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숨>을 몇번이고 다시 시작한다. 이번까지면 다섯번째 쯤 되는가? 뭐가 달라지고 싶은데… 그동안 침묵하면서 뭐가 더 마음에 닿았는데… 달라져야지, 하는 강박증이 알게 모르게 나한테 있었나 보다. 그래서야 끝까지 갈 수가 있겠나? 그 시점에서 나는 쓰레기통 하나를 책상 밑에 들여놓아야지, 생각했다. 잔뜩 멋만 들어간 원고들 뿐 아니라 나의 이런 의념들까지 거기 처박아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좀더 홀가분해지려면 조그마한 쓰레기통 하나로는 어림도 없겠지…
오랜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정확하지가 않다. 글은 늘 쓰고 있긴 했다. 스케치하듯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글로써 끄적거리기는 계속 멈추지 않고 있었다. 숨을 쉬듯이 그냥 백지 우에 내 숨결들을 늘여놓기를 나는 즐겼다. 노트 속은 늘 그래서 뒤죽박죽이였다. 그 뒤죽박죽인 혼돈을 이렇게 글 하나로써 정돈할려니 더더욱 혼란스러워지려고 한다. 아무런 제목도 문체도 달지 않은 글들, 그것들은 내가 순간순간 잡아내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흔적도 없이 영원으로 갈 것들이였다. 어쩌면 소설을 쓰고 있지 않았던 지난 일년이란 시간동안 공간에서 공간을 옮겨다니며 나는 영원 안에서 아무런 것도 잡지 말아야 할지를, 그래서 모든 것을 ‘무’로 놓아버려야 할지를 어처구니없게도 끝없이 고민했다. 내가 잡을 수도 잡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한심한 그 집념은 대체 어데서부터 난 거란 말인지… 들숨날숨 안의 영원과 만나기 직전까지는 쭉 그랬다. 나는 그렇게 ‘숨’과 만났다. 처음으로 자신이 숨을 쉬고 있음에 감사했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임을, 창 밖의 오동나무의 눈이 오동통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것처럼 내 안의 뭔가가 역시 오동통 살아나서 귀기울이기 시작한 숨소리들… 바람과 나무와 해빛과 풀과 나비와 모래와 바다와 하늘 그리고 사람들…
그러고 보니 하늘도 숨을 쉬고 집도 숨을 쉬고 반죽도 숨을 쉬고 피부도 숨을 쉬고 땅도 숨을 쉬고 항아리도 숨을 쉰다. 그 커다란 숨 안에서 우리도 숨을 쉬고 있는 것이였다.
사형제부부가 아이를 잃은 건 지난해 봄의 일이였다. 지금처럼 버드나무들이 실실이 드리우고 목란이며 도화며 앵두꽃이 만발한 무렵이였고 화병에 꽂은 노란 매화가 서서히 말라가면서 마지막 향기를 뿜고 있을 무렵이기도 했다. 그들 부부의 아이는 아이의 조부모가 보고 있었고 그날 아이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복숭아나무아래서 천방지축으로 뛰여다니며 놀고있었다. 아이의 조부모는 성정이 거침없이 활달한 분이셨고 모든 위험이 아이를 비켜갈 거라고 믿고 있었는듯 아이에게는 그 어떤 위험에 관한 주의사항 같은 걸 굳이 주입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가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듯 싶었다. 그리고 그날 아이의 외삼촌이 먼곳으로부터 놀러 왔다. 아이는 외삼촌을 붙잡고 놀러 나가자고 지청구를 들이댔고 아이의 외삼촌은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밖으로 놀러 나갔다. 일은 거기서부터 일어났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물을 내보내는 수로가 있었고 강물마냥 넘실거렸다. 겨울 내내 막혀있다가 저수지에서 전날 마침 물을 내보냈다고 했다. 외삼촌이 아이를 자전거에 내려놓고 자전거를 세워놓는 새, 일은 그 순간에 일어났다. 둔치로 먼저 올라간 아이가 비탈로 달려 내려갔고 밑에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었고 아이는 그대로 물에 빠졌던 것이였다. 아이의 외삼촌은 그 상황에 놀라서 소리 지를 새도 없이 풍덩 강에 뛰여들었고 아이도 어른도 결국은 강에서 나오질 못했다. 아이의 조부모며 사형제부부며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아이와 아이의 외삼촌을 찾아나섰고 그날 밤 그들은 강우에 떠있는 아이의 조그마한 시체를 발견했다. 수사대가 나서 아이의 외삼촌을 찾았고 꼬박 사흘을 찾아서야 아이의 외삼촌을 강에서 건져낼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찾아냈을 때 아이의 외삼촌의 다리는 강밑 수초들에 얼기설기 엉켜져서 그때까지도 강물속에 꼿꼿이 서있더라고 했다.
장례는 조촐하게 급속도로 치뤄졌다. 아직 네살 난 아이도 아이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되여 세상을 향해 성큼 나가야 할 아이의 외삼촌도 아깝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소설을 쓰고저 했을 때 나는 그 사건으로부터 피해갈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다른 건 쓸 수가 없었다.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숨을 쉰다는 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게 그때만큼 행운처럼 축복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다. 대체로는 그 자체를 잊고 살았다. 숨을 쉬고 있다는 그 자체를 말이다.
어쩌면 아이는 숨을 멈췄지만 그 아이를 사랑했던 이들의 마음속에서는 해마다 한살씩 먹어가면서 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설에 사형제부부가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젊은 부인은 두번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온 대지가 파란 숨을 토해내는 지금, 숨을 쉬고 있는 모든 것들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같이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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