽 따위를 쥐지 않고 붓을 쥐고 부채를 쥔 문장과 풍류를 일삼는 “고귀”한 선비의 손이다. 그러니 나의 손은 으레 미수(美手 )요, 귀수(貴手)일 것이다. 이렇게라도 한번 내 작은 손을 위해 옹호하는 예찬을 해야 내 손에 위안을 줄 것이 아닐까. 손은 무엇인가? “그대는 그곳에서 귀한 손으로 저희를 이끌고 오른손으로 저희를 잡아주십니다.“ (시편) 139의 시구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손을 의미하는 단어는 기둥을 가리켜 말하는 언어와 관련돼있으며 지지, 힘, 강함을 나타냈다. 로마에서는 손은 보호, 권위의 상징이었다. 초기 기독교 교도들은 神 의 모습을 구름 속에서 내민 손으로 그렸다고 한다. 상징으로서의 손은 언어의 대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언어장애자는 손짓의 수화(手話)로 말을 하고, 맹인은 손으로 점자를 통해 글을 읽었다. 손은 말이고, 손은 눈이다.--- 나는 이것이 손의 무엇이냐? 에 대한 가장 함축적이고 실질적인 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손은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나? 하는 연구는 생물진화론,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 생리학 등 여러 연구 분야에서 해답이 속출하고 있다. 나는 손은 생리적인 역할(도구)의 뿐만 아니라 그 집단 인간의 문화자체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인간 자체가 그의 손안에 축소돼 있어 손이 인간의 대변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手)자로 인간의 하는 일, 직업을 말한다. 가수(歌手)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어에는 聞き 手 , ヤリ 手, 買い手, 賣手, 相手.... 차례로 듣는 사람, 하는 사람, 사는 사람 파는 사람, 상대의 사람이라는 뜻을 이렇게 수(手)롤 표현한다. 수당手當, 打手, 견본이란 뜻의 手本, 그리고 스스로 하는 일을 勝手(손이 이긴다)고 표현한다. 손이 이긴다. “손은 밖으로 튀어나온 뇌”라고 하니 손은 인간 신체의 최고 신기수(神技手)가 아닌가! 손재주, 말재주란 말은 있어도 발재주란 말은 없다. 나는 발재주라면 축구를 드리불 하는 것 밖에 모른다. 기실 손재주 하면 나는 별 신통한 재주가 모자란다. Aㆍ비어스는 에서 손은 “인간의 팔 끝에 달린 통상 타인의 포켓에 들어갔다 나오는 기묘한 도구”라고 그 스리의 신기를 야유하고 있으나 그러한 신기는 물론, 나는 컴퓨터의 건판을 치는 가장 쉬운 일도 못하며 자동차 운전은 고사하고 주방의 가스 불 점화기 켤 줄도 모른다. 어이없다고 친구는 “손이 발에 붙었냐?” 라고 조롱하는 말에 나는 “아니 사타구니에 달렸어”하고 자조한다. 나는 또 흔한 젓가락질도 잘못하여 늘 음식물을 떨 군다. 내 손이 단 하나 중요한 일을 해주는 것은 내 두뇌 속에 사유를 펜으로 써 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내 손이 내손일수 있는 가장 큰 까닭은 육필로 글쓰기를 하는 것인가 한다. 내 손은 내 입보다 더 말을 한다. 입도 못 하는 말을 내 손이 척척 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내 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마 내 육신에서 제일 작고 귀여운 내 손가락들이 필을 잘 쥐고 글을 줄줄 써내려가는 재간이 유일한 자랑거리일까? 눈, 귀, 코, 위장, 간장, 그리고 대장, 소장, 어디하나 자랑할 만한 데 없는 내 병신 같은 육체에서 작은 손이 나를 대변해준다. 심리학자 융의 지론대로 “창조와 생산의 힘의 상징”인 손만은 작으나 건강하고 아무리 부려 먹어도 고달프단 말 한마디 쉬자는 말 원성 없이 수걱수걱 움직여준다. 누가 나를 귀재라 하는가? 나는 귀재(鬼才)도 기재(奇才)도 아닌 수재(手才)다. 수재인 만큼 손으로 글을 쓰는 컴퓨터 기계문명의 복을 누릴 자격도 없는 나이다. 유년기부터 병약한 나는 신체의 모든 부위가 작고 약하여 타자와 나와의 접촉에서 매우 민감 체질의 인간이었다. 이를테면 음식물 반응이 예민하여 먹고 마시는데서 맞지 않으면 곧 설사를 하곤 했다. 그래서 주위 어른들의 보육과 관심을 많이 받아오면서 민감한 체질적 감수성을 키운 것 같다. 내가 곰 같이 터프한 체질, 건강한 아이였다면 주위의 배려는 적었을 것이며, 민감한 감수성이 훈육되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감수성은 사유하고 글 쓰는 것으로 집중된 것 같다. 공자진(龔自珍)이 노래했던 병신의 病梅병매가 더 아릿다운 것은 그 病態 때문이다. 병태 적으로 작거나 이상하거나 하는 것이 때로는 아름다움으로 되는 것이다. 작아도 자기 구실을 하는 것이 좋다. 연장만 대자로 크고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은 오히려 큰 것이 비난의 상대로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자신의 몸의 핸디캡이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면 창조적 에너지로 변신하는 힘이 있는 법이다. 오른손에는 학문, 왼손에는 문학을, 나는 내 이름을 이렇게 해석 하고 싶다. 관념적으로 좌우의 손의 중요함의 차이가 거의 문제시 되지 않는 오늘날, 오른손도 이성(理性), 사유를, 왼손은 신비, 감성의 상징체이기도 하다, 서양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왼손으로 쥐고 고환을 나꿔챘다는 것에서 왼손은 불길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좌우의 양손이 합치면 큰 역량이 되며, 타자와 손과 손을 잡는 것은 결속과 강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악수와 같이 신임과 평화를 상징한다. 아무튼 ‘학문’과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연구와 글쓰기, 이것은 내 작은 손이 다 해주니 너무 고마운 존재이다. 이 손에 대해 나는 거수경례로 가장 큰 경의를 표하고 싶다. 며칠 전 12살의 아들 녀석이 내손을 보고 “아빠 손은 내 손 만큼 작아요” 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빠보다 키도 크고 손도 큰 남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나는 희열을 느꼈다. 나의 후대는 나만큼 되지 말고 부디 큰손, 큰 키의 사나이로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필을 쥐든, 화필을 쥐든 아니면 무엇을 하든 큰 손만큼 마음이 큰 사나이로 성장했으면 한다. 어쨌거나 나는 내 작은 손을 아프리카 땅덩이를 준대도 바꾸고 싶지 않다. 말하는 내 손을 말이다.
108    5-2.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 댓글:  조회:5935  추천:28  2013-07-28
2.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   이글은 일본과 나의 만남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다. 솔직히 고백하여 나와 일본, 일본문화와의 만남은 일종 “운명적인” 만남의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만남에는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惡緣)의 만남이 있고, 반드시 만나야 할 길연 (吉緣)의 만남이 있다면, 나와 일본은 후자이다. “운명적”이란 것은 필연적인 것과 동연(同然)인바, 나에게 있어서 지극히 자연적으로, 또는 생리적으로 일본, 일본문화가 좋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개인과 일본과의 만남의 레슨은 유년시절부터 일찍이 시작된 것 같다. 모든 만남(사랑 미움도)은 추상적인 것이기 보다는 구상적인 것에서 싹이 트는 법이다. 우리 집에는 값진 가보(家寶)라 할 만한 골동품은 없었지만 할머님의 장롱에는 두 가지 추억이 슴배인 “보배”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아껴 쓰시던 단계 벼루(端硯)이고, 또 하나는 곤 색에 은회색 무늬가 디자인 돼 있는 일본제 넥타이였다. 그 넥타이는 일제식민지시기 지식인 (한방의이며, 선비)이었던 조부님과 친하게 사귀던 일본인 지식인 나카무리씨에게서 받은 선물이라 하신다. 넥타이는 우리 가족과 일본과 연결된 이야기(역사)의 심벌이었다. 어린 내게 있어서 그것은 처음 느낀 일본의 향기였다. 조모님과 백 조부모님들은 모두 일본식민지의 체험자였기 때문에 늘 일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인 (병사?)에게 처음으로 “미깡”(귤)을 선물로 받았던 일화, 당시 아는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던 우정의 에피소드를 얘기하시면서, 일본인은 전부다 악인(惡人)이 아니었다고 가르쳐주었다. 향기 그윽한 일본인의 이미지, 이는 당시 모택동시기 항일영화에 꼭 많이 등장하는 “바카야로” 를 연발하는 콧수염의 일본군인의 추한 이미지와 오버럽되면서 기묘한 엇갈림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모든 일본인은 나쁜 놈”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게 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적어도 “나쁜 일본인”중에 “좋은 일본인”도 있었다는 인식에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어린 나에게 일본인은 좋고도 나쁜 양이미지가 동시에 기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한 것일 것이다. 소학교시절 숙부의 서가에서 들춰낸 일본어판 인지 하는 잡지의 페이지를 번지면서 최초로 접하는 가나문자에서 나는 신비스러운 묘한 감각을 느꼈다. 한자도 아니고 우리 한글도 아닌 기묘한 생김새에서 미적(美的) 妙味를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 읽고 뜻을 내는가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안게 되었다. 중고교에 들어가자, 홍수같이 유입되는 일본영화, 애니메이션에 매혹되었다. (중국명은 ‘추적(追捕)’)의 다카쿠라켄(高倉健)이 맡은 남자주인공과, 나카노 요시코(中野良子)가 맡은 순정아가씨 마유미의 생머리의 표탕하는 美에 짐대하게 매료되었다. 잇따라 쇼오와(昭和)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 주연의 영화, 드라마에서 청초하고 순진무구한 여성미에 또 깊이 침혹되었다. 나는 속으로 주제넘게 야마구치 모모에와 똑같은 여성과 만나서 결혼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결국 40이 넘도록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 관한 서적, 소설도 읽게 되었으며 일본문화에 포로 된 고교생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학수험전년인 고교 2학년 때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나는 일본어가 좋아서 일 년도 안 되어 제법 숙달하고 마스터 하여 당시 유명한 동북사대의 일본문학과에 합격했다. 소학 때부터 “문학소년”으로서 문학이 좋아서 장내 작가나 학자로 되려는 꿈을 꾸고 있던 나는 대학 전공을 일본어과로 선택했던 것도, 생각하면 모종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때 수험 전에 지망대학 원서를 제출하는데 중국문학부, 조선문학부와 일본문학부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 망설이던 끝에 최종적으로 일본문학부를 동북사대 제일지망으로 택했다. “외국어를 아는 것은 또 하나의 文化를 아는 것이다”는 일본어 교사의 말씀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의 일어일문과 입학으로 나와 일본문화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는 일종의 “국내 유학”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어 교수님을 거의 일본문부성에서 파견되어 온 대하국문과 교수나 고교 국문교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일본인 교수님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일본문화를 접촉하고 섭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독특한 청결함, 깔끔하고 스머트한 몸매나 친절성.... 이런 것들에서 나는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항일영화에 익숙히 보아오던 콧수염에 바카야로를 외치는 조폭스러운 “왜놈”, “日本鬼子”의 이미지와는 전혀 운니의 차이였다. 조모님께서 들려주던 “좋은 일본인”의 이미지가 눈앞에 현실로 생신으로 나타난 셈이다. 일본어 반은 외국문학부에서 하나밖에 없었는데 전원 20명이었다. 급우는 동급생인 만 17세, 18세와 사회인에서 입학한 25세, 26세 정도의 ‘어른’들도 있었다. 그때는 문화대혁명후 회복한 대학수험제도라서 사회인도 많이 수용했던 것이다. 그 ‘어른’들은 나를 “小日本”(꼬마일본인)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나를 일본식 이름으로 “小金井(코가네이)”로 불렀는데, 나는 별 반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아 중국식으로 나를 부를 때 ‘小金’(꼬마김씨)라서 그 “金”씨에 유사한 ‘小金井’이란 일본성씨를 붙힌것 같다. 내가 반감하지 않는 이유는 이름이나 별명을 내가 부르는 게 아니라 타자가 부르는 他者用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르는 것은 나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한 그들의 自由이니까. ‘小金井’은 일본 근대 문호의 작품(나츠메소세키 아니면 누구인지 기억은 잘 안난다)중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 인물과 왜소한 체구인 나의 이미지를 오버럽 한 것일까? 나는 그때 이미 대단히 일본을 즐기는 일본애호가, 지금 식으로 말하면 ‘哈日族’(대만 젊은 작가가 창안해낸 명칭, 일본을 좋아하는 젊은이를 이르는 말)에 속했다. 1982년 경이니까 교과서문제로 일본과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상황 속에 반일감정이 유행했던 시기였다. 그것을 감안 하면 나의 “哈日”은 ‘이단’적이였다. 대학 4년 동안 일본 교수님들의 일본어 특훈을 통해 덕분으로 나는 오리지널 일본어를 구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학부도서관에 소장된 일본 직수입 도서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은 것은 내 생애의 큰 행운이었다. 그중에는 중국에서 공개 번역 출간되지 못한 세계명작, 사상서들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일본어로 그런 서적을 많이 탐독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일본서적은 정신의 식량으로 되어 배고픈 나의 정신세계를 채워주었으며, 나의 가치관, 세계관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일본 펜 벗들이 우송해주는 일본어책들을 통해서 일본 文化의 레슨은 쌓이기 시작했다. 1983년 인가 처음 읽은 동포문인 이어령 선생의 을 통해 일본에 대한 동경은 더 한층 중대되었다. 그리고 이어령선생에 대한 개인적 숭배의 싹도 트기 시작했다. 일본, 일본인 그리고 일본문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폭됨에 따라서 나는 왜 동양에서 그 작은 섬나라가 솔선하여 근대화에 성공했으며, 세계 경제, 문화의 대국이란 기적을 창조해낼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강렬히 매혹되어갔다. 나는 고교 때부터 싹텄던 동일한자문화권인 중, 일 ,한 3국의 문화비교분야에서 탐구를 할 결의를 남몰래 내렸다. 그래서 나는 미구한 장래에 일본유학을 노렸으며 중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포기 해버렸다. 대학 근무 6년후 일본유학의 찬스가 나에게 지구에 떨어진 어린왕자같이 나타났다. 재일 한국인 비교문화학자 김양기(金 兩基)교수님의 알선으로 도시샤(同志社)대학의 니이지마(新島)장학금을 운 좋게 획득하게 되어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늘에 별 따기”라는 니이지마 장학금은 내 운명을 바꾼 일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일본 땅에 발을 내 드릴 때부터 일본 녹차의 청향이 공항의 로비에 물씬 풍기던 일은 오늘도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있다. 중국 공항에는 중국요리의 기름 냄새가 나고 한국 공항에는 김치의 냄새가 나는 것은 그대로 3국 비교문화의 상징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처음인데도 어쩐지 낯익다”는 일본의 한국관광에 대한 광고용어가 유명하다. 이 말과 같이 처음 와보는 일본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했고 익숙한 고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항일영화에 나오는 잔혹하고 하품(下品)의 일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 가든 질서정연하고 깨끗하고 청결한 일본이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길어짐에 따라서 일본에서 지내는 삶이 오히려 중국내에서 보다 내 개인적으로 행복한 기분인 것은 나로서도 불가사이 했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이 심경을 토로하자 “그러세요” 하면서 미소를 지으면서도 표정의 이면에는 어딘가 석연치 못하다는 뜻이 담겨있는 듯 했다. 아마 그 친구들이 외국생활 경험이 없었던 탓으로 나의 이국생활감각에 대해서 미처 이해를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 뒤 프랑스에서 십여년동안 생활 해온 일본인은 나의 체험담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異文化체험이 있냐 없냐에 따라 이문화 이해 정도는 물론 그 생활자체에 대한 감각도 판이 한 양상을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생활이 일점의 불편 없이 다 완미한 것은 아니었다. 순풍 만범한 것도 아니었다. 타민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얕잡아 보거나 경제적 수준이 나린 국가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에 대해 차별시 하는 일본인도 주변에서 만났다. 속으로 기분 나빴으며, 특히 입국관리의 그런 노골적인 외국인 차별 직원과도 나는 패스포트를 집어 뿌리면서 싸운 적 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他文化이해의 절박성에 대해 더 깊이 몸과 피부로 느꼈으며 비교문화를 통한 상호문화이해, 인식의 중요성을 터득하기도 했다. 학문을 하고 표현을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학자, 작가, 오피니언)에 있어서 그 언론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사회, 일본은 그런 자유가 발달된 나라였다. 이 자유의 공간, 서로 간섭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분위기와 그 사회적, 학문적 자유의 바람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고  선렬한 자유로 와 닿았다. 대학원 연구공부와 함께 독서의 자유로운 세계. 그것이 나에게는 말 그대로 최고 지복(至福)의 자유였다. 자유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비교문화의 탐구는 박차를 가 할 수 있었다. “박차에 박차를 가한다” 라는 말과 같이 일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것, 따라서 중국과 한국에 관한 문제도 더 알아야 한다는 구지욕으로 나는 “탐욕” 하다시피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문화, 일본인론에 관한 연구에 도취된 동시에 福澤論吉, 內藤湖南, 水井荷風, 谷崎潤一郞, 涉澤龍彦, 坂口安語, 安部公房, 村上春樹, 梅原 猛, 中西進, 梅棹忠夫, 加藤周一, 鳥居龍藏...등의 책에 심취했다. 도시샤대학시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강연을 처음 청강하던 광경은 생애 망각할 수 없는 감동적인 한 광경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나는 도시샤 대학이 또한 우리 민족의 탁월한 문인을 배출한 모교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지용, 오상순, 그리고 윤동주, 이들의 족적을 따라 나는 도시샤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역시 여기서 나는 이들 선각자들과 또 다른 만남을 이룩했다. 28세 청년의 만용으로 나를 이들의 뒤를 이어 문화사에 남기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거창한 목표로 일을 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도시샤에서 공부하던 족적을 추적가하기도 하면서 또 세상이 모르는 “발견”도 하기도 했다. (특히 윤동주에 대한 나의 연구작업도 이때 싹이 텄다. 앞으로 윤동주 인물에 관한 다른 시각에서 밝히는 작업을 책으로 낼 예정이다.)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일본학계의 비교문화영역에서 보수적 체질을 느끼게 되었다. 즉 일본문화를 항상 서구와의 비교만을 통한 것으로 시도하는 편향성을 안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좋으나, 동일 한자문화권에서 유사한자끼리의 비교를 통하여 각국의 문화특징을 보다 정확히 석출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나는 이 비교원리를 자칭 “近色비교원리”로 이름 짓고 서양과의 비교보다도 같은 동색계열의 비교가 오히려 더 극명하게 그들의 차이점을 분석해 낼 수 있다고 여겼다. 일테면 “황색”이라면 “담황” “심황” “주황”.... 등 미묘한 차이를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인종, 문화상 비슷한 한중일의 비교가 더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이 원리에 따라 나는 나름대로 한중일 3국 비교문화론을 전개시켰다. 그리하여 비교문화론, 문명비평 등 집필과 강연이 일본에서 먹히게되었으며, 잇따라 중국과 한국에도 파급되어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많은 팬의 옹호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속속 여러 편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면서 동아시아의 주목을 받으며 조선족의 글쓰기의 가능성을 알리고자 했던 나의 꿈을 이룬 셈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문화 활동을 두고 같은 조선족의 어떤 연변 지식인이 나를 “매국노” “친일파”로 격렬히 왜곡중상하기도 했다. 나에게 팬들은 반론을 안 한다고 야단법석이었으나, 나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들이 나의 국경을 넘어선 모스코폴지탄적인 사상경계나 월경하는 글쓰기의 진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론을 해도 그들이 이해할 수 없으며 가치 없는 내부소모전으로 되기 십상이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연변의 어떤 학자가 나를 “매국노”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세월에 무슨 친일파고 매국노고 야단인가? 어디에 매국노가 있나? 외국에 가서 자유롭게 살고 하는 시대에, 거 참 나 시골 할매 보담 생각이 짧은 학자도 있단 말이냐?!” 그러시면서 어머님을 웃으셨다. “괜히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니 하고픈대로 하라. 사내가 작게 태어나도 맘은 넓어야 한다. 내 보건데 네 글이 바른 소릴 하던데 뭐가 나쁘단 말이냐?” 무식자 어머님 역시 나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나의 월경적 문화적 코스모폴리탄적 사상에 이해 해 달라고는 하고 싶진 않다. 사람은 다 자신의 수준과 시야에서 말을 하기 나름이니까. 나는 자신을 “친일파”를 넘어선 “애일가”, 아니 “知日家” 로 본다. 정치이념을 넘어서 생리적으로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그리고 일본도 중국과 한국같이 문화적 고향과 조국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인이라 생각한다. 나는 타인에게 일본을 무리하게 좋아하라, 사랑하라 권유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단 타자와 비교에서 타자의 결함을 비웃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결함을 끄집어내고 비판하여 자기성찰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이라면 사탕발린 찬미가를 부를게 아니라 앎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이야기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애초에도 지금도 나의 글쓰기를 이룬 큰 기둥의 하나이다. 따라서 자기와 타자, 타문화의 배척, 배제보다는 나는 상호의 대화, 이해와 융합을 주장하는 인간이다. 21세기는 그러한 대화와 공존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기실 일본에서 내가 발견한 일본문화의 경계성, 복합성 등에는 일본형의 공존, 융합의 미학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을 과거의 역사체험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비하하며 경멸하기는 쉬우나, 그보다도 생산적 인 것은 그들을 이해하고 일본문화 속에 숨겨진 장점들을 찾아내서 연구, 습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본의 외국학습에 대한 방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문화, 문명을 학습하는 학습의 우등생적인 체질은 우리 자신에게도 유리하고, 상호인식에도 유익하며 공존공생의 기반을 구축해 주는 구체적 작업이 된다. 앞으로도 나는 체질적으로 맞는 일본문화를 한국, 중국문화와 함께 계속하여 좋아할 것이다. 좋아하기에 나는 그에 대한 결함, 약점을 비판, 성찰하는 연구, 비평의 글쓰기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美)의 나라 일본, 문(文)의 나라 중국, 그리고 정(情)의 나라 한국- 3개의 조국과 문화의 고향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나는 이 행복을 글쓰기로 향수하면서 만끽하고 있다. 간략하게 쓴다던 것이 또 길어졌다. 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문학연구자이며 일본을 사랑한 미국학자 도널드 킨(Donald Keene)의 말로서 이글을 접으련다. “나와 일본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 기묘한 운명에, 나는 장래에도 계속 감사해나갈 것이라는 것만은 지금 너무 명백히 잘 알고 있다.”  
107    5-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댓글:  조회:6317  추천:26  2013-07-21
제5장 월경ㆍ자유ㆍ비판 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아침 식사는 북경의 레스토랑에서 우롱차에다 기름 빵을 먹는다. 그리고 정오에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서울 시내로 달려가서 삼계탕에 들큰한 동동주 한 사발을, 저녁은 어느새 도쿄에 날아와서 신선한 생선회에 기린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런 3국의 동시 체험이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된 지도 오래다. 도쿄의 아담한 선술집에 홀로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어떤 기묘한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일까 하는 자문자답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1998년 6월 나의 장남 철야가 태어났을 때 중국에 계신 어머님을 초청하여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3개월의 간의 일본 체류 기간에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기만하다. “얘야, 넌 꿈속에서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하는 거냐?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지껄이지, 또 이따금 우리말을 하다가도 일본말로 중얼거리기도 하니 원,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어머니와 함께 나도 무심결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자신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꿈에서까지 세 나라 말을 쓰다 보니 사람까지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게 도대체 뭔가? 나에게는 이런 ‘혼란상태’가 오히려 하나의 낙이다. 나는 스스로 자신을 일종의 ‘분열 인간’이라고 부른다. 내가 감히 ‘분열인간’이라고 자랑삼아 큰소리칠 수 있는 까닭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 항로와 밀착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국어와 중국어을 동시에 구사하며 2중 언어의 문화생활을 해온 내가 20대가 끝나는 무렵에 일본으로 유학 와 일본 문화를 피부로 느끼며 생활한지도 벌써 20년이 된다. 그리고 또 모국인 한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모국 문화를 거듭거듭 체험해 왔다. 게다가 해마다 중국에는 두세 번꼴로 돌아가서 현지 생활을 느끼고 온다. 내 가슴속에는 중국 문화와 일본 문화, 그리고 한국 문화라는 동양 세 나라의 문화에다 조선족 문화까지 비빔밥같이 온통 엉키고 뒤섞여 내 입에는 가장 맛있는 문화 비빔밥이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고 복합화 시키는 체험 없이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지향하는 것은 허위적인 슬로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벌써 50여년 전에 미국의 사회학자 E, V. 스통키스가 그의 저서 에서 경계인(境界人)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경계인이라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복수의 집단에 소속되긴 하나 어느 한 집단에도 완전히 빠져 버리지 않으며 그 귀속이 분명하지 않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경계선, 이 사회와 저 사회의 경계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최근 문화인류학에서 빈번하게 제기되는 디아스포라가 이에 해당된다. 원래 유태인이 이산이라는 뜻에서 온 것인데, 자기 문화에도 이문화에도 소속되지 않고 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창조의 에너지로 삼는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동과 이산을 뜻하던 네거티브 개념이 국제화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없이 소중한 포지티브 개념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타향에서 사는 사람, 월경 인간은 어둡고 슬프고 가련하다는 이미지가 다분히 농후하며, 향수에 젖어 망향의 안타까움으로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가는 존재쯤으로 이해하고 있다. 가요만 보아도 타향살이와 고향 떠나 사는 사람의 슬픔과 망향의 절절한 감정을 담은 노래가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문학 작품에도 이 같은 테마의 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늘 보아 오던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는 타향에서 온 경계 인간이나 월경 인간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짙다. 내 친구 중에 해외에서 장기간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한국에 간 중국인 가족이 있는데, 아들이 중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에게 심한 차별을 받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한국어를 잘 모른다고 욕을 하고 따돌려 아들이 등교 공포증에 걸렸다는 이야기였다. 한국 내에 살고 있는 이국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중국 교포에 대한 멸시와 학대는 한두 마디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족은 한국에서는 경계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껏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국 문화와 중국말에 익숙해 살다가 말로만 들어서 알고 있던 한국 문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심각한 갭이 생기며 커다란 컬쳐 쇼크를 받는다. 그러나 월경 인간을 못마땅하게 보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엾기만 하다. 월경 인간은 사실 네커티브한 이미지와는 달리 포지티브하게 문화 모험을 감행하는 시대의 용사라고 할 수 있다. 둘 또는 그 이상 복수의 문화와 사회에 소속하면서 그 모두와 거리를 둔 채 여러 개의 가치관을 갖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의 이들에게는 있다. 나 같은 월경 인간의 눈에는 오히려 하나의 문화에 푹 빠져 그 테두리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같이 하나의 사고밖에 할 수 없는 단일 문화의 인간이 안 되어 보인다. 특히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단일 민족과 단일 문화를 긍지로 삼고 있는 한국인의 단일한 발상, 단일한 스케일, 단일한 스타일은 너무 편협하고 근시안적이고 촌스럽기만 하다. 늘 이런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해 온 한국인은 여기에 푹 절어 해외에 나가지 않고는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는 세계화 국제화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는데, ‘국제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당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우리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어 그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에게 한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깨지는 날 국제화도 성큼 다가설 테지만 지금의 민족의식, 나라의식, 우리나라 최고라는 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터이다. 한국의 겉모습을 보면 지극히 국제적 색체를 띠고 있지만, 그 내실은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다. 겉치레만 국제화지 그 껍질을 벗기면 온통 국수주의뿐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특히 과격하다는 정평이 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국수주의자, 보수주의자가 많기 때문이다. 편협한 나라 사랑, 애국심, 우리나라최고라는 생각에서 조금이라도 깨어나 광대한 세계 지향의 안목을 키우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내가 말하는 월경 인간은 꼭 해외에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월경 인간에는 경계를 넘는다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국경은 지구위에 이데올로기나 체제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계선에 불과하다. 사실 이런 경계선은 국경 말고도 지구 전체에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지방별, 직업별, 성별, 학력별, 연령별, 계급별, 민족별로 수많은 경계선이 한국 사회에 엄연히 살아 있다. 이런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인간이 되면 그 역시 월경 인간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한국 남자들이 가장 꺼리는 집안일을 하며 여자로, 주부로 변신해 주부의 경계선을 넘어본다. 남녀 차별의 틀을 깨보라. 그럼 당신도 당당한 주부(主夫)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경상도, 전라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어울려서 지내보라. 지역 경계선을 넘은 월경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모든 차별과 고정 관념의 경계를 초월한 월경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국내 월경인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국내 월경 인간과 해외 월경 인간이 많아지는 것이 바로 세계화와 국제화로 달리는 첩경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국가 의식이나 민족의식에서 벗어나 ‘무국적인’ ‘세계인’ ‘지구촌민’의 의식을 키워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이의 공동 발전만이 인류의 행복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도 월경인은 즐겁다.
106    4-6. 한국인과 조선족의 문화갈등 해결 방법 댓글:  조회:6469  추천:19  2013-07-14
6. 한국인과 조선족의 문화갈등 해결 방법 “신조선족”이 국내 대도시 공간, 특히 海外로의 월경은 異文化와의 빈번한 만남을 의미한다. 異文化와의 만남은 또한 異文化에서 오는 “異文化偏見,偏向”이 반드시 동반되는 법이다. 알기 쉽게 실례를 들어 얘기하면 조선족이 고국(조국)인 한국에 대거 진출하여 노동력 수출자로서 살면서 현지 한국인과의 갈등, 한국인으로부터 받는 편견, 차별, 멸시 등은 같은 겨레에 대한 일종의 “異文化偏見, 偏向”인 것이다. 이럴 경우, 하나 망각해서는 안 될 특기의 사항이 있다. 즉 “한국”대 “조선족”은 기실 “異文化”대 異文化“의 조우인 것이다. 서로 100년의 各自生活圈에서 獨自的으로 形成된 思考樣式이나 文化자체가 상당히 이질성을 띠고 있었다. ”한겨레“ ”핏줄“이란 막연한 동질감, 유대는 이 異文化의 허들을 넘어서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異文化의 허들과 담 벽은 높고도 경고하다. 따라서 異文化에 대한 무지, 몰리해로 인해 처음부터 자기문화 우위의 시각에 서서 異文化를 폄하, 경멸하는 태도는 매우 강한 경향성으로 노정된다. 이문화에 대한 타 집단에 대한 편견, 편향을 “오리엔탈리즘”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엔트”는 “서양”에서 바라본 “동양(동방)”을 의미한다. 팔레스티나 출신의 미국 비교문학가, 문화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said Edward W)가 1978년 출간한 (Orientalism)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문화를 표상할수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을 책에서 던진다. 그의 물음은 지구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인간, 문건, 문화, 경제의 직접 간접적 교류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 인류사회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발견”은 지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이드는 여직껏 단순히 을 의미했던 오리엔탈리즘을 “과이라 칭해지는 것 사이에 설정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별을 바탕으로 한 사고방식”이라고 재정의 한다. 여기서 “오리엔트”는 협의적으로는 중동지역을 칭하지만 광의적으로는 지역과 상관없이 사용되며 그것에 동반되는 또는 “구종주국”대 “구식민지” “선진국”대 “발전도상국”이라는 양자관계에 있어서 전자가 후자에 대한 잠재적 우월의식이나 편견, 편향을 가리킨다. 사이드는 이 책에서 푸코의 언설적 개념을 원용하여 서양지식인, 서양인이 비서양 지역에 대해 산출시킨 “후진성, 정체성, 적대성, 비합리성..... ”등 마이너스적 표상으로 획일하게 맞추어 평가절하 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가 우월주의에 안주한 서양이 비 서양에 대한 획일적인 편견, 평향 그것이었다. 사이드는 그 후에도 서양지식인의 같은 맥락의 잠재된, 편견 설을 대위법적 해독(對位法的解讀)으로 알려진 (1993)에서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늘 현대 세계사상을 리드해왔다. 사이드는 이문화의 월경적 글쓰기를 구사한 경계를 넘은 위대한 지식인으로서 세계정신사에 남을 것이다. 물론 異文化,他者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 완벽한 표상이 이론적으로 至難이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 편향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상호이해, 존중의 대안이 열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오리엔탈이즘”은 서양, 서양인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 동양내부, 즉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서양이 우리에게 행사했던 동류의 “오리엔탈리즘”이 엄연히 존재해왔으며 또 지금도 농후한 색채로 우리의 교류를 먹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최근 문화인류학자들은 “역광(逆光)의 오리엔탈리즘” (아오키 타모츠)으로 지칭한다. 필자는 그것을 원용하여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일본이 과거 대만을 위시로 조선반도, 만주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행사한 것은 그 슬로건이나 발상이 그 얼마나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피식민지 민족에게 남긴 상처, 민족의 드라우마와 함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고루하고 후발적인 정체성, 비합리성, 우매성, 미개성...”등 일본지식인과 대중의 표상으로 점 찍혔던 “조선”과 “지나(중국)”를 그들은 그대로 서양인이 동양인에게 행사했던 “오리엔탈리즘”을 답습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인과 조선족의 만남은 또 비슷한 편견, 편향으로 노정되었는데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후발성, 미개성, 비위생성...”등 일본인이 과거 조선인에게 표상했던 같은 표상으로 “조선족”을 폄하,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과 조선족의 갈등은 사실 이문화에 대한 몰이해, 편견의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의 팩터적 비중이 큰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인에게 행사하는 이문화 편격 역시 똑같은 “역발적 오리엔타리즘”이란 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인에 대한 조선족의 표상은 대개 “깍쟁이, 인심 박하고 인정사정없다. 같은 겨레, 민족인데도 정을 느낄 수 없다...”와 같은 부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 것은 결국 한국인에게 향해진 조선족의 역발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부의 김용택교수의 담론에 의하면 조선어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해”란 제목의 글을 쓰게 한 결과 2/3학생이 한국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2009년 9월) 10년전 조선족이 한국의 차별대우 속에서 “옛날 일본왜놈보다 더 고약한 한국놈”하는 표상이 있었는데 필자는 에서 그 표상에 대해 이문화 이해의 시각에서 비판은 가창력이 있다. 비판하기는 쉬우나 이해하기는 어려울까? 조선족이 이제 세계의 이문화 지역공간으로 침투하면서 비판도 좋지만 안일한 비판을 속으로 삭혀 하나의 이문화이해의 “청명한 청주”로서 걸러내는 방법도 습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방법이다. “역발적 오리엔탈리즘”을 “超克하는 方法”으로 필자는 한국인과 조선족은 상호인식에서 同一性, 같은 民族-겨레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 같은 핏줄이란 안일한 관념에 안주하여 모종의 “응석부리기”로 조선족은 한국에 대한 기대가 지대했다. 기대가 큰 만큼 돌려받는 失望도 큰 법이다. “통일 민족, 겨레”에서 되돌아오는 컬쳐쇼크도 컸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일한 인식에서 오는 “응석부리기”는 다시금 “공격하기” 또는 “반발하기”로 전환된다. 한국인측도 마찬가지다. 반세기, 백년이나 이산돼 중국에서 살아온 동일민족, 겨레의 2,3세를 안일하게 여전히 “동포”,“교포”라고 생각하여 상대해오다가 이질성 때문에 갈등을 느끼고 차별로 편향화 되어버리는 성향이 강하다. 한국인의 혈연지역주의적 사고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까지 “한국인”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작년 한국에서 초청강연을 했을 때 주최 측이 필자에 대한 연사소개를 “김문학선생님은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교수입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장에서 “한국인 교수가 아니라. 재일 조선족 출신입니다.” 라고 소개자의 표현을 정정해주었다. 조선족은 중국에 있을 때보다도 오히려 한국이란 모국, “同一民族”이라고 인식했던 한국인과 직접적 접촉을 통하여 자기 동일 지속성, 즉 아이덴티티를 “중국조선족”으로 다시 귀추 하고자 한다. 그 사실을 “감자”라는 식물을 동원하여 관찰하기로 하자. 소년시절에는 필자의 할머니가 가꾸던 채마밭에서 감자를 캐던 먼 기억을 되살려 본다. 할머니의 감자 농사는 진정 “석과누누(碩果累累)”라는 四字成語로 표현할 만큼 언제나 풍작이었다. 그래서 감자수확 철이면 할머니를 도와 감자 캐는 일이 즐거웠다. 가지 과의 다년초요 塊狀의 지하경이 감자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크고 작은 감자알로 “주렁주렁”달려있었다. 그런데 지상경에는 잎이 자라고 꽃이 피는데 꽃에서 감자열매가 열린다. 청포도 알만한 연두색 색깔에다가 익으면 황금빛에 가까운 황금열매로 변하는데 그 맛은 좀 떫은 감미에 달콤한 맛이어서 별맛이었다. 지하괴상의 감자와는 同根이지만 이 청포도알 형태의 열매는 모양도 맛도 전연 이질적이다. 말 그대로 “同根異果”의 양상이다. 필자는 이 감자와 감자의 지상경에 열린 同根異果의 異質性으로 한국인 “감자”에서 열린 조선족의 “청포도열매”로 인식하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고 본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이렇게 이미 “우리”로 이름 짓는 “民族”은 엄연한 “他者”로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民族”을 바라보는 정의의 기준은 많이 변하고 있다. 사실 “民族”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창조된 단어로서 동아시아에서 오늘날 “민족”이 전파 수용되어 정착된 것이다. 영어에는“民族(민족)”에 완전히 상당한 단어는 없고 people, nation, ethnicgroup, ethnics 등과 문맥에 의해 나뉘어 사용된다. 현재 세계에는 191개 국가가 존재하며 민족은 4000-5000종, 언어는 약 7000종 존재한다는 통계가 있다. 민족이란 보통 일정한 양식화된 민족문화라고 불리는 文化를 共有한 인간의 집단을 말한다. 民族을 인접하는 他民族과의 상대적 독립성을 문화인류학에서는 지금까지 (1)객관적 기준 (2)주관적 기준 (3)객관적 기준+주관적 기준 (4)3세대 경과설이란 이 4개중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었다. 좀 더 전개하면 (1)의 경우에는 언어, 종교, 예술 등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문화를 공유함에 포인트를 둘 것이다. (2)의 기준은 그 집단의 성원들의 귀속의식, 정체성 등 아이덴티티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3)은 (1)과 (2)를 통합시키는 정의 법 (4)는 한 집단의 적어도 3세대이상의 지속성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조선족은 이미 4세 5세까지 왔으므로 엄연히 하나의 “民族”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전까지 만해도 “민족”은 인류학에서 고정된 객관실체로서 포착하는 사고가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을 고정불변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고착화시키고 변모, 변용하는 그 내실을 외면해왔다. 또한 고정된 “민족”관념은 내셜내리즘에 이용당하는 면이 컸던 것이다. 이 같은 폐단을 간파한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은 “민족”에 대한 재정의의 필요성을 감지했던 것이다. 캐나다의 우크라이나계 사회학자 lsajiw. w. w.(이사제프)는 민족 집단을 27종의 定義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민족 집단의 객관성 속성 중 제1위가 지리적 출자 또는 공통적 조상을 들고 있다. 그리고 언어는 제5위로 허락되는데 우리의 상식에서 좀 일탈된다. 특히 아이덴티티(정체성)인 민족의 중요한 팩터인데 제6위에 머물러 있다. 민족에 대한 연구는 “民族學 ”이라고도 자칭하는데 문화인류학 연구에서도 주요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현재 “민족”은 고정된 정태(靜態)적인 것 이 아니라 늘 유동하고 있는 動態的프로세스속에서 사고해야 할 실체라고 인식하고 있다. 어떤 민족의 특징이라고 보이는 것도 그 민족내부에서는 지역 차이에 의해 농담(濃淡)이 생기며 계층차도 보인다. 민족주의 역시, 어떤 민족이 자신이 민족문화의 중심부분을 자기 칭찬함으로써 민족단합에 이용하면서 때로는 그것이 거세찬 사회운동으로 편항 되기도 한다. (아야베츠네오2006) 이러한 “민족”의 변천의 추세에서 맞추어 보아도 한국인과 조선족의 그 “民族”동일성의 內實은 이미 분화되어 상당히 이질적 “민족”으로, “他者”로 변모를 이른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질성을 인식하는 것은 分裂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갈등, 이문화 갭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찾는 길을 의미한다. 요컨대 한국과 조선족이 안이한 “동일민족”의 스테레오잎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상대를 서로 이질 된 “他者”로서 인식하고 바라보는 새로운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신을 가장 아는 것도 아마 자기 자신일 것이며, 그러나 자신이 가장 보아낼 수 없는 것 역시 자기이다. 그러므로 이질 된 가치관과 문화로 “우리들”이라 불리 우는 “他者”를 인식함으로써 자기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의 긴장감이 풀리고 편안해지면서 상호인식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타자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105    4-5.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댓글:  조회:5818  추천:37  2013-07-03
5.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필자는 2006-08년 사이이란 저작을 집필 하면서 중국 고대로부터 현재까지의 “비적”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다수 섭렵했다. 중국 “正統”사회라는 표면의 사회 외에 裏面에는 또 하나의 “비정통”사회로서의 인간 층이 중국사에 존재해 왔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비정통”이라 일컬어지는 良面의 인간 층, 즉 正統社會의 表面의 인간 층의 대극에 존재한 그들이야 말로 表面인간층을 뒤엎고 새로운 正統사회의 주인으로 되는 중국사회의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 구조를 이룬 중대한 팩터가 곧 “비적원리”임을 깨달았다. 물론 “비적원리”라는 용어는 필자의 조어이다. 중국 사회를 지배해온 수많은 원리 중에서 우리가 홀시했거나 간과했던 덧이 이 “비적원리”였다. 흔히 중국을 지배한 유연한 원리로 “유교원리”로 포착하지만, 그것을 지배계급이나 위정자의 장식물로서의 典雅한 간판이며, 이 이면에 반거해 있는 것은 어느 조대나 공포 스러운 “비적원리”였던 것이다. 100년전인 1900년대 초기 신해혁명 1911년을 거쳐 1949년 신중국이 설립될 때까지 중국역사에서도 비적이 창궐의 극성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중국근대사에서는 흔히 “혁명사”, “반제, 반봉건, 반식지투쟁사”로 만 기술에 편향하면서 이시기의 비적, 비밀결사, 유민(遊民)의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위정자들은 의도적으로 이들에 대한 기술을 은폐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에는 중국의 정통적인 혁명과 이들의 밀접한 관계성을 되도록 회피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서구나 일본의 근대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1911년의 전후의 백년전 중국은 “그대로 거대한 비적의 공동체(4억의 무법체)”이므로 “이시기의 비적 연구에 따라 중국의 국민성이 규명 될 수 있다” 라고 단언한다. 근대 중국의 裏 사회의 주종을 이룬 비적을 다각적 시각으로 해부한 훌륭한 노작이 있다. 영국학자 Philp Richard Billingsley의 (1988년간행)사회학자인 저자는 근대 중국의 귀중한 사료를 구사하여 중국의 비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참신한 시점으로 근대중국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 농민들은 생활이 궁핍해지면 왕왕 비적으로 전향하는 역사 룰을 지닌다. 전설적 도적이었던 도척(盜跖)은 비적의 “수호신”이었으며 도교의 유토피아 사상 중에도 분명히 무법자와 공존이 혼효되어있다. 그러므로 중국사에서 주기적으로 왕조의 흥망성쇠가 거듭해온 배경에는 모택동이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다” 라고 지적 한 것 같이, 농민의 반란이 규칙적으로 반복된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이 역대의 농민반란, 비적원리를 스스로 중국을 구제하는 방침으로 삼았다. 문약한 근대 중국 지식인의 “사대부원리士大夫原理”에 반기를 든 모택동의 폭력적이고도 획기적인 혁명방침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농촌의 최하층 유민, 무산자, 룸펜(모택동 자신의 말대로 병사, 비적, 도둑, 걸인, 매춘부)들에게는 투쟁력이 왕성하므로 그들을 교육, 조직해 중국혁명의 주력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거듭 고백하듯이 자신은 “녹림대학(綠林大學)” 졸업생이며 중국 문제의 해결은 “양산박 영웅을 배우는 것”이었다. 을 애독한 모택동은 양산박녹림대학원리의 충실한 실천자였다. 문화대혁명의 원리는 사실“계급투쟁” “조반유리(造反有理)”의 간판을 건 폭력원리(비적원리)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1910년대의 중국의 신문, 잡지를 통해 내륙부에서 비적으로 인한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자의 잠언대로 “법의 숫자가 증폭되는 만큼 도적의 숫자가 늘어난다” 라는 상태였다. 1930년 비적의 총 숫자는 적게 치고서도 2000만에 달했다고 朱新繁의 글이 전한다. 신해혁명후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중국 신문은 중국을 “民國”이라 칭하는 대신 “匪國”이라 야유한다. “민국이 시작된 무렵 비적이 안 나타난 곳이 없었으며 비적이 소란피우지 않은 해가 없었다” 라고 載玄之는 그의 저서 에서 술회한다. 이런 비적, 의적은 그 신비성으로 인해 근대 중국 지식인, 문인사회에도 매료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무협소설, 같은 의적 문예의 계보가 중국 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왕왕히 비적을 영웅시 했던 것이며, 비적의 심정에 본능적인 이해를 표시하기도 했다. 일종 비적집단의 형식인 “비밀결사”가 근대 중국 혁명과 밀접히 연관된 것은 근대 중국사의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黃建遠의 에 따르면, 청말 민초시기 天地會, 靑帮,紅帮 등 폭력적 비밀결사가 전국각지에 대두하며 지배층까지 영향력이 미친다. 민국의 총통이나 총리로부터 군, 경찰, 금융, 상공계, 매스컴, 문예계, 서비스업, 산업계 및 최하층 쿠리(苦力)까지 침투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손문의 신해혁명 자금은 일본의 지원 외에도 洪門天地會에 속한 비밀결사가 致公當의 지원이 지대했으며, 손문 본인 역시 하와이 치공당 당주이기도 했다. 장개석 역시 상해 靑帮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중국 뒷거리를 장악한 청방의 두목 황금영의 제자인 장개석은 1920년대 주가후정에 실패해 실의에 빠졌을 때 황금영의 추천으로 손문에게 기대게 된다. 장개석은 그 뒤 총통이 되었어도 청방과 늘 동맹관계를 보전하고 있었다. 민국의 대군벌인 吳佩孚, 張宗昌 역시 청․홍방의 멤버이기도 했으며 경극 스타 梅蘭芳, 周信帮 도 황금영문하생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1927년 지식인형의 도시점령방침을 포기하고 강서의 비적 文才등과 동맹을 결성하여 정강산 근거지를 개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택동의 혁명이념은 마르크스주의와 그 자신의 혁명원리인 비적원리를 근대식 투쟁원리로 승화시킨 것이며, 이것으로 그가 중국 해방에 성공한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이며 독자적인 “혁명원리”를 발안한 희대의 혁명가로서 손색이 없는 근대 거물이다. 근대 중국인식에서 망각했거나 누락한 것은 이 같은 “유교원리”아래에 연면히 맥을 잇고 있고 있는 비적원리를 바탕으로 한 폭력, 투쟁원리이다. 그것을 신사와 유민이 공동으로 중국사회를 이룬 것과 같은 이치로, 중국 지배의 또 하나의 굵직한 원리이다. 그리고 중국 국민성의 하나의 구성구분이기도 하며, 근대 중국이 오히려 화려한 유교간판을 걸고 행해진 지배원리는 그 국민성의 뒷받침으로 가능해진 “폭력원리”이다.
104    4-4.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댓글:  조회:5545  추천:43  2013-06-26
4.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식민지 체험은 피식민 민족에게 기나긴 어둠의 회한을 낳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만큼 내면의 양태로 풀기 어려운 숙제들을 남기기도 한다. 필자가 근대 아시아를 재조명 하는 동기의 하나가 이런 풀지 못한 숙제를 풀어보자는 소박한 의도에서 이기도 하다.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친일”은 “반일”의 음지에 있는, 우리 민족의 치욕이자 통한의 주제로서 항상 우리의 가슴을 비분하게 만든다. 이렇듯 우리 민족 사회의 덧나는 상처처럼 괴롭히는 “친일파”문제, 그에 대한 처우 문제에 대해 필자는 근대 100여년을 읽으면서 다시금 재고하게 되었다. “친일파=매국노”, “친일파를 처벌주고 척결해야 된다” 라는 주장이 지금까지 성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의식 주장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일 수 있는가?, 과거 역사의 진실에 얼마나 접근한 발산인가? 하는 반추와 반문조차 제기 되지 않은 채 무조건 맹종하고 있다. 필자가 근대사를 읽으면서 재 발전되는 역사사실(史實)에서 “친일”행위 보다도 오히려 “친일”에 대한 인식, 반성에 대한 현대인의 문제도 문제 삼아 타당하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의 그 건물을 기억에서 영구히 지우려고 인공적으로 철폐하는 한편, 독립기념관을 세워 일제의 만행을 또 영구히 기억하려는 단순한 모순. 누구나 이 모순을 지적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이 모순적 사실에서 현대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의 “모순”을 읽는 듯 했다. “친일파=매국노”의 등식의 대극에 있는 우리의 최대의 민족 영웅 안중근 의사. 그의 양상은 “친일파”의 모습을 다시 조명하는 거울 내지, 지금까지 미처 하지 못한 “발견”을 하게 되리라고 필자는 믿는다. 필자는 “국제안중근 기념협회” 일본지회장으로 수년 동안 그의 사상을 비롯해 이등박문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 안중근이 왜 우리에겐 위대한 영웅인가? 이등박문은 1905년-1909년 일제의 대표로 한국정부에 임한 침략자로서, 한국의 최대의 침략자의 원흉, 상징이었다. 따라서 이등 저격, 말살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 반일을 상징한다. 필자는 또 이런 “발견”을 했다. 안의사가 그렇게도 많은 한국독립 투쟁사의 김구, 안창호, 박은식, 여운영, 이승만, 서재필 등 쟁쟁한 인물을 누르고 최정상의 영웅지위를 획득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한국 근대사에 답안이 있다. 19세기 후반, 말기와 20세기 한국 식민지 시기 1945년까지 통 털어 개화파와 보수파, 저항파와 친중파, 친러파 및 친일파가 역동의 드라마를 펼쳤다. 특히 3.1운동의 민족 운동가, 독립운동가 들이 그 후에는 일본제국 통치에 적극 내지 소극적 협력, 이른바 “부일협력”으로 전락 해버린다. 그래서 김옥균으로부터 김성수, 이승만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운동가 들에게는 기필코 “더럽힌 과거”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와 지극히 대조적인 것이 바로 안중근이다. 그가 우선 일제 침략의 세계사인 이등을 처단한 것이고, 이는 최대의 독립의 심벌적 행동이었으며, 또 하나는 그가 불과 5개월의 짧은 투옥생활을 거쳐 깨끗하게 순국한 것이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쟁쟁한 독립운동가 들에게 있는 “더럽힌” 과거 같은 것이 일말도 없다. 그러므로 안중근이 근대 반일독립의 최고의 영웅이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리라.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사상가였다. 이 의미는 지대하다. 그런데 냉철히 말해, 그렇게 아름다운 “동양평화론”이 권총 탄환의 형태로 밖에 나타나지 못한 것이 안중근에게도, 이등에게도, 그리고 모두 조선인과 일본인에게도 비극이었다. (김기협《망국의 역사 조선을 말하다》) 그리고 문제는 “친일파”가 왜 “친일파”로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상황, 이유를 따져야 한다. 1860년대 이후 명치유신을 거친 근대 일본과 양무운동을 겪은 청국에 뒤진 조선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대에 미처 따라가지 못해 스스로 많은 내부 문제를 내포하게 만든다. 또한 조선 조정의 재정은 일본이나 청국 조정에 비해 취약했으며 자신들이 스스로 의도했던 개혁도 일본이나 러시아 또는 청국에 의지해야 할 만큼 역량이 빈약했던 절박성을 알고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가 “친일파”로 된 데는 그 역사적 배경에서 오는 심각한 번뇌를 안고 있었다. 이를 외면하고 단순히 “친일파=매국노”로 지탄해도 의미가 없다. 더욱이 동일맥락에서 한일 병합 이후 이 문제는 더 두드러진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상해에서 망명 독립가들이 만든 임시정부는 불행하게 국제 열강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일제의 통치 또한 갱연 양면으로 교묘해져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적응시켜 “친일파”로 전향해야 한다. 당시 “친일”은 숱한 독립운동가, 지식인 엘리트들의 생존방식이었다. 3.1독립선언문의 기초자 최남선이 그랬고 근대문학의 대부 춘원 이광수, 그리고 백철, 김동리, 모윤숙, 노천명, 이병도 역시 그랬다. 왜 독립운동가 들이 자치운동, 최종적으로 전쟁 시기에 대일 협력자로 전향해야 했을까?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들로서 최고의 국제적 시야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들이 한 부일협력을 무엇을 의미할까? 이광수가 훗날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는 변언에 그 누구도 외면하고 그 말의 진의를 부정하기만 한다. 사실 이 한마디에 이광수 같은 당대 최고 엘리트들의 “열길 물속”의 속궁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친일파”를 매국노로 이제 추세가 된 우리가 비판, 지탄함은 너무도 쉽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 추세의 현재의 심정을 그대로 역사의 과거에 투영시켜 버린 그 우(愚)가 남을 뿐이다. 인간의 문화사가 입증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은 현실과 타협하여 적응시키는 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그 어떤 민족적 이상주의나 고상한 이념만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존할 줄 모르고 어찌 다시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역사가 거울이고, 앞으로의 지침서라 외치기를 즐기는데, 그 시대의 역사 인물들이 어떻게 현실과 격투하여 적응하면서 지혜롭게 살아왔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지금도 “친일파”의 무덤에는 차디찬 겨울의 엄동설한이 맴돌며, 무덤에 침 뱉고 채찍으로 타매하기에 여념이 없다. 실로 슬픈 일이다. 이제 역사에 대해 좀 더 현명하고 이분법적(二分法的) 편협한 인식에서 탈피하는 날, 필자는 믿는다. 그러면 얼어붙은 삭막한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올 것이라고. 그리고 진달래가 만발 할 것이라고.  
103    4-3. 魯迅과 李光洙 댓글:  조회:5578  추천:20  2013-06-17
4. 魯迅과 李光洙 노신과 동일문맥에서 비견되는 조선의 인물은 조선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春園 李光洙이다. 일본 유학 경험, 자국국민성 비판과 개조사상, 그리고 세계적인 월경의 시야 등 측면에서 노신보다 11세 연하인 이광수는 매우 유사한 相似性을 띄고 있다. 단지 死後 최고의 위대한 文學家의 표상으로 낙인 된 노신에 비해,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최고봉인 반면 민족의 반역자의 대명사인 “친일문학의 거두”라는 치욕스런 렛텔이 붙여있는 것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식민지로 전략된 조선의 비극 자체가 李光洙의 표상에 투영된 것으로 인식할 때 중국은 겨우 일제의 식민지전략까지는 면했지만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 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 형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 있다.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노신은 1920년 梁白畢,柳樹人및 申彦後, 李陸史등 文人에 의해 속속 조선에 소개되면서 이광수에게 수용된다. 그는 1936년 일본의 「개조」잡지에 “조선의 阿鬼 ”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萬爺의 死」를 집필하는데 「아Q정전」의 영향을 받았다. 훗날 이광수는 친하게 지낸 후배 문인 金素雲에게 “나는 아Q와 같이 바보다”고 고백, 자신을 “아Q형 지식인”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일제식민지속에서 적응과 저항의 구도에서 자신들을 두고 향해진 쓸쓸한 야유였을 것으로 추찰된다. 노신보다도 월등 다층다각의 얼굴을 보인 이광수는 안일하게 “친일반역적문인”으로서 일축하기엔 무리한 인물이다. 사실 지금껏 한국이나 우리 민족이 이광수를 재는 척도는 “민족”이란 바러미터 밖에 없었다. 1940년 이후의 이광수의 “부일협력”의 언행은 그의 모든 평가를 집약시킨 “표상”으로 고정시켰다. 이 표상 역시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많이 일그러진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의 주장은 이문화의 경계를 살아간 이광수의 “월경적 삶”을 하나의 척도로 제단하면 그 표상은 오히려 다른 양상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서울대의 유명한 문학비평가 김윤식교수는 1400매의 상하권 이광수 평전 (1999 도서출판 솔)에서 이광수의 일찍 부모를 상실하는 삶을 “내면 풍경의 발견”으로서 “고아의식”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래서 여윈 아비를 일본제국주의에서 찾아 헤맸다는 “표상”을 제작해낸다. 그런데 필자는 그의 “표상”에 “완전동감”하지 못하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여기에 결여된 것은 이광수를 이광수이게끔 한 그의 이 문화체험, 간단없는 월경하는 방랑에서 생성되는 경계의 지(知)적 思想을 평가의 잣대에서 빼버린 것이다. 이광수 자신이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이광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 시각이 언제나 “민족” “민족의 반역”이란 고정 틀에 맞춰 넣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으로 이광수의 “표상”을 재생산 하는 것이다. 오늘도 한국지식인의 이런 재생산은 정치적 이용자(노무현 정부 친일파 청산정책)들에 영합하여 자기성찰과 반추도 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친일파”의 생산 공장은 “친일파”인물, 죽은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후세 정치가와 그 수하의 체제적 지식인이 아닐까? 물론 소수의 반역자는 어느 나라든지 다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반역자 말고 문제는 후세들이 자진해서 “친일파”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이광수의 경계를 넘은 삶을 다시 바라보자. 그의 삶을 이끄는 큰 테제의 하나는 월경과 그에 따른 방랑이다. 11살에 고아가 된 그는 1906년 13세에 일본 유학자의 길에 오른다. 철학자 지명관 선생은 “그의 조선적인 유교영향이 적었다”고 지적한다. 그 반면 그는 다감한 소년시절 일본의 명치중학에서 일본의 근대 문명개화에 일찍 개안한다. 1910년 한일합병의 해 귀국하여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1916년 와세대대학에 유학하여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소세키(夏目瀨石)와 영국의 바이런 등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 무렵 「매일신문」에 「동경잡신」을 발표하는데 일본의 선진성 근대화에 대해 선망의 정을 토로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카치의 무덤을 찾아 “경모와 감개”를 표하기도 하는 그는 소년기에 일본의 근대화된 표상을 한국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인식하고 있다. 소년시기 모든 조선인보다 일찍 문명개화에 開眼한 그는 자신만만한 확신을 갖고 있는 패기로 넘친 청년지식인으로 변용한다. 그가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天才”라 불린데 는 그 이유가 있다. 그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재능과 지견과 사상이 있은 까닭이다. 국민적 시인 서정주가 그의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듯, 이광수의 삶의 8할의 경계를 넘는 “월경”이다. 노신은 절강-남경-동경-센타이-동경-절강-북경-광주-상해로 인생의 월경을 거듭하지만 이광수의 월경은 초원을 찾는 양과 같이 시공 적으로 일본의 츠시마-러시아 바이칼호-상해-만주해삼위로 地珠적인 월경이다. 월경의 문인, 사상가로서 이광수, 그는 비평가들이 흑백논리와 선입견의 고정관념에 포로가 되어 무조건 친일 문인 반역자로 왜곡 중상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존재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인「민족개조론」을 위시한 고백 작품「나의 고백」「나의 자서전」등 주요 저작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오 이광수, 친일한 작가”하고 안일하게 일축하려 든다. 「민족개조론」(1992년「개벽」)은 세계인, 월경하는 코스모폴던적인 시각에서 러시아 유랑시절에 태어난 아이디어이다. 정신적 아버지인 안창호의 영향으로 생긴 것으로, “일제 총독부의 사촉”으로 집필됐다는 망언은 무근무실하다. 필자가 10여년전, 그리고 최근 또 정독한「민족개조론」은 조선민족의 결함을 시리어스하게 비판하고 새 시대에 맞게 개조함으로써 재생을 기하자는 위대한 사상이 담긴 명문이었다. 오늘날 재독해도 여전히 그에 관통된 사상은 유효하며 그를 산출한 저자야 말로 우리 민족의 탁월한 사상가. 지성인이라는데 탄복할만한 걸작이다. 저자가 서문인 “변언”에서 밝히다시피 “이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며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와 구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 번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시피 이 사상은 해외동포 월경하는 민족 지성의 사상임이 엄연하다. 이광수는 조선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박애, 예의, 염결, 자존, 무용, 쾌할”이며, 반면 결함으로 “허식, 나태, 비사회성, 경제성 쇠약, 과학의 부진”등을 열거한다. 그리고 그는 민족성 개조의 비전을 8항목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한다. 우리 민족이 이광수의 개조사상 비전을 진지하게 성찰, 수용했으면 오늘 우리 민족의 양상은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일본에 후쿠자와 유키치의「학문의 권장」이 있다면 조선에는 이광수의「민족개조론」이 있다. 춘원 이광수의 경계성에서 생성된 민족사상은 아이러니하게 그 민족 억압의 피식민지화 앞에서 “굴절된 지혜”로 나타난다. 한국 단국대 김원모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춘원은 항일 운동을 벌인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만큼 표면적으로만 거짓으로 친일 행동을 했을 뿐, 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춘원은 그 자신의 친일 행위를 민족정신 보존운동으로 역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일협력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친일을 위장한 민족보존운동”은 바로 그의 작품 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춘원의 친일과 민족 보존론」) 춘원은「나의 고백」에서 한마디로 “민족보존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풍부한 월경으로서 경계를 넘는 실천 속에서 걸러낸 “사상”을 몰이해하고 단순하게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 것은 자신의 “우(愚)”이다. 춘원에 대한 고정적 표상은 상당히 일그러진 면을 노정하고 있다. 이 같이 죽어서도 지탄 받는 그의 비극은 사실 식민지를 체험한 우리 민족 모두의 “비극”그 자체인 것이 아닐까?  
102    4-2. 백년의 눈물 댓글:  조회:6812  추천:10  2013-06-05
2. 백년의 눈물 (중략) 나는 조선족을 한해 얘기 한다면, 적이나 라이벌로 간주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러나 나를 적으로 보고 경계하는 라이벌로 삼는 자는 숱하다. 그들에게 내가 “적”, “라이벌”로 위구심을 느끼게 한 것은, 그만큼 내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실제적으로 별 일을 하지 않고, 나만 폄훼, 왜곡, 중상하는 그들에게서 덕이나 지(知)적 수준에서 정색해서 대꾸할 만큼의 필요나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정면에서 정색하여 반론하지 않았다. 요즘 두 번 글을 쓴 것은 그냥 그들을 익살로 조롱(嘲弄)하는 장난끼에서 생긴 글이다. 웃고 지나면 그만이다. 나는 아직 소년 같은 장난끼, 유치한 면이 많은 천진난만한 인간이다. 그래서 나를 잘 아는 주위 사람이나 여성 팬들로부터 “글쓰기와는 달리 어린아이 같은 치기가 있어서 귀엽다”고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평을 곧잘 듣곤 한다. 그러니 항상 안티파들을 나는 사랑으로 품어주고 싶다. “敬天愛人”의 사상으로 그들을 대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대할 것이다. 김소월의 시에 “사노라면 잊을 날이”하고 읊었는데, “그러노라면 이해할 날이”라고 읊고 싶다. 이해 받지 못하면 말고, 구태여 이해 해 달라고 무리한 주문 역시 안하리다. 그래서 나는 이해보다 더 좋은 약은 “용인(容忍)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일은 이해 할 수 없는 사물이 많지만 용인 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해도 못하면서 용인도 못한다면 자신을 괴롭힐 뿐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노신, 호적 두 분다 좋아하지만 “갱골두(硬骨頭)”의 노신선생보다도 “和派”의 호적선생을 더 좋아한다. 죽을때까지 “一個都不能寬怒”라고 외운 노신에 비해, 호적은 “容忍比自由 更重要”라고 강조했다. 실생활에서도 신변에 적이 많았던 노신에 비해 호적은 적보다 벗이 더 많았다. 노신의 후반인생은 거의 잡문이 문필생활의 주요 아이템인바, 그 잡문은 또 거의 적, 라이벌에 대한 공격이 주종을 이룬다. 대조적으로 호적은 유연한 의식과 관용, 용인의 아량으로 주위가 모든 “적”이나 라이벌을 품어서 “자유”를 선물했으며, 그 자신도 유유자적 자유를 즐기면서 일을 했다. 임어당 역시 동일 유형의 문인으로서 “용인”이 아닌 “유모아”란 깃발을 내걸었으며 언어학, 문학 및 인생철학에서 실천하면서 일을 한 문호이다. 이렇듯 근대중국의 대문호들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3대 국제파 문호”중에서 인생후반의 실적이나 해놓은 일에서 보아도, 노신은 “인신공격”의 잡문으로 점철 돼 있는바, 점수를 매기면 가장 하위점수를 주고 싶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든 그는 “갱골두” 체질성격에 의한 적을 공격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다 보니 지신이 피로했던 것이다. 그런 노신을 나는 본받지 못하겠다. 차라리 “푸접좋은 ” 호적의 “용인”정신과 임어당의 “유머아” 지혜로 인생을 살고 글을 쓰고 싶다. 안티파 지식인 중에 이 시각에도 나는 “반공, 반화....”라고 아주 대단한 硬骨頭型 반역의 투사처럼 분에 넘친 모자를 씌우는 양반이 있다. 사실 이런 양반들은 나를 너무 올려 추키고 있다. 너무 과분한 “영예”다. 기실 나는 그렇게 한시도 간단없이 땅땅하게 서 있는 남자는 아니다. 평시에는 말랑말랑 유연하며, 꼭 필요할 때만 땅땅하게 선다. 찰떡처럼 말랑말랑 하다가도 무쇠 亞鈴처럼 땅땅하게 말이다. 솔직히 고백해, 나는 “반공”도 “반화”도 아니다. 또한 “반체제”지식인도 아니고, 나는 노신형의 반체제 지식인이기 보다는 호적형의 자유주의 지식인이고 싶다. “문제를 많이 연구하되, 주의(主義)를 작작 담론하자” “대담하게 가설을 제기하되, 소심하게 실증을 하자” “실천은 진리를 경험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는 호적의 많은 이론, 주장에서 나는 심대한 공감을 하고 있다. 이런 이론은 오늘도 내일도 유효하다. 호적은 1917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차,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장훈 복벽의 뉴스를 접한다. 그때 그는 감개무량하여 한탄했다. “중국의 근본적 문제는 제도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소질(素質)의 문제이다. 즉 문화 관념의 문제이다.” 라고 이렇게 그는 귀국한 뒤 20년 동안 정치를 불문하고 문예로 국민의 넋을 개조하는 것만 담론하기로 결심했다. 방향은 노신과 비슷했으나, 그가 택한 방법은 노신과 다른 유용한 관용, 주의를 넘은 길이었다. 호적은 반체제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국민당 장개석을 비판, 수용하면서 언설활동을 벌인다. 유연한 그의 실적은 국민당체제개혁에도 유익한 일을 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급진파 지식인 보다 유연파 지식인, 자유지식인이 되었다. 체제 안에 있을 때도 밖에 있을 때도 나는 종시일관 “자유파”였다. 나의 안티파 지식인들처럼 체제에 무조건 곡학아세 하고 뭔가 학계, 문단에서 관리직함을 쟁취하자고 옥신각신 하는 그런 인물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도 일체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며, 또 정치적 出世欲따위는 더구나 기피했다. 지금 역시 해외에서 살면서 활발한 문필, 연구 활동을 벌이지만, 일체 정치에는 무관하다. 안티파들은 “우익”이니 “매국노”이니 상투적으로 왜곡하기를 즐기는데 그런 中世紀적 사고를 갖고 혁명의 정치적 투쟁심이 가미된 자들은 “우익”이 그렇게 좋고 “매국노”가 그렇게 좋은가? 2009년 북경 정부기구의 초청으로 동아시아 이해에 관한 강연을 했을 때, 많은 당간부와 고위급 지식인들도 나의 중일한 문화, 역사의 담론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2010년 8월에도 북경대, 인민대 및 국가 일류급 출판사의 간부, 학자, 언론인들과 수차례 환담을 하면서 느낀 곳은 많이 “변한” 그들의 수준과 사고 양식이었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 (중략) 등소평이 유소기의 유지를 이어서 “개혁, 개방”의 국책으로, 모택동시대의 “階級仇ㆍ民族恨”의 내홍투쟁을 종식시키고 경제, 산업의 근대화에 성공시켰으며 정치적 환경 역시 관용과 자유로 크게 변해가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등소평의 개혁개방선의 수혜자로서, 등소평 할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 등할아버지처럼 키가 작은 것도 나 역시 긍지감을 느낀다. 등할아버지, 강택민 큰아버지도 그리고 호금도 작은아버지도 나를 귀여워 하셔서 한 번도 나를 “반공” “매국노”라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중공 및 위정자는 현재는 지식 엘리트로 구성되었으며 정치체제개혁의 절박성,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는듯하다. 온화한 온가보 큰아버지도 최근에 항상 “정치체제 개혁의 보장이 없이 현대화건설의 목표 실현을 불가능하다” 라고 하시며 “사상해방 대담 탐색하여 정체함 없이 뒤로 후퇴해서는 더구나 아니 된다” 라고 거듭 강조하신다. 얼마나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셨는가! 과연 이 말씀대로 정작 안 해서 그렇지 실현만 되면 참 미국을 능가한 인민의 “제국”이 탄생할 것이다. “제국”이란 말이 나온 김에 좀 부언하자면, 냉전체제 붕괴 후 미국 같은 포스트근대의 거대한 제국은 글러벌속에서 “국민국가”의 질이 변하고 있다. 즉 국가가 통치대상 국민에 대해 마크로(거시적)적이 아닌 미크로(미시적)적으로 포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주 섬세한 정책 수단을 구사해, 국민을 감시하고 관리하고 격리시킨 개인으로 분해시키고 있는 것으로 노정된다. 고전적(전통적)제국 모델은 그 원리가 황제가 천자라고 해 절대적 권리를 행사하며 중앙 집중 형으로 인민을 통치 해왔다. 현재 중국의“제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은 경제적 성장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중국을 빈번히 방문할 때 마다 나는 그 일사천리의 급속한 변화, 대도시의 숲 풀 같이 일어서는 빌딩에서 보아가며 압도적인 근대성의 역량을 실감하곤 한다. 변하는 중국에 대한 나의 견해도 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외견상의 硬件(하드)이라면, 내가 또 실감을 느끼는 것은 이에 상응되지 않은 모습이다 곧 軟件(소프트) 국민성, 인간의 소질, 정치체제의 개혁 면에서는 여전히 답보하고 있거나 오히려 경제적 수준, 하이데크적 첨단기술의 재생으로 더욱 세속화, 공리화, 실리화를 추구해온 중국인의 實利志向의 근성을 추구 가능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나는 (2008)이란 책에서 중국국민성을 실리추구, 공리성 “民以食爲天”의 “食”만 해결 되면 기타 사회문제, 정신성에 대한 추구는 게을리 한 “실리민족”의 양상에서 규정지었다. 문화인류학적 이론을 구사하여 걸러낸 “신중국이론”이어서 이 책을 조선족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노신이 지적 비판했던 것과 같이, 또한 호적이 앞서 말한 “제도문제가 아닌 인간 소질, 물화관념의 문제”에서 나는 중국인을 오늘 21세기의 문에 들어서서 역시 답보하고 있다고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중국정부의 통치는 고전적 전통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면이 많은 것은 그 자체의 특질이기도 하며 역시 약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통치수단의 “독재”는 전통에서 탈피하지 못했으나, 또한 미국 등 선진제국의 하이테크적 첨단기술을 구사하며 전통적 통치를 일층 공고시킨 양상으로 노정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특기해야 할 것은, 이미 중공은 ‘경직된 독재’가 아니다. ‘유연한 독재’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역시 여기서 유추해 나오는 테제이지만, 유연한 독재, 중국에 있어서 방법이 아닌 방법이다는 것이다. 이 말에 나를 지탄하는 지식인도 있을 법 하지만 나는 다만 객관적으로 체제와의 자유자로서 관찰을 할 뿐이다. 중국시민의 지적 수준, 계몽에는 내가 아는 만큼 글쓰기로 힘을 보태고 싶다. “유연한 독재”, 이는 나의 신조어인바, 이 뜻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강압적인 탄압적인 독재가 아닌 국민 공제를 하면서, 체제에 대한 비판도 허용하고 언론, 출판, 데모의 자유도 주면서 대중의 소질이 향상되기를 기다림과 동시에 체제내부 자신들의 의식도 변혁시키는 것이다.     (중략) 국민국가에서 근대국민은 단합성과 근대적 기준에 맞먹는 문화소질이 구비되어야 하며 거국일치하게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로 진척 할 수 있으나 중국은 그 부분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매일 핏대 세우고 “애국심”을 외친다. 중국이 100년전 일본과 동일 스타트지점에서 근대화를 바라고 달렸으나 겨우 백년이 지난 21세기에 근대화 국가로 성장되었거나 (내륙부분은 아직 거리가 있다) 성장 돼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민주화 역시 백년전에 외친 스타트지점에 되돌아와 다시 담론해야하는 현실이니 참 답답하다. 민주화를 지탱해주는 튼튼한 기반은 그 나라 국민의 근대적 소질이다. 현재 중국 농민을 위시로 한 국민의 대다수가 민주화를 지탱해 주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이 점은 인국 한국과 일본과의 비교에서도 역역히 드러내고 있는 사정이다. 광범한 중국 대중은 이직도 “먹고사는데 걱정해야 할” 눈앞의 “식민성 (食民性)”에서 탈피하지 못 한 것이 귀 아프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이며, 또한 실리성이 대단히 강한 중국인이 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 해도, 고차의 정신추구는 방치하고 향수, 향락으로 편향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 중국 연해도시의 일부 벼락부자들이 이런 인간의 전형이다. 이런 자들이 해외 관광에 나오면 위생, 질서 등 면에서 많은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다. “돈 있는 바보”들의 행진곡을 펼친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失望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국민성, 소질역시 환경의 변함에 따라 변하고 향상 하는 시대적 특징도 있기 때문이다. 이 변함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좀 너무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속수무책이나 수수방관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비판적, 도전적 지식인의 “계몽”은 아직도 필요하며 유효 적이다.   (중략) (중략-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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