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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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중편]나는 나를 버리기로 했다(1) 댓글:  조회:373  추천:0  2019-07-18
나는 나를 버리기로 했다(1) 박초란   모든 것이 사라졌다. 엄마가 알뜰히 챙겨넣은 송이버섯된장이며 직접 지은 콩으로 메주를 쑤어 달인 간장이며 아끼던 크고작은 오래된 독과 단지들이며 천정에 두렁두렁 달아두었던 말린 명태와 고사리와 버섯들이며 항아리마다 가득했던 콩과 옥수수와 쌀들, 이외에도 한쪽 창고에 가득 장져놓았던 장작들과 석탄무지며 엄마가 장보러 갈 때면 쓰던 작은 끌차와 온갖 도구들, 남김없이 사라졌다. 엄마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외에 미처 기억 못한 것들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거기에는 그녀가 소녀시절 애독했던 장서들과 친구들과 나눴던 편지들이 먼지를 들쓴 채 숨겨져 있었고 가끔 고향에 갈 때마다 산행을 나서며 신었던 등산화와 딱 한번 밖에 쓰질 않은 등산배낭도 거기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트렁크를 끌고 집에 들어선 엄마는 그 자리에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기가 막혀서… 엄마의 그 때 기분은 그랬을 거고 기가 막힌 엄마는 가까스레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먼저 전화를 했을 거고 엄마는 그녀가 전화를 받기 무섭게 내가 원, 기가 막혀서, 로 말을 시작했을 거였다. 기가 막혀서… 집에… 창고가… 텅 비였어… 창고는 텅 비여져 있었고 그런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났다는 것에 엄마는 놀랐다. 창고의 물건들이 하나 둘씩 누군가에 의해서 날라져 가는 동안 아무도 정말로 아무도 엄마한테 전화로라도 소식을 알려주지를 않았다. 엄마가 살고 있는 동네, 그러니까 이미 개발이 시작된 판자촌 막바라지에 잡고 있는 동네는 차일피일 개발을 미루고 있었다. 엄마는 허물기 전까지는 거기서 계속 살 예산이였다. 두달 전 엄마가 떠나올 때까지도 아무런 조짐도 없었던 터였다.    그녀는 그 때 두 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있었다. 크림이며 블루베리가 듬뿍 들어간 빵들과 요구르트와 멀리 프랑스에서 온 이백오십그람짜리 커피원두 두봉다리가 다였지만 꽤 무거웠고 겨우 이백여원어치의 쇼핑을 하고 딱 이백여원어치 만큼의 행복을 느끼면서 2층 홀에 위치한 태평양카페 앞을 막 지나려고 하고 있던 참이였다. 아래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나무테이블 우에 빵과 요구르트와 커피가 들어있는 구럭을 내려놓고 나서야 겨우 엄마의 전화를 받을 수가 있었다. 소소한 행복은 결국은 그렇듯이 소소했다. 엄마의 ‘기가 막혀서’에서부터 그 소소한 행복은 구만 구천리로 곧장 날아가버렸고 조금씩 그녀는 엄마의 분노에 점점 감염이 되여가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요란스런 음악이 기승스레 빠져나오고 있었다.  “신고했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엄마에게 물었다. “응, 아니…” “대체 신고한 거야? 안한 거야?” 분노에 이어 슬슬 엄마에 대한 짜증마저 치밀어오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언제까지 비워야 하는지 언제부터 허물 것인지에 대해 잘 알아보지도 않고 집을 비운 엄마 탓인 것처럼 그럴 때까지 뭘 하고 계신 거냐는 타박이 막 입 밖으로 쏟아져나갈 것만 같았다. “신고를 하러 파출소에 가긴 했는데… 가두에 가서 해결을 하라고 해서… 파출소서 그러더라, 뭐 별거 잃어버린 거 없으면 그냥 두라구… 그 따위 소리 듣고 화가 나서 그냥 나와버렸지…” “뭐 별거 아니라니… 힘들게 담근 장이며 간장이며 고추장이며 다 독 채로 없어졌는데… 그것들 뿐이겠니… 글쎄…” 엄마는 계속 엄마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렇게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어쩔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됐다. 그만하자… 더 말해 뭘 하겠니? 잃어버린 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이모가 왔다. 끊는다…” 엄마는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멀리 타지에 살고 있는 딸이 직접적인 도움이 못될 것임을 엄마는 전화를 하기 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듯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갔던 음악이 다시 그녀의 귀에 쿵쾅거리고 들려온다.  가지런히 놓인 테이블 아래로 아래층 매장 입구들이 내려다보이고 훤히 트인 앞쪽으로 멀찍이 사람들을 싣고 올라오고 내려가는 엘레베터가 보인다. 역시 거리의 조용한 카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카페였다. 카페라기보다는 쇼핑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음료 같은 걸 마시면서 쉬여가는 간이역 같은 공간이였다. 간혹 그냥 쇼핑백을 내려놓고 쉬다 가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카페 프런트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배렬되여 있었고 처음부터 카페주인은 꼭 소비해야 하는 손님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좌석이라는 걸 아예 강조할 생각 같은 건 없었던 듯했다. 꽤 묵직해 보이는 쇼핑백에다 녀자의 핸드백까지 든 남자가 옆에 와서 손에 든 것들을 내려놓으며 동행한, 의자에 쓰러질 듯 그녀 앞자리로 와서 털썩 들어앉는 녀자에게 뭘 마시겠냐고 묻는다. 그런 뒤 남자는 마지못해 하듯 그녀에게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 주변을 살펴본다. 그녀가 눈치를 미처 못 챈 새에 하나 둘 사람들이 와서 주변 테이블을 거의다 채우고 있었다. 인조꽃들로 둘러싸인 으슥진 자리에는 아까부터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부지런히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그 때에야 그녀도 뭔가 따뜻한 것을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란히 마주앉은 련인들이 시키고 난 뒤 그녀 역시 앞치마를 두른 시원한 단발머리의 카페직원에게 카푸치노 한잔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커피가 나올 때까지 카페의 통나무느낌의 의자에 앉아 한참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면서 앉아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활랑이면서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편 실실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집은 괜찮은가?’ 그제야 엄마에게 제대로 된 반응을 못해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는 걸 알아챘다. ‘엄마, 물건 잃어버린 건 괜찮아. 넘 급해하지 말고… 사람 써서 이사짐 나르고.’ 문자메시지를 적어내려가다가 와그르르 삭제해버린다. ‘괜찮긴 뭐가 괜찮은데!’ 엄마가 오히려 더 화를 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 버리기로 작정한 것은 곰인형이였다. 그런 곰돌이인형이 왜? 왜! 집안에 있는 건지 한참을 생각했다. 노란 베개를 베고 반쯤 눈을 감고 누워있는 곰인형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크기가 아니였다. 두 손바닥으로도 넘쳐나는 곰인형을 내려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넌 어데서 왔니? 인형 같은 걸 사들인다는 건 결코 내게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였다. 곰돌이인형은 쏘파 밑 청소를 하다가 발견했다. 시작부터 쏘파 밑 청소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였다. 물론 시작은 그 문제의 녹나무쏘파였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가 말가 한 촘촘한 구멍이 나있는 쏘파는 일단 청소하기조차 힘들었다. 이 집으로 이사오면서 친구가 특별히 화물트럭을 불러 배달까지 해준 삼인용과 두개의 일인용에 탁자까지 세트로 된 쏘파였는데 덩치가 컸다.  “사긴 샀는데… 저지르고 보니 둘 데가 마땅치가 않아서… 너 집 거실이 크지?” 친구는 인부들이 쏘파를 날라들이는 새 내게 말했다.  “내가 결혼하게 되면 가져갈게… 그 때까지 잘 써야 돼… 알았지?”  얄미운 그 친구는 그 때 뿐 아니라 일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남자친구도 없다. 친구가 돌아간 뒤 나는 꽤 넓었던 거실 절반을 날름 차지해버린 쏘파를 노려보면서 씩씩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자리만 덩실하니 차지하고 청소하기도 힘든 그 쏘파를 내다버리고 싶었다. 이사하고 한달 쯤 됐을 때부터 나는 지쳐있었다. 부피가 어마어마한 쏘파들이 나를 지지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차츰 나는 거실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석달 쯤 되였을 때부터는 거의 침실에만 박혀있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쏘파 때문이라는 생각도 못했다. 어느 날 침실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금 쏘파를 도피해서 이러고 있는 거구나… 밤 늦은 시간이였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통화하기에는 약간 저어되는 시간임에도 나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왜?” 친구가 잠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간신히 목소리를 뽑아냈다.  “너 당장 쏘파 가져가. 안 그러면 내다 버릴 거야.” 내가 다짜고짜 어깃장을 놓았다.  “뭐야? 잠든 사람 깨워놓고 홍두깨 같은 소리나 하고…” 친구가 하품을 뽑아대면서 말했다.  “도저히 못 참겠어. 대체 내가 집을 너 쏘파한테 줄라고 산 거니? 너 이달 안으로 가져가질 않으면 내다버릴 거다. 이고 살든 타고 살든 맘대로 해.” 그리고는 전화기를 꺼버렸다. 친구는 그 달도 그 다음달도 그 다음다음달도 오질 않았다.  전화통화 뒤 석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쏘파를 쑤욱 빼냈고 빼낼 때까지만도 그 밑에 곰인형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질 못했다. 결국은 쏘파는 버리질 못했다. 대신 생각지도 못했던 곰인형은 쌓여져 있던 먼지와 함께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그 다음날에는 주방양념들을 버렸다. 한두번인가 쓰고 방치해둔 양념들이 봉다리 채로 통 채로 가득했다. 유리양념통에 담겨진 갈색 나는 가루가 대체 뭔 양념인지 비닐봉다리에 가득 담긴 하얀 가루는 또 뭔 가루인지 나는 기억하지를 못했다. 언제 내 손을 거쳐서 주방 서랍에 들어간 건지조차 모호했다.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들을 차곡차곡 찬장에 집어넣으면서 깨달았다. 귀퉁이를 뜯기운 채 혹은 병마개를 개봉한 채 쓰지 않고 방치해둔 똑같은 양념들이 몇개씩 된다는 사실을… 많게는 네댓개도 있었다. 간장이 그랬고 식초가 그랬고 기름도 그랬다. 혼자서 사는 녀자가 밥도 잘해먹지를 않는 녀자가 그 많은 양념들을 왜 갖고 있게 되였는지… 나는 단촐해진 양념통들을 차곡차곡 되넣으면서 생각했다. 살다 보면 밥도 잘해먹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걸가?  버리기는 그렇게 시작이 되였다. 처음은 류통기한이 지난 못쓰는 것들로, 그다음에는 내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조차 기억하질 못한 것들로, 그 다음에는 작아졌거나 망가졌거나 더는 사용이 불가능한 것들로 사냥군 같이 하나씩 찾아내고 가차없이 내다버렸다.   엄마는 그 날 엄마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창고 안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고 집안의 모든 것들은 아니였지만 엄마의 손때 묻은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이모와 함께 짐을 싸면서 엄마는 하나 둘씩 사라져버린 것들을 기억해냈다. 대체로 전기밥통이 없어졌다, 압력솥이 없어졌다, 목욕통이 없어졌다, 두터운 가죽옷이 없어졌다, 반지가 없어졌다, 그랬다. 할아버지가 산 오래된 손마선이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부터 엄마는 더 이상 사라져버린 것들을 헤아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철거가 진행된 란장판을 틈 타 누군가가 집안까지 침입해 휘젓고 간 거였다.    참죽나무싹들이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웃자라 있다. 울퉁불퉁한 산초나무가지마다 손톱눈 만한 잎새들을 매단다. 언젠가 누군가가 산초나무가지를 손안마나 해보라고 한토막 잘 다듬어서 갖다주었던 기억이 난다. 집안 어딘가에 아직 남겨져 있을 터였다. 뻐스에서 내려서 대여한 자전거를 바꿔타고 거리를 달린다. 자주 가던 문방구집에 가기 위해서다. 아직도 노트들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가끔은 아무 노트를 들고 우적우적 옥수수여물을 씹는 당나귀처럼 씹어먹을 때가 있다. 진짜로 종이장을 여물 삼아 씹어먹는단 얘기는 아니고 여물 대신 나는 노트 안의 빈 공간을 우적우적 씹어삼켰다. 필 하나로 충분히 가능하다 해서 기분이 그냥 그랬다. 문방구집은 정법대 뒤켠 골목에 있었다. 우연히 지나다가 들린 문방구집은 꽤 고급진 문방구들로 즐비했고 나는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여기구나… 그 뒤부터 그 곳은 얼마 되질 않는 내가 자주 찾는 공간중 하나가 되였다. 문제의 사달은 역시 버리기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쓸 만한 노트 한권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아챘을 때에는 버리기를 시작해서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내가 아껴뒀던 노트들이 상자 채로 비워져 있었다. 책장의 책들을 비워내면서 같이 치운 것이였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는 조금 상심했지만 다시 기운을 내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노트를 사러 나가기 위해서였다. 쓰레기를 버릴 쓰레기통이 필요했듯 나는 외로움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분노를 버릴 쓰레기통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로 노트를 선택했다. 노트를 선택하기 전엔 술로 풀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끝이 간단명료하지 않았다. 머리도 빠개질 듯 아프고 속은 계속 메슥거리고 이삼일은 그렇게 고통스러웠고 그 고통을 감내하기엔 소위 고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어이없이 부풀려져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몸이 견뎌내야 하는 고통에 비해서 그 고통이라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사치한 일이였던가, 그런 깨달음을 위해서 계속 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임을 깨달아버렸다고나 할가, 나는 좀더 간단명료해지기 바랐을 뿐이였다. 그런 의미에서 노트는 참 좋은 대상이였다. 그렇다고 내가 글을 쓰는 작가라거나 그런 일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오해하지 말아주시길… 나는 그냥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일인일 뿐이였다.   그 남자를 본 건 분명 문방구점에서였다. 남자의 자근자근한 목소리가 별로 크지 않은 건물 안에 울렸다. 카운터 앞을 지날 무렵 카운터의 젊은 녀자가 남자에게 이사 잘했냐고 묻고 있다가 그녀에게 급히 어서오세요, 반겼다. 네…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 카운터를 지나 곧장 노트들이 늘여져 있는 뒤쪽으로 들어갔다. 매번 올 때마다 젊은 녀자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고 간혹 비슷한 또래의 녀자와 함께 진렬대에 새로 들여온 물건들을 올려놓군 하기도 했다.   주방에서 주전자에 수도물을 받다가 무심히 내다본 창밖엔 노란 베개를 벤 곰인형 하나가 갸우뚱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수로 심은 오동나무잎들이 무성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였고 푸른 하늘 아래 싱싱한 빛갈이 강렬하게 두 눈을 자극해왔다. 하얀 곰이였을가 아니면 회색곰이였을가 확신이 서지 않는 곰인형이 파란 쓰레기통 우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늘만 쳐다보는 곰인형과 눈맞춤을 포기하고 나서 막 넘쳐나기 시작한 물을 서둘러 끈다. 그리고는 그릇 하나를 내리워 주전자 가득한 물을 반나마 옮겨놓고는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가스불을 켠다. 흔히 볼 수가 있는 커다란 불수강 주전자였고 물론 이 주전자도 친구 누나가 이민을 가면서 두고 간 물건중의 하나다. 그는 일주일 전에 친구 누나의 아빠트로 이사를 왔고 어쩌면 친구의 충고처럼 이 집을 사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누나가 자신 앞으로 남긴 아빠트를 그의 유일한 친구녀석은 처음부터 그에게 팔고 싶어했다. 어차피 너도 집을 사고 정착해서 살아야지 않겠어? 친구녀석은 볼 때마다 통화할 때마다 시도때도 없이 들이댔다. 그렇다면 일단 살아봐… 살아보다 보면 그 동네가 좋아져서 다른데 가고 싶어지지 않을 걸. 친구녀석은 누구보다 그를 관심해주고 있었고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친구 누나는 가면서 대부분의 물건을 처분했다. 친구녀석이 인테리어를 다시 할 거라고, 모든 가구들은 다 버릴 거라고 협박을 했다고 했다. 녀석은 그 무렵 목공일에 재미를 들이고 있었고 모든 인테리어를 직접 자신의 두 손으로 하고 싶어했다. 일년 너머 끌어온 친구의 인테리어공사는 끝내는 사람을 써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할 수가 있었다. 친구가 나중에도 작업실로 쓸 작정이였던 탓에 집은 거의 휑뎅그렁했다. 가구는 하나씩 친구가 직접 만들 거라고 했지만 침대를 해도 될 만큼 커다란 앉은뱅이 상 하나를 작업한 뒤 친구는 그 일에서 손을 뗐다. 그 덕분에 그는 지금 침대도 없이 매트만 깔고 살게 되였고 결국은 그런 생활도 일주일 만에 금방 습관이 되여서 더 이상 침대가 필요하다는 생각마저도 않게 되였다. 140평의 아빠트 안의 가구라고는 거실의 커다란 상 하나와 방석 하나, 침대매트, 몇벌의 옷이 걸린 나무옷걸이 하나가 전부였다. 그 흔한 옷장 하나 없이도 그는 참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쭉 잘 지낼 것만 같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책소개를 보다가 자신이 별 의도도 없이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런 것도 책으로까지 출판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였다는 게 그는 영 희한한 일 같이 생각되였다. 그는 씩 웃고 나서 곧바로 그 책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건 결코 단순하게 살고 있지 않아서 그래서 필요한 게지… 물이 끓으면서 씩씩 소리를 낸다. 반쯤 되던 물이 그새 졸아서 밑굽에 조금 남아있다. 또 창 앞에 선 채 잠들어버린 거다. 소름이 쭉 돋아난다. 겪고 또 겪어도 놀라기는 처음보다 덜하진 않다. 전기포트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이번이 처음 아니다. 오늘은 당장 나가서 하나 사와야겠군, 결심한다. 그는 그렇게 가끔 까무락하니 곯아떨어지는 버릇이 있다. 그냥 버릇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병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크는 내내 그 덕분에 욕도 많이 먹었다. 게으른 놈, 큉한 놈, 잠귀신이 붙은 놈… 암튼 온갖 소리를 다 들으면서 자랐다. 가장 많이 들은 욕은 좀 정신 차려 자식아, 였다. 기면증, 그것이 병이라는 것은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야 알았다. 그러니까 그는 그즘 거의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져 있었다. 치솔질을 하다가 졸고 수업을 듣다가 졸고 시험을 보다가 졸고 밥을 먹다가 졸고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였다. 대학에 들어와서부터 무가내로 돋아나기 시작한 수염, 면도질은 그 자체가 커다란 위험이였다. 그 당시 한 숙소에 있던 녀석이 그의 손에서 면도칼을 빼앗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였을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오른손에 들린 면도칼이 번뜩이며 목덜미로 떨어지던 찰나였다고 녀석은 그 일이 있고 난 썩 뒤 술을 마시면서 그에게 말했다. 녀석은 기어코 그의 할아버지가 쓰시던 면도칼을 내버리고 자신이 쓰던 전동면도칼을 쓰도록 했다. 그것은 면바로 발등에 떨구지만 않는다면 여러모로 안전한 기계였다. 그는 할아버지의 유품인 면도칼을 버리기는 아쉬웠지만 안전하지 못한 요소는 미리감치 주변에서 치워버려야 된다는 녀석의 말에 공감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곤혹을 게으른 놈으로나 정신 못 차린 놈으로 해석하지 않고 곤혹으로 받아주는 사람을 만난 셈이였다. 그는 녀석에게 자전거를 탔다가 졸아서 큰 사고를 당할 번할 일이며 졸업시험 때 졸아서 시험지 절반도 채우지 못했던 일이며 첫 데이트에 나갔다가 좋아하는 녀자 앞에서 잠들어버려 녀자친구가 떠나간 일이며 그런 이야기들을 녀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처음이였다.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면도칼사건으로 녀석과 그 사이에 동지와 같이 끈끈한 뭔가가 생겨났다고 그는 믿었다. 낮 동안 그는 자신이 대여섯번 정도 잠든다고 했고 녀석은 그가 열댓번은 깜빡깜빡 곯아떨어져버린다고 했다. 그로서는 자신보다도 녀석의 말에 더욱 신뢰감이 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녀석은 누나가 근무하고 있다는 병원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병증에 관련해 듣게 되였다. 기면증, 그런 병도 있다는 걸, 자신의 증상이 게으름이나 정신 못 차리는 거랑은 아무런 련관이 없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커오면서 부모에게서조차 게으른 놈이라고 정신 차려란 소리를 듣고 자란 것이 너무 억울해지는 순간이였다.    차를 마시고 나서 그는 오랜만에 외출준비를 한다. 가게에도 나가 매장상태를 살펴봐야 되고 나갔던 김에 전기포트도 하나 구입해야 했다. 그는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는다. 창밖 주차장에서 차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다. 갑자기 그는 뭔가가 생각나서 주방 쪽으로 급히 몸을 움직인다. 아직, 노란 베개를 벤 곰이 쓰레기통 우에서 하늘을 향해 웃고 있었다. 이번에 그는 곧장 문을 열고 한달음에 쓰레기통 앞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곰인형을 집어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비밀스러운 작전이라도 치른 듯 그의 별로 뜨거워진 적 없는 심장이 툭툭툭 소리를 낸다. 그는 화장실 개수대 안에 곰인형을 던져놓고 화장실문마저 꽁꽁 닫아놓고 나서 거실로 나와 하나 밖에 없는 방석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로서도 자신의 방금 한 행동을 리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남이 버린 곰인형을 주어와야 될 리유 같은 걸 죽었다 깨도 찾아낼 수가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 녀자를 떠올렸다. 남들 다 자는 이른 새벽,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던 그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집어들었던 노란 베개를 벤 곰인형을 쓰레기통 우에 살며시 올려놓던 그녀, 조금 뒤 현관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녀자가 현관 맞은 편 문 안에서 산다는 걸 알았다. 가끔 더 근사한 일을 하면서 살면 어떨가? 그런 생각을 내가 전혀 안해봤던 건 아니다. 문방구 사장이라… 대학을 나오고 나서 한참은 직업다운 직업, 그러니까 금융전업이란 타이틀에 어울릴 만한 직업을 갖고 싶었다. 녀석은 본지 호구라서(이건 순전히 나의 일방적인 생각이다) 제꺽 누구라도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은행에 취직이 된 반면 나는 겨우 사립학교의 교사자리를 얻게 되였다. 어릴 적부터 돈에 대한 의식을 키워줘야 한다는 학교의 방침 덕분에 나는 엉뚱하게 사범학교를 나온 다른 경쟁자들을 뚫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선생님, 그 호칭에 적응할 만한 시간도 결국은 주어지질 않았지만 그것이 내가 해온 전부의, 유일한 직장 경력이였다. 내가 기면증이라는 희귀병이 있다는 것은 리력서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였다. 또한 그것은 곧바로 들통이 나버릴 일이기도 했다. 한달도 안되여 나는 교장실로 호출을 받았고 나는 내 병명을 터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였다. 결국은 그 학기를 마칠 때까지만 근무하게 하기로 학교 측의 통보를 받게 되였다. 기면증은요, 수업 도중에 깜빡깜빡 졸기는 하기만 결코 옮는 병은 아니랍니다! 그렇게 소리지르고 싶어지는 순간이였다. 그것이 벌써 16년 전 일이였다.  그러니까 그 남자의 이름은 박수남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딱 학교 다니기 전까지만 그렇게 불렸다. 학교 다닐 나이가 되여서야 호구부에 박수납이라고 적혀있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등록처의 직원의 실수로 나의 이름은 박수남이 아닌, 박수납이 되여버렸다. 한자로 버젓이 朴书呐라고 적혀져 있었고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박수남이 아닌 박수납으로 불렸다. 내 지독한 잠버릇에 아버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결국은 본인도 수납이 이 놈! 정신 차려! 했다. 참고로 내 아버지는 지독하게 수납을 잘하시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길거리에 떨어진 나사못 하나라도 주어다가 창고에 있는 못통에 집어 넣어두는 그런 분이셨다. 랑비는 죄악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평생의 신조였다. 쓸 만한 것들을 버린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였다. 아버지는 구두 하나를 삼십오년 신으셨다. 본인도 그러했지만 식구들에게도 그렇게 하길 바라는 정도를 이미 넘어서서 요구를 했다. 한창 클 무렵 옷가지나 신을 새로 사야 할 때면 어머니는 며칠이고 아버지의 눈치를 봐가면서 아버지에게 사정사정하군 했던 광경은 아마도 내 평생 잊혀지지 않을 터였다. 당시 막 성년이 된 작은고모가 립스틱을 가만히 샀다가 빨래방치를 집어든 아버지를 피해 천방지축 도망치던 광경 또한 지금까지도 작은고모를 보면 떠올려지는 기억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내가 어린 아이 때부터 들었던 오래된 나무통의 라지오를 듣고 반세기도 훨씬 넘은 오래된 집에서 사신다. 아직도 땔나무를 손수 해다가 때시고 가마에 물을 끓여 낡고 둥그런, 어린 나와 동생들이 써왔던 목욕통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신다. 어머니의 소원은 뜨거운 물이 마음대로 나오는 샤워기가 있고 앉은뱅이 변기가 있는 그런 화장실을 가지는 거였다. 아마도 어머니 평생 이루시기 힘든 소원이 될 것이였다. 한동안 고향집 화장실과 주방을 편하게 고쳐드릴가, 내심 곰곰히 고민해봤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변변한 직장 대신에 문방구를 차렸다는 소식에 벌끈하신 아버지의 노기가 그 때까지도 수그러들지 않았던 까닭이였다. 아버지는 힘들게 대학공부까지 시킨 자식이 결국 코흘리개 애들이나 대상하는 문방구점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반면, 어머니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다행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깜빡깜빡 조는 버릇이 있는 자식이 밖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질 않아도 된다는 것에 어머니는 안심스러워했다. 딱 한번 어머니에게 전화로 화장실을 고쳐줄가? 물었던 적이 있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는 듯하더니 좋긴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좋다, 하셨다. 어머니는 그 순간에서 자신의 소원보다도 아무 것도 못 버리는 아버지의 성정을 더 걱정하고 계셨다.    문방구점은 대학가의 뒤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오셨어요?”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이양이 반색한다. 벌써 구년째 이양은 가게일을 봐주고 있었다. 처음 이양을 보았을 때를 그는 기억한다. 고집스러워보이는 눈매를 갖고 있는, 아직 시골에서 자란 아이다운 수더분함과 수줍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 아이의 수더분함과 수줍음이 마음에 들었다. 9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당시 스무살이던 이양은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련애도 좀 하고 그래. 그가 매번 큰오빠처럼 다그쳐보지만 이양은 그가 알기에는 한번도 련애를 한 적이 없다. 한창나이의 녀자애를 그렇게 가게에 묶어두는 것이 안스러워서 점원을 차례로 두명 더 들였지만 이양은 이양 대로 가게에 하루종일 붙어있었다. 너 어떡하니? 좋은 시절을 이런 가게 안에서 다 흘려보내서… 3년 전인가, 한번 그가 롱담 절반 진담 절반 그녀에게 터놓았던 적 있다. 그럼 사장님이 책임지세요. 이양이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대답했고 그는 그만 아차, 싶어 황급히 말을 돌려야 했다. 어데 적당한 사람이 없나 좀 알아볼가?  그 동안 이양은 점점 가게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여갔고 매일마다 가게에 붙어있어야 하던 그가 지금 일주일에 한번 정도 가게에 얼굴을 내밀어도 될 정도로 제법 잘 돌아갈 수가 있게 된 것도 이양이 있어 가능한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사는 잘하셨어요?”  이양이 그에게 묻다가 젊은 녀자손님이 들어서자 깍듯이 어서 오세요, 인사를 했다.  급히 노트코너로 들어가는 녀자손님의 어깨가 낯익다는 것이 느껴져서 그가 다시 돌아보았지만 녀자는 이미 매장 깊숙이 들어간 뒤였다. “이사는 잘하셨어요?” 이양이 다시 물었다. 얼마 전까지만도 그는 이양과 또 다른 한명의 점원과 셋이서 한 아빠트에서 살았다. 방 두개에 거실이 큰 아빠트였고 방 하나를 그가 썼고 다른 방 하나를 이양과 민이가 썼다. 민이가 오기 전까지는 이양과 그가 방 하나하나씩 쓰면서 살았고 지금은 나간 훅이란 남자애가 거실에서 살았다. 그동안에 서너번 점원이 바뀐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여온 셈이다. 가게는 장사가 잘되였고 그는 더 이상 근사한 직장을 나가는 친구들이 부럽지가 않았다.  “잘했어. 좀 멀긴 해도 조용해서 좋아.” 그가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또 잠든 줄…” 이양이 조금 머리를 돌리고 웃었다. “뭐? 뭐라고?” 그가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이양은 깜빡깜빡 잠들어버리는 그의 잠버릇에 대해서, 몇해 전까지만도 담배를 피운 과거에 대해서도, 한동안 담배 대신 필을 손가락에 끼우고 돌려대는 새로운 버릇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지붕 아래서 살아오는 동안, 땀 흘리며 같이 일하는 동안, 이양과 그는 가족 아닌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여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그것이 조금 불편해짐을 느꼈다. 이양은 스스로 그를 위한 모든 일을 떠맡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여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거뒀다. 처음에는 집안에 곳곳에 도는 온기 때문에 그는 고맙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이양이나 다른 점원들 외로움까지 보듬고저 했다. 그것이 선뜻 자신의 아빠트의 공간을 내주도록 만든 원인이였다. 한번도 그는 이양을 이성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집안일을 하고 있는 이양과 마주치면 웬지 모르게 불편해졌다. 안해가 생긴다면 저기 저러고 있질 않을가? 그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령역이 침범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기 전에 그는 떠나야 했다. 더는 묵인하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였다. 이양 혼자서 그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도리가 아닌 듯 싶었다. 이양도 그가 이사를 나가게 된 리유를 알가?  “집들이 한번 해야죠?” 이양이 물었다.  “집들이는 무슨… 번거롭게.” 그는 아예 이양도 직원중 아무도, 어쩌면 친구들도 새로 살게 된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는 그 공간을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품이 나오려고 한다. 약간 고개를 돌려 조금씩 하품을 삼킨다. 이양의 앞에서 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양은 스스로 너무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듯했다. 그는 한번도 이양에게 자신의 기면증에 대해 말했던 적이 없다. 그녀도 그의 기면증을 자주 곯아떨어지는 잠버릇이나 피곤함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다만 그녀는 그의 잠버릇을 비난하는 대신 곯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곯아떨어진다면 그녀는 그럴 것이다. 아유, 잠꾸러기 우리 꿀꿀이 또 잠들었네… 그녀는 그렇게 사람을 당혹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처음 쯧쯧 혀를 다시는 이양을 보았을 때 그는 어린 그녀의 표정에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싫지는 않았다. 싫지는 않다 해서 난처하지 않았던 건 아니였다. 열한살이나 어린 녀자애한테서 우리 꿀꿀이, 그런 얘기를 듣는다는 건, 언제 봐도 쑥스러운 일이였다.  갈색의 줄무늬가 있는 운동화가 카운터 쪽으로 절주 있게 움직여왔다. 그가 머리를 들었다. 노트를 집어든 녀자가 거기 서있었다. 그가 카운터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녀자가 잠간 그에게 눈길을 돌리나 싶더니 인츰 이양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이거로 주세요.” 이양이 계산을 하는 새 그는 카운터에서 한발 물러선 채 깜빡 존다. 까무룩 잠 속에 빠져드는 순간, 매번 그는 내가 지금 자고 있구나, 확인에 재삼 실패한다. 그 순간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마저도.   텅 비여버린 상 우에 노트를 꺼내놓는다. 기분이 좋아진다. 비여있는 노트장을 바라보고 있는 일도 만족스러워진다. 애니메이션영화의 최초의 토끼 경찰관 주디 홉스가 두 귀를 빨쭉하고 웃고 있는 표지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다지 두텁지가 않은 두께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몇개월 간 쓰고 있던 검은색 가죽노트가 점점 지겨워지고 있던 참이였다. 좀더 활발하고 무게 있어보이는 것보다는 가벼운 걸로 바꾸고 싶었다. 빼곡이 적어넣었어도 금방 채워질 수가 있는 그런, 가볍다는 건 결코 그 무게 뿐은 아닐 텐데 싶어지면서 나는 나를 알 수 없게 지지누르고 있는 것들과 노트와의 관계를 잠시 생각해본다.  새벽 눈을 뜨면서 강렬한 목소리를 나는 분명 들었다. 그래, 잘못된 거였어! 아예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한낮이 되여 뻐스를 타고 시내로 향하면서 차창 밖 점점 푸르러져가는 나무잎들을 바라보면 후회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후회가 아닌가 싶은 의심 또한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후회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건 그 때가 처음이였다.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비난하고 타매해 스스로를 최악의 상황에 밀어넣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뻐스에서 내려 자전거로 바꿔타면서 나는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걸 의식했다. 자전거를 타고 교정을 누비던 그 때의 녀자아이가 더 이상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이제 2년이 지나면 나도 사십이 되는구나, 하고. 사십대가 아니라 삼십대라도 저렇게 나이를 먹고 뭔 재미로 살지? 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지금 그 시기를 꾸준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니? 사람들은 이제 결혼은 했냐고가 아니라 아이가 몇살이냐고 혹은 몇이냐고 묻는다. 처음엔 그 물음 자체가 황당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무렇지 않은 걸 봐서는 분명 나도 나이를 먹었다. 결혼을 안했으니 당연히 아이는 없다. 이제 몇해만 지나면 출산적임기를 넘어가고 어쩌면 아이 같은 건 내 생에 영영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걱정은 아예 들지가 않는다. 결혼에 관해 조금 생각을 해보게 되는 건 엄마가 와서 같이 있을 때 뿐이였다. 아주 잠간 여기저기에서 녀배우들이 란자를 랭동시켜 보관한다는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저걸 해야 되나? 고민 정도는 해본 적이 있다.   버리기를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 나는 집안을 모조리 비우고 텅 빈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여러 나라를 돌면서 사들였던 기념품들과 아빠트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거라고 믿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을 비워내고 싶어졌다. 그것은 그것을 사들일 때와 비슷한 열정의 무게로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즘 나는 조금 랭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어떤 리유를 불문하고 그 어떤 열정이 일렁인다는 건 내가 알 수 없는 어데론가 무분별하게 흘러갈 수가 있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돈을 벌고 나서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엄마에게 아빠트를 사드리는 일이였다. 고향집과 가까운 도시의 아빠트를 사고 엄마에게 들어가서 살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싫다고 했다. 일흔이 아직 안된 년세였을 적이였지만 엄마는 익숙한 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허름한 집이긴 하지만 이미 정든 곳이기도 하고 앞마당에 밭도 있어서 떠날 수가 없다고 했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흔적이 곳곳에 배인 그 곳을 정작 내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였다.  노트에 끄적이다 말고 나는 거실을 휘둘러본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6인용 단풍나무식탁을 제외하고 거실에만도 상이 참 많다. 베란다에 유리테이블 하나, 커다란 쏘파에 딸린 차탁으로 쓰고 있는 앉은뱅이 상 하나, 거실에만 상이 세개나 된다. 식구는 나 하나. 혼자서 왜 이렇게 많은 상이 필요한 거지? 좁다란 서재에도 커다란 책상이 하나 있고 2년 전인가 열성을 보였던 거문고가 놓인 앉은뱅이 긴 상이 하나 있고 침실에도 화장품을 올려놓은 소나무원목상과 읽은 혹은 읽을 책을 올려놓거나 차 한잔을 올려놓기도 하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이제는 고물이 된 개다리 소반 하나가 거기 머리맡에 놓여있다. 북쪽 방에도 어마어마한 무게와 크기의 황화리나무 차탁 하나가 주인처럼 낮다랗게 틀고 앉아 있을 터였다. 나는 어느새 노트 앞에서 일어나서 이 방 저 방 기웃거리고 있었다.  상을, 버려야겠다!  나는 중대한 결정을 한 듯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상들을 하나하나 점검한다. 밥상도 필요하고 차탁도 필요한 듯하고 책상도 필요하고 차탁이 두개니까 그걸 하나 버려야 하나? 헌데 하나는 언젠가는 친구에게 돌려줘야 할 쏘파세트로 된 거고 하나는 넘 무겁고 또 비싼 건데… 베란다에는 유리상 밖에 놓을 수가 없는데 해볕 때문에… 결국은 화장품을 올려놓은 소나무원목상을 빼서 버리기로 한다. 화장품은 그냥 화장실 밖 세면대 우의 나무가름대에 올려놓기로 하고.   그녀는 나무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 좋았다. 나무의 싱싱한 냄새. 대패날에 잘게 부서진 대패밥에서 나는 나무의 속살냄새. 어린 그녀는 그것이 아버지의 냄새였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이나 옷자락 어딘가에는 늘 대패밥이나 톱밥이 락엽마냥 붙어있었고 문밖에서부터 툭툭 옷자락을 털고 바지를 터는 소리로써 어린 그녀는 아버지가 왔음을 알아챘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문을 열기도 전부터 우리 딸, 아빠 왔다. 어린 그녀를 찾던 아버지는 결국은 그녀와 엄마를 버렸다. 그녀가 열두살 때 일이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친구라는 사람의 일을 도우러 나갔다 사고를 당했다. 새로 산 전기톱이라고 했다. 전기톱에 나무처럼 잘리웠을 아버지의 다리, 그녀는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본다. 동맥이 잘려 피를 철철 흘리는 아버지의 다리를. 한번도 전기톱을 다뤄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친구는 왜 전기톱을 샀을가? 그리고 호기롭게 통나무를 벤다고 설쳤을가? 통나무 대신에 아버지의 다리를 베면서 말이다. 그것을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다리도 아버지의 얼굴도 아버지의 시신도 본 적이 없다. 장례식 내내 어린 그녀의 기억에 남겨져 있는 건 아버지가 어떻게 저 조그마한 골회함에 들어갔을가? 그 궁금증 뿐이였다. 아버지는 그 조그마한 골회함에 담겨져서 그녀가 클 때까지 화장터의 골회함 보관처에 보관되여 있었다. 결국 그녀는 엄마에게 아빠트를 사드리는 대신에 아빠가 누울 자리를 양지바른 곳에 마련했다. 죽어서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든다는 걸 그녀는 그 때 처음 알았다.    내다버리는 일도 힘들다. 무거운 원목상을 낑낑거리고 거실로 끌고 나왔다. 나는 혼자 하는 일에 이제 습관이 되여서 웬만한 것은 다 절로 한다. 혼자서 살다 보면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꽤 많이 생긴다. 두터운 소나무 널판으로 만든 화장대로 써온 그 상은 그러니까 내가 직접 짠 상이다. 아니, 내가 사람을 시켜서 직접 짠 상이다. 목수의 딸이지만 그렇다고 손재주마저 이어받는 건 아니였다. 나는 칼날을 톱날을, 날카로운 날이 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이 손톱깎개나 작은 가위 같은 것이랄지라도. 그래서 료리 같은 건 죽어도 못해먹는다. 엄마가 잃어버린 물건 중에는 아버지가 쓰던 대패나 톱 같은 도구들도 있었을 터였다.  거실의 밥상 앞에 앉아 한숨 돌린다. 무겁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소나무 냄새.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나무냄새가 솔솔 나는 나무상을 내다 버릴 생각을 했다니… 죄의식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어느 순간 나는 말도 안되는 일임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아침나절이 다 지나가 있다. 산보를 나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나는 내올 때보다 더 무거워진 소나무원목상을 다시 침실 침대의 머리맡에 갖다 놓는다. 다른 걸, 일단 다른 걸 먼저 버리는 걸로…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늦은 산보길에 나선다. 이렇게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진행하지 않으면 금방 일상은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아무런 모양을 잡아볼 새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혼자 사는 사람은, 특히 직장이나 꼭 해야 할 일 따위가 없는 사람은 스스로 일과를 만들고 진행시켜야 한다. 나오는 길에 나는 현관에 내다 놓은, 외국 려행 때 사들고 왔던 몇개의 기념품이 담긴 종이봉투를 쓰레기통 곁에 기대여 놓았다. 아직은 쓰레기는 아닌 것 같았으므로.   “언제 이사한 집 보여주실 거예요?” 이양이 또 물었다.  “그거야…” “필요한 거 있으시면 사갖고 갈려구요. 다 두고 가셔서 장만해야 할 것이 많을 텐데…” “그럴 건 없구… 간단한 게 좋아.” 그는 나올 때 자신의 옷가지와 덮던 이불만 들고 나왔다. 다른 물건들은 어차피 거기서도 계속 써야 할 것들이였고 꼭 필요하게 되면 그 때 그 때 살 예정이였다. 친구녀석이 쓰던 무거운 후라이팬과 그릇 세개가 부엌살림 전부였지만 그다지 더 필요한 것도 없어보였다. 거기에 맞게 국수를 삶아 먹으면 되였다. 아직 밥은 한번도 시도해본 적 없지만 그는 조금씩 부족한 부분마저 즐기고 있었다. 근사한 다기가 없어도 그냥 유리컵에 차잎을 넣고 물을 부어마시면 그만, 도마가 없어도 그냥 접시에 대고 대충 썰어서 국에 넣으면 그만, 화병이 없어도 그냥 마시고 남은 와인병에 산보길에 꺾어온 도화 한가지를 꽂아넣으면 그만, 그렇게 살다 보니 그만그만인 것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는 불편함마저 감수하면서 즐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불편하다는 생각마저도 들지가 않았다.  “지금 어디세요?” 이양은 통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듯 끈덕지게 그를 붙잡았다. 그는 빨리 통화를 끝내고 싶었다. “집이야. 별일 없으면 이만.” 그는 재빨리 말을 끊어버리고 빨간 버튼을 눌러버린다. 그는 이양에게서 자꾸 이양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자신을 본다. 뭔 사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면서. 그는 그 때마다 절레절레 머리를 젓는다.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그는 산보를 나오면서 굳이 휴대폰을 갖고 나온 데 대해 막 후회하는 중이였다. 그는 서둘러 휴대폰 전원을 꺼버린다. 지금 산보를 하고 있는 이 순간만은 누군가에게 계속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는 계속해서 아빠트 단지를 돈다. 아침이면 그는 물 한잔을 마시고 나서 아침산보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렇게라도 하면 좀더 하루종일 정신이 나서 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한 산보가 지금은 아예 습관으로 굳어져버렸다. 이양도 물론 잘 알고 있는 습관이기도 했다. 그는 갑자기 등뒤가 쌔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 산보. 이양. 습관. 그가 돌아섰다. 꽃이 지기 시작하고 이파리를 너울거리기 시작한 커다란 오동나무 아래 그의 짐작대로 이양이 서있었다. 한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 밑에는 커다란, 무거워보이는 종이박스를 내려놓은 채. “어떻게… 왔어? 왔으면 왔다고…” 화가 난 듯 그를 노려보던 이양이 가까스레 웃음을 물더니 그에게 손을 저었다. 그가 스적스적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이걸 갖다만 주려고 했는데… 다신 그러지 마세요.” 다가설 때까지만도 이양이 이번 쯤은 뭐라고 화를 낼 줄로만 알았던 그는 이양의 말에 고마워해야 되나 미안해야 되나 어리둥절했다. 이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신의 감정을 감출 줄 알았다. 그런 이양이 대견스럽다가 이어 감탄스럽다가 지금은 무섭기도 했다. 이양의 부드러운 말투 뒤에 숨겨져 있는 로련함에 그는 당황했고 어느 순간 징그러워졌다. 그냥, 화가 난다고 소릴 지르는 게 더 좋을 것만 같이 갑갑하고 피곤했다. 그녀가 화를 안으로 삭히면서 스스로를 감추고저 할수록 그를 향해 올가미 같이 서서히 옥죄여오는 알 수 없는 뭔가가 느껴졌다. 그가 얻어낸 결론은 그녀가 그를 짝사랑하고 있다였다.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거요…” 이양이 낑낑거리고 박스를 든다. 그가 한걸음 다가서서 박스를 받았다. 무겁다. “뭔데?” 그가 물었다. “전기밥가마예요. 아버지가 집에 하나 더 있다고 해서 보내달라고 했어요… 한국 거라서 쓰기 좋을 거예요.” 조선족이긴 하지만 그는 굳이 한국산을 찾는 사람은 아니였다.  “그냥 쓰지 무거운 걸 갖고 오긴…” “우릴 쓰라고 두고 와서 어차피 하나 사야 하잖아요. 저 오늘 오전 가게 휴식이예요. 이따 점심에 나가기로 했어요. 두사람이서 잘 보고 있을 거예요…” 이양은 인츰 돌아설 태세가 아니였다. 별수 없는 일이였다. 아침부터 근처의 카페나 식당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는 망설였지만 결국은 박스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의 등뒤로 조심스럽게 따라오던 이양이 어느새 그와 나란히 서서 그의 손에 들린 박스 한쪽 모서리를 받들어 든다.  그러면서 이양이 혼자소리처럼 중얼댔다.  “동네가 참 조용하네? 좋다…” 출처:2017 제4호
8    [중편]나는 나를 버리기로 했다(2) 댓글:  조회:273  추천:0  2019-07-18
나는 나를 버리기로 했다(2) 박초란   그가 사는 5동은 3동 바로 뒤편에 있었다. 4동은 아예 없다. 3동을 지나 건늠길을 건느려는데 총망히 쓰레기통 옆에 뭔가를 놓고 지나가는 그녀가 보였다. 그의 이웃집 녀자.  “어, 저 녀자? 어떻게 여기 살지?” 이양이 놀란 소리를 했다. “왜 알아?” 내가 물었다.  “지난번에도 우리 가게에 노트 사러 왔었는데… 그 근처에 사는 줄 알았는데?” 이양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의 눈길은 그녀가 버린, 쓰레기통 옆 종이봉투에 가있다.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간다. 머뭇거리기에는 박스가 너무 무겁다. 그것보다는 이양이 보는 앞에서 그 종이봉투를 기어코 줏게 될가봐서였다. 무거운 박스를 내려놓고 이양이 그것을 푸는 새, 그는 계속 그 종이봉투가 생각난다. 이웃집 녀자가 버린 종이봉투. 오늘은 대체 뭘가? 그는 궁금하고 또 궁금해진다.  어제는 접시 하나에 숟가락 두개. 그제는 조선말로 된 책 여섯권. 그리고 그그제는 옷 몇벌. 그리고 그그그그제는 새 노트와 잡지 네권. 그 앞서 며칠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이 많았던 물건들… 조선말 책이라니… 그는 그 책들을 이리저리 번져보며 흥흥 코노래를 불렀었다. “아침은?” 이양이 물었다. “아직… 이따 알아서 먹을게……” 그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럼 같이 먹어요. 지금 내가 가서 채소며 사올게요. 쌀은 있나?” 이양이 부엌으로 가서 여기저기 열어본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든다. “쌀은 없어… 됐으니까 오늘은 그냥 가줄래? 좀 있다가 친구가 오기로 했어.” “그래요? 모처럼 오늘 시간 냈는데… 이 먼데까지 왔는데 밥도 차도 안 주고 쫓을내기예요?” “차? 어쩌지 생수도 없는데…” 이양은 수도물은 아예 안 마시는 사람이였다. 고향에서는 돌틈에서 굴러나오는 샘물을 마셨는데 수도물에서 역한 냄새가 난다며 끓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럼 뭘 마시고 뭘 먹고 살아요?” 이양이 정색해서 물었다. “그냥 수도물을 받아서 끓여 마셔. 그게 편해. 굳이 생수를 주문할 필요도 없고.” “며칠 놔뒀더니… 이렇게 막 사시면 어째요?” 이양은 쉽게 그를 놔줄 기세가 아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급해진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먹고 살아… 가서 너 일 봐. 걱정 말고.” 그는 두 손으로 떠밀다 싶이 이양을 현관으로 내민다. “아직 집구경도 못했는데…” 이양이 결국은 그에게 떠밀려 신을 신고 황당해진 표정을 감출 생각을 않고 문밖으로 나선다. “잘 가.” 그가 인사를 하고 창밖으로 이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신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종이봉투는 거기에 있었다. 그는 제꺽 종이봉투를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그는 그런 그를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는 이양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쳤다. 잠시 그 자리에 굳어져버린 그와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지켜보던 이양은 더 뭐라고 하지도 않고 꼿꼿이 몸을 돌려 가버렸다. 그는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되여서 현관문을 닫았다. 봉투 안의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싹 사그라져버렸다.    조금씩 산의 릉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숲 속에서 나온다. 교외에 살고 있는 것 중의 행복한 일은 바로 근처에 나무숲들이 줄지어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숲에 안길 때마다 느낀다. 오늘은 소나무숲, 래일은 아카시아나무숲 그다음은 은행나무숲… 나무들이 커가고 무성한 수림을 이룰 때까지 여기 오래오래 살고 싶어진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삼환로변의 아빠트를 처분하고 이렇게 교외로 이사나온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은 아무도 리해해주지 않았다. 잘 나가던 애가 왜 그래? 다들 그런 표정이였다. 나는 업계에서 알아주는 광고회사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 사장은 회사의 얼마간의 주식을 떼여주며 내가 남기를 권했다. 내 이십대의 절반과 삼십대의 대부분 시간들을 그 회사를 키우는 데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나는 커다란 성취감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애를 느꼈다. 내 자신이 점점 빈 껍데기로만 남겨지는 것 같았다. 그 때에야 나는 에서 힘든 하루를 보낸 줄리가 퇴근 후 주방에서 초콜릿크림을 저으면서 ‘확실한 게 하나도 없어서 불안한 세상에서 재료를 넣고 정해진 시간 동안 저으면 맛있는 초콜릿크림이 만드어진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한 말을 조금이나 리해할 수가 있었다. 그전까지만도 모든 게 확실한 그런 세상을 살고 있었던 나였으니. 그 확실했던 것들이 불안한 것으로 바뀌는 데는 불과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라는 걸 나는 그 때야 안 셈이다. 명예나 부가 다 있는데 뭘, 하면서 그냥 모르는 척 살 수가 있을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보았지만 일에 대한 열정과 끈기는 거기서도 빛을 발했다. 나는 절대로 그냥 못 본 체하고 만족해할 인간이 아니였다. 정작 일을 그만두려는 결정은 어렵게 내린 결정이였다. 어느 한순간에 내린 결정이 아님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반년 가까이 더는 밤 늦도록 야근을 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나는 서서히 조심스럽게 일에서 물러날 준비를 해왔던 셈이였다. 일에만 배여온 습관이란 것은 마약과도 같은 금단 증세를 보였다. 일찍 자야 되는데 다시 보고 있으면 어느새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들고 있었다. 그 무렵 그동안 읽으려고 사다가 무져놓은 책들을 저녁시간을 리용해 읽고 있었고 그렇게나마 자신을 위하는 듯한 위안을 받고 있었다. 서서히 밤샘을 하면서 책을 읽는 일이 밤샘을 하면서 일을 하는 것으로 바뀌여가고 있음을 그 순간에는 몰랐다. 그 습관의 힘의 존재를 알았을 때 나는 아연해졌다.  결국 나는 휴식할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 되여있었다. 스스로를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어떤 것이 진정한 휴식인지를, 어떤 것이 몸이고 어떤 것이 마음이고 그 둘의 련관관계가 어떤 것인지…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남겨진 인생의 숙제가 되였다.  산보를 시작한 것은 내가 한번도 몸을 위해서 몸을 움직여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였다. 몸은 늘 일을 위해서 뭔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숨가쁘게 움직여왔었다. 피곤해도 아파도 그리해왔다. 요가를 하고 있던 친구가 요가를 건의해온 것도 3년 전 일이였지만 늘 바쁘다는 핑게로 가질 않았다. 그 때 그 친구가 척추 교정을 필요할가 있는 것 같다고 귀띔을 했었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때의 나는 얼마나 우둔하고 무지한 건가?   갑자기 발밑에 뭔가가 채일 듯해서 급히 들었던 발을 좀더 크게 앞으로 내디뎠다. 그 통에 평형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뭐지?” 회색의 커다란 것이 분명 발밑에서 움찔했다. 바로 서서 허리를 굽히고 그것을 다시 내려다본다. 어둠안에서 그것은 꼼짝하질 않고 웅크리고 있다. 눈을 바싹 대본다.  “쥐인가?” 쥐라기엔 너무 크다. 그리고 무슨 놈의 쥐가 이렇게 웅크리고만 있겠는가? 언녕 도망가고 말지… 그렇다고 손가락을 대기에는 징그러운 생각이 든다. 그 때였다. “뭐하세요?” 누군가가 내 곁에 다가오며 역시 허리를 굽히고 그것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머!” 내가 낮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것에 집중해 있어서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자취를 듣지 못한 탓에 놀란 것도 있지만 더더욱 놀란 건 그의 말 때문이였다. 그는 정확하게 그것도 류창하게 조선말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런 외딴 교외의 동네에 조선족이 있었어? 그리고 내가 조선말을 안다는 건 어찌 알고? 그것은 놀라움이였다. 그리고 힐끗 올려본 나는 더더욱 놀라고 말았다. 맞은편 집 남자였다. “아…”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이거 고슴도치 같은데요?” 남자가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전등을 켰다. 불빛 사이로 고슴도치가 촉촉한 코를 날름거렸다. 까맣고 작은 두 눈을 들었다.  “미안, 너도 이런 불빛은 싫지?” 남자가 급히 스마트폰을 껐다. 고슴도치라니? 나는 신기해서 그것을 만져보려고 어둠 안으로 손을 내민다.  “찔리면 아플 거예요.” 남자의 한마디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래요? 정말 찔릴가요?” 그러면서 나는 손을 움츠렸다. “아니요. 그것보다는 동물들은 사람냄새가 묻어나는 걸 안 좋아할 수도 있어요.” 남자가 말을 이었다. “고슴도치 처음 봐요?” “네, 처음이예요. 신기하네요. 이렇게 동네 숲에서 다 볼 수가 있다는 게.” 어둠 안에서 고슴도치가 꼼짝 않고 계속 웅크리고 있다. “헌데 이렇게 길에 나와있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가끔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이 길로 다니기도 하던데…” 걱정이 든다. 이 아이를 어떻게 치워야 하나? “그럼 우리 빨리 갑시다. 그러면 저 애도 빨리 갈 거예요.” 남자가 웃었다. 남자가 앞서 걷고 내가 뒤따랐다. 숲이 끝나는 어구지에서 내가 다시 걱정했다. “갔을가요?” “갔을 거예요. 아니면 다시 가서 확인해볼가요?” “그럴가요.” 이번에는 남자가 왼편에 서고 내가 오른편에 서서 나란히 고슴도치를 만났던 곳으로 향한다. 어둠이 밀려든 숲, 바람소리가 난다. 박쥐 두마리가 허공에서 부지런히 날아옌다. 이맘 때면 언녕 떠나간 숲길이였다.  “여기가 맞나?” 내가 주변을 휘둘러본다. 남자도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맞아요, 했다. “없는 걸 보니 갔네요.”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든다. 찔리더라도 한번 만져볼 걸 그랬나? “생각보다 빠르네요.” 조금 더 어둠 안에 머무르고 싶어진다. “좀더 걸을래요?” 남자가 물었다. 나는 어둠 안에서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남자가 왼편에 서고 내가 오른편에 서서 나란히 앞으로 걸었다. 한번도 이렇게 어두운 숲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남자가 곁에 있다는 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져 어둠도 두렵지가 않았다. 침묵이 내린 대지를 우리는 침묵을 하면서 걷는다. 며칠 전에 불어친 황사바람에 날려 떨어진 아카시아꽃들이 발밑에 밟혀 사르락사르락 소리를 냈다. 숲이 끝나가는 끝자락에서 남자가 멈춰섰다. 숲이 열리고 남쪽 하늘로 두툼하게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집채 만한 구름이 낮게 깔려져 있었다. 어둠 안에 서서 장엄하기까지 한, 어쩌면 멀리 서장에 있는 부다라궁을 련상케 하는 구름덩이를 바라본다. 나는 남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런 남자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 남자의 어깨를 이렇게 바라보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살풋이 들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아카시아꽃향마냥 은은하게. 남자의 머리 우로 나무잎 몇개가 날려 떨어진다. 별 몇개가 머리 우에서 반짝거린다. 남자는 아까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고슴도치를 닮은 것 같다. 다만 남자에게는 뾰족한 가시가 없을 뿐. 저러다가 남자가 정말로 고슴도치로 변해버리는 게 아닌가, 근심스럽다.  나는 이번에는 찔리더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후텁지근했던 공기가 어느새 차거워져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렸다. 어둠에 둘러싸인 숲, 그녀는 그 때까지도 거기 서있었다. 얼마나 잔 걸가? 한참 시간이 흐른 듯 아까 숲 끝자리로 나오면서 보았던 집채 만한 하얀 구름덩이가 이제는 어둠 안에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다. “아직 계셨네요?”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녀자가 대답 대신 어둠 안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이였다. 잠들어버린 그를, 잠든 내내 조용히 지켜만 봐준 사람은 처음이였다. 그의 어머니마저도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편히 침대에 가서 누워자라고 귀띔을 해주군 했다. 친구녀석은 또 시작이군, 하면서 언제라도 잠든 그를 내버려두고 가버리군 했었다. 그는 친구녀석 앞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함을 어둠 안에서 느낀다.  그는 처음 그녀의 곰인형을 집어 들여오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때부터였을가? 그는 인연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무섭지도 않았던 걸가? 그는 궁금해지기도 한다. “춥지 않으세요?” 그가 물었다. 밤바람이 찼다. “아니, 괜찮아요.” 그녀는 그러면서 얇은 셔츠의 옷깃을 여민다. 그가 입고 있던 운동복을 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그의 손에서 옷을 받았다. 그는 그녀가 그의 커다란 운동복을 어깨에 걸치는 것을 지켜본다. 지켜보는 그도 그의 옷을 받아 입고 있는 그녀도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아주 오래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이마냥 익숙한… 그가 조금 앞장서 걸었고 그녀가 곧장 뒤따라왔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숲 앞으로 뻗어있는 길을 따라 5분 정도 나가면 큰길이 나오고 큰길을 따라 십분 정도 걸어가면 그들이 살고 있는 아빠트단지가 나온다. 앞에 바라보이는 큰길 녘 가로등이 켜져 있어 울퉁불퉁한 흙길도 걷기가 불편하지 않다. 그와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없이 걷기만 한다. 긴 그림자가 뒤따라왔다. 큰길로 련속 차 두대가 지나갔다. 첫 차가 지나가기 전 그는 뒤따라오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5동 앞. 녀자가 옷을 벗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두 손을 내밀다 말고 주춤해진다. 부쩍 피기 시작한 장미덩굴 아래에 이양이 서있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인사를 했고 그는 옷을 받았다. 이양의 굳어진 눈빛이 날카롭게 그의 손에 톡톡 부딪쳤다. 이양이 그와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늦-었네요?” 이양의 첫음의 악센트가 유난히 길고 높았다.  “두분, 어데 같이 갔다 오나 봐요?” 이양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려고 애쓰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산보 갔다 오는 길이야.” 그가 성큼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그런 그와 이양을 살풋 올려다보았다. “어라, 언니였어요?” 가까이로 다가온 이양이 그녀를 보며 반색한다. “누구?” 그녀가 조심스럽게 젊은 녀자의 얼굴을 뜯어보지만 아무런 인상이 없다. “날 알아요?” 그녀가 물었다. “그럼요! 며칠 전에도 우리 가게에 왔었잖아요. 노트 사러…” 그녀는 아아, 하고 머리를 끄덕인다.  “카운터에 있던 아가씨네요!” “네, 맞아요. 이양이라고 해요. 반갑네요… 헌데 두분은 알던 사이신가요?” 이양은 그러면서 슬며시 그의 얼굴을 눈빗질한다. “아, 아까 산보하다가 그냥…” 그녀가 웃었다. 왠지 애매한 립장이 되여버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 사장님 여기 집에서 사는데, 그럼 언니도 여기 사세요?” 그녀가 여기 살아요, 하면서 일층의 아빠트 창문을 손짓했다. “와, 이런 우연이… 맞은편 집이네요. 그럼 우리랑 이웃인 거죠?” “이양, 우리라니?” 그가 반박했지만 더 끼여들 틈이 없이 이양이 계속 말을 쏟아냈다. “언니랑 사장님 아는 사이인 줄 알았어요. 어차피 지금은 아는 사이 맞잖아요. 하하하, 저 슈퍼에서 맥주 사들고 왔는데 가까운 이웃 끼리 한잔 할가요?” 이양이 그녀의 팔짱을 꼈다. “아니, 전 그만 들어가봐야 돼서… 두분이서 마셔요. 그럼.” 그녀는 급히 말을 끝내고 조용한 방안으로 스며들고 싶다. 젊은 녀자의 한 옥타브 높아진 듯한 말소리도 친근한 척하는 행동도 거슬렸다. 그녀가 몸을 빼내여 아빠트로 들어가려는데 이양이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언니, 언니가 대답 안하면 사장님이 또 절 내쫓으실 거예요. 지난번처럼.” 이양이 그러면서 울상을 지었다. “언니…” “언니-” “언니?” … … 이양이 끝없이 언니를 불러댔다. 그녀의 어깨에 기대온 이양의 입에서 옅은 술내가 났다. “이미 마신 것 같은데?”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한발 나서 이양을 잡았다. “술 마셨어?” 이양이 이번에는 그에게로 기대여왔다.  “조-기 서서 기다리다가 딱 하나 마셨지…” 이양이 가리킨 아까 서있던 곳에 비닐주머니 하나가 놓여있었다.  “바로서봐.” 그가 이양을 밀어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양은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언니, 같이 마셔요. 제발.” “이거 몇개나 마신 거야? 아니, 다섯개나 마신 거야?” 그가 비닐주머니에서 빈 캔을 련속 주어내여 쓰레기통에 던진다. 그리고는 아직도 묵직한 비닐주머니를 들고 다시 이양의 팔을 잡았다.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그는 화가 나있었다. “안 갈 거예요. 이거 다 마시기 전까지는.” 이양이 어거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술에 많이 취한듯 싶었다. 그가 이양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양이 소리를 질렀다. “아프다구요. 아프다구요! 사람을 꼭 그렇게 쫓아버려야겠어요?” 이렇게가 아니고 그렇게라니? 그녀는 이번 뿐 아니라 전번도 있었구나 눈치챘다. 쫓아냈어? 왜? 같이 사는 건 아닌가 보네… 헌데 다행이라는 이 느낌은 대체 뭐지? 그녀는 까치마냥 우짖어대는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있다가 씁쓸해진다. 저 사람이 뭐라고… 이양의 느닷없는 울부짖음에 그가 깜짝 놀라 잠간 팔을 놓아버린 새 이양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다시 그녀에게로 매달렸다. “언니, 그럼 언니가 저랑 마셔요. 넹~”  “일단 들어가 재우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이른 저녁이였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동네를 소란스럽게 해서 좋을 일은 없을 터였다. 그녀나 그나 어차피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할 터이니까. 그녀가 이양을 달랬다. “알았어. 그럼 들어가서 딱 한잔만 마셔…” 그녀가 이양을 부축해서 안으로 들였다. 이양이 희죽희죽 웃으며 그녀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따라 들어왔다. 문앞에서 그녀가 그를 되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서세요. 문 열게요.” 그가 열쇠를 꺼내서 문을 열었다.  이양이 먼저 문을 젖히고 집안에 달려들어갔다. “집에 왔네… 좋다~” 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들어가기를 권했다. “들어오세요. 제가 혼자서 저 친구랑 있기엔 불편해서 그래요.” 그가 한숨을 내쉬였다. 그녀는 빨리 자신의 침대로, 하다 못해 싫었던 쏘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남자의 한숨 앞에 별수 없이 남자의 집 문턱에 발을 들이민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익숙한 노란 베개를 벤 곰돌이인형을. 여기저기 방을 기웃거리던 이양이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이양의 품안에 그것이 안겨져 있었다. “사장님, 곰돌이 좋아하셨어요? 웬 이런 게 여기 있을가?” 이양은 아까와는 달리 몸가짐이 반듯해 보였다. “그건…” 남자가 다가가 이양의 손에서 인형을 빼앗았다. “아무 거나 막 다치는 거 아니다.” 그가 급히 인형을 침실로 들여갔다.  이 남자는 뭐지? 싶어진다. 그러다가 서뿌른 판단은 금물이란 생각도 든다. 그런 곰돌이인형이 어데 하나 뿐일라구? “인형 좋아하시나 봐요?” 남자가 거실로 돌아오자 그녀가 물었다. “아, 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뭐랄가요… 아까 그 인형을 보면 내 자신을 보는 듯해서……” “그건 또 뭔 말씀이세요? 사장님. 내가 사장님 자는 걸 몇번 봐서 아는데… 전혀 닮지 않았거든요!” 이양이 빈정거렸다. 그의 얼굴로 어색스런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그렇고 참, 앉으세요… 이 집엔 쏘파 같은 게 없어서, 그냥 여기 앉으세요.” 그가 커다란 방석 하나를 나에게 내민다. “나는요?” 이양이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넌 여기…” 그가 자신의 옷을 거실바닥에 깐다. 이양이 만족스럽다는 듯 성큼 그 우에 앉았다. 그제야 나는 남자의 집 거실을 휘둘러본다. 거실은 정말 내가 갖고 싶었던 그대로 텅 비여있었다. 텅 빈 거실엔 나무상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거짓말처럼 방석도 내가 깐 것이 유일했다. 내가 지금 지독하게 갖고 싶은 거실, 나는 잠간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실실 웃어버리고 만다. “완벽하네요!” 내가 감탄했다. 이양이 재빠르게 되물었다. “완벽하다구요? 내 보기엔 넘 없어보이는데… 사장님, 돈 다 어데다 쓸려구요?” 남자가 아무 대꾸도 없이 캔을 따서 내 앞에 내려놓는다. “마시죠…” 이런 텅 빈, 내가 꿈꾸던 공간에서 맥주 한캔 쯤은 마셔줘야지 싶다. 집구조가 똑같은 터라 슬슬 다른 칸들도 궁금해진다.  “미니멀 라이프네요.” 내가 캔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굳이 그걸 쫓은 건 아닌데 어찌하다 보니 이렇게 살게 됐네요.” 그가 웃었다. “요즘은 심플족이 류행이라지요?” 이양이 비꼬는 듯 입꼬리를 샐쭉거렸다.  이양의 말에는 아랑곳 없이 나는 계속 말했다. “혹시 《나는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책 보셨어요? 그 책이 나오고 또 다른 이는 《나는 어지르고 살기로 했다》 그런 책을 냈더라구요…” “네, 《나는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책소개는 인터넷에서 봤어요. 이쪽 책제목이 재밌네요…” 그가 머리를 끄덕였고 이양이 말을 받았다. “《나는 뻔뻔하게 살고 싶다》라던가 《나는 아이없이 살기로 했다》 그런 책도 있던데요?” 이양의 얼굴이 납빛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주는 유리잔에 따라 마셔야 제맛인데…” “또 어델 가?” 그가 이양을 잡아 앉히려고 손을 내밀었다. “유리잔 찾으러요.”  이양이 그의 손을 피해 창문 쪽으로 에돌아 부엌으로 잔걸음으로 나갔다. “잔 같은 거 없어.” 그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있네요…” 이양이 유리잔 두개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거… 안 쓰던 거야.” 그가 말했다. “써라고 있는 거라구요.” 이양이 갖고 온 잔에 맥주를 붓는다. 동그란 유리잔이 눈에 익다. 내가 그그저께인가 버린 물건 중에 저런 유리잔도 두개 있었는데… 나는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캔맥주를 든 채 사색에 잠겨있다. “저도 이렇게 텅 빈 공간을 갖고 싶었어요.” 내가 말을 꺼냈다. 남자가 반응이 없다. 이양이 남자를 툭 쳤다. “또 잠든 거죠?” 남자가 어, 하고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놓쳐버렸다. 남자가 다급히 캔을 다시 잡았지만 이미 맥주가 쏟여져서 남자의 하얀 티셔츠자락을 흠뻑 적셨다. 이양이 깔깔 웃더니 뛰여가 부엌에서 행주를 찾아들고 와서 흘려진 맥주를 닦았다. 휴지를 찾아보았지만 상 우에도 상 밑에도 없다. “사장님이 깜빡 잠드는 버릇이 있어요. 이런 사람 본 적 없죠?” 나는 그제야 아까도 남자가 잠든 거였구나, 깨달았다.  문득 잠들어버리는 남자. 나는 남자의 집도 남자도 신기해졌다. 남자가 옷을 바꿔입으러 침실로 들어갔다. 이양이 물었다. “조선족이죠?” “티가 나?” 내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이양이 중국어가 아니라 조선어로 말했다. “저 분한테서 배운 거야?” 내가 침실 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아니, 제 고향도 연변이예요. 조선족들과 함께 한동네서 살았지요…” “어머, 그랬어?” 나는 리유없이 반가워진다.  그동안 나도 외로웠던가, 싶던 찰나.  “헌데 왜 저한테 아까부터 반말이세요?” 금방까지 살뜰하던 이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언니라고 불러주니 언니라도 된 줄 아셨나?” 아주 작게 혀아래소리로 이양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렷이 고막을 쳐왔다. 뭔, 이런 애가? 눈길을 들어 그 애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 대신 잔을 들었다. 얘는 대체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다. 이양도 따라서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다.   “아니, 둘이서 신나셨네요?” 남자가 티셔츠를 바꿔입고 나오다가 비워진 잔을 보면서 말했다. 남자는 아까와 똑같은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자의 똑같은 하얀색 티셔츠마저 만족스럽다. “언니랑 친해질려구요…” 이양이 다시 신이 난 듯 떠든다. 아까의 묘한 표정은 가뭇없이 사라져 있었다.  “언니를 처음 볼 때부터 친근해보였거든요. 그런 거 있잖아요… 가게에만 있어서 저 친구도 없어요…” 이양이 내 앞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웠다. “…” 내가 웃었다. 잠간 침묵이 흘렀고 남자가 말을 꺼냈다.  “고향이…” “아까부터 나도 묻고 싶었는데 언니, 고향이 어디세요?” 이양이 남자의 말을 급하게 나꿔챘다.  이거였구나. 이양이 견제하고저 하는 건. “물학성이라고 아세요?” 그녀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되물었다. 이번에도 남자의 옆에 붙어앉다 싶이했던 이양이 말을 먼저 받았다. “물학성…” 남자가 박수를 쳤다. “저, 이양의 고향도 물학성이라고 했지?” 이양의 낯빛이 어색해졌다가 금세 본래대로 돌아왔다. “네, 우리 집도…” “그럼, 알던 사이일지도 모르겠네?” 남자가 호기심을 표해왔다. “우리 집은 소학교 근처에 있었는데 어데 집이 있었던 거야?” 내가 눈길을 그녀의 얼굴로 박으면서 물었다. 어쩌면 오다가다 만났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아니면 우에 오빠나 언니나 있다면 모르지… 알고 있을지도?” “시내랑 좀 떨어진 곳에서 살았어요.” 이양이 담담히 말을 맺었다. 그다지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보였다.  “너 오빠 둘이 있다고 하질 않았어? 큰오빠가 너랑 아홉살 차이가 난다고?” 남자가 집요하게 이양에게 물었다. “그럼 나랑 동갑인데?” 내가 말했다. “저보다 어리시네요?” 남자가 나를 보며 웃었다. 이양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님, 저 먼저 가볼게요. 넘 늦은 거 같아서…” 너무 갑작스러워 남자가 이양을 쳐다보았다가 나를 쳐다보고 나를 쳐다보았다가 이양을 쳐다보았다. 이양은 그대로 휭하니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으로 나가면서 아직 주방 바닥에 놓여있는 밥가마를 가리키면서 밥 잘해먹어요, 했다. 붉은색의 전기고압밥가마였다. 익숙하다 싶어 생각해보니 엄마가 잃어버린 밥가마도 그것과 똑같이 생긴 거였다.  현관에서 신을 신던 이양이 갑자기 신발장 밑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집어내더니 내게 말했다.  “이거, 언니가 내다버린 거죠?” 며칠 전 아침에 내다버린 종이봉투였다.  “저건?” 나는 아연해진다. 아까부터 아니겠지? 했던 것들이 명확해져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버렸던 곰돌이도 컵도 그리고 아마도 책이나 다른 것들이 고스란히 이 집안 어덴가로 스며들었을 것이였다.  기분이 찜찜했다. 이미 내가 버린 것들임에도 기분은 찜찜했다. 그렇다면 내가 입던 옷도? 그것은 이미 불쾌감의 수치를 훨씬 넘어가있었다. “왜?” 스스로도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왜 이양이 기어코 내게 보이려 한 건지 그걸 묻고 싶었는지 아니면 남자가 내가 버린 것들을 주어들인 리유를 묻고 싶은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이양이 사라졌다. 가게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지만 사실이였다. 그동안 이양을 믿어온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차피 가게는 조만간에 이양에게 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였다. 친구녀석 덕분에 투자가 잘되여 생각지도 않은 돈을 벌게 되였고 가게가 그다지 그에게 큰 의미가 있던 건 아니였다. 메일함에서 이양의 편지를 발견한 건 불쾌했던 그 날이 있고 나서 딱 열흘 뒤였다. 열흘 뒤 이양은 가게를 팔았고 그 돈을 가지고 사라져버렸다. 이양이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가게를 팔아넘겼다는 것도 그는 이양의 메일을 보고서야 알게 된 셈이였다.   이양의 편지는 이랬다.   사장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처음으로 저를 사람대접 해준 게 아마도 사장님이였을 거예요. 그래서 오래 사장님 곁에 남고 싶었어요. 제 얘기를 꼭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어쩌면 사장님이라면 그런 저를 보듬어 안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우리 집 막내였지요. 오빠가 둘이 있다고 했는데 실은 셋이였어요. 셋째오빠가 내가 여길 오기 전해에 죽었거든요. 전혀 갈 일 없는 6층 베란다에서 추락해서 죽었지요. 저의 아버지는 도둑이였어요. 살던 고향에서는 더는 살 수가 없어서 도망을 쳐서 왔다가 그 곳에 정착한 거라고 했어요. 거기서 엄마를 만났고 엄마는 두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아버지가 도둑이라는 걸 알았지요. 그리고 고향에서 도망을 했던 건 도둑질을 하다가 실수로 사람이 다쳤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 때 알았다고 해요. 엄마는 그래도 두 아이를 보더라도 다시는 도둑질을 안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그렇게 살았나 봐요. 그렇게 셋째아들을 낳고 또 저를 낳았지요. 제가 일곱살 때 큰오빠가 도둑질로 소년원에 붙잡혀 들어갔어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어머니 몰래 도둑질을, 그것도 재간이라고 전수해준 거라나요… 어머니는 결국 화김에 목을 맸어요. 셋째오빠가 죽은 것도 도둑질과 관련이 있다는 걸 나도 알아요. 엄마가 죽고 나서 아버지와 오빠들은 아예 일을 할 예산은 없이 여기저기로 나돌아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기 시작했으니까요. 아마도 큰오빠 이름만 대면 언니는 분명 우리 집을 알 거예요. 큰오빠가 소년원에 가게 된 것도 그 언니 때문이니깐요. 한창 사춘기였던 큰오빠가 사랑했던 녀자였으니깐요. 민희, 차민희. 그 언니의 이름이였죠. 아주 어렸을 때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상하죠. 나는 첫눈에 알아봤는데 그 언니는 나를 못 알아보더라구요. 큰오빠가 훔친 건 책이였어요. 그 언니가 책을 좋아한다고 서점을 턴 거죠. 언니가 큰오빠가 가져간 한무더기의 책들을 내놓지만 않았더라도 큰오빠는 탈 없이 학교를 마치고 대학도 갔을 거예요. 큰오빠는 공부를 잘했거든요. 큰오빠는 절대 그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돈을 훔치진 않았어요. 큰오빠는 그 당시에만도 순수한 사랑을 꿈꾸던 소년이였는데 거기에 어찌 훔친 돈 같은 것이 그 사랑에 끼여들게 하겠어요. 사람들은 아버지가 도둑이라는 것만 믿고 그 자식도 도둑이라고 밀어붙여서 돈과 책을 같이 잃어버렸다는 서점주인의 말만 믿은 거예요. 아마도 민희언니도 믿질 않았을 거예요. 헌데 서점에서 잃어버린 2000원은 결국 오빠가 훔친 거 맞아요. 큰오빠가 아니라 둘째오빠가. 그런 집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가 없었어요. 아무도 나를 가까이하질 않았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혼자였어요. 엄마가 죽고 나서는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해야 했어요. 밥 하고 설겆이 하고 아버지와 오빠들의 빨래를 하고. 나는 그러면서 절대로 아버지나 오빠들처럼 살진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요. 엄마를 그렇게 죽게 만든 아버지가 너무 미웠어요. 나와 년년생인 셋째오빠가 죽고 나서 나는 그 집을 떠나야겠다고 작심했어요. 그리고 끝내는 아버지의 돈을 훔쳐 갖고 북경 행 기차를 타게 된 거구요. 그래도 운 좋게 사장님을 만났고 쭉 이대로 오래동안 살 줄 알았어요.  이 돈은 내가 벌어서 꼭 갚을게요. 도둑년이라고 욕하진 말아주세요.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그리고. 갖다 드린 밥가마는 실은 언니네 집 거였어요.   두번째 편지는 편지라기보다 쪽지 같았다.   나는 나를 버리고 싶다.   딱 한마디 뿐이였다. 처음에는 화를 참지 못해 그는 펄펄 뛰였다. 녀동생처럼 믿고 아꼈던 아이였다. 친구녀석의 첫 반응은 신고할 거야? 였다. 결국 그는 신고를 하질 못했다. 가차없이 당했건만 가차없이 몰아붙이기는 싫었다. 이양에게 한번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이양의 큰오빠처럼 결국 도둑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겠지? 암?! 어차피 돌려줄 거라고 말했지 않았는가… 그랬다가도 그는 또 화가 나서 펄쩍 뛰였다. 수남에서 수납으로 불리워졌을 때 보다도 더 황당했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냥 달라고 하지, 달라고… 그는 상심하고 또 상심했다. 그는 이양의 마지막 한마디가 맘에 걸리기는 했다. “나는 나를 버리고 싶다.”라니.    그 다음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첫 비였다. 그는 잠 속에서 투덕거리고 자신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었다. 분노를 하다가도 잠들 수가 있다는 것, 그는 그것이 복인지 슬픈 일인지 헛갈려졌다.                        열흘 동안 그는 옆집 녀자를 보질 못했다. 그러니까 열흘 동안 가게마저 아예 방치하고 낑낑 앓고 있었던 건 그녀 때문이였다. 옆집 녀자는 더 이상 아무런 물건도 내다 버리지 않았다. 쓰레기를 버리러도 나오지 않은 듯했다. 잠든 새에 나왔다 다시 들어갔나? 그는 온통 그녀의 집문소리에 신경이 씌여져 있었다. 뭐라고 해석을 해야 할 테지만, 결국 열흘을 낑낑거리며 합당한 리유를 찾고저 했지만 모든 게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내리깐 눈초리에 걸려있던, 넌 이상하고 더러운 인간이야! 하는 말을 읽어냈다. 스스로도 자신이 이상해 보였고 그러는 그녀가 충분히 리해가 갔다. 차라리 그 순간에 잠들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는 생각한다. 그는 주방 바닥에 놓여있는 전기밥가마를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비가 내리기 전부터 비가 주룩주룩 퍼붓고 있는 어둠이 깃들이 시작한 저녁녘까지 수십번을 반복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본다. 그녀가 자신이 이상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용기를 내여 무거운 전기밥가마를 들고 문을 나선다. 이제 그녀의 집 문앞에 그는 서있다.  초인종을,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 전기밥가마가 자꾸 아래로 처진다.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침실 침대에 누운 채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는다. 한번, 두번, 세번, 네번. 네번째 만에 벨소리가 끊겼다. 집안에 흐르는 정적. 숨을 크게 들이쉰다. 나는 옆집 남자일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다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한번, 두번, 세번. 이번에는 세번 만에 끊어버렸다. 정적.  아까보다 더 깊어진 듯한 정적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마주쳐보자. 이렇게 피하고 있는 것도 불편하니까. 그렇다고 이사 가? 나는 그 날부터 쭉 이사 갈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사 가라고 해볼가? 나는 침실 안을 휘둘러본다. 집은 내가 이제 퇴직을 하면서 말년까지 쭉 살 생각으로 고심고심하면서 고른 집이였다. 사십도 안돼서 벌써 퇴직하고 뭘하면서 살 건데? 주변사람들의 걱정에도 아랑곳 없이 꿋꿋이 실행에 옮긴 그 결과물이였다. 천천히 할 것들을 찾아봐야지 뭐… 그러면서 시작했던 것이 고작 버리기였고 미니멀 라이프는커녕 이런 사달이 나고야 만 거였다. 나는 이번에는 꼭 남자의 입에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길에 나서면 여기저기서 반색했다.  네가 민희니? 북경대학에 다닌다는… 연구생공부를 할 무렵이였고 엄마는 고향에 어쩌다 온 딸을 매일이다 싶이 여기저기 끌고 다니길 좋아했다. 그 때만도 고향에는 오래도록 같이 지내온 많은 이웃들이 살고 있을 때였고 곧바로 천지사방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모를 때였다.  갖다 먹어유… 떡이며 과일이며 먹으라고 떠밀어주는 인심 좋은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이 있었고 북경엔 땅 밑으로 기차가 다닌다는 게 정말이예요? 하고 궁금해하는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그 날도 그녀는 엄마와 함께 시장나들이를 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과일이며 먹거리를 사고 있었고 막 채소를 사러 내려갈 참이였다. 채소난전이 벌려져 있는 입구에서 그녀는 그 아이를 보았다. 이선. 그 애의 이름은 이선이였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였고 그녀의 가슴에 아프게 묻혀져 있는 아이. 그녀 기억 속의 그는 아이였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로부터 9년이란 세월이 흘러있었다. 이선은 온갖 채소들을 벌려놓은 좌판 뒤에서 채소를 팔고 있었다. “이거 하나 더 드릴게요. 다음에 또 사주셔야 돼요. 예쁜 아줌마…” 도마도 하나를 더 올려놓으며 능청스럽게 장사거래를 하고 있는 이선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그 사람이 이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너?” 그녀는 좌판 밖에 굳어져버렸다. 연구생공부를 하고 있는 자신에 비해 이런 난전에서 좌판을 벌려놓고 채소장사를 하고 있는 이선이라니. 언제 소년원에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그녀는 몸을 돌렸다.  “저 애 너 한반에 다니던 애가 아니였니? 그 때…” 엄마는 물어왔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때 그 책들을 내놓지만 않았어도… 왜 그랬던 걸가? 그녀는 이선을 좋아했지만 도둑이라는 이선마저 좋아할 용기는 없었다. 이선은 책만 훔쳤다고 했다. 그녀를 위해서. 열두권짜리 세계명작선집이였고 그녀도 이선도 돈이 없었다. 당시 유치원 보조선생님으로 일한 엄마의 월급은 쓰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았다. 반짝이는 금줄로 테두리를 한 세계명작선집은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책은 가져왔지만 돈 같은 건 절대 훔친 적 없어.” 서점주인이 경찰과 함께 학교에 나타났을 때 이선은 분명히 말했지만 그녀는 믿질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선의 아버지가 유명한 도둑이라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녀는 책상 안에 넣어둔 책들을 꺼내 묵묵히 서점주인의 앞으로 내갔고 그 날 오후 그녀는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다. 후에 건너서 들은 얘기로는 서점주인이 그 날 책을 들여오려고 찾아놓은 2000원이나 되는 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고 했다. 한달 월급이 사오백원이던 그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돈이였다. 무거운 책을 안고 나가는 그녀를 지켜보던 이선의 눈빛을 그녀는 또렷이 기억한다. 절망과 실망과 슬픔이 범벅이 된 그런 눈빛,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질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선을 만났던 걸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문을 연다. 먼저 빨간색의 전기밥가마가 보였고 그다음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말소리가 둥둥 귀가에 울린다. “이걸, 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어이없게도 나는 모든 것을 떠나서 갑자기 남자의 기면증이 궁금해진다. 인터넷에서 찾아읽은 기면증이 바이러스 감염에 따른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유력한 가설을 떠올리면서… 내가 물었다. “혹시 모다피닐을 드세요?” 출처:2017 제4호
7    [단편] 이기다의 선물 댓글:  조회:365  추천:0  2019-07-15
이기다의 선물 박초란   1. 프롤로그 “어떻게 된 거지?” 네티는 자신의 팔다리를 차례로 쓰다듬어보고 배와 가슴께를 쓸어본다. 그러다가 생각난듯 꽉 닫힌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앗!” 네티는 가볍게 비명소리를 냈다. 분명 그 안에는 네티 그녀 자신이 희미하게 비쳐있었다. 싹뚝 자른 단발머리와 동그스름한 얼굴, 그녀를 가장 빛나게 해주었던 까만 눈동자. 갑자기 눈동자가 떨렸다. 어둠이 깃든 창 속 자신의 모습 뒤로 조그마한 침대를 발견했다. 몸을 돌렸다.  낯설은 방, 낯설은 침대. 그녀가 누워있던 침대 발치께로 작은 영아침대가 놓여져있었다. 네티는 몸을 일으켜 나무향이 솔솔 풍기는 침대 안을 들여다본다. 녀아가 주먹을 쥔 채 쌔근쌔근 잠들어있었다. 네티가 자그마한 소리로 불렀다. “네티!” 꼬마 네티가 그 부름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잠결에 샐쭉 웃었다. 티없이 맑은 이슬 같은 얼굴이였다. 네티는 꼬마 네티를 이슬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충동을 그 순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네티의 입가에도 웃음이 상현달 같이 걸렸다. 그것이 네티와 네티의 첫 만남이였다.   2. 이기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기다의 눈’이라고 불렀다. 이기다의 네티는 세상에서 가장 까맣고 반짝이는 두눈을 갖고 있었다. 우주의 블랙홀마냥 모든 것을 흡수해버릴듯한 그녀의 눈동자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까만색이였고 깊고 깊은 바다같이 검푸르게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면 어떠한 지혜도 어떠한 희망도 무색해졌다. 이기다의 네티는 이기다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스물일곱번째의 네티로 거듭나고 있었다. 스물일곱번째 네티와 스물여덟번째 네티가 만나는 순간이였다. 전까지는 한번도 없던 일이였다. 스물일곱번째 네티가 태여나면서 스물여섯번째 네티가 사라졌고 스물여섯번째 네티가 태여나면서 스물다섯번째 네티가 사라졌다. 이기다에서는 영아가 어미를 필요치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새로 태여났다. 정자와 란자의 개념은 언녕 력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와 더불어 불필요해진 성행위나 구애 자체도 도태되여버렸다. 후대라는 개념도 사라져갔다. 새로 태여나고 싶다면 이기다에 가서 신청만 하면 가능했다. 무로의 과정을 즐기고 싶다면 100년이든 1000년이든 뒤로 설정을 해도 되였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존재 자체를 원했다. 인공자궁에 들어가 십초 만에 새로 태여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진화라도 설정할 수가 있었고 코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다음번 태여날 때는 원하는 코모양을 설정해 태여날 수도 있었다. 년령마저 설정할 수가 있었다. 다시 태여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삶을 다시 한번 살 수가 있다는 것. 이기다는 그런 도시였고 이기다는 모든 불만이, 모든 결함이 만족스럽게 변할 수 있는 희망의 자궁이였다. 이기다에서는 시간 자체가 그다지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생로병사, 이기다는 이미 그것을 초월한 세상이였다. 생이 있되 생명의 잉태와 위대함 따위는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였다. 사死가 있되 죽음의 숙연함과 비장함 따위도 이미 상실된 지 오래되였다. 이기다의 주민들은 모두가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자신을 원했고 또한 그런 시설마저도 빈틈없이 갖춰져있었다. 누군가의 유전자가 잘못된 습관이나 병독의 침해로 조금의 변화를 일으켜도 경고가 들어왔다. 치료 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다. 얼마든지 가장 건강하고 밝은 나로 돌아갈 수가 있으니까.    3. 네티 “네티 뭘 해?” 내가 네티의 방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아무 것도.” 네티가 문께에 서있는 나를 흘낏 되돌아보더니 대답했다. 열다섯살인 네티의 반항적인 모습에 요즘 들어 나는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돌아와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따끈한 커피가 생각났다. 나에게 네티는 뭘가? 나는 대체 뭘가? 나 자신에 대한 곤혹이 계속해서 따라붙는다. 그 인연의 풀리지 않는 끄트마리를 계속 헤집어본다. 당시 나는 다만 이기다를 통해 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었을 뿐이였다. 흑진주 같이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지 일주일 쯤 되던 날이였다. 처음 있는 일이였다. 이기다를 통해 몇백번을 다시 태여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세상에서 나처럼 몇십년에 한번 어쩌다 이기다를 리용하는 인간은 극소수였다. 이기다에 들어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작은 네티가 작은 침대에 누워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당신의 아이예요.” 침실에 들어온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아이라니?” 내가 놀라자 간호사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교수님 모셔올게요.” 맞다. 잠시 뒤에 만난 그 칠십대로 보이는 교수란 작자가 내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 잉태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코웃음 치지도 못했다. “엄마가 된 기분이 어때요?” 흰머리를 날리며 침실로 들어서면서 그 작자가 싱글벙글했다. 굳이 왜 흰머리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젠가 한번 쯤 만났던 적이 있을지를 속궁리해봤다. 중년과 청년이였던 그의 모습들을 하나씩 그려보면서. 전혀 기억에 떠오르는 게 없다. “나에겐 지금 모습이 가장 좋아요. 젊은 시절의 그 어느 때보다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금이. 그래서 죽음이란 영원으로 한발 들여놓은듯한 지금이 가장 좋거든요.” 그 작자가 내 마음을 궤뚫어보기라도 한듯 말했다. 그 진지한 모습에 뭐라 대답거리를 잃어버린 채 할일 없이 하얀 머리카락만 쳐다보았다. “안기홍입니다. 소개가 늦어졌군요. 안교수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 작자가 아니구요.” “여긴…” 멋쩍어진 기분으로 말을 돌렸다. “네티, 여긴 이기다의 가장 중심지입니다. 이기다의 근원인 셈이지요.” 안교수의 등뒤, 활짝 열린 문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실험기구들이 보였다. “당신은 이기다의 모든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자궁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요. 자궁이 뭔지 아시지요? 인공자궁이 아닌 진정한 자궁. 당신은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지요. 우리의 짐작이 맞았어요. 당신은 이제 건강하고 예쁜 아이의 엄마가 되였지요. 저 아인 당신이 낳은 딸입니다.” 내가 가볍게 소리를 질렀다. 한번도 아이 같은 걸 낳는다는 생각을 못해봤던 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교수의 눈빛을 따라 아이가 누워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가 얼굴을 잔뜩 이그러뜨리고 피식거렸다. 나는 묵직해진 유방 앞 옷이 축축히 젖어듬을 느꼈다. “배고프군요. 먼저 아이한테 젖을 먹이시지요. 잠시 뒤에 계속하지요.” 안교수가 나가면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나는 아이를 안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티, 너랑 닮은 거야? 아기였던 너랑 닮은 거야? 나는 어릴 적의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없다. 나 역시도 이기다의 모든 이들처럼 인공자궁 안에서 다시 한번 잉태되였고 기계사람인 ‘마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고 걸음마를 옮길 즈음 이기다의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뛰놀며 함께 컸다. 우리에게는 이기다가 엄마였다.  나는 서투른 손짓으로 가슴을 들춰 아이의 조그마한 입안으로 조금만 다쳐도 젖이 흘러나오는 유두를 갖다 대였다. 아이가 힘차게 젖을 빨기 시작했다. 네티는 그렇게 조그마한 입으로 먹고 또 먹으면서 날이 다르게 커갔다. “엄마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그 한마디는 화두와 같이 15년 동안 순간순간마다 나를 따라다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 물음을 떠올린다. “엄마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4. 안교수   이기다로 다시 태여남으로써 인간은 불사의 몸이 되였다. 불사의 몸이 되고 난 뒤 인간은 후대를 잉태해야 할 의무 따위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한세대 또 한세대를 통해 업그레이드되여왔던 인간은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세대교체를 하지 않아도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인격체로 승화시킬 수가 있게 되였다. 인간의 욕망이 최고조에 도달하고 나서 처음으로 일어난 변혁은 인간의 자궁의 퇴화였다. 자궁 뿐 아니라 정자와 란자마저 말라가다가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피 한방울, 머리카락 한오리, 손톱 한점만으로도 충분히 다시 태여날 수가 있는 이기다, 나는 이기다를 사랑했다. 이천년이란 세월 동안 내가 해온 일이기도 했다. 이기다에는 어미가 없다. 그리고 그 자식 또한 없다. 인간자궁을 통해 새롭게 태여나는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 부모와 형제, 이런 친인이란 개념 자체가 멀어진 지 오래다. 결혼 그 자체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지만 그것도 이제는 아주 극소수인들의 선택일 뿐이다. 갑자기 다음달에 십대로 돌아가고 싶어질 때도 많았으므로.  그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저 이기다는 법으로 규정되였다. “결혼한 뒤 14년은  이기다를 리용할 수가 없다.”라고. 이기다는 7년을 한주기로 셈을 한다. 즉 7년에 한번을 이기다로 들어가는 기회를 얻는다. 만약 그 사이 이외의 사고나 변을 당했을 경우에만 이기다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정확히 그 나이 만큼만 허용이 되군 했다. 모든 호칭들이 거의 의미를 상실했고 주민 모두가 이름으로 불렸다. 일곱살 아이가 일흔살의 로인에게 이름을 부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누구도 정확히 자신이 몇살인지를 알지를 못했다. 나는 정확히 2071년 하고도 242일을 살았다.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가 밤이면 창밖에서 술렁거린다. 지난 천년을 나는 이기다의 행복에 취해 지내왔다. 앞으로 닥칠 위기가 무엇인지 알지를 못한 채. 위기,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이미 인간이 자궁을 잃어버린 뒤였다. 미친듯이 병원과 연구소를 돌아다니면서 정자와 란자를 찾았고 그것을 배양하기 위해 수억번의 실험을 진행했다. 네티를 발견하게 된 건 행운이였다. 이기다의 네티. 네티는 거의 70년에 한번 정도로 이기다를 사용하고 있었다. 네티는 영아기를 거치고 십대와 이십대 그리고 삼십대와 사십대와 륙십대와 칠십대를 거쳐 안온하게 자신의 생명을 즐기는 극소수의 부류에 속했다. 인간은 너무도 많이 젊음에 집착해있었다. 네티가 내 눈을 끌게 된 건 이기다의 반응 때문이였다. 이기다가 70년에 한번 정도 잠간 정지되군 했는데 그 원인이 네티라는 걸 발견하고 나서였다. 왜서일가? 네티의 모든 자료를 조사해나가다가 네티한테 지금의 인류에게는 없는 자궁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기다가 멈칫거린 것은 그 때문이였다.    5. 내 이름도 네티 내가 세상을 알기 시작해서부터 알게 된 건 이 세상 아이들 누구도 나처럼 엄마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였다.  엄마. 아이들은 엄마란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키워준 건 엄마가 아니라 ‘마마’라고 불리우는 기계사람이였다는 걸 어렸을 적의 나는 알지 못했다. 엄마가 나처럼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란 건 분명했다. 엄마, 하고 부르면 배꼽이 아파났다. 엄마의 이름은 네티였다. 네티와 네티. 나는 엄마와 딸은 다 이름이 같은 법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였다. 네티는 이 세상에 하나 뿐이여야 했다. 이기다의 법률이 그랬다. 끝없는 복제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는데 꼭같은 유전자는 다만 한명만이 인정이 되였고 누군가가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 시 발각만 되면 3000년 동안 강제수면에 들어가야 했다.  나와 엄마는 이기다의 중심지인 안교수의 연구소 안에서 내가 아홉살 때까지 살았다. 나는 세살부터 밖의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뛰놀면서 컸다. 물론 그동안 엄마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 뒤 안교수는 엄마가 살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가 자연인간족(인간의 자연적인 생사를 즐기려는 사람들 군체) 집거구역에 집 한채를 마련해 우리를 살게 했다. 집안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여있는 집이였다. 열두살 쯤 되여 나는 나 자신이 네티의 복제인간이 아닌지에 대해 큰 곤혹을 느꼈었다. 엄마가 나를 낳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꽤 큰 곤역을 치렀다. 뭔가 이상했다. 엄마, 하면 자꾸 이기다가 떠올려졌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 만큼은 아니겠지만. 엄마는 가끔 나를 숨막히게 한다. 나에 대해서 엄마는 자기 자신보다도 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긴다. 나는 나인데 엄마가 어떻게 나를 안다는 건지, 나는 가끔 네티가 아니고 싶다. 그냥 내 이름을 이슬이라고 부르지 왜 그랬어? 타박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머리 우에서 비둘기가 꾸룩꾸룩 소리를 내더니 퍼드득 날아간다. 보지 않아도 재빛 비둘기다. 웃집 주택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키우고 있는 비둘기 한쌍은 해질녘이면 늘 내 방 창문 우에서 깃을 다듬군 했다. 노르스름한 해살이 창가에 비스듬히 기울어져있다. 거실에서 엄마의 흥얼거림이 들려온다. 엄마는 바다가의 주택에서 살면서부터 가끔 일을 하다가도 흥얼거리군 했다. 엄마의 노래소리는 듣기가 좋았다. 엄마는 땀을 흘리면서 집안 곳곳을 쓸고 닦았다. 그러다가 가끔 생각난듯 내 방문을 열고 빠끔히 들여다보거나 내 이름을 자그마한 소리로 불러보군 했다. 친구들은 나 역시도 이기다에서 태여난 줄로 알고 있었다. 내가 첫 생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아이들은 어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가? 이기다의 아이들은 은근히 많은 생을 살아왔다는 것에 자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주 가끔 엄마의 자궁에서 태여난 아이라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군 한다. 정확히 그것은 수치심이였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한 나의 비밀이였다. 안교수는 나의 미세한 변화라도 알고 싶어 안달을 떨었지만 나는 이제 어떤 생각들은 감춰야 한다는 걸 배웠다. 생각마저도 읽어낼 수가 있는 기계를 인간이 만들어낸다면 참 공포스럽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이미 안교수의 독심술에만도 충분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니.   6. 생명의 근원 그 겨울 나는 고립되였다. 눈 한송이도 내리지 않던 긴긴 겨울이였다.  고립된 상태를 나 스스로가 바랐다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모든 인연들과의 주춤거림. 싹뚝 잘라지지 않는 게 인연이였고 나는 여기저기서 부딪쳐오는 사람관계 때문에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다. 주변에는 늘 사람들로 넘쳐났고 늘 열려있는 눈과 귀로 사정없이 들어오는 정보들 때문에 힘들었다. 2056년 전의 나. 서른아홉의 나는 당시 이미 생명과학원의 교수였고 한 녀자의 남편이였다. 나와 안해는 결혼한 11년간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안해의 문제였다. 안해의 자궁은 아이를 잉태하기를 거부했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왜지?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보아버렸다고 할가? 나는 그 순간 사랑했던 안해로부터 쭉 멀어져갔다. 내가 한때 죽을 만큼 사랑했던 그녀가 가증스러워졌다. 그녀의 살뜰함 모두가 허위처럼 보였다. 멋모르는 량가 부모님들은 일만 일이라 말고 빨리 아이를 갖지 않는다고 볼 때마다 우리에게 닥달을 했다. 그녀도 나도 서서히 지쳐갔고 거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하루이틀 한 게 아니였다. 몸도 힘들어졌고 정신도 잔뜩 긴장되여있다는 건 그 시간들이 흘러간 뒤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와 나 사이엔 영영 아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껌딱지처럼 매달렸다. 그녀와의 인연을 끝내는 게 가장 간단한 방식임을 알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너무 쉽게 내뱉는 친구들의 말들이 상처가 되고 있었다. “안교수,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너 참 복도 많다. 그 고생을 면했으니…” “안교수, 애를 낳으려면 둘은 낳아야 돼. 이제 한꺼번에 쌍둥이를 낳으면 되겠군.” “안교수, 당신 부부는 언제 아이를 가질 생각이야? 돈도 명예도 이제 그만큼 하면 됐지 않았어?” 나보다도 안해가 감당해야 할 부담감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안해에게 그런 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못해줬다.  안해가 죽고 나서야 나는 번쩍 정신이 든 기분이였다.  안해에게 내가 대체 뭔 짓을 한 거지?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안해의 이름은 기다였다.   7. 이게 아니라 나는 그동안 진화하고 변해온 과정들을 즐겼다. 아이를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의 그 과정을 즐겼듯 아이가 진화하고 변해가는 과정들을 즐겼다. 아이가 나를 초월한 그 뭔가의 발견, 내 삶 속에서는 그 신비함이 차넘쳤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그 신비함보다 아연함과 초조함이 더 많아졌다. 아이는 더 이상 나와 교류하기를 꺼렸다. 아이의 눈빛에서 나는 살짝 비껴가는 경멸 비슷한 감정을 발견하기도 했다.  ‘엄마가 뭘 알아?’ 그런 찌가 내 슬픔을 톡톡 건드리면서 아이의 까만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였다. 처음 아이의 눈동자가 내 눈동자보다도 더 까맣고 깊다는 걸 발견했을 때의 감동은 그 순간에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이게 아닌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티. 산스트리트어로 네티는 ‘그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베단타학파의 몇몇이 령적인 길을 일러 ‘네티’라고 불렀는데 벗겨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게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불러본다.  “네티…” 그러니까 나도 결국은 ‘그것이 아니다’였다. 슬프지만 그랬다. 나는 슬픈 눈으로 그런 슬퍼하는 ‘그것이 아니다’인 네티를 들여다본다. 여기 있는 네티와 저기 있는 네티, 성인이 된 네티와 작은 소녀인 네티. ‘그것이 아니다’인 우리는 대체 어데로 가고 있는 걸가? 나는 안교수가 원하는 것이 뭔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나 스스로도 ‘그것이 아니다’인 그 마지막 남겨진 뭔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나, 가 점점 희미해져갔다고 하는 게 맞았다. 내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아이의 존재 때문일가? 어둠 속으로 떨어져내리는 꿈속에서 소스라쳐 깬 날 새벽, 문득 나에게 묻는 소리가 푸르끄레한 어둠 속에서 음울하게 울려나왔다. 그 아이가 커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말라버린 감자마냥 쭈그러들고 있었다. 한번도 없던 느낌이였다. 스물일곱번의 로쇠를 겪어왔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였다. 벗겨진 매미의 허물 같이 홀가분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묵직함과 홀가분함의 공무共舞, 나는 네티여야만 했다. 그 아이가 네티여야만 했던 것처럼. 해가 뜬다. 해 뜰 무렵이면 나는 이기다의 가장 중심이고 가장 높은 곳인 연구소의 침실 창가에 기대여서서 잠에서 서서히 깨여나는 만다라 모양의 이기다를 내려다보았던 그 날들을 떠올린다. 아기였던 네티의 말랑말랑한 볼과 팔과 손과 다리, 나는 그 순간들의 행복을 떠오르는 노란 해살 속에서 받아안는다.   8. 가족 안기홍교수는 내가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생물학적으로는 아무런 련관이 없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분이야말로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사람이였다. 나는 엄마가 안기홍교수를 그 작자라고 부르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발생한 잉태와 출산 자체를 혐오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가 내 눈을 마주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아챘다. 엄마가 엄마 나름 대로의 판단 우에 내 판단을 더 얹지를 말아야지 생각했다. 엄마와 부딪치기를 포기하고 나서 집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미 충분히 조잡하고 화약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터라 그 적막이 더 숨막힐 것만 같았는데 엄마는 태연하게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가끔 코노래까지 흥얼대군 했다. 엄마는 나를 낳기 전 이기다의 눈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새도나 마스카라나 아이펜슬 같은 유명 브랜드의 대표적 광고모델이였다. 엄마의 눈은 이기다의 도처에 걸려져서 검푸른 바다와 같이 보는 사람들을 향해 넘실거렸다. 사람들은 나를 그 네티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그게 싫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게 싫었다.  “네티는 내 엄마예요!”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는 건 아빠에게서 주의를 받았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엄마나 나 둘 중 하나는 영영 사라져야 한다는 말에 덜컥 겁을 먹었다. 사라짐이 존재하지 않는 이기다에서는 사라진다는 말이 금기였다. 나는 가끔 그런 유혹을 느낀다.  “난 이기다가 아닌 네티의 자궁에서 태여난 아이예요.” 왜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지 나는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사람들은 동물들만이 그 더러운 자궁을 통해서 후대를 번식한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를 잊어버릴 수가 없다. 내 짝꿍이였던 수림이 그림책을 같이 보다가 내게 말했다.  “토끼가 이렇게 태여난대. 이봐. 어미토끼 자궁 안에 있는 새끼들을.” 함께 보고 있던 그림책 안에는 여섯마리의 새끼가 바글거리는 어미토끼의 자궁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피비린내가 확 코에 달라붙듯했다. 나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내 온몸에 달라붙어있던 피와 양수 그 진득함이 느껴졌다. 고작 다섯살이였던 나는 그 순간 진한 살기를 느꼈다.    9. 그만하고 싶어, 이젠 잠결에 안해가 혼자말 하는 소리를 어슴프레 들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깨고 나서야 나는 안해가 11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뛰여내렸다는 걸 알았다. 네번째 실험관아기가 실패하고 난 뒤였다.  안해는 유서 한장 남기지 않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경찰에서는 자살로 판정이 났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안해를 베란다로 떠밀어낸 살인용의자로 인식이 되였다. 혼자서 연구소에 파묻혀 지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안해의 목소리가 계속 내 귀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그 때 잠에서 깼더라면 안해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를 살인자로 심판석에 올렸다. 나도 이제 그만하고 싶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 숨을 내쉬는 일을. 그 날도 안해의 목소리가 내 귀가에 울렸다. “당신, 할일이 많잖아. 난 정말이지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어. 남들에겐 그렇게 쉬운 일이 왜 나에겐 그렇게 힘들었을가? 당신 한번 나를 위해서 살아봐. 이기다, 그래. 이기다를 만들어봐. 인류를 낳는 이기다를.” 번쩍 눈이 띄여지는 기분이였다. 내 평생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을 이제 찾았다는 걸 알았다. 안해가 나를, 이기다를 만들어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여났고 내 안해가 되였고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불임으로 고통을 겪었고 베란다에서 뛰여내렸다는 걸 알았다.   10. 무엇을 보여주든 그렇다. 나는 나를 낳았다. 그 작자가 내 딸이라고 했지만 나는 안다. 내가 낳은 것은 정자와 란자가 결합해 낳은 아이가 아니라 나라는 걸. 그것을 밝혀야 하는데 그 분명했던 목표가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무의미해졌다고 확인하는 데까지 꼬박 15년이 걸렸다.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정자였어요. 다른 생각 하지 마세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니까. 아시죠?” 안교수가 나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애를 쓸수록 나는 점점 모든 것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 작자가 나를 연구소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꽁꽁 숨겨놓을 때부터 솔직히 의심스럽긴 했었다.  네티와 함께 살면서 정확히 말해서 네티가 점점 성장해오면서 나는 알았다. 매일매일 내가 씻기고 먹이고 했던 그 아이가 나라는 걸. 왼쪽 발바닥의 점마저 똑같았다. 웃을 때면 코를 잔뜩 매다는 것도 같았고 불안할 때면 손톱을 씹는 습관도 똑같았다. 고집스럽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것도 다름이 없었다.   마흔둘의 네티가 열다섯의 네티를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확히 말하면 열다섯의 네티의 잔뜩 긴장된 어깨를 바라보았다.  “내려와서 간식 먹을래?” 내가 물었다. “아니, 배가 안 고파.” 네티가 뒤도 돌아볼 념을 않고 대답했다. 화가 치밀었지만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열다섯의 나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니까. 화를 내봤자 내가 내 자신한테 화를 내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슬퍼진다. 나는 나에게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고 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두 네티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면 나는 내가 사라지고 싶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저 아이는 엄마가 주었던 그 사랑을 그 때 가서 아주 가끔이지만 떠올려보겠지? 그게 위안이 된다. 나는 열다섯의 네티가 엄마가 있었던 날들을 이제 살아가야 할 수많은 날들에 기억해주길 어쩌면 바라고 있었다. 나는 네티를 사랑했다.   11. 나는 양파가 아니야 비가 올 것 같다.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공기 속 물방울들과 찰랑찰랑 부딪친다.  저녁식사 전이였다. 물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갔더니 엄마가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의 표정이 이상했다. 까고 있던 양파 한알을 손안에 든 채 노려보고 있었다. “뭐 해?” 내가 핀잔했다. 엄마는 양파 하나를 바라보는 것이 세상에 둘도 없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엄마가 조심스럽게 양파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짜증이 나려고 한다. 엄마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연거퍼 세겹의 양파껍질을 벗겨버렸다. 양파의 알싸한 냄새가 코끝에 묻어났다. 내가 손을 내밀었다. 엄마가 내 손을 거칠게 밀어냈다. 엄마의 손끝은 양파로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엄마는 멈추지 않고 계속 양파를 벗기기 시작했다. 주먹 만큼 했던 양파가 어느새 계란 만큼 작아졌다. “이건가?” 엄마가 혼자소리를 했다. “뭐가?” 내가 다급히 물었다.  엄마가 나를 돌아보았지만 엄마의 눈동자 안에는 내가 없다. 불안해졌다.  “엄마, 왜 그래? 무섭게.” 엄마의 눈동자 속에 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그랬던듯 엄마에게는 내가 전부라고만 믿었다.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것 봐.” 엄마가 내 눈앞으로 메추리알 만큼 된 양파를 내밀었다. 엄마의 눈굽은 이미 양파의 매운 맛에 축축해져있었다. 엄마가 마지막 한겹을 벗겼다. 허물 같이 벗겨진 마지막 한겹이 엄마의 손끝에서 떨어져내리고 엄마가 다시 물었다. “이거 보이지?” 나는 엄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멍청하니 서서 그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한겹한겹 다 벗겨내고 나니 마지막에 이게 남았어. 네티도 이렇겠지?” 나는 엄마의 텅 빈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엄마는 거기 소중한 것이 담겨져있기라도 하듯 두 손바닥으로 떠안고 있다. “이걸 기억해야 돼. 언젠가 너도 양파처럼.” 엄마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의  눈동자 안에서 양파 하나를 보았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고 내가 엄마에게 쏘아붙였다. “싫어. 나는 양파가 아니란 말이야!”   12. 이게 아니더라도 “그것을 만났군요.” 그 작자가 부엌으로 들어서다 말고 아이의 어깨를 두손으로 잡으면서 소리쳤다. 아이가 조금 놀라나 싶더니 안교수인 것을 알고는 올려다보며 샐쭉 웃었다. 아이가 저런 웃음을 내게 보이길 거부한 지가 꽤 오래되였다는 생각이 난다. 이게 아니라. 나는 나 대로의 삶을 그냥 살게 내버려두지 않은 그 작자를 노려보았다. 아이가 제멋대로 아빠라고 부르는 것도 귀에 거슬렸다. “아빠.” 아이가 또 한번 내 앞에서 그 작자를 아빠라고 부른다. 주먹을 쥔다. “아빠란 소리 하지 말랬지.” 내가 으르렁거렸다. 아이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는 분명한 아이였다.  “왜 또 그런대?” 아이가 들릴락말락 내쏘았다. “왜 그러냐니?” 입안에서만 감돌기만 하는 말들. 내가 나를 낳았는데, 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내가 나를 먹이고 키웠는데… 왜 그러냐니? 이 한심한 네티야! 넌 아비가 없이 태여났단다… 그렇다고 내가 단성생식으로 바다와 하늘을 낳은 ‘가이아’인 것은 아니잖니? 나는 삽시간에 분노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양파의 뿌리를 잘랐던 가느다란 칼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북쪽으로 난 창으로부터 비쳐들어오는 석양빛에 반짝거리고 있는 칼날. 내 마음이 그 칼날에 베인듯 섬뜩했다. ‘그것이 아니다’인 나는 이제 과거가 되였다. “미친 놈, 네 놈은 인간도 아니야!” 내가 고함을 질렀다. 어느새 손에 잡힌 칼이 정확하게 그 작자의 심장으로 푹 꽂혔다. 피가 뿜겨나오면서 내 얼굴과 머리카락에 들씌워졌다. 뜨끈뜨끈한 피였다. 내 몸안에도 이렇듯 뜨끈뜨끈한 피가 흐르고 있겠지?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이미 땅바닥에 널부러진 그 작자의 심장을 향해 칼을 꽂았다. 그러다가 지쳐버린 나는 시체마냥 널부러져서 부엌문가에 가까스레 기댄 채 하얗게 질려버린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헛갈린다. 내가 과거의 나인지 저 아이가 과거의 나인지? 아이가 나의 과거인지? 내가 아이의 과거인지? 밤이면 미래의 수많은 ‘나’가 우르르달려들어 나를 집어뜯고 사지를 찢는다. 더 이상 심장이 아프지가 않으리라. 이젠 아프지가 않으리라! 우리와 함께 사라져갈 것은 영원으로 사라져버릴 테니까. 이젠 멈춰지겠지… 헛갈리기만 했던 나. 스물일곱번째 네티가 그립다. 부족함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완정했던 네티. 완정한 하나의 ‘그게 아니다’가. 등뒤에서 퍽, 소리가 나나 싶더니 심장을 도려내는듯한 통증이 밀려온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피 묻은 가위를 손에 든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또 하나의 네티가 어쩔 바를 몰라 서있었다.  그 순간, 배꼽이 불에라도 덴듯 모질게 아파나기 시작했다. 출처:2018 제6호
6    [단편소설] 숨-박초란 댓글:  조회:271  추천:0  2019-07-15
 박초란   숨   모든 것이 숨을 쉰다. 나무도 새도 벌레도 그리고 사람도. 그녀는 여태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너무 당연하고 당연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무심하게 무지했다. 그냥 숨은 쉬여지는 거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한번도 그 숨이 어느 순간, 멎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특히는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을 적에는. 대체 때가 된다는 건 언제란 말인가? 적어도 사과가 꽃이 피고 영글어 어느 날 나무에서 뚝 떨어지는 정도 아니면 열리고 또 떨어지고를 반복하던 사과나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갈 만큼? 숨 쉬는 것 자체가 이렇게 버거워질 거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복사꽃잎 같았던 아기의 발가우리한 우유빛 얼굴이 아직 손끝에 맞혀진다. 그런 아이를 시부모님한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건 결코 공기오염 때문이 아니였다. 남편과 그녀 둘 다 출근해야 하는 맞벌이부부였고 집을 마련하면서 쓴 어마어마한 은행대출도 빨리 갚아야 했으며 아직 젖도 못 뗀 아이를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들여 하루종일 맡기려고 해도 불안했다. 주변의 여느 젊은 부부들처럼 그들 부부 역시 고향의 시부모님한테로 아이를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그것을 다행으로 생각했고 아이 봐줄 부모님이 계셔 좋겠다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아이를 부모님한테 보내고 나서 부부는 누구에게라 없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시골서 자유롭게 달아다니면서 깨끗한 공기와 물을 마시면서 무공해 채소와 과일들을 맘껏 먹으면서 클 수 있다는 게 어디에요… 그녀 품을 곧 떠나게 될 전날밤도 아이는 쌕쌕 품안에서 잠이 들었고 그녀는 처음으로 아이의 숨소리안에서 녹아내렸다. 새끼와 떨어지게 된 여느 어미들처럼. 아이는 그렇게 반년 만에 아직 어미구실이 서투른 그녀 품을 떠났다. 한동안 밤이면 쌕쌕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온 세상이 그녀의 품안에서 떠난 기분이였다. 그녀가 이 세상으로 처음 나오던 순간의 기억은 숨막히다, 였다. 그래서인 것 같아… 목이 있는 스웨터 같은 걸 입는 게 죽을 만치 싫었거든. 그녀는 커서까지도 자줄 그 기억을 떠들고 다녔다. 정말로 내 기억일가? 그런 의문이 들기 직전까지는 쭉 그랬다. 뭔 소리여? 태줄에 목 감긴 것도 아니고… 넌 니 엄마가 순산한 거여. 이모가 그날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계속 그렇게 떠들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 최초의 기억이였다고 믿고 있던 것을 의심하게 되였다. 그 기억이란 것도 결국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이거나 아니면 어느 책이나 영화 같은데서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심 말이다. 결국은 제목도 기억나질 않는 어느 책에서 보았던 주인공의 한마디를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인 것 같다는데 의심의 초점이 맞춰졌고 어느 순간 그랬구나, 머리를 끄덕이게까지 되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이 세상으로 나오고 나서 최초의 기억이 뭔지 끝내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 불확실성은 한동안 꾸준히 그녀를 괴롭혔다.   새벽부터 초미세먼지가 심각할 거라는 주의보가 스마트폰에 떴다. 슬슬 해빛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눈부신 해를 바라본 것이 언제인가 싶어진다. 며칠전에 갓 피기 시작한 앵두꽃도 호함지게 흐드러졌던 목련도 오래되여 퇴색할 대로 퇴색해버린 사진 속 화면같이 누르께하게 창 밖에서 숨을 죽인다. 아직 잎이 나오기 직전인, 겨우내 더욱 앙상해진 오동나무가지들이 더욱 기괴스러워진다. 피와 살을 뜯기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이 큰 설음을 호소하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치고 있듯… 그것들도 해빛이 그리운 게 틀림없다. 두터운 스모그가 배경처럼 깔려있는 하늘아래, 그녀도 거기 두 팔을 뻗고 서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꽉 닫힌 창문틈새로 먼지가 스며들어 목이 매캐하다. 누런 흙탕물같이 고운 미세먼지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부유하다가 그녀에게로 스멀스멀 다가온다. 후--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아주 짧게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쉰다. 그녀는 보이질 않는 질긴 태줄에 목이 감겨져있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한다. 언젠가는 숨쉬기도 돈 내고 해야 할 세상이 올지도 몰라… 그녀는 창가를 떠나 주방으로 가 커피원두를 갈고 물통에 생수를 더 부어넣고 커피를 내린다. 며칠이고 스모그가 칙칙한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부적같이 하늘가득 짓누르고 있어도 이제는 짜증마저도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지독하게 외롭다는 생각이 밀려드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 령혼마저 허공에 풀어헤쳐놓은 듯한 흐리터분한 흐린 날이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 3월… 청소를 하던 도중이였다. 구수한 커피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거실바닥을 닦던 밀걸레는 화장실로 꺾어지는 복도 쪽에 그대로 방치된 채로 있다. 아직 끝내려면 반시간 정도는 더 걸려야 할 터였다. 그녀는 청소를 하다 보면 좀씩 생활 안으로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현실감이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가끔 당황해한다는 것, 그리고 또렷한 현실감 안으로 들어가려고도 한다는 것, 스모그가 심한 날이면 그 증상이 더더욱 심각해진다는 것, 2월부터 읽기 시작한 서장의 명상관련 책이 아직 창가의 유리탁자우에 놓여있다. 그녀는 거실 쏘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한편으로 그 책을 쓴 린포체에 관련한 뉴스를 찾아본다. 스마트폰을 휘리릭 펼치면서 찾아본 뉴스에는 누구나 알 수가 있는 이름의 녀자 연예인이 그 린포체와 아이를 낳았다는 기사가 뜬다. 약간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이 책을 읽는데에는 그다지 방해가 되질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말 방해가 안될가? 그녀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든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휙 쏘파우로 집어던지고는 얌전히 앉아 계속 야금야금 커피를 마신다. 그러다가 거실 탁자에 놓인 딸아이의 사진을 보다가 화들짝 놀란다. 그 두 사람의 아이는 어떤 삶을 살게 될가? 남편은 또 출장중이다. 남편이 출장을 떠나는 날이면 그녀는 꼭 짐을 싸는 꿈을 꾼다. 두번인가 세번째만인가 그녀는 인터넷으로 해몽풀이를 검색해본 적 있다. 새로운 시작, 그런 것이 꿈에 짐을 싸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 무렵, 그녀는 부쩍 아이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이르지 않을가?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일찌감치 마음 접어.” 남편은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다가 “그 어린 것이 이런 공기를 마시면서 큰다고 생각해봐. 그리고 부모님은 어떻게 살라고? 애만 데려온다면 같이 온다고 부득부득 우기실 걸? 좀만 더 참자. 유치원 다닐 정도면 그때 데려오자.” 그렇게 협박절반 애원절반 달래기도 했다. 지난번 아이를 봤을 때 그녀는 하마트면 자신의 아이를 알아보지 못할 번했다. 품안에 안겨 젖을 먹던 아이는 그동안에 부쩍 커서 달아다니고 있었다. 아이가 처음 기기 시작하는 것도 처음 걸음마를 타는 것도 처음 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녀는 겪지를 못했다. 로인네들은 인터넷을 사용할 줄도, 사용하려고도 하질 않았다.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아이는 끝내 엄마라고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아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렇게 시켜줘도 아이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꼭 다물고 뜨악하게 서있었다. “왜 그래 엄마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아이의 할머니가 쯧쯧 혀를 찼다. 아이는 엄마, 부르는 대신 할머니, 하고 부르며 그녀가 아닌 시어머니의 품에 폭 안겼다. 그것이 그렇게 슬프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것이 지난 설휴가때 일이였다. 그 순간부터였다. 그녀는 빨리 아이를 자신들 곁으로 데려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유치원에 보내도 되겠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찾아든다. 벨소리가 울리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에 없나? 그녀는 다시 시아버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본다. 길게 벨소리가 울리고 시아버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모두 웬 일이지?! 그녀는 심드렁해져서 다시 스마트폰을 쏘파우로 던져버렸다. 해찰하다 말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던 청소를 계속한다. 걸레를 빨고 탁자우를 닦고 조금 뒤 청소를 마친 그녀는 다시 커피를 내린다. 그녀는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의미에서 커피머신 한대를 새로 장만했다. 어쩌면 공기청정기를 장만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인지도 몰랐다. 공기청정기 매장 앞을 잠시 서성이다가 결국은 커피머신으로 결정하고 나니 매장안에 들어선 내내 숨막히던 가슴이 훅 트이는 느낌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라인더로 열심히 커피콩을 갈고 열심히 커피를 내려서 밥대신 열심히 커피를 마신다. 커피콩을 간 것은 커피 그라인더이고 커피를 내린 것은 커피머신이지만 커피콩을 넣고 지꺼기를 청소하는 건 나이니까 결국은 내가 열심히 한건 맞긴 맞다고 우기면서 열심히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그녀의 숨이였다. 그렇다면 커피머신은 숨통? 그녀는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사치였다. 그동안 그녀는 정신없이 보냈다. 남편과 어쩌다가 아이가 생겼고 끌다 보니 어쩌다가 삼개월이 지났고 어쩌다 보니 남편과 결혼이란 걸 하게 되였고 어쩌다 보니 만삭의 몸이 되였고 어쩌다 보니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아키운다는 것, 그것은 임신을 하고 나서도 아이를 낳고서도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철없는 나이도 아니였다. 결혼 당시 그녀는 스물아홉이였고 충동적으로 일을 치는 열정은 그녀에게도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녀는 홀과 주방을 넘나들며 일을 하는 것이 좋았고 일하는 시간들이 훨씬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 쭉 그렇게 살아왔다. 언젠가는 결혼도 하겠지 언젠가는 아이도 낳겠지… 남자를 쭉 만나오면서도 그 모든 것은 요원한 미래의 일이였고 그 언젠가는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그렇게 문득 찾아들었다. 아이는 어땠을가? 내 몸에서 나올 때 아이도 숨이 막히다고 느꼈을가? 아이도 당황했을가? 그녀는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묻고 싶어졌다.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때도 당황했고 결혼이란 걸 하게 되였을 때도 당황했고 아이를 낳고도 당황했다. 어머니가 그때처럼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거실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점심때가 됐네… 그녀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커피 두잔으로 때웠다는 것이 생각났다. 모처럼 집에 있는 날, 한달 만에 겨우 얻은 하루의 휴가, 오롯이 그녀는 자신만의 하루로 만들고 싶어진다. 그녀는 하나(一) 란 외자체인점에서 점장을 맡고 있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그녀는 식당복무원부터 시작했다. 간신히 지방전문대학을 나온 그녀로서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직업이였다. 커피를 나르고 손님들이 비운 그릇과 잔을 치웠다. 그럼에도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녀의 끝없는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넉달뒤 그녀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본점에서 계량되여온 재료들을 이미 배운 대로 조리를 해서 담으면 되였다. 그렇게 삼년이 지났고 또 이년이 지난 뒤 그녀는 점장이 되였다. 새벽 한시 두시까지 근무하는 날들이 허다했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그녀는 커피를 마시는 습관을 들였다. 그렇다고 커피만 마실 수는 없는 일이였다. 날씨마저 음울한 날, 그녀는 이제 좀 뭘 맛있는 걸 해먹고 싶어진다. 그녀는 갑자기 아주 오래전 먹었던 떡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녀는 랭장고 문을 열고 떡가루가 있나 뒤져본다. 얼마 전에 고향에 있는 녀동생이 보내준 떡가루가 랭동실 어덴가에 있을 터였다. 떡가루는 왜 보냈어? 열근은 남짓해보이는 떡가루가 담긴 택배상자를 찾아들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전화로 녀동생에게 화를 냈다. 언니가 떡 먹고 싶다고 그랬잖아? 녀동생이 웃었다. 내가? 그녀는 밀봉된 열근이나 되는 떡가루를 낑낑 랭동실에 넣으면서 그녀가 녀동생과 통화하면서 떡이 먹고 싶다고 했었던 적이 있었는 지를 한참을 생각했다. 통화를 마치기 전 녀동생이 다시한번 말했다. 언니가 분명 그랬거든 엄마가 옛날에 해줬던 골무떡 먹고 싶다고. 그녀의 어머니는 떡을 해서 팔아 그녀 자매를 키웠다. 꼭두새벽부터 뽐프로 물을 잦는 소리와 가마솥 부딪치는 소리와 탁탁 아궁이에서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에 이어 가마솥에서 김이 쌕쌕 빠져나오는 소리, 절구에 떡을 넣고 철퍼덕철퍼덕 치는 소리, 어머니가 동그랗게 비빈 하얀 떡을 칼도마우에 놓고 탁탁 절주있게 써는 소리들이 분주한 가운데 그녀와 녀동생은 잠을 깼다. 쑥가루나 치자가루로 곱게 색을 낸 골무떡이나 만두기는 그 빛갈부터가 여간 먹음직스러운 게 아니였다. 그럼에도 그녀와 녀동생에게는 늘 그림의 떡이였다. 어머니는 길게 비벼 늘인 말랑말랑한 가래떡을 칼판에 놓고 안성맞춤한 크기로 썰어서는 작은 유리접시 밑굽으로 떡을 찍어냈다. 빗살무늬가 떡우에 퍼져나갔고 어머니는 간혹 무늬 밖으로 넘쳐난 부분을 칼로 베여냈다. 볶은 기름을 발라가며 차곡차곡 함지에 골무떡을 담고 나서 어머니는 다시 할머니와 함께 만두기를 만들군 했다. 커다란 도마우로 맞춤한 두께로 얌전히 밀린 떡우에 어머니는 할머니가 이미 주먹으로 꼭꼭 쥐여놓은 팥이나 강낭콩속(가끔 녀동생이랑 할머니를 도와 꼭꼭 주먹으로 빚기도 했던 속이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빚은 것이 할머니가 빚은 것보다 더 귀엽고 잘 빚었다고 했다.)을 집어놓고 그우로 떡을 올려 겹쳐놓고 역시 꽃무늬를 찍던 작은 유리접시로(이번에는 밑굽이 아니라 접시 웃쪽의 변두리 부분으로) 동그랗게 떠내군 했다. 하얀, 파란, 분홍 환상적인 반달들이 어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고 어린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떡이 완성되고 나서 남겨진 쪼가리떡들이 식구들의 아침식사거리가 되였다. 어머니는 굳이 떡쪼가리들을 다시 곱게 빚어 그녀와 녀동생 앞으로 내밀어주는 법이 없었다. 머리모양을 대충 손으로 다듬고 나서 어머니는 동이 푸르러오는 새벽, 떡 팔러 아침시장으로 향하거나 미리 들어온 주문대로 떡함지를 머리에 이고 그 집으로 달려가군 했으므로… 베여낸 괴이한 각양각색의, 말 그대로 쪼가리떡을 그녀와 녀동생은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이 어떨 때는 도마 앞에서 어떨 때는 다리도 펴질 않은 밥상 앞에서 손가락으로 집어먹군 했다. 가끔 배추김치나 갓김치나 깍두기를 곁들이는 일도 있었지만 어린 아이였던 그녀와 녀동생은 매콤한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아무렇게나 찢겨져버린 쪼가리떡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르르 기름기가 돌던 떡, 어린 녀동생은 가끔 거기로 손을 뻗군 했지만 곧바로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군 했다. “어디다가 손을 대! 이미 개수를 채운 거라고 몇번을 얘길 해. 그거 하나라도 모자라면 큰일난다구 내가 그랬지?” 울먹울먹해진 동생에게 할머니가 쪼가리떡들을 모아서 대충 손으로 비벼 가래떡 한 오라기를 만들어 건네주군 했다. “자, 명이는 이걸 먹자. 이따가 할미가 더 맛있는 떡 만들어주마…” 그럼에도 한번도 그녀와 녀동생을 위해서 만들어진 떡은 없었다. 팔기 위해서만 떡은 만들어졌다. 골무떡이나 만두기처럼 매일마다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는 쉰떡도 만들고 감자가 흔한 겨울에는 언감자떡도 만들군 했다. 좀 커서야 그녀는 쉰떡을 증편이라고 한다는 걸 알았는데 그래도 그냥 쉰떡이라고 부르는 게 정감이 있었다. 쉰떡 반죽은 대체로 할머니가 했다. 가마목에 둔 반죽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무렵, 할머니는 반죽을 덮은 면보자기를 끌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숨 잘 쉰다…” 그녀는 반죽이 숨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도 아닌데 반죽이 숨을 쉰다니… 그녀는 싱긋 웃었다. 쉰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반죽을 해서 가마목에 두터운 이불을 덮어 여섯시간 정도 발효시켜야 했다. 반죽이 발효되면서 푹푹 익어가는 소리가 꿈결에도 들려오는 듯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꿈결에 중얼거렸다. “숨 잘 쉰다…”  떡가루를 꺼낸다. 두공기면 될가? 세공기? 네공기면 되겠지? 그녀는 폴폴 날리는 하얀 쌀가루를 그득하니 가끔 선선로 료리를 해먹던 남비에다 꺼낸다. 집에는 커다란 양푼이 없다. 있을 턱이 없다. 밥은 거의 가게에서 먹군 했으니까. 가스렌지를 켜고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그녀는 이쁜 떡을 만들고 싶어진다. 파랗고 노랗고 분홍 그런 기름기가 자르르 도는 먹음직한 떡을. 아이였던 그녀는 생각했다. 이담에 커서 아이가 있게 되면 꼭 가장 이쁜 떡을 만들어서 아이한테 먹일 거라고… 그래서 아이가 이쁘게 크게 하리라고… 절대로 어머니처럼 쪼가리떡으로 아이의 배를 채우게 하는 일은 없게 하리라고… 물이 발랑발랑 끓는다. 그 소리소리 사이, 그녀는 집안의 정적에 부르르 몸을 떤다. 아이라도 곁에서 조잘대줬으면 좋으련만. 딸아이가 보고 싶다. 아이를 낳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올린 이가 친정어머니였다. “와서 애 봐달란 말만 하지 말어… 나도 좀 숨 쉬면서 살자…” 처음부터 그녀의 어머니는 그렇게 쐐기를 박았다. 그동안 어머닌 숨도 못 쉬고 사신 거야? 그렇게 그녀는 되묻고 싶었지만 결국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다고 대답할 것만 같았다. 그랬을 것만 같았다. 서른넷에 남편을 잃고 두 딸아이와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애면글면 살아온 어머니가 정작 숨 한번 훤히 못 쉬고 살아왔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여섯살 되던 해 벌목하러 따라갔다가 사고로 죽었다. 아버지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가 않았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한 해 한국에서 일을 하던 어머니는 거기서 만난 남자랑 재혼을 했다. 어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그녀의 계부를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였다. 아이를 낳고 삼개월 쯤 되였을 때 어머니랑 같이 보러 왔다 간 것이 그 전부였다. 어머니는 와서 딱 이틀을 머물렀다. 이틀뒤 어머니는 계부와 함께 사천으로 려행을 떠나버렸다. 어머니는 아주 작심을 하고 스스로의 생을 살고저 한듯 싶었다.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마른 가루는 익반죽을 해야만 한다. 나무주걱으로 김이 물물 솟아오르는 쌀가루를 젓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직까지 한번도 아이한테 떡은커녕 근사한 밥상 한번 차려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이를 보러 시댁으로 갔을 때도 시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아이와 함께 먹기만 했었다는 사실을, 수많은 날 이름도 모를 낯선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주변의 친인들에겐 린색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힘껏 쌀가루를 젓는다. 그러다가 나무주걱이 귀찮아진듯 손을 집어넣고 손바닥으로 쌀가루를 비비기 시작한다. 아직 가루는 뜨거웠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마저 불에 덴듯 뜨거워짐을 느낀다. 손안에 움켜쥐우는 쌀가루의 촉감, 그녀는 조금 물을 더 넣는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으로 쌀가루를 비빈다. 너무 물이 많아도 안된다. 물기를 해주어 마르기 전의 촉촉한 쌀가루의 촉감으로 되돌리면 된다. 쌀가루가, 바싹 말랐던 가루들이 물기를 머금고 조금씩 살아나는듯 그녀의 손안에서 뭉쳐졌다가 다시 부서지기를 계속한다. 그녀는 손바닥안의 쌀가루와 함께 포실포실 숨을 쉰다. 이제 쌀가루는 갓 방아간에서 나온듯 폭신하고 차분해져있다. 그녀는 언녕 창 밖의 초미세먼지 따위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숨쉬기가 힘들었던 것도 옛날 일인양 아무렇지도 않게 가루를 가는채로 내린다. 하얀 눈송이같이 채밑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떡가루… 그녀는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채를 살살 친다. 톡톡 손바닥으로 동그란 대나무채틀을 두드려 가면서… 허리를 펴고 숨을 내쉰다. 크게… 쪼크리고 앉아있었던 탓에 허리가 뻐근하다. 배가 다시 고프기 시작했다. 그냥 동네시장어구에 있는 만두집에 가서 찐만두나 구운 떡으로 대충 때우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몸 한켠에 오랜 세월 숨겨져있던 졸깃졸깃한 떡을 한입 베여물었을 때의 촉감이 더더욱 간절해진다. 이제 시작이다. 찜틀에 면포를 깔고 어머니가 했던 듯이 물을 더 뿌려 버무려 손바닥만 한 크기로 둥그렇게 빚어 차곡차곡 빙둘러 줄세워 그것들을 포개놓은 뒤, 이미 한벌 김을 올린 시루에 넣고 찌기 시작한다. 조금 뒤 물이 끓는 소리에 이어 김이 쌕쌕 빠져나오는 소리가 주방안을 가득 채운다. 그녀는 떡이 쪄지기를 기다리며 거실 쏘파에 벌렁 누워버린다. 떡 만드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였어? 아직 절반도 못했는데도? 그녀는 의아해진다. 매일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 많은 량의 떡을 만드는 걸 볼 때는 그것이 세상 쉬운 일 같았는데 말이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네이버에 들어가 검색해본다. 골무떡. 가래떡의 경상도 사투리… 라는 단어해석이 뜬다. 그리고 다른 한 사이트에서는 멥쌀가루에 물을 내려 찌고 청, 홍, 황색 물을 들여서 오래 치댄 후 골무모양으로 만든 떡(도병)이고 평안도 지방의 떡이라고도 했다. 그 외에는 골무떡에 관련된 건 아무리 찾아볼려고 해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이상 찾는 걸 포기하고 사이트에서 나오고 나서 그녀는 다시 시댁으로 전화를 한다.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열두시가 지나있다. 점심때면 한창 모여서 식사를 할 시간이였다. 모두 어데 간 건가? 그녀는 다시 시아버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본다. 역시 받지를 않는다. 이상한데? 웬 일이지? 그녀는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서둘러 남편에게로 전화를 한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고 나서야 간신히 남편이 전화를 받는다. “어디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그녀가 조금 짜증을 냈다. 남편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는 사람들 소리가 시끌벅적한 가운데 분명 시어머니의 어쩐다니… 내가 뭔 면목으로… 본다니… 하는 흐느낌소리 혹은 넉두리 비슷한 것을 들었다. 그녀는 소스라치듯 놀란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어머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응? 아니… 응…” 남편의 대답이 영 시원치가 않다. “뭐야? 집에 간 거면 간 거지 못 갈델 간 것도 아니고 왜 이래? 어머님은 왜? 우시는 거 같은데? 어머님 혹시 아버님이랑… 아니다…” 남편이 거기 있다는 것에 그동안 졸였던 그녀의 마음이 좀은 가라앉는다. 헌데 시어머니는 왜 우시지? “분명 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일은 잘 마무리된 거야? 래일에야 돌아올 것 같다더니…” 그녀는 좀더 남편의 말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응, 아무 일도… 일은 일찍 끝났어. 아까 금방 여기 도착했구…” 남편이 자리를 옮긴듯 통화가 이제 한결 조용해졌다. 그녀는 가만히 웃는다. “딸냄이가 보고 싶었구나… 나도 보고 싶어서… 우리 이쁜 딸 먹일라고 떡 만들고 있다가 통화라도 할가고 전화를 계속했는데 안 받아서… 웬 일인가 했지… 아, 맞다… 우리 딸 좀 바꿔줘봐요…” 그녀는 공연히 분주해진다. “그게… 영이야… 아이가…” 남편이 말을 잇지를 못한다. 누군가가 “먼저 오라고 하는 게…”하고 뒤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급습한다. 그 불안감이 미세먼지같이 그녀의 목안에 걸려 지걱거린다. 눈이 매웠다. “혹시, 애가… 뭔 일이… 있는 거야?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공포가 스멀스멀 그녀를 핥고 지난다. “지금 와야 될 것 같애… 혼자서… 올 만하지?” 남편의 어조는 가라앉아있었다. 그 목소리 안에는 뭔가 감추고저 하면서도 감출 수가 없는 비통함 같은 것이 깔려져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그녀는 설마하는 요행마저도 바람받이 초불마냥 쑥 꺼져버리는, 와장창 뭔가가 무너져내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아이가… 우리 아이가… 왜 그래… 모두들… 아까부터 전화도 안 받고…” 그녀는 두렵다. 그녀는 허둥거린다. 부엌에서 김이 올라오는 소리가 더욱 크게 집안에 울린다.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요… 가스불에 떡 올려놨는데… 다 해가지고 가면 안될가? 애 먹일라고… 그래서… 그래서…” “정신 차려! 그냥, 지금 옷 입고 나와… 내가 차를 불렀으니… 근처에 사는 내 친구 알지? 동욱이가 마중을 나가 있을 거야. 나와서 차 타고 공항에 가면 돼… 신분증 챙기고… 티켓은 이미 끊어놓았으니까.” 남편의 목소리가 랭정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져버린다. 이제 떡도 거의 쪄져가고 그것을 치대고 틀로 찍으면 되는데… 그럼 되는데… 되는데… 그렇게 옴씹다가 그녀는 바락 아스러지는 비명을 지른다. “뭘 하자는 거야? 대체! 애가… 애가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녀는 악을 썼다. 세상이, 온통 미세먼지에 둘러싸였던 세상이 어두컴컴해졌다. “와서… 와서 얘길 하자. 제발!” 남편이 애원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물앉아버렸다. 온몸이 흙속으로 잦아들듯 싶었다. 고운 모래알들이 차곡차곡 그녀의 몸우에 쌓였다. 하늘 땅에 넘쳐나던 미세먼지들이 눈깜짝할 새 그녀를 묻어버리고 만다. 그녀는 꺽, 숨이 막혔다. 가슴이 미여지듯 아파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오른손 하나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가슴을 투덕투덕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 똑, 똑.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조금 뒤 나지막하고 웅글진 목소리가 들렸다. 계시지요… 시간이 급해서…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현관문을 노려본다. 거기에 저승사자라도 서있기라도 하듯… 그녀 등뒤에서 김이 씩씩 악다구니질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   아이는 비탈아래에 가득 핀 제비꽃을 보았다. 꽃, 꽃…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할아버지는 한참 떨어진 저편 밭머리에서 비습한 땅을 삽으로 번지고 있었고 할머니는 아이와 가까운 비탈아래 밭머리에서 달래를 캐고 있었다. 분홍머리삔을 한 아이는 제법 잘 달아다녔다. 말도 곧잘했다. 이제 막 세상을 탐색하기 시작한 아이의 눈에는 보라빛 제비꽃이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푸른 하늘로 머흘머흘 구름송이들이 동쪽으로 흘러갔고 사리사리 누군가 밭에서 태우는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져가고 있었다. 어데선가 귀맛 좋은 종달새소리가 울렸다. 아이가 꽃을 꺾다 말고 귀를 쫑긋거렸다. 할머니, 저거 뭐야? 아이가 노래하듯 소리쳐 물었다. 달래를 캐다 말고 할머니가 허리를 쭉 펴고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또 뭐가? 저 노래하는 거… 아이가 다시 귀를 쫑긋거렸다. 노래하는 거? 종달새구나. 종달새가 노래하네… 종달새가 포드등하고 머리 우를 스쳐지나간다. 종달새?! 참 이뻐… 할머니, 그치? 참 이쁘지? 왜 종달새는 저렇게 빨리 날아가? 울 엄마한테도 들려주고 싶은데… 아이는 이미 자취도 없어진, 새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꽃 많이 뜯었어? 그 꽃 누구 줄라고? 이번에는 할머니가 물었다. 엄마! 아이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키워줘도 엄마밖에 없네. 없어… 할머니는 구시렁거리며 웃다가 다시 달래를 파기 시작한다. 바구니를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아이는 비탈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제비꽃을 꺾었다. 애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이는 제비꽃을 하나 또 하나 꺾었다. 그러다가 아이는 이른봄 번데기에서 막 까나온 새하얀 나비를 보았다. 처음 보는 나비였다. 아이는 좋아서 짝짜궁을 치다가 손을 내밀었다. 나비는 제비꽃처럼 쉽게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팔랑팔랑 날아예며 나비는 잡힐듯 말듯 아이를 희롱했다. 까드득, 아이의 웃는 소리가 하늘가로 가득 넘쳐났다. 아이는 온힘을 다해서 나비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비가 지친듯 비탈 웃쪽의 제비꽃우에 앉았다. 아이는 비탈우로 조심스럽게 숨도 죽인 채 살며시 올라갔다. 거짓말처럼 아이가 손을 내밀자 나비는 또다시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저편의 비탈 아래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너무 아쉬웠다. 서둘러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나비를 향해 몸을 날려 덮쳤다. 그 순간, 아이는 소리 한번 지르지도 못한 채 경사가 강한 비탈아래로 데굴데굴 구을러 내려갔다. 돌멩이가 떨어지 듯, 아이는 비탈밑 강물을 끌어들이는 수로에 쑥 빠져들었다. 몇번 허우적거리긴 했지만, 할머니,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시커먼 강물이 사정없이 아이의 코와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아이의 두 손이 물우로 뻗었다. 엄… 마… 아무도 아이의 손을 잡아주질 않았다. 새하얀 나비도 언녕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아이의 할머니가 바구니를 다 채우고 아이를 찾았을 때는 아이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기겁한 할머니는 바구니를 던져버리고 할아버지를 불렀고 할아버지가 시커먼 물에 들어가서 한참을 찾았지만 이미 아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떡집앞을 지나고 있었다. 화려하고 앙증맞게 이쁜 온갖 떡들이 오구작작 모여살고 있는 집. 그녀는 그중 아이한테 먹이고 싶었던 골무떡을 닮은 듯 닮지 않은 절편을 본다. 뚫어져라 괴물을 보듯이… “떡이… 왜요?” 그녀의 표정에 놀란듯 떡집 녀자가 다가와 물었고 그녀는 소리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알았다. 그녀가 먹고 싶었던, 아이한테 먹이고 싶었던 떡은 결국은 떡집에서 살 수가 있었던 화려하고 이쁜 떡이 아니라 아무렇게 손으로 막 뭉그러뜨리면서 먹을 수가 있는 망글망글한 떡이였다는 걸… 잘 차려진 밥상이 아니라도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준 그냥 소박하다 못해 그냥 그런, 아무런 장식도 모양도 색감도 없는 그런 떡이였다는 걸 말이다. 그 옛날 어머니의 쪼가리떡처럼 말이다. “괜찮은 거냐? 영아…” 어머니는 가끔 그녀에게 전화로 묻는다. “응, 괜찮아!” 그녀는 씩씩하게 대답한다. 먼 하늘아래서라도 어머니가 이렇게 숨 쉬고 있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되는 일인 줄 그녀는 그때 알았다. 아이의 쌔근쌔근한 숨소리가 아슴아슴하게 어데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5    [단편] 월광곡月光曲 댓글:  조회:308  추천:0  2019-07-15
월광곡月光曲 박초란   1. 나는 한번도 저축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 이십대가 다 지나고 삼십대가 될 때까지 대체 나란 인간은 통 어떻게 살아온 건지 늘 가난에 허덕허덕거렸다. 돈에 쫓기우면서도 자신은 가난한 게 아니라고 계속 억지를 부렸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카드빚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져갔다. 거품처럼 하얗고 몽골몽골하게. 빚을 진다는 건 죄악이였다. 언니가 나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였다. 두세번 쯤 급한 카드빚을 물어준 것도 언니였는데 내가 두번째인가 세번째인가 또 언니에게 부탁을 하자 언니는 모질게도 나와의 모든 련락을 끊어버렸다. 언니가 내 전화를 받지 않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내 친언니가 맞긴 한 건가? 싶은 생각이 스물스물 돋기 시작할 즈음이였다. 몇번의 구세주로 도움을 줬음에도 이미 그 고마움들은 내게서 구만구천리로 날아가버렸고 섭섭한 마음이 날로 쌓여 서서히 노기로 변해갔다. 스마트폰을 켠다. 어느 순간부터 스마트폰이 손안에 쥐여있지 않아도 불안하다.거의 모든 것이 모바일 결제 가능한 세상, 모두가 다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물론 인터넷을 아예 접하지 못한 늙은이나 꼬맹이들이야 뭐…) 카드빚까지 지게 된 것은 스마트폰의 공로가 참 많다. 그것도 안다. 그럼에도 카페인에 중독된 자가 죽어라고 커피를 마시듯 나 역시도 죽어라고 스마트폰을 뒤적거린다.별세상, 스마트폰 하나로 이어진 별세상에서 나만의 우주려행을 한다. 어차피 산다는 건 뭔가 하나 쯤은 미쳐있지 않을가? 나는 이쯤에서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언니, 련락줘. 제발. -언니, 뭔 일 생긴 건 아니지? -언니, 대체 뭘 하는 거야? -강미연, 너 죽을래?! -강미연, 빨리 답장 줘라. -야, 살았어 죽었어? -썅, 네가 이러구도 언니야? -인연 끊어, 끊자고. -정말 인연 끊고 싶은 건 아니지? -죽고 싶어… -미치는 꼴 보고 싶어? -언니, 한번만 딱 한번만 도와주라. 결국은 혼자서 미친년처럼 떠들어댄 판이였다. 언니는 숨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있다. 나는 텅 빈 대화창을 들여보다가 한숨을 내쉬였다. 설마 오늘도 답장이 없을가 싶었는데 정말로 답장이 없다. 언니에게 철저히 버려졌다는 배신감이 온몸을 훑고 다녔다. 새들이 귀찮게 벤치 옆 손바닥 만한 잎사귀를 저팔계의 귀마냥 너펄거리는 오동나무 우에서 우짖어댄다. 찔 째려보다가 다시 몸을 옹송그렸다.지금 누굴(그게 참새라도 말이지) 걱정할 때가 아니다. 당금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데…   “강미연. 너 한번 해보자 이거지?” 나는 애꿎은 나무를 쏘아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서슬에 참새들이 잠간 소리를 죽이나 싶더니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온 나무 우에 참새들이 열매처럼 그득 매달려있듯 - 열매들이 일제히 입을 열고 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재잘거림 - 어느새 내 머리속은 온통 새들의 지저귐으로 그득 찼다. 스마트폰 련락처를 다시 훑어내린다. 그렇다고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짠하고 나타날 리는 없겠지만. 스마트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선뜻 말하기는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신희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 월급이 들어오려면 보름 정도나 남았는데 내 호주머니에는 먹고 살 만한 돈 한푼 없다.먹는 거야 친구한테 빌붙어 때운다 쳐도 정 아니면 동네 슈퍼의 싸구려 라면으로 보름을 버텨낸다 쳐도 카드빚은 더 밀릴래야 밀릴 수가 없다. 제일 먼저 언니한테 전화가 가겠지? 언니가 모른다고 하면? 그 순간 온 천하가, 친구들을 포함해서 모두가 내 처지를 알아버릴 테지… 진저리가 쳐진다.   “거기서 뭐 해?” 숙소로 들어가는 길녘에 룸메이트인 신희가 뭔가 담긴 검은 봉다리를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붙어다녔던 짝꿍이였던 신희가 나를 자신이 안착하고 있는 북경으로 부른 건 지난 3월의 일이였다. 그전에 나는 청도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심수로 철새마냥 옮겨다니고 있었다. 나는 내가 쓸 만큼의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였는데 늘 돈이 모자랐고 늘 여기저기 직장들을 기웃거렸다. 처음 신희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오던 때가 기억난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였고 지저분한 동네였다. 마침 비까지 내린 터라 길마저 질척거려서 더욱 그랬다. “여기서 산다고?” 트렁크를 끌고 신희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추위에 떨며 몇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상상하고 있던 거랑 너무 달라서 조금 당황했다. “응. 다 왔어. 저기.” 긴 골목을 들어가서 작은 창문들이 다닥다닥 달린 ㄴ자형 건물 앞에서 그녀가 잠간 멈춰섰다. 그리고는 ㄴ의 내리금과 건너금이 만나는 끝녘의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2층에 있는 저 집이야.” 모두 3층으로 되여있는 건물이였고 내부를 보지 않아도 세를 주기 위해서 지은 건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시내 안의 집세가 너무 비싸서 좀 멀긴 하지만 차라리 나와 사니까 돈도 남고 조용하고 좋아.” 신희가 앞장서서 들어가며 말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 같았다. 소리들이 구석구석에서 웅웅거리며 울렸다.   신희에게 차라리 터놓고 말해볼가? 나는 멀거니 내 앞으로 다가오는 신희의 주근깨가 박힌 민낯을 쳐다본다. 신희는 세월이 지났어도 중학교 시절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화장마저 거부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쓱쓱 크림 하나만 바르고 밖에 나서는 신희를 보고 경악했다. 물론 내 커다란 화장품 통을 보고 신희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다 얼마야?” 신희가 짧게 외마디소리를 냈고 나는 그런 신희의 옆에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지… 그게 불과 두개월 전 일이였다. 알게 모르게 한눈에 보아도 몇해는 입은듯한 날깃날깃한 신희의 옷차림을 비꼬았던 순간들이 떠올려졌다. “옷 같은 옷이 없네.” “옷 좀 사입어라.” 내 앞으로 다가온 신희는 역시나 그 조촐한 옷차림이다. 몇해 전부터 류행되였던 착용감 좋은 검정색 데님에 유니클로 회색 반팔티. 그리고 하얀 끈의 검정색 운동화.   신희는 길림에서 대학을 다녔다. 고중을 졸업한 뒤 신희와 나는 별로 만날 새가 없었다. 딱 한번 신희가 내가 취직해서 살고 있던 청도로 놀러 왔을 뿐이였다. 신희는 그 당시 실련의 마음을 달랠 곳으로 나한테로 왔고 꼬박 사박오일을 바다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는 커피숍으로 와서 내가 퇴근하기까지 어둠이 내려앉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있군 했다. 신희는 아예 술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똑같은 실련이지만 이렇듯 대처하는 방법도 다르구나 하는 것을 나는 그녀를 보면서 배웠다. 신희가 도착한 날, 나는 내 방식 대로만 생각하고 맥주를 한구럭 사들였다. 결국은 밤을 새면서 혼자서 다 마셔버렸지만. 신희는 딱 반잔을 마시고 힘들어했다. 알콜과민 때문에 맥주 한모금도 못 마시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잔뜩 눈꺼풀이 풀린 눈으로 신희의 팔과 다리에 돋기 시작한 좁쌀 만한 빨간 도드래기를 지켜보았다. “우리 참 다르다 그치?” 그 때 신희가 했던 말이 떠올려진다. 앞에 다가온 신희에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우리 참 다르다 그치?”   “여기서 뭐 해? 안 들어가고.” 신희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응. 널 기다렸지. 생각할 것도 좀 있고…” 나는 앉으라는 표시로 벤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쳤다. 신희는 앉을 념을 안하고 그런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너 먼저 들어가던가.” 내가 멋적어져 말했다. “날 기다렸다면서?” 신희가 다그치듯 반문했다. “알았어. 가자고. 들어가자고.” 심드렁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미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 신희의 발자국을 폭폭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 앞에서 걷는 신희의 어깨가 단단하다. 신희가 화가 나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야 알았다. 집 문 앞에 다다르자 열쇠를 꺼내던 신희가 몸을 돌려 내게 물었다. “너 내 카드 가져갔니?”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 “카드? 카드라니?” 내가 반문하자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ㅌ커피숍 카드 말이야.” 그제야 나는 그녀가 화를 내는 리유를 알게 되였다. “아… 그거 말이야? 응. 어제 잠간 나갔다 오면서 갖고 나갔지. 꺼내놓는다는 게 깜빡했어.” “그런 건 동의를 얻고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니야?” 신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고작 커피 한잔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건데…” 주눅이 좀 들긴 했지만 그녀의 그 민감함에 나도 발끈했다. “그래. 너한테는 커피 한잔 값이 고작이긴 하겠다. 카페라테 효과(식사 후 자연스럽게 마시는 커피 한잔 값을 매일 절약하면 묵돈이 된다는 말)라는 말 들어나 봤을라나?” 신희가 코웃음 쳤다. 그리고는 문을 발칵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라테는 마셔는 봤다만.” 문밖에 남겨진 나는 무안해져서 궁시렁거리면서 잠시 문밖에서 서성거릴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문이 발칵 열리고 신희가 소리쳤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뭘 해!”   신희가 말없이 라디오를 틀었다. CD가 딸린 기기지만 고장이 생긴 뒤로 라디오만 듣고 있었는데 이 방안에서 유일하게 떠들어댈 수가 있는 기기였다. 그 흔한TV도 없었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결이 찰랑거리듯한 선률이 좁은 방안에 꽉 찼다. 딱딱하게 버티고 서있는 벽마저도 좋아라고 흘러넘치는 음부音符들을 흡수하듯했다. 음악이 흐르는 한, 꽉 찬 이 느낌은 계속될 터였다. 조금씩 빳빳했던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려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은 나는 늘 뭔가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명품 가방에 고급 화장품에 브랜드 옷에 구두에. 신희가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내 표준으로 보면 궁색과 결핍 그 자체였지만 분명한 건 그 당사자인 신희는 결코 스스로가 궁색하지도 결핍하지도 않다고 여기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십대를 버텨내는 내내 나는 적어도 스스로 궁색해지지 않으려고 결핍을 선택했지만 신희는 달랐다. 뭐지? 나는 참 그녀의 궁핍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낡은 옷을 입고도, 화장기가 없는 민낯을 하고도 거리를 활보하고 나다니는 신희의 당당함에 갑자기 화가 났다.신희는 뭔가 단단하고 굳건한 자신의 결의 같은 걸 갖고 있듯했다. 그녀는 결핍을 오히려 즐기고 있듯했는데 썩 뒤에 그녀의 적금통장을 보았을 때에야 나는 그게 대체 무엇이였는지 알 수가 있었다.   “너 피아노 잘 치지 않아?” 잠자코 음악을 듣고 있던 신희가 내게 물었다. “오래동안 치질 않아서…” 내가 말끝을 흐렸다. “혹시 피아노 치는 일자리 구할 생각 없어?” 신희가 다시 물었다. “좀 련습하면 어떨지…” 다섯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온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너 학교 다닐 때 콩클에 나가서 대상도 받고 하지 않았어?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네가 하고 싶다면 래일 점심에 우리 회사 앞으로 와. 내가 알고 있는 언니가 호텔 레스토랑 경리인데 피아노 칠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널 얘기했더니 한번 보자구 하데…” 신희의 눈빛이 재빠르게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내 심장이 후두둑 뛰는 소리를 들었다.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때가 떠올려졌다. 신희에게조차 한번도 터놓지 못한 얘기였다. “피아노를…” 나는 울 것처럼 되여서 되뇌여본다. 피아노를 놓은 지 오래되였지만 나는 안다.내 머리 속에 있는 손가락들이 피아노 선률만 울리면 저도 몰래 보이질 않는 건반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넌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어. 드레스도 거기서 준비해준다고 했어. 래일 점심에 봐.” 신희는 두말이면 잔소리라는듯 말을 끊었다. 나는 온몸이 경직된 채 창가에 기대여 서있는 신희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았다. “이제 밥이나 먹을가?” 갑자기 신희가 몸을 발딱 일으키더니 좁아터진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목표가 정해지니 모든 게 단순해진다. 돈. 내게는 절실했다. 처음으로 아무도 기댈 데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아픔이였던 피아노를 다시 찾게 만든 동력이였다는 건 슬프게도 분명했다. “얼마가 필요한데?” 신희가 그 날 밤 자기 전에 물었다. “4만.” 땅바닥에 자리 깔고 누워 내가 어둠 안에서 신음처럼 대답했다. “알았어. 도와줄게. 헌데 다 갚을 때까지 돈 관리는 내 의도 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해.” “뭐?” “그냥 이렇게 쫓기우면서 살기 싫으면 말이야. 싫다면 나도 도와줄 수가 없어.내 시간이나 돈을 수익은커녕 언제 받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 투자하기는 싫거든.” “투자? 네가?” 내가 어둠 안에서 피식 웃었다. “돈이 많아야 투자를 할 수가 있다는 그런 생각부터 버려. 너 은행리자가 얼마인지 알아?” 나는 당장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번도 은행에 저축을 차곡차곡 해봤던 적이 없었던 까닭이였다. “다 쓰고 나서 돈을 저축하겠다고? 말도 안되지. 명심해! 선저축 후지출.” 신희가 간단명료하게 나의 그동안의 상황을 정리했다. 선저축 후지출. 속으로 신희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보았다. 카텐 쯤으로 밝고 둥근 달이 갸웃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던 걸가?   달빛 아래 익어가고 싶었다. 빨갛게 익는 도마도나 사과처럼. 앵두나 꽈리 같이 가만히 익어가고 싶었다. 나는 나를 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해살, 바람, 땅, 이슬, 달빛, 별빛… 농염하게 무르익어서 흘러내릴 때까지 푹푹 익어가면 그 종자 한알에 담긴 커다란 꿈을 제대로 깨우치게 될가나? 어두컴컴한 어둠 아래 노오랗게 잠든 새싹의 꿈을 소중히 여겨야 되겠어. 이제 달빛 한오리가 비춰들고 있잖아… 갑자기 나는 소리내여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말을 건넨다. 어쩌면 그냥 내 입으로 중얼거리고 내 귀로 듣고 싶었던 그런 말들을. 그 소리들을. “할 거야. 다시 해보고 싶어!” 피아노란 단어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엄마가 집안의 모든 돈을 박박 모아서 내게 사주었던 피아노를 눈앞에 그려본다. 국내에서 생산된 많지 않은 모델 중의 하나였다. 반짝거리는 까만 몸뚱이를 가진 그 피아노를 보는 순간 나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하얀 건반을 두드리면서 나는 행복을 느꼈던 것은 분명했다. 고작 다섯살이였는데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 새벽같이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련습을 했던 것도 신기했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언니로부터 피아노를 지키고저 했던 욕심 때문인지도 몰랐다. 피아노를 그만둔 뒤로 나는 한번도 그런 열정과 시간을 어덴가에 몰부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때부터 피아노와 한몸이 되였다. 그 피아노가 두분의 일년치 봉급보다 더 비쌌다는 건 커서야 알았다.   2. 신희가 근무하는 호텔은 오성급까진 아니였지만 꽤 근사한 호텔이였다. 내가 근무하는 북카페도 그 근처 쇼핑몰에 위치해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관촌과 원대도공원 사이를 갔다 왔다 오고 가고 있었다. 간혹 둘 다 일찍 퇴근하게 된 경우, 원대도에서 산보를 하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귀가하군 했다. 휑뎅그레한 5호선을 10호선에서 갈아타고 돌아오는 길은 멀었지만 빨랐고 그 즘이면 우리는 지하철 안의 수많은 타인처럼 심드렁해져있었다. 지하철 마지막 역에서 내려서 다시 뻐스를 갈아타고 이십분 가까이 - 아침 출근시간이면 한시간도 넘어 걸릴 때가 있는 그 길 때문에 신희는 스쿠터를 살가 자전거를 살가 한달째 고민하고 있었다 - 달려서 동네를 걸어들어 갈 무렵이면 벌써 어떤 집들은 불을 끄고 이미 잠들어있었다.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노라면 한층 더 고즈넉해진 밤공기 때문에 다른 세상에라도 온듯 생경하기도 했다. “미희야, 여기!” 정장을 입고 가슴에 빠찌를 단 신희가 엘레베터가 아닌 복도문 쪽에서 나를 불렀다. 엘레베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터라 신희의 갑작스런 부름소리에 깜짝 놀라 호텔 로비의 쏘파에서 발딱 일어섰다. “어.” 신희가 그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맞은편에 앉았던 중년의 녀자가 내 손에 들린 샤넬백을 보더니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 손에 들린 명품백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한순간에 알아챈다. 명품백의 종착지인 ‘샤넬’, 나는 알게 모르게 내 등허리가 쭉 펴지는 걸 느낀다. 그것이 내가 굳이 무리를 해서라도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리유라는 걸 신희가 안다면 뭐라고 할가? 나는 아주 어릴 적 옆집 할머니가 키우던 잘난 수탉 모양(그 순간에 왜 하필이면 나만 보면 쫓아다니던 그 수탉이 떠올랐는지,참)으로 턱을 치켜든 채 씩씩하게 신희에게로 향했다. “아가씨, 올라가볼가요?” 신희가 소리없이 웃으며 엘레베터 쪽으로 안내했다. 나는 잔뜩 긴장을 한 채 엘레베터를 탔다.   홀 중간에 놓여있는 그랜드 피아노. 거만한 신사 같이 나를 그 앞으로 불렀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 연주해보세요.” 레스토랑 담당자가 말했다. 신희가 나를 피아노 앞으로 떠민다. 조심스럽게. 정말로 조심스럽게 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착석. 내 두손이 자연스럽게 건반 우에 올려진다. 피아노를 내 평생 다시는 만지지 않을 줄로만 알았는데… 귀에 익은 선률이 홀 안에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월광곡. 내 손끝에서 터져나오는 선률이 아닌 내 마음 안에서 뿜어져나오는 선률임을 나는 안다. 빨간 피방울이 되여 터져나온 음들. 누구의 말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한마디만이 계속 마음 안에서 에돌았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   집안의 수입 대부분이 피아노레슨비로 들어갔다. 엄마는 삶의 유일한 위안이 피아노 신동으로 소문난 작은딸이라고 했다. 엄마가 나를 감싸안을수록 언니와 아버지 관계는 단단해져갔다. 아버지는 엄마로부터 소외된 언니가 상처를 입을세라 보듬어안았다. 그 안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을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넌 어머니의 전부의 관심을 받고 있었잖아.” 삼년 전인가, “아버지는 내 친아버지가 아닌가봐.” 했던 내 말에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꼬박 14년 동안 나와의 대면도 대화도 회피하셨다. 억울하고 슬펐던 시절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 역시도 점점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내게 아버지가 있다는 그 사실 전체를 외면하고저 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 한국에 나간 아버지는 언니하고만 련락을 했다. 언니 앞으로 생활비를 보내왔고 언니의 일본류학 경비 모두를 대주었지만 나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다니는 언니에게서 간간이 생활비에 보태라면서 용돈이 왔지만 그것 뿐이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도 그리고 대학진학도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도끼로 장작 패듯 패버린 피아노는 그 날 밤 아버지의 손에서 불살라졌다. 겨우 내 손안에 남겨진 까만 건반 한쪼각을 억지도 뺏아내서 불 속에 던져넣던 아버지의 손길이 거칠어서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 했다. 정작 아버지가 패서 불 속에 던져버리고 싶은 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때 했었다.   손가락이 건반 우에서 춤추듯 질주를 한다. 눈물방울 하나가 투덕 하고 건반 우로 떨어졌다. 피아노를 치는 나를 정겹게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이 나타난 건 그 때였다. “엄마!” 내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아노의 열린 뚜껑에 비친 내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였다. “왜 그래?” 신희가 달려왔다. “괜찮은 거야? 너…” 내 얼굴을 쳐다보던 신희가 나를 안았다. 박수소리가 터졌다. 나는 내가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는 걸 그 순간 알았다. 엄마와 함께 말이다.   3. 수익이 떨어진 날. 기분이 찜찜하다. 괴로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맛이구나 싶었다.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가 있을가? 늪 속 깊이 가만히 누워있는 조개처럼 입을 여닫으면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있을가? 그런 내공이 필요하다. 딱 일주일 만에 신희가 내게 넘겨준 펀드는 그 때 쯤 벌써 루적 3% 수익률을 내고 있었다. 그동안 신희에게서 배운 대로 내가 시작한 펀드는 계속 마이너스를 갱신하고 있지만 이럴수록 기회라고 생각하라던 신희의 조언이 도움이 되였다. 신희가 제일 처음 내게 요구한 일은 샤넬백을 되팔아버리는 일이였다. 그 백을 갖기 위해서 신용카드를 긁었는데… 말도 안된 일이라고 내가 코웃음 쳤다. “모든 쇼핑은 금지야! 인터넷쇼핑도 금지야! 내가 가만히 보니까 네 월급 절반 이상이 쇼핑에 들어가고 있어. 그것보다 심각한 건 신용카드 한도를 네 돈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큰 문제야! 그거 알아? 네 돈이 대체 다 어디로 갔는지? 계속 이렇게 월광족으로 살 거야?” 신희가 소리질렀다. “내 돈을, 내 맘대로 쓰겠다는 게 뭔 상관이야!” 내가 뿌루퉁한 얼굴을 한 채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다. 신희가 어이없다는듯 웃었다. “내 백 하나만 남겨도 되지?” 내가 애원했다. “안돼. 안된다고! 하나도!” 신희가 매몰차게 대꾸했다. “그걸로 신용카드 빚 청산해야 해. 넌 부자처럼 살고 있는듯했지만 실속은 아무 것도 없잖아!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니?” 불행하게도 나는 한 인간의 차림새나 장신구나 들고 있는 백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속물(?) 중의 일인에 불과했다. 신희가 도와주겠다고 했던 말은 돈을 전액 꾸어주겠다는 말이 아니였다. 나는 화딱지가 났지만 별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신희가 내가 아끼던 백을,그 다음은 옷과 신발을, 주얼리를 인터넷에 올려 혹은 지인들에게 돌려가며 팔아치우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내 지난 십년의 모든 것이였다. 샀던 가격의 절반도, 절반의 절반도 안된 돈이 입금이 될 때 절망했다. “물건들은 자산이 될 수가 없어. 봤지? 사는 순간 그 가치가 떨어져. 다시 팔 때면 그 가격을 절대 받을 수가 없는 거.” “희귀템은 가격이 올리뛰기도 해.” 내가 혀아래소리로 변명했다. “올리뛰면 뭘 해? 팔지도 않을 거면서.” 신희가 귀찮은듯 손을 휙 저었다. 신희가 대신해서 여기저기 내놓은 물건들 대부분을 다 팔았지만 들어온 돈은 5만원이 조금 넘었을 뿐이였다. 그나마 샤넬백은 구입한 지 겨우 4개월 밖에 안된 터이고 현재 가격이 어느 정도 오른 터라 원금은 충분히 받을 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빚을 갚고도 만 2천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신희는 내 이름으로 된 적금카드를 만들고 주립식 펀드에 넣었다. 단 일주일 만에 모든 일이 진척이 되였다. 그나마 구찌백 하나를 사수해서 다행이다 싶긴 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황금알 잘 낳는 거위 한마리 키우는 거야.” 카드빚을 갚은 날, 신희는 내가 넘겨준 하나 또 하나의 신용카드를 사정없이 가위로 잘라버리면서 말했다. 내 손가락이 신희가 휘두르는 가위에 잘려나가듯 섬뜩했다. “황금알? 거위 한마리?” 어이없게도 치킨이 먹고 싶어졌다. 이렇게 후텁지근한 날은 치맥이 딱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풍기 바람마저도 화기를 품고 있었다. “너 치맥 생각했지!” 신희가 정곡을 콕 찔렀다. “그런 말이 있어. 우리가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는 시간의 두배 이상을 부자들은 어떻게 돈을 모을지를 생각한대. 뭔 얘기인지 감 잡혀?” “거위는 모르겠고 오리 두마리는 키웠던 적이 있지…” 내가 심드렁해서 대답했다. “뭔 소리야?” 신희가 세탁기 속 빨래를 꺼내면서 핀잔했다. 열여덟살, 처음으로 내가 했던 일은 랭면집 복무원이였다.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무거운 랭면그릇들을 쟁반에 쌓아서 나르는 일이였다. 연변에서는 가장 크고 오랜 력사가 있는 랭면집이지 않을가 생각된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녀자아이들이 여덟명이서 숙소 하나를 썼다. 어쩌다 쉬였던 어느 날, 서시장에 나갔다가 걀걀거리는 노란 오리새끼들을 만났다. 고작 아이스크림 두개 값을 주고 오리새끼들을 깨워 파는 장수의 손에서 박스에 담긴 두마리의 오리새끼를 받았다. 지금도 손에 잡힐듯 말듯, 보송보송한 노란 솜털과 납작한 주둥이에 가냘퍼보이는 발목 아래 넙죽한 발가락을 바둥거렸던… 어떤 리유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숙소는 추웠다. 옹송그리고 잠에 빠져들었다가 새벽이면 추위에 깨군 했다. 그 새벽 머리맡에 두었던 오리새끼가 이상했다. 두마리 중 하나가 널부러져있었다. 추워서 그러나 보다고 오리새끼들을 박스에서 꺼내 내 가슴 안에 품었다. 오리새끼들이 자꾸만 내 겨드랑이로 파고들었다. 다음날 새벽, 깨여나서 보니 그중 한마리가 계속 제대로 일어서지를 못하고 괴롭게 걀걀거렸다. 먹이를 주어도 먹지를 않았다. 머리도 쳐들지 못하는 고 놈을 계속 손가락으로 만져주다가 깨달았다. 오리새끼 같은 건 내 삶에 사치라는 것을. 내가 들고 들어온 건 고작 두개의 아이스크림이 아닌 생명이였다는 걸. 더럭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살다가 가끔 생각나군 한다. 내가 박스에 담은 채 결국 그 새벽 쓰레기통 우에 내다 놓았던 그 오리새끼들은 맘씨 좋은 누군가를 만나 살았을가? 암만 벌어도 내 월급으로는 삼년을 모아도 피아노 한대 사기 힘들다는 것도 그 때야 알았다. 그 뒤부터였다. 나는 월광족에서 빛의 속도로 일광족이 되였다. “그러게. 오히려 부자들이 더 검소하게 산다 하더라.” 나는 내 자신이 월광족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욜로족이라고 부르짖었던 어제의 자신이 떠올라서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아담한 체구의 신희는 어릴 때부터 딱 부러진 그런 아이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엄마는 신희를 볼 때마다 그렇게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신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랑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집안의 온갖 살림을 다 도맡아했다. 아버지가 술을 퍼마신 것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어머니가 어린 신희와 남편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 먼저였는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신희는 늘 만취가 되여 퍼져있던 아버지를 위해 장국을 끓이고 북어국을 끓였다. 열두살 때부터는 김치 같은 것도 직접 담그었다. “도전을 할 용기가 있다면 이 세상은 말이야 참 근사한 곳이야.” 신희는 어느새 자존감이 강하고 적응력이 강한 어른이 되여있었다. 신희를 보면서 나는 내가 아직 크지 못한 어른아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좋아. 난. 소름이 돋게 좋지!” 침대에 기대여있던 신희가 몸을 흐드득 떨었다. 신희가 집세를 꼬박꼬박 받고 있는, 아직 은행대출이 남아있는 자그마한 아빠트도 한채 소유하고 있다는 소식보다는 신희의 그 모습이 내게는 더 충격적이였다. 내게는 빡빡한 이 세상을 신희는 즐기면서 살고 있듯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마음 붙이지 못하고 살아온 나와는 완연 다른 삶의 자세였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그 순간 분명하게 알게 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이 불공평한 세상과 운명을 탓하느라 온 기운을 모조리 소모해왔다는 걸. 모두들 열심히 사는구나. 출퇴근길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뒤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 안에서 희석해진 오래 전의 꿈을 만져보려 손을 내밀어보기도 했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던 날들. 내 령혼을 흔들었던 음률과 헤여나올 수 없던 떨림과 마력 같은 표현력, 묵직한 울림이 빠져나간 삶.나는 나 자신이 절박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절박한 만큼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가 있지 않겠냐고 쏙닥거리는 어둠의 소리를 잠자코 듣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지만. 빨래를 건조대에 탁탁 털어 널고 나서 평소와 다름없이 잠옷차림으로 침대에 기대여 앉아있는 신희가 우러러보였다. 내 눈높이로 신희를 폄하해왔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졌다. 고작 내 눈높이가 고만큼 밖에 안된다는 것에 처음으로 심하게 수치심을 느꼈다. 명품만 찾으면서 나는 내 눈높이가 높아진 줄로만 알았다. 착각이였다.   4. 내가 먼저 밥상머리에서 일어섰다. 신희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있는 듯했다. “어제 말이야…” 신희가 입을 뗐을 때 나는 벌써 서너발작 건너 창가 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신희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제 그 사람이 왔었어… 너한텐 미안한데…” “신희야! 나 괜찮아. 그리고 생각해봤는데 내가 나갈게.” 창밖 서쪽 하늘에 가느다란 조각달이 걸려있다. 또 혼자가 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려고 한다. “아니야. 아직 넌 힘드니까 내가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애. 이번 참에 그 사람이랑 다시 합칠가 생각 중이야.” 신희가 힘겹게 말을 마쳤다. 신희가 결혼 일년 만에 남편과 리혼을 하게 된 것은 술 때문이였다. 술 한잔도 못하는 줄로 알았던 남편이 술만 들어가면 괴물이 되여버린다는 건 결혼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였다. 화장실의 변기를 부셔버린 날 신희는 리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나 그 사람이랑 같이 상해에 가기로 했어.” 신희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 밥이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사람 인연이 그렇더라. 쉽게 끊는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더라. 그 사람이랑 아주 가끔 계속 련락은 유지하고 있었던 건 맞아. 문안 정도는 할 정도라고 할가.그 사람이 찾아올 줄은 생각 못했어.” 신희가 긴 말을 늘여놓았다. 맺고 끊음이 매사에 분명했던 신희가 아니였다. “너 어데서 잤어?” 신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텐데 그 순간은 아무 것도 말하기가 싫다. 내가 대답이 없자 신희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미희야!” 내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이제 말 좀 해줄래? 화 좀 풀고.” “너 꼭 그렇게 해야겠어? 신희야.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신희가 창가로 다가와 내 곁에 나란히 섰다. “너랑 시간이 아직 많이 남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떠나게 돼서 미안해. 미희 네가 엄마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알아. 네 엄마가 그렇게 되고… 얼마나 자상한 분이셨는데… 나한테도 엄마 같은 분이셨지. 알지?” 신희가 훌쩍거렸다. 누군가를 떠내보내는 일은 내게는 늘 힘들었다. 이제 이 커다란 도시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신희마저 떠나보내야 한다. 나는 늘 누군가를 가까이하기를 거부했다.   블랙 금요일이다. 언제나 기다려지던 금요일이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금요일이 두려워졌다. 특히는 이렇게 주가가 떨어져버린 날이면 더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야 하는 일이 힘겨웠다. 자진해서 북카페에 휴일 종일 근무를 신청했다.저녁이면 레스토랑에 가서 피아노를 쳤다. 돈 쓸 새도 없이 움직이다 보니 돈도 통장에 꼬박꼬박 착실하게 쌓였다. 신희를 따라 돈을 펀드에 넣으면서 쏠쏠한 그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그 때부터였다. 토요일과 일요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펀드를 하면서부터 생긴 조급증이다. 맘에 쏙 드는 물건을 사고 싶을 때 느끼는 그 짜릿함이랑 비슷했다. 어떻게 될가? 일년이 지나고 오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가? 평정심이 쉽지가 않다. 그 스릴 안에서 느끼는 건데 재미있다. 쇼핑으로 카드를 긁어대던 시간보다도 더 재밌다. 빠져버린다는 게 이런 거로구나 싶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희가 이 도시를 떠나 상해로 간 지도 두주일이 지났다. 6월이다. 혼자서 맞는 이 도시에서의 6월. 날씨는 39도로 넘나들고 있다. 지난 주부터 주가가 푹 떨어지기 시작했다. 신희는 괜찮으니 좀더 지켜보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불안했다. 오랜만의 휴식일이였다. 아침 아홉시에 출근을 해서 저녁 다섯시 반까지 북카페에서 그리고 저녁 일곱시부터 아홉시 반까지 레스토랑에서 출근을 하는 단조로운 날들이 계속되였다. 돈 쓸 시간마저 없구나 하면서 적금통장과 펀드에 돈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눈을 뜨자 바람으로 휴대폰으로 펀드를 확인해본다. 어제 하루만도 460원이 빠져나가있었다. 펀드에 든 만 팔천원 외에도 적금을 든 2만원이 있었다. 지난 두달 월급을 받은 것까지 차곡차곡 넣었더니 조금의 여유도 생겼다. 쇼핑사이트는 휴대폰에서 삭제되였고 가끔 쓰지 않는 물건들을 팔 중고사이트만이 남겨져있었다. 처음 왔을 때 탐탐하게 느껴졌던 방이 널직해졌다. 신희가 가고 나서부터 더했다. “무역전쟁이 시작되였습니다…” 복도를 들락거리며 지나다니다 주어듣는 뉴스에서는 매일이다 싶이 그런 소식이 흘러나왔다. 위기는 그렇게 갑자기 찾아들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든다. 전문가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더욱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다 없어지는 거 아니야? 모두가 얘기하듯 햇부추新韭菜가 되여 싹뚝싹뚝 잘리는 거 아니야? 먼산 보듯했던 세상형세가 나와 이렇게 실질적으로 닿아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늘 먹어왔던 간장이나 기름이나 양념들 그리고 진렬대에 늘어져있는 먹거리들이 례사롭지 않아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들먹들먹했다. 미처 알아채고 말 것도 없이 눈앞에 닥치고 나서야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매초마다 증폭했다. 어떻게 하지? 대책보다는 어서 빨리 그 불안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벌써 7% 떨어졌어. 신희가 저편에서 위챗으로 대답을 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좀더 지켜봐. -도망치고 싶어. 더이상 못 견디겠어! -다 떼우고 마는 거 아니야? -또 떨어졌어. -12.3%가 됐어. 눈물을 좔좔 흘리는 이모티콘을 다다닥 눌러서 보낸다. -겨울엔 나무를 베는 게 아니야. 알지? 좀만 더 지켜보고… 신희가 보낸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버린다. 탐났던 하나 남은 백이 그냥 계속 그 자리에 있을가 조바심을 내면서 매장으로 종종걸음 치던 때보다도 더욱 쫄깃한 마음 졸임이였다.   그렇게 나흘째. 어느새부터였을가? 나는 중고사이트 안을 휘집고 있었다. 견뎌야지 하면서 스마트폰까지 꺼버렸는데… 안 보고 있는 게 더 괴로웠다. 차라리 다른 관심거리를 찾아보자… 피아노를 보고 있었다. 몇천원짜리도 있고 몇만원짜리도 있고. 가슴이 활랑거렸다. 내가 갖고 있는 돈으로 충분히 근사한 브랜드 피아노 한대를 살 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 돈이 빠져나가게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피아노 한대 사는 게 낫지 않겠어? 내 안에서 그런 소리가 울려나왔다. 온몸이 피아노를 칠 때마냥 부풀어오른다.내 손가락이 펀드매출을 누르고 있다는 것도, 적금해제 확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할 새도 없이 온 세상이 부풀어올랐다. 한참 뒤, 내 입에서 비명이 새여나왔다. 눈 깜짝할 새였다.   5. 꿈이 무엇인가요? 라디오 DJ가 묻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나는 동네슈퍼에서 산 맥주 다섯캔을 검정봉다리에 담아든 채 슈퍼의 미닫이 유리문을 드르렁 열고 나오고 있던 참이였다. 에어컨을 켜놓아서 시원했다. 밖에 나오는 순간 후텁지근한 열기가 불편하게 얼굴로 달라붙었다. 그 때 등뒤 슈퍼 안에서 켜놓은 라디오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꿈이 무엇인가요? 문턱에 걸려 휘청거리면서 검정봉다리 속 캔맥주의 철렁거림과 함께 내 안에서 뭔가가 철렁거렸다는  걸 알았다. 꿈이… 무엇인가요?   엄마가 어린 나에게 물었다. 우리 미희는 꿈이 뭘가? 엄마와 함께 꿈을 꾸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였다.   6. 매주 토요일이면 엄마와 함께 피아노 배우러 다녔다. Y시로. 뻐스를 타고 한시간은 푼히 가야만 했다. 날로 손님이 빠져나가는 식당료리사였던 아버지는 학교 음악선생님한테서 배워도 될 일을 유난을 떤다고 못마땅해했다. 지금도 리해가 되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그 당시 백화점 식료품 판매원이였던 엄마는 어떤 계기로 어린 딸들에게 피아노를 배워주기로 마음먹었던 걸가?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였지만 엄마는 딸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를 바랐던 게 아닐가 싶긴 했다. 부모님은 지인 분의 소개로 만나 한달 만에 결혼을 했다고 했다.나긋나긋한 성미의 어머니와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는 그렇게 차례로 언니와 나를 낳았다. 지금 와보면 오히려 언니가 더 나긋나긋했고 내가 더 불같았다. 언니는 늘 엄마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언니가 아빠라고 부르는 아버지를 나는 늘 아버지라고 불렀다. 우리 자매는 가끔 그 호칭 때문에 토닥토닥 다투기도 했다. “너 엄마잖아!” “너 아빠잖아!”   그 날도 엄마와 함께 피아노 교습을 받고 귀가하고 있었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한겨울이였다. 뻐스터미널에서부터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뻐스가 움직일 즈음부터는 눈발이 한결 굵어지기 시작했다. 뻐스운전수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이러다가 눈에 발이 묶여버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하며 근심어린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백미러로 보였다. 조금 뒤 뻐스가 부르릉 몸체를 떨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열네살의 겨울이 그 눈발과 함께 얼어붙게 될 줄은 그 순간에도 상상조차 못했다. 동지가 가까워오면서 이웃집 할머니 말씀처럼 노루꽁지 만치 짧아진 해도 이제 네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어데론가 사라진 뒤였다. 어둑어둑 어둠 속으로 이제 펑펑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들도 촌락들도 눈 속에 소복히 파묻혔다. 뻐스는 투덜투덜 몸을 떨면서 힘겹게 오르막길을 올랐다. 차바퀴가 자꾸 헛돌고 미끌어져내리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저도 몰래 엄마의 손을 움켜잡았다. 어이씨 하는 누군가의 짧은 비명이 뒤에서 울렸다. 기를 쓰는 엔진소리로 꽉 들어찬 뻐스 안은 어느새 공기마저 얼어붙은듯 빳빳하게 경직되여있었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서 가뜩이나 길옆에 잔뜩 쌓여있던 눈 때문에 이제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웅덩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올리막길에서 몇번이고 시도하던 운전수가 시동을 꺼버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더는 못 가게 생겼구만. 여기서 내릴 분들은 내리고 다시 돌아갈 분들은 자리에 남으시오.” “못 간다오?” 옆줄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눈이 많이 쌓여서 올라 못 가나 봅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엄마가 다시 묻자 할머니는 요 앞동네까지라고 했다. 할머니의 뒤를 따라 우리도 뻐스에서 내렸다. “내리자. 래일도 뻐스가 통할지 모르니까. 가다가 정 아니라 싶으면 동네에 들려 하루밤 자구 가자.” 엄마는 짐짓 큰일이 아니라는듯 가벼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춥다. 눈에 둘러쌓인 길 저편으로 먼저 내린 사람들이 몸을 잔뜩 앞으로 만 채 바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흰눈빛만 희끗희끗 비쳤다. 바람이 간헐적으로 불어쳐왔다. 그 때마다 엄마는 내가 날려가기라도 할세라 내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사각사각 눈을 밟는 소리만이 한참을 울렸다. 갑자기 엄마가 나를 불렀다. “미희야, 저기 봐.” 내가 머리를 돌려보니 저만큼 산자락에 노루 두마리가 두귀를 쫑긋거리며 노닐고 있었다. “와, 엄마. 노루야!” 내가 걷는 것도 잊은 채 환성을 질렀다. “쉬-” 엄마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미노루와 새끼노루야. 그치?” “응, 그래. 그런 것 같아.” “가까이로 가서 보고 싶은데…” 나는 노루가 길녘까지 내려왔다는 게 신기해서 저도 몰래 그 쪽으로 발을 옮겼다. “미희야, 안돼.” 엄마가 뒤쫓아와서 내 팔을 잡았다. 그 순간이였다. 발밑에서 부지직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내 몸이 눈과 함께 아래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였다. “아악!” 저도 몰래 비명이 터져나왔다. 같이 부서져내린 눈덩이들이 사정없이 내 머리 우로 쏟아졌다. “미희야!” 엄마의 손아귀가 점점 내 손끝에서 미끄러져 멀어져가고 있었다. 엄마가 가슴을 언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다시 내게로 손을 뻗었다. 눈구덩이는 깊고도 가파로왔다. “엄마, 어떡해…” 엄마가 사람들이 사라진 앞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눈보라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온통 하얀 세상이였다. 눈구덩이 안으로 계속 푸실푸실 눈이 날려떨어졌다. 울음이 터졌다. 이러다가 영영 눈 속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미희야, 걱정 마. 울지 말구. 엄마가 있잖니…” 엄마가 주저없이 눈구덩이 안으로 뛰여들었다. “엄마!” “미희야!” 엄마가 이미 꽁꽁 얼어버린 내 손을 매만졌다. “미희야, 내 말 잘 들어. 내 밑에서 받쳐주면 너 우로 올라가서 빨리 동네를 찾아가야 된다. 가서 사람들을 불러와. 알았지?” “엄마, 혼자서 기다려야 하잖아요.” “엄마는 안 무서워.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얼른 가서 사람들을 데려와야 돼. 응?”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엄마가 허리를 굽혔다. “내 등 밟고 올라가. 빨리.” 울면서 엄마의 등을 밟고 안깐힘을 써서 눈구덩이를 톺아올랐다. 내 발을 우로 추슬려올리느라 맥이 진해버린 엄마의 마지막 파들거림이 그대로 발끝에 남겨졌다. 눈구덩이를 톺아오르느라 손끝이 얼어버려 아무런 감각이 없다. “미희야, 너 손가락 얼면 안돼. 알았지? 빨리 가. 빨리!” 엄마가 눈구덩이 밑에서 소리쳤다. “엄마, 꼭 기다려야 돼. 인츰 올게요!” “응. 기다릴게. 갔다 와.” 엄마는 그 아래서 손을 저으며 내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웃음이 엄마가 내게 보인 마지막 웃음이라는 걸. 엄마를 그렇게 보낼 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도 꿈에 그 자리에 가있다. 춥고 슬프고 두려운 그 눈구덩이 속에. 그 순간에도 아기주먹 만큼한 눈송이들이 계속 내 머리 우로 쏟아져내렸다. 깨고 나면 눅진하게 녹아버린 눈송이들이 내 눈가에 축축히 자국을 남기군 했다.   7. 피아노가 배달이 된 것은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이였다. 어제 밤을 새면서 마신 맥주 때문에 늦잠을 실컷 자고 점심녘에야 깨여나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서 다시 침대에 누워 오늘은 뭘 하지 생각하면서 빈둥거리고 있다가 다시 낮잠까지 두시간 정도 자고 막 눈을 뜰 무렵이였다. 오랜만의 휴식일이였다. 스마트폰이 울렸고 모르는 전화번호였지만 받았다. 모르는 전화번호라도 받지 않으면 불안한 내 오래된 습관이였다. 혹시 련락을 끊었던 언니의 전화일 수도 혹시는… “피아노 배달인데요. 집에 계시죠?” 침대 우에서 발딱 일어났다. “피아노?” 그제야 피아노를 구입한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빨리요? 네. 집에 있어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피아노를 실은 차 한대가 골목길 어구에 서있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책임자인듯한 얼굴이 하얀 남자가 집이 어디냐고 다시 확인했다. 내가 2층 창문을 가리켰다. “자, 일합시다.” 해볕에 구리빛으로 탄 얼굴의 세명의 일군이 피아노를 트럭에서 내리웠다. 피아노의 덩치가 하도 커서 책임자인듯한 남자까지도 걱정스러운듯 다가서서 받든다. 골목길이 좁아서 그중 일군이 피아노를 경사지게 들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조률을 해야 하는 터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야 하고 위안했다. 십메터도 안되는 골목길이 길게 느껴졌다. 굳이 브랜드 피아노로 구입한 게 약간 후회가 되였다. 이제야 더럭 겁이 났다. 좁아터진 방안에 놓으려면 침대마저 내놓아야겠구나 하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한참 이동해서 동쪽에 위치한 건물 입구로 통과해 2층까지 무사히 들어오면 되였다. 갑자기 남자가 일군들에게 피아노를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집문으로 들어갈 것 같아요?” “네?” 내가 반문하자 남자가 알았다는듯 가서 한번 봅시다 했다. 남자가 앞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내 방 앞에 서서 자를 꺼내 대보더니 한숨을 내쉬였다. “안되겠군. 당최 안될 일이여.”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다. “안 들어갈가요? 그럼 어떡하죠?” “창문으로 올려오는 수 밖에.” 남자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하더니 한번은 물어보고 싶었다는듯 이번에는 나를 되돌아 쳐다보면서 물었다. “저 방에 저 피아노가 들어갈 수가 있어요?” 남자의 눈빛이 집요했다. “네?” 결국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결국 묻고 싶은 말은 “대체 이렇게 작은 방에서 살면서 저렇게 큰 피아노를 살 생각은 어떻게 한 거예요?” 일지도 몰랐다. 남자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남자를 따라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남자가 일군들과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한쪽켠에 떨어져서서 그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남자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지게차를 끌고 와야 돼요. 창문을 다 뜯고 넣는 수 밖에 없겠네요.” 빨갛게 타고 있는 석양이 유난히 아름답게 2층 창가로 비쳤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벌써 다섯시 반이 넘고 있었다. “일단 여기다 두지요. 래일 지게차를 끌고 와야 돼요.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남자가 내게 말했다. 아직 날이 훤한데 늦다니? 좀 황당한 생각이 들어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근처에서 지게차를 찾을 수 있겠어요?” 남자가 미심쩍은 얼굴로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게차를요?” 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나 보고 지게차를 찾으라고? “저희 회사의 차는 래일이라야 가능해요.” 남자가 우린 별수가 없으니 알아서 해보라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멍청하니 아직 포장비닐로 칭칭 감긴 커다란 피아노를 노려보았다. 너무 커서 숨이 콱 막혔다. 숨막히도록 무더운 날이기도 했다. “비는 안 오겠지… 자, 여기.” 남자가 일군 중 한명이 들고온 방수포를 내게 내밀었다. “그럼, 래일 올게요.” 하얀 얼굴의 남자가 내게 짤막한 손짓을 해보이고는 일군들을 데리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석양이 더욱 진하게 타오르다가 잦아들 때까지도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버텨서있었다. 마음 안에서 “이럴 거면 안 살 거예요. 갖고 가세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그 커다란 피아노의 압박감에 눌리워 기진맥진해있었다. 귀가하는 사람들이 “뭐야, 피아노잖아?!”, “여기 웬 피아노?” 하는 소리가 울림처럼 귀가에 여운을 남겼다.   침대를 빼내고 그 자리에 놓으면 피아노가 들어갈 것 같았는데 문제는 옷장이였다. 작은 사이즈의 옷장임에도 하도 방이 작은 터라 틀림없이 옷장문마저 막혀버릴 터였다. 옷장마저 빼내야 할 판이였다. 허둥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있지? 나야!” 집주인이였다. 문을 열자 집주인 아저씨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도둑이라도 잡아낼듯한 매서운 눈빛으로 안의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물었다. “마당에 놓은 피아노 209호 거야?” “네.” 내가 대답하자마자 아저씨가 기운 좋은 매미의 톤으로 물었다. “어디다가 놓으려고?” “저 침대를 빼고 놓으면 비슷할 것 같은데… 아마 이 옷장도…” 내가 침대와 옷장을 번갈아 가리키는 사이 집주인 아저씨의 눈빛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럼 그럴 수 밖에 없겠군. 침대와 옷장 처리할 데가 없으면 사람 불러다가 내가 가져가지. 피아노가 방을 다 차지해버리면 자넨 어디서 자나? 설마 피아노 우에서 잘 생각은 아니지?” 주방과 방 사이 한 사람은 누워도 될 만큼의 공간은 되여보였다. “책상도 빼야지 않겠어?” 주인아저씨의 눈길이 탐욕스럽게 화장품들이 가득한 책상 우의 경대를 훑어내려갔다. “그건 래일 피아노를 넣으면서 보죠.” 내가 대답하자 아저씨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침대와 옷장을 움직이지.” 주인아저씨가 휴대폰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나는 급히 옷장의 옷들을 꺼내 책상 우에 콩케팥케 쌓기 시작했다. 신희가 남긴 침대와 옷장이였다. 주인아저씨는 자리를 피할 념도 없이 내 뒤에서 말로 거든다. “내가 좀 거들어줄가? 매트 들어줄가? 아니, 매트 놀 자리가 남으려나?” 조금 뒤 옷장이 텅 비였다. 만족스럽게 옷장을 들여다보던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생각난듯 말했다. “피아노 말이야. 이건 지켜줘야겠어. 저녁 7시 이후에는 치질 않는 걸로. 다른 사람들 피곤하게 하면 안되지 않나? 헌데 자네 피아노 칠줄 알아?” 텅텅텅 발자국소리가 울리더니 몇번 층계에서 마주친 적 있던 이십대 초반 쯤 돼보이는 젊은 남자가 활짝 열린 문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어, 왔어?” “예. 아버지.” 주인아저씨 아들이였다. “이거 좀 들자.” 나는 창가에 걸터선 채 그들 부자가 옷장과 침대를 차례로 문밖으로 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옷장과 침대가 빠져나간 자리가 컸다. “래일 사람들이 오면 내게 꼭 전화해.” 주인아저씨가 나가면서 당부했다. 창문을 뜯어야 한다는 말에 걱정스러운듯했다. 문을 닫고 나서 나는 텅 비여버린 공간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서있었다. 신희가 그리워났다.   보름달이 훤하다. 매트를 깔고 일찍 자려니 잠이 오지 않는다.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피아노는 그 자리에 있었다. 피아노라도 만져보면 위안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잠옷바람에 문을 나선다. 집집마다 에어컨을 혹은 선풍기를 돌리는 소리가 복도에서도 윙윙 들린다. 층계를 내려서며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혀버린다. 아직 열시가 안된 터라 여기저기 TV를 틀어놓은 소리도 요란스러웠다. 둥근달이 누군가가 그립게 커다랗게 허공에 걸려있다. 슬그머니 한줄기의 찬바람도 이마를 스쳤다. 무더위에 지친 벌레들이 이제 막 겨우 잠들가 말가 하는 한여름의 밤, 나는 밤하늘 아래에 서서 진득한 열기가 아직 미지근하게 남아있는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방수포를 걷어내고 피아노를 감싼 포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조금 뒤 거대한 피아노가 달빛 아래 거만한 펭귄마냥 번쩍이는 몸을 드러냈다. 피아노 밑에 숨겨두었던 걸상도 빼낸다. 그리고는 피아노의 덮개를 열었다. 그것은. 88개의 내 모든 세상이였다. 까맣고 하얀 건반. 달빛과 별빛의 소리를 머금고 있고 바람의 소리를 품고 있고 낮과 밤의 이야기를 그리고 삶의 노래를 써내려가는, 칠색의 무지개의 빛갈이 슬프게도 아름다운… 건반 우에 손을 얹는다. 명주 같이 매끄럽고 바람이 빵빵한 고무풍선 같이 탱탱한 골감骨感.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러본다. 도- 긴 여운이 어둠 끝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나는 그 음을 듣는다. 또다시 한번. 도- 그리고 또다시 한번. 어둠 안으로 뻗어나가는 빛 한줄기를 본다. 하늘 한끝에 보이지 않는 피아노 해머 하나가 내 손끝 건반과 이어져 온 우주가 둥- 울리듯 싶다. 그것은 산사의 종소리마냥 은은하게 나를 전률했다. 호흡을 다잡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달빛을 타고 선률이 흐른다. 애잔한 음들이 어둠을 간지럽힌다. 이제 고조로 치닫기 시작한다. 눈먼 소녀가 달빛 아래서 춤을 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다. 손가락 끝마다 뼈에 사무치는 행복이 부딪쳐서 찡찡 맞혀온다. 그리고 춥다. 그 때였다. 창문이 탁 열려젖히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 꼭대기에서 웬 사내의 술 취한 듯한 거친 욕설이 우박처럼 투투둑 하고 피아노 우로 내 정수리로 쏟아져내렸다. “몇시야! 잠이나 퍼질러 자자. 좀! 할 지랄이 없어? 미친년!” 거의 동시에 창문을 걷어닫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텅텅 울렸다. 나는 미친듯이 정말이지 달빛 아래서 춤이라도 추어대고 싶어졌다. 출처:2018 제5호
4    [단편] 블루베리농장 댓글:  조회:303  추천:0  2019-07-14
블루베리농장 박초란   처음엔 블루베리가 아니였다. 왕건을 유혹했던 건 맑고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 공기였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중요하다고 믿는 것 몇가지가 있기 마련인데 그에게 있어서는 공기가 그랬다. 그것이 삶의 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되였다. 매일이다 싶이 미세먼지에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살다 보면 그런 념원이, 소원이 생기지 않고는 어쩔 수가 없다고 왕건은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누구나 다 그처럼 철새마냥 좋은 공기를 찾아서 날아다니지는 않는다는 것 쯤은 자명한 일이였다. 그것이 왕건의 생의 목표가 되여버렸다. “무슨 목표가 이래” 싶게 몇년 전만 해도 그는 상상을 못할 일이였다. 그 때마다 그는 고려를 세운 왕건을 떠올렸다. 그는 공기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다가 블루베리를 알게 되였다. 블루베리야 전에도 먹긴 했지만 블루베리나무를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였다. 당연한 순서마냥 그는 블루베리에 빠져들었다. 마트에서 블루베리를 가끔 사다 먹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일생의 목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블루베리가 그의 입이 아니라 생 안으로 들어오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가? 왕건은 그 겨울이 끝나갈 무렵 블루베리농장을 하기로 했다. 선결조건은 당연히 ‘깨끗한 공기’가 되였다.   왕건은 오래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이 때문이였다. 태여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딸아이를 봐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봐줄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신경증으로 앓고 있는 장모님에게 봐달다고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보모를 쓰기엔 왕건의 절반 월급과 거의 맞먹는 정도라서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아직 피덩이 같은 아이를 누군가 잘 모르는 사람 손에 하루종일 맡겨야 하는 일도 썩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은 안해보다 수입이 적은 남편이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서른넷이였고 왕건은 그렇게 ‘주부’가 되였다. 벌써 4년 전의 일이였고 그동안 아이는 그가 차려주는 예쁜 음식들을 비우면서 몸무게를 늘여갔고 머리가 여물어져갔다.   월요일이다. 차들이 시동을 거는 소리가 련달아 들린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왕건의 안해인 해도도 이른아침부터 서둘러 나서야 했다. 출근길이 막혀버리면 큰일이라 해도는 좀더 일찍 나서는 게 편하다고 했다. 해도가 커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고 나간 뒤 왕건은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 탁자 앞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운은 저녁 늦게까지 보채더니 아직도 꿈나라를 헤맨다.  월요일은 그에게 어제나 그제나 별반 다름이 없는 날이다. 급히 길에 나서야 할 필요성도 없는 터라 이 점은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좋은 점 중의 하나다. 활력은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창문 활짝 열어 반겨 맞아들여야 하듯이. 노트북을 켠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인터넷이 기다려달라고 한다. 기다리는 새 왕건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한다. 해가 둥그렇게 빛사위를 만들면서 세상으로 얼굴을 내민다。 처음인 것처럼, 수집어하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지 새벽을 터치우는 폭죽소리에 놀라는 것처럼, 얼굴을 붉힌 채, 전률하듯 소용돌이치며. 질기고 두서없는 꿈들에 시달리다 눈을 뜨고 보니 그랬다. 책 한권을 찾아 괴기한 서점 안을 기웃거리다가 올라탄 뻐스 안에서 카드를 찍었던지 말았더니 흐릿한 기억을 더듬던 그 순간에도 해살은 스쳐지나간 꿈속 풍경 안에 있었던 것 같았다. 빛살에서 따끈한 커피향이 배여나왔다. 꿈속에서 왕건은 혼자였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고 있던 건 맞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혼자였다. 뻐스에서 처음 보는 곳에 내렸고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어느 근처라고 말해야 하는데, 기억해야 하는데, 찾아야 하는데 그 주소마저 잊어버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집을 찾아헤맨 건가 싶게도 어둠이 미꾸라지같이 꾸물거렸다. 미꾸라지의 배때기같이 희멀끔하고 누런 석양이 낮과 밤 사이에 걸려있었으며 급할 것도 없다는듯 조금씩 조금씩 침식되여가는 와중에도 그는 잃어버린 길 한복판에 서서 길을 찾고 있었다. 어둠의 속살을 찾는 것보다 불가능해졌다는 걸 왕건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의 왕건은 이미 꿈에서 깨여나 김이 모락모락 솟는 커피 한잔을 마주한 채 거실 베란다에 앉아 커다랗게 떠오르는, 이미 떠오른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쉬였다거나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행위 자체는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꿈은 꿈이니까. 꿈을 그냥 꿈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수많은 아침을 맞았다. 금요일과 월요일의 별다른 점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면서.   사내자식들은 주방문턱을 들락하는 게 아니라면서 어린 왕건의 등을 떠밀던 할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주방문을 열 때마다 느껴진다. 주방에 들어선다. 어느새 정들어진 곳이다. 시금치를 다듬어 나물을 무치고 감자를 깎아 된장국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아이가 좋아하는 계란찜을 만들고 빵을 굽기도 하는, 하루 중 왕건이 네댓시간씩 머무르기도 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커피잔을 개수대에서 씻어 엎어놓은 뒤 아이가 일어나서 먹을 빵을 굽기 시작한다. 계란후라이를 하고 브로콜리도 조금 데쳐놓고 제철 딸기도 씻어 예쁘게 잘라놓는다. 그리고 블루베리잼도 꺼내놓는다. 이제 딸아이를 깨울 시간이다.    가습기가 뽀얗게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방, 물통에 그득 담겼던 생수가 어느새 밑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여 빠져나오고… 공기 속에 품고 있는 적당한 물방울들, 그것들이 아이의 몸을, 호흡기를 어느 정도 편안하게 만들어주긴 했다. 창문 쪽에서 공기청정기가 사르르 수없이 정화된 공기를 토해내고 있다. 그 공기 안에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습기와 산소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가 않는 그것들이 왕건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느껴지는 고마움, 자잘한 감동이 빛살처럼 마음 안에서 퍼져나가는 순간들, 왕건은 그런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신기해졌다. 그럼에도 아이의 방문을 열 때마다 짠해지는 그 무엇, 왕건은 공기 중에 깊은 한숨 하나를 보탠다. 지운은 이미 깨여있었다. 지운이 꿈속처럼 공기 중에 말을 던졌다. “아빠, 블루베리 먹을래.” 지운은 유난히도 블루베리를 좋아했다. 슈퍼에서 구입한 블루베리로 잼을 만들어놓아야 할 정도였다. 빵 먹기 싫다고 칭얼대다가도 블루베리잼을 얹어주면 잘도 먹었다. 지운은 달콤하고 새콤한 맛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모든 달콤하고 새콤한 맛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였다. 적당히 달콤하면서 은은한 새콤함이 배여있는 자신의 입맛에 따른 맛만을 찾았다. “블루베리도 있어?” 지운이 식탁 앞에 다가오면서 또 블루베리를 찾았다. “응. 맛있는 블루베리잼도 있지!” 지운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건지 두손으로 눈을 비빈다. “더 자고 싶어?” 왕건이 물었다. 지운이 식탁 앞에 마주앉아 접시를 끄당긴다. “유치원 갈 거야.” 지운은 짝꿍친구가 생기고 난 뒤부터는 유치원에 잘 간다.  “아빤 외로워서 어쩌지?” 왕건이 짐짓 울상을 지어보인다. 딸애가 힐끗 왕건을 쳐다보더니 말을 던졌다. “아빠도 아빠유치원 다녀. 그럼 친구도 많아!” “그렇지? 지운이처럼 아빠도 유치원 다녀야겠네!” 왕건은 아이가 긁어서 이미 피딱지가 앉은 귀밑을 들여다보면서 대답했다.   딸아이가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였다. 왕건은 그 어떤 행복의 실체와 맞닥뜨렸다. 피하기엔 이미 충분히 늦어버렸다는 걸,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그 긴 꿈을 꾸었었다는 걸 그는 알았다. 왕건은 인행도 우에 서서 벌겋게 달아오른 해를 쳐다보았다. 어제의 해가 아니였다. 눈안으로 자꾸만 뽀얀 먼지들이 아물거렸다. 늘 자신의 마음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그 무엇의 실체를 이미 피할 새도 없이 보아버렸다. “가야겠어. 여길 떠나…” 왕건은 갑자기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였다. 도시가 더더욱 삭막해졌다. 아이가 자라기엔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골수에 파고 들었다. “여기 오는 게 좋을 걸세. 한번 와보기나 하게.” 다형의 말이 번개처럼 왕건의 뇌리로 다시 한번 번쩍였다.   아미산에서 만났던 다형과 꾸준히 련락을 가져온 것은 고마움 때문이였다. 다형이 아니였으면 큰일 날 번했었다. 아미산의 원숭이가 그렇게 대단할 줄은 생각도 못하고 묵고 있던 호텔주인이 지팽이를 꼭 갖고 나가야 한다면서 지팽이를 집어주는 것도 괜찮다고 사양했다. 그래도 짐승인데 싶었는데 그곳의 원숭이들은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녀자친구였던 지금의 안해인 해도에게로 달려드는 원숭이를 쫓다가 팔에 상처까지 입었지만 덩치가 커다란 또 한놈의 원숭이가 왕건의 앞을 막자 해도는 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 해도는 뒤에서 배낭을 당겨대는 놈의 괴력에 이미 땅에 넘어져있었다. 그 때였다. 마침 그 자리를 지나게 된 다형이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지팽이로 원숭이를 쫓았다. 원숭이가 이발을 드러내고 씩씩거렸다. 왕건이 급히 해도를 원숭이로부터 잡아당겨 일으켰고 다형이 해도의 등뒤에 있던 놈을 다시 지팽이로 쫓았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였다. 다형은 자신은 위해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다형은 아미산 정상에서 내려가고 있었고 그들은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대로 다형과 다시 련락하기로 약속하고 그들은 거기서 헤여졌다. 그랬던 다형이 재작년부터 산골동네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갓 뾰족뾰족 나온 배추며 상추며 쑥갓들을 혹은 노란 병아리와 오리새끼들을 찍어 왕건에게로 보내기도 했다. 다형은 한번 와보면 여기 눌러살고 싶어질 거라고 했다.  왕건은 꽤 많은 곳들을 돌아보았다. 아토피를 앓는 딸아이 때문이였다. 그는 한때 교외의 산속 쪽으로 이사할가고 꽤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 쪽도 시내 안보다는 심각하진 않겠지만 결국은 별로 크게 상황이 나아지지가 않겠다는 데 실망하고 말았다. 아토피가 심해진 지운을 데리고 장성 근처의 지인의 별장에서 보름 동안 머물고 나서였다. 지운은 건조한 공기 때문에 계속 기침을 했고 여기저기를 긁어댔다. 말유를 온몸에 발라주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가습기를 종일 틀어놓아도 습도가 별로 올라가지 않았다. 해도는 드라마를 만드는 일에 잔뜩 신나있어서 문화의 중심지인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살려면 부부 중 한사람은 돈을 벌어야 했다. 돈 버는 일도 아이를 키우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해도는 밤늦게까지 드라마극본을 썼다가 고치고 또 고쳤다. 젊은 시절 해도의 꿈은 소설가였다. 이제 해도와 상의할 일만 남았다.   그 날 밤이였다. 왕건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해도에게 다형을 보러 같이 가자고 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이래. 공기도 좋고.”   왕건이 해도를 쳐다보았다.   “시간 내기 좀 바쁠 것 같은데…” 해도가 말끝을 흐리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나를 기다리지 말고 이번 주말에 당신이 애 데리고 갔다와. 다음에, 다음에 갈 때 내가 시간을 내볼게.” 잠이 모자라서 해도의 눈에는 피발이 져있었다. “그래. 그럼 이번엔 지운이랑 둘이서만 갔다오는 걸로. ” 왕건은 쉬면서 해야지 하는 뒤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안해에게 그 말을 건네는 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살아가는 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가. 점점 분명해지는 건 그것이 집이나 차가 아니라는 점이였다. 집안에서 빨래하고 청소를 하다 보면 뚝뚝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뿌듯한 충만감이 가슴에 차오르군 했다. 뭔가 커다란 것을, 전에는 상상조차도 못했던 그 하나를 내려놓았다는 걸 알았다. 왕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사군이였다. 왕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로동자였다. 농민과 로동자의 차이를 보면서 왕건은 자란 셈이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콩밭을 매다가 시퍼렇게 자라는 콩들을 뒤돌아보면서 흐뭇하게 웃음 짓던 할아버지의 의미심장한 그 미소를 왕건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일에 쫓기워 살고 있는 안해도 자신의 콩밭을 되돌아보면서 그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가 궁금해진다. 왕건은 해도에게서 한번도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다.   소년 시절 왕건은 일찍 깨쳤다. 그 지루한 시골을 떠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걸. 그리고 왕건은 코피를 쏟으면서 공부를 했다. 큰도시로 가고 싶었다. 왕건은 원하던 대학에 붙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니던 가죽공장과 방직공장이 차례로 부도가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실업자가 되였다. 왕건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모든 저축을 학비로 냈다. 그 돈을 건네줄 때 아버지의 떨리던 굵은 손가락마디가 떠올려진다. 오랜 세월 가죽을 이겨온 손이였다. 왕건의 대학 뒤바라지를 위해서 부모님은 집을 팔았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일한 재산이였다. 아버지는 곧바로 한국으로 나가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한국에 나갈 때까지 연길에서 남의 매대를 봐주는 일을 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왕건은 한번도 집에 다녀간 적이 없었다. 왕복기차표가 아까와서였다. 침대칸도 아닌 좌석표였음에도 아까왔다. 그것도 대학생은 절반 가격이였음에도. 왕건이 대학을 졸업할 즘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세상떴어도 왕건은 집에 다녀오지 못했다. 아버지도 들어오지 못했다. 혼자 남겨진 할머니는 며칠 사이에 폭삭 늙어서 운신도 못할 정도여서 어머니가 시골에 내려가있어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거기 남아있어야 했다. 할머니는 경로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를 했다. 할머니까지 그렇게 보내고 나면 자신을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고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우셨다고 후날 들었다. 왕건이 연구생을 마친 그 다음해 아버지는 출근하던 길에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왕건이 한국으로 갔고 아버지의 유골을 동해바다에 뿌렸다. 할머니가 그에게 던진 마디마디가 아직도 귀가에 묻어있다. “태워서 그냥 날려. 데려올 필요가 없어. 난 내 아들이 계속 한국에 나가서 돈 벌고 있거니 생각할 테니껴.” 왕건이 취직을 해서 겨우 북경에서 안정될 만할 때 할머니도 세상을 떴다. 어머니를 북경에 모셔오려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아직 움직일 만한테 왜 벌써부터 자식 애를 먹여. 싫다. 난 한국 나가서 돈 좀 벌란다.” 그렇게 나간 어머니는 벌써 7년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었다. 왕건이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살 때도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그런 어머니에게 왕건은 차마 와서 아이를 봐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운은 기차를 타기 전부터 신나했다.  “아빠, 우리 어데 가는 거야?” 지운이 한어로 물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지운은 조선어보다 한어를 더 편안해했다. “엄마가 집에서는 조선말 하라구 했지?” 왕건이 핀잔을 주었다. “아빠 여긴 집이 아니잖아! 응, 엄마한텐 비밀.” 지운이 까르르 웃었다. 그러더니 머리를 숙여 왕건의 볼에 뽀뽀를 했다. 목마를 태우고 있던 왕건은 그 서슬에 약간 비틀했다. 아이가 컸구나, 그런 감회가 새로와진다. “지운아, 다형아저씨 기억나?” 아기 때라 아이의 기억엔 남아있을 리 없겠지만 왕건이 물었다. “기억나.” 지운이 조선어로 대답했다. “그래?” 왕건이 놀란듯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다형아저씨 원숭이를 쫓아줬다는 옛말 다 기억나.” 지운이 노래하듯 떠들었다. “옛말?” “응, 옛말!” 아이한테는 그들의 지난 일들이 옛말이구나하고 생각하니 약간 씁쓸해졌다. 아이한테가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해서. 어린 아이였을 적 자신도 할아버지한테 옛말을 해달라고 끊임없이 졸라댔던 게 떠올려졌다.  기차에 오른다. 사람이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이 때문이였다.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지운은 힘들어했다.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오늘은 편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가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다형의 농장은 기차역에서 차로 한참을 가야 했다. 바다와 시골동네가 이어지고 이 땅의 끝자락마냥 산이 막힌 곳, 화기융융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원하고 습윤한 공기가 가슴안으로 흘러든다. 도착하자 참으로 다형이 농장을 구경시켜준다면서 왕건을 밖으로 안내했다. 다형은 왕건이 생각했던 것처럼 일하던 작업복차림에 장화를 신고 그들을 마중하지도 않았고 딱히 주변에는 마구간 같은 것도 없어보였다. 다형은 놀랍게도 정장차림이였다. “어데 나가시는 중 아니죠?” 왕건이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다형이 클클클 웃었다. “귀한 손님들이 오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하고는 지운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네가 지운이구나!” “큰아버지!” 지운은 기차에서 일러준 대로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지운이 블루베리 좋아해?” 다형이 묻자 지운이는 방긋 웃으며 작은 머리통을 힘차게 끄덕였다. “네!” “우리 집에 블루베리가 엄청 많거든.” 동화 속 산타할아버지가 냄직한 목소리 톤으로 다형이 말했다. 지운이 눈길이 여기저기 갸웃거렸다.  왕건이 웃었다. “여기선 블루베리 타령 안하겠네.” “블루베리나무도 엄청 많아.” 다형의 신비한 목소리에 지운이 뿐 아니라 왕건도 그 속으로 끌려들어가는듯했다.    다형의 농장은 웅기중기 들어선 산밑에 있었는데 아득하니 넓었다. 낮다란 블루베리나무들이 줄지어서있었다. “가서 맘껏 따먹으렴.” 다형이 나무 밑에 지운을 내려놓았다. 산자락 아래로 멀리 잔잔한 바다가 바라보였다. 구수하게 몸안 깊숙이 파고드는 흙냄새, 모든 게 싱그러웠다. 지운은 벌써 몇개째 블루베리를 따먹었는지 손바닥까지 보라빛이다. 한가롭게 그냥 나무그늘 밑에서 누워자고만 싶은 오월의 끝자락이였다. 다형과 나란히 블루베리나무 밑에 앉았다. 블루베리밭 아래로 비닐하우스가 일여덟개 이어져있었고 거기엔 겨울채소와 딸기를 심는다고 했다.  “정리하고 여기 내려와서 살어. 애도 여기가 좋을 거야.” 다형이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저야 좋긴 한데…” 왕건이 말끝을 흐렸다. 안해의 표정을 상상해보았지만 아직 또렷하지가 않았다. “그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지. 한번 잘 생각해봐. 언제든지 대환영이니까.” 다형이 빙그레 웃었다. 왕건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 아래 넘실거리는 블루베리나무 사이로 뛰여다니는 지운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아이가 뛰여노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흐뭇하게 웃어본 지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 주변에 있던 공원에서 뛰여노는 아이를 보고 있을 때 말 못할 짠한 감정에 절어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편안함이였다. 왕건은 오랜만의 편안함을 느꼈다. 너무 오래되여서 더듬더듬 기억을 찾아서 확인해보아야 할 정도로. 왕건은 찾고 싶었던 곳을 이제 찾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해도를 설득할 일만 남았다.   농장은 다형네 부부 뿐 아니라 왕건네와 비슷한 나이대의 화가부부가 함께 경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네. 일이야 동네 일군들을 삯내면 되지만 좀더 장기적으로 함께 일을 만들어갈 사람들이 필요하지. 아이들도 많아질 거고 그러면 학교도 필요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만의 건강한 구역을 만들어가고 싶네.” 지운은 이미 왕건으로서는 아직 구분이 잘 안되는 화가부부의 쌍둥이들과 친해져서 밖에서 뛰놀았다. 본래는 학교 운동장이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다형네 집은 옛 학교를 개조해서 만든 주택이였는데 비여있는 방만도 아홉칸이 되였다. 화가부부 중 남편은 유화를, 안해는 수묵화를 그린다고 했다. 거실에 걸린 그림 중 한폭이 마주앉아있는 장의 안해인 린이 그린 그림이라고 다형이 주방에서 나오며 설명했다. 탐스런 호박을 매단 호박넝쿨이 하늘을 향해 물음표를 긋고 있는 수묵화였다. 장은 린과 결혼하기 전 사년 가까이 사찰에서 그림을 그려주면서 머무르다가 린을 만났다고 했다. 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출가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장이 왕건을 마주봤다. 왕건은 그다지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탓으로 그냥 그랬나 보다고 그 말을 넘겼다. 장이 뭔 말인가 할듯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초창기라서 수입은 적지만 이제 다음해부터는 블루베리도 대량으로 판매하게 되면 수입도 꽤 될 걸세. 자신이 하고 싶은 생활을 하면서 돈 걱정 없이 살 수가 있다는 게 참 행복이지 않겠나?” 다형이 거실 쏘파로 와서 앉으면서 다시 농장얘기를 꺼냈다. “그럼요! 저희한테도 그런 행운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왕건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있었다. “여기로 오게. 언제든지 환영일세! 빈방도 가득하고. 아무 방이나 고르게나!” 다형은 열정에 불타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원해서 하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가 있는 그런 에너지였다.  밤이 깊어갔고 다형의 열정 또한 더욱 깊어져갔다.    곧이어 숯불에 올려진 동으로 된 샤브샤브 가마가 나왔고 식탁에는 싱싱한 야채들과 버섯들이 가득 늘어졌다. 양고기도 올라왔다. 지운은 놀기도 잘 놀고 먹기도 잘 먹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이 느껴졌다. 행복이란 단어가 그대로 가슴 안에서 껑충껑충 노루처럼 들뛰면서 노닐었다. “지운이 많이 먹어. 양고기도 많이 먹고. 양도 직접 키운 거라서 고기맛이 다르지…” 린이 쌍둥이아들보다는 지운을 더 챙겨주었다.  왕건은 돌아가면 대출이 아직 남은 집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 홀가분해졌다. 몸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묵직한 짐에 짓눌리워있던 당나귀 한마리가 어쩌다 히히힝 몸을 흔들어대며 소리내여 웃고 있는듯 온몸이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난듯 기분 좋게 유연해졌다. 왕건은 세상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을 찾은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왕건은 농장으로 이사오던 날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친인처럼 반겨맞아주던 다형과 화가부부, 해살이 맑은 날이였고 해도의 얼굴 가득 퍼져있던 오랜만에 보는 웃음. 해도는 왕건이 말을 꺼내기 바쁘게 그 말을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그러자고 했다.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었고 오히려 당황한 쪽은 왕건이였다. 믿겨지지가 않아서 왕건은 몇번이고 다시 해도에게 확인해야 했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이사 가자고.” “응.” “북경이 아니라 먼 위해, 그것도 산골동네라고.” “응.” “집도 팔아야 한다고.” “응.” “직장 그만둬도…” 해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된다고! 직장 다 때려치우고 당신이랑 지운이랑 채소 심고 닭도 키우면서 살 거라고.” 왕건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해도를 품에 그러안았다. 해도에 대해서 정말이지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안해도 나름 이 삶이 무거웠구나 싶었다. 해도가 그의 품안에서 말했다. “나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고… 그리고 지운이랑도 놀아주고 싶다고…” 해도의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있었다.   그들은 일단 위해에 정착해 살 집을 사기로 했다. 시내 변두리의 자그마한 아빠트를 사고 이사짐 대부분은 거기에 풀었다. 그리고 나서 수중에 90만 정도가 남았다. 아주 간추린 살림으로 그들은 농장에 입주를 했다. 다형은 화가부부가 입주할 때 70만원을 농장에 투자했다고 얘기했다. 당연히 농장주인이 되려면 투자는 해야 할 게 아니냐고 왕건이 말했다. “생각 좀더 해보시지 그러셨어요…” 입주 환영만찬이 끝나고 왕건이 산보 삼아 혼자서 마당에서 걷고 있는데 손에 닭알이 그득 담겨있는 광주리를 들고 옆을 지나던 린이 가다 말고 조용히 말을 던져왔다. “네?” 왕건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린을 올려다보았다. 광주리를 든 린의 모습은 틀림없는 시골아낙의 행색이였다. “농장에서 산다고 홀가분한 것만도 아니예요. 어데든 마음자세가 중요하겠지만 정작 살다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거랑은 천지차이예요. 적어도 저희한테는요.” 린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왕건을 건너다 보지도 않고 말을 던지고는 몸을 돌려 총총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져갔다. 왕건은 좀 무거워보이는 광주리를 들어다줄걸 그랬나 머뭇거리다가 다시 느적느적 마당을 돌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왕건은 손에 붓만 들던 화가들이 농사일을 하려니 당연히 힘들겠지 하고 린의 말을 속으로 풀이를 했다. 헌데 다형은 일군들을 쓴다고 했지 않는가?  쥐여짜면 레몬즙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달이 떠올랐다. 왕건은 린의 표정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왕건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집스럽게 발끝만 내려보면서 말을 던져올 때 린의 표정은 이상하리 만치 슬퍼보였다. 무가내로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듯 버거워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첫 만남과는 달리 린도 그렇지만 린의 남편인 장도 말을 참 아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었다. “달이 참 밝아. 달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 해도가 다가와서 그의 곁에 섰다. “응, 달이 밝지? 우리 여기서 잘살자.” 왕건이 안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해도가 머리를 기대여왔고 왕건의 알 수 없던 불안감은 순식간에 어데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 려행을 나갔다고 했던 다형의 부인은 왕건네가 농장에 정착한 지 한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은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으로 해도가 다형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꽤 긴 려행을 하네요? 어데 가신 거예요?” 마침 터밭의 풀을 뽑고 있었고 곁에서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던 린이 해도에게 눈짓하며 머리를 저었다. 해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왕건과 장과 함께 수로를 빼고 있던 다형이 삽질을 멈추고 그들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얘길 안했는데… 우리 부부 별거 중이예요.” 잠시 침묵이 스쳤고 다형이 두손바닥으로 툭툭 호주머니가 달린 앞섶을 털더니 “좀 쉬다가 합시다.” 하고는 먼저 집 쪽으로 향한다. 해도가 한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것을 왕건은 물끄러미 건너다 보고 있었다. 게면쩍어질 때면 저도 몰래 나오는 해도의 습관이였다.   그 날 밤 자기 전 해도는 린에게서 들은 얘기라면서 왕건에게 말했다. “다형이네 부부 말이야. 별거한 지 꽤 오래됐대. 이 농장을 할 때부터 아주머니가 반대를 하셨나봐. 다형이 시내에 있던 집도 팔고 있던 돈을 모두 이 농장에 넣는 바람에 리혼얘기까지 나왔대. 다형이 돈을 줘야 하는데 그 돈을 못 주게 되니까 리혼을 지금까지 미뤄왔나봐… 다형 참 안됐지? 부부가 같은 취향을 갖고 같이 살 수가 있다는 게 참 행운인 것 같애. 당신은 여기서 살길 원하는데 내가 싫다고 계속 시내에 있어봐…” 왕건은 대답 대신 해도의 손을 꼭 잡았다.    과묵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장이 다형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게 된 것은 며칠 뒤였다. 왕건은 한두달 쯤 있어본 뒤 최종 합류결정을 내릴 생각이였는데 다형은 은근히 빨리 투자금을 다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왕건은 어차피 농장에 자리잡기로 한 걸 빨리 돈을 준대도 괜찮겠지 생각했다. 처음부터 다형을 믿고 시작한 일이니까. 왕건이 다형의 거실 앞에 다가갔을 때 안으로부터 장의 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계속 언제까지 끌 거요? 벌써 반년째 돌려달라고 했지 않소? 왕건이네한테는 그 돈을 우리에게 달라고 말할 작정이니 그리 아시오!” “자네도 알다 싶이… 돈도 돈이지만 사람도 필요하지 않은가. 이 농장은 돌아가야 되지 않겠나? 좀만, 좀만 기다려주면 안되겠나?” 다형이 장을 달래고 있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2년 동안 우리가 일한 만큼 보수는 줘야 할 게 아니요? 그동안 돈 십원을 줬소? 아니잖소! 애들도 커서 학교도 다녀야 할 거고. 그동안 보수는 그만두더라도 투자한 원금은 돌려주시오. 그래야 우리도 살 게 아니요…” 장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우리 농장사정을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좀만, 좀만 더 기다려주게…” “기다리고 말고 할 게 없소. 더는 못 기다리겠으니 그리 아시오. 아니라 싶으면 왕건에게 내가 다 말하리다.” 장이 나오는 발자취소리가 났다. 왕건은 황급히 뒤마당 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왜 몸을 피해야 했는지 왕건 스스로도 허구퍼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장은 발을 탕탕 구르면서 자신의 집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왕건은 사위스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히 돈얘기였다. 왕건은 주머니에 넣은 은행카드를 손바닥으로 툭툭 쳐보다가 자리를 떴다.    정적. 정적이 흐른다.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면 그 태초의 침묵도 이 밤의 정적마냥 흘렀으리라. 오후 내내 장작을 팼더니 몸이 노곤했다. 왕건은 침대에 누워 어둠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래도 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래일 날 밝는 대로 장을 만나 얘기를 나눠봐야 하겠다고 왕건은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와글거리고 정적 속을 헤맨다. 여길 온 게 잘된 일 맞겠지? 왕건은 그 순간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산 너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낡은 풍금을 가까스레 당기듯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다. 해도가 몸을 움츠렸다. 왕건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갑자기 어둠 속이 여간 북적북적한 게 아니였다. 잎이 무성해진 살구나무 그림자가 카텐을 드리운 창가로 무섭게 드리워져있다. 왕건은 어둠 안에서 두려움에 떨던 어린 아이로 되돌아간듯 온몸이 경직됨을 느꼈다. 크게 한숨을 내쉬다 말고 왕건은 손으로 밀면 밀릴 수가 있는 물건처럼 오른팔을 내밀어 휘휘 어둠을 쫓았다. 그러다가 그런 자신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만다.  이제 잠이나 자야지 싶어 눈을 붙이는데 저쪽 방으로부터 지운이 잠꼬대하는 소리가 났다. “민수오빠 같이 가.” 왕건은 섭섭해지려고 한다. 잘 익은 살구가 몇개 바람에 투둑 하고 땅에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왕건은 세수를 하러 짐짓 장의 집 쪽을 에돌아 뒤쪽 편 샘터로 나갔다. 장이 퐁퐁 솟아 흘러내리는 샘터에서 대나무바구니에 그득 담긴 오이며 가지, 호박, 상추를 씻고 있었다. 이번 주는 린의 식사당번이다. 한주씩 왕건네와 장네가 돌아가면서 식사준비를 하기로 했지만 거의다 린이 도맡아했다. 그동안 린이 이 큰 살림을 맡아해온 터라 린을 좀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제의한 당번제도였는데 일주일도 안돼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나서는 포기한 셈이였지만 해도는 그래도 열심히 자신 앞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주방일에 더 익숙한 왕건이 하려고 하면 해도는 자신의 일거리를 뺏지 말라면서 왕건을 주방 밖으로 내쫓았다. 해도도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밥물도 제대로 못 맞추고 국수를 삶다가도 넘치는 바람에 놀라 소리지르며 달아나는 해도가 린의 마음에 들었을 리는 없었겠지만 린은 가타부타 소리없이 해도의 손에서 밥통을 받아 물을 맞추고 끓어넘친 가마에 찬물을 부어넣고 행주로 가스렌지를 닦았다. 어제 아침에는 린이 채소 따는 걸 도와준다고 나갔던 해도가 시무룩해서 집에 돌아왔었다. “왜 벌써 왔어?” 살랑살랑 아이의 코를 간지럽히며 지운이를 깨우고 있던 왕건이 물었다 해도는 왕건을 보자 얼굴이 새빨개져서 화를 냈다. “린에게 쫓기웠어. 너무한 거 아니야? 린이 말이야. 오이면 오이지 가지면 가지지… 어느 건 따도 되고 어느 건 따면 안된다고…” “왜 린이 그랬을가? 나도 리해가 안되네.” 왕건이 해도를 끄당겨 곁에 앉혔다. 어느새 잠에서 깬 지운이가 뒤로 가만히 다가와 제 엄마의 겨드랑이에 작은 두손을 쏙 집어넣었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는 해도가 숨이 넘어갈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하하… 나 죽네.”   “싱싱하네요.” 왕건이 말을 건넸다. 장이 깜짝 놀라 몸을 크게 떤다. 그 서슬에 왕건도 놀라서 어 소리를 냈다.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왕건이 급히 사과를 했다. “아니예요. 제가 너무 몰입을 해서… 제가 뭔 일을 하면 푹 빠져버리는 버릇이 좀 있어서…” 장이 미안한듯 웃었다. “그림을 그리려면 고도로 몰입을 해야겠죠.” 왕건이 머리를 끄덕였다. 왕건은 세수하는 것도 잊은 채 멀거니 장이 상추잎을 하나씩 떼여 씻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제 아침에, 린이 큰소리를 냈다고 엄청 후회를 하더라구요.” 한참 상추잎을 씻고 있던 장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네?” 왕건이 조금 뒤늦게 장의 의도를 알아채고 급히 아니라고 했다. “아니예요. 해도가 여러 모로 살림을 안해봐서 주방일도 밭일도 몰라요. 한번도 오이 같은 걸 따본 적도 없을 걸요. 도시에서만 커서 그런 일이 워낙 서툴러요. 헌데 본인도 엄청 일을 배우고 싶어해서…” “지운이 엄마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 하더라구요. 린이 약간 채마전에 대해선 까탈스럽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저도 리해가 안되긴 마찬가지예요. 오이나 가지나 호박이나 도마도가 딱 그 자리에 달려있어야만 예쁘다고. 두고 보려고 키우는 거죠. 언젠가 민석이 녀석이 처음 익은 도마도를 따서 먹어치웠는데 린이 얼마나 화를 내던지… 그 때문에 저희 다투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별 수 없이 그러려니 해요. 지운이 엄마가 리해를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왕건은 뭔 말인지 잘 리해가 안됐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네.” “다시 말하자면 채마전은 그냥 채소를 심어먹는 땅이 아니라 린의 예술작품 창조 같은 것이라고 할가요? 실제로 린의 많은 작품들이 거기로부터 나오기도 했죠. 다형의 거실에 걸린 그림 있죠? 호박덩쿨과 호박 그림도 그렇게 그린 거예요.” 왕건이 머리를 다시 끄덕였다. “그렇게 두고 보겠다고 키우는 채소들도 있군요. 하여튼 대단하네요.” 장이 채소가 그득 담긴 대나무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볼 게요. 식사준비를 해야 해서. 돌고 천천히 들어오세요.” 왕건은 멀어져가는 장의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선 채 차거운 샘물로 푸푸 세수를 했다. 그러다가 장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엄마, 민수오빠한테 나 시집갈 거야!” 지운은 쌍둥이들과 잘 어울려 다녔다. 민수는 쌍둥이 형제 중 형이였다. 동생은 민석이였다. “왜 민수오빠야?” 해도가 목욕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주다가 물었다. “민수오빠 멋있어.” “그래? 민수랑 민석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럼 민석오빠도 멋있지.” “아냐, 민수오빠가 더 멋있어.” “뭐가?” “음… 민수오빠가 수제비 날리는 거 더 멋있어요.” “수제비?” “오빠가 말하지 말랬는데…” 지운이는 해도가 들고 있는 목욕수건 안으로 파고 들었다. “바다 갔었어?” 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운이는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은 타조 모양으로 해도의 품안으로 파고든다. 저도 잘못한 줄 아나 보았다. “누구랑? 쌍둥이오빠들이랑?” 지운이 목욕수건을 뒤집어쓴 채 머리를 끄덕였다. “바다는 위험하다고 했지? 꼭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가야 한다고 했지?” 지운이 숨소리마저 죽인 채 머리를 끄덕였다. “민수도 혼나야겠네.” 해도가 목욕수건을 잡아챘다. 아이가 손끝으로 두세번 수건끝을 잡아당기다가 포기하고 손을 놓았다.  “민수오빠가 그런게 아냐… 민석오빠가 먼저 가자고 했어.” 민수를 혼내야겠다는 해도의 말에 지운이 울먹거렸다. 해도는 다섯살짜리의 사랑 앞에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다신 혼자서 바다에 가면 안돼 알았지? 오빠들이랑도 안돼!” 해도가 오금을 박았다. 린에게도 단단히 아이들에게 이르라고 말할 참이였다. “엄마, 민수오빠 혼내지 마… 지운이, 지운이 다음부터는 말 잘 들을게.” 지운은 엄마한테 혼나는 것보다도 민수 걱정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나했다.   이런 것이 행복이지 않을가? 왕건은 해도가 어린 딸애를 어르는 모습에 감동한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노랗게 익은 살구를 따먹는 재미에 지운은 푹 빠져있었다. 아이를 씻긴 목욕물로 빨래를 하던 해도가 치마에 살구물이 들었다고 아무리 비벼도 벗겨지지 않는다고 아이한테 타박했다. “치마에 또 살구를 주어담았지?” “살구가 너무 많아서 호주머니가 넘쳐났어.” 지운이는 푸짐하게 줏던 살구 생각이 나는지 생글거렸다. 해도가 서둘러 아이의 웃옷을 뒤져보더니 이거 뭐야! 구박한다. “살구 너무 많이 먹으면 탈난다고 했다…” 해도가 계속 아이의 치마자락을 불걱불걱 비비면서 핀잔을 늘여놓을 때는 지운이가 별이 내다보이는 창가 쪽 흔들이의자 우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왕건의 몸 우로 막 기여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였다. 지운이는 씩 웃어넘긴 채 아빠에게 감겨든다. “아빠, 책 읽어줘.” 왕건이 아이를 몸 우에 얹은 채 흔들흔들하면서 “옛날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울 때 말이야.” 옛말을 하기 시작했다. “호랑이 담배 피워?” 지운이의 눈이 올롱해졌다. “응,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옛적에 말이야. 커다란 살구나무 한그루가 있는 집에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단다. 그 아이가 엄마 말을 안 듣고 밥도 잘 안 먹고 살구만 따먹었지. 아, 그 애 이름은…” 왕건이 잔뜩 턱을 내리깔고 슬며시 아이를 엿보았다. “아빠, 잘못했어. 그 아이 이름 나도 알아. 지운이지?” 지운이 시무룩해졌다. “가서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말하고 올 거지? 그럼 계속 재미있는 옛말 해줄 건데…” 왕건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아이가 재빠르게 엄마한테 달려가더니 손빨래를 하고 있는 해도의 볼에 쪽 소리나게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달아와 왕건의 몸 우로 기여올랐다. 그런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해도의 얼굴에도 행복이 찰랑거렸다. 평온한 밤이였다.   블루베리는 잘 팔렸다. 매일 오전 늦게까지 블루베리밭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해도와 린이 같이 일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린은 해도보다 두살 어렸다. 그럼에도 바다바람에 시달렸는지 아니면 두 쌍둥이아들을 키우느라 힘겨웠던 건지 린은 오히려 해도보다 겉늙어보였다. 두살이나 적다는 걸 알고 나서 해도가 놀랐을 때 린은 체념한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던졌다. “이제 아줌마가 다됐는 걸. 언제 거울을 들여다봤던지도 아득해요.” 해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린이 아까보다는 다소 거칠어진 손으로 블루베리를 따는 것을 지켜보았다. 통통하니 보라빛으로 익은 블루베리가 린의 손안에서 물러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블루베리가 어느새 가득찬다. 새벽 같이 일어나서 블루베리를 따서 택배로 보내는 일이 하루 중 중요한 일과가 되였다. “헌데 다형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해도의 말소리가 빳빳해진 분위기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장의 친한 친구랑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 친구가 농장얘기를 꺼내면서 인연이 됐죠.” 린이 가볍게 웃었다. 해도도 한달 전 농장으로 들어오던 때의 부풀었던 그 순간순간들이 떠올려졌다. 꼭 두달 전만 해도 이렇게 산과 바다로 둘러쌓인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가.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살게 된 것도 인연이겠죠…” 초심을 잃지 말아야지, 해도는 그 순간 다짐했다. 정말이지 다짐 같은 건 왕건과 련애를 할 때조차도 해본 적이 없던 것이였다. “전원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번에는 린이 물었다. “음… 여유작작하고 게으름을 실컷 피우고 맨발로 바다가 산책을 하고 책도 읽고 또…” 해도가 뭐가 더 할 말이 필요하냐는듯 거기서 말을 멈추고 린을 뒤돌아보았다. 해도는 다른 일은 잘 못해도 블루베리 따는 일은 잘했다. 린이 흐드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 있죠…” 그러더니 해도의 두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좀더 지내보세요!” 했다. “그래야겠죠?” 해도도 린의 두눈을 피할 념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조금 뒤 해도가 다시 말을 꺼냈다.  “블루베리가 이렇게 잘 팔릴 줄 생각 못했어요.” “따서 바로바로 택배로 보내서 꽤 신선하거든요. 찾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늘었는데 물량은 아직도 못 따라가고 있죠. 블루베리꿀은 거의 아는 몇분만 나누고 있구요.” 린이 잠간 서서 멀리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해도를 마주해 섰다. “그러면 뭘해요.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돈 한푼 받지 못하는데…” “네?” 해도는 미처 린의 말뜻을 몰라 혀아래소리로 물었다.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저희 부부 2년 동안 일했는데 아직 돈 한푼 못 받았어요.” 린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첫해는 얼마 팔지 못했으니 그러나 보다 하고 넘어갔거든요. 헌데 지난해도 없는 거예요. 다형이 리혼을 한다고 했잖아요. 그 돈 모두가 다형의 부인한테로 넘어간 거죠. 아직도 다 주려면 아마 몇해 걸릴 거예요. 다형이 말 안했죠?” 해도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다형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저희도 농장에 투자를 했거든요. 그러면 어느 정도 투자액 만큼 수익분배는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아마도 우리가 투자한 그 돈도 다형의 부인한테로 들어갔을 거예요.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름 대로 고민을 하긴 했는데…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린이 다시 손을 내밀어 블루베리를 따기 시작했다. 해도의 손안에서 블루베리알들이 후드득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장과 다투고 난 다음날 일 보러 시내에 다녀온다고 나갔던 다형이 돌아왔다. 막 아침식사를 마친 뒤였다. 나흘이 흘렀을 뿐인데 수염을 깎지 않아서 그런지 다형은 폴싹 늙어져 홀쪽해진 쌀자루 모양으로 거실 쏘파 한쪽켠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다형을 보면서 왕건은 기분이 착잡했다. 그제날의 열정은 고사하고, 한점의 불꽃마저도 사그라져버린듯한 다형이 낯설었다. 그럼에도 한편 얼마나 힘들면 이 모양일가? 다형이 안스러웠다. “아침은?” 장이 묻자 다형은 힘겹게 머리를 저었다. 린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뒤모습을 따라 해도도 부엌으로 따라들어간다. 그러더니 잠시 뒤 꿀물 한컵을 타들고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이 밖에서 숨박곡질을 하느라 떠들썩했다. 폭우가 퍼부을 것처럼 해가 구름장 뒤에서 얼굴을 내밀 념을 안했다. 다형이 해도가 건네는 꿀물을 단숨에 비웠다. “아, 이제 살 것 같군.” 다형이 컵을 내려놓고 그제야 좌우를 살펴보더니 별일 없었지? 물었다. “별일이야 뭐.” 장이 툭 말을 던졌다. 장은 아예 다형과 눈도 맞추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툭 트인 거실이 오늘따라 숨막힐듯 갑갑했다. 해도가 재빨리 부엌으로 몸을 도사린다. “내가 나간 지 나흘인가? 닷샌가?” “나흘입니다. 오늘까지.” 이번엔 왕건이 대답했다. 장은 계속 내려오지도 않은 앞머리를 올리쓸었다. 허리께까지 길게 묶은 장의 생머리가 신기한지 지운은 몇번이고 장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녀자예요? 남자예요?” 뾰족한 턱 때문인지 작은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채 때문인지 장은 녀성적인 느낌이 강해보이긴 했다. “나 지금 삼박사일을 지하에 갇혔다가 풀려난 길이라네.” 다형의 말소리가 거실 안에 공허하게 퍼졌다. “어쩌다가…” 왕건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모질 줄은 생각 못했네. 당장 돈 삼백만을 내놓으라는데 천천히 주면 안되냐고 했더니 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지하실에 가둬놓고…” 다형이 힘겨운듯 두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사람 남자형제가 셋이라네. 내가 세 장정을 당해낼 수가 있겠나? 지하에 가둬놓고 차용증을 쓰라고 협박을 하대… 지금 별 수 없이 그 차용증을 쓰고 풀려나온 길이네.” “그렇다면 파출소부터 갔어야죠?” 장이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다형이 장을 건네다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고 감옥에 보내야겠나? 식구끼리?” 다형이 끄응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목욕부터 하고 밥이나 먹어야겠네. 있다가 얘기하세.” 동시에 밖에서 후둑후둑 비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와, 소리지르며 그들이 있는 거실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창밖으로 보였다.   “미쳤어? 그걸 다 얘기하면 어쩌자고!” 장이 린에게 고함을 지르는 걸 왕건은 들었다. 지운을 찾으러 나갔다가 마당 어디에도 없길래 쌍둥이네 집에서 노나 보다고 그 집 쪽으로 향하던 중이였다. 린은 그들 집과 거의 붙어있다 싶이 한 채마전에서 쪼크리고 앉아 풀을 뽑고 있었다. 비가 온 뒤라 풀들이 기세등등해서 올라왔다.  “애들 못 봤어요?” 왕건이 소리쳤다. 장이 놀라면서 그런 왕건을 돌아보았다. “아니, 저 뒤쪽에서 놀고 있었는데…” 린이 일어나면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장을 보는 체도 않고 집 뒤편으로 걸어갔다. 린네 집은 ㄱ자형으로 앉은 집들 중 동쪽에 있었고 다형네는 남향으로 앉은 중간집에, 왕건네는 서쪽 끝머리에 살고 있었다. 집 뒤쪽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가장자리로 가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거기서 놀기 좋아했다.  왕건도 장의 곁을 지나 린의 뒤를 따라 실개천까지 나왔다. 거기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어데 갔지?” 린이 이미 어둠이 옅게 깔리기 시작한 동녘을 바라보다가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왕건도 린의 뒤를 따라 달렸다. 바다였다. 집 근처에 없다면 아이들이 갈 곳은 바다 밖에 없었다. 린은 이미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앞에서 달렸다. 걸어서 반시간도 되나마나한 거리가 오늘따라 멀기도 멀다. 하얀 날개의 갈매기 한마리가 어둠 속으로 날아들어간다.  그 때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다가 쪽에서 들려왔다. 왕건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때렸다. “지운아!” 눈물투성이 된 지운의 모습이 먼저 보였고 그 다음 보인 건 쌍둥이 중 하나였다. “민수야! 민석아!” 뒤에서 린의 부름소리가 따라왔다. “민석아! 형은? 너 형은!” 린이 달려와 민석을 흔든다. 아이는 이미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엄마…” 아이가 입귀를 피식거리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아니야.” 린이 외마디소리를 지르면서 바다로 뛰여들었다. 민석의 울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달려온 장과 다형도 바다에 들어갔다. 곧바로 해도가 달려왔고 지운은 해도의 품에 안겨 온몸을 바들바들 떤다. 그런 모녀간을 뒤에 두고 왕건도 바다로 뛰여들었다.  뛰여드는 순간, 왕건은 그 날 새벽 집 뒤 샘터에서 장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말이, 하지 못했던 그 말 한마디가 밀려오는 파도처럼 평생 가슴을 쳐오리라는 걸 알았다. “실은 말이야, 위해에 집 장만하고 나서 먼저 다형에게 50만원을 이체했다네.” 어둠이 무겁게 바다가에 내렸다. 파도소리가 철석거리는 가운데 린의 갈린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민수야, 어데 있어…” 출처:2018 제4호
3    [단편] 향기와 벽 댓글:  조회:279  추천:0  2019-07-12
향기와 벽 박초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좁은 길을 요리조리 비집더니 어느새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가가 즐비하게 늘어선 네거리 도로변, 처음 와보는 낯선 거리였다. 그럼에도 가게마다의 짙은 냄새가 어우러져 하나의 운명을 지닐 수 밖에 없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북적임과 고단함을, 깊어가는 겨울 안에서 울림이 되여 퍼져오는 북풍의 문안을 그리고 오랜 예전의 고요를, 이 모든 것을 단꺼번에 받아안을 수 있다는 것의 행운에 대해서 단 몇번의 호흡만으로 느낄 수가 있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낯설지가 않은 거리였다. 사거리동네의 력사 같은 것인가? 생각해보니 오래 전에 내가 이런 비슷한 표정에 비슷한 냄새를 지닌 사거리에서 한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물론 이 거대한 도시의 번화한 사거리의 표정 대부분이 살뜰하게도 비슷하긴 했다. 한쪽에 웅장한 쇼핑몰이 있고 그 겉면에 유명한 피자나 샤브샤브나 북경구운오리 등등의 체인점들 간판들과 각종 패션과 화장품 브랜드 간판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여있는 것은 물론, 초스피드로 사면팔방 통하는, 그런 속도를 유지해야만 여기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시시각각 그 몸뚱아리 전체를 던져 깨닫게 해주면서 늘 지상으로 아니, 저 높은 하늘을 향한 꿈을 갖도록 만드는 지하철 입구들과 통유리창으로 김이 몰몰 올라오는 따끈한 빵이 들여다보이는 그래서 더욱 위안이 되는 빵가게와 치킨할아버지의 웃음과 맥도날드의 두툼한 햄버거와 프랜차이즈커피나 각종 맛의 밀크티체인점 등등 가게들이 들어앉아있는 것이 기본이긴 했다.  사거리 앞에 서면 어린 시절 종이로 접어 량손가락에 끼우고 놀던 ‘동서남북’이 생각났다. 어느 쪽으로 가면 ‘자하문’이 있을가? 동, 서, 남, 북 하면서 대뇌 속에 끼운 ‘동서남북’을 이리저리로 빼본다. 택시기사는 앞 네거리 맞은편 모퉁이만 굽어들면 자하문이 보일 거라고 했지만 나는 과감히 지금 서있는 동쪽 모퉁이를 굽어든다. 이 모퉁이에 빵집이나 커피점이 있음직했다. 일단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도 좋을듯 싶긴 했다. 빵집이 먼저 보였다. 빵집에도 커피를 팔긴 했지만 커피만 빵집에 앉아 마시기엔 애매했고 아침식사하러 빵집을 찾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여유 있게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엔 불편해보였다. 몇년 만에 맡아보는 빵집 냄새인가? 나는 가게 밖에서 빵냄새를 들이마시다가 코앞에 떡하니 있는 ‘자하문’ 간판을 발견했다.  어두컴컴한 문으로 들어섰다. 아직 영업시간 전이다. 교외에 살다 보니 길이 막힐가봐 일찍 떠났는데 너무 일찍 모임장소에 도착했던 것이다. 불도 달랑 하나가 켜져있는 어두운 홀, 나무테이블 앞에 중년의 남자가 연록색의 운동복 차림으로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남자가 인기척에 머리를 들고 물었다.  “왜요? 여기… 직원인가요? ” 이렇게 손님이 들이닥치기는 처음이리라. 직원들도 아직 출근하기 전이다. 공연히 미안해졌다. “예약한 손님인데요. 너무 빨리 도착했네요. 여기서 기다려도 될가요? ” 내가 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잠간 있으니 듬성듬성 들어서던 직원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카운터에는 딩동딩동 출근카드를 찍는 소리가 쉴새없이 울렸다. 홀 안은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서서히 분망한 하루가 시작될 조짐이다. 불이 켜졌다. 해가 잘 들어오지 않아 낮에도 조명을 환히 켜야 했다. 불이 안쪽으로 층층이 켜지며 식당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드디여 홀 전체가 환해지고 그제서야 나는 이 식당이 엄청 큰 규모임을 눈치챘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매일 반복되는 그네들의 일상일 것이다. 가끔은 바쁘게 움직이는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이 즐겁다. 그 활기가 나에게 전염이라도 되는듯 보는 순간만 나도 뭔가 민첩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한눈에 바라보이는 공간을 제외하고 여러개의 특실이 숨겨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누군가의 분주함이 좋다. 수저와 그릇, 컵을 정연하게 격식대로 차려놓고 차 한잔을 따라주는 그런 잘 짜여진 서비스에 익숙한 몸짓마저도. 결국 깨닫게 된 건 그런 와중에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움직임, 그래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 서로가 긴밀히 련결되여있는 것일지도… 한시간 쯤은 기다린듯하다. 그리고 년말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가 그중 누군가가 남경대학살 때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살육을 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갖고 시비를 했다.  “징병되여 전쟁에 나갔다 하더라도 일본병으로 나간 거니 일본이 한 거죠. 안 그래요?” “그게 정말일가요? “저도 위챗에 나온 걸 봤어요…” 그 때였다. “그건 엄연한 류언비어입니다!” 듣고 계시던 사학자 한분이 듣다 못해 그들의 화제에 끼여들었다.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따뜻한 차를 홀짝거리던 나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건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우리 민족을 매도하기 위해서 퍼뜨린 류언비어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속혀서 동조하면 안되지요.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에서 다음해 1월까지 6주간 자행되였어요. 포털사이트에서 남경대학살을 자행한 일본군 중 40%가 조선인이였다는 근거 없는 류언비어가 류포되였는데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그 당시 일본의회는 조선에서 징병여부를 토론 중에 있었습니다. 이후 1939년에 일부 징병을 했지만 평양사단과 서울사단에 분배되였으며 국외로 파병된 적이 없지요. 우리라도 그 사실을 알고 그것이 류언비어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잠간 지속되였던 고요함이 지나가고 다른 화제가 시작이 되고 끝나고 또 새로운 화제가 시작이 되였지만 내 머리 속에는 온통 아까 그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 뿐이였다.  누군가 옆에서 작가님, 하고 불러왔지만 오래 전에 자주 맡았던 단향檀香 타는 향기가 어데선가 쏘옥쏘옥 자꾸만 내 후각을 자극했다.  향. 단향. 향기.  그리고… 천연염색한 청색 치마의 묵직한 흔들림.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서던 하얀 운동화. 그녀는 그렇게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썅썅香香. 향로가 되고 싶다던, 그것도 그녀가 애용하고 있던 단아한 향로도 아닌, 누구라도 와서 크고 작은 소원을 담은 향을 사르는 절 앞의, 비바람 속에서도 태연한 커다란 향로가 되고 싶다던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여울쳐오는 향기와 함께 계속해서 부딪쳤다.   “밥 사줄게. 그동안 고생 많았어.” 한이 서점에 들린 건 우리가 작은 서점을 오픈한 지 일주일 뒤였다. 아무런 도움도 못되였다고 미안해했지만 가게자리를 찾을 때 두세번 정도 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였다고 내가 대답했다. 그건 진심이였다. 나는 그동안 북경에서 살면서 관광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5환로 밖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내게는 창평昌平은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지리도 사람도 모든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막막했는데 한이 함께 돌아준 덕분에 금방 이곳에 익숙해지게 되였다. 이 지역 자체가 크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길들이 쭉쭉 곧게 뻗어있어 찾기도 쉬웠다. 한은 창평구가 되기 전인 창평현성에서 태여나 학교를 다녔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녔다. 그러니까 친구 한에게는 창평이 고향이자 인생의 중요한 시간 대부분을 보낸 곳이였다. 한은 나보다 네살 정도 많았다. 한은 한동안 시를 썼는데 그의 시에 묻어있는 정서가 마음에 들었고 나는 꽤 오래동안 어쩌면 그녀의 유일한 독자이기도 했다. 어느 한 독서모임에서 만나서부터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였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한은 자신의 시를 읽어줄 독자가 필요했다. 한어언문학汉语言文学을 전공한 나는 솔직히 조선어로 된 문학작품보다는 중국어로 된 작품들을 더 많이 읽은 셈이였다. 한은 채식주의자까지는 아니였으나 태여나 밥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고기붙이는 입에 대지도 못했으므로 밖에 나와서 음식을 먹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3년 남짓 직접 채식 위주의 음식점을 경영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무슨 ‘주의’ 같은 걸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아니였다. “밖에서 먹긴 좀 그렇지 않겠어?” 내가 걱정을 하자 한은 이미 생각해둔 곳이 있으니 따라만 오라고 했다.  ‘초향로草香芦’에 처음 들린 건 그 때였다. 서점을 개업하기 전부터 그 가게 앞을 오고 가면서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늘 급한 일들에 치달려 잊어버리고 있었던 터였는데 한과 점심을 먹기로 한 그 날, 그 가게 앞을 지나는 도중 갑자기 한이 저 가게 한번 들어가보고 싶어, 하면서 앞장서서 그 가게문을 밀었다.  차들이 쉴새없이 오고 가는 큰길 맞은편에는 우정국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브랜드 옷가게들이 십자가 머리끝까지 줄느런히 늘어져있었는데 그 앞은 맞은편(우리가 들어선 가게가 있는)보다는 늘 들락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사선으로 또렷이 바라보이는 십자거리 동남쪽 편에는 우선 빵가게 하나가 있었고 컨더키매장도 빠질 수가 없다는듯 들어앉아있었으며 그 뒤로는 거대한 성마냥 쇼핑몰이 하나 떡하니 서있었다. 각종 음식점들은 물론, 영화관이며 수영장에 헬스장까지도 달려있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왠지 모를 경외감까지 드는 5층 건물이였다. 동북쪽에도 브랜드 옷가게들이 줄느런히 서있었는데 그 쪽의 열기는 좀 덜했다. 서북쪽으로는 유명한 브랜드의 마트 하나가 v자 모양으로 들어서있었는데 마트의 끝편 쯤으로 빠져나오면 신화서점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신화서점을 지나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있는 곳에 우리 가게와 갓 개업한 서점이 있었다.  한과 함께 그리고 해살과 바람과 함께 그 가게에 들어선 기분이였다. 가게 안은 약간 어두웠고 은은한 조명으로 분위기를 잡고 있었는데 나무숲에 들어선 것만 같은 좋은 향기가 났다.  “분위기가 좋네…” 한이 감탄을 련달아 했다. 그러건 말건 가게를 지키고 있던 젊은 녀자는 차상 앞에서 아까부터 하고 있던 알 수 없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가게는 ㄴ자 모양으로 되여있었는데 진렬해놓은 물건이 그닥 많지 않음에도 옹골차보이는 그런 가게였다. 군데군데 도자기 몇점이 진렬되여있었고 이 상품은 팔지 않음이란 글자가 조그맣게 씌여진 메모지가 옆에 놓여있었다. 가게에 가장 많은 물건이 념주였다.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나무종류 외에도 갖가지 보리수 종자로 만든 념주도 있었고 수정이나 호박이나 밀랍 재질의 념주도 있었다. 나무로 조각한 호신부도 몇점 보였는데 서툴지 않은 솜씨였다. 이외에도 향과 향로도 놓여져있었다.  “이거 어떻게 파세요?” 한이 잠겨진 유리문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잠시만요.” 이십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녀자가 천천히 다가와서 유리문을 열었다. 무릎 아래로 내리드리운 묵직한 청색 치마가 인상적이였다. “이건가요? 6백원요.” “녹나무인가요?” 한이 물었다. 한은 념주를 좋아했다. 평소에도 한두개를 꼭 몸에 하고 다녔다. 그렇다고 그녀가 충실한 불교도인 것도 아니였다. 그냥 념주가 좋다고 했다. 내가 고기도 못 먹고 장신구보다는 념주를 좋아하는 한에게 전생에 분명 스님이였을 거라고 했을 때 한은 고맙다고 했다. 그게 왜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인지 나는 리해하지 못했다. “네. 맞아요.” 녀자가 념주를 꺼내 한에게 내밀었다. 한이 그것을 손목에 감고서 들여다본다. 이미 그의 다른 손목에는 금강보리념주가 감겨져있었다. 한은 그걸 좋아하는 만큼 념주에 대해 잘 알았다. 념주알마다 다른 무늬와 향기, 나로서는 보고도 알 수가 없었고 그것들에 대해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한이 금강보리라고 하면 금강보리였고 녹나무라고 하면 녹나무였고 그것의 진가를 가려내야 할 안목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녀자가 흘깃 한의 손목의 념주를 건너다보더니 감각이 좋으시군요 했다.  한은 지기를 만났다는듯 이거 괜찮은 거죠? 다시 한번 확인했다.  녀자가 아무 말도 없이 가볍게 웃었다. “왜요?” 한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였다.   “아니예요. 좋아보여요.” 녀자가 대답했다. 그럼에도 한은 시원치가 않았는지 되물었다. “헌데 아까 그 웃음은 뭐죠?” 내가 한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거 좀 놔볼래? 그냥 궁금해서 그래. 내가 화났을가봐?” 한이 웃었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녀자를 쳐다보았다. 해살이 잘 안 드는 가게라서 그런지 녀자는 창백한 얼굴로 한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입을 뗐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일 때가 더 좋은듯해서요.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소중하지가 않거든요… 제 생각엔 그래요.” 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 얘기해줘야 하나 끙끙거리다 해주지 못한 말이기도 했다. 헌데 그녀는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아주 쉽게 한에게 그 말을 던지고 있었다. 한은 아무 말도 없이 손목에 감았던 념주를 풀어서 내려놓았다. 사태가 심각해지나 걱정하고 있는데 한이 갑자기 깔깔깔 웃었다. “살다보니 이런 가게도 다 있네. 장사를 하는 사람이 물건을 팔면 됐지 손님이 그걸 몇개를 사든 뭔 상관이래!” 한이 그러건 말건 녀자의 얼굴빛은 변함이 없었다. 너무 담담해서 보고 있던 나마저도 이건 뭐지 싶었다. 그녀는 손님의 기분 따위를 맞춰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책을 팔면서 나는 자신이 서서히 비굴해져가고 있다는 걸 느끼였다. 꼬마아이를 데리고 온 아이엄마에게도 애가 귀엽다는둥 이쁘다는둥 칭찬을 늘여놓으면서 이 책 저 책을 찾아내놓았고 책 한권 사지 않으면서 선자리에서 몇권의 책을 다 읽고 다음날 또 찾아오는 심심해보이는 표정의 말라빠진 남자에게도 싫은 소리 한마디 못했다. 나는 이 동네에 익숙해져야 했고 어떠한 손님들에게도 비위를 맞춰줄 심적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장사는 처음이였다. 엄연한 의미에서 책을 팔아야 먹고 살 수가 있는 나에게 서점도 장사는 장사였다.  서점을 하자고 나를 끄당긴 사람은 율이였다. 나의 동업자이자 남자친구. 솔직히 나는 그녀가 걱정이 되였다. 깊은 동굴 같은 이 가게 안에 하루가 가도록 대체 몇사람의 손님이 나드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보건대는 이렇게 장사를 어찌 하나 싶었다. “가자.” 한이 내게 눈짓했다. 이미 제자리로 돌아가앉아 뭔가를 계속하고 있는 그녀 쪽을 향해 한이 입을 삐쭉했다. 약간 재수없어보이는 스타일이였다.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녀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갑자기 내게 말을 건넸다. “저기, 옆에 갓 서점을 여셨죠? 언제 한번 들릴게요…” “아, 네. 그러세요.” 내가 느끼기에도 웃음이 어색했다.   그 날, 한은 뭔 저런 녀자가 다 있냐고 몇번이고 코웃음 쳤다. 밥 먹으러 가다가 그랬고 그녀가 찾아낸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채식식당 안에서도 그랬고 그녀의 가게 앞을 다시 지나 우리의 서점으로 돌아올 때도 그랬다. 그렇게 ‘초향로’와의 인연은 끝나나 싶었다. 뭐 시작도 없는 인연인데 라는 생각은커녕 어쩌면 그녀를 잊어가고 말고 할 것까지도 없는 만남이였다. 들어가서 물건을 흥정했던 가게주인을 다 기억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율과 함께 살고 있던 우리의 집을 한이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고향에서 대학을 나왔다. 한국기업들이 대거 중국에 진출할 때라 한창 조선족들이 여기저기에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많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렇게 북경으로 오게 되였다. 한국의 유명한 기업에 취직을 했고 부지런히 일을 한 덕분에 나는 꽤 많은 월급을 받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알았다. 이것이 조선족으로서 거의 최고의 자리라는 걸. 더 이상의 발전성은 불가능하다는 걸. 그 때부터였다. 나는 자신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졌다. 율은 그즘에 내게로 다가왔다. 율은 내게 같이 일을 하자고 했다. 뭔 일을? 내가 물었고 율이 말했다.  “진정으로 네가 하고 싶은 일 말이야. 평생 해도 싫지 않을 그런 일 말이야!”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였다.  “잘 생각해봐.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율이 다시 한번 말했다. 나는 자신의 일보다는 남자가 더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율이 일을 핑게로 나한테 관심을 가진 거라고 믿었다. 율이 전문 책도매를 하는 친구를 소개시켜주기 전까지는 그랬다. 얼마 뒤 율은 회사에서 잘렸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주변에서 율이 거래처와의 비리건으로 잘렸다고 쉬쉬했지만 율은 아니라고 했다. 율은 이제 자신의 사업을 해나가야 할 시점이여서라고 했고 책 읽기가 유일한 취미였던 나는 율에게 서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나에게 일은 잘하고 있냐는 대신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물었다. 율은 결혼에 대해서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엄마가 고향에서 부쳐준 소금에 절인 송어를 꺼내 구워먹었다. 율은 출장을 나갔고 서점은 직원에게 맡겨놓고 모처럼 저녁 일찍 집에 들어온 날이였다. 굽기 시작할 때부터 냄새가 송어의 마지막 한숨처럼 집안 곳곳을 파고들었고 송어가 집을, 공기를 그리고 나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싶게 온 집안이 송어로만 그득찼다. 다른 생각은 아예 침입할 틈조차도 없었다. 송어는 송어로서의 마지막을 그렇게 화려하게 장식했다. 장엄한 어떤 례식으로 군침을 뚝뚝 삼키는 인간이란 생물을 짙은 냄새로 환호하게 만들었다. 공기청정기는 벌써 네개의 빨간 신호등을 번쩍이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옷에도 머리카락에도 언녕 소리 소문 없이 자신의 존재를 처절하게 남겼다. 씻기 전에는 송어의 마지막 존재의 무게를 그대로 떠메고 있어야 할 터였다. 잠간 과일 사러 밖에 다녀오는 길에서도 바람결에 흩어지는 냄새만으로 사람들은 바다에서 헤염치던 물고기의 위엄을 알아챘다. 사람들 뿐 아니라 길에서 마주친 개와 고양이도 그 냄새 하나에 눈빛이 달라졌다.  하필 이런 날, 한이 왔다. 서점에 들려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율은?” 한이 문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율이 있냐고 물었다. “출장 갔어.” 내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은 생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뒤를 향해 어서 들어와 했다. 한의 뒤를 따라 들어선 이는 그녀였다. ‘초향로’의 주인.   한은 들어서자 참으로 코를 벌름거렸다. “이게 뭔 냄새지?” “아까 송어를 구웠더니 냄새가 안 빠지네…” “완전. 여기 어떻게 있어?” 그러면서도 한이 주방을 기웃거렸다. “밥은?” “아니. 먹고 왔어.” 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갈가?” 한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송어냄새를 피우면서 거리를 떠돌고 싶은 생각은 눈곱 만치도 없었다. “좀 있으면 냄새 나갈 거야.” “참, 잘도 나가시겠다.” 한이 코웃음 치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황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우리가 냄새 때문에 의견이 갈린 새에 그녀는 거실 탁자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내가 다시 한번 앉으라고 권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쏘파에 앉았다.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한도 쏘파에 와서 앉았다.  “차 마실래?” 내가 물었다. “차? 차에서도 비린내가 날 것 같은데. 차라리 맥주 줘.” 한은 갈 때까지 어쩌면 집에 돌아가서까지도 이 비린내 투정을 계속할 것만 같다. “저기. 이걸.” 앉아있던 그녀가 메고 온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향 태우시면 냄새가 금방 좋아질 거예요.” 그녀가 내민 것은 조그마한 향통이였다. 집에 향로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내가 율의 담배재털이를 가져왔다. 그녀가 향을 잘라 갸우뚱하니 재털이 우에 걸쳐놓았다.  “냄새 좋네요.” 내가 계속 코를 벌름거리다가 말했다.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비린내에 이미 찌들은 코안으로 향기들이 날개가 달린듯 날아들었다. “그렇죠… 단향이예요.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직접 만들어요?” 향을 만드는 사람에 관해서는 한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터라 신기했다. “이이가 글쎄 수제향을 만드는 명장이래.” 한이 끼여들었다. “우리가 같이 와서 놀랬지? 솔직히 말해봐.” 한이 친근하게 한쪽 팔을 내 어깨로 걸치며 물었다. “응, 좀.” “지난번에 나랑 같이 갔던 채식식당 있잖아. 그 식당 사장이랑 이 친구가 친한 사인 거야. 거기서 만났어.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하고 있는게 너무 잘 맞는 거야. 널 물어보길래 그냥 같이 와보자고 했지.” 한은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다. 한은 뭐든지 경험해보는 걸 즐겼고 새로운 사람이랑 곧바로 친해지는 재주가 있었다. “너 둘 동갑이더라. 친구로 지내면 좋겠네.” 한이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스물아홉?” 그녀가 먼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새벽까지 열렬했던 우리의 끝없이 이어지던 화제들을 기억하고 있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했던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엉뚱함과 매력에 대해 얘기했고 헤세와 ‘싯다르타’를 얘기했고 타고르의 시를 읊었고 장자와 금강경과 릉엄경에 대해서 얘기했다. 서서히 온 집안에 단향으로 가득 차넘치는 것을 느끼면서 흥분했고 차분해져갔다. 갖가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잠간 울기도 했다. 그러는 새 우리는 하나가 되여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생을 탐색할 준비를 이미 마쳤다는 것을, 그래서 함께 용감하게 나아갈 ‘동지’가 되여줄 것임을 확인했다. 우리는 정신적인 것들이 물질적인 것보다 더욱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부류에 속했다. 아직까지 한번도 처절한 가난도 굶주림도 전쟁의 상처나 느닷없이 찾아든 불행 따위를 겪어보지 못했다. 의미있음의 의미없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의미없음의 의미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맥주 한잔으로도 충분했던 밤이였다.   그 뒤 우리는 틈 날 때마다 모여서 떠들고 웃었다. 그 날 너무 신난 나머지 그녀의 이름마저도 묻지를 않아서 다음날 대체 그녀 이름이 뭔지 몰라서 곤혹스러웠던 것도 에피소드라면 에피소드였다. “이름이… 내가 듣긴 들었는데.” 한이 멍털멍털 구을러다니는 서점의 창밖 양서杨絮를 내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생각난듯 손벽을 짝하고 쳤다. “썅썅香香, 썅썅이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우선 향비香妃를 떠올렸다.  “그 환주거거还珠格格에서 향비 이름과 같아. 향향공주라고 했지?” 한도 향비를 먼저 떠올렸던 게 틀림없었다. “얼굴도 말갛고 조신한 게 향비랑도 너무 닮지 않았어?” 한이 그 와중에도 이름을 기억해낸 게 자랑스럽다는듯 신나했다.   사람들이 들이닥친 건 서점을 개업하고 나서 다섯달 쯤 되였을 때다. 날이 찌물쿠기 시작할 무렵이였고 밤 늦게까지 거리에는 밖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얼굴빛이 굳어진 남자 둘에 날카로운 목소리의 녀자 하나가 갑자기 서점 안에 밀고 들어오더니 율이 어데 있냐고 찾았다. 율은 서점이 좀 안정되고 나서 부쩍 출장이 잦아졌다. 자신은 다른 사업거리를 찾아본다고 했다.  “율이 지금 없는데요. 출장 갔어요.” 내가 대답하기 바쁘게 녀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서점 안에 챙챙하게 울렸다. “언녕 내뺐어. 내뺀 거야.” “어데 갔어?” 이번엔 두명의 남자 중 하나가 물었다. 나이가 좀더 들어보이는 쪽이였다. “저도 잘…” 내가 말끝을 흐리자 녀자가 다시 소리쳤다. “언녕 내뺐겠지… 여서 기다리고만 있겠어? 헌데 아가씨는 여기 직원이야?” “직원은 아니고… 동업자…” “동업자? 뭐야. 그럼 같이 사기를 친 거야?” “사기라니요? 대체 당신들 뭐야?” 내가 소리를 질렀다. “율이 그 놈이 우리 돈을 사기쳐갔어. 이 서점을 담보로.” “이 서점 다 제 돈으로 개업한 건데요?” “뭔 소리야. 우리한테서 서점 더 크게 늘인다고 돈 꿔갔어.” “얼마나…” “오십만.” “말도 안돼요. 이 가게는 다 내 돈을 들여서 개업하고…” “으흐흐흐, 뭐야, 그럼 아가씨도 당한 거야?” 녀자가 쓰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헤아려보니 율이 출장 나간 지 벌써 일주일이 넘고 있었다. “말도 안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자꾸 눈물만 도리반거리고 기대여도 내려앉지 않을 만한 책장도 책상도 사람도 보이질 않았다.   “괜찮아?”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녀였다. “당신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공안국에 가서 신고나 하세요.” 그 사람들을 한참 달래서 내보낸 뒤 그녀가 서점문을 닫았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들 말처럼… 하다면 너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돼.” 그녀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그래야지 하면서도 휴대폰을 누르는 내 손이 계속 무섭게 떨렸다. 율의 전화번호는 계속해서 없는 전화번호입니다를 중복했다.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난했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들이닥친 고비였다. 마음을 도스르려고 할수록 더욱 허둥거리기만 했다. “너 가게세 몇달치 줬는데? 주인한테 전화해서 물어봐. 그 돈 그대로 있는지.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네 카드 정지시키고.” 그녀가 빠르게 말했다. “그건…” “빨리 해봐.” 그녀가 다그쳤다. 세상 밖으로 나앉은듯 가게를 지키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아니였다. 가게주인아줌마가 전화 저편에서 말했다. “책 들여온다고 반년치를 먼저 빼갔는데 일주일 뒤에 준다고 하더니만… 언제 줄 거요?” “네? 반년치를 빼갔다구요? 책 들여오는 돈은 이미 줬었는데…” 지갑 안에 넣어뒀던 카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목구멍에서 헛헛한 바람이 새여나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시렸고 손발이 차겁게 오그라들었다. 오만원은 넘어 있어야 할 카드에는 달랑 오천원이 남아있었다. 율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자비’이자 내  전부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풀풀 나왔다. 내 이십대 대부분을 들여 모은 돈도 그리고 사랑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단 한순간에 티끌이 되였다. 그 먼지가 내 살아있는 생 내내 내 눈을, 내 가슴을 알알하게 할 것만 같아서 스물아홉의 나는 더더욱 아팠다.   꼬박 삼일 동안을 열병으로 앓았다.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거웠다가 찜통에라도 들어간듯 더웠다가 반복했다. 포크레인이 뭔가를 계속 부수고 있는 소리가 덩덩덩 누워있는 침대를, 아빠트 전체를 두들겼다. 낑낑 앓으면서 지옥이 따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고만 싶었다. 녹아버리거나 증발해버리거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념주알의 진가를 알아볼 수 없는 건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어도 한 인간의 진가를 가리지 못한 건 뼈아픈 후과가 뒤따라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 됨됨이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바보스러웠고 스스로가 마주하기에도 창피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어도 충분히 비켜갈 수도 있었을 터인데 자신을 사랑이란 이름하의 그 무조건적인 무지 속에 방치해버린 나 자신에게 화딱지가 났다. 내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못한 벌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날들, 더 이상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할 것만 같아서 슬퍼졌다. 한과 그녀가 번갈아가며 찾아와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 해 여름이 다 갈 무렵 나는 머리카락 틈새로 쏜살같이 빠져 달아나는 젊음을 보았다.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고 륙십이 되고 칠십이 다 가는, 섬뜩한 두려움이 삼복철 기분 나쁜 습기처럼 온몸에 들러붙는듯했다. 세월이 흘러간다는 게 이런 거로구나. 심장을 움켜쥔듯한 통증이 재빨리 전신을 훑고 지나가듯이 신음했다. 서점은 정리했다. 이른 봄 내내 개업준비를 하면서 설레였던 시간들이 먼 기억 속 화석으로 굳어져갔다. 책도매상과 결산을 하고 나니 거의 맞서서 다행히 빚을 지진 않았다는 것이 고맙게 생각되였다. 살고 있는 아빠트의 방세는 그나마 빼가지 않은 것이 그 와중에도 고맙다고 해야 하나, 방 침대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동안 아침은 커피 한잔으로 때웠다. 그리고 시계를 들여다보면 어느새 열한시가 되고 있었고 쏘파에 늘어져있다가 다시 커피를 마시면서 과장된 몸짓의 개그프로를 들여다보면서 그냥 따라 웃다 보면 곧장 오후가 한시가 되고 두시가 되였다. 그것도 지치면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면서 앉아있었다. 나만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은 생각에 얼얼했다가, 창밖의 날씨가 미세먼지에 묵직하게 쌓여있으면 침침하게 가라앉았다가, 비 오는 날은 울기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비는 머춤하고 서있던 그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깊어가도록 오지도 않았다.  그런 나에게 그녀가 한번 해보라면서 일감을 가져왔다. 수제향을 만드는 일이였다. 오후 늦은 시간이였는데 아마도 그녀는 가게문을 닫고 온듯했다. 나는 가게는 어찌하고 이 시간에 왔냐고 묻지도 않았고 다만 그녀가 거실 나무탁자 우에 향로며 이름 모를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놓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향을 만들기 전에 먼저 향을 사르는 걸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그녀가 가루향이 그득 담긴 비취색의 향통과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가 달린 동판을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넓은 향로에 그것을 대고 앙증맞은 향숟가락으로 향가루를 떠서 솔솔 뿌려넣기 시작했다. 누르는 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맞춤하게 가해야 향이 부서지지도 않고 완정하게 완성이 될 수 있다고 그녀가 곁에서 설명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엔 딱 좋은 일이였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향가루같이 거무스름한 어둠의 가루가 잔뜩 창밖에 내려앉아있었다. 세상 전체가 향로인듯 그래서 서서히 하늘끝이 타오르는듯 나는 문득 다시 한번 세상의 냄새를 맡고 싶어졌다. 조심스럽게 동판을 빼냈다. 또렷한 범어 만자가 향로 안에서 살아났다. 부서졌던 가루들이 모이고 모여서 다시 또렷한 문양이 되여 태여났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한쪽 끝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조금 피여나나 싶더니 천천히 타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가 쏘옥 코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단전까지 스윽, 푸근해지게 하는 시원한 기운이였다. 연기가 긴 꼬리를 하늘하늘 흔들면서 피여났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향이 이제 내 몸뚱이 전체를 품었다. 코속으로 눈속으로 귀속으로 그리고 피부의 세포 하나하나 속으로 머리카락 속으로 향기가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먼저 후두둑 눈물방울이 떨어졌고 이어 꺽꺽 울음소리가 향기와 함께 집안 전체를 파묻었다. 율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혹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 않을가 은밀하게 가슴 밑바닥에 숨겨져있던 일말의 요행마저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바보스럽게 당한 내 자신이 한심하긴 하지만 그런 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다 울고 기운이 진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리고 그 향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그녀는 소리없이 내 곁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점점 향기가 어데론가 사라져가고 있을 때 쯤 그녀는 옅어진 향기가 말을 건네오듯 작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침향沉香이야.” 그리고 나서 하얀 재가 조금 남은 향로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령혼을 정화시키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지. 향로는…” 중도에 꺾이지 않고 끝까지 타들어간 침향을 보면서 그리고 그 훅 불면 날려갈 것 같은 하얀 재가 남은 향로를 보면서 알 수 없는 희열이 가슴에 차올랐다. 향이 다 사라진 뒤에도 남겨져있던 그 희열의 정체를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지만 몸을 살라 향기를 풍겨주는 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그렇게 좋은 향도 타고 나면 조금의 재로 남는구나, 그런 생각이 그 당시의 나에게 오히려 위안이 되였다. 그녀의 향도수업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줄 서있다는 것도, 그 학비 또한 어마어마하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게 되였지만 나에게 그녀는 다만 순수한 믿음직한 그런 친구였다. 향 하나만으로도 마음을 나눌 수가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스승 같은 친구였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그녀의 가게로 나갔다. 그녀와 함께 상 앞에 앉아서 향목과 다른 향초 등을 넣고 섞어 반죽을 해서 각양각색의 향을 만들었다. 한도 저녁이면 와서 거들기도 했다. 가루를 배합하고 반죽을 하는 건 그녀의 몫이였고 나와 한은 주사기로 향을 뽑았다. 끈적거리는 반죽이라서 힘이 들긴 했지만 나는 그 과정들을 충분히 즐겼다. 가느다란 선향线香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며칠이고 그늘에서 말리우면 되였다. 모든 재료는 천연재료였고 찹쌀가루도 들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원추모양의 나무틀에 넣어 찍어내는 향도 만들었고 향가루와 말린 꽃을 집어넣은 향낭香囊을 만들기도 했다. 온갖 꽃향들이 싱그러웠다.    그렇게 보내고 있던 충실했던 날들.  한이 갑자기 그 말을 꺼냈다. 그 날도 향을 틀에 넣어 찍어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던 중이였다. “그거 봤어? 남경대학살 때 조선인도 있었다며?” “설마?” 내가 도리머리를 저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거 나도 봤어.” 매장에서 향낭을 걸고 있던 그녀도 합세를 했다. “뭔 소리야? 남경대학살은 일본놈들이 한 거잖아! 그렇다고 해도… 학도병으로 강제로 끌려온 거겠지…” 내가 애살스럽게 변명했다. “강제로?” 한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강제로 끌려온 거라면 그렇게 지독하게 죽일 필요까진 없었지 않을가?” “지독하게?” 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교과서에서 남경대학살에 대해 배우면서도 거기에 가해자로 나와 같은 피를 가진 동족이 참여했을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그럴 리가…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걸 거야.” “정말 그럴가?” 한이 한숨을 내쉬였다. “정말이지 말이야. 나도 아니길 바래.”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한의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 “누군가의 롱간일 수도 있어.” 그녀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고마웠다.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쟤 잘못은 아닌 거잖아.” 그녀가 아까부터 걸고 있던 향낭을 걸며 한마디 더 붙였다. 나는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궁해져서 꿀 먹은 벙어리 모양을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숨막힐듯한 정적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계속 미세하게 가슴이 떨렸다. “먼저 일어날게.” 침묵을 깨고 내가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면대로 가 손을 씻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밤바람이 차거워져있었다. … …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빠트를 정리하고 그 곳을 떠났다. 새로운 터전을 찾고 정착을 하느라고 바삐 보내다 보니 한번도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주 가끔 번화한 사거리 앞에 서면 그녀의 고즈넉한 가게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가 떠올려지군 했다. 그리고 함께 만들었던 향의 향기가 세월의 바람결 너머 은은하게 달려오듯하기도 했다. 온갖 세상의 냄새에 섞여있음에도 너무 분명하고 달콤한 향이였다. 지금까지도 내게는 그랬다. 출처:2018 제3호
2    [단편] 무화과나무 댓글:  조회:318  추천:1  2019-07-11
박초란 배낭은 그녀의 것이였다. 시조새가 그려져있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보기 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비싼 브랜드인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려행을 좋아했던 그녀가 갖춰놓은 수많은 장비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녀는 봄과 가을이 될 때마다 하나 또 하나의 아이템을 사들이면서 언젠가는 배낭려행을 떠날 거라고 꿈꾸었다. 배낭만도 크고 작은 배낭이 여섯개나 있었다. 려행지들을 스크랩해놓고 들떠 얘기할 때마다 언제? 내가 물었고 그녀는 조만간에 갈 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내가 려행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결코 내게는 함께 떠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온갖 장비들이 하나 둘 다락에 쌓여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그녀가 그 모든 것을 달팽이 같이 짊어지고 길에 나서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그 장비들만을 다락에 남겨둔 채 떠나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세상과 떨어진 이곳에서 사는 삶 자체를 이건 아니라 싶었는지 아니면 나한테서 발전가능성이나 든든함을 못 느꼈는지 나는 알지를 못했다. 그냥 그런 겐가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였다. 문을 닫는 순간, 약간의 동요가 일렁였다.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마음거죽이 째질듯이 밀려들었는데(마음에 거죽이 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 쯤은 마음 같은 것이 뭐라 하든 적당히 무시해버릴 줄도 알게 되는데 그 순간 나는 모르는 척도 아니고 대놓고 무시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를 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익숙한 도로로 걸어나왔다. 도로에는 차 한대도 보이질 않았는데 평소에도 다니는 차가 적은 터라 걷기에는 맞춤했다. 차 두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도로였다.  우리는 5년째 도시도 산골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 살고 있었는데 도시로 한번 들어가려고 해도 멀고 불편했고 마음 먹고 산으로 한번 놀러 나가려고 해도 불편했다. 분명한 건 그녀가 차타령을 하면서 좀씩 달라져갔다는 점이였다. 다니기가 너무 불편해. “우리 차는 한대 있으면 좋지 않겠어? 요즘 차가 없는 집이 어딨어?” 그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내게 지청구를 들이댔다. “난 운전 못해.” 나는 순순히 그 말을 따를 수는 없어 핑게를 댔다. “운전면허증 있잖아.” 그녀가 반박했다. “벌써 팔년째야. 면허증만 따놓고 차를 운전해본 적이 별로 없어!” 나는 차잔을 기울이다가 차맛이 별로라는 것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차맛보다는 그녀가 하필 차를 마시는 이 시간에 내 맞은편에 앉아서 차맛을 흐려놓는 것이 더욱 짜증이 났다. 그녀가 정색해서 말했다. 쪼르르 다시 차를 따른다. 차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의 기분이 상당한 비중으로 그 맛을 결정한다는 내 믿음을 다시 한번 믿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같이 차를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도 그 맛이 좌우지될 수도 있다는 믿음도. “결국 오늘의 차는 틀렸군,” 하면서 차잔을 비운다. 동방미인(대만차의 일종)의 그 신묘한 향기는 이미 어데론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내가 빈정댔다. 매일이다 싶이 산보하던 구간이라서 익숙했다. 그녀와 함께 혹은 나 혼자서 이 도로를 따라서 대양산까지 걷군 했는데 갔다 오면 네시간 정도 걸렸다. 이 가을이 시작되고 나서 그녀는 열흘 정도 같이 나가고 나서는 익숙해져버린 그 코스에 지겨워했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잖아. 그녀는 헐벗은 산들에 둘러싸인 산길을 따라 걷다가 다람쥐도 안 보이냐고 타발을 했다. 봄 내내 온 산에 가득 핀 도화에 취해있을 때랑 다른 몸짓이였다. 교외에 나와 살면서 어덴가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데는 이미 신물이 나있었고 나는 조용하게 남은 생을 보내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그 생각을 말했을 때 그녀는 꿈꿔왔던 자신의 삶이라고 하면서 참 좋아했다.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라는 건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나를 따라 산으로 들어왔다. 들어올 때가 2012년 11월이였으니 벌써 5년 전의 일이였다. 그녀는 꽤 유명한 출판사 편집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에는 별로 미련이 없는듯했다. 나는 흥청망청 쓰지만 않는다면 먹고 사는 데는 큰 부담이 없을 만큼의 여유는 있었고 그다지 필요 이상의 돈도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직장을 정리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회사의 사장은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는 다시는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동안 일을 했던 것도 지금부터의 자유와 여유를 위해서였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이니까. 나는 아이 때부터 그다지 성공이나 돈이나 그런 것에 관심이 적은 편이였다고 생각했다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에 괜히 머쓱해진다. 나는 한때 그 누구보다 더더욱 성공이란 걸 해보고 돈을 벌고 싶었었다.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누구의 시점에서 보면 충분한 성공일 수도 혹은 누구의 시점에서 보면 나의 성공이란 것이 아무런 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였고 나는 좀더 욕심(?)이 많은 성인이 되여있었다. 례를 든다면 안일이나 행복이나 건강이나 삶의 의미 같은 것… 그것들을 위해서는 뭔가를 삶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다행스럽게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은 셈이였다. 2012년 내가 퇴직을 했을 때는 내가 서른여섯살이 되여있었다.  산에 들어갈 계획을 얘길했을 때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려진다. 산으로 들어온 것도 그리고 나랑 같이 산 것도 결국은 그녀의 젊었을 때 해야 할 일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였는가? 나는 의심스러워진다. 무화과가 먹고 싶어졌다.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한 귤빛 노을을 혼자서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달콤하고 쫀득쫀득한 그 맛이 그리워졌다. 특별히 무화과가 맛있다고 느꼈던 적도 없었는데 그 날은 왠지 모르게 평생 몇번 먹어보지도 못한 무화과가 먹고 싶어졌다. 무화과는 그녀가 좋아하던 과일이였다. 긴 외출을 나갔다 돌아올 때면 그녀의 가방 안에는 꼭 무화과가 들어있었다. 싱싱한 과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말린 무화과를 몇통씩 들여다가 놓고 먹군 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인 그녀는 무화과와 무슨 원쑤라도 진듯이 아귀작아귀작 이악스럽게 먹었다. 그녀가 떠나간 지 열흘 만이였다. 나는 어슬렁거리면서 2층 다락에 올라가서 혹시라도 그녀가 숨겨둔 무화과통이 없나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배낭을 집어들었다. 혹시 배낭에 넣어두었나,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냥 그 순간에 그 회색의 밋밋한 배낭이 눈에 훅 들어왔다. 그것을 집어든 순간 알았다. 길에 나서게 되겠구나 하고. 산길이 구불구불 뻗어있다. 바위가 듬성듬성 보이는 산들은 대체로 밋밋하다. 키 낮은 잡목들이 보기 부끄러운 칠칠치 못한 늙은 녀인네의 머리카락처럼 흩날리고 있지만 가다가다 보면 그것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돌산이 무리지어있는 곳을 걸어온듯 돌아보게 된다. 아주 간혹 골짜기 쪽으로 소나무숲이 무리지어 으슥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모처럼 소나무숲이 바라보이는 길녘에서 보온병에 갖고 온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한숨 쉬였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한시가 되고 있었다. 벌써 세시간을 꼬박 걸은 셈이였다.  잠시 려행 다녀옴.  결국 나는 랭장고에 붙여놓았던 메모지를 쓰레기통에 구겨서 던져버리고 말았다. 하트 우에 적어놓은 그 말이 갑자기 빈껍데기가 된듯 시시해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그것 때문에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아파한다는 걸 썩 커서야 알았다. 그 마음을 어떻게 다독이고 어떻게 가다듬어야 하는지는 그 뒤에 남겨진 나의 평생의 숙제였다. 기쁘다는 걸 의식도 못한 채 좋아서 풍덩풍덩 뛰기부터 했던 어린 시절의 기쁨이, 아프다는 걸 느끼지도 못한 채 엉엉 울어젖히고 씨익 웃고 잊어버렸던 날들이 축복이였다는 걸 나는 뒤늦게나마 눈치챘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나는 아프다는 것도 화가 난다는 것도 적당히 무시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여있었다. 기쁘다고 느껴본 지가 한참 오래되였다는 걸 이 순간에 깨닫는다. 그녀가 곁에 있었던 날들에도 기뻤다고 느껴졌던 날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순간에는 기뻤었겠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와의 똑같은 날들이 그녀 자체도 습관이 되여버렸던 거로구나. 그녀에게도 나 역시 습관이 되였을가. 지루했고 참을 수가 없었던 걸가?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마음에 곰팽이가 날 것 같애. 그녀가 던졌던 말만이 더욱 또렷해진다. 배낭을 멘다. 저녁에 묵을 곳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을 가야 한다. 산 아래까지는 단숨에 내려왔다. 그리고 달구지길을 따라서 큰길녘으로 나왔다. 이제 나는 아까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풍경 속의 한 점이 되였다. 거기서부터는 다니는 뻐스도 있었다. 뻐스역에서 머뭇거리면서 뻐스를 탈가 잠시 고민을 했다. 결국은 계속 걷기로 했다. 삼거리의 주유소 근처는 몰려든 장사군들과 뻐스를 기다리거나 갓 내린 사람들로 법석였다. 구와 구의 경계선, 즉 창평구과 회유구의 경계선이다. 나는 그렇게 창평구에서 회유구로 넘어섰다. 커다란 뻐스들이 들락거리는 큰길을 따라서 사십분 정도 걸었다. 뻐스가 지날 때마다 뽀얗게 먼지가 흩날렸다. 이제 나는 먼지를 잔뜩 들쓰고 제법 려행자 같은 몰골이 되여버리고 말았다.  밤나무가 가득 들어선 동네 입구에 앉아 잘 정돈된 동네를 마주하고 바나나 두개를 련달아 먹어치웠다. 폭신하고 달콤했다. 바나나 두개가 주는 위안이 참 크다. 그녀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집 대문에 저처럼 크고 둥근 홍등을 내걸고 싶어했다. 나는 오고가는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건 질색이였다.  그녀는 나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이미 충분히 집이 화려해졌기에 불만족이였다. 내 계획 대로라면 산골 동네의 소박하고 평범한 그런 집을 원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적금을 아낌없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집에 투자를 했다. 통유리 창문을 달고 주방과 거실을 텄고 마당에 그네를 매고 매화나무와 감나무와 벗꽃나무도 심었다. 이른봄이면 동전 만한 벗꽃이 동쪽 창으로 무섭게 떨어져내렸다. 그럴 때면 그녀는 벗꽃구경을 오라고 친구들도 불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고 타발을 했다.  그녀는 어느새 우리가 이 집을 30년 계약을 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녀가 환상 속의 아름다운 정원과 집을 포기하기까지는 꼬박 3년이 걸렸다. 아무리 뭔가를 바꾸고 뜯어고치고 해도 지은 지 20년이 훌쩍 지난 이 집이 그녀 상상 속의 정원이 달린 아름다운 전원주택으로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의식을 하는 순간, 그녀는 그 집에 밀어넣은 돈이 아까와졌던 것이다. 나는 그냥 편히 쉴 수가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였다. 화려하지도 번잡하지도 않은 그런 편안한 집. 내게는 다만 그게 필요했다.   길녘에 호텔과 민박집들이 줄줄이 이어져있다. 이름들도 각양각색이고 풍격도 각자 다르다. 해가 너울너울 서산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1월의 산 속의 오후해는 짧기도 했다. 노루꼬리 만큼 하다는 말이 나옴직하다는 생각에 쿡 웃음이 나온다. 미리 예약을 한 민박집에 전화를 한다. 호우따거, 내가 입을 떼자마자 전화를 받던 이가 알았다고 지금 데리러 나온다고 했다. 나는 이 동네에서는 제일 근사해보이는 호텔 입구에서 민박집 따거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기다린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는 시간들이 싫다. 아니, 불안하다. 그녀가 내 어린 시절을 비난했던 것도 그 때문이였다. 어릴 때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내게는 상처가 맞기는 맞다. 인정하기 지금도 싫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릴 적을 핑게로 계속 징징대기는 더더욱 싫으니까. 내 나이 열한살부터 나는 장순영녀사에게서 생활비를 타다 쓰는 일이 부끄러웠다. 장순영녀사라고 부르는 게 훨씬 편했고 나는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대출을 내여 학업을 마쳤다. 이미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나는 세상 천지에 혼자가 되였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두렵지 않았다. 내 혼자 먹고 잘 곳이 있으면 충분했다. 변호사가 된 첫해가 끝나갈 무렵에 장순영녀사한테서 딱 한번 련락이 온 적이 있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는데 두번 련속 울렸던 터라 의뢰인일 줄로 알고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다시 했다. 변호사사무실인데요, 전화주셨던데… 누구신지? 내가 물었고 그쪽에서 대답했다. 나야.  누구시라구요?  장순영녀사가 가까스레 대답했다. 다 널 위해서야 했던 장순영녀사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것도 그 다음해부터였다. 통화를 하고 있는데 “엄마, 빨리 와, 아버지가 공원 앞에서 기다린대!” 하는 녀자아이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고 장순영녀사가 아까와는 분명하게 낮아진 소리로 “알았어, 금방 가.” 했다. 내게는 들리지 않도록 한손으로 전화통을 막고 소리치고 있다는 걸 나는 금시 알아챘다. 장순영녀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녀자아이와 공원에 놀러 간다는 것보다 그 녀자아이가 챙챙하게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보다도 장순영녀사가 쾌활하게 “알았어, 금방 가.” 하는 말소리가 덥석 쥔 가지의 가시가 손가락 끝에 꽂히듯 전화기를 든 내 손가락을 사정없이 찔렀다. 송골송골 피방울이 맺히듯 선명한 아픔이였다. 아마도 그 뒤부터였을가, 나는 장순영녀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말이 상처가 될 수가 있다는 걸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할머니의 타박 때문에 장순영녀사도 상처를 받았을가 하면서 나는 세상 어떤 말도 쉽게 믿지를 못하는 사람이 되여갔다. 강마른 오십대 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가 오른손을 활짝 들었다. 오랜 농사일에 거칠어진 손이였다. 어떻게 왔냐고… 나는 그 말 자체가 헛갈려져서 머뭇거리다가 걸어서 왔다고 대답했다. “어데서 온 거지? 걸어서?” “구도하에서 사나?” “다 왔네. 여기야!” 낮다란 돌담에 둘러싸인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배추포기들이 아직 터밭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마당에 서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들이 옆구리가 터진 채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돌담 구석에는 따놓은 감들이 무둑히 쌓여있었다. 호우따거가 동쪽 편의 방문을 가리켰다. 호우따거가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서쪽방으로 들어갔다. 모두 세개의 방이 있었고 본채에 붙은 서쪽 끝머리의 낮다란 지붕의 방은 주방으로 쓰는듯했다. 마당 한가운데 수도가 있었다. 방 구석으로 조그마한 TV가 놓여있었고 그 맞은편에 다기가 놓인 차상과 쏘파가 놓여져있었다. 거기 앉아서 차를 마시는 모양이였다. 싸구려 플라스틱 보온병 하나가 그 곁에 덩그러니 놓여져있었다. 마개를 열어보니 뜨거운 물이 그득 담겨져있다. 나는 밥보다는 따끈한 차 한잔을 마시고 싶어진다. 휴대용 보온병을 꺼낸다. 언젠가 그녀가 일본에 려행 갔다가 사온 작은 사이즈의 보온병이였다. 거기에 집에서 갖고 온 홍차잎을 조금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익숙한 차향이 낯선 공간 안에 퍼지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씩 그 안의 일부가 되여가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그녀의 냄새가 도처에서 났다. 그녀만의 체취였고 나긋했다. 그녀와 보냈던 수많은 낮과 밤들이 떠올려지는 그런 냄새였다.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달짝지근하고 끈끈한 무화과맛이 그리워졌다. 이상했다. 그녀가 무화과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와 나는 부부라고 하기보다는 동거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5년을 함께 살았지만 우리는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다고 해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도 아니였으므로 우리 사이는 쉽게 마무리될 수 있는 그런 사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이란 걸 했던 적이 있었다. 4년의 결혼생활 끝에 리혼을 하게 된 그녀는 6년 전의 어느 날 내가 나가는 변호사사무실로 문의했다. 리혼도 하기 전에 선을 본 남편을 고소할 수가 있냐고. 그 때 그녀는 화가 많이 나있었다. 시어머니가 남편 중매를 섰다고 했다.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병원진단을 받고 나서였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실에도 그녀는 상당히 화를 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상담이란 이름하에 낯선 이인 나에게 끝도 없는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후날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아준 리유로 그녀가 나에게 오히려 호감을 느꼈었지 않을가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내가 했던 말은. 지금의 나에게 이 말을 던져본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명길아, 자냐~” 그렇다. 내 이름은 오명길이다. 북경에서 그나마 성공한 변호사, 주변의 친구들도 동료들도 내가 조선족이란 걸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나 역시 오래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온통 중국어문화권에 둘러싸여 살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조선족임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어쩌면 내 몸이다. 내 몸이 내 혀와 위장이 김치와 된장을 찾지 않고는 못견뎌한다. 그녀와 나는 처음부터 중국어로만 대화를 나눴다. 그게 편했다. 그녀가 표준적인 서울말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 한참 지나서 알게 되였다.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그녀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한국사장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녀가 출판사 일을 그만두기 전이였다. 그녀의 류창한 서울말투에 나는 내심 놀라긴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중국어로 간단히 그녀가 무랍없이 언니라고 부르는 사장과 인사만 나눴다. 사장이 자리를 뜨면서 그녀에게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이번에도 중국사람이야? 그녀가 웃었다. 언니, 나도 중국사람이야. 왜 그래? “동치미가 먹고 싶다~” “나도 잘함다. 연변말이라서 그렇지… 얼음 우에 표주박 밀듯이… 한번 들어보겠슴둥?” 그녀는 웃다가 눈물까지 훔치며 내게 중국어로 말했다. 아무 것도 안해도 자유로운 삶, 나는 그런 삶을 동경했다. 이제 그 안에서 그녀마저 빠져나간다면 정말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가? 나는 내게 마지막까지 남는 그것이 무엇일지가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 것 같다. 새벽에 잠을 깨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다섯시가 되고 있었다. 옆으로 던져버리려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부터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네통이 빨갛게 동그라미를 한 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손끝을 댄다. 하나씩 펼쳐지고 광고와 광고에 이어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떡하니 거기에 있다.  “나 돌아가. 집에 있지?” 다시 확인해보니 엊저녁 보낸 메시지다. 나는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그 때 또 한통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혹시 밖이야? 화난 건 아니지? 대꾸 좀 해줄래?” 나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다. 아무 일도 없다는듯이 담담하게. 알았어. 나 지금 밖이야 썼다가 밖이야를 지우고 수장성이야. 썼다가 다시 지우고 밖이야를 썼다. 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하다가 그 뒤에 수장성. 세글자를 썼다. “알았어. 우리가 갈게.” 우리? 우리라니! 묵고 있던 동네에서 걸어올라가니 수장성까지 두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하고 나서도 먼저 눈앞에 보이는 넓은 주차장 끝에 있는 옛 골목을 본따 만든 거리를 한참을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장사군들이 여기저기서 뭔가를 사라고 자꾸 권한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골목을 다 빠져나가고 나서 거대한 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중학생들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한편 나는 숨을 고르며 아직도 아득히 높아보이는 장성을 쳐다본다. 그 때였다. 나는 익숙한 그녀의 얼굴이 그 우에서 환히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를 기대여앉은 나이 들어보이는 녀인네의 팔을 툭툭 건드리는 것을 보았다. 익숙한듯하면서 낯선 녀인네였는데 놀란듯 울먹울먹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녀인네를 보면서 나는 헉, 비명을 질렀다. 내 지나온 생에 대한 짧은 비명이라고나 할가. 비명과 동시에 나는 코등이 찡해짐을 느꼈다. 장순영녀사였다. 늙었지만 분명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로 다가온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명길아~”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얼마 시간이 안 남았다고 해서… 당신 대신 내가 갔는데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명길아.” 내가 대답했다. 나는 머리를 들어 이제 려행객들이 빠져나간 장성을 올려다본다. 아무리 위대한 장성이라지만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에는 쓸쓸한 세월이 유령같이 맴돌기만 할 터였다. 문득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간 뒤에 결국은 사람이 남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대도시의 인파 속에서 정작은 사람이 그리웠다는 걸 알았다. 이제 돌아가면 그녀를 위해서 무화과나무 한그루를 심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리도록.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하나 실제는 과실 안에서 꽃이 핀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1    [단편] 장자의 고양이 댓글:  조회:194  추천:0  2019-07-09
장자의 고양이 박초란   서른이 되기 전 재유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부지런히 선을 봤고 혹시 모를 인연을 만들고저 여기저기 모임에도 빼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별로 련락이 없던 김인후가 생일을 쇤다고 초대했을 때도 그래서 선뜻 대답할 수가 있었다. 양력으로 1월 1일 생인 재유는 별로 생일을 쇠여본 기억이 없다. 설날에 태여난 그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재유의 부모님은 그의 음력 생일은 아예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재유를 보고 인사처럼 던진 말은 ‘네가 원단에 태여났다는 애로구나.’였다. 아이였던 재유는 1월 1일에 태여난 것이 좋다는 의미인지 나쁘다는 의미인지 아리송해서 그 때마다 머리를 주억거리군 했다. 재유의 이름은 《장자(庄子)》에서 따온 단어였는데 장자를 좋아했다기보다 마침 재유가 태여났을 무렵 백화문으로 된 장자를 읽고 있던 아버지가 제11장(마침 아버지가 11장을 읽고 있었을지도)의 소제목이기도 한 재유在宥라는 단어를 툭 던져왔고 그대로 죽을 때까지 못 벗을 재유의 이름이 되였다. 유재유, 재유는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다 유재유인 유재유가 되였다. 아버지는 재유란, 사물을 구속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둔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들에게는 평생 관통된 아버지의 교육방침이기도 했다. 아버지 나름대로 터득한 그 뜻은 대학 때 읽은 로자老子의 ‘무위이무불위(无为而无不为)’와는 별 련관이 없어보였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그렇다고 학교의 아이들을 그대로 ‘자연에 맡겨둘’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승학률이 중요시되기는 매일반이였으니 말이다. 재유는 대학입시를 치른 뒤부터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버지는 열여덟살이면 스스로 경제적 자립도 해야 한다고 일렀다. 세상구경을 나간다고 친구들은 대도시며 명산들이며 바다로 려행을 나갔지만 재유는 재빨리 돈 버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물론 재유도 한번도 못 가본 북경이나 상해나 태산이나 아미산이나 화산에 가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도 가보고는 싶었다. 그럼에도 재유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바다였다. 드넓은 바다, 세상이 넓다는 것은 교과서에서만 배워왔고 TV에서만 보아왔던 그에게 세상이 유혹적으로 다가왔지만 재유는 꾹 참고 한달에 천원이 남을가 말가 하는 아르바이트에 열정을 바쳤다. 돈을 벌기 위해서 태여난 사람처럼 재유는 그것을 즐겼다. 차곡차곡 돈이 쌓여지는 통장, 재유는 그 안에서 잉태된 희망의 꼬리를 잡을 날을 그려보았다. 재유는 김인후로부터 그의 안해의 친구들도 참석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결혼 안한 애들도 있어. 김인후가 말했다. 김인후는 그 나이가 되면 점점 낯선 처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힘들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선심 쓰듯 그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 역시 마다할 리 없었다. 어쩌다 고향에 나와보니 남아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다들 대도시로 해외로 나가버린 뒤였고 그 역시 한국류학을 갔다 와서 북경에 막 자리를 잡고난 뒤였다. 어머니가 몸이 아프다면서 한번 왔다 가라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이였다. 상사의 눈치가 보였지만 그는 나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향했다. 위챗에 올라온 친구들을 통해서 중학교 동창인 김인후가 고향에 있다는 걸 알았고 김인후는 래일 자신의 생일을 쇠기로 했다면서 그 때 보자고 했다.   ※ 묘와 유재유는 그렇게 만났다. 묘는 김인후의 안해 서해영의 친구였다. 김인후는 서해영과 묘의 대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재유가 한국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반면 묘는 이제 막 류학을 나갈가 어쩔가 마음도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할 무렵이였다. “지하철 안에는 이미 콩나물시루 같이 사람들로 꽉 찼는데 자꾸만 사람들을 밀어넣는 거야. 꽉꽉 더 차야 출발할 수가 있다는듯이… 너무 덥고 숨까지 막혀. 깨고 보니 꿈이였는데 그래도 너무 더운 거야. 아버지가 그래도 오랜만에 온 아들이 추워할가봐 아궁이에 장작을 많이 밀어넣은 거지…” 술에 취해서일가, 초반에는 말이 없던 재유가 갑자기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너 집은 아직도 그 동네서 불 때면서 살아?” 김인후가 그런 재유를 건너다 보며 물었다. “응. 거기가 좋으시다는 걸 뭘.” 재유가 술잔을 내려놓고 말을 받았다. “어지간하면 연길에나 들어와서 살지 그래. 년세도 있으시고…” 김인후도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묘가 보기에도, 얼마 전에 으리으리한 신혼집을 마련한 선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있었다. 굳이 식당이 아닌, 집으로 모두를 요청한 것도 2층짜리 빌라를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것 쯤은 누구라도 다 알 수 있는 일이였다. 연길의 집은 누가 공짜로 주나? 묘 역시도 집이 연길이 아닌지라 그 말에 조금 심기가 상했다. 슬며시 올려다보니 재유도 말없이 술을 털어넣고 있었다. 그러더니 말을 뱉어냈다. “집을 사려면 북경에다가 사야지. 어차피 거기 정착해서 살 거니까.” 김인후의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경의 집값 장난이 아니던데… 저희도 요청해주세요. 덕분에 북경구경 실컷 하게.” 묘가 맞장구를 쳤다. 재유가 눈을 들어 정면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날 저녁,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것도 그 때였다. 묘는 재유가 실없이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재유에게서는 오랜 방랑을 거친 뒤 고향으로 돌아온 그런 피곤함과 쓸쓸함이 풍겼다. 밤이 깊어가고 돌아갈 시간이 되였다. 서해영은 묘에게 자고 가라고 했고 김인후는 친구인 재유에게 자고 가란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같이 왔던 친구들이 벌써 다 빠져나간 뒤끝이였다. “아냐, 오늘은 그냥 갈게. 이모 집에서 자면 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 대학 내내 단짝친구였던 서해영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새 재유는 밖에 나섰고 그녀는 서해영의 품안에 꼭 껴안긴 채 초조해져있었다. “이제 가!” 끝끝내 서해영이 묘를 풀어주었고 그녀는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문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강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4월이였고 하루 밤새에도 뭔가 쑥쑥 소생한듯한 기운이 상큼하게 느껴지는 무렵이였다. 그런 봄이라서 그럴가 묘는 불투명한 앞날이 더욱 조급해져있었다. 대학 졸업 후 일년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해왔지만 그녀에게는 적성이 맞지가 않았다. 적성에 맞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를 못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만은 묘하게 잘 알았다. 그녀는 더욱 큰 세상을 떠돌고 싶어서 안달을 떨었다. 큰길로 빠져나오는 어구에서 재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택시든 나든 암튼. 그녀는 만족했다. “여서 기다린 거예요?” “거기서 묵는 거 아니였어요?” 둘이서 동시에 물었다. “먼저…” “먼저…” 그리고는 둘이 마주보면서 웃었다. 큰길녘에 줄느런히 늘어져있는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어둠 안에서 빛나는, 나무잎이 막 돋기 직전이였다. 재유는 꽃들이 만개했던 봄에서 추방되여 겨울왕국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조금 바람이 찼다. 재유는 온기를 느껴보려는듯 좀더 묘의 곁으로 다가섰다. “좀 걸을가요?” 재유가 말했다. “그럴가요?” 묘는 걷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답했다. “아까 들으니까 류학준비 중이라면서요?” 늦은 밤까지도 차들이 스르륵 흘러가는 큰길녘의 침묵을 깨면서 재유가 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인도는 텅 비여있었다. 앞에 훤히 바라보이는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굽어들어 부르하통하를 가로지른 새 다리를 건너 공원 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이모 집이 있었다. “아… 네.” 아직은 확정도 안된 일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준비는 다됐어요?” 재유가 다시 물었다. “아직은…” 말끝을 흐리는데 재유가 냉큼 받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 “아… 네.” 그녀는 자꾸 앞만 바라보고 걷기만 하는 재유가 신경이 씌였다. 이러다가 래일 아침까지 계속 걷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몇번 신지 않아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구두 때문에 발도 아팠다. “어느 방향이예요?” 사거리에 다달아서 묘가 물었다. 이모 집에 들어가려면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되겠다 싶었다. 이모부가 안 계시더라도 외사촌동생들 할머니가 계셔서 눈치가 보였다. “우리 사우나에나 갈가요?” 재유가 갑자기 물었다. 마음이 좀 흔들렸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넘고 있었다. 어차피 사우나는 공공장소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가서 술 한잔 더해요.” 재유의 눈빛이 간절했다. 어쩌면 재유도 그녀처럼 하루 밤을 지새워야 할 곳이 더욱 절실했던 건지도 몰랐다. “글쎄요…” 말끝을 흐리다 다시 재유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앞에 사우나가 보였다. 규모가 큰, 이모랑 외사촌들이랑 몇번 왔었던 사우나였다. “저기 어때요?” 재유가 물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니 이곳 사정은 나보다는 모르겠구나 싶어서 언제 이모랑 와봤는데 괜찮더라는 설명을 늘여놓았다. “그럼 들어갑시다.” 재유가 앞장서 들어갔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오해하겠다 싶었지만 묘의 발은 이미 문턱을 넘고 있었다. 재유가 계산을 하고 그녀에게 바꿔입을 찜질복과 수건을 내밀었다. “있다 봐요.” “네, 있다가 봐요.” 목욕탕 입구에서 갈라져서 녀자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시뿌연 김들이 서리서리 서려있었고 텅텅 뭔가가 계속 부딪치는 소리와 철퍼덕거리고 물을 부어대는 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이였고 때밀이하는 아줌마가 금방까지도 청소를 했던 모양으로 작은 방안에서 걸어나오자 물이 쫘르르 쏟아지던 소리가 뚝 멈췄다. “때밀이 할 거요?” 아줌마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묘가 급히 대답했다. 샤워기를 튼다. 뜨거운 물이 정수리로 쏟아진다. 한참을 그렇게 몸을 맡기고 서있다가 두런두런 울려오는 말소리에 눈을 훔치고 돌아보니 나이 들어보이는 아주머니 둘이 김이 물물 나는 욕탕에 몸을 묻고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점점 보기 싫어져서… 원쑤가 따로 없다니까. 애가 아픈 걸 알면서도 마작 놀러 나가서 한밤중에 들어오지 않겠나, 밥이라도 어데서 먹구 들어왔으면 싶은데 밥 차려내라고 성화지… 그럴 때 같으면 콱 그저.”        가늘어서 손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듯한 거미줄 같은 목소리였다. 이어 나무망치로 두드리면 덩덩 울릴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언니네 딸내미네는 언제 들어온다우? 언니 이러다가 병 들겠수…” “집 산 거 다 물어야 오든지 말든지 하지. 에구, 제 자식이라고 낳기만 했지 같이 있질 않았으니 정이 들긴 하겠어?” “그러게 말이요. 다 마찬가지지.” “너 집은 텅 빈 것 같겠다. 분주하던 애가 가버렸으니…” “한동안은 그렇더니 뭐, 지금은 습관이 돼서 조용한 게 좋소. 애들이 제 자식 데려다가 더 좋은 학교에 보낸다는데 뭐라겠소.” “상해 가믄 한족학교 다니겠네?” “그렇지 뭐. 다음에 오면 한족애가 다돼서 올가봐 나도 한족말을 배워둬야 될가보우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목욕탕 안에 울렸다.   샤워를 마치고 목욕탕을 나간다. 열쇠로 사물함을 열고 찜질복으로 바꿔입고 젖은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어내고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나서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옅은 화장을 한다. 거울 안의 그녀를 바라본다. 아직은 젊고 싱싱한, 그래서 뭐라 해도 될 것만 같은 자신감이 그 순간 만큼은 탱탱하게 살아났다. 스물여섯, 묘는 아무런 것도 이뤄낸 것이 없이 이십대 중반을 지나 이제 이십대 후반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초조해져있었다. 묘는 고향이 싫었다. 한평생 익숙한 그 자그마한 곳에서 비비면서 보낼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는 고향을 그리워할 날도 물론 있을 테지만 그건 떠나본 자만이 느낄 수가 있는 향수이리라.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다시 한번 응시한다.   사우나 안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누워자고 있었다. 의외로 자러 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 뜨거운 열기가 훅훅 뿜어져나오는 찜질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들어갈가 말가 망설이는데 등뒤에서 재유가 “들어갈래?” 하며 육중한 나무문을 민다. 그녀가 들어서고 그가 따라들어갔다. 수건을 목에 두른 강마른 남자가 땀투성이가 된 채 힐끗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쪽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기로 숨이 턱턱 막혔다. 재유의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여있었다. “뜨겁지?” 재유는 아까부터 반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묘도 반말을 했다. 약간의 오기가 생긴 것도 사실이였다. “나갈가?” 묻고 있는 재유를 올려다보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라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안 더워?” 재유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응. 더워!” 그녀는 화끈화끈하다 못해 이제는 아프기까지 한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며 대답했다. 문을 나서면서 재유가 “더 있다간 탈 것 같다”고 했고 재유의 등뒤를 따라나가면서 묘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녀 역시 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였다.   “땀도 냈으니 맥주나 한잔 할가?”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매점 주변에는 아직도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고 있거나 구운 명태나 계란이나 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재유가 맥주와 오징어를 시켰다. 맥반석계란도 먹어줘야 할 것 같아서 묘는 계란도 달라고 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드라마에서 봤던듯이 계란을 들어 재유의 머리통을 겨냥하다 말고 머뭇거리는데 재유가 머리통을 쑥 그녀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도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재유가 말했다. “이런 건, 련인들이나 하는 거지…” 갑작스런 재유의 행동에 당황해졌다. 결국 묘는 계란을 자신의 머리통에 박았다. 아팠다. 이런 건 다시는 따라하지 말아야지… 그 순간, 묘는 다짐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이러니까… 이런 바보. 가끔은 그냥 고집 피우지 말고 따라주면 좀 좋지 않겠니? 그래봤자 제 머리통이나 아프고 말이야… 이런 생각 따위를 그녀는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머리 속으로 씹고 또 씹었다. “장자를 읽어봤어?” 재유가 물었다. 벌써 두병째 맥주를 비우고 있었다. “웬 장자?” 묘가 묻다가 다시 대답했다. “아니.” 장자 같은 건 정말이지 한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장자 얘기를 하나 싶었는데 재유가 뒤에 이은 말은 자신의 이름에 관한 얘기였다. 장자가 궁금했던 적이 없었던듯이 또한 재유의 이름의 래력이 궁금했던 적도 없었지만 묘는 맥주잔을 홀짝홀짝 비우면서 머리를 끄덕여가며 재유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재유가 외로워보였다. “한국서도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지. 이런 사우나에서도 일을 했었고. 지금도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막 뛰여가서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야. 여기선 지금 손님인데도… 재유란 이름이 걸맞지가 않은 재유가 된 거지. 구속되지 않는다니… 자연에 맡겨둔다니… 그게 가능키나 할가?” “글쎄. 나도 모르겠네.” 그녀가 지금 직장을 떠나려고 하는 건 그 구속이 싫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더 좋은 곳에 속하기 위해서라는 걸 묘는 잘 안다. 그녀는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걸맞게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아직은 너무 많다. “아까 했던 집얘기, 실은 그냥 해본 소리였어.” 재유가 느닷없이 집얘기를 다시 꺼냈다. “네?” 재유가 맥주잔을 꼴똑 채웠다. “결혼하기 전에는 집을 살 생각이 없었거든.” 맥주 거품이 부글거리며 잔에 넘쳤다. “왜…” 그녀는 말 대신 눈빛으로 물었다. “그냥. 그건 좀 싫어서… 사람이 좋으면 좋은 거지 왜…” 재유는 굳이 긴 말을 하질 않았지만 묘는 오히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나 다 살아가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아무런 요구조건을 달지 않은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갈증이 숨겨져있으리라. 우리는 어쩌면 생 전체를 들여서라도 그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헤매는 수행자인 셈인지도… “헌데 집이 있어야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할게 아니야.” 묘는 왠지 모르게 빈정대고 싶어졌다. 재유가 어쩌면 그녀를 녀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재유가 고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라도 집이 있는 남자를 선택할 것 같애. 그래야 안정감이 들잖아.” 묘가 말했다. “너도 그래?” 재유의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초연해졌다. “넌 남자친구가 있어?” 재유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 마음 안에 동요가 일었다. 없다고 해야 하나? 있다고 해야 하나? “당근 있지.” 그녀가 대답했다. 가슴 한끝이 저려왔다. 아직도 그 사람만 떠올리면 그랬다. 묘는 자신이 류학을 나가고저 하는 그 동기를 아직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련락을 끊어버린 그 사람을 찾아가고 싶었는지, 그래서 한마디 말도 없이 다른 녀자랑 동거하고 있는 그를 비난하고 싶어졌는지, 그녀는 알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묘는 련인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녀한테는 아직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였으므로.   한동안 잠자코 맥주를 마셨다. 더 마시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묘는 계속 마셨다. 차곡차곡 빈 맥주병이 발치에 줄을 섰다. 처음 그녀에게 정도환이 다른 녀자랑 동거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준 것은 해수였다. 묘는 해수랑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였다. 오히려 약간은 불편한 사이였다. 해수가 정도환을 좋아한다는 건 대부분 동기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해수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어쩌면 그녀랑 같은 전선에 선듯한 동지감을 느꼈을가? 통화를 마치고 나서 그것이 궁금해졌다. 해수에게서 그 얘기를 듣고 있는 게 그녀에게는 더욱 치욕스러웠다. 차라리 정도환의 입으로 듣고 있대도 그렇게까지 모욕적이진 않았을 터였다. 정도환이 한국으로 나간 지 딱 일년 만이였다. 묘는 지난 겨울 돌아가신 이웃집 할머니가 생전에 엄마와 자신의 며느리를 흉보면서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자고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쯧쯧… 걸어서 종단하면 한시간도 될가말가한 자그마한 변강도시가 그렇게 갑갑해지기는 처음이였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누구의 눈에도 뻔한 삶을 더 이상 살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일이 슬며시 공포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두려움이였다. 이십대 초반의 그 막막함만이 아닌 뚜렷한 공포였다.   “너 한국 갈려는 거 그 남자 때문이지.” 재유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묘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재유가 재밌다는듯 더욱 능청스러운 웃음을 베여물었다. 그 웃음에 묘는 공연히 화가 났다. “그 남자 다른 녀자 있지?” 재유가 한술 더 떴다. “뭐야? 왜 그러는데… 나한테.”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늦게까지 앉아있던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화낼 것까지는 없어. 그냥 대체로 흘러가고 있는 스토리 대로 한번 풀어내봤을 뿐이야. 헌데 진짠가 보네.” 재유가 재밌다는듯 팽그르르 웃었다. 이 재수 없는 남자를 내 발치에 무릎 꿇게 만들 거야 따위의 오기 대신 묘는 재유가 웃듯이 팽그르르 따라 웃었다. “너 련애해본 적 한번도 없지?” 그녀가 씹기 힘든 오징어뼈를 뱉어내듯 랭소를 뱉어냈다. “뭐?” 재유의 얼굴이 말라비틀어진 오징어마냥 탈렸다. “너 녀자랑 한번도 자본 적도 없지?” 한번 퍼붓기 시작한 랭소를 멈출 수가 없다. 재유의 얼굴에 마른 오징어 몸통 하얀 분이 뽀얗게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 녀자랑 키스해본 적도 없구나!” 그즘에서 묘가 키드득 웃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재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 같은 건 이제 통하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쉽게 아픈 말을 던지는 그런 꼬장한 성격의 사람은 아니였다.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누군가의 상처 입히는 말들을 듣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였다. 맥주파티는 싱겁게 끝났다. 묘가 사람들이 별로 없는 자리를 찾아 눕자 재유도 그녀 옆, 서너사람은 넉근히 들어누워도 될 만큼의 간격을 둔 채 누웠다. 자다가 깨여보면 재유가 눈을 뜬 채 뒤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코 고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장단을 맞춰 들려왔다.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다. 정도환과 해수를 보았고 분노하는 자신을 보았고 쫓아오는 호랑이를 피해 도망을 치기도 했고 영화관 같은 데 들어가서 하나하나 앞서 꾸었던 꿈들을 영화마냥 다시 보는 그런 꿈도 있었다. 그녀 곁에 앉아 같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남자, 누구지? 하면서 어둠 속을 뚫고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살펴보는데 그 때 번쩍 눈이 띄여졌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남자의 얼굴이 커다랗게 떠있었다. 누구지? 하다가 순해보이는 쌍겹진 두눈을 보면서 재유구나 했다. 그리고는 왜 이러는 거지? 다시 긴장을 했다. “너 내게 한번이라도 키스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지? 지금 대답하려고.” 재유가 그녀의 귀가에 속삭였다. 뭐라는 거야? 입을 떼려고 하는데 재유의 입술이 갑작스럽게 묘의 입술로 덮쳤다. 밀쳐내려고 하지만 재유의 단단한 팔을 풀어낼 수가 없다. 강압적이지만 수줍은 재유의 혀가 그녀의 입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성급했고 딱딱 이발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찝찔한 맛도 약간 났다. 밀쳐내려고 애를 쓰다가 그녀는 어느 순간,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재유에게는 첫 키스라는 걸 알았다. 처음 정도환과 키스를 할 때의 자신이 떠올려졌다. 서툴렀고 수줍던 몸짓도. 그 서투름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 눈물이 찔금 났다. 입맞춤이 짙어져갔고 그녀가 조금씩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재유의 떨림이 신기했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신기해하는 자신이 더욱 신기해졌다. 묘는 살며시 남자의 가슴에 파고든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 다시 재유를 마주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이 남자는 대체 날 어떤 녀자라고 생각할가? 헤픈 녀자로 오인받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난 척 그런 얼굴로 마주해야 하는 일도 싫었다. 그 때였다. “이젠 내가 널 책임질게.” 재유가 말했다. 재유의 탄탄한 팔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누군가가 그녀를 책임지겠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였다. “아니.” 묘가 고집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키스를 한번 했다고 해서 책임진다고? 그것 역시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우리 결혼하자.” 재유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묘 역시 그 서슬에 놀라서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말도 안돼. “한번도 이런 적 없어. 이 녀자는 내 녀자다, 이런 느낌. 아마도 오랜 세월 난 이걸 기다려왔던가봐.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재유가 정색해서 말했다. 묘는 신기한듯 그런 재유를 바라보았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물종物种을 발견한듯이. “혹시,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해?” 재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묘는 상반신을 일으킨 채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굳어져있었다. “내 이름이 뭔지 알아? 내가 몇살인 거는?” 묘가 어이구야 하면서 그에게 말을 던졌다. “묘, 아니야? 너 친구들 다 널 묘라고 부르는 걸 들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어리니까… 대학은 졸업했다면서, 스물다섯? 여섯? 일곱?” 재유가 묘를 바라보았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내 이름은 유재유야. 스물아홉이고. 고향에 부모님 계시고 형제는 없어. 북경에서 통번역을 하는데 안정된 직장이라서 네가 일을 안해도 두 사람이 살기엔 그나마 무리는 없어. 네가 원하면 집도 장만할 거고. 물론 대출을 좀 내야겠지만.” 재유가 동의를 구하듯 다시 묘를 바라보았다. 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할 말을 잊어버린 채 멍하니 그런 재유를 바라보았다.   장미묘연, 그녀의 이름이였다. 사람들은 장미라는 성도 있냐고 희한해했다. 그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지어준 부모님을 알게 모르게 원망했다. 또 한번 성은 장씨, 이름이 미묘연이라고 해석해야 했다. 한때는 그녀의 특이한 이름이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네 이름이 장미묘연이구나. 너 부모님 중 시인이 계시니? 학교 다니는 내내 전교 사생들은 사람 먼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신기한듯 그녀를 다시 한번 돌아보거나 굳이 찾아와보군 했다. 그게 한때는 싫지가 않았다. 이름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가 있다는 걸 그 때는 행운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날이 지나고 커감에 따라서 불편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이 불편해졌다. 여기저기서 주목받는 일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였다. 대중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고 있는 연예인들은 이보다도 더 따가운 눈빛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고 그녀는 그네들에 알 수 없는 동정심이 생겼다. 미묘연, 한번도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조차 그녀를 묘연아 하고 불렀다. 그럴 거면 왜 남들이 다 안 쓰는 네글자짜리 이름을 지어줬는지…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결국 친구들은 한글자로 그녀를 불렀다. 묘, 그녀를 오래동안 지켜본 친구들은 그 ‘묘’의 의미를 잘 안다. 고양이, 그러니까 그녀의 별명이였던 셈이였다. 곱실곱실한 반양머리며 걀죽한 눈매며 그녀가 고양이 같이 생겼다고 아이들은 야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커서는 묘 하고 불렀지만 그 다른 의미는 고양이라는 걸 그녀도 부르는 친구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이 묘가 아니라니? 그녀는 묘란 이름이 있다고 믿고 있는 재유가 다시 한번 신기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울려퍼진다. 묘는 어제 밤 자기 전에 꺼놨던 휴대폰을 켠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딩동딩동 수없이 울려오는 알림소리, 위챗이였다. 클릭하고 들어간다. 백여개의 새 메시지가 벌새의 날개짓처럼 파닥파닥 뜬다.   어쩐 일이래? 진짜 맞네… 사진 합성은 아닌 것 같애. 정도환은 봤을가? 묘 맞지? 남자는 누구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할 데 없어서 사우나에서? 저 남자를 아는 사람? 뒤통수만 보고 누가 알아. ㅋㅋㅋ…   정도환이랑은 저래서 헤여진 거야? 나라도 싫겠어… … …   묘는 화면에 뜬 사진 한장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익숙한듯 낯선 표정, 남자의 뒤통수에 가리운 절반의 얼굴. 걀죽한 눈매, 흘러내린 곱슬머리, 제발 아니길 묘는 내심 바랐지만 틀림없는 자신이였다. 누가? 묘는 휴대폰을 든 채 주변을 휘둘러본다. 낯익은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재유가 그런 그녀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묘는 그러는 재유를 쏘아보았다. 가능하다면 눈빛 하나로 멀리로 날려버리고만 싶어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해영이였다. 전화를 받는다. “너 대체 어디야? 사진 봤어? 모두들 란리 났는데… 너 알고나 있어?” 서해영의 말소리가 따갑게 묘의 귀청에 울렸다. “지금… 봤어. 헌데 정말로… 그런 거 아니야. 해영아.” 묘가 떠듬떠듬 말을 했다. “그 남자 엊저녁 인후오빠 친구지? 설마 했는데… 너 둘 정말 좋아하니?” 따지듯 묻던 서해영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뭔가 숨겨야 할 것처럼 갑자기 낮아졌다. “도환이 아까 나한테 련락 왔었어. 너 이럴 줄 몰랐다고. 너 이제 어쩔래? 바람 피울 거면 들키지나 말던가…” 묘의 가슴에 찬바람이 스쳤다. “뭐? 바람?” “너 잘 생각해봐. 정도환일지 아니면 그 재유인가 뭔가 하는 사람일지…” 서해영은 묘의 변명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듯 자신이 할 말을 내뱉어버리곤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묘는 서둘러 다시 전화를 누르려다가 포기하고 만다. 그 사진이 나돈 이상 누구도 그녀의 결백 같은 건 믿어주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정도환이 다른 녀자랑 동거한다는 말을 꺼내선 뭘 하랴 싶기도 했다. 그녀만 남자의 배신에 배신으로써 보복하는 이상한 녀자가 되여버릴지도 몰랐다. 묘는 이제 두눈을 부릅뜨고 원쑤 같이 재유를 쏘아본다. “대체 왜 그러는데?” 재유가 놀라서 물었다. 묘는 말 대신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봐봐.” 재유가 휴대폰을 받아쥐고 들여다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누가 이따위 짓을.” “난들 알겠어?” 묘는 울상이 되여버린다. 이제 억울해도 억울하다는 말도 못하고 갇혀버린 두아窦娥가 된 느낌이다.   서둘러 사우나에서 나왔다. 뻐스역에서 유재유와 묘는 헤여졌다. “전화할게.” 재유가 뻐스 타러 들어가는 묘의 등뒤에서 소리쳤다. “하지 마. 아무 것도 하지 마.”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자리를 찾아앉고 나서 묘는 서해영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 말 먼저 들어. 나 그 재유란 사람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야. 그 남자 좀 이상해. 갑자기 달려들어서… 절대로 내가 원해서 그런 거 아니라구. 그리고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정도환은 이미 한국에 다른 녀자가 있어. 그 녀자랑 동거까지 한다구. 내가 이 말 하기 싫어서 여직 이러고 있었는데… 너라도 날 믿어주라.” 말을 하다 말고 묘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도환이 다른 녀자랑 동거를 한다구? 그게 정말이야? 나한텐 미리 얘기 좀 하지. 왜 바보 같이 이제서야, 아까 콱 욕해놓는 건데…” 서해영이 역정을 냈다. “친구야, 정말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헌데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입이 안 떨어져서.” “그럼 정도환과 갈라진 거야?” “그래야겠지? 헌데 도환이 한달 동안 련락이 안돼. 그 일을 내가 알았다는 걸 눈치챈 거지… 그래도 전화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니?” “나쁜 자식. 그건 그렇고 헌데… 그 사진은 누가 찍은 걸가?” “그러게. 나도 몰라.” “그럼 그 남자는, 재유란 사람은 어쩔려고?” “뭐, 어쩌긴.” “알았어. 당분간 위챗은 보지 마. 며칠 지나면 시들해질 거야.” 뻐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묘는 자신의 방 침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 재유는 몇번이고 묘의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묘는 아예 전화기를 꺼놓고 있었다. 아프다고 했던 어머니는 몸이 아팠던 게 아니라 아들에게 어울릴 만한 처자들을 찾아놓고 만나보라고 굳이 재유를 부른 거였다. 재유는 어머니가 내미는 사진 속 처자들에게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늘 점심에 가서 만나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어머니는 이미 이틀 동안의 스케줄을 짜놓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마뜩잖은 눈으로 지켜보기는 했지만 타박하지는 않았다. 아들을 이대로 계속 자연에 맡겨두다가는 손주는커녕 결혼도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던 게 분명했다. 재유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선 보러 나가는 차 안에서 묘에게 전화를 했고 선자리에 나가 상대방을 기다리면서도 전화를 했다. 전화는 계속 통하지가 않았다. 커피 한잔을 놓고 맞은편에 앉았던 녀자가 이름이 뭐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재유는 더는 참지를 못하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김인후에게 전화를 했다. “야, 너 이 자식. 너 뭐야. 묘연이 너 때문에 큰 곤역 치르게 된 거 알고 있어? 삼년을 좋아했던 남자랑 헤여지게 생겼다구. 몰랐는데… 너 참 대단하다…” 김인후가 계속 빈정거렸다. “난 진심이야. 묘가 어데 사는지 알려줘.” “뭐? 찾아가게. 너 묘가 그 남자랑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 말도 안돼. 너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오면 힘들어. 힘들구 말구.” “너 지금 집이야 아님 단위야?” “왜 찾아오게? 와도 난 너랑 할 말이 없어.” 김인후가 덜컥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 뒤 메시지 도착음이 딩동 울렸다.   묘연이 그러는데 네가 무작정 달려들었다면서… 개도 아니고 말이지. 참… 묘연은 아예 생각도 없었다는데… 널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란다. 허니 꿈 깨라고.   재유는 한산한 거리가 더욱 낯설어졌다. 그리고 등달아있는 자신도 더욱 낯설어졌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절박함이였다. 재유는 봄날 오후의 따스한 해살 아래 몇번이고 다시 김인후가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개도 아니고 말이지. 재유는 충격받은 얼굴로 해살 가득한 거리바닥에 목적지를 잃고 허둥거렸다. 재유는 그 해살 아래 드러눕고만 싶어진다. 노곤히 나비꿈을 꾸는 장자마냥 잠들고 싶어진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 묘가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을 것만 같았다. 재유는 살아오면서 목표가 명확했다. 그 명확함이 그를 그다지 감성적이라던가 인생경력이 풍부하지 못하게 만든 대신에 삶에 훨씬 주동적이게 만들었고 그는 만족했다. 래일은 둘째 치고 일분일초란 미래 앞에서는 영원히 주도적일 수가 없다는 걸 발견하기까지는 그랬다. 아주 가끔 희붐한 새벽에 눈을 떴다가 재유가 재유답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옅은 죄의식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런 새벽이면 재유는 일어나서 장자를 읽었다. 백화문이 아닌 원문으로 중얼중얼 소리내여 주문처럼, 이른 새벽의 념불처럼 그것을 읽었다. 그런 새벽과 같이 재유는 장자를 들고 아무 생각 없이 읽어내려가고 싶어진다. 두터운 책 속의 삽화 하나가 떠올려졌다. 나비꿈을 꾸는 장자의 삽화. 나비꿈을 꾸고 있는 장자의 침대나 나무밑둥이나 그늘 속에 혹은 동자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차를 끓이는 화로 뒤쪽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고양이 한마리가 숨어서 하품을 하다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삽화 속 어디에도 없는 고양이 한마리를 재유는 정말이지 너무 찾아내고만 싶었다. 그 때 재유는 왜 하필 고양이였는지, 왜 보이지도 않는 고양이를 찾고 싶었는지를 알지를 못했다. 뒤이어 재유의 휴대폰으로 끝없이 이어진 위챗 알림소리가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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