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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수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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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소흥의 원림세계 (2) 댓글:  조회:4409  추천:66  2009-02-07
                  소흥의 원림세계 (2)  이어지는 심원입니다. 몇번에 나누어 펼쳐 드립니다.
216    소흥의 원림세계 (1) 댓글:  조회:4465  추천:70  2009-02-07
                 소흥의 원림세계 (1)   월나라 때까지만도 2500여년의 력사를 가진  절강 소흥은 이름난 력사문화도시로서 원림세계가 쫘악 펼쳐지고 있습니다.   "소흥의 원림세계(1)"은  남송의  위대한  애국시인  륙유를  주선률로 펼쳐지는  도심의  "심원"입니다. 그야말로  선경을  방불케  하는  절경입니다.   원림세계라 하면 명승고적에 수풀, 꽃, 돌과 물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수석인이 돌을 떠날수 없듯이 원림의 돌세계는 너무나 황홀합니다. 자연이 아닌 인공으로 이루어내는 세계지요.
215    섣달 그믐날 찍어 본 사진입니다 댓글:  조회:4056  추천:60  2009-02-01
            섣달 그믐날 찍어 본 사진입니다   1월 25일 섣달 그믐날 절강 소흥의 가암풍경구를 찾았습니다. 여러 분들의 감상을 기대합니다.
214    기축년 소띠해 행복 가득하소서 댓글:  조회:4793  추천:71  2009-01-31
             기축년 소띠해 행복 가득하소서
213    선경바다 구름바다 하늘위에 펼쳐져 댓글:  조회:4275  추천:70  2009-01-24
                 선경바다 구름바다 하늘위에 펼쳐져   대자연의 기이한 돌에서 기분을 바꿔 볼까요, 항주~광주행 하늘나라서 찍어 보았습니다.    즐거운 설 시각이 되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당신의 새해를 축복합니다 !!!
212    대자연의 기이한 돌 댓글:  조회:4028  추천:65  2009-01-24
                   대자연의 기이한 돌   대자연엔 기기묘묘한 돌들이 많은가 봅니다. 수석인이니까 돌을 떠나지 못하여 기이한 돌들이 자주 눈에 띄울까요?!   여기 올리는 사진은 절강의 명산 회계산 주봉아래의 바위사진입니다.    하늘같은 엄청 바위덩어리가 한 부위만 아래 바위에 대이고는 그대로 들려 있지만 가까이서, 멀리서도 그 전모를 찍을수가 없어 유감입니다.    설기간~~보는 이들의  한 순간에 즐거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11    새해 기축년의 첫 태양이 솟아 오릅니다 댓글:  조회:4875  추천:72  2009-01-01
        새해 기축년의 첫 태양이 솟아 오릅니다   높이 21메터의 대우동상이 일떠선 절강 회계산 북쪽 정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우리 두만강수석회를 꾸준히 지켜봐 주신 모든 이들이 솟아 오르는 2009년 기축년 새해의 첫 태양과 같이    생기발랄하며, 항상 건강하고 안녕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
210    남경총통부의 수석세계 댓글:  조회:4895  추천:77  2008-12-28
                 남경총통부의 수석세계      남경취재차 지난 11월 중순과 12월 초에 두번 남경에 다녀 왔습니다.       남경총통부는 남경 장강로 292번지에 위치, 600여년의 력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력대는 그만두고라도 태평천국시기 홍수전이 남경을 수도로 하고 여기에 굉장한 규모의 천조궁전을 지었고, 1912년 1월 1일 손중산선생이 여기서 중화민국 대통령에 취임, 1927년에 국민정부가 세워지고 여기는 또 1937년까지 국민정부 기관으로 되였습니다.      이 글의 제목을 "남경총통부의 수석세계"라고 했지만 실은 총통부내에 진렬했거나 꾸린 것, 수석세계가 엄청 컸습니다. 남경의 수석집산지였습니다.
209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6) 댓글:  조회:4919  추천:79  2008-12-21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6)
208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5) 댓글:  조회:4697  추천:86  2008-12-21
중국 중경 만석 박람회(5)
207    【나와 수석】(1) 우화석—나 수석사의 첫걸음 댓글:  조회:5157  추천:94  2008-12-11
【나와 수석】(1)     우화석—나 수석사의 첫걸음       2008년 11월 하순,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회장 부부와 더불어 절강안휘 접경지대 수석탐석에 다녀온후 기분이 류다르게 짱이다. 돌이켜보면 김봉세회장과 나 둘만의 첫 수석탐석은 10년전으로 거스르는데 수석으로의 어섯눈은 그보다 훨씬 앞선 지난 80년대 초반 남경우화석이 시작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25년전인 1983년 5월 나는 행운스럽게도 남경우화대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이듬해이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나와 당사연구실의 왕청산선배는 장강이남 겨레발자취답사길에 올랐었다. 상해, 소주, 남창, 구강 등지를 거쳐 남경에 이르렀는데 남경에서의 답사는 남경의 중산릉과 우화대로 이어졌다. 그시절 30대 문턱을 바라보는 열혈의 나에게 있어서 남경하면 선참 떠오르는것이 우화대였다. 옛날의 우화대는 석자강(石子岡), 마노강, 취보산 등으로 불리우다가 남송시기 운광이라는 고승의 설법에 의해 우화대(雨花臺)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되고, 력래로 풍경명승구로 이름이 났었지만 구중국의 어두운 시절에 우화대는 국민당반동파 등이 우리 혁명지사들을 학살하는 형장으로 살풍경을 이루며 수많은 선렬들의 피로 물들어갔다. 그러니 답사의 발길이 우화대로 돌려지는데 우화대답사에서 흥미로운것은 당지 사람들이 자기로 채집한 우화석을  담아다가 파는것이라 할까. 자연우화석은 자름자름한 마노들이고, 수마가 잘되고, 문양이 천태만상을 이룬 색채석이여서  대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우화석을 파는 사람들은 흔히 농촌에서 왔다는 아낙네들이 아니면 50~60대의 남성들이라, 물어보니 강돌이 아니라 땅속의 자갈층에서 캐낸 것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수석이란 개념조차도 모르던 시절이여서 땅속에 이런 자연우화석이 있다는것이 그리도 신기할수가 없다. 값을 물으니 우화석 하나가 보통 1원 사이, 나는 문양이 환하고 반들반들한 우화석 몇점을 골라잡았다. 그때의 우화석은 모두가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형태의 우화석들이였다. 수석을 모르며 재미로 느끼던 시절의 일로서 그래도 굳이 나 수석의 어섯눈이요, 첫걸음이라 함은 수석으로 이어지는 자연우화석의  첫 이해요, 첫 인상이요, 첫 구입이였기 때문이다. 우화석은 세계 수석가운데의 진귀한 품종으로서 주요성분은 천연 꽃마노석이고, 250만년전~150만년전에 형성, 강소 의정이 주요산지라고 알려진다. 그만큼 우화석의 력사도 유구한데 남경의 음양문화유적지에서 우화석과 우화석으로 만든 장식픔들이 발견되였다는 것으로 보아 5000여년전 고인류시절에 이미 우화석이 개발되였음을 알수가 있다. 당송이후에 이르러 우화석은 문인들의 글속에 자주 나타나는데 남송시기의 신화이야기가 그러하다.   남송 량무제시절에 고승 운광법사가 석자강에서 설법하매 그 정성에 하느님이 감동되여 꽃비를 내리니 꽃비가 땅에 떨어져 오색석자(五色石子)가 되였더라.   그로부터 우화대, 우화석이라는 부름이 생겨나 오늘에 이르렀다. 근대이후 우화석은 보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예술대사들인 서비홍, 매란방 등이 우화석을 무척 즐기였다고, 주은래총리도 일찍 남경 매원 시절에 우화석을 사랑한 나머지 질그릇에 잘 모시였다고 한다. 최초에 사람들은 우화(雨花)형태의 마노석을 우화석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우화대계렬의 자갈층에서 채집하는 자갈들을 어우러서 우화석이라고 부른다. 이런 우화석이 지난 80년대 초 이후 시골의 농민들이 조금씩 광주리에 담아다 팔던데로부터 지금은 우화대 안팎이 우화석시장을 이루어 흥성의 일로를 걷고있다. 내가 내눈으로 보아온 우화석팔기의 어제와 오늘이다. 25년이 지난 11월 중순에 나는 다시 남경우화대에 발길을 돌리면서 받은 인상인데 오늘의 우화석은 거개가 인공으로 다듬어져 하나에 5원~10원, 몇십원, 몇백원에 팔리고 있었다. 진귀한 우화석은 그 값이 얼마인지 모른다. 아무렴은 어떠랴, 1983년 남경우화대 첫 답사는 나더러 세상에 우화석이 있다는것을 알게 하고 나 수석사의 첫 걸음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니.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남경우화대를 거닐며 감개무량한 나머지 25년전의 우화대를 떠올려보며 남경우화석이 나 수석사의 첫걸음이였다고 자랑스레 말하며 이 글을 “나와 수석”의 첫 글로 쓰게 된다.   2008년 12월 9일, 소흥에서                                        
206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4) 댓글:  조회:4571  추천:68  2008-12-07
무엇 때문에 남방 지역에 수석이 상대적으로 더 많을까요? 이는 자연지리환경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황하 등 북방의 강들은 황토고원처럼 돌이 적고 흙이 상대적으로 많으며 돌이 있다해도 물살이 급하지 않은 지역을 경과하다보니 수석이 적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장강 등 남방의 강들은 세계적으로 해발이 제일 높은 청장고원에서 발원하여 급속도로 줄기찬 물살을 타고 하류에로 흐르고 있으며 또 강 연안에는 황토고원과는 달리 많은 암석들이 있기에 홍수 때마다 수없이 많은 돌들을 하류에로 굴러내려가게 합니다. 그 과정에 각종 성분을 가진 암석들이 여러가지 형태로 마모되면서 오늘 우리가 볼수 있는 기석으로 된 것입니다.     이건 단지 저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오니 여러분들의 고견을 바랍니다.
205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3) 댓글:  조회:4673  추천:76  2008-12-06
 오늘부터 10일간 중경전람센터(会展中心)에서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행사가 있게 됩니다. 중국 남방지역 성시들로는 중경, 사천, 운남, 귀주, 호북, 광동, 광서 등 성,시들이 참가했고 북방지역에서는 신강, 산동성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의 먄마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전시장 내 400여개 부스가 거의다 찰 정도로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수석과 근예(根艺)작품들을 돌아보면서 160여장의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빙산일각(冰山一角)에 불과합니다. 이 사이트에 사진을 등록하는 기술이 없어 한번에 겨우 10장 정도밖에 올릴수 없는데 오늘은 먼저 사진 찍은 순서대로 30장을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흥취가 있으시면 몇번 더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4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2) 댓글:  조회:4548  추천:83  2008-12-06
 오늘부터 10일간 중경전람센터(会展中心)에서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행사가 있게 됩니다. 중국 남방지역 성시들로는 중경, 사천, 운남, 귀주, 호북,광동, 광서 등 성,시들이 참가했고 북방지역에서는 산동성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의 먄마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전시장 내 400여개 부스가 거의다 찰 정도로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수석과 근예(根艺)작품들을 돌아보면서 160여장의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빙산일각(冰山一角)에 불과합니다. 이 사이트에 사진을 등록하는 기술이 없어 한번에 겨우 10장 정도밖에 올릴수 없는데 오늘은 먼저 사진 찍은 순서대로 20장을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흥취가 있으시면 몇번 더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3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댓글:  조회:4652  추천:66  2008-12-06
  오늘부터 10일간 중경전람센터(会展中心)에서 중국중경만석(万石)박람회 행사가 있게 됩니다. 중국 남방지역 성시들로는 중경, 사천, 운남, 귀주, 광동, 광서 등 성,시들이 참가했고 북방지역에서는 산동성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의 먄마에서도 참가했습니다. 전시장 내 400여개 부스가 거의다 찰 정도로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수석과 근예(根艺)작품들을 돌아보면서 160여장의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빙산일각(冰山一角)에 불과합니다. 이 사이트에 사진을 등록하는 기술이 없어 한번에 겨우 10장 정도밖에 올릴수 없는데 오늘은 먼저 사진 찍은 순서대로 20장을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흥취가 있으시면 몇번 더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2    【탐석기】탐석도 하고 항주도 지나보고 댓글:  조회:5366  추천:55  2008-12-04
               탐석도 하고 항주도 지나보고   절강안휘 접경지대  첩첩산구에서 하루밤 떨고나니 이튿날 새날이 밝아온다. 련일 해맑은 날씨더니 이 아침은 첫 된서리가 대지를 강타하며 강남땅은 사정없이 찬기운을 토해낸다. 그래도 아침해가 하루길을 달리며 찬기운을 발뼘발뼘 몰아내니 따스함이 대지를 포근히 감싸 안는다. 우리는 다시 새날의 탐석에 나서 보았다. 탐석지는 산과산 사이를 흘러내리는 림천하가 아닌 절서대협곡 어구 룡강진 부근으로 잡아졌다. 절서대협곡의 어구 길가 대나무림을 배경으로 김봉세 부부를 사진속에 잡아두니 뒤날 강남땅 탐석기념은 되리라~그러니 마음이 훈훈해 난다. 강가에 이르니 파릇파릇 가을달래가 한창이여서 강남땅의 풍취를 더해준다. 대협곡 어구구간은 어딜보나 대나무숲이요, 흰머리를 떠인 가을 억새밭이 한창이다. 끝도 모르는 돌밭이 펼쳐져 기대가 앞서간다면 대협곡을 훑어내린 큼직큼직한 돌들은 너무도 수마가 잘되여 경탄뿐이다. “이런 엄청난 돌들까지 둥글둥글 모양이니 그 력사가 수백수천만년은 잘 될것 같소.” “글쎼, 대자연 대협곡의 힘이란 참 신비도 하지. 둥글둥글 큰돌들이 어쩌면 여기까지 굴러 왔을가?!” 나와 김봉세 부부는 너한마디 나한마디 주고받으며 돌밭을 누비였다. 수메터 높이를 가진 강변 언덕받이나 저쪽 두가닥 강물의 합수목 구간 언덕받이나 하나같이 한층 또 한층의 둥그런 돌과 흙으로 그 형성역사의 유구함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때였다. 큼직한 둥그런 돌들사이 바닥에 차돌같은 맞춤한 돌하나가 보이는데 한쪽면이 잘 썩어있었다. 틀림없는 명석이라 제꺽 주어들고 보니 앞뒤가 모두 썩은 흰돌이다. 인공으로 조각한 섬세한 조각품 같았다. 북경이나 심양 청나라 고궁의 돌조각품과 진배 없다. 나는 하마트면 “수석 한점 주었소!”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래 하늘이 무심하지야 않겠지. 어제 이른 새벽에 강남땅에 와서 첫 별밝은 하늘을 보았는데 몰라 줄수가 있을까!” 나는 희열속에 빠져 들었다. 잇따라 층암절벽을 감도는 뭉게뭉게 흰구름떼를 련상시키는 소품 한점이 나를 불렀다. 룡강진 부근에서는 우주의 중심이런듯한 복판이 도드러진 소품 한점이 또 나를 빠끔히 올려다 본다. 그래서 지난해 11월에 달리는 버스로 절서대협곡을 지나며 본 거대 돌밭에 무엇인가 숨어 있는것 같아 그리도   다시 오고 싶어 김봉세 부부 동반으로 달려온 내가 아니던가. 그래도 나는 이 기쁨을 활 들어낼수가 없었다. 어제와는 달리 김봉세 부부가 절서대협곡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수석 한점을 주어들지 못했는데 나 혼자만 좋다고만 할수도 없지. 오후 일찍 서둘러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대소 버스를 세번 갈아타며 항주에 이르매 항주서역이라, 항주서역에서 항주동역으로 달리는 먼 구간은 항주시내 구경이 제격이다. 뽕도 따고 님도 본다더니 수석도 탐석하고 아름다운 항주도 지나보는 탐석의 하루가 소리없이 흘러간다.   2008년 11월 29일, 소흥에서                                                                                
201    【탐석기】절강안휘 변계에 탐석의 자취 남기다 댓글:  조회:5289  추천:59  2008-12-03
            절강안휘 변계에 탐석의 자취 남기다     여느 때와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 6층 아빠트 창문가로 다가가니 새벽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어둠이 깔린 이른 새벽의 공기속을 헤치노라니 삼태성을 망라한 겨울철 대6각형이 서남~서북 하늘에 걸쳐  누워있고 정동쪽의 높이 25도 쯤 되는 하늘엔 봄철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목동자리의 1등성—아르크투르스가, 동남쪽 높은 하늘엔 봄철의 별자리 사자자리가, 서북쪽 높은 하늘엔 북쪽하늘의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유난히 빛나고 있다. “오늘은 구름 한점 없는 해맑은 날씨겠구나. 저 하늘에 숱한 1등성과 2등성의 별들이 빛나는 것을 보면 이제 가는 탐석길에 행운이 깃들것 같고!” 벌써부터 마음이  둥둥 뜬 나는 상해의 아들집으로 왔다가 소흥의 나한테로 온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 리분녀 부부와 같이 아침 일찍 서둘러 소흥의 뻐스중심부로 갔고 오전 7시반 뻐스를 잡아타고 절강~안휘 접경지대의 절강땅 림안시 룡강진으로 달리였다. 지난해 11월 황산행에서 룡강일대의 수석탐석지를 보아내고 뒤미처 나 홀로의 탐석길에 오른 후로 두번째 절강 룡강 탐석길이였다. 김봉세회장은 당신이 있어 상해서 소흥에 왔고 강남땅 절강에서 탐석할수 있게 됐다며 감개무량. 그속에 항주의 전당강를 지나고 서호가의 륙화탑을 지난다. 몇시간만에 근 500리밖의 절강 룡강 구내에 다달으니 주위세계는 온통 푸르른 산들이요, 림천강에 맑디맑은 물 흐른다. 근근히 1년후의 두번째 걸음인데 우리의 경탄을 모으는 림천강 돌밭은 완전히 바뀌여져 있었다. 분명 올해 봄과 여름사이 큰물이 졌음을 단적으로 알리는 눈앞 현실이였다. 나는 림천강을 가로탄 고속도로 다리구간에서, 김봉세부부는 다리 아래 구간에서 탐석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탐석이, 그것도 내 고향 연변이 아닌 강남땅 절강에서 탐석한다는 것이 신나기만 하다. 화창한 봄날이련듯 따스한 11월의 태양아래 우리는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어느덧 김봉세씨는 산수석 한점 주어들고 안해되는 분은 호수석 수석 한점을 주어들고 희열을 감추지 못한다. 나도 점점이 박힌 문양석 한점과 산수석 한점을 주어들었지만 그다지 한다하는 수석은 되지 못한다. 이 두점조차 버리니 맹랑한것은 나 혼자뿐, 그래도 기분은 좋아 등산이 울고간다, 여행이 울고간다며 코노래가 절로 난다. “하느님이 공평하지 못하구만. 북방땅엔 눈내리는 벌거벗은 대지를 주고, 강남땅엔 한겨울 모르는 푸르른 산천을 주니 말이요.” “하하하” “호호호” 우리 셋은 하느님 타령에, 북방~강남 타령에 한바탕 웃음판을 터뜨렸다. 저녁은 따스하던 한낮과는 전혀 딴판이다. 겨울옷까지 주어입었는데 온몸이 오싹오싹해 난다. “이거, 북방의 겨울이 시샘하여 강남땅을 휩쓰는것이 아니오?” 나는 강남땅 두번 겨울철에 이런 추위 몰랐다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러니 주숙지 방은 더 썰렁하여 옷을 몽땅 주어입고 이불속에 누워도 찬기운만 랭랭하다. 어이유, 누가 알았으리오, 여기는 소흥이 아닌 황산 가까이 해발 1800여메터 청량산 아래 첩첩산구여서 제법 추위를 부른다는것을--- 어이유, 누가 알았으리오, 별들이 총총한 새벽날씨 이미 절강땅 첫 된서리를 잉태하고 있었다는것을---   2008년 11월 28일, 절강 룡강에서                                                                              
200    신철호님이 보내온 한국 야유회사진 댓글:  조회:4516  추천:64  2008-12-03
         신철호님이 보내온 한국 야유회사진   12월 1일 한국에 박사공부를 간 신철호님이 11월 21일 동료들간 야유회 사진 5장을 보내 왔습니다. 먼저 올린 잡문과 함께 보내온 사진입니다. 신철호님의 우리 수석회 코너 활약이 돋보입니다.
199    【잡문】565님에게 이그노벨상을 (신철호) 댓글:  조회:4847  추천:67  2008-12-01
                      565님에게 이그노벨상을       이그노벨상은 미국의 과학잡지 《기발한 연구연보》의 발행인  에이브러햄스가 과학계의 엄숙주의를 비판하여 1991년 제정한것인데 ‘이그(Ig)’는 ‘형편없는(Ignoble)’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말이라고 한다. 이 상은 진짜 노벨상과는 달리 상금이 한 푼도 없지만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자비(自費)를 들여 시상식에 참가할 정도로 권위가 있다고 한다.      이 상은 매년 노벨상 수상이 끝난 후에 “다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될” 기발한 연구나 업적에 수여하는데 그 업적이라는것이 처음엔 사람들을 웃게 만들지만 나중에는 꼭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들이라,  한마디로 노벨상을 빗대어 만든 ‘엽기 노벨상’이다.     2008 이그노벨상 수상작은 아래와 같다.     물리학: ‘머리카락과 실이 복잡하게 얽혀 매듭이 되는 이유’     화학: ‘코카콜라의 피임 효과에 관한 연구’, ‘콜라는 피임 효과가 없다는 연구’     영양학: ‘듣기 좋은 과자 씹는 소리가 과자를 더 맛있다고 믿게 만드는 심리학 연구’     생물학: ‘개에 기생하는 벼룩이 고양이에 기생하는 벼룩보다 더 높이 뛰는 이유’     의학: ‘비싼 가짜 약이 싼 가짜 약보다 효능이 더 좋다’     인지과학: ‘퍼즐 푸는 점균(粘菌)류 발견’     평화: ‘식물의 존엄성 인정 법안 통과’     고고학: ‘아르마딜로의 활동으로 뒤범벅되는 고대 유물 연구’     경제학: ‘스트립댄서의 생식주기와 수입 간의 관계’     문학: ‘조직 안에서 내뱉는 모욕적인 화술에 대한 탐구’        한국 동아일보의 2008년10월 4일 보도에서는 올해 이그노벨상 평의이유를 이렇게 소개했다.   ……    10개 분야에 이르는 올해 수상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화학상. 이그노벨상 수상자 선정위원회는 올해 최고의 엽기 화학 연구자로 미국 보스턴대 의대 데버러 앤더슨 교수와 연구진을 선정했다. 그들은 코카콜라, 특히 다이어트 콜라에 정자를 죽이는 살정제(殺精劑)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 의학전문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에 발표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앤더슨 교수는 “상을 받아 매우 흥분된다”면서도 “하지만 코카콜라를 마셔서 피임하는 방법은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선정위원회 측은 또 같은 주제의 연구지만 ‘코카콜라에 피임 효과가 없다’는 상반된 연구결과를 내놓은 대만 타이베이의대 연구진도 화학분야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외신에 따르면 코카콜라 측은 이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이그노벨 의학상은 좀 더 비싼 가짜 약이 싼 가짜 약보다 효능이 좋다는 연구 결과를 낸 미국 듀크대 댄 아릴리 교수에게 돌아갔다. 아릴리 교수 연구팀은 환자들이 복제약도 이름과 포장이 고급스럽게 보일수록 효능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실제 임상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미국 뉴멕시코대 심리학과 제프리 밀러 교수와 제자들은 스트립댄서가 가임(可姙) 능력이 정점에 이를 때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을 규명한 연구로 이그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밀러 교수에 따르면 여성은 가임기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며 실제 여성 스트립댄서 1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가임기 수입이 평소보다 80% 이상 늘어난다는 결과를 확인했다. 이 밖에 영국 옥스퍼드대 심리학과 찰스 스펜스 교수는 ‘바삭’ 소리가 좋은 감자칩이 맛도 더 좋다는 연구로 영양학상을, 프랑스 툴루즈 국립수의대 마리크리스틴 카디에르게, 크리스텔 주베르, 미셸 프랑 교수는 ‘개에 기생하는 벼룩이 고양이에 기생하는 벼룩보다 더 높이 뛰는 이유’를 규명해 생물학상을 받았다.      …… 하여튼 륙대주 넓은 세상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살아가니 순전히 장난질같은 어런저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미있는 일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난다. 참으로 오색(五색)만 찬란한 세상이  아닌듯 하다.  우리가 살고있는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그노벨상감으로 될만한 “연구결과”들이 수두록하다. 다만 “장난질”로 취급하거나 또는 “형편없는”것으로 알고 아예 시야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인상에 없을 뿐이다.     사람들은 사람몸에 기생하는 이중에서 머리의 이가 몸의 이보다 허리가 더 길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를 연구한다면 아마도 ‘개에 기생하는 벼룩이 고양이에 기생하는 벼룩보다 더 높이 뛴다’는 견해에 짝지지 않아서 당연 뛸데 없는 이그노벨상 감이다.     도문시에 있는 도훈도로어구에 근육이 울퉁불퉁한 두 라체력사(裸体力士)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상하게 남자의 그 상징물이 없다. “기발하게” 생각해보면 “상징물이 없는 남자가 상징물이 있는 남자보다 더 멋지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라체력사 조각상이 이 해석을 말없이 증명하였으니 가히  ‘비싼 가짜 약이 싼 가짜 약보다 효능이 더 좋다’는 관점을 밀어버리고 이그노벨상 의학상을 탈 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2008년 11월 12일에 조글로(www.ckywf.com)의 두만강수석회 코너에 아호(雅號)가 565인 어떤 “평론가”가 수석을 평한 글을 올렸는데 간단명료하기로 천하명작이다.    “十漢놈”.     중국 사람들은 생활속에서 터득한 철리들을 기껏 함축하여 사자성어(四字成語)로 표현하였는데 565께서는 사자성어보다 한 글자가 적은 단 세 글자로 자기의 풍부한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뭐 일본의 한 유명한 시인이 후지산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면서 “아-”하고 한마디를 길게 웨쳤다고 하는 말을 풍문삼아 귀가 아프게 들어온 일이 있는데, “十漢놈”이나 “아-”나 다들 함축성이 극치를 이루는 표현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겠다.     무조건 길게 써야만  문장이며 장문이여야만 내용이 풍부하겠는가?  “조직 안에서 내뱉는 모욕적인 화술에 대한 탐구”가 도대체 어느만큼 긴지 알 길이 없다만 암만 봐도 두 나라 언어로 된 565의 “삼자성어”보다는 별로 풍부한 뜻을 담은것같지 않다. 다 같이 화술에 관련되는 현상이니 래년에는 함축성이 있는 표현의 백미라는 리유로, 두 나라 언어의 창발적인 사용이라는 리유로  565의 “삼자성어”를 2009년 이그노벨상 문학상에 추천하여야 할 것 같다.                                                                                                    2008년 12월 1일              
198    【기행】김봉세 부부 로신옛집 답사기 댓글:  조회:4776  추천:62  2008-11-30
   【기행】                김봉세 부부 로신옛집 답사기 렬차로 상해를 떠난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 리분녀 부부가 절강 소흥역에 내린 시간은 11월 27일 오후 2시쯤이다. 소흥역으로 마중을 나가니 김봉세회장은 오후 시간도 있고한데 로신선생의 옛집을 찾고싶다고 속셈을 터놓는다. 김봉세 부부를 안내한 소흥의 로신옛집 답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소흥의 로신선생 옛집은 소흥시 해방남로 로신거리에 위치. 로신의 옛집, 조부네 옛집, 백초원, 어린 시절 공부하던 삼미서옥, 로신동상광장 등으로 이루어지고 국가급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받들리고 있는 현실. 우리가 로신 옛집 거리에 들어서자 목요일 오후인데도 유람객들이 련속부절히 밀려 들어 일대 풍경을 이룬다. 우리가 선참 발을 들여놓은 곳은 로신선생이 어린 시절 글을                 읽었던 삼미서옥이다. 삼미서옥에서도 어린 로신이 앉아 공부하던 책상과 걸상이 인상적이여서 김봉세회장은 련속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김회장은 세월이 흐른다음 남는것은 사진 뿐이라며 삼미서옥에 무척 흥미를 가지였다. 이어 우리는 그    옛날 시절에도 흔치않은 로신의 조부네 옛집—주가로대문과 로신의 옛집—주가신대문을 돌아 보았다. 로신선생이 소흥의 주씨네 명문대가에서 태여나 자라남이 알리는 력사의 현장이라 김회장은 소흥에 와서 로신의 옛집을 찾을줄 어찌 알았겠느냐며 로신선생이 어린 시절 뛰놀았다는 로신옛집내 안뜰의 백초원에서 인츰 떠날줄 모른다. 로신선생에 대해 남다른 지식을 가진 김회장이 돋보이는 순간이였다. 답사의 발걸음은 나중에 로신옛집 구내 로신기념관으로 이어졌다. 로신기념관은 2004년의 건축물로서 로신 조부네 옛집과 로신옛집 사이에 위치, 전체 면적이 5500여 평방미터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 기념관 보다 두배 남짓히 크다고하는데 강남의 전통적 풍격으로 지어진 기념관 정면에는 곽말약선생의 필체로 된 “소흥로신기념관” 금빛글자 일곱자가 유난히 눈부시었다. 2층으로 된 로신기념관에 들어서면 로신선생의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사망후의 이모저모 추모사진과 글, 인물형상화, 멀티미디어 등이 현대진렬수단으로 잘 나타나 있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것은 로신의 어머니 로서사진과 로신선생의 원 부인 주안의 사진이라 할까. 로신선생의 어머니 로서는 1857년생 소흥출신으로서 결혼하여 주씨댁에 들어서니 남편되는 사람은 수재이고 시아버지는 한림 출신으로서 소흥의 이름난 명문대가였다. 그러나 시아버지 주복청은 북경에서 관리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과거시험 회뢰사건에 휘말려드는 신세. 그 영향으로 로신의 아버지 주백이는 과거출세 희망이 끊기고  화병으로 페병에 걸려 가산을 탕진하고 만다. 1896년에 남편이 끝내 병사한후 로서는 아이 넷을  데리고 어려운 가정의 중임을 떠메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아들 로신이 남경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하자 로서는 장신구까지 팔아가며 백방으로 8원을 갖추어 주고 로신이 후에 일본류학길에 오르자 또 온힘을 다해 받들어 준다. 로신 어머니의 잠간 스케치라 하겠다. 그만큼 로신은 어머니께 효도를 하며 어머니의 성씨 따라 필명을 로신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어머니건만 로서는 아들의 결혼문제에서는 치명적 오유를 빚어내고 만다. 로신한테는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외삼촌의 딸 금고가 있었는데 두집 사이에 언약까지 한 사이면서도 로서는 금고가 양띠라고, 녀자가 양띠면 남편을 먼저 죽이는 살이라고 오래동안 정식청혼을 미루기만 한다. 화가 난 로신의 외삼촌은 딸 금고를 다른 남자한테 시집 보낸다. 결국 금고는 우울증으로 앓다가 죽는다. 1898년 5월, 로신은 남경에 가서 선후로 남경강남수사학당, 강남륙사학당 부설 광로학당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이 기간인 1901년 4월 로서는 아들 로신과의 말도 없이 주안이라는 처녀를 며느리감으로 정하게 된다. 하나 로신은 주안과의 결혼을 반대하며 1902년 3월에 일본류학길에 오르고만다. 그러다가 로신이 일본녀자와 결혼했소, 아이를 낳았소 등 풍문이 들리자 모친의 병이 위독하니 급히 귀가하라는 급전을 보내게 되고 로신은 소흥에 돌아와 구식결혼에 맞띠우고 구식결혼에 응할수 밖에 없다. 혼례식 날 저녁 로신은 신방에서 온밤 울다가 나흘후 일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후 로신선생은 8년 일본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경의 중앙교육부에 취직하다가 교육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고 북경녀자사범학당(후에 북경녀자사범대학으로 개칭)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5년 10월에 녀학생 허광평과 사랑관계를 맺게 되고 같이 생활한다. 유감이라 할까, 로신은 시종 주안과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파혼하지 않은 채 시종 어머니와 주안과 더불어 한집에서 생활하나 로신은 로신대로 허광평과 부부생활, 주안은 처녀로 늙어야만 한다. 여러 자로를 통해 보는 로신의 어머니 로서와 원 부인 주안의 개략 소개이다. 주안의 사랑비극이 애절하여, 로신 어머니의 극단 봉건조치가 안쓰러워 우리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가, 로신기념관 답사를 마치고서도 로신 어머니와 원 부인 주안의 사진인상이 머리를 감돈다. 로신옛집 답사는 깊은 인상속에서 끝나간다. 김봉세회장은 항주까지 다녀가도 소흥은 거치게  되지 않는데 나 덕분으로 소흥 로신옛집을 찾아 보았다며 무척 감회에 젖어든다. 어린 로신이 할머니한테서 옛말 듣는 모습을 형상한 동상앞에서 유머동작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회장안해 리분녀의 모습도 그러하다. 로신옛집 방문이 주는 인상이 너무나도 큰가부다.   2008년 11월 30일, 소흥에서                                                    
197    【우리 만남】리흥국부장과의 여객기 만남 댓글:  조회:3628  추천:52  2008-11-30
 【우리 만남】              리흥국부장과의 여객기 만남     11월 21일 누나 딸--조카 최련의 결혼으로 급히 연변행에 올랐다가 11월 24일 오후 귀가길에 연길 공항에서 연길~상해 남방항공 여객기 CZ 6552에 올랐다. 뜻밖에도 현임 주당위 리흥국선전부장이 앞줄에 앉아있질 않는가. 공무로 연변방송텔레비총국 국장 등과 함께 상해로 떠나는 걸음이였다. 우린 뜨거이 악수를 나누었다. 돌이켜보면 2006년 6월 제1차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이후 다시 만나지 못하였으니 옹근 2년여 후의 만남이다. 나와 리흥국부장과의 인연회억이 지난 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오른다. 1982년 7월에 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서 근무하다가 1984년 6월에 연변일보사로 전근하여 편집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 시절에 리흥국부장은 연변텔레비 뉴스부주임으로 뛰고있었다. 기자라는 동행인으로 우린 서로 알게 되였지만 만나면 서로 인사나 나누는 인연이라 할까. 그후 리흥국부장은 연변주위 선전부로 전근하였다. 그에 앞서 나도 주위선전부로 전근할 기회를 가지였으나 기자, 학자로의 소신을 확고히 가진 나는 그번 기회에 응하지 않았다. 그후 리흥국부장은 백산호텔관련 무슨 책임부서로 뛰다가 연변방송텔레비 총국 국장, 주심계국 국장으로 정무에 나서게 되였다. 이 과정을 쭈욱 지켜보던 내가 두만강 수석회를 조직하면서 리흥국부장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2004년 7월 28일은 우리 연변 문인수석인들로 말할 때 잊을수 없는 날이라고 할수 있다. 시인 김학송씨와 나 김봉세 등의 발기와 노력으로 이날 우리는 연변텔레비 리흥국국장 사무실에 모여앉아 문인수석인들의 자발적인 모임—두만강수석회를 선포하게 되고, 리흥국국장, 연변방송국 김대현 전임국장, 김학송시인, 김철학시인, 신철호선생, 생활안내 한태익주필, 김봉세씨 그리고 나 등 여럿이 모여 앉았었다. 그날 모임에서 김대현선생이 고문으로, 리흥국국장이 초대회장으로, 김학송씨가 부회장으로, 내가 총무로 추대되였다. 수석회의 일상사무와 활동은 내가 책임지고 내밀었다. 그때부터 나와 리흥국국장과의 인연은 깊어졌고 일이 있으면 우린 수시로 만나는 허물없는 사이, 수석탐석에 같이 나서기도 하였다. 둘 다 동갑나이 말띠라지만 우린 습관상 “예. 예” 사이, 지금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 인연은 서로 부부사이에서도 통하고있다. 리흥국부장의 안해 리화옥씨나 우리 부부간은 연변일보사 시절 동료여서 서로 알고지내고있는 사이다. 그런 고로 안해는 내가 절강으로 온후 나의 부탁으로 나의 력사저서 여러 책을 리흥국부장댁을 찾아 직접 전하면서 리화옥씨와 회포를 나누기도 하였다. 리흥국부장과의 인연에서 보다 인상 깊은것은 두가지라 하겠다. 서로간의 인연속에서 나는 리흥국부장이 독실한 수석인일뿐만아니라 사진촬영에도 짙은 취미를 가지어 사진설비들을 두루 갖추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던 2006년 4월의 봄날에 주심계국 국장으로 뛰던 리흥국국장은 연길시 평봉산아래에 진달래동산이 있다는 나의  말을 듣고 들놀이를 가자고 청을 들었다. 그래서 리흥국국장과 김대현 전임방송국 국장, 시인 김철학씨, 나 넷이 평봉산아래 진달래동산을 찾게 되였다. 그날 우리 넷은 평봉산 진달래동산에서 맘껏 즐기다가 평봉산의 옛 장성터를 돌아보기도 했는데 리흥국국장은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 리흥국국장이 찍어준 사진은 우리 문인들 사이 하나의 추억사진으로 남게 되였다. 수석이라는 공동한 취미생활로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 다음은 2006년 6월의 제1차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다. 리흥국 주심계국 국장의 노력과 후원 역할로 우린 그해 6월 8일, 생각했으나 행동에 옮길수 없었던 두만강수석전시회를 연변박물관과의 합작속에서 연변박물관 2층홀에서 성황리에 가지였는데 전시된 두만강수석 100여점, 연변수석문화전파에 거대한 기여—이 모든것은 리흥국국장이 헌신적 노력의 결과였다. 그번 두만강수석전시회기간 리흥국국장은 정무관계로 더는 수석회 회장책임을 리행할수 없다면서 전문 회의를 부르고 나를 제2임 수석회 회장으로 추천하였다. 문인회원들의 만장일치로 나는 이렇게 제2임 수석회 회장으로 나서게 되였다. 그후 리흥국국장은 중공연변주위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승진하고 나는 몇달후 2006년 9월에 절강월수외국어대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다. 상해발 남방항공 여객기 회억속에서 여객기는 어느덧 산동 연태에 착륙하였다. 그 휴식시간이 40분, 나와 리흥국부장은 연태공항 휴계실에서 두만강수석회를 둘러싸고 잊지 못할 상봉의 인연을 나누었다. 나를 수행동료들에게 “이름난 조선족력사학가”라고 소개해주는 리흥국부장이 고마왔고, 댁에도 아무때나 전화하라는 리흥국부장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여객기는 다시 리륙, 오후 7시지나 상해 홍교공항에 무사히 이르렀다. 우린 이후의 상봉을 기약하며 다시다시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상해발 여객기에서의 우리 만남,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리흥국부장과의 만남이였다.                                                     2008년 11월 27일 오전, 절강에서                          
196    나의 수장품 댓글:  조회:3775  추천:65  2008-11-28
195    나의 수장품 댓글:  조회:4281  추천:67  2008-11-28
수 석
194    【우리 만남】상해서 김봉세회장 부부를 만나 댓글:  조회:4213  추천:75  2008-11-27
            상해서 김봉세회장 부부를 만나   지난 11월 21일, 나의 일가 셋은 조카 결혼으로 연변행차 상해 홍교공항에서 우리 수석회 김봉세회장 부부를 만났다. 김봉세회장 부부는 11월 12일 비행기편으로 상해 복단대학을 졸업하고 외국회사에 근무하는 아들집으로 왔고, 우리가 상해 홍교공항에서 상해~연길행에 오른다는 것을 알고 홍교공항에 이르렀었다.   원래 우리는 김봉세회장 아들집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었다. 근데 오후 상해 도착이 늦어져 원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홍교공항에 곧추 갈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봉세회장 부부는 친히 홍교공항에 까지 와서 우리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 소행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연변밖 머나먼 상해에서의 두 부부간 상봉, 정말 쉽지 않은 상봉이다. 이에 11월 21일 그날의 상봉사진 한장을 올리는 바이다. 아들애가 찍어 준 우리 두 부부의 상봉사진이다.
193    【시조와 수석】(3) 내가 아는 한사장(신철호) 댓글:  조회:4611  추천:68  2008-11-16
【시조와 수석】(3)                           내가 아는 한사장        한사장(韓社長)이란 그가 여러 해 전에 연변인민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을 책임지고 꾸린 일이 있어, 다들 나이구분을 떠나서 듣기 좋게 또는 부르기 좋게 쓰는 호칭이다.  <수호전>에서 요용이 학구로 있었다고 다들 오학구라 부른 것이나 <삼국연의>에서 류비가 헌제의 삼촌벌이 되니 다들 류황숙이라 부른 것과 일맥상통하는 호칭이다.      한사장의 명함은 한태익(韓太益), 시인이고 수필가이다.      지금은 50고개에 오른지도 이슥하니 행정직을 죄다 털어버리고  평기자로 근무하지만 위인이 원체 선량하기로 동곽선생(東郭先生)의 선생이라, 사회적으로는 그냥 변함없이 인정을 받아서 한때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지금은 두만강수석회 총무장을 맡고 불철주야하고 있으니 차후에는 아마도 호칭을 한회장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1. 첫만남      필자가 한사장과 처음 상면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이 넘는 1986년 9월이다. 그 무렵에 필자는 대학교 졸업학년이라 연변인민방송국에 자원하여가서 실습기자로 있었는데, 매양 당치 않게 이도 아니 나서 콩밥을 씹는 격으로 어떻게 하나 단독취재를 하고 훌륭한 기사를  써서 일약 이름을 날릴 궁리만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때 화룡시 남쪽 교외에 돌배즙가공공장이 새로 서서 개업식을 하게 되었는데 방송국에서는 화룡으로 보낼 기자를 불시에 배치할 수 없어 꿩대신 닭으로 필자를 보내게 되었다. 실상 실습기자만을 달랑 보낸다는 것이 어찌 보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필자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행운이였다. 집이 화룡시내에 있으니 취재도 할겸 집에도 가볼겸 내게는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거량득이였다.       취재는 아침에 일찍 찾아갔던 관계로 쉽게 이루어졌다. 점심때가 되어 공장측에서 행사참가자들을 륭숭하게 대접하는데를 따라가서 현정부 간부들과 한 술상에 앉았댔는데, 그때 곁에 앉았던 한사장과 초면인사를 나누었다. 한사장은 당시 화룡현방송국 기자였는데 여러 상에 앉은 하객들 속에 류행도 아니게 캡을 쓴 사람은 그와 나 딱 두사람이였다.      한사장을 처음 보는 순간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일것 같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굳이 초상묘사를 한다면 뭐라고 할까? 어려서 본 영화 <우리마을 젊은이들>의 조무림이나 <폭풍취우>의 조옥림 또는 조선영화 <남강마을 녀성들>의 덕수-털보전사같은 모습들의 복합형이라고 할까? 여하튼 수더분하기를 이르데 없는 모습이였다.      한사장은 말수가 적었다. 남자들만 앉은 술상이라 술이 둬순배 도니 고담준론들이 터져나오는데 한사장은 고개를 갸울이고 듣기만 하였다.  배갈 몇잔에 기분이 붕 뜬 필자도 입건사를 못하고 가리산지라산을 헤맸는데  한참 년상인 한사장에게 본새가 나쁘게 감히 하오체를 들먹이며 팔을 마구 내흔들었건만  한사장은 “예, ”하고 오히려 존칭을 쓰며 들어주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하여도 참으로 막돼먹은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에 깊숙하게 빠진다.      필자가 6년간 잡았던 교편을 동댕이치고 1993년 7월에 평생의 직업으로 갈망했던 연변TV방송국 기자로 전근하고 보니 한사장은 진작 화룡에서 전근하여  연변라디오TV신문사 기자로 와있었고 같은 분야이다 보니 가끔가끔 함께 취재도 나가게 되었다. 1995년도에 연변에서 “제1차 두만강하류국제무역투자상담회”를 조직하였는데 둘 다 열심히 뛰면서 취재하고 같은 특집프로를 만들어 각각 상을 탄 일이 있었다.          2. 여드레에 팔십리        중국 당대문학사에서 마봉(馬烽)은 조수리와 비견하는 유명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단편소설 <나의 첫 상급>에는 성이 전(田)씨인 농업건설국 부국장이 나오는데, 평소에는 남달리 느리다가도 관건적일 때에는 무비의 침착성과 결단력을 발휘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 전국장이 하루는 농촌에 내려가 사무를 보고 그곳에서 홀로 자는데 밤중에 큰 바람이 휘몰아치였다. 와지끈 하는 무서운 소리가 천정에서 울려 눈을 떴지만 그는 일어날 대신 이불밑에 꼼짝도 아니하고 누운채로 태연하게 손전지를 켜들고 천정을 비춰보았다.  대들보가 거의 끊어져 곧바로 무너져 내릴 지경이였다.       “래일까지는 별 일이 없어.”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돌아누워 그냥 잠들었다.      필자는 한사장을 만날 적마다 이 전국장을 떠올리군 한다. 한사장은 행동이나 말이나 다들 느린 “천천히파”이다.      1995년도 12월에 백두산빙설제 취재차로 이도백화에 갔댔는데, 저녁식사후에 기자들은밖이 엄청 추운데다가 짐을 푼 려관이 동떨어진 곳이다보니 끼리끼리 갈데가 없어 방에 모여서 트럼프판을 벌렸다. TV기자들은 평소 자주 어울려 놀다보니 눈치만으로도 편을 척척 알아맞히는데 그 속에 한사장이 홍일점으로 끼여들어 다른 사람의 눈치에 전혀 맞지 않는 전술을 혼자 펼치니 같이 판을 벌린 셋은 속이 곪아터질 지경이였다.      트럼프 한장을 내리는 것도 머리를 몇번씩 긁적이고 내리는가하면 판국이 다 글렀는데도 손을 드는 기미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아서 성질이 급한 다른 친구들은 하품을 쩍쩍 할 지경이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원인도 모르게 셋의 집중폭격을 맞기도 하였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남들은 수지가 조금만 탈려도 거무락푸르락인데 그는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끝날 때면 그저 머리를 둬번 긁적거릴뿐 항상 시작할 때의 태연한 모습이였다.      “잘못 앉아서 오늘 지출이 꽤 컸겠습니다?”      “오늘 잃으면 래일에 얻고…….”      대답은 묻는 말보다 짧았으나 마디마디의 휴지는 꽤 길었다.      2002도에 필자는 대학교 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분서주를 직업으로 하던 것이 조용히 앉아만 있자니 사지에 좀이 쑤시는 것을 당초 참을 수가 없어서 2003년 초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 참가하였다. 동갑이지만 두학년 선배라고 언제나 형님을 앞세우는 우상렬교수에게 산악회 성원들을 일일이 물었다.      “니가 거지반 아는 사람일거야. 우선 김관웅교수와 김호웅교수, 그리고 가무단의 김학송시인, 방송국의 채선애와 한태익기자, 교통은행의 류광철, 문련의 신영애가수, 로인아파트의 이정옥원장…….”      그가 념불하듯 줄줄 섬기는 명단 속에 한사장이 있었는데 그때  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사 사장을 맡고있었다. 아니게 아니라 20여명되는 성원중에 절반은 아는 사람들이거나 알만한 사람들이여서 첫날부터 제법 정이 들어 서슴없이 육담판에 끼여들기도 하였다.       한사장은 필자보다 키도 훨씬 컸고 체력도 좋았다. 필자는 산골에 태를 묻은 경력을 믿고 항상 일행의 앞장에 서서 길안내행세를 했지만  한사장은 불쑥불쑥 앞지르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또 한참 뒤에 처지는 일도 없었다. 항상 가운데쯤에 서서 김관웅교수의 수필창작에 관련한 무료강좌를 말없이 귀담아 듣군 하였다.  김관웅교수는 학부생들의 교수평의에서 최고점수를 따는 분이라 아무 때나 시작되는 통속적인 무료강좌에 푹푹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걸음들이 늦기로 여드레에 팔십리다보니  밖에서는 우리를 “산보팀”라고 부르고 있다. 평지길을 걸으나 비탈길을 걸으나 한사장은 속도가 균일하여 “산보팀”의 대표자이고 팔자걸음의 일인자이다. 아무튼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온다고 해도      “그놈이 십분전에는 안올거야.”      하며 그냥 바지호주머니에 두손을 지른 채로 유유히 걸어갈 사람이다.       한사장은 2006년도 년말총화모임에서 만장일치의 박수가결로 2007년도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으로 선거되었다. 말씀을 열흘에 한마디나 하는 분이라 취임사는 아주 짧았다.      “일년간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신 류광철전임회장께서 부회장이 되어 도와주십시오.”      우스개을 전담하는 김익교수가 그 취임사에 꽃을 큼직하게 달아줬다.      “명년에도 막걸리를 10근씩 그냥 메고 오면 련임은 문제없습니다.”       3. 갓마흔에 첫 버선      2004년도 여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서는 력사가 유구한 성자산성에서 야유회 겸 문학작품집 발간식을 가졌다. 작품집 제목은 산악회라는 특징을 살려서 <저 높은 산에 푸른 꿈을 안고>라고 달았다.       이 출간식에, 후일 발족한 두만강수석회 제2임 회장 리광인선생이 참가하였는데 그는 그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대외사무를 관장하고있었다. 김학송시인(당시 산악회 회장이였음)과 리광인선생은 원체 구면인데다가 다들 연변의 수석문화을 개척한 원로급들인지라 만나자마자 의기상투하여 오가는 말씀들이 문학과는 숫제 거리가 먼 수석이야기들이였다.      “장마철이 오래지 않는데  큰비가 몇축 내렸으면 좋겠소.”      “86년도 경신란리때처럼 말이가?”      “장마야 크게 지면 질수록 좋지만 자금자금하게 여러번 터지는것도 좋소.”      “두만강과 가야하의 물때가 일년에 서너축씩 벗겨져야 하는데 말이요.”      경신란리란, 1986년도 여름에 류례없었던 장마가 져서 훈춘 경신벌이 온통 물바다로 변해버린 재해를 민간에서 이름하여 부르는 말이다. 두 어른은 장마니 란리니 하며 농민들이 들었다가는 대번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 말씀들을 서슴없이 “람용”하고있었는데 이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사람은 일행중에서 한사장과 필자였다. 한사장은 잠자코 듣기만 하였고  필자는 입건사가 허술한것이 문제이다보니 아 대화속에 무작정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광인선생과 초면인사가 이뤄졌는데 신정이 여구해져 지금까지 끈끈한 수석인연을 엮어가고 있다. 남녀사이라면 첫눈에 정이 들어 어쩌고저쩌고 하겠는데 말이다.      출간식이 끝난 한주일 후, 약속대로 우리 네 사람과 연변병원의 김봉세선생, 방송국의 전임 부주필 김대현선생 등이 도문시 신기동에 가서 탐석을 하며 하루해를 보냈다. 함께 즐기는 즐거움이라 조직의 필요성도 제기되어서 이듬해 여름에 현임 주당위 선전부 리흥국부장(당시에는 연변라디오TV방송총국 국장. 서예가)을 초대회장으로 하는 연변두만강수석회를 성립하였고 2006년 6월에 연변박물관에서 제1차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람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였다. 등산에서는 여드레에 팔십리를 가는 한사장이 돌밭에 들어서서는 아주 신행태보였다. 직업적 성향이라고 할까? 같은 방송국출신인 김대현고문님(두만강수석회 초대고문. 골동품수집가. 장서가)은 한사장보다 한수 앞선 신행태보였다.         탐석(探石)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끈기와 인내력이 기본이여서 조밭 초벌기음을 매는 자세로 열심히 주위를 차근차근 살피고 조심조심 뒤져야 하는데 한사장은 전혀 그러지를 않고 두손을 호주머니에 지른채 동에 가서 번쩍 서에 가서 번쩍하며 돌밭을 휩쓸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이미 탐석경력만도 10년을 넘나드는 김봉세, 김학송, 리광인 등 선생들은 이미 발에 익고 눈에 익어서 매번 탐석때마다 수확이 있었건만 한사장만은 도로무공이라 올 때의 배낭보다 돌아갈 때의 배낭이 항상 더 가벼웠다.      일이란 생각대로 안되면 투정이 많기마련인데 한사장은 투정도 없었다. 훌쭉한 배낭을 메고 귀가할 때면 락망도 어지간히 크련만 내색을 근본 보이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1년반 되는 사이에 열 번도 더되는 탐석활동이 있었건만 한사장은 개근에서 보여주는 열성과 정반대로 성과는 거의 없었다.  완전히 공수거(空手去)하고 공수래(空手來)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행태보로 돌밭은 휘젓고 다니다 해도 그냥 헛물만 켜라는 법은 없다. 일생일석(一生一石)이란 일생에 명석 하나만 갖고 있어도 만족이라는 말인데 한사장에게 일생일석 감을 선사하려고 하느님이 의식적으로 한사장을 자꾸 헛걸음시켰는지 누가 알랴?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6년 5월 1일에 또 한번의 합동탐석이 도문시의 신기동에서 이루어졌는데 한사장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습성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변함이 없이 표현되였다. 신기동 돌밭은 연변에서 가장 큰 탐석지의 하나이지만  교통이 편리하여 수석인들이 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통에 자원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다.  그래서 다들 이날 소품석들을 얻은 것에 그쳤고 한사장은 역시 종전대로 빈손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 거의 왔을 때, 올적 갈적 그냥 생각 없이 지나쳐버리던 돌무지(집을 짓자고 모여놓은 돌무지)에 이르러 한사장이 우리 모두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고함소리를 질렀다.      “야. 메주다. 메주!”       모두 고개를 돌려보니 뒤처져 오던 한사장이 과연 메주처럼 생긴 돌을 안고 흥분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화강암이지만 금 하나 없이 둥글둥글 륜곽이 자연스럽게 생긴데다가 밑둥치를 칼로 벤듯 잘려진 것이 흡사 알뜰한 새색시의 손에 잘 다듬어진 메주같았다. 김학송시인이 연신 감탄하면서 물을 뿜으니 노오란 색상이 돋아나는 것이 구미도 당겼다.      “명석이야. 물형석으로는 제격이야. 그리고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는가?”      “밑둥치가 딱 비례에 맞게 잘려진것이 신기하오.”      “오늘밤에는 사모님을 객실에 내보내고 이 메주석을 안고 자는게 좋겠습니다.”      남들이 중구난방으로 칭찬을 하는데 한사장의 생각은 벌써 한달후의 일로 가 있었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는데 전시회에 내놓으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하지. 관상석으로는 일품인데.”      김대현고문은 적극적으로 전시를 주장하였다.      2006년도 년말에 리광인선생이 절강성 월수 외국어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되면서 두만강수석회는 인사변동을 하였다. 김대현선생은 종신고문으로 되고 김봉세선생이 제3임회장으로, 한태익선생이 총무장으로 되었다. 필자는 2007년 3월에 늦깍이 공부를 하느라 한국행을 하다보니 지금껏 탐석을 못하고있다. 그러다보니 거의 2년이 되는 사이에 한사장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감감 모르고있지만, 기왕 메주석이 큰 행운을  얻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필경 좋은 성과를 거뒀으리라 또 거두고있으리라 믿는다.       4. 다만지 손이 성하니      송인(宋寅,1516~1584)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고 해서(楷書)에 능한 서예가이다. 학식이 뛰여나고 성품이 고결하여 퇴계 리황(李滉)과 율곡 리이(李珥), 남명 조식(曺植), 우계 성혼(成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리황에게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리황이 "비문은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송인과 성수침(成守琛.즉 성혼의 부친)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수침의 글씨는 힘은 있으나 허술한 곳이 있으므로 송인이 가장 좋을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송인이 쓴 시조 중에 <들은 말 즉시 잊고>가 있는데 가히 한사장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적어둔다.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이                              내 인사 이러함에 남의 시비 모르노라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한사장은 열흘에 한마디 할 정도로 말문이 무거운 사람이다. 시도 쓰고 가사도 쓰고 수필도 쓰지만 술을 반겨 흥분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의 작품은 어떻고 하는 “평론”을 듣는다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이다. 확실히 들은 말을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 하는 사람이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글을 열심히 쓰고 “다리가 성하니” 등산과 탐석에 여가를 모두 바치는 사람이다.      새해에도 메주석과 같은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192    중경 자기구 장강수석 점포 또 하나 댓글:  조회:4408  추천:124  2008-11-11
장강 삼협 댐 수위를 175미터로 올린 후 장강과 가릉가의 합수목인 중경의 수위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자기구에 나갔다가 민속가에 또 하나의 장강수석 점포가 생겨난 것을 보았습니다. 주인의 윤허를 받고 사진 몇장 찍었습니다.   
191    【수석감상】 호수석 한점 새로 탄생이오 댓글:  조회:4333  추천:95  2008-10-22
【수석감상】                 호수석 한점 새로 탄생이오
190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2) 댓글:  조회:4383  추천:89  2008-10-19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2)
189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1) 댓글:  조회:4190  추천:87  2008-10-19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1)      우리 수석회 총무ㅡ사무국장님,  두번에 나누어 사진으로 보여 드립니다. 지나온 우리 발자취로 펼쳐집니다.
188    【수석감상】한태익의 수석세계 댓글:  조회:4450  추천:104  2008-10-09
【수석감상】                   한태익의 수석세계     한태익님은 연변인민방송국의 기자이고 우리 두만강수석회의 총무, 진짜배기 산행인이고 문인수석인입니다. 오늘 한태익님의 수석 "메주"를 올리니 여러분들의 진지한 감상을 기대합니다.     수석 "메주"는 2006년 6월,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연변박물관과의 합작) 에 전시하였다가 지난 2008년 8월 27일 찾았습니다. 사진은 수석 "메주"를 가져오던 중 거리 길가에서 찍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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