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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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하) 댓글:  조회:5379  추천:15  2013-05-27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하) 8. 이토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란 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특히 그 주위에 안중근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인이 안중근을 숭경하고 감동을 느끼고 공명하며 감회될 수 있는 사실은 안중근의 인격과 함께 그의 견식, 사상이 일본의 원훈보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포들은 그 점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의 안중근숭모의 미담을 소개하기로 한다. 앞에서 러시아검사의 증언에도 등장하는 타나카 세이지로의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하다. 남만철도주식회사의 이사로 있던 그는 안중근이 이토 저격당시 이토곁에 있다가 총탄에 부상을 입은 인물이다. 그 뒤 안중근이란 인물을 알게 되면 될수록 타나카는 그 위대한 성품과 견식에 빨려들어 팬이 되어버린다.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지금껏 만난 인물 중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물가운데서 누가 제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유감스럽지만 그건 안중근입니다.” 하고 타나카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자신을 총탄으로 쏘아 부상까지 입힌 철천지원수를 감히, 솔직히 위대한 인물의 제일인자로 칭송하는 그 담력 뒤에는 역시 안중근의사의 감화력의 파워가 있기 때문이란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또 하나의 감격적인 미담을 소개하자. 당시 여순감옥에서 헌병상등병으로 안중근의 감방 간수 역을 맡았던 치바토시치(千葉十七)라는 젊은이 역시 안중근의 극렬 팬 이었다. 직책상관계로 안중근과 일상적 접촉이 잦았던 치바는 당시 25세. 안중근보다 6살 연하였다. 그는 안중근을 처음에는 명치의 원훈 지도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여기고 경계했지만 차츰 접촉이 깊어지면서 안중근의 깊은 교양과 고고한 인격적 포용력, 활달하고 효자다운 효도성, 그리고 일당백의 당당한 태도에 점차 감복되고 나중에는 그에게 감화 당하게 된다. 치바의 친척이 되는 변호사 가노씨의 저술에 의하면 어느 날 치바가 안중근에게 “왜 꼭 이토공을 저격해야만 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독립은 물론 일본과 청국(중국)을 포함한 동양의 평화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토공이 추진하고 있는 병합정책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이토공의 정책은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나는 자신을 조국에 바치는 몸이라 죽을 각오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내 행동이 내 뒤를 이을 우국지사들이 궐기를 환기하기 위함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니 나는 이토공에 대한 개인적 원한 같은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한일 두 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불행한 쪽으로 흐르는 것도 이토공 한 인물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역사란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게 아니니까요. 내 거사가 장차 우리 동포들의 독립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만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편판단은 후세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나는 소중히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국을 위해 이슬로 사라질 것을 결의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준 이 목숨은 죽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돼 있고 인연이 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건 하나님께 맡기고 유구한 한국역사에 하나의 조약돌로 될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이런 고결한 생각을 품은 안중근이였기에 사형선고를 받고도 상급법원에 상소를 포기하고 그 대신 법원 원장에게 사형기일을 한 달 미루어 자기가 지향한 동양평화의 원대한 구상을 저술하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그 뒤 치바 청년은 안중근을 대할 때마다, “이 사람이 더 살수만 있다면 기필코 한국을 어깨에 짊어질 수 있는 거물이 되기에 틀림없겠구나. 이런 인물이 사형당하여 한 점의 찬이슬로 돌아가게 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9. 1910년 3월 26일. 작년 10얼 26일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거사 날부터 옹근 다섯 달 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다. 안중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머니가 지으신 결백한 명주 한복정장을 차려입고 기도를 하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장으로 나아갈 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감방 옆에 서 있는 치바를 불렀다. “치바상, 전번에 부탁받은 글을 써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하면서 치바는 부랴부랴 흰 비단 천과 필묵을 갖고 왔다. 안중근은 자세를 바르게 취하고 단숨에 붓을 날렸다. “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로다” 그리고는 숨을 죽여 약지가 절단된 왼손에 먹을 듬뿍 묻혀 이름석자 밑에 힘 있게 찍었다. 치바는 “감사합니다”하고 깍듯이 대례를 올렸다. 안중근의 최후의 사형장면은 어떤 모습 이였을까? 10시 정각. 미조부치검찰관, 구리하라전옥. 그리고 소노기 통역이 여순감옥 형장감시실에 착석했다. “사형을 집행한다. 남길 유언은 없는가?” 라는 구리하라전옥의 질문에 안중근은 조용히 대답한다. “나로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단지 동양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동양평화 만세’ 3창을 부르고자 합니다. 결국 “동양평화 만세”가 안중근의 유언으로 되었다. 오전 10시 20분. 교수형으로 안의사는 숨을 거둔다. 그날 소노기 통역은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 안중근은 어제 밤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 조선복(웃옷은 백색, 바지는 검은색)을 입고 가슴엔 성화를 품고 있었는데 그 태도는 너무나 침착하여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태연자약하게, 떳떳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것이 장한 우리 영웅의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휘호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란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계속하여 치바의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 뒤 치바는 제대되어 고향 미야기(똫냘)에 있는 시골로 귀향하였다. 그는 54세로 죽는 날까지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불단에 정중히 모셔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한일양국의 영원한 평화친선을 빌었다고 한다. 치바씨가 사망된 뒤에도 부인은 97세의 고령으로 세상 뜨기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 안중근과 치바를 같이 기렸다고 한다. 1979년 안중근의 탄신 100돐 기념에 치바씨의 후손들이 동경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선생을 통해 서울안중근기념관에 유묵을 기증했다. 안중근과 치바부부의 한일우호를 상징하는 미거를 표창하기 위해 1981년 치바의 유골이 잠든 대림사(大林寺)에 안중근, 치바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도 대림사주지와 함께 일한 인사들이 한일평화를 기리는 합동추도법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이야말로 안중근과 이토의 원한구도를 넘어선 한일양국의 경하할만한 생동한 평화도가 아닌가! 10. 시다라씨네와 작별을 고하고 나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JR전차에 몸을 실은 나는 귀로에 올랐다. 그리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오늘은 내 생에서 그야말로 뜻 깊은 하루가 된다. 안중근의 친필유묵. 그것은 내게 있어선 안중근 본인이었다. 이제 돌아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돌 기념일이 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고 반성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독립--동양평화--투사 - 문인 - 천주교도 - 사상가…이런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둠이 잠기기 시작한 차창에는 붉은 노을이 비낀다. 창가에 문득 안중근의 얼굴이 나타났다. 31세의 청년이 아닌 131세의 백발이 성성한 노숙한 성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 성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자네가 내 유묵을 보았다니 반갑네. 이렇게 우리 후예들이 일본에도 마음대로 유학하고 거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구만. 허허…” “반갑습니다. 안 할아버지는 금년 벌써 131세지요. 할아버지의 유지는 우리 세대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깍듯이 대답했다. “며칠전 하늘나라에서 말이지. 글쎄 이토와 만났구나. 여전히 옛날 모습이여서 놀랐지만 우리는 화해를 했단다. 그래야 우리가 쌓았던 원념들이 담벼락이 돼서 자네 세대가 동양평화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뭇는데 지장이 아니되니까.” “역시 안 할아버지의 탁견이십니다.” “뭐. 그런 건 아니고 하루 빨리 EU보다 앞선 동아시아공동체를 뭇기를 바란다네. 허허허…” 성자 안중근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안공〜”내가 다급히 불렀으나, 안의사는 벌써 하늘나라로 행적을 감춘 뒤였다.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었다. 꿈인지 생신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안공의 혼백과 만나 경희하기만 했다. 나는 생각한다. 안중근의 세계적 공명을 불러일으킨 평화사상, 공동체관에 대해 깊은 연구와 넓은 공감대의 확신이 요망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평화사상,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한 인물연구서가 아직 한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안공의 기념활동도 좋지만 형식차원을 능가한 실천적, 건설적 차원으로 그의 사상을 활용하고 실현해야 한다. 천부적 인권론, 개화사상, 기독교사상, 유교, 불교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안공의 사상체계는 21세기형이다. 그러므로 이제 안중근은 단순히 우리 민족 한국인만의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적 안중근이다. 그의 세계적 보편가치성을 갖고 있는 사상체계가 그것을 확보해준다.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은 우리보다 100년 앞을 달리는 열차에 탄 유일무이의 사상가이다. 이제 동양평화 실현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사상가 안중근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준 크나큰 과제다.
100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중) 댓글:  조회:5139  추천:11  2013-05-19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중) 5. 이제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할빈역 플래트홈에서 발발한 역사적인 의거 장면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안중근의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난 다음 이토의 시신을 밟고 “코리아 우라(한국만세)”를 세 번 목 놓아 부른다. 그리고 러시아 병사들에게 결박당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간결하고 판에 박은 묘사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어딘가 조잡하고 사살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어서 아쉽다. 이제 그날 의거에 대해서 한번 객관적으로 기술해보자. 안중근에 대한 일본 측의 취조기록, 로씨아 측의 증언기록이 다수 있어 이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쓰자면 적어도 단행본 한권의 분량이 된다. 편폭의 제한도 있고 그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여기다 제시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나는 제3자 즉 일본 측도 한국 측도 아닌 로씨아 측의 보고를 중심으로 서술키로 한다. 이토가 1909년 6월 1일 한국통감을 사양한 뒤 추밀원의장을 맡았는데 원래 대만 식민지경영 경험이 있는 현 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 고토신페이의 권유로 만주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로씨아의 대장상 코코프체프와 면담하기 위해서 만주를 일주, 할빈으로 왔던 것이다. 10월 26일 아침 9시에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자 코코프체프, 콘스탄티 미텔등 로씨아측 일행이 이토가 있는 귀빈차량에 올라 인사를 나누고 20분정도 회담을 했다. 그런 후 코코체프가 플래트홈에서 로씨야 철도수비군의 의장대의 열병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토는 정장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상대의 간청에 이기지 못해 응하여 9시 25분쯤 차에서 내렸다. 그때 동석했던 로씨아국경재판소 검사 콘스탄티 미텔은 안의사의 의거장면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토공이 로씨아의장병을 사열하고 5보내지 7보 걸어서 일본인 집단 환영대열에 다가갔을 때 로씨아의 장병 사이에서 몇 차례나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 두 차례 발사소리가 난 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총을 발사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범인으로 보여 지는 자가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쳐 들고 의장병 앞을 지나가는 이토공을 향해 또 한발 쏘았다. 그리고는 급히 뒤돌아서서 이토공을 뒤따르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발사했는데 아마 3,4발인가 발사했다. 마지막 발사는 땅을 향해 쏟 것 같은데 생각건대 이 총알이 타나카 세이조(만주철도 이사)를 맞혀 부상시킨 것 같다. (중략) 발사가 끝나자마자 동청철도회사 철도경찰서장대리 기병대위 니키트로프가 2회 발사때 범인에게 덮쳐들었으나 범인의 완력이 하도 강해 쓰러뜨릴 수 없었다. 격투 끝에 다른 장교의 도움으로 권총을 빼앗았다. 그때 범인은 로씨야어로 “코리아 우라”하고 세 번이나 외쳤다. 범인의 발사 시간은 30-40초가 넘지 않았다. 정거장에 있는 철도경찰의 숙직실에서 안정을 되찾은 범인은 자신의 흉행에 대한 동기를 진술했다. 약 20분 뒤에 이토공의 사망을 알려주자 범인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숙직실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편 이토는 어떻게 되었는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은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무로다 요시아야등에 의해 부추 켜 열차 안으로 운송되었다. 급기야 이토를 쏘파에 눕힌 후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에 응급처치를 강행했다. 당시 수행의원으로 처치를 했던 코야마 의사 (小山)의 증언에 따르면 피탄 된 흉부와 복부에서 선지피가 샘솟듯 했으며 이미 치명적인 상임을 즉각 알았다고 한다. 정신이 좀 들라고 코야마가 전해주는 브랜드 두 컵을 마시고 난 뒤 혈색을 잃고 안색이 종이 장 같이 창백해진 이토는 3번째 컵은 끝내 들이마실 기력 마져 없었다. 통역한테서 한국청년이 저격자라는 말을 듣고 이토는 “바보 같은 자식”하고 한마디 뱉고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그리고 피탄 30분만인 10시에 절명했다. 6. 그러나 안중근의사는 결코 이토가 숨지기 직전에 남긴 “바보”가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일본인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근대 일본의 건국원훈을 암살한 “테러리스트”이며 “바보”같이 용맹한 적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사의 일면만 알았지 그 이면에 있는 문인, 선비, 지식인다운 인물상에 대해서는 아직 깊은 인식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인만 탓 할 바가 못 된다. 우리 자신도 사실 안중근의 “투사”를 넘은 위대한 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번 3월의 나의 특강은 안중근의 평화사상 및 사상가적인 심층의 안중근을 알리고자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금년 안으로 이란 제목의 책을 펴낼 예정으로 지금 일본어로 집필 중에 있다. 한마디 아쉬운 소리 더 부언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의 많은 동포들도 안중근을 단지 상무정신이 강한, 용맹무쌍한 독립투사로 쯤 표면적인식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문인이자 사상의 동서를 통찰한 선각자로서의 심층적인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 인식이 결여하다. 이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단선적이면서도 피상적인 이해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는 “독립” 유목과의 만남을 통하여 단순히 만용만 자랑하는 투사 안중근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독립자주지향으로 내세웠던 사상가 안중근 선각자와 만나는 실감을 느꼈다. 사상가 안중근, 그는 구경 누구인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모르고 있던 안중근의 이면, 심층에 대해 재 이해를 해야 할 사정에 와있지 않은가. 나의 이 졸고에서 안중근의 위대한 사상가의 전체상을 다 표현하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나 총체적, 개략적인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안중근의 31년의 짧은 인생은 한손에 붓, 또 한손에 총을 쥐고 우선 민족교육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을 일깨웠고 단지동맹으로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향했다.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는 적의 리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려순감옥에서 5개월간 공판투쟁 끝에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고 순국한다. 개괄하면 안중근은 단순히 무인, 군인, 투사로서 독립을 이룩하는 위업에 헌신 했을 뿐 아니라 교육자, 문인, 지식인, 평화주의자, 천주교신도, 유교와 불교사상을 종합시키고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가. 선구적인 예언가이기도 하다. 그는 려순감옥의 심문에서 “한 나라라도 독립자주하지 못하면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 수 없으며,” “모두가 독립하는 것이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라고 소리 높이 주장한다. 독립자주평화는 안중근의 유일한 화두이며 그가 평생 겨냥했던 이상이다. 그의 사상이 가장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발로한 것이 바로 이 “독립”유묵이 아니였던가! 안중근은 또 일본검사의 취조 중 한중일 동양 3국을 세형제로 비유한 우화를 술회하면서 셋째동생 일본이 둘째아우 한국을 향해 악행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비유하면서 지금 동양의 평화가 깨어진 결과는 이토의 강제정책이 열악했기 때문이라고 규탄하였다. 또 이토 본인을 간웅(姦雄)이라고 자탄, 그를 제거한 것은 동양평화실현을 위한 행위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더욱이 1909년 1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당시까지 그는 개인 전기인 와 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사상을 구상화한 후자 저술은 결국 미완성으로 끝난것이 너무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다. 결국 3월 25일까지 써서 서문부분에만 그쳤는데 고등법원원장 하라이시와의 면담내용을 기록한 등을 종합하면 그 전면모를 대강 알 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안중근의 사상, 전략은 아래와 같다. 동아시아의 최대 분쟁의 중심인 려순을 중립지대로 개방하고, 한 중(청), 일이 공동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관리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지역을 아시아평화의 근거지로 만드는 것이다. 동아시아평화회의의 재정확보책으로 원만한 금융을 위해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 공통유통의 공용화폐를 발행 하는 것. 그리고 3국의 청년들이 2개국 3개국 언어를 배우게 하고 우방, 형제적 제휴연맹관념을 형성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3개국 공동시술개발센터와 동아시아 동양평화군대를 창설 할 것까지 제안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지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 서양의 로마교황청에 각국 대표를 파견하여 서양과의 협력관계를 도모할 것을 권유한다. 이래서 세계적 시야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고 평화의 유지를 이룩 할수 있다는 신념을 수립한다. 그는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일국(一國)중심의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의 동아시아평화정책의 제한성을 간파하고 일본제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를 파괴하고 로씨야, 미국으로 전쟁을 확장시킨다면 일본 자신의 괴멸을 기필코 초래한다고 그 시점에서 이미 예언한다. 결과적으로 안중근의 예언은 너무나 적중하지 않았던가! 안중근은 사상뿐 만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탁월한 예견적 안목을 갖춘 예지에 찬 예언가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 당시 제안한 동아시아의 제휴, 연대적인 동아시아평화회의, 공동개발체계, 다중언어교육체계, 공동은행개발책, 공용화폐제도 이 같은 구상은 너무나도 탁월한 식견이며 선구적인 구상이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본은 동아시아공영권을 소리높이 주장했지만 일본 중심의 일국내셔널리즘적인 강제적 정책이었기에 동아시아의 공명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 결국 1945년 8월 15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무산되고 말지 않았던가! 현재 유럽의 EU연합이나 동아시아가 추진 중인 동아시아공동체나 APEC등 세계적인 공동체제휴의 흐름추세를 안중근은 그 탁견과 예지력으로 이미 100년전에 발안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중근은 유럽공동체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모네보다, 중국근대의 국부로 추대된 손중산보다, 그리고 아시아 평화의 리더였던 칸트보다 더 선구적인 대사상가. 대정략가임이 틀림없다. 안중근, 그는 100년 앞을 내다 본(英知)의 사나이였다. 7. 정오가 되자 아시마루회장은 시다라로인과 나를 위해 일본요리점에다 푸짐한 오찬을 마련했다. 식사중 우리의 화제는 당연히 안중근에 관련된 내용으로 꽉 차있었다. “왜 안중근이 일본의 원훈을 암살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려순감옥에서 그렇게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았을까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당당한 신앙심에 매료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원과 감옥, 통역사 그리고 일반 관리들께서도 다 일본인인데 안중근에게 글을 써 달라고 요구했답니다. 려순감옥에서도 안중근에게 상등백미 밥에다 끼니마다 반찬에 맛있는 과일이 배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에 한 번씩 목욕도 시키고 이발도 해주고-- 일본의 최고실력자 원로를 죽인 범인에 대한 존경이 이렇듯 깍듯했다는 것은 정말 경탄할 일이지요.” 화제는 또 다시 안중근의 품위 있는 유목으로 되돌아왔다. 1910년 2월 사형판결이 난 뒤, 주의의 일본인중 비단이나 일본 화지를 지참하여 안중근에게 휘호를 요구한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안중근은 번마다 상대를 고려하여 어구를 선택하고 정성껏 써주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안중근은 이 기회를 일본인에게 자신의 품은 뜻을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는지 모른다. 1910년 3월, 안중근은 옥중에서 “박학어문, 약지이례 (博學於文, 約之以禮 널리 학문을 배우고 례로써 단속한다)라는 (논어)〔옹야편〕의 문구를 한 일본인 관리에 써 준적이 있는데 기하게도 이토히로부미의 이름 ‘박문’도 이 논어 옹야편에서 두 글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이토는 유교의 한학에 조예가 깊고 한시에 능했으며 서예가로서도 일본 근대예사에서 능서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몇 점의 이토 유묵을 보면 그는 행서나 초서에 능했는데 성격같이 활달한 글씨를 썼다. 한국통감, 인감이 찍힌 그의 유묵은 또한 일본식민지화의 생생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조선의 유교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당시 일본의 어느 정치가보다 깊었으며 조선유교 문화가 일본문화보다 앞섰다고 거듭 말했다.그의 여러 종류 전기를 섭렵해보면 그는 한복을 즐겨 입고 한복차림으로 공식장소에 나타나는 등 행동으로 “한국통”을 자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조선식민지통치정책을 스스로 미화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들을 감화시킬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토의 이름과 그의 유묵, 또한 한학의 교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는 원래 유교, 한자문화 등으로 공유 할수 있는 부분이 너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 일국의 식민통치책으로 인해 그 끈끈한 유대성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한국 계명대 이성환교수 등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이토 역시 안중근과 같은 “동양평화를 제창했으나 그 행동양식으로서 정반대의 지향성을 실천으로 행하고 있었다. 이토는 동양평화를 위한 명목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할 필요성을 주장했고, 안중근은 이런 이토를 한국침략자로서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첫걸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입장의 다름에 따라 두 인물의 사상과 행동은 천양지별의 양상을 보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당시 양국의 입장을 극명히 상징함과 아울러 두 인물의 양립할 수 없는 사상적 대립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동양평화는 동양제패의 꿈에 불과했으며 안중근의 예언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지 않았던가!
99    4-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상) 댓글:  조회:5422  추천:19  2013-05-11
제4장 민족ㆍ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상) 1. 2010년 2월 20일 새벽 4시경에 깨어난 나는 유난히 흥분돼있었다. 40대에 들어서서 10대같은 마음의 설레임을 느끼기는 처음이다.그럴만한 큰 이유가 있다. 왜냐면 오늘 나는 우리 민족의 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진 영웅 안중근의사의 친필 유묵과 곧 대면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본서 살아 온지 벌써 20년이 된 나는 “국제안중근기념협회” 총회 부회장 겸 일본 지회장직을 맡은 지도 어언 수년이 된다. 이 같은 영광스러운 사회직을 맡으면서 나는 나름대로 일본에 있는 안중근 관계 자료를 발굴, 수집하면서 안중근사상연구를 해오고 있는 중이였다. 원래 고서수집과 서화괴집벽이 있는 나는 동아시아비교연구와 함께 관련 역사인물 서화자료를 꽤 많이 수집했는데 근대 조선의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같은 개화파리더나 중국의 손문, 리홍장, 원세개나 일본의 이토ㆍ히로부미, 타나카 카쿠에이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명 인사들의 유묵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금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100주년기념활동의 일환으로 우리 “국제안중근기념협회”에서 최고로 완성도가 높은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화첩편집위원회의 멤버로서 나는 일본에 산재돼있는 안중근 관련 사진, 자료를 적극 발굴, 수집하여 제공해왔다. 그러므로 이번 안중근의 유묵친필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 유묵은 일본인이 다수 소장하고 있지만 사진이나 화첩에서나 보았지 한 번도 친필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나에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몇 시간 후면 소중한 안의사의 친필유묵과 대면하게 되니 어찌 가슴이 설레이지 아니하랴! 그리고 안의사 순국 100주년기념으로 나는 이곳 히로시마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동아평화를 기원하여”라는 주제로 곧 특별강연을 갖게 된다. 주최 측의 강연광고가 나가자마자 일본인들의 반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며칠 전, 나의 책을 애독하고 있다는 히로시마 모 중소기업의 회장인 이시마루(石丸)씨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가 사는 집 근처에 간센지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그 절의 주지 시다라씨가 안중근의 친필유묵 “독립”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와는 친한 사이여서 유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시다라씨 역시 내 책을 읽었고 수년전 히로시마시내 호텔서 나의 비교문화특강을 청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도 간센지에 유묵이 소장돼있다는 정보는 오래전부터 입수했지만 무슨 방법으로 주지와 접촉할까 하고 고민 중이었다. 나는 하늘이 돕는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2. 아침식사를 대충 끝낸 나는 10시 JR히로시마역에서 미요시행 열차를 잡아탔다. 10시 55분경 무카이하라(向原)역에 하차하니 이시마루회장이 자가용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간센지는 역에서도 승용차로 20분 달려 아주 한적한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토진종파에 속한 8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란다. 주지 시다라 사미즈(設樂)씨는 82세의 고령 이였지만 60대쯤으로 보이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반기면서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전에 김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나이 드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40대 젊은 분이시네요. ”하면서 시다라씨는 부인이 내놓은 오차를 권했다. 이어서 시다라씨는 곧장 안의사의 유묵으로 화제를 옮겼다. 그가 간직해온 유묵은 약 10년전에 논픽션작가 사이토씨의 권유로 매스컴에 사진으로 공개한 적 있지만 한국에서 전시되기는 한번뿐이라고 한다. 안중근의 유묵은 전부 려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게 휘호를 해준 것 인데 그 수자가 근 200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독립”이란 글이 있는 유묵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한다. 두말 할 것 없이 한국에 반환되면 국보급 문화재다. 한국정부는 이 귀중한 유묵을 긴 시간 소중히 보관해온 시다라씨에게 감사의 뜻으로 한국 서울에 초대하여 안중근기념식전에 참석시키기도 하고 국빈처럼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 생전에 시다라씨를 한번 뵙자고 초청 한 적이 있는데 시다라씨는 완곡히 거절했다는 에피소드를 피력했다. 왜냐면 안중근을 숭모하여 우리 집의 가보를 소중히 모시는 것은 우리 집안의 범사(凡事)이므로 대통령의 접견을 받을 만큼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다라씨는 겸손한 인품이었다. “어떻게 안중근의 유묵이 이곳 간센지에 남아있게 됐습니까?” 나의 새삼스런 질문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저의 작은 할아버지 시다라 마사유키가 당시 대련구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안중근의사와 동년 동월 생 이였다고 합니다. 두 분은 잦은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백년전의 지금쯤이 됩니다. 안중근이 사형당하기전인 1910년 2월 려순감옥에서 이 ”독립“ 두글자를 써서 저의 작은 할아버지께 주셨습니다. 나는 또 궁금했다. “왜 독립”이란 휘호를 한국인이 아닌 일본에게 써주었을 가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역시“하면서 대답했다. “한국인들로부터 늘 받는 질문입니다. 일본인에게 주면 안중근님의 본인의 뜻이 일본인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아닐까요.” “독립이야말로 안중근의사의 절절한 소원이 푹 슴배인 글자니까요.” 나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의사의 일본인에 대한 유언 그 자체라고 생각이 되었다. 시다라씨는 또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은 이토를 격살하고 이 '독립'이란 글발을 통해서 이토의 직접적인 상전인 천황에게 조선독립을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인물이지요. 31살의 청년이 이런 장대한 스케일과 예지와 용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존경스럽지요.” 실제로 안중근과 접촉이 있은 일본인들이나 지금의 일본인들 속에서도 안중근의사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이 있다. “우리는 원수가 쓴 것이라면 피하거나 버리고 싶어 한다. 안중근은 일본의 적 일터 이므로 그것이 버려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 많은 것이 남아있고 또 대접받고 있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안중근은 일본을 좋아한 것 같다. 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가려다 갑신정변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을 만큼 일본의 신문화에 흥미가 컸다. 그러나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까지 하는 극력한 반일투사가 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조선 독립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이며 안중근 자료 발굴 및 연구의 제일인자인 최서면선생이 최근 “안중근의사의 유물전시회에 붙여”에서 쓴 말이다. 노숙한 연구자다운 의미심장한 말이다. 3. 어느새 시다라부인이 “유묵이 준비 되었습니다”.하고 우리를 불렀다. 최고급 일본견사로 특제한 포장 커버 속에서 시다라부인은 조심스럽게 안중근의 유묵액자를 꺼냈다. 사진에서 익히 보아왔던 “獨立”이란 박력 있는 두 글자가 한눈에 확 안겨왔다. 종횡 33X66센치의 일본화지에 박아쓴 글씨였다. “대한국인 안중근. 여순감옥에서” 화지는 열화 되어 시누렇게 변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먹 글씨나 장인은 너무나 선명히 박혀있었다. 안중근의 유묵 중에서 이 손 바닥 인이 가장 뚜렷하다고 한다. 나는 방안 중앙에 있는 큰 테이블위에 유묵액자를 정중히 모셔놓고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형언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물결이 팽배하면서 어느새 눈물이 앞을 흐리였다. 나는 유묵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유묵으로부터 받는 특유의 기(氣)에 나는 무한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였다. 유묵은 나에게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다. 절절히 또한 침통하게. “독립” 두 글자는 순간 안중근의사의 얼굴모습으로 변하여 다가왔다. 순국 당시 31세의 청년의 안중근. 얼굴은 대형 영사막의 영상처럼 클로즈업된다. 독립자주 평화사상을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부르짖고 있었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과 함께 자여기인(字如其人)이라 글씨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듯이 이 글씨자체가 안중근의 인격의 결정체이며 등신대(等身大)의 안중근 그 자신인 것이다. 침착하고 육중한 그 글씨의 뿌리는 아마 한국 근대유학자 선비들의 기풍이 슴배여있다고 본다. 어디 그뿐이랴. 단정하고 명쾌하고 중후한 본인의 인격을 남김없이 발로하고 있는 것이다. 4. 문득 나는 안중근의 그 선명한 먹으로 찍은 장인에 네 손바닥을 갖다 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910년 6월, 12인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으로 왼손의 약지를 절단했기에 새끼손가락 사이즈와 같다. 천생 여자의 손같이 작은 내 손이였지만 안의사의 손은 의외로 내손만큼이나 섬세하고 작았다는 발견에 나는 다시금 놀랐다. 163센치의 신장인 안의사가 손이 항우의 왕손만큼 클 리는 만무했다. 그의 손은 분명 크고 투박한 무인(武人)의 손이기보다는 작고 섬세한 선비, 문인의 손 이였을 것을 나는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 역시 피아니스트나 화가의 손처럼 가늘고 긴 편이였다.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의 유학경전을 익혔던 그가 붓을 쥐였어야 할 손에 총을 쥐고 적장을 저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시대배경에는 바로 그 참담했던 역사와 민족의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안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역시 161센치의 왜소한 체구였다. 며칠 전 야마구치의 이토기념관에 전시된, 그가 입었던 조선통감복이나 속내의 실물을 보면서 그가 몸이 작았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기(奇)하게도 안중근과 이토의 생일은 모두 9월2일 똑같은 날 이였다. 이토는 1841년 9월 2일, 야마구치현(山口) 하야시(林)씨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뒤 이토가문의 양자로 되어 성이 이토로 됨)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순흥(順興)안씨 안태훈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했다. 할빈에서 사망 당시 이토는 만 68세노인, 안중근은 만 30세 청년 이였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결은 한일양국 민족의 대결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생일을 같이 공유했을 뿐 만 아니라 서로 원수이긴 했지만 그 인물의 성품 면에서는 모두가 양국의 위인으로서 공통점이 많았다고 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일본의 지한파 지식인의 한 사람인 교토대학 이토 유키오교수(이토 히로부미와 아무런 친척관계가 없음)는 작년 11월 600페이지의 대형전기(코단샤 간행)를 집필했는데 그는 이토와 함께 안중근연구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이토와 안중근의 관계를 논하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기묘한 느낌이지만 이토의 전기를 집필하는 작업과정에서 안중근의 성품을 알게 되면서 입장이야 달리 하지만 강한 정의감, 의지 등 면에 있어서 이토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토 암살자인 안중근에게는 굳은 신념으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토와 공통한 친절감 마저 들었다. 그렇다. 후세의 일본인 학자들까지 안중근에게서 자신들의 위인과 같이 동일한 위치에 높이 올려놓고 높이 평가하고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확고한 신조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98    3-7. 100년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댓글:  조회:5492  추천:21  2013-05-06
7. 100년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1910년 “한국병합” 선후의 100여년전의 평가를 보면, 제 3자의 시각에서 한국, 한국인 및 그 국민성, 사회상황에 대해 이해하는 좋은 소재로 된다. 또한 억울한 “한국병합” 역시 우리 민족자신의 결함에서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주기도 한다. 당시 서양인 관찰자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충전하는 기세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반면,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Land of the Moming Clam)로 아직은 전 근대의 잠자는 나라로 보았다. 일본에 비해 한국은 대체로 “부패와 착취로 점철된 사회”이며 “애국심이 결핍하며 더럽고 무례하고 게으른”표상이 주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이자벨라 버드숍(1831~1904), 조지 커즌(1859~1925), 헐리어(초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웨브 부인, 구빈스, 존 조든(주한영국 공사) 등 여러 서양인들 눈에 비쳐진 한국은 대체로 우리의 상상을 넘어 부정적 이미지가 많았다. 필자도 그들의 한국기록을 읽으면서 경악함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일본에 대한 긍정과 한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서도 대조적 구도를 이루었던 것이다. 1876년 헐리어는 서양인이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근대 중국”에서 갑자기 “근세 중국”으로 옮겨 온 곳으로 착각 할 만큼 “빈곳이 편재하고 게으름이 국민적 특성인 나라”로 모사했다고 말한다. 중국과도 비교해도 한국은 후진의 나라란 것을 그들은 발견한다. 그러므로 한국은 “문명퇴화”의 모델이었다. 1911년 한국에 왔던 웨브 부부는 “무지하고 미개한”, “더럽고 무식하고 미개한 사람들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살면서”, “문명개화가 안 된 농부의 나라”가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한다. 1893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 정치가 커즌은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엔 너무 부패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엔 너무나 쇄약했다” 라고 판단하며 “한국은 가장 잘 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로 한국 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지적한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주한 총영사로 부임한 헨리 코번은 고종을 비판하면서 성격적으로 우왕좌왕하는 약점이 있으며 많은 영국인들은 한국이 한마디로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고 자력 할 수도 개척 할 수도 없다면 외부로부터라도 개척해야 된다고 결론 내린다. 영국인 매크리비 브라운은 당시 저명한 애국자 관료 민영환에게도 공공정신이 결여하며 일본 지도자들과의 헌신적 희생과 대표적이라고 한다. 전봉준이 동학 농민 전쟁에서 체포된 다음 심문 받는 당시 중앙 정부의 탐관오리로 민영준과 함께 민영환을 꼽았다. 일제 침략에 목숨을 바쳐 반항한 애국자에게도 이런 숨겨진 ‘악’이 있었던 것은 충격적이다. 동경 주재 영국 영사 구빈스도 1902년 서울에 있는 적 이 있는데 그는 한국을 “완전 붕괴상태에 있는 동양 국가”로 묘사 하였으며, 동아시아 정세에 투철한 관찰가 새토우는 “한국을 에워싼 국제적 모순은 한국 정부의 허약함과 부패, 당쟁 싸움에 의해 조장되었다” 라고 지탄하면서 “터키가 유럽의 환자”라면 한국은 “동양의 환자”라고 표현한다. 1880년대 초에 일본을 방문한 적 있는 비숍여사는 한국인의 특성의 하나로 “시간관념이 박약하여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다” 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쇠락하고 죽어가는 나라이며, 황궁에서 최하층 빈민에 이르기까지 개혁에 집요하게 저항하는 보수주의 나라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그녀가 관찰한 한국의 모습은 서양문명의 “청결”이 결여된 “더러움”이었다. 북경을 보기 전 까지 서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비숍은 고백했다. 서양인들은 “서울은 눈과 코가 다 괴로운 장소”라고 했으며 반면 일본은 “거지도 더러움도 없는 근대성을 나타낸 곳”이라고 예찬했다. 따라서 “일본인은 몸과 옷이 다 청결하고, 한국인은 옷은 청결하나 몸에는 관심 없는데 중국인은 둘 다 청결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서양인이 본 동아시아 3국 청결 문명 비교론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영국인들은 한국을 “3천마리의 소를 기르면서도 30년 동안 한 번도 외양간을 청소한 적이 없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아우게이아스담의 마구간’”에 빗대며, 이것을 “청소 할 수 있는 자는 일본인뿐”이라고 판단했다.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인의 국민성을 대체로 “간교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고집이 세고 도덕심이 부족하며”, “남녀가 다 더럽고 씻기를 싫어하고 단정치 못하며”, “누워서 빈둥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사색을 즐기는 민족”이며, 공통적 특성은 “게으름”이라고 지적한다. 백년전 민족의 성격이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표상과는 너무나 괴리된 모습들이다. 비숍은 만약 한국인의 정직한 정부에 의해 산업이 흥하고 생계를 보호 받을 수만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성장 할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국내 정치의 부패와 착취가 원인이라고 한다. 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주재한 언론인 매켄지도 한국인의 사랑스러운 면을 발견하면서 동정적이고 일본의 진면목을 알자 반일태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에 비친 한국인은 “세상의 채찍 아래서 침묵의 무관심을 고집하는, 건강하지만 무관심한 양들의 나라”로 비유한다. 따라서 특기할 것을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정이 없고 국가나 집에 대해 자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영국인 관찰자들은 “한국이 어차피 독립국 자질을 가지지 않았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백년전 우리에게 발견되는 모습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히 강조할 만큼 민족심이 의외로 결여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이란 말이 백년 내지 80년전에 만들어진 단어이듯이 한국민족주의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형성, 보급된 것으로 이제 다시 봐야할 것이다. “한국병합”에 대해 결론은 “왕의 무능과 부패, 일반 국민의 무지와 무관심에 일관해있기에 자립이 어려우며 따라서 외부로부터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10년 영국의 여론은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계몽의 스승으로 한국을 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1928년 한국 경성제국대학에 와서 영어교수로 있던 영국 소설가 드레이크의 발언을 보자. “어떤 민족이 강압적 통치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 내부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조선이 악의 무고한 희생양들이라고 심약하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 서양인의 평가, 지적은 귀 아픈 소리이지만, 또한 “한국평화”의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혼재 되어있으나, 100여년전의 국민성, 사회실정, 정치, 경제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 매우 지대한 의미를 지닌 지적이다. 남의 탓, 비판도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자기 성찰은 그 이상으로 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97    3-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댓글:  조회:5520  추천:12  2013-04-29
  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1. 일본에 2. 이등박문이란 사람이 3. 삼천리 금수강산을 4. 사방에서 바라보고 5. 오적을 매수하여 나라를 앗아 갔기에 6. 육연발 권총으로 7. 칠발 쏘아서 8. 팔도 강산을 다시 찾으니 9. 구사일생의 왜놈들은 10. 십만리 밖으로 뺑소니치네.    한국 통감으로 사실상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할빈역두에서 조선 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조선인들이 지어 불렀던 숫자풀이 노래였다. 한국 통감 이토의 지배에서 받았던 그 울분의 한을 이렇게 민중들을 풀었던 것이다.    에서 기술했듯이 1905년 제2차 日韓協約(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한다. 당시 초대통감인 이토히로부미에 의한 보호정치가 시작된다.    최근 한국과 일본 및 서양학자들의 연구 (한명근, 이토 유키오, Beasley)에 따르면 이토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하여 “자치 육성 정책”을 실시하며 일본이 실권을 쥔 지배방식을 시도했다. 따라서 그는 의도적으로 한국인에게 親韓 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썼다.    《大邱物語》(가와이(河井朝雄)1929)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일본정권대사로 한국에 온 그는 한성근처의 농민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천진난만하게 담화를 즐겼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 같이 한복차림으로 노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 행동에는 자신이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일본과 한국은 한집안이라는 정치적 은유가 숨어있다.(최재묵)”    《伊藤博文傳》(春畝公追頌會1940)에 그가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1906년 1월 이지용, 박희병과 그들의 부인들과 나란히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이토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서 이토의 왼쪽 앞줄에 앉은 여성이 이토의 부인 우메코(梅子)인데 역시 한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복이 한민족 전통의 상징이며 민족의 심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토는 숙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한복을 입고 한국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표상을 적극 자작하였다.    그의 각종 전기, 회상기를 섭렵해 보면 이토는 명예욕과 자부심이 유난히 강했는데 자기 현실욕과 그 표현력의 강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금전욕에는 담박했으나 색욕과 현시욕에는 출중했다고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자연히 그런 이토가 한복차림으로 자신의 “親韓ㆍ知韓ㆍ愛韓” 표상 수립에 적극 자작자연 했을 것이리라.    영남대학 최재묵 교수의 말을 빌면 “한복을 입는 이토의 행위는 한국의 제도나 전통을 존중하며 일정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시늉)였다. 그것은 한국 민심 향배(向背)에 부심한 일종의 계산된 정치적 연기이기도 했다.”    “한복차림의 이토”, 문인답고 선비다운 풍모를 1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느낄 수 있는 사진이다. “한국 침투의 선두주자”란 한국교과서의 기술은 맞다. 그런데 침범하여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해 우리 자신도 모호하다. 그리고 “극악무도”의 인물이란 평은 사실과 어긋난다. 최근 속속 등장되는 이토 연구서나 전기에 의하면, 필자는 우리 동포가 표상으로 막연히 인식하고 있는 이토의 인물상은 너무나 조잡하고 편향적이다 라는 것이다.    이토가 중요한 것은 한국식민의 설계자적인 위치의 대극에 있는 원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 교육의 “신성한”차원에서 이토는 반드시 “악의 상징”으로 평가 절하해야 되고, 지어 왜곡해도 무관하다는 태세다. 이런 문화상태주의가 결핍한 민적정서의 “유치성”이 곧 우리 민족의 이토관 내지는 한일역사에 투영된 한계이기도 하다. 역사는 단순히 민족 정서와, 민족의 뜻으로 풀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룰을 우리는 짓밟고 있다.    필자가 새로 발견한 이토의 인물상, 한일관계에서 노정된 이토는 “극악무도”로 일축한 인물이 아니며 안중근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듯, 그 역시 일본의 근대를 만든 영웅적 거물이며, 또한 일류의 정치가, 사상가, 정략가란 당대의 대표적 인물이란 것이다.    이토의 이름 博文은《論語》의 “君子博 學於文, 約之以禮”에서 따 온 것이며, 文을 숭상한 문인, 시인형 정치인이었다. “文明”, “立憲國家”, “國民政治” 가 그가 노린 평생의 이상이었으며, 한국 통치의 정치적 철학은 “일본국민을 문명의 인으로 계몽하듯이 문명정치를 한국에서 실시하고 싶은 것”이였다.  1906년 그는 니이토베 이나조(新戶渡)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은 대단하다. 이 나라 역사를 보아도 그 진보는 일본보다 월등 앞선다. 이런 민족이 나라를 스스로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정치가 나빴기 때문이다. 나라만 잘 되면 인민은 양과 질에 있어서도 부족한 점은 없다.”(《니이토베전집5권》)    이토는 한국의 기존 질서, 가치관을 되도록 존중하며 점진적 문명국으로 전환 시킬 꿈을 안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국 유교 소양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 유림을 활용하려 했으나, 한국 유교적 사상이 하나의 보수 사상으로 한국의 개혁을 막고 있는 보수파라는 것을 실감한다. 마치 중국 무술변법시 유교적인 보수파층과 같이 한국에도 중압적인 존재가 되었다. 유교에 대한 회유책을 시도했으나 드디어 실패한다. 그의 “문명화”는 유교권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 채 흐지브지 해진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 전통과 민족성에 대해 관심을 돌려 한국에서 교육에 종사한 일본인 교사들에게 한국국민성 존중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통치구상에서 새로 발견된 메모에 다음과 같은 플랭이 보인다. “①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衆議院)을 조직한다. ②한국 문무양반 중에서 각 50명 원로를 호상 선출하여 上院 을 조직한다. ③한국 정부대신(大臣)은 한인으로 조직하고 책임내각을 구성시킨다. ④정부는 부왕의 수하에 속 한다”. ( 堀口修等編)    이토는 1909년 4월에야 한국병합을 인정하며 병합 후에도 한국의 정치자치를 주장했으며 의회 정치를 통해 한국의 문명화를 실현하여 장래 한일 동맹을 구상했다고 밝혀졌다. 그런데 이토의 암살로 그의 플랭은 편의 종이조각으로 남고 말았다. 이토가 자신을 저격한 인물이 조선청년이라는 것을 알고 절명직전에 남긴 “바보 같은 자식”이란 말의 뒤에는 자신의 진의를 모르고 자신을 원수로 저격 했다는 뜻이였을까? 그 뒤 합방이 정식 이뤄지고 이토의 구상과는 달리 데라우치(寺內)초대 조선 총독의 가혹하고 강압적인 무단(武斷)정치에 들어선다. 이토가 살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으로 그 공백을 매울 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이 이토의 진의를 몰랐다 해도 그의 죄가 아니다. 죄는 수단의 이하를 불문하고 이 민족을 지배하려 했던 이토와 일본제국주의에게 문책해야 한다.  
96    3-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댓글:  조회:5330  추천:10  2013-04-20
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백여년전 한중일 근대사 궤적을 조감하면 3국의 근대화 성공여부의 선로가 선명히 부상한다. 중국과 한국은 늘 자부감을 느낄 정도로 ‘문’의 사회 였고, 일본은 반대로 ‘무’의 사회였다는 점이 일목 요연히 알린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핵으로 구성된 “문인”에 의한 문치 사회와 전통적 상무정신의 핵으로 이뤄진 일본의 무치사회는 지극히 대조적인 사회 및 문화패턴이었으며, 그 가치관, 행동양식은 역시 대조적으로 이질적 양상을 노정했다. 그런데 필자가 불가사이하게 느낀 것이라면, 지금 껏 중한일의 이 대조적인 문, 무 세계에 대해, 중국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문”이 한수 위이고, 우수한 반면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문화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열세로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중국과 한국이 야만의 무사에 일시 패배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오만해지며 문의 문화가 왜 무의 문화에 패배했는가 그 원인규명의 자아성찰은 거의 누락돼있다 필자가 동아시아 근대사 해독 작업에서 재발견 된 것은 우리가 일본무사문화를 그냥 “야만, 잔혹, 폭력”이라고 냉소적인 경멸로 일축할 사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언이폐지 하면, 근대 조선, 청국이 경시하던(지금도 변함없음) 무사 문화의 그 실속을 모른다면 그것에 패북당할  가능성이 없지않다. 이것은 근대 중, 한이 일본에 근대화 경쟁에서 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100여년이 지난 오늘 날 현대 21세기의 진로에도 이 원인에 의해 중한일의 미래가 규정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의 행동양식, 가치관은 무엇일까? 역사에서 노정된 그 양상을 정리하면 그것은 “실무성”과 “혁명성”으로 귀추 할 수 있다. 우리가 늘 얕잡아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낱말로만 일축 할 수 없는 근대적 원리가 일본의 무사 문화 속에 내재해 있다. 이에 비교해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유교정신을 토대로 한 독서인, 지식인 즉 文人문화의 “공론성(空論性)”과 “문약성”으로 귀추 되는 행동양식, 가치관이며, 항상 앉아서 쉽게 안이하게 이루려는 비생산적인 발상이다. 일본 무사가 늘 칼을 거머쥐고 생활의 현장에서 행동적인 것에 반해, 중, 한의 유교 신사, 선비는 늘 붓을 쥐고 탁상에 앉아 논쟁을 즐기며 생의 현장에서 행동, 실천을 기피해왔다. 생각만 하고 행동은 결여했던 치명적인 결점, 즉 행동력과 혁명력의 결여 그것이었다. 상대로 일본의 무사계급은 사고 한 뒤 그 플랭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이 신속히 따랐던 것이다. 상징적인 역사 인물을 들어 보자. 서양의 충격에 의해 개국을 하게 되는 데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 행동양식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의 사카모토료마(坂本龍馬), 타카스기신사쿠(高杉晉作)등 지식인이며 무사인 그들은 당시 서양 열강에 통용된 국제법 저작 《만국공법》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권총사격술도 익숙했다. 이렇게 국제 지식과 실용적인 무기사용을 직접 장악 할 만큼 실무정신이 뛰어났다. 그러나 청국의 지식인들, 즉 문인들은 책만 붙들고 탐독하면서 논쟁 설전을 벌이기를 즐겼다. 위원, 엄복, 강유위 누구하나 실무적인 권총을 손에 쥘 생각조차 못했다. 조선의 선비들 박규수, 김윤식 당대 일류의 지식인 역시 사대주의적 공론에 치우쳐 두 번의 양유체험을 거치면서도 실용적인 “무”가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누구하나 제기하지 못했다. 과거(科擧) 제도의 시스템에 의해 문화력을 과시해온 문인 지배인 중국에서는 정말 문인 관료가 2만명, 무관 7000명이었으며 총 지방관원수가 200만도 안되었으나, 이 소수의 문인 엘리트 사회가 4억 남짓한 인구를 지배해나갔다. 당시 일본은 3300만 인구에 무사계급 189만의 방대한 체계로 일본 전체를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인 관료계급은 상대적으로 작은 숫자였지만 독립자주 할 필요 없이, 매판 무역에 의해, 국가의 봉록으로도 윤택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만으로 전무사계급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무사들은 경제, 산업 개혁에 지대한 열성을 보이며 서양의 모방과 함께 “물건 만들기” 제조업에 힘을 기울인다. 원래 실무정신이 강한 그들은 부국을 강병의 토대를 하여 식산흥업에 혼신을 다한다. 1892년 일본 산업 기업 수는 3065개, 총 투자 수는 1억 6371만원에 달한다. 그런데 청국의 “양무운동”은 1860년에 시작해 산업의 수나 투자 수에서나 일본의 규모에 비교가 안 된다. 1894년 통계에 따르면 제조 기업이 15개, 총 투자수가 2796,6만원이다. 양무파와 민간기업 수나 투자액에서 일본과 전혀 견주지 못할 저수준에 머물렀다. 문인 계층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대 중국의 유신은 실무정신과 혁명성에서 모두 일본을 뒤따를 수 없을 만큼 박약했다. 일본의 근대공업이 “물건 만들기” 제조업적인 실무 형에 비해 중국의 경제모델은 과잉노동력, 인재, 기술 부족 하에서 “배를 만들기보다 배를 사는 편이 낫고, 배를 사기보다 빌리기가 낫다”는 안이한 쉬운 산업원리를 고안 해냈다. 그리하여 자기민족의 기간산업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경제 산업의 근대화는 “그림의 떡”에 그쳤다. 사실 따져보면, 백년이 지난 오늘도 이 같은 기업원리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개혁개방 40년이 되어 오도록 방대한 민족 기간산업이 축적, 형성되지 못하고 세계의 기업을 위해 알바를 하는 “세계 공장”이란 한계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근대 문인계급의 혁명, 개혁에서도 혁명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귀족계급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일본의 무사들은 새로운 서양 관념과 기술에 그 실무성과 혁명성을 발휘하여 익숙히 수용하여 과학과 사상을 토대로 한 근대화 모델을 터득한다. 그들이 우선 목을 벤 것은 자신들의 목이었다. 혁명의 목표도 뚜렷했다. 중국과 조선은 다 같이 문인계급의 결정적인 결함으로 근대혁명은 산업면이나 사상면 사회면에서도 성사 시킬 수 없었다. 근대 한중일의 성공여부는 사실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가지 문화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비교, 분석, 성찰할 의미는 매우 크다.  
95    3-4 검디검게 먹칠한 조선 지도 댓글:  조회:5763  추천:13  2013-04-02
4. 검디검게 먹칠한 조선 지도   1910년 8월 29일 이 발표되면서 일본 관인이 환희의 광란 드라마 벌이며 그것을 찬미하고 있을 때, 단 한명의 일본인이 한국병합에 대해 비판했다. 그가 바로 그 당시 일본의 국민적 시인이었던 25세의 젊은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琢木 1885~1912년)였다. 8월 29일 직후의 시점에서 매스컴을 통해 한국병합을 비판하면서 조선민족에 지대한 동정을 보인 인물은 단 이사카와 한명이었다.   지도위의 조선국에 검디검은 먹으로 칠하니 쓸쓸한 추풍이 들린다 1910년 9월 9일에 읊은 이사카와의 단시(短詩)였다. 조선 지도를 흉사에 사용하는 먹으로 검게 칠하면서 가을바람의 쓸쓸하고 매서운 오한을 느끼는 심정을 남김없이 표현한다. 일본제국의 침략에 반대하고 망국의 민이 된 조선 민중에 대한 뜨거운 동정과 연민의 눈물을 타쿠보쿠는 쏟고 있었다. 일본전체가 꽃전차를 타고 초롱불을 들고 희열의 극치에 달한 그 상황에서 정면에서 이의(异意)를 표하고 과감히 제국을 비판한 그 담량과 시적 기량은 모두 최일급적이었다. 사실 1년전인 1909년 10월 할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 했을 때, 타쿠보쿠는 안중근을 영웅다운 행위로 예찬하는 시구를 썼다. “영웅답게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의 소문 항간에 널리 퍼지네.” “그 누가 나를 권총으로 쏘아보라, 이토같이 달갑게 죽여 줄테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중근을 “영웅답게도” 순국한 의사로 존경했으며, 이토를 그토록 존경한 타쿠보쿠였지만, 역시 한국의 영웅에게도 존경의 념을 표했던 것이다. 당시 타쿠보쿠는 이토의 죽음을 “위대한 정치가의 위대한 심장은 신일본의 경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고동을 멈추었다”고 가슴아파하면서도 이토를 쏜 “한인”에 대해 “아직도 진짜로 증오해야 할 까닭을 모른다” 라고 고백한다. 패자, 약자에 대하여 응시해왔던 타쿠보쿠는 강자 일본의 강폭한 소행이 안중근과 같은 약자들의 의거를 초래했다고 휴머니즘적 입장에서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인”을 증오해야 할 까닭이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약 일본인으로서의 자기가 피지배자인 그 누구가 권총으로 쏘아도 기꺼이 죽여 줄테다고 죄책감을 솔직히 고백한다. 타쿠보쿠는 메이지 시대를 한 복판에서 살아온 견증인으로서 그 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침략, 팽창한 국가주의에 인식을 가하면서 약자에 대해 강렬한 동정을 품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따라서 국가주의에 의해 팽창된 식민확장, 지배에 대해서 그는 과감히 비판하는 인물이었다. 1910년 8월 29일 관보 号外에 메이지 천황의 한국병합에 관한 조서(詔書)가 공표되는데 그것은 그 어떤 국민의 비판과 발발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절대다수의 국민과 지식인들마저도 국가주의에 팽배한 동조와 영합을 보인 상황 하에서 타쿠보쿠와 같은 일본 국가주의의 제국주의와의 서어(齟齬) 및 정면대결은 너무 쉽지 않았다. 일본을 “시대의 폐색(閉塞)”의 나라라고 29일 그늘 비판하는 글을 쓰며, 메이지 천황의 그 에서 언급한 “조선총독을 설치하여 육해군을 통솔하여 제반 정무를 출발한다.”는 군정을 실시하려는 신언에 혐오감을 느낀다. 8월 30일 에 “大日本帝國의 전 ”와 “新版圖조선”지도가 게재되었다. 일본지도와 조선지도가 한 가지 빨간색으로 되어있었다. 일본판도에 들어온 잃어버린 조선지도였다. 곤도(近藤典彦)의 논고에 따르면 실제로 타쿠보쿠가 조선지도를 펼치고 그 위에 검은 먹으로 칠하면서 시구를 썼다고 한다. 일본제국에 의해 삼켜버린 조선의 불행을 “지옥”으로 보면서 다쿠보쿠는 그 어설픈 가을바람을 들었다. 이어 다쿠보쿠는 으로 제목한 단시 전제 345의 시에서 한국병합의 비참한 단시 몇 수를 또 써내려간다. “메이지 43(1910년)의 가을 내 마음은 더없이 참말로 구슬프구나” “어쩐지 야비해 보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 위로 가을바람 스친다” “가을바람은 우리 메이지 청년의 위기를 슬퍼하는 얼굴 애무하며 불어온다” 다쿠보쿠는 쓸쓸한 추풍과 비애를 모티브로 일본제국, 국자주의의 비애와 함께 일본제국주의 팽창으로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인의 비애를 읊는다. 1906년 사회주의자 코도쿠슈스이(幸德秋水)의 영향으로 다쿠보쿠는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국자주의를 비탄하고 조선 경멸론을 지탄하게 된다. 1911년 6월에 남긴 “코코아의 한술”이란 시에서 다쿠보쿠는 “나는 알고 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하고 읊고 있는데 여기서 “테러리스트”란 이토를 쏜 안중근을 칭한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적인 안중근에게 깊은 이해와 동정을 표했다. 그것은 전 조선민족에 대한 이해이기도 했다. 일본 현대 저명한 지식인 츠루미(鶴見俊輔)는《현대 일본 사상사》에서 이렇게 타쿠보쿠를 높이 평가 하고 있다. “이 한일 병합이라는 정부의 행동이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해 어떻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 상상을 여러모로 구사한 역량을 갖춘 일본인은 당시 흔치 않았다. 이사카와타쿠보쿠라는 시인은 그 흔치 않은 한사람이었다.” 이런 일본 시인에 대해 한국에서도 일찍 숭모한 지식인, 시인들이 있었다. 저명한 문학자 김기진(金基鎭)(팔봉)은 1920년 일본 유학당시 타쿠보쿠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1932년 김상회(金相回)가 타쿠보쿠의 시집 를 에 변역하기도 한다. 1960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전에 시인 김룡제(金龍濟)에 의해《타쿠보쿠 시집》이 한국에서 정식 번역 출간되며 그 뒤로도 대역형식으로 다수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타쿠보쿠의 사상과 인물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미개척지에 속한다. 일본의 강제병합에 대해 비판하지만, 우리는 일본인 중에서도 우리 같이 일본제국을 비판한 천재(天才)적 시인이 있었던 것에 너무 어둡다. 타쿠보쿠는 조선인과 피압박 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야 하고 이해해야할 일본인의 양지를 갖춘 희소적 가치의 인물이다.  
94    3-3.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 댓글:  조회:5325  추천:20  2013-03-26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3장역사란 何오 3.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   한일 병합 10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지배 36년에 대한 역사적 기억. 식민지의 기나긴 경험은 당한 조선민족의 영혼에 지지리 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회억 자체도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덧나는 상처처럼 꺼내기 싫은 과거 일지도 모른다. 행, 불행을 떠나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 근대 역사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닌 역사 과정이었으며, 조선의 그 이후의 역사를 규정짓는 큰 구실을 했던 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는 조선, 일본, 중국의 근대사 100년의 수없이도 많은 자료 문헌을 섭력하는 과정, 일본 식민통치를 당한 피식민지자의 후예로서 가슴 아픈 대목들을 많이 조우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역사가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어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의 피와 살이 된 것이니, 무조건 덮어 감추거나 왜곡, 무시 할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일본과 같이 무섭게 동질적 사회, 문화를 이룬 우리 민족은 나 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반대편에선 적, 상대에 대해 비관용적이다 라고 한국의 석학 이어령 선생도 필자와 대담할 때 지적한적 이 있다. 증오의 감정 역시 늘 동질, 균질적이어서 우리 아닌 남, 타자, 특히 일제와 같은 대상은 무조건 증오의 타깃이되어, 그 시대에 대한 모든 역사적 해석 역시 “증오”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거의 어느 하나 누구의 이론(異論)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태세로 기세당당하다. 그런데 증오의 절대적 감정, “정의(正義)”에 눈가려 망각할 것은 이성적인 자기 성찰과 반추라는 중요한 팩터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제감강정식민시기를 다룰때, 학문적인 접근이든, 대중적인 언설이든 사석에서의 잡담이든 대개가 지극히 동질, 균질적 양상을 노정한다. 즉 일제통치의 역사적 시간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피부로 느낀 감각이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풍화”내지는 단순한 “관념화”란 여과장치를 거쳐 무조건 “저항사관”아니면 “매국친일” 2항 대립구조로 일축해버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여기서 빼놓고야 말았다.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이 인간의 일상에 의해 지탱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상”을 담론한 여지가 우리 민족에게 없다.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거의 이야기 하지 않고 꺼리고 있다. 역사란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많은 역사 공간 시간은 오히려 그 정치체제하에서 생활해온 보통일반인의 “일상생활”에 의해 전개해온 것이 아닌가. 최근 다행히도 일제식민시기의 일상생활을 반영하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어 세상의 햇빛을 보고 있다. 《내가 조선반도에서 한 일》(마츠오 시게루),《일본제국이 점지해준 아이들》(카터 엣커트),《일본 통치하의 조선진북의 역사》(사카이 도시오),《생활자의 일본통치시대》(오선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타카사키 소오지) 등 저작이 나타나면서 일제식민시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에 대해 그 진실을 규명하고 있다. 그것을 잠깐 들여 다 보기로 하자. 서울의 일본인은 줄지어서 다다미를 깐 일식가옥의 거리를 형성하여 살고 있으며, 이런 일본인 사회와는 거리를 둔 조선인의 집에서는 라디오 제2방송(조선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 중계를 듣고 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는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빨래 방망이질을 하면서 환담하고 있다. 종로거리의 영화관 앞에서는 신작 영화를 관람하고자 행렬을 지어 있는 조선인들. 물만두를 열심히 파는 중국인의 모습도 보인다. 손님으로 만원을 이룬 화신(和信)백화점. 카페 여급과 환담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남성 취객. 사쿠라를 꽃구경하는 덕수궁의 화창한 봄 풍경. 학교에서 공부를 게을리 해 버들 회초리로 맞는 아이의 비명 소리. 얼음이 석자 두께로 언 한강위에서 썰매를 씽씽타는 아이들. 길을 물어보는 일본인에게 친절히 가르치는 예쁜 조선 아가씨. 이런 것들이 식민지 시기 당시의 하나하나의 풍경이다. 일제시기 일상생활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아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도 않았다. 서로 문화가 다른 민족이 같이 살다보면 알륵과 반목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는 인류학이 이미 실증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특히 도시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반목이 심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배 내밀고 딸깍 딸깍 게다 소리를 내며 으스대던 일본인을 조선인은 아마 덜 반기는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전후, “고향”을 찾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제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일제시대의 역사를 굳어진 이데올로기 일색의 저항, 친일, 2항 대립구도도 좋지만 그것을 넘어서 보다 생활, 실제 모습에 접근하는 인식방법이 필요하다고. 역사를 이룬 일상의 실상을 통해 우리와 타자의 과거를 알고 재인식 하는 것은 서로 유리하지 않을까.  
93    3-2. 조선말기 사회 진상은 어떠했는가 댓글:  조회:5157  추천:16  2013-03-18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3장역사란 何오 2. 조선말기 사회 진상은 어떠했는가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으로 조선은 망국한다. 물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이미 실질적으로 조선조의 망국은 시작되었다고 해야 한다. 500여년간 우리 민족의 “국가”로 구실을 해오던 조선조는 철저히 사라져 버렸다. ‘조선왕국의 망국, 왜 조선이 망했는가?’의 진짜 원인을 인식하려면 우선 몇 가지 막연한 통념에서 탈피해야 하며, 그 당시 조선조말기의 사회와 삶의 진상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통념의 하나가 식민지 되기 전의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상 조선 왕조는 대부분 시간 명, 청의 조공관계 시스템에 의한 예속국이었다. 형식적으로 독립된 모양새만 갖추었을 뿐 외교국제법의 기준으로 조준해 보면 “비독립국"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중국대륙을 중심, 정점으로 한 동아시적 천하 체제(天下体制)에 예속된 속국으로서, 1904~05년 청일 전쟁을 계기로 이 체제가 붕괴된다.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이 1905년인 것은 바로 중국의 예속에서 이탈된 때를 같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우리의 통념의 하나는 일제 식민지로 되기 전 조선은 매우 좋은 사회였으며 민족주의라는 관점을 투영시켜 조선의 일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타자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부정하려는 점이다. 또한 이런 통념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이 통념에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가령 이 통념을 뒤집는 증거, 사실이 눈앞에 나타나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조선조, 특히 그 말기 진상은 어떠했을까? 이런 물음에 준비된 답은 결코 긍정적이고 좋다는 것만은 아니다. 우선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 지배 시스템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 특질로서 노예제도가 엄연히 존속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조선왕조 시초부터 말기까지 노예제도는 조선 사회 지배 및 구성 원리의 중추였다. 조선 말기 외국인 관찰가들의 조선 방문기, 조선인론의 숱한 저작, 저술 중에도 조선의 노비라 칭해진 노예가 대단히 많았으며, 그 노예들이 피땀 흘린 노동으로 조선 통치, 사회가 움직이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고려조 초기부터 전해온 노예제도는 500년이 아닌 1000년을 유지해왔다. 15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사회지배원지를 제공한《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아도 노비들을 인간이하 가축식 재산처럼 취급한 비참한 현실을 발견 할 수 있다. 1894년~95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은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조선인들이 모두 평등한 인간으로 되도록 한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일본의 압력, 또는 협력으로 성공한 이 혁명이 일본인 타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사실은 명치 혁명에 성공한 일본인의 경험이 갑오경장의 성공을 보장해주었다. 다음으로 근대의 큰 표징인 교통도로사정을 살펴보자. 조선왕조 500년간 조선에는 사람이 통과한 안전한 길이 없었다는 증언이 많다. 그래서 새로운 관리가 부임되면, “이번 오시는 길에 진흙탕에 몇 번 빠졌습니까?” 라는 것이 인사말이었다. 간선도로도 우마차, 인력거가 겨우 지날 정도로 대부분 논두렁길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요간선도로인 서울과 의주를 이은 도로는 종주국 청국의 사신이 왕래한 까닭에 유일 도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중요도로도 보완공사가 필요할 때가 많아서 보수경비를 현지에 보내면 3/4은 도중에서 지방 관리들이 횡령했다고 한다. 결국 경비는 상민, 천민, 노비들에서 가렴주구로 거두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모든 하천에 거의 다 다리가 없었으며, 조선왕조 이전에 있던 다리도 부스고 말았다. 이씨 조선이 고려를 반역하여 탈취한 정권이므로 그들의 역습을 경계하여 군대가 진군하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셔버렸다. 가령 다리가 있다 해도 여기저기 구멍이 있어서 현지 사정을 모르는 자가 밤길에 그 다리를 건너다가 구멍에 빠져 떨어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때문에 다리(足)와 다리(橋)의 발음이 동음이라고 한다. 매년 강 건너다가 죽은 사람이 많아서 각지에서 진혼제를 지냈다고 한다. 도로사정 하나만 보아도 당시 우리 선조들은 지극히 궁핍하고 빈약한 경제사정하에 “근대화”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영위했다. 인류생활의 근대화의 표징인 교통이 좋아진 때는 1894년 일청갑오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철도가 생기고 1896년 경인선 38.9km를 일본기업이 미국인으로부터 매수 한 뒤 1900년 7월 8일 전선이 개통된다. 서울-인천간 5,6일 걸린 것이 2,3시간으로 통했다. 서울 양반들은 처음 보는 기차를 철마(鐵馬)라 불렀으며 별 목적 없이 하루 종일 기차 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은 양반들도 많았다고 한다. 경제, 정치의 근대적 혁명, 개혁을 조선조 정부는 끝내 자주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복거일씨의 말을 빌면 “조선정부에 대해서 실망한 지식인들이 눈길을 돌린 곳은 일본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조선이 저항할 만한 전범을 보았다.” 출판된《윤치호 일기》를 읽으면 조선조 말기가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며 부패했고, 현명하지 못하였으며 스스로 자기개혁을 못했다는 사실이 재발견 된다. 조선 말기의 가장 탁월한 개혁파 지식인의 한 사람인 윤치호는그때의 조선을 두고 “아아 슬프다, 조선의 현상이여. 남의 노예노릇 하는 것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어찌 떨쳐 일어나려 하지 않는가!” (《윤치호 일기》송병기역, 1883년 1월 2일자) 라고 통탄한다. 또 일제시기 최일류의 민족 독립가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 역시 “조선의 실태와 일본의 성공을 보면서 조선에 실망, 체념을 일본에 대해선 우려와 기대를 아울러 갖게 했다.” (복거일) 조선조의 망국은 근대화 조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진 그 자신의 원인이 더 컸던 것이다. 결국 일본이 조선조의  근대화를 도와준다는 구실을 준 것 역시 조선조 정부였다.
92    3-1. 역사란 何오 댓글:  조회:5831  추천:24  2013-03-05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3장 역사란 何오 1. 역사란 何오 - 내가 중일한 근현대사에 집착하는 이유 0. 우선 제목의 해석으로 부터 글의 서두를 시작한다. 이 타이틀은 내가 가장 숭경하는 근대 조선의 최고 지식인 춘원 李光洙 선생의 명문 를 본 따서 지은 것이다. “문학”이 지식인(작가, 시인, 평론가 등)에 의해서 발설, 전개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역시 많은 지식인에 의해서 기술, 해석, 계승 되는 것이다. 역사를 쓰고, “창조”, 해석, 전승 시키는 것은 주역은 어느 시대든 그 나라, 사회, 집단의 엘리트들인 지식인의 몫이다. 역사가 고전적 의미의 “히스토리(이야기)”, 그리스어에서 “조사, 탐구”의 의미를 내포한 “서술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의 서술의 주역은 항상 서민, 대중이 아닌 지식인(학자, 문학자 등)이다. 그런 “이야기”를 고급스러운 이야기라 직언한 인물은 저명한 역사학자 E.H 카아(Carr)이다. “역사란 과거가 현대의 들려주는 이야기, 고급스런 이야기”라고 찍어 말한다. 역사, 그리고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적 영역으로서의 “역사학”이 지식인에 의해 창발, 진행, 전승한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역사”, “문명사”이기도 하다. 항상 역사의 주역을 담당해 시대를 리드한 엘리트 지식인. 1. 과연 지식인은 누구인가? 역사 속에서 동양사에서는 사대부(士大夫), 독서인(讀書人)으로 칭했고, 서양에서는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및 인텔렉추얼(intellectual)로 시대를 리드 해온 계층이다. 제정 러시아 사회 안의 지식인들로서 서구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노예제, 전체주의에서 인민 해방과 정치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킨 지식인이 바로 인텔리겐치아라 일컬어진 지식인이다. 근대 유럽에서 지식과 최고의 교양을 고안해냈고 발전, 확대시킨 자가 인텔렉추얼이라 칭해진 지식인이다. 필자의 이해로서 “진정한 지식인은 사회 체제에 적응, 순응하기 보다는 변혁을 통한 발전을 시도하고 그 방향을 지적하는 것이어야 하며, 사회의 경향, 약점을 지적, 해부, 비판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체제나 권력에 곡학아세 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사명감으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며 사회의 암 따위를 제거하기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체제와 기성권력에서 꺼리는 인물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이 나라나 소속집단, 민족을 위해서 진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장악한 지식, 정보를 모르는 대다수 대중에게 전달하며, 진실을 말하는 장악한 지식, 정보를 모르는 대다수 대중에게 전달하며, 역사, 특히 다치면 터질 것만 같은 민감한 역사의 판도라 함을 열고 진실을 감히 파헤치는 의식과 용기, 그리고 대담한 실천력이 있어야 한다. 비록 체제 내에 살아 남기위한 “적응”을 꾀하더라도 환관 같은 무절조의 곡학아세 보다, 체제의 개혁, 진보를 위한 건설적 지적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것에 지식인의 사명의 큰 아이템이라고 여긴다. 나는 조선족 지식인에 두 부류가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침묵하는 연구자, 행동자와 말하는 비연구, 비행동자. 전자는 실제로 묵묵히 자신의 신조에 따라 창조적, 생산적인 연구, 글쓰기에 전념하는 지식인. 후자는 실제로 말수는 많고 잡 글은 많이 쓰지만, 일관성이 없이 창조적, 생산적 연구, 글쓰기가 아닌 어떤 “특정적 지식인의 창조적 생산적 연구, 글쓰기”에 매달려 흥분하고 비난 하는 일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는다. 나는 후자로부터 수많은 비난의 화살을 맞아온 전형모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필자는 성격상 초식동물이어서 제 풀만 먹고 그런 자질구레한 데 신경 안 쓰는 타입이다. 내가 가장 기피하고 경멸하는 것이 아무런 창조적, 생산적 활동과 글쓰기가 아닌 비창조적, 비생산적인 타인 공격의 소모전이다. 필자는 그런 에네르기를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조에 따라,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슬로건이 아닌 실제로 지식인의 사명감(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민족, 국가 및 사회에 유익한)을 무언가 실천으로 옮기는 것에서 생의 보람을 느끼는 지식인이다. 또한 그런 자부심을 상실하지 않고서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제 갈 길을 나갈 터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흑싸리 껍데기를 벗어 던진 진정한 지식인의 지조, 산앙, 의지에 필자는 스스로 충실하면서 껍데기를 탈피시킨 가장 진실을 말하는 자유의 지식인을 겨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구가 있다. 우리 겨레의 당대 지식인, 시인 신동엽의 명시이다. 여기서 전 시를 인용하면서 독자 제현과 共賞하고 싶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일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거추장스러운 허위, 이념의 “껍데기”. 그런 모든 “껍데기”를 백안시 하는 나의 신조와 태도를 잘 대변했다. 그래서 이 땅위의 모든 “껍데기”를 제거하는 글쓰기가 필자의 국경을 초월 하면서 진행하는 실천인 것이다. 2. 이 같은 나 자신의 지적(知的)실천을 지탱하는 지조를 언명하고자 한다. 나는 우리 조선족의 척박한 지적 토양을 두고 객관화 시키면서 항상 슬픔 따위에 가까운 비애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 역설(逆說)적 의미에서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해외나 국내에서 활발한 지(知)적 창조, 글쓰기, 연구 활동으로 불언실행(不言實行)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정신사적으로 족적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거만한 소리라는 빈축을 살 위구를 무릅쓰고 라서도 명언하고 싶은 사연이 있다. 즉, 현재 21세기에 접어들어, 나를 포함해서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펼치고 있는 모든 지적활동은 척박하고 빈약한 조선족의 정신사(문화사)에 거의 다 “최초”라는 숙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사료된다. 어쩌겠나, 워낙 우리의 지적 풍토가 그토록 박약하고 미개척지의 처녀지가 많으니 말이다. 100년전 최남선, 이광수 등 우리 겨레의 선각자들이 진행했던 모든 문학적 활동, 글쓰기가 죄다 처녀지를 개간했다는 의미에서 우리 겨레 근대의 정신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정비(里程碑)적인 족적을 남기었다. 당시의 정신사를 펼치면 이광수, 최남선들이 동족의 타매와 찬성을 동시에 받았다는 양상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지금도 그 타매는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 자신의 정신을 흐리우기도 한다. 모든 선각자는 타매 당하기 마련이다.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현재 펼치고 있는 왕성한 미증유의 지적 모험은, 역시 선구적인 성격을 불가피적으로 띠고 있기에 수구파 조선족 지식인의 비난과 중상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3. 이제 드디어 내가 왜 한중일 근현대사에 매달리는가? 하는 졸문의 주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우선 당연히 “역사”담론으로 시작된다. 나는 전공학문 영역이 역사학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역사에 매우 심취해 있다. 문화인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한중일 비교문화를 하다 보니, 역시 “문화로서의 역사”가 꼭 문화자체를 영향주고 지탱하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옛날의 학교 교육에서 받았던 역사 교육과 역사의 진실이 너무나 상이(相異)하다는 “발견”에 항상 충격을 받곤 했다. 지금도 그런 역사 진상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지적 흥분은 여전히 20대 연애 하는 심정에 못지않다. 이렇듯 역사의 진실을 하나 또 하나씩 캐나 가는 것은 마치도 금 노다지를 캐고 산에서 산삼을 캐는듯한 희열, 경이, 흥분, 감개의 지적(知的) 쇼크의 연속이다. 따라서 나는 늘 “역사란 무엇일까?” 하는 자문자답 해보곤 하는 버릇이 있다. 이글의 제목이 가 곧 현대 우리말로 풀이하면 “역사란 무엇일까? 이다 “역사”개념자체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다양하고 잡다하다. “문화”의 개념해석만큼이나 다양한 기술로 돼 있다. 호적이 말했던가, “역사란 임의로 분장시킬 수 있는 아가씨”라고. “아빠, 역사는 무슨 역할을 하는지, 좀 나한테 설명해줘요.” 한 소년의 소박한 질문에 유럽 사회경제가 연구의 권위자인 마르크 블록(1886-1944)이 명저 을 집필하게 된 직접 동기가 되었다. 일본의 중국사 연구에 큰 실적을 남긴 미야자기 이치사다(宮 市定)(1901-95)는 “역사학은 인간의 본능에 뿌리박은 학문이다.”라고 했다. 내가 또 상기되는 유명한 말은, 앞서 말한 영국의 위대한 사학자 E.H 카아(1892-1982)의 말이다. “역사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과정이며, 역사가도 이 과정을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백종을 넘는 개념정의에 관해,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가장 알기 쉽게 평명한 언어로 해석한 것은 일본 동양사 연구의 제일인자로 불리는 전 동경외대의 사학교수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1931~)교수이다. 그는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역사란 인간이 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 이 양자의 축에 따라서 그것도 한 개인이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 척도로 파악, 해석, 이해, 설명, 서술하는 행위이다.” (오카다 히데히로 ) 이 해석에 따르면, “한 개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타인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의미가 없어진다. 즉 역사의 본질은 “인식”으로서, 그것은 개인의 범위를 넘어선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는 인간이 사는 세계와 관련된 것이다’라는 것. 인간이 존재 아니 한 곳에는 역사는 존재할리 없다. “인류의 발생이전의 지구사”라든가 “은하계 생성되기까지의 우주사”라든가 하는 것은 지구나 우주를 인간으로 견주어, 인간이라면 역사에 해당됨직한 것을 비유로서 “역사”라고 칭할 따름이며, 이런 것은 본래 역사가 아니다. 오카다 교수는 이렇게 평명한 언어로 “역사”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4. 시공간에서 담론하여 역사는 마르크스즘이 발설한 “진보사관”에 공감을 느끼기보다 나는 오히려 진보가 아닌 “변화사관”에 찬동한다. 역사는 변화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진보”로 포착 할 수는 없다. “진보사관”의 대치에 또 “하강사관”이, “정체사관” 있는바 이 역시 공감 할 수 없다. 역사에 관한 학문인 역사학이 “인간에 관한 학문”이며, 또한 “인간의 세계를 해석, 인식”하는 인문 과학이라면 서술법에서는 “문학”에 끝없이 가깝다. 이른바 “과학”과 “문학”의 양극을 오가는 역사학에서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한 것은 20세기 서양 역사학자들이다. 환언하여 “사실·진실”과 “문학·레토릭”이 양자는 대립되기 보다는 “同 의 惡友”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격이다. 미국의 사학자 피터 게이(1923~)가 역사학에 있어서 예술과 과학이 준별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은 흥미롭다. “이 양자는 기나긴 세월 굴절된 경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학문적 교역 내지 문학적 거래를 아무런 지장 없이 또한 정식 수속도 없이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 (). 중국을 위시로 한 동아시아 역사학, 내지 역사의 해석 본질은 사마천의 식의 정통(正統)관념이며, 중국 문명의 역사관은 “정통”사관 지배아래 위정자, 통치계층이 절대적 옹호, 유리로운 봉사체계로서의 작용을 해 왔으며 또 지금도 이는 부동의 자세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사마천이 쓴 는 지배계층의 정상 황제의 정통의 역사일분 세계사도, 중국사도 아니다.” 라고 오카다교수는 지적했다. 통치자, 위정자의 “정통성을 성립, 유지하기 위한 인문학적 장치로서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이는 결국 레토릭, 상상력과 같은 맞은 문학적 서술수법이 동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가 황제를 쓴 이야기로서 재미있는 스토리로 구성된 것도 이런 연우에서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정통”의 정사에 불복하거나, 그 허위성 레토릭에 도전한 재야 지식인들이 쓴 또는 광범히 유전해 내려오는 야사(野史)가 병존하고 있다. 왕왕히 아이러니 하게도 “정사”보다도 “야사”가 더 史實에 접근 하거나, 문학적 접근이라 해도 더 사실의 진실에 핍근한 점이 발전된다. 그래서 정. 야사를 병행 연구를 하는 역사 연구방법은 늘 근대사학자나 지식인들이 흥미진진하게 행해온 연구법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말해, 동아시아의 정통적인 정사, 그 연장선에서 오늘 교육용 교과서로서의 “역사”교육은 야사적, 즉 서민, 대중의 실제적 삶의 양상과 질 생활양식으로서의 인간의 문화 그 자체가 많이 결락되어 있는 지대한 흥을 안고 있다. 단순히 현대사에서 “정설”로 되듯이 “과거(1949년전) 중국은 암흑한 사회였고 노동인민이 헐벗고 굶주린 一 二自의 사회”였다고 기술 하고 또 이런 “정설”이 일점의 회의도 허용치 않는 관념 내지 통념으로 중국인의 뇌리 속에 각인 되어 있어 털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정설”을 지탱 할 수 있는 史實적 근거, 실증적 데이터, 수자 등 사료는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은채 누락시켰다. 그리고 그 누락시킨 공백에 발호, 횡일 하는 것은 프로파간다 적인 위정자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과대 포장, 허위, 날조, 왜곡 등 모든 레토릭, 문학 수법이 동원 된다. 5. 그래서 “역사는 이야기이며 문학”이라고 직언하는 역사학자가 많다. 앞서 본 오카다 교수에 의하면 즉, “역사는 과학이 아닌 것으로 본다. 왜냐면 과학은 거듭 실험 할 수 있는 성질이 있지만 역사는 단 한번 밖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대상이 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 가의 문제.” 즉, “과학에서는 입자(粒子)의 상이점은 문제시 하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다고 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한사람, 한사람 매개 개인이 다르다. 그것이 타인에 미치는 기능 역시 다르다. 이를 기술 하는 역사를 쓰는 사람도, 역사를 읽는 사람도 모두 다 같은 인간이다.” 이런 원인으로 역사가 과학이 아닌 문학이라는 것이다. 문학으로서의 역사가 하나하나의 “작품”에는 그것이 구비된 기능이란 것이 있다. 역사를 쓰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에서 역사자가 노린 목표, 효과가 있기 마련이며, 한편 역사를 읽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가 갖춘 요구나 애호, 이해력 등 조건이 따른다. 역사를 사색할 때 이 양자를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고 오카다교수는 지적한다. “정통성”을 지니고 강조시키기 위한 위정자의 수요에서 역사는 엄청난 조작, 작위성을 띄게 된다. 그러므로 “신화”를 간단히 역사사실로 바꾸는 기술도 있으며, “없는 사실”을 그대로 “역사 사실”로 창작하여 만드는 것은 오히려 상투적 역사 작법이다. 일본의 《일본서기》의 천황이란 군주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조작이었다. 그리고 《고사기》 역시 에도시대에 이르러 국학자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 長~)가 새롭게 개찬한 것이다. 많은 일본 사학자들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압력으로 개국했을 때, 서양 문명에 수용, 대치하기 위해 일본인의 콤플렉스에서부터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재구축 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완전히 공상적 모이역사”가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1911년 《세계적 연구에 비롯된 일본태고사》(기무라 다케타로)에서는 일본인의 조상이 이집트인과 그리스 인이라 했다. 1924년 오야베젠이치로가 쓴 《칭키스칸은 源義經世》라는 대베스트셀러 저작에서 칭키스칸은 몽골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외쳤다. 유명한《다케우치문서》(1928)에서 저자 다케우치는 천무천함보다 더 이른 시대에 “일본초고대왕조”의 천황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칸 대륙까지 통치했다는 기발한 상상의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1950년대, 또 오늘까지도 奇想을 동원해 쓴 “일본역사서”가 대거 쏟아지고 있다. 자유로운 일본의 언론, 출판 사정을 설명하는 사연이기는 하나, 이처럼 공상과학소설 같은 奇書가 위정자가 아닌 민간 지식인 중에서 산출되는 것 또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1950년대 전후 일본에서는 에가미(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정복설”(騎馬民族整服設)이 일세를 풍미했다. 일본 황실은 북아시아 기마민족 출신인데, 기마민족이 조선반도를 종횡하고 일본열도에 건너와서 일본 황실의 조상이 되었다는 학설이다. 오카다 교수나 많은 사학자들이 이 학설은 완전히 판타지 공상이며 그 어떤 사실적 근거가 없는 에가미의 창작이고 새로운 신화 만들기라고 지적, 비판했다. 결국 이 학설은 현재 완전히 뒤엎어지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6. 문제는 일본의 역사 조작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의 왜곡, 작위성이 격심한 것이다. 타자의 결함, 오류를 비판, 공격하기는 쉬운 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허위성, 결점에 대한 비판, 성찰은 왕왕 어려운 것이다. 타자 비판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은 우선 자기에 대한 비판, 반성이야 한다. 모두 불행과 악을 타자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나 자신에 있는 이유, 원인 규명을 하는 것이 월등히 현명한 처사라고 나는 믿는다. 또한 그것이 성숙한 이성적인 행동으로서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도 다 유리한 쪽으로 흐른다. 나는 이데올리기를 초월한 일개 자유주의 지식인이다. 이 자유주의가 나의 정신을 반거하고 있는 신앙이며 나를 나이게끔 한 정신적 최대의 요소일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자신의 허위성, 결함을 지적 하는데 주위와 동족으로부터의 타매를 맞을 각오 없이는 상당히 어렵다. 특히 체제와 민족, 애국이 등호를 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내가 “정통적” 역사관을 짖 부수고 진실을 밝히는 행위는 그 자체가 민족의 터브, 우리 역사의 터브를 깨는 것으로 직결되어있다. 그만한 용기와 담력과 함께 학문적 사료의 접근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불가사이하게도 조선족 지성사에서 조선족 역사, 이민사 및 문학사에 관한 연구나 그 접근은 많지만(또는 있지만), 역사의 터브에 정면에서 도전한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는 제로 상태다. 결국 나의 한중일 근대사 연구, 글쓰기는 뜻하지도 않게 탐험 같은 선구적 작업이 되었다. 나는 우리의 조선족 사학자, 역사 프로패셔널들이 이 작업을 해야 된다고 기다렸으나 누구하나 이 분야에서 외면할 뿐이었다.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없는가는 불평불만의 석연치 않은 심경으로 나는 십년이나 고투해왔다. 내가 하는 작업이 우리 조선족에서는 항상 첫 번째 적 일이며, 이런 작업에서 반영되는 내용과 질에 대해 조선족에서 오늘 반발, 비난은 엄청나다. 그런 비난, 반발은 작업의 내용 실체에 대한 이성적,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이 작업을 짊어진 주인공인 나 개인의 인신공격으로 점철된다. “계란의 맛을 품평하는 일에서 계란은 외면해버리고, 계란 낳은 암탉 잡이”로 편향된다. 암탉을 죽이면 계란은 누가 낳는가? 이런 암탉 잡이가 금방  문화대혁명, 대자보의 먹물이 마르지도 않은 그 우리의 최근과거의 살벌한 계급투쟁의 광란극, 그 자체로 재연하고 있다. 소리놀이, “민족상잔의 내홍으로 비극을 빚은 역사의 교훈”을 삼는다고 하면서 역사교훈을 포기하고 피비린 역사극을 다시 스스로 재연하는 그 우(愚)를 왜 모르는가? 가장 역사, 역사를 외우고 역사를 거울로 삼자는 우리가 또한 가장 역사를 초개시 하고 역사를 망각하는 아이러니, 그래서 타자를 비난, 중상할 자격이나 있는가? 나는 “오늘도 연변이 문혁을 끝내지 않았다” 라고 한 내 말이 과히 적중한 명단(明斷)이라 자신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이 이 명단을 앞 다투어 입증해주고 있잖은가? 물론 이 같은 명단은 더 이상 없어졌으면 나는 바란다. 한 가지 중요한 연구 과제를 독자제현께 아뢰고 싶다. “왜 연변은 문화대혁명을 계속 하는가”의 테마는 매우 멋있는, 현실적 중대한 의의를 지닌 연구과제이다. 이를테면《연변 문화대혁명 연구》또는《연변문혁의 역사적 규명》등 이런 것을 누가 한번 착수하시길 바란다. 누가 한번 곰곰이 생각하면 좋겠다. 말이 약간 새어나가서 죄송하다. 다시 본제로 돌아가자. 7. 사실 유순호씨가 최근(2010년 10월 8일자 조글로, 니카댓글, 김광림에 대한 발언) 예리하게 지적하다시피 “역사에 대한 무지한 교수, 박사와 정면에서 토론을 해도 상대가 안 되는 것이며, 그것은 끝없는 소모전에 이어질 것이라.” 하며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고 조선족에게 메시지를 발했다. 이 메시지의 의미를 아마 지금 조선족 지식인의 다수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고학력자일수록 경직된 사고방식과 역사인식에서 답보하고 있는 양상을 그 자신들이 스스로 나와 유순호씨, 김정룡씨 등에 대한 비난에서 폭로시켰다. 그래서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순호씨가 “김광림 박사가 역사공부부터 하고 뉴욕에서 더 체험하고 공부하신 다음 다시 토론을 벌이자.” 라고 한 안타까움, 무위의 막무가내, 이것이야 말로 나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어느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의 비난자, 반대파와 정면 학술토론을 벌일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상대의 수준이하의 지적수준, 문혁시의 사고체계 탓이다. 그럴진대 이들과 어찌 정색해서 역사를 논하고 학문을 토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들은 현재 나의 이 말에 대해서도 이해 할 능력이 없는 것은 뻔하다. 그래서 “거만하다, 잘난채 한다.”는 넌센스의 언어로 일축하게 된다. 나는 이런 상대와 대화를 할 수 없는 일이 막무가내지만 이것 또한 눈앞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수준 치에 도달하면 오히려 반대파들은 나보다 더 억척스럽게, 나보다 더 심한 “진상 규명”의 글을 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좀 좋겠다. 근대의 변법 지식인의 거물 강유위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들겠다. 강유위에게 어느 날 요평(廖平)이란 젊은 지식인이 “중국의 6경(六經)중에 하나가 위조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노발대발 한 강유위는 죽일 놈 이라고 요평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다가 흐지부지 헤어졌다. 그런데 수개월이 안 지나서 강유위는 말했다. “6경 중에 하나가 아니라 전부다 가짜외다.”라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新學僞經孝》,《孔子改制孝》등 명작이다. 일설에 따르면 강유위의 이런 명작은 결국 나중에 요평의 글을 표절했다고 한다. 연변 조선족의 안티 김문학파가 6개월 후 아니 6년 후라도 유위와 같은 변모가 일어 나겠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나는 같은 겨려 지식인으로서 정녕 이들의 변화를 기다리며, 그때가 오면 기꺼이 두손들어 포옹하겠다. 아버지 죽인 원수도 아닌데 원수인양 암탉 잡이 “동족상잔”을 할 필요가 있을까. 8. 그리고 미래의 화합을 위해서라도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있다. 즉 안티 김문학파 제현이 이구동성으로 내가 진술한 역사 사료에 대해 완전히 일본의 “우익”, “극우”와 등호를 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관한 사연. 아마 분명히 그들에게 있어서 내가 기술한 역사자료(근현대, 만주국 등)에 대한 서술을 다 “일본 우익의 언론과 동일하다.” 라는 틀에 박은 듯 인식하고 있는데, 사실 내가 구사하고 인용한 자료는 대부분이 중국학자, 해외 중국학자의 내 책을 진지하게 정독하지 않고 “오, 자식 나쁜 반역자구나.”하는 선입견에 치달아 학자가 갖춘 이성을 흥분으로 대체한 우를 범했다. 그래서 “우익”의 말과 내가 사용한 사료 및 서술에서 일치 또는 유사한 부분만을 단장취의해서 그 선입견을 급급히 입증하려는데 활용, 과장시킨 것이다. 나 자신은 우익의 “우”자가 어디로 향해있는지도 모를 일이며, 일본의 우익들과 어울려 글 쓸 하등의 이유도 필요도 못 느꼈다. 나를 “우”자로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들의 소행이었지, 나와 상관 되지 않는 사실이다. 그래, 내가 우익단체에 가입해서 “공산당을 타도하자”고 외쳤나? 그들에게 돈을 받아서 우익들 위해 활동하고 글 썼나? 왜 그들은 그렇게 “우익”에 연연하며 거기에 걸고 드는 걸까? 오히려 그러는 그들이 우익의 조폭 같은 狂信적 사고와 몽둥이를 휘두르는 면에서는 우익과 꼭 닮았지 않았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본은 미국과 같이 역사 기술, 역사이해에서는 다양한 견해를 허용, 존중하는 사회이다. 일본의 역사관에서도 정·반, 좌·우, 친중, 반중, 친한, 반한, 친일, 반일…. 그리고 또 아무데나 귀속하지 않는 제 3자의 의견. 이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문화, 정치 풍토는 중국내에서는 상상 할 수도 없다. 실제로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하는 일본인이 있는 동시에 한국영토라고 소리높이 주장하는 일본인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일본인을 “매국노”라고 일축하지 않은 언론자유의 세계이다. 유순호씨의 변모는 바로 미국에서 이 같은 자유의 풍토 속 에서 그 지적 자유를 향유하면서 태어난 것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유순호씨 같은 인물이 많이 배출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런 유연한 사고를 지닌 조선족 지식인이 많이 나올수록 경직된 사고를 깨고 조선족의 개방, 개화에 이바지 하는 것으로 직결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관웅씨의 나의 “우익”론에서 노정된 것은, 위정자가 일본을 비판할 때, 특히 역사인식에서 판에 박은 듯 사용하는 최대 무기 “일본 우익”을 그대로 교조적으로 원용한 것이다. 이 때 그들은 “반체제”가 아닌 “체제 옹호”, “추종자”, “맹신자”로 변해 있다. 대중을 설복시키기 위해, 나를 비난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이 “우익”내지 “우익”과 동급의 “배족”, “매국노” 같은 동족 잡기의 고깔모자가 무엇보다 효력이 클 것이라는 점을 김관웅씨는 숙지하고 있는 터다. 그러나 아이러니 할 것은 중국 위정자들이 말하는 “우익”의 개념 역시 꼭 진실성, 유효성이 구비 됐는가 하면 그렇지 만도 않다. 위정자의 “역사 정통성”에 위구심을 주는 역사관, 역사 인식 내지 역사사료, 문헌을 흔히 일본에 대해서는 “우익, 극우”라 칭하고 일축한다. “우익”이 무섭기 보다는 근현대사에 베일에 감춰진 그 “치부”가 탄로날까봐, 또는 “정통성”에 위협 주는 역사관 자체가 무섭고 반갑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 한 것은 근대, 현대사의 진실을 캐면 캘수록, 속속 발견 되는 것은 오히려 “우익”의 사관과 일치 또는 비슷한 모습들이다. 해외에서 공간되는 사료, 역사서를 차치하고서라도 중국내에서 공간되는 근현대사의 역사서, 역사비평, 사료, 문헌은 오히려 위정자가 가장 기피하는 이른바 “우익”의 언론과 일치, 유사한 史實을 밝히고 있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의 관리들이 이런 “우익”을 운운하면 그런 것은 그들의 일이니까 이해가 되지만, 학자라는 지식인이 같은 언론으로 소리 높이 떠든 다면 학문적 접근을 표기한 위학자라는 것을 자인 할 것 밖에 안 된다. 세계화, 글로벌 및 세계와 “제꾸이(接軌)”한다고 외치면서도 하는 행동은 완전히 국제 상실을 무시한 언어도단적인 논리의 노예로 전락된 것이다. 역사관, 역사인식이 역사학의 범주에서 학문적으로 다루어야 할 일이나, 그것이 정치의 하수가 되는 것을 역사, 역사학이란 학문의 비극이다. 지식인이라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부조리에 도전하고 변혁을 통한 역사 감각으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체제나 권력에 곡학아세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행복 할 수 있으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으로는 절대 아니다. 중국에서  하루속히 다양한 언론이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싶다. 진짜 그런 날이 오면 김관웅님들은 아마 나나 유순호님 이상으로 “자유지식인”으로 변신 할 것으로 믿는다. 김관웅님들과 나의 갭은 모종의 의미에서 민주화 나라와 비민주화 나라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9. 그럼 이번에는 좀 구체적 사례를 들어서 역사문제를 담론 하겠다. 우선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과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되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기로 하자. 조선민족의 근대사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가장 큰 사건, 史實이며 양국에 모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기나긴 그림자 같이 조선민족의 정신에 따라다닌다. “조선식민지 지배”에 대한 평가는 따라서 식민지 사실만큼 중요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한국, 조선족 측에서는 대부분 부정적, “악”으로 평가되기 일쑤이며, 객관적 평가를 하는 의식이 박약하다. 최근 객관적 평가를 하는 한국 학자들에게는 세찬 비난의 화살이 몰리기도 한다. 또한 일본의 학자 중에도 객관적 평가를 하는 학자도 많으나, 오히려 ‘제 3자 서양인의 평가는 어떨까?’ 하는 의문에서 나는 10년 전부터 이 방면의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연구를 해왔다. 만약 역사 연구의 작법(作法)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자신의 作法을 표명한다. “서술의작업(narration)과 문헌정보 자료 실증 작업(documentaion)이라는 관계를 그대로 연구의 현장에 가져가는 서양사학자의 작법이다. 거기다 또 보태자면 이 기초위에서 실제 생긴 일, 그 일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란 문제의식을 안고 상상을 발휘하거나 비교사학을 원통하게 평가를 내리든지, 자신의 사색을 그대로 진솔하게 적는 것이다. 이런 작법대로 진행하다 보면, “조선식민지배”에 대한 평가에서 의외로 제 3자인 서양인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리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 나는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했다. 영국의 신문기자 아서 매켄지《조선의 비극》, 미국 사학자 Edwin o. Reischauer의《Japan: The stry of a Nation》등 등, 많은 역사 서술을 보면 여기서 상세히 열거, 서술한 자리가 없어서 유감이나, 우리가 상상이상으로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좋게 평가한다. 사실, 계량적 통계, 경제수치, 인구증장, 인플레 건설, 교육, 학교, 조선어 보급 등에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보편적 인식과 정반대인 역사를 노정하고 있어, 이 그대로 적으면 한국 근대사에 상당히 거북함을 제공하게 된다. 현재 나는 이 주제를 한권의 단행본으로 정리하려고 준비 중이다. 유순호씨가 댓글에서 언급한, 북한 현재의 독재정치의 횡포아래 인민대중의 기아와 생활의 질이 1960년 내지 65년(일제 식민지배 36년)에 비해 형편없는 저질, 최하위의 양상을 노정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하나, 하나씩 실증을 획득하게 된다. 이와 밀접히 연관된 “친일 문제”에 대한 접근 역시 많은 함정을 안고 있다. 현재 한국이나 우리가 행해지는 “친일”에 대한 접근은 윤리적, 도덕적 비판, 민족이란 척도를 구사하여 진행되는 비판적 접근은 사실 “역사 평가”가 아니다. 역사로서의 친일을 우리는 감정, 민족정서를 그대로 투영시켜 “정치투쟁”으로 오버되어 버리고, 오히려 역사 사실. 역사에 환원시켜 평가를 하는 요긴한 작업을 방치한대로 있다. 이런 면에서 노출되는 것은 역사를 그렇게 소중히 한다는 우리가 기실은 역사를 외면하고 너무 소홀히 대하는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역사로서의 일본 식민지 지배라는 환경을 주제로 친일을 접근해야 한다. 왜냐면 친일이든 반일이든 다 일본식민지 지배의 역사의 조선인이 취한 당연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친일”, “반일”, 검은 양복 아니면 흰 드레스 식의 2분법 아닌 다양한 조선인이 일제 식민지시기에 실존 한 것을 무시 할 수 없다. 오히려 역사에서 노정되는 모습은 친일에 가까운 적일(適日), 순응 자로서 대다수 조선인은 일본 통치에 순순히 적응하면서 삶을 영위 해온 것이 진실이다. 다 민족 저항파였다면 일본의 총칼에 누가 살아남았겠는가? 문화란 한 민족 집단이나 사회가 그 환경에 적응하는 최적의 적응방법으로서 창출해낸 생활양식 그 자체인데, 그 식민지 지배하의 우리 선조의 삶이 문화, 그 자체였다면 살아남기 위해 친일, 순응 한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문화, 그 자체의 관성이 아닌가. 식민지배가 후진국에게 문명, 근대화를 가져 온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Post Colonialism) 이론의 상식이다. Rupert Emerson이 “좋든 나쁘든 식민주의는 사교양식과 기술이, 즉 서양의 정신적 및 물질적 역량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작용한 주요한 경로였다.” 조선은 서양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조선말기의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변했다. 진보가 아닌 크나큰 변화였다. 이 말에 잘 납득이 안가고 무조건 반발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 점을 충분히 예견한다. 왜냐면 나 역시 미처 몰랐을 때는 이에 반발이 컸었기 때문이다. 반발하는 최대의 원인은 우리가 100여년전 조선말기의 사회 상황 현실에 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다, 아주 좋은 사회였는데 일본이 침략해서 엉망으로 짓니겨 놨다고 착각하는 것이 일종의 민족적 통념이 굳게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가 실제 살아보지도 못한 조선조말기의 상황은 현재 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배로 비참하고 낙후한 중세적인 사회였다. 이 실상은 서양인 관찰가, 지식인, 여행가의 기록에서 에누리 없이 실증되고 있다. 노예, 노비제도, 경제의 극빈, 정치의 부패와 가렴주구…. 지어 당시 교통수단의 교량도 변변이 없어서 강을 다 인간의 다리로 건넜기에 다리와 교량이 다리로 불러진 형편이었다. 교량을 다리라 부르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참담하고 극빈한 조선조말기의 사회실상의 사료, 문헌을 읽으면서 나는 지대한 충격을 거듭 받았다. 부패 무능한 고종에게 실망한 조선의 엘리트 정치인, 지식인들이 근대화에 앞선 일본에 시선을 주고 일부에 더 기대를 걸었던 것은 당연하겠다. 계명대 사회교수로 조선 근대사에 대해 신선한 시점에서 연구하고 있는 김기협씨는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펼치게 된 사실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측면이 많이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분일 뿐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문학적 비유법으로 얘기하자. 한국은 여성이고 일본은 남성이다. 그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강간을 했다. 미구하여 이 사이에 아들이 생겨났다. 일본이란 남자는 싫어도 생겨서 난 아들은 여자가 사랑하는건 당연하다. 이아들이 곧 “근대화”이다. 아들이 크면 클수록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누군가라는 것을 알려고 캐묻는다. 지난날의 강간당한 치욕을 어머니는 덮어 감추거나, 깊은 증오, 또는 어떤 미묘한 추억, 이런 복잡한 감정이 동반된다. 피식민자의 우리 겨레의 일본에 대한 심정은 이 어머니의 심정 마냥 착잡할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자신의 과거를 점검 하는 일은 과거의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작업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일본이란 他者에 의해 수동적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판단자체를 일그러지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조선 병합은 공식적 행위였고 국제적으로도 서양 및 타국의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가 인정하고 싶든, 잘 모르든 실제적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제 통치를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것들은 역사 사료, 기록에서 다 실증이 되고 있다. 결코 “일본 우익의 지론은 앵무새 같이 외우는 것” 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지면의 관계로 역사 사실의 일단을 요만큼 선보인다. 착수중인 역사 연구서《세계에서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 했나》를 단행본으로 준비 중이다. 상세한 것은 그 책이 간행 되면 일독하시길 바란다. 10. 다음으로는 중국 근대사의 사례를 들기로 하겠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민족, 국가, 사회 및 입장에 따라 다르다. 같은 민족성원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객관, 주관적, 원인으로 개인의 사관도 또 다를 수 있다. 문학이 한 민족 집단의 정서적, 감성적 심층을 대변한다면, 역사는 문학보다 더 근엄한 의미로 한 민족 집단의 정체성에 관계되는 거울, 교과서로서 다루어지는 측면이 크다. 또한 역사관을 국가나 정부차원에서 다양성이 아닌 모종의 틀 속에 규정시킨다면, 역사관의 다양성과 자유는 곧 차단되고 말 것이다. 중국의 역사인식이 현재 정부의 “국정교과서”에서 통일적인 기술체계를 확보하고 있는데서 보이듯이, 그것은 중국민족(중화민족)이란 공통분모를 토대로, 당정부의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유력한 관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의문할 나위도 없다. 2005년 나는 일본의 저명한 역사비평가와 중국 교정교과서를 검증하는 대담집을 간행했다. 그 대담 중에서는 나는 “일본인이 역사교육이 일반적 교양으로서 취급하는데 반해, 중국은 당체제의 교육프로그램의 하나로서 중공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세뇌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고 직언한 적이 있다. 즉 애국 교육의 일환으로 역사교육이 전개되는 특징을 갖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와 일당 전제의 국가의 역사교육 현주소의 본질적 구별이다. 나는 중공정부를 평가 절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양자의 이질성을 준별하자는 문제의식을 전제조건으로 제기 하고서, 현행 역사교육 및 양구의 역사관, 역사인식의 비교고찰의 기점을 밝히자는 학문적 의미에서였다. 실제로 남경대학살기념관이나 9.18기념박물관 등 전국에 수백개 “전국애구주의 교육기지”가 있어, 역사를 애국주의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중국이 아닌가. 고향 심양에 갈 적마다 나는 소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9.18기념박물관을 방문하여 관람하곤 했다. 아들 녀석은 제가 전반에서 처음으로 이런 항일기념관을 관람했다면서 과거 이런 전쟁이 있는 것은 알았다고, 다시 이런 불행한 과거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감상을 말했다. 대조적으로 일본은 역사명승은 수없이 많아도 그 자체를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이용하는 발상은 통하지 않으며, 실제로 정부나 대중의 통념에서 “애국” 이마저도 사갈시하는 실정이다. 여러 의미에서 중일의 문화를 비롯해 역사교육, 역사인식, 역사관 자체에는 심대한 격차가 실존한다. 이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중국과 같이 교과서도 단 일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중학 역사교과서도 8종이나 되며,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여 교육기관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교육자유주의 통념이 일반화 된지도 오래다. 일본이 다 “우익”의 교과서를 배우고 “우익적”이라고 착각 하는 것은 웃기는 비상실이다. 할 말은 많으나 각설하고, 중국 근대사 인식에 관한 실례를 들어 이야기를 끌고 가자. 중국 근대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거쳐 명랑한 근대강국으로 성장한 것과는 반대로, 피해자 이미지로 관통되어 있다. 아편전쟁이래의 근대사는 서양열강의 침략의 역사이며 근대화가 자연 된 최대의 원인도 열강의 침략으로 돌리는 인식이 보통이다. 당연히 침략과 피침럄,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는 옳다. 그러나 이 시점만으로는 타자와 자신으로 착종하게 얽힌 근대 중국사나 관계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엔 역부족이다. 민족이나 개인이 역사에서 교훈을 섭취하고 거울로 활용하려면, 자신의 실패원인을 역사상에서 토털적으로 검증, 반성하는 것을 결락시킬 수 없다. 중국에서 근대, 현대사를 치중하는 것은 열강의 침략을 철저히 규탄하고, 그런 침략에서 대중을 구원, 해방했다는 위정자의 정통성을 돌출히 하기 위해서 인듯하다. 따라서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서 찾는 것은 외면했으며,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他者를 악자로 내몰고 애국심을 환기시큰 장치로 활용했던 것이다. 즉 근현대사에 일관된 축은 침략과 저항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사실 이 2항대립(二項對立)구도 만이 아닌 보다 다양한 다원 해석이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일테면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이 청일 갑오전쟁에서 일본에 패북한 뒤 타협의 “마관조약”을 체결 시 모두 그를 “매국노”라 매도했다. 외국열강과의 타협, 화해는 언제나 “매국노”로 낙인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독일의 피스마르크,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세계3대 정치인”으로 불린 개방된 정치가였다. 매국노 운운을 어불성설! 역사의 해석은 적어도 다양한 시각에서의 해석을 허용할만큼의 드넓은 좌표축을 필요로 한다. 항일전쟁시기의 일본 괴뢰정권으로서 왕조명(왕정위)정권을 위정부라 하고 왕정위 본인을 최대의 “한간=매국노”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를 재검증해보면 일본 유학의 경험자이며 손문의 우수한 제일 제자였던 왕정위는 “일면 저항, 일면 교섭”방침을 산출시킨다. 그는 미남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지식, 필력, 담용에서 탁월한 문인형 정치가였다. 물론 장개석보다 수준이 한 급 위였다. 여기서 자상한 서술을 할 여유가 없으나(사실, 책 한권의 분량이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 부딪치는 무모의 저항보다도 “평화공존”을 하면서 역량을 키워서 일본에 대적하자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1938년 그는 “君爲其易 我任其難”(그대는 쉬운 길을 가라, 나는 가난의 길을 가겠다)고 장개석에게 말을 남기고 일본과 평화타협의 길을 택한다. 애국적 저항은 쉬웠으며, 영웅시 되었으나, 평화타협은 “매국행위”로 규탄당한 실로 험난한 길이었다. 국내 사학계와 대만에서도 현재 왕조명을 새로 재조명하면서 “친일적 애국영웅”으로 재평가 하는 기운이 팽배하게 일고 있다. 항일전쟁 당시의 중일관계사를 전반적 시야에 넣고 이 문제를 보면, 중일관계의 새로운 양상이 노출되며, 따라서 왕씨가 간단히 “한간 매국노”로 일축할 위대한 혁명가, 정치가임을 재인식하게 된다. 동일맥락에서 근대, 현대를 중·일·한의 토탈적(total) 시야와 당시의 국제적 시야에서 재검토, 검증하면 역사의 많은 맹점, 허위성, 조작성이 드러나게 된다. 사실 나의 저작《반일에 열광하는 중국, 우호로 영합하는 일본》(2004년)은 바로 중일 근현대사의 허위성을 논한 저작이었다.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아무리 이 책을 빌미로 나를 “매국노”로 내모는 것은 일말의 힘도 없는 무지자들의 광대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가 무지를 낳고 왜곡이 왜곡을 재생산한다. 참으로 참혹한 21세기 조선족 지성계의 일면을 말해주는 대목이어서 가슴이 쓰리다. 그럴수록 나는 역사재조명의 사명감을 절박히 실감하고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결의가 굳세어진다. 인간은 다 자기의 수준대로 발언하는 고급영장류이다. 언설을 생업으로 하는 지식인이 토로하는 말에는 그 자신의 지적 수준이 극명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는 조선족의 고루한 지식인이 꼭 나의 지견의 수준으로 통일시켜 얘기하자고 강압하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 수준에서 각자 적극 발언하는 것 역시 그의 자유이다. 다만 역사를 담론할 때, 한 인물이 밉다고 무조건 감정적인 대응은 쉽게 인신공격으로 직결되기 십상이니, 그런 저질 공격은 삼사이후행(三思而後行)하는 것이 他者에게도 자신에게도 유리할 수 있다. 결국 선대의 역사가 가르치듯이, 무지에서 오는 他者에 대한 공격 타매는 다 유턴하여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11. 이제 “역사란 何(하)오”에서 “역사를 하오”로 들어간다. 역사란 무엇일까 에서 역사를 연구, 재조명하는 일, 실천으로의 이행. “나는 왜 중한일 근현대사에 집착하는가?”란 부제목에 대한 답을 마침내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질문의 행간에서 산발적으로 이 문제의 답은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다. 근년에 들어 조선족과 일본, 중국, 한국의 독자들 가운데서 “왜 위험하고 민감한 역사문제에 대해 쓰게 되었나?”라고 관심어린 어조로 말씀하는 분들이 많아진다. 자주 걱정 어린 애독자 팬들의 질문을 받으니, 그에 대한 답을 내는 것도 예의이고, 나 자신 역시 이 기회에 역사인식, 역사관에 관해서 세상에 피력하고 싶다. 이래서 나의 찬성파이든, 안티파이든 통 털어서 내 개인의 역사인식의 내실을 알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표현하게 되었다. 역사, 역사인식, 역사관에 대한 나의 태도, 작법(作法)은 다음과 같다. ○ 한 민족, 집단의 문화로서의 역사는 자신의 과거인 동시에 오늘을 직결하고 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정체성)의 정합성(整合性)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환언하면 역사 자체가 자기와 정체성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그러기에 역사는 해석이며, 승자와 위정자가 자신의 정통성, 정체성을 만드는데 이용당한다. 따라서 역사는 가장 “작위성”과 “허위성”으로 분식 당하는 객관체이며 주관체이기도한 “문학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 역사에서의 주인은 항상 자기와 他者이다. 착종한 관계 넷트속에서 여러 가지 양식, 수단으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타의 또는 자의에 의해서 움직일 수도 있으며, 전혀 예상치 않은 方向으로 흐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역사속의 자기인식은 결국 他者인식을 통해 행해지어야 하며 타자와 직결된 자신을 일방적으로 美化하거나 또한 他者를 일방적으로 丑 하는 것은 愚이다. 왜냐면 그때의 他者는 자신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他者否定은 즉 자기否定의 愚를 범하며, 역사의 어느 시기에 대한 자기 美化나, 허위적 조작은 결국 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왜곡하는 격이 된다. ○ 역사에서 교훈을 섭취하고 교과서나 거울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실패 원인을 규명, 인식, 성찰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他者에게 피억압, 피지배 당했다고 해서 피해자, 피정복자의 의식만 강조하고 상대에 탓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영원히 자신의 실패원인을 호도 하기 때문이다. 타자 탓도 필요하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에서 원인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작업이다. 물론 쉽지 않으나 이는 꼭 실행해야할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을 간력한다면 역사는 다만 “이야기”일 뿐 거울의 구실을 못하게 된다. ○ 이 우주의 체계, 세상의 체계가 열린 것과 같이, 모든 세상, 사회, 인간, 그룹 역시 인과율에 의해 돌아가고 그 내실 역시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민족이나 나라와 일개인이나 오늘은 곧 과거의 산물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숙명이기 때문이다. 운명도 아니다. 運命은 글 그대로 움직일 수도 있으나 숙명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과거를 자기 자신의 전체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라는 인식하에 그것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통한다. ○ 따라서 우리에겐(누구나가) 어떤 역사적 체험(식민지, 침략 등)의 치부 같은 불쾌한 과거를 안고 있다고 해서 치부, 터브로 간주하고 외면하거나 그 자체를 전면 부정한다면 곧 자신의 살과 피를 깎아버리는 것이다. 역사가 숙명체(宿命体)일진대, 자신이 못나서 식민지, 침략을 당했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정해진 숙명의 과거이다. 가해자를 비판하고 혐오하는 것은 감성적으로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역사를 대하고 이해하는 것을 대체해버리면 그것은 유치함으로 끝난다. 좀 더 성숙한 차원은 가해자 vs 피해자란 二項對立積國를 탈피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넓은 시야에서 객관化시켜 인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 이런 유치한 二項對立 구도는 오늘도 우리 겨레 자신들을 스스로 괴롭히는 망령이 되고 있다. 일제 식민지가 종식 된지도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이 대립의 함정을 파고 빠지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는 이 대립구도가 “친일 vs 반일”의 단순 구도로 전개되며, 일본이란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재생산하여 내부 소모전을 펼치고 있다. 또한 이 “친일파” 척결은 정치에 이용당한 책략적 성분이 농후하기도 하다. 결국 정녕 민족애의 넓은 시야에서 보면, 자기 민족치기의 내홍을 일제 강압 아닌 자신의 정치의 체제의 강압으로 전개되니,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일본이 없는데 “친일파”를 잡는다’, 이런 발상, 사고 자체가 일제 식민지의 망령에서 탈피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 “친일”은 사실 당시 일제식민지하에서 지극히 당연한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그것은 도덕, 윤리의 차원에서 지금 현대인의 의식(민족애 따위의 간판을 들고)을 과거에 투영시켜 행해지는 희극에 불과하다. 식민지 과거의 “청산”이란 미명을 걸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기억”, “망령”에 스스로 빠져들어 일본인 대신 자신의 “적”을 만들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하는 것이다. ○ “역사를 바로 잡는다.”, “청산”한다는 슬로건은 유치한 동족잡기가 아닌 역사 자체에 대한 일그러진, 왜곡, 허위, 거짓 그 자체를 발굴, 연구 하여 “바로 잡는 것이다.” 우리의 감성적인 차원에서 혐오한 他者 비난, 친일파 재생산은 결국 더욱더 우리 자신의 역사, 과거를 비틀어지게 할 뿐이다. ○ 따라서 나는 중국과 한국 및 이것을 다 우리라고 칭하며, 우리 안의 역사왜곡, 날조, 작위성에 대해 새롭게 조명, 발굴, 인식, 해석, 평가하는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틀린 역사관으로는 비틀린 아이덴티티를 재생산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10년전부터 “문화로서의 역사 인식, 이해”라는 의식의 깃발을 들고 혼자서 不言實行의 역사연구, 재조명 탐험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 동포들 속에서 거론되고 비난 받은 책들이 그 초기 작업이었다. 이제 10년 계획으로 “한국, 중국 역사 재조명”연구의 구체적 아이템으로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사상가 안중근》, 이광수, 윤동주나 “세계는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 했는가” 등 등 착수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때로는 손오공 같이 分身이 생겨 동시에 연구 작업을 전개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어제 한일 보다 이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또 본업인 3국비교문화연구도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 “하면 된다.”는 말보다 나에게는 “안하면 안된다”다. 중국의 유명한 현대파 시인 베이도우(北鳥)가 말했던가, “영웅이 없는 이 시대에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이 말을 패러디 해서 표현한다면 “누가 하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나는 그저 하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사람은 항상 안하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다. 이는 역사가 가르친 “인간의 법칙”의 하나이다. 좋든 나쁘든 선구자는 모험자이다. 모험은 하는 일 자체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주위에서 모험자에 대한 비난으로 수시로 날아들기 마련이다. ○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내가 실제로 뭔가 “인류를 위해서, 민족이나 아시아를 위해서”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 조금이라도 상호 이해 인식에 일조라도 된다면 그것으로 무한의 보람을 느낀다. 나는 ,가끔 자신의 소년 같이 유치하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노회한 세속인과 달리 실 이익을 요것조것 재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지식 소년이고 싶다. 나무배에 전동기를 달아 호수에 띄우며 바다를 향한 꿈을 키우던 소년. 이 지식소년, 이 영원한 월경하는 탐험가는 오늘도 즐겁다. 나 자신은 이렇게 일종의 “역사”를 “하고”있다!
91    2-7. ‘죽음’에 대한 명상 댓글:  조회:5509  추천:19  2013-02-13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7. ‘죽음’에 대한 명상 -----나의 死生觀 1. 삶이 무어냐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어서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더욱 모른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그것은 사랑과 미움 같이 우리 인간이 항구히 직면하고 있는 테제이며 숙명이다. 죽음과 삶만큼 인간을 희로애락으로 괴롭히는 게 더 있을까? 살만큼 살았으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삶에 대해 이해하고 터득 할 것이며, 나름대로의 “인생관”도 정비될 것이다. 기실 나는 삶에 대해서 특별히 목적이나 의의 같은 따위가 있는가하면 회의적이다. 우연히 이 땅위에 태어났으며, 왜 태어났냐 해도 그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 사느냐 하면 태어났으니까 산다는 것뿐인가 한다. 인간이 사는 데는 목적이기 보다는 방식이라고 인식한다. 왜냐면 목적은 달라도 살아가는 방식은 생물, 동물학적으로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 같이 의,식,주, 행의 방식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이라면 삶의 방식의 질(質)일 뿐이다. 강자와 약자, 부유한자와 빈곤한자, 권력자와 비권력자, 남자와 여자, 지식인과 무식자..... 뭐 이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억만장자라 해도 하루 5식 10식을 먹는 것도 아니며, 돈을 베게로 삼고 사후에도 관속에 넣고 가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굳이 인생관, 삶의 의의가 있다고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한다. 일 할 수 있는 자유, 적당한 물질적생활 이것이면 너무 충분하다. 2. “인생관”이란 말은 있어도 “人死觀”이란 말은 없다. 우리는, 특히 동양인은 너무 사는 데는 치중하여 열중하고 삶의 現世 즉 “지금, 이것 여기”에만 집착하는 인생관으로 편향 돼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거의 현세를 살아가는 방식, 기술에 그친 교시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공자는 화를 냈다. “우리가 현세의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하여 죽음을 알려고 하느냐?” 라고 그는 아예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중국 고려의 유교나, 도교의 원리는 형태는 달라보여도 거의 인간의 현세, 지금 인생을 살아가고 즐기는, 그리고 장수, 쾌락의 방식과 미학에 관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엘리트 지식인의 삶을 출세(出世)해서는 유교적 방식을, 입세(入世)해서는 도교의 도술을 실천하는 두 가지로 삶을 산다.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죽음도 나쁜 삶보다 못하다(好死不如 賴活)” 그러니 살아야 한다. 아무리 곤란해도 살아 뻐쳐야 한다”는 것이 서민들의 인생관이다. “삶은 행복하고 아름답다”는 인생가치관일 뿐, 죽음은 무조건 마이너스적, 惡으로 취급한다. 특히 유교적 현세가치관에 침혹된 우리는 自殺을 기피하는 성향이 강하며, 부모 보다 미리 떠난 자살 따위는 지탄받을 不孝로 간주한다. 따라서 현세의 삶으로서 대를 잇지 못한 무후(無後)야 말로 최대의 不孝가 된다. 아무튼 이 현세를 살아가는 삶만이 최고의 행복이다. 아니 삶 자체가 전부이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대극에 있는 것, 삶의 마감, 종식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은 美化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속에서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3. 다만 죽음의 미화되는 경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모종의 일데올로기, 정권체제를 위한 프로패건더로 이용되는 때 만이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을 초개같이 취급하는 사상이다. 바로 머지않은 文化革命때, 매우 유명한 청년영웅 김훈화(金訓華)의 佳話가 있었다. 그가 왜 목숨을 잃었는가? 공공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슴없이 생명을 바쳤다고 하는데, 그 재산이라야 홍수에 떠내려가는 하우스 비닐막 한 장이었다. 죽은 본인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고작 하여 비닐막 한 장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그 자체가 비극이다. 비닐막 한장이 생명의 가치와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죽음을 두고 부풀려서 시대의 본보기 “영웅”으로 만드는 국가적 기구의 프로퍼건다이다. 인명을 초개시하는 국가의 선전, 죽음을 현 체제의 미화, 복종에 이용하는 생명관, 이러한 “인명경시” “체제중시”의 사관(死觀)은 바로 비극을 낳는 장본인이 아닐까. 중국에는 이러한 프러퍼건다에 의해 작위된 영웅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초유록, 유문학, 문합, 왕걸.... 등등. 유호란의 생각난다. 모택동은 작두에 목이 날아난 그녀의 죽음을 두고 “위대한 삶, 영광의 죽음”이라고 휘호했다. 국가, 체제, 정권 모든 국가적 이후에 죽음도 불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세뇌교육이 유별나게 강조 되어 왔다. 옛 소련과 현 북한에서도 지금 이런 인명경시의 “영웅”을 간단없이 만들어 내고 있으니 인간의 희극이지 비극인지? 모택동이 자주 인용하던 사마천 발명의 사생관을 벌어 혁명을 위하여 죽으면 “태산보다 무겁고, 연하지 않으면 홍모나 가볍다”고 한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과연 그럴싸한 명구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생관은 진실이 아니라 다만 관념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인다. 혁명, 공산주의 사업자체도 “가설”이거니와, 진짜 죽음이 태산보다 무거운가 하면 그것은 과학이 아닌 것은 차치하고서라고 관념적 가설이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의식에 불과하다. 포퍼가 갈파한 것처럼, 공산주의사상이 과학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설”, “강박관념”을 뒤집어 보면 裏面에는 수많은 “호위”이고 “인명경시”의 기만적 레토릭이 반거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유년시절에 이런 프로패건더에 매혹 된 나는 한때, 고추밭에서 고추도둑을 잡다가 그 악한 도둑에게 피살된 유문학(劉文學)이란 同名의 소년영웅을 선망한 적이 있었다. 고추 몇 개 때문에 아까운 생명을 끊인 그, 국가의 화려한 “세뇌교육”에 넘어간 소년의 비극이 아닐까! 4. 결국 죽음마저도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현실 이익을 위하여 그 가치를 부여해지는 사실, 모종의 국체, 집단사회의 이념에 이용, 프로패건더의 소재로 전락되면 그 죽음은 무엇이 될까? 죽음에 아무리 인공적, 이념적 의의나 가치를 불어 넣어도 죽음은 그냥 죽음 일뿐이다. 하물며 삶과 함께 죽음까지도 어떤 이념에 이용당하는 그것이야 말로 직언하여 인간의 일대 비극일 것이다. 푸코의 말과 같이 살아서 인간 개인의 신체가 국가 지구에 통제 당하는 것도 비운이나, 죽어서 죽음까지도 국가의 통제에 이용당하는 것은 더구나 큰 비운이 아닐까! 옛날 “대일본제국”이 국민을 전쟁의 희생으로 내몰았던 역사체험은 결국 그것을 “대일본 死國”으로 변형시켰다. 마찬가지로 국가 이념에 이용당해 해방 후에도 수많은 국민이 죽은 대한민국 역시 좌파 지식인들의 지적대로 “죽음의 무덤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그리고 신중국의 많은 국민이 내부의 내홍에서 계급투쟁의 이념으로 수천만 생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현대사는 모택동의 어록에 등장하는 “수천만의 선열의 피”라는 말과 같이 피로 도배 돼 있다. 죽음을 강요하는 허위 장치로 이 나라는 많은 “영웅”을 만들어 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말과 같이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는 불행이다.” 불행이라 하면 나는 일개의 죽음까지도 국가가 통제, 필요 하는 그것이 더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5. 삶에도 이렇다 할 의의가 없는데 죽음에 무순 대단한 의의가 있을까? 개인의 삶과 함께 죽음도 그냥 죽음 자체로 내두는 사회야 말로 정녕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인간세상일 것이다. 나에게 생사관이란 게 있다면, 나는 삶과 죽음은 흑과 백처럼 준별되는 二分法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 돼 있다고 믿는다. 삶의 延長이 곧 죽음인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말로 “삶”보다 한 글자 더 많다. 한자어로 표현해도 生과 死는 다 같은 한글자로 똑같은 길이이며 박자이다. 삶의 길이와 같이 죽음은 같이 길 것이며, 어쩌면 보이는 삶보다 안 보이는 죽음의 세계가 훨씬 추측할 길 없이 길고 또 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흔히 유심론자 아니면 유물론자로 인간자체를 규정, 구별하기를 즐긴다. 그렇다면 나는 유심론자도 유물론자도 아니다. 양자의 경계에서 오가는 세계관, 아니 우주관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인간 자신의 사상과 모든 자유를 강제로 구속하는 이데올로기, 이념의 속박에서 해탈해야 한다.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 넓고 매력적인 미지의 사상(事象)으로 충만 되어 있다. 이 10년래 나는 우주학 내지 천문학이란 학문에 도취되었다. 우주를 아는 것이란 지구를 넘어 우주를 통해 우리 자신의 앎으로 이어진다. 공자님의 말씀한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아야 하나?”란 난폭한 현세욕의 중국인적인 인생관을 우주학의 지(知)적 세계에서 볼 때 얼마나 옹졸한 것인가 알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하다못해 삶을 위해 먹는 쌀 한 알에도 무한한 우주와 연결돼 있지 않은가! 이를 정성스럽게 가꾼 농군의 농사일, 씨를 수용하고 키운 땅, 그리고 물, 햇빛, 공기.... 이 쌀알을 먹어서 살아가는 자기의 생명, 육신의 존재는 집이 있고 대지가 있고 지구가 있고 태양이 있고 은하계가 있고 많은 행성과 항성, 혹성이 있다. 137억 년 전의 빅뱅에서 탄생 된 우주가 이후 부단히 팽창을 거듭하고 매초 30만Km의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해도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주전체에서 별 등 눈에 보이는 물질은 겨우 4%에 불과하여, 보이지 않는 96%에 대해서도, 비록 보이는 물질에 대해서라도 그 정체를 아는 것 역시 근소(僅少)에 지나지 않는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96%중에 23%가 중력(重力)을 일으키는 “암흑물질”이라 칭하는 정체불명의 물질이라고 한다. 나머지 73%기 우주를 팽창시키는 “암흑에네르기”, 미지의 열량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세계를 3차원이라 보는데, 우주학에서는 진짜 시공은 4차원이 아니라, “양자론 차원(量子論的次元)”에서 일어나는 초대칭성 입자(超對称性粒子)가 존재하여, 이 가벼운 초대칭성입자가 그 “암흑물질”의 유력후보의 하나라 한다. 따라서 시공은 4차원을 넘어 5차원, 6차원 아니 진짜 시공은 10차원까지 있다고 한다.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4차원시공” 마저 어려운데, 그보다 6차원이나 많은 것이니 머리가 아찔해져도 모를 상상의 범위를 절하나는 시공의 세계이다. 5차원이상의 공간에서 운동하는 입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에네르기라고 한다. 그러니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인간의 5관 감각을 훨씬 초월한 별(別)세계이다. 6. 내가 우주의 5차원 6차원, 10차원의 현혹 스러운 미지의 화제를 꺼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죽음과 직결된 차원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인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그의 명작 에서 제시한 적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마치 코끼리의 피부의 주름 안에 기생하는 기생충처럼 그 벌레들이 보이는 세계는 주름살이 전부이며 거대한 코끼리의 형태전체를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도 기생충마냥 5관으로 보이는 세계만 “세계”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인간은 필경 기생충에 아니기에 스스로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 우주를 날려고 하는 구지욕으로 “세계내 존재” 범위를 탈출하여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세계적으로 연구가 가속되고 있는 임사체험(臨死体驗)의 연구, 최민법 연구로 죽음을 체험하는 심리학적 분석으로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사후의 세계에는 인체를 떠난 영혼이 존재 한다는 보고가 무수히도 있다. 이를테면 죽은 뒤 인간은 육체에서 이탈하여 부유(浮遊)하여 둥둥 떠 있으며, 어떤 광(빛)에 의해 (물론 태양이나 전등광 같은 빛이 아니다.) 유혹되기도 하면서 정신, 의식체로 되어 천정에서 자신의 시신을 바라본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병원에서 죽었다 깨어난 일본인의 체험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부유한 자신의 의식이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결국 빛의 세계에서 “아직 오지 마세요, 어서 돌아가세요” 하는 가르침대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죽음에서 깨어났다고 술회한다. occult, 즉 신비한 초자연사상(事象)에 눈을 뜨고 4차원 6차원의 세계를 안다는 초능력자라 칭하는 인간도 있다. 순식간에 자신의 혼(정신)이 육체에서 이탈해 오사카 동경의 거리를 갔다 오는 초능력자도 있다고 한다. 한 의학교수가 나에게 내 전세(前世)가 누구인지 안다고도 했다. 그는 나의 영혼은 김시습이라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니 기쁘지만 또 100%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의식 수준은 아직 인간의 의식을 넘은 5차원 6차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 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파스칼은 에서 인간의 의식 수준을 넘은 고수준의 차원에서 직접적 간섭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 본인 역시 실험물리학자의 시조의 한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대물리학자 뉴톤도 초자연사상에 흥미를 갖고 만년에는 그 영역에 연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노벨생리학 ㆍ의학상(1912년) 수상자 아렉시스 가레르는 영혼을 갖춘 인간을 목격했으며 인간의 “세계내존재”에서 탈출 할 수 있음을 실중한 과학자, 의사이기도 하다. 7. 요컨대 “인간은 물질로서의 자신을 초월하는 정신적 존재이다” 라는 근년의 심리학, 인간학 가설에 대해 나는 차츰 믿게 되었다. 비록 신비체험은 없지만, 잠재의식은 체험하곤 한다. 일테면 “오늘 혹시 내가 찾는 고서가 그 책방에 가면 있겠지”하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헌책서점에 가보면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은 듯 나를 보고 미소하고 있는 그책. 옛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을 만난 기쁜 기분이다. 이때의 그 감은 전세의 혼, 또는 정신이 먼저 그 고서점에 가서 보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해석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영적세계, 초자연능력의 세계에서 육체의 사라짐(죽음)에 따라 정신(혼)이 인른 차원의 세계로 이행 하여 생(삶)이 연속한다고 한다. 임사체험을 겪은 사람이나 초능력자는 이것을 잘 안다고 한다. 즉 죽음-삶-앎의 연결고리인 듯 하다. 나의 한 80 넘은 독자는 자신은 현재 노후이지만, 연금도, 저축도 보험도 일절 없이 그 어떤 대책도 구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한다. 지극히 비상식적인 삶을 해왔지만,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그는 웃으면서 답한다. 젊었을 적에 노후의 그 다음만 걱정해왔기 때문에 그 근심을 해결하고 나니 노후의 근심도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그 뜻을 몰라서 내가 또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구극의 진실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노후의 근심을 하는데, 노후의 그 다음은 근심 하지 않는다. 초 상식적 진리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니고 있다. 육체는 생명이지만 정신은 아니다. 의식생명이다. 인간은 정신생명이다. 육체는 늙지만 정신은 늙지도 죽지도 안한다. 따라서 나 자신을 무한한 것이며, 무한히 젊다는 것이 곧 해결이다” “육체는 죽어도 정신을 죽지 아니 한다”가 그 노인의 지론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가 참 부러웠다. 인간의 “죽음”을 일찍 알아버린 “앎”이 있기에 그에게는 “죽음”도 “삶”이었던 것이다. 8. 내가 “죽음”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지하게 사고 한 것은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타계로부터였다. 2008년 4월 14일 심야 2시경, 심양에서 동생이 국제전화로 부고를 전했다. 찰라 나는 머릿속이 온통 흰 색으로 공백을 이룬 자신의 의식을 의식 했다. 그 다음 한참 지나자 집의 천정이 무너지듯 내 머리를 압박해왔다. 시야도 좁아지고 집안이 흰 거대한 암석판 같이 지지 눌렀다. 전화를 놓고 한 식경 지나서야 나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3일 전만해도 입원중인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퇴원하시면 봄에 일본에 오시겠다고 하시던 어머니시다. 부랴부랴 귀국한 내가 어머님의 영결식에서 본 어머님의 용안은 마치 평온하게 깊은 잠에 드신 것만 같았다. 영면(永眠)이란 단어는 고인의 잠든 것과 같은 모습에서 생긴 말일 것이다 며칠 전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날 12시경에 취침한 나는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얘야, 내가 옛날 널 임신할 때 꾼 태몽이 있잖아. 그때 내가 두레밖에 든 큰 뱀을 버리고 왔길래 너와 멀리 떨어져 사누나. 나 멀리 길 떠나야 한다” 라고 내 손을 잡고 말하신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아니”, 여기가 좋은데 갑자기 어디로 떠나신다고 그러세요?“ “아니다, 내가 꼭 갈 때가 있단다. 나 먼저 가니 몸조심하고 잘 살아야 한다.....” 아침에 깨어난 나는 꿈에서 어머님의 “작별”이 심상치 않다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어 어머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다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죽음”을 타곳으로 가서 산다는 “삶”으로 이미 나에게 고백했던 셈이다. 슬프다는 말이 너무 무력한 만큼, 깊은 슬픔에 빠진 나는 일본에 돌아온 뒤에도 일 년 동안은 거의 3일이 멀다하게 홀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뒤 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에 대해 늘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육체의 사라짐은 어머님에 대한 무한한 상념으로 연결해 주었다. 그 뒤 나는 왠지 늘 어머님이 영혼이 늘 나의 주위에 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네르기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이리하여 나는 슬픔의 슬럼프에서 이탈하여, 어머니와 항상 같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늘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어머니는 “죽음”이라는 육신의 사라짐을 통해 영원한 정신의 삶을 지속해가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왜냐면 살아계시는 분을 위해 제사 따위를 지낸다는 것을 불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육체가 사라지면 아마 혼의 에네르기로 되어 어머니와 같이 살 것이다. 그리고 이상 선배, 이광수선생, 김시습 할아버님과도 만나야겠다. 9. 누구는 영원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시신을 수정관에 넣어 영생을 시도한다고 하는데, 참 어리석은 골계의 풍경이 아닌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죽음”이라면 그까짓 육체가 뭐 길래 썩은 시체를 그대로 두고 우러러 첨앙(瞻仰)한단 말인가? 결국은 영원한 육체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유물론자들의 썩은 발상방법엔 정년함구하게 된다. 죽은 시체가, 영혼이 다 날아간 시체를 “영생물멸”연하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에라, 그런데 신경 쓰기보단 그냥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명상하는 편이 퍽 즐겁다. “소장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생떼벡페리의 은 별나라에서 온 작은 왕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잃어버린 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서양의 종교는 몰론 말 할 나위도 없으나, 서양의 회화에도 언제나 “죽음”의 테마가 대거 등장한다. 일테면 1517년에 한스 바르동의 명작 , 사신(死神 )과 쾌락의 원천인 소녀가 같이 있는 그림, 백골의 사신이 아릿다운 나체의 소녀에게 키스를 하는 광경에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 깔려있다. “삶과 죽음은 표리의 일체이다”라는 메시지를 발하여 오늘까지 충격을 주고 있다. “즉음을 잊지마라”는 서양의 “죽음의 영생” 테제는 미술, 문학, 음악예술에 관통한 굵은 주제이기도 하다. 죽음이야말로 삶을 빛나게 한다는 신조에서 서양인들은 죽음을 삶의 연쇄로 보았다는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동양의 불교에서도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프로세스에 있는 하나의 통과점이라고 간주한다. 무식한 어머니도 빌기도 하셨다. “죽어서 극락정토에 가서 너희들 행복을 빌겠다” 라고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만 68세에 타계 하신 어머님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않고 더 좋은 하늘나라로 가서 자식들을 위해 정성을 다 할 것이라고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셨으니 고맙기만 하다. 10.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작품엔 항상 “죽음”의 향기가 풍긴다. 왜 그가 세계적으로 그렇게 애독 되냐고 하면 그의 작품에는 국경을 넘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근원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치다(內田樹)교수의 말에 따르면, 무라카미는 인간의 창조족인 근원인 어둠의 장소에 추를 곧추 내리 드리우고, 그 속에 있는 현실세계가 아닌 이계(異界) 즉 “죽음”을 깊숙이 조명하고 자 한다. “현실세계”와 “현실이 아닌 세계”가 교착하는 문학을 통해 죽음에 포위되어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해 사고를 하고 있다. 에서 무라카미를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 그 일부분으로서 존재 한다”는 메시지를 발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통해 언어, 국경, 종교를 넘어 세계 만민이 공유하는 상징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또 하나의 참신한 모델을 고안하고 있으므로 나는 몇 년 안으로 그가 기필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리라 확신한다. 11. 죽음은 무엇인가? 해도 나는 확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삶은 죽음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죽음은 도착점이 아니라 인간의 또 하나의 생의 스타크지점 이라는 것. 인간은 부모님의 선택에 의해 우연히 태어나고, 우연이란 것들이 집합하여 삶을 살고 어느 날 우연히 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신”이라는 가설에 나는 매력을 느낀다. 그러므로 유물질적론적인 물질 편향의 인생론보다도 나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찾는데서 더 보람을 느낀다. 따라서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자신의 삶의 종식이 아니라 정신적 자기가 항원히 존재 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 삶에서 나는 내가 살았고 웃었고 울었다는 표식을 남기고저 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자식인 나의 글쓰기로 얻어지는 책들이다. 나는 육신은 죽지만 책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욕심 하나 더 있다. 저 세상에 가서도 될 수 있다면 책을 많이 쓰고 싶다. 욕심이라면 공자님과 석가님과 예수님 더불어 노자, 장자와 만나 논쟁을 하고 싶다. 또한 플라톤, 칸트, 세익스피어, 괴테를 만나고 싶고 김시습, 이광수, 이상을 뵙고 그들의 신변에서 살고 싶다. 결국 나는 죽음을 위해서 삶을 행하고 있는 것 같다. 다 죽음을 위한 연습이다.
90    2-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댓글:  조회:3903  추천:23  2013-01-29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11살 때 인가 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이 부러웠다. 새들은 날개가 있는데 인간은 왜 날개가 없을까 제법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고리키의 산문시 을 읽으면서 격량을 가르며 창공을 비상(飛翔)하는 새들에 대하여 사색하는 일은 그 작품 감상만큼 재미있었다. 쉬는 날에 나는 참새를 잡아서 날개의 모양을 관찰하려고 반나절이나 야외에서 참새를 쫓아 다녔다. 나는 놈에게 뛰는 놈이 당해내랴! 그때 나는 날개와 인간의 양각(兩脚)의 운니의 차이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래서 결국 할머니가 기르는 퇴화된 날개를 갖춘 닭을 잡아서 날개를 찬찬히 관찰 하였다. 닭은 놀라서 고꼬댁 거렸고 안간 힘을 쓰다가 닭털을 많이 뽑혔다. 나중에 질겁한 닭이 줄기차게 똥을 배설하는 바람에 내 얼굴에 에노구 (수채물감) 같은 그림을 그려 놓았다. 골계의 장면을 바라 본 할머니는 몹시도 꾸지람 하셨다. 그것도 씨암탉의 날개털이 뽑힌 “봉변”을 할머니는 가만 둘리 없었다. 나는 할머니를 피해서 집으로 들어와서 책을 찾았다. 아무래도 책 속에 그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날 내가 읽은 책속에는 새들이 나는 날개의 비밀이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홀로 그것을 깊이 사색 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닭털을 뽑은 나, 새를 쫒아 다니던 내가 지금 돌이켜 보아도 꽤 어리석은 아이였다고 생각 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다. 11살의 나에게도 사색이라는 “둥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많은 독서와 사유를 통해 나는 깨달음과 상상의 날개를 키울 수 있었다. 지성과 미성의 둥지를 꾸준히 마련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기에 뭐든지 다 스스로 궁리하고 개척 해나가야 했던 운명이었던가 보다. 형이 있는 급우생들이 부러웠지만 한편 나는 형이 있는 동생을 생각하면 나의 兄長의 날개가 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개척하는 날개, 이것이 내 가족적 ,그리고 운명적 인생 도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편했다. 자고이래로 새는 곧 날개를 갖추어서 창공을 날아가는 동물로서 혼과 정신의 승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이는 지상의 동물이 고정, 정착된 물리적인 것의 상징과 대조를 이룬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날개를 갖춘 인체의 神들이 사랑과 승리, 행복의 관념을 나타냈다. 에집트 문화에서도 새는 인간의 얼굴을 지닌, 인간 사후의 육체에서 이탈된 혼을 상징했다. 힌두교에서도 새는 태양에서 탄생된 神 그자체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새는 원래 男根의 심벌로서 그것이 이윽하여 승화를 이루어 정신적 사랑의 행동을 의미하게 됐다고 한다. 우화나 동화, 만화 속에도 새는 은인이나 연인이 되어 나타나서 지상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스토리가 수없이도 많이 등장하지 않은가. 새가 넋을 의미하는 민화(民話)역시 많은 유럽민족들 사이에서 정시(呈示)된다. 새의 날개는 사유, 상상력과 지성(知性), 천사를 상징한다. 인간이 새들보다 더 발달되고 위대한 “날개”를 갖게 된 것은 사유, 상상과 지성이라 불리는 것들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날개”를 키운 것은 아무래도 “둥지”의 덕분이다. 그 둥지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이런 천진난만한 사유의 문제를 사유하기를 즐긴다. 동심으로 문제를 사고하노라면 의외로 성인들의 굳어진 사유보다 더 유난하여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성인들은 자신의 경험 자체가 자신의 행위를 규정짓는 모종의 감옥이 되기 십상이다. 견고한 담벼락의 감옥같이 사유의 유연성과 분방성을 막기에 맞춤이다. 이런 두터운 담벼락의 콘크리트둥지에서 유연한 발상이 탄생하기는 지난(至難)하다. 어렸을 때 중국에서 자라면서 받은 교육은 거의가 두터운 담벼락이 둘러쌓인 “이념”에 맞추기를 강요한 요소가 다수였다. 내가 문학공부를 했을 때였다. 애써 쓴 습작을 어떤 어른에게 가져가 보이니, 그는 “글이란 이렇게 쓰는 게 아니야. 글 속에 반드시 우리 시대의 이념, 공산주의 빛나는 사상을 불어 넣어야 제대로 된 작품이 될 수 있다....” 라고 가르쳤다. 결국 나는 이날까지 이념이요, 공산주의 빛나는 사상이요 하는 것이 내 사유의 반경 속에 비치되지 못한 까닭에, 그 어fms이 요구하는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로 성장되지 못한다. 소학교 때 나는 암기는 잘 했으나, 억지로 암기하여 그것의 틀에 맞춰야 한다는 위로부터의 (由上而下)강요가 그렇게 싫었다. 거기에는 “왜? 무엇을 위해? 그래서”? 하는 등등의 사유에 해답 줄 만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 사람이 그 옛날 죽은 글을 암기하고 모방해다 하고 그 틀은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는 주입식 교육방식에 나는 질리고 말았다. 대학시절에 문학공부를 하면서 송정환 선생님 댁으로 자주 찾아가서 시 공부를 했다. 역사학자이며, 시인인 송 선생님은 중한 당뇨병 탓으로 손수 주사기로 인슐린을 맞아 가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간 지식인이었다. 인자하시고 사유 또한 학식과 감성을 경비한 유연한 것이 있어서 나는 문학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죽은 공부를 하지 말고 산 공부를 해야 한다” 송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시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송 선생님의 이 교시에서 나는 당시 “죽은 사유의 둥지는 죽은 사유의 말밖에 부화시킬 수 없다” 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다. 만들어 놓고 보니 제법 그럴 싸 했다. 그때 같이 같던 연인에게 이 말을 했더니, “음, 멋있는 말이네요. 철학자다운 맛이 있어서 좋아요.” 하고 반겼다. 나는 나름대로 내 사유의 둥지를 틀어가면서 암탉같이 알을 낳는 격으로 사색하고 책 읽고 또 글을 써내려 왔다. 지금도 나는 중국 자유주의 지식인으로서 40대에 아깝게 타계한 왕소파(王小波)의 작품과 사상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유학 공부해온 그는 동시대 지식인들 중에서 발군의 유연성 사고를 갖춘 엘리터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인에게 있어서 사유의 엘리트로 되는 것이 도덕의 엘리트로 되는 것보다 퍽 중요하다.” (1994) 사유가 도덕 즉 정치적 이념, 주의를 강조하는 윤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참 심원한 의의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그냥 글 쓰는 자체, 문장력, 단어력, 구성 등 문필활동에 노정된 외곽에서만 사유, 터치하고 있다. 기실 나는 글쓰기에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적 역량, 능력은 글쓰기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글 쓰는 작가의 머릿속 즉 사유라고 생각한다. 문장은 곧 사고가 글자의 뀜으로 표현 되는 것이다. “글쓰기의 비결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잘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글쓰기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유 사고한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것 뿐이다 라고 대답해준다. 글쓰기를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은 사유도, 구상도 잘 하지 않고 또는 설익은 사고로 쓰는데 급급해 하는데 이것은 본말 전도이다. 사유를 깊이 하고 구상을 익히면 사실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그 차적이며, 또 잘 써내려 갈수 있다. 산모가 10개월을 회임하고 고생한 뒤라야 하루아침에 출산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사유가 있으면 어떤 글이 태어난다. 경직한 사유자는 그냥 죽을 때까지 경직한 글만 양산한다. 결국 쓰레기에 가까운 글을 쓰면서도 주옥같은 명문을 쓴다고 하는 이들이 바로 경직된 사유의 작자들이다. 대조적으로 유연사유의 작자는 늘 신선하고 독특한 견해를 듬뿍 담은 글을 써내기 마련이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유연한 사랑은 유연한 인생을 살게 되며, 경직한 사람은 경직된 인생을 살아간다. 유연하지도 경직하지도 않은 사람은 또 유연하지도 경직되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이 세상이, 이 우주가 꼭 인간이 생각하는 “과학적으로 이렇다” 라는 “상실적”인 사유에 매인 사유로 보지는 않는다. 과학은 세계를 풀어가는 많은 열쇄와 코드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간조 한다. 따라서 과학은 “절대유일”의 기준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근거”로 풀지 못하는 사상(事象)은 수 없이도 많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능력으로서는 아직 그 수수께끼를 풀 코드, 방법을 찾지 못했거나 눈앞에 있는데도 경직된 상식의 사유탓으로 보고도 안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과학까지도 일종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 가설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눈에 가시적으로, 손에 가촉적이기 때문에 무한한 사실(事實)에 가까운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3차원 세계 밖에도 4차원, 5차원의 세계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가설로서 말이다. “가설”이야 말로 모든 과학의 기본일 것이며, “가설”이 되면 “과학”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관, 학교에서 배운 것, 국가가 정부가 세뇌하는 것, 모든 상식, 통념, 모든 것을 가설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사유를 토대로 세계를 인식하고저 한다. 그래서 터브를 부수고 가설을 부수거나 또는 입증하려고 하는 자세가 나의 인생과 글쓰기, 학문의 기본자세이며 방식이다. 글쓰기에만 한정해서 이야기 하자면, 나의 글쓰기는 사유의 작은 둥지에서 알을 낳는 것이다. 내가 자주 암닭이라 자신을 비유한 레토릭은 이 “둥지가 있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알이 부화되면 아마 또 병아리가 태어나고 병아리가 자라면 또 암탉으로 성장하여 알을 낳을 것이다. 낳다보면 노란 자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낳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 심히 우려하지 않는다. 다음번 더 좋은 알을 낳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터넷에 발표되는 자신의 졸문 아래 많이 달라붙는 댓글에 대해서 요즘에야 조금씩 읽게 되었다. 그야말로 “안화요란(眼花瞭亂)”의 댓글이 줄줄이 끝없는 포도송이 같이 달리고 또 달린다. 읽다보니 그것도 일종 낙(樂 )이 된다. 그중에 최근 등장한 “최수정”이란 닉넴의 댓글이 하나 재미있어서 여기에 옮겨보겠다. 내가 암탉이라 배유한 데 대한 평가적인 댓글이다. “최수정”님은 이렇게 쓰고 있다. “김 선생님이 단지 계란만 낳는 암탉이 아닌 부화하여 삐악〜거리는 병아리를 거느리는 母情이 강한 엄마 암탉이라는 便命感을 지니세요.... 책임감 있고 사명감 있는 암탉이 되어 보다 영양가 있는 계란을 낳아 부디 나머지 병아리들을 견실히 잘 키워주세요! 병아리들이 8색 조로 성장하여 조선족의 신지평을 열어주세요!” 그리고 작가에 대한 건강에도 신경써주는 매너와 배려가 돋보인다. “계란 부화 성공하시고” “영양실조에 유의하여 스스로 영양가 식단 배분을 잘해드시길.!” 고마운 댓글이다. 아마 용의주도한 배려까지 잊지 않은 것을 보면 여성분일까 생각된다. (따라서 오늘 이 졸문을 빌어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독자들. 생명부지의 조선족 독자 제현씨께 심심한 고마움의 말씀 전하고 싶다.) “최수정”님 진정어린 성원과 기대가 좀 부담스럽다. 내가 그런 “사명감”을 갖춘 암탉으로 성큼 성장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독자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오늘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괴테는 “오, 신비로운 동양의 힘이요!” 하고 노래했는데 나는 “오, 사랑스런 내 사유의 둥지여!” 하고 읊어 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어진다. “둥지에서 알을 부지런히 낳고 또 부지런히 부화 시켜야지.”   물론 나는 둥지가 오래돼서 구조적으로 썩기 전에 새 둥지를 만들겠다. 또한 욕심 같아서는 천사 같은 병아리들을 키워내고 싶다.
89    2-5. 서의 마음, 서의 정신 댓글:  조회:4021  추천:23  2013-01-18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5. 서의 마음, 서의 정신   나는 자신이 전통적 문인취미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이라는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그 안에는 동양적 문인취미의 또 다른 裸身이 드러난다. 연구와 글쓰기는 주업이고 그림그리기와 서예, 글쓰기의 서화의 여기(餘技)로서 즐긴다. 文,書,畵,琴이 조선말기와 식민지 초기, 청말민초(淸末民初) 다이쇼(大正), 쇼오와(昭和) 초기까지의 동양3극 전통적 文人(文化人, 知識人)의 조화를 이룩한 하나의 입체적 세계였다. 내가 자신을 문인취미를 혹애하는 문인이라고 함은 21세기의 포스트모던사회의 하이데클노로지ㆍ디지털의 거세찬 소용돌이 속에서도 육필로 글쓰기를 견지하는 구식의 20세기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서나 화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여기로 직접 붓글을 쓰거나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음악 예술적 의미의 琴은 전혀 문외한이나 남들 따라 어울려서 “카라오케”라 칭하는 노래방에서 몇 곡 부르는 것뿐이다.   “文人趣味”에 참혹된 나는 20대부터 서화, 고완에 침취하기도 했는데 지금껏 제법 수집한 근대 동아시아 명사문인의 유묵과 문방 4우의 硯ㆍ墨 ㆍ筆ㆍ紙도 수십 점에 이른다. 내 서제를 文學書房, 또는 文學山房이라 하며, 실제로 명사의 한 두점 서화가 걸려있다. 물론 절대다수는 전문 서고가 있어 거기에 보관하고 있다. 서화가 없는 서재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지인이나 특히 문화인의 자택이나 서재를 방문할 때, 먼저 보는 것이 서가와 벽에 서화가 걸려 있나를 둘러보는 버릇이 있다. 서나 화가 걸려 있지 않은 서재는 노랑자위가 없는 계란같이 보인다. 아니 방초가 없는 공원이며, 오아시스가 없는 사막으로 보인다. 서가 있는 풍경, 그것은 지성과 지혜와 예수의 별들이 총총히 박혀서 앞 다투어 반짝이는 찬연한 밤하늘의 공간이다. 윤동주가 읊었던 가을밤의 별 하늘이다.   소학교 때부터 습자시간과 작문시간이 제일 좋았다. 주판을 치는 산수시간은 별재미가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묵향이 풍기는 먹물을 붓에 듬뿍 찍어서 선지에 글을 박아 쓰는 습지. 먹즙의 청향이 좋아서 나는 지금까지 붓을 쥐고 습지하는 습관을 버리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서에 대해서 스승에게 사사하여 특별히 배운 적은 없다. 지금도 어느 문파(門派)에 들어가서 습득할 생각이나, 또 특정 서가를 私淑할 예정도 없다. 顔眞卿(안진경), 玉羲之, 歌陽詢, 손과정(孫過庭), 조맹부(趙孟頫), 동기창(董其昌)의 書, 書法의 章法에 대해서 눈동냥도 해왔으나, 특별히 못하거나 모방하지는 않았다. 모방으로서 나 자신의 서가 이룩되리라고는 믿지 않아서였다. 서법에는 용필(用筆), 문가(問架), 풍신(風神)이라는 3요점이 있고 구체적으로 筆墨, 章法, 氣韻이라는 필법이 있다고 손과정은 에서 가르친다. 우선 필묵, 용필에서는 먹색, 먹의 농담에 주의하여 필을 사용하며 그 농담5색이 적당해야 함을 강조한다. 장몀, 서간이란 글자의 구조, 일점일획의 규준에 따라 글자와 글자 사이의 호응, 결체의 서밀, 용필의 경중, 지속, 용묵의 건습, 농담에 따라 하나의 서폭세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풍신, 기운이란 구체적 설명은 어려우나 글자체를 통해 풍겨내는 분위기, 정신적, 추상적 멋을 말한다고 한다. 문징명(文徵明)의 小楷는 娟秀秀朗하여 왕택(王澤)의 1장2척의 대폭은 勁健雄獨하며, 풍신은 다르나 일종 느끼는 감동은 비슷하다. 그래서 글씨 서체나 필자의 독특한 개성에 따라 그 소질에는 雅秀, 濕潤雄渾 沈深蒼凉, 淸越, 龍飛 등 특색으로 감명을 환기한다고 한다. 요컨대 서에다 일종의 영성을 부여하여, 氣를 불어넣어, 글을 쓴다고 한다. 書가 일종 “修神養氣”의 방법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에는 찬동한다. 글쓰기가 막히거나 기분이 침울하거나 답답할 때 나는 책도, 필도 팽개치고 붓을 쥐고 묵향을 맡으면서 선지위에다 붓글을 써내려 간다. 수십장 쓰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참 이보다 양호한 특효약이 내게는 없는 것 같다. 2006년에 병마에 시달리며 투병중일 때 나는 늘 서를 쓰는 것으로 투명생활에서 낙취를 찾았고 안정을 이룩했다. 그때 나는 고완 수집가인 독자(80대의 망년지교)로부터 청나라 때 왕근성(王近聖)의 제자 제작했다는 고묵(古墨)한편을 선물 받았다. 나는 소장하고 있는 청조시기 말기의 벼루에 갈아서 썼는데 묵향이 온 서재를 감미롭게 감돌아 기분이 하는 나는 백학 같았다.   투병에 이런 고묵, 고연은 참 좋은 약이었다. 병은 몸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맘에서 생긴다. 맘이 평온하고 따스하면 몸의 병도 스스로 물러난다. 나는 또 명사의 서를 걸어놓고 응시하면서 그 명사의 필적에서 “오라”를 흡취한다. 만나지도 못함 백년전, 수백년전의 명사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삶의 고락, 의지와 신념을 가르쳐 준다. 사람의 묵적(墨蹟)을 보는 것은 그 개인 개인의 마음을 읽는 것과 같다. 그들의 정신을 읽는 것과 같다. 그들의 얼굴이 다른 것 같이 개성과 정신도 다 다르다. 그 묵적이 무엇을 썼든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차라리 나는 묵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묵적을 본다. 훌륭한 묵적은 호흡이 흐르고 그래서 살아있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은 모사, 임서(臨書)를 해서 형태는 본 따 낼 수 있으나 대가의 마음, 정신세계는 절대 쉽게 본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불멸의 의사 안중근의 목적에서 나는 강건. 雄渾의 의지를 본다. 그리고 안중근의 육혈포에 절명한 이토히로부미의 목적에서 나는 한학 유교소양의 깊은 모락가의 활달한 마음을 본다.   추사 김정희의 유묵에서는 자유분방한 미학을 보고, 동심 金農의 예서에서는 고귀한 치졸의 미학을, 손문의 書에서는 인류를 사랑하는 고고한 흉금을 읽는다.   이완용의 묵적에서는 동양3국 명사에서 최고수준의 달필이상의 분방한 초서의 멋을 본다.“매국노”이든 “애국노”이든 그의 정신세계는 단순히 오명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 없는 고상한 정치가, 선비의 품격이 있다. 나이토고난의 서에서는 일류 거물학자의 박학과 통찰력을, 이어령스승의 만필이 아닌 글씨에서는 소탈의 지성, 얼굴을 본다. 그리고 余秋雨의 글씨에서는 수려한 글 솜씨에 담긴 英知를 본다.   대저 “文如其人”이라 하는데 나는 그 말보다 “書如其人”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글은 많이 쓰니까 本人얼굴이 흐리워지는 때도 있으나, 서예는 본인의 글씨가 그대로 마음(성격)씨를 배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맘씨와 글씨의 씨는 직결되어 있지 않은가.   서에 대한 동양 3국의 명칭도 각기 다르다. 본가 중국에서는 서법이라 하여 글씨 쓰는 章法, 格法에 치중한다. 일종의 형식, 규범을 중히 여기는 서의 세계이다. 한국은 서예라 하여 서법을 예술의 하나로 보고 있다. 일본은 書道라 하여 즐기는 茶道, 花道와 같이 “三道”를 이루어 “茶禪一味”의 정신세계를 이룬다. 중한일의 서를 보면, 본가의 중궁의 서는 격식에 매인 규범적 미, 기준적미가 주류이고, 한국은 중국의 규범을 지키면서 좀 더 분방한 예술의 경계에 있다. 일본은 더욱 자연적 정서적 원리원칙을 깬 “道”를 자유 활달의 선의 맛이 있다. 이것이 내가 3국의 서를 즐겨 보면서 인상적으로 느낀 “비교3국서론”이다. 이 “서론”적 양상은 3국의 문학, 미술, 예술, 문화전반에 흐르는 특징이다.   정치도 문학도 문화도 중국은 보다 유연성이 있고 분방해 보이나 기실은 너무 격식, 규범에 스스로 메어 이탈하지 못하는 결함을 많이 안고 있다. 이데올로기 정치에 종속된 문예전통은 오늘도 중국은 여전하고, 정도는 약하나 한국에서도 그것이 보이며 일본은 하이구와 같은 시나, 소설에서도 거의 정치적 이념으로 글을 쓰는 전통은 보이지 않는다. 노신, 이광수의 작품에서는 계몽, 정치이념, 민족의 이념이 농후하게 깔려있으나 나츠메소세키의 소설에는 이같은 이념이 배제된 인간중심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예술에서 꽃 하나를 묘사해도 꼭 꽃에 무슨 이념, 계몽, 사상을 인공적으로 부여시키고 그 꽃을 순수한 예술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 중국과 한국이다.   이념의 원리세계 중한과 이념 부재의 美의 세계의 일본의 정신 구조적 이질성, 3국에서 역사관이 이질성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역사문제가 진짜 충돌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역사는 역사학으로서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검토 연구할 학문의 세계이지만, 역사를 정치이념에 이용하는 얄팍한 위정자. 정치꾼들의 농락에 놀아난 것이다. 왜 역사가 이념에 이용당해야 하는가? 역사를 교과서로, 거울로 삼는다면 역사를 더 소중히 하고 존중하며, 적어도 왜곡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이념으로 역사를 “소녀같이 임의로 분장”시키고 왜곡도 불사하는 행동에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는 말은 거짓말 밖에 아니 된다. 역사 그 자체의 불행인 것이 아니라, 역사를 정치로 해석, 이용하려는 그 심산이 불행을 끌어온다. 지난 역사로 오늘을 괴롭히는 우(愚)는 이제 억제해야 할 것이다. 서의 말에서 어떻게 역사 문제로 좀 비약했나?   먹을 갈고 붓글을 쓰면서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먹이 사람을 간다. 따라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실은 글이 사람을 쓴다. 인간은 술에 사람이 취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술이 사람에 취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도취된 사람은 그 상대화 自他가 아니라 실은 자기 同一體로 一體를 이루는 법이다. 해서 같은 술을 먹어도 취함에서 나타나는 人格은 천차만별이다.   나는 서에서는 “格에 들어가 격을 나오는 ”방법이 좋다. “격은 있으되 격을 깨는” 그런 경지, 이것이 나의 서의 사상이며 정신이다. 뿐만 아니라 내 정신세계, 나의 인생에 관통한 하나의 굵직한 主義이다. 나는 서를 쓰지만 그 누구의 격에 들어선 맞춘 글씨가 아니라 나만의 개성을 살린 글을 쓰고 싶다. “자유분방, 경묘소탈”의 정신세계, 그리고 미학, 격식과 고상을 겸비한 왕부지나 안진경의 교과서적 서체보다 나는 오히려 격식이 없는 격식을 깬 추사 김정희나, 일본의 會八一, 中村不折의 분방한 서체, 그리고 副島種臣의 격을 일탈한 서체가 좋다. 일본인이라서가 아니다. 그 누구의 얼굴이 아니라 그 서체가 좋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일탈과 이단의 서, 나는 글쓰기에서도, 나의 정신세계에서도 이는 궁극적으로 목적이면서도 방법이기도 하다.
88    2-4. ‘미완’의 사상 댓글:  조회:3827  추천:30  2013-01-1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4. ‘미완’의 사상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완벽한 글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 왔으며, 그래서 나는 자신이 쓴 글이 비록 쓸 당시에는 흡족한 글이었더라도 수성상이 지나고 다시 再讀해 보면 구석구석에 흠이 보이고 그때 좀 더 잘 썼을 것을 하고 지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리, 상식상의 오유가 아니라면 나는 거의 지난 글에 손을 대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과거의 얼굴 사진이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수정하지 않듯이.   “미완(未完)”의 결함, 그것이 다음은 좀더 잘 하지고 자신을 밀어주게끔 약속한다. 미완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글쓰기에 있어서도, 그리고 인간의 행동양식의 내면에 있는 의식세계로서의 사상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함적인 우정이 아닐까.   나는 자신을 미완성의 인간, 미성숙의 남자라고 자안한다, 내 심성의 발로인 글과 달리 실생활의 나는 少年같은 치기와 童趣에 머물러 있다. 소년과 같은 “미성연”의 치졸함과 동심은 내가 글쓰기에 충실하여 스스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영구히 즐겁게 뒷받침해 주는 에너지로 되고 이는 것이다. 당연히 연령적, 육체적 의미의 미완성 뿐 만이 아니다. 나는 내 행동양식의 총설계사인 내면의 思想 역시 항구히 “未完”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나는 너무 성숙되고 완벽하고, 완성된 모든 事象에 대해 천연적으로 거부감과 위압감을 느낀다. 차라리 흠이 많아도 독특한 뭔가를 지닌 것에 더 공감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학생들 작문, 레포터의 채점도 사려가 없고 멋있고 완성된 구성의 문장보다도 미숙하고 결함이 있는 글이라도 그 중에 독특한 사고, 기발한 견해, 관점이 있다면 높이 평가한다. 노란 자위가 없는 계란은 아무리 크고 빛깔이 화려해도 영양가는 평가하기 어렵지 않은가.   술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다. 酒香 이 있으면 나는 그런 술이 더 좋다. 유명브랜드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의 유니크한 개성이 있는 물건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그쪽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도 그러하다. 너무 완벽한 미인, 너무 똑똑한 (체하는) 여성에게서는 오히려 모종의 고압감이 있어서 마음이 부담스러워진다. 오히려 썩 미인은 아니더라도 어딘가 독특한 품위와 멋, 센스가 풍기는 知的향이 있는 여자가 나는 좋다. 내가 20,30대에는 용자단려한 미인을 선호했으나 40대에 들어서니 좀 철이 들었는지 “용모보다 마음”의 미인을 선호하게 되어가고 있다.   흠이 있어서 아름답다. 세상은 추가 있어서 미가 더 돋보이듯이, 사람들은 흔히 “옥에 티”라고 흠을 꺼리는 경험이 있으나 오히려 과히 깨끗하고 미끄러질 듯 매끈한 옥보다도 미인의 아래턱에 점이하나 붙어 있듯이 그런 “티”가 있어 더 섹시하고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일까 洪自誠의 에서도 “花看半開, 酒飮微醉” 즉 “꽃은 절반 핀 꽃이 좋고, 술은 약간 취함이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구절 뒤에는 “영만(盈滿)”을 바라는 자는 심사국려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 꽉 차지 않고 어딘가 빈 칸이 있고 결점이 보이는 미완의 사상, 이것이 나의 삶을 지배하는 主義중의 하나이다. 만약 내게 사상이 있다고 한다면, 나의 사상은 늘 변하는 흐름의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함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는 프로세스, 언제 어떻게 어떤 方向으로 바꿀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내 사상을 “미완”으로 규정해도 좋을 만큼, “미완”그것을 즐기기도 한다. 무릇 사물이나 인물이나 그 사상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도중에 있을 때가 보람 있고 멋있게 보인다.   완숙한 사물은 결국 종식을 의미한다. 죽음의 종식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나는 완숙한 紅柿가 무르익어서 땅에 떨어져 완숙의 죽음을 구가하는 기껍고도 애달픈 모습을 목격했다. 또 대학 근처의 은행나무 잎들이 샛노랗게 물들고 빨갛게 단풍이 든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낙엽으로 떨어지는 풍경을 보았다. 이처럼 자연의 만물들도 완숙의 고봉 기에 달하면 곧 그것으로 해서 사라짐의 그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짐이 죽음이 아니 더 라면, 오 헨리의 의 존시가 그렇게까지 병상에 누워 한 잎 남은 나뭇잎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존시를 위해 마지막 잎새를 그려준 베어면의 마음씨도 아름답거니와 사라질 때 사라지는 낙엽들도 아름답다. 낙엽들이 아름다운 까닭은 자신의 죽음으로 봄이 오면 신록이 피는 희망을 묻었기 때문이리라.   “희망”은 죽음에서도, 미완에서도 괴어나는 것이다. 내가 자신의 연구, 글쓰기에서 부지런히 꺾기지 않고 견지할 수 있는 굵은 심(芯)이 있다면 그 어떤 관념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완성된 완숙이 아닌 미숙, 미완의 사상이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모자라다. 아직 골똑 차지 못한 빈구석이 너무 많다. 그러니 좀 더 잘 쓰고 좀 더 많이 써야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연구하고 독서하고 글쓰기를 해왔다. 빈칸의 계단, 그 계단의 공백을 매우면서 한층 한층 위로 오르는 희열, 변하고 또 변하는 자신, 왜 변해야 하는가고 물으면 나는 변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준비해 둔다. 나는 “코스모폴리탄”, 한중일 3국을 다 조국으로 사랑하는 인간이다. 협애한 민족, 국가관의 애국주의의 포로가 아닌 이념의 좌우를 넘어선 티브를 깨고 벌거벗은 왕님을 벌거벗었다고 하는 어린이와 같은 진실을 말하는 인간이다.   아마 나 같은 左와 右를 넘어서, 조국을 3개 갖고 있다는 말에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를 왜곡하는 것은 나는 싫다.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 보지 않고 꼭 무슨 이념의 색깔로 보는 그런 것이 말이다.   또 한해의 무르익은 성숙의 가을이다. 5층 서재의 창가에 서면 울긋불긋 늦가을의 색깔을 장식하는 단풍잎이 보인다. 그리고 탐스럽게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성숙하는 가을 풍경은 눈요기에도 너무나 풍요롭기만 하다. 익어 떨어진 감들의 시해들이 무참하게 시야에 안겨온다. 인간의 시해라면 백골화된 참경(慘景)이겠지.... 릴케는 꽃이 만발하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다. 꽃이 지는 열매가 맺는 “완숙”의 봄을 슬퍼했던 것일까. 그가 가장 좋아한 꽃은 화왕이라 불린 장미꽃이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장미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장미에게도 무서운 흠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시에 찔려 릴케는 죽는다. 그의 시처럼 그 죽음도 수많은 소녀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는 릴케처럼 죽으면서도 소녀들을 울린 그런 시도 쓸 줄 모른다. 더구나 나는 완숙을 거부하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이 人間的으로 미숙한 자신을 알고 있다. 이것저것 허울을 다 벗기고 나면 나는 앙상한 명태와 같은 마른 사람이다. 아니 피 흐르는 미이라이다.   성격은 오팍 한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혼자 있기를 즐기고, 나긋나긋 말랑말랑해 보이면서도 땅땅 할 때는 땅땅해서 자기 줏대를 아니 굽힌다. 인정이 박하고 냉정하며 생긴 얼굴같이 새 차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른다. 게다가 자중(자기중심)적이며 표현옥이 왕성하고 자존심, 자부심이 강해서 자찬으로 에스컬레이트 하는 면이 많다. 생활에서는 자유분방, 방종형이지, 먹는 데는 입이 발아서 까다롭지, 몸이 또 유년시절 때부터 병약해서 약골인 주제이니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다. 그래서 굳이 우익(右翼)이니 좌익(左翼)이니 하는 날개가 따로 필요 없다. 한마디로 결점 투성의 인간이다. 이런 나는 한곳에 오래 있으면 아니 된다. 여기저기 경계에서 살아야 내 특성을 발휘 할 수 있다. 다름 아닌 “미완인”이기에 자기에 대해 자부하면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自信하면서도 不滿型 사나이다. 자부는 있되 자족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완의 공백, “빈칸메우기”라는 말을 즐긴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놀트 겔렌은 )1904)에서 “인간은 생리학적 결함을 文化的行動으로 메우고 있는 존재로서, 원숭이 태아가 문화적으로 훈육된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결함動物”의 인간은 누구나 그 결함에 메우는 행동을 하도록 숙명을 타고 난 생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빈칸 메우기”의 설법 같이 나는 자신의 미완의 “빈칸”을 한 칸 또 한 칸씩 메우는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한 칸 한 칸씩 사상은 바뀌고 인간은 변한다.   빈칸은 많터 그래서 할 일은 많다. 조급히 우물에서 숭늉 찾는 성급함보다 나는 “Festina lente”(천천히 서두는) 행동원리를 준수한다. 준비 안된 성급함은 금물이다. 거북이 같이 “서서히”, 토끼같이 “서두는”나 자신만의 미완의 길을 걷는다. 그래서 결국 그 한마디다. 완숙한 紅柿가 되기보다는 떫은 미완의 靑枾이고 싶다.
87    2-3. 反컴퓨터론 댓글:  조회:7198  추천:25  2012-12-2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3. 反컴퓨터론   안경을 쓴 버마재비를 아시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가로 막으려고 언감생심 나섰다” 라는 그 버마재비(사마귀)ㆍ당치도 않은 그런 버마재비를 우리는 一策로 부하고 냉소한다. 나는 오늘 큰맘 먹고 그 버마재비가 되어보려고 덤빈다. “컴퓨터時代”라 칭해지는 오늘의 시대에 가로막는 담론을 하려고 한다. 컴퓨터시대의 수레바퀴를 “잠깐!”하고 내 길고도 가는 손을 내밀고 세워 보련다. 물론 “反 컴퓨터론”이라 하여 이 시대를 부정, 反動으로 거부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컴퓨터시대라고 구가 하는 최첨단정보시대, “정보화 사회”를 相 化시켜 반추와 성찰을 하자는 소박한 異見일 뿐이다.   오늘 컴퓨터, 통신정보기술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하루가 멀다하게 발전을 하고 있다. 누가 상상을 할 수 있었던가? 컴퓨터가 인간의 삶의 필수품으로서 사회의 모든 분야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되고 있는 오늘 같은 시대를. 근무시간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인터넷, 컴퓨터 작업으로 처리되고 있다. 회사 서류작성, 발신, 수신, 대학생들의 리포트, 논문작성이나 작가의 글쓰기, 일반사무의 처리와 연락사항, 연애편지와 친구에 전하는 소식, 시골의 양돈장에서 돼지새끼가 한꺼번에 10마리를 낳았다든가, 오늘은 저녁메뉴를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든가 하는 것까지도, 우리들이 컴퓨터의 딧,플레이 화면에 등장한다. 친구와 금방 헤어졌는데 이메일이 우선 먼저 상대방의 귀가보다 빨리 도착한다. 말하자면 21세기 우리의 일상의 식사처럼 중요한 일과로 되었으며 휴대폰까지 가세하며 일상의 거의 초단위로 컴퓨터化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매개인의 “컴퓨터가 있는 풍경” 그자체이다. 보다시피 인터넷기술은 우리의 정보를 물(物)에서 이탈시키는 큰 역할을 한다. 15세기 구텐베르쿠가 금속 활판인쇄를 발명이후 계속 되 온 인쇄술, 활자와 종이에 의한 정보의 시스템(즉 물질에 의한 정보전달방식)을 일거에 쇄신시키는 革命이라 할 수 있다. 보브 메트가표의 법칙에 의하면, 인터넷의 효용은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를 2승(二乘)에 비례된다고 한다. 즉 100명이 참가하는 네트워크에서는 이 네트워크를 통하여 남은 99명과 접속, 교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간단한 원리이다. 200명이라면 199명이 되며, (100명의 네트워크의 약 2배로 증폭됨) 결국 2배의 2배 즉 4배 (2승)이 된다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전 세계의 인간을 한꺼번에 연결시키는 기세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생활기반으로서 자리 잡는다고 한다. 즉 일, 공부, 오락, 쇼핑. 인간사이의 연락, 통신, 정보수집, 발신과 수신... 이 모든 것에 인터넷이 사용되며 인간의 생활은 지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바. 이는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다. 피터ㆍ드럭커거교수는 “20세기는 체력노동자의 생산성이 50배 향상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21세기는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이 50배 향상되는 기간이다. 컴퓨터에 의존하여 그 향상이 달성한다는 것이다. 금후 기술이 발달되면 인간의 두뇌의 사고를 이길 수 있는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한다. 현재 상태의 컴퓨터는 아직 미완성의 기술제품인바, 지금의 컴퓨터는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컴퓨터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컴퓨터가 사용하기 어려운 결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나 같은 컴맹에게 이 말은 반가운 말이다. 앞으로 성능이 고도로 정비된 쓰기 쉬운 컴퓨터가 등장하면 나처럼 손재간이 없는 멍청이도 자유자재로 컴퓨터를 부릴 수 있을 것일까. 그때가면 우리의 주위에 어디나 존재하는 컴퓨터는, 컴퓨터로서의 흔적이 안 보인다고 한다. 지어 “컴퓨터를 쓰고 있다”는 의식마저도 없어진다고 한다. 참 아름다운 장밋빛의 미래이다. 그 미래에 가면 현재의 형태의 컴퓨터가 아닌 수백배 발전된 것으로서, 아무튼 책상위에 놓여 우리가 쉬운 장난감 다루도록 다룰 수 있는 “컴퓨터”라 칭하지 않는 첨단의 도구가 나타난다고 예측하고 있다. 유토피아 같은 미묘한 “정보사회”라고 한다. 이 같은 “정보화사회”를 꿈꾸는 우리들은 누구나 “기술이 인간 사회를 바꾼다” 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보기술과 사회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나는 이 미묘한 앞날에 대해 전부 믿기 보다는 왜서인지 회의적이다. 당연히 컴퓨터가 몰고 올 정보기술의 내일은 무상의 매력을 발하고 있다. 인간의 이날까지의 기술 도구로서는 상상을 절하는 편리함과 기계문명의 낙(樂 )을 구가하고 있다. 그 매력 앞에 누구나가 무력한듯하다. 그러나 이 매력에 눈이 어두워 진짜 보아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느낌을 나는 떨칠 수 없다. 19세기 말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지본주의를 사회를 대체 한다는 인류의 유토피아 공산주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일종의 이상적 유토피아로 종식되지 않았던가! 과학철학자 칼ㆍ보퍼(1902-94)의 말을 빌리면 “공산주의는 과학이 아닌 것”이다. 실체로서의 공산주의는 아직 멀고 먼 미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미래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같이 좀처럼 잡혀 질 조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는 “정보기술이 인간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장밋빛 꿈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회의적이며, 오히려 반대로 인간사회의 구조가 기술 양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인간사회의 발전을 자연사회-농업사회-공업사회-그리고 오늘의 정보사회로 파악하고 그것을 그대로 종교 신앙처럼 믿어 의심치 않는 작금, 나는 이런 “신앙”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이유가 있다. 인간의 만든 컴퓨터, 정보기술은 레토릭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만든 옷과 비슷하다. 인간의 복장은 이 날까지 여러 가지로 변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어떤 시내든 옷을 걸친 인간 주체가 변했는가 하면,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이다. 변한 것은 인간의 사고, 발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복장을 개발하고 창조해 온 복장 그 자체일 뿐이다. 내가 금방 인간은 안변한다고 했는데, 인간이 변한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컴퓨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일종 병태로 되어 기계와 기술의 노예로 전락되는 현실이다. 마치 “신(神)”을 만들어 놓고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에 예속되는 것 같이, 또는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침몰하는 격이 되고 만다. 인간사회, 인간의 위험이라면 컴퓨터 자체가 아니라, 컴퓨터 기술에 의존 증에 걸린 인간의 의존 병이다. 인간들이 “정보화 사회”를 소리높이 구가하는 언행에는 벌써 “기술결정론”이란 “인공낙원”을 찾아 거기로 도피하는 도피주의가 보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인간의 취약한 도피행위 심리가 보인다. 술과 같이, 마약과 같이 인간들은 인터넷, 휴대폰에 마비되어 가고 있다. 하루라도, 아니 한시각이라도 컴퓨터, 휴대폰을 못 떠나서 못 살 것 같은 도취, 그 강박감으로 충만 된 자신의 행위를 억제 못하는 그 자체가 기묘한 원숭이처럼 보인다. 기계를 쓰는 원숭이들의 세계다. 실제로 앳 마크인 @를 독일인들은 ‘원숭이 꼬리’라고 부르고 폴란드인들은 ‘원숭이 새끼’라고 부른다. 사실 @에서 발신하여 @로 수신되는 정보는 컴퓨터의 조작으로 인해 허위 情報와 허위 사실이 ‘진실’로 위장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인터넷 자료 인류학, 문화론 정보를 검색해 보아도 눈에 띄게 현저한 거짓정보와 신빙성이 낮은 정보들이 난무했다. 이런 것이 규제 없이, 여과 없이 용이하게 전파되니 거짓을 진실로 믿는 폐해는 지대하다. 그러니 웨브, 인터넷 정보는 말 그대로 玉石混淆(옥석혼효)의 세상이다. 또 한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수신하는 메일 중 80% 이상이 스팸메일이라 한다. 그것을 지우는데도 많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된다. 메일 발신 법을 모르는 나의 메일에도 하루에 수십 통이 들어온다. 어디서 내 메일주소를 알았는지 수상할 정도로 정체불명의 잡다한 내용이 침범해온다. 이는 개인 주택으로 말하면 “불법침입” 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불법 침입 죄가 아무런 법적수속도 없이 당당하게 행해지니 함구 할 수밖에. 인터넷에 통효한 친구를 불러다 방법을 댔는데도 잠시 일뿐 또 다시 침입해 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보시대는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라기보다 쓰레기의 홍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이 “가짜”로 되고, 가짜가 쉽게 “진실”로 둔갑하는, 지구규모로 그것이 급속히 가능한 것이 또 컴퓨터 인터넷의 造化가 아닌가. 그러니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이론”를 플러스시점으로 보는 것과 함께, 마이너스 시각으로도 보아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마크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시각적으로 영어의 첫 번째 기호인 이 a를 둥근 원으로 둘러싼 로고가 신비스럽게 느끼고 보기도 좋다. 이유는 딱히 모르겠다. 디자인 감각으로 해석 할 수 있을런지? 한국에서는 “골뱅이”라고 하는데 독일에서는 ‘원숭이꼬리’라 하며 폴란드나 동유럽국가에서는 “꼬마 원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달팽이”라 하고 터키에서는 동물의 “키”라고 한다. 그런데 핀란드는 “고양이 꼬리”로 보이고, 중국은 “쥐”라고 비유한다. 러시아에서는 “개”로 변한다. 한편 스웨덴은 “코끼리의 몸”이다. 참 흥미로운 것은 골뱅이에서, 쥐로 그리고 코끼리로 크게 달라지니, 이 자체를 곰곰이 생각하면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문화, 사고방식에 따라 같은 사상(事象)도 달리 보이고 달리 해석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글러벌(세계화)의 홍수에 휘말리는 시대에, 아무리 정보화 디지털 시대라 해도 그의 역방향으로 쏠리는 로컬화(지역화), 자기스스로의 문화를 가지고 전자 文明에 대항하려는 골계이다. 이 모순을 컴퓨터 전자문명의 희극으로 볼까, 비극으로 볼까? 차라리 나는 두 가지가 다 겸했다고 보고 싶다. 인터넷 문명의 천만까지 편리와 하이테크놀로지의 승리를 구가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강조해도 과도 하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치명적인 결함과 약점을 본다. 정보의 잡다성, 허위성, 옥석혼효성, 그리고 인간을 같은 사고나 행동으로 매어놓는 획일성, 따라서 가상성(假想性)에 침혹되어 상상력을 말살당하는 우(愚), 과다한 도상(圖像)과 가상적 이미지 표상에 포로 되어 思考가 정지 되는 아이들.... 편리성만큼이나 위구성도 증폭될 것이다. 이 편리성과 위구성의 양가성 모순, 대립(代立)을 구경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스무드하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상상하면 장미꽃 미래 속에 뜨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다시 장미꽃을 피운 가지의 가시에 찔려 피 흘리는 모습이다. 이어령선생은 나와의 대담 중 이런 재미난 말씀을 했다. “정보(情報)의 특징은 정(情)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여 정(情)을 알리는 것 (報)이 정보(情報)가 된다” 라고 결국 아무리 기술이 변하고 외부 환경이 바뀐다 해도 우리 인간이 주체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정보가 발달해도 인간은 밥을 먹어야 하고 배설을 해야 하고 잠을 자야하며 서로 만나고, 만나서 식사도 하고 횡설수설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다. 아무리 인터넷에서 정보를 전달, 수신한다 해도 역시 “만나서 얘기하자”로 얼굴을 봐야한다. 정을 나누고 정을 알리는 정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부터 反時流的 회의적인 성질이 있어서 “通說과 通念은 꼭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라고 항상 생각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지극히 상식, 통념으로 백 프로 믿는 곳에는 기필코 反 이 있는 법일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왔다. 지어 세계와 인간이 “99,9%는 일종의 가설 일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 한다 ”인터넷의 정보는 방대한 좋은 정보가 있다“ ”인터넷의 커뮤니케이션을 멋있다.“ “인터넷의 집합적인 지(知)” “인터넷은 인간의 인생을 바뀐다” 등등... “인터넷 찬미론”이 신종플루처럼 무진장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이 얼마나 인생을 바꾸는 가는 대저 믿지 못하겠다. 그리고 인간이 변한다는 통념에서 오히려 “기술결정론”의 맹점을 읽게 된다. 기술이라면 인터넷보다도 나는 알랙산더ㆍ 그러함ㆍ벨리 1876년에 발명한 전화가 정보혁명의 획기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터넷은 전화이후의 제2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인터넷이 편리한 것은 백만 번 언급해도 되지만 정보 혁명에서 이미 전화가 인터넷의 기능을 구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일테면 무슨 동창모임이 있어 전화로 알리는 것이나 인터넷으로 송신하는 것이나 그것은 육성과 文化의 차이 일뿐이다. 인터넷을 열지 않으면 오히려 전화보다도 못하다. 인터넷의 기술을 맹신하듯, 그의 편리를 예찬하듯이, 인터넷을 사용한다 하여 인간이 능력이 하루아침 비약적인 향상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이 있든 없든, 쓰든 안쓰든 인간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인터넷을 왕좌로 모시고 그 기능과 편리함이 노예가 되기보다는, 그것을 전화나 FAX와 같이 편리한 도구, 방법으로서 이용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컴퓨터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他者”이다. 이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이 창조한 망치나 낫과 같이, 펜과 검과 같이 우리 인간의 능력의 보조선, 대체로서 사용되고 있으나 도구를 사용하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 자신들이다. 컴퓨터라는 첨단의 “他者”를 통해 굴절된 우리 자신의 욕망을 기탁하려는 近代的기술은 매력으로 충만 되어 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자신이 만든 도구에 유혹되어 의존중 같은 노예로 된다면 본말전도의 아이러니에 빠져 버리고 말게 된다. 진실하고 생동한 인간, 인간의 삶은 컴퓨터에 있지 않고 인간자체에 있다. 우리인간의 사회에 있다. 자, 컴퓨터를 일단 버려라. 그리고 거리에 나서라. 살아있는 인간들 속으로.
86    2-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댓글:  조회:5127  추천:25  2012-12-01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1. 그대는 이런 풍경을 보았는가? 소 한 마리가 풀을 뜯어먹고 있다. 유유자적 하게 소는 열심히 풀을 먹고 있다. 멀리 숲으로부터 봄바람이 노래같이 불어온다. 그리고 전원(田園)의 어디선가 목동의 피리소리도 들려온다. 소는 봄바람 노래와 피리소리를 흠상한다. 소는 경 읽기는 싫어하나 피리소리 노래 가락은 즐긴다. 음〜매〜 하고 짖는 소리는 좋다〜 하는 기쁨의 말이다. 소등위에는 등에가 내려앉아서 봉봉거리며 소를 깨문다. 그러나 소는 등에를 내쫒지 않고 그냥 둔다. 등에가 가려운데를 긁어주기라도 하듯, 소는 여전히 유유자적 풀만 뜯는다. 이따금 시누런 오줌을 줄기차게 배설한다. 그리고 빵 같은 커다란 똥도 눈다. 분뇨는 다시금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유와 함께 분뇨는 소가 大地에 남기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소가 되고 싶다. 나는 십우지도(十牛之圖)의 선화(禪和)에 나오는 소가 되고 싶다. 明禪師의 放牛圖頌(방우도송)그림이 뇌리에 떠오른다. 소와 목동으로 인간의 깊은 깨달음을 상징한 선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소가 망아(忘我)의 세계인에 진입하여 유유자적 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부럽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화나 근대 극화의 대화백 李苦禪(이고선) 선생의 소의 방목도는 선의 사상을 활사 하고 있다. 제백석(齊白石)도 무척 좋지만, 선우(禪牛)도 만큼은 천하의 제백석도, 오창석(吳昌碩)도 이고선을 따르지 못한다. 이 유연한 소의 망아(忘我)지경을 서양의 근대 철학자 니체까지도 동양사상으로서 크나큰 매력을 느꼈으며 너무 선망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니체가 살았던 독일의 시골에도 소가 풀 먹는 광경이 흔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나도 어렸을 적 심양 근교의 마을에서 자라면서 소가 풀 뜯는 풍경을 자주 보아왔다. 만약 내가 저 소였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풀을 열심히 먹을까 하고 중학생인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 기억이 있다. 풀 뜯는 소를 바라보면서 풀판에 누워서 책장을 번지던 소년시절은 꿈도 많았다.   2. 철저하게 시간에 쫓기는 삶, 공리성과 실리성을 따지고 物慾에 팽배된 인간사회에서 인간은 소의 유유자적한 자유, 여유를 빼앗긴지도 오래다. 그리고 지견과 관점이 다른 他者를 포용이 아닌 공격으로 자신의 모종의 실리, 공리를 절취하려고 필사적으로 목숨을 건다. 그게 신물 나도록 질린다. 공격성에 노출된 암퍅스러운 앙심을 품은 앙칼지고 방정스러운 모습이 나는 싫다. 타자에 대한 공격, 그 공격성을 인간의 또 하나의 지대한 “추악”이다. 인근의 타자와의 싸움을 불교, 기독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모든 종교는 “악”으로 간주한다. “공격성”을 인간이 짊어진 “본능”이라고 한 철학자,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그리고 근대란 극한의 생활 속에서 숙명적 반응으로서 “공격성”을 설명한 서양사상가들이었다. 1920년-30년에 프로이트, 로렌츠, 등 세계적 연구자들이 획기적인 연구업적을 쌓았다. 구조주의적 정신분석의 시각에서 잭크ㆍ라칸은 인간의 공격성이 본능으로부터 아마고으로의 매트릭 변화에 있음을 갈파한다. 즉 인간의 공격성은 공격의 지향으로 노정된 신체해체의 심상(心像)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로렌츠 역시 인간의 공격성은 友情이 잠재돼 있으며, 우정은 공격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나는 이 가설이 설립된다면 공격성은 우정과 같이 소실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훗날 미국의 EㆍO 윌슨은 에서 로렌츠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평화적 포우류라고 했으나, 그래도 인간은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때로는 동물이상으로 상상을 절(絶)하는 공격과 살육과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가. 전쟁이 그렇고 폭력이 그렇고 국가적 정치폭력, 문화인의 언어폭력, 인신공격.... 이 모두가 우리 인간 스스로를 괴롭히는 공격성의 “추악”이 아닌가! “악은 악으로 치고 독은 독으로 뺀다.” 라는 격언(格言)이 있으나, 다른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나는 지식인 사이의 상호인식공격을 말한다면 오히려 이전투구와 가치 없는 소모전으로 비생산적이고 우리 모두의 지적생활과 지적 생산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데 섣부른 대응이 아닌 소가 풀 먹는 식으로 유유자적 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면서 지적생산, 지적창조의 삶을 즐기고 있다. 당연히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에 知的으로 오만불손의 경향이 있는 흠 많은 미완의 인물이다. 소가 오만해서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등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풀 뜯기에 여념이 없기에 등에 한 마리 쯤 하등 자신의 집중력을 환산시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역시 나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는 상대를 나는 “등에”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에는 때로는 소가 손이 못 닿는 가려운 부분을 따끔하게 긁어주는 쾌감을 가져다주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공격자든 피격자든 다 안전요해의 “합작성(合作性)” 공모자의 운명에 있다고 본다.   3. 생태학과 문화 인류을 결합시킨 학제적 연구에서 양의 동서 思想을 초식(草食)과 육식(肉食)의 사상으로 규정한 학자가 있다. 일본의 저명한 비교사학자 사바타 토시유키(鯖田豊之ㆍ1926-)교수는 등 일련의 저작에서 인간중심의 기독교에 기반을 둔 서양인이 목축문화 풍토에서 걸러낸 동물과 인간의 단절된 인간절대주의 사상을 지적했다. 동시에 비교되는 동양의 미식(米食)문화, 즉 초식문화(한반도, 북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 포괄)는 자연에 의존한 자연과 조화된 자연숭배사상, 자연파괴 공격성 원리가 아닌 조화, 융합사상을 창출했다. 실제적으로 벼농사일은 인간의 개인적 활동이 아닌 여럿이 일손을 맞추어 어우러져서만 되는 합동, 협력, 융합의 과정이기도 하다. 서양적 원리주의에 대치된 동양적 조화, 융합의 사상에 대해 나는 요즘 심대한 공감을 느낀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융합, 공론에서 인류 문명의 미래 비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이분법 원리 아닌 조화, 융합만이 인류의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수년전 쿄토에서 있은 나와의 문명대담에서 이어령선생은 이솝우화의 를 지금 21세기에서는 일하는 것 (work)과 노는 것( play), 생산자 대 소비자의 흑백구도가 아닌 양자의 상호결합의 상태를 주장했으며 그것을 가리켜 “개짱이”로 불렀다. 서로 대극에 있는 노동과 놀이를 노동〓놀이를 일직선으로 연결하여 “뽕도 따고 님 도 본다”는 속담같이 “쉬엄쉬엄 일하다” 라는 말과 같이,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같은 리듬 안에서 공존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래서 개미와 베짱이가 하나로 매시업되어 ”개짱이“란 新造語를 탄생시켰다. 나는 고희를 넘으신 이어령선생의 유연한 사고에 경복을 금치 못했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일찍 1980년, 쿄토대학의 서양사학자이여 문명비평가로 명성을 떨친 아이다 유지(會田雄次) 교수는 에서 생화양식을 민족적으로 보아 유럽인은 육식동물적 생활, 라이온(사자)처럼 생활을 하고 있으나, 일본인은 원숭이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서양인은 일을 할 때는 집중적으로 지력, 체력, 의지력을 전부 가동시킨다. 그런 다음 잠자는데 열중한다. 노동, 놀이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동양인)은 옛적부터 쌀밥이 주식이며, 백인종에 비해 장(腸)이 긴 체질로 되었다. 원숭이적 생활이란 원숭이가 늘 먹는 나뭇잎인데, 절반은 놀면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먹는다. 채식(採食)에 전력 집중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일본인은 이처럼 무한히 질질 끄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구미인 수렵 목축민족으로 육식동물 삶을 해 온 것에 반해, 채집 순농(純農)적 생활을 해온 까닭이라고 밝힌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인은 질질 끌면서 근무하는 근무적 민족이다. 이리하여 일본인의 사고방식도 일하는 육체동작과 같이 질질 끌고 손발을 쉬고서 생각 하는 것이 아닌, 일하면서 사고하는 양식이다. 20년전, 아이다교수가 미처 어떤 수준의 학자라는 것을 모른채, 그의 탁발한 비교 문화론 저작을 읽었을 무렵에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워낙 일본을 대표하는 당대의 문명비평가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과 놀이, 이 둘은 나를 나름대로 “일놀이”로 신조어를 만들어 본다. 그때 이미 다 선생이 원숭이적 “일 놀이”의 삶을 일본인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일하면서 사고하는” “하면서 사색” 하는 것이야 말로 일본인의 사고방식이라고 상찬했다. “하면서 사고하는 것”은 육체와 도구가 함께 움직이는 것 그리고 사색사고 하는 것이 융합, 조화된 통일체이다. 그중에서 비약, 아이디어가 탄생된다. “하면서 주의”-- 나는 일본에서 언제나 전차 안에서 독서하며, 통근하면서 독서, 사색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고착시켰다. 그리고 서재에서 나는 음악 CD. 테이프를 틀어놓고 귀로 들으면서 독서 집필한다. 명상을 즐기는 나는 아예 책장을 접어놓고 전차 안에서, 화장실에서 사색에 잠기곤 한다. 그리고 글을 구상하기도 한다. 사실 늘 이런데서 아이디어, 발상이 떠오른다. 글감, 쓸거리가 생긴다. 롤댕의 “사색하는자”를 패러디해서 말하면 “사색하는 자는 항상 화장실에 앉아 있는다” 이다. 나의 서재의 고물 탁상위엔 책, 원고지, 필묵, CD, 레코오트 이외에도 음료수, 과자, 캔디, 크림, 티슈, 휴대전화, 카메라 등이 잡다하게 널려있다. 탁상위의 “일상용품 잡화점”이다. 색연필, 볼펜, 만년필, 연필로 필만해도 수십개를 놓고 쓴다 왜 그런가 하면 일하면서 사고 하늘, 또는 보면서 들으면서, 또는 먹으면서 마시면서 하는 보조적 필수품들이기 때문이다.   4. 땔나무를 지게로 지고 걸어가면서 독서하는 동상이 있다. 니노미야의 동상이다. 니노미야 손도쿠(二 宮尊德 1787-1856), 일본인과 식민지시대 조선인에겐 익숙한 인물이다. 에도(江戶)시대의 農政家이며, 도덕과 경제의 융합사상을 전 일본에 보급시킨 위대한 괴짜이다. 일하면서 공부를 하는 그의 “일놀이” 사상적 실천은 가히 동양 스타일의 우수성을 구현한 인물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 딱딱한 합리주의적 사고보다 융합법, 조화법 사고가 보다 유연적이다는 것은 서양의 결함을 메울수 있는 대안이 된다. 괴테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 신비한 역량이여! 둘이면서도 하나인 동얀의 나무 은행잎이여!” 서양과 동양의 전통적 문화를 레토릭으로 표현하면, 서양의 문화는 돌(石)이고 동양의 문화는 나무(木)이라 할 수 있다. 또 동양의 문화는 물(水)이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 유동하는 것, 돌같이 금속같이 굳어 있지 않은 부드러운 사고양식의 문화이다. 유교가 주장하는 인은 언제나 두 사람, 상대적인 것이고 부드러운 화(和)의 사상이다. “1아니면 2다” 하는 대립, 충돌의 이념이 아닌, 대립을 넘어서는 유연한 역학이다. 같이 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유연한 공생, 공존의 사상엔 칼날같이 이질적인 타자를 베 버리는 차갑고 무서운 사상이 아니, 그것을 초월한 공존학이 있다. 5. 다시금 소의 이야기로 돌아선다. 만약 서두에 등장하는 “십우지도”의 그 풀뜻는 소에 대하여 식민지를 찾아 혈안이 돼서 서두르는 서양인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영락없이 서양인들은 소를 잡아서 식용의 스테이크로 요리해서 먹어치웠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구로부네(黑船)”라 불린 상선을 이끌고 일본에 상륙 했을 때, 그들은 무조건 일본인들에게 소 십여마리를 요구했다. 왜서 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쇠고기, 돼지고기를 肉食으로 하거나 우유를 먹는 식생활이 더구나 없었던 일본인들은 “풀도 없는 배안에서 어찌 소를 기를 수 있느냐?” 라고 의아쩍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 뒤 서양문물을 신속히 수용, 소화시킨 그들은 쇠고기, 육식과 우유를 식생활의 당당한 메뉴로 정착한다. 서양식 문명대로 서양을 본 따서 식민주의의의 칼을 물고 이웃나라를 우마처럼 지배하지 않았던가! 한국이 기나긴 육식문화를 자랑하면서도 한 번도 서양적 근대의미의 침략을 하지 않은(못한)것은 비운일까 행운일까? 육식문화의 원리와 초식문화의 원리를 융합시킨 것은 한국 문화의 원리가 아닌 원리이었다. 구운 쇠고기에 상추를 싸먹는 한국문화는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중국문화와 한국문화의 내실에는 일본과는 달리, 서로 유사한 친근성이 존재하는 것은 육식문화를 공유해온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동양 3국이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문화를 공유한 문화적 콘텐츠는 소와 소등에 앉아 피리를 부는 목동과도 같은 자연중앙의 묵가적인 또는 天人合一의 사상과 불교, 도교적 요소들이 다분히 유교와 함께 들어있다. 서양적 근대의 합리주의와 속력을 추구하는 “드로몰로지”(질주학)논리에 지금은 소들마져도 꼬리를 깃발로 추켜들고 말처럼, 자동차처럼 질주해야 하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자칫하면 그런 드로몰로지의 무한한 경쟁, 배제사회에서 소의 뿔은 타자를 공격하는 문명충돌의 예리한 칼로 변할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사고, 사색의 절주를 한 박자, 두 박자 줄여서 천천히 일하면서 사고하고 싶다. 悠然하게 우보(牛步)를 걸으면서 사고하고 지식의 풀을 섭취하여 소화시켜서는 유연한 아이디어, 발상의 여과를 거쳐 정신적 우유로 배설 하고 싶다. 피자 같은 지짐 같은 우분(牛糞)도 맥주, 막걸리 같은 우뇨(牛尿)도 도도하게 배설하면서. 섭생도 배설도 소와 같은 유연(悠然)과 유연(柔軟)이란 “쌍유”의 라이프 스타일 이어야 한다. 소처럼 즐기면서 놀면서 책을 읽고 사고(思考)하고 글을 부지런히 쓰겠다.
85    2-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댓글:  조회:5563  추천:26  2012-11-26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2장 내 사상의 계보 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0.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고유의 “생일”이 있는 법이다. 이 탄생에 이르는 고유의 궤적, 흐름 적 “과정”을 되돌아보는 문맥을 통해서 만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을 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 자신의 “사상”이 태어난 “생일”의 “과정”에 대한 망각이었다. 만약 나에게 “思想”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글쓰기에서 표현 됐거나, 또는 내 내면의 의식 속에서 있다고 가정하는 세계, 사회, 인생에 관한 나름대로 의식 내용일 것이다. 기실 “思想”이란 것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의식세계로서, 그 자체를 말과 글로 표현, 표달하기는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편의적으로 표현 해보는 시도는 그래도 있다. 나는 내면의식 세계로서의 사상을 독서를 통한 나의 계보학(系譜學)적 흐름으로 짚어보는 것으로 표명해 보기로 하겠다. 1. 1989년 5월 하순. 만 26살의 나는 북경에 있었다. 세계를 진감한 “6ㆍ4 천안문 사건” 전야였다. 나는 북경 모 출판사의 요청으로 그때 내가 집필한 책과 일본책 번역 교정일로 십여일 간 잠깐 휴강을 하고 북경에서 체류했다. 천안문과 인근 거리에 있는 출판사 근처의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나는 하루 작업을 끝내고 나면 매일 천안문광장에 가서 산보하는 것이 일과였다. 5월 하순에서 말에 접어들자 북경시내의 여러 대학교 학생들의 데모가 점차 더 큰 규모로 백열전에 달했다. 민주와 자유주의를 정부에 호소하는 충천 하는 대학생들의 열의는 그때 대학 강사로 있던 젊은 나의 가슴에도 와 닿았다. 5월 31일 나는 일을 마치고 곧 심양으로 돌아와 출근을 했다. 그런데 저녁에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나는 허리를 다쳤다. 그리하여 이내 집에서 쉬면서 조선족 종교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학생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파급되었는데, 심양의 수많은 대학생들도 민주화 데모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뿐이 아니라 대학의 젊은 교사, 교수들 그리고 일반인 청년들도 데모에 가담하여 온 시내의 교통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한족 지식인, 작가 친구들이 많았다. “너는 왜 청년지식인으로서 잠자코 있냐? 이런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 뛰어 들자!” 라고 상대방들은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나는 데모에 나가지 않았다. 두문불출 글쓰기를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사상에는 “데모”를 형태로 하는 “주의, 이데올로기”의 행동이란 “프로그램”이 결여 했던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어디까지나 글쓰기를 통한 행동이다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노신의 후기의 이데올로기에 편향했던 것과 달리 호적의 “주의를 담론 아니 하고 정치를 불문 하는” 학문주의, 인문주의적 사상에 공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중국에서 태어난 마이너리티(소수민족) 지식인으로서, 문화적으로는 아무래도 아웃사이더 인만큼, 정치에다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기 보다는 학문, 문학으로 불태우겠다는 인문주의적(?)사상이 근저에 있었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언어를 총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글 쓰는 발화행위가 바로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데모를 하는 것도 그 자신의 자유요, 안하는 것도 내 자신의 자유로 생각하고 나는 글쓰기로 인생에서 승부하는 자신이라고 결의를 더욱 굳힌 것도 그때인 것 같다. 적성적으로 따지면 나는 정치인적인 기질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며, 오히려 이념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주의 지식인, 연구와 글쓰기 쪽이 내 기질, 성격에 맞다 는 것을 일찍 알았기 때문이다. 2. 아마 내가 기억하건데, 나의 사상의 탄생의 시발점에는 중국에서 아동기 때부터 받아온 “맑스주의”, “모택동사상”으로 칭해지는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사상”일 것이다. 물론 막연하고 어렴풋한 폭력, 투쟁, 계급 등 키워드로 연결된 미완의 “사상”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반시류, 반골정신이 있었던 내게서 매일 같은 계급투쟁의 사상주입에 대해 거부감, 기피 감을 느낀 것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일본의 서적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서는 맑스주의, 모택동사상 외에도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한 사상이 존재함을 알고 경탄하며, 그 사상의 이해와 수용에 탐닉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은 계급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라고 갈파했다. 모택동은 “정권은 총구멍에서 나오며, 인간은 계급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된다는 독재적 폭력투쟁사상을 고안해 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기실” 자신이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모르고 사고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동시대의 사상가, 철학가 니체는 인간은 “자신이 外在적 규범의 노예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도 모른다” 라고 단언한다. 고전문선학자로 출발한 니체는 “계보학”적 사고를 원용하여 “자신을 모르는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 바보로 되었나?”를 관통시켜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언설을 펼치고 있다. 내가 니체의 사상에서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어떤 시기에 있어서 사회적 감수성이나 신체감각 같은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과거나 타자(이방)의 경험을 내면에서 살리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자료적 기반과 대담한 상상력과의 유연한 지성이 필요하다” 라고 한 사고이다. 이 사고는 “계보학적” 사고로 명명한 현대 프랑스의 역사학자, 철학자 푸코에 의해 전승, 발전되는 듯하다. 3. 1980년대의 세계적(서양적) 포스트모터니즘 사상 격랑의 여파가 아직도 강렬하게 동아시아에서 불고 있던 1991년 초, 나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물론 그 한 해 전에는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등 유럽 나라를 일주하게 되는 행운도 차지하였다. 내가 일본에서 발견한 세계는, 100년 전 중국 지식인 노신이나 주작인의 언설에서 노정되고 있는 “일본에서 발견 되는 중국 당풍(唐風)문화”가 아니었다. 일본은 전통의 일본이란 고층(古層)외에 중후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은 세계문화, 사상의 “도가니”, 즉 지적도가니라는 것이었다. 서양의 근대, 포스트모터니즘의 일체 사상, 지적 조류가 여기서 회합하고 집결하여 강열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 나는 경이로 왔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일본문화와 조우는 나에게서는 일본문화인 동시에 일본에서 층층으로 파문같이 크고 작은 원을 형성하고 있는 역동적인 서양문명, 근대의 사상이었다. “국제화”로 칭해진 일본의 글로벌화 진척은 나의 사상과 지견을 변용시키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대학생 때 읽기 시작했던 일본어 서적(번역서)을 통해 사상을 읽었다. 근대 및 포스트근대의 사상을 하나하나씩 접촉, 반추, 수용, 배제의 여과장치를 거쳐 내 넋 속의 사상으로 층층의 동심원을 이르며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기술의 편의를 위해 시대별로 나의 이 “층층의 동심원(同心圓)”에 대해서 계보적, 궤적으로 그려 보기로 하겠다. 4. 중국에서 대학공부를 할 때,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혁명사, 중공당사, 철학과를 통해 배웠지만, 근대 특히 1980년으로부터의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완전히 교양과목에 결락 된 공백의 세계였다. 다행히도 나는 일본에서 펜팔들이 (일본의 대학 교수, 작가 및 대학원생) 우송해 주는 책으로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수 있었다. 일본에 와서 나는 1980년대 격량을 일으킨 포스트모던 사상을 “근대 계몽사상의 종식”을 선고 하는 식으로 접했다. 포스트모터니즘의 선열한 사상을 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특히 프랑스 사상가 프랑소와, 리오타르(1924-98)의 영향은 지대했다. 1977년 출간된 그의 에서 저가는 근대적 “장대한 이야기”가 종식됐다는 시대로서 포스터모던을 정의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모던)란 인간주체의 해방, 자본축적의 이론, 정신의 변증법등 “장대한 서사”가 지배한 시대였는바, 현대는 그 같은 “대서사”에 향해 불신감이 팽창된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가 바로 근대를 넘어선 포스트모던의 시대라는 것이다. 사르트르(1905-80) 같은 반체제 지식인이 언설로써 시대의 정치체제와 맞서 싸워 대중의 크나큰 호응을 얻었으나, 포스트모던 시기에는 이런 지식인의 역할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사르트르적 반체제지식인의 실존주의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리오타르의 지적대로, 나는 그의 이론이 열린 다양성의 사상, 창출을 꾀했다는 면은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대한 이야기”가 끝났다고는 찬동할 수 없었다. 왜냐면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련 공산주의 사회의 붕괴, 등 대사건이 그의 이론을 정면에서 부정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을 정면에서 반론을 든 독일의 유명한 사회철학자 하버마스 (1929-)와. 그는 커뮤니케이션적인 행동이론 (1981) 노작을 출간하기에 앞서 라는 글 (강연)에서 근대계몽사상은 아직 유효하며 그 정면 적 유산을 수정하면서 계승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까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미셸ㆍ푸코는 1984년생을 마감하지만, 오늘날까지 하머마스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과시한 사상가ㆍ역사학자이다. 내가 푸코를 존경하는 이유는 푸코의 니체이래 “계보학”적 방법으로 학문연구를 역사적 팩터로 복합적으로 행한 공적이다. 《감옥의 탄생 (감시와 형벌)》, 《광기의 역사》, 《知의 고고학》등 저작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넷트웍으로 관찰 한 점이 보인다. 그는 인간의 신체도 사회의 의미에 의해 엮여진 “사회제도”라고 갈파한다. 그래서 국가가 신체를 조작한다는 원리를 발견하는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푸코는 휴머니즘(인간주의)을 “지금, 여기, 나”라는 주의로 설정하여 인간주의적 진보사관을 부정하며 역사는 직선적으로 추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갈파한다. 푸코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 관찰하는 것으로 인간이 안고 있는 여러 “상식”을 깨부수고 있다. 그가 “상식깨기”에서 인간의 정신질환에서 “정상과 이상”의 경계란 개념을 깨고 狂氣(광기)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하고 있다. 그가 말년에 쓴 대작 《성의 역사》는 “인간을 왜 성에 대해 이처럼 정열을 몰부어 담론하는가?”에 답을 주는 저작이었다. “성을 억압된 문법으로 담론하려하는 우리들의 정열의 안(眼)이 지탱해준다” 라고 그는 답을 찾았다. 많은 충격을 받으면서 읽은 푸코의 저작들은 이 지구위의 인문, 사회과학 연구자의 필독 문헌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회의”로부터 출발한 방대한 푸코의 지적 言說은 회의의 사상을, 그리고 계보학적 지의 사상을 나에게 심어준 스승이기도 하다. 5. 신자유주의 사상은 또 나에게 영향을 준 사상이었다. 1980년대 “네오리벨라즘”이라 칭해진 사상의 고안자인 하이예크 (1897-1992)는 그의 경제사상을 이렇게 전개했다. “북구형 복지국가를 포괄한 중앙집권적 경제가 인간예속이라 하고,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한 시장경제로 의해서만이 사회 번영이 가능해진다” 라는 독특한 학설을 주장했다. 영국의 사처수상이 1980년대 실시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기실 하이예크의 사상이었다. 90년대 중국 사상계, 지식계에서도 이 “新自由主義” 사상이 급속히 전파되면서 신자유주의 지식인을 많이 생성시켰다. 1990년 이후 세계적 규모로 전파된 “글러벌 산지유주의”는 미국에서 다시 생긴다. 그중에도 나는 킴릿카(1962-)가 제시한 “多文化的市民” 사상, 마이너리티와 개인의 자율성과 평행을 이룬 국민국가론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찰스테일러 (1931-)의 “국내에서 다양한 문화를 승인하는 多文化主義사상을 나는 읽으면서 찬성하는 면이 많았다. 1990년에서 현재까지 인류역사는 리오타르가 “대서사의 종식”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대사건”이 빈발하는 쪽으로 흘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연방의 해체, 이라크 전쟁, 그리고 냉전체제의 해체, 9ㆍ11 사건... 잇따라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3세인 푸랜시스ㆍ후쿠야마(1952-)의 공산주의 종식과 자유주의 이념의 승리를 선고한 《역사의 종말》이 등장했다. 그리고 사뮈엘헌팅턴(1927-2008)의 유명한《모명의 충돌》, 그는 세계문명을 8개의 문명권으로 구분시켜, 문화권에 의해 문명의 저항관계를 주축으로 국제질서를 해독했다. 흥미로운 이론의 제시였으나, 문명지간의 상호융합조화라는 원리를 배제시킨 편견이 있어 문화, 문명의 상호학습, 영향에 대한 주지를 노정시켰다. 증오를 선정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고, 한편 그의 치명적 결합에는 많이 실망했다. 그때 상쾌하게 등장한 것이 “반헌팅턴 구상”이라는 부제로 나온 하랄트 뮐러(1949-)의《문명의 공존》이었다. 독일 프랑크트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인 뮐러는 1998년에 출간한 이책에서 “충돌”을 전면에서 비판하고 “충돌”보다 매력적인 “공론”이 미완의 근대 속에서 가능하며 또 그런 전망은 밝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주장한 이론에는 서구 중심적 가정(假定)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999년 토머스 프리드먼(1953-)의《렉서스와 올리브 나무》가 출간된다. 《뉴욕타임스》의 중동전문가로 출발한 칼럼니스트인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것을 통해 세계화(글러벌) 至上主義자의 바이불로 꼽히는 이 책을 집필했다. 나는 2001년 12월《장백산》에서 주최한《김문학작품 연구심퍼지엄》에 참석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책 (한국어판)을 읽었다. 책 제목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가치관의 충돌을 의미한다. 렉서스는 일본 토요타의 고급 자동차브랜드, 즉 세계화를 상징하고, 반면 올리브나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전통을 상징 한다 즉 지방적인 것을 상징한다. 그는 세계화 (글러벌)와 지역의 모순을 이야기 하면서 세계화의 큰길을 달리는데 올리브 나무가 걸림돌이 되기에 세계는 불안하다.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글러벌리즘과 로컬리즘을 사고하는데 좋은 텍스트였다. 이 양자에 대한 사고 역시 내가 줄곧 사고하고 있는 일종 사상적 테제이기도 하여, 이 영역에 대해서는 졸문의 뒤 부분에서 재의하기를 하겠다. 6.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래 가장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제국론”을 통해 자본주의세계의 작동메카니즘의 역사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설명한 거작이었다. 바로 네오마르크스주의자 지식인 안토니오네그릿(1933-)이다 이탈리아 좌파 지식인인 그는 1979년 테러유도 협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200년 미국 듀크대학 모학 쇼수 파이클 하트 (1960-)의 공저로 된 을 출판한다. “끊임없이 달 중심화 하는 권력의 넷트웍으로서의 제국”으로 세계를 통권 하는 주권력을 해석하면서 제국의 탈근대적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적 권력에 직적 대항하여 전 지구적 주장하며 대중의 절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가능할 수 있으며, 이 가능성을 최선봉으로 통일유럽이라고 직언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가 실행했던 인터내셔널운동을 계승하는 의미가 엿보인다. 마르크스주의, 사상, 헤겔의 진보사관 등에 대해서는 생략하지만, 일본에도 기실은 근대사를 펼치면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로 지칭된 사상가들 일테면 요시노사쿠조(吉野造作 1878-1933)가 헤겔의 영향을 받은 프로티스탄이 실재했다. 그리고 야마가와 (山川均)ㆍ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등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에게 정도 부동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에 바로 유학했던 진독수, 이대소, 주은래의 마르크스사상 육성에 큰 영향을 행사한 것으로 실제로 중국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운동은 공화혁명을 일으킨 손문과 같이,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서 전개되는 사실(史實)을 인식해야 한다. 화제가 약간 옆으로 샜다. 근대성에 대해 즉 모더니즘에 대해 서양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후 슈펭글러(1880-1936)가 명저 《서양의 몰락》등의 영향 있는 문명비평론의, 그리고 유명한 하이데거(1889-1976)의 근대비란이 등장한다. 그 뒤 아드르노가 계몽의 변증법기를 출간하여 “비판적 이성”을 제의하면서 근대 계몽을 재고하였다.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인간 사고의 결락으로서의 악(惡)으로 나치스적 전체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녀의 사상은 전체주의의 악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근원적 사고결여,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사고의 결여”로서 이를 읽으면서 나는 현재 존재하는 중국의 티벳에 대한, 위글 족에 대한 소수민족 탄압이 나 인민의 생명을 경시하는 북한의 전체주의에 대해 새롭게 재고하게 되기도 했다. 7. 근대, 포스트 근대, 문화적 근대성, 이것들은 내가 근 10여년간 항상 관심을 안고 사고 해온 거시적 제들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과 같이 근대의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구가하는 시회가 있는가 하면, 또한 북한이나 중국 같이 여전히 근대민주주의, 자유주의 원리를 배제한 전 근대적 요소를 다분히 내표한 사회도 존재하고 있다. 어떤 근대, 어떤 근대성이 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는 묻지 않아도 自明한 문제이다. 특히 근대성, 문화적 근대성을 다시 재고하면서 읽었던 마셜ㆍ버멘의 는 저작을 근대성의 모호함과 애매성에 흥미로운 접근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근대성을 남성이나 여성에 공통된 경험, 즉 시공적 경험, 자기와 타자의 경험, 생명가능성과 위험성의 경험, 등 양식이라는 것이고 규정하며, 이 일련의 경험을 즉 “근대성”이라 한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신과 세계 대해 모험, 힘 ,기쁨, 성장, 변신을 약속함과 동시에 인간이 갖고 있는 것, 아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험이 있는 환경의 몸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근대적 환경 경험이란 지리, 민족적 경계선, 국적, 계급의 경계선,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을 모두 뚫고 지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성은 모든 인간을 통일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逆設적 통일, 不統의 통일이며, 인간전체를 영구한 파괴와 재생, 투쟁과 대립, 애매함과 고통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다. 즉, 근대적이라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견고한 모든 것을 공중에 용해시키는” 우주에 속한다. 물론 앤드슨과 같은 지식인은 “견고한 것은 모두 용해 된다” 라는 중심사상을 “발전”이라 포착하기도 한다. 근대란 자본주의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의 과정을 내포하지만, 버멘은 “자기발전”이기도 하며 근대적 경험이기도 하다고 직언한다. 버멘의 근대성을 거론하면서 존ㆍ톰 린슨이란 영국의 비평이론 연구자는 1991년에 쓴《문화제국주의》에서 서양적 발전관을 재고해야 한다고 力說한다. 현재의 근대 자본주의 발전은 목적을 잃어버린 문화가 세계에 획일적으로 침투하고 있는바, 이를 글러벌리제이션이라고 칭한다. 글로벌의 근대적 확산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획일성을 띠면서 확산시키는 문화 그 자체가 무목적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문화가 어디로 가야하냐는 문제에 대해 많은 심사숙려를 자아내는 책이었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융합, 조화를 이루는 “세계인”의 사상,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에 지대한 관심을 안고 있다. “관심”이란 낱말을 월등히 넘어서, 나 자신의 일본유학 이후에는 1990년해 형성, 훈육된 코스모포리더니즘 사상은 김문학 사상, 주의의 社와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1795)《인륜의 形而上學》(1797)등에서 창안한 세계시민법 사상에서 나는 감명을 받았다. 칸트의 동시대인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으로 인권선언이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독일의 피히테(1762-1814)는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에서 “교양 있는 국민”사상을 전개하면서 “저항력 내셔널리즘”을 창도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피히테의 애국주의 민족주의는 그 뒤 미국 윌슨 대통령(1856-1924)과 소련에 의해 “민족自決” 이 1910년(조선 일본식민지 시작되는 해)에 승인되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독립운동의 사상적 지침으로 고착된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 우리 민족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들도 역시 “민족자결” 사상의 영향으로 자주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물론 그 운동이 자력에 의해 일본 식민자를 제거하지 못한 채 미국과 중국 국제세력으로 일본이 항복하는 것으로 시원치 않은 민족독립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근대 일본의 자유주의적 내셔널리스트 사상가는 후쿠자와 유카치로 시작되는, 최근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의 계보로 이어진다. 20세기가 이념 사상의 대결구도로, 이데올로기의 세기라는 것은 민족자결의 독립해방, 그리고 냉전체제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 인류 최대의 이념의 세기였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인류이념의 가장 큰 실험장, 도가니로서 20세기의 세계를 규정지어도 과언은 아니리라. 1990년 이래 최근까지, 세계를 나는 이념보다도 이념을 초월한 “문화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념에 의해 가리워진 문화, 민족, 종교의 팩터가 일거에 노출되면서 문화의 요소가 인류를 이끄는, 인류쟁점 충돌의 제일 요인으로 부상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이해”가 사상이상으로 중요한 시대라고 나는 믿는다. 비교문화를 하는 역할 역시, 인류의 오늘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이 현현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9. 나는 인류의 문명의 미래는 일원적이 아닌 “多元文化, 文明의 變化”라는 史觀사상으로 “비판적 대화”, “比較論적 해석학” 및 文明論사상으로 共生ㆍ共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20세기 까지 지어 오늘 21세기 10년이 되는 이날까지 세계는 행인지 불행인지 서양 中心적 진보사관에서 이탈하지 못한 채로 있다. 서양 중심의 근대적 사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 개인 역시 서양의 근대 사상 포스트근대 문화에 물젖었고 영향 받은 지식인이다. 그러나 현재 서양의 중심, 단일적 진보사관 사상을 여전히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이를 해탈하여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 해왔다. 나는 비교문화를 근간으로 문화인류학적 이론을 전공으로 했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자로 부터의 문제의식에서 사고의 실 머리를 찾고자 한다. 20세기 후반 세계적 문화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 인류학의 비조인 레버스트로스의 사상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구조인류학을 창안한 그는 《야생의 사고》등 저작으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을 분쇄시켰다. 방대한 필드워크의 실증을 기반으로 그는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원래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하여 우열을 논하는 자체가 무의마하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 리얼한 세계”라 여기며, 他人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일그러진 세계”라고 착각하며 他者를 경멸한다. 자신이야말로 우월한 “문명인”이며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일수록 이 착오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그는 유럽을 문명지역이고 다른 지역은 후진의 미개지역으로 보는 편전에 대해 준열한 비판을 가한다. 2005년 11월 파리의 유네스코헌장 채택 60돐 기념식전에서 98세의 고령인 스트로스는 강연을 한다. 그는 서구의 인문주의의 지대한 오유를 세계에 실존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자신을 우월성으로 특권화 시키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생물의 다양성처럼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며 그 속에서 사는 인간, 민족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했다.《문명은 무지개의 대하이다》(핫토리 에이지ㆍ 2009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트로스는 근대의 단선적 진보사관을 비판함과 동시에 미래의 전망이 결여된 비관적 문화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방도로서 18세기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비고(1686-1744)의 “螺旋狀적인 발전사관”을 원용하였다. 서양 중심의 문화관 역사관을 넘어서야 한다고 거듭 지적한다. 스트로스와 같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문화인류학자 기어츠 역시 서양 중심주의적 학지(學知)를 비판하며 래디컬한 언설을 발한 학자였다. 그는 선배격인 크랙 폰의 학문을 비판하면서 서양 중심주의를 해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자신이 쳐 놓은 의미적 그물에 걸려있다”로 포착하여 그 “그물”을 문화로 보고 있는 문화관을 지니고 있다. 그물로서의 문화의 열기설기 복잡한 다양성, 문맥성 의미를 섬세히 이해, 해석하고 “두껍게 기술(記述)”하는 것이 인류학자의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해석인류학” 및 “상징인류학”의 방법이론으로 문화를 분석 이해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서양의 “보편주의” 사고에 대항하는 것으로 “로컬 나렛지”라는 콘셉트를 구사하였다. 그는 보편적 학지는 공허한 것으로서, 의례히 언제어디서의 바라보는 방법을 제기했다. 다양한 문화를 해석학적으로 두껍게 기술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대화적세계(유니버스)의 확대”를 꾀하는 것을 창도했다. “문화상대주의”의 함정에서 탈출하여 글러벌 수준에서 상호간의 대회적 이해를 통해 서양 중심의 문명진보사관을 탈피한 것을 호소했다. 사실 “탈 서양 진보주의 사관”의 루트는 유명한 막스 베버(1864-1920)에 있다. 베버는 명작 (1904)등에서 근대적 계몽주의를 관통해온 “진보사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상세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어서 간략하지만, 베버는 아무튼 비유럽의 유고, 도교, 및 이슬람, 힌두교등의 가치 자유적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물론 동기도 좋지만, 빈약한 자료를 근거로 유교등을 인식하려 했기 때문에, 대만 출신의 유명한 사상사가, 역사학자인 余英時(1930-)에 의해 그 오류를 지적당했다. 10. 서양 중심의 편견사상을 통일하게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1935-과007)교수의 을 비롯한 당대 세계의 최고의 문명비평가의 책은 나의 생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75), , 등 많은 저작을 통해 사이드는 서양인 중심의 동양에 대한 우월성, 편견, 무지를 비판하면서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화해로 연결하는 사상을 전개시킨다. 내가 사이더에게서 공명을 환기시킬 수 있는 까닭은, 한국의 비평가가 지적하다시피 “아웃사이더와 경계를 넘는 글쓰기”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의 문화에만 속하지 않는 두 세계에 다 속한 아웃사이더”라고 자칭한 사이더의 고백을 같은 처지의 나를 동화시키는 역량은 불언지명(不言之明)의 파워가 있었다고 해야 좋겠다. 도 그러하거니와, 그의 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보다 훨씬 다양한 주제 이론,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좋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로 “나의 주요 목표는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것이다. 나는 철학적, 방법론적 이유로 문화라는 것은 혼종, 혼합이며 순수하지 않다는 그리고 문화적 분석이 현실에 맞추어 재현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점에 관심을 모아왔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제국주의”에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노정했던 푸코적인 담론 결정론적 자세에서 해탈되어 식민과 탈식민의 이분법을 광정하고 다원적이고 역동적으로 어프러치 해 간다. 요컨대 사이드는 1990년대의 세계정세를 “新自由주의적 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세계화 시대로 특정 짓는다. 따라서 이에 적응한 대안, 이젠더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종 결론으로 그는 유색인종들의 저항적 감수성, 탈식민지론을 통하여 계급 결정론, 경제결정론 및 정치학을 초월하는 유연하고 관용한 이주와 월경의 새로운 타입의 地域文化 창출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는 추상적인 면들도 있으나 많은 면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섭취하였다. 11. 이상에서 나는 자신의 독서, 사고의 기나긴 “과정”을 진술함으로써, 내가 지니고 있는 “사상”(사상이라 하기 보다는 내면의 의식, 학지)의 모태로 된 부분에 대해서 써왔다. 사실 인간의 의식이나 사상은 지층에서 용솟는 샘물같이 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생성되는데는 절대다수가 생활의 경험이 아니면 독서, 타자로부터의 영향을 통해서만 이룩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문화를 습득하는데 “문화화” 과정과 같이 “사상화” 과정을 겪어서 서서히 또는 급격히 육성, 발전 변화돼간다. “당신은 무슨 사상을 갖고 있냐?” 라고 질문하면 나는 서슴없이 답을 제시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보다 복잡하고 또는 정체불명의 의식 세계로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 지적 삶속에서 괴어 오른 것, 그리고 자신이 의식적으로 갖추기를 원한 것들이 혼합적으로 혼효하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프랑스의 철학자 리크루의 해석에 따르면 “모종의 기호에 따라 매개(媒介)된 文化的, 歷史的 존재자로 간주”하며, 그 기호를 해석 하는 것이 영위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自己一他者一世界”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계를 “자신에게는 이질된 타자”로서,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자신과 세계를 발견으로 직결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리크루가 테마로 삼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이해”와 “미래의 투입”, 이외에 여러 가지 역사적, 문화적 문맥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자기-타자-세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상은 세계이해의 지침이지만, 이는 세계 이해의 대화중에서 생기는 “계란과 병아리”의 변증법적 관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중국의 노장사상, 유교, 및 禪에 관한 사상을 밑거름으로 해왔다고 자신을 간주한다. 물론 책을 읽은 경험을 통해서 섭취한 것뿐이다. 이것을 서양에서 발설하는 사상, 철학, 역사, 인류학 등 저작 읽기를 통해, 동서양의 共時的구조를 비교 석출 할 수 있다고 나는 비교문화학자의 시각으로 직감해왔다. 나는 비교사상가나 사상학자가 아니므로 사상체계에 대해서는 전공부분야가 아니다. 그 방대한 작업은 그 전문 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할 수 밖에 없으며, 나는 단 이 글에서 나의 “사상”의식 계보를 정리 해 본데 지나지 않는다. 동양의 사상은 서양에서 발하는 근대, 포스트모던의 사상, 철학같이 시선을 혼동케 하는 현람함은 결해도 일상에, 가슴속에 항상 숨결과 같이 살아있는 영구의 공시성을 갖고 있다. 나는 서양사상가들이 말하는 “지평의 융합”으로서, 동서양의 학지(學知)가 늘 “지평의 융합”으로 융합된 “사상”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나의 “사상”을 형태로 포획하라면, 나는 지극히 평명하고도 단순한 말로 나열해 보겠다. ○ 나는 코스모폴리탄 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조국도 고향도 복수의 디아스포라의 사상, “세계인”사상을 지니고 있다. ○ 나는 월경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국경만 아니라, 학계, 문화의 경계, 사고의 경계, 모든 틀의 경계를 “월경”하는 “월경”의 사상이다. ○ 나는 세계의식을 위한 타자와의 대화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自他와 話를 통해 항상 문화의 경상(鏡像)을 만들고 세계를 보는 동시에 자신의 모습도 점검한다. ○ 나는 인류의 평화사상을 숭앙하는 지식인이다. 평화를 위한 상호의 이해 문화의 인식이 앞서야 하며 “상대주의”의 절대적 함정을 피해, 자타를 이해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사료한다. ○ 나는 多元주의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일원적 절대 가치관을 넘어서 많은 타자들과 共存 共生의 대안이 인류의 미래를 구하는 방도이다. ○ 나는 自然 숭배주의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자연과의 공생, 자연을 경외하는 동양사상의 체현이야 말로 자연의 파괴에서 인류의 파멸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나는 자유주의와 이성주의를 결합시킨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자유주의에 이성주의를 합친 방향이야 말로 인간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 나는 진보주의사상보다 변화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지식인이다. 인간의 문명이 직선적이 아닌 나선 상태로 변화하는 복잡한 문명의 메카니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나는 변(變),진(眞),파(破)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3者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學 知를 行으로 실천하는 글쓰기를 한다.
84    1-7. 나의 여성관ㆍ연애론 댓글:  조회:5049  추천:55  2012-11-17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7. 나의 여성관ㆍ연애론   남자는 두뇌로 사고하지만 여자는 자궁으로 생각한다. 남성은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같이 노출된 채로 소리를 낸다. 여성은 화원 속에 감춰진 미궁(迷宮)같이 미스터리의 세계다. 그리고 그 미궁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영원한 고향이다. 그래서 인가. 남자에게 있어서 그곳은 항원의 매력이고 유혹이며 신비의 궁전이다. 그 신비의 미궁을 찾아 남자는 영원히 미쳐있다. 화원을 침범하고 그 기나긴 촉촉한 복도를 거쳐 자신이 왔던 흔적을 남기려고 낙서를 한다. 물론 잘된 낙서는 작품으로 결실되고, 잘못된 낙서는 쭉정이로 사라진다. 그때만은 남성은 성난 남성이 된다. 성난 무소의 뿔처럼 충천(沖天)한다. 작품 탄생의 흰 먹물을 뿌리고 나면 그 찰나에 시들어 든다. 말랑말랑한 찰떡같이 우리 노래에 있듯이 “고개 숙인 옥경이”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은 어떠할까? 대조적으로 그녀들은 항상 미궁으로 통한 복도는 촉촉한 감촉으로 젖어 있다. 이는 영원한 감수성의 天國이다. 그런 감수성의 유연함은 샘물과 같이 생명을 탄생시킬 化力이 있으며, 그 사색 역시 유연하고 촉촉하다. 그래서 남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촉촉이 감싸주는 유연한 보자기의 부드러움에는 이기지 못한다. “以柔克剛”의 역할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 여성은 남성을 포근히 감싸주는 보자기와도 같다. 그 보자기의 모양은 예쁘다. 꽃 같이, 이파리 같이 아리땁고 종소리 같이 은방울같이 감미로운 美聲을 낸다. 세상의 動物들은 죄다 수컷이 화려하고 예쁘지만 인간은 여성의 용모와 스타일이 더 아름답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조화력인지, 여성 그 자신의 조화력인지 모르겠다. 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동물 행동학자 디즈몬드ㆍ모리스는 동물이 주위의 위험성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무까지나 돌맹이나 풀색 같은 색깔내지 모양으로 몸을 변신 하는 것으로 적을 “속이는” 천성을 지적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인간의 여성이 아름다운 입술과 매력적인 유방은 기실 제각기 발정한 성기와 커다한 엉덩이의 이태(異態)라고 한다. 성기와 엉덩이는 4각(脚)으로 걸어 다니는 암원숭이와 수컷을 유혹하는 중요한 신호 장치였다. 그런데 인간이 직립하여 보행하기에 뒤에 감춰진 성기는 가리워진다. 대신 인간의 여성의 입술과 유방이 성기 대신의 구실을 한다고 한다. 逆說的으로 여성의 매력은 “기만”으로 이룩됐다는 견해다. 그러나 그 “기만”은 역시 아름다운 덩어리이기 때문에 남성은 영원히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生物的, 動物的적인 유물시각으로부터 나는 여성과 남성의 異質性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이질 되기 때문에 “異性”이라 칭하지 않은가. 여성과 남자의 복잡한 이성적 코드를 푸는 작업은 아무래도 物体로서의 異質性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그 위의 形而上學的인 담론은 모래성 같이 순간에 무너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여성과 남성의 세계는 그 생물적 기초로 두고 긴 세월동안 육성되어온 심리, 정신적 문화의 세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함에 있어서 “性”에 대한 최초의 감성적 인식은 유년시기로부터 낳아 길러준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통해서 시작 되는 것이다. 어렴풋하고 막연하나 그 성의 이질적 性 을 느낀다. 어머님은 병약한 체질이었으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분이며 똑똑하고, 독서를 별로 안 하셨지만 비평적인 기질을 가지셨다. 그리고 아량이 넓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그런 관찰력이 뛰어나신 분이셨다. 그런 어머님은 한번 도 체벌을 하신적도, 강제로 공부하라고 횡설수설 하신 적이 없다. 아버님은 대조적으로 건강하셨으며 40대에도 20ㆍ30대와 같이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회 때 단거리를 달리셨다. 독서를 즐기시고 과묵하셔서 변재는 무디었으나, 글씨는 달필이셨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리고 實容하셔서 너그럽고 타인 탓을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누구나 좋아하는 “老好人”의 타입이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큰 결점은 언어설복력이 약한 탓이어서 그랬는지 타이름 대신 작은 일에도 손을 대고 하셨다. 그런 것이 나나 동생들에게는 꽤나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님과 할머님께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것으로 위안을 받곤 했다. 할머님과 어머님이 그런 아버님을 말로 몰아 부칠 때 나는 쾌감적인 위안의 보상을 느끼곤 했다. 모택동의 전기를 보면, 소년시절 때 맹호 같은 아버지의의 질타가 두려웠던 모택동의 “모성의존증”(mother complex)이 보인다. 아버지의 꾸지람이나 체벌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의 등 뒤에 서서 불만의 눈초리로 쏘아 보면서, 어머니의 구원을 얻었다. 실제로 성년의 모택동의 자백에도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했고 어머니의 등 뒤에서 숨는 자신의 모친착종(母親錯綜)증상에 대해 기탄없이 얘기했다. 나는 성년이 된 다음에도 역시 어머니를 이탈하지 못하는 정신적 “모성의존증” 증상이 약간 보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동성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의례 여성, 모성에서 그 “공격받는” “상처”를 치유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여성은 어머니의 모성과 같은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처럼 간주된다. 거물 원세개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수많은 공격을 받고 그 억울함의 상처가 아플 때면 사랑하는 애첩의 유방에 머리를 묻으면 아이처럼 흐느끼는 드라마의 신을 보면서 나는 심히 감명을 느꼈다. 동양 남자에게 있어서 아내는 어머니와 아내와 이성의 3자 역할을 한다는 말은 이래서 생긴 것이다. 남자는 약자이다 제 아무리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을 하고 제 아무리 도도히 호언장담을 해도, 제 아무리 고고한 품성을 자랑해도, 제 아무리 청운의 뜻이 있다하더라도 워낙 남자는 약자이다.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다. “상식”이라는 내용에 일정의 회의도 없이 “여자는 약자, 남자는 강자” 라는 착각에서 살고 있다. 사실 생물학적 지견에서 보아도 나약해 보이는 여자가 더 강하다. 의사들의 고백에 따라도, 여성은 “아픔”에 대해 남자보다 월등 강하다고 한다. 여자가 “아픔”에 대해 약해 보이는 것은 작은 “아픔”에도 남자보다 빈번히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진짜 크고 깊은 대통(大痛)에 있어서 여자는 오히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감수하며 그 인내력은 남자보다 수십 배 강하다. 출산의 산고는 남자들은 모르지만, 진통 속에서 3천g의 아기를 그 가냘픈 여체가 낳는 것은 남성은 상상하지 못한다. 십 개월의 임신기, 출신의 진통, 1년의 보육, 그 고통의 연속과 복잡함을 겪고도 여성은 또 다음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본질적인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강하다. 남성이 강한 것은 순발력 체력뿐이었지 이는 지속적 생명력과 무관 하다” 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여성이 강한 이유는 (1) 여성은 아픔에 둔감한 것 (2) 출혈 상처에 강한 것, (3) 환경 적응력이 우수한 것 이 3점을 들고 있다. 대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라는 책에서 “여자가 없었다면 우리 남성들의 생활은 처음엔 원조에서, 다음엔 열락(悅樂)에서, 마지막엔 위안에서 탈락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내가 이 말에 동감인 것은 어머님의 강인한 생활력과 사랑에서, 그리고 나와 결혼한 아내들과 연애를 해온 복수의 여성을 통해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 보다 더 실감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여성은 교과서를 지니지 않은 선생님이시다. 여성을 통해 교과서적 지식이 아닌 삶의 방법, 정신적 에토스의 강인함, 관용 등살아 있는 철학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지식인”으로서의 나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런 공격의 그물망에 포로 되지 않고, 그 그물망을 나의 여가를 즐기는 테니스 라케트로 즐기는 지혜와 여유는 모두 어머님의 母校와 함께 여성의 아픔에도 견딜 수 있는 생명력 넓은 부드러운 감성을 배웠기 때문이리라. 남성은 사회적으로도 스트레스에 약하고 굶주림, 아픔, 추위 따위의 생리적 스트레스에 여성보다 훨씬 약하다. 여성의 염색체는 두 개의 X가 서로 보완해 주며 생명유지를 위한 중요한 유전자가 많이 구비돼 있다고 과학연구 결과가 있다. 게다가 여성의 몸은 쓸 때 없는 소모가 없고, 작은 에너지로 생명유지가 가능하게끔 돼있다고 한다. 또한 여성은 성이나 신체에 리듬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리듬은 달(月)의 리듬으로서, 발신원은 체내 시계이며, 그곳에서 정보를 받아서 난소가 달의 리듬을 갖는다고 한다. 태양계에서 사는 생물로서 달의 리듬을 지닌 여성이 유순하고도 강한(柔剛)의 자연체 구조를 이룬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약해 보이나 기실은 강한 여자와 강해 보이나 기실은 약한 남자. 여자와 남자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 같다고만 인식하는데서 여자와 남자는 오해가 생기고 충돌이 생긴다. 여자는 “自然”이고 남자는 “文化”라는 서양의 말도 있다. 남성우월주의의 발상이지만, 결국 자연에 적응하는 가운데 육성된 적을 양식이 곧 문화가 아닌가. 그리고 보면 이 말에는 여자가 남자를 훈육시킨다는 진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자연과 文化의 대조만큼 이질적이다. 화성인과 목성인인 만큼 다른 것으로 나는 본다. 좀 과한 표현이지만 이질화된 두 세계이다. 30년대 활약한 귀재 이상의 지교였던 역시 일류의 문장가인 이태준(李泰俊ㆍ1904-?)은 명작 에서 이렇게 이성을 말하고 있다. 참 재미있는 비유로 남녀의 이질성을 설명하고 있다.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처럼 최대, 그리고 최적의 상이물(相異物)은 없다. 같은 조선 복색이되 우리 남자에게 여자의 의복은 완전히 이국복(異國服)이다. 우리가 팔 하나 끼어 볼 수 없도록 완전히 이국복이다. 같은 조선어 이지만, 우리 남자에게 있어 여자들의 말소리는 또한 먼 거리의 이국어(異國語)이다. … 우리에게 여성은 완전한 이국(異國)이다.” 그러면서 이태준은 “같이 아는 정도라면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우리 남성은 늘 더 신선하다” 라고 고백한다. “다른 것끼리가 즐겁다” 라는 이유를 밝힌다. “이성끼리 쉽사리 석탄같이 열이 생기고, 동성끼리는 돌맹이어서 마찰이 잘 생긴다” 라고 한다. 따라서 “남성끼리의 십년 정보다 이성끼리의 일 년 정이 더 도수를 올릴 수 있는 석탄화 작용” 이라고 갈파한다. 이태준의 말들은 나의 심정을 대변 한 것 같아서 좋다. 남자에 대해 여자는 자기인식의 거울이다. 적어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험을 통해 “여성이 자기 발견의 계기와 경상(鏡像)이 되었다. 마치 달린 것과 감추어진 것. 불룩 나온 것과 민민한 것, 화원과 검... 이러한 차이로부터 남자와 여자는 서로 상대의 他者성에 눈 뜨며 자신을 있는 것과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구체적인 기술은 삼가 하지만, 농담 적으로 말해 문자 그대로 나는 여성의 덕분에 남성으로 설 수 있었다. 좀 노골적인 치졸한 표현이긴 하나, 나는 여성들에게 더욱 사랑 받기 위해, 대장부 남아로서 출세해야 되고 더 좋은 글도 써야 하겠다는 원동력(原動力)이 생기기도 했다. 남자는 아마 출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에베레스 정상을 정복한 힐러리 경이 “왜 산에 오르냐?” 라는 물음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 라고 답했던 것처럼 출세주의는 무조건 등산 같은 남자의 삶의 방식이다. 남자는 아무튼 그대로 두어도 뭔가 길과 계단을 선택하여 오르기를 하는 생물이다. 남자가 높은 곳을 바라고 오르는 “등산”타입이라면, 여자는 높이가 아닌 평면의 서로 횡적 비교 하는 나열식 동열(同列)을 즐기는 평지(平地)타입이다. 출세보다도 평지에서 걸어가는데서 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스트레스의 덩어리인 남자에 비해 유연한 동열지향의 즐거움은 참 부럽기만 하다. 여자의 감성적 지혜에 남자의 고놀적인 출세주의적인 이성(理性)은 때로는 오히려 너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너무 높은데 오르려다 떨어지거나 하면 남자들은 많이 다친다. 그리고 실의의 슬럼프에 빠지기에 십상이다. 다만 남자는 그런 것들을 짐짓 여자 앞에서 감추거나 티를 안내려고 할 뿐이다. “남자대장부”라는 소제지에 붙여도 먹을 수 없는 알량한 자존심, 강박감 때문에. “여자는 단지 일종의 天便, 여장부, 妖女, 女獸 혹은 인간전형이 아니라, 무한하게 열린 것을 기다리는 인간 실존으로서, 남성은 부단히 그 미지의 자기를 열어가는 무수의 열쇄이다.” 일본의 작가 武田泰淳의 말이다. 때로는 작가의 싶은 문학적 체험담은 학자의 연구보다 투철하고도 명징한 결론에 닿기도 한다. 여자에 의해 남자가 성장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도 남자에 의해 “개발”되고 성적으로도 성숙된 여성으로 성장된다. 여성과 남성은 생리적으로 성의 구조가 이질 될 뿐 아니라, 그에 비롯된 성차, 성애, 연애 및 결혼에 대한 감성, 인식도 이질적이다. 여성은 일단 성적 쾌락을 알았다면 그 성교시의 쾌락은 남자의 수십 배나 된다고 한다. 마치 귀 구멍이 가려울 때 손가락으로 후비면 시원하고 기분 좋은 것은 귀 구멍이냐 손가락이냐 하면 당연히 귀 구멍이다. 이것을 알면 남녀의 성적 쾌락의 차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성은 솔직히 성감 그것을 쾌락으로 빠져 느낀다. 그래서 여성들은 성교 때 눈을 감고 그 무비의 쾌락의 절정을 즐긴다. 그러나 남성은 눈을 뜬 채 여성의 쾌락을 느끼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 하려한다. 여자의 성감과 달리 남자의 성은 육체적 쾌감보다도, 오히려 자신에 의해 여성에게 쾌락을 안겨준다는 정복감, 탐험의 스릴 따위에서 쾌감을 더 느낀다. 조물주는 그래서 성의 쾌락을 남자보다 수십 배의 절정을 준 동시에 그에 대한 “벌”로서 출산의 고통을 부여해 주었다. 사실 곰곰이 살피면 성교시 여성의 절정에 달한 절교는 분만 시의 그 절교와 거의 똑같다. 나는 서양의 영향 하에 근년대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권리 신장을 외치는 “페미니즘”의 여성들은 왕왕히 성적 쾌감을 맛보지 못한 성의 무지에서 오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만일 그녀들이 좋은 남자에게서 성적 쾌락을 느끼고 만족했다면 적어도 그렇게 까지 페미니즘에 신경을 안 쓴다고 여긴다. 성차를 무작정 팽창, 확대시켜 성차별, 성천시로 불려도 결국 여성과 남성의 이질성을 무시한 愚를 법하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생리적으로 이질 된 남녀에게는 서로의 능력이 있는 만큼, 결함도 있기 때문에 서로 상호 보완이 되는 플러스, 마이너스의 양극을 이루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사랑이란 애정에 대해서도 여자는 애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것은 아름다운 심정, 염원이긴 하나 너무 감성적이다. 그래서 나는 여성은 자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남성은 영원한 사랑을 여자처럼 깊숙이 믿는 편이 아니다. 20대에는 믿었으나,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임에 따라 애정이 영겁불변으로 지속한다는 착각에 눈을 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은 그것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몽테뉴는 “결혼은 새조롱과 같아서 밖에 있는 새들은 들어가고 싶어 하나, 안에 있는 새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필사적이다” 라고 갈파했다. 같은 말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격언도 있다. “영원한 사랑의 생명은 불륜에 있다.” 라는 말도 역시 이를 두고 한 말 일 것이다. 사랑이 일종의 열병이라면, 그 열병은 오로지 결혼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결혼 후 사랑은 식고 남는 것은 일상의 냉철과 지극히 평범한 안정이다. 대체로 4년, 내지 7년에 결혼은 파탄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남자의 성은 한 특정된 이성에 고착돼있지 않다. 성감의 농도가 박약하기에 특정적 파트너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없다. 오히려 미지의 새로운 여성을 상대로 하는 정적 긴장감에서 흥분하고 쾌감을 느끼고자 한다. 그래서 “여성은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족하지만, 남성은 본능에 맡긴다면 곧장 아내에 대한 배신으로 직결된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남편의 그런 “배신”은 꼭 아내가 생각하는 것처럼의 “배신”만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다하더라도 성적으로 “외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히 있다. 창녀와의 일이 그렇다. 창녀의 직업이 인류의 최고(最古)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남자들은 그래서 “일부다처제”를 창출해냈던 것이며, 요즘도 “불륜은 남자의 앞가슴에 단 훈장이다” 라고도 한다. 물론 일부일처제의 현시대에 무모하게 “불륜”을 정당화 시킬 생각은 추호만큼도 없다. 일탈한 귀재 근대의 학자 고홍명은 “일부다처제”를 수호하는 명언을 남겼다. 서양의 여성기자가 그에게 일부다처제의 이유를 질문했을 때 한 답이다. “차 항아리가 하나고 찻잔이 여럿인 것은 있어도, 찻잔이 하나고 차 항아리가 많은 것 봤어요?” 그 영국 여기자의 답이 또 걸작이다. “그럼, 한 찻잔 안에 여러 숟가락을 넣어서 잘랑잘랑 소리 안 나는 거 봤어요.” 일부다처제속의 처첩들의 옥신각신 시기와 싸움을 두고 한 말이다. 물론 지금 같은 시대에 “일부다처제”는 지구위에 지극히 개별적 민족을 제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변상적인 양식은 제도가 아닌 실제 행위를 남자들 (지위, 관리, 부유를 장악한 남자)가운데 실존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세상이란 늘 이렇게 수평면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수평면하의 진실이 병행되었다. 황차 사랑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영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즉 문화의 하나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굳이 이래라 저래라 제3자가 간섭할 바는 아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부딪치는 큰 문제 중에 이성과의 만남, 사랑은 탈락시킬 수 없는 덕목이다. 나는 욕심 같아서는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많은 여성을 만나고, 또 사랑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성은 동성에게서 배울 수 없는 많은 他者적의 것을 가르쳐 주고 또 나 자신의 향상을 밀어주는 에너지로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자신을 이성의 거울로 비추어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복사꽃”이라 하겠다. “復數(복수)의 사랑을 꽃 피우며” 자신을 완성해가는 자기동일성의 확인과 그 작업의 프로세스. 앤소니 기든스는에서 이성과의 사랑은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만들어 가고, 동일성속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규범이라” 라고 했다. 서로 상대의 정체성, 이질을 승인하면서 공존(共存)의 감정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사랑이다. 두달전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門)의 기자가 인터뷰중, 나에게 문득 “좋아하는 여성의 타입은 어떤 것인가?” 라고 물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깊은 사색 없이 나는 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야마구치모모에(山口白惠合)라고 말했다. 썩 미인은 아니더라도 청초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보이는 여성이 좋다. 너무 완벽한 미인에 나는 주눅이 들고 위압감으로 기가 못 필 것 같다. 왜냐하면 10층에서, 아니 18층엣 떨어진 메주같이 생긴 내가 어찌 완벽한 미인과 언감생심..... 그리고 청초, 유순에 지성이 겸비된 여성, 일테면 요시나가사유리 (吉永小白合) 아니면 사카이노리코(酒井法子)형, 한국 여성으로 말하면 오연수 아니면 강수연 전도연 쯤이나 될까? 중국 한족여자는 美人일수록 너무 강해서 어딘가 공포감을 느낀다. 그냥 멀리서 보는 것으로 눈요기나 하면 그만이다. 버마재비를 아는가? 그것의 암컷은 수컷과 교미 할때, 수컷의 머리부터 먹기 시작한다. 먹히울수록 머리가 갈기갈기 찢기 우는 수컷은 더 활발한 교미를 하면서 죽는다.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숫 버마재비를 암컷은 무자비하게 먹어치운다.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절(絶)하는 잔혹한 행위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크게 쾌감을 느낀다고 하는 동물행동학자의 연구가 있다. 휘트먼의 시에 “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늙은 여인이여!” 라고 읊은 구절이 있으나, 나는 늙은 여인, 즉 年上의 여인과 사랑 해 본 경험도, 해볼 애정도 없다. 나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年下의 여성이 좋다. 아마 30세의 선비였던 할아버지가 15세의 할머니와 결혼한 것처럼 우리 가족사에서 보면 옛적부터 전승해온 DNA탓일까? 나는 지금의 아내도 12세 연하, 그리고 연애 해 온 여성도 거의 다 10세 연하였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나 자신도 명확히 준비된 답이 없다. 연애, 사랑은 확실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것이 아니고, 마음 따라 발길 따라 가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바람에 부는 대로 책장이 번져 지듯, 번져 진 페이지의 내용을 읽으면 된다. 바람은 글을 몰라도 언제나 책장을 번지니 아 아니 소탈한가! 연애도, 결혼도, 그리고 글쓰기도 어쩌면 이같이 자연의 정해진 숙명적인 것이 있다고 나는 감으로 믿는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문학영역뿐만 아니라 박물학, 물리, 생물, 역사, 고고학, 등 영역에서 많은 실적을 남긴 일류의 대형 “지적거인”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연애의 왕자이기도 했다. 그의 생을 지적 창조와 함께 연애의 행각이 울긋불긋한 색깔로 장식된 생이기도 하다. 83세에게도 19세의 아가씨를 추구했던 그는 문화와 성호(性豪)를 경비한 희대의 천재였다. 나는 성공한 인물에서 공통성을 발견한다. 비범한 지적창조, 많은 방대한 작품, 일탈한 성격, 병약 아니면 변태, 그리고 범인을 초월한 성욕, 성적능력, 물품의 성능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진짜 性能이다. 성(性)이란 文字그대로 살아있는 마음이 아닌가. 마음이 살면 인생이 산다. 삶의 에너지가 자연 왕성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성인류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지적인 일을 하고 있는 인간일수록 상옥이 강하다는 것이다. “발정기에서 해방된 원숭이”로서의 인간은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대뇌신피질의 정신에 활동에 영향 받기에, 쾌락을 위해서만 이라도 성적 욕망이 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며 체험적으로 납득이 간다. 지적 창조의 짜릿한 쾌감은 어딘가 꼭 성적 쾌감과 유사한데가 있다. 그런 ‘幸福’을 중국인들은 ‘性福’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괴테는 자신의 풍부한 성편력 체험으로 이런 격언을 남겼다. “영원의 여성은 우리를 인소하고 간다” 라고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참 멋있는 명언이다. “남존여비”의 유교적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나는 이것이 나의 연애, 여성관의 굵은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고백한다. “원래 여성은 기실 태양이었다” 라고 한 여성이 있다. 1911년 일본의 신여성의 등장을 선고한 기백 있는 명언이다. 신여성 지식인의 대표인 히라츠카라이데우가 여성잡지《靑踏(청답)》창간호 권두언에다 쓴 말이다. 그렇다. 여성은 태양이다. 인류의 고향이다. 이 태양의 따사로운 빛 발아래서 나는 영원히 아이, 미성년의 소년이다. 나는 양광의 부드러운 애무를 받으면서 죽을 때까지 홀로서기(獨立)한 지적 少年이고 싶다. 전세계 남성들이여, 태양의 밑에서 일치 단합하여 우리의 여성을 사랑하라!    
83    1-6. 나의 독서방법 댓글:  조회:5126  추천:16  2012-11-1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6. 나의 독서방법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는가?” “독서에 무슨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독자나 학생들, 기자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다. 이는 마치도 “밥 먹는데 어떤 방법으로 먹는가? 라고 하는 질문과 같다. 기실 평소에 거의 생각하지 않는 문제이다. 독서법 같은 것은 나중에 반추하여 귀납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의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모든 방법론도 역시 이 같은 반추성찰의 결론이 되겠다. 독서를 흔히 식사로 비유하는 발상이 있다. 여러 종류 메뉴의 요리를 골고루 먹음으로서 다양한 영양가를 섭취하는 것 좋다. 책 역시 여러 종류의 분야, 장르를 폭 넓게 읽으면서 정신적 에너지를 섭취하게 된다. 이는 지식인들이 독서생활에서 걸러낸 독서의 지혜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독서란 방법으로서의 방법이기 보다는 생활방법의 하나이다. 정신적 공간을 한 칸 한 칸씩 메워가는 정신적 삶의 방법, 기교의 큰 덕목이다. 독서가 없는 나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독서는 자신에게 없는 정신세계, 세계관을 만나는 일이며, 이질화된 가치관을 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타자란 텍스트를 읽는 것으로 멀리 존재했거나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정신의 타자들과 한번 또 한 번씩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인간이 문화생물인 것은 타자와의 접촉(교육, 전승, 학습 등) 을 통해, 문화를 이어 받아 문화를 전수받는 “문화화(文化化)” 의 프로세스를 통해야만 문화인으로 육성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文化화” 프로세스 중에서도 혼자 진행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며, 이 같은 혼자 있기, 홀로서기(獨立) 를 통해 인간성이 육성, 시작된다. 독서는 인간성의 내면세계를 구축하는 정신적인 것과 행동적인 것의 결합이며 폭 넓은 독서는 어느 하나의 고집된 절대적 가치관의 함정에 빠지지 아니하고 넓은 시야에서 사고정지를 방지하며 자신의 사고양식의 부단한 탈피를 형성하게 된다. 인간의 지적 세계의 공간이 커지면 그릇도 크게 한다. (器)가 큰 인간이 큰일을 해낸다. 나는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마음은 커야 한다” 라는 어머님의 모교를 나름대로 실천 해왔다. 내게 있어서 독서는 훌륭한 타자와 만나는 행위였으며, 이런 훌륭한 타자를 흉금에 많이 포용하고 있을수록 마음은 더 커지게 된다고 믿는다. 실생활에서 주위에 훌륭한 인간이 많으면 그것은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책은 그 아쉬움을 메우는 구실을 하는 법이다. 좋은 책은 훌륭한 스승처럼 인간성 형성과 향상을 자극 주며 인간의 품위를 높일 수 있다. 인간의 향기는 독서라는 꽃을 통해 나타내기도 한다. 독서는 아득히 멀리 있는 타자와의 대화를 시켜주고, 그 사이의 무한한 시 공간은 삽시에 사라진다. 2천년전의 공자를 만나는 일은 그의 를 위시로 한 저작을 읽는 것으로 쉽사리 이루어진다. 세상에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이런 기적적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즐거움이 또 어디 있으랴! 독서가 습관 된 인간에게 있어서 독서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이 궁핍한 생활이다. 가령 나는 무인도에 방치 당했다 해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책이 있으면 만족한다. 가끔 나는 무인도에서 독립생활을 상상해 본다. 가장 필요한 필수용품이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는 줄로 안다. “讀書立人”을 신봉하는 나는 그 역설로 “立人卽郡讀書”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서는 인간을 키우고, 인간이 되려면 독서한다는 사상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독서의 방법”, “독서의 기술”은 어떤 것일까? 하면 나는 주로 아래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독서의 세계” 를 즐기고 있다. 내가 존경하는 일본의 당대 문화인류학의 대가 우메사오 타다오(梅棹忠夫, 1920-2010) 는 이런 말을 남겼다. “독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저자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서 자신의 사상을 개발시켜 육성시키는 것이다.” 우메사오 교수는 독서를 “발견”을 위한 촉매작용을 한다고 갈파한다. “나는 독서란 전류의 감응현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의 코일에 전류를 흘리고 또 하나의 코일에 감응전류라는 전혀 이질 된 전류가 발생한다. 양자의 직접 연결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처음 흐르는 전류가 아니라 그 다음의 감응전류이다. 이를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모터는 비로소 회전하게 된다.” 우메사오에게 있어서 독서는 자신의 창조적 행위의 “발견”, 사상을 개발하는 방법으로 되고 있다. 나는 이 방법에 대해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 타자의 책을 읽으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왕왕히 그 단 한마디의 글귀 절, 그 전체적 주제, 모티브, 사상에서 “아! 그렇구나” 하는 발견, 재발견의 섬광이 번뜩인다. 책에서 자신의 사고 속에서 잠재된 씨앗을 “발견”하게 되고 그 씨앗을 심으면 이내 또 다른 책이 탄생된다. 특히 글쓰기, 연구를 생업으로 하는 직업적 프로패셔널 지식인에게 있어서, 독서는 자기의 “창조적 지적 생산”으로 직결 되어 있다. 닭이 계란을 낳고 계란이 또 병아리를 낳고, 이런 순환반복이 작품탄생의 영구한 프로세스도 흡사하지 않은가. 직업이나 목적에 따라 독서의 방법과 기술은 제각기 달라도 독서가 각자의 정신적 식량이나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독서법을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이는 내 자신이 지금까지 행해온 독서법을 귀납해 볼 것이다. 나의 “독서12법”이다.   (1) 단숨독법, 즉 단숨에 책을 내리 읽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방법은 책의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좋다. 일단 읽기 시작했다면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읽어 버린다. 책은 저자가 구축한 하나의 독립적 세계로서 이 세계를 인식함은 그만한 정열을 투입시켜야 한다. 나는 보통 200-300페이지 분량의 책은 줄 창 내리 읽어 글 전체상황을 파악한다.   (2) 필기독법, 읽으면서 중요한 구절이나, 신선한 대목, 관점에 대해서는 책의 상하여백부분에 자신의 감상이나 그 내용요약, 등을 작은 글씨로 적어 넣는다.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이 부분을 다시 체크하면 책의 주요 주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효하다.   (3) 방선독법, 책 행간에 방선을 긋는 방법이다. 새 책에 방선 긋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으나 저자의 말하려는 포인트, 또는 자신이 멋있다고 느끼는 부분에 방선을 긋는다. 또한 빨강색, 파랑색으로 중요한 부분과 재미있는 부분을 긋는다. 이 줄을 그는 것으로 책은 자신의 책으로 안긴다. 마치 미지의 세계에 지도를 그리듯 이 책은 지도같이 환하게 안겨온다. 방선법과 필기 법을 병용하면 더 효과적이다.   (4) 사선독법, 여기서 사선(斜線)이란 책을 빗으로 모발을 쭉 훑듯이 신속이 시선을 이동시켜 시선에 걸리는 문구를 포착한다. 독서의 양이나 질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이 방법을 실행 가능하며 꼭 전체 페이지, 전부를 읽지 않고서라도 그 요점을 파악 할 수 있다.   (5) 목차독법, 새 책을 처음 읽을 때 우선 머리말과 후기를 쭉 읽으면 이 책의 내용이 대개 잡힌다. 먼저 서문, 후기를 읽는 것은 아주 유효한 독서법이다. 그리도 다음으로 목차만 훑어보고, 자신이 필요한, 흥미가 가는 목차의 페이지를 펼치고 읽는다. 시간이 긴박하거나 없을 경우 이것은 최고의 방법이다. 나는 대체로 서점의 매장에서 이런 방식으로 책을 보고 구매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또 써서 보기에 입독(立讀)이라고도 한다.   (6) 축적독법, 책을 일단 서가나 책상에 쌓아둔다. 관련서적을 몇 권내지 십여 권 쌓아 두었다가 읽고 싶을 때 한권, 한권씩 읽어 내려간다. 쌓아두면 눈에 뜨이기 때문에 읽기를 망각하는 실수 없이 자신에게 읽는 압력을 가하게 된다. 구체적 읽는 방법은 자신이 정한다.   (7) 통독법(通讀法) 통근의 전차 안에서 읽는 방법이다. 나는 자가용 운전을 할 줄 몰라 십여년 동안 대학 근무처로의 교통도구는 전차, 또는 버스를 이용한다. 통근의 전차 안에서 책을 미리 준비했다가 독파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통독”으로 일일일책(一日一冊)을 매일 실행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에는 一日三冊, 五冊이 되는 경우도 있다. 통근 공간과 시간을 유효하게 이용하는 독서법은 매우 좋다. 그러나 너무 몰두하여 목적 역을 지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망각하지 말 것. 하기야 다시 돌아오는 차에서도 책을 읽으면 되지만.   (8) 반독법(反讀法)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인바, 책의 내용과 기술에 대해 그 견해를 백 프로 믿지 않는 것이다. “꺼꾸로 읽는 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늘 “이건 아닌데” “정말 그럴까?" "그 역설을?” 하는 의문을 품고 거꾸로 생각해 보고 뒤집어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반독법, 역독법을 늘 실천해 와서 늘 어른들이나 선생님의 핀잔을 듣곤 했다. 중학교 때 중국의 항일 영화 “지뢰전”, “지도전” 을 자주 보았는데, 중국 농촌이 민병들이 빈약한 자작 지뢰작탄으로 정예무기로 전부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싸워 이기는 내용이었다. 나는 민병이 일본군을 이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선생님께 터놓자, 선생님은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이런 얘길 다시 하지마라. 너 반동파로 몰린다” 라고 하셨다. 내가 그 뒤 중국 역사서, 근대사를 읽으면서 이런 反 독법으로 문제를 발견하면 그를 증명하는 문헌자료를 다시 찾아내고 읽었으며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 연구과제, 글쓰기로 이어졌다. (9) 난독법(亂讀法), 연구서, 전문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폭 넓게 여러 장르, 영역의 책, 잡지, 신문을 눈길이 가는대로, 닥치는 대로 읽는다. 학자, 전문가는 흔히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관심이 가는 약점이 있는데, 나는 자신의 전공부야의 수백 배 이상의 타 분야를 읽기를 좋아한다. 어느 한 분야나 가치관에만 편 합되면 그것만 절대시 하는 위험성에 스스로 침몰되기 십상이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전문바보” 라고 한다. 폭 넓은 독서를 통해 넓은 지견과 가치관을 접하면서 자신의 지견과 가치관, 사고를 넓은 시야에서 관조 할 수 있으며, 또한 독서의 경묘소탈의 묘미를 체득 할 수 있어 좋다. 이를테면 나는 전문영역 외에도 자연과학, 수학, 물리학, 골동관계, 서예 미술고서, 진서, 포르노그라픽, 춘화, 성애론, 에로스관계 책, 잡지와 글을 많이 수집하고 읽는다. 이런 분야를 읽다가 또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신저작이 생기는 수가 많다. 난독, 잡독은 인생과 일의 일대 묘미이다.   (10) 분독법(分讀法), 자신의 전공, 일에 관계된 필요 서적은 맹렬한 스피드로 읽는다. 그러나 한편 전공, 일에 관계있는 책을 흔히 읽기에 어려운 책에 봉착하며 지겨울 때도 있다. 이때는 차라리 분독 법을 구사한다. 그래서 잠깐 전공분야의 책을 제쳐놓고 의식적으로 본 테마와는 멀리 하면서 일에 핑계 대는 책을 읽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知적 거인”이라 불리는 다치바나타가시(立花陸)의 방법론이기도 한데 책을 읽다가 거기서 또 새로운 아이디어 발상이 탄생한다. 이것이야말로 망외(望外)의 기쁨이다.   (11) 추독법(追讀法), 필요한 책, 자신의 관심분야의 책을 읽고 미지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래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때 나는 그 책의 저자가 책 뒤에 로 즉 나열 해놓은 책 리스트를 곰곰이 읽어본다. 그 속에는 오히려 이 책이 탄생된 지탱해준 우수한 책, 자료가 매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다 라는 책을 따라 추적하여 찾아 읽는다. 이 방법은 용이한 방법으로 매우 유효한 수단이다. 그리고 어느 작가나 지식인의 저작이 좋아서 읽고 나서 계속 추적하여 그 한사람의 저작을 추종하여 읽는다. 나는 “연쇄독법”이라고 명명하는 바, 하나 또 하나의 고기 꿰임을 먹는듯한 지적 자극을 연쇄적으로 받게 된다.   (12) 매독법(買讀法), 나는 책이란 자신이 돈으로 구매하여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도서관이나 자료실 따위를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외려 자신이 구매하여 읽는 편이 좋다. 혹자가 공영도서관을 “시민의 식생활 같이 공영식당에서 식사 시킨다” 라는 발상으로, 시민의 독서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전 발상을 나는 우습게 본다. 독서는 지극이 개인적인 정신생활이며, 자신이 먹는 정신식사의 대가는 자신이 치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이 선택하고 제 돈을 내고 사서 자신의 서가나 침상 옆에 놓아두는 것이어야 한다. 학생이면 몰라도, 그만한 돈 마저 쓰기 아까워하는 정신적 구두쇠는 책의 진가를 모른다. 제 돈 들여서 산 책 이라야 더 소중히 하고 읽을 맛이 나며 또 읽게 된다.   마치도 여성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연인은 너무 가까이 하면 도망가지만, 책은 너무 가까이 해야 도망가지 않는다. 연인은 가까이 두면 잔소리가 많고, 책은 가까이 두면 지성이 많아진다. 그대여, 연인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책을 사랑하라!
82    1-5. 至福의 독서편력 댓글:  조회:4528  추천:16  2012-11-0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1-5. 至福의 독서편력   책에 대해서 만 큼은 할 말이 얼마든지 많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活字中毒者 아동이었다. 내가 기억 하는 한 8살 때부터 인가 하도 글을 좋아해서 땅바닥에 있는 신문지나 종이조각에 박힌 활자라면 다 주워 읽는 버릇이 있었다. 시골서 자랄 때다. 재래식 측간(화장실)에서 지금 같은 고급스러운 화장지가 아니라 신문지로 화장지를 대신해서 썼다. 그 똥 묻은 신문지에 찍힌 글을 읽다가 마저 읽으려고 그것을 집안으로 들고 와서는 수돗물에 씻어서 읽곤 했다. 그러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어이없는 놈이라고 웃고 계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책이 너무 좋아서 아직 글을 모르는 유아시기에도 책을 쥐고 읽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아마 내게 있어서 책보다 더 좋은 완구는 없었을 것이다. 소학교에 입학 전부터 나는 어머님이 시내 나갔다 오시면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 따위보다도 그림책(만화)을 사 달라고 졸랐다. 이 버릇을 잘 알고 계신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숙부는 서점에 들러서 그림책을 사다 주곤 했다. 원체 병약한 나는 병으로 자주 앓아서 집에서 쉬는 일이 많았는데, 나는 누워서 언제나 책을 읽었다. 겨울이면 밖에 나가셨다 돌아오시는 어머님을 기다렸다. 시내에 가신 어머님이 꼭 책을 사오시기 때문이었다. 앓아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없는 나는 어머님이 들어오실 때의 그 신선한 찬 공기가 좋았다. 그리고 의례히 그림책에서 나는 인쇄잉크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코끝에 갖다 대고 몇 번이고 잉크의 향을 맡고 나서야 책장을 넘겼다. 빈한한 농가인 우린 집에서 사실 책이 몇 권 없었다. 그 나마 10년 위인 숙부가 학생이어서 교과서와 그가 읽던 책 수십 권이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즐겨 보았다. 한자를 모르면 도감이나 그림이라도 보는 것이 나는 즐거웠다. 소학교 때 도 나는 책이 좋아서 늘 책하고 벗했다. 실제로 친구와 어울려서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운동선수로 훈련을 하는 것 외에는 나는 늘 홀로 책 읽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지금도 나는 낙(樂)이라 하면 독서보다도 즐거운 낙을 느끼지 못한다. 읽고 쓰는 것이 나 생애의 전부 인 것 같다. 소학교 3학년 땐가 나는 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숙부의 책장 속에서 몰래 들추어내서 읽었다. 그때 읽었던 줄거리를 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3국연의》는 뒤 부분이 많이 페이지가 떨어졌는데 나는 친구 누나에게서 빌려서 결락된 수백페이지분량을 전부 만년필로 베껴냈다. 친구 누나가 놀라서 혀를 두르며 “너 커서 유명한 작가가 되겠구나” 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나는 책 읽는 것이 즐거웠고, 책 읽는 것만이 가장 고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역시 인생의 至福은 “매일 책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4학년 때 숙부의 장서에 있던 시 누렇게 퇴색한 을 찾아서 읽은 기억은 오늘도 선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를 읽으면서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에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시들을 줄줄 외우기도 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글귀가 너무 좋고 낭송하기에도 너무 음률이 좋아서 김소월을 너무도 좋아했다. 그 뒤 모방해서 쓴 시 몇 수를 국어선생님께 보였더니 너무 멋있다고 어디서 베낀 것이 아닌가 하고 혀를 찼다. 모르는 미지의 세계, 하나의 수수께끼의 답을 알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쉐익스피어의 명언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충실 하라” 라는 말이 있다. 자기 양심에 부끄럼 없이 처신하라는 뜻이 되겠다. 진부해보이지만 이런 진리적 교훈은 영구히 값진 말이다. 독서에서 말하면 영어의 세계에는 “지적정직(知的正直=인테럴츄얼. 오네스티)”이란 단어가 있다. 알면 알고, 모르면 아는 척하지 않는 정직함을 이르는 말이다. 모르는 미지, 또는 알고 있었으나 틀린 지식, 착각들, 이런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 충만 된 나는 알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 감동되거나 재미난 책은 읽고 읽고 또 읽기도 했다. 소학교 때 주위로 부터나 반급의 급우로부터 “신동” 또는 小老師(꼬마선생)“ 으로 불린 나는 급우들이 늘상 질문하는 문제를 답하기 위해서도 하여간 많은 책을 가장 많이 빌린 학생도 나라고 도서실 관리자인 인자하고 예쁘게 생긴 여선생은 나를 귀여워 해주셨다. 방학후면 귀가해서도 생산대(마을) 집회소에 있는 신문, 잡지를 보러가곤 했다. 그리고 급우들에게 말하여 각기 제집에 있는 책을 한권씩 갖고 오라고 한 아이디어도 나 스스로 고안하기도 했다. 반 급장이었던 ”권리“와 ”명성“을 나는 활용했던 것이다. 그때 만난 것이 “노신”이었다. 노신의 소설 와 이었다. 조선어판 이었는데 판본은 북한의 책이라 기억된다. 미치광이, 사람 잡아먹는다, 아이들을 구하라, 등등 난잡하고 괴상한 말들로 점철된 노신의 소설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어려운 책도 있었구나 하면서 그것을 읽어내려 갔으나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노신 소설에 관해 질문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야, 네가 벌써 노신을 읽느냐” 고 하시면서 매우 경이 로와 하신다. 그 뒤 노신을 조금 이해하게 된 때는 중학을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교과서에 노신작품을 배우면서 부터였다. 소학, 중학 시기는 난독(亂讀)시기였다. 무어나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나는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계열의 책도 좋아했다. 그때 상해인민출판사에서 나오던 아동자연과학시리즈 “10만 가지는 무엇 때문에?” 를 거의 다 읽었다. 그리고 미니 전동모터를 구입해서 나무판자로 배를 만들어 물에 띄우는 실험도 해보고 개구리를 잡아다 생체해부도 해 보았다. 육상 단거리용 스파이크가 없어서 비닐 신바닥에 못을 박아서 실험해보기도 했는데 어른들은 어이없는 놈이라고 웃었다. 문화대혁명이 한참이던 1970년대 소학교를 다닌 나는 세계 명작은 거의 접촉하지 못했다. 그때 노신 외에 모든 중국작가나 세계작가는 금지 된 시기였기에 명작은 다 “분서갱유” 의식으로 불살라버리고 형적을 감추었다.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의 개국(開國)책을 실시한 것은 1978년 이후 등소평의 노선이 탄생된 후 부터였다. 그때 중학3학년인 나는 고문 텍스트로 유명한 (고문관지)를 사려고 시내 신화서점에 가서 아침부터 줄을 서서 5시간을 기다려서 겨우 한권 샀다. 처음 세계 문학명작을 접하게 된 것도 80년대 이후부터였다. 거의 중국어판으로 읽었다. 등을 읽은 것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대학수험준비로 여념 없는 때였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많은 책을 탐독하면서 오히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수험공부보다 월등히 즐거웠다. 담임선생님께서 “지금 어느 때인데 이런 책을 읽느냐? 시험공부에나 열심히 해?” 하고 몇 번이나 불러내어 귀띔해 주실 정도였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는 성미인 나인지라, 나는 아랑곳 않고 낮에는 수험공부, 밤에는 명작탐독을 병행시켰다. 그 무렵 나는 장차 문학가가 되느냐 화가가 되느냐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책이 좋아서 책을 쓰는 글쓰기의 학문세계, 또는 문학세계로 용왕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름이 문학인만큼 어떤 숙명적인 인연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문학이란 이름은 그대로 읽으면 문학이요, 거꾸로 읽으면 학문이 되니, 나는 장래 이양자의 경계를 오가는 지식인이 되고 싶은 것이 꿈이었다. 13살에 개인 작품집을 간행한 나는 문학 소년이었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지원서를 쓸 때도 중국문학부냐 조선 문학부냐, 아미면 일본문학부냐는 삼자택일을 두고 고민 했다. 결국 나는 “하나의 외국어를 아는 것은 하나의 이질 된 문화를 아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일본 언어문학과를 지원하여 일본어교육레벨이 전국 일류인 동북사대에 입학했다. 물론 그때 총점수로 북경의 일류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점수였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의 독서생활이 수준이나 질적 의 의미에서 지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 동북사대 일어일문과 입학 후 부터였다. 왜냐면 이 일본어라는 문화무기가 나에게 방대한 지적(知的) 생활, 생산의 수단이었고 또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법으로서의 일본어”를 활용해갔다. 대학4년을 나는 교실 -도서관- 교실 3각형의 순환을 이루며 심한갈증을 해소하는 사람 물마시듯 독서를 했다. 학부 도서실에는 일본 직수입의 일본어 도서들이 풍부히 장서돼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일본의 여러 명 펜팔을 통해 우송 되 오는 일본어 서적을 탐독했다. 그 시기 중국에서 미처 번역 출간하지 못한 서양의 명작, 사상, 철학서를 일본 서를 통해 나는 지독하게 많이 읽었다. 니체, 미셀푸코, EㆍHㆍ카, 스펜서, 그리고 포크나 로렌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릴켈.... 일본의 나츠메소세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후쿠자와 유치키, 무라카미 하루키...등등 이러한 서적은 마치 내 빈 정신적 공간에 영양가 풍부한 식량같이 많은 것을 채워주었다. 대학 4년을 독서 4년의 자신에 충실한 시간이었다. 2학년 학기부터 고향의 1년 후배인 여학생과 연애를 하면서도 나는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또 읽은 책에는 일본의 펜팔이 보내준 어어령의 라 한국어로 된 에세이 등 여러 권과 이문열, 김소운 등의 작품이 있었다. 이상의 같은 시와 같은 소설도 접하면서 나는 이어령과 이상의 팬이 되기도 했다. 고백하면 나는 이어령 선생님께 이미 그때 사숙(私淑) 한 것이었다. 작가, 글쓰기와 연구자로 되는 꿈을 키우면서 나는 왠지 특히 모터니즘 계열의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TㆍSㆍ 엘리엇, WㆍB예이츠의 시와 함께 김소월의 시를 외우기도 했다. 그리고 조이스의 그리고 카프카, 토머스만,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책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헤세 등 서양 작가와 지식인의 책들은 나의 넋을 진감하는 문화파워가 되어 폭발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중국문학부의 선배가 “대학4년에는 조급하게 글을 써서 발표 하는게 급히 하기 보다는 부지런히 읽고 축적을 해야 한다”고 한 말에 나는 동감했다. 물론 나는 4년 동안 글쓰기를 많이 했으나, 책 400권을 목표로 (그것도 중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서양의 작품, 사상서와 일본인 작가, 지식인의 서적들) 많이 읽었다. 중문학부와 외국어학부에 급급히 시나 소설을 쓰던 많은 친구들은 결국 졸업 후 한 둘씩 도중하차해 버리고 몇 명 남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던 친구들은 역시 학자나 작가로 오늘까지 명성을 날리고 있다. 내가 중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포기하고 일본 유학을 택한 것은 대학시절 일본의 책을 통해 일본 같은 자유의 학문의 나라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싶은 것이 큰 이유의 하나이다. 말 그대로 일본 유학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독서와 글쓰기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신적, 지적 창조의 일에 종사하는 지식인, 작가는 책읽기가 정신적 식량이며, 지적 자극과 충전을 하는 유일무이의 방법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독서立人” 이란 숙어를 고안했다. 책이 인간을 육성한다는 논리이다. 독서는 늘 홀로서기 (獨立)의 사고력을 육성하는 기반이 된다. 정신 적 자극, 긴장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의 진폭을 넓혀준다. 셀티에ㆍ가 바록이 쓴 “독서의 역사”에 따르면 일본은 에도시대, 명치시대를 걸쳐 세계일류의 독서대국이 되었으며 식자 율이 세계최고에 독서량도 질도 일류에 달했다. 지금도 일본의 연간 4만 종류에 달하는 15억 책 서적이 도도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고도로 세련되고 정비된 출판사만 해도 무려 5000여사나 된다. 그리고 독서판매에도 적합한 1억 3천만의 인구, 독서 인구는 중국보다 많으며 신문판매량도 요미우리신문 같은 경우 무려 천만부이상의 세계 최대 신문이 있다. 일본의 근대, 포스트 근대의 문화역을 지탱한 곳은 이 엄청난 국민의 독서력이다. 이런 독서왕국, 출판대국에는 찾으려고만 하면 다 찾을 수 있는 서적, 정보 학문적 자료문헌이 정비되어 있다. 나는 마치 만경창파를 질주하는 고래마냥 서책의 해양에서 많은 서책을 탐독하면서 지식인에 필요한, 또는 나 자신에 필요한 지적 영양을 섭취했다. 독서의 여러 종류 영양가는 독서의 폭을 넓히고 여러 장르, 영역을 섭렵하는 것에서 온다. 독서의 폭이 좁으면 하나의 지식에 절대시 하는 치명적 함정을 파게 된다. 하나의 기성지식을 절대시하는 것은 결국 사고정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마치 하나의 종교에 빠져 절대시 하면 다른 종교와 신앙을 무시하고 타자를 부정하는 사고정지, 절대가치관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조선족의 지식인 중에 그런 패턴의 사람이 흔히 있는바, 어느 하나의 가치관을 절대시 해 버린 나머지 사고정지에 빠져 타자를 무조건 부정, 반대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내가 그런 지식을 상대하지 않는 이유는 지식의 폭이나 사고 면에서 정면대결의 가치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공 외에도 특히 사상, 역사분야의 책을 많이 읽는다. 일본의 나이토고난(內藤湖南)의 중국사연구와, 마루야마 마시오(九山 男) 의 의 문명론적인 일본인에 대한 고찰, 인류학자 梅棹忠夫(우메사와 타다오) 의 등 일본인이 제기한 “세계사 모델”의 시야에 대해 큰 공감을 느꼈다 .에서 개발을 얻은 나는 최근 이란 일본어 저작을 집필했다. 그리고 사상영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리오타르의 하버마스의 와 푸코의 일본어명 을 위시로 한 일련의 대작들, 그리고 신자유주의 하이예크 등 근 20년래의 사상서에서 많은 자기 형성의 정신식량을 획득했다. 식민지주의 영역에서는 에드워드ㆍ사이드의 명작등 저작을 탐독하면서 제3자로서 타자와 자신의 경계를 살아가는 월경의 지식인의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근 10여년동안 역사, 특히 한중일 근대사 사료, 문헌을 읽고, 발굴, 수집하면서 근대사의 “왜곡”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왜곡”에 대한 비판, 성찰작업이 나의 글쓰기와 연구의 굵은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왜냐면 역사는 문명사로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놓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사를 알고 진실을 밝히는 성찰작업은 타자인식과 함께 중요한 자기 인식의 불가결의 작업이다. 책은 자기인간형성의 정신적 에너지이다. 독서를 배제한 정신적 에너지는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순수한 농도 100%의 “독서인” 이다. 그리고 나는 간단없이 변하는 자신을 꿈꾼다. 독서야말로 내 자신이 인간형성이 완성되는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요즘은 컴퓨터시대, 휴대폰시대로 일컬어진다. 인간은 이미 컴퓨터와 휴대폰의 노예로 디지털의 지배하에 떨어져 있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책의 시대의 독서인이다. 책의 노예가 되고 싶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사네” 하고 읊은 시인과 같이, “나는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 를 읊는다. 책을 대체 할 수 있는 至福의 희열을 나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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