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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고양이
박초란
서른이 되기 전 재유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부지런히 선을 봤고 혹시 모를 인연을 만들고저 여기저기 모임에도 빼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별로 련락이 없던 김인후가 생일을 쇤다고 초대했을 때도 그래서 선뜻 대답할 수가 있었다.
양력으로 1월 1일 생인 재유는 별로 생일을 쇠여본 기억이 없다. 설날에 태여난 그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재유의 부모님은 그의 음력 생일은 아예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렸을 적 어른들이 재유를 보고 인사처럼 던진 말은 ‘네가 원단에 태여났다는 애로구나.’였다. 아이였던 재유는 1월 1일에 태여난 것이 좋다는 의미인지 나쁘다는 의미인지 아리송해서 그 때마다 머리를 주억거리군 했다.
재유의 이름은 《장자(庄子)》에서 따온 단어였는데 장자를 좋아했다기보다 마침 재유가 태여났을 무렵 백화문으로 된 장자를 읽고 있던 아버지가 제11장(마침 아버지가 11장을 읽고 있었을지도)의 소제목이기도 한 재유在宥라는 단어를 툭 던져왔고 그대로 죽을 때까지 못 벗을 재유의 이름이 되였다. 유재유, 재유는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다 유재유인 유재유가 되였다. 아버지는 재유란, 사물을 구속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둔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들에게는 평생 관통된 아버지의 교육방침이기도 했다. 아버지 나름대로 터득한 그 뜻은 대학 때 읽은 로자老子의 ‘무위이무불위(无为而无不为)’와는 별 련관이 없어보였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그렇다고 학교의 아이들을 그대로 ‘자연에 맡겨둘’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승학률이 중요시되기는 매일반이였으니 말이다. 재유는 대학입시를 치른 뒤부터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버지는 열여덟살이면 스스로 경제적 자립도 해야 한다고 일렀다. 세상구경을 나간다고 친구들은 대도시며 명산들이며 바다로 려행을 나갔지만 재유는 재빨리 돈 버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물론 재유도 한번도 못 가본 북경이나 상해나 태산이나 아미산이나 화산에 가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도 가보고는 싶었다. 그럼에도 재유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바다였다. 드넓은 바다, 세상이 넓다는 것은 교과서에서만 배워왔고 TV에서만 보아왔던 그에게 세상이 유혹적으로 다가왔지만 재유는 꾹 참고 한달에 천원이 남을가 말가 하는 아르바이트에 열정을 바쳤다. 돈을 벌기 위해서 태여난 사람처럼 재유는 그것을 즐겼다. 차곡차곡 돈이 쌓여지는 통장, 재유는 그 안에서 잉태된 희망의 꼬리를 잡을 날을 그려보았다.
재유는 김인후로부터 그의 안해의 친구들도 참석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결혼 안한 애들도 있어. 김인후가 말했다. 김인후는 그 나이가 되면 점점 낯선 처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힘들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선심 쓰듯 그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 역시 마다할 리 없었다.
어쩌다 고향에 나와보니 남아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다들 대도시로 해외로 나가버린 뒤였고 그 역시 한국류학을 갔다 와서 북경에 막 자리를 잡고난 뒤였다. 어머니가 몸이 아프다면서 한번 왔다 가라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이였다. 상사의 눈치가 보였지만 그는 나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향했다. 위챗에 올라온 친구들을 통해서 중학교 동창인 김인후가 고향에 있다는 걸 알았고 김인후는 래일 자신의 생일을 쇠기로 했다면서 그 때 보자고 했다.
※
묘와 유재유는 그렇게 만났다. 묘는 김인후의 안해 서해영의 친구였다. 김인후는 서해영과 묘의 대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재유가 한국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반면 묘는 이제 막 류학을 나갈가 어쩔가 마음도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할 무렵이였다.
“지하철 안에는 이미 콩나물시루 같이 사람들로 꽉 찼는데 자꾸만 사람들을 밀어넣는 거야. 꽉꽉 더 차야 출발할 수가 있다는듯이… 너무 덥고 숨까지 막혀. 깨고 보니 꿈이였는데 그래도 너무 더운 거야. 아버지가 그래도 오랜만에 온 아들이 추워할가봐 아궁이에 장작을 많이 밀어넣은 거지…”
술에 취해서일가, 초반에는 말이 없던 재유가 갑자기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너 집은 아직도 그 동네서 불 때면서 살아?”
김인후가 그런 재유를 건너다 보며 물었다.
“응. 거기가 좋으시다는 걸 뭘.”
재유가 술잔을 내려놓고 말을 받았다.
“어지간하면 연길에나 들어와서 살지 그래. 년세도 있으시고…”
김인후도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묘가 보기에도, 얼마 전에 으리으리한 신혼집을 마련한 선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있었다. 굳이 식당이 아닌, 집으로 모두를 요청한 것도 2층짜리 빌라를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것 쯤은 누구라도 다 알 수 있는 일이였다.
연길의 집은 누가 공짜로 주나?
묘 역시도 집이 연길이 아닌지라 그 말에 조금 심기가 상했다. 슬며시 올려다보니 재유도 말없이 술을 털어넣고 있었다.
그러더니 말을 뱉어냈다.
“집을 사려면 북경에다가 사야지. 어차피 거기 정착해서 살 거니까.”
김인후의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경의 집값 장난이 아니던데… 저희도 요청해주세요. 덕분에 북경구경 실컷 하게.”
묘가 맞장구를 쳤다.
재유가 눈을 들어 정면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날 저녁,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것도 그 때였다. 묘는 재유가 실없이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재유에게서는 오랜 방랑을 거친 뒤 고향으로 돌아온 그런 피곤함과 쓸쓸함이 풍겼다.
밤이 깊어가고 돌아갈 시간이 되였다. 서해영은 묘에게 자고 가라고 했고 김인후는 친구인 재유에게 자고 가란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같이 왔던 친구들이 벌써 다 빠져나간 뒤끝이였다.
“아냐, 오늘은 그냥 갈게. 이모 집에서 자면 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
대학 내내 단짝친구였던 서해영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새 재유는 밖에 나섰고 그녀는 서해영의 품안에 꼭 껴안긴 채 초조해져있었다.
“이제 가!”
끝끝내 서해영이 묘를 풀어주었고 그녀는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문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강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4월이였고 하루 밤새에도 뭔가 쑥쑥 소생한듯한 기운이 상큼하게 느껴지는 무렵이였다. 그런 봄이라서 그럴가 묘는 불투명한 앞날이 더욱 조급해져있었다. 대학 졸업 후 일년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해왔지만 그녀에게는 적성이 맞지가 않았다. 적성에 맞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를 못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만은 묘하게 잘 알았다. 그녀는 더욱 큰 세상을 떠돌고 싶어서 안달을 떨었다.
큰길로 빠져나오는 어구에서 재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택시든 나든 암튼. 그녀는 만족했다.
“여서 기다린 거예요?”
“거기서 묵는 거 아니였어요?”
둘이서 동시에 물었다.
“먼저…”
“먼저…”
그리고는 둘이 마주보면서 웃었다. 큰길녘에 줄느런히 늘어져있는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어둠 안에서 빛나는, 나무잎이 막 돋기 직전이였다. 재유는 꽃들이 만개했던 봄에서 추방되여 겨울왕국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조금 바람이 찼다. 재유는 온기를 느껴보려는듯 좀더 묘의 곁으로 다가섰다.
“좀 걸을가요?”
재유가 말했다.
“그럴가요?”
묘는 걷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답했다.
“아까 들으니까 류학준비 중이라면서요?”
늦은 밤까지도 차들이 스르륵 흘러가는 큰길녘의 침묵을 깨면서 재유가 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인도는 텅 비여있었다. 앞에 훤히 바라보이는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굽어들어 부르하통하를 가로지른 새 다리를 건너 공원 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이모 집이 있었다.
“아… 네.”
아직은 확정도 안된 일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준비는 다됐어요?”
재유가 다시 물었다.
“아직은…”
말끝을 흐리는데 재유가 냉큼 받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
“아… 네.”
그녀는 자꾸 앞만 바라보고 걷기만 하는 재유가 신경이 씌였다. 이러다가 래일 아침까지 계속 걷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몇번 신지 않아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구두 때문에 발도 아팠다.
“어느 방향이예요?”
사거리에 다달아서 묘가 물었다. 이모 집에 들어가려면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되겠다 싶었다. 이모부가 안 계시더라도 외사촌동생들 할머니가 계셔서 눈치가 보였다.
“우리 사우나에나 갈가요?”
재유가 갑자기 물었다. 마음이 좀 흔들렸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넘고 있었다. 어차피 사우나는 공공장소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가서 술 한잔 더해요.”
재유의 눈빛이 간절했다. 어쩌면 재유도 그녀처럼 하루 밤을 지새워야 할 곳이 더욱 절실했던 건지도 몰랐다.
“글쎄요…”
말끝을 흐리다 다시 재유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앞에 사우나가 보였다. 규모가 큰, 이모랑 외사촌들이랑 몇번 왔었던 사우나였다.
“저기 어때요?”
재유가 물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니 이곳 사정은 나보다는 모르겠구나 싶어서 언제 이모랑 와봤는데 괜찮더라는 설명을 늘여놓았다.
“그럼 들어갑시다.”
재유가 앞장서 들어갔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오해하겠다 싶었지만 묘의 발은 이미 문턱을 넘고 있었다. 재유가 계산을 하고 그녀에게 바꿔입을 찜질복과 수건을 내밀었다.
“있다 봐요.”
“네, 있다가 봐요.”
목욕탕 입구에서 갈라져서 녀자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시뿌연 김들이 서리서리 서려있었고 텅텅 뭔가가 계속 부딪치는 소리와 철퍼덕거리고 물을 부어대는 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이였고 때밀이하는 아줌마가 금방까지도 청소를 했던 모양으로 작은 방안에서 걸어나오자 물이 쫘르르 쏟아지던 소리가 뚝 멈췄다.
“때밀이 할 거요?”
아줌마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묘가 급히 대답했다.
샤워기를 튼다. 뜨거운 물이 정수리로 쏟아진다. 한참을 그렇게 몸을 맡기고 서있다가 두런두런 울려오는 말소리에 눈을 훔치고 돌아보니 나이 들어보이는 아주머니 둘이 김이 물물 나는 욕탕에 몸을 묻고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점점 보기 싫어져서… 원쑤가 따로 없다니까. 애가 아픈 걸 알면서도 마작 놀러 나가서 한밤중에 들어오지 않겠나, 밥이라도 어데서 먹구 들어왔으면 싶은데 밥 차려내라고 성화지… 그럴 때 같으면 콱 그저.”
가늘어서 손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듯한 거미줄 같은 목소리였다. 이어 나무망치로 두드리면 덩덩 울릴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언니네 딸내미네는 언제 들어온다우? 언니 이러다가 병 들겠수…”
“집 산 거 다 물어야 오든지 말든지 하지. 에구, 제 자식이라고 낳기만 했지 같이 있질 않았으니 정이 들긴 하겠어?”
“그러게 말이요. 다 마찬가지지.”
“너 집은 텅 빈 것 같겠다. 분주하던 애가 가버렸으니…”
“한동안은 그렇더니 뭐, 지금은 습관이 돼서 조용한 게 좋소. 애들이 제 자식 데려다가 더 좋은 학교에 보낸다는데 뭐라겠소.”
“상해 가믄 한족학교 다니겠네?”
“그렇지 뭐. 다음에 오면 한족애가 다돼서 올가봐 나도 한족말을 배워둬야 될가보우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목욕탕 안에 울렸다.
샤워를 마치고 목욕탕을 나간다. 열쇠로 사물함을 열고 찜질복으로 바꿔입고 젖은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어내고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나서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옅은 화장을 한다. 거울 안의 그녀를 바라본다. 아직은 젊고 싱싱한, 그래서 뭐라 해도 될 것만 같은 자신감이 그 순간 만큼은 탱탱하게 살아났다. 스물여섯, 묘는 아무런 것도 이뤄낸 것이 없이 이십대 중반을 지나 이제 이십대 후반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초조해져있었다. 묘는 고향이 싫었다. 한평생 익숙한 그 자그마한 곳에서 비비면서 보낼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는 고향을 그리워할 날도 물론 있을 테지만 그건 떠나본 자만이 느낄 수가 있는 향수이리라.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다시 한번 응시한다.
사우나 안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누워자고 있었다. 의외로 자러 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 뜨거운 열기가 훅훅 뿜어져나오는 찜질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들어갈가 말가 망설이는데 등뒤에서 재유가 “들어갈래?” 하며 육중한 나무문을 민다. 그녀가 들어서고 그가 따라들어갔다. 수건을 목에 두른 강마른 남자가 땀투성이가 된 채 힐끗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쪽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기로 숨이 턱턱 막혔다. 재유의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여있었다.
“뜨겁지?”
재유는 아까부터 반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묘도 반말을 했다. 약간의 오기가 생긴 것도 사실이였다.
“나갈가?”
묻고 있는 재유를 올려다보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라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안 더워?”
재유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응. 더워!”
그녀는 화끈화끈하다 못해 이제는 아프기까지 한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며 대답했다.
문을 나서면서 재유가 “더 있다간 탈 것 같다”고 했고 재유의 등뒤를 따라나가면서 묘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녀 역시 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였다.
“땀도 냈으니 맥주나 한잔 할가?”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매점 주변에는 아직도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고 있거나 구운 명태나 계란이나 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재유가 맥주와 오징어를 시켰다. 맥반석계란도 먹어줘야 할 것 같아서 묘는 계란도 달라고 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드라마에서 봤던듯이 계란을 들어 재유의 머리통을 겨냥하다 말고 머뭇거리는데 재유가 머리통을 쑥 그녀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도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재유가 말했다.
“이런 건, 련인들이나 하는 거지…”
갑작스런 재유의 행동에 당황해졌다. 결국 묘는 계란을 자신의 머리통에 박았다. 아팠다. 이런 건 다시는 따라하지 말아야지… 그 순간, 묘는 다짐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이러니까… 이런 바보. 가끔은 그냥 고집 피우지 말고 따라주면 좀 좋지 않겠니? 그래봤자 제 머리통이나 아프고 말이야… 이런 생각 따위를 그녀는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머리 속으로 씹고 또 씹었다.
“장자를 읽어봤어?”
재유가 물었다. 벌써 두병째 맥주를 비우고 있었다.
“웬 장자?”
묘가 묻다가 다시 대답했다.
“아니.”
장자 같은 건 정말이지 한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장자 얘기를 하나 싶었는데 재유가 뒤에 이은 말은 자신의 이름에 관한 얘기였다. 장자가 궁금했던 적이 없었던듯이 또한 재유의 이름의 래력이 궁금했던 적도 없었지만 묘는 맥주잔을 홀짝홀짝 비우면서 머리를 끄덕여가며 재유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재유가 외로워보였다.
“한국서도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지. 이런 사우나에서도 일을 했었고. 지금도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막 뛰여가서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야. 여기선 지금 손님인데도… 재유란 이름이 걸맞지가 않은 재유가 된 거지. 구속되지 않는다니… 자연에 맡겨둔다니… 그게 가능키나 할가?”
“글쎄. 나도 모르겠네.”
그녀가 지금 직장을 떠나려고 하는 건 그 구속이 싫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더 좋은 곳에 속하기 위해서라는 걸 묘는 잘 안다. 그녀는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걸맞게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아직은 너무 많다.
“아까 했던 집얘기, 실은 그냥 해본 소리였어.”
재유가 느닷없이 집얘기를 다시 꺼냈다.
“네?”
재유가 맥주잔을 꼴똑 채웠다.
“결혼하기 전에는 집을 살 생각이 없었거든.”
맥주 거품이 부글거리며 잔에 넘쳤다.
“왜…”
그녀는 말 대신 눈빛으로 물었다.
“그냥. 그건 좀 싫어서… 사람이 좋으면 좋은 거지 왜…”
재유는 굳이 긴 말을 하질 않았지만 묘는 오히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나 다 살아가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아무런 요구조건을 달지 않은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갈증이 숨겨져있으리라. 우리는 어쩌면 생 전체를 들여서라도 그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헤매는 수행자인 셈인지도…
“헌데 집이 있어야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할게 아니야.”
묘는 왠지 모르게 빈정대고 싶어졌다. 재유가 어쩌면 그녀를 녀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재유가 고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라도 집이 있는 남자를 선택할 것 같애. 그래야 안정감이 들잖아.”
묘가 말했다.
“너도 그래?”
재유의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초연해졌다.
“넌 남자친구가 있어?”
재유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 마음 안에 동요가 일었다. 없다고 해야 하나? 있다고 해야 하나?
“당근 있지.”
그녀가 대답했다. 가슴 한끝이 저려왔다. 아직도 그 사람만 떠올리면 그랬다. 묘는 자신이 류학을 나가고저 하는 그 동기를 아직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련락을 끊어버린 그 사람을 찾아가고 싶었는지, 그래서 한마디 말도 없이 다른 녀자랑 동거하고 있는 그를 비난하고 싶어졌는지, 그녀는 알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묘는 련인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녀한테는 아직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였으므로.
한동안 잠자코 맥주를 마셨다. 더 마시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묘는 계속 마셨다. 차곡차곡 빈 맥주병이 발치에 줄을 섰다.
처음 그녀에게 정도환이 다른 녀자랑 동거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준 것은 해수였다. 묘는 해수랑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였다. 오히려 약간은 불편한 사이였다. 해수가 정도환을 좋아한다는 건 대부분 동기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해수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어쩌면 그녀랑 같은 전선에 선듯한 동지감을 느꼈을가? 통화를 마치고 나서 그것이 궁금해졌다. 해수에게서 그 얘기를 듣고 있는 게 그녀에게는 더욱 치욕스러웠다. 차라리 정도환의 입으로 듣고 있대도 그렇게까지 모욕적이진 않았을 터였다. 정도환이 한국으로 나간 지 딱 일년 만이였다. 묘는 지난 겨울 돌아가신 이웃집 할머니가 생전에 엄마와 자신의 며느리를 흉보면서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자고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쯧쯧…
걸어서 종단하면 한시간도 될가말가한 자그마한 변강도시가 그렇게 갑갑해지기는 처음이였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누구의 눈에도 뻔한 삶을 더 이상 살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일이 슬며시 공포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두려움이였다. 이십대 초반의 그 막막함만이 아닌 뚜렷한 공포였다.
“너 한국 갈려는 거 그 남자 때문이지.”
재유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묘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재유가 재밌다는듯 더욱 능청스러운 웃음을 베여물었다. 그 웃음에 묘는 공연히 화가 났다.
“그 남자 다른 녀자 있지?”
재유가 한술 더 떴다.
“뭐야? 왜 그러는데… 나한테.”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늦게까지 앉아있던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화낼 것까지는 없어. 그냥 대체로 흘러가고 있는 스토리 대로 한번 풀어내봤을 뿐이야. 헌데 진짠가 보네.”
재유가 재밌다는듯 팽그르르 웃었다. 이 재수 없는 남자를 내 발치에 무릎 꿇게 만들 거야 따위의 오기 대신 묘는 재유가 웃듯이 팽그르르 따라 웃었다.
“너 련애해본 적 한번도 없지?”
그녀가 씹기 힘든 오징어뼈를 뱉어내듯 랭소를 뱉어냈다.
“뭐?”
재유의 얼굴이 말라비틀어진 오징어마냥 탈렸다.
“너 녀자랑 한번도 자본 적도 없지?”
한번 퍼붓기 시작한 랭소를 멈출 수가 없다.
재유의 얼굴에 마른 오징어 몸통 하얀 분이 뽀얗게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 녀자랑 키스해본 적도 없구나!”
그즘에서 묘가 키드득 웃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재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 같은 건 이제 통하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쉽게 아픈 말을 던지는 그런 꼬장한 성격의 사람은 아니였다.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누군가의 상처 입히는 말들을 듣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였다. 맥주파티는 싱겁게 끝났다. 묘가 사람들이 별로 없는 자리를 찾아 눕자 재유도 그녀 옆, 서너사람은 넉근히 들어누워도 될 만큼의 간격을 둔 채 누웠다. 자다가 깨여보면 재유가 눈을 뜬 채 뒤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코 고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장단을 맞춰 들려왔다.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다. 정도환과 해수를 보았고 분노하는 자신을 보았고 쫓아오는 호랑이를 피해 도망을 치기도 했고 영화관 같은 데 들어가서 하나하나 앞서 꾸었던 꿈들을 영화마냥 다시 보는 그런 꿈도 있었다. 그녀 곁에 앉아 같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남자, 누구지? 하면서 어둠 속을 뚫고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살펴보는데 그 때 번쩍 눈이 띄여졌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남자의 얼굴이 커다랗게 떠있었다. 누구지? 하다가 순해보이는 쌍겹진 두눈을 보면서 재유구나 했다. 그리고는 왜 이러는 거지? 다시 긴장을 했다.
“너 내게 한번이라도 키스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지? 지금 대답하려고.”
재유가 그녀의 귀가에 속삭였다.
뭐라는 거야? 입을 떼려고 하는데 재유의 입술이 갑작스럽게 묘의 입술로 덮쳤다. 밀쳐내려고 하지만 재유의 단단한 팔을 풀어낼 수가 없다. 강압적이지만 수줍은 재유의 혀가 그녀의 입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성급했고 딱딱 이발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찝찔한 맛도 약간 났다. 밀쳐내려고 애를 쓰다가 그녀는 어느 순간,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재유에게는 첫 키스라는 걸 알았다. 처음 정도환과 키스를 할 때의 자신이 떠올려졌다. 서툴렀고 수줍던 몸짓도. 그 서투름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 눈물이 찔금 났다. 입맞춤이 짙어져갔고 그녀가 조금씩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재유의 떨림이 신기했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신기해하는 자신이 더욱 신기해졌다.
묘는 살며시 남자의 가슴에 파고든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 다시 재유를 마주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이 남자는 대체 날 어떤 녀자라고 생각할가? 헤픈 녀자로 오인받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난 척 그런 얼굴로 마주해야 하는 일도 싫었다.
그 때였다.
“이젠 내가 널 책임질게.”
재유가 말했다. 재유의 탄탄한 팔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누군가가 그녀를 책임지겠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였다.
“아니.”
묘가 고집스럽게 머리를 저었다. 키스를 한번 했다고 해서 책임진다고? 그것 역시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우리 결혼하자.”
재유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묘 역시 그 서슬에 놀라서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말도 안돼.
“한번도 이런 적 없어. 이 녀자는 내 녀자다, 이런 느낌. 아마도 오랜 세월 난 이걸 기다려왔던가봐.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재유가 정색해서 말했다.
묘는 신기한듯 그런 재유를 바라보았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물종物种을 발견한듯이.
“혹시,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해?”
재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묘는 상반신을 일으킨 채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굳어져있었다.
“내 이름이 뭔지 알아? 내가 몇살인 거는?”
묘가 어이구야 하면서 그에게 말을 던졌다.
“묘, 아니야? 너 친구들 다 널 묘라고 부르는 걸 들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어리니까… 대학은 졸업했다면서, 스물다섯? 여섯? 일곱?”
재유가 묘를 바라보았다. 잠간 침묵이 흘렀다.
“내 이름은 유재유야. 스물아홉이고. 고향에 부모님 계시고 형제는 없어. 북경에서 통번역을 하는데 안정된 직장이라서 네가 일을 안해도 두 사람이 살기엔 그나마 무리는 없어. 네가 원하면 집도 장만할 거고. 물론 대출을 좀 내야겠지만.”
재유가 동의를 구하듯 다시 묘를 바라보았다.
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할 말을 잊어버린 채 멍하니 그런 재유를 바라보았다.
장미묘연, 그녀의 이름이였다. 사람들은 장미라는 성도 있냐고 희한해했다. 그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지어준 부모님을 알게 모르게 원망했다. 또 한번 성은 장씨, 이름이 미묘연이라고 해석해야 했다. 한때는 그녀의 특이한 이름이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네 이름이 장미묘연이구나. 너 부모님 중 시인이 계시니? 학교 다니는 내내 전교 사생들은 사람 먼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신기한듯 그녀를 다시 한번 돌아보거나 굳이 찾아와보군 했다. 그게 한때는 싫지가 않았다. 이름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가 있다는 걸 그 때는 행운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날이 지나고 커감에 따라서 불편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이 불편해졌다. 여기저기서 주목받는 일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였다. 대중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고 있는 연예인들은 이보다도 더 따가운 눈빛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고 그녀는 그네들에 알 수 없는 동정심이 생겼다. 미묘연, 한번도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조차 그녀를 묘연아 하고 불렀다. 그럴 거면 왜 남들이 다 안 쓰는 네글자짜리 이름을 지어줬는지…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결국 친구들은 한글자로 그녀를 불렀다. 묘, 그녀를 오래동안 지켜본 친구들은 그 ‘묘’의 의미를 잘 안다. 고양이, 그러니까 그녀의 별명이였던 셈이였다. 곱실곱실한 반양머리며 걀죽한 눈매며 그녀가 고양이 같이 생겼다고 아이들은 야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커서는 묘 하고 불렀지만 그 다른 의미는 고양이라는 걸 그녀도 부르는 친구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이 묘가 아니라니? 그녀는 묘란 이름이 있다고 믿고 있는 재유가 다시 한번 신기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울려퍼진다. 묘는 어제 밤 자기 전에 꺼놨던 휴대폰을 켠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딩동딩동 수없이 울려오는 알림소리, 위챗이였다. 클릭하고 들어간다. 백여개의 새 메시지가 벌새의 날개짓처럼 파닥파닥 뜬다.
어쩐 일이래? 진짜 맞네…
사진 합성은 아닌 것 같애. 정도환은 봤을가?
묘 맞지? 남자는 누구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할 데 없어서 사우나에서?
저 남자를 아는 사람?
뒤통수만 보고 누가 알아. ㅋㅋㅋ…
정도환이랑은 저래서 헤여진 거야? 나라도 싫겠어…
… …
묘는 화면에 뜬 사진 한장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익숙한듯 낯선 표정, 남자의 뒤통수에 가리운 절반의 얼굴. 걀죽한 눈매, 흘러내린 곱슬머리, 제발 아니길 묘는 내심 바랐지만 틀림없는 자신이였다.
누가?
묘는 휴대폰을 든 채 주변을 휘둘러본다. 낯익은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재유가 그런 그녀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묘는 그러는 재유를 쏘아보았다. 가능하다면 눈빛 하나로 멀리로 날려버리고만 싶어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해영이였다. 전화를 받는다.
“너 대체 어디야? 사진 봤어? 모두들 란리 났는데… 너 알고나 있어?”
서해영의 말소리가 따갑게 묘의 귀청에 울렸다.
“지금… 봤어. 헌데 정말로… 그런 거 아니야. 해영아.”
묘가 떠듬떠듬 말을 했다.
“그 남자 엊저녁 인후오빠 친구지? 설마 했는데… 너 둘 정말 좋아하니?”
따지듯 묻던 서해영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뭔가 숨겨야 할 것처럼 갑자기 낮아졌다.
“도환이 아까 나한테 련락 왔었어. 너 이럴 줄 몰랐다고. 너 이제 어쩔래? 바람 피울 거면 들키지나 말던가…”
묘의 가슴에 찬바람이 스쳤다.
“뭐? 바람?”
“너 잘 생각해봐. 정도환일지 아니면 그 재유인가 뭔가 하는 사람일지…”
서해영은 묘의 변명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듯 자신이 할 말을 내뱉어버리곤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묘는 서둘러 다시 전화를 누르려다가 포기하고 만다. 그 사진이 나돈 이상 누구도 그녀의 결백 같은 건 믿어주지도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정도환이 다른 녀자랑 동거한다는 말을 꺼내선 뭘 하랴 싶기도 했다. 그녀만 남자의 배신에 배신으로써 보복하는 이상한 녀자가 되여버릴지도 몰랐다.
묘는 이제 두눈을 부릅뜨고 원쑤 같이 재유를 쏘아본다.
“대체 왜 그러는데?”
재유가 놀라서 물었다.
묘는 말 대신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봐봐.”
재유가 휴대폰을 받아쥐고 들여다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누가 이따위 짓을.”
“난들 알겠어?”
묘는 울상이 되여버린다. 이제 억울해도 억울하다는 말도 못하고 갇혀버린 두아窦娥가 된 느낌이다.
서둘러 사우나에서 나왔다. 뻐스역에서 유재유와 묘는 헤여졌다.
“전화할게.”
재유가 뻐스 타러 들어가는 묘의 등뒤에서 소리쳤다.
“하지 마. 아무 것도 하지 마.”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자리를 찾아앉고 나서 묘는 서해영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 말 먼저 들어. 나 그 재유란 사람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야. 그 남자 좀 이상해. 갑자기 달려들어서… 절대로 내가 원해서 그런 거 아니라구. 그리고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정도환은 이미 한국에 다른 녀자가 있어. 그 녀자랑 동거까지 한다구. 내가 이 말 하기 싫어서 여직 이러고 있었는데… 너라도 날 믿어주라.”
말을 하다 말고 묘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도환이 다른 녀자랑 동거를 한다구? 그게 정말이야? 나한텐 미리 얘기 좀 하지. 왜 바보 같이 이제서야, 아까 콱 욕해놓는 건데…”
서해영이 역정을 냈다.
“친구야, 정말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헌데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입이 안 떨어져서.”
“그럼 정도환과 갈라진 거야?”
“그래야겠지? 헌데 도환이 한달 동안 련락이 안돼. 그 일을 내가 알았다는 걸 눈치챈 거지… 그래도 전화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니?”
“나쁜 자식. 그건 그렇고 헌데… 그 사진은 누가 찍은 걸가?”
“그러게. 나도 몰라.”
“그럼 그 남자는, 재유란 사람은 어쩔려고?”
“뭐, 어쩌긴.”
“알았어. 당분간 위챗은 보지 마. 며칠 지나면 시들해질 거야.”
뻐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묘는 자신의 방 침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
재유는 몇번이고 묘의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묘는 아예 전화기를 꺼놓고 있었다. 아프다고 했던 어머니는 몸이 아팠던 게 아니라 아들에게 어울릴 만한 처자들을 찾아놓고 만나보라고 굳이 재유를 부른 거였다. 재유는 어머니가 내미는 사진 속 처자들에게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늘 점심에 가서 만나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어머니는 이미 이틀 동안의 스케줄을 짜놓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마뜩잖은 눈으로 지켜보기는 했지만 타박하지는 않았다. 아들을 이대로 계속 자연에 맡겨두다가는 손주는커녕 결혼도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던 게 분명했다.
재유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선 보러 나가는 차 안에서 묘에게 전화를 했고 선자리에 나가 상대방을 기다리면서도 전화를 했다. 전화는 계속 통하지가 않았다. 커피 한잔을 놓고 맞은편에 앉았던 녀자가 이름이 뭐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재유는 더는 참지를 못하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김인후에게 전화를 했다.
“야, 너 이 자식. 너 뭐야. 묘연이 너 때문에 큰 곤역 치르게 된 거 알고 있어? 삼년을 좋아했던 남자랑 헤여지게 생겼다구. 몰랐는데… 너 참 대단하다…”
김인후가 계속 빈정거렸다.
“난 진심이야. 묘가 어데 사는지 알려줘.”
“뭐? 찾아가게. 너 묘가 그 남자랑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 말도 안돼. 너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오면 힘들어. 힘들구 말구.”
“너 지금 집이야 아님 단위야?”
“왜 찾아오게? 와도 난 너랑 할 말이 없어.”
김인후가 덜컥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 뒤 메시지 도착음이 딩동 울렸다.
묘연이 그러는데 네가 무작정 달려들었다면서… 개도 아니고 말이지. 참… 묘연은 아예 생각도 없었다는데… 널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란다. 허니 꿈 깨라고.
재유는 한산한 거리가 더욱 낯설어졌다. 그리고 등달아있는 자신도 더욱 낯설어졌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절박함이였다. 재유는 봄날 오후의 따스한 해살 아래 몇번이고 다시 김인후가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개도 아니고 말이지.
재유는 충격받은 얼굴로 해살 가득한 거리바닥에 목적지를 잃고 허둥거렸다. 재유는 그 해살 아래 드러눕고만 싶어진다. 노곤히 나비꿈을 꾸는 장자마냥 잠들고 싶어진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 묘가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을 것만 같았다.
재유는 살아오면서 목표가 명확했다. 그 명확함이 그를 그다지 감성적이라던가 인생경력이 풍부하지 못하게 만든 대신에 삶에 훨씬 주동적이게 만들었고 그는 만족했다. 래일은 둘째 치고 일분일초란 미래 앞에서는 영원히 주도적일 수가 없다는 걸 발견하기까지는 그랬다. 아주 가끔 희붐한 새벽에 눈을 떴다가 재유가 재유답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옅은 죄의식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런 새벽이면 재유는 일어나서 장자를 읽었다. 백화문이 아닌 원문으로 중얼중얼 소리내여 주문처럼, 이른 새벽의 념불처럼 그것을 읽었다. 그런 새벽과 같이 재유는 장자를 들고 아무 생각 없이 읽어내려가고 싶어진다.
두터운 책 속의 삽화 하나가 떠올려졌다. 나비꿈을 꾸는 장자의 삽화.
나비꿈을 꾸고 있는 장자의 침대나 나무밑둥이나 그늘 속에 혹은 동자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차를 끓이는 화로 뒤쪽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고양이 한마리가 숨어서 하품을 하다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삽화 속 어디에도 없는 고양이 한마리를 재유는 정말이지 너무 찾아내고만 싶었다.
그 때 재유는 왜 하필 고양이였는지, 왜 보이지도 않는 고양이를 찾고 싶었는지를 알지를 못했다.
뒤이어 재유의 휴대폰으로 끝없이 이어진 위챗 알림소리가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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