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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 해봤어?” 댓글:  조회:791  추천:0  2016-11-18
글/ 김몽 세상 사람 모두가 성공이라는 “집”안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성공의 “집”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결국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공이라는 이 “집”은 아주 매정하여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는것이 아니고 오직 용감한 자, 긍정적인 사유를 가진 자, 끈질긴 의력을 갖고 있는 자에게만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글에서는 세계적인 대기업, 현대그룹을 만든 정주영 회장의 일화를 례로 들어 두드림의 미학을 말하려 한다. 1970년대 초에 정주영은 조선산업에 뛰여들려고 작심했다. 당시 정주영에게는 배를 만들만한 막대한 자금도 없고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었다. 그해에 정주영 회장은 독일로 돈 빌리러 갔다. 돈을 꿔주면 배를 만들어 당신들에게 팔겠다는 정주영의 말을 듣고 독일재벌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고 한다. 사실 조선업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없고 거기다 자본도 없는 사람에게 누가 거액의 돈을 꿔주겠는가? 독일인들은 “당신은 나무배나 만드시오.”라고 하며 조롱섞인 거절을 했다고 한다. 결국 정주영 회장은 독일의 문을 한번 두드렸다가 고배를 마셨던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빈털터리로 돌아온 정주영 회장을 보고 배를 만들 희망이 안 보이니 그만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그때 정주영 회장은 “당신 해봤어?” 하고 반문했다.  “당신 해봤어?” 란 이 말은 오늘 한국에서는 어록으로 불리우고 있다.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는 뜻과 결심만 있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뜻이 모두 포함된 말이다. 정주영은 독일이라는 문을 두드렸다가 괄시를 받고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배를 만들겠다는 웅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1971년에 정주영은 영국의 문을 두드려 보려고 런던으로 갔다.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돈을 빌리러 왔다는 소문을 듣고 재벌들이 이 핑게 저 핑게 하면서 정주영을 만나주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을 뛰여다니다가 요행 대재벌인 애플도이사의 총재인 롱바톰의 사무실을 알게 되여 그를 찾아가게 되였다.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동양의 작은 나라,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름도 없는 기업가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허나 정주영은 실망하지 않고 매일이다싶이 찾아갔다. 정주영의 끈질긴 행동에 감동된 롱바톰 회장이 마침내 정주영 회장과 만났다. 체면으로 만나주기는 했지만 정작 돈을 빌려달라는 말에는 이런 저런 구실을 대면서 거절하였다. 이때 정주영이 5백원짜리 한국지페를 롱바톰 회장에게 내밀었다. 당시 한국의 5백원짜리 지페에는 리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러져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철갑선을 만든 나라가 우리 나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이 당신들이 가장 자랑하는 넬슨 제독도 엎드려 절을 한다는 리순신 장군입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믿어주십시오.” 정주영의 끈질긴 열정에 감동을 받은 롱바톰 회장은 버클리은행에 긍정적인 보고서를 제출해주었다. 결국 정주영 회장은 영국에서 돈을 빌리게 됐으며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고 자본도 없던 한국의 조선업이 발을 떼였고 오늘은 한국의 조선업이 세계 1위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우뚝 솟게 된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중동진출도 한강기적의 창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는데 중동의 문을 두드리고 중동진출을 이끌어 낸 사람도 정주영이다. 1970년대 중동은 석유로 막대한 딸라를 벌어들였다. 중동나라들에서는 벌어드린 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많은 나라의 기업들을 청했으나 기업인들이 한번 와 보고는 조건이 렬악하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돌아갔다. 당시 경제발전에 혼신을 쏟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기회에 중동의 돈을 벌어오려고 정부관리들을 중동에 파견하여 고찰하게 하였다. 정부고찰단은 고찰이 끝난 후 대통령에게  “너무 더워 낮에는 일할수 없고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물이 부족함으로 중동진출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며칠간 고민을 하던 박정희가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정회장 당신의 견해를 말해보시오. 당신마저 중동진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난 중동진출계획을 포기하겠소.” 정주영 회장도 중동지구를 돌아보고 왔던차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년 열두달 비가 오지 않으니 일년내내 공사를 할수 있고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은 현장에 있으니 자재조달이 쉽고 물은 어디에서 실어오면 되고 50도가 되는 뜨거운 날에는 초막을 치고 자고 밤에 서늘해지면 그때 일하면 됩니다. 중동에서 기름을 싣고 우리 나라로 오는 배는 돌아갈 때 빈 배이니 그 배에다 물을 싣고 가면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긍정적인 사고로 사물을 판단하는 정주영 회장의 전위적인 기업가정신에 탄복하고 중동진출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30여만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중동으로 대거 진출하여 막대한 딸라를 벌어들였다. 오늘의 중동지구의 고속도로와 지하수도관은 거의 다 한국로동자들이 건설한것이다. 중국에도 문을 두드리는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등소평이다. 등소평은 오래동안 봉페상태에 있던 가난한 중국을 개변시키기 위해 개혁개방이라는 큰 대문을 열어제끼고 중국을 오늘과 같은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전변시켰다. 문이란 한번 두드려서 열리는것이 아니다. 한번에 안되면 두번, 두번에 안되면 세번……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 두드려야 하며 정 안되면 몸을 문에 부딪치면서라도 열어야 한다. 나라나 개인이나 이런 정신만 있다면 못해낼 일이 없을것이다. ▣
1    금메달 리스트로 된 두 사람 댓글:  조회:677  추천:0  2016-08-05
글/김몽         브라질 리우 올림픽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  리우 올림픽을 눈앞에 둔 지금 지구촌이 벌써부터 열광에 들떠있다.     그런데 문득 올림픽을 떠올리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생각이 갈마드는것은 웬 일일까.     그것은 울림픽 력사에 우리 민족으로서는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아프고도 서러운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7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제11차  올림픽 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당장 2차대전을 일으킬  만단의 준비를 마친 상황하에서 세인의 이목을 가리고저 세계평화니 민족평등이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그번 경기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인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을 깨고 우승의 금메달을 따내 세상을 크게 놀래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고  침울하였다. 종점을 통과하자 손기정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선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기에 손기정은 부득불 일본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였던것이다. 손기정은 비록 일등을 하였지만 망국노로서 일본을 대표하여 운동에 참가한것이 죄라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손기정이 종점을 통과한 다음 겉에 입었던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품을 벗어버리고 미리 밑에 입었던 태극기가 새겨진 옷을 입고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였는지  아니면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들이 꾸며낸 사건인지는 딱히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온 후인 8월 3일에 당시《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리광수가 손기정을 인터뷰하고 신문에 커다랗게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는데 유니품에 새겨져있던 일장기표식을 지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페간되고 리광수는 편집국장에서 해임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장기사건이다. 그후부터 손기정은 마라톤경기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더는 일본의 얼굴에 분칠을 해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이렇듯 손기정은 민족심이 강한 애국자였다.     제11차 올림픽에 손기정 외에 또 한명의 조선인 녀자 륙상선수가 참가했는데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800메터에서 금메달의  월계관을 따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능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것이다.     1936년, 금릉녀자대학(金陵女子大學)에 강미려(姜美麗) 라는 평양 출신의 녀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마라톤선수로 유명했다. 중국 국내의 큰 경기 때마다 우승을 했으나 중국국적이 아니라는 리유로 번마다 수상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구가 여러모로 노력하였고 학교 측에서도 적극 나섰으나 일이 그냥 꼬이기만 했다. 이 일로 강미려 본인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때 강미려에게 눈독을 들이는 한 일본외교관이 있었다. 그 일본외교관이 일본정부로부터 강미려를 쟁취하여 일본국적을 만들어 미구에 독일에서 열리는 제11차 올림픽에 내보내라는 비밀지시를 받았다. 일본외교관이 중국정부 중앙철도국의 국장인 장경립(張競立)에게 강미려를 유인하여 쟁취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장경립은 친일파였다. 마침 장경립의 집이 금릉녀자대학 근처에 있었고 그의 둘째 딸이 금릉녀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장씨 부부는 둘째 딸을 내세워 강미려를 자주 집에 초청하여 맛있는 음식도 해먹이고 선물도 사주면서 은혜를 베푸는척 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때가 성숙되였다고 생각한 장경립이 중국에 있으면 전도를 망치게 되고 일본에 가면 앞길이 창창할것이라고 꼬드겼다.  장경립이 달콤한 말로 꼬드기니 강미려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거기다 장씨가 부지런히 쐐기를 박았다.      애국단 단원들로부터 이런 상황을 회보받은 김구는 일본인들의 흉계를 반드시 파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김구의 한 측근이 김구를 보고  강미려가 영화황제 김염의 독실한 팬이라고 귀뜀했다. 김구가 김염을 불러 강미려의 마음을  돌려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김염은 당시 촬영 스케쥴이 빽빽했지만 상해로 가지 않고 곧장 강미려를 찾아갔다. 그는 강미려 앞에서 일본인들이 조선반도와 중국땅에서 저지른 침략만행을 낱낱이 성토하고 나서 조선인으로 민족의 기개와 량심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고 만약 일본국적으로 넘어가 일본을 위해 일하면 매국역적이나 다를바 없다고 단단히 모를 박았다. 강미려는 자기의 우상이였던 김염이 몸소 찾아와서 타이르는지라 그 자리에서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김염은 자신이 가지고 간 사진에다 싸인까지 해주었고   “나라와 민족에 루를 끼치는 삶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백의동포라는것을 절대 잊지말라!”는 쪽지까지 써주고 돌아갔다. 하지만 김염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미려는 허영심과 금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한 다음 장경립의 집에 얼마간 머물러 있다가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체육총회에 가입했고 프로선수가 되였다.      강미려는 이름을 안창숙으로 바꾸고 일본국적을 취득했다. 일년 후에 베를린에서 거행된 제11차 올림픽에서 녀자 800메터 금메달을 따내 아시아권 최초의 육상메달리스트로 되였다.     결국 제11차 올림픽에서 조선인이 큰 종목에서 금메달을 두개나 따낸것이다. 그러나 금메달 두개가 모두 일본의 몫으로 되여버렸다. 애국자 손기정의 이름은 오늘까지도 빛을 뿌리고 있다. 하지만 조국을 배반한 강미려의 이름은 력사에 영원히 매몰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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