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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란
배낭은 그녀의 것이였다. 시조새가 그려져있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보기 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비싼 브랜드인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려행을 좋아했던 그녀가 갖춰놓은 수많은 장비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녀는 봄과 가을이 될 때마다 하나 또 하나의 아이템을 사들이면서 언젠가는 배낭려행을 떠날 거라고 꿈꾸었다. 배낭만도 크고 작은 배낭이 여섯개나 있었다. 려행지들을 스크랩해놓고 들떠 얘기할 때마다 언제? 내가 물었고 그녀는 조만간에 갈 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내가 려행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결코 내게는 함께 떠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온갖 장비들이 하나 둘 다락에 쌓여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그녀가 그 모든 것을 달팽이 같이 짊어지고 길에 나서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그 장비들만을 다락에 남겨둔 채 떠나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세상과 떨어진 이곳에서 사는 삶 자체를 이건 아니라 싶었는지 아니면 나한테서 발전가능성이나 든든함을 못 느꼈는지 나는 알지를 못했다. 그냥 그런 겐가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였다.
문을 닫는 순간, 약간의 동요가 일렁였다.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마음거죽이 째질듯이 밀려들었는데(마음에 거죽이 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 쯤은 마음 같은 것이 뭐라 하든 적당히 무시해버릴 줄도 알게 되는데 그 순간 나는 모르는 척도 아니고 대놓고 무시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를 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익숙한 도로로 걸어나왔다. 도로에는 차 한대도 보이질 않았는데 평소에도 다니는 차가 적은 터라 걷기에는 맞춤했다. 차 두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도로였다.
우리는 5년째 도시도 산골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 살고 있었는데 도시로 한번 들어가려고 해도 멀고 불편했고 마음 먹고 산으로 한번 놀러 나가려고 해도 불편했다. 분명한 건 그녀가 차타령을 하면서 좀씩 달라져갔다는 점이였다. 다니기가 너무 불편해. “우리 차는 한대 있으면 좋지 않겠어? 요즘 차가 없는 집이 어딨어?” 그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내게 지청구를 들이댔다. “난 운전 못해.” 나는 순순히 그 말을 따를 수는 없어 핑게를 댔다. “운전면허증 있잖아.” 그녀가 반박했다. “벌써 팔년째야. 면허증만 따놓고 차를 운전해본 적이 별로 없어!” 나는 차잔을 기울이다가 차맛이 별로라는 것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차맛보다는 그녀가 하필 차를 마시는 이 시간에 내 맞은편에 앉아서 차맛을 흐려놓는 것이 더욱 짜증이 났다.
그녀가 정색해서 말했다.
쪼르르 다시 차를 따른다. 차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의 기분이 상당한 비중으로 그 맛을 결정한다는 내 믿음을 다시 한번 믿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같이 차를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도 그 맛이 좌우지될 수도 있다는 믿음도. “결국 오늘의 차는 틀렸군,” 하면서 차잔을 비운다. 동방미인(대만차의 일종)의 그 신묘한 향기는 이미 어데론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내가 빈정댔다.
매일이다 싶이 산보하던 구간이라서 익숙했다. 그녀와 함께 혹은 나 혼자서 이 도로를 따라서 대양산까지 걷군 했는데 갔다 오면 네시간 정도 걸렸다. 이 가을이 시작되고 나서 그녀는 열흘 정도 같이 나가고 나서는 익숙해져버린 그 코스에 지겨워했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잖아. 그녀는 헐벗은 산들에 둘러싸인 산길을 따라 걷다가 다람쥐도 안 보이냐고 타발을 했다. 봄 내내 온 산에 가득 핀 도화에 취해있을 때랑 다른 몸짓이였다.
교외에 나와 살면서 어덴가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데는 이미 신물이 나있었고 나는 조용하게 남은 생을 보내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그 생각을 말했을 때 그녀는 꿈꿔왔던 자신의 삶이라고 하면서 참 좋아했다.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라는 건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나를 따라 산으로 들어왔다. 들어올 때가 2012년 11월이였으니 벌써 5년 전의 일이였다. 그녀는 꽤 유명한 출판사 편집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에는 별로 미련이 없는듯했다. 나는 흥청망청 쓰지만 않는다면 먹고 사는 데는 큰 부담이 없을 만큼의 여유는 있었고 그다지 필요 이상의 돈도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직장을 정리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회사의 사장은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는 다시는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동안 일을 했던 것도 지금부터의 자유와 여유를 위해서였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이니까. 나는 아이 때부터 그다지 성공이나 돈이나 그런 것에 관심이 적은 편이였다고 생각했다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에 괜히 머쓱해진다. 나는 한때 그 누구보다 더더욱 성공이란 걸 해보고 돈을 벌고 싶었었다.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간이 흘렀고 나는 누구의 시점에서 보면 충분한 성공일 수도 혹은 누구의 시점에서 보면 나의 성공이란 것이 아무런 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였고 나는 좀더 욕심(?)이 많은 성인이 되여있었다. 례를 든다면 안일이나 행복이나 건강이나 삶의 의미 같은 것… 그것들을 위해서는 뭔가를 삶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다행스럽게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은 셈이였다. 2012년 내가 퇴직을 했을 때는 내가 서른여섯살이 되여있었다.
산에 들어갈 계획을 얘길했을 때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려진다. 산으로 들어온 것도 그리고 나랑 같이 산 것도 결국은 그녀의 젊었을 때 해야 할 일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였는가? 나는 의심스러워진다.
무화과가 먹고 싶어졌다.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한 귤빛 노을을 혼자서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달콤하고 쫀득쫀득한 그 맛이 그리워졌다. 특별히 무화과가 맛있다고 느꼈던 적도 없었는데 그 날은 왠지 모르게 평생 몇번 먹어보지도 못한 무화과가 먹고 싶어졌다. 무화과는 그녀가 좋아하던 과일이였다. 긴 외출을 나갔다 돌아올 때면 그녀의 가방 안에는 꼭 무화과가 들어있었다. 싱싱한 과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말린 무화과를 몇통씩 들여다가 놓고 먹군 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인 그녀는 무화과와 무슨 원쑤라도 진듯이 아귀작아귀작 이악스럽게 먹었다. 그녀가 떠나간 지 열흘 만이였다. 나는 어슬렁거리면서 2층 다락에 올라가서 혹시라도 그녀가 숨겨둔 무화과통이 없나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배낭을 집어들었다. 혹시 배낭에 넣어두었나,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지만 그냥 그 순간에 그 회색의 밋밋한 배낭이 눈에 훅 들어왔다. 그것을 집어든 순간 알았다. 길에 나서게 되겠구나 하고.
산길이 구불구불 뻗어있다. 바위가 듬성듬성 보이는 산들은 대체로 밋밋하다. 키 낮은 잡목들이 보기 부끄러운 칠칠치 못한 늙은 녀인네의 머리카락처럼 흩날리고 있지만 가다가다 보면 그것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돌산이 무리지어있는 곳을 걸어온듯 돌아보게 된다. 아주 간혹 골짜기 쪽으로 소나무숲이 무리지어 으슥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모처럼 소나무숲이 바라보이는 길녘에서 보온병에 갖고 온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한숨 쉬였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한시가 되고 있었다. 벌써 세시간을 꼬박 걸은 셈이였다.
잠시 려행 다녀옴.
결국 나는 랭장고에 붙여놓았던 메모지를 쓰레기통에 구겨서 던져버리고 말았다. 하트 우에 적어놓은 그 말이 갑자기 빈껍데기가 된듯 시시해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그것 때문에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아파한다는 걸 썩 커서야 알았다. 그 마음을 어떻게 다독이고 어떻게 가다듬어야 하는지는 그 뒤에 남겨진 나의 평생의 숙제였다. 기쁘다는 걸 의식도 못한 채 좋아서 풍덩풍덩 뛰기부터 했던 어린 시절의 기쁨이, 아프다는 걸 느끼지도 못한 채 엉엉 울어젖히고 씨익 웃고 잊어버렸던 날들이 축복이였다는 걸 나는 뒤늦게나마 눈치챘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나는 아프다는 것도 화가 난다는 것도 적당히 무시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여있었다. 기쁘다고 느껴본 지가 한참 오래되였다는 걸 이 순간에 깨닫는다. 그녀가 곁에 있었던 날들에도 기뻤다고 느껴졌던 날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순간에는 기뻤었겠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와의 똑같은 날들이 그녀 자체도 습관이 되여버렸던 거로구나. 그녀에게도 나 역시 습관이 되였을가. 지루했고 참을 수가 없었던 걸가?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마음에 곰팽이가 날 것 같애. 그녀가 던졌던 말만이 더욱 또렷해진다.
배낭을 멘다. 저녁에 묵을 곳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을 가야 한다. 산 아래까지는 단숨에 내려왔다. 그리고 달구지길을 따라서 큰길녘으로 나왔다. 이제 나는 아까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풍경 속의 한 점이 되였다. 거기서부터는 다니는 뻐스도 있었다. 뻐스역에서 머뭇거리면서 뻐스를 탈가 잠시 고민을 했다. 결국은 계속 걷기로 했다. 삼거리의 주유소 근처는 몰려든 장사군들과 뻐스를 기다리거나 갓 내린 사람들로 법석였다. 구와 구의 경계선, 즉 창평구과 회유구의 경계선이다. 나는 그렇게 창평구에서 회유구로 넘어섰다. 커다란 뻐스들이 들락거리는 큰길을 따라서 사십분 정도 걸었다. 뻐스가 지날 때마다 뽀얗게 먼지가 흩날렸다. 이제 나는 먼지를 잔뜩 들쓰고 제법 려행자 같은 몰골이 되여버리고 말았다.
밤나무가 가득 들어선 동네 입구에 앉아 잘 정돈된 동네를 마주하고 바나나 두개를 련달아 먹어치웠다. 폭신하고 달콤했다. 바나나 두개가 주는 위안이 참 크다. 그녀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집 대문에 저처럼 크고 둥근 홍등을 내걸고 싶어했다. 나는 오고가는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건 질색이였다.
그녀는 나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이미 충분히 집이 화려해졌기에 불만족이였다. 내 계획 대로라면 산골 동네의 소박하고 평범한 그런 집을 원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적금을 아낌없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집에 투자를 했다. 통유리 창문을 달고 주방과 거실을 텄고 마당에 그네를 매고 매화나무와 감나무와 벗꽃나무도 심었다. 이른봄이면 동전 만한 벗꽃이 동쪽 창으로 무섭게 떨어져내렸다. 그럴 때면 그녀는 벗꽃구경을 오라고 친구들도 불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고 타발을 했다.
그녀는 어느새 우리가 이 집을 30년 계약을 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녀가 환상 속의 아름다운 정원과 집을 포기하기까지는 꼬박 3년이 걸렸다. 아무리 뭔가를 바꾸고 뜯어고치고 해도 지은 지 20년이 훌쩍 지난 이 집이 그녀 상상 속의 정원이 달린 아름다운 전원주택으로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의식을 하는 순간, 그녀는 그 집에 밀어넣은 돈이 아까와졌던 것이다. 나는 그냥 편히 쉴 수가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였다. 화려하지도 번잡하지도 않은 그런 편안한 집. 내게는 다만 그게 필요했다.
길녘에 호텔과 민박집들이 줄줄이 이어져있다. 이름들도 각양각색이고 풍격도 각자 다르다. 해가 너울너울 서산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1월의 산 속의 오후해는 짧기도 했다. 노루꼬리 만큼 하다는 말이 나옴직하다는 생각에 쿡 웃음이 나온다. 미리 예약을 한 민박집에 전화를 한다. 호우따거, 내가 입을 떼자마자 전화를 받던 이가 알았다고 지금 데리러 나온다고 했다. 나는 이 동네에서는 제일 근사해보이는 호텔 입구에서 민박집 따거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기다린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는 시간들이 싫다. 아니, 불안하다. 그녀가 내 어린 시절을 비난했던 것도 그 때문이였다. 어릴 때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내게는 상처가 맞기는 맞다. 인정하기 지금도 싫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릴 적을 핑게로 계속 징징대기는 더더욱 싫으니까.
내 나이 열한살부터 나는 장순영녀사에게서 생활비를 타다 쓰는 일이 부끄러웠다. 장순영녀사라고 부르는 게 훨씬 편했고 나는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대출을 내여 학업을 마쳤다. 이미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나는 세상 천지에 혼자가 되였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두렵지 않았다. 내 혼자 먹고 잘 곳이 있으면 충분했다. 변호사가 된 첫해가 끝나갈 무렵에 장순영녀사한테서 딱 한번 련락이 온 적이 있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는데 두번 련속 울렸던 터라 의뢰인일 줄로 알고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다시 했다. 변호사사무실인데요, 전화주셨던데… 누구신지? 내가 물었고 그쪽에서 대답했다. 나야.
누구시라구요?
장순영녀사가 가까스레 대답했다.
다 널 위해서야 했던 장순영녀사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것도 그 다음해부터였다. 통화를 하고 있는데 “엄마, 빨리 와, 아버지가 공원 앞에서 기다린대!” 하는 녀자아이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고 장순영녀사가 아까와는 분명하게 낮아진 소리로 “알았어, 금방 가.” 했다. 내게는 들리지 않도록 한손으로 전화통을 막고 소리치고 있다는 걸 나는 금시 알아챘다. 장순영녀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녀자아이와 공원에 놀러 간다는 것보다 그 녀자아이가 챙챙하게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보다도 장순영녀사가 쾌활하게 “알았어, 금방 가.” 하는 말소리가 덥석 쥔 가지의 가시가 손가락 끝에 꽂히듯 전화기를 든 내 손가락을 사정없이 찔렀다. 송골송골 피방울이 맺히듯 선명한 아픔이였다. 아마도 그 뒤부터였을가, 나는 장순영녀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말이 상처가 될 수가 있다는 걸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할머니의 타박 때문에 장순영녀사도 상처를 받았을가 하면서 나는 세상 어떤 말도 쉽게 믿지를 못하는 사람이 되여갔다.
강마른 오십대 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가 오른손을 활짝 들었다. 오랜 농사일에 거칠어진 손이였다.
어떻게 왔냐고… 나는 그 말 자체가 헛갈려져서 머뭇거리다가 걸어서 왔다고 대답했다.
“어데서 온 거지? 걸어서?”
“구도하에서 사나?”
“다 왔네. 여기야!”
낮다란 돌담에 둘러싸인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배추포기들이 아직 터밭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마당에 서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들이 옆구리가 터진 채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돌담 구석에는 따놓은 감들이 무둑히 쌓여있었다.
호우따거가 동쪽 편의 방문을 가리켰다.
호우따거가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서쪽방으로 들어갔다. 모두 세개의 방이 있었고 본채에 붙은 서쪽 끝머리의 낮다란 지붕의 방은 주방으로 쓰는듯했다. 마당 한가운데 수도가 있었다.
방 구석으로 조그마한 TV가 놓여있었고 그 맞은편에 다기가 놓인 차상과 쏘파가 놓여져있었다. 거기 앉아서 차를 마시는 모양이였다. 싸구려 플라스틱 보온병 하나가 그 곁에 덩그러니 놓여져있었다. 마개를 열어보니 뜨거운 물이 그득 담겨져있다. 나는 밥보다는 따끈한 차 한잔을 마시고 싶어진다. 휴대용 보온병을 꺼낸다. 언젠가 그녀가 일본에 려행 갔다가 사온 작은 사이즈의 보온병이였다. 거기에 집에서 갖고 온 홍차잎을 조금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익숙한 차향이 낯선 공간 안에 퍼지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씩 그 안의 일부가 되여가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그녀의 냄새가 도처에서 났다. 그녀만의 체취였고 나긋했다. 그녀와 보냈던 수많은 낮과 밤들이 떠올려지는 그런 냄새였다.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달짝지근하고 끈끈한 무화과맛이 그리워졌다. 이상했다. 그녀가 무화과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와 나는 부부라고 하기보다는 동거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5년을 함께 살았지만 우리는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다고 해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도 아니였으므로 우리 사이는 쉽게 마무리될 수 있는 그런 사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이란 걸 했던 적이 있었다. 4년의 결혼생활 끝에 리혼을 하게 된 그녀는 6년 전의 어느 날 내가 나가는 변호사사무실로 문의했다. 리혼도 하기 전에 선을 본 남편을 고소할 수가 있냐고. 그 때 그녀는 화가 많이 나있었다. 시어머니가 남편 중매를 섰다고 했다.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병원진단을 받고 나서였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실에도 그녀는 상당히 화를 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상담이란 이름하에 낯선 이인 나에게 끝도 없는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후날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아준 리유로 그녀가 나에게 오히려 호감을 느꼈었지 않을가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 내가 했던 말은.
지금의 나에게 이 말을 던져본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명길아, 자냐~”
그렇다. 내 이름은 오명길이다. 북경에서 그나마 성공한 변호사, 주변의 친구들도 동료들도 내가 조선족이란 걸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나 역시 오래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온통 중국어문화권에 둘러싸여 살다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조선족임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어쩌면 내 몸이다. 내 몸이 내 혀와 위장이 김치와 된장을 찾지 않고는 못견뎌한다. 그녀와 나는 처음부터 중국어로만 대화를 나눴다. 그게 편했다. 그녀가 표준적인 서울말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 한참 지나서 알게 되였다.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그녀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한국사장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녀가 출판사 일을 그만두기 전이였다. 그녀의 류창한 서울말투에 나는 내심 놀라긴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중국어로 간단히 그녀가 무랍없이 언니라고 부르는 사장과 인사만 나눴다. 사장이 자리를 뜨면서 그녀에게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이번에도 중국사람이야? 그녀가 웃었다. 언니, 나도 중국사람이야. 왜 그래?
“동치미가 먹고 싶다~”
“나도 잘함다. 연변말이라서 그렇지… 얼음 우에 표주박 밀듯이… 한번 들어보겠슴둥?”
그녀는 웃다가 눈물까지 훔치며 내게 중국어로 말했다.
아무 것도 안해도 자유로운 삶, 나는 그런 삶을 동경했다. 이제 그 안에서 그녀마저 빠져나간다면 정말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가? 나는 내게 마지막까지 남는 그것이 무엇일지가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 것 같다. 새벽에 잠을 깨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다섯시가 되고 있었다. 옆으로 던져버리려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부터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네통이 빨갛게 동그라미를 한 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손끝을 댄다. 하나씩 펼쳐지고 광고와 광고에 이어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떡하니 거기에 있다.
“나 돌아가. 집에 있지?”
다시 확인해보니 엊저녁 보낸 메시지다. 나는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그 때 또 한통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혹시 밖이야? 화난 건 아니지? 대꾸 좀 해줄래?”
나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다. 아무 일도 없다는듯이 담담하게.
알았어. 나 지금 밖이야 썼다가 밖이야를 지우고 수장성이야. 썼다가 다시 지우고 밖이야를 썼다. 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하다가 그 뒤에 수장성. 세글자를 썼다.
“알았어. 우리가 갈게.”
우리? 우리라니!
묵고 있던 동네에서 걸어올라가니 수장성까지 두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하고 나서도 먼저 눈앞에 보이는 넓은 주차장 끝에 있는 옛 골목을 본따 만든 거리를 한참을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장사군들이 여기저기서 뭔가를 사라고 자꾸 권한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골목을 다 빠져나가고 나서 거대한 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중학생들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한편 나는 숨을 고르며 아직도 아득히 높아보이는 장성을 쳐다본다. 그 때였다. 나는 익숙한 그녀의 얼굴이 그 우에서 환히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를 기대여앉은 나이 들어보이는 녀인네의 팔을 툭툭 건드리는 것을 보았다. 익숙한듯하면서 낯선 녀인네였는데 놀란듯 울먹울먹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녀인네를 보면서 나는 헉, 비명을 질렀다. 내 지나온 생에 대한 짧은 비명이라고나 할가. 비명과 동시에 나는 코등이 찡해짐을 느꼈다. 장순영녀사였다. 늙었지만 분명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로 다가온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명길아~”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얼마 시간이 안 남았다고 해서… 당신 대신 내가 갔는데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명길아.”
내가 대답했다.
나는 머리를 들어 이제 려행객들이 빠져나간 장성을 올려다본다. 아무리 위대한 장성이라지만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에는 쓸쓸한 세월이 유령같이 맴돌기만 할 터였다. 문득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간 뒤에 결국은 사람이 남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대도시의 인파 속에서 정작은 사람이 그리웠다는 걸 알았다.
이제 돌아가면 그녀를 위해서 무화과나무 한그루를 심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리도록.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하나 실제는 과실 안에서 꽃이 핀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나는 이제 열매 뿐 아니라 그 열매 안에 아무도 보지 못하지만 스스로가 아는 꽃 하나를 피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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