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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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시]해바라기 시간(김경후) 댓글:  조회:1453  추천:14  2009-09-16
해바라기 시간 김경후[한국]                                      해바라기 씨앗 위로 시멘트 반죽이 떨어진다 계절 내내 계속되는 오후 두 시 세 시를 향해 혼자 울며 뛰어가던 길 가방 속 탬버린은 흔들려도 조용했다 공터의 땅을 나 혼자 다 따먹어도 나는 공터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무도 오지 않아도 나랑 놀아주세요 울다 지친 오후 두 시에게 오후 두 시를 잊어버리기 위한 놀이와 단어들이 바닥난다 바닥도 고꾸라지며 더 이상 바닥이 아니다 굳지 않는 시멘트에 고이는 물 나는 내 발을 걸어 넘어진다 목 잘린 해바라기 줄기 위로 여보세요, 툭, 두 시가 된다
98    [시]서정적인 삶(김안) 댓글:  조회:1347  추천:16  2009-09-16
서정적인 삶 김 안[한국] 당신은 나를 향해 몸을 벌려요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새 내 얼굴은 녹색이 되어요 당신이 몸을 벌리면 파르르 서리 낀 창이 흔들려요 방 전체가 하얀 서리들로 가득 차요 밤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벌어진 몸에선 노래가 흘러나와요 나는 이 노래를 알고 있지만 아무리 불러도 첫 소절로만 돌아갈 뿐이에요 나는 이 노래의 끄트머리에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노래를 움키고 당신의 푸른 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요 온갖 은유를 만져요 제발 나를 안아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제발 나를 안아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게요 당신은 사려 깊은 장님처럼 내 손을 빼내어 당신의 입 안으로 넣어요 아직 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는데 당신의 입 안에서 내 손이 사라져요
97    [시]어떤 出土(나희덕) 댓글:  조회:1364  추천:19  2009-07-06
어떤 出土 나희덕[한국]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늘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려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 보면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들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추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었다 불꽃들도 흙 속에 잦아든지 오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96    [시]가시(김행숙) 댓글:  조회:1234  추천:22  2009-07-06
가시 김행숙[한국] 그는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린다. 찔끔, 눈물이 난다. 처음 가시를 발견하고 그는 열다섯 살 소년처럼 몸을 뚫고 나오는 털에 대해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으로 소년은 털이 집중적으로 자라는 부위를 만지곤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열다섯 살 소년이 아니고 가시는 부드럽게 쓸리지 않는다. 당신은 나를 찔러요. 여자가 했던 말은 감각적인 것이었다. 빼야 할 건 가시겠지만 그는 여자를 빼고 눕는다. 그는 다시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리며 눈물을 흘린다. 처음 가시를 발견하고 그는 가시에 찔린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뽑으려고 하니까 그가 딸려왔다. 방바닥과 그의 엉덩이 사이에 3센티쯤 간격이 생겼다. 그는 어느새 가시의 뿌리가 되어 있었다. 아, 아, 아, 그는 소리를 지르며 손을 뗐다. 그는 다시 몸을 뚫고 나오는 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던 몇 분 동안 그녀에게서 빠져나간 머리털을 그는 다 셀수 없었다. 여자는 머리털같이 흩어져서 그를 빠져나갔다. 여자는 그를 빼고 눕고 그는 여자를 빼고 눕는다. 누가 날 좀 뽑아줘, 누워서  소리치기도 하지만 그건 분명 헛소리다. 그는 다시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리며 눈물을 흘린다.  
95    [시]집274(김언희) 댓글:  조회:1384  추천:24  2009-07-06
집 274 김언희[한국] 1 얘야 집이 어디니 네 집으로 가거라 아버지가 계시는 곳으로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 네 집이란다 얘야 이제 그만 집으로 가거라 아버지가 기다리시지 않겠니 식탁 위에서 아버지의 의수가 변기 속에서 아버지의 개눈이 기다리지 않겠니 기다릴 거야 얘야 침대 속에서 아버지의 의족이 물잔 속에서 아버지의 의치가 이빨을 딱딱딱 마주치며 기다릴 거야 2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 집으로 너는 돌아간다 한 번도 집이었던 적이 없는 집으로 그 집에서 너는 한번도 밥이었던 적이 없는 밥을 먹는다 경멸과 면박의 망각과 질식의 더운 밥을 먹는다 외눈박이 집 추잡한 의처의 집에서 너는 한 번도 잠이었던 적이 없는 칼잠을 잔다 한 번도  꿈이었던 적이 없는 꿈 매일밤 똑같은 꿈을 꾼다 하루밤도 빠지없이 한 장면도 빠짐없이 배려의 손길이 죽음의 손길인 그 집에서  
94    [시]비내리는 날(김승희) 댓글:  조회:1329  추천:12  2009-07-06
비내리는 날 김승희[한국] 오늘은 내가 조용히 견디려고 하는데 비가 내리고 있어. 주룩주룩 유리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좀 봐. 빗물마다 손이 있어. 손마다 귀신이 있어. 유리창을 마구 문지르며 손은 유리를 부여잡으려고 해. 나팔꽃, 칡꽃, 넝쿨 장미, 위로 위로 올라 가려는 세상의 모든 손들이 떠올라. 그런데 유리창은 그 손을 미끄러뜨리려고 해. 그리고 비가 오고 있어.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빗물의 손들은 하염없이 유리창에 손을 비비며 무언가를 호소해. 그 손들이 모두 송이 송이 혀로 보여. 오늘은 내가 조용히 견디려고 하는데 빗줄기마다 수천수만 송이 귀신의 혀가 피어나고 있어. 빗줄기마다 흐린 혀의 꽃다발이야. 시냇물 같은 혀의 꽃송이들이 유리창에 죽죽 흘러. 오늘은 내가 견디려고 하는데 유리창 속 얼굴 속으로 빗물이 번개를 그으며 급류처럼 흘러가. 번개의 급류에 맞아 내 얼굴이 쪼개진 석류가 되었어. 쪼개진 석류 이빨 사이로 소용돌이치듯 뜨거운 피가 흘러. 그러나 비는 또 오고 유리창엔 수천수만의 꽃송이가 지고 구름 같은 귀면이 흐르고 유리창은 야간열차처럼 검은 거울이 되고 거울 속에는 얼굴이 있고 그녀의 얼굴은 비바람에 부딪쳐 파열하는 석류가 돼. 핏물 흐르는 파열된 석류가 점점 부어오르고 있어. 점 점 점 점 석류는 커져서 드디어 이 방보다도 커진 석류, 지평선보다 더 부어오른 석류의 쪼개진 두개골이 하염없이 비바람을 맞고 있는 거야. 흐린 나무들은 미친 듯이 머리를 풀고 회오리치고 푸른 곰팡이 먹은 얼굴의 오필리아가 몇 번이고 다시 또 다시 부풀어오른 늪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런 날.   
93    [시]野菜史(김경미) 댓글:  조회:1358  추천:21  2009-07-06
野菜史 김경미[한국]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지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92    [시]우주로 날아가는 방(김경주) 댓글:  조회:1375  추천:11  2009-04-14
방을 밀며 나는 우주로 간다 산동네 지하 방들은 하나 둘 풍선처럼 떠오르기 시작하고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인간의 수많은 방을 싣고 지구는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음악 같은 일이다 불씨처럼 제 정신을 떠도는 일이지만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내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 가슴에 몇 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 해주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         지구에서 떠올라온 그네하나가 흘러 다닌다 인간의 잠들이 우주를 떠다니는 동안 방에서 날아와 나는 그네를 탄다 내 눈 속의 아리아가 G선상을 떠다닐 때까지, 열을 가진 자만이 떠오를 수 있는 법 한 방울 한 방울 잠을 털며  밤이면 방을 밀고 나는 우주로 간다  
91    [시]하늘에게(이성복) 댓글:  조회:1324  추천:8  2009-04-14
푸른 하늘이여, 철없을 때 내가 판 연못이여, 아직도 그때 물결은 흰 물거품을 일으키지만, 아직 철이 안 든 나는 검은 비닐봉지와 싸우는 반쯤 눈이 가린 삽살개 같구나 예전에 저 하늘을 이고 있던 바위들은 지극한 미륵불의 기다림에 분신 소신의 공양을 우습게 알았지만 지금은 쓰다버린 몽당 빗자루만도 못하구나 예전 저 하늘에 똥을 누고 큰 바윗돌로 눌러 놓았던 나도 부러진 이쑤시개만 못하구나 하지만 이대로 늙을 수는 없어 이럴 땐 길 가는 나무를 껴안든, 길 가는 길을 껴안든 고압의 송전탑처럼 발기해 천지의 미물을 감전시키고 싶지만 쪼그라진 귀두龜頭에 처바를 와셀린을 구할 수 없으니 아, 나는 또 길바닥에 쏟아진 어묵처럼 낙담하는구나 하지만 하늘이여, 아직 나는 네가 영 귀찮지는 않아 네 똥꼬 속에 머리 집어넣고 횟배 앓는 네 내장에 간지럼을 먹일 수도 있으니, 지금은 눈구멍 귓구멍 다 열어 놓고 뜨거운 입김 불어 넣어주길 기다리는 하늘이여, 철없을 때 내가 잘못 판 푸른 연못이여  
90    [시]나는 사는것을 잊었다(작자 미상) 댓글:  조회:1499  추천:11  2009-03-18
처음에 나는 고등학교를 끝내고 대학을 시작하고 싶어 죽었다 그리고 나서 대학을 끝내고 일하기 시작하고 싶어 죽었다 그리고 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어 죽었다 그리고 나서 내 아이가 충분히 나이들어서 나는 일에서 돌아오고 싶어 죽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죽어가고 있다 ...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나는 사는 것을 잊었다  
89    [시]내압(이병승) 댓글:  조회:1437  추천:12  2009-03-04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옥상 바닥 시원한 물을 뿌려주려고 잠가 둔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거침없이 몸을 흔드는 고무호스 긴 잠에서 깨어난 뱀처럼 시뻘건 각혈과 마른기침이 노래로 변하고 늘어졌던 마음의 통로에 생수의 강이 콸콸 흐른다 사방에 뿌려대는 열정의 땀방울들 더 이상 짓눌린 눈물이 아니다 무지개를 띄워라 거침없이 신나는 춤사위 꼼짝 말라고 두 발로 밟아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딴딴해지는 오기의 몸짓 그 정도 힘으론 날 못 누르지 흐물흐물 늘어진 생은 끝났다는 저 팽창의 힘 자기를 채워 흘러넘치는 나눔의 통로 채워라, 터질 듯이 채워라 내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외려 솟구쳐 신명나게 춤추는 고무호스 건너 집 옥상 화단, 벽에 매달린 넝쿨까지 살리고 스스로 뜨거워 목마른 해도 적신다 200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88    [시]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손택수) 댓글:  조회:1481  추천:16  2009-03-04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87    [시]다리 저는 사람(김기택) 댓글:  조회:1514  추천:12  2009-03-04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86    [시]사막(정호승) 댓글:  조회:1363  추천:10  2009-03-04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빛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85    [시]돌아가는 길(문정희) 댓글:  조회:1294  추천:11  2009-03-04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84    [시]물의 결과부좌(이문재) 댓글:  조회:1424  추천:6  2009-03-04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 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 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있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 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83    [시]과녁(이동호) 댓글:  조회:1405  추천:6  2009-03-04
나뭇잎 하나 수면에 날아와 박힌 자리에 둥그런 과녁이 생겨난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마다 수면은 기꺼이 물의 중심을 내어준다 물잠자리가 날아와 여린 꽁지로 살짝 건드려도 수면은 기꺼이 목표물이 되어준다 먹구름이 몰려들고 후두둑후두둑 가랑비가 저수지 위로 떨어진다 아무리 많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라도 저수지는 단 한 방울도 과녁의 중심 밖으로 빠뜨리지 않는다. 저 물의 포용과 관용을 나무들은 오래 전부터 익혀왔던 것일까 잘린 나무 등걸 위에 앉아본 사람은 비로소 알게 된다 나무속에도 과녁이 있어 그 깊은 심연 속으로 무거운 몸이 영영 가라앉을 것 같은, 나무는 과녁 하나를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한자리에 죽은 듯 서서 줄곧 저수지처럼 수위를 올려왔던 것이다. 화살처럼 뾰족한 부리의 새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나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은, 명중시켜야 할 제 과녁이 나무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년 빚쟁이를 피해 우리 동네 정씨 아저씨가 화살촉이 되어 저수지의 과녁 속으로 숨어들었다 올해 초 부모의 심한 반대로 이웃마을 총각과 야반도주 했다던 동네 처녀가 축 늘어진 유턴표시 화살표처럼 낚시바늘에 걸려 올라왔다 얼마나 많은 실패들이 절망을 표적으로 날아가 박혔던가 눈물이 된 것들을 위해 가슴은 또 기꺼이 슬픔의 중심을 내어준다 죽음은 늘 백발백중이다.   
82    [시]재로 지어진 옷(나희덕) 댓글:  조회:1456  추천:13  2009-03-04
흰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의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81    [시]물의 집(박제천) 댓글:  조회:1303  추천:12  2009-03-04
빈 방에서 새소리가 도란도란 흘러나온다 들여다보니 백자주전자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향기 새소리는 간 데 없다 작설차를 우리는 동안 참새 입술 닮은 잎들이 정담을 나누었나 무심히 주전자 안을 들여다보니 물 속에 무슨 소리의 무늬가 설핏 보이는 듯싶다 우듬지 가득 받아든 햇빛, 뿌리가 탱탱하게 빨아올린 땅속 어둠이 서로 섞여들며 물이 하고 싶은 소리, 잎이 하고 싶은 소리를 물무늬 지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다 사람 몸속 어둠을 다 씻어야 해 맑은 기운으로 온몸을 감싸돌아야 해 그 소리 귀 기울이다보니 참 착하다. 참 맛있다 백자 주전자를 기울여 맛깔난 소리를 잔에 가득 채우는 이 황홀 나는 오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물의 말을, 새소리처럼 맑은 잎들의 말을 배부르게 먹었다  
80    [시]꽃뱀의 목에 꽃무늬를 두르는 시간(반칠환) 댓글:  조회:1678  추천:9  2009-03-04
구불구불 길 위로 길 하나 가는 걸 보았느냐. 아무리 곧은 길도 굽어가는 천형을 보았느냐. 평생을 달아나도 제 몸의 길 벗어날 수 없어 서럽게 울며 흰 길 위로 달아나는 한 발 초록길을 보았느냐. 지팡이 하나 봇짐 하나 미투리도 없이 온몸이 나그네인 발바닥을 보았느냐.가시덤불 헤치고 사금파리 넘어 가까스로 신작로 오르면, 우르르 쏟아지는 죄 없는 햇살이여 돌팔매여,머里 지나 허里 지나, 꼬里 이르도록 마디마디 고통의 눈금 새겨지는 가늘고 긴 줄자를 보았느냐. 아픔에서 아픔으로 가는 삼거리, 눈물에서 눈물로 가는 네거리를 재고 또 재는 슬픔의 측량사를 보았느냐.문득 네 앞에 서린 무서운 한 모퉁이, 꼿꼿이 목을 세운 한 타래를 보았느냐. 꽃이 될까, 독이 될까. 꿀꺽,기쁨에서 슬픔으로 가는 지름길에서,슬픔에서 기쁨으로 가는 벼랑길에 한 움큼 붉은 독 이겨 바르는 꽃뱀을 보았느냐. 이름은 꽃길이라도 온몸의 바탕은 지루한 암록인 우리네 구절양장을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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