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석】(1)
우화석—나 수석사의 첫걸음
2008년 11월 하순,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회장 부부와 더불어 절강안휘 접경지대 수석탐석에 다녀온후 기분이 류다르게 짱이다. 돌이켜보면 김봉세회장과 나 둘만의 첫 수석탐석은 10년전으로 거스르는데 수석으로의 어섯눈은 그보다 훨씬 앞선 지난 80년대 초반 남경우화석이 시작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25년전인 1983년 5월 나는 행운스럽게도 남경우화대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이듬해이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나와 당사연구실의 왕청산선배는 장강이남 겨레발자취답사길에 올랐었다. 상해, 소주, 남창, 구강 등지를 거쳐 남경에 이르렀는데 남경에서의 답사는 남경의 중산릉과 우화대로 이어졌다.
그시절 30대 문턱을 바라보는 열혈의 나에게 있어서 남경하면 선참 떠오르는것이 우화대였다. 옛날의 우화대는 석자강(石子岡), 마노강, 취보산 등으로 불리우다가 남송시기 운광이라는 고승의 설법에 의해 우화대(雨花臺)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되고, 력래로 풍경명승구로 이름이 났었지만 구중국의 어두운 시절에 우화대는 국민당반동파 등이 우리 혁명지사들을 학살하는 형장으로 살풍경을 이루며 수많은 선렬들의 피로 물들어갔다. 그러니 답사의 발길이 우화대로 돌려지는데 우화대답사에서 흥미로운것은 당지 사람들이 자기로 채집한 우화석을 담아다가 파는것이라 할까.
자연우화석은 자름자름한 마노들이고, 수마가 잘되고, 문양이 천태만상을 이룬 색채석이여서 대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우화석을 파는 사람들은 흔히 농촌에서 왔다는 아낙네들이 아니면 50~60대의 남성들이라, 물어보니 강돌이 아니라 땅속의 자갈층에서 캐낸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수석이란 개념조차도 모르던 시절이여서 땅속에 이런 자연우화석이 있다는것이 그리도 신기할수가 없다. 값을 물으니 우화석 하나가 보통 1원 사이, 나는 문양이 환하고 반들반들한 우화석 몇점을 골라잡았다. 그때의 우화석은 모두가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형태의 우화석들이였다. 수석을 모르며 재미로 느끼던 시절의 일로서 그래도 굳이 나 수석의 어섯눈이요, 첫걸음이라 함은 수석으로 이어지는 자연우화석의 첫 이해요, 첫 인상이요, 첫 구입이였기 때문이다.
우화석은 세계 수석가운데의 진귀한 품종으로서 주요성분은 천연 꽃마노석이고, 250만년전~150만년전에 형성, 강소 의정이 주요산지라고 알려진다. 그만큼 우화석의 력사도 유구한데 남경의 음양문화유적지에서 우화석과 우화석으로 만든 장식픔들이 발견되였다는 것으로 보아 5000여년전 고인류시절에 이미 우화석이 개발되였음을 알수가 있다. 당송이후에 이르러 우화석은 문인들의 글속에 자주 나타나는데 남송시기의 신화이야기가 그러하다.
남송 량무제시절에 고승 운광법사가 석자강에서 설법하매 그 정성에 하느님이 감동되여 꽃비를 내리니 꽃비가 땅에 떨어져 오색석자(五色石子)가 되였더라.
그로부터 우화대, 우화석이라는 부름이 생겨나 오늘에 이르렀다. 근대이후 우화석은 보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예술대사들인 서비홍, 매란방 등이 우화석을 무척 즐기였다고, 주은래총리도 일찍 남경 매원 시절에 우화석을 사랑한 나머지 질그릇에 잘 모시였다고 한다.
최초에 사람들은 우화(雨花)형태의 마노석을 우화석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우화대계렬의 자갈층에서 채집하는 자갈들을 어우러서 우화석이라고 부른다. 이런 우화석이 지난 80년대 초 이후 시골의 농민들이 조금씩 광주리에 담아다 팔던데로부터 지금은 우화대 안팎이 우화석시장을 이루어 흥성의 일로를 걷고있다. 내가 내눈으로 보아온 우화석팔기의 어제와 오늘이다. 25년이 지난 11월 중순에 나는 다시 남경우화대에 발길을 돌리면서 받은 인상인데 오늘의 우화석은 거개가 인공으로 다듬어져 하나에 5원~10원, 몇십원, 몇백원에 팔리고 있었다. 진귀한 우화석은 그 값이 얼마인지 모른다.
아무렴은 어떠랴, 1983년 남경우화대 첫 답사는 나더러 세상에 우화석이 있다는것을 알게 하고 나 수석사의 첫 걸음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니.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남경우화대를 거닐며 감개무량한 나머지 25년전의 우화대를 떠올려보며 남경우화석이 나 수석사의 첫걸음이였다고 자랑스레 말하며 이 글을 “나와 수석”의 첫 글로 쓰게 된다.
2008년 12월 9일, 소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