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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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19 ]

119    [시]바위(유치환) 댓글:  조회:2427  추천:0  2011-08-19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菲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찔하여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 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118    [시]기빨旗(유치환) 댓글:  조회:2136  추천:0  2011-08-19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야 흔드는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표標ㅅ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117    [시]너에게(유치환) 댓글:  조회:2287  추천:0  2011-08-19
유치환 물 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 가고 밀려 오는 거리에서 너의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孤獨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運命이란 피避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避할 수 있는 것을 피避하지 않음이 운명運命이니라 
116    [시]마라의 결혼식(김경후) 댓글:  조회:2292  추천:0  2011-08-09
김경후 초대합니다 설사똥을 흘리는 비둘기 두 마리 긴 리본을 물어와 저희 둘을 묶고 통통한 심장을 파낼 겁니다 신선하다면 그 위에 장미가 가득 피겠지요 부디 와주십시오 신부단장 희 천으로 처녀의 발을 덮는다 꽃으로 손을 감싼다 내장은 이미 소다수에 담아 장독대에 두었으니 화장을 위해 눈만 감으면 되지 주례가 신랑에게 정녕 네 갈비뼈냐 뼈 하나가 남을 때까지 자르고 썩인 다음 네 몸에 넣어보면 알겠지 그런데 아니면 어떡할래 갈비탕이라도 끓여 먹도록 해라 행진 흰 구더기들이 미라의 다리로 몰려들고 있다 박수소리 같은 사람들이 한 줌 흙 던지는 소리
115    [시]그날 말이 나오지 않는다(김경후) 댓글:  조회:2160  추천:0  2011-08-09
김경후[한국] 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리고 내 말은 너의 입으로 간다 이빨에 말 몇 점 찢겨 걸린 채 입은 급하게 닫힌다 습하고 어두운 속을 지나 말들, 목구멍에 기대 무성영화를 보고 있다 가끔 네 입이 열리면 나의 말 혹은 그 부스러기 스키린에 비치기도 하지만 식도에서 끈끈한 양상추를 건져 너덜대는 모습을 가릴 수 있다 미끄러져 어딘지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위장까지 내려가면 누구나 그렇게 되니까 머리 없이 끊, 어, 진, 단음절 말의 살점들 위로 다시 영사기가 돌아간다 무언가 보이겠지 소리 없이 네 말은 이빨 밖에 있고 내 말은 없다 하지만 네 속에 이미 내 말의 뼈 녹아 있다
114    [시]죽은 아기의 집(김경후) 댓글:  조회:2542  추천:1  2011-08-09
김경후 아이는 눈을 뜨기도 전에 죽었다 지금 그의 투명하고 찢어질 듯한 살가죽은 벽에 걸려 있다 창문을 열어줄까 밖은 소나기구름의 어두움 희오리바람 소리 아기 살갗이 파르르 떨린다 펄럭이며 울음소리를 낸다 덩달아 난 딸국질을 시작한다 순간, 부억에서 들려오는 굉음 달아오른 냄비 속 내 젖꼭지, 폭발했다 누가 끓는 물에 소독하려 했을까 아이의 살가죽이 자꾸 내 얼굴을 덮는다 울음은 점점 커져 웃음소리가 되고 비바람은 거세진다 창문을 닫아야 해 하지만 밤새도록 천장에선 누렇고 끈적한 젖방울이 떨어지고 아기의 살가죽은 내 목을 꼬옥 감아조른다
113    [시]침대(김경후) 댓글:  조회:2305  추천:0  2011-08-09
김경후 여자는 밤새도록 침대에 포도주를 붓는다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버터를 바른다 어느 날 그녀의 밤과 그녀의 낮 사이로 비가 새기 시작한다 점점  불어나는 빗물 그곳에 포도주 병을 따다 다친 여자의 손가락과 잃어버린 구두 한 짝이 떠다니고 있다 회색 쥐가 침흘리며 손가락을 뒤쫓고 쥐를 따라가던 늙은 개는 구두 위에 오줌을 싼다 물길이 거세져 밤과 낮을 뚫는다 까마귀의 비명, 물살에 쓰러지는 포도주 병과 쥐털이 묻은 버터조각 여자는 더 이상 시트를 갈지 않는다 큰물이 몰려오고 있다 침대, 뒤집혀 여자와 함께 가라앉는다
112    [시]흡(吸)(김경후) 댓글:  조회:2364  추천:0  2011-08-09
김경후 너는 출렁거리는 내 몸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내 목덜미에 빨대를 꽂는다 입을 대려다 멈칫, 다시 빨대를 뽑아 날 주전자에 붓고는 끓인다 기포가 생기면서 부어터지는 내장 김으로 날아가버리는 살덩이 식탁에 팽개쳐진 내 껍질이 찌그러들고 있다 식어가는 나를 마시자마자 너는 바닥에 쓰러져 뒹군다 배를 쥐어뜯으며 덩어리 피를 토하더니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아직 네 내장들을 녹이며 출렁이고 있다
111    [시]칼(김경후) 댓글:  조회:2188  추천:1  2011-08-09
김경후 여자는 하루 종일 아궁이에 숨어 도마에 내리꽂힌 식칼을 쳐다본다 가끔은 칼날을 갈다가 도마를 베고 잠들기도 하지만 발소리가 들리면 다시 검댕이 속에 몸을 파묻는다 불 피워본 적 없는 아궁이에 매일 장작을 가져오고 굴뚝청소를 하는 마을사람들 옆집 할멈은 여자를 위해 하얀 옷을 뜨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도 칼을 치우지 않는다 모두 잠든 한밤중 여자는 밖으로 나와 처녀 별자리를 향해 힘껏 칼을 던진다 별자리의 배 부분에 칼이 꽂히다 온 마을에 쏟아지는 멍울멍울한 핏덩어리 피를 뒤집어 쓴 채 여자는 저수지로 향한다 암적색이 번지고 있는 살얼음들 새벽엔 다 얼겠구나 물무늬 하나 생기지 않게 가만히 그녀가 몸을 담근다
110    [시]가재미.3(문태준) 댓글:  조회:2612  추천:21  2009-12-10
가재미.3 ㅡ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문태준[한국]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용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용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채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빈 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댕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줄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쓸어볼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 집이 되었다
109    [시]가재미.2(문태준) 댓글:  조회:2584  추천:22  2009-12-10
가재미.2 문태준[한국]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두꺼운 땅 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염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같다 털같이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108    [시]가재미.1(문태준) 댓글:  조회:2129  추천:16  2009-12-10
가재미.1 문태준[한국]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107    [시]소나기(김안) 댓글:  조회:2525  추천:43  2009-09-23
소나기 김안[한국] 불가능한 체위에 대하여 너는 이야기 한다. 그때마다 너의 얼굴은 희디흰 빛을 발한다. 몰블랑을 덮은 눈처럼 너는 늘 경쾌하게 그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게도 네게도. 하지만 너의 눈은 설명할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희롱당한 여자가 울고 있는 지하철 안에서 너는 태연하게 그것을 요구한다. 나는 사춘기이고 너는 막대사탕을 빨고 있다. 그 반대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때이다. 가끔 창을 넘어온 삼촌들이 면도 안한 턱을 너의 볼에 부빈다. 너는 얕은 고함을 지르고 나는 구석진 너의 서랍속에서 덜컹거리는 창의 진동을 느낀다. ‘바보! 바보’ 귀에 젖은 네 고함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106    [시]비닐봉지가 난다(이원) 댓글:  조회:2354  추천:19  2009-09-23
비닐봉지가 난다 이원[한국]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허공을 난다 울음 속에서 살을 쏙쏙 빼먹으며 난다 활짝 열어놓은 안이 불룩하다 보여주지 않는 안이 팽팽하다 보이는 밖이 남김없이 검다 위태로워 반짝인다 공기들이 비닐봉지의 천수관음으로 붙어간다 비닐봉지가 잉잉거린다 바람의 안쪽이 맥박처럼 터진다 천구관음이 된 비닐봉지에 시간의 모서리가 닳는다 사라지는 자리가 쌉싸름하다 그렁그렁하다 시간이 둥글어진다 천 개의 손이 눈이다 둥글어진다 둥근 것은 뜨겁다 비닐봉지가 허공을 오므린다 허공이 주렁주렁하다 나는 것들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
105    [시]거짓말(위선환) 댓글:  조회:2587  추천:20  2009-09-23
거짓말 위선환[한국] 돌맹이는 죽어있다. 그렇다. 죽어서도 돌맹이는 구른다. 닳으며 동그래지며 아직 죽어 있다. 그런가. 머리 위 어중간에 나비가 걸려 있다. 그렇다. 굽은 갈고리에 찔렸거나 은빛 거무줄에 감겼다. 글런가. 새가 반짝이며 구름 사이로 점멸했다. 그렇다. 높이 나는 새는 불꽃이다. 하늘에다 그을린 자국을 남겼다. 그런가. 나뭇잎이 떨어져서 어깨에 얹혔다. 그렇다. 나뭇잎에 눌린 만큼 어깨가 내려앉았다. 그런가. 벌써 익은 찔레 열매가 아직 달려 있다. 그런가. 바짝 마른 뒤에야 떨어진다.그런가. 잘 익은 씨앗 몇 개 감추고 있다. 그런가.
104    [시]조개를 굽다(심언주) 댓글:  조회:3231  추천:24  2009-09-23
조개를 굽다 심언주[한국] 화덕 위 맨발로 뛰어나온 그녀들, 단단한 입술 속에 부드러운 혀를 감춘 그녀들, 레코드판 같은 껍데기마다 파도 소리를 감아놓고 귀에 대면 금방 바다를 보여주던 그녀들의 화려한 캠프파이어. 부리가 뜨거워져 붉은부리갈매기가 날아오른다. 파랗게 질린 간월도 한쪽이 주-우-욱 끌려 올라간다.
103    [시]문명의 식욕(배한봉) 댓글:  조회:2330  추천:13  2009-09-16
문명의 식욕 배한봉[한국] 옷의 식욕은 왕성하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세다 나는 옷의 배를 불리는 양식이다 양말을 신자, 발이 사라진다, 양말이, 발을 먹었다 왼쪽 다리를 먹은 바지가 오른쪽 다리를 밀어넣으니 오른쪽 다리마저 먹어버린다 왼팔을 넣으면 왼팔을, 오른팔을 넣으면 오른팔을 먹는 재킷 씹지도 않고 삼켜 버리는 재킷 나는 이제 어깨도 가슴도 없다 나는 이제 한 벌의 옷이다! 거리에 사람을 갖춰 입은 옷들이 둥둥 걸어 다닌다 숫제 개나 고양이를 갖춰 입은 옷도 있다 아침부터 왕성하게 나를 먹어 치운 옷은 저녁이면 나를 생산한다 살아 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된다
102    [시]사막에서는 그림자도 장엄하다(이원) 댓글:  조회:2482  추천:20  2009-09-16
사막에서는 그림자도 장엄하다 이원 이른 아침 교복을 입은 남자 아이가 뛴다 바로 뒤에 엄마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뛴다 텅 빈 동쪽에서 붉은색 버스 한대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다 아직도 양수 안에 담겨 있는지 아이는 몸이 출렁거린다 십수 년째 커지는 아이를 아직도 자궁 밖으로 밀어내지 못했는지 여자의 그림자가 계속 터질 듯하다 그러나 때로 어두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니 때로 아름다운 것은 어두운 것이다 그림자는 몸을 밀며 계속 어둡다 깊다 무슨 상징처럼 부풀어오른 검은 비닐봉지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림자와 함께 간다  
101    [시]아득한 성자(조오현) 댓글:  조회:2016  추천:22  2009-09-16
아득한 성자 조오현[한국]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100    [시]모네의 저녁 산책(조연호) 댓글:  조회:2283  추천:37  2009-09-16
모네의 저녁 산책 조연호[한국] 산책이 시작되는 길 위에서 모든 아침은 세상 밖의 것이 된다. 응달 위에 내린 눈이 따뜻하게 익어갈 때 바람은 魂이 모인 쪽으로 날아가곤 했다. 나는 산기슭에 앉아 날이 저물도록 어둠의 입문서를 읽었다. 모든 산길의 나무는 浮力을 가진다. 나는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을 불러 여러 번 캐물었다. 아직도 불지 않겠는가, 배후는 누구냐. 날개 없는 나무가 새의 날개 속으로 날아간다. 집으로 가서 빨래들과 함께 잠들고 싶었다. 이방인들이 편히 쉬는 7일째의 날에 나는 옥수수알처럼 노릇노릇 굳어가는 저녁길을 걸었다. 낡은 책 속에서 읽은 밤의 이목구비가 내 앞에서 뚜렷이 깎이고 쉰소리로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공중으로 떠오른 흙과 돌이 나무의 부레 속에서 함께 맴돌았다. 간선도로 끝에서 세상의 본을 뜨는 무딘 쇠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결심이 수난史를 쓰고 낙엽이 땅보다 더 밑으로 걸어갔다. 오후는 공원과 도살장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을 만들고, 밤은 그 위에 목탄가루를 뿌렸다. 나는 모래흙 위에 하늘과, 땅과, 집과, 집과 집이 모여 만드는 天地宇宙에 관한 쉬운 이국어의 뜻문자를 썼다. 모든 명료함은 아팠다. 나는 아프게 말했고 누구의 말도 읽지 못했다. 붉은, 푸른, 흰 바람이 먼저 순례하고 간 저녁 산책길은 아이들만 남아서 딱지와 고무줄을 흥정하는 흐린 풍경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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