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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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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614 ]

224    연길 정원석 댓글:  조회:4566  추천:55  2009-04-14
연변대학의 돌
223    연길 정원석 댓글:  조회:4401  추천:55  2009-04-14
과기대의 돌
222    소흥 동호 기석세계 산책 댓글:  조회:4277  추천:61  2009-04-09
                소흥 동호 기석세계 산책   절강 소흥 시구역에서 동으로 3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항주 서호, 가흥 남호와 더불어 절강의 3대명호수로 불리우는 동호가 있다.    산과 호수가 이어진 이 그림같은 동호풍격구에는 가흥 남호 호심도와 마찬가지로 기이한 기석들과 인공가미기석들이 많아 수석인들이 한번쯤은 가볼만한 고장이다.    오랜 옛날부터 채석하고 잘 다듬어 놓은 바위강산은 현대인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선경",  나 일가족은 4월 5일 오후 소흥 동호풍경구를 다시 찾았다.
221    가흥 남호 기석세계 산책 댓글:  조회:4247  추천:46  2009-04-06
                  가흥 남호 기석세계 산책     하늘이 밑창이라도 뚫렸는지,  4월 4일 청명날 강남대지에 온 하루 비가 내린다. 이날 나와 안해, 아들애 일가족 셋은 절강 동북부에 자리잡고 소흥에서 상해쪽으로 150여킬로미터 떨어진 가흥 관련답사를 떠났다가 가흥 남호의 호심도(湖心島)에서 강남풍격이 짙은 원림기석들을 보아내게 되였다.    가흥 남호는 가흥 시구역 동남부에 위치하고, 력사가 유구하고, 호수면적이 800여무를 헤아리는 아름다운 호수로서 송나라이후 항주 서호, 소흥 동호와 더불어 절강의 3대명호수로 불리여왔다. 이런 호수속에는 수림으로 덮히고 면적이 17무를 가진 선경같은 호심도가 있는데 이 섬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재위60년에 선후 6차나 강남을 순시하면서 8차나 남호 호심도 연우루(煙雨樓)에 발자취를 남기고 시 15수를 남긴 력사의 섬으로 이름이 있다.    남호가 보다 그 이름을 세상만방에 자랑한것은 남호의 호심도 연우루와 한 유람선이 중국공산당의 창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 1차당대회는 상해 망지로(望志路) 106번지에서 열리다가 회의도중 프랑스조계지 순경의 돌연적인 수색으로 자리를 떠야 했다. 8월초에 대표들은 비밀리에 가흥 남호로 전이하여 남호의 호심도 한 유람선에서 다시 회의를 가지고 당의 첫 강령과 첫 결의를 심의, 통과하고 당의 지도기구—중앙국을 선출하고 중국공산당의 설립을 장엄히 선고. 그로부터 중국혁명의 항선은 남호에서 돛을 올리고 항행에 나서면서 유서깊은 남호는 중국혁명의 중요한 혁명기념지로 떠오르게 되였다.    그후 후날의 대한민국 림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이 1932년 4월 29일 , 상해 홍구공원 윤봉길사건으로 상해를 떠나 가흥으로 피난하여 가흥에서 수년간 활동하면서 남호는 또 한국사람들이 자주 찾는 고장으로 된 현실이다.    가흥 남호는 이렇듯 력사가 유구하고 유서깊은 아름다운 호수이다. 남호의 호심도가 바로 청 건륭황제가 8차 오르고 중국공산당이 창건된 력사의 섬으로서 섬에는 옛 강남특색이 짙은 연우루와 청휘당(淸暉堂) 등 건물들과 유적지, 유람지들이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남호의 호심도에는 또 이 북방수석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강남풍격의 기석군들이 자주 눈에 뜨이여 기분이 한결 좋았다. 비내리는 강남 호수섬에서의 기석촬영, 오늘 이 기석사진들을 추리여 여러 분들의 진지한 감상에 내맡겨본다. 이 강남기석들은 인공이 가미되고 인공으로 연출된 원림기석의 한부분으로 나타나지만 한번쯤은 감상할만도 하다.   2009년 4월 6일                                                                                          
220    팔도 서쪽 주봉에 올라서(09.4.1) 댓글:  조회:4354  추천:59  2009-04-03
두리봉 서남족 주봉 방향으로뻗은 장성및 료망대 3개 발견
219    강남의 기석사진 감상 댓글:  조회:4149  추천:50  2009-04-03
                  강남의 기석사진 감상   어제 4월 2일 정오직후 여기 회계산 남쪽면의 깎아지른듯한 거대바위군체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회계산 남쪽기슭으로 갔습니다. 길가 어느 기업체 마당에 숱한 기석들이 있기에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요.   크나큰 기석들이고, 산지는 알수가 없지만 기석의 질이 만점이였습니다. 잘 다슬구어 어디에 진렬하거나 팔려는 모양 같았습니다. 감상용으로 올리여 봅니다.  
218    연변 고장성 흔적을 찾아서 댓글:  조회:3959  추천:68  2009-04-01
217    원선생의 기석 댓글:  조회:4240  추천:56  2009-04-01
216    소흥의 원림세계 (3) 댓글:  조회:4082  추천:49  2009-02-09
                 소흥의 원림세계 (3)
215    소흥의 원림세계 (2) 댓글:  조회:4409  추천:66  2009-02-07
                  소흥의 원림세계 (2)  이어지는 심원입니다. 몇번에 나누어 펼쳐 드립니다.
214    소흥의 원림세계 (1) 댓글:  조회:4465  추천:70  2009-02-07
                 소흥의 원림세계 (1)   월나라 때까지만도 2500여년의 력사를 가진  절강 소흥은 이름난 력사문화도시로서 원림세계가 쫘악 펼쳐지고 있습니다.   "소흥의 원림세계(1)"은  남송의  위대한  애국시인  륙유를  주선률로 펼쳐지는  도심의  "심원"입니다. 그야말로  선경을  방불케  하는  절경입니다.   원림세계라 하면 명승고적에 수풀, 꽃, 돌과 물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수석인이 돌을 떠날수 없듯이 원림의 돌세계는 너무나 황홀합니다. 자연이 아닌 인공으로 이루어내는 세계지요.
213    섣달 그믐날 찍어 본 사진입니다 댓글:  조회:4056  추천:60  2009-02-01
            섣달 그믐날 찍어 본 사진입니다   1월 25일 섣달 그믐날 절강 소흥의 가암풍경구를 찾았습니다. 여러 분들의 감상을 기대합니다.
212    기축년 소띠해 행복 가득하소서 댓글:  조회:4793  추천:71  2009-01-31
             기축년 소띠해 행복 가득하소서
211    선경바다 구름바다 하늘위에 펼쳐져 댓글:  조회:4275  추천:70  2009-01-24
                 선경바다 구름바다 하늘위에 펼쳐져   대자연의 기이한 돌에서 기분을 바꿔 볼까요, 항주~광주행 하늘나라서 찍어 보았습니다.    즐거운 설 시각이 되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당신의 새해를 축복합니다 !!!
210    대자연의 기이한 돌 댓글:  조회:4028  추천:65  2009-01-24
                   대자연의 기이한 돌   대자연엔 기기묘묘한 돌들이 많은가 봅니다. 수석인이니까 돌을 떠나지 못하여 기이한 돌들이 자주 눈에 띄울까요?!   여기 올리는 사진은 절강의 명산 회계산 주봉아래의 바위사진입니다.    하늘같은 엄청 바위덩어리가 한 부위만 아래 바위에 대이고는 그대로 들려 있지만 가까이서, 멀리서도 그 전모를 찍을수가 없어 유감입니다.    설기간~~보는 이들의  한 순간에 즐거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9    새해 기축년의 첫 태양이 솟아 오릅니다 댓글:  조회:4875  추천:72  2009-01-01
        새해 기축년의 첫 태양이 솟아 오릅니다   높이 21메터의 대우동상이 일떠선 절강 회계산 북쪽 정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우리 두만강수석회를 꾸준히 지켜봐 주신 모든 이들이 솟아 오르는 2009년 기축년 새해의 첫 태양과 같이    생기발랄하며, 항상 건강하고 안녕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
208    남경총통부의 수석세계 댓글:  조회:4895  추천:77  2008-12-28
                 남경총통부의 수석세계      남경취재차 지난 11월 중순과 12월 초에 두번 남경에 다녀 왔습니다.       남경총통부는 남경 장강로 292번지에 위치, 600여년의 력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력대는 그만두고라도 태평천국시기 홍수전이 남경을 수도로 하고 여기에 굉장한 규모의 천조궁전을 지었고, 1912년 1월 1일 손중산선생이 여기서 중화민국 대통령에 취임, 1927년에 국민정부가 세워지고 여기는 또 1937년까지 국민정부 기관으로 되였습니다.      이 글의 제목을 "남경총통부의 수석세계"라고 했지만 실은 총통부내에 진렬했거나 꾸린 것, 수석세계가 엄청 컸습니다. 남경의 수석집산지였습니다.
207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6) 댓글:  조회:4920  추천:79  2008-12-21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6)
206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5) 댓글:  조회:4697  추천:86  2008-12-21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5)
205    【나와 수석】(1) 우화석—나 수석사의 첫걸음 댓글:  조회:5157  추천:94  2008-12-11
【나와 수석】(1)     우화석—나 수석사의 첫걸음       2008년 11월 하순,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회장 부부와 더불어 절강안휘 접경지대 수석탐석에 다녀온후 기분이 류다르게 짱이다. 돌이켜보면 김봉세회장과 나 둘만의 첫 수석탐석은 10년전으로 거스르는데 수석으로의 어섯눈은 그보다 훨씬 앞선 지난 80년대 초반 남경우화석이 시작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25년전인 1983년 5월 나는 행운스럽게도 남경우화대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이듬해이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나와 당사연구실의 왕청산선배는 장강이남 겨레발자취답사길에 올랐었다. 상해, 소주, 남창, 구강 등지를 거쳐 남경에 이르렀는데 남경에서의 답사는 남경의 중산릉과 우화대로 이어졌다. 그시절 30대 문턱을 바라보는 열혈의 나에게 있어서 남경하면 선참 떠오르는것이 우화대였다. 옛날의 우화대는 석자강(石子岡), 마노강, 취보산 등으로 불리우다가 남송시기 운광이라는 고승의 설법에 의해 우화대(雨花臺)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되고, 력래로 풍경명승구로 이름이 났었지만 구중국의 어두운 시절에 우화대는 국민당반동파 등이 우리 혁명지사들을 학살하는 형장으로 살풍경을 이루며 수많은 선렬들의 피로 물들어갔다. 그러니 답사의 발길이 우화대로 돌려지는데 우화대답사에서 흥미로운것은 당지 사람들이 자기로 채집한 우화석을  담아다가 파는것이라 할까. 자연우화석은 자름자름한 마노들이고, 수마가 잘되고, 문양이 천태만상을 이룬 색채석이여서  대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우화석을 파는 사람들은 흔히 농촌에서 왔다는 아낙네들이 아니면 50~60대의 남성들이라, 물어보니 강돌이 아니라 땅속의 자갈층에서 캐낸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수석이란 개념조차도 모르던 시절이여서 땅속에 이런 자연우화석이 있다는것이 그리도 신기할수가 없다. 값을 물으니 우화석 하나가 보통 1원 사이, 나는 문양이 환하고 반들반들한 우화석 몇점을 골라잡았다. 그때의 우화석은 모두가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형태의 우화석들이였다. 수석을 모르며 재미로 느끼던 시절의 일로서 그래도 굳이 나 수석의 어섯눈이요, 첫걸음이라 함은 수석으로 이어지는 자연우화석의  첫 이해요, 첫 인상이요, 첫 구입이였기 때문이다. 우화석은 세계 수석가운데의 진귀한 품종으로서 주요성분은 천연 꽃마노석이고, 250만년전~150만년전에 형성, 강소 의정이 주요산지라고 알려진다. 그만큼 우화석의 력사도 유구한데 남경의 음양문화유적지에서 우화석과 우화석으로 만든 장식픔들이 발견되였다는 것으로 보아 5000여년전 고인류시절에 이미 우화석이 개발되였음을 알수가 있다. 당송이후에 이르러 우화석은 문인들의 글속에 자주 나타나는데 남송시기의 신화이야기가 그러하다.   남송 량무제시절에 고승 운광법사가 석자강에서 설법하매 그 정성에 하느님이 감동되여 꽃비를 내리니 꽃비가 땅에 떨어져 오색석자(五色石子)가 되였더라.   그로부터 우화대, 우화석이라는 부름이 생겨나 오늘에 이르렀다. 근대이후 우화석은 보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예술대사들인 서비홍, 매란방 등이 우화석을 무척 즐기였다고, 주은래총리도 일찍 남경 매원 시절에 우화석을 사랑한 나머지 질그릇에 잘 모시였다고 한다. 최초에 사람들은 우화(雨花)형태의 마노석을 우화석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우화대계렬의 자갈층에서 채집하는 자갈들을 어우러서 우화석이라고 부른다. 이런 우화석이 지난 80년대 초 이후 시골의 농민들이 조금씩 광주리에 담아다 팔던데로부터 지금은 우화대 안팎이 우화석시장을 이루어 흥성의 일로를 걷고있다. 내가 내눈으로 보아온 우화석팔기의 어제와 오늘이다. 25년이 지난 11월 중순에 나는 다시 남경우화대에 발길을 돌리면서 받은 인상인데 오늘의 우화석은 거개가 인공으로 다듬어져 하나에 5원~10원, 몇십원, 몇백원에 팔리고 있었다. 진귀한 우화석은 그 값이 얼마인지 모른다. 아무렴은 어떠랴, 1983년 남경우화대 첫 답사는 나더러 세상에 우화석이 있다는것을 알게 하고 나 수석사의 첫 걸음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니.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남경우화대를 거닐며 감개무량한 나머지 25년전의 우화대를 떠올려보며 남경우화석이 나 수석사의 첫걸음이였다고 자랑스레 말하며 이 글을 “나와 수석”의 첫 글로 쓰게 된다.   2008년 12월 9일, 소흥에서                                        
204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4) 댓글:  조회:4571  추천:68  2008-12-07
무엇 때문에 남방 지역에 수석이 상대적으로 더 많을까요? 이는 자연지리환경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황하 등 북방의 강들은 황토고원처럼 돌이 적고 흙이 상대적으로 많으며 돌이 있다해도 물살이 급하지 않은 지역을 경과하다보니 수석이 적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장강 등 남방의 강들은 세계적으로 해발이 제일 높은 청장고원에서 발원하여 급속도로 줄기찬 물살을 타고 하류에로 흐르고 있으며 또 강 연안에는 황토고원과는 달리 많은 암석들이 있기에 홍수 때마다 수없이 많은 돌들을 하류에로 굴러내려가게 합니다. 그 과정에 각종 성분을 가진 암석들이 여러가지 형태로 마모되면서 오늘 우리가 볼수 있는 기석으로 된 것입니다.     이건 단지 저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오니 여러분들의 고견을 바랍니다.
203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3) 댓글:  조회:4673  추천:76  2008-12-06
 오늘부터 10일간 중경전람센터(会展中心)에서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행사가 있게 됩니다. 중국 남방지역 성시들로는 중경, 사천, 운남, 귀주, 호북, 광동, 광서 등 성,시들이 참가했고 북방지역에서는 신강, 산동성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의 먄마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전시장 내 400여개 부스가 거의다 찰 정도로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수석과 근예(根艺)작품들을 돌아보면서 160여장의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빙산일각(冰山一角)에 불과합니다. 이 사이트에 사진을 등록하는 기술이 없어 한번에 겨우 10장 정도밖에 올릴수 없는데 오늘은 먼저 사진 찍은 순서대로 30장을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흥취가 있으시면 몇번 더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2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2) 댓글:  조회:4548  추천:83  2008-12-06
 오늘부터 10일간 중경전람센터(会展中心)에서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행사가 있게 됩니다. 중국 남방지역 성시들로는 중경, 사천, 운남, 귀주, 호북,광동, 광서 등 성,시들이 참가했고 북방지역에서는 산동성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의 먄마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전시장 내 400여개 부스가 거의다 찰 정도로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수석과 근예(根艺)작품들을 돌아보면서 160여장의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빙산일각(冰山一角)에 불과합니다. 이 사이트에 사진을 등록하는 기술이 없어 한번에 겨우 10장 정도밖에 올릴수 없는데 오늘은 먼저 사진 찍은 순서대로 20장을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흥취가 있으시면 몇번 더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1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댓글:  조회:4652  추천:66  2008-12-06
  오늘부터 10일간 중경전람센터(会展中心)에서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행사가 있게 됩니다. 중국 남방지역 성시들로는 중경, 사천, 운남, 귀주, 광동, 광서 등 성,시들이 참가했고 북방지역에서는 산동성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의 먄마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전시장 내 400여개 부스가 거의다 찰 정도로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수석과 근예(根艺)작품들을 돌아보면서 160여장의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빙산일각(冰山一角)에 불과합니다. 이 사이트에 사진을 등록하는 기술이 없어 한번에 겨우 10장 정도밖에 올릴수 없는데 오늘은 먼저 사진 찍은 순서대로 20장을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흥취가 있으시면 몇번 더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0    【탐석기】탐석도 하고 항주도 지나보고 댓글:  조회:5366  추천:55  2008-12-04
               탐석도 하고 항주도 지나보고   절강안휘 접경지대  첩첩산구에서 하루밤 떨고나니 이튿날 새날이 밝아온다. 련일 해맑은 날씨더니 이 아침은 첫 된서리가 대지를 강타하며 강남땅은 사정없이 찬기운을 토해낸다. 그래도 아침해가 하루길을 달리며 찬기운을 발뼘발뼘 몰아내니 따스함이 대지를 포근히 감싸 안는다. 우리는 다시 새날의 탐석에 나서 보았다. 탐석지는 산과산 사이를 흘러내리는 림천하가 아닌 절서대협곡 어구 룡강진 부근으로 잡아졌다. 절서대협곡의 어구 길가 대나무림을 배경으로 김봉세 부부를 사진속에 잡아두니 뒤날 강남땅 탐석기념은 되리라~그러니 마음이 훈훈해 난다. 강가에 이르니 파릇파릇 가을달래가 한창이여서 강남땅의 풍취를 더해준다. 대협곡 어구구간은 어딜보나 대나무숲이요, 흰머리를 떠인 가을 억새밭이 한창이다. 끝도 모르는 돌밭이 펼쳐져 기대가 앞서간다면 대협곡을 훑어내린 큼직큼직한 돌들은 너무도 수마가 잘되여 경탄뿐이다. “이런 엄청난 돌들까지 둥글둥글 모양이니 그 력사가 수백수천만년은 잘 될것 같소.” “글쎼, 대자연 대협곡의 힘이란 참 신비도 하지. 둥글둥글 큰돌들이 어쩌면 여기까지 굴러 왔을가?!” 나와 김봉세 부부는 너한마디 나한마디 주고받으며 돌밭을 누비였다. 수메터 높이를 가진 강변 언덕받이나 저쪽 두가닥 강물의 합수목 구간 언덕받이나 하나같이 한층 또 한층의 둥그런 돌과 흙으로 그 형성역사의 유구함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때였다. 큼직한 둥그런 돌들사이 바닥에 차돌같은 맞춤한 돌하나가 보이는데 한쪽면이 잘 썩어있었다. 틀림없는 명석이라 제꺽 주어들고 보니 앞뒤가 모두 썩은 흰돌이다. 인공으로 조각한 섬세한 조각품 같았다. 북경이나 심양 청나라 고궁의 돌조각품과 진배 없다. 나는 하마트면 “수석 한점 주었소!”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래 하늘이 무심하지야 않겠지. 어제 이른 새벽에 강남땅에 와서 첫 별밝은 하늘을 보았는데 몰라 줄수가 있을까!” 나는 희열속에 빠져 들었다. 잇따라 층암절벽을 감도는 뭉게뭉게 흰구름떼를 련상시키는 소품 한점이 나를 불렀다. 룡강진 부근에서는 우주의 중심이런듯한 복판이 도드러진 소품 한점이 또 나를 빠끔히 올려다 본다. 그래서 지난해 11월에 달리는 버스로 절서대협곡을 지나며 본 거대 돌밭에 무엇인가 숨어 있는것 같아 그리도   다시 오고 싶어 김봉세 부부 동반으로 달려온 내가 아니던가. 그래도 나는 이 기쁨을 활 들어낼수가 없었다. 어제와는 달리 김봉세 부부가 절서대협곡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수석 한점을 주어들지 못했는데 나 혼자만 좋다고만 할수도 없지. 오후 일찍 서둘러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대소 버스를 세번 갈아타며 항주에 이르매 항주서역이라, 항주서역에서 항주동역으로 달리는 먼 구간은 항주시내 구경이 제격이다. 뽕도 따고 님도 본다더니 수석도 탐석하고 아름다운 항주도 지나보는 탐석의 하루가 소리없이 흘러간다.   2008년 11월 29일, 소흥에서                                                                                
199    【탐석기】절강안휘 변계에 탐석의 자취 남기다 댓글:  조회:5289  추천:59  2008-12-03
            절강안휘 변계에 탐석의 자취 남기다     여느 때와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 6층 아빠트 창문가로 다가가니 새벽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어둠이 깔린 이른 새벽의 공기속을 헤치노라니 삼태성을 망라한 겨울철 대6각형이 서남~서북 하늘에 걸쳐  누워있고 정동쪽의 높이 25도 쯤 되는 하늘엔 봄철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목동자리의 1등성—아르크투르스가, 동남쪽 높은 하늘엔 봄철의 별자리 사자자리가, 서북쪽 높은 하늘엔 북쪽하늘의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유난히 빛나고 있다. “오늘은 구름 한점 없는 해맑은 날씨겠구나. 저 하늘에 숱한 1등성과 2등성의 별들이 빛나는 것을 보면 이제 가는 탐석길에 행운이 깃들것 같고!” 벌써부터 마음이  둥둥 뜬 나는 상해의 아들집으로 왔다가 소흥의 나한테로 온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 리분녀 부부와 같이 아침 일찍 서둘러 소흥의 뻐스중심부로 갔고 오전 7시반 뻐스를 잡아타고 절강~안휘 접경지대의 절강땅 림안시 룡강진으로 달리였다. 지난해 11월 황산행에서 룡강일대의 수석탐석지를 보아내고 뒤미처 나 홀로의 탐석길에 오른 후로 두번째 절강 룡강 탐석길이였다. 김봉세회장은 당신이 있어 상해서 소흥에 왔고 강남땅 절강에서 탐석할수 있게 됐다며 감개무량. 그속에 항주의 전당강를 지나고 서호가의 륙화탑을 지난다. 몇시간만에 근 500리밖의 절강 룡강 구내에 다달으니 주위세계는 온통 푸르른 산들이요, 림천강에 맑디맑은 물 흐른다. 근근히 1년후의 두번째 걸음인데 우리의 경탄을 모으는 림천강 돌밭은 완전히 바뀌여져 있었다. 분명 올해 봄과 여름사이 큰물이 졌음을 단적으로 알리는 눈앞 현실이였다. 나는 림천강을 가로탄 고속도로 다리구간에서, 김봉세부부는 다리 아래 구간에서 탐석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탐석이, 그것도 내 고향 연변이 아닌 강남땅 절강에서 탐석한다는 것이 신나기만 하다. 화창한 봄날이련듯 따스한 11월의 태양아래 우리는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어느덧 김봉세씨는 산수석 한점 주어들고 안해되는 분은 호수석 수석 한점을 주어들고 희열을 감추지 못한다. 나도 점점이 박힌 문양석 한점과 산수석 한점을 주어들었지만 그다지 한다하는 수석은 되지 못한다. 이 두점조차 버리니 맹랑한것은 나 혼자뿐, 그래도 기분은 좋아 등산이 울고간다, 여행이 울고간다며 코노래가 절로 난다. “하느님이 공평하지 못하구만. 북방땅엔 눈내리는 벌거벗은 대지를 주고, 강남땅엔 한겨울 모르는 푸르른 산천을 주니 말이요.” “하하하” “호호호” 우리 셋은 하느님 타령에, 북방~강남 타령에 한바탕 웃음판을 터뜨렸다. 저녁은 따스하던 한낮과는 전혀 딴판이다. 겨울옷까지 주어입었는데 온몸이 오싹오싹해 난다. “이거, 북방의 겨울이 시샘하여 강남땅을 휩쓰는것이 아니오?” 나는 강남땅 두번 겨울철에 이런 추위 몰랐다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러니 주숙지 방은 더 썰렁하여 옷을 몽땅 주어입고 이불속에 누워도 찬기운만 랭랭하다. 어이유, 누가 알았으리오, 여기는 소흥이 아닌 황산 가까이 해발 1800여메터 청량산 아래 첩첩산구여서 제법 추위를 부른다는것을--- 어이유, 누가 알았으리오, 별들이 총총한 새벽날씨 이미 절강땅 첫 된서리를 잉태하고 있었다는것을---   2008년 11월 28일, 절강 룡강에서                                                                              
198    신철호님이 보내온 한국 야유회사진 댓글:  조회:4516  추천:64  2008-12-03
         신철호님이 보내온 한국 야유회사진   12월 1일 한국에 박사공부를 간 신철호님이 11월 21일 동료들간 야유회 사진 5장을 보내 왔습니다. 먼저 올린 잡문과 함께 보내온 사진입니다. 신철호님의 우리 수석회 코너 활약이 돋보입니다.
197    【잡문】565님에게 이그노벨상을 (신철호) 댓글:  조회:4847  추천:67  2008-12-01
                      565님에게 이그노벨상을       이그노벨상은 미국의 과학잡지 《기발한 연구연보》의 발행인  에이브러햄스가 과학계의 엄숙주의를 비판하여 1991년 제정한것인데 ‘이그(Ig)’는 ‘형편없는(Ignoble)’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말이라고 한다. 이 상은 진짜 노벨상과는 달리 상금이 한 푼도 없지만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자비(自費)를 들여 시상식에 참가할 정도로 권위가 있다고 한다.      이 상은 매년 노벨상 수상이 끝난 후에 “다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될” 기발한 연구나 업적에 수여하는데 그 업적이라는것이 처음엔 사람들을 웃게 만들지만 나중에는 꼭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들이라,  한마디로 노벨상을 빗대어 만든 ‘엽기 노벨상’이다.     2008 이그노벨상 수상작은 아래와 같다.     물리학: ‘머리카락과 실이 복잡하게 얽혀 매듭이 되는 이유’     화학: ‘코카콜라의 피임 효과에 관한 연구’, ‘콜라는 피임 효과가 없다는 연구’     영양학: ‘듣기 좋은 과자 씹는 소리가 과자를 더 맛있다고 믿게 만드는 심리학 연구’     생물학: ‘개에 기생하는 벼룩이 고양이에 기생하는 벼룩보다 더 높이 뛰는 이유’     의학: ‘비싼 가짜 약이 싼 가짜 약보다 효능이 더 좋다’     인지과학: ‘퍼즐 푸는 점균(粘菌)류 발견’     평화: ‘식물의 존엄성 인정 법안 통과’     고고학: ‘아르마딜로의 활동으로 뒤범벅되는 고대 유물 연구’     경제학: ‘스트립댄서의 생식주기와 수입 간의 관계’     문학: ‘조직 안에서 내뱉는 모욕적인 화술에 대한 탐구’        한국 동아일보의 2008년10월 4일 보도에서는 올해 이그노벨상 평의이유를 이렇게 소개했다.   ……    10개 분야에 이르는 올해 수상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화학상. 이그노벨상 수상자 선정위원회는 올해 최고의 엽기 화학 연구자로 미국 보스턴대 의대 데버러 앤더슨 교수와 연구진을 선정했다. 그들은 코카콜라, 특히 다이어트 콜라에 정자를 죽이는 살정제(殺精劑)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 의학전문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에 발표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앤더슨 교수는 “상을 받아 매우 흥분된다”면서도 “하지만 코카콜라를 마셔서 피임하는 방법은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선정위원회 측은 또 같은 주제의 연구지만 ‘코카콜라에 피임 효과가 없다’는 상반된 연구결과를 내놓은 대만 타이베이의대 연구진도 화학분야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외신에 따르면 코카콜라 측은 이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이그노벨 의학상은 좀 더 비싼 가짜 약이 싼 가짜 약보다 효능이 좋다는 연구 결과를 낸 미국 듀크대 댄 아릴리 교수에게 돌아갔다. 아릴리 교수 연구팀은 환자들이 복제약도 이름과 포장이 고급스럽게 보일수록 효능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실제 임상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미국 뉴멕시코대 심리학과 제프리 밀러 교수와 제자들은 스트립댄서가 가임(可姙) 능력이 정점에 이를 때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을 규명한 연구로 이그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밀러 교수에 따르면 여성은 가임기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며 실제 여성 스트립댄서 1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가임기 수입이 평소보다 80% 이상 늘어난다는 결과를 확인했다. 이 밖에 영국 옥스퍼드대 심리학과 찰스 스펜스 교수는 ‘바삭’ 소리가 좋은 감자칩이 맛도 더 좋다는 연구로 영양학상을, 프랑스 툴루즈 국립수의대 마리크리스틴 카디에르게, 크리스텔 주베르, 미셸 프랑 교수는 ‘개에 기생하는 벼룩이 고양이에 기생하는 벼룩보다 더 높이 뛰는 이유’를 규명해 생물학상을 받았다.      …… 하여튼 륙대주 넓은 세상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살아가니 순전히 장난질같은 어런저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미있는 일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난다. 참으로 오색(五색)만 찬란한 세상이  아닌듯 하다.  우리가 살고있는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그노벨상감으로 될만한 “연구결과”들이 수두록하다. 다만 “장난질”로 취급하거나 또는 “형편없는”것으로 알고 아예 시야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인상에 없을 뿐이다.     사람들은 사람몸에 기생하는 이중에서 머리의 이가 몸의 이보다 허리가 더 길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를 연구한다면 아마도 ‘개에 기생하는 벼룩이 고양이에 기생하는 벼룩보다 더 높이 뛴다’는 견해에 짝지지 않아서 당연 뛸데 없는 이그노벨상 감이다.     도문시에 있는 도훈도로어구에 근육이 울퉁불퉁한 두 라체력사(裸体力士)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상하게 남자의 그 상징물이 없다. “기발하게” 생각해보면 “상징물이 없는 남자가 상징물이 있는 남자보다 더 멋지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라체력사 조각상이 이 해석을 말없이 증명하였으니 가히  ‘비싼 가짜 약이 싼 가짜 약보다 효능이 더 좋다’는 관점을 밀어버리고 이그노벨상 의학상을 탈 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2008년 11월 12일에 조글로(www.ckywf.com)의 두만강수석회 코너에 아호(雅號)가 565인 어떤 “평론가”가 수석을 평한 글을 올렸는데 간단명료하기로 천하명작이다.    “十漢놈”.     중국 사람들은 생활속에서 터득한 철리들을 기껏 함축하여 사자성어(四字成語)로 표현하였는데 565께서는 사자성어보다 한 글자가 적은 단 세 글자로 자기의 풍부한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뭐 일본의 한 유명한 시인이 후지산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면서 “아-”하고 한마디를 길게 웨쳤다고 하는 말을 풍문삼아 귀가 아프게 들어온 일이 있는데, “十漢놈”이나 “아-”나 다들 함축성이 극치를 이루는 표현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겠다.     무조건 길게 써야만  문장이며 장문이여야만 내용이 풍부하겠는가?  “조직 안에서 내뱉는 모욕적인 화술에 대한 탐구”가 도대체 어느만큼 긴지 알 길이 없다만 암만 봐도 두 나라 언어로 된 565의 “삼자성어”보다는 별로 풍부한 뜻을 담은것같지 않다. 다 같이 화술에 관련되는 현상이니 래년에는 함축성이 있는 표현의 백미라는 리유로, 두 나라 언어의 창발적인 사용이라는 리유로  565의 “삼자성어”를 2009년 이그노벨상 문학상에 추천하여야 할 것 같다.                                                                                                    2008년 12월 1일              
196    【기행】김봉세 부부 로신옛집 답사기 댓글:  조회:4776  추천:62  2008-11-30
   【기행】                김봉세 부부 로신옛집 답사기 렬차로 상해를 떠난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 리분녀 부부가 절강 소흥역에 내린 시간은 11월 27일 오후 2시쯤이다. 소흥역으로 마중을 나가니 김봉세회장은 오후 시간도 있고한데 로신선생의 옛집을 찾고싶다고 속셈을 터놓는다. 김봉세 부부를 안내한 소흥의 로신옛집 답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소흥의 로신선생 옛집은 소흥시 해방남로 로신거리에 위치. 로신의 옛집, 조부네 옛집, 백초원, 어린 시절 공부하던 삼미서옥, 로신동상광장 등으로 이루어지고 국가급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받들리고 있는 현실. 우리가 로신 옛집 거리에 들어서자 목요일 오후인데도 유람객들이 련속부절히 밀려 들어 일대 풍경을 이룬다. 우리가 선참 발을 들여놓은 곳은 로신선생이 어린 시절 글을                 읽었던 삼미서옥이다. 삼미서옥에서도 어린 로신이 앉아 공부하던 책상과 걸상이 인상적이여서 김봉세회장은 련속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김회장은 세월이 흐른다음 남는것은 사진 뿐이라며 삼미서옥에 무척 흥미를 가지였다. 이어 우리는 그    옛날 시절에도 흔치않은 로신의 조부네 옛집—주가로대문과 로신의 옛집—주가신대문을 돌아 보았다. 로신선생이 소흥의 주씨네 명문대가에서 태여나 자라남이 알리는 력사의 현장이라 김회장은 소흥에 와서 로신의 옛집을 찾을줄 어찌 알았겠느냐며 로신선생이 어린 시절 뛰놀았다는 로신옛집내 안뜰의 백초원에서 인츰 떠날줄 모른다. 로신선생에 대해 남다른 지식을 가진 김회장이 돋보이는 순간이였다. 답사의 발걸음은 나중에 로신옛집 구내 로신기념관으로 이어졌다. 로신기념관은 2004년의 건축물로서 로신 조부네 옛집과 로신옛집 사이에 위치, 전체 면적이 5500여 평방미터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 기념관 보다 두배 남짓히 크다고하는데 강남의 전통적 풍격으로 지어진 기념관 정면에는 곽말약선생의 필체로 된 “소흥로신기념관” 금빛글자 일곱자가 유난히 눈부시었다. 2층으로 된 로신기념관에 들어서면 로신선생의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사망후의 이모저모 추모사진과 글, 인물형상화, 멀티미디어 등이 현대진렬수단으로 잘 나타나 있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것은 로신의 어머니 로서사진과 로신선생의 원 부인 주안의 사진이라 할까. 로신선생의 어머니 로서는 1857년생 소흥출신으로서 결혼하여 주씨댁에 들어서니 남편되는 사람은 수재이고 시아버지는 한림 출신으로서 소흥의 이름난 명문대가였다. 그러나 시아버지 주복청은 북경에서 관리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과거시험 회뢰사건에 휘말려드는 신세. 그 영향으로 로신의 아버지 주백이는 과거출세 희망이 끊기고  화병으로 페병에 걸려 가산을 탕진하고 만다. 1896년에 남편이 끝내 병사한후 로서는 아이 넷을  데리고 어려운 가정의 중임을 떠메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아들 로신이 남경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하자 로서는 장신구까지 팔아가며 백방으로 8원을 갖추어 주고 로신이 후에 일본류학길에 오르자 또 온힘을 다해 받들어 준다. 로신 어머니의 잠간 스케치라 하겠다. 그만큼 로신은 어머니께 효도를 하며 어머니의 성씨 따라 필명을 로신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어머니건만 로서는 아들의 결혼문제에서는 치명적 오유를 빚어내고 만다. 로신한테는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외삼촌의 딸 금고가 있었는데 두집 사이에 언약까지 한 사이면서도 로서는 금고가 양띠라고, 녀자가 양띠면 남편을 먼저 죽이는 살이라고 오래동안 정식청혼을 미루기만 한다. 화가 난 로신의 외삼촌은 딸 금고를 다른 남자한테 시집 보낸다. 결국 금고는 우울증으로 앓다가 죽는다. 1898년 5월, 로신은 남경에 가서 선후로 남경강남수사학당, 강남륙사학당 부설 광로학당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이 기간인 1901년 4월 로서는 아들 로신과의 말도 없이 주안이라는 처녀를 며느리감으로 정하게 된다. 하나 로신은 주안과의 결혼을 반대하며 1902년 3월에 일본류학길에 오르고만다. 그러다가 로신이 일본녀자와 결혼했소, 아이를 낳았소 등 풍문이 들리자 모친의 병이 위독하니 급히 귀가하라는 급전을 보내게 되고 로신은 소흥에 돌아와 구식결혼에 맞띠우고 구식결혼에 응할수 밖에 없다. 혼례식 날 저녁 로신은 신방에서 온밤 울다가 나흘후 일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후 로신선생은 8년 일본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경의 중앙교육부에 취직하다가 교육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고 북경녀자사범학당(후에 북경녀자사범대학으로 개칭)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5년 10월에 녀학생 허광평과 사랑관계를 맺게 되고 같이 생활한다. 유감이라 할까, 로신은 시종 주안과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파혼하지 않은 채 시종 어머니와 주안과 더불어 한집에서 생활하나 로신은 로신대로 허광평과 부부생활, 주안은 처녀로 늙어야만 한다. 여러 자로를 통해 보는 로신의 어머니 로서와 원 부인 주안의 개략 소개이다. 주안의 사랑비극이 애절하여, 로신 어머니의 극단 봉건조치가 안쓰러워 우리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가, 로신기념관 답사를 마치고서도 로신 어머니와 원 부인 주안의 사진인상이 머리를 감돈다. 로신옛집 답사는 깊은 인상속에서 끝나간다. 김봉세회장은 항주까지 다녀가도 소흥은 거치게  되지 않는데 나 덕분으로 소흥 로신옛집을 찾아 보았다며 무척 감회에 젖어든다. 어린 로신이 할머니한테서 옛말 듣는 모습을 형상한 동상앞에서 유머동작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회장안해 리분녀의 모습도 그러하다. 로신옛집 방문이 주는 인상이 너무나도 큰가부다.   2008년 11월 30일, 소흥에서                                                    
195    【우리 만남】리흥국부장과의 여객기 만남 댓글:  조회:3629  추천:52  2008-11-30
 【우리 만남】              리흥국부장과의 여객기 만남     11월 21일 누나 딸--조카 최련의 결혼으로 급히 연변행에 올랐다가 11월 24일 오후 귀가길에 연길 공항에서 연길~상해 남방항공 여객기 CZ 6552에 올랐다. 뜻밖에도 현임 주당위 리흥국선전부장이 앞줄에 앉아있질 않는가. 공무로 연변방송텔레비총국 국장 등과 함께 상해로 떠나는 걸음이였다. 우린 뜨거이 악수를 나누었다. 돌이켜보면 2006년 6월 제1차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이후 다시 만나지 못하였으니 옹근 2년여 후의 만남이다. 나와 리흥국부장과의 인연회억이 지난 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오른다. 1982년 7월에 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서 근무하다가 1984년 6월에 연변일보사로 전근하여 편집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 시절에 리흥국부장은 연변텔레비 뉴스부주임으로 뛰고있었다. 기자라는 동행인으로 우린 서로 알게 되였지만 만나면 서로 인사나 나누는 인연이라 할까. 그후 리흥국부장은 연변주위 선전부로 전근하였다. 그에 앞서 나도 주위선전부로 전근할 기회를 가지였으나 기자, 학자로의 소신을 확고히 가진 나는 그번 기회에 응하지 않았다. 그후 리흥국부장은 백산호텔관련 무슨 책임부서로 뛰다가 연변방송텔레비 총국 국장, 주심계국 국장으로 정무에 나서게 되였다. 이 과정을 쭈욱 지켜보던 내가 두만강 수석회를 조직하면서 리흥국부장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2004년 7월 28일은 우리 연변 문인수석인들로 말할 때 잊을수 없는 날이라고 할수 있다. 시인 김학송씨와 나 김봉세 등의 발기와 노력으로 이날 우리는 연변텔레비 리흥국국장 사무실에 모여앉아 문인수석인들의 자발적인 모임—두만강수석회를 선포하게 되고, 리흥국국장, 연변방송국 김대현 전임국장, 김학송시인, 김철학시인, 신철호선생, 생활안내 한태익주필, 김봉세씨 그리고 나 등 여럿이 모여 앉았었다. 그날 모임에서 김대현선생이 고문으로, 리흥국국장이 초대회장으로, 김학송씨가 부회장으로, 내가 총무로 추대되였다. 수석회의 일상사무와 활동은 내가 책임지고 내밀었다. 그때부터 나와 리흥국국장과의 인연은 깊어졌고 일이 있으면 우린 수시로 만나는 허물없는 사이, 수석탐석에 같이 나서기도 하였다. 둘 다 동갑나이 말띠라지만 우린 습관상 “예. 예” 사이, 지금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 인연은 서로 부부사이에서도 통하고있다. 리흥국부장의 안해 리화옥씨나 우리 부부간은 연변일보사 시절 동료여서 서로 알고지내고있는 사이다. 그런 고로 안해는 내가 절강으로 온후 나의 부탁으로 나의 력사저서 여러 책을 리흥국부장댁을 찾아 직접 전하면서 리화옥씨와 회포를 나누기도 하였다. 리흥국부장과의 인연에서 보다 인상 깊은것은 두가지라 하겠다. 서로간의 인연속에서 나는 리흥국부장이 독실한 수석인일뿐만아니라 사진촬영에도 짙은 취미를 가지어 사진설비들을 두루 갖추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던 2006년 4월의 봄날에 주심계국 국장으로 뛰던 리흥국국장은 연길시 평봉산아래에 진달래동산이 있다는 나의  말을 듣고 들놀이를 가자고 청을 들었다. 그래서 리흥국국장과 김대현 전임방송국 국장, 시인 김철학씨, 나 넷이 평봉산아래 진달래동산을 찾게 되였다. 그날 우리 넷은 평봉산 진달래동산에서 맘껏 즐기다가 평봉산의 옛 장성터를 돌아보기도 했는데 리흥국국장은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 리흥국국장이 찍어준 사진은 우리 문인들 사이 하나의 추억사진으로 남게 되였다. 수석이라는 공동한 취미생활로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 다음은 2006년 6월의 제1차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다. 리흥국 주심계국 국장의 노력과 후원 역할로 우린 그해 6월 8일, 생각했으나 행동에 옮길수 없었던 두만강수석전시회를 연변박물관과의 합작속에서 연변박물관 2층홀에서 성황리에 가지였는데 전시된 두만강수석 100여점, 연변수석문화전파에 거대한 기여—이 모든것은 리흥국국장이 헌신적 노력의 결과였다. 그번 두만강수석전시회기간 리흥국국장은 정무관계로 더는 수석회 회장책임을 리행할수 없다면서 전문 회의를 부르고 나를 제2임 수석회 회장으로 추천하였다. 문인회원들의 만장일치로 나는 이렇게 제2임 수석회 회장으로 나서게 되였다. 그후 리흥국국장은 중공연변주위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승진하고 나는 몇달후 2006년 9월에 절강월수외국어대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다. 상해발 남방항공 여객기 회억속에서 여객기는 어느덧 산동 연태에 착륙하였다. 그 휴식시간이 40분, 나와 리흥국부장은 연태공항 휴계실에서 두만강수석회를 둘러싸고 잊지 못할 상봉의 인연을 나누었다. 나를 수행동료들에게 “이름난 조선족력사학가”라고 소개해주는 리흥국부장이 고마왔고, 댁에도 아무때나 전화하라는 리흥국부장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여객기는 다시 리륙, 오후 7시지나 상해 홍교공항에 무사히 이르렀다. 우린 이후의 상봉을 기약하며 다시다시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상해발 여객기에서의 우리 만남,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리흥국부장과의 만남이였다.                                                     2008년 11월 27일 오전, 절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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