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백남영도편집부로부터 문학자서전을 쓰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많이 머뭇거렸다. 이제 나도 문학인이라는건가. 문학에서는 늘 자신을 문학동네 어구에서 바장이며 가끔 가다 갸웃하고 동네안을 들여다보는 아마추어쯤으로 간주한 나더러 이렇게 떳떳이 문학을 담론하라는것은 조금은 황공하고 어딘가 격에 맞지 않는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직도 문학소녀의 그것과 같은 문학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만은 여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림하여 나의 문학을 얘기하는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펜을 들기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책밖에 모르는 책벌레였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된《문화대혁명》의 동란년대에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여섯살때에 중학교 교원인 부모가 학생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모습을 본것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또한 《문화대혁명》후기에는 늘 혁명이요, 비판이요 하면서 정신없이 돌아치는 부모들 귀가시간이 늦어 아홉살때부터 물동이를 이고 밥을 짓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 시절, 공부를 해야 할 어린 나이때부터 전민이 대채를 따라배우는 운동속에서 모내기철과 가을철은 물론 해란강공사요, 조전이요, 옥수수영양단지요 하면서 일년사시절 거의 농민들과 함께 바삐 돌아쳐야 했던 그 력사의 불가사의… 책가방과 로동도구를 동시에 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속에서도 다행히 책이라는것이 있어 그 험난한 세월을 무난히 보낼수 있었던것이 아니였나싶다. 내가 맨 처음 접한 책은《반짝이는 붉은 별》이라는 장편소설이였던것 같다. 그 소설을 한 이틀새에 다 읽었는데 다 읽고 책을 놓으니 날이 어둑어둑한 저녁때였다. 물길러 갔다가 물동이를 이고 집안에 들어서는데 방구석 시커먼 곳에서 소설속의 호한삼이 당장 뛰쳐나오는것 같아서 집안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일이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남들이 보면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책에 미쳐있어서 친구집에 놀러 가도 친구와 얘기하며 노는것이 아니라 한구석에 박혀 책만 보다가 돌아오기가 일쑤였고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불을 땔 때도 책을 들여다보면서 풍구질하여 밥을 태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생일날 어머니가 맛있는걸 사먹으라고 준 용돈으로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를 샀는가 하면 련환화(그림책)를 가득 사서 벽에 쭉 걸어놓고 소조공부를 하는 친구들과 함께 책속에서 과외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늘 책속에 파묻혀있다보니 집에 손님이 와도 머리만 꾸벅하는 식으로 인사를 대신하여 부모들의 꾸중을 들었고 여느 집 처녀애들처럼 멋 부릴줄도, 말을 곱게 할줄도 모르는가 하면 또한 세상물정에 어두워《저 계집애 저러다가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니?》하는 지청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 했다. 뿐더러 중학교 교장이셨던 아버지께서 즐겨 구독하던 《연변일보》, 《광명일보》, 《문회보》 등 신문들을 아버지가 퇴근하기 바쁘게 빼앗다싶이 해서 읽으면서 좋은 구절, 속담, 성구들은 수첩에 베껴두고 자주 들여다보군 하였다. 한편 오락모임이라면 의례 노래를 부르는 남들과는 달리《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는 조기천의 시를 늘 격정드높이 읊으시던 아버지와 노래를 수준급으로 잘 부르셨던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유전자가 작용하였던것이였을가. 소학교때 어문선생님이신 김학범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동요, 동시라는걸 써가지고 당시《홍소병》잡지에 투고하였는데《내가 만든 붉은 창》, 《영이 엄마 뜨락또르 몰아요》라는 등 여러 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중학시절, 연변1중에서 가진 전 주 초중학생작문초청경연에서 의외로 1등을 하여 평강벌에 있는 이름없는 중학교를 위해 영예를 떨치기도 했고 대학입시때에는 만점을 맞은 나의 작문이 신문에 게재되는바람에 대학교입학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온 집안에 환성이 터지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모교에 불리워가 후배들에게 학습경험담을 소개하며 작가가 될 꿈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경력이 그후의 나에게는 플러스로 작용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여 오래동안 나를 괴롭혔음을 실토하는바이다. 대학에 가서 나는 늘 고민과 방황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젊은 시절의 경우 다가 그러하듯이 사랑, 인생 등을 두고 고뇌하고 방황한것외에도 세계 명작가들의 대작을 읽으면서 거기에 비견할수 없는 미미한 자기에게 늘 화나있었고 따라서 대작이 아니면 발표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었다. 3학년때쯤이였던가. 딴에는 괜찮게 썼다고 여겨지는 소설을 가지고 림원춘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대번에 퇴짜를 놓는것이였다. 문학적재능은 인정하나 너무나 비현실적인 소재여서 소설로서는 아니라는것이였다. 졸업때는 문학작품에서의 정감문제를 가지고 론문을 쓰면서 문학공부에서의 일대 진전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문학창작에서는 여전히 작품 한편 발표하지 못한채 졸업을 맞이하고말았다. 지금도 그때의 일기들을 보면 최서해의 영향을 많이 받아《참인간》의 《참생활》을 부르짖으며 인간세상의 비리를 대성질호하고 인간세상사를 깊이 해부한다고 하는 어구들이 눈에 띄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늘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못마땅해하면서 처음으로《실버들》이라는 녀대생잡지를 창간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20여년전의 일로 되여버렸다. 사회에 진출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대작콤플렉스는 계속되여 작품을 발표하는것을 은근히 겁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 한가지― 문학을 향한 열망만은 식지 않아 일기를 쓰고 좋은 글을 스크랩하고 베끼는 작업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케일이 크고 무게가 있는 소설 같은것만 문학인줄로 착각하고있었던것 같다. 《문화대혁명》이 낳은《문예창작에서의 3돌출 원칙》이라는것이 오래동안 의식속에 남아있은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북경이라는 이 한어문화권에서 종사하는 번역편집이라는 직업이 형상사유를 고갈시키는데 일조했음도 부인할수 없을것이다. 그러던중 만난것이 한국의《수필공원》(《에세이문학》의 전신)이라는 수필전문지였다. 그 담담하고 진솔하고 청아한 수필, 그때까지 내가 알고있었던 수필에 대한 모든 통념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수필들을 만나면서 여태 가졌던 문학에 대한 생각― 거창하고 무게 있고 스케일이 큰 작품만 문학이라던 생각―을 버리고 차츰 주변의 사소한 일상에 눈을 돌리게 되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조정하니 평범하지만 뭔가 글감이 될것 같은 소재들이 하나, 둘 걸려나오기 시작했고 조금은 어설프지만 자잘한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담아내는 글을 한편, 두편 써서 조심조심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중반, 아직 수필이 뭔지 모르고 갈팡질팡할 때 남영전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격려의 편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가지로 많이 위축되여있은 나에게 자신심을 북돋워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수필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갸륵하게 생각한것이였을가. 늘 한국에 출장을 다니는 남편이 매번 한국에 갔다 올 때마다 수필지들을 한권, 두권씩 사다주더니 어느 한번은 수필에 관한 론문을 쓰련다는 나의 말에 한국수필계의 이름난 수필평론가 윤재천교수님을 무작정 찾아가 커다란 려행가방에 그 무거운 수필리론서 20여권을 가득 담아가지고 와 내앞에 와그르르 쏟아놓으면서 나를 경악케 하기도 하였다. 2001년, 기회가 닿아 부산에서 석달간 문화연수를 하는 기간에 한국의 여러 수필가들을 만나면서 우리 문단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수필의 높은 위상에 적잖이 놀랐고 동시에 여러번 품평회에 다녀오면서 수필에 림하는 그들의 진지한 자세와 높은 문학적기량에 많이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번 걸음에 잊지 않고 윤재천교수님을 찾아갔더니《구름카페》라고 이름한 사무실에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어마어마한 장서의 수필도서관을 안내해주는가 하면 10여권의 수필관련서들을 골라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후로 오늘까지 줄곧 한국의 《현대수필》,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수필시대》 등 수필전문지들을 애독하면서 수필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고 따라서 수필과의 인연은 점점 깊어져 이젠 수필을 떠나 내 문학을 론할수 없게 되였다. 2003년, 북경에서 삼지마을문학회가 발족되면서 나와 문학과의 인연은 더구나 끈끈하게 이어졌다. 동인들끼리 모여앉아 품평회를 가지고 문학을 담론하게 되였고 또한 수필에 조예가 깊은 쟁쟁한 문학동인들의 인맥에 힘입어 국제수필세미나 같은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국내외 여러 수필가들과 널리 교류를 진행하면서 점차 수필이라는 쟝르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였다. 이것이 이 세상에 왔다가 문학을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 수필문학에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나의 문학려정이다. 구태여 《수필은 서른여섯살이후 중년의 문학》이라고 갈파한 피천득님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있어 수필은 내 생애의 20대에 소리없이 만나 30대에 그 묘미를 발견하면서 서서히 입문하였고 40대에 이르러서는 내 생명의 한부분과도 같이 깊이 사랑하면서 이제 한생을 수필중독증으로 살아가야 할 숙명적문학으로 자리매김한것이다. 나는 글을 자주 발표하는 편이 아니다. 그만큼 수필을 쓰는 속도가 남보다 느리고 또 어렵게 쓴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고 하여 조바심치지 않으며 다만 매편의 글에 최선을 다하고저 애쓸뿐이다. 한국의 이름난 소설가 리문열이 왜 수필을 쓰지 않는가는 물음에 《수필이 너무 어려워서 쓰지 못한다.》고 한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러면서 또한 《수필은 끝없는 내적 수련이 없이는 한줄도 쓸수 없다.》고 하였다 하니 여기서 수필에 대한 대문장가의 높은 존중과 선비정신을 엿볼수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수필을 그런 대문장가들의 글과 비교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다만 수필이란 결코 《붓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글이 아님을 강조하려는것뿐이다. 수필이 쉽게 씌여진다는것,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나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아직도 깊은 내적 수련을 거치지 못한 나의 경우에는 수필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깊이 천착하는 장인정신으로 수필에 림하고저 한다. 수필이라는 이 쟝르를 마주하게 되면 마치 오래전의 지기를 만난듯 모든것을 고백하고픈 심정이 되고 진지한 자세로 자기를 성찰하며 내밀한 심적 라체를 적라라하게 드러내는데 주저치 않는다. 나는 흔히 음악이 흐르는 속에서 글을 쓴다.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 클래식음악이 고요히 퍼지면 곧 순수한 소녀의 마음이 되면서 인생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픈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내 수필은 흔히 서정수필로 이름지어지는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쟝르에 비해 자칫 《신변잡기》라는 오명을 들쓰기 쉬운 수필, 거대담론이 판을 치는 시대에 작고 가녀리고 자잘한것들을 통해 인생을 조명할수 있고 삶의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해줄수 있는 문학, 그래서 작지만 령혼심처를 울릴수 있는 정(情)의 미학, 그래서 《작은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수필, 나는 그런 수필을 사랑한다. 겉보건대는 작아보이지만 많은것을 담을수 있는《그릇》이 수필이다. 그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인생을 조명할수 있는 쟝르라는 말로도 된다. 무엇을 쓰는가보다 어떻게 쓰는가가 절실하게 제기되는 요즈음, 같은 소재의 글도 남다른 방식으로 써보려고 시도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 언저리에서만 맴돌고있는 나, 그 미궁 같은 속을 파헤쳐보고싶은 충동에 요즈음도 수필이라는 이 숲속에 묻혀 전전하고있다. 그속에 묻혀 《내게 주신 겸허하》고 아름다운 우리 말의 하나 또 하나의 낱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가장 적절한 어구를 고르느라 고심하는 나는 행복하다. 2007년 9월 <<연변문학>> 2007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