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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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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스케치】 문인들 수석관 찾았구려 댓글:  조회:4164  추천:94  2006-06-13
【스케치】 문인들 수석관 찾았구려 리 함 예로부터 수석이란 황제, 대신들이나 대부호들, 문인묵객들이 즐기고 문인묵객들의 필묵에 의해 생동하게 묘사된 대자연의 소산이요, 축소판이다. 헌데 우리 문인들에 의해 전시된 연변수석만의 첫 수석전시회가 여러 날 되도록 찾아드는 문인 한사람 볼수 없다. (연변의 문인들이 이다지도 수석문화에 숙맥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서운함이 한가슴 괴여오른다. 오늘은 수석전시 엿새가 되는 날이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던차 정오를 앞두고 룡정의 시인 황상박선생, 연변인민출판사의 시인 최문선선생, 한국인 김부식선생 등이 수석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을 찾은 문인들 첫 손님이라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그래 우리 문인들이 수석문화를 몰라줄수가 없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일이라 흥분속에 잠기는데 마침 두만강수석회 고문 김대현선생이 뒤미처 나타났다. 《돌을 모르며 돌보러오는가?》 김대현선생은 문우들을 허물없이 대했다. 《오면 안되는가?》 최문섭선생 또한 허물없이 응해나섰다. 수석전시관 분위기는 대번에 활발해지고 황상박선생은 구수하에서 탐석한 《오리》를 가리키며 터값을 받아야겠다고 롱담을 걸어온다. 그러는 황상박선생은 《수석하는 사람이 많구나!》하며 감탄해마지않는다. 그때다. 최문섭선생은 전시관 첫머리에 놓인 남근석을 보더니 한국 수석전람에 남근석이 쭈욱 놓였더라면서 대자연이 묘하다는것을 한 5년전에 알았다고 소감을 내비친다. 알고보면 편심 최문섭선생은 1942년생으로서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전업을 졸업하고 교육, 선전, 출판 사업에 종사, 편집, 시인으로 활약하면서 《구름기차》, 《꽃동네》 등 허다한 동시집, 시집과 이야기집 《천지의 무지개》 등을 펴낸분이다. 그러던 선생은 약 5년전에 한국행에 나섰다가 목포시 수석관을 돌아본적이 있었단다. 수석과는 인연이 있었기에 수석을 통해 대자연이 기기묘묘하다는것을 보다 터득하였다는 선생이다. 최선생은 필자의 중국지도 수석한점을 보고 묘하다고 했다면 한태익의 메주 수석을 보고 또 묘하다고 련발한다. 황상박선생은 묘하기에 수석이 존재할것이 아니냐며 허허 웃는다. 룡정시 팔도행출신으로 신문, 도서 배달원, 기자, 편집으로 활약해오다가 정년퇴직하고 가사전문지 《해란강여울소리》주필을 맡아오며 시창작에도 왼심을 써오는 이름난 시인이기도 하다. 한국인 김부식선생은 언제부터인가 연변수석이 더는 밖으로 흐르지 말고 자체의 수석관을 가졌으면 하는것이 드팀없는 소원이였다고 내심을 토로한다. 1992년 7월에 연변에 와서 연길시에 《연변장애인기술훈련센터》를 꾸리고 운영해오다가 현재는 운남성 곤명에 가서 장애인기술훈련원을 꾸린다는 선생, 이 선생이 연변서 손수 탐석길에 나선것은 1995년이였다고 한다. 한다하는 명석도 척척 안겨지고 하면서 연변의 문인수석인들과 돈독한 우정을 맺어온 그다. 수석전시관은 문인들의 웃음소리, 말소리로 차고넘친다. 그속에 오후 시인회의를 앞둔 최문섭선생이 필자에게 금방 출판한 동시선집 《새싹은 햇병아리》를 증정한다. 문인들의 세계가, 서로 통하는 세계가 좋기만 하다.문인선배들 수석관 찾았구려! 2006년 6월 13일
66    수석전시관이 있어 좋아 댓글:  조회:3875  추천:106  2006-06-12
수석전시관이 있어 좋아 리 함 오늘은 수석전시 닷새가 되는 날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질 않는다. 수석이란 이 대자연의 천연예술품은 자석마냥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강한 힘을 갖고있는 모양이다. 오전이다. 연변박물관 해당참관에 나섰던 리퇴직교원 수십명중 적지 않은 교원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수석전시관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대자연의 아름다운 삼라만상이 그대로 수석에 표현되였다면서 신기함에 빠져본다. 오후이다. 력사답사길에 올랐던 룡정의 사진촬영가 리광평씨 등은 연변수석이 전시된 전시관을 돌아보고서야 시름을 놓는다. 연변만의 수석이 이리도 훌륭한 줄을 몰랐다는 리광평씨다. 그에 앞서 한국의 수석가이고 연길서 일보는 박식선생이 부부동반으로 전시관을 찾았다. 그는 6월 8일 수석전시회 개회식에 참가하여 테프를 끊고 돈까지 기부한 터이지만 이같이 훌륭한 수석세계를 어찌 혼자만이 감상하겠느냐며 안해와 동반하였다고 감상을 터놓았다. 연변수석문화의 질적제고와 보급에 고무된다는 박식선생은 서로간의 긴밀한 협력을 바랐다. 수석전시청을 찾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감수는 우리 자치주의 수부 연길시에도 대자연의 천연예술품인 연변수석만의 전시관이 있어 좋기만 하단다. 2006년 6월 12일
65    수석과 수석인의 삶의 방식 댓글:  조회:2760  추천:141  2006-06-11
수석과 수석인의 삶의 방식석문주6월 10일은 연변두만강수석협회의 수석전람회가 연변박물관에서 열린지 세번째로 되는 날이다. 이날도 무려 70~80명에 달하는 수석관람자들의 발길을 모았다. 길림위성 TV프로에서 직일에 나선 김학송부회장을 현지취재하였고 연변일보사 한문판 녀촬영기자도 다녀갔다. 그만큼 인기속에 연변수석이 전시되기까지 우리 수석인들의 피타는 노력과 취미가 스며있다. 130여점에 달하는 수석을 보면 정말 인간의 희로애락, 우주의 신비한 조화를 력연히 볼수 있었다. 초대회장이고 현임 명예회장인 리흥국씨의 《돌고래》, 리함씨의 형상석 《오리》와 《남근석》, 《중국지도》, 김학송씨의 소품 《춤추는 처녀》, 《달밤을 나는 학무리》, 김대현씨의 소품 《비행접시》, 김봉세씨의 《빨래하는 조선족처녀》, 《자자》, 형상석으로 된 두마리의 거부기—이런수석들은 수많은 관람자들로부터 《야!》하고 마음의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수 없었다. 수석. 그것은 신비한 세계에로 마음을 끄당기는 자석이며 발견의 짜릿한 매력을 감수하는 정신적쾌감이며 자나깨나 꿈을 꾸면서 만나고싶어하고 그려보는 미지의 미녀세계이다. 바로 그때문에 수석인들은 신이 닳도록, 발이 부르트도록 산을 넘고 강을 지나며 수석찾아 천신만고하는것이고 삶의 방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새삼스레 체험하게 되는것이다. 마작, 트럼프, 도박 등을 외면한 고상하고도 격이 높은 취미생활— 수석인들의 인생은 항상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그속에 있는것이 아닐가. 2006년 6월 11일
64    수석전시청 찾은 한가족들 댓글:  조회:3824  추천:87  2006-06-11
수석전시청 찾은 한가족들 리 함 수석전시 네번째 날, 오전에만도 30~40명 사람들이 다녀갔다. 보다 인상적인것은 수석전시청 찾은 한가족들, 해맑아 보이는 한가족끼리 단란한 모습이였다. 가족 세식구 오전 9시가 금방 지난 시점인데 두만강수석회 신철호씨가 들어섰다. 잇따라 한 녀성이 녀자애와 같이 다가오더니 신철호는 집사람이라며 인사를 시키는것이였다. 수인사를 나누고보니 수석가족 세식구만의 휴일동행이다. 신철호씨는 수석에 입문한지 오라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빨리 수석인이 된 사람이다. 워낙 연변텔레비에서 기자로 뛰다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교편을 잡았다지만 사람이 좋고 수석에 빠지여 수석회의 사랑을 무척이나 받는터였다. 그에 따라 석복이 따르니 지난 2~3년사이 괜찮은 수석 몇점을 줏기까지 하였다. 안해와 딸애도 수석에 짙은 관심을 몰붓는다나. 그러던 가족이 일요일시간을 타서 수석전시청에 나타난것이다. 올해 40대 초반인 안해 김영란, 올해 15살인 연길시 10중 1학년생 은설—단란한 세 식구는 수석감상에 여념이 없다. 신철호씨는 수석마다 설명을 깃들이며 성의를 보여준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슴에 와닿기만 한다. 안해되는 사람 새로 두만강수석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김봉세씨는 수석년한만도 6~7년에 나는 한다 하는 중견수석인이다. 마침 김봉세씨가 직일 서는 날이라 서로간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안해되는 사람 리분녀양이 나타났다. 이제 누군가의 부주의로 수석한점을 깨뜨렸다고 하여 가슴아파 찾아온것이였다. 돋보이는 소행이 아닐수 없다. 돋보이는 소행은 이뿐이 아니였다. 6월 7일은 서로가 집에 소장한 수석을 가져다가 진렬하는 날인데 점심참이라 밖에 나가 식사를 해야 했다. 헌데 누군가는 남아서 직일을 서야 하는데 일순 난감한 처지다. 이때 분녀양이 직일을 자청해 나섰다. 수석회사람들이 다같이 식사에 림하라는 배려의 처사였다. 이튿날 6월 8일은 수석전시회 개회날이라 또 여러 지도자, 래빈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였다. 이때도 리분녀양은 수석전시청을 지켜서며 수석회 일행 모두들 동행하게 하여 수석회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오늘은 또 수석한점이 살이 뜯겼다 하여 찾아왔다. 평소도 남편의 수석취미를 묵묵히 받들어주는 미더운 안해, 김봉세씨의 수석인 걸음걸음마다엔 안해의 안받침이 푹 배여 있다고 한다. 이에 못지 않게 수석에도 빠지여 수석인 못지 않은 조예가 깊은 녀성이기도 했다. 일행 네사람 오전시간의 한때 수석전시청에 30대후반으로 돼보이는 젊은 부부가 할머니와 《딸애》를 데리고 찾아왔다. 매 한점의 수석마다 돌아보며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이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할머니되는 분은 시어머니되는 분이십니까?》 《친정어머닙니다.》 필자의 물음에 시원히 답을 주는 녀성분이다. 할머니 춘추를 물으니 올해 76살이란다. 하나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보이고 걸음걸이도 온건하기만 하다. 어떻게 되여 찾아오셨는가고 물으니 연변텔레비를 보고 전문 수석보러 찾아왔다는 그네들이다. 한가족의 동행이 조련치 않다고 말하자 녀성분은 저 처녀애는 딸이 아닌 조카애인데 처음으로 전시되는 연변만의 수석이라서 꼭 보이고만싶어 알려서 같이 왔단다. 《그래요?》 필자의 놀람에 녀성분은 피식 웃는다. 처녀애와 몇마디 주고받으니 처녀애는 룡정에 집이 있고 룡정1중 2학년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재미있는 《한가족》—일행 네사람이다. 녀성분이 수석에 취미가 있는듯 부지런히 수석을 가리키는데 친정어머니—할머니는 돌에도 이런것들이 있느냐며 수석마다에 눈길을 박고 처녀애는 신기한 세계라며 수석을 즐긴다.
63    【속 보】두만강수석회 새 지도부 출범 댓글:  조회:3367  추천:104  2006-06-10
【속 보】 두만강수석회 새 지도부 출범 두 만 강 오늘 오후 동아리모임—연변두만강수석회는 리흥국회장의 사회하에 전문회의를 갖고 새로운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두만강수석회의 초대회장은 리흥국선생이였다. 2004년 7월 28일에 고고성을 터친이래 두만강수석회는 리회장의 지도하에 활발한 양상을 보이며 연변의 수석문화의 제고와 보급에 크나큰 기여를 하여왔다. 오늘 6월 8일에는 연변박물관과의 공동주최하에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개회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현재 주심계국 국장을 맡고있는 리흥국회장은 사업상 관계와 사단법인 정식출범의 요구와 비추어 볼때 자기가 계속 회장으로 뛴다는것은 현실적이 되지 못한다고 심경을 터놓았다.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개회가 있은후 리흥국회장은 연변박물관 2층홀에서 전문회의를 부르고 리함비서장을 제2임 회장으로, 김봉세를 부회장 겸 비서장으로 건의하였다. 전문회의에는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김봉세, 신철호, 석문주, 리함, 연변박물관 관장 맹철학 등이 참가하였는데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가결로 리흥국회장의 건의를 받아들이였다. 가결결과는 아래와 같다. 리함—제2임 회장 김봉세—부회장 겸 비서장 김학송—부회장 련임 전문회의는 또 일치한 가결로 명예회장과 고문단을 추대하였다. 추대결과는 아래와 같다. 리흥국—명예회장(주심계국 국장) 김대현—수석고문(원 연변방송국 부주필) 마경봉—고문(주정부 부비서장) 맹철학—고문(연변박물관 관장) 왕영창—고문(원 연변군분구 부정위) 박성룡—고문(연길시수리국 국장)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개회후 두만강수석회는 새 지도부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적당한 시기에 사단법인 수석절차를 밟게된다.
62    수석전시기간은 8월말까지 댓글:  조회:4139  추천:89  2006-06-10
수석전시기간은 8월말까지 수 석 회 오늘 연우미디어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1회 연변수석전시기간이 11일까지 4일간이라니 말입니다. 잘못 전해진, 누군가의 실언임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는 6월8일에 개회식을 가지고 8월 말까지 내내 전시하게 됩니다. 이는 이번 전시회의 주최측인 연변두만강수석회와 연변박물관의 공동결정임으로 특히 널리 알리는 바입니다.
61    전시회 두번째 날 댓글:  조회:3491  추천:109  2006-06-10
전시회 두번째 날 수 석 회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는 개회식을 마치였지만 그 열기는 여전한것 같다. 오늘 하루 수석전시청을 찾은 사람들은 50여명에 달한다. 오늘 연변박물관 수석전시청을 찾은 사람들중 어제 저녁 연변텔레비뉴스를 보고, 연변일보 문화면 기사를 읽고 찾아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패 또 한패의 사람들이 이어 섰는데 그들 가운데는 연변에 온 한국인들 8-9명이 있는가 하면 화룡에서 찾아왔다는 60대후반의 백발로인이 있고 훈춘에서 몸소 찾은 이름없는 수석인도 있다. 전시회 두번째 날, 연변수석만의 독특한 전시는 수석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모두가 연변수석은 희망이 보인다며 기쁨을 금치 못한다.
60    【스케치】사천 성도서 온 손님 댓글:  조회:4008  추천:104  2006-06-10
【스케치】 사천 성도서 온 손님 리 함 오늘은 수석전시 세번째 날이자 김학송시인과 석문주시인 직일날이다. 일도 있고 하여 연변박물관 수석전시청으로 나갔더니 김대현고문과 김봉세부회장이 금시 출입구를 나서고있었다. 잠간 이야기를 나누고 2층의 전시청으로 올라갔더니 김학송시인과 석문주시인이 전시청을 지켜서고있었고 조금후 짧은 반바지차림의 중년 한족남자가 들어섰다. 《전시청을 돌아보아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필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참 례의에 밝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겨왔다. 그만큼 인물체격이나 스타일도 좋은 분이다. 이윽고 중년남자는 전시청의 수석들을 쭈욱 돌아보더니 또 말을 건네온다. 《사진찍어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역시 됩니다 대답이다. 김학송부회장과 필자의 허가에 중년남자는 느낌이 좋은 수석을 디지털사진기에 담는다. 그 소탈함이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안겨 들자 이번에는 필자가 먼저 말을 건네였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오시는지요?》 《녜, 사천 성도에서 옵니다.》 《볼일이 있어 왔나보죠?》 《녜, 처사할 일이 있어 연길에 왔습니다.》 《그럼 수석전시 소식은 어디서 알았지요?》 《호텔서 연변텔레비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시장소를 물으며 찾아왔지요.》 《그래요?!》 필자는 인차 동을 달았다. 《수석을 즐기나보죠?》 《녜, 수석애호가라 할수 있지요.》 알고보니 중년남자는 이름이 남걸이고 탐석경력 6~7년에 수석구매경력 20년쯤 된다는 독실한 수석인이였다. 그러는 그는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수석에 대해 박식한 리해와 지식을 갖고있었다. 연변자체의 수석을 말할 때 그는 몇점의 두만강수석을 가리키면서 석질이와 강도가 비길데없이 좋다고 극구 치하한다. 이에 대비해 우리 중국내지의 수석들은 비록 썩기는 잘 썩었지만 석회질이 다분하다고 평가하는 그다. 확실히 남걸씨는 수석을 알고 있는 수석인이였다. 이야기를 나누는사이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서로 련계전화와 신분을 알리고 서로간의 련계를 갖기로 약속을 보았다. 어찌하든 사천 성도서 온 손님 남걸씨—중년 남자는 수석전시청을 찾으리만치 수석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알려졌다. 열린 수석전시회의 스케치를 이루는, 수석을 통한 서로의 만남이였다. 2006년 6월 10일 점심
59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안내문 댓글:  조회:4325  추천:86  2006-06-08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안내문 김 대 현 수석이란 순수한 자연석에 삼라만상의 오묘한 형상과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축소되고 응축되여 사람들에게 예술적 감수나 사색을 줄수있는 돌을 가리킨다. 수석은 오랜세월 자연이 빚어낸 천연예술품으로서 석질이 좋고 특정한 모양이나 아름다운 색채를 갖고있기에 먼 옛날부터 많은 문인묵객들의 필묵에 의해 생동하게 묘사되였다. 수석문화는 문학과 철학, 광물학, 지질학, 암석학을 포함한 종합적인 문화로서 그것은 천인합일의 동양사상에 근원을 둔 문화적함량이 매우 높은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수석은 흔상가치, 경제가치, 소장가치가 있다. 연변은 량질의 수석산지라고 볼수 있는바 두만강, 가야하를 비롯한 여러 강이나 하천에서 좋은 수석이 많이 발견되고있다. 연변에도 10여년전부터 수석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애석가들이 점점 늘어나고있는 추세다. 2004년에 설립된 연변두만강수석회는 교원, 작가, 기자 등 문인들로 구성되였으며 현재 활발한 탐석활동을 벌리고있다. 협회의 전체회원들은 연변수석문화의 제고와 보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이번에 펼치는 제1회 수석전시회에 2년 남짓한 동안 회원여러분들이 수집한 연변의 향토석을 위주로 전시한다. 애석가 여러분들과 해내외 관광객 여러분들의 깊은 관심과 지지, 성원을 부탁드린다.
58    전시회 수놓은 시와 서예작품들 댓글:  조회:4729  추천:95  2006-06-08
전시회 수놓은 시와 서예작품들 리 함1. 서화작품: ㄱ. 一生一石 石寿万年 (일생일석) (석수만년) ※ 리철, 연변박물관 직원, 연길시서법가협회 부주석 ㄴ. 无言的诗 立体的画 (무언의 시 립체의 그림) ※ 리흥국, 연변두만강수석회 회장2. 시 ㄱ. 두만강 가야하에 기울인 일편단심 자연에 동화되여 티없이 맑았으니 어화라 이 멋이 좋아 젊어 지는 내 인생! ㅡ김대현, 연변두만강수석회 고문 ㄴ. 수석찬가 너의 눈은 미지이다 너의 입은 미지이다 大川이 그 품에 있고 명산이 그 속에 있고 너의 주소는 과거와 미래의 영원속에 있음을 알겠다 ㅡ김학송, 연변두만강수석회 부회장 ㄷ. 수석련가 억년聖 산이 안방에 놓였으매 온집안에 고요스레 仙風이 이는구려 ㅡ김학송, 연변두만강수석회 부회장
57    【뉴스】 연변 수석문화의 대잔치 댓글:  조회:4127  추천:97  2006-06-08
연변 수석문화의 대잔치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리 함 6월 8일, 연길시 진달래광장 서쪽가에 자리잡은 연변박물관은 100여명의 주인, 손님들로 흥성거리였다.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가 성황리에, 성공적으로 이곳에서 열리였다.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는 동아리모임인 연변두만강수석회와 연변박물관에서 공동주최하고 연변박물관에서 모든 후근준비와 장소제공을 담당한 연변수석문화의 대잔치. 이 대잔치를 위해 연변 주정협 손흥개부주석, 주정부 마경봉 부비서장, 주문화국 김영철국장, 연변방송텔레비죤국 부국장, 연변텔레비방송국 주필 리호남선생, 연변국제전시청 왕봉신주임,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 연길시 수리국 국장이고 수석가인 박성룡선생, 원 연변군분구 부정위이고 수석가인 왕영창선생, 원 연변방송국 김대현부주필, 한국수석가 박식선생 등 래빈들이 참가하여 축하하고 힘을 보태주었다. 수석전시회에는 또 두만강수석회와 연변박물관의 회원, 직장인들과 수석애호가, 보도매체 여러 기자들, 관심사로 되는 해당 인원들이 참가하여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는 첫 시작부터 자못 열기를 띠였다. 수석전시회개회식은 두만강수석회 리함비서장이 사회하고 리흥국회장이 개회사를 드리였다. 개회사에 이어 주정부 마경봉부비서장,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 한국 수석가 박식선생 등이 선후로 축사를 드리고 김학송부회장이 두만강수석회 회원들을 일일히 소개하였다.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의 클라이막스는 테프끊기였다. 손흥개부주석, 마경봉부비서장, 리흥국회장, 김영철국장, 왕봉신주임, 맹철학관장, 왕문빈명예회장, 왕영창 원 부정위, 리호남주필, 박식선생 등이 일제히 테프를 끊어 수석전시회의 정식개회를 널리 알리였다. 테프끊기가 끝난후 주인과 손님들은 수석전시청을 돌아보며 전시된 수석들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였다. 전시회에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회원들이 다년래 두만강, 가야하 등에서 손수 탐석한 연변의 수석 135점과 약간의 내지 수석이 전시되여 전시회참가자들의 주의를 무척 끄당기였다. 할아버지를 따라 전시청에 들어선 6~7살짜리 한족어린애는 수석이라는것이 이런것인가며 퐁퐁 뛰여다니다가 수석이 재미난다고 야단이다. 수석전시청에는 오후에도 내내 손님들이 그칠줄 몰랐다. 전시회 소식 듣고 훈춘에서 달려왔다는 리범화는 10점의 수석을 내놓으며 전시회에 출품할수 없는가고 청들었다. 이번 제1회 두만강 수석전시회—연변수석문화의 대잔치는 8월 말까지 계속 전시를 이어가게 된다. (2006년 6월 8일)
56    【뉴스】제1회 두만강수석전시 완료 댓글:  조회:4341  추천:101  2006-06-07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 완료 리 함 래일 6월 8일에 열리는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준비가 원만히, 깨끗이 완료되였다. 오늘 두만강문인수석회의 회원들은 저마다 소장한 수석을 갖고 연변박물관 2층홀에 모이였고 하루동안의 긴장한 준비를 거쳐 수석전시를 마무리했다. 어제 전시회장소정리와 준비에 있은 계속이였다. 도문에 주문한 30여개의 좌대와 수석도 전문차로 가져와 수석전시회의 순조로운 진행에 한몫을 했다. 연변박물관에서 수석전시회의 모든 후근준비를 맡아나섰다. 래일의 수석전시를 위해 박물관에서는 오늘 밤도 쉬지 않고 필요한 전시준비를 다그치고있는 중이다.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는 래일 6월 8일 오전 10시반에 연변박물관에서 원 계획대로 개막식을 갖게 된다. (2006년 6월 7일)
55    【탐석기】가야하에서 주은 산수수석 댓글:  조회:4344  추천:108  2006-06-04
【탐석기】 가야하에서 주은 산수수석 두만강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살아가노라면 여러가지 취미생활로 삶을 풍부히 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수석취미는 고상하고도 품위있고 멋진 취미여서 삶을 더 이채롭게 해주는것 같다.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김대현씨, 김봉세씨 등이 수석에 푹 젖어버린 수석인들이다. 수석을 떠나선 생활의 의의를 잃는다는 그네들은 5월 28일 여느떄와 같이 가야하탐석길에 올랐다. 물론 필자와의 동행길이다. 이날 따라 희스레한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때이르게 덮쳐든 무더위를 막아주어 탐석행이 좋았다. 연길에서 뻐스로 석현까지, 석현에서 택시로 삼도구에 이른 우린 삼도구 다리목에서 하루 탐석행의 첫걸음을 떼였다. 삼도구는 서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가야하와 왕청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치여 동남으로 빠진다 하여 생겨난 이름인데 이 구간 가야하물곬엔 신작로다리와 철교가 병행하여 나란히 뻗었다. 여기 웃 산지대에 만천성땜이 수축되고 발전(發電)의 수요로 물길이 산을 뚫고 하목단촌으로 빠지는데서 삼도구구간은 강물이 개울물 같아 탐석지로서는 리상적인 구간이 아닐수 없었다. 헌데 동으로 공로교를 지나 철교밑에 이르니 어디라 없이 큰물의 충격이 력력하다. 강에 고기발을 놓는 당지 로농과 물으니 바로 며칠전 소낙비로 신흥, 대감자 쪽으로 쏟아져내린 신흥골물이 물사태를 이루어 말이 아니였다고 한다. 삼도구로 보아 물피해는 눈에 띄이지 않는데 수석인들로 말하면 얻기 어려운 기회였다. 사품치는 강물이 돌밭을 휘딱 번져놓아야 파묻혀진 수석들이 새로 얼굴을 내밀기때문이다. 철교아래 합수목가에 과연 새로운 돌밭이 펼쳐졌다. 흥이나 강물을 철벅거리는데 오석류의 큼직한 돌하나가 소인을 기다리고있었다. 급기야 강돌을 번지고보니 괜찮게 《썩은》 오석이다. 썩었다는것은 물에 잘 수마되면서 기이하게 생겨났다는 말이 되는데 뒤따른 김봉세씨는 가야하에서 이런 류의 수석을 탐석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무거움을 지니고 탐석할수가 없어 강가 버드나무밑에 감추어놓으니 벌써부터 기분이 둥둥 뜬다. 그 기쁨을 안해한테 전화로 전하였다. 첫 구간 다리목지대를 떠나고 강구비를 도니 강따라 길게 뻗은 돌밭이 펼쳐진다. 이날 탐석의 목적지였다. 첫 지대 돌밭은 홍수에 잠긴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지만 돌밭이 바뀌지는 않았다. 김대현씨가 첫 지대 돌밭을 훓는사이 필자는 강물에 발을 잠그며 수중돌에 눈을 박았다. 판단은 적중하였다. 첫 지대 돌밭아래 물가는 큰물에 의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산》이 둘러박힌 평원석이 새로 발견되였다. 청석류에 석질 또한 좋아 나무랄데 없으나 보기 흉하게 금이 간것이 맘에 걸리였다. 물에 말끔히 씻어 이모저모로 연출해보다가 결국 아쉬운대로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기분만은 좋기만 하다. 큰물이 지나간 뒤에 뜻밖의 수석이 나타날수 있기때문이다. 남으로 길게 뻗은 돌밭은 그 아래바위구비에 이르러 동강나고 강물은 흐름을 서쪽으로 바꾼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와지는 시점이라 셋은 바위구비 물가에 점심도시락을 풀었다. 김대현선생이 곰취요, 드릅따위를 한구럭 꺼내놓으니 선생과 봉세씨가 내여놓은 약주가 저절로 넘어갔다. 그래서 나이들수록 토장에 산나물에 보다 집착한다고 하는걸가. 문인들의 시선에 강건너 절벽바위중턱에 피여난 진달래꽃이 비쳐온다. 가는 봄과 더불어 진달래꽃이 지나간 시절에 바위가의 소나무아래 소담히 피여난 진달래꽃이 그리도 정겨울수가 없다. 마치도 가야하 탐석행에 나선 우리를 보고서야 가겠다고 고집스레 마지막 고삐를 늦추는것만 같았다. 하목단촌구간은 오석이 가끔 출몰하는 지대다. 여기 돌밭은 새 아스팔트닦기에 들리여나가 탐석지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저 지나칠 곳은 아니였다. 아니나 다를가 큰물이 지나간 강가 몇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돌밭자리에서 잘 썩은 청석류의 수석 한점이 탐석되였다. 가야하물에 헹구어보니 가야하에서는 얻기 어려운 산수경석 수석이다. 앞뒤가 모두 잘 썩었다면 앞면은 벼랑형 산봉우리고 그 기슭가에 못까지 생겨나 제법 그럴사한 수석이다. 김봉세씨는 가야하에 이런 수석이 발견된다는것은 드문 일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 하루가 어떻게 흐른지도 모르겠다. 가야하탐석 수년만에 한다하는 수석 한점 주어들었으니 역시 올해 2006년은 석복이 따르는 수석의 해인것 같다. 김대현씨와 김봉세씨가 필자의 수석보다 나은 수석을 탐석하지 못해 못내 미안하여 으썩할수가 없었지만 둥둥 뜬 기분은 내내 가라앉지가 않는다.
54    【속심의 말】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댓글:  조회:4110  추천:109  2006-06-03
【속심의 말】 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두 만 강 벌써 5월도 막가고있습니다. 6월이 시작되면 한 여름의 땡볕이 열기로 번지여 그 열기를 그대로 토해내는 돌밭에서의 탐석은 사실상 불도가니 고역으로 되기에 연변에서의 탐석의 황금계절은 따스한 봄날과 서늘한 가을인줄로 압니다. 이 점을 너무도 잘알고있는 수석인들이기에 봄날의 탐석을 다그쳤더니 그에 못지 않게 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기회는 항상 준비되여있는 자에게 찾아든다고 석복도 마찬가지 도리겠지요. 지난해는 그대로 변화없는 돌밭이요, 고갈된 돌밭이라 수석다운 수석 몇점을 줏지 못하고 흘러보냈습니다. 새로운 탐석지를 찾음이 없이 다니고 다닌데를 또 찾으니 석복이 따르지 못할밖에요. 돌이켜보면 올해 봄이후 지금까지 신들메를 조이고 배낭지고 탐석에 나서본것은 다섯번인가 봅니다. 5일이라는 말이지요. 헌데 3월 24일 첫 탐석과 4월 하순의 탐석, 5월 2일의 탐석까지 망라하여 세차례에 걸치는 탐석 모두가 늘 다니는 왕청 가야하 구간이 아니면 두만강 삼합~개산툰 구간이여서 그럴만한 수석을 탐석할수가 없었습니다. 약간의 소품만 손에 쥐였을뿐이구요.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날을 잡으며 다닌들 시간과 체력과 돈만 팔게 되지요. 새 탐석지, 그것도 수석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데를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중 석복이 조용히 찾아들기 시작하더군요. 4월 6일 고구려 옛 장성의 동쪽구간 시발점을 찾아 연길시 청차관~성자산사이 답사에 나섰다가 성자산과 욕지산사이 동쪽어구 골안물가에서 우연히 조선족 버선모양의 수석 한점을 주어들게 되였습니다. 탐석행이 아닌 답사의 길에서 말입니다. 그때의 기쁨을 이루다 말하기 어렵군요. 올해 처음으로 주은 수석이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5월 3일에는 이진숙원장 등 여러분들과 함께 화룡시 남평 송전에 갔다가 운이 좋게도 바랄수도 없었던 중국지도—《신주대지》 문양석을, 5월 16일에는 연변텔레비 문예부기자들을 안내하여 연길시 서북쪽 평봉산 남쪽기슭에 진달래촬영을 갔다가 고대그리스의 비너스를 방불케 하는 원시조각형의 수석—산석 한점을 주었지요. 세번 모두가 탐석행이 아닌 력사답사길이나 려행길, 안내길에서 우연히 주어들게 된 석복이였습니다. 버선모양의 물형석을 제외한 중국지도나 고대비너스—원시 조각형은 진짜배기 명석이였지요. 석복이 터져도 크게 터졌습니다. 복은 쌍으로 온다고 연속성을 보여주었습니다. 5월 3일 남평 송전에 갔다가 새 탐석지를 발견한후 5월 17일과 5월 19일 련속 두번 김봉세씨, 김대현선생 등과 더불어 처녀지개발에 나섰더니 수석풍년이 들었습니다. 탐석행 5일에 답사려행길 3일—8일간에 엄청 크기의 구멍수석 두점과 버선목형 한점을 제외하고도 명석들인 중국지도, 고대비너스형 두점과 표준형 문양석 한점, 괜찮은 구멍수석 세점 등 6~7점을 주었으니 진짜 만풍년입니다. 우리 수석인들로 말할 때 한해 이쯤의 탐석수확이면 대단한 수확으로 보아야겠지요. 지난해는 한다 하는 수석한점 줏지 못했음을 대비할 때 더욱 그러한가 봅니다. 석복이 찾아들었습니다. 올해 봄날과 초여름에 벌써 한해 탐석목표를 넘쳐완수했으니 진정 복 받은 올해의 수석인이겠지요. 깊은 감수라면 욕심을 버리고 느슨하게 림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처녀지를 탐색하며 부지런히 뛰고 또 뛰여야 한다는것입니다. 석복은 스스로 찾아들지 않습니다. 석복은 자기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지식으로 당겨와야 하지 않을가요!!! (2006년 5월 23일)
53    【명석소감 】뒤늦게 공개하는 희귀수석-신주대지 댓글:  조회:4888  추천:113  2006-06-02
【명석소감 】 뒤늦게 공개하는 희귀수석—신주대지 두만강 수석입문 6~7년사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뜰수 있는 명석 두점을 갖고있어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릅니다. 수석인이라는 놈한테 일생일석에 견줄 명석 한점 없다면야 어찌 뜬다하는 수석인이라 하오리오, 유감이라면 이 두점 명석이 두만강이 살짝 빠진 구수하가 아니면 륙도하 산지여서 그렇더니만 요즘은 두만강 명석하나가 더 늘어 흐뭇하기만 합니다. 생일달과 날에 따라 수자 《3》을 선호하는 나에게 한다하는 진짜 명석 세점이 생기였으니 나는 복받은 수석인 같습니다. 하다면 선호수자—《3》을 이루는 희귀수석은 무엇이고 언제 주었는가고요? 말하자면 참 한국인 이진숙녀사부터 떠올려야지요. 한국인으로 불리우는 이진숙녀사는 현재 연변대학 민족문화교육원 한국측원장에, 한연직업기술학교 리사장 겸 원장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중국에 온지도 15년이나 난다고 하는데 연변대 민족문화교육원도 사재 등을 털며 뜻 있는 여러 분들의 힘을 합쳐 인민페 수백만원으로 일떠세운것이라 합니다. 지난해 여름이후 인연이 닿았는데 지난 5월 13일에는 나와 집사람한테 중국조선족사회의 첫 중년부부 새 결혼식으로 되는 《무료결혼식》을 치러주기까지 했지요. 어때요, 이만하면 이진숙녀사의 형상이 어느 정도라도 떠오르나요? 이 짧은 글에는 스쳐지날수밖에 없음을 먼저 밝히는바입니다. 이런 이진숙녀사님—원장님이 5월 2일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5월 3일 두만강가 남평의 송전으로 가는데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이 사람은 만사불구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두만강가 화룡시 남평진 송전마을에는 몇해전에 지은 이진숙녀사의 별장—조선족귀틀집과 땅마지기가 있습니다. 가고보니 송전마을인데 자가용 두대에 7~8명이 탄것 같습니다. 송전에 이르니 점심시간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나는 사례의 말씀 올리고 다짜고짜 두만강가로 나가보았지요. 아니, 나는 놀랐지요. 놀라도 크게 놀랐답니다. 송전마을앞 두만강가에는 대면적의 돌밭이 펼쳐져있었으니 말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별반없는 시점이라 말 타고 꽃구경식으로 부랴부랴 돌아쳐야 했습니다. 헌데 이 시간에 비하면 돌밭은 엄청이나 컸습니다. 돌들은 수석으로 말하면 쓸모가 적은 희스레한 돌이고 화산곰보돌이 가끔 섞이여 수석산출이 명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돌밭이 아닙니까, 연길수석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숫처녀지지요. 나는 구두를 신고말고 길고긴 돌밭을 휙 돌아보았습니다. 처음에 들어선 돌밭어구에 이르러 어딘가 떠나기가 아쉬워 주밋주밋하는데 글쎄 중국지도모양으로 된 수석한점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지 않겠습니까. 숨을 가다듬고 바로 두손을 가슴에 모아 의 은총에 천배백배 사례하고 주어드니 희귀수석 중국지도였습니다. 희스레한 돌에 초록색으로 된 문양석 수석이였지요. 두만강물에 씻어보니 무늬를 이룬 초록색은 반짝반짝 빛나고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나에게 수석 3을 이뤄주는 두만강 수석—중국지도 명석을 줏게 되였습니다. 별장에 돌아와 손님들에게 보였더니 이구동성이 중국지도,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보여도 중국지도, 글쓰기에 나선 10여명 초중생들에게 물어도 첫마디가 중국지도, 문인수석회의 동호인들에게 보여도 역시 중국지도—명실공히 금닭을 상징하는 중국지도, 내가 알건대 중국에 몇점뿐인 중국지도형 수석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두만강문인수석회의 리흥국회장은 중국지도이니 《신주대지》라 이름지으면 좋겠다며 6월에 전시되는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의 간판수석으로, 그것도 공화국 오성붉은기와 같이 출품하자고 했습니다. 오늘이나마 뒤늦게 공개하는 두만강 희귀수석—신주대지, 하늘의 은총에 감사하고 두만강에 감사하고 이진숙녀사님께 감사하고 여러 수석인들께 감사합니다. 나는 복받은 수석인입니다.
52    【명석소감】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 한점 줏고서 댓글:  조회:4159  추천:109  2006-06-01
【명석소감】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 한점 줏고서 리 함 이 세상 수석인들에게는 석복이란것이 있고 사람에 따라 석복이 다르다고도 하지만 나란 놈은 수석과 천생연분이 있는것 같다. 석복이 따른다는 말인데 생각지도 않고 탐석행도 아닌 평봉산아래 옛 유적지에서 고대희랍, 즉 그리스로 통하는 비너스형 수석 한점을 주었으니 석복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이달 5월 16일은 몽골 동부지역과 화북지역 열파의 영향으로 온 연변이 때이르게 찾아든 무더위로 시달리던 두번째 날이다. 무더위가 싫어 두문불출하고 글이나 쓰려는데 오전 8시반경에 석우 김학송씨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봉산 아래 있다는 진달래밭으로 가보지 않겠느냐는 청탁전화였다. 글이나 쓰련다고 잘라버렸더니 한참후 다시 전화벨소리가 들리였다. 역시 김학송씨의 전화이고 연변텔레비 문예부의 요긴한 사항이라고 한다. 《아 참 들볶는다니깐. 별수 없지.》 《언녕 그래야지!》 둘은 허물없이 찧고 받았다. 같은 문인인데다가 하나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부회장이요, 하나는 사무국장인 석우관계이니 서로 간격이 필요없었다. 결국 뒤따른 기자취재차에 앉아 연길시 의란진 대암촌 서남쪽에 펼쳐진 평봉산아래 진달래밭으로 출발하고말았다. 취재차에서 수인사를 나누고보니 취재팀일행은 연변텔레비 문예부의 주금파씨와 리상호씨 그리고 텔레비 얼굴인 아나운서 김춘희씨였다. 일전에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에서 펼쳐진 진달래축제를 축으로 진달래축제전문프로를 준비중인데 무언가 모자라는것 같아 우리 조선족시인이 진달래밭에서 시를 읇으며 아나운서와 주고받는 장면 30초짜리를 찍는다는 그들이였다. 시인으로 뽑힌것이 김학송석우요, 시인이다. 알고보면 일은 묘하게만 돌아간다. 지난 겨울에 연우산악회 평봉산산행시 고구려 옛 장성 돌성벽을 발견한후 평봉산과 대암일대를 수없이 다녀왔다. 샅샅이 답사했다는 말이 되겠다. 와중에 소택지에 바위돌로 덮힌 옛 물동자리를 발견했는데 연변의 새로운 풍경구여서 5월 7일 5월의 황금주기간에 가족여행을 나서보았다 워낙 연변 1중에서 공부하는 쌍둥이 딸 생일날인 5월 4일에 떠나려다가 겹쳐드는 행사로 5월 7일에야 겨우 시간을 냈는데 이날 상상외로 평봉산 남쪽아래 구간에서 보기 드문 대면적의 야외진달래동산을 발견하게 되였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평봉산에 다니는 10년 경력의 산행인들도 모르는 진달래동산이여서 산행인이고 석우들인 두만강문인수석회의 중견 인물들과 터놓았더니 가보자고 야단들이다. 그중에서도 원 연변방송텔레비 총국국장이고 현임 자치주 심계국국장,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 회장인 리흥국씨가 더욱 극성이다. 그래서 5월 11일, 리흥국씨의 알선으로 리흥국, 김대현(원 연변방송국 부주필), 김철학(시인, 연변시조시사 사장), 필자 등 넷은 리흥국씨의 전용차에 앉아 대암 서남쪽의 진달래동산을 돌아보았다. 사진촬영에 조예가 깊은 리흥국씨는 숱한 진달래사진을 찍어냈다. 5월 15일에 다시 진달래동산의 안내자로 나섰다. 그러던 5월 16일에는 또 김학송시인한테 붙들려 텔레비기자들과 동행하게 된것이다. 생각밖으로 기자취재차는 울퉁불퉁한 구릉길을 들추며 평봉산 남쪽 말 무덤산 아래에까지 갈수 있었다. 정차지에서 동북쪽 따라 조금 내려가면 진달래밭인데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초원 방목지에는 화산체 옛 막돌들이 가득 널리였다. 어느 찰나 나의 시선에는 땅에 박힌 우묵한 돌하나가 비껴들었다. 수석인의 눈길은 속일수 없었다. 파내고보니 고대그리스 조각품—비너스를 방불케 하는 수석 한점이다. 보라, 사람의 웃몸형 물형석인데 가슴부위가 움푹 패워들었다면 두팔이 떨어져나가고 머리가 잘라져버린 인체가 아닌가! 비너스수석을 원지에 두고 텔레비기자들을 안내하여 진달래밭에 갔지만 메새가 수풀을 그리워하듯이 나의 마음은 온통 비너스수석에 쏠린다. 귀로에서 김학송시인한테 자랑했더니 어서 가보잔다. 김학송씨도 보더니 괜찮은 수석이라며 언젠가 평봉산일대서 원 연변일보사 부주필 장정일씨가 줏고 애지중지하는 산석보다 낫다고 한다. 그 평이 감사하지만 학송씨는 이 수석이 고대원시 조각품형수석이라는것은 미처 보아내지 못한것 같았다.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한점은 이렇게 우연한 구릉지에서 우연한 기회에 필자의 손에 쥐여졌다. 귀가후 말끔히 씻어보아도 천여년의 풍상속에서 굳어져버린 흙먼지를 지워버릴수는 없었다. 그래도 비너스형 수석임은 틀림이 없어 수반에 올려놓으니 그리스 옛 비너스로 안겨든다. 고대그리스 비너스란 무엇일가? 다행히 나라는 사람은 취미가 다양하여 인류의 라체예술사에 짙은 흥미를 가지고 20여년이나 지궂게 자료를 수집해온데서 이만한 라체예술지식은 갖추고있는터였다. 고대유럽을 망라한 국가들, 회화와 조각에 종사하거나 중시하는 국가들에서는 적라라한 인체가 예술의 중심제재를 이루고있었다. 회화의 극성시기에 라체류의 라상(裸像)은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받들렸으니 실상 헤아리고보면 라상은 고대그리스인들이 기원(서기)전 5세기에 창조한 일종 예술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라체예술사에 눈길을 돌리면 고대그리스에 앞서 원시조각품들이 쏟아져나왔었다. 조잡해보이고 정예하지 못하기는 하나 원시조각품으로 알려지는 동산취여신상(东山咀女神像)이 그러하고 고대인도 원시조각품인 하라파남자조각상이 대표적 일례들이다. 의미있는것은 이 두 원시 조각품들은 각기 남녀상이기는 하나 머리가 없고 두팔이 없는것이라 하겠다. 아니 그뿐인가, 아니지. 고대그리스 력사속에 들어가보면 기원전 5세기의 에이스큐린비너스 녀신상에 두팔이 없고 고대그리스의 생육의 어머니 비너스도 머리가 없고 두팔이 없다. 고대그리스 로마시기 삼미신(三美神)도 머리가 없지 않으면 두팔이 없다. 이런 고대조각품들은 근근히 실례들뿐인데 고대그리스나 고대인도의 허다한 조각품들이 두팔과 머리가 없는것으로 나타난다. 고대인도 조각품인 나무신 약차녀는 두팔과 머리가 없을뿐만아니라 두 젖무덤마저도 패우며 잘리여나갔다. 인류라체예술사로 보는 고대조각품 사례들이다. 인류문명의 발원지인 고대그리스나 인도가 그러할진대 동방의 강국으로 불리운 고구려가 례외일가, 나는 필자의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을 근 2000년전의 고구려 옥저시기로 소급해보면서 인간의 가공이 미친 수석이 아닐가도 느껴본다. 그만큼 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은 고대 옛 라체예술조각품을 똑 떼여닮았다. 보면 볼수록 신통하기만 하다. 이런 시공간을 뛰여넘는 환상과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 있기에 수석인은 수석에 울고 수석에 웃는걸가. 우연속에 필연이 있다고 우연과 필연의 결합물인 나의 수석—고대그리스 비너스형 수석 한점, 수석덕에 나는 오늘도 평봉산의 옛 수석을 감상하며 머나먼 원시사회에로까지 거스르는 인류의 라체예술사를 더듬어본다.
51    두만강수석전시회준비 빈틈없이 댓글:  조회:4233  추천:91  2006-05-31
두만강수석전시회준비 빈틈없이 두 만 강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에서는 제1회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준비를 빈틈없이 짜고들고있다. 수석전시회의 관건적인 절차는 수석출품석 확정과 수반, 좌대 준비로 알려진다. 수석은 수반이나 나무로 깍아만든 좌대우에 연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두만강수석회는 이미의 수반, 좌대 토대에서 새로 연출하고저 5월 27일 오전에 연길시 해당 전문판매점에 가서 크고 작은 수반 수십개를 새로 사서 회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5월 28일 두만강문인수석회 부회장 김학송과 리함은 전문차로 도문에 가서 수석에 취미를 갖고 좌대만들기에 조예가 있는 분한테 31점의 수석을 맡기여 두만강수석전시회의 순조로운 전시에 순응해나섰다
50    6월 8일--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댓글:  조회:3967  추천:80  2006-05-31
6월 8일--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두 만 강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를 6월 8일에 연변박물관 2층홀에서 가지기고 합의를 보았다. 이는 5월 26일 저녁, 두만강문인수석회와 연변박물관의 관장들이 모인 모임에서 결정된 수석뉴스이다. 두만강문인수석회는 연변의 조선족지성인들로 무어진 동아리모임으로서 올해 만 2년철을 잡는다. 이날 저녁 모임에는 두만강문인수석회의 시인, 작가, 학자들인 김대현, 김학송, 김봉세, 김철학, 신철호, 석문주, 리함 등과 연변박물관의 맹철학관장, 한광운부관장이 참가하였다. 연변박물관에서는 두만강문인수석회와의 공동주최로 되는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를 올해 박물관 전문전시회의 하나의 대사로 삼고 틀어쥐고있으며 문건형식으로 주당위선전부와 해당 부문에 널리 알리였다. 제1회수석전시회의 모든 전시준비와 후근사업도 의사일정에 올려놓고 밀고나가고있다. 이번 제1회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는 6월 8일에 개막식을 가지고 6월, 7월, 8월, 9월 몇달간 계속 연변박물관내에 전시하게 된다.
49    【탐석기】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2) 댓글:  조회:4640  추천:97  2006-05-24
【탐석기】 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2) 리 함 두만강 남평구간 첫날 탐석행에서 송전과 류신구간 세개 돌밭에 미처 이를수 없었다. 그래서 5월 17일에 이어 5월 19일에 남평구간 두만강가를 다시 찾았다. 5월 19일 탐석행은 필자와 김봉세씨만이 아닌 김대현선생과의 3인행이였다. 김대현선생은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고문이고 원 연변방송국의 부주필로서 지난 1990년부터 수석에 남다른 짙은 취미를 느끼고 배낭을 지난채 강 따라 산 따라 연변의 산천을 누비며 다니지 않은곳이 없는 분이다. 고향이 당년의 화룡현 서성구 이도촌이고 어린시절을 연변의 미츄린으로 불리운 최일선외할아버지댁—명암촌 과수원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낸 김대현선생은 뻐스가 오늘의 서성진 명암촌구간을 지나칠 때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을 보이였다. 화룡태생인 필자와 그의 제자 김봉세씨는 명상에 잠긴 의미를 쉽사리 읽어낼수 있었다. 화룡뻐스부에 이르러 우린 남평행 택시를 바꿔탔다. 이틀전 탐석행에서 택시운전사 야씨를 알게 되고 사전에 련계를 취한데서 택시는 이미 뻐스부에서 대기하고있었다. 또, 택시는 반시간만에 남평진 류신촌구간 두만강가에 이르러 200여리밖에서도 오전 9시 지나 탐석에 몰두할수 있었다. 화룡시 남평진 류신촌은 남평진에서 동북쪽으로 10여리 떨어진 두만강가의 한 마을로서 이 구간 두만강가에는 송전마을앞에 못지 않은 꽤나 큰 돌밭이 있다. 송전령을 넘는 산중턱길에서 볼 때는 보통 정도의 돌밭으로 보이지만 버들숲사이사이 돌밭까지 이어놓으면 역시 굉장한 돌밭이였다. 셋은 제각기 자리를 잡아나가며 돌밭을 참빗질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첫 시작에 벌써 주먹만큼의 깊은 홈이 패인 수석 한점을 주어들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말랑말랑한 정도 두께로 구멍이 완전 뚫리지 않은 상태였다. 손에 쥐이는 돌로 뒤면을 때리니 닭알모양의 구멍이 펑 뚫리였다. 수석은 가공을 허용하지 않는 대자연의 걸작이라고 하지만 인위적부분을 잘 연마하면 집에 두고 감상하기는 무관한 흥미로운 수석감이였다. 실상 이 정도 크기의 구멍수석을 탐석한다는것은 그리 쉽지 않다고 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한식경이 지나 김대현선생이나 김봉세씨도 화산폭발의 산물인 구멍수석 한점씩 주어들었다. 하긴 이 구간 돌밭은 수마(水磨)가 잘되고 검푸른색의 돌들도 가끔 나타났지만 색다른 수석 한점을 탐석한다는것은 여간 쉽지 않았다. 정신과 체력의 소모였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우린 탐석지를 류신촌에서 10리가량 떨어진 동쪽구간의 룡연촌에 옮기였다. 택시를 세내니 10리쯤 거리는 잠간이였다. 룡연촌을 앞두고 두만강 제방뚝이 마을밖으로 크게 에돌아 있어 그리로 택시가 들어섰더니 갈수록 심산이라고 풀과 애어린 나무들이 자라있어 되돌아서야 했다. 할수없이 룡연촌구간을 포기하고 그 아래마을 룡연 6대에 이르러서야 탐석에 림할수 있었다. 그곳도 돌밭은 괜찮았겠으나 두만강 모래밭에서 철분을 채집하느라 어수선한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말이 아니였다. 그래도 수석과는 천생연분이 있는지 괜찮은 구멍수석 한점을 주어 명분이 서게 되였다. 김대현선생도 물이 고일수 있는 수석 한점을 주어들고 싱글벙글한다. 택시는 다시 한때 이름이 뜨르르했던 원 용화향 상화촌 구간을 달리였다. 역시 룡연에서 10리쯤 되는 거리라 잠간새에 이르렀는데 두만강가에 돌밭이라 할수 있는 곳이 두어곳 되지만 수석과는 거리가 먼 대자연속의 한낱 돌밭에 불과했다. 상화 5~6대인가 마을 동쪽아래 크게 후미진 절벽구간과 그 굽이돌이는 거리상, 시간상 갈수 없는 구간이라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부지런히 하루길을 달리기만 하던 해님은 어느덧 오후 종심에로 육박한다. 두만강구간의 더 이상의 새 탐석지는 무리였다. 택시는 우리의 뜻에 따라 워낙 스케줄로 잡혔던 상화⇒ 고령⇒화룡행 귀가길을 버리고 방향을 돌려 다시 두만강가 류신구간에 들어섰다. 거의 오전내내 탐석하던 곳이라 새 수석이 나질리가 만무했다. 인젠 하루 탐석일지를 접을 때도 된것 같았다. (2006년 5월 23일)
48    【탐석기】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1) 댓글:  조회:4516  추천:100  2006-05-24
【탐석기】 두만강 남평구간 첫 탐석행 (1) 리 함 5월 15일과 16일 이틀간 온 연변은 때이르게 찾아든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했으나 그에 앞서 화룡시 남평진 송전구간 두만강 돌밭에서 우연히 신주대지— 중국지도 문양석 한점을 주은 필자는 진정할수 없었다. 5월 17일, 떄이른 무더위 사흩날에 필자는 석우 김봉세씨와 더불어 두만강 남평구간 처녀지 탐석행에 나서보았다. 해란강이 심장지대를 흐르는 연변의 곡창지대 룡정 세전이벌과 화룡 60리라 평강벌은 벼모내기가 금방 시작된 참이라 전야는 들끊는, 약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있었다. 연길-화룡행은 76킬로메터라지만 중형뻐스는 세전이벌, 평강벌을 누비며 빨리도 달리여 한시간만에 우릴 화룡뻐스부에다 부리웠다. 오전 8시 남평행뻐스가 이미 떠난데서 택시를 잡아타야 했는데 남평까지 근 100리길 택시비는 일인당 15원에 불과했다. 화룡은 우리 둘의 고향이라 내 고향으로 달리는 두만강 첫 탐석행은 신나기만 했다. 택시가 화룡시가지를 벗어나고 우심령을 넘어서자 김봉세씨는 벌써부터 흥분에 젖어있었다. 알고보니 봉세씨는 1990년에 화룡을 떠난후 16년만에 우심령을 다시 넘어보는데 우심령너머 차장자는 그가 한때 소학시절을 보낸 잊지 못할 고장이였다. 택시가 우심령 서쪽기슭 고산촌을 지나고 차창자구내에 들어서자 김봉세는 이런 얘기를 터놓았다. 김봉세씨는 아버지가 현림업계통에서 사업하다가 차창림산작업소 업무소장으로 전근한데서 가족과 함께 화룡현성을 떠나 차창자로 이사하게 되였다. 지난 60년대초라고 하니 봉세씨는 소학교 저급학년시기를 차창소학교에서 보내게 되였는데 그때까지만도 차창자일대는 말짱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아담한 고장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차창자는 온통 한족들뿐이라며 개탄해마지않았다. 그것도 산동 등지에서 모여든 한족이주민들이 꼬드개로 넘친 초원지대를 개간하고 오늘의 마을을 일떠세우고 밭들을 개간했으니 그 개척정신이 우러러 보인다고 동을 달았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사이 택시는 숭선과의 갈림길과 신흥동, 선경대풍경구를 지나고 흥진, 류동, 추전, 류신촌 구내, 송전령을 너머 송전구간 두만강가에 이르렀다. 송전촌은 남평진의 한개 행정촌으로서 남평서 동으로 10리쯤 떨어진 고장인데 20여세대가 오붓이 모여살던 마을이 지금은 3세대쯤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 두만강가에는 크나큰 돌밭이 생겨나 리상적인 탐석지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그것도 5월 3일 남평송전행에서 발견했으니 연길의 수석인들로 말하면 그야말로 황금의 처녀지와 진배없었다. 수석인들의 눈길은 무서운가 본다. 5월 3일 행에서 두루 한바퀴 돌아보았는데 두번 다시 수석다운 수석을 손에 쥘수 없었다. 점심을 이곳 돌밭에서 거르고나도 옹근 오후시간이 남아 우린 송전 동쪽아래 바위구비로 탐석지를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바위구비로 두만강물이 출렁이며 흐르는데서 산등성이를 타야 했지만 나무숲 우거지고 진달래꽃 가담가담 피여있는 산등성이 길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었다. 연길이나 화룡의 산들은 이자 푸른 옷을 갓 입기 시작하는데 산들로 막히여 기후가 따뜻한 두만강반은 온통 완연한 푸른단장이다. 야산 같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에돌아내리고 벼랑바위구간을 지나 두만강가로 나아가니 눈이 뒤집혀질 지경이다. 송전마을앞 돌밭이 크다했는데 여기 바위구비구간은 그 몇배나 클것 같았다. 둘은 신바람 났다. 쨍쩅 내리쬐이는 땡볕도 우릴 나무그늘로 이끌지 못했다. 두어시간사이 필자는 표준형 문양석 한점과 구멍난 화산분출돌 몇점을 주었다. 그중 구멍수석 두점만 보아도 한점은 구멍이 닭알만큼이나 통쾌하게 뚫린 수석, 집에 두고 감상하기는 흥나는 수석이였다. 김봉세씨도 구멍수석 한점과 아라비야수자 《1》자가 박힌 보기 좋은 수석 한점을 주어들었다. 희스레한 돌밭천지에서 괜찮은 수석 몇점을 주었다는것은 일대 기문이 아닐수 없었다. 처녀지는 처녀지였다. 오후 시간이 흐르며 비구름이 몰키고 비방울이 떨어졌지만 우리 두 수석인은 처녀지를 떠날줄 몰랐다. 늦어서야 핸드폰으로 택시운전사 야씨와 련계하니 운이 좋게도 택시는 숭선갔다가 남평으로 돌아오는중이였다. 남평에서 화룡까지 택시비 일인당 10원, 250리쯤의 왕복 전체 로비는 120원—참으로 해볼만한 두만강 남평구간 처녀지 첫 탐석행이였다. (2006년 5월 22일)
47    【시】 수석을 주었습니다 댓글:  조회:4392  추천:89  2006-05-11
수석을 주었습니다 김 철 학 —2006년 4월 27일 오전 10시 무렵에 김학송, 석문주 시인과 함께 도문시 석현진 가야하강변에서 《고구려벽화》한폭을 방불케하는 기묘한 수석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수석을 《고구려벽화》라고 이름을 지었다.더 이상 평범할수 없는 고향의 강가에서신비로운 대자연만이 만들어 놓을수 있는 수석이라 불리우는 당신을 주웠습니다.순간, 당신의 억만년이 내 가슴을 진동합니다. 이 세상을 본후 처음 당하는 황홀경이 아닙니까.어쩌면 《고구려벽화》가 이리도 생동합니까. 동방제국 고구려의 장한 기백이 요동칩니다. 더할나위 없이 행운스럽게도 내 혼령은 당신과 더불어 억만년을 꿈결같이 보낼겁니다. 아닙니다, 인간들이 수자로 기록해 놓은 만년, 억만년하는 세월따위가당신과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그저 이 한가지만을 고집하고 싶습니다. 신비로운 대자연만이 만들어 놓을수 있는 수석이라 불리우는 당신을 주었습니다.우주와 함께 영원할 《고구려 벽화》입니다. 이제부터 당신과 소리없는 대화를 나누며핵폭발같은 엄청난 흥분과 감동을평생을 두고 고이 잠재우렵니다.
46    【인물스케치】김철학님 하마트면 쓰러질뻔 댓글:  조회:3710  추천:96  2006-05-11
【인물스케치】 김철학님 하마트면 쓰러질뻔 두 만 강 어제 5월 10일 오전이다. 시인이고 수석인인 김철학님은 두만강수석회의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리함 등과 더불어 수석전시회 전시청 보러 연변박물관에 갔다가 금방 주운 문양석 수석소품 한점을 내보였다. 서로 돌려가며 보다가 리흥국회장이 부주의로 딴딴한 콩크리트 바닥에 떨구게 되는 찰나 김철학님은 낯색이 하얗게 질리며 하마트면 쓰러질뻔 했다. 그럴만한 김철학님이였다. 다가온 봄과 함께 지난 4월 27일 오전에 김철학님은 김학송, 석문주 시인과 더불어 도문시 석현진 구간 가야하에 갔다가 《고구려벽화》 한폭을 방불케하는 그럴듯한 문양석 수석소품 한점을 줏게 되였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고구려 벽화를 똑 떼여 닮았다. 수석경력 2년째에 내놓을만한 수석한점 바로 줏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김철학님은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그날밤은 잠못 이루는 밤이였다. 석문주시인의 묘사를 빈다면 《까만밤 하얗게 지새우며 내처 흥분했다.》는 김철학님이다. 그래서 요즘 실없이 웃음이 많아진다는 김철학님은 《나 이돌 10만원 아래엔 절대 안팔아!》하며 흥분하기에 이르렀다. 김철학—수석경력 2년째에 늘 부진을 면치 못하고 고스란히 후배역에 충실해야 했던 님이라 십분 리해가 간다. 오죽했으면 《천마를 메운 전차를 탄 장수가 위풍스레 돌진하니 질겁한 룡이 긴 꼬리를 하늘높이 꾸불떡거리며 도망치려 하고있을뿐만아니라 그앞에 섰던 하늘나라 개도 혼비백산하여 빳빳히 꼬리를 추켜들고 덩달아 줄행랑을 놓으려 하고있다.》고 고대벽화 내용설명서까지 정리하고 《수석을 주었습니다.》서정시까지 써냈을가. 그래서 요즘 내처 흥분하고 실없이 웃음이 많아진다는 김철학님인데 애지중지하는 《고대벽화》가 콩크리트바닥에 떨어지니 어찌 낯색이 변하며 가슴이 철렁하지 않겠는가, 그러는 김철학님을 두고 일행은 박장대소했다. 김학송님과 필자는 배를 그러안고 웃어대며 빙글뱅글 돌아갔다. 다행히 《고대벽화》는 명이 질기여 티끌하나 손실보지 않았다. 아니면 김철학님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일어나지 못했을것이다. 한점의 수석 《고대벽화》로 웃음주머니 흔들흔들하는 김철학님—올해 수석 대운이 트소서!
45    【뉴스】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수석 알려지다 댓글:  조회:4159  추천:102  2006-05-10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수석 알려지다 두만강 5월 10일 오전, 두만강문인수석회의 리흥국, 김대현, 김학송, 리함, 김철학 등은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의 안내하에 연변박물관에 모여 전시청을 돌아보고 회원들의 댁을 방문하여 전시수석품을 최종점검, 전시수석품이 드디여 알려지게 되였다. 오전내내 잔잔한 비가 내렸지만 일행은 내내 흥분속에 잠기였다. 비속에서 이들은 리흥국회장댁, 김학송부회장댁, 리함비서장댁, 김대현고문댁을 순회하면서 100여점의 연변내 특색있는 수석을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에 전시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수석이 내부로 알려졌다. 세상과의 만남도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44    【뉴스】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6월 중순에 댓글:  조회:4333  추천:92  2006-05-10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6월 중순에 두만강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와 연변박물관에서 공동주최하는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가 다가올 6월 중순에 연변박물관전시청에서 성황리에 펼쳐지게 된다. 이는 5월 9일에 있은 두만강문인수석회와 연변박물관 해당 련석회의에서 결정된 최종 뉴스다. 두만강문인수석회는 수석에 취한 연변내 지성인들로 무어진 동아리로서 수석회 수석인들마다 저나름의 귀한 탐석수석을 소장하고있다. 수석의 주체가 이들만의 두만강수석들로서 어디에 내놓아도 엄지를 내들 수석들이 수두룩하다. 허나 연변에 수석전시회가 두어번 개최되였어도 전문 연변내 수석, 더우기 두만강수석을 전문으로 하는 수석전시회는 아니였다. 이에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에서는 연변박물관의 대거협력밑에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지고 두만강수석을 만세상에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5월 9일 저녁 두만강문인수석회의 회장, 부회장, 고문, 비서장들인 리흥국, 김학송, 김대현, 리함 등은 연변박물관 맹철학관장과 만찬을 가지고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 전시날자결정과 더불어 수석전시회준비를 빈틈없이 짜고들기로 했다. 성황리에 펼쳐질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를 두손 모아 기대하여본다.
43    【탐석행】두만강 강역에서 대산까지 댓글:  조회:4511  추천:99  2006-05-03
【탐석행】 두만강 강역에서 대산까지 (2006년 5월 2일) 두 만 강 천리 두만강 중류의 한 구간인 룡정시 삼합진 강역촌으로부터 개산툰진 대산촌 구간에는 30~40리 사이에 7~8개 돌밭을 이루는 수석탐석지가 있다. 뻐스가 통하지 않아 웬간해서는 뛰지 못하는 구간이라 두만강문인수석회의 고문 김대현선생과 김봉세, 신철호, 리함 등 넷은 5월의 황금주에 택시편으로 강역~대산 구간 탐석에 나서 보기로 했다. 오전 7시 40분에 룡정을 떠난 택시는 반시간만에 39킬로메터밖의 삼합진 강역촌에 이르렀다. 강역 1~2대로부터 5대에 이르는 근 10리 구간에는 대형 돌밭이 두세곳으로 헤아려지나 평소 쉽게 찾아보는 구간이여서 지나버리기로 했다. 하긴 오늘따라 피여나기 시작한 변강의 양지쪽 진달래와 살구꽃이 이채를 띠여 음달을 좋아하는 진달래, 양지쪽을 즐기는 살구꽃을 두고 재미있는 이야기 판이 벌어졌다. 잠간새에 10리밖의 강역 6대 마지막 마을에 이르러서야 이야기가 동강났는데 큼직큼직한 돌들이 무드기 널린 강역 6대 구간은 첫 시작부터 진한 흥미를 자아냈다. 했으나 이 몇해사이 수석인들이 수차 거쳐간 구간이라 수석다운 수석이 쉽게 나질리가 만무했다. 스산한 것은 강역 6대 마을이다. 한 20세대의 조선족들이 오붓하게 모여살았다는 마을이 달랑 3세대 밖에 남지 않았고 많은 밭들에는 새로 심은 애어린 백양나무들 뿐이였다. 변강은 텅텅 비여가고있었다. 강역 6대부터 대산 4대 구간 20여리 구간은 마을이 없는 무인지경이다. 강역 6대를 벗어난 택시는 다시 한 구간을 달려 두만강가 하나의 탐석지를 찾았으나 새로운 돌밭을 이루지 못한 탐석지는 변화가 보여지지 않았다. 김봉세씨가 산수형 소품하나를 주었을 뿐이였다. 이곳 탐석지 아래 굽이돌이를 이룬 구간에는 두만강 강심에 길다란 섬 하나가 있다. 중국측 섬이고 희망을 둔 수석산지여서 김봉세씨와 필자는 목이 긴 장화까지 준비했으나 허사였다. 4월 19일~20일의 폭설이 녹아내리면서 두만강 물은 엄청 불어있어 건널 엄두를 내지 말아야 헀다. 섬가의 희망의 돌밭은 사품치는 두만강물에 잠기여 버리였다. 이제 바라볼 구간은 개산툰진 대산 4대 서남쪽 몇리밖 돌밭이다. 이 구간 돌밭은 폭은 좁아도 꽤나 길어 리상적인 탐석지로 알려진다. 이 구간서 수석한점 줏지 못하면 오늘 탐석은 빵점일수밖에 없는데 돌밭을 누비다시피해도 헛탕이기만 하다. 넷이 돌밭을 한바탕 훑어도 그 상이 장상이다. 어쩌다가 모양새와 석질이 좋은 구멍난 투석 한점을 주었는데 구멍이 왼쪽 변두리여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라던 탐석지에서 그대로 물러설수는 없었다. 돌밭을 따라 동으로 누비다가 돌따서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돌밭이 시작되는 서쪽가에서 어른 주먹보다 조금 커보이는 검스레한 돌 하나가 눈에 띄였다. 시선에 잡히는 것은 둥그런 돌 웃가락에 박힌 두개의 새끼 손가락만한 돌이다. 이는 홈이 졌다는것을 알리는 표징이기도 한데 뒤를 보니 앞면과 이어진 뒤에도 콩알보다 큰 알갱이돌 하나가 박혀있었다. 탐석경험으로 보아 십상팔구는 구멍난 돌이였다. 정신이 부쩍 들었다. 강가에 가서 씻으며 박힌 모래돌을 가시여내니 새끼손가락만큼의 돌 두개가 들리여났다. 홈은 아래로 깊이 패여져 있어 벌써부터 흥분이 감돈다. 뒤의 콩알모양의 알갱이돌도 빼여던지니 뛸데없는 구멍돌이다. 구멍은 또 아래로도 통해 있었다. 아래우로 구멍난 소품이였다.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하고 아래쪽에서 김대현선생이 점심시간이라고 식사하잔다. 탐석하다말고 모임장소로 향하는데 구멍난 자지색모양의 소품하나가 눈에 띄운다. 모래와 돌이 박히지 않은 구멍돌이다. 뜻하지 않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잠감새에 구멍소품 두개를 주어들었다. 일행은 구멍소품으로서는 제격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속에서 김봉세씨가 지닌 약주 두어모금이 절로 넘어간다. 김대현선생이 아침 시장에서 샀다는 곰취 또한 일품이다. 밥맛이 새롭기만 하다. 수석인들의 점심참은 들놀이의 밥참과 진배없다. 점심식사후 한동안의 탐석이 이어졌다. 신철호씨와 서쪽가로 걷다가 구멍소품 또 하나를 주어들었다. 신철호씨의 몫이였다. 소품이나마 제각기 하나씩 주어들었으니 5.1절 황금주의 탐석행은 신나기만 하다. 두만강가에 피여난 진달래꽃과 살구꽃도 우릴 축하하는듯 싶다. 음달이 진 길가마다 진달래꽃은 두만강을 물들이기라도 하듯 떨기떨기 피여났고 양지쪽 살구꽃은 선구자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금시 터지려는듯 망울이 진 상태다. 산굽이를 돌아 대산 4대 구간을 지나니 대산 2대 구간이다. 이 구간과 대산 1대 서북쪽 큰 돌밭에서 다시 수석을 주어들진 못했으나 2대의 한 남성분한테서 감감 잃어버린 대산 1대~4대 구역을 다시 알고 2대 서남쪽의 소소리 높은 산이 대맥산(大脉山)이란걸 안것은 성과라 하겠다. 산행인이기도 한 신철호씨와 둘은 대맥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겨서야 직성이 풀리였다. 택시는 다시 대산 1대 구간을 에돌아 개산툰행 산중턱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두만강가 강역에서 대산까지 이어진 탐석의 하루다. 룡정서 삼합으로, 삼합에서 개산툰으로, 개산툰에서 또 룡정으로 달려야 하는 5월의 황금주 탐석행은 즐겁기만 하다.
42    【탐석기】홀로 탐석도 즐거워 댓글:  조회:4136  추천:77  2006-05-03
【탐석기】 홀로 탐석도 즐거워 (2006년 4월 29일) 김 봉 세 4월 29일 아침 5시경 나는 예나 다름없이 연집하강뚝 아침시장을 거닐었다. 아침 날씨는 유난히 따스하였다. (허참 이런 날씨에 탐석하지 않고 언제 하겠나) 나는 아침시장을 거닐다말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배낭에 무릅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넣고 수상시장 정류소에서 6선뻐스를 잡아타고 연길역으로 갔다. 《도문으로 가는 표를 주십시요》 《몇시 차 말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매표구에서 매표원이 준 표를 상세히 보니 발차시간은 6시 48분 이였다. 플래트홈을 바라보니 기차는 이미 역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급기야 대합실승강기를 타고 검표구를 지나 공중다리를 날래게 달아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뿡ㅡ》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연길역을 떠났다. 기차는 약 50분만에 도문역에 이르렀다. 나는 도문역 광장 동쪽부근에서 3륜차를 타고 도문해관다리로 향하였다. 넓다란 아스팔트 길 량옆에 가즈런히 줄지어선 살구나무에는 흰꽃, 분홍꽃송이가 울긋불긋 피여 꽃향기가 그윽하였다. 과일나무는 왜 먼저 꽃이피고 후에 잎파리가 자라는지? 화초는 왜 잎파리가 먼저 자라고 후에 꽃이 피는지 도무지 알리가 없었다. 그래 녀성은 꽃이라면 남성은 잎파리란 말인가. 그렇다, 꽃은 영원히 아름답다. 먼저 핀꽃도 아름답고 후에 핀 꽃도 아름다울뿐만아니라 잎파리가 안받침한 꽃은 더욱 아름답다. 실로 지난 4월 19일, 20일 력사상 보기드문 폭설의 흔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정녕 이 대지에 봄이 찾아왔다. 봄, 봄마다 애석인들이 발목을 잡게하는 두만강 강변에도 따스한 봄, 백화가 만발하는 봄이 찾아왔다. 《오늘은 어느 돌밭으로 갑니까?》 해관다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택시운전사의 물음이였다. 그자리의 택시운전사들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마패 돌밭!》 《자 오르시요. 인차 떠나겠습니다.》 택시는 어느사이에 일광산기슭 언덕마루로 달리고있었다. 필자가 굽이쳐 흐르는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반달형 돌밭을 바라보는 순간 6년전 문자석, 별나라석에 남다른 정을 두고있는 석우 리함씨와 두만강수석산지를 개척하느라고 도보로 이 언덕을 넘나들던 그 옛일들, 리함씨가 이 반달돌밭에서 수자석 《三》자를 탐석했다고 흥이겨워 이야기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택시는 간평촌, 하평촌을 지나 마패에 대이였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하천뚝에 올라 두만강 쪽으로 발길을 재우쳤다. 두만강 제방뚝에 이른 나는 그만 아연실색하고말았다. 작년 가을만 해도 목짜른 장화를 신고서도 섬의 돌밭으로 들어 갈수 있었는데 제방을 하느라고 물골이 바뀌여서인지 도무지 건널수가 없었다. 두만강 제방뚝을 따라 한참 걷고나니 제방뚝우에 난데없는 오토바이가 세워져있었다. 사방을 일별하니 강기슭에서 고기를 낚고있는 낚시군의 오토바이였다. 아, 그렇다. 봄마다 서로 만나는 낚시군이로구나. 나는 낚시군 뒤를 가로찔러 두만강기슭에 이르렀다. 두만강기슭의 실버들에도 버들개지가 소담하게 피였고 나무가지 우에는 까치가 《까ㅡ까ㅡ》노래 부르고있었다. 백양나무 밑에 있던 한쌍이 들꿩이 인기척에 놀랐는지 《프드덕ㅡ프드덕ㅡ》 두만강을 자유로이 날아 조선측 산기슭에 자리잡았다. 실로 조류들은 국경선이 넘나보다. 돌밭에 이른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작년만 해도 이 돌밭에 검실검실하고 굵직굵직한 돌들이 많았는데 어디에다 《호구》를 올렸는지 돌구멍만 남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뿐이다. 아마도 별장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것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가시고 탐석에 몰두하였다. 그러는데 강건너 조선쪽에서 《이겨라! 이겨라! 우리 편이 이겨라!》라고 웨치는 응원소리, 호각소리, 확성기에서 울러오는 노래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아마도 봄철교내운동대회를 하는것만 같았다. 이쪽 돌밭머리에는 손잡이뜨락또르가 《우르릉ㅡ우르릉》 모래를 운반하느라고 분주히 오가고 저쪽 조선 연강철도에는 기차가 《뿡ㅡ》하고 기적을 울리며, 흰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고있다. 대자연의 바람소리, 산새소리, 동음소리, 기적소리, 어린이들 웨침소리, 노래소리ㅡ실로 이 모든것이 합류되여 나만의 이 애석인을 환영하며 좋은 돌을 탐석하라고 응원하는것만 같았다. 그래. 오늘 이 대자연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우리 애석인에 속한다. 필자는 오후에 주은 돌 몇점을 모래우에 놓고 연출하고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온 아까 낚시군이 벙긋이 웃으며 다가왔다. 《좋은 돌을 주었습니까》 나는 주먹만큼한 소품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것은 주봉이요, 이것은 부봉이요, 이것은 산기슭의 옹달샘이요, 밑자리가 반듯하고 뒤통수가 잘생겼다고 일일이 그에게 설명하여주었다. 《야, 그 쌍봉이 정말 멋이 있으꾸마》 낚시군은 모래우에 텁석 앉으며 나에게 담배한대 권한다. 나도 배낭을 헤쳐 작은 보온병에서 더운 물을 따라 그에게 주며 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서야 생각밖으로 운이 좋아 탐석된 립석 바위경(높이 36센치메터, 너비 12센치메터, 두께 9센치메터 좌우) 한점, 소품 쌍봉 한점, 《0》으로 된 문자석 한점, 문양석 한점을 배낭에 넣고 흐뭇한 마음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기차에 몸을 실은 나는 호주머니에서 문양석을 꺼내보았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필경 여우놈을 닮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는 뽀쪽하고 두앞발을 들어 싹싹비비며 애걸하는 형상이 검은 색바탕에 노란 석영으로 그려져 있었다. 실로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는 형상이다. 다만 꼬랑이가 범에게 물리웠는지 아니면 가두었는지 짤룩한것이 흠이라 할가. 이 세상엔 완전완미한것이 없다고 아마도 수석이 아름답고 슬픈것은 완성된 수석이 없기 때문인가 본다. 나는 완성보다 아름다운 미완성을 사랑한다.
41    카나다 운석 75만딸라에 팔려 댓글:  조회:3912  추천:79  2006-05-01
카나다 운석 75만딸라에 팔려 카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 거주하는 남자가 2000년에 주운 운석을 드디여 75만딸라로 현금화했다. 이 운석은 과학자들에게 생명의 기원에 대한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줄것으로 평가되고있다. 그러나 6년전 버터 두조각 크기의 조그만 돌덩어리를 발견해 랭동보관해온 짐브룩에게는 75만딸라를 가져다준 행운의 돌이기도 했다. 당시 200톤량의 바위덩어리는 지상 25~30킬로메터 지점에소 폭발하며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와 유콘 준주 접경에 불꽃처럼 흩어져 떨어졌다. 브룩이 발견한 운석은 얼어붙은 타기쉬호수우에 떨어진 수백개의 조각가운데 하나다. 850그람 크기의 이 운석은 폭발로 인한 화염에 휩싸여 지구로 떨어졌지만 얼음우에 떨어진탓인지 기적적으로 아주 원 상태로 남아있었다. 브룩은 폭발돼서 몇주후 얼어붙은 호수를 가로질러 차를 몰고 가다가 검은 돌덩이를 발견했다. 그는 맨손으로 운석을 만지면 오염된다는 과학지식을 갖고있었던 덕분에 돌덩이를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와 랭동보관했다. 연구자들은 이 운석이 화성과 목성사이에 소행성들로 구성된 두터운 띠로부터 유래한것이라고 판정했다. 미국 NASA 과학자들은 탄소를 함유한 이 구립운석(球粒陨石)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기물질이 포함돼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물방울모양의 탄화수소를 찾아냈는데 이는 태양계가 형성되기 훨씬전에 형성된것이며 완벽한 유기체의 초기형태라는것이다. 아리랑저널에서
40    【탐석기】오늘은 너와의 만남이로구나 댓글:  조회:3930  추천:93  2006-04-30
【탐 석 기】 오늘은 너와의 만남이로구나 김 봉 세 지난해 11월 11일 탐석을 마감으로 장장 5개월이나 탐석행에 나서지 못해 온몸이 쑤셔났다. 마음이 항상 돌밭으로 달리는 기다림과 설레임은 산모가 산아의 출생일을 기다리는 심정이라 할가, 드디여 청명직후인 4월 10일 석우 왕영창씨와 두만강 밀강 첫 탐석행에 나서보기로 약속을 가지였다. 약속한 날자의 전날 밤이다. 배낭과 모자, 면장갑, 비닐장갑, 쇠갈구리 등 모두를 준비하고 자명종시계를 아침 5시에 울리게 맞추어 놓고 잠을 청했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수석장식장 앞을 거닐면서 개개의 수석을 어루쓸며 분무기로 물을 뿌려 보아서야 직성이 조금 풀리였다. 다시 잠을 청해보았다. (더 좋은 수석을 탐석해야지, 더 좋은 수석을 탐석해야지.) 머리는 온통 기대가 가는 래일의 탐석이다. 어느결에 꿈나라에 빠져 들었는지 자명종 소리에 놀라 깨여나니 아침 5시였다. 창문을 열어보니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이고 가슴을 포근히 껴안아준다. 아침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안해가 정성스레 갖추어준 도시락을 배낭에 지니고 총총걸음으로 로잔(老站)에 이르니 정각 7시, 뒤미처 왕영창씨도 이르고 훈춘행 뻐스에 오르니 오전 7시반이다. 훈춘행 뻐스는 연길시가지를 벗어나 연길~도문 고속도로에서 달린다. 덜먹 총각이 숫처녀를 만나러가는 심정이라 할까,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이기만 한다. 석우 영창씨는 대자연이 인류에게 하사한 문양석의 기묘한 자태를 흥이 나 이야기하기도 하고 탐석은 끈질긴 의력과 심미안이 있어야 한다고 곱씹기도 한다. 필자도 지난 북경행에서 중국관상석협회의 도움으로 북경 제2차 기석전시회에 참가했던 경과와 감수를 터놓았다. 재미나는 석담속에서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어느덧 탐석지 밀강이라, 뻐스에서 내려 10분쯤 걸으니 밀강구간 두만강탐석지가 눈앞이다. 둘다 《야!》소리가 절로났다. 간밤에 내린 비로하여 돌밭은 금방 미역감은 처녀처럼 말쑥하고 깨끗한데 가마반지르르하고 굴곡진 문양석은 보다 선명해 보였다. 돌밭에서 탐석장비를 챙기고 습관적으로 심호흡 20차 좌우하니 《봄이 왔다고 제비들도…》노래가 저절로 튕겨나온다. 돌밭 저쪽에서는 흥얼흥얼 부르는 영창씨의 노래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필자가 청석, 오석의 산수경석, 물형석에 신경을 쏟을 때 영창씨는 문양석, 문자석에 골몰한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벌써 12시반, 한자리에 앉아 약주를 조금 마이기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서로 주운 돌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영창씨가 주은 인물형 문양석은 검은 색바탕에 하얀 문양이라 한 아이가 땅에 허리를 굽히고 다른 아이가 허리우로 뛰는 모습이라 어린시절 말타기유희를 련상시킨다. 또, 오후 탐석이 열을 올리였다. 한시간 가량 지나 먹장구름이 밀려오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바람마저 불어쳐 말이 아니다. 춥기도 하여 담배 한대 피우려는데 두어발짝 앞에 변화가 잘된 청석 한점이 댕그라니 누워 있질 않겠는가, 필자는 두손을 모아 코등에 가져가고 《하느님》께 기도한 후 조심스레 연출해보니 무게가 있는 립석 단바위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오묘한 동색 청석이다. 뽐으로 재이니 높이는 약 23센치, 너비 18센치, 두께가 약 17센치메터—상하비례, 좌우비례가 어울리는 수석임에랴. 필자는 속으로 (오늘은 너와의 만남이로구나!)하고 쾌재를 불렀다. 영창씨도 삐여난 문양점 몇점을 주어들고 다가왔다. 이때의 기쁨을 어찌 왕자와 공주의 태여남에 비길수 있을가! 다음의 탐석지를 두만강 수석의 주요산지인 도문아래 신기동으로 잡았다. 귀로에 오르면서도 머리는 온통 다음 탐석에서 어떠한 수석을 쥐게될가 하는 생각뿐이였다.
39    【스케치】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댓글:  조회:4129  추천:73  2006-04-29
【스케치】 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리 함 4월 28일은 셋째형 셍일이라 안해와 아들놈과 더불어 동북아뻐스부로 향하는데 연길 공신쪽으로 뻗은 길가 거리미화용 복숭아꽃이 피여나기 시작했다. 지구의 날 4월 22일엔 4월 20일의 폭설을 이겨낸 두세그루 복숭아나무잎이 파릇파릇 움트기 시작하더니만 4월 27일 뒤늦게 찾아든 따스한 봄볕에 힘입어 일제히 꽃으로 소담히 피여오르는 모양이다. 연변부유보건원 정원의 복숭아꽃도, 살구꽃도, 동북아뻐스부가 자리잡은 동서 거리량켠의 복숭아꽃도 일제히 다투어 피여난다. 오, 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이 계절을 가리켜 만물이 소생하는 봄, 종다리 우짖는 봄,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봄, 온 누리에 가득차 흐르는 봄, 나무잎이 푸르므레 움트는 봄이라 하거늘 드디여 연변대지에 봄이 찾아왔다. 4월 27일, 4월 28일에 이어 4월 29일 오늘도 꽃샘추위 이겨낸 화사한 봄날이니 대자연의 모든 것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때아닌 봄추위에, 폭설에, 진눈까비에 발뼘발뼘 다가서던 봄아씨가 오스스 움추러들더니 절기 한철은 늦어진것같다. 4월 중순과 하순사이면 연변 산야에 진달래꽃 만발하고 겨우내 억눌렸던 만물이 한껏 기지개를 켜며 소생하련만 어디라없이 살풍경이 밉살스러웠다. 그래도 오는 봄은 막을수가 없어서 흙냄새풍기는 훈훈한 봄바람에 소심스럽기만 하던 봄아씨가 언제 그랬느냐듯이 아장아장 걸어온다. 봄은 모아산 남쪽너머 세전이벌에도 찾아들었다. 2~3일전까지만도 한적하던 전야에 사람들 밭갈이와 씨붙임에 한창이다. 봄은 60리라 일컿는 평강벌에도 찾아들었다. 논갈이에 나선 농민들 이랴낄낄 소를 다독여가는 소리 정다웁고 갈아번진 검스런 흙냄새 풍년소식 예고한다. 봄은 평강벌 중부에 자리잡은 셋째형네 집에도 찾아들었다. 남향집 벽가 세멘트바닥 틈서리에 자라난 민들레 두떨기가 활짝 핀 노오란 꽃 한마당을 일제히 토해냈다. 전야에서는 아직 볼수없는 떨기떨기 민들레꽃이다. 봄은 겨우내 시가지 세멘트바닥에 찌든 수석인들 속에도 찾아들었다. 봄바람에 두만강수석회 수석인들 너나없이 배낭메고 쇠고랑이 들고 강따라 돌밭찾아 탐석행에 오른다. 봄이다. 완연한 봄이다. 연길거리거리의 복숭아꽃, 살구꽃은 보다 탐스럽게 어여쁨을 자랑한다. 연변의 산과 들에 진달래도 다투어 피여난다. 그래, 봄이다. 온 누리에 완연한 봄이 가득차 흐른다. (2006년 4월 29일)
38    김철학님이 주은 고대벽화 댓글:  조회:3913  추천:100  2006-04-29
김철학님이 주은 고대벽화 석문주 (흐흐! 운수대통이야!) 수석 경력 2년째, 늘 부진을 면치 못하고 내놓을만한 돌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김철학님이 요즘 좋은 명석 한점을 줍고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린다. 구겨진 체면도 살리고 금년 6월달에 펼쳐질 수석전시회에 내놓을만한 좋은 작품을 구했으니 까만밤 하얗게 지새우며 내처 흥분했다는 말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암, 가구 말구요. (나 이 돌 10만원 아래엔 절대 안 팔아!)라고 하는 고집스런 말씀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암, 이게 고대벽화가 아닌가? 옳구 말구! 분명히 돈황석굴의 그 벽화를 닮았다. 오묘하기 짝이 없다. 대바람에 통운이 트고 석복이 터진 김철학회원님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리구 요즘 실없이 웃음이 많아진다는 그의 묘한 행복감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암, 가구 말구요. 그의 석복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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