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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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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금사강반에 솟은 모택동얼굴상 산체 댓글:  조회:6251  추천:34  2010-09-01
          금사강반에 솟은 모택동얼굴상 산체     홍군장정길 사천 회리현 통안진을 출발한 택시는 어느덧 평원을 방불케 하는 희넓은 구릉지대를 지나 구비구비 산령길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저앞 산굽이에 하늘을 찌를듯한 기묘한 삼형제바위가 나타나니 택시운전사는 당지에서는 저 삼형제바위를 장군산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준다. “장군산이면 홍군장정과 관련되지 않아요?” “그렇지요. 당년 모택동의 홍군대오는 금사강을 건너 저아래 골짝따라 오르다가 삼형제바위에서 한무리 적들을 까부시고 통안진으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나의 당돌한 물음에 택시운전사는 긍정적인 답을 주며 그때부터 민간에서는 저 바위산을 장군산으로 부른다고 동을 단다. 나는 머리를 끄떡이였다. 삼형제바위에서 당년의 홍군대오가 적들을 까부셨다면 그 대오는 필연코 양림 등이 지휘한 중앙군위 간부퇀 장병들일 것이다. 내가 벌써부터 흥분에 잠겨 있을 때 택시는 긴 산굽이를 돌고돌아 어느 한 산령에 이른다. 산령 너머는 흰구름을 떠인 우중충한 산체다. 이곳 산령과 건너편 산들사이 금사강이 흐르지 않는가고 물으니 이번에는 택시운전사가 머리를 끄떡인다. “택시를 세워요” 그리곤 택시가 멈춰서기 바쁘게 나는 택시에서 뛰여내리며 길 오른쪽 나지막한 언덕으로 내달았다. 산령 아래를 눈주어 보니 누우런 금사강이 이곳 산령과 산령너머 산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이 난 나는 “금사강아, 내가 왔어!”하고 소리지르며 철모르는 어린애처럼 퐁퐁 뛰였다. 그 모습이 우습던지 택시운전사가 따라와서 저아래 금사강을 가로지른 다리가 교평대교이고 대교 바로우가 당년 홍군이 금사강을 강행도하한 교평도나루터라고 이른다. 이윽고 나는 금사강 북안 산령을 떠날줄 몰랐다. 택시운전사한테 디지털카메라를 넘기였더니 금사강과 량안배경속 나의 모습이 카메라에 흘러든다. 그뿐이 아니고, 택시운전사는 교평대교 웃구간 금사강막바지 산체를 가리키며 산체의 한구간 전체가 누워서 하늘을 향한 모택동의 얼굴상이라고 설명한다. 처음 순간 나는 반신반의, 아무리 보아도 모택동의 얼굴상으로 안겨들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가로흔드니 택시운전사는 큰 산봉 세개중 가운데 산봉을 보라고 한다. 오호, 가운데 산봉은 과연 누운 모택동어른의 얼굴상이였다. 이마로부터 눈, 코, 입, 택 전체가 모택동어른을 쏙 떼어닮았다. 먼저는 세 산봉중 제일 아래 산봉을 주시하니 잘못 본 거였다. 나는 흥이 나 모택동얼굴상 모습산체를 련속 카메라에 담았다. 인젠 떠날 때도 되였다. 내가 언제부터 저 산체를 모택동얼굴상으로 보았는가고 물으니 택시운전사는 딱히는 모르겠는데 최근년간의 일이며 당지 텔레비에도 보도되였다고 한다. 나는 가슴에 두손을 대고 모택동얼굴상 쪽으로 목례를 하며 택시운전사에게 감사를 드리였다. 그래 모택동이 지휘한 홍군대오가 저 산아래 금사강에서 금사강을 건너 사천으로 진격했는데 자취가 없을까, 이곳 삼형제바위 장군산도 그러하고, 저 금사강반 모택동얼굴상도 그러하지. 모택동의 거룩한 형상은  사천과 운남 변계의 인민들속에 뿌리를 내리고 전설을 낳았다면 하느님도 감동되여 모택동의 얼굴상을 금사강반에 영원히 남기여 대대손손 모택동위인을 그리게 하는거지. 택시는 금사강 북안 산령을 떠나 구비구비 산령따라 내린다. 모택동의 얼굴상은 내내 금사강반에 떠오른다. 내 마음은 당년 1935년 5월 초의 홍군대오 금사강 강행도하에로 치달은다. 그 속에 모택동이 떠오르고, 장문천이 떠오르고, 주은래 떠오르고, 주덕이 떠오르고, 당중앙과 중앙군위를 지켜선 간부퇀 양림참모장의 모습이 어려온다 ......   2010년 8월 31일, 강남 두앵원에서  
306    금사강 교평도서 산수석 탐석 댓글:  조회:5525  추천:29  2010-08-30
            금사강 교평도서 산수석 탐석     홍군장정의 천험지대—금사강 교평도를 답사하는것은 나의 오랜 숙원이라 이번 여름방학에 마침내 이 숙원이 풀리여 그 기쁜 마음 이루 형언할수가 없다. 게다가 우리 양림장군, 무정장군의 발자취 어린 이곳 금사강 교평도 남안에서 금사강 남안의 가파른 천험지대를  방불케 하는 산수석 한점을 탐석하였으니 일거량득이라 하겠다. 운남, 사천, 귀주—서남지구 답사길에 올랐다가 운남과 사천 경계의 천험지대 금사강에 이른것은 지난 8월 15일의 일이다. 이날 오전 사천의 회리현성에서 남으로 54킬로미터 밖 통안진에 이르고, 통안진에서 다시 27킬로미터 밖 금사강 교평도에 이르니 청장고원의 청해쪽에서 발원하는 금사강은 청해성을 벗어나 서장과 사천의 변계를 따라 남하하다가 서장의 최남단과 운남의 적경장족자치주와 려강시를 거치고 다시 운남과 사천의 천험지대를 흘러 내리고있었다. 금사강 량안은 말그대로 경사가 가파른 산악지대인데 1935년 5월 3일과 9일 사이 모택동, 장문천, 주은래, 주덕 등이 지휘하는 홍1방면군 1,3,5군단과 중앙기관 3만여명 홍군대오는 여기 교평도나루터에서 7척의 나루배로 밤낮 7일간 금사강을 강행도하하여 운남땅에서 사천 경내에 진출했었다. 그 홍군대오 속에는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퇀장 진갱, 퇀정위 송임궁과 더불어 선참으로 금사강 돌파를 진두지휘한 조선족 양림이 있었으니 쉽게 떠날수가 없다. 8월 15일 밤을 금사강 남안 교평도의 한 호텔에서 묶기로 했다. 오전과 오후 한때 교평도대교 따라 금사강 량안을 부지런히 답사하며 금사강 교평도를 눈에 익히고 마음에 익히니 시간이 남아 돈다. 독실한 수석인이기도 한 내가 금사강 북안의 사천쪽과 남안의 운남쪽 량안을 덮은 크고작은 강돌들을 보고 어찌 지나칠수 있으랴, 쏟아지는 불볕속을 헤치며 먼저 금사강 북안 사천쪽을 샅샅히 누비며 탐석하니 온 몸이 땀통이다. 시원한 금사강에 몸을 적시고 물장구를 치며 통안진 경내에서 흘러내리는 깊은 골짜기를 올려다 보니 내물로 형성된 대면적 돌밭은 흔히 철광돌들이여서 거개가 수마가 되지 않았다. 수마가 된 엄청 크기 바위돌들은 문양이 곱고 욕심나도 수석의 범주를 벗어나는 그림의 떡이였다. 아쉬운대로 금사강 남안 운남쪽을 넘어오니 남안 돌밭도 수마는 빵점이다. 그런대로 교평도대교 아래를 걸어보는데 불현듯 나의 눈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아래 한구간 모래절벽에 촘촘히 박힌 돌들이 펼쳐진다. 가까이 다가서니 모두가 수마가 엄청 잘된 돌들, 아득한 옛날옛날에 형성된 금사강 지질년대의 산물. (음, 오늘은 수석 한점 땡이로다!) 신난 나는 모래절벽에서 떨어져 내린 돌구간을 누비기 시작했다. 과연 나의 예측은 틀림이 없어 얼마후 나는 사진에서 보이는 금사강 산수석 한점을 주어들었다. 크기도 맞춤하고 앞뒤 모두가 수마가 잘된 산수석이였다. 실은 문양석이라 함이 옳겠으나 구름띠처럼 검은 무늬가 층층이 가로 지난 수석은 천험을 이룬 운남쪽 금사강 남안의  산천을 신통히도 닮아 있었다. 그래 산수석이라 하는거다, 나는 흥이 겨워 사품치며 흐르는 금사강에 씻어보다가 강안의 바위우에 놓고 앞뒤를 사진찍어 보며 미역 감으며 시간가는줄 몰랐다. 불볕은 대지를 달구기라도 하듯 그대로 쏟아져 내린다.  금사강 교평도 산수석 한점은 이렇게 주어졌다. 답사길에서 사들인 숱한 책들과 함께 배낭에 넣으니 어깨를 지지 누른다. 아직도 운남 여러 곳을 답사하고 귀주를 답사해야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독실한 수석인이 아니면 지니지 못할 답사길에 금사강 산수석은 내내 나의 동무로 되여 주었다. 그것도 우리 당년 홍군의 발자취, 조선족 양림장군과 무정장군의 발자취 어린 금사강 교평도에서 친히 탐석한 산수석이니 이 산수석을 가끔 꺼내 볼때면 금사강 남안 천험지대를 돌파하고 금사강을 돌파하는 양림, 무정 장군을 보는것만 같아 가슴이 뭉클해 난다.   2010년 8월 30일  
305    (시) 수석 2 댓글:  조회:4605  추천:32  2010-08-15
밤마다 잠자리에 누우면너는 내 머리맡에계곡으로 감뛴다청아한 산속시내목을 터치는데너는 천년을 발가벗어던지고구름을 휘여잡아이끼와 키스하며산새와 눈맞춤하며마음을 바래웠다지금 바래워진 혼은신선이 되여하늘을 썬다.
304    (시) 수석 1 댓글:  조회:4163  추천:28  2010-08-15
굉징히 큰 부푸른 꿈이거기 그렇게 고요히 누워있더이다수천년의 눈비와 바람과 이슬을 마신신령한 기운이 거기 그렇게도고히 앉아있더이다낮이면 꽃과 이슬과 철새와 구름과 숨박꼭질도 했고밤이면 삼라만상을머리빗어 잠재워놓고우렷이 하늘로 오르더이다... ...
303    달마 댓글:  조회:5146  추천:30  2010-08-07
달마
302    탄생 댓글:  조회:4606  추천:30  2010-07-31
탄생
301    새야새야 날아라 댓글:  조회:4779  추천:38  2010-07-31
새야새야   날아라김봉세새야새야   날아라바람타고   날아라어디까지   보이니두만강이   보인다새야새야   날아라안개타고   날아라어느만큼   보이니백룡돌밭   보인다새야새야   날아라돌밭우로   날아라무엇무엇   보이니산수경석   보인다새야새야   날아라구름타고   날아라무엇무엇   부르니수석노래   부른다
300    돌이 된 녀인아 (문사) 댓글:  조회:4825  추천:32  2010-07-29
돌이 된 녀인아 문사 헐망한 옷자락은 비물에 축축하고 축 처진 어깨는 가냘픈 하소연인가 긴 목만은 님 기다려 빠지게 가늘고 님 생각 커다래진 허망한 머리 이젠 이야기 돌상된 녀인아, 오늘도 하염없는 저 멀리 동구밖을 지켜보고 섰느니 만고의 슬픔에 수석도 소리없이 눈물흘리누나 
299    직녀 댓글:  조회:5004  추천:19  2010-07-19
직녀직녀와   인연되여견우가   되였으니기쁨을   담아주네애석인   너도나도직녀에께   정을주니   즐거웁고직녀에께   사랑주니   행복하네
298    투석 세계 댓글:  조회:4123  추천:34  2010-06-20
투석  세계
297    음양석 세계 댓글:  조회:4710  추천:40  2010-06-18
음양석  세계
296    사랑과 평화가 담긴 조각공원 댓글:  조회:6210  추천:68  2010-06-15
                          사랑과 평화가 담긴  조각공원                             한태익      지난 6.1국제아동절오전에 나는  홀로 연변과기대조각공원을 찾았다. 동북아의 명주로 급부상하는 연길시지만 정부차원에서 투자하여 만든 조각공원은 하나도 없다.도시건설을 관장하는 정부에서 아직 하지 못한것을  과학기술대학에서 조각공원을 만들었으니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수 있다. 도시의 이미지를 살려주는데는 다양한 조각상이 한몫하는줄로 알고 있다. .    과기대교문을 들어서 소나무아래로 아느새 걸어 들어 가노라면 커다란 자연석 두개에다 YUST조각공원 글자를 새긴것이 한눈에 환히 안겨 온다. 열린 입구로 들어가다 오른쪽켠에 눈길을 주면 돌로 만든 두 녀인조각상을 볼수 있다. 곁에 다가가 찬찬히 살펴 보면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개의 녀인조각상이다. 한 녀인의 조각상은 가슴에 손을 얹고 머리우에 비둘기가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인데 조각상에서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녀인의 진지한 모습이 감명깊게 다가 온다. 다른 한 녀인조각상은 가슴에 뱀이 있고 머리에는 금단의 사과가 얹혀져 있다. 가슴의 뱀은 무엇을  상징하고 머리에 얹은 금단의 사과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조각예술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아리송하기만하다.그러다 비너스님의 댓글에서 그 의미를 알고 다시 조각공원을 찾았다. 알고 찾았을 때의 감수는 몰랐을때보다 확연이 달랐다.비너스님에 따르면  이 녀인의 조각상은 밀톤의 장편서사시 실락원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한거란다. 실락원>의 저자인 존 밀톤은 소년 시절에 창세기 1-3장까지 읽고 충격을받았다. 그는 이것을 한편의 멋진 소설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이것이 소년 밀톤의 꿈이되였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자신의 꿈을 펼칠수 있는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햇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불우한 소년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정치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소년 시절의 찬란한 꿈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념려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이 감옥이야말로 내 시어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이다.>> 여기에서 그는 소년 시절에 품었던 <실락원>의 찬란한 꿈을 붓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위대한 장편서사시<실락원>의 탄생 동기이다.     녀인의 가슴에 있는 뱀은 이브를 유혹하기 위해 지옥에서 나온 사탄이 변한 모습이고 녀인이 사과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은 금단인 선악과를  훔쳐먹고 락원에서 태초의 인간세상에 쫓겨난 이브의 모습이다.  실락원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인차  이 내용을 머리에 떠오를수 있다.과기대서 이 조각상을 세우게 된거는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기위해서라 생각된다.또한 과기대가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운곳임을 표현한것이기도 하다. 소망과 평화 그리고 꿈과 사랑이 숨쉬는 배움의 전당임을 표현한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조선민족은 아담과 이브가 아닌 웅녀를 태초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지만 말이다.     두 녀인의  조각상이 있는 곳에서 조금 나와 조각공원내에 낸  오솔길을 건너 봉분같은 자그마한 언덕에 이르면 부부와 애조각상이 정답게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다정한 부부가 나란히 걷고 있는데 아이는 엄마품에  안기여 행복해하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 얼굴에는 모정의 미소가 찰랑찰랑 넘친다. 아이와 함께 하는 부부의 모습은 그대로  사랑이 꽃피는 화목한 가정을 대변해주고있다. 가정은 사회의 뿌리이고 꽃이며 열매이다.  그아래 우리조선족의 이민사를 담은 대형나무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피뜻 보아도 알수 잇는 삼각조형물이지만 천년자란 아름드리 나무 세개를 삼각으로 세우고 거기에 녹쓴 꺽쇠를 박은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여사롭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멀 상징하는지 나로서는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 해답을  연변과기대 교양학부 박영자교수가 친절히 안내하며 알려 주었다.  세그루 아름드리고목나무로 된 삼각조형은 조선족이민사의 쓰라린 상처와 아픔을 반영한것이라 한다. 삼각은 건축학적으로 볼 때 온정성이 매우 좋다고 한다. 그래서 상처를 치유하고 굴기하는 조선족의 응집력을 반영하기도 했단다.    그아래 우리 조선족들이 연변에 와 이 땅을 개척할 때 쓰던 쟁기를 주체로 하여 꽉지. 낫,곡갱이,살깍재 두개,차재 등 농기구를 원모습처럼 크게 재현하여 쟁기우에다 걸쳐 놓은것이 우리 선조들의 농경생활의 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조각공원의 중심에는 YST라고 쓴 오석기단에 립체조각석조물이 에술적 상징으로 과기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를 반영해주고 있었다. 조각물에서 북쪽으로 좀 가니 건축학부의 학생들이 설계하고 지었다는 그림같은 축소형초가집이 한채 댕그라니 자리하고있다.길이 2.5메터,너비 1.5메터 가량되는 축소형초가집은 우리 선조들이 살아 오던 집모습 그대로였다. 나도 어릴때 저런 집에서 태여났고 동년시절을 보냈다. 장가갈 때도 저런 집에서 장가가고 말이다. 우리 애들에게는 잊혀져 가고 잇는 초가집이지만 보면 볼수록 정겹게 안겨온다.초가집마당에서 물레방아 도는 모습을 재현한 곳을 내려다 보다 천천히 물레방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방아도는 내력 >>노래가 떠오른다.벼슬도 싫다만은 명예도 싫어/정든 땅 언덕위에 초가집 짓고/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하고/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 보련다/    나의 집은 작은 도랑물이 흐르는 옆에 있엇다. 거기에 다리 놓이고 물레 방아있어 어릴적에 그곳에서 해종일 놀던 기억이 난다. 달뜨는 저녘에 물레방아 도는가운데 구슬픈 어머니의 사향가가 들려 오는것 같다. 내가살던 고향과  어머님을 떠올리다 매돌을 쌓아 올린 조각물을 찾아 자리를 옮겻다.우리 선조들이 즐겨 쓰던 매돌 20개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꼭대기에 방아호박을 놓은것이 조선족의 민족특색을 가장 잘 반영한 조형물이였다. 력사학자들은 고고발굴때 방아호박만 발굴되여 나와도 우리 선조들이 거주하던 곳이라 단정한단다. 선조들이 애용하던 물건이 그대로 아름다운 조형물로 될수 있다는것을 조각공원을 돌아보며 예술가들의 창작을 통해 잘 알았다. 그 언제인가는 아들딸과 함께 연변과기대조각공원에 오고 싶다.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원풍경 | 일상의 순간들 토요일만 되면 산이 그리워난다 3주채 병상에 있을라니 산이 그리워 못살겠다. 자신을 위로삼아 옛날 사진들을 둘춰본다. 아직도 정리하지못한 사진들이 많으니 그것또한 별 재미이다. 전번 마반산산행시 과기대를 슬쩍 지나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렇게 사진으로보니 언제 저렇게 멋졌나 생각되였다. 하기야 학교정원치고 가장 멋진 풍경이지.....        
295    새로운 시탐구로 여생을 빛내는 시인 댓글:  조회:4819  추천:50  2010-06-15
새로운 시탐구로 여생을 빛내는 시인                                  한태익              전날에 거위털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서인지 올해 들어서서  가장 추운 날씨였던 지난 12월6일에  최룡관시인이 살았던 산골마을을 찾아 떠났다. 최시인은 1944년에 흑룡강성 학강에서 태여나 한살나는 해에 어머니 잔등에 업히여 화룡현 덕화진 로과촌 강장골에 와서 동년을 보냈다. 리욱시인이 처음 중국에 와서 자리잡은곳이 여서 더더욱 유서 깊은 고장이지만 지금 그 마을은 없어지고 나무들이 우거졌다. 그저 리욱시비만이 호곡령에 호젓하게 서있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연변예술학원 촬영학부 성광호 학부장이 운전하는 차는 연길서부터 화룡 신흥동까지 눈이 말끔하게 치워진 아스팔트길을 무난히 달렷는데 소골령에 차를 들이대니 생각과 다른 판국이였다. 길은 온통 미끄러운 눈길인데다 겨울을 대비한 차바퀴가 아니여서 령길굽이를 몇개 돌지 않았는데 더 오르지 못한다. 하여 우리 일행은  최시인이 말대로 동년시절을 살앗던 강장골과 서호마을을 포기하고 시인이 열네살에 이사하여 와 20여년을 산 유신촌으로 차핸들을 돌렸다. 최시인은 평상시에는 자신이 살던 강장골골안을 들어가기 주저하였다. 간혹 강장골에 갔다오면 자신이 간직하고 잇는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말끔히 지워지는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는 동년의 추억을 안고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한거같다. 그의 동년의 추억에는 10여채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있던 정다운 고장, 앞내가에는 종개를 잡느라고 채발을 놓던 발터가 있었고 마을앞에는 돼지오줌개를 뿔궈서 뽈을 차던 널직한 신작로가 있고 이웃집에는 커다란 석마가 있고...뒤산 숲에는 나리꽃이 푸른숲에서 빨갛게 웃는데 학교갓다 올 때 같이 손에 손잡고 오던 춘자 오봉이가 생각난다면서 그들과 함께 놀던 동년시절이 동화책처럼 머리에 남아 영원히 동년의 고향을 간직하고 있는데 지금 거기에 가면 아름다운 고향이 이깔밭이 되였다니 소중한 아름다운 그림이 구겨지는것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지않는다한다. 시인이 그래서 강장골에 가는거 주저했는데 눈길도 시인의 마음을 알아맞추었는지 길이 미끌어 갈수가 없었다. 유신촌은 연변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선경대아래켠 두만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최시인이 살고 있을 때는 40여호 동네였다는데 지금은 다 어디로 이사가고 열여덟호만 댕그라니 남아 있을뿐이였다. 요즘 4권에 달하는 전집을 출판하고 성대한 출간행사까지 진행한 최시인은 6남매중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시인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 남의 집 종살이를 하다 서른살에 겨우 장가를 들어 첫아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룡관이다. 최씨라는 성자체가 높은데다가 룡자를 붙이고 거기에 벼슬관자를 달아주었으니 아버지 소원대로  벼슬해야겠지만 문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시인은 유신촌에 와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화룡고중을 졸업하고 고향마을에 와서 1969냔도에 처녀작을 발표하였다. 그의 처녀작을 발표시켜주신 분은 리서량기자이다. 그때 농촌문화실에 회의하러 갔다가 자신이 시가 연변일보에 버젓이 발표된것을 보고 너무도 감동되여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는감을 느꼇다면서 처녀작이 발표된 감수를 토로하였다. 처녀작을 잉태시킨 유수촌마을의 박씨네 삼동서가 최시인온다고 두부을 앗고 토닭을 잡고 성의스레 손님을 맞았다. 우리는 뜨근뜨근한 구들에 앉아서 오미자술에 좋은 안주를 먹으며 최시인의 창작담을 들었다. 지금까지 <<반쪽은 다른 얼굴이다>><<이미지시론>><<별들의 울음소리>>등 10여권의 책을 출간햇고 선후하여 <<천지문학상>><<두만강여울소리시상>><<진달래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수십차 수상했다. 시인은 연변일보문화부 부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등 중책을 력임하면서 우리 조선족문단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고심을 했다. 시인은 처녀작을 발표하여 27년만에 <<반쪽은 다른 얼굴이다>>는 시집을 출판하게 되니 기쁨보다 울음이 나간다고 했다. 왜 반쪽이 다른 얼굴이라고 했는가하면 이 시집에는 정통시와 현대시가동시에 묶어지였기때문이다. 제1부는 시적상관물을 리용하여쓴 현대시이고 제2부는 정통시이고 제 3부는 상징시이고 제4부와 5부는 정통시와 장시로 되여있다. 첫시집을 출간한후 시인은 오늘에 이르까지 무수한 내심의 진통을 껵으며 이미지시에 대한 탐구를 하여 이번 전집출판에서 1권은 시집편인데 이미지가 있는 현대시를 수록하였다. 시인은 물과 돌로 이미지에 대해 말한다. 물은 흐르는 움직이는 액체상태의 사물이고 돌은일정한 모양의 다치지 않으면 파괴되지 않는 고체상태의 사물이다. 물과 돌은 이 지구덩어리우에서 함께 하는 사물이지만 그것들의 색갈,모양, 동작 ...여러가지 방면에서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는성질의 완전히 다른 사물이며 표현형태가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시인의 상상에 기대여 이런 이질적인 사물들은 서로 전환하며 둔갑한다. 이런 마술적인 상상으로 시에서는 물이 돌로 되고 돌이 물이 되는데 이런 현상을 시에서 이미지라고 한다고 주장한것이 인상적이다.  시인한테 시대표작을 짚어 달라니 동문서답격으로 자아시와 무아시를 추천해준다.   자신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모르겟다며 추천한 자아시한수다   나에게 암흑을   암흑을 달라 암흑을 빛 한오리 없는 암흑을   암흑은 용광로 나의 광석은 쇠물이 되련다   암흑을 달라 암흑을 빛 한오리 없는 암흑을   암흑의 공장에서 함마에 맞아 아니면 선반에 깎기여 나의 생철은 다시 태여나리라 슬프게도 한마리 귀뚜라미로   암흑속에서 부활하지 못하면 차라리 한점 암흑이 되리라  시인은 이 시는 어려움속에서 새롭게 태여나려는 생명운동을 쓴거라면서 쇠물이 귀뚜라미로 다시 산생되는 과정을 통하여 시인이 념원하는바를 이미지적으로 말했다고 주장한다. 시인의 무아를 나타낸 시이다  기차가 흐물흐물 달리다가   산모롱이를 에돌아 기차가 흐물흐물 달리고있다 옆에서 흐르던 강물이 창문으로 쓸어들어와 출렁거린다 사람들이 물속에 잠기고 물우엔 깐들거리는 손가락들...   부시가 잔디밭에서 연설을 한다 인어공주가 달려와 부시의 빨간 혀를 빨다가 입속으로 바람처럼 사라진다 나는 낄낄거리며 그것들의 공연을 본다   산모롱이를 돌아 기차가 흐물흐물 기여온다 나는 기차를 하늘로 몰아간다. 렬을 지은 바곤들이 피리를 분다 태양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기차를 마신다. 마지막 바곤이 풀떡거리는 순간 구름이 지나가며 기차도 태양도 지워버린다 이 시는 2008년 10월에 안도에서 있은 두만강필회에서 접한적이 있다.그때 제목이 틀리게 나가서 논란을 빚은 시이다. 틀리게 나간 시제목은 <<개나리 기차가 흐믈 흐믈 달리다가>>이다. 개나리는 다른 시의 제목인데 편자의 실수로 틀린 제목이 나가게 되여 더 오리무중에 빠지게 하던시이다. 시인의 해석에 따르면 이 시는 련과 련이 관계가 없이 한수의 시를 이룩한 파편문체의 시란다.  파편문체란 이미지와 이미지가 련계성이 없고 련과련사이가 련계성이 없소 마치도 몬따쥬형식으로 조각무이를 한거요 여기서는 작자가 무엇을 주장하려는 개념이 작용하지 않는 무아의 시다. 시인이 현대이미지가 다분한 시를 쓰면서 현대시에 대한 관한 독서는 사람을 놀래울정도로 많이 하였다. 책을 적게 읽는 시대에 시인처럼 새로운 조류를 따라 열심히 독서하는정신은 누구나 본받을바이다. 시인은 요즘 동시작시법에 많이 심취해있었다. 시인한테서 동시를 배운 제자들이 여러 문학상을 거머쥐는것을 보고 가슴뿌듯해 하는 모습에서 시인의 희망을 읽었다. 시인은 자신을 키워준 시골마을에서 키워온 동심을 고이 도시로 가져와서 나이들어도 곱게 간직하고 그것을 시화시키는 작업으로 여생을 멋지게 보내고 있다.  뜻깊은 취재를 마무리하고 유신촌 뒤산--시인이 투구같다는 멋있는 바위산을 배경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귀가길에 올랐다.우리한테는 귀가길이지만 시인한테는 몸은 도시로 가도 마음은 동년이 있는 고향에 두고 올거라 생각했다.대망의 한해를 장식할 새해에도 시인의 건필을 바란다.       //
294    박회장과 함께 한 좋은 산행 댓글:  조회:4678  추천:43  2010-06-15
박회장과 함께 한 좋은 산행 1  화련리 서대문에서 남대문 그리고 골프장주변산행                 한태익     박회장은 산우등산팀의 회장님이시다. 미녀삼인방과 츨츨한 남자몇이 한팀이 된 산행팀인데 산행력사가 일년도 안되지만 연변등산계에서 알아주는 산행팀이다. 강한 장군아래에 약한 병사가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박회장은 연변의 산들을 메주밟듯이 안다녀본것이 없을정도로 산에 반한 사나이다. 사람들한테 공원님으로 통하는 그는 수의학을 전공하여 산과 산짐슴들에 박학다식하다. 내가 새해 첫산행을 박회장과 함께 하게 된것을 몇해전에 박회장의 텐트속에서 일박하며 고장성종주를 한 인연이 모태가 된것같다. 그후에 화룡의 진달래축제에도 함께 가보았고 교하라법산단풍관광도 함께 했으며 기차타고 청산리를 지나 중국에서 몇번째로 긴 턴넬을 지나 베개봉역에 내려 두어시간 즐기던 모든 인연들이 지금 생각보면 매우 소중하게 안겨온다.그런 인연의 끈을 놓기 쉽지 않아 새해 첫산행을 박회장과 함께 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전화를 걸었다.  <<박회장님 안녕하세요. 음력설 잘 보냈지요? 저 오늘 박회장님 산행하는데 따라갈려는데요.될수있는지요?>> <<반갑소! 설 잘쇴소. 언제든지 환영하오!>> <<정심은 어떻게 준비하면 되나요?>> <<간식을 준비하면 되오. 9시에 덕의루로 오오>> 간단한 대화를 통해 반갑게 환영해주는 박회장님의 마음을 읽었다.하지만 오늘 산행로정이 30리라니 내가 소화해낼수 있겟는지 근심이 앞섰지만 가겠다고 했으니 빨리 서둘러 출발해야했다. 과일가게서 귤사고 슈퍼에서 고애똥과자 한봉지를 사고 14선뻐스에 앉아 가니 박회장과 김주필이 쏘허룽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린다. 이제부터 산행시작---쏘허룽에서 도문가는 산간의 아스팔트길따라 가다 화련리서대문에 이르러 한쉼쉬며 사진도 남기고 간식도 들었다. 화련리---동북항일투쟁사에 한페지를 차지한 해란강참안의 진원지가 이 화련리가 아닌가! 오늘 이곳을 답사하게 되니 매우 기뻣다.   도문시박물관 관원 최장산씨가 화련리일대에서 빚어진 《해란강대학살사건》이란 책을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해란강대학살사건》은 지난 세기 30년대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서 일제침략자와 영용한 투쟁을 벌렸던 중공해란구위의 항일투쟁사를 처음으로 펴낸 책이다. 저자는 항일렬사후대들의 회억록과 회억을 수집정리하고 연변박물관, 룡정시법원, 룡정시당안관, 도문시지판공실 등 기관으로부터 많은 관련자료와 서류들을 수집하여 내용을 보다 충실히 하였고 해란구위의 추수, 춘황 투쟁과 1931년 10월부터 1933년 2월초까지 17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해란구에 대한 94차에 달하는 무차별한 토벌을 감행하여 1700여명에 달하는 해란구조선족혁명자와 무고한 군중을 살해한 일제의 토벌사건을  반영하였다.    옥에 티라 할가? 력사는 진실해야한다며 1700여명이 희생된 수자가 실제에 맞지 않는다며 조선족항일투쟁사를 연구하고 있는 리광인교수가 << <해란강 대혈안>의 진상>>이란 글을 써서 화련리 등 9개 마을에서 포위토벌당하며 희생된 사람들의 수자를 새로 증명해보였다. 이런 력사의 현장을 가는 산행이여서 힘들긴 하지만 무척 의미가 있었다. 화련리마을은 사라지고 지금은 어장을 지키는 집에 있는데 통나무구새로 하얀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도 개가 짖지 않는것으로 보아 주인은 개를 데리고 어디론가 린근에 나간거 같았다. 박회장이 주인을 익숙히 안다며 문고리를 잡아당겨 따뜻한 열기가 나오며 노란장판을 깐 집안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남자냄새는 나는데 녀자냄새가 없네요!>> 우스개말이지만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남자들 신세를 측은해하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잠간 사진을 찍으며 다리쉼을 하고 길을 재촉하였다.서대문에서 화련리로 내려걸었다면 이제부터는 남대문을 향해 산골짜기로 난 길을 따라 올릭막길을 힙겹게 걸어야만 했다.힘이 들어 추운날인데도 뒤잔등에 땀이 난다. 점점 맥이 뻐져  사진기 앞에서 간신히 포즈를 취했다. <<오늘 산행 로정의 삼분의 이를 완수했나요?>> <<이자 겨우 절반 왔소.>> 힘이 많이 빠진거 같은데 절반 왔다니 걸어가야할 로정이 아득하기만 했다.힘들어도 산행일행을 따라 가야지 뒤쳐지기만 하면 더 힘들기만 하다. 숨을 몰아쉬며 아득바득 남대문에 도착하니 도문으로 가는 아스팔트길이 산등줄기를 따라 구불구불 뻗어간것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났다. 길에서 우리가 올라온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누가 백원을 준다해도 이제 남대문에서 다시 서대문으로 갈거 같지 못하였다.  한숨돌리고 사방을 둘려보니 연길은 멀기만 하고 이제가야 할 골프장은 산너머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박회장은 새해 처음 합류한 나를 배려하여 지름길을 택하는거같았다.그렇게 골프장까지 오고 해란강저수지강판에 들어서고 보니 집을 다 온기분이다.   박회장이 기기로 측정해본결과 오늘 산행로정이 38리라니 이제 춘삼월에 맞이할 3.8부녀절이 생각난다.2월은 음력설이 있어 한달내내 명절분위기에 둥둥 떠있고 3월은 녀성의 명절이라 남자들도 덩달아 좋아하게 되였으니 이것도 우리 연변에만 있는 멋진 풍경이 아닐수없다! 오늘 산행을 멋지게 가이드해주신 박회장님께 고마운 마음이다.다음 박회장과 함께 할 2차산행이 기대된다   //
293    고난의 할빈행 댓글:  조회:4406  추천:65  2010-06-15
                 고난의 할빈행                                 한태익    올해 3월 22일 나는 일행들과 함께 할빈조선족예술관 60주년 송화강잡지 50주년행사에 참가하고저 자가용 두대로 할빈행을 하였다.아침6시 출발 도로가 미끌어서 할빈가는데 무려 열시간이나 걸렸다. 피곤한 몸을 이끄고 어둠이 깔린 저녁에 삥땅구경에 나섰다. 몇해전에 가족일행이 왔을때는 너무 추었는데 오늘은 그때에 비하면 봄날씨다.하지만 처음 할빈에 간 몇몇 사람들은 춥다며 그 좋은 삥떵 관광을 포기하기도 했다.대회측에서 200원씩 하는 입장권을 무료로 제공하고 가이드까지 하는데도 동장군한테 손을 들고 투항하는것이였다. 안본다고 먼저 갈수 없는 상황, 우리 일행이 구경다하고 돌아오길 관광차량안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는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세계제일을 자랑하는 얼음조각상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수정궁을 방불케하였다.  거기서 40메터 높이로 쌓아올린 고건축물앞에서 사람들은 감탄을 련발한다. 20층높이 고충청사보다 더 놓은 얼음건축물앞에는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기지부수다.    삥떵까지 본 우리는 호텔에서 즐겁게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는 할빈의 첫날밤을 기분이 뜰대로 붕떠서 보냈다. 이튿날 행사가 원만히 진행되고 기념공연도 관람하였다.할빈조선족예술관에서 십여년간 가수로 있은 최경호가 본가집잔치에 와서 여러곡의 노래를 선물하여 참가자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그는 지금 중국동방가무단에서 가수로 뜨고 있었다.  행사에는 한국의 강신성일영화배우가 와서 한국문화관광부 유인촌장관의 축사를 대독하기도 했다. 안중근전람관과 정률성기념관도 보고 저녁 연회에 참가하니 옆에 앉은 김박사 사모님이 간절히 귀띰해주신다. <<저녁에 술 마시지 마세요.래일 큰눈이 온다니 돌아갈 길이 아득하네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술마시지 않을게요>>  사모님이 핸드폰으로 보여주는  흑룡강성기상대 기상정보에 의하면  밤부터 24일 밤까지 전 성 대부분 지역은 중설에서 대설, 일부 지역은 대설에서 폭설로 이어질수 있다고   했다.     밤부터 24일 밤까지 이춘, 수화, 하얼빈, 학강, 가목사, 쌍압산, 칠대하, 계서, 목단강 등지는 흐린 날씨에 중설에서 대설로, 그중 하얼빈, 칠대하, 계서,목단강 등지의 일부지역은 대설에서 폭설로 이어지는데 대설, 폭설 날씨는 24시간 이상 지속될수 있다. 24일 낮부터 밤까지 이춘, 수화, 하얼빈, 학강, 가목사, 쌍압산, 칠대하, 계서, 유수,목단강 등지는 여전히 중설에서 대설로, 그중 하얼빈, 칠대하, 계서, 목단강 등지의 일부지역은 여전히 대설에서 폭설로 이어질수 있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래일 기상조건이 나빠 근심했지만 예정대로 돌아기로 하고 아침에 8시반에 눈꽃이 흩날리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텔체크인 마치고 출발하였다. 시교를 벗어나는데 눈이 펑펑 쏟아져 갈길이 잘 알리지 않아 택시차기사한테 20원주고 길안내를 부탁하기까지 했다.   눈이 점점 더 내려 중국에서 가장 큰 동북평원은 하늘과 땅을 분간할수가 없었다.차는 시속 40키로에서 기고 있었다. 오상을 지나며 전복된 뻐스며 길가에 들어박힌사고차량 6섯대를 보니 등곣이 서늘해났다.아무리 늦게 가도 안전하길 속으로 빌었다.   여러곳에서 우리 탄 차가 가다서다를 반복했다.사고차량을 있어서 교통경찰들이 교통질서를 잡아주고 있었다. 사고차량을 보니 남의 일같지 않았다. 올때 길이 미끌어 급제동한것이 차가 돌면서 나무에 처박아 한쪽 헤드라이트가 터지는 경미한 사고를 경험했던 우리들이니 속이 더 조마조마했다. (제발 무사하게 집까지 가게 해주세요! )   내가 앉은 도요다차는 마구 내리는 눈에  작동이 잘 되지 않아 자주 세우고 손으로 차유리에 매달린 눈덩이를 치웠다. 눈내리는 흑룡강지역을 벗어나 길림지나니 눈개비가 내리면서 앞에 안개가 폭 끼여 속도를 낼수 없었다. 눈과 비와 안개속을 뚫고 집으로 오는 우리 로정은 당승이 서천으로 불경가지러 가는 길만큰 험난하기만 했다. 차안에서 슈퍼에서 사온 간식들로 대충요기하면서 귀가길을 재촉했다. 간신히 교하지역을 벗어나 하발령을 넘고 연변경내에 들어오니 언제 눈이 오고 비가 왔던가싶게 도로사정이 좋아 고향의 정다움을 더더욱 느끼게 되였다.   할빈서 연길까지 장장 12시간 넘어 걸렸으니 그 지루함이란 상상할수 없었지만 눈내리는 할빈을 출발한것이 너무나 잘한 일이였다. 오랜 시간 차 운전하느라 아나운서가 고생이 막심했다. 무사하게 집까지 오게 하여 감사한 마음이다.    저녁 9시  집에 도착하여 피곤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직장에 출근하니 거위털같기도 하고 활짝 피여난 목화송이 같은 눈이 하늘에서 하늘하늘 춤추며 내려 땅에서 녹는것이 교통이 두절될것만같았다. 아니나 다를가 연변, 장춘,길림지역에서 내린 큰 눈으로 하여 24일부터 장춘-연길구간 고속도로 운행도  중지되였고 주내의 려객뻐스선로운행회복도 교통운수관리부문의 통지를 기다려야하는 실정이였다. 연길공항은 25일 오후 3시까지 전반 항선 운행을 중지하기로 잠시 결정하고 날씨변화를 보아가며 3시후부터 정상적인 운행을 회복할 예정이라니 연변으로 나오는 하늘길과 땅길이 다 막힌셈이니 우리가 하루 연체했더라면 새장에 갇힌 새신세가 될뻔했다.고난의 할빈행! 내 인생에 깊은 추억을 남긴 장도행차다. 앞으로 일기예보를 보아가면서 교통수단을 잘 리용하는것이 현명한거라는것을 고난의 할빈행에서 직접 체험했다.
292    한잔의 커피를 둘이서 함께 하는 순애보 댓글:  조회:4803  추천:42  2010-06-15
한잔의 커피를 둘이서 함께 하는 순애보                         한태익    고희에 안해사랑을 책으로 엮은 리상각시인을 방문하고  로시인의 순애보같은 사랑에서 감동을 받았다.         수천권의 책을 소장한 서재에서 리상각시인은 반갑게 저희들을 맞아 주었다. 리시인옆에는  50년너머 환난을 같이 해오신 사모님이 맴돌고 계셨다. 훌륭한 안해로서 창작의 동반자로서 함께 해오신 사모님이 몇해전에 갑자기 정신장애가 와서 기억망각증이 심하시다. 그래서 리시인님이 항상 옆에서 보살펴주어야한다.출국해도 출판모임이 있어도 남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리시인은 흔쾌히 부인과 동반한다.   리시인님은 우리들한테 이전엔  부인이 알뜰히 챙겨서 과일이랑  커피랑 내오던걸  손수 하신다. 리시인이 주방에 나가 만들어오신 커피를 마시며 우리 셋은 화기애애하게 연변시조시사사업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가 커피잔을 들고 마시니 사모님이 말씀은 안하시는데 커피를 마시고 싶은 행동을 하신다.   리시인은 우리 먼저 제꺽 눈치채시고 자신의 커피잔을 부인의 손에 살며시 쥐여 주신다. 부인은 동심이 담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커피한모금 마시고 커피잔을 돌려주신다.  로부부가 커피한잔을 나누어 마시는 모습이 그토록 감동깊게 다가왔다.한잔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습은 로부부사랑을 담은 한폭의 수채화같았다.   리시인은 부인과의 사랑을 담은  책 출간회를  인츰 하게 된다면서 같이 간 우리들한테 책을 선물하시였다. 저한테는 자택방문이 처음이라며 근자에 출판한 <<뼈다귀>>란 시집에 친필싸인까지 해주셨다. 그러며 안해와의 사랑을 담은 에세이책은 싸인안한 리유를 설명하고  주는것이였다.   리상각에세이 <<그리는 달>>은 리시인이 갑자기 불어닥친 안해의 불행에 당황하다가 사랑의 에세이집을 써서 안해를 위로해주자고 고희의 나이에 추억을 더듬어 필을 든것이라한다. 안해와의 첫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50여년간의 부부사랑을 쓰고는 그 초고를 정신장애로 기억을 상실한 안해에게 보이면서 기적을 불러 오지 않을가 하면서 밤이 새도록  집필에 몰두했단다. 안해가 자신의 사랑수필을 읽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니 기뻐했다. 치매가 온 부인, 그 부인의 수발을 드시는 로시인은 시인이기에 앞서 훌륭한 남편이시고 좋은 동반자였다.   시인의 감정고백이 진솔하게 담긴 에세이집에는 책제목의 <<그대는 달>>이란 안해에게 바치는 서정시가 있어 감명깊게 읽었다. 그대는 달이외다 아득히우러러 바라만 볼수 있는 꿈에도 가까이 다가설수 없는 그대는 저 하늘의 달이외다   그리워도 기다려도 오지를 않는 불러도 소리쳐도 대답이 없는 먼먼 하늘끝에서만 굽어보는 그래서 그대는 예쁜 달입니까?   너무도 차가와요 너무도 야속해요 외로운 이 밤 바라보느니 아, 눈물만 하염없이 흐흡니다.   50여년전 안해의 아리송한 절연편지를 받고 가슴아팠던 시절을 몇십년이 지난 후날에 추억하며 지은 시란다. 실연의 감정과 그리움의 감정이 함뿍 담긴 시에서 리시인의 련인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읽을수 있었다.리시인의 사랑수필을 한국의 황송문시인이 <<문학사계>>2006년 17호부터 20호까지 연재한후 그 반향이 너무 좋아서 에세이집으로 묶어 출간하였다.    리상각시인은 칠순이 너머 순애보나 다름없는 에세이집을 만들어 부인에게 선물함으로써 황혼사랑의 찬가를 엮었다.리시인이 우리와 재미있게 이야기하니 부인님은 시인이 앉은 쏘파옆에서 자주 맴돌고 있었다.리시인님도 부인이 옆에서 맴도는게 오히려 덜 근심이 되는지 별아랑곳없이 우리와 반갑게 말씀하면서 부인을 알뜰히 챙기신다.로시인은 부인 김세영녀사께서 때론 엉뚱한 행동을 하여 속이 상하겠지만 일언반구의 짜증도 내지 않았다. 정말 조련치 않은 일이다. 한국의 황송문시인도 리시인의 부인사랑에 감동먹고 자신이 이런 일에 봉착하면 참기 힘들었을텐데 하고 마음으로 혀를 내두른적이 있다고 에세에 후기에 감수를 적기까지 했다.   우리의 대화가 좀 오래 흐르니 치매가 오신 부인이 짜증이 나나보다. 하지만 말로는 표현하지 않고 다동증이 있는 애들처럼  끌신을 벗어 쏘파에 놓으며 바꿈재를 노는것이였다. 리시인은 손님이 앉은 쏘파에 끌신을 놓치 말라고 부드럽게 타이르며 하던 이야기를 끌고 간다.그러니 좀 있다가 또 다른 엉뚱한 모습을 보이자고하니 우리는 부랴부랴 책 출간식에 서 뵙겟다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다며 리시인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했지만 이미 일어난 우리는 리시인부부가 정월대보름달처럼 만년을 밝고 둥글게 살아가시길 바라면서 시적사색이 묻어나는 서재에서  리시인님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로시인은 부인과 함께 현관문까지 우리를 바래다 주며 후에 또다시 놀러 오란다.  정월대보름달같은 둥근사랑이 향기롭기만 하다.    //
291    평양기행: 평양대극장에서 본 홍루몽(4) 댓글:  조회:5734  추천:44  2010-06-15
                 평양기행:평양대극장에서 본 홀루몽( 4 )                                       한태익      아름다운 평양에 가보고서야 내가 진짜 촌놈이라는것을 더한층 실감했다. 극장에서 연극은 여러번 보았어도 평양대극장처럼 아릅답고 좋은 극장은 태여나 처음보니 말이다.평양대극장에는 피바다가극단 배우 수백명이 운집해서  가극 꽃파는 처녀 등 고전가극들을 무대에 올렸다.     우리 중국에서 함께 관광온 500여명의 한족들과 함께 평양대극장에서 조선말로 된 중국의 고전가극<<홍루몽>>을 관람하게 되니 우리 문화예술대표단일행들은 저마다 기쁨에 들떠 있었다.가는곳마다 평양미인들이 고운치마저고리 입고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니 기분이 짱이다.눈에 풍년드니 마음이 싱그럽다.    상해, 강소성, 절강성 등지에서 온 500여명의 관광객들속에는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싸운 로전사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나이 팔순을 바라보는 이들가운데는 자식들의 부추김을 받으며 가슴에 훈장을 달고 오신 할아버지들이 많이 계신다. 자신의 피와 땀이 슴배인 나라를 죽기전에 다시 한번 찾아와 보기싶어서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찡해났다. 청춘을 전쟁으로 보낸 저 할아버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가? 지금도 저 할아버지들은 전쟁을 바라고 있을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된다.전쟁을 껵어본 사람들이 더 평화를 갈구하기마련이다.   조선피바다가극단에서 중국고전 홍루몽을 가극으로 무대에 올렸다는 뉴스를 중국에서 매채를 통해 미리 알았다. 그때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조설근이 쓴 명작 홍루몽은 학문적연구가치가 너무도 높아 홍학이란 학파가 생겨나 수많은 석사박사들이 홍루몽을 연구하는데 이것을 조선에서 자기 나라말로 가극을 만들었다니 조선의 예술수준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무대의상과 복장은 중국에서 다 무상으로 제공받았다고 한다.자기 일을 해주는데 밥을 주는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던차 이번 평양방문에서  홍루몽가극을 관람하게 되였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것도 만인지상 일인지하란 말처럼 조선인민이 우러러 모시는 위대한 장군님 다음 두번째로 급별이 높은 김영남위원장님을 모시고 함께 관람했으니 그때 극장의 분위기기 어떻했겟는가는 말치않아도 대단했다. 어제밤 김영남위원장이 상해엑스포개막식참석차 비행기트랙에서 내리는 모습을 테비에서 보니 더더욱 친절감나는 모습인것은 한극장에서 가극을 함께 본 인연이 있어서 그랬으리라!     홍루몽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인상깊은 작품이다. 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시험이 홍루몽주제사상에 관한 연구였다.  홍루몽가극은 관중들의 대절찬을 받았다. 조선말을 모르는 한족관중들은 무대량켠자막에 나오는 가사를 보면서 홍루몽가극무대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때 조선말을 잘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가를 절실히 느꼈다.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고 고국을 관광하니 가는곳마다 말이 통하고 친절하여 내 고향집에 온것만같았다.    홍루몽의 주연 가보옥배우의 가창실력은 가히 최고수준이란 찬탄을 받았다. 조선에서 홍루몽을 가극으로 무대에 올리게 된것은 60년대였다니 근 50년세월이 흘렀다. 그때 홍루몽가극에 가보옥배역을 맡은 분이 지금 생존하여 있는데 지금 나이가 칠순을 훨씬 넘기여 팔순을 바라본다고 한다. 기막힌 인연인지 50년전에 가보옥역을 맡았던 할아버지손자가 이번에 홍루몽가극에서 주연인 가보옥역을 맡았으니 반세기란 시간의 강을 사이두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것이다. 이번 출연을 위해 할아버지는 손자가 가보옥역을 맡아 부르는 노래를 일일히 들어보면서 조언들 주셨다고한다. 이런 사연을 알고 가극을 구경하니 리해가 한결쉬웠고 음악을 잘 모르는 나도 가극이 보내주는 감동에 흠뻑 젖어들수있었다.    조선피바다가극단에서 출연한 가극 홍루몽이 연변예술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손꼽아 기대해본다.      댓글 17 인쇄 | 스크랩(0) //   인생의거울 가극은 조선이 괜 찮치요. 서울말로 뮤지컬인가 하는건데 저는 이전부터도 뮤지컬에는 흥취가 없었지만 락동강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보고싶은 마음이 부쩍 생기네요. 한번 보려 간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10.04.30 10:26 답글 ┗ 락동강 한번 보세요. 저 연길에서 로미오와 쥴리에트를 한번 본적이 있고 이번이 두번째랍니다. 님도 한번보세요 10.05.03 10:50 수정 | 삭제   칠색무지개 오래도록 인상에 남을 좋은 경험들을 많이 하고 오셨네요... 10.04.30 11:26 답글 ┗ 락동강 네 구경하고 집체행사가 많데요. 다녀가시며 남긴 고운자취 향기가 넘침니다. 10.05.03 10:50 수정 | 삭제   란초꽃 우리 말로 된 <<홍루몽>>관람하실 행운이 참 부럽기도 합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10.04.30 22:33 답글 ┗ 락동강 감사합니다. 조선의 예술수준높다는거 실감햇습니다. 10.05.03 10:51 수정 | 삭제   두만강 좋은 구경하고 오셨군요. 부러바 죽겠네요.ㅎㅎㅎ 어느날엔가는 모란봉꼭때기에 올라서서 <내가 왔노라!>하고 소리칠 날이 있겠죠.좋은글 많이많이 부탁합니다. 10.05.01 06:55 답글 ┗ 락동강 님 모란봉꼭대 을밀대에 올라가서 대동강내려다보며 힘차게 소리쳐보세요 그리고 사진남기고 여기에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 10.05.03 10:53 수정 | 삭제   spirit 울님은 참 행복 하신 분입니다.아무나 못가고 아무나 보지못한 공연을 보셨으니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서 위대한 우리 한민족의 여러 공연들을 함께 보는 그날이 돌아왔으면 합니다.외색되지 않고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이 조선이며 중국 조선족이 생활하는 연변이랍니다.한국도 우리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외세의 음악으나 춤들이 판을 치고 이젠 장가못가는 사람들 국제결혼과 함께 한국 토종이 아닌 이방인과 혼혈인이 많은것에서 우리의 한민족의 피도 이젠 국제회가 된가봅니다.우리것이 좋고 우리의 얼이 최고지요.중국고전 명작을 극으로 무대에 올린 조선 그리고 조선 예술은 최고의 정상 10.05.01 11:00 답글 ┗ 락동강 님의 장문의 댓글에서 우리 조선족을 치하하니 신납니다. 사실 이런저런문제도 존재하지만 우리 민족 고유의 습관과 문화를 간직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우리말과 글을 살리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리플 감사합니다 10.05.03 10:54 수정 | 삭제   가을천사 락동강님의 글을 읽으면서 덩달아 함께 홍루몽을 구경하는 기분입니다.잼있는 기행문을 잘보고 갑니다. 10.05.01 13:13 답글 ┗ 락동강 님 보아주심에 감사합니다. 항상건강하세요 10.05.03 10:54 수정 | 삭제   연분 이토록 상세하고 자세하게 알려줘서 넘 잘 감상 하였어요...락동강님께서는 이번 여행길에 너무나 큰 수 을 거두었으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겠네요...진심으로 드리구요, 또한 심심으로 되는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거운 5.1절 되세요 10.05.01 15:42 답글 ┗ 락동강 감사합니다. 51절 더 쓰려고 햇는데 두곳의 잔치집에 갔다오니 명절이 다가네요 항상 잘 지우시길 바랍니다 10.05.03 10:55 수정 | 삭제   노을빛 재미있는 기행문 잘 보고 갑니다 10.05.01 15:59 답글 ┗ 락동강 바쁘신 와중에 보시고 리플달앗네요 감사합니다. 10.05.03 10:56 수정 | 삭제   하얀구름 와 그곳에서 그렇게 명망높은 극을 관람하시다니요 락동강님 이번 여행에 추억이 많겠지요 그추억 울님들과함께 나누니 더욱 인상이남을 거겠지요 부럽네요 미있는 평향기행 잘 읽었어요 거운 오후 시간 되세요 10.05.06 14:18 답글   //
290    평양기행: 조선 평양의 세계최고(3) 댓글:  조회:5385  추천:48  2010-06-15
            평양기행: 조선 평양의 세계최고 ( 3 )                                          한태익     세계최고라고 부르는것을 내 눈으로 처음 본것은 스므살때이다. 현성의 고중을 졸업하고 모두다 농촌에 돌아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세월인지라  농촌이 고향인 나는 집에 돌아와 농사를 하였다.  수많은 농촌청년들과 하향지식청년들이 있는데 나는 운좋게 촌단지부서기와 촌의 말단직이지만 현금을 가지고 있어서 중책이라 불리는  출납책임을 맡았다.    어느 하루 촌의 당지부 안동수서기가 나를  불렀다. 중국에서 농업의 기발인 대채로 참관을 보낼테니 농촌에 영원히 뿌리박겠는가고 진지하게 담화하는것이였다.  <<네. 영원히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하겠쓰꾸마>> 나의 입당이 당지부대회에서 통과되고 공상당위비준을 기다리는 때인지라  나의 입에서는 추호도 주저없이 혁명적인 대답이 나왔다.속으로는 입당하고 대학에 추천받아 가고 싶어하면서도 입으로는 이런 말이 서슴없이 튀여나오니 사람마음이란 간사한거같다. <<좋소! 정말  새시대훌류한 농촌청년답구만! 당지부에서는 동무를 대채참관을 보내기로 결정하였소! 이제 대채참관을 갔다와서 대채의 혁명정신을 고향땅에 꽃피워주오>> <<네 !안서기 말씀을 명심하겠쓰꾸마!>  그때 나는 얼마나 기뻣던가! 북경에도 가본다니 천안문도 보고 장성에도 오르겟으니 생각만해도 밤잠을 잘 이룰수없었다. 마을 처녀들을 은근히 부러워 추파를 보내는것같아 어깨가 으쓱해났다.참과일행들과 함께  대채참관을 가서 호두산에도 올라보앗고 참관길에 청도의 황현의 재무관리경험도 학습했으며 상해 항주 북경도 유람했다. 정말 촌개구리가 눈을 떠가는셈이였다. 북경에 갔다 만리장성에 오른것이 내가 세계제일을 처음 본것이 아닐가 생각된다. <<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 모주석의 시사가 생각났다. 유람하고 기념품파는데서 몇원짜리 장성모조품을 삿는데 그것이 밀랍으로 된것이여서 참관내내 밀랍장성이 가방에 부서지는것같아서 신주단지모시듯하고 다녔다. 내가 장성에 오르더니 다시 내가 장성을 지고 다니는꼴이 되였다. 그리고 수많은 세윌이  흘러 운좋게 올해 조선평양에 가서 세계최고를 목격하였다. 세상에 태여나 55년 살면서 난생 처음 땅밑 150메터밑을 들어가보았다. 승강기를 타고 땅밑으로 내려가는것이 장관이였다. 사선으로 내려다 보니 150메터 맨앞사람이 조그마하게보였다. 그렇게 지하철에 내려가 지하철역을 보니 말그대로 지하궁전이였다. 벽화도 너무나 찬란하였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구경하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지하철빵칸에 올랐다. 빵칸에 올라 처음 조선평민들과 접촉하였다. 우리와 함께 간 사람이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나도 무슨 냄새인지 몰라도 냄새를 감지하였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냄새였다. 호텔에서 나는 향수친 그런 깨끗한 냄새는 아니였다. 하지만 나는 그 냄새가 그리 싫지 않았다.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전차빵칸(조선 국제열차에 앉으며 표검사하는 분이 하는말에서 기차칸을 빵칸으로 들었음 틀렷다면 정정하려함)에서 나는 냄새! 목욕을 자주하지 않은 사람들도 타는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가 사람들이 남겻거나 남기고 있는 사람사는 냄새가 아닐가 생각하니 그 냄새가 싫지가 않앗다. 이  냄새를 맡으며 정다운 지하철승객들과 함께 멀리 종점까지 가고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하철을 탄 시간을 고작 십분이엿다. 나는 내가 최고를 경험한 이 십분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태여나 가장높은곳으로 올라간곳이 조선평양에서였다. 조선평양 주체사상탑은 화강석으로 쌓은 150메터우에 밤이면 훨훨 타오르는 커다란 홰불을 올린것이 20메터라니 탑총높이는 170메터이다. 탑안내원의 살뜰한 안내로 엘리베트타고 석탑속으로 올라가는데 엘리베트안에 단추를 눌러주는 이쁜 안내원녀성이 아이를 데리고 있엇다. 정말 귀엽게 생긴 어린이였다. 평양에서 만나는 여자들마다 다 이쁘니 예로부터 평양은 미인이 많았다는것이 실감된다. <<넘 귀엽네!>> 누군가가 어린이고사리같은 손에 사탕인지 껌인지 쥐여준다. <<고맙습니다!>> 어린이는 목소리도 챙챙 인사성도 밝았다. 우리 일행가운데 롱을 잘하는 누군가가 어린이한테 악의없는 지꿎은 장난을 걸었다. <<고토리 어디에 있습니꺄?>> 천진란만한 어린이는 주저없이 자신의 아래도리를 고사리손으로 가리키며 챙챙하게 말했다.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이의 씩씩한 대답에  우리 일행은 웃음을 터뜨렸다. 주체사상탑정상에 올랐다. 대동강너머 인민대학습당이 한눈에 보이고 김정일장군이 인민군대를 사열하던 광장도 보였다. 석탑으로 최고높이라는 150메타석탑에 오르니 동평양 서평양이 다 보이고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이 청룡마냥 굽이굽이 느리게 흐르는것이 장관이였다. 나는 아름다운 평양의 전경을 굽어보고 또 보았다. 또 내눈에 높은 건물이 안겨왔다. <<저 하늘에 높이 솟아있는 고층청사가 김일성대학청사지요?>> <<맞습네다. 혁명의 수도 평양이 처음이신것같은데 잘 아십네다>> <<네 안내원동지의 안내를 받으며 안내차에 앉아 김일성대학정문을 자주 지나갔습니다. 대성산렬사릉도 가고 만수대의사당에도 가보고요>> 내 어찌 김일성대학을 잊을수 있으랴! 62년전에 김일성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한 저의 형님이 발자취가 남겨진곳이니 더더욱 잊을수 없다.    나는 행운스레 중년의 나이에 나로는서 맨처음 세상에서 가장 깊은 150메터땅속 지하철에 내려가 기념사진을 남겼고 땅우 세상에서 제일높은 석탑 주체사상탑에 올라 평양의 김일성대학을 배경으로 영원히 잊을수 없는 기념사진을 남겼다.조선평양에서 뜻깊게 세상의 최고를 경험한것은 나에게 잊을수없는 추억을 남겨줄것이다.     댓글 21 인쇄 | 스크랩(0) //   인생의거울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갔을때에는 지하철이 없을때인데 좋은 구경 하셨습니다. 석탑에는 올라가 봤구요.........미중부족이 모향산에 가서 9층 폭포를 가지 못하고 돌아 온것이 한이됩니다......김일성관과 김정일관에서 반나절 넘게 보내고 나니 점심먹고 다른 일이 있어서 모향산에서 인츰 내려 왔습니다. 다시 한번 가고 싶어요. 10.04.30 10:18 답글 ┗ 락동강 저와 똑같네요. 묘향산 절경은 많이 보지 못햇습니다 고운 봄비가 오는데 조선에서 가장 위대하게 모시는 김일성선물관과 김정일선물관보니 반나절이 다 지나가서 계곡폭포에서 맥주를 보며 아름다운 묘향산절결을 눈으로 바라만 보았습니다. 후에 배낭메고 텐트가지고 묘향산에 가서 며칠머무르며 등산하고 싶습니다 다녀가심에 감사합니다 10.04.29 09:46 수정 | 삭제 ┗ 두만강 평양띠테는 30여년전부터 있었어요 ㅎㅎㅎ 케해서 뭐하다 띠테두 못탔어요. 이사람?ㅎㅎㅎ 10.04.29 17:10 ┗ 인생의거울 가이드가 안내를 해줘야 가던지 말던지 하지 혼자 마음대로 나갔다가 썩어지자구........ 10.04.30 10:19   칠색무지개 나의 기억속에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평양지하철과 주체사상탑....덕분에 그 때를 떠올려보는 좋은 시간을 만들었습니다.감사합니다. 10.04.29 10:02 답글 ┗ 락동강 님 평양다녀오셨네요. 사람마다 평양가면 필수코스지요.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의 자랑을 세상에 알리고요. 댓글 감사합니다 10.04.30 07:02 수정 | 삭제   란향천리 락동강님 글 읽고 주체사상탑 가 보고 싶은 생각 불붙습니다. 10.04.29 10:19 답글 ┗ 락동강 불붙는 생각을 행동에 옮겨 보시길 바랍니다. 녀사님 각도에서 본 평양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특히 평양남자들에 대한 인상도 담으면 더 좋고요.감사합니다 10.04.30 07:04 수정 | 삭제   天池 저도 시간타서 평양을 다녀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평양에 미인들을 아름다운 드레스로 더 이쁘게 주고 싶습니다 10.04.29 17:05 답글 ┗ 락동강 천지님의 평양견문보고 싶습니다.기발한 착상 반짝이는 아이디어같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10.04.30 07:08 수정 | 삭제   두만강 아이구~기차다 ㅎㅎㅎ 부러워 죽겠네 ㅎㅎㅎ 어쩜 저리도 좋을가?ㅎㅎㅎ 멋진려행기에 머물다 갑니다. 하회를 눈빠지게 기다립니다. 10.04.29 17:08 답글 ┗ 락동강 두만강님 하회를 기다린다니 또 써야하는디 뭐 쓸가요? 땔감은 많는데 쌀이 부족한지 밥짓는 재주가 없는지 인차 써안지네요. 보아주시여 감사합니다.항상 건강하세요 10.04.30 07:08 수정 | 삭제   spirit 평양 메트로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아름다운 서브웨이로 정평이 나있지요.타보고 싶네요.그러나 아무나 못가는 나라 조선.참 님은 어디든지 가실 수 있으니 참 좋으시겠네요.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서 전쟁시에 지하로 숨어서 문을 닫으면 핵 공격에도 끄떡없다고 합니다.한국 서울 지하철은 교통의 수단으로 서울의 지하는 지하철도로 얽혀있지요, 평양은 교통수단과 방공호 시설로 설계되어 있고 군사 비밀이라 더이상은 개방을 안한다고 하드군요.지하 200미터 지상 참 좋은 구경하셨네요. 고소공포증은 없으셨는지요?님을 통해서 평양을 조금이라도 더 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영혼. 10.04.29 19:51 답글 ┗ 락동강 영혼님 자상히 보아주시여 너무 고맙습니다. 평양기행으로 많이 모자라는글입니다.그저 내가 본것을 수박겉핣기식으로 옮겨서 미안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10.04.30 07:09 수정 | 삭제   연분 평양기행문 제3집도 잘 봤습니다...낙동강님께서 난생 처음으로 세상에서 제일깊은 지하철에 들어 가 보셨고, 또 처음으로 세상에서 제일높은 탑에 올라가신데 대 진심으로 드리며 또한 함께 거워지는 기분입니다...덕분에 평양 구경도 잘 했어요 행복한 밤 되세요 10.05.01 00:58 답글 ┗ 락동강 다녀가심에 감사합니다. 돌아올때 단동에 들려 지원군군사박물관을 참관하고 깊은 인상을 받앗습니다. 10.05.03 10:31 수정 | 삭제   가을천사 난 북경에 몇번은 댕겨봐도 장성구경을 한번도 못해봤담니다.락동강님의 덕분에 앉아서 평양의 세계제일의 경관구경을 잘하고 갑니다.하회를 서둘러보려고 담글로 넘어가봅니다. 10.05.01 13:06 답글 ┗ 락동강 천사님 다녀가셧네요. 북경에 이제 가면 장성에 가보세요 장성에 오르지못하면 대장부가 ㅇ아니여라 말도 잇는데요 건강하세요 10.05.03 10:32 수정 | 삭제   무궁화1 오늘 우연하게 코스모스 자작글자작시방에 들리였더니 락동강님의 "조선평양의 세계최고" 란 글제목이 저의 시선을 흡인하네요. 단숨에 읽어내려가면서 마음속으로 다시한번 고려민족의 후손으로 태여난 무한한 자부심과 자호감을 느꼈어요.동시에 락동강님의 덕분에 꿈에도 생각지 못한 평양의 세계최고의 경관을 관람도하고요. 좋은 글 감했습니다. 거운 휴일 되세요. 10.05.02 10:44 답글 ┗ 락동강 그래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한민족 한피줄이지요. 51황금연후 잘보내시길 바랍니다. 10.05.03 10:35 수정 | 삭제   하얀구름 락동강님 평양기행 너무 재미있네요 님의어렸을때 최고라고 느끼시던 꿈속의 나라를 가보셨으니 그맘 얼마나 설레였을가 짐작이 가네요 님의소원을 푼셈이네요 님의글 보니 평양에 가고픈맘 더 박절 지네요 세계에서 제일 높은탑에 올라 세계를 둘러 보고 싶네요 님의덕분에 평양구경 한것같네요 고마워요 건 시간 되세요 10.05.06 14:04 답글   //
289    평양기행: 말을 가장 적게 한 열흘(2) 댓글:  조회:4792  추천:33  2010-06-15
          평양기행: 말을 가장 적게 한 열흘(2)                               한태익    조선에서 태양절을 국가적 명절로 크게 치르는지라 4월10일 순안공항은 조선을 찾는 외국사람들로 북적이였다.까다로운 세관검사를 통과하고 나오니 남자안내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22년간 군인생활을 한 미남자가 우리 대표단안내로 나섰다.   우리 대표단은 단독안내를 받으며 차에 오르니 단장이 우리 일행을 한분 한분 안내원에게 소개시켜주었다.안내원동지의 인사말씀이 있엇다. <<조선족문화예술연구소대표단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평양에 오신것을 열렬히 환영합네다.  지금  위대한 김일성수령님의 생일로 제정된 태양절행사축제로 온나라가 들끓고 있습네다. 여러분들한테 꼭 알려야 할 한가지 주의사항이 있습네다. 조선에 오면 조선의 규례를 잘 따라주셔야합네다.>> <<그래야지요.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한다고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조선에 와서는 언행에 특별히 조심해야한다. 그래서 이번 평양행 열흘간은  내 인생에서 말을 가장 적게 한 열흘이 되였다. 날마다 말하고 글을 보고 쓰며 살아온 저에게는 자신을 추수르는 좋은 기회였다. 처음에 말을 적게 하니 좀 답답한감이 들었지만 하루이틀 지나니 그렇게 편할수가 없었다. 걸려오는 전화도 없고 어디에 전화를 하기도 어렵고 하여 우리 모든 일행은 철저하게 안내원동지의 행사지시에 따를수밖에 없었다.   요즘 말이 많는 세상에서 말을 적게 하니 마음이 몹시 차분해졋다.평양에 있는 열흘간 우리 일행이 가장 많이 한 말은 남자나 여자나 다  들어도 싫지 않는 유머와 육담이였다. 내가 본 조선의 안내분들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유머도 잘하고 육담을 하는데는 선수였다.  아름다운 묘향산으로 가는 길에서엿다. 중국 로씨야 일본 등 나라에서 온 동포대표단이 관광차에 합석했다. 안내원 여럿이 따랐는데 여자안내는 한분이였다. 평양의 미인이였다.평양미인의 고운입에서 나오는 말도 미인처럼 고울거같았다. 조선의 열두삼천리평야가 나타나는 풍경을 감명깊게 바라보고 잇는데 여자안내원이 마이크를 잡고 인사하고 프로는 넘기는데 그 말이 걸작이였다.목소리는 아나운서못지않게 고왔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코가 큰 남자는 그것도 크다고 합네다. 그것도 큰 남자는 밤에 그일도 잘한다고  합네다.여기에 여러해동안 우리 위대한 당과 수령님께 충성의 마음을 안고 기념상패를 만들어가지고 국가적행사에 참가하신 재일동포한분 있습네다. 여러분께 소개합네다. 박수!!이분의 코를 한번 보세요. 코가 보기좋게 매우 크지요?>> 일행은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로 동감한다. <<코도 크니 노래도 매우 잘할겝니다.노래 부탁하는것이 어떻습네까? >>    또 박수가 터져나온다. 코큰 일본동포남자는 코가 커서 공명이 잘 되는지 걸걸하게 노래를 잘해서 재청까지 받았다.유머는 생활의 비타민이였다. 삭막한 분위기를 180도 반전시킬수 잇는것이 우리 생활속에 녹아잇는 유머가 아닐가 생각된다.   우리 일행이 열흘간 유머와 육담도 하지 않았다면 그 긴시간을 어떻게 보낼을까? 말이 많은 집 장이 쓰다하는데 30여년을 사업하면서 내가 한 수많은 말로 하여 누가 상처를 받지 않앗는지? 무심히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오줌누다 맞아죽는 봉변은 없었는지?이글을 쓰면서 내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은 모든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싶다. 쓸데 없는 말이 탈이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주어담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할말 못할말을 가리지 않고 입으로 마구 내밷는다.그래서 어떤 사람의 입에서는 구레가 나가는지 똥이 나가는지 모르겟다고 한다.    사람의 배에 말이 적고 밥이 적어야한다. 과식은 불식이라고 많이 먹어도 탈이다. 여기다 보충한다면 요즘 먹고 놀기좋아하는 일부  우리 조선족의  배에 술이 적게 들어가고 담배연기는 아예 들어못가게 원천적인 차단을 해야한다.술로 인하여 조선족중년남자들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근데 요즘 술잘마시는 여자들도 많아지니 조선족사회장래가 근심된다. 말이 적었던 평양의 열흘은 내 인생에 잊지못할 추억을 남겨줄것이다.  
288    모란봉서 혼자 울며 형님을 불러보았다 댓글:  조회:4989  추천:44  2010-06-15
( 평양기행) 모란봉 을미대서 혼자 울며 형님을 불러보았다 1                                  한태익      4월9일에 집떠나 19일까지 조선족문화예술연구소대표단일행으로  평양에 다녀왔다. 심양공항에서 조선 평양으로 가는 조선고려항공에 오르고서야 아무 사람이나 갈수 없는 조선 평양을 간다는게 실감났다.   비행기가 도선공항서 리륙하여 한시간도 안되여 평양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지만 국경을 사이두고 있다보니 에둘러 가야했다. 국경이란 사람들한테 무엇인가?평양가는 로정은 단동--평양행 국제열차편과 심양--평양 항공편뿐이였다. 그래서 갈 때는 항공편, 올 때는 기차편리용키로 하고  전날 연길에서 밤기차타고 십여시간넘어 달려 심양에 와서 에돌아가야했다.    난 직장에 출근하면서 박봉에 허덕이다 보니 가게생활에 보탬을 하려고 안해의 짐군이 되거나 나 홀로  조선에 7차나 다녀왔다. 무산 회령 혜산 원산 함흥 등 많은곳을 다녀왔지만 평양만은 처음이였다. 나에게 있어서 평양은 남다르게 특별한곳이다. 60년전 내 친형님이 윤동주시인이 다니던 중국 룡정대성학원에서 공부하다  특별 추천받아 평양 김일성대학에 류학하여  공부하다 6.25가 나니 강건군관대학을 졸업하고 전쟁에 참군했다.대위로 산화했지만 아직까지 어느때 어디에서 어떻게 희생되였는지 모른다.   나는 누구도 몰래 60년전인 1951년10월16에 조선전쟁 최전선에 형님이 쓴 편지를 가지고 갔다. 신바닥밑에 넣고가서 서캐를 훝는 세관검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나는 형님의 편지를 가지고 평양팔경의 하나인 모란봉에 올라 을밀대를 찾았다. 을밀대서 내려다 보니 부벽루를 감돌아 흐르는 대동강은 푸른데 나처럼 말이 없었다. 저멀리 형님이 60년전에 다녔던 김일성대학청사가 한눈에 보인다.   나는 누구도  몰래 형님이 전선에서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대동강에 띄워보냈다. 그리고 가지고 간 석냥짜리 북경얼궈토우술을 병채로 강에 띄워보냈다.앞길이 창창했던 친형님을 이렇게라도 추모하고 싶어서였다. <<형님! 한번도 보지 못하고 한장밖에 남지 않은 사진으로만 보시던 형님을 찾아 이 동생이 형님이 희생되여 60년만에 형님의 발자취가 남겨진 조선평양에 왔습니다. 형님! 형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동생이 속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나요?>>   천임함사태로 삼천리금수강산은 너무나 긴장한 분위기다.다시는 동족이 싸우는 전쟁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동강푸른물에 손을 적시며 조선 어느땅 어느골짜기에 파묻혀있는지 모르는 친형님을 마음껏 소리쳐 부르지 못해도  낮게 불러보았다. 저도 몰래 내 양볼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누구를 원망하랴! 없어야 할 전쟁을 원망해야지! 내가 이러할진대 시골서 쌀을 팔아 공부시킨 아들이 조선최고대학에 갔다 전쟁에 나가 25년간 무소식이여서 날마다 눈물로 보내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술과 담배로 속탄 마음을 달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어머니.아버지! 부모님 찾아오지 못한 평양에 이 막내 아들이 와서 부모대신 형님혼을 위로합니다.이제 어디서 외롭게 떠돌던 형님혼이 부모님찾아 갈거니 시름놓으세요!)   나는  조선안내원이 따라붙는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아름다운 모란봉을 오르고 내렸다. 지금은 외로운 고혼이 된 형님의 허락이 없이 대동강에 띄워보낸 형님 편지의 원문을 한자도 고치지 않고 아름다운 코스모스화원에 올림을 존경하는 회원분들이 널리 양지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그어떤 리념고취가 목적이 아니고 60년전 당시전쟁상황자체를 알자고 올린거고 이제 연재될 평양기행도 내가 본것을 쓰니 한국에 계시는 회원분들이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부록: 저와 31살 이상인 형님 한태건대위가 1951년  최전선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전문          아버지께서 받아 보시오.     아버지 오래동안 편지를 올리지 못하였습니다.그동안 소식을 몰라서 얼마나 기다렸으며 근심하고 계셨습니까? 살았는지죽었는지를 몰라서 !..........그러나 저는 몸건강이 우리의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싸움터에서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며 소탕하는 마당에서 언제나 용감하게 영웅적으로 싸우고있습니다. 아버지! 미제국주의자들이 리승만 괴동동당들을 꾀하여 우리 조국 강토에 동족 전쟁의 내란을 도발한후 우리 주곡의 앞에는 어느때보다 무서운 위험이 닥쳐왔던것입니다.조국의 자유와 독립과 영예를 수호하는 전인민적 투쟁이 벌어진 그때에 저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찾으며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작년 7월에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전선에서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압잡이들을 때려부시는 싸움터를 탄원하여 오늘에 이르까지 조국과  인민이 주는 전투임무를 영웅적으로 완수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저는 공화국과 김일성장군께서 주시는 모든 과업을 조국과 인민앞에서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1년이 넘는 동안 수십차 수백차에 걸친 가열한 전투에서 적들을 소탕하였으며 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듭하였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직까지 지금과 같이 기쁨과 영광속에서 생활하여 보기는 처음입니다.또 지금같이 아무런 근심도 없고 태평스레 생활하기는 처음입니다.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아버지는 체험하여 보지 못하시여 모르실것입니다. 싸움터처럼 안전한곳은 세상에 없는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근심도 아무런 고통도 없는곳입니다. 다만 일편단심 원쑤들과 싸워서 목숨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답게 청년답게 아니 또  조선사람답게 성스럽게 싸워 조국과 인민앞에 많은 공을 세워 보겠다는것뿐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가르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또 우리의  계급을 위하여 언제나 몸을 바쳐싸워야 한다는 >>말씀을 가슴속에 조각처럼 새겨 명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1 저는 옛적에 일하고 글배우던 태건이가 아닙니다.저는 원쑤들에게 대해서는 포악하고 무서운 사람이지만 동지들에게  대해서는 순진하고 인자한 사람이 되였습니다. 저는 옛적과 같이 마음이 약하고 수집음 청년이 아닙니다. 아버지! 저는 수많은 싸움에서 과감성과 결단성이 있는 콸콸한 청년이 되였습니다.어떠한 곤난과 난관이 있더라도 타개할수 있는 능숙한 수완가로 되였습니다. 얼마나 기쁘며 전도유망한 일입니까? 아! 정말 그동안 속을 많이 태웟지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서 말입니다. 저도 그동안 집소식과 고향소식을 몰라서 답답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저와 지금 함께 생할하고 있는 동무들 가운데는 작년 겨울 화룡진에서 훈련받던 동무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화룡지방과 천수촌 사정이야기를 대강 들었습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 우리 집에 가본 동무는 없으며 아버지를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그 동무들 가운데서 우리 마을을 많이 왔다 갔다했으며 심지어는 우리 집뜰악에서 휴식도 한 사람이 있는것을 여러가지로 물어보는 가운데서 알아냈습니다. 뜰악에서 휴식하는 동안 가작간옆에 소말뚝이 있고 가작간뒤에 도야지우리들이 있는것을 보았다고 하며 마을 한가운데 웃물이라 하는것을 보아 우리 집옆 우물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곳이 우리 집이라고 하니 그들은 놀라면서 그런줄 알았으면 들어가서 한턱 잘 먹을걸 잘못하였다고 하여 우리들은 한바탕 웃음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제가 알고 싶은 소식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천리타향에 아들을 보내고 눈물로 날을 보내시던 어머니께서 더욱히 펀지조차 못받으시는가운데서 백발이 되였으며 언제나 수심속에서 날을 보내실것입니다. 그리고 형님 오빠하고 기다리던 동생들도 많이 컷을것이고 변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세월은 말할수 없이 빠른거 같습니다.제가 집에 가서 놀다가 다시 평양으로 떠난 다음 벌써 두번째 추수를 하시겠습니다. 작년도 농사와 금년도 농사를  잘 지으셨는지? 나의 머리속에는 그 농사하는 형편이 떠 오릅니다. 봄이면 밭갈고 씨뿌리며 여름이면 가꾸어 가을이면 추수하는 그 모든것든 정말 재미가 있는것입니다. 아버지! 재미있는 고향의 소식을 많이 전하여 주십시오.가정형편과 동생 사정들을 잘 설명해주십시요. 룡정에 계시는 3촌께서는 아직도 해란촌에 계시는지 그주소를 알려주십시요. 아버지! 저와 평양에 같이 있는 박승영동무는 전쟁이 시작된 다음에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며  박재수동무는 작년 9월 락동강전선에서 만나보았는데 포병소위로서 근무하고 있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화룡진에 있는 김대학생 김주석동무는 평양 제1군관학교(간겅군관하교)에서 헤여진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이상 세동무의 소식을 아는대로 알려주십시요. 아버지!편지를 자주 올리겠으니 언제나 이 펀지주소대로 종종 편지를 올리기 바랍니다.                              조선인민군우편함 244호 가의(ㄴ)                                            태건 올림                                    1951년 10월 16일                                 조선인민군군사우편 제3310호  
287    한태익기자 아끼는 수석 댓글:  조회:4829  추천:35  2010-06-06
                  한태익기자가 아끼는 수석                                          --나는 무엇일까요?
286    소흥 항주서 우리 다시 만나 댓글:  조회:4041  추천:35  2010-06-03
              소흥 항주서 우리 다시 만나    5월 29일과 30일, 중앙민족대학 서영섭교수 부부가 조선어특강차 소흥과 항주로 오셨습니다.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와 남방아리랑에서 조직한 행사여서 수석인 최성호씨도 우리 개개인께 드릴 선물을 듬뿍 안고 강소 의흥에서 달려 왔습니다. 수석인인 우리 만남이 이루어지고 우린 소흥과 항주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285    화목한 장수 가정 댓글:  조회:4367  추천:43  2010-05-08
284    수석교실___평원석 댓글:  조회:4742  추천:30  2010-05-05
      돌 한쪽에 산봉우리가 솟고 언덕이 이루어져 있으며 그 옆이나 앞으로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을때 이것을 평원석이라고 한다.      평원석에서 평평한 저끝에 콩알만하게나마 봉우리가 솟아 있으면 산악으로 감상할수 있으며 그러한 봉우리가 여러개 있으면 더 좋다. 또 평면에 패여 들어간 부분이 있으면 늪 혹은 호수로도 보게 된다.       평원석에서 봉우리가 여러개 있고 호수까지 있으면 아마 일품일 것이다.
283    두만강수석회 도문신기동에서 활동(10.5.3) 댓글:  조회:4319  추천:48  2010-05-03
회장님,고문님과 같이 신기동에서 6시간 돌밭을 돌아 한두점씩주었습니다
282    진달래 피여나던 시절에 댓글:  조회:4357  추천:50  2010-05-03
                  진달래 피여나던 시절에    진달래 피여나던 2006년 4월의 봄날에 연변 두만강수석회의 문인들인 김대현과 김철학, 리광인 등이  회장이고 현임 중공연변주위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인 리흥국의 제의와 두만강의 안내로 연길시 대암의 진달래동산을 찾았습니다.   리흥국회장이 진달래 배경속 우리 셋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워낙 촬영애호가인데서 사진이 잘 나왔으나 그 사진을 다시 촬영하니 효과가 많이 떨어집니다. 그래도 잊을수 없는 진달래밭 기념이여서 내 고향 연변의 진달래 철을 맞아 수석코너에 올리여 봅니다
281    동그라미 댓글:  조회:4293  추천:45  2010-04-24
                                     동그라미                                               김봉세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해님도   동그라미                             달님도   동그라미                             돌님도   동그라미                             수석인의   우정도   동그라미                             수석인의   석정도   동그라미                             수석인의   인생도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세상은   아마도   동그란가바
280    소흥 후산풍경구에도 수석관이 있어 댓글:  조회:5291  추천:47  2010-04-19
            소흥 후산풍경구에도 수석관이 있어    지난 4월 10일 아들애와 같이 소흥 후산풍경구에 가서 후산수석관을 찾아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수석이면 한두점 고르자고 했는데 우리와 흥취와 풍격이 완전히 달라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279    나도 한점의 돌 댓글:  조회:4698  추천:57  2010-04-04
나도 한점의 돌          김봉세뜨겁게 달아오른 두만강 기슭 신기동 돌 밭을 온종일 맨 발로 헤매다가   해질무렵 시원한 투석 한 점 두눈 별처럼 빛난다   주먹만한 돌을 가슴에 문지르니 심장이 뛴다   구멍나고 뼈만 남은 너는 아무 말도 안하나 나는 너의 만마디 말을 듣는다   돌 밭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돌이 있으니 그만 나도 한점의 돌이 되고 말았네
278    신철호박사의 애석 댓글:  조회:4461  추천:83  2010-03-14
                      신철호박사의 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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