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야하와의 인연 이 땅의 우리 겨레에 있어서 가야하는 두만강, 해란강과 더불어 유서깊은 역사의 강, 전설의 강, 어머니 강이 아닐수 없다. 내가 이런 어머니 강 가야하와 인연을 맺은것은 40여년 전 철부지 소학시절로 거스른다.
내가 태여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해란강 상류의 한 농촌마을이었다. 뜻하지 않게 4살에 아버지를 여인 나는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야 했다. 그것도 우로 형님 셋에 누나 하나, 여동생까지 6남매가 유일한 일손인 어머니에 의지해 살다보니 생활은 째지듯 가난하여 세 형님과 누나는 중학교 공부도 마치지 못하고 줄레줄레 물러서야 하는 신세. 그래도 막내 남동생이다보니 어려운 살림에도 형님, 누나들의 사랑을 받으며 외로움은 몰랐는데 여름방학이면 노임쟁이 아버지를 모신 나 또래들이 연길공원으로 간다, 친척집으로 간다며 뻐스에 오를 때면 그 모습이 그리도 부러울수가 없었다.
(나도 언제면 뻐스타고 놀러갈가?!)
그 시절 소학교 저급학년인 나에게 있어서 최대의 소망과 꿈은 버스타고 고향밖으로 나가보는것이었다. 그래서 늘 가까운 고향의 서쪽 산정에 올라서 동쪽의 목도고개너머 멀리 평강벌, 비암산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보다 열세살 우인 큰 형님이 “가야하 푸른 물이” 어쩌고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문학을 즐기고 노래를 즐기는 큰 형님은 시골소학교 선생질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가야하노래가 그만 내 여린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렇게 배운 노래가 후날 커서 알게 된, 임효원 사, 동희철 곡으로 된 1958년도 작 “내 고향 좋구좋다”였다.
가야하 푸른 물이 논밭을 적시고
갈모자 산기슭에 소나무 무성한
… … …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왕청땅에 있다는 가야하가 내 어린 마음에 와 닿으며 끝없는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가야하는 어디지?)
대중없는 심산이지만 무작정 가야하가 보고싶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가야하, 가야하는 내 머리에서 떠날줄 몰랐다.
그런 막내가 안쓰러웠든지 하루는 어머니가 도문 북쪽 석현이라는 부근 고장에 친언니네가 살고있다고 했다. 귀가 번쩍 틔었다. 소학교 2~3학년 때던가 나는 어머니를 졸라 종내 석현행에 올랐는데 열차타고 두세간 끝에 석현역에 내리니 외큰어머니댁은 석현에서도 가야하를 따라 북으로 10여리 더 가는 궁벽한 시골마을—룡북이였다.
그래도 좋았다. 꿈결에도 그리던 그 가야하였으니 가야하를 옆에 끼고 걷는 재미가 별 재미였으니 기분은 내내 둥둥 뜨기만 하였다. 노래와 같이 푸른물 일렁이는 가야하는 고향을 흐르는 해란강에 비기면 진짜배기 넓고도 큰 어머니 강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여름방학만 되면 큰어머님네가 사는 가야하 기슭마을—룡북으로 달려갔다. 손우인 외사촌 형님네를 따라 처음 즐기는 가야하 줄낚시질이 좋았고 강가에서 물장구치다가도 가야하가 기슭을 치는 마을아래 저 병풍바위에 올라 맘껏 소리지르기도 하였다. 그 소리가 메아리되여 들릴 때면 제 세상이노라고 퐁퐁 뛰였다. 때론 외사촌 형님을 앞세우고 마을 북쪽의 산정에 올라 저쪽 산너머를 한없이 바라보기도 하였다.
(산 저쪽은 어딜가?)
외큰어머님은 산저쪽 가야하를 거슬러 오르면 목단지가 있고 삼도구가 있고 배초구가 있고 왕청이 있다고 했다. 가야하와 인연을 맺은 어린 시절 나 모습이다.
어언지간 세월속에 묻히여 가야하로의 발길이 뜸해졌다. 큰어머님과 큰아버님이 선후로 세상뜨시고 외사촌형제들이 시골마을을 떠났다. 듣자니 가야하 기슭마을 룡북촌이 많이 황페해졌다고하나 찾아본다는것이 여간 쉽지가 않았다.
하긴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였다. 몇년 전부터 수석에 취해버렸는데 탐석차로 가야하에 자주 다니게 되면서 가야하와의 인연이 다시 맺아졌다. 천교령 아래로부터 대흥구, 왕청구간, 배초구에 이르기까지 다니지 않은곳이 없었다. 소시적 그 시절은 멀고도 먼땅으로 느껴지더니만 40년 세월이 흐른 중년의 오늘에는 문앞이런듯 했다. 탐석행은 배초구 구간의 만천성풍경구아래에서 석현, 도문구간까지도 이어졌다.
2002년 여름이다. 석현~삼도구 구간 가야하 탐석차 룡북촌을 지나게 되였는데 살림집 몇채뿐인 황페한 마을이 시선에 맞혀와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필경 어린 시절의 모습 어리고 꿈이 어리고 소시적 추억이 어린 가야하기슭의 시골마을이었다.
그러던 시골마을 룡북촌으로 지난해부터인가 도문—왕청구간 아스팔트길이 가로 지르니 룡북촌이 달라졌다. 더는 한적한 시골마을이 아닌, 택시나 버스로 잠간새면 가 닿을수 잇는 고장이었다.
그래서일가, 가야하기슭의 이 시골마을을 견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것 같다. 그속에는 한국분도 끼여 개발여지가 큼을 시사하였다. 마을 앞으로 가야하가 흐르고 도문—왕청구간 신작로, 도문—목단강행 철도가 쭈욱 뻗은데다가 마을주위가 온통 부침땅이고 뒤쪽은 산으로 둘러있어 여간 좋은 고장이 아니다. 큰 어머님네가 어찌할 수 없이 묻혀 살던 시절은 옛날이었다. 한국을 다녀와 올해 연길시에 새 아빠트를 잡은 외사촌누님은 동생이 다니던 그때는 가난이 푹 배인 시절이었다고 몇번이고 되뇌이었다.
오늘도 나는 철부지 그 시절 어린 내 마음을 끄당기던 가야하를 가끔 찾는다. 수석찾아 강따라 장장 216킬로미터 가야하를 오르 내릴 때면 내 마음은 하냥 그제날 가야하 기슭마을—룡북촌을 떠나지 않는다. 천교령구간 발원지에서 50킬로미터 내리 흐르다가 천교령에서 북으로 내려오는 춘양하와 합수하면서 제법 강모습을 드러내는 가야하, 대흥구를 지나 왕청현성 서쪽구간에서 소왕청하와 십리평쪽에서 흘러내리는 대왕청하와 합류하여 큰강을 이루는 가야하, 서위자, 중안, 배초구, 삼도구, 석현, 곡수 구간을 스치며 두만강에 흘러 들기까지 도합 78개의 크고작은 강을 포옹하는 가야하, 배초구진 구간에 만천성국가삼림공원을 가지게 한 유서깊은 가야하—이 가야하와의 인연을 나는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두만강, 해란강이 우리 겨레, 내 마음의 어머니 강이듯이 가야하도 잊을수 없는 어머니 강이기만 하다.
또 하나의 어머니 강 가야하, 이 가야하의 유역면적은 6500평방킬로미터, 이 강 유역지구에는 옛날 두만강을 넘어서고 해란강을 건넌 조선이주민의 후예—우리 겨레들이 많이 살고있는데 총인구가 2만 명을 헤아리는 배초구진에만도 1만 1000여명의 조선족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가야하기슭의 시골마을, 석현구간의 한 마을인 룡북촌도 이런 조선족마을의 하나가 아니던가! 만천성 국가삼림공원에 힘입은 룡북촌의 내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리고 인연이 닿은 가야하의 내일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2005년 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