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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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흔아홉송이 장미의 비밀 댓글:  조회:757  추천:56  2008-06-20
  아흔아홉송이 장미의 비밀 남 영 도 그날 어떤 예감이 들었던것일가? 오전내내 꽃이야기였다. 수필가 S의 수필집을 편집하다가 꽃을 가지고 심리테스트를 하는 대목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볼펜을 멈추었다. 피끗 그 테스트문제를 사무실 동료들에게 내놓으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다가 지쳤는데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아담한 집 한채가 있어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집안은 조용한데 깨끗한 책상우에 꽃병이 있다고 한다. 그 꽃병에 꽃이 몇송이 들어있을지 느낌으로 말해보라. 동료들이 한송이라거니, 두송이라거니, 아예 한송이도 없다거니, 한, 두송이가 아니라 많이 들어있다거니 하면서 너도나도 자기의 느낌을 말했다. 그러면서 정답이 뭐냐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진짜 심리전문의이기나 한것처럼 짐짓 헛기침을 해가며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그 꽃병안의 꽃송이 수자가 애인수자와 맞먹는다는 결과를 털어놓았다. 《하하하하…》 대번에 폭소가 터져나왔다. 꽃이 한송이 들어있다고 한 사람들은 물론 파스였지만 두송이 들어있다고 한 사람, 많이 들어있다고 한 사람들은 대뜸 화제의 대상, 공격의 대상이 되였다. 한바탕 웃고 떠들고나자 모두들 퇴근하면 자기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한번 테스트해봐야겠다고 은근히 벼르는 눈치였다.  그날 나는 꽃병에 꽃이 많이 들어있다고 했었다. 여자치고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라 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일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늘 꽂혀있던 여러송이의 인조화를 보아온때문이여서일가, 내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많이 들어있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던것이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남들의 공격대상이 되여 놀림을 당하면서도 한마디 변명하고프지 않은 그것이였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오전나절을 보냈는데 오후에 뜻하지 않은 일이 터졌다. 그야말로, 정말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하게 긴 생머리를 한 웬 아릿다운 아가씨가 엄청 많은 량의 붉은 생화를 한아름 가득 안고 우리 사무실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리고 환장하게도 곧장 나를 향해 걸어오다니?! 웬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아가씨가 《생일 축하드립니다!》하고 생긋 웃으며 그 생화묶음을 나에게 안겨주는것이였다. 묵직한 생화묶음을 받아안으면서 그제야 그날이 내 생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그날 새벽같이 한국으로 떠나다보니 생일같은걸 쇨 생각을 전혀 안했던것이다. 어망결에 꽃을 받아안은 나는 일순간 할말을 잊었다. 꽃은 화사하게 핀 붉은 장미였는데 여러송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수량의 꽃이였다. 후에 세여본 일이지만 그날 받은 장미는 정확히 아흔아홉송이였다. 누가 보낸건가고 묻는 말에 그 아가씨는 ××회사 전체직원들이 보내는거라고 한마디 던지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카드에 《××회사 전체직원 드림》이라고 적혀있는걸 보니 남편 회사 직원들의 소행이였다. 누가 시켰을가? 처음에는 남편이 시킨게 아닐가고 생각했었는데 회사일로 바삐 한국에 간 남편이 언제 그런걸 생각할 경황이 없었을 것 같았고 또 평소 회사일과 집일을 한데 버무리는것을 질색하는 남편의 위인됨을 봐서 마누라 생일이라고 회사직원들보고 여차여차 하라고 시킬 사람이 아니였다. 그리고 결혼하여 여태 꽃을 선물한 적이라고는 한번도 없을만큼 로맨틱분위기하고는 거리가 한참 먼 남편인줄을 나 또한 잘 알고있는 터이다. 동료들이 다가와 다투어 꽃묶음을 안아보며 연신 감탄이다. 《야―, 이건 완전 드라마다, 드라마!》 《아까 꽃송이가 많이 들어있다고 하더니 이런 일이 생기려구 그랬구나!》 모두들 한바탕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하면서 법석을 떨었다.  꽃을 안고 거리에 나서는데 숱한 사람들의 눈길이 장미꽃다발에 쏟아진다. 《그 장미 아흔아홉송이 맞죠?》하고 물어오는 청년도 있었다. 저녁,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님이 모처럼 마련하신 생일파티에서 그 아흔 아홉송이 장미는 또다시 화제가 되여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집에 돌아와 그 장미꽃을 손질하여 꽃병에 하나하나 꽂노라니 감구지회가 일렁인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생일을 숱한 사람들이 기억해주고있다는것이 이외스러웠고 황송스러웠다. 그런데 왜 100송이가 아니고 하필이면 99송이인가? 꽃에 대해 아는것이란 별로 없어 그 류행의 의미를 찾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99송이는 바로 100송이의 의미로 통한다는것이다. 99송이는 생물적의미의 꽃, 거기에 꽃을 받는 상대방을 1송이로 쳐서 100송이, 즉 완벽을 의미한다는것이다.  그러고보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나라는 위인은 꽃에 비유될 정도로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으니 물론 그 ‘나머지 한송이’의 뜻으로 나에게 꽃을 선물한것은 아니였을것이다. 두말할것없이 거기에는 성의를 나타내는 의미가 다분하리라. 그렇다면 나는 누군데 이런 분복을 받아안게 되였는가?  내가 남편회사를 위해 한 일이 뭔가? 아무리 따져보아도 내가 한 일은 없다. 있다면 어느 해 구정엔가 고향에 설쇠러 못간 남편 회사 직원들을 집에 불러다 밥 한끼 해준것이 고작일뿐이다. 그렇다면 사장님 부인이라는 이유로?  그 이유가 정말 성립된다면 나는 이제 나 한사람에게만 속하는 몸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말그대로 이제는 인생을 사는데 한걸음 한걸음 심사숙고하며 내디뎌야겠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숙연한 기분까지 들었다. 밤이 이슥하건만 잠이 오지 않는다. 남편이 회사일에 미쳐 가족에게, 마누라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바가지도 많이 긁었었다. 가끔가다 티격태격하면서 듣그러운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자신은 직장일이 바쁘다는것을 핑게로 정작 이렇다할 내조도 못하면서말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 아내가 알면 걱정을 할가봐 전혀 내색을 내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이겨내며 한걸음 한걸음 회사를 이끌어간 남편의 고심은 감감 모른채, 그 숱한 어려움을 딛고 마련한 이 가족의 오늘의 평화와 안녕은 의식못한채 왜 나는 그냥 참고 기다려야 하는가고 은근히 불평을 부리기도 했었다. 감동은 감동을 낳는가보다. 그날의 감동을 남편에게 전할 양으로 컴퓨터에 마주앉아 메일을 쓰는데 텔레파시가 통했던지 남편으로부터 생일 잘 쇴는가는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물론 낮에 있었던 꽃이야기를 했고 혹시 누구한테 시켰는가고 넌지시 묻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은 전혀 모르는 일이란다. 웬만해서는 잘 흥분하지 않는 나의 들뜬 목청에 남편도 퍼그나 감염된 눈치였다. 그럼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날 서울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남편이 아내 생일인데 출장을 나오다보니 못쇠줬다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말을 귀담아들은 함께 간 회사직원이 남편 몰래 중국에 전화를 해서 그런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였던것이다. 회사를 위해 다년간 애쓴 남편의 노고가 드디어 전체 임직원들의 성의에 받들려 그 99송이 장미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는 순간이였다. 그러고보니 그 많은 수자의 꽃은 남편의 노력의 결실을 의미하는 것 같았고 그런 남편한테 내조를 잘해달라는 의미도 곁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남편의 노고를 99송이로, 아내의 내조를 그 ‘나머지 한송이’로 보는 ‘100송이 해석법’을 만들어보았다. 그럴듯한 해석이 되는 것 같았다. 남편의 힘든 노력으로 얻어진 결실에 감사할줄 모르는 간사한 내 마음의 작간을 간파라도 하듯이, 한번 로맨틱분위기에 푹 빠져보라고 이렇게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꽃사태를 안겨주는것이리라, 그래서 자칫 교만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뻔한 나를 깨우쳐주는것이리라. 한편 그것은 로맨틱분위기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은근히 불만이였던 남편의 웅숭깊은 마음을 다시 한번 가슴으로 느낄수 있는 계기로 되여 남편의 숨은 노고가 가져다준 환장할 정도의 로맨틱분위기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새로운 눈을 달아주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싶다. 그 새로운 눈으로 99송이 장미를 바라보니 ‘나머지 한송이’는 또한 ‘늘 모자라는 나’라는 의미로도 다가왔다. 늘 모자라는 나는 언제나 노력을 경주하여 그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 완벽한 100송이로 거듭나야겠다는 편달을 해본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성장을 한다더니 마흔을 넘은 어느날 이렇게 꽃을 받고도 감동해하며 할말이 구구해하는 나라는 여자가 참 어이없고 한편 신기하고 대견하다. 스스로를 꽃같은 하찮은것(?)에는 별로 감동을 하지 않는 여자로 알고있었는데 이제보니 나도 꽃에 약한 어쩔수 없는 여자였다. ‘아흔아홉송이 장미와 그 나머지 한송이’에 담긴 새로운 의미에 걸맞는 아름다운 여자이고싶다.
3    그 남자의 블로그 댓글:  조회:690  추천:51  2008-06-20
  그 남자의 블로그 요지음 그 남자의 블로그에 접속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 접속할 때는 때로 댓글도 달며 다녀간 흔적도 남겼지만 이 남자의 블로그에는 일절 댓글이라는걸 달지 않고 묵묵히 보고만 있는중이다. 오래동안 그 남자의 속내가 무척 궁금했었는데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진셈이다. 그 남자의 불로그에 접속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는것같은 느낌이 온몸에 번지면서 쾌감같은것이 느껴지는걸 어쩔수 없었다. 블로그란 인터넷일기로 한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볼수 있는 도경이기도 하다. 요지음 인터넷상의 새로운 유행인 블로그로 하여 그야말로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세계 각지의 블로거들은 마음만 먹으면 한동네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사는 얘기를 소상히 주고받을수 있다. 여기 북경에서 저기 미국에 있는 블로거와 수시로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 사실, 몇년전까지만해도 상상이나 했으랴. 천만명의 클릭수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는 스타불로거도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의 블로그에 접속하여 살아가는 잔잔한 얘기를 보고 듣는것이 무엇보다 재미가 쏠쏠한것같다. 그 남자의 블로그는 우선 배경음악이 일품이다. 매양 순수하고 그윽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그 배경음악이 온 방안에 부드럽게 퍼질때면 나는 온몸에 전률같은것을 느끼면서 흥분속에서 그 남자의 블로그에 떠있는 문자 하나, 사진 한점 놓치지 않고 눈박아본다. 그러노라면 그 블로그주인과 늘 함께 있는듯한 착각에 빠지면서 보내는 저녁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다. 사실 그 남자의 블로그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접속하게 되였다. 맨 처음 보는 순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 블로그에서 풍기는 분위기며 글들이 너무 기대이상으로 깔끔하게 만들어져있어 무척이나 놀랐었다. 내가 여태 알고있었던 그 남자에 대한 선입견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충격적인 글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풀어놓은 들말처럼 거침없는 사색의 흐름, 기발한 상상력과 넘치는 랑만,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사유, 탄탄한 문장력…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무엇보다도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그 문장력이 나를 놀라게 했다. “와! 이러다가 주인장, 시인이 되는게 아니냐, 문장력이 정말 놀랍다, 대단하다!”는 댓글들이 올라오는걸 보아도 내 생각은 무리가 아니였다. 내가 알고있는 그 남자는 미남이라고 할 정도로 잘 생긴건 아니지만 유머감각도 꽤있고 밝고 명랑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유치한 구석이 더러 보이고 자기주견이 별로 없어보이는 그런 남자였었다. 그런가 하면 또 걱정같은것도 끼치게 만드는 그런 남자… 그런데 이제 그 남자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였다. 몇년간 그 남자의 속내를 알수 없어 무던히도 속을 썩여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에서 그 남자의 속내를 읽을수 있다는것은 이외의 수확이였고 향수였다. 주인장의 기호와 습벽으로부터 일상중의 희로애락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한 찬가와 꿈에 대한 열망 그리고 내심의 고뇌와 자칫 라태해지려는 자기에게 끊임없이 편달하며 진취적으로 살려는 그 진지한 자세가 돋보이면서 차츰 멋있는 남자로 다가왔다. 《나의 우상은 아버지》라는 말도 이외였지만 멋있는 자세로 골프를 치는 모습으로부터 여태까지 독파한 게임에 관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솔직하지만 예지가 번뜩이는 글들, 그리고 요지음 남자라면 모두가 열광하는 월드컵에 대한 단상들, 사나이의 눈으로 본 축구스타들에 대한 치열한 논평들이 내 마음을 끄당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남자에게 여자가 생긴것이였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장문의 시로 적었다는데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였다. 이럴수가? 그런데 스스로도 이상한것은 은근히 시샘이 나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림하는 그 사랑의 고백과 고뇌들이 오히려 감동을 주며 드라마속 주인공의 이야기에 빠지듯 늘 하회가 기다려지는 그것이였다.… 그 남자 불로그에서 여러달 내내 주인과 더불어 울고 웃던 어느날, 《하하… 내 블로그 함부로 보면 안되는데…》 라는 소리가 뒤통수를 쳐왔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내 뒤에 구척장신의 아들녀석이 시물시물 웃으며 서있는것이 아닌가?  바로 그 문제의 블로그 주인―대학 1학년에 다니는 아들녀석이 어느덧 방학이 되여 돌아온것이였다. 그 넉넉한 웃음은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부모의 눈빛과 같은것이여서 더구나 몸둘바를 몰랐다. 《이…이 자식, 너희 친구들 보는건 되고 엄마가 보는건 안되냐?》 나는 괜히 생억지를 쓰며 어느새 성숙된 모습으로 서있는 아들녀석을 밉지 않은 눈으로 흘겨보았다. 이제 유치한 티를 많이 벗고 바야흐로 어른으로 커가는 녀석, 이제 더는 물가에 내놓는 식의 잔 걱정같은걸 하지 않아도 될법한 녀석이였다. 그동안 여자친구 사귀는데 대해서는 일절 찬반의 티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런것들에 조금은 시름을 놓아도 될듯하였다. 문득 인생은 이래서 살맛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장성한 아들, 여태 잔소리와 푸념으로 닥달을 해왔던 아들을 그 사상 깊이에까지 알수 있는 시점에 와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겉모습만 보고 주견이 없다고, 어리다고만 보아왔던 아들이 이제 저만치 장성하여 한 인간으로 서있다. 시대가 달라 자유분방한 요지음의 젊은이들과 딴에는 녀석또래들을 많이 알고있다고는 하나 그네들 눈에는 여전히 전통적이기만한 부모세대, 코드가 잘 들어맞지 않아 대화가 툭툭 끊겨나가는 경우도 많이 경험했던만큼 이제 성인대 성인으로 인생이며 사랑이며를 두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역시 살맛나는 일이 아닐수 없다. 때로는 능청을 떠는 녀석에게 은근 슬쩍 응석을 부리기도 하면서…   순간 나름대로의 주견과 사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아들이 의젓하게 느껴지면서 무어라 이름할수 없는 행복감이 한가슴 그들먹해온다. 《인생은 어느 나이고 살아볼만한 나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가?!… 아직 여리고 풋풋한 티를 채 벗지 못했지만 내 눈에 녀석은 분명 사나이였다. 그것도 멋진 블로그를 쓰는 멋진 사나이였다.  
2    나의 고백(남영도) 댓글:  조회:780  추천:31  2007-12-19
나의 고백남영도편집부로부터 문학자서전을 쓰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많이 머뭇거렸다. 이제 나도 문학인이라는건가. 문학에서는 늘 자신을 문학동네 어구에서 바장이며 가끔 가다 갸웃하고 동네안을 들여다보는 아마추어쯤으로 간주한 나더러 이렇게 떳떳이 문학을 담론하라는것은 조금은 황공하고 어딘가 격에 맞지 않는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직도 문학소녀의 그것과 같은 문학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만은 여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림하여 나의 문학을 얘기하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펜을 들기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책밖에 모르는 책벌레였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된《문화대혁명》의 동란년대에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여섯살때에 중학교 교원인 부모가 학생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모습을 본것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또한 《문화대혁명》후기에는 늘 혁명이요, 비판이요 하면서 정신없이 돌아치는 부모들 귀가시간이 늦어 아홉살때부터 물동이를 이고 밥을 짓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 시절, 공부를 해야 할 어린 나이때부터 전민이 대채를 따라배우는 운동속에서 모내기철과 가을철은 물론 해란강공사요, 조전이요, 옥수수영양단지요 하면서 일년사시절 거의 농민들과 함께 바삐 돌아쳐야 했던 그 력사의 불가사의… 책가방과 로동도구를 동시에 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속에서도 다행히 책이라는것이 있어 그 험난한 세월을 무난히 보낼수 있었던것이 아니였나싶다.   내가 맨 처음 접한 책은《반짝이는 붉은 별》이라는 장편소설이였던것 같다. 그 소설을 한 이틀새에 다 읽었는데 다 읽고 책을 놓으니 날이 어둑어둑한 저녁때였다. 물길러 갔다가 물동이를 이고 집안에 들어서는데 방구석 시커먼 곳에서 소설속의 호한삼이 당장 뛰쳐나오는것 같아서 집안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일이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남들이 보면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책에 미쳐있어서 친구집에 놀러 가도 친구와 얘기하며 노는것이 아니라 한구석에 박혀 책만 보다가 돌아오기가 일쑤였고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불을 땔 때도 책을 들여다보면서 풍구질하여 밥을 태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생일날 어머니가 맛있는걸 사먹으라고 준 용돈으로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를 샀는가 하면 련환화(그림책)를 가득 사서 벽에 쭉 걸어놓고 소조공부를 하는 친구들과 함께 책속에서 과외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늘 책속에 파묻혀있다보니 집에 손님이 와도 머리만 꾸벅하는 식으로 인사를 대신하여 부모들의 꾸중을 들었고 여느 집 처녀애들처럼 멋 부릴줄도, 말을 곱게 할줄도 모르는가 하면 또한 세상물정에 어두워《저 계집애 저러다가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니?》하는 지청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 했다.  뿐더러 중학교 교장이셨던 아버지께서 즐겨 구독하던 《연변일보》, 《광명일보》, 《문회보》 등 신문들을 아버지가 퇴근하기 바쁘게 빼앗다싶이 해서 읽으면서 좋은 구절, 속담, 성구들은 수첩에 베껴두고 자주 들여다보군 하였다.  한편 오락모임이라면 의례 노래를 부르는 남들과는 달리《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는 조기천의 시를 늘 격정드높이 읊으시던 아버지와 노래를 수준급으로 잘 부르셨던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유전자가 작용하였던것이였을가. 소학교때 어문선생님이신 김학범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동요, 동시라는걸 써가지고 당시《홍소병》잡지에 투고하였는데《내가 만든 붉은 창》, 《영이 엄마 뜨락또르 몰아요》라는 등 여러 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중학시절, 연변1중에서 가진 전 주 초중학생작문초청경연에서 의외로 1등을 하여 평강벌에 있는 이름없는 중학교를 위해 영예를 떨치기도 했고 대학입시때에는 만점을 맞은 나의 작문이 신문에 게재되는바람에 대학교입학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온 집안에 환성이 터지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모교에 불리워가 후배들에게 학습경험담을 소개하며 작가가 될 꿈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경력이 그후의 나에게는 플러스로 작용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여 오래동안 나를 괴롭혔음을 실토하는바이다. 대학에 가서 나는 늘 고민과 방황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젊은 시절의 경우 다가 그러하듯이 사랑, 인생 등을 두고 고뇌하고 방황한것외에도 세계 명작가들의 대작을 읽으면서 거기에 비견할수 없는 미미한 자기에게 늘 화나있었고 따라서 대작이 아니면 발표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었다. 3학년때쯤이였던가. 딴에는 괜찮게 썼다고 여겨지는 소설을 가지고 림원춘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대번에 퇴짜를 놓는것이였다. 문학적재능은 인정하나 너무나 비현실적인 소재여서 소설로서는 아니라는것이였다. 졸업때는 문학작품에서의 정감문제를 가지고 론문을 쓰면서 문학공부에서의 일대 진전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문학창작에서는 여전히 작품 한편 발표하지 못한채 졸업을 맞이하고말았다. 지금도 그때의 일기들을 보면 최서해의 영향을 많이 받아《참인간》의 《참생활》을 부르짖으며 인간세상의 비리를 대성질호하고 인간세상사를 깊이 해부한다고 하는 어구들이 눈에 띄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늘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못마땅해하면서 처음으로《실버들》이라는 녀대생잡지를 창간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20여년전의 일로 되여버렸다.  사회에 진출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대작콤플렉스는 계속되여 작품을 발표하는것을 은근히 겁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 한가지― 문학을 향한 열망만은 식지 않아 일기를 쓰고 좋은 글을 스크랩하고 베끼는 작업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케일이 크고 무게가 있는 소설 같은것만 문학인줄로 착각하고있었던것 같다. 《문화대혁명》이 낳은《문예창작에서의 3돌출 원칙》이라는것이 오래동안 의식속에 남아있은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북경이라는 이 한어문화권에서 종사하는 번역편집이라는 직업이 형상사유를 고갈시키는데 일조했음도 부인할수 없을것이다.  그러던중 만난것이 한국의《수필공원》(《에세이문학》의 전신)이라는 수필전문지였다. 그 담담하고 진솔하고 청아한 수필, 그때까지 내가 알고있었던 수필에 대한 모든 통념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수필들을 만나면서 여태 가졌던 문학에 대한 생각― 거창하고 무게 있고 스케일이 큰 작품만 문학이라던 생각―을 버리고 차츰 주변의 사소한 일상에 눈을 돌리게 되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조정하니 평범하지만 뭔가 글감이 될것 같은 소재들이 하나, 둘 걸려나오기 시작했고 조금은 어설프지만 자잘한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담아내는 글을 한편, 두편 써서 조심조심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중반, 아직 수필이 뭔지 모르고 갈팡질팡할 때 남영전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격려의 편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가지로 많이 위축되여있은 나에게 자신심을 북돋워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수필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갸륵하게 생각한것이였을가. 늘 한국에 출장을 다니는 남편이 매번 한국에 갔다 올 때마다 수필지들을 한권, 두권씩 사다주더니 어느 한번은 수필에 관한 론문을 쓰련다는 나의 말에 한국수필계의 이름난 수필평론가 윤재천교수님을 무작정 찾아가 커다란 려행가방에 그 무거운 수필리론서 20여권을 가득 담아가지고 와 내앞에 와그르르 쏟아놓으면서 나를 경악케 하기도 하였다.  2001년, 기회가 닿아 부산에서 석달간 문화연수를 하는 기간에 한국의 여러 수필가들을 만나면서 우리 문단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수필의 높은 위상에 적잖이 놀랐고 동시에 여러번 품평회에 다녀오면서 수필에 림하는 그들의 진지한 자세와 높은 문학적기량에 많이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번 걸음에 잊지 않고 윤재천교수님을 찾아갔더니《구름카페》라고 이름한 사무실에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어마어마한 장서의 수필도서관을 안내해주는가 하면 10여권의 수필관련서들을 골라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후로 오늘까지 줄곧 한국의 《현대수필》,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수필시대》 등 수필전문지들을 애독하면서 수필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고 따라서 수필과의 인연은 점점 깊어져 이젠 수필을 떠나 내 문학을 론할수 없게 되였다.  2003년, 북경에서 삼지마을문학회가 발족되면서 나와 문학과의 인연은 더구나 끈끈하게 이어졌다. 동인들끼리 모여앉아 품평회를 가지고 문학을 담론하게 되였고 또한 수필에 조예가 깊은 쟁쟁한 문학동인들의 인맥에 힘입어 국제수필세미나 같은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국내외 여러 수필가들과 널리 교류를 진행하면서 점차 수필이라는 쟝르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였다.  이것이 이 세상에 왔다가 문학을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 수필문학에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나의 문학려정이다. 구태여 《수필은 서른여섯살이후 중년의 문학》이라고 갈파한 피천득님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있어 수필은 내 생애의 20대에 소리없이 만나 30대에 그 묘미를 발견하면서 서서히 입문하였고 40대에 이르러서는 내 생명의 한부분과도 같이 깊이 사랑하면서 이제 한생을 수필중독증으로 살아가야 할 숙명적문학으로 자리매김한것이다.    나는 글을 자주 발표하는 편이 아니다. 그만큼 수필을 쓰는 속도가 남보다 느리고 또 어렵게 쓴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고 하여 조바심치지 않으며 다만 매편의 글에 최선을 다하고저 애쓸뿐이다.  한국의 이름난 소설가 리문열이 왜 수필을 쓰지 않는가는 물음에 《수필이 너무 어려워서 쓰지 못한다.》고 한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러면서 또한 《수필은 끝없는 내적 수련이 없이는 한줄도 쓸수 없다.》고 하였다 하니 여기서 수필에 대한 대문장가의 높은 존중과 선비정신을 엿볼수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수필을 그런 대문장가들의 글과 비교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다만 수필이란 결코 《붓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글이 아님을 강조하려는것뿐이다. 수필이 쉽게 씌여진다는것,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나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아직도 깊은 내적 수련을 거치지 못한 나의 경우에는 수필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깊이 천착하는 장인정신으로 수필에 림하고저 한다.  수필이라는 이 쟝르를 마주하게 되면 마치 오래전의 지기를 만난듯 모든것을 고백하고픈 심정이 되고 진지한 자세로 자기를 성찰하며 내밀한 심적 라체를 적라라하게 드러내는데 주저치 않는다.  나는 흔히 음악이 흐르는 속에서 글을 쓴다.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 클래식음악이 고요히 퍼지면 곧 순수한 소녀의 마음이 되면서 인생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픈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내 수필은 흔히 서정수필로 이름지어지는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쟝르에 비해 자칫 《신변잡기》라는 오명을 들쓰기 쉬운 수필, 거대담론이 판을 치는 시대에 작고 가녀리고 자잘한것들을 통해 인생을 조명할수 있고 삶의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해줄수 있는 문학, 그래서 작지만 령혼심처를 울릴수 있는 정(情)의 미학, 그래서 《작은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수필, 나는 그런 수필을 사랑한다.  겉보건대는 작아보이지만 많은것을 담을수 있는《그릇》이 수필이다. 그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인생을 조명할수 있는 쟝르라는 말로도 된다. 무엇을 쓰는가보다 어떻게 쓰는가가 절실하게 제기되는 요즈음, 같은 소재의 글도 남다른 방식으로 써보려고 시도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 언저리에서만 맴돌고있는 나, 그 미궁 같은 속을 파헤쳐보고싶은 충동에 요즈음도 수필이라는 이 숲속에 묻혀 전전하고있다. 그속에 묻혀 《내게 주신 겸허하》고 아름다운 우리 말의 하나 또 하나의 낱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가장 적절한 어구를 고르느라 고심하는 나는 행복하다.   2007년 9월 <<연변문학>> 2007년 10월호
1    김치와 물만두가 만났을 때(남영도) 댓글:  조회:904  추천:46  2007-12-19
김치와 물만두가 만났을 때남영도몇해전 한국에 문화연수를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함께 있는 한국분들이 중국에서 온 나와 선배언니를 보고 오늘은 물만두를 빚어먹는것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중국에서 간 우리들 덕분에 오랜만에 중국음식을 먹어보자는것이다. 물론 우리는 쾌히 찬성했고 곧 준비물을 구입하러 시장으로 갔다. 한국에서는 숙주나물, 계란 등으로 만두소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냥 중국에서의 습관대로 배추가 좋겠다고 하여 배추 파는데로 갔다.  한국에서 《배추》하면 당연히 김치재료로 첫손에 꼽히기에 배추값이 폭등할 때에는 김치가 아니라 《금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것 같았다. 배추 파는 아줌마가 당연히 김치를 담그려고 배추를 사려는줄 알고 통이 잘 앉은걸로 골라주는데 우리가 물만두를 빚으려 한다고 하자 홀연 쳐다보던 그 의아해하던 눈빛, 《물만두를 빚는데 그 비싼 배추를 써요?》 아마 그런 뜻이였을것이다. 그런 눈빛을 북경에서도 본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가을철이 되면 제일 싼것이 배추다. 한키로에 이십전좌우인데 겨우내내 먹을 과동용인지라 뜨락에, 복도에 가득 쌓여있어 누가 그중 한포기를 슬쩍 채가도 별로 큰 일이 아니다.  8, 9년전의 일인데 어느날 김치를 담글 생각으로 배추 사러 시장에 갔는데 한족아저씨가 물만두를 빚으려고 그러는가고 하며 배추를 골라주기에 김치를 담그려고 그런다고 하자 쳐다보던 그 눈빛, 바로 지금 한국아줌마의 그것과 비슷한 표정이였다. 그 표정을 떠올리자 묘한 감정이 일면서 만두 빚는 일에 어떤 사명감 같은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날, 물만두는 오전부터 시작하여 장장 6시간만에 다 빚어졌다. 먼저 배추와 고기를 잘게 탕쳐서 만두소를 만들고 만두피를 밀어서 만두를  빚어냈다. 만두피는 얇게 빨리 미는것이 재간인데 선배언니가 한꺼번에 두장씩 밀면서 잽싸게 해제끼는 놀라운 솜씨에 곁에서 구경하던 한국분들이 혀를 내두르며 찬탄해마지 않았다. 나는 미는데는 재간이 없어 싸는걸 맡았는데 솔직히 수준급이 못되는데도 모두들 곱게 잘 싼다고 칭찬이였다. 우리는 마치 요술사가 요술을 부리듯(?)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익숙한 솜씨로 만두를 빚고 또 빚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오붓이 모여앉아 만두 빚을 때에 하던 그대로 재미나는 유머에 노래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그리고 만두는 중국어에서 《교자》라고 하는데 묵은 해에서 새 해로 넘어가는 날 자정(交子)에 먹는 음식이라고 해서 그 음을 본따《교자(餃子)》라고 했다는것, 중국에서는《물만두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好吃不過餃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두를 중국의 대표적음식으로 꼽는다는것 등, 여하튼 물만두에 관해 아는것은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는 자신이 마치 중국의 사절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물만두는 만드는 품에 비해 먹는데 드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게눈감추듯》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식사가  빠른 음식이다.  저녁식사때 물론 만두맛이 일품이라는 탄성이 터져나왔음은 더 말할것 없다. 기름끼를 싫어하는 한국인들의 식성을 감안하여 기름을 적게 넣었음에도 느끼하다면서 만두를 김치에 말아서 드시는 분들도 있었다.  우리 민족이 어떠한 음식재료로도 김치를 만들수 있는것처럼 한족들은 어떠한 음식재료로도 다 물만두를 만들수 있다. 만두전문집에 가보면 몇십종의 재료로 된 물만두 메뉴를 보게 되는데 너무도 많아서 일시 어느것을 택했으면 좋을지 몰라 어리벙벙해지기가 일쑤이다. 흔히 부추로 된 물만두를 즐겨먹지만 그것도 이제는 너무 먹어 식상하고 어쩌다가 줄당콩으로 만든 물만두를 먹어보았는데 생각외로 맛있었다. 그리고 회향(茴香)이라는 야채로 만든 물만두는 그 강한 향에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지만 일단 맛을 들이면 마약과 같아 그 맛이 자꾸자꾸 생각나기도 한다. 10여년전 우리 집 맞은켠에 북경본토박이 할머니가 살았는데 늘 회향소를 둔 만두를 몇가마씩 쪄놓고 우리더러 맛보라고 하여 더러 맛보기도 했는데 그때는 무슨 맛으로 그런 이상한 향의 야채를 먹을가고 의심이 들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던 음식이였다.  물만두말이 나오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지인들끼리 북경시 교외에 소풍을 자주 다니는데 그때마다 미나리뜯기는 우리 랑자군들의 일과로 되였다. 미나리를 뜯으면 동북삼성이 고향인 조선족들은 의례히 고추장으로 무침을 만들어먹는줄로 아는데 대도시에서 자란 어느 한 친구는 조선말만 서툰가 했더니 미나리 또한 분별할줄 몰라 미나리와 비슷한 풀을 한아름 뜯어안고 돌아와 우리를 경악케 하더니 다음번에 제대로 뜯어온 미나리를 집에 가져가서는 글쎄 물만두를 빚어먹었다는것이 아닌가. 못말리는 음식습관이였다. 오래동안 북경에서 살면서 김치와 된장을 즐겨 먹는 자신은 늘 한국적이라고 생각해왔다. 20여년전, 임신중에 된장국이 먹고싶었지만 북경에서는 구할수 없어 한밤중에 펑펑 울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디 그뿐인가, 북경아세안게임때 미디어센터에 한 40일간 자원봉사를 나간적이 있는데 식사시간이면 꼭꼭 고추장을 챙겨가지고 식당에 나타나군 하는 나에게 숱한 한족친구들이 호기심어린 눈길을 보내오던 일은 아직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먹었던 중국음식들이 한국에 가서 석달을 지내는 동안에 가끔씩 생각나 나를 괴롭히는데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으며 또 중국음식에 대해 아는것이 그토록 많은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적잖이 놀랐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그런 중국음식을 찾을수도, 먹을수도 없다는 현실에 실망하여 민망스러울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기까지 하였다.  한국에서 돌아오던 날, 란주라면이 먹고싶어 짐을 내려놓자바람으로 란주라면집으로 달려갔던 기억, 《아, 이 맛!》하고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련발하며 단숨에 라면 한사발을 게눈감추듯 먹어버리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그리고 향채(香菜)가 곁들여진 건두부무침은 왜 또 그렇게도 맛있던지. 해마다 구정이 되면 북경 지단공원에서 한 열흘간 묘회(廟會―장터)라는것이 서는데 그때가 되면 중국 동서남북의 특색있는 음식들이 다 등장한다. 지단공원근처에서 살던 10여년간 거의 해마다 가족들과 함께 묘회에 가는것이 구정때 년례행사로 되군 했는데 그때면 의례히 음식거리에서 중국 남북방의 여러가지 음식들을 맛보는것을 잊지 않는다.  겨울이라 가끔 먼지바람이 불면 음식거리 주위가 지저분하기도 하지만 사람들로 붐비는속에서 이리 밀리우고 저리 밀리우면서 선채로 먹는 그 맛이란 말그대로 별미다. 련자(蓮子)죽, 단단면(덫덫面), 대나무밥, 양고기산적… 그렇게 여러가지 음식을 골고루 맛보다보면 자연히 그런 음식에 길들여지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식성이 좋은 나에게 세상 맛없는 음식이란 별로 없었고 또 그런 음식을 좋아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런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까지 좋아하게 되는것은 인지상정이리라. 얼마전 연변에 갔다가 우리 민족의 된장국이며 김치를 스스럼없이 잘 먹으면서 우리 말을 투박한 연변사투리 그대로 잘하는 한족들을 더러 보았는데 그 감회란 한두마디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달랐다…  오늘도 물만두생각이 간절하다. 오늘은 맛도 맛이지만 독특한 향이 일품인 그 회향만두를 사다 먹을가보다. 거기에 김치까지 곁들여 먹는 그 맛이란… 물만두에 김치를 곁들이면 그 맛이 잘 어우러짐은 먹어본 사람이라야 안다. 2007년 9월 <<연변문학>>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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