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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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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614 ]

254    증봉산-로리커호 종주(09.10.16~18) 댓글:  조회:4549  추천:45  2009-10-19
2박3일 증봉산-로리커호 종주: 증봉령 올라서니 사방은 묘연하고 산아래 천둥번개 산우는 백설세계 대자연 포응속에서 발자국 남기네 심산속 원시림해 준엄한 종주의 길 차디찬 백설세례 이한몸 식지않고 미지의 힘겨운 로정 발밑에서 끝나네
253    상해 세계 박람회 맞이 수석 전시회 일각 댓글:  조회:3917  추천:49  2009-10-16
상해 세계 박람회 맞이 수석 전시회 일각
252    장백산기석문화성 락성 (최창남) 댓글:  조회:5225  추천:47  2009-10-06
장백산기석문화성 락성 기자: [최창남] [2009-10-04 오전 8:00:28] 《룡흥사관》에 전시된 가치가 1억 3000만원인 《중화룡》기석 9월 27일 장백산기석문화성이  백산시 강원구에서 락성되였다. 장백산기석문화성 부지면적은 8만 2000평방메터이고 건축총투자는 1억 949만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문화성기석시장과 지질박물관 그리고 기초시설조립이 포함된다.  문화성기석시장은 도합 308세대의 상품전시매대를 설치, 건축면적은 4만 3000평방메터이고 총 투입은 8530만원에 달한다. 주요하게 성내외의 갖가지 기석과 공예품을 경영하며 점차 광석채굴, 설계, 조각, 포장, 판매를 일체로 건설후 동북최대의 기석집산지와 공예품집산지로 부상된다. 지질박물관은 총 4층으로 건설, 건축면적은 7700평방메터, 총 투입은 2419만원에 달하는데 강원의 력사와 만족문화, 송화석산업, 지질연구를 일체로 건설후 동북지역최대의 전문성 지질박물관 및 과학연구양성기지로 부상될것이다. 이날, 장백산기석문화성이 락성되면서 북경, 산동, 호남, 내몽골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 온 300여세대의 송화석상인들이 기석, 조각 등 멋진 예술공예품들을 내놓았다. 이날 박람회에서 32가지 투자대상이 체결, 체결총금액이 34억 2000만원에 달했다.                                                           인터넷 길림신문에서
251    와룡 천리봉(09.10.2) 댓글:  조회:4160  추천:52  2009-10-02
북경에서 돌아 오신 태극님,허경리,김교수님 설산님,공원 5명은 6시30분 차로 서성에 도착하여 차를 갈아 타고 8시20분에 천리봉산밑 마 을인 어랑촌에 이르러 잠간 쉬고 곧바로 산발을 타고 등산.주봉에서흔적을 남기고 남으로 천수동림장골에 내려섰다.오다가 산머루 좀 뜯고 와룡강창을 지나 연길로 향한뻐스를 잡아타고 돌아왔다.
250    마반산(09.9.30) 댓글:  조회:4388  추천:54  2009-10-01
가을의 마반산에서
249    오봉산을 다시 찾아서(09.9.27) 댓글:  조회:4261  추천:68  2009-09-27
허경리,설산,공원 3명 참가.
248    라법산(09.9.26) 댓글:  조회:4013  추천:55  2009-09-26
도로찾은나 팀과 함께
247    오봉산에 다시 올라 (09.9.20) 댓글:  조회:4042  추천:44  2009-09-21
형제자매팀과 함께
246    석인저수지 부근의 뾰족산을 찾아서(09.9.17) 댓글:  조회:4397  추천:54  2009-09-17
7시반 이란진정부 소재지에서 출발.  리민-뾰족산 남비탈-등산-587주봉-서비탈로 하산-저수지뚝건너-서남쪽으로 몇개 산을 넘어 남계 형원산장-  2시반 리민촌 도착.
245    남도끼산<궤짝돌산>을 찾아서(09.9.12) 댓글:  조회:3721  추천:51  2009-09-12
무명팀을 만나 같이 등산.(9시~6시) 관도촌에서 산발을 잡아 동북방향으로 전진하여 남도끼봉 남쪽 바위틈을 톱아 올랐다.서쪽비탈로 하산하여 관선촌을  경과하여 동남으로 동불에 도착.
244    도문 대라자산을 찾아서(09.9.10) 댓글:  조회:4201  추천:52  2009-09-10
아침 7시 기차로 도문 . 6선차를 타고 안산촌 .안산촌 북령에서 서쪽으로 산발을 타고 대라자산에 이르러 북,남봉을 치고 남북봉 사이  서쪽 비탈로 하산.
243    모아산 야간등산(09.9.9) 댓글:  조회:4363  추천:49  2009-09-09
산우팀 5명.2시간.
242    계림동산(09.9.5) 댓글:  조회:4257  추천:49  2009-09-05
형제자매팀과 함께(8명)
241    렴명-관선-동불 산발을 타고 종주(09.9.4) 댓글:  조회:4316  추천:51  2009-09-04
아침9시-3시45분
240    93명절 모아산 유람길(09.9.3) 댓글:  조회:4169  추천:50  2009-09-03
유람객과 승용차로 붐비는 모아산공원
239    락타봉에서(09.9.2) 댓글:  조회:4599  추천:49  2009-09-03
9-1시
238    아동-대서툰구간 고장성 답사(09.9.1.)-2 댓글:  조회:4716  추천:47  2009-09-01
두만강님과 함께
237    아동-대서툰구간 고장성 답사(09.9.1.) 댓글:  조회:4375  추천:51  2009-09-01
오전8시-오후3시(7시간) 답사완성.
236    소화룡에서(09.8.30) 댓글:  조회:3962  추천:50  2009-08-30
김회장님,두만강님.박사장님,한기자님, 공원 5명 오늘 두만강수석회 즐거운 모임을 가졌다
235    태항산 청장하에도 탐석의 자취 남기며 댓글:  조회:4581  추천:35  2009-08-29
  태항산 청장하에도 탐석의 자취 남기며   8월의 태항산항일근거지 답사차 하북성 찬황현 경내 홰하에 탐석의 자취 남겨 보았더니 섭현경내를 흐르는 태항산의 청장하에도 탐석의 자취 남겨보는 취미생활 이를데 없다. 하북성 섭현의 남장촌, 하일촌, 적안촌, 중원촌, 석문촌은 그젯날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던 우리 팔로군내 조선의용군부대가 머무르던 유서깊은 마을들이다. 이런 마을들은 모두가 청장하를 사이두고 20킬로메터쯤 되는 거리에 널리여 있는데 여러 마을 변두리를 스쳐흐르는 청장하에는 청장하에 깃든 우리 조선의용군부대의 항일이야기들이 전해지는가 하면 태항산의 돌들이 잘 수마된 상태로 쫙 깔리여 탐석지로서는 제격이다. 8월 20일, 청장하 량안의 여러 마을 답사를 마치니 섭현 경내의 태항산 항일근거지 답사는 끝나갔다. 하루길을 달린 해가 서산에 걸터 앉기까지는 두세시간이 남아있고 섭현 현성과의 거리도 3킬로메터에 불과하다. 내가 청장하에서 탐석하고 싶다며 택시에서 내리니 택시운전사는 막지는 못하고 맥이 진하면 핸드폰으로 알리라고 신신당부한다. 그 소행이 고맙기만 하다. 청장하에도 찬황 홰하와 같이 엄청 크기의 모래장이 이루어져 오랜 세월속 파묻혀 있던 수마가 잘된 강변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그리도 유혹적이다. 한 조약돌의 형성이 수십수백만년 장구한 세월이라고 할때 둥글둥글, 반들반들 수마가 잘 되기까지 그 시간이 얼마랴, 이런 수마돌들이 십여메터 두께를 이루며 청장하 바닥을 덮어 나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하긴 청장하는 찬황 홰하와는 달리 태항산의 희부연 모양의 돌들로 덮이여 여러류의 수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것으로 보인다. 와중에도 각가지 문양석은 천태만상이여서 나의 마음을 다 잡기에는 족하다고 할가, 나는 어느결에 문양이 곱게 박히고 석질도 좋고 지니기에도 어울리는 수석 한점을 주어들고 기뻐 어쩔줄 몰랐다. 우리 조선의용군의 발자취 남겨진 청장하에서 탐석했다는 자체가 의미가 유달랐다. 청장하는 올해 극심한 가물에 흐르는 물 사라지고 강바닥이 드러났다. 한시간쯤 청장하를 훑다가 강바닥이 둔덕진 곳에서 다리쉼을 하노라니 팔로군 총부가 자리잡았던 적안촌이 시야에 안겨든다. 적안촌 강건너 중원촌은 조선의용군부대가 머물던 곳이라면 십리쯤 되는 강아래 오지산 기슭에는 남장촌, 하일촌이 보이여 태항산항일근거지 주체가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그에 따라 그젯날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강에서 빨래하며 물고기를 잡던 모습들이 떠오르고 장마철 강을 건너지 못하여 대안의 적안촌 팔로군총부에 전할 통신을 잘 훈련시킨 세빠드로 전하는 무정장군의 모습이 우렷이 솟아오른다. 벌써 두어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답사중 적안촌의 장군령에도 오르고 해발 900여메터를 이루는 명승지ㅡ여와궁에도 오른데서 오늘따라 두 다리가 후들후들 거린다. 생각뿐이지 적안촌~남장촌구간 십여리 탐석길을 이어갈것 같지 못하다. 3~4리를 내리다가 종내는 주어든 문양석까지도 아쉬운대로 버려야했으니 맥이 빠질대로 빠진 내가 한스럽다. 별수가 없지, 막무가내에서 핸드폰으로 택시운전사를 부르니 택시는 지체없이 나한테로 달려왔다. 정말이지 고마운 운전사이다. 이틀간 태항산근거지 답사길에서 인연을 맺은 보람으로 나는 현성의 룡산거리 주숙처까지 무사히 이를수 있었다. 피로가 일신을 강타해도 겨레의 숨결어린 하북 섭현의 태항산항일근거지 청장하에도 탐석의 자취 남겼다는 자체가 마음을 달콤하게 한다.   2009년 8월 20일, 하북 섭현 호텔에서          
234    수천리밖 답사길 홰하탐석 댓글:  조회:3905  추천:34  2009-08-26
  수천리밖 답사길 홰하탐석   수석인의 마음은 탐석현지를 지나치지 못하는가부다. 8월 16일 오전, 석가장 화북렬사릉원 답사를 마치고 택시로 원씨현을 지나 찬황현 황북평촌 조선의용군 4렬사묘소로 향하던중 찬황현의 한 강가 아스팔트길에서 돌로 덮힌 강을 보아내고 마음이 한없이 끌리기만 한다. 이튿날 오전 원씨현 호가장 전투현지를 답사한후 시간이 있는지라 나는 더 주저할 겨를이 없이 어제 타던 택시를 불렀다. 원씨현성에서 찬황현성까지는 19킬로메터고 찬황현성에서 탐석현지까지는 또 근 20킬로메터를 달려야 한다. 40킬로메터 거의 이른다는 말인데 택시운전사는 머리만 가로 젓는다. 오후시간에 택시를 타고 “돌”을 주으러 간다니 리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렴은 어쩌고, 반시간 나마 달리니 강변이 나타나고 돌밭이 펼쳐지는데 여기저기서 수석이 막 튀여나올것만 같다. 강은 이미 물이 말라버리고 모래를 캐느라 파놓은 웅덩이들에 물이 맑게 고였을 뿐이다. 웅덩이들 모양으로 보아 돌밭 두께가 4~5메터, 7~8메터정도를 이루는데 이 지경 돌밭 두께를 형성하기까지 오랜세월이 흘렀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모두가 수마가 잘된 돌층의 두께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찬황현이 천년 옛현이라더니 강도 자그만치 수천수십만년의 력사를 거슬러 왔을터. 돌밭은 아득히 저 아래로 펼쳐져가고, 연변의 두만강이나 가야하와 다를바 없다. 다양한 돌들이 그대로이고 수석은 떼놓은 땡이다. 더우기 문양모양도 너무도 보편적인데 흠이라면 선명하지 못한것이라 할까. 첫시작에 벌써 문양이 어울린 수석 한점을 주어들더니 두만강의 돌과도 다름없는 청석모양의 잘 “썩은” 수석 한점이 시야에 안겨든다. 유감이라면 먼먼곳 겨레 발자취 답사에 지니고 다닐수 없는것, 사진을 찍고 도로 내려놓을수 밖에 없다. 맞춤한 것이면 배낭에도 넣으련만. 한 500~600메터를 내려왔을가. 지나온 아스팔트쪽 강가에 두 남자가 서성임이 육안으로 알려진다. 뛸데없는 수석인들이다. 거리도 있고 하여 그대로 강따라 나아가는데 한시간쯤 지나 핸드폰이 걸려온다. 택시운전사인데 지방의 한 수석인이 나를 기다린다고 한다. 5~6리쯤 쓸어보니 끝간데 없이 돌밭이고 며칠이고 탐석해도 괜찮은 수석들이 얼마든지 주어질 판이다. 나는 내 고향 연변과의 머나먼 거리를 한탄하다가 돌아설수밖에 없었는데 지방수석인은 두어시간 그때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방수석인의 말에 의하면 원씨현에는 수석인이 10여명 뿐이고 늘 교류를 가진다고 한다. 또 먼거리 자전거타기에 맘이 끌려 자전거애호가 10여명으로 모임단체를 가지고 오늘도 100킬로메터를 달리다가 택시타고 탐석에 나선 수석인을 만나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단다. 강은 홰하라고 부르는데 자기는 수석입문 3년으로 아직 수석을 잘알지 못한다고 내비친다. 택시는 다시 찬황현성을 지나 원씨현성으로 달린다. 지방수석인의 청으로 현교통국에 다닌다는 그의 집에 가보니 수십점의 수석이 책장에 잘 모셔져 있다. 대부분 종유석이 아니면 석회암들이여서 그닥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나는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다. 탐석한 수석을 들고 이름까지 지었다며 열성을 부리지만 아까 강가에서 주어든 여러가지 문양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러나 그의 열성에는 감복되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오늘 우리 만남도 인연인데 차후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가자고 하니 그는 자기도 소원이란다. 뜻하지 않은 찬황현 홰하탐석, 홰하탐석지 발견, 내 마음은 둥둥 뜨기만 한다. 연변 수천리밖 화북 홰하에서 탐석해 보았다는것이 그리도 즐거울수가 없다.   2009년 8월 17일, 하북 원씨현 정부초대소에서                          
233    두만강수석회의 소하룡 산행 댓글:  조회:5140  추천:87  2009-08-23
                두만강수석회의 소하룡산행   연길에 오면 의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두만강수석회 문인수석인들이다. 7월 25일 두만강수석회 김봉세회장, 한태익사무국장과 같이 수석회 고문 박식사장이 경영하는 백두산한식관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박식사장이 소하룡 동쪽골안에 새로 개척한 산행길이 있다고한다. 스케줄에도 없던 수석회산행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박식사장의 자가용에 앉아 소하룡 동쪽골안을 따라 한참 달리니 골안이 왼쪽으로 꺽어든다. 자가용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내를 건너니 울울창창한 소나무숲이 맞아주어 좋기만 하다. 박식사장과 그의 동료인 한국인 사장 한분이 앞서고 우리 셋이 뒤를 따르는 산행길, 박사장은 소나무숲이 사람들의 건강에 대단히 리로와 이곳 수십년생 소나무숲 산행길을 개척하였다면서 한주일에도 수차 등산하군 한단다. 그래서인지, 소하룡 동쪽골안 소나무숲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 소나무숲을 가로세로 타고타니 산정의 평지숲속인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았다. 박식사장의 소나무숲 산행길 묘리를 비로소 알것 같았다. 산정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아가니 소하룡 바로 뒤산 내리막길, 낮다란 참나무숲 너머로 소하룡 너머 연길시 동쪽변두리가 한눈에 안겨오고 옛날 동하국의 수도자리로 널리 알려진 성자산 산정의 분지가 발아래 펼쳐진다. 언제부터 성자산 산정분지와 산 전체를 사진에 담아보려 했는데 그 시각이 소하룡 동쪽골안 등산으로 이루어진다. 소나무숲 산행에 연길시가지 바라보기, 성자산의 정경—마음이 한결 부푸어오른다. 한식경만에 우린 다시 오던 길로 돌아섰다. 하산하다 말고 동쪽으로 나아가니 풀밭으로 이루어진 산정의 널다란 평지밭, 옛날 민가들이 살던 밭으로 펼쳐진다. 평지를 따라, 산발을 따라 계속 나아가면 연길시 해란호풍경구 북쪽산이다. 해란호풍경구와 골프장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다리쉼을 하노라니 해란호라 불리는 저수지가 생겨나기 전 김봉세와 나 둘이서 소하룡에서 구룡까지 10여리 해란강물을 거스르며 계곡의 수석탐석에 나섰던 일이 선히 떠오른다. 그후  이곳 계곡에 다시 와보지 못했더니 계곡은 해란호풍경구로 바뀌우고 계곡의 동쪽 산아래 비탈은 대형골프장으로 변해 있었다. 연길시의 변화, 세월의 변화를 돌이키는 잊지 못할 산행길, 백두산한식관의 박식사장—우리 수석회 박식고문이 너무너무 고마왔다. 그속에서 두만강수석회의 7월 25일 2시간 산행이 훌쩍 지나간다.   2009년 7월 26일          
232    【시조와 수석】(4) 수석이 없는 강은 흐르지나 말지(신철호) 댓글:  조회:5312  추천:45  2009-06-28
시조와 수석 (4)   수석이 없는 강은 흐르지나 말지                                                신 철 호      도석(賭石)      안휘성 령벽현(灵璧县) 부반산(浮磐山)은 령벽석(灵璧石)의 산지이다.    령벽석은 경석(璧石) 또는 팔음석(八音石)이라고도 부르는데 검은색, 흰색, 붉은색, 회색 등 네가지로 나뉘나 검은색으로 된 것을 으뜸으로 친다. 석질이 견고하고 주름진 표면에 윤기가 돌며 두드리면 쟁쟁 쇠소리가 울리는것이 퍽 매력적이려니와, 크기를 불문하고 모양의 변화가 상상할 수 없이 괴이할 정도로 천태만별이여서 산수경석이든 물형석이든 얻고 보면 그 값이 가히 금값이다.    돌로 이름난 곳이니 돌을 주제로 하는 지방문화가 각양각색으로 차치고 포치면서 소문을 내는데 그 가운데서 도석(賭石)-돌도박이 하나의 특색이 있는 지방문화라 할 수 있겠다.    령벽석이 전국(战国)시대부터 진상품명록에 올랐다고 하니 《수호전》에서 청면수 양지가 화석강을 운반해오다가 황하에서 배를 뒤엎고 신세를 망친 이야기를 보면 령벽석의 력사적 운명을 알만도 하다. 그러니 수천년의 채석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어느 산비탈이나 골짜기 또는 밭머리에 번듯이 누워서 점고를 기다리는 령벽석을 얻는다는 것은 꿈에서 될법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 정부든 개인이든 땅속에 있는 령벽석을 찾아 파내는데 공을 열심히 들이게 되었고 따라서 생겨난 것이 합법적인 도박인 도석이다.    정부측의 관원과 땅임자, 광맥을 잘 잡는 지질학자들이 갑방이 되어 일정한 면적의 땅에 몇만원씩 기본금으로 내걸고 을방인 채석자들에게 땅을 경매하는데 실은 땅속의 령벽석을 경매하는 것이다. 물론 채석자들에게는 지질학자들의 입에서 땅속에 령벽석이 무조건 있다는 장담을 전제로 하는 도박이지만, 가령 령벽석이 없어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꼴이 되더라도 갑방에 시비를 아니 일으키는 도박이다. 그러나 일단 제대로 된것을 파내기만 하면 수십만원을 쉽게 벌게 되는 수지가 맞아도 엄청 맞는 장사인지라 채석자들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심사를 안고 락착가를 다투어 올린다.    땅주인은 도석 때문에 일년농사를 전폐해도 입찰뒤의 보상금을 톡톡하게 받고 또 땅을 도로 메우면 이듬해 농사에 별 지장이 없다. 놀고도 돈을 버는 꿩먹고 알먹는 일이니 궁벽한 농촌에서는 저저이 제집 땅에서 돌도박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아무튼 정부도 땅임자도 채석자도 다 돈을 벌고 환경도 파괴되지 않는 노릇이다.      호연장귀      연변의 수석산지는 매우 제한되여있다. 두만강과 가야하, 훈춘하들의 중류 또는 하류의 부분적 구간들에 듬성듬성 널려있는 손바닥만큼한 모래톱들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도석을 소문나게 벌릴만한 장소도 없다. 연변수석의 백미인 오석(烏石)은 보통 지표면에 표출되여있기 때문에 불도젤이 한번 머리를 틀어박고 지나가면 그곳은 대번에 수석의 불모지로 되고 만다. 때문에 오석은 땅을 떼먹는 식의 도석으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의 탐석 경륜으로 키워온 혜안으로 찾아내는것이다. 그러니 수석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탐석은 예술적 소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여가활동이다.    생졸년대가 미상인 김천택(金天澤)은 조선 영조 때 활약한 대표적인 가객(歌客)이고 시조작가로서, 자는 백함(伯涵), 리숙(履叔)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다. 오래동안 노래로만 불리고 기록되지 못했던 역대 시조를 모아 최초의 가집인 《청구영언》을 1728년(영조 4년)에 편찬했다. 벼슬을 했다는 것이 숙종 때에 고작 포교(捕校)로 있었던 것뿐이고 평생을 거의 가객으로 살았다. 속세의 구속들을 훨훨 떨쳐버리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다는 말이다.    그가 쓴 시조 중에 《풍진에 얽매이어》가 있는데 그가 왜 한뉘 가객으로 살아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자꾸자꾸 청청해진다.      風塵에 얽매이어 떨치고 못 갈지라도    江湖一夢을 꾼 지 오래더니    聖恩을 다 갚은 후는 浩然長歸 하리라    “부귀나 공명에 뜻이 없고, 자연을 벗으로 삼아 풍류생활로 인생을 즐기려는 인생관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호연장귀, 즉 속세의 모든 욕심과 번거로움을 툭툭 떨쳐버리고 호연한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자연을 벗으로 삼아 살줄 아는 사람들이여야 수석인으로 될수 있다. 두만강수석회의 회원 모두가 호연장귀의 진미를 나름대로 깊이 터득한 사람들이다. 탐석을 아니 할 때에는 산행도 단체로 하는 순박한 위인들이다. 피치 못하게 동서남북에 널려있어도 글로 사진으로 마음을 전달하며 정을 돈독히 하는 오석같은 동아리이다.      서울의 밤섬      《서울신문》 2009년 6월 26일자 28면에 《사람한테 해방된지 40여년 77종 둥지 튼 ‘새들의 천국’ 》이라는 제목으로 한강의 밤섬을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밤섬은 1999년 서울시 최초의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후 10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도심속 무인도’이라고 한다.    여의도와 마포 당인동 사이 윗밤섬과 아랫밤섬으로 나뉘어 있는 이 섬은 원래 유인도로서 1960년대까지 600여명의 주민이 살았으며 1968년 여의도 개발에 쓸 모래와 자갈을 채취하기 위해 폭파해 무인도가 됐다고 한다. 그 후 조각난 10개의 섬은 흘러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제 모습을 찾았는데 차츰 버드나무와 갈대숲이 자라고, 새들이 모여 들어 세계적인 도심 속 철새도래지가 됐다고 한다. 1985년 17만 7300㎡였던 면적은 2005년 26만 3200㎡로 확대됐다고 하니 해마다 4200㎡씩 증가한 셈이다.    현재 식물은 46과 194종, 어류는 28종이나 된다. 조류가 급증한 것도 눈에 띈다. 멸종위기종인 흰꼬리수리와 천연기념물 원앙 등 77종 9782개체가 서식하고 때가 되면 찾는다. 밤섬은 인위적인 파괴로 소실될번하였지만 자연치유의 능력에 의해 서서히 원기를 회복하고있다. 따라서 한강도 바뀌고있다.      갈 땅도 없는 봄은 오지나 말지      원체 얼마되지도 않던 연변의 수석산지들이 개발의 뜨거운 바람에 휩싸여 점차 소실되고있다. 모래와 자갈, 지어는 철광석을 파내느라 불도젤이니 굴삭기니 춤을 추며 강바닥을 싹 파내는 바람에 수석들이 씨가 말라가고있다.    해란강 하류구간이 그렇게 소실되었고 부르하통하 하류구간도 그렇게 없어졌으며 훈춘하 하류의 일부 구간도 그렇게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은 두만강 상류구간이 수명을 다하고있으며 중류와 하류가 어우리는 구간도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다. 원체 연변에서 가장 큰 수석산지인데 천천히 말라가고있다. 만천성저수지 아래의 가야하 10리 구간도 이미 오래전부터 안전지대가 아니였다.    개발바람에 불성모양이 된 강바닥들은 앞으로 30년 세월이 흐르면 자연치유의 능력에 의해 밤섬이 다시 태여난것처럼 본디의 모습을 되찾겠지만 한번 고갈된 수석자원은 수천만년이 흐른 뒤에나 다시 생겨날는지 누가 알랴.    우리민족의 유명한 시인 박아지(朴芽枝. 1905~1959)는 진실하고 소박하며 향토적 정서가 짙은 시 작품을 많이 썼는데 1929년에 창작한 시 《갈 땅도 없는 봄은 오지나 말지》의 후반구는 이렇게 씌여졌다.      들꽃은 웃고 싶어 웃는 봄이요/ 새들은 울고 싶어 우는 봄이나/    울지도 웃지도 못할 봄철이어든/ 속상해 애를 태며 오지나 말지.      갈 땅도 없는 농민들에게 오는 봄이 어이 반가우랴. 마찬가지로 수석도 없는 강이 수석인들에게 어이 정겨우랴. 아하. 수석이 없는 강은 흐르지나 말지.   2009. 06. 28. 한국 배재대학교 우남관 209호에서  
231    란정에 펼쳐진 태호석과 태산석 댓글:  조회:5577  추천:58  2009-05-30
              란정에 펼쳐진 태호석과 태산석    명나라 대성현이였던 왕수인--양명선생은 안휘 구화산을 통해 당나라 문화거인--지장보살 신라인 김교각님과 이어진 위인이시다. 5.1연휴 때부터 양명선생의 발자취를 답사하며 절강 여요 옛 고향집과 절강 란정의 양명선생 묘소를 찾다가 란정 부근의 길가에 펼쳐진 태호석과 태산석을 사진찍게 되였다.   절강 란정은 소흥  남서쪽 12킬로미터 떨어진 이름난 풍경구로서 동진 때 대서예가인 왕희지를 기리는 성스런 고장이다. 언제부터 지나다니며 길가의 태호석 등을 보았지만 달리는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다가 5월 16일 오후 란정 걸음에 들러 보는 행운을 지니였다. 수석을 즐기는 한 개인집에서 길가의 자기들 공지에  진렬해 놓은것인데, 주인집 안로인과 물어보니 태호에서 가져온 태호석과 산동에서 가져온 태산석으로서 정원석으로 팔기위한 것이였다.   란정의 이 정원석을 오늘 우리 수석코너에 올리니 여러 수석동인들과 여러 수석애호가들의 왕림을 기대하여 본다. 5월에 들어서서 인터넷 불찰로 내내 수석사진이나 글들을 올리지 못하여 미안함을  알리는 바이다.
230    5월3일 신기동을 찾아서-2 댓글:  조회:4714  추천:68  2009-05-04
경치
229    5월3일 신기동을 찾아서 댓글:  조회:4193  추천:57  2009-05-03
09년 5월3일 신기동에서 수석회 활동을 진행
228    중경 남산 식물원의 기석 댓글:  조회:4438  추천:110  2009-04-29
중경 남산 식물원은 항전시기 장개석의 관저였던 황산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학과 교수들과 함께 꽃 구경 갔다가 기석에 매혹되어 사진 몇장 찍어 두었다.
227    수석(奇石)으로 본 성의식 댓글:  조회:5959  추천:72  2009-04-28
수석(奇石)으로 본 성의식 김병활   수석(奇石)이 많은 남방에는 수석 전시회가 자주 열린다. 수천수만의 수석 작품 중에는 성을 주제로 한 것들이 자주 눈이 뜨인다. 그런데 이런 작품에 대해 관중들은 전혀 거부감이 없을 뿐만아니라 아주 진지하게 감상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외지 사람들은 때로 서남 지역 사람들이 보수적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지만 이런 정경을 보는 순간 이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개방적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성의식에 대해 동서고금의 많은 학자들이 의론하고 있는바 대체로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성행위는 사회와 문화의 각종 제한을 받게되며 인간은 반드시 성본능을 승화시켜야 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기독교문화는 성을 일종 죄악으로 보고 인류의 산생은 착오의 결과라고 인정한다. 이는 실제상 성을 승화시키는 일종 방식이다. 하지만 성은 아무튼 인간의 일대 욕망이기에 제한할수 있을뿐 근본적으로 두뇌에서 없애버릴수는 없다. 기독교문화는 성을 죄악시하면서 사회를 정화시키려 했지만 이로인해 성관념은 두뇌속에 깊이 매장되여 있게된다. 이것이 이른바 프로이드가 말하는 <성억압>이다. 이런 억압으로 인해 성 에네르기는 다른 형식으로 방출(释放)하게 된다. 서방문학에 성감(性感)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데 이는 프로이드의 견해를 반증해 주는것 같다.   각종 문화에서 성을 승화시키는 형식은 다르다. 중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들의 문화는 성을 죄악시하지 않기에 성본능을 승화시키는 방식은 <억압>이 아니라 모종형식의 <제한(框限)>이다. 중국인과 일본인의 견해는 대체로 옛날 성인들이 말한것처럼 “음식남녀는 인간의 자연적인 일대 욕망이라는 것이다(饮食男女,人之大欲存焉).” 때문에 일정한 범위에 제한시키고 사회규범에 맞기만 하면 무방하다고 인정하였다. 서방문학작품에 성주제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것과는 달리 전통적인 중국과 일본의 예술작품에는 성주제를 일정한 범위내에 제한하고 있다. 일반적인 예술작품들에서는 성주제를 거의 찾기힘들지만 특정 작품(례를 들면 春宫画거나 중국의 <<금병매金瓶梅>>와 같은 소설)에서는 조금도 꺼리낌없이 성에 대해 묘사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인도 불교가 중국에 전래하면서 조롱박 모양의 불탑이 페니스 모양의 불탑으로 변한 것도 잠재의식 중의 성의식이 발로된 것이라도 한다.       “식색성야, 인지상정이라(食色性也, 人之常情).”수석 작품에 성의식이 반영된 것도 이런 차원에서 리해할 수 있다고 본다.
226    서호변의 수석들... 댓글:  조회:4526  추천:47  2009-04-23
오래전부터 리광인선생님의 "시간나는대로 아름다운 서호주변의 수석들을 카메라에 담아주시오"라는 부탁을 받아놓고 이제서야 잠간 시간을 타서 사진 몇장 올립니다.
225    【수필】수석의 의미 (신철호) 댓글:  조회:6165  추천:42  2009-04-17
                           수석의 의미       신 철 호    수석에 혼백을 죄다 바치고 탐석에 열성을 다 희생하면서 동분서주한지 꽤 오래다. 두만강이니 가야하니 해란강이니 부르하통하니 홍기하니, 고동하니 좌우간 이름깨나 붙은 큰 강이든 작아서 이름도 없는 개울이든 둥글둥글한 돌멩이들이 널려있는 돌밭들을 보고 그저 스쳐지나간 일이 없었다.      수석인들에게 수석은 무엇일까?    리정보(李鼎輔 1693~1766)는 리조판서, 례조판서, 대제학 등을 두루 지낸 관료로서 서예도 뛰여났거니와 문장력도 뛰어났다. 그의 시조 《꽃 피면 달 생각하고》를 읊어보면 저자가 달, 술, 벗을 그리는 마음의 절절함이나 수석인들이 수석을 그리는 마음의 절절함이나 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 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하리오.    수석인들에게 수석은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는 달이요 기쁨을 향기롭게 피워주는 술이요 자나깨나 못잊어 어데 가나 있으면 무작정 찾아보는 벗이다. 그래서 수석인이 수석을 얻은 날은 완월장취(玩月長醉)에 못지않은 완석장취(玩石長醉)ㅡ거나하게 취한 기분으로 수석을 감상하면서 즐기는데, 그런 기분이 또한 수석속에 오래동안 지어는 일생동안 스며있으면서 몸과 마음을 닦아준다. 그래서 절묘하게 빼여난 수석 한점만 얻어도 천하를 다 얻은듯 하다고 하여 일생일석(一生一石)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乐水,仁者乐山)》는 말을 남겼는데 수석을 찾아 산이든 강이든 찾아 떠도는 나그네ㅡ수석인들이야말로 참으로 지혜(智慧)와 인덕(仁德)을 두루두루 갖춘 군자(君子)들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와 같은 신참들은 다만 지(智)와 인(仁)을 얼마간이라도 갖추기 위해 군자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수련을 하는 생도(生徒)일뿐이여서 스승들을 백두산처럼 희귀하게 생긴 산수석에 비한다면 나같은 초입자들은 아무렇게나 생긴 김치돌정도이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하는 일에 몸이 피곤할 때면 나는 어김없이 컴퓨터에서 수석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 뒤져보는 것으로 머리를 쉰다. 한국 수석에서는 산수석을 주로 감상하고 중국 수석에서는 물형석을 주로 감상하면서 감미로움을 맛본다.    두만강수석회 제2임 회장이였던 리광인(李光仁)교수가 중국조선족 글로벌 네트워크(ckywf.com)에 수석코너를 만들어놓고 사진과 글을 련속부절 올리고 있는데 나는 애초부터 이 코너의 단골손님으로 되었다. 리광인교수는 오랜 언론인이고 력사학자로서 지금은 절강월수외국어대에서 교편을 잡고있는데 절강연우산악회를 꾸리고 등산도 열심히 하고있는가 하면 시간만 나면 절강성 일대의 강들을 찾아 누비며 탐석에 열과 성을 다 비치고 있다.    나도 가끔씩 이 코너에 맹물에 조약돌을 삶은 것같은 글일지라도 써서 올리는데 수석을 감상하면서 느낀 감미로움을 글로 정리하고 보면 이 또한 탐석에 못지않은 즐거움을 주는 일로 된다. 하지만 지금은 늦깎이로 박사공부를 하느라고 2년 넘게 탐석에서 손을 떼고 아울러 수석에 관련한 글도 별로 쓰지 못하고 있으니, 때로는 탐석에 대한 미련이 충천이나 하려는듯이 치밀어 오르면서 마음이 막 싱숭생숭하여져서 저도 모르게 어둠컴컴한 페갱속을 헤매고 있다고 현실을 질타하기도 한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한달에 한번씩 어김없이 떠오르는데 탐석의 자유는 나에게 언제면 찾아오려는지?    수석은 나에게 참으로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는 달이다. 그것도 《십오야 밝은 달이 십륙일에 둥글어(十五的月亮十六圆)》지는 그런 보름달이 아니라 볼 때마다 둥글어지는 그런 보름달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관동별곡》에서 《… 명사(鳴沙)길 익은 말이/ 취선(醉仙)을 빗겨 실어/ 바다를 곁에 두고/ 해당화(海棠花)로 들어가니 …》하면서 자기를 감히 취선에 비할 정도로 술을 반겨마지 않은 사람이다. 술에 관한 일화도 많거니와 술을 노래한 주옥같은 시편들도 많다. 《장진주사(將進酒辭)》는 다른 때에 보도록 하고 시조《재 넘어 성권농 집에》를 음미하여 보자.      재넘어 성권농(成勸農)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鄭座首) 왔다 하여라    성권농이란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인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을 가리키고 정좌수는 정철 자신이다.    옛날 문인들은 다들 술이 없으면 문장이 흘러나오지 않고 문장이 없으면 술맛이 나지 아니 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술은 물로 된 시요 시는 마음으로 빚은 술(酒是水質的詩, 詩是心釀的酒)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고 달과 그림자와 더불어 술을 마셨다는 시선 리백이 생겨났을 것이며 《누운 소 발로 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달려간 정철이 생겨났을 것이다.    문인들은 술에 취하고 수석인들은 수석에 취한다.  세속의 피치 못할 사정에 밀려 마음이 괴롭고 몸이 피곤할 때 서재에 정히 소장되여있던 수석을 꺼내여 쓰다듬으면서 양석을 하고, 물을 뿜어 색상을 돋우면서 자연계 이상으로 무한히 확대하여 감상할 때면 살며시 나를 감싼 무아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별유천지요 무릉도원이다. 남들 눈에는 그저 손바닥만큼 넓적한 돌판으로밖에 안보이는 평원석에서 수석인들은 돌돌 흐르는 개울을 보고 노랗게 핀 민들레꽃들이 뿜겨내는 봄향기를 맡으며 뻐국새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수석에는 공수의 셩녕에 의해 귀부(鬼斧)로 다듬어진 무궁한 자연의 신비가 응축되어 있다. 깊이 취하면 취할수록 그 신비가 한층 한층 벗겨지면서 려산진면목을 드러낸다. 그래서 수석도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수석에 취한다는것은 남다른 또는 남이 모르는 어떤 생활적, 예술적인 경지에 들었음을 의미한다. 수석은 하느님이 선사한 가장 갚진 선물이라는 그 선물의 값을 아는 사람들이 곧 수석인이다.    정철이 술을 찾아 소를 재촉하여 성권농을 찾아가는 것이나 수석인이 수석을 찾아 산하를 주름잡는것이나 별로 다름이 없는것은 다들 취함으로 피여오르는 생활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인 초탈의 경지에서 음미할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석을 일컬어서 기쁨을 향기롭게 피워주는 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를 넘어 술에 취하면 실례이지만 수석에 취하는데는 도(度)가 없다. 다만 도(道)가 있을뿐이다. 술에는 주도(酒道)가 있고 차에는 다도(茶道)가 있듯이 수석에도 분명 석도(石道)가 있다.    석도는 모두 다섯 차원으로 나누는데 첫째차원이 취미관(趣味观)이고 둘째차원이 미술관(美术观)이며 셋째차원이 예술관(艺术观)이고 넷째차원이 추상관(抽象观)이며 다섯째차원이 가장 높은 찰학관(哲学观)이다.    이 표준에 비춰보면 정철의 음주차원은 철학관을 넘은 차원이라 할 수 있겠다. 수석인이라는 대접을 받으려면 바로 예술관을 넘어 추상관에 이르는 정도여야 한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고 문인이였던 리규보(李奎報 1168~1241)는 호가 백운거사(白雲居士), 지헌(止軒),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등이다. 9세때에 이미 앉은 자리에서 즉흥시를 척척 써서 신동으로 알려진 인물로서 소년시절부터 술을 좋아하여 자유분방하게 지냈으며 거문고솜씨 또한 시와 술에 짝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너무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삼혹호선생이라 하였다.    나는 이제야 수석에 어섯눈이 뜬 신참이지만 그래도 리규보처럼 친구 셋이 있다.  첫째 친구는 직업적 성향이라 별수 없이 서재를 가득 메운 책들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지금도 순진하다할 정도를 잘 듣고 있다.    둘째 친구는 칼이다. 거문고는커녕 하모니카같은 악기에조차 전혀 손을 대본 일이 없는 대신, 목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심심할 때면 칼로 뭐든지 깎아야만 하는 버릇이 사십년동안 젼혀 고쳐지지 않아 지금에는 아주 습관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등산하러 갈 때나 탐석하러 갈 때나 수염을 깎아도 되게끔 예리하게 갈아놓은 전공칼을 꼭꼭 지참하고 간다. 지금은 직업때문에 신교수로 불리지만 고급중학교에서 근무하였을 때나 TV방송국에서 근무하였을 때에는 곧잘 신목수로 불렸다. 아무튼 잔잔한 손재주를 많이 갖고 있다는데는 언제나 긍지를 가진다.    셋째 친구는 죽어서도 뿌리칠 수 없는 수석이다. 늦바람이 용마루 벗긴다고 가장 늦게 사귄 친구에 지금 넋을 싹 잃고 살고 있다.    올 2월 하순에 빛고을 광주(光州)에서 한밭 대전(大田)으로 이사를 온 후 지도를 얻어서 펼쳐보니 배재대학교 뒤편에 있는 도솔산을 넘어 갑천이라는 강이 꽤나 크게 그려져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2월 28일과 3월 22일에 안해를 데리고 봄나물도 캘 겸 탐석도 할 겸 두 번이나 갑천에 가서 다리품을 허리가 물러나게 팔았지만 수석의 팔촌조차도 못 얻었다. 원체 하천 다스리기를 잘하여서 강바닥에는 죄다 남포에 풍비박산하고 해머에 릉지처참당한듯한 뿌연 바위돌 조각들만 쫙 지천으로 널려있었을 뿐이였다.   《류비도 삼고초려(三顧草廬)만에 제갈량을 만나지 않았던가? 》    비록 도로무공이라 마음이 허전하기를 피면할 수 없었지만 감히 류비의 심경에 높이 견주면서 자기위안을 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2007년 여름에 한번 지리산에 가서 탐석해보고는 여태껏 탐석에서 손을 뗀채로 축도 아니나는 공부에만 매달려 세월을 보내기만 하였으니, 헛걸음일지라도 그동안의 애원을 풀어보았다는 의미에서는 그래도 즐겁기만 하였다.    수석은 인제 나에게 있어서 친구라는 관계를 초월하여 부모, 형제, 처자와 더불어 혈육으로 되었다. 그러니 제대로 되는 탐석을 한번도 못하고 책속에만 묻혀있어야 하는 나의 마음이 오죽하랴.       님 그려 얻은 병을 약으로 고칠쏜가    한숨이야 눈물이야 오매에 맺혔세라    일신이 죽지 못한 전은 못 잊을까 하노라    역시 리정보의 시조이다. 혈육-수석과 갈라져 2년여 살아온 내 심정을 여실하게 대신 표현해주는 시조이다.    아하! 어머니와 형님과 동생과 안해와 딸과 수석을 떠나 어디에 가서 홀로 살리오?   2009. 04. 16. 대전 배재대학교 우남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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