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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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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614 ]

194    나의 수장품 댓글:  조회:3775  추천:65  2008-11-28
193    나의 수장품 댓글:  조회:4281  추천:67  2008-11-28
수 석
192    【우리 만남】상해서 김봉세회장 부부를 만나 댓글:  조회:4214  추천:75  2008-11-27
            상해서 김봉세회장 부부를 만나   지난 11월 21일, 나의 일가 셋은 조카 결혼으로 연변행차 상해 홍교공항에서 우리 수석회 김봉세회장 부부를 만났다. 김봉세회장 부부는 11월 12일 비행기편으로 상해 복단대학을 졸업하고 외국회사에 근무하는 아들집으로 왔고, 우리가 상해 홍교공항에서 상해~연길행에 오른다는 것을 알고 홍교공항에 이르렀었다.   원래 우리는 김봉세회장 아들집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었다. 근데 오후 상해 도착이 늦어져 원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홍교공항에 곧추 갈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봉세회장 부부는 친히 홍교공항에 까지 와서 우리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 소행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연변밖 머나먼 상해에서의 두 부부간 상봉, 정말 쉽지 않은 상봉이다. 이에 11월 21일 그날의 상봉사진 한장을 올리는 바이다. 아들애가 찍어 준 우리 두 부부의 상봉사진이다.
191    【시조와 수석】(3) 내가 아는 한사장(신철호) 댓글:  조회:4611  추천:68  2008-11-16
【시조와 수석】(3)                           내가 아는 한사장        한사장(韓社長)이란 그가 여러 해 전에 연변인민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을 책임지고 꾸린 일이 있어, 다들 나이구분을 떠나서 듣기 좋게 또는 부르기 좋게 쓰는 호칭이다.  <수호전>에서 요용이 학구로 있었다고 다들 오학구라 부른 것이나 <삼국연의>에서 류비가 헌제의 삼촌벌이 되니 다들 류황숙이라 부른 것과 일맥상통하는 호칭이다.      한사장의 명함은 한태익(韓太益), 시인이고 수필가이다.      지금은 50고개에 오른지도 이슥하니 행정직을 죄다 털어버리고  평기자로 근무하지만 위인이 원체 선량하기로 동곽선생(東郭先生)의 선생이라, 사회적으로는 그냥 변함없이 인정을 받아서 한때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지금은 두만강수석회 총무장을 맡고 불철주야하고 있으니 차후에는 아마도 호칭을 한회장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1. 첫만남      필자가 한사장과 처음 상면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이 넘는 1986년 9월이다. 그 무렵에 필자는 대학교 졸업학년이라 연변인민방송국에 자원하여가서 실습기자로 있었는데, 매양 당치 않게 이도 아니 나서 콩밥을 씹는 격으로 어떻게 하나 단독취재를 하고 훌륭한 기사를  써서 일약 이름을 날릴 궁리만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때 화룡시 남쪽 교외에 돌배즙가공공장이 새로 서서 개업식을 하게 되었는데 방송국에서는 화룡으로 보낼 기자를 불시에 배치할 수 없어 꿩대신 닭으로 필자를 보내게 되었다. 실상 실습기자만을 달랑 보낸다는 것이 어찌 보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필자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행운이였다. 집이 화룡시내에 있으니 취재도 할겸 집에도 가볼겸 내게는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거량득이였다.       취재는 아침에 일찍 찾아갔던 관계로 쉽게 이루어졌다. 점심때가 되어 공장측에서 행사참가자들을 륭숭하게 대접하는데를 따라가서 현정부 간부들과 한 술상에 앉았댔는데, 그때 곁에 앉았던 한사장과 초면인사를 나누었다. 한사장은 당시 화룡현방송국 기자였는데 여러 상에 앉은 하객들 속에 류행도 아니게 캡을 쓴 사람은 그와 나 딱 두사람이였다.      한사장을 처음 보는 순간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일것 같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굳이 초상묘사를 한다면 뭐라고 할까? 어려서 본 영화 <우리마을 젊은이들>의 조무림이나 <폭풍취우>의 조옥림 또는 조선영화 <남강마을 녀성들>의 덕수-털보전사같은 모습들의 복합형이라고 할까? 여하튼 수더분하기를 이르데 없는 모습이였다.      한사장은 말수가 적었다. 남자들만 앉은 술상이라 술이 둬순배 도니 고담준론들이 터져나오는데 한사장은 고개를 갸울이고 듣기만 하였다.  배갈 몇잔에 기분이 붕 뜬 필자도 입건사를 못하고 가리산지라산을 헤맸는데  한참 년상인 한사장에게 본새가 나쁘게 감히 하오체를 들먹이며 팔을 마구 내흔들었건만  한사장은 “예, ”하고 오히려 존칭을 쓰며 들어주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하여도 참으로 막돼먹은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에 깊숙하게 빠진다.      필자가 6년간 잡았던 교편을 동댕이치고 1993년 7월에 평생의 직업으로 갈망했던 연변TV방송국 기자로 전근하고 보니 한사장은 진작 화룡에서 전근하여  연변라디오TV신문사 기자로 와있었고 같은 분야이다 보니 가끔가끔 함께 취재도 나가게 되었다. 1995년도에 연변에서 “제1차 두만강하류국제무역투자상담회”를 조직하였는데 둘 다 열심히 뛰면서 취재하고 같은 특집프로를 만들어 각각 상을 탄 일이 있었다.          2. 여드레에 팔십리        중국 당대문학사에서 마봉(馬烽)은 조수리와 비견하는 유명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단편소설 <나의 첫 상급>에는 성이 전(田)씨인 농업건설국 부국장이 나오는데, 평소에는 남달리 느리다가도 관건적일 때에는 무비의 침착성과 결단력을 발휘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 전국장이 하루는 농촌에 내려가 사무를 보고 그곳에서 홀로 자는데 밤중에 큰 바람이 휘몰아치였다. 와지끈 하는 무서운 소리가 천정에서 울려 눈을 떴지만 그는 일어날 대신 이불밑에 꼼짝도 아니하고 누운채로 태연하게 손전지를 켜들고 천정을 비춰보았다.  대들보가 거의 끊어져 곧바로 무너져 내릴 지경이였다.       “래일까지는 별 일이 없어.”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돌아누워 그냥 잠들었다.      필자는 한사장을 만날 적마다 이 전국장을 떠올리군 한다. 한사장은 행동이나 말이나 다들 느린 “천천히파”이다.      1995년도 12월에 백두산빙설제 취재차로 이도백화에 갔댔는데, 저녁식사후에 기자들은밖이 엄청 추운데다가 짐을 푼 려관이 동떨어진 곳이다보니 끼리끼리 갈데가 없어 방에 모여서 트럼프판을 벌렸다. TV기자들은 평소 자주 어울려 놀다보니 눈치만으로도 편을 척척 알아맞히는데 그 속에 한사장이 홍일점으로 끼여들어 다른 사람의 눈치에 전혀 맞지 않는 전술을 혼자 펼치니 같이 판을 벌린 셋은 속이 곪아터질 지경이였다.      트럼프 한장을 내리는 것도 머리를 몇번씩 긁적이고 내리는가하면 판국이 다 글렀는데도 손을 드는 기미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아서 성질이 급한 다른 친구들은 하품을 쩍쩍 할 지경이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원인도 모르게 셋의 집중폭격을 맞기도 하였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남들은 수지가 조금만 탈려도 거무락푸르락인데 그는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끝날 때면 그저 머리를 둬번 긁적거릴뿐 항상 시작할 때의 태연한 모습이였다.      “잘못 앉아서 오늘 지출이 꽤 컸겠습니다?”      “오늘 잃으면 래일에 얻고…….”      대답은 묻는 말보다 짧았으나 마디마디의 휴지는 꽤 길었다.      2002도에 필자는 대학교 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분서주를 직업으로 하던 것이 조용히 앉아만 있자니 사지에 좀이 쑤시는 것을 당초 참을 수가 없어서 2003년 초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 참가하였다. 동갑이지만 두학년 선배라고 언제나 형님을 앞세우는 우상렬교수에게 산악회 성원들을 일일이 물었다.      “니가 거지반 아는 사람일거야. 우선 김관웅교수와 김호웅교수, 그리고 가무단의 김학송시인, 방송국의 채선애와 한태익기자, 교통은행의 류광철, 문련의 신영애가수, 로인아파트의 이정옥원장…….”      그가 념불하듯 줄줄 섬기는 명단 속에 한사장이 있었는데 그때  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사 사장을 맡고있었다. 아니게 아니라 20여명되는 성원중에 절반은 아는 사람들이거나 알만한 사람들이여서 첫날부터 제법 정이 들어 서슴없이 육담판에 끼여들기도 하였다.       한사장은 필자보다 키도 훨씬 컸고 체력도 좋았다. 필자는 산골에 태를 묻은 경력을 믿고 항상 일행의 앞장에 서서 길안내행세를 했지만  한사장은 불쑥불쑥 앞지르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또 한참 뒤에 처지는 일도 없었다. 항상 가운데쯤에 서서 김관웅교수의 수필창작에 관련한 무료강좌를 말없이 귀담아 듣군 하였다.  김관웅교수는 학부생들의 교수평의에서 최고점수를 따는 분이라 아무 때나 시작되는 통속적인 무료강좌에 푹푹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걸음들이 늦기로 여드레에 팔십리다보니  밖에서는 우리를 “산보팀”라고 부르고 있다. 평지길을 걸으나 비탈길을 걸으나 한사장은 속도가 균일하여 “산보팀”의 대표자이고 팔자걸음의 일인자이다. 아무튼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온다고 해도      “그놈이 십분전에는 안올거야.”      하며 그냥 바지호주머니에 두손을 지른 채로 유유히 걸어갈 사람이다.       한사장은 2006년도 년말총화모임에서 만장일치의 박수가결로 2007년도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으로 선거되었다. 말씀을 열흘에 한마디나 하는 분이라 취임사는 아주 짧았다.      “일년간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신 류광철전임회장께서 부회장이 되어 도와주십시오.”      우스개을 전담하는 김익교수가 그 취임사에 꽃을 큼직하게 달아줬다.      “명년에도 막걸리를 10근씩 그냥 메고 오면 련임은 문제없습니다.”       3. 갓마흔에 첫 버선      2004년도 여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서는 력사가 유구한 성자산성에서 야유회 겸 문학작품집 발간식을 가졌다. 작품집 제목은 산악회라는 특징을 살려서 <저 높은 산에 푸른 꿈을 안고>라고 달았다.       이 출간식에, 후일 발족한 두만강수석회 제2임 회장 리광인선생이 참가하였는데 그는 그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대외사무를 관장하고있었다. 김학송시인(당시 산악회 회장이였음)과 리광인선생은 원체 구면인데다가 다들 연변의 수석문화을 개척한 원로급들인지라 만나자마자 의기상투하여 오가는 말씀들이 문학과는 숫제 거리가 먼 수석이야기들이였다.      “장마철이 오래지 않는데  큰비가 몇축 내렸으면 좋겠소.”      “86년도 경신란리때처럼 말이가?”      “장마야 크게 지면 질수록 좋지만 자금자금하게 여러번 터지는것도 좋소.”      “두만강과 가야하의 물때가 일년에 서너축씩 벗겨져야 하는데 말이요.”      경신란리란, 1986년도 여름에 류례없었던 장마가 져서 훈춘 경신벌이 온통 물바다로 변해버린 재해를 민간에서 이름하여 부르는 말이다. 두 어른은 장마니 란리니 하며 농민들이 들었다가는 대번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 말씀들을 서슴없이 “람용”하고있었는데 이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사람은 일행중에서 한사장과 필자였다. 한사장은 잠자코 듣기만 하였고  필자는 입건사가 허술한것이 문제이다보니 아 대화속에 무작정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광인선생과 초면인사가 이뤄졌는데 신정이 여구해져 지금까지 끈끈한 수석인연을 엮어가고 있다. 남녀사이라면 첫눈에 정이 들어 어쩌고저쩌고 하겠는데 말이다.      출간식이 끝난 한주일 후, 약속대로 우리 네 사람과 연변병원의 김봉세선생, 방송국의 전임 부주필 김대현선생 등이 도문시 신기동에 가서 탐석을 하며 하루해를 보냈다. 함께 즐기는 즐거움이라 조직의 필요성도 제기되어서 이듬해 여름에 현임 주당위 선전부 리흥국부장(당시에는 연변라디오TV방송총국 국장. 서예가)을 초대회장으로 하는 연변두만강수석회를 성립하였고 2006년 6월에 연변박물관에서 제1차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람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였다. 등산에서는 여드레에 팔십리를 가는 한사장이 돌밭에 들어서서는 아주 신행태보였다. 직업적 성향이라고 할까? 같은 방송국출신인 김대현고문님(두만강수석회 초대고문. 골동품수집가. 장서가)은 한사장보다 한수 앞선 신행태보였다.         탐석(探石)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끈기와 인내력이 기본이여서 조밭 초벌기음을 매는 자세로 열심히 주위를 차근차근 살피고 조심조심 뒤져야 하는데 한사장은 전혀 그러지를 않고 두손을 호주머니에 지른채 동에 가서 번쩍 서에 가서 번쩍하며 돌밭을 휩쓸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이미 탐석경력만도 10년을 넘나드는 김봉세, 김학송, 리광인 등 선생들은 이미 발에 익고 눈에 익어서 매번 탐석때마다 수확이 있었건만 한사장만은 도로무공이라 올 때의 배낭보다 돌아갈 때의 배낭이 항상 더 가벼웠다.      일이란 생각대로 안되면 투정이 많기마련인데 한사장은 투정도 없었다. 훌쭉한 배낭을 메고 귀가할 때면 락망도 어지간히 크련만 내색을 근본 보이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1년반 되는 사이에 열 번도 더되는 탐석활동이 있었건만 한사장은 개근에서 보여주는 열성과 정반대로 성과는 거의 없었다.  완전히 공수거(空手去)하고 공수래(空手來)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행태보로 돌밭은 휘젓고 다니다 해도 그냥 헛물만 켜라는 법은 없다. 일생일석(一生一石)이란 일생에 명석 하나만 갖고 있어도 만족이라는 말인데 한사장에게 일생일석 감을 선사하려고 하느님이 의식적으로 한사장을 자꾸 헛걸음시켰는지 누가 알랴?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6년 5월 1일에 또 한번의 합동탐석이 도문시의 신기동에서 이루어졌는데 한사장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습성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변함이 없이 표현되였다. 신기동 돌밭은 연변에서 가장 큰 탐석지의 하나이지만  교통이 편리하여 수석인들이 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통에 자원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다.  그래서 다들 이날 소품석들을 얻은 것에 그쳤고 한사장은 역시 종전대로 빈손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 거의 왔을 때, 올적 갈적 그냥 생각 없이 지나쳐버리던 돌무지(집을 짓자고 모여놓은 돌무지)에 이르러 한사장이 우리 모두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고함소리를 질렀다.      “야. 메주다. 메주!”       모두 고개를 돌려보니 뒤처져 오던 한사장이 과연 메주처럼 생긴 돌을 안고 흥분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화강암이지만 금 하나 없이 둥글둥글 륜곽이 자연스럽게 생긴데다가 밑둥치를 칼로 벤듯 잘려진 것이 흡사 알뜰한 새색시의 손에 잘 다듬어진 메주같았다. 김학송시인이 연신 감탄하면서 물을 뿜으니 노오란 색상이 돋아나는 것이 구미도 당겼다.      “명석이야. 물형석으로는 제격이야. 그리고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는가?”      “밑둥치가 딱 비례에 맞게 잘려진것이 신기하오.”      “오늘밤에는 사모님을 객실에 내보내고 이 메주석을 안고 자는게 좋겠습니다.”      남들이 중구난방으로 칭찬을 하는데 한사장의 생각은 벌써 한달후의 일로 가 있었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는데 전시회에 내놓으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하지. 관상석으로는 일품인데.”      김대현고문은 적극적으로 전시를 주장하였다.      2006년도 년말에 리광인선생이 절강성 월수 외국어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되면서 두만강수석회는 인사변동을 하였다. 김대현선생은 종신고문으로 되고 김봉세선생이 제3임회장으로, 한태익선생이 총무장으로 되었다. 필자는 2007년 3월에 늦깍이 공부를 하느라 한국행을 하다보니 지금껏 탐석을 못하고있다. 그러다보니 거의 2년이 되는 사이에 한사장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감감 모르고있지만, 기왕 메주석이 큰 행운을  얻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필경 좋은 성과를 거뒀으리라 또 거두고있으리라 믿는다.       4. 다만지 손이 성하니      송인(宋寅,1516~1584)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고 해서(楷書)에 능한 서예가이다. 학식이 뛰여나고 성품이 고결하여 퇴계 리황(李滉)과 율곡 리이(李珥), 남명 조식(曺植), 우계 성혼(成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리황에게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리황이 "비문은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송인과 성수침(成守琛.즉 성혼의 부친)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수침의 글씨는 힘은 있으나 허술한 곳이 있으므로 송인이 가장 좋을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송인이 쓴 시조 중에 <들은 말 즉시 잊고>가 있는데 가히 한사장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적어둔다.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이                              내 인사 이러함에 남의 시비 모르노라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한사장은 열흘에 한마디 할 정도로 말문이 무거운 사람이다. 시도 쓰고 가사도 쓰고 수필도 쓰지만 술을 반겨 흥분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의 작품은 어떻고 하는 “평론”을 듣는다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이다. 확실히 들은 말을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 하는 사람이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글을 열심히 쓰고 “다리가 성하니” 등산과 탐석에 여가를 모두 바치는 사람이다.      새해에도 메주석과 같은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190    중경 자기구 장강수석 점포 또 하나 댓글:  조회:4408  추천:124  2008-11-11
장강 삼협 댐 수위를 175미터로 올린 후 장강과 가릉가의 합수목인 중경의 수위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자기구에 나갔다가 민속가에 또 하나의 장강수석 점포가 생겨난 것을 보았습니다. 주인의 윤허를 받고 사진 몇장 찍었습니다.   
189    【수석감상】 호수석 한점 새로 탄생이오 댓글:  조회:4333  추천:95  2008-10-22
【수석감상】                 호수석 한점 새로 탄생이오
188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2) 댓글:  조회:4383  추천:89  2008-10-19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2)
187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1) 댓글:  조회:4190  추천:87  2008-10-19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1)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두번에 나누어 사진으로 보여 드립니다. 지나온 우리 발자취로 펼쳐집니다.
186    【수석감상】한태익의 수석세계 댓글:  조회:4450  추천:104  2008-10-09
【수석감상】                   한태익의 수석세계     한태익님은 연변인민방송국의 기자이고 우리 두만강수석회의 총무, 진짜배기 산행인이고 문인수석인입니다. 오늘 한태익님의 수석 "메주"를 올리니 여러분들의 진지한 감상을 기대합니다.     수석 "메주"는 2006년 6월,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연변박물관과의 합작) 에 전시하였다가 지난 2008년 8월 27일 찾았습니다. 사진은 수석 "메주"를 가져오던 중 거리 길가에서 찍어 보았습니다.
185    광서 분재와 전시장 일각 댓글:  조회:4367  추천:97  2008-10-02
중경 화회 박람회에서 본 광서 분재와 실내 전시청 일부 및 실외 전시장 일각입니다. 2008.9.30
184    귀주 분재(盆景) 댓글:  조회:4149  추천:83  2008-10-02
중경 화회 박람회에서 본 귀주 분재입니다.2008.9.30
183    운남 수석 댓글:  조회:4158  추천:82  2008-10-01
중경 화회 박람회에서 본 운남 수석2008.9.30
182    중경 화회 박람회에서 본 수석(2) 댓글:  조회:4140  추천:86  2008-09-30
오늘(2008.9.30) 중경시 구룡파 백시역에서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경 제4차 화회 박람회에 다녀 왔습니다. 나는 화회보다 오히려 수석과 분경(盆景,분재)에 더 흥미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먼저 중경 수석(1,2), 운남 수석 등을 올리고 나중에 여러 분들이 분경(분재)에 관심이 있으면 적당한 자리에 귀주 분경과 광서 분경을 올릴까 합니다. 김병활
181    중경 화회 박람회에서 본 수석 댓글:  조회:4681  추천:91  2008-09-30
  오늘(2008.9.30) 중경시 구룡파 백시역에서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경 제4차 화회 박람회에 다녀 왔습니다. 나는 화회보다 오히려 수석과 분경(盆景,분재)에 더 흥미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먼저 중경 수석(1,2), 운남 수석 등을 올리고 나중에 여러 분들이 분경(분재)에 관심이 있으면 적당한 자리에 귀주 분경과 광서 분경을 올릴까 합니다. 김병활
180    안녕하세요. 댓글:  조회:3709  추천:90  2008-09-23
안녕하세요. 저 막내 연변방송 송철남입니다. 그사이 선생님들 무척 보고싶었고 같이 탐석하고 싶었는데생각처럼 되질 않네요. 그래서 조용히 시간이 나는대로 가뭄에 단비처럼 그 느낌을 찾고저홀로 몇번 다니다가이제야 좀 여유가 나질것 같아 이렇게 선생님들한테 인사 올립니다.늦어 미안합니다.리광인선생님 잘 보내시는지요/.그리고 한국에 가신 신철호선생님 잘보내시는지요?탐석할때면 무척 그립습니다. 수석그림을 올리려니까 잘 안되네요.
179    문자수석 108과 108의 심오한 의미 댓글:  조회:4637  추천:81  2008-09-18
         문자수석 108과 108의 심오한 의미   나에게는 내가 아끼는 문자수석 108이 있다. 10과 8모두가 내 고향 연변 두만강에서 탐석한것들인데 나는 수호전에 108두령이 등장한다며 이  수석소품 두점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그러던 내가 지난 8월 29일 절강 귀교차 심양에서 하루낮 시간이 있어 청나라시조 누르하치를 모신 청복릉(淸福陵)을 돌아보다가 크게 놀랐다. 수자 108의 함의는 자못 심오한 것이였다.         심양동릉이라고 불리우는 청복릉은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와 황후 예허나라를 모신 릉묘로서 심양 옛성에서 동북으로 20리 떨어진 천주산(天柱山)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흥미를 무척 끈 것은 길이 약 40메터, 너비 8메터의 릉묘의 길 108돌계단이였다. 관련 소개글을 보니 108돌계단은 명청 두 조대 황릉에서 유일무이한 건축형식으로서 108의 래원을 두고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지고있었다. 108돌계단 전설에서 가장 보편적인 설법은 도교의 별자리전설에 기인된다고 한다. 도교의 별자리전설에 따르면 하늘에는 36청강성과 72지살성이 있는데 모두 길상스럽지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청봉릉을 수건할 때 특별히 108돌계단길을 만들고 36청강성과 72지살성을 발로 밟는것으로 청복릉의 평안과 안녕을 바란 모양이다. 다른 하나의 설법은 108수자가 불교사상에 기인된다고 한다. 108수자는 불교문화에서 늘 보게 되는것으로서 념주도 108목이요, 불교 신도들이 외우는 주문도108번이요, 불교사원의 종울리기도 108번이란다. 이는 수자 108이 우리 인간들에게서 극히 상서로운 수자임을 너무도 잘 알려준다. 심양동릉—청봉릉의 108돌계단은 수자 108에 대한 나의 리해를 깊이에로 이끌었다. 알고보면 수자 108이 내포한 의미는 관련소개글뿐이 아니였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번뇌를 108번뇌로 일컿으매 중생의 번뇌 108가지를 가시는데서 108배(拜)를 기본으로 한다. 불교의 108배란 108번 절을 함을 말한다. 불교에서 108배는 중생의 번뇌를 다스릴수 있는 가장 좋은 수행법으로서 스님들은 항상 새벽에 일어나 몸을 깨끗히 하고 108배를 한다고 알려진다. 108배 외에도 불교에는 108참회기도도 있다. 불교문화에서 수자 108이 이같이 깊은 의미를 갖고 인간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기에 청나라 강희황제 시절에 황궁에서 규정한 진상제도에는 매년 커얼친 등 기들에서 총 12개의 “9”, 즉 양 108마리와 젖술 108병을 진상해야 한다고 규정되여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황궁생활에 슴배인 수자 108의 숭배라 하겠다. 그래서 수호전의 저자는 수호전에 등장하는 두령들을 더는 많지도, 더는 적지도 않은 108명으로 그리여 냈으리라. 심양 동릉ㅡ청복릉을 답사한후 수자 108은 나의 마음에도 뿌리를 깊이 내리였다. 나는 수자 108을 상서로운 준칙으로 받아 들이면서 나의 수석소품 108을 전에없이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대자연의 돌들 세계에서 수자 108소품을 찾아 든다는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수백수천만년의 장구한 세월을 거치여 오면서 형성된 진귀한 수석소품 108이,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점의 수석이 나에게 안기여 지기까지~남다른 추구와 인연이 없이야 상상도 할수없는 일이지. 나는 문자수석 108을 갖고있음을 더없는 행운으로 간주한다.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수석소품 108은 나의 평생의 길동무로 남을 것이니 ~ 수석소품 108이여, 두고두고 한늬 나와 가족의 평안과 안녕을 도모하여 주소서.   (2008년 9월 17일)                                                    
178    【수석감상】옹근 2년만에 다시 보는 나의 수석 댓글:  조회:4087  추천:101  2008-09-17
【수석감상】                          옹근 2년만에 다시 보는 나의 수석      여기 올리는 수석사진은 2006년 연변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에 전시되였던, 연변박물관에 전시보관되였던 나의 보물--부분 수석들이다. 지난 2008년 8월27일 가져 왔으니 옹근 2년을 나와 떠나 있었다.
177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을 다시 만나 댓글:  조회:4571  추천:88  2008-09-17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을 다시 만나   연길출발을 앞둔 지난 8월 27일은 우리 두만강수석회로 말해 잊을수 없는 하루인것 같다. 이날 우리는 옹근 2년만에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을 만났고 박물관에 전시보관하였던 나의 수석을 찾았었다. 맹철학관장과의 인연을 말하자면 2년도 넘는 2006년 6월로 돌아가야 할것 같다. 이해 6월 8일, 우리 두만강수석회에서는 연변박물관과 함께 박물관에서 연변제1회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지였는데 그번 두만강수석전시회가 맹철학관장과 한광운부관장, 리철주임과의 끈끈한 인연의 계기였다. 그때 우리 두만강수석회 회장은 연변주심계국 리흥국국장이고 부회장 겸 총무는 나 두만강이였다. 나는 리흥국국장의 추천과 회원들의 믿음으로 제2임 회장을 맡았고 제1임 리흥국회장의 노력과 추진으로 연변박물관과 손잡고 연변박물관내 2층홀에 수석전시관을 꾸리고 몇달을 전시하는 기회를 가지였다. 이 기간 맹관장과 한관장은 수석전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돌리여 우리들의 마음은 훈훈해났다. 이 수석전시회후 리흥국회장은 연변 주 당위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제발되였다. 그로부터 만 2년이 지나도 리흥국회장은 물론 우리들 사이 훈훈한 마음은 여전하였고 상봉의 자리는 뜨거운 인연으로 흘러넘치였다. 8월 27일 오찬회는 두만강수석회 제3임 김봉세회장과 총무 한태익, 나 그리고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 리철주임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화제는 내내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를 떠나지 않아 우리의 뜻깊은 인연을 잘 말해주고있었다.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가 끝나 몇달 되지 않아 내가 절강월수외국어대에서 한국어과 교편을 잡게 된데서 미처 전시수석을 찾지 못했고 내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는데 리철주임이 잘 건사해주어 고맙기만 했다. 오찬이 끝난후 우린 맹관장의 배려와 리철주임의 안내로 박물관내 7월 31일에 개관된 중국조선족민속전시관을 돌아보며 이들의 헌신적 로고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나의 전시수석 10여점을 찾은것도 이날의 일이다. 8월 27일의 우리 다시 만남도 벌써 근 한달전의 일이다. 그날 우리를 뜨거이 만나주고 대해주던 맹철학관장의 진정이 금방 일만 같다. 그만큼 우리 사이 인연은 뜨거운 인연으로 남아있다. (2008년 9월 17일)                          
176    장강 삼협의 수석(奇石) 댓글:  조회:4386  추천:98  2008-09-15
2008년 9월 추석 연후 기간에 3박4일로 장강 삼협을 관광하였습니다.위의 9장 사진은 삼협 댐 곁의 농민 시장에서 본 수석들이고 마지막 두 장은 대창 고진(大昌古镇)본 것들입니다.김병활2008.9.15  
175    【탐석기】 아들애 생일이 두만강으로 이어지다 댓글:  조회:4278  추천:99  2008-09-08
          아들애 생일이 두만강으로 이어지다     생일을 앞둔 아들애의 최대소원은 연길역에서 렬차타고 차굴 다섯 지나 도문으로 가보는것이다. 그러던 아들애는 매일이다 싶이 생일이 온다며 그리도 기다리더니 생일을 하루 앞둔 8월 22일 오전에는 집안 여기저기를 오락가락하며 나의 눈치만 살핀다. 나를 쳐다보는 아들애의 두눈에는 절절한 기대가 어려있다. “그래, 래일은 경원의 생일이고 아버지 대학동창들이 모이니까 오늘 도문으로 떠나보자!” 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들애는 두눈에 기쁨의 눈물이 고이더니 펄펄 뛰며 내심의 흥분을 드러낸다. 아들애의 눈빛이 절절한데 절절한 그 눈빛을 뿌리칠수야 없지, 나는 쓰던 글을 멈추고 배낭을 짊어지고 아들애와 함께 도문행 렬차에 올랐다. 연길~도문행 북경발 렬차는 연길역에서 오후 1시 25분 발차라지만 반시간나마 연착된데서 연길 출발은 오후 2시를 넘어선다. 렬차가 계동, 마반산 역을 지나고 산과 산사이 좁은 구내를 달리니 련속 두개의 차굴이 나진다. 아들애는 좋아서 온 얼굴이 함박꽃으로 되더니 위자구역이요, 곡수역이요, 도문역을 련달아 불러댄다. 이번 여름방학 남방과 북방을 일주하며 상해요, 항주요, 청도요~ 외우며 새기던 아들애에게 있어서는 고향 연변의 하나하나의 소역들이 류달리 정다운 모양이다. 렬차가 도문역에 이르니 언녕부터 지뿌둥하던 하늘은 잔잔한 비발을 내리 드리운다. 바람까지 가세해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잠깐 주저하던 나는 아들애의 손을 잡고 택시에 올라 도문아래 두만강가 신기동 구간으로 달리였다. 도문행에 오르매 나로말해 헛 다녀갈수 있을까, 스케줄에 없던 수석탐석에 나서 볼 판이다. 신기동 마을뒤 북쪽 두만강가에 이르니 강바람이 강하게 정면으로 덮쳐든다. 소스란 비로 내든 우산은 두만강바람을 이겨낼수가 없다. 우산을 거두니 흩날리는 비에 온몸이 오스스하지만 그것도 한참 뿐, 희넓은 두만강가 돌밭에 이르자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아들애를 찬바람이 으르렁대지 못하는 아늑한 나무그늘 아래서 쉬게 하고 본격적인 탐석에 나서보았다. 이곳 신기동 마을앞과 북쪽 두만강가는 돌밭이 많고 석질이 좋아 연변의 수석인들이 즐겨찾는 탐석지로 이름이 높다. 그만큼 수석이 고갈되여 가는데 바로 가까이에 크나큰 모래장까지 이루어지고 차량들이 많이 드나들어 탐석지는 앞뒤로 뜯기우는 살풍경이다. (연변의 탐석지는 갈수록 줄어만드는구나!) 후유~ 나는 연변의 탐석지 현실을 개탄하면서 하나 또 하나의 자갈돌들에 눈을 박아갔다. 그사이 립석모양의 소품 하나를 주어들었다. 괜찮다는 수석한점 주어들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만함도 성과라고 보아야 했다. 비바람이 몰키며 제법 비가 쏟아질 판국이다. 시간도 늦은 오후 언덕을 넘어서는데서 귀로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아들애덕분에 어찌구러 도문행에 오르고 두어시간 두만강 탐석에 나서보니 기분이 한량없이 좋기만 하다. 아들애 생일이 두만강가 탐석으로 이어진 즐거운 하루였다.                                      
174    【수석감상】김봉세의 수석세계 (2) 댓글:  조회:3877  추천:110  2008-08-24
【수석감상】                     김봉세의 수석세계 (2)
173    【수석감상】김봉세의 수석세계 (1) 댓글:  조회:4633  추천:98  2008-08-24
【수석감상】                    김봉세의 수석세계 (1)      김봉세회장의 수석 여러 점 사진을 올리여 봅니다. 여러  분들의 왕림을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사진촬영 김봉세)
172    【시】돌 앞에 서면 (김봉세) 댓글:  조회:4147  추천:105  2008-08-21
【시】돌 앞에 서면 돌 앞에 서면 부끄러워지는 마음만고풍상 다 견디고풍아(風雅)의 극에 이른주먹만한 수석 앞에서 개미같이 작아진다돌처럼말없이정직하지도  진실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고    홀연   네 앞에   다시서면 무아지경에 빠져 숨을  곳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ㅡ 2008년 8월 5일 
171    【탐석기】오늘은 수정채집에 나서 보았다오 댓글:  조회:4353  추천:97  2008-08-17
【탐석기】             오늘은 수정채집에 나서 보았다오      8월 중순도 고온이 지속되여 안도행 1박 2일 탐석을 강행할수가 없다. 그렇다고 8월 중순으로 잡아본 두만강수석회 집단탐석을 포기할수야 없지, 우린 언제부터 벼르던 수정채집에 나서보기로 했다.  8월 16일 오전 8시, 김봉세회장과 한태익, 박창호(인민공원), 나 그리고 아들애 다섯은 연길 버스북역에서 한 버스를 잡아타고 수정채집길에 올랐다. 수정으로 말할진대 대자연속 천연수정—광물체를 말하는데 인민공원님 박씨가 의례 선배님으로 된다.  인민공원님 박창호씨는 올해 59살, 1974년 연변농학원 졸업생, 졸업후 연길현 지신록장, 의란록장, 룡정종축장, 연변야생동물연구소를 이저리 돌다가 연길시 인민공원 동물수의로 뿌리내린 것은 1992년, 고급공정사, 그래서 인민공원 출신이라고 산악회에서나 수석회에서 닉네임 인민공원으로 통한다. 그러던 인민공원님이 2006년 12월 내부퇴직후 산에 도취되여  산행, 력사고적 답사, 수정채집, 송화석 탐석, 고물수집 등에 빠져 든다. 재직시절 그 옛날부터 고적이나 력사자료수집에 발목을 잡히더니 옛 연변지도와 일제침략자들이 남긴 해당자료에 따라 력사고적답사, 수정채집 등에 본격적으로 나선지도 이태가 잘된다. 와중에 한 골안의 산속에 자리잡은  옛 산지를 찾아내고 오늘은 사심없이 수석회동료들을 안내하여 수정채집에 나서보는것이다.  수석광 옛터는 연변의 한 깊숙한 골짜기 산비탈. 해볕이 직사하는 고온속에서 인적이 드문 산비탈을 찾다가 도중 휴식만도 2~3차. 끝내는 골안의 목적지에 이르니 지난세기 30년대인가 일제놈들이 경영하던 수정광 옛터이다. 벌써 저기에 꽤나 깊게 패운 길다란 광석홈이 나타나고  산비탈을 돌아가는 수메터너비의 옛길이 나타난다. 아마도 수정광으로 이어가는 광산길 같았다.  광산길을 따라 가고가니 인적이 전혀 닿지 않은 길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찐찐한 참나무 락엽이 수북히 깔려 옛스러움을 그대로 발산한다. 광산길 끝머리에 이르니 산비탈 중턱을 수십메터나 깊숙이 동강낸 수정광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호, 못된놈 새끼들이, 당년 연변을 짓밟고도 모자라 경제침략에   혈안이 되여 산간의 깊숙한 골짜기에까지 들이닥쳐 천연수정을 마구잡이로 싹쓸이 했구나.”  1982년 대학졸업후 전공을 조선족항일투쟁사로 잡은 력사학자인 나로서는 첫 마디에 된욕부터 나간다. 그럴 때 김봉세회장님이 광산길 웃구간 산비탈에 어지러이 널린 흰차돌속에서 어른 주먹만한 수정 한점을 주어든다.  “이런것이 수정인가?”  수정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의 탄성이다. 뒤미처야 나는 이곳 대자연속 천연수정의 형성은 땅속 불그레한 흙과 관계된다는것, 동굴속 석회암 종유석처럼 흰차돌에서 형성되여 뾰족뾰족 자라난다는것, 종유석 모양의 수정은 각이 나며 끝머리가 연필 깎은것처럼 비스듬히 천연 6각형을 이룬다는것을 알았다.  정오를 앞둔 11시 반경, 우리의 수정채집이 열을 올리였다. 우린 저마다 옛 광구 홈차기 한구간씩 차지하고 옛 부스럭 흙무지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초행자인 나로서는 두어구간 바닥을 파고들어도 주먹수정은 커녕 손가락만한 수정주도 주어들지 못했다. 땀이 비오듯하고 온몸의 힘이 김빠진 공이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수정채집공부로다!)  나는 얼마전 연길시 고물시장에서 산 소형 손잡이 곡괭이와 군용삽 비슷한 소형삽을 팽개치고 수십메터 길이의 숲속수정광구를 발길이 가는대로 돌아보았다. 그사이 김봉세님, 인민공원님, 한태익님은 저저마다 주먹수정, 눈에 드는 수정들을 주어 들었지만 나라는 놈은 빈건덕지신세이다. 그래도 좋았다. 오늘은 수정채집공부렸다. 수석인들에게 있어서 이 재미도 별재미지.  점심참도 수석인들간의 이야기는 수석을 떠나지 못한다. 오늘의 화제는 인민공원님을 둘러싼 수정이야기. 그속에서 나는 인민공원님의 남다른 인생취미행보를 어느정도나마 더듬고 고개를 끄떡이였다. 퇴직후 취미목표를 갖고 살아가는 인민공원님이 돋보이기만 한다. 덕분에 우리 수석회에서는 지난 5월 연휴기간  첫 수정채집에 나서보고 오늘이 두번째행이다.  오후 수정채집이 다시 열을 올린다. 아들애는 나무그늘속에서 제놀음에 잡히고 나의 시야에 홈비탈에서 반짝이는 수정 한점이 안기여든다. 나만을 만나기 위해 수천수만년의 오랜 세월을 감내하며 기다려온 보석—수정이 아닌가?! 잇따라 인민공원님이 역사를 벌린 바로 웃 구간 수메터 길이의 좁은 너비공간에서 손가락 끝모양의 수정 여러 점이 련속 나를 빤히 쳐다본다. 수정을 알아보니 너도나도 나의 채집을 기다린다.  수정공부행이 헛손으로는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모양이다. 이런 개개의 작디작은 수정은 수정채집가들에게 있어서는 눈에 차는 수정들이 아니지만 수정채집 첫 행보의 나에게는 기쁨의 보물들이기만 하다. 연변 수정을 알게 한 꼬마수정들이 그지없이 고마울 뿐이다.  오후 4시경에 우린 산비탈 숲속길을 헤치며 귀로에 올랐다. 아들애의 떠진 걸음을 따르는 귀로이지만 미소가 함함이 피여나는 기쁨의 발걸음이 그리도 가벼울수가 없다.  “오늘은 수정채집에 나서 보았다오!”  온 세상에 소리소리 높이 지르고만 싶은 심경.   2008년 8월 16일, 연길에서  
170    천년송마을에서 만난 회장님과 총무님 댓글:  조회:4203  추천:109  2008-08-06
        천년송마을에서 만난 회장님과 총무님      귀가후 7월 26일  점심, 천년송마을로 불리우는 소하룡, 박식사장님이 경영하는 "백두산 한식관에서 두만강수석회 김봉세회장님과 한태익총무를 만났습니다. 신철호님이 한국으로 떠난터에 상봉할수 없었고 김대현고문님과 인민공원님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169    【탐석기】(4) 오늘은 가야하에서 부르하통하까지 댓글:  조회:5226  추천:101  2008-07-30
          오늘은 가야하에서 부르하통하까지     메새가 수풀을 그리워하듯이 수석인의 마음은 수석을 떠날수 없는가부다. 가야하에 다녀온지도 닷새에 나는데 인젠 물이 많이 줄지 않았나 싶어 가야하 다리구간이 아른거린다. 수석이나질 것만 같다. 그 유혹을 이길수 없어 나는 만사불구하고 또 홀로 가야하 탐석에 끌리여 들었다. 오늘(7월 27일)은 택시가 아닌 장거리뻐스. 멋도 모르고 연길북역뻐스부에서 오전 10시 15분 뻐스에 오르니 석현행뻐스다. 석현행은 위자구를 둘러가는 원길로 가니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기가 마련인데 설상가상으로 의란~도문갈림길 구간까지 왕청행 도로확건공사가 한창이여서 뻐스는 가끔 게자리걸음을 해댄다. 탐석지에 이르니 30~40분이면 족할 시간이 90분으로 치다른다. 다행히 가야하물은 많이 줄어 두다리 사이 가야하 서켠기슭을 덮었던 물이 자리를 내고있었다. 그래도 그상이 장상이라 찾고저 수석님들은 어디가 숨었는지 모습들을 나타내질 않는다. 나는 며칠전 탐석에서 남기였던 새류 물형석소품을 다시 주어들고 무작정 연길행 택시 한대를 잡았다. 가야하 다리목은 302국도 66킬로 지점이다. 향양을 떠나 벽수촌을 지나고 소판령차굴을 지나 연길쪽으로 10킬로메터를 달리니 부르하통하에 가로 놓인 장안진 하동다리가 보인다. 아까 이 구간을 지나갈 때 돌밭들을 보아 두었던지라 나는 택시에서 내리였는데 내리고 보니 탐석지는 하동다리에서도 한참은 저쪽이다. 아무렴은 어떨가, 부르하통하를 따라 걷는 재미도 별재미. 도보니까 주변의 산천경개 마음껏 볼수 있어 좋았다. 위자구구간에 이르러 부르하통하는 동으로 내리 쓸다가 산에 막혀 북으로 길게 내리꼰지며 거대한 타원형을 그리여낸다. 이번에는 남으로 구부러지게 흘러내리다가 또 거대반원을 그리며 북으로 돌아온다. 그 모양새를 문자로 표시하면 영어자모 “S” 이런 멋이라 재미있어도 한창 재미있다. 탐석지는 강안 모래장이다. 이 구간 강바닥폭은 너비 수백메터를 이루는데 강심 전체가 모래장 자리여서 강물은 강서쪽 기슭으로 몰키여 흐른다. 사위는 온통 모래 자갈 쳐내고 남은 돌들 세상이다. 첫 구간은 평지 돌밭, 다음 구간은 꽤나 길게 뻗은 산더미 돌밭. 평지돌밭을 지나 산더미 돌밭에 오르니 산더미 돌밭 너머에 강변 돌밭이 쫘악 펼쳐져 있다. 이쪽 기슭에서는 보이지 않던 돌밭 발견이 신나기만 하다. 하늘나라의 해님도 하늘을 덮은 구름속에 숨어버린다. 나는 첫 걸음에 한쪽에 볼록이 솟은 평원석 하나를 주어들고 어린애들처럼 퐁퐁 뛰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이 무심할리가 없지. 때는 오후 2시경이다. 그제야 점심이 떠올라 도시락을 펼치였지만 눈길은 내내 정다운 평원석을 떠나지 않는다. 대련 해변가에서 길림 송화강, 가야하를 거치여 온 탐석이 부르하통하 위자구 구간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만하면 됐지!) 나는 탐석으로 이어질 도문시 장안진 하동촌 웃구간 강변탐석을 포기하고 302 국도에 다시 올랐다. 한참 기다려도 지나가는 뻐스나 택시가 없는데 모래실이 연길 트럭운전사가 자기차에 앉으란다. 탐석의 하루가 순조로이 흘러간다. 오늘은 가야하에서 부르하통하까지 신나는 탐석을 해보았지.
168    【탐석기】(3) 가야하 다리목을 찾아 댓글:  조회:4480  추천:118  2008-07-29
가야하 다리목을 찾아     련일 흐리던 날씨가 온 하루 비발을 드리우더니 오늘(7월 22일)은 가뭇 없다. 가끔 해가 얼굴을 내밀어 비를 내리지 않음을 알려주는 듯 하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종내는 탐석행에 끌리고 말았다. 아들애의 동행은 두말이면 잔소리라 할가. (어딜 가지?) 아들애의 또렷또렷한 두눈이 물음을 던지여온다. (오늘은 가야하가 부르하통하와 어울리는 합수목이야!) 나역시 무언의 웃음으로 아들애의 손을 잡아 끌었다. 반시간이 푼히 흐르자 연길—도문 고속도로를 통한 택시는 가야하 합수목 부근 향양주유소에 이른다. 주유소에서 가야하 쪽으로 나아가는 사이 두산 사이 곡수벌을 누비는 가야하따라 저 아래켠에 국경도시 도문의 륜곽이 비껴오고 저 우로는 도문경제개발구와 산너머 초모정자가 달리여온다. 산좋고 물좋은 내 고향 연변의 정다운 한 모습니다. 눈앞에 길이 수백메터 가야하 다리가 이어지며 다리란간 글발은 이 다리가 1963년 11월15일에 준공되였음을 알리여준다. 와~ 40여년전이구나. 붉은넥타이 시절 석현의 외큰어머니 집으로 놀러다니며 자주 거닐었던 다리, 가야하다리 우로는 연길—도문 고속도로 가야하 새 다리가 펼쳐져 가야하 물결우에 하나의 풍경선을 그리여 놓았다. 그 아래로 련일 비에 엄청 불은 가야하물이 엄청 너비의 폭을 이루며 성난 파도를 이룬다. 그래도 가야하다리 아래 구간에 꽤나 펼쳐진 돌밭구간을 남기여 이 수석인을 실망시키지는 않는다. 가야하다리 아래 구간 기슭에서 나는 남근석 수석소품 하나를 주어들었다. 보면 볼수록 남근이라 기분이 흐뭇한데 고개든 새를 방불케한 소품수석 하나가 또 나를 흥분케 한다. 아들애한테 카메라를 넘기니 디지털 카메라속에 고스란히 비끼여 든다. 아들놈에게 쥐여 사진찍으니 남근이요, 새가 신통하다. 나는 허허 소리내여 웃고 말았다. 이번에는 가야하다리 건너 웃구간 가야하 서쪽기슭이다. 강물이 기슭우까지 덮어도 탐석의 공간만은 남기여 두어시간 훑어보기는 어렵지가 않다. 이 구간은 문양석이 가끔 손에 쥐우나 리상적이 되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물이지면 무언가 불쑥 나타날것만 같다. 늦은 점심에 아들애와 같이 도시락을 펼치여 든 기분이 별기분이다. 드디여 오후 2시 지나 연길—도문 고속도로 귀가길에 올랐다. 차창가에 앉은 아들애는 신나는 기분이더니 아유, 깜빡깜빡 졸아댄다. 탐석 서너시간사이 기슭에서 기다리며 피곤이 덮친거지…              
167    【탐석기】(2) 길림의 송화강가에도 탐석의 자취 댓글:  조회:4767  추천:111  2008-07-28
【탐석기】(2)   길림의 송화강가에도 탐석의 자취   여기는 북국강성(北國江城)으로 불리우는 길림성의 두번째 대도시—길림이다. 7월 11일 절강 소흥을 떠나 상해, 청도, 위해, 대련을 거치다보니 여름방학간 한주일이 훌쩍 지나쳐 버리는데 길림에 이르매 길림의 송화강가가 나를 부른다. 7월 18일, 쌍둥이 딸애와 아들애를 낮차로 먼저 떠나 보내고 안해, 녀동생과 더불어 길림역 광장에서 택시를 잡아타니 송화강을 가로지른 길림대교가 한식경만이다. 수건중에 있는 길림대교를 거니노라니 세기광장켠 길림대교 아래우 송화강가에 돌밭이 펼쳐져 있다. 나는 안해와 녀동생한테 쉼을 부탁하고 길을 돌아 길림대교 아래 서쪽켠으로 내려갔다. 송화강가를 따라 수백메터 나아가 보았지만 수석은 그림의 떡이다. 다시 길림대교 바로 밑 돌밭으로 내려 왔지만 역시 허사이다. 그래도 기분이 둥둥 뜨기만 한다. 송화강에서 탐석해 본다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련일 흐린 날씨에 비뿌림에서인지 옅은 송화강가에 들어서보니 한 여름의 강물이 차디차서 한동안을 견디기가 어렵다. (7월의 송화강물이 이다지도 차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송화강기슭에 올라섰다. 때는 오후 늦은 시기라 해가 서켠으로 내려 앉았는데 송화강 량안에 비껴든 길림의 고층청사들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길림에서도 대련의 해변가처럼 수석한점 주어들지 못했지만 길림의 송화강가에도 탐석의 자취를 남겨본다는 기분은 좋기만 하다.  
166    【탐석기】(1) 대련 성해 해변가 탐석재미 댓글:  조회:4521  추천:122  2008-07-27
【탐석기】(1)   대련 성해 해변가 탐석재미   위해서 “생생1”(生生1) 호화륜선을 타고 대련에 이르니 2008년 7월 17일 이른 아침. 대련의 로호탄풍경구를 거쳐 성해풍경구에 들어서니 한낮이라 해볕이 극성을 부린다. 일행중 안해와 녀동생, 아들 경원이는 성아극지세계 부근에서 그늘을 찾아 땀을 들이고 나는 쌍둥이 딸애들과 더불어 성해풍경구의 해수욕장을 찾았다. 성해풍경구 해수욕장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여 있었다. 첫 구간 해수욕장은 휑한데 비해 두번째 구간 해수욕장은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로 차고 넘치였다. 아름다운 대련의 성해 해수욕장이였으나 나의 주의력은 파도가 연해연방 기슭을 때리는 해변의 모래톱에 쏠리였다. 두 구간 성해 해수욕장의 해변가 모래톱은 어딜보나 잘다란 바다돌들의 세상이여서 탐석하기가 좋았다. 첫구간 해수욕장을 거닐며보니 해석문양석이 있을만 했다. 헌데 문양이 선명하지 못하여 하나 또 하나 주어 들었다는 버려야 했다. 그 사이 쌍둥이는 첫구간 해수욕장에서 다리쉼을 하는데 두번째 해수욕장까지 다녀오니 쌍둥이가 오간데 없다. 내가 두번째 해수욕장으로 넘어간 사이 나의 뒤를 따르다가 길이 어긋났던 것이다. 성해 해수욕장의 탐석이 좋았다. 비록 그럴만한 수석 한점 주어들지는 못했지만 대련에서 해석탐석에 나서 보았다는 그 자체가 마음을 후련히 한다. 대련에서의 해석탐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1999년 10월로 거스르는데 그해 나는 대련에서 한달간 국제선원강습반에 참가하고 국제선원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리고 연길의 한 무역회사에서 세를 낸 500톤 급 무역선에 올라 두달간 해외 망망바다를 누비였었다. 대련에 머무른 강습기간 나는 성해공원 등지 해변가를 메주밟듯 하며 탐석의 첫걸음을 디뎌 보고 한국의 동해가에서도 해석(바다돌)탐석에 나서 보았는데 성해해변가 해석탐석이 나 수석사의 첫걸음이였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르고 뜬다하는 수석인으로 거듭난후 다시 성해풍경구 해변가 탐석에 나서니 감개가 무량했다. 오호~ 정녕 잊을수 없는 대련이요, 성해해변가렸다. 나를 수석인으로, 첫 걸음마를 떼어준 뜻깊은 성해해변가였다.      
165    【박식특집】(1) 수석회의 초대고문-박식선생 댓글:  조회:3957  추천:102  2008-07-26
수석회의 초대고문—박식선생   우리 두만강수석회에는 초대고문으로 활약하는 박식선생이 있습니다. 2006년 6월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회 전시회로부터 본격적인 모습을 보인 박식선생은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넓고도 넓다”는 밝은 생활신조를 가진 분이여서 나이격차에도 두만강수석회 수석인들과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한데서 두만강수석회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박식선생이 천년송마을—연길시 하룡촌에서 한국독자로 움직이는 “백두산 한식관”을 즐겨 찾습니다. 오늘 7월 26일도 두만강수석회 부분 수석인들은 백두산 한식관에서 상봉모임을 가졌습니다. 한국독자—백두산 한식관은 닭, 오리, 토끼, 장어, 물고기, 무공해야채 등으로 손님을 끄는 전문 한식관인데 한식관 자체가 돌, 나무, 흙 등 원자재로, 자연을 소재로 하여 지은, 500여평의 건물을 가진 민속고유의 농가멋이여서 인기도가 무척 높습니다. 한국인 박식선생은 취미가 다양한 분이여서 수석인이기도 하면서 시인이고 화가이며 등산, 수영 등에도 짙은 애착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이미 3권의 시집을 펴낸 재능있는 박식선생은 칼럼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떨치여 2003년부터 “연변일보”에 칼럼, 기사 등 100여편을 발표하여 왔습니다. 그중 “사랑으로 감싸줄 때 행복은 활짝”이 2005년 1월 28일에 연변일보 기사 1등상을 수상했고, “6.1절 선물 무엇으로 할까”가 재차 2008년 3월 28일 연변일보 우수기사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였습니다. 따라서 두번이나 연변일보 2004년, 2005년~2007년 우수 특약기고인으로 뽑히였습니다. 우리 수석회 초대고문—한국인 박식선생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이런 박식선생에게는 자식처럼 애지중지한는 수석소품—거부기가 있고 구입하기도 하고 탐석하기도 한 여러 수석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박식선생 특집입니다. 박식선생의 세점의 수석을 먼저 사진과 더불어 선을 보입니다.   (200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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