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문화의 추구자 실천자 김대현선생
리 함
1. 서론 오늘날 경제의 신속한 발전에 따른 생활의 지속적인 향상과 생활조건의 크나큰 개선으로 하여 인류의 수명이 보편적으로 연장되면서 사람들의 년령구조는 재래의 인생 50~60년형에서 인생 80년형으로 바뀌여진다. 평생직장은 운운할수 없고 대신 그 자리를 채워가는것은 갈수록 늘어만 가는 여가생활이다. 이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속에서 생활의 풍요로움을 창조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여가문화가 조용히 깃을 펴고있다. 여가란 직업적인 일 혹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로부터 해탈된 결과로 생긴 자유시간, 혹은 개인이 구속없이 임의로 지배할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단마디로 말하면 우리 말로 겨를이나 틈인데 유럽의 서구나라들에서는 20세기 중반에 벌써 여가를 학문적인 경지에로 승화시키면서 여가문화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동양문화권인 한국의 경우에는 여가문화연구가 이미 발자국을 떼고 여가문화협회들이 활성화되고있는 현실이지만 우리 연변에서는 아직 여가문화란 개념조차 생소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현실이다. 이럴 때 여가문화의 열렬한 추구자, 실천자로 각광을 보이고있는 지성인들이 나타나고있는데 그 돌출한 대표인물들중의 한분이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의 원 부주필 김대현선생님이 아닌가싶다. 여가형태로 받아들여지고있는 여가문화에는 각종 놀이, 오락, 게임, 독서, 스포츠, 여행…등 넓은 범위의 생활여가들이 포괄되지만 김대현선생은 트럼프, 마작, 장기, 낚시 등 시간소일을 위한 놀이문화에 비해 보다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삶의 질적가치를 부여한 취미생활—장서, 수석수집, 옛 민속품수집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있다. 여가문화의 일익을 이루는 김대현선생님만의 독특한 삶의 추구라 해야겠다. 1944년 이른 봄날에 당년의 화룡현 서성구 이도촌에서 생의 계주봉을 넘겨받은 김대현선생은 1968년에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마치고 중학교교원을 거쳐 1975년부터 연변인민방송국 화룡주재기자, 방송국기자, 편집으로 삶의 코스를 바꾼다. 1984년 1월부터 방송국 부주필로 18년, 2001년 12월 방송국의 지도책임을 젊은이들에게 넘겨준 뒤에는 임의로 지배할수 있는 시간적여유가 늘어갔다. 이 같은 여가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하며 주어진 삶—여생을 충실히 하기 위해 김대현선생은 상기 취미생활에 보다 집요함을 보이며 여가문화의 새 편장을 엮어갔다. 2. 본론 여가문화의 추구에서 보여주고자 함은 삶의 질을 높여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것일것이다. 여가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기호가 그러하다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영위하다가 흐르는 세월속에서 직장 1선에서 물러나고 보다 많은 여가생활이 주어질 때 이 생활의 여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자기의 경제생활과 취미에 맞는 스스로의 생활습관을 개발하는것은 여생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서 자못 중요하다고 보아진다.
경제의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질도 부단히 높아지고있다그러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여 꼭 삶의 질이 저절로 높아진다고 볼 수 없다. 아무리 생활수준이 높아져도 먹고 마시는데만 신경을 쓰거나 자기만을 위해 살거나 저급적인 취미에만 물젖어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삶의 질은 보잘것 없는것이다. 옳바른 취미기호추구, 여가문화의 풍요로운 창조는 그 사람의 인생포부와 인간다움을 말하는데 김대현선생은 자기의 취미기호를 여가문화속의 장서, 수석, 옛 민속품—세가지로 잡는다. 1)김대현선생의 첫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우리 글로 된 책들을 널리 수집하는 장서(藏書)이다. 김선생은 지난세기 50년대초에 부모님들이 조선 복구건설에 지원해나갔기에 어려서부터 초중을 졸업할 때까지 “연변의 미츄린”으로 불리운 외할아버지—최일선 댁에서 자라야 했다. 화룡시 쟈피거우어구에 자리잡은 선생의 외가집은 과일동산에 둘러싸인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였다. 동년의 그 시절에 김대현선생은 벌써 그림같은 과일동산의 대자연속에 묻히여 아무놀이도 모른채 책보기에만 열중하였다. 소시적의 취미라 하겠다. 선생의 어려서부터의 꿈은 기자나 작가가 되는것이였다. 그래서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다니던 60년대중반에 선생은 장서로 넘친 연변대 도서관에 파묻혀있다싶이 했다. 동년의 꿈과 대학시절의 책보기는 향후 이름난 장서가로 될 탄탄한 토대로, 밑거름으로 되였다. 뜻대로 기자의 생애를 시작한후 김대현선생은 글쓰기와 더불어 “사람들 기억속에 사라져가는 옛 물건—도서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후세에 넘겨주어야”겠다는 책임감, 사명감을 강렬히 느끼였다. 드디여 이는 선생의 소원으로 되여 지난세기 80년대중반부터 책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거리거리의 책 난전은 책수집의 주요무대였다. 이렇게 여러 해가 흐르니 수천권의 책이 모아졌다. 이런 수천권의 책들속에는 문학, 민속, 력사, 정치, 인물전기, 관광저서, 의서 등에 이르기까지 없는것이 없다. 보풀이 일고 누렇게 변색된 이런 책가운데는 연변서 1948년에 발행된 《문화》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말잡지도 있고 50년대초에 발행된 《연변문예》, 《아리랑》,《연변청년》 등 잡지들이 있는가 하면 지난 20~30년대 조선문예작품집들도 수두룩하고 광복후 조선서 출판한 장편서사시 《독로강》,《백두산》 등 시집만 해도 퍼그나 된다. 당년에 모스크바 외문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문서적들도 적지 않다. 또 1915년 중화민국시기 길림성기상자료집, 1956년 북경고적출판사에서 3000부만 출판한 《자치통감》(1권-10권)은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닐수 없다. 김대현선생의 장서를 보면 기준이 있는데 조선문도서는 지난 50~60년대가 위주이고 조선출판물은 지난 70년대 이전을 위주로 한다. “현대문명의 충격과 출판부진, 조선족인구의 감소 등 원인으로 다시는 출판이 어려운 옛 책들, 그런 옛책에 사회발전의 력사가 기록되여있고 그 당시 인간들의 지혜와 슬기, 감정과 생활상이 그려져있다.”고 선생은 말한다. 하기에 선생은 “돈부자는 못되더라도 책부자는 되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책으로 메운 책시렁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고 보물고에서 산다는 기분으로 마음이 든든해진다고 한다. 책속에 만석의 곡식 들어있다는 김대현선생의 생활지조, 여가문화의 한 분야로 된 책수집—이런속에서 김대현선생은 청춘을 되찾은 기분이고 또 그로하여 더 없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간다. 2) 김대현선생의 두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수석탐석과 수집이다. 수석은 가공을 허용하지 않는 대자연의 걸작으로서 크게 산수경석, 형상석, 문양석, 색채석 등 4개 분야로 나눈다. 자연을 사랑하고 산수를 즐기는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수석이란 말그대로 산수경석의 략칭이기도 한다. 하나의 돌덩이에서 아름다운 산수의 경치나 산수미의 세계를 여러 가지로 련상하고 맛보고 즐기게 되니 진짜 돌과 인간과의 만남은 뜻깊은 만남이라고 할수 있다. 김대현선생은 이런 수석세계에서 삶을 가꾸며 멋지게 살아간다. 수석이란 부름은 지난 80년대말, 90년대초부터 우리 조선족들의 말밥에 소리없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김대현선생은 1990년부터 수석에 강한 취미를 느껴 휴식날이면 어느 강변으로 탐석을 가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배낭을 지고 두만강, 가야하, 봉밀하, 구수하, 륙도하…돌밭을 찾아다니며 수석을 발견하는 그 재미가 별멋이고 시원한 강바람, 맑은물 출렁이는 우거진 숲, 새들의 지저귐소리는 그야말로 선경에 들어선 기분이란다. 참다운 수석인이 된다는것이 쉽지 않다면 참다운 탐석인이 된다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탐석을 즐기는 김대현선생은 연변지성인들의 동아리—연변두만강수석회의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강따라, 산따라 다니지 않는곳이 없다. 외지출장길에도 수수한 옷차림에 배낭을 지니고 다니며 고물시장이나 수석가게에 들려 마음에 드는것을 사서 등에 지고오는 선생이다. 하여 선생의 집에는 가야하의 명석을 망라한 오묘한 수석만도 수십점에 달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황홀케 한다. 수석세계는 살아숨쉬는 대자연의 축소판이여서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작은것에서 큰 경치를 보아내고 한점의 수석에서 대자연의 여러가지 신비로움을 련상하면서 그 찡한 진미를 맛보고 즐기는것이 진짜 수석인들이다. “집안에 들어서면 돌을 어루만져 주고 물을 먹여주고 자식처럼 귀여워한다.”며 김대현선생은 수석에 푹 빠져버렸다. 취미생활에서도 으뜸가는 취미는 수석문화라는 김대현선생은 수석을 떠나서는 생활이 멋적을것 같다며 수석 하나에서 자연의 숨결, 자연의 정취와 신비로움, 조화로움과 천태만상의 예술적감흥,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삶을 풍요롭게 가꿔가는 분이다. 여가문화속의 또 하나의 멋진 세계라 하겠다.3) 김대현선생의 세번째 고상한 취미와 기호는 옛 민속품 수집이다. 민속은 한 민족의 지나온 력사를 여실하게 담는 거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태여나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식생활을 떠날수가 없다고 할 때 식생활의 발달과 더불어 식기와 부엌용구들이 발달하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조선민족의 숟가락과 식기의 발달은 놀라울 정도이다. 숟가락과 놋그릇을 례로 들어도 숟가락의 사용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오른다면 놋식기, 놋수절을 중심으로 한 놋그릇은 벌써 통일신라시대때부터 상당한 발전을 보이였다. 그만큼 조선민족의 생활세태를 보여주는 갖가지 옛 민속용품들은 다종다양하여 겨레의 전통적인 민속풍습으로 줄곧 꾸준히 지난 80~90년대까지 전하여내려왔다. 허나 현시대 생활의 급격한 향상과 더불어 유구한 력사를 가진 이런 옛 민속품들이 급격히 소실되여가는 현실이다. 소실은 단절을 의미한다. 우리 이 세대에 와서 민속의 맥이 끊어져서는 안된다. 사명감에 부푼 김대현선생은 책수집, 수석탐석과 함께 지난 90년대초반부터 취미생활의 한 분야로 겨레의 옛 민속품수집에 정진하였다. 선생의 집안에 들어서면 남쪽베란다와 북쪽베란다 모두가 가지수가 다양한 옛 민속품세계이다. 실로 갖가지 옛날 사발, 종류가 다양한 놋그릇과 10여종에 다하는 다리미로부터 인두, 돌절구, 동고리, 다듬이돌, 방망이, 가마니용 바디, 떡메, 떡구유, 함지, 쌀함박, 물동이, 각종 질그릇, 오지단지, 로인식사용 소반, 표주박, 나무바가지, 옛 자물쇠, 오강, 화로, 매돌, 광주리, 기와 등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구전한 옛 민속품들이다. 보라, 100여년의 세월을 거치였다는 대짜옹이항아리, 옛날 우리 어머님들의 손때묻은 싸리광주리, 옛날 아낙네들이 시부모님들에게 진지상 받쳐올렸던 소반상, 옛날 가마니 짤 때 쓰던 바디, 가내용 작은 돌절구, 조선녀인들이 시집갈 때 바느실을 담았던 옛 동고리, 까마반지르르한 물동이들, 윤택이 나는 크고작은 10여개의 옛 오지단지, 다양한 다리미 등이 자리를 메운다. 그중 놋식기, 놋숟가락, 놋쟁반, 놋저가락, 놋밥주걱 등 놋그릇만 해도 가지각색이여서 감탄이 절로 나며 탄복하지 않을수 없다. 어찌보면 지난날 농가의 뒤울안에서 이저리 뒹굴다가 녹쓸고 썩어버리고 쓸모없다고 쓰레기로 버리고 불아궁이에 넣어버리고 이사할 때마다 버리고 버린 “천한 물건”들이다. 이런 물건들이 김대현선생한테는 보석같이 빛나면서 하나같이 귀중한 겨레의 옛 민속용품으로 안겨들었다. 하기에 김대현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생활과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는것들, 비록 나무나 쇠붙이, 흙으로 만들어지고 투박한것들이나 그것들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가 슴배여있고 조상들의 삶의 모습이 어려있고 해당 사회의 력사가 기록되여있는 소중한것들이다.”
소중함의 미학을 알리는, 머리가 수그러지는 찡한 말씀이다. 김대현선생은 이같이 옛 물건들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애지중지 소장하고있다. 여가문화속의 한 분야를 이룬 이 자체가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사랑이고 후세인들에게 세세대대로 전하여주고 보여주려는 참된 마음의 발로이다. 삶의 승화된 경지, 민속의 맥락을 이으며 참신한 경지에 선 김대현선생의 모습을 볼 때 존경이 가지 않을수 없다.3. 결론 우에서 김대현선생의 여가문화속의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생활—책수집, 수석탐석,옛 민속품수집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 모든것을 경제적으로 환산하면 꽤나 많은 돈으로 번져질수가 있다. 하나 김대현선생이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것은 돈이 아니였다. 소형적이나마 하나의 민속전시관이나 박물관을 꾸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겨레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게 하며 민속의 맥과 우리 삶의 현장을 후세에 그대로 길이 전하여 주겠다는것이 소망이고 노력방향, 그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삶의 질을 높여가는 김대현선생이다. 김대현선생은 인젠 60대초반에 이른 분이다. 선생은, 인간은 45살전후부터 뇌의 용적이 점차 줄어들며 뇌에 위축이 오기에 나이가 들면서 아무런 삶의 추구나 목표없이 덧없이 살아가면 신경이 무디여지고 바보스러워진다는 도리, 대신 로령이 되여 뇌에 적당한 자극이 가해지면 뇌의 활동기능을 제고시킬수 있다는 도리를 너무나 잘알고있다. 그래서 두뇌에 활력을 불어넣는 활성화조치가 바로 취미생활이다. 인생 여생기에 취미, 그것도 건전하고 고상한 취미를 갖는것이 뇌의 생리적로화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조치가 아닐가. 이면에서 김대현선생은 본보기를 보여주는데 선생은 품위있고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생활로 삶에 신선한 활력을 주입하고 삶의 질을 한층 높이면서 건강하고 즐겁고 보람있는 로후생활을 창조하고있다. 김대현선생은 실로 값진 인생살이로 평가되는 장서, 수석, 옛 민속품 등 취미생활로 조선족여가문화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참된 인간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여가문화속에서 삶의 질을 승화시키면서 민족의 력사와 전통, 문화를 고이 간직하며 후세인들에게 세세대대로 전하여주고 보여주려는것이 김대현선생의 삶의 추구이며 참된 마음이다
(2005년 7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