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우에서
박초란
딱 6주 만이였다. 구호준이 장편을 완성했다고 하면서 16만자에 달하는 장편을 보내왔다. 6주 만에 완성한 거야. 파일을 보내면서 그가 말했다. 겨울 한철을 고향에 돌아와 보내면서 묵직한 작품 하나를 건져든 그가 내게 작가평을 써달라고 청탁했다. 그즘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생계전선에 뛰여들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도 그 때야 알았다.
구호준에 대해서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한 인간을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동료작가보다는 친구 같이 자신에 대해서 터놓고 얘기해주는 구호준 덕분에 그동안 많이 편한 사이가 된듯 싶다. 구호준에 대해서 처음 그의 소설로 만났다. 실은 그의 글보다는 그의 인생스토리에 관심이 더 쏠렸던 것 같다. 방송국을 다니다가 로신문학원에서 칠개월 간 공부하기 위해서 직장마저 때려치운 놈(?), 그게 당시 나에겐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요인이라고 봐야 했다.
그 무렵이였다. 마침 모 문학지에서 주최하는 문학행사에서 글로만 알았던 작가들과 만나게 되였는데 그중에 구호준도 있었다. 휴면하고 있는 화산 같은 존재라고나 할가? 뭔가를 분출해내고 싶어하면서도 겉으로는 덤덤해보이는 그에게서 나는 그 당시 내가 읽고 있던 비트 문학의 대표작 잭 케루악의 《길우에서》(1957)와 같은 방랑자의 느낌을 받았다. 결국 그 느낌이 맞았다. 그 후날 내가 지켜본 그는 끊임없이 배낭려행을 했고 등산을 했다. 지난 설날에마저 한국의 태백산에 올라서 새해를 맞이했다. 태백산의 일출을 찍은 사진을 위챗으로 보내왔던 것이다. 진령산맥의 최고봉으로 해발이 3771메터인 중국의 태백산이야말로 꼭 한번 올라가보라고 한 내 추천에 그가 소리질렀던 게 기억난다.
“그믐날 구호준 기막혀서 죽게 하려고 하네. 서안 며칠 죽치고 있으면서 놀았었는데 화산, 숭산 거기를 돌고 근데 태백산은 인제야 들으니 억울해서 못살아!”
그리고는 웃었다.
“또 한번 가게 돼서 좋네.”
그 행사 마지막 날 내가 갖고 갔던 《길우에서》를 그에게 줬다. 구호준이라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리고 2년 쯤 뒤인가 또 문학행사에서 만나게 되였다. 어쩌하다가 몇몇 젊은 작가들이 숙소에 모였다. 문에 들어서는데 그가 갑자기 내게 말했다.
“우리 비슷한 년배이니 그냥 말 놓고 친구하자.”
그가 나보다 몇살 년상임을 아는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웃어넘겼던 적이 있었다. 그 뒤에도 그가 내게 몇번 말 놓으라고 하긴 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나는 그냥 내가 편한 대로 하기로 했다.
그 때 그는 한국에서부터 권오섭의 6권짜리 소설 《팔만대장경》을 들고 와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경장본이라 무거웠다. 길림에서부터 그것을 들고 북경까지 오는 동안 나는 고마움 때문인지 무거운 줄도 모르고 들고 왔다. 역으로 마중왔던 친구가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왔냐고 걱정해서야 그게 그렇게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중국까지 들고 왔는 걸.
내가 말하자 마중 왔던 친구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글쟁이들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지금까지도 가끔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내게 택배로 보내주기도 하는 그다. 북경에 살다 보니 우리 말 책들을 접할 기회가 많지가 않다. 지금은 애기엄마가 된, 당시 한국에서 연구생공부를 했던 친한 동생이 간간이 갖다주는 책 외에는 내가 보는 책 대부분은 한어로 된 책들이여서 그가 보낸 우리 말 책들을 받을 때면 매우 반가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살뜰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아주 가끔 발표된 내 소설의 평을 해서 내게 보여주기도 하는 그다. 몇백자도 아니고 만자 가까이 되는 평을 발표도 안할 거면서 오직 당사자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을 내여 써서 보내주는 그에게 결국은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부끄럽지만 내 글에 대한 애정을 고맙다는 말이 아닌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는 게 맞는 일 같아서였다.
은 구호준의 첫 장편소설이다. 중편으로 시작했던 글이 장편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나의 첫 장편소설에 관해서 물어왔을 때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다. 6주 만에 완성될 거라는 걸. 속전속결, 그것이 그의 글쓰기 전략이다. 아니면 스스로가 먼저 지루해져서 내버리게 된다고 했다. 하여 그의 글쓰기는 밤과 낮이 없다. 열시면 꿈나라에 들어가는 나와는 완전 다른 방식이다. 어차피 우리는 현재 글쓰기라는 길우에서 련마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방식이든 저런 방식이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전략만 찾으면 그만이다. 분명한 것은 글쓰기란 길우에서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도반임은 틀림없다.
그 길우에서 존재 자체만으로 깊고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그런 소설가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출처:2018 제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