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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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르게 살려는 녀자
2012년 10월 23일 10시 04분  조회:12966  추천:1  작성자: 최균선
                                   바르게 살려는 녀자
 
                                          최 균 선
                                       
                                                1.
 
    남행렬차, 경편렬차칸은 언녕 잠내가 짙어있다. 초영은 보던 잡지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처녀의 몸으로 떠난 이번 길은 모험의 길이기도 했다. 그동안 공장에서 산품을 내보내고 받아들이지 못한 돈이 쌓이고 쌓여 운영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놓은 책략이 통고를 내붙여 빚을 받아올 지원자를 공개초빙하게 되였다. 그맘때 엄마의 고질병을 치료해야 할 딱한 처지에 빠져있던 초영이는 받은 돈에 10%장려금을 준다는데 매료되여 칼물고 뜀뛰기에 나섰던것이다. 돈이면 귀신도 석마를 돌리는가? 초영이는 자기 수완을 믿기보다 그쪽에서 원공장장이고 오랜 관계호로 있던 백부의 인정을 봐서라도 꽉막히게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요행심리였다. 하긴 공장에서도 초영이가 빚받이군으로 나설때 작고한 백창장의 덕을 볼수 있겠다고 타산하고 승낙했다.
    그러나 초영이는 엄마의 병을 고쳐드려야겠다는 하나의 욕심에 일체를 걸고나섰지만 마치 불행의 나락으로 향해가는 느낌이였다. 끝없는 생각과 고민과 나름대로의 작전계획을 세우노라 뇌리를 짜는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려로의 고달픔이 덮쳐와 그녀를 깊은 꿈나락으로 이끌어갔다…꿈인지 생시인지 누군가 지근지근 발을 밟는 느낌이 들어 억지로 천근같은 눈까풀을 쳐드느라 안깐힘을 썼다.
  《왜 이래요? 지저분하게스리.》
   어찌나 째지게 소리쳤던지 가슴이 쩌렁 울렸다. 그 서슬에 감겼던 눈까풀이 펄쩍 떠지였다. 깨고보니 꿈이였다. 아니, 꿈이 아니였다. 맞은켠에 앉은 멋지게 생긴 구레나룻의 남자가 또 한번 발끝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야무지게 쏘아보던 눈길이 탁자에 놓아둔《청년생활》이 안겨왔다.
   (조선족이구나. 비단보에 개똥…)
  《오해하지 마시오. 아가씨, 이런 밤차를 타고 먼길 갈땐 꿈속에서라도 신경을 살려야 합니다. 낯선고장에선 인심도 인심나름이니까요.》
   사내는 말하면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는 커다란 망치같은 주먹으로 시렁우에 트렁크를 탁탁 쳐댔다. 일종의 시위같았다. 그제야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아차린 초영은 옆을 보았다. 엉큼하게 생긴 남자가 일어나면서 구레나룻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구레나릇은 경멸의 눈길을 한번 돌릴뿐 굳어진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격투직전의 투사같이 감때사나운 눈에서 불꽃이 튕기고있었다.
  《조선족이군요.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곁에 의무보호병이 있다는걸 알려주려 했을뿐이지요.》
  《좋은분 만나 다행이예요. 그렇지 않았더면 어쩔번했겠어요. 호—》
   서른살쯤 되였을가? 아니야 기껏해 스물예닐곱살일거야. 저 구레나룻터가 아니라면…첫눈에는 조금 무서워보이던 사내의 준수한 얼굴에서 어떤 믿음을 읽으며 초영은 안도의 한숨을 호ㅡ내쉬였다. 떨리던 가슴이 차차 가라앉았다.
  《멀리 가시나요. 실례지만요.》
  《난 별로 목적한 곳이 없어서 멀다면 멀구. 가깝다면 가까울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다에 뛰여들어 헤염쳐보려는 판이지요. 허허…》
   가슴에 난류를 실어오는 그 소탈한 웃음이 초영이의 잠기를 말끔히 쫓아버렸다.
 《이번엔 내가 좀 눈붙입시다. 짐 좀 살펴봐주시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사내는 등받이에 기대더니 눈을 감았다. 굵다란 누에눈섭이 한두번 꿈틀거렸고 그 사람을 끄는 형형한 불꽃도 사라졌다.
(좋은 분같이 느껴져…)초영은 황보를 떠올리며 미안쩍은 생각이들어 얼굴을 붉혔다. 황보씨도 미남형이다. 헌데 어덴가 가벼워보이는 도련님타잎이였다. 아마 그의 멋스러운 체격과 잘생긴 얼굴에 마음끌려 백년약속을 주었는지도 모른다.(그인 좀 인정에 린색한 남자야. 이럴때 곁에서 지켜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가.)황보와 갈라진다는 생각을 꿈에도 가져보지 않았으나 어째 탐탁하지 못한감을 느끼지 않는것도 아니였다. 무슨 공사를 꾸린다고 덤벼치다가 쫄딱 녹아나고 지금은 고정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는게 첫째로 안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도 썩 내키지 않았다.
    고요히 쪽잠에 든 맞은켠 구레나룻에 다시 눈길이 끌림은 어쩐일이지? 꿈속에 서마저 자기를 다스릴만큼 견정해보이는 사내의 모습을 뜯어보며 초영이는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그래, 저이의 도움을 청해보자. 보수를 톡톡히 주면…)그녀는 이제 곧 벌어질《격전》에 심장이 파르르 떨려옴을 느꼈다.
    차창으로 붉은 해살이 비껴들때 구레나룻은 깨여났다. 해빛에 번쩍이는 그의 두눈에서 튕기던 불꽃은 사라지고 그대신 일종 따스한 정을 안겨주는 그윽한 빛이 굴절되여나왔다. 그는 사람좋게 웃어뵈였다. 혼자 먼길을 떠난 초영에게는 그것이 놓쳐버릴수 없는 정신기둥으로 우뚝 일어섰다. 망설이던 용기가 입술을 밀어제치고 불쑥 뛰여나왔다.
 《돌봐주신 값으로 제가 한턱 내지요. 거절하지 않겠지요.》
   역시 그동안 단련을 받아온 초영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더 동의를 구할것도 없다는듯 눈길로 사내를 얽어가지고 앞서 걸어나갔다. 사내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녀자의 뒤모습에 흘린듯 잠간 멈췄다가 코꿰운 송아지처럼 순순히 따라나갔다…
 
                                                                    2.
 
    A시에 도착한 초영은《원양무역수출입본공사》 왕경리를 만나는데 급급해하지 않았다. 그대신 은밀하게 왕경리의 인격, 기호, 성미서껀 일일히 료해하는데 신경을 쓰면서 행동반경을 세밀하게 그렸다.《적정》을 충분히 장악했다고 생각되여서야 왕경리의 사무실에 돌연히 나타났다. 왕경리는 초영이가 공손히 받쳐올리는 명함장을 자상히도 훑어보더니 초영이의 얼굴에 눈길을 박은채 놀라는듯한 시늉을 지어보이였다.
   《연변한끝에서 오셨군요. 먼길을 또 걷게 해서 미안합니다. 어서 앉으시오. 》
   《네. 고마워요.》
   《허허, 그 친구들이 이번엔 장백산선녀까지 출동시켰구만. 하하…관음보살님 같이 신통력이 있는 녀사인가 봅니다그려…》
    왕씨는 차물을 붓는다 과일을 내놓는다 하며 온갖 친절을 베풀었다.
  《일백팔십번 변하는 손오공을 꼼짝못하게 하는 보살님이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허지만 어려운 일도 왕왕 우둔한자의 단순함과 진솔함때문에 끌릴때가 있다지 않아요? 전 그런 우둔함과 진솔이 가져다줄 요행을 바라고 왔을뿐입니다.》
  《말뜻을 알겠습니다. 한어가 류창하기를 이만저만이 아닌데요. 그게 역시 신통력의 열쇠일수도 있지요…》
  《높이 보아주셔셔 감사해요. 제가 우리 거기서 정말 신통력이 대단한 녀자로 이름짜하게 알려지도록 잘 합작해 주시겠어요?》
 《백녀사 아주 재미있는 녀자군요. 급해마십시오. 먼곳에서 온 귀빈이자 채권자 인데 점심식사나 함께 하면서 천천히 상의해봅시다.》
   술좌석에는 업무경리들과 재무부장이 참석했다. 초영이의 교제술이 왕경리를 탄복시켰다. 초영은 채무에 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이튿날 답례연회석에서도 소위 감정교류에만 마음을 쓰는듯 대범하게 놀았다. 초대연이 끝나자 초영이는 왕경 리를 단독으로 다방에 청해놓고 정식담판을 벌렸다.
  《백녀사,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요?》
  《지금 전 어떻게 하면 손오공처럼 작은 파리로 변해서 왕경리의 배속에 들어가 심장을 움켜잡을가 궁리하고있어요. 호호…》
  《말솜씨 한번 먹었군요. 그러지 않아도 내가슴속에서 7급지진이 일고있거든요. 하하…무슨 특별한 방안이라도 있는건가요?》
  《방안이란건 없어요. 왕경리의 기업인다운 량심과 의무감을 믿을뿐입니다.》
  《상업전선에서는 량심이라든가 어떤 군자의 협정같은것이 별로 소용없답니다.》
  《정 떼질쓰면 저도 그만큼 질기게 나올거예요. 당신의 사무실에 매일 출근할것이고 저녁이면 왕경리의 객실에 매일 손님으로 갈겁니다. 숨어버리지야 않겠지요?》
  《잠적할수도 있지요.》
  《중도망은 있어도 절도망이야 있겠어요? 왕경리가 그까짓 돈때문에 인격마저 버리지 않으리라 믿는데요.》
  《그래서 안되면요?》
  《법률의 무기가 있지 않습니까?》
  《여긴 우리 지반인걸요.》
  《아무튼 이번에 돈을 받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겠어요. 수백명로동자들의 밥통이 깨질판인데 당신네 밥통이라도 흔들어놓을것이예요.》
  《무섭군요. 허.그동안 백녀사네 공장에서 몇분이 빚받이를 왔다갔지만 이렇게 책임감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하긴 그때 우리도 성의가 전혀 없었지만 피차일반입니다. 우리도 많은 물건을 외상으로 주어 몇백만원이 깔려있습니다. 귀공장은 백창장이 있을때부터 우리의 련계호인데 어찌 끝까지 생떼질 쓰겠습니까?》
  《백창장을 아시나요? 우리 큰아버지인데요, 그럼?》
  《아참, 인연이란 별스럽기도 하네, 초영이가 백창장의 조카라? 좋습니다. 래일 재무부장 손동무가 해결할겁니다.…오늘저녁 비행기로 해남도에 가야하니 끝까지 배동할것같지 못하오.》
 《네. 말씀한대로 하시면야…언제 또 만나게 되겠지요.》
   이튿날 과연 재무부장 손씨가 찾아왔다.
  《이렇게 너무 사무적으로 해서야 어디 재미있습니까! 오늘은 제가 공사를 대표해서 송별연을 차리지요.》
  《절 숙맥으로 보지 마세요. 현금 얼마간과 지표를 봐야 송별주를 마실수 있습니다.》
  《그럼요. 백녀사와 벗으로 사귀고싶으니까 믿어도 됩니다.》
   그날 저녁, 초영은 자기가 든 호텔식당에 손씨를 불렀다. 단둘이 마주앉아 기울이는 술잔에 초영이도 웬간히 취했다. 그러나 손씨는 거의 곤죽이 되게 만들어 놓았다. 손씨를 부축해서 자기방에 올라간 초영이는 들어서자바람으로 재촉했다.
 《그 지표 좀 봅시다. 진짜면 맘대로 하게 할게요.》
 《어디 보라구. 몽땅 결산하지는 못했지만 100만원 행표지, 어때? 이 손모가 신용지키지? 자 어서요.》
  이때 복도에서 구두발소리가 들려오더니《똑똑!》문을 노크했다.
 《차예!》
 《백아가씨, 니…니?》
  초영이는 손씨의 손에서 지표를 살짝 빼내고는 문을 차고나갔다.
  《제대로 되였소? 그럼 빨리, 복무대에 결산을 다 봐두었소. 밖에 택시도 대기했소. 갑시다》
  《네. 수고했어요.》
   …검은색 택시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같이 시외로 달렸다.…
  …한달후, 초영이가 개선하여 돌아왔다. 한곳이 아니라 두곳에 빚을 받아가지고 왔다. 물론 구레나룻의 미더움이 컸다. 초영은 황보숭을 찾아 달려갔다.
  《축복해주세요. 성공했단 말이예요. 어머니를 치료할수 있게 되였어요.》
  《난 반갑지 않소. 남자들도 못받아온 돈을 녀자가 가서 받다왔다니, 흥 정말 막간극이 재미있겠는데.》
  《무엇이 어째요? 녀자는 그래…》
  《녀자는 돈이 생겼으면 이미 나빠졌다는걸 설명해야 하오? 미안하지만 썩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요. 그 더러운 돈을 가지고!》
  《아니 왜 그러는거예요? 다정한 말한마디 해줄대신 어쩜 그럴수 있나요?》
  《난 돈과 순결은 바꾸지 않소. 그러니 내눈앞에서 썩 꺼지란 말이요》
  《황보씨가 말하는 뜻을 알겠어요. 좋아요. 부산과에 함께 가보자요.》
  《필요없어. 지금 병원에서 무얼 못해넣는게 있다구.》
  초영은 처음으로 생소한 사람을 보듯 황보숭을 매섭게 쏘아보고는 홱 돌아서 나와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결김에 한 행동일뿐이다. 초영은 천천히 해석하느라면 황보숭이도 자기를 믿어주리라 믿었다. 허지만 그것은 한낱 소박한 념원뿐이였다. 황보숭은 초영이의 행각에 철저히 의심을 품고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장안에서도 복창이터질 뒤공론이 파죽가마 끓듯하고 있었다.
  《마창장님, 이건 사람들이 너무 하잖아요? 사람을 이렇게까지 억울하게 굴다니요.》
  《초영이, 이번에 공장을 위해 큰공을 세웠소.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어떤일은 해석할수록 더구나 우스워지지. 여기 은전 삼십냥이 없소 하는격이 랄가?》
   초영은 억이 딱 막혔다.
  《아니?! 마창장도 그렇게 말하나요? 어쩌면…어쩌면…으흑》
   초영은 문을 쾅 닫고 나왔다. 마창장은 좀 안된듯한 표정이였지만 순간이였다.
   초영은 숭허물없이 지내던 정실에게 자기 고충을 털어놓고 조언을 바랐다.
 《언니, 언니의 청백을 누가 증명할수 있겠어요? 언닌 해석이 필요하다구 믿어요? 진짜는 가짜가 될수 없구 가짜는 진짜가 될수 없는 법이잖아요.》
 《오—너두?! 그래 좋아,더 말하지 말자.》
    차간에서 제일 믿어주던 박아주머니도 그저 듣고만 있을뿐 반응이 랭랭했다. 아무도 초영이를 알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그가 받게 된 10여만원의 장려금때문에 배를 앓는 판이였다.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다고 초영이의 일에 잘코사니를 부르는것은 정실이였다. 황보숭이를 은근히 따랐지만 인물고운 초영에게 빼앗긴지라 불난김에 훔치지 않을리 없었다. 정실이는 데쳐놓은 겨울시래기처럼 후줄근해 다니는 초영이의 몰골을 보며  (미안해. 이번에야 내가 당당히 황보숭의 보배가 될걸. 그래 안됐다. 미인아가씨…)
   초영이가 상림아주머니처럼(제가 안가는걸 그랬어요. 제가…)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해서 두주일만에 정신병원에 들어가고말았다. 신경문란이 왔던것이다. 초영이가 정신이 좀 안정될 무렵, 병실로 두리모를 쓴 사람이 찾아왔다.
 《모두들 왜 절 잡아먹지 못해 앙탈인가요. 제가 무슨 죄를 범했기에…》
 《랭정하시오. 우린 좋은 사람은 억울하게 굴지않소. 어떤 사람이 동무의 수입에 문제가 있다고 적발하였소. 그리구 이번 행각에두 더러운 교역이 있다구했소. 이제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마른하늘에 벼락이란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한것이리라. 금방 미칠것 같았다.
 《수입이라구요? 시작도 안되였는데 결과가 있어요. 맘대로 하세요》
    초영은 더 말치않고 엉엉 울어버렸다. 삭막해진 인정의 사막에서 누가 초영이를 구해줄것인가. 며칠동안 벙어리 랭가슴앓듯 속을 태우던 초영이는 결김에 왕경리에게 편지를 써서 전번 그의 요청에 응할 뜻을 내비쳤다. 한달 지났을가 연변에 장사차로 나왔던 왕경리가 마공장장을 찾았다.
《당신네 조선족들은 우점도 많지만 흉금이 절반인게 탈이라니. 우리가 당신네 그 미인에게 홀딱 반한것만은 사실이요. 단순히 미녀라는 의미만이 아니요. 당신들은 지금 진짜 순금에 똥칠을 하고있단말이요. 초영인 탄복할만한 일군이요. 로동자들을 생각하며 눈물흘릴 때 우린 량심에 촉동을 받구 비리한 장사속이 해소되였던거요. 여기서 싫으면 내가 데려가겠소. 공소과 업무경리로말이요.》
   마씨는 왕씨의 말에 불쾌해졌다.
 《우리 공장로동자들이 어떻다는거요? 여보 왕선생, 당신이 뭐게 남의 산소쓰는데 와서 제돌삐뚫었소 천광이 얕소 하며 이 야단이요.》
 《좋소, 좋소, 더 말하지 않겠소. 아무튼 우린 당신네같은 사람들과는 더 거래하고싶지 않다는것만 말해두지.》
 《흥, 그러면 누가 겁날줄 아오? 중국에 당신네밖에 없다구?》
   왕경리는 콩팥칠팥하는 마씨를 어이없이 건너다보며 전임 공장장이였던 백덕윤을 문득 떠올렸다. 그때는 손이 잘맞아 돌아갔던것이다. 초영이가 백덕윤의 조카딸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더구나 그래서 그녀의 행차가 헛걸음이 되지 않게 어려운 여건임에도 큰 마음먹고 결산해주었다는것을 초영이도 미처 몰랐을것이다.
    왕씨는 병원에까지 초영이를 찾아가서 위로도 해주고 돈도 내놓고갔다. 또 한번 소문의 폭죽이 터졌다.(흥, 웬간한 사정이 아니구야 몇천리밖에서 찾아왔겠소. 미진한 정을 풀자구 왔겠지. 돈두 숱해 주었다오. 그 왕씨가 비서로 데려간다더군…)공장안에서 류언비어가 제멋대로 딩굴고 날개돋고 했지만 초영이는 깜깜 몰랐다.
   초영이는 편지에 그렇게 썼지만 왕씨가 정작 오라고하니 완곡하게 사절했다. 엎어진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고 진탕물을 끼얹은 사람들앞에서 그것을 깨끗이 씻어보여야 했다. 그러나 공장에서는 영향면을 고려한다면서 초영이를 다시 차간에 내려보냈다. 높이 띄웠던 배구공을 여지없이 깎아내리친격이였다. 하느님을 창조한것도 로마인이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것도 로마인이라더니 초영이야말로 그 격이다.
 
                                                                3.

    운명이란 한번 어떤 인간을 희롱하기만 하면 그 못된장난질이 지꿎기마련이다. 이래저래 세상이 보기싫어진 초영이는 방구석에 들어박혀 눈물과 절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였다. 이왕지사를 생각할수록 부아통이터진 초영이는 어느날, 수면제 한줌을 삼키고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러나 초영이는 죽지 못했다. 잔뜩 신경을 살리고있던 엄마에게 들키여 구급된것이다. 병원에서 나온 초영은 식음을 전페하였다. 그후 죽는다 산다하며 두어번 병원출입을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초영은 살기로 작정했다. 몸이 웬간히 좋아지자 건강미체조쎈터에 열성분자가 되였다.
    어느날 최신류행의 모던껄처럼 차리고 영화관에 갔다. 영화에 흥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중앞에서 자기는 건재하다는것을 과시하려는 녀자의 심리에서였다. 그가 표를 사고 돌아서려는데 귀에 익은듯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초영이 아니요?》
  《어머나, 어쩜—그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언제 돌아왔어요?》
   어찌나 반가웠던지 처녀로서의 수집음도 잃고 와락 매달렸다. 그는 다른 누가 아니라 구레나룻이였다. 2년나마 남방의《바다》에서 헤매다가 별로 큰것도 건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만것이다. 며칠전, 안해—미화가 쫑알거리는 잔소리가 싫어서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영화관앞에까지 왔다고 한다.
   초영이는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아, 선우정씨, 얼마나 만나보고싶었던 사람인가.)초영은 자기가 제일 즐겨읽는 소설들의 작자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외롭고 쓸쓸한 녀자, 바른 인생길 걸으려고 모지름썼건만 모래바람 거친 이 길, 비틀어진 생활의 비탈길을 걷는 초영이는 인파속에 사라진 그 남자를 그리며 엉뚱한 동경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아이, 내가 무슨 욕심을…그인 안해가 있다지 않는가)골목길 어둠을 즈려밟는 초영이의 어두운 마음의 하늘에 반짝 류성이 지나갔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이끌려 나이트클럽에 온 선우정은 무대에 눈길을 모았다. 소문의 녀가수가 등장했다. 빠리의 멋쟁이아가씨처럼 요란한 옷차림의 가수는 선우정의 가슴에 반가움보다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아니?! 그가 ?오리무중에 빠져있는 동안 그녀의 아릿다운 노래소리가 청중의 열광을 터뜨리였고 넓은 홀이 박수소리와 휘파람소리로 소란해졌다.
《한곡 더, 50원이다. 내가 지정한 곡을 부르오.》
《100원이요.<님과 함께라면>을 불러주오.》
《<바다가 륙지라면>이요, 자, 150원!》
  여기저기서 제짝패끼리 호기를 불러댔다.
《여러분이 요청한대로 차례차례 불러드리겠어요.》
《안돼! 내가 청한 노래를 먼저 불러야 해!》
  가운데를 차지하고앉아 제일 떠들어치던 짝패들속에서 코수염쟁이가 꽥꽥 게사니 울음을 울어대였다.
《저 껄렁한 새끼들이 누구와 맞서자구! 자, 200원이다!》
《미꾸라지들이 보채네. 자, 여기 천원이 있다. 저 가수의 노래 우리 다 샀어!》
그 번잡속에서 점잖게 맥주만 마시면서 노래를 론평하고있던 세청년들속에서 누군가 장훈을 불렀다.
《어이, 친구들, 여기가 무슨 경매장이요. 노래가 예술인데 예술적으로 즐기자구, 저 아가씨의 자유를 침범하지 말자구 하는 말이네.》
《이봐. 어이씨들, 뭐 들가방경리급이나 되는가본데 육신이 가렵지 않으면 얌전히들 있어봐.》
  코수염쟁이가 어줍잖게 한국인말씨를 흉내내고있었다.
   나이트클럽에 나와서 처음 당해보는 행패질인지라 겁이 더럭났지만 그속에 황보숭이 끼여있는것을 보자 마음속에 불기둥이 치솟았다. 황보숭은 초영이가 순결하다는것을 알자 다시 회복하자고 여러번 찾아왔지만 여지없이 내쳐버렸다. 그래서 오늘 황보숭이 잔뜩 비틀어진 심사로 사단을 일으키고있는것이다.
《여러분, 하찮은 제노래로 기분잡칠것 없어요. 가수가 많으니까요. 전 퇴장하겠습니다.》
  초영이는 외투를 걸치고 출입구쪽으로 걸어나갔다.
《어, 아가씨. 그래서 되겠소? 아가씬 저기 우리 황보아우의 본처였다는데 남편 의 명령을 거역해서야 안되지. 으허허허…》
《저리 비켜요. 류망!》
《뭐라구. 입은 까졌는데. 그런데 그렇게 바락바락 악을 쓰는게 더 귀엽네.》
  옆에 어중이떠중이들도 맞장구쳤다. 초영이가 안절부절하는데 귀익은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여보게들. 무식한 사람들 같잖은데 이게 무슨 실례요. 모두 길을 비키시오.》
《여허—넌 어데서 삐여져나온 망아지냐? 오, 네가 서우인지 염소인지 하는 껄렁 이구나. 듣자니 우리 아우님의 미혼처를 넘본다며? 어디 좀 체조를 시켜볼가.》
《네 아우란게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이니?》
《여기 이 어른이다 짜식! 너 상급생이라구 그때 우쭐댔지? 저 녀잔 원래 내가 주무르던 녀자였어. 네가 무슨 상관이길래 ××에 보리알 삐치듯 하는거냐!》
  황보숭이 가슴을 툭툭 치며 나섰다.
《그러냐! 이제보니 장미꽃이 썩은 소똥에 꽂힐번했구나. 그럼 오늘 나에게서 교육 좀 받아야겠다. 너절한 자식!》
구레나루터가 시퍼런 주먹을 언뜻하더니 황보가《아이쿠》하며 벽에 뒤통수를 박았다. 좀해서는 격동되지 않던 그는 수모받는 초영이앞에서 더는 자제할수 없었다.
《저새끼! 감히?! 얘들아, 저 털보새끼의 문지 좀 털어줘라.》
코수염쟁이가 선참 달려들자 선우정이 초영이를 밀어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선우정의 친구들도 달려나왔다. 광증이 난 일곱마리 황소가 날뛰였다.…급해맞은 초영이가 《110》을 불렀다. 아츠러운 경적소리에 황보숭네패가 줄행랑을 놓았다.
《어이, 나 칼에 찔렸네.》
  선우정이 쓰러질듯 땅에 주저앉았다.
《어디? 몹시 찔렸나, 동초, 택시불러!》
선우정이 친구의 부추김을 받아 택시에 오를때 초영이가 달려왔다.
《잠간요.》
《아가씨는?》
《저도 함께 가야해요.》
  택시는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선우정은 엉뎅이를 두곳이나 깊이 찔렸다. 그날밤, 초영이는 선우정의 곁에 지키고앉았다.
《미안해요. 저때문에…》
《집에 가야는걸 그랬소. 공연히》
《안요. 전 여기에 있어야 해요.》
  이튿날 아침, 스물댓 되여보이는 깔끔하게 생긴 녀자가 병실에 뛰여들어오더니 독기어린 눈으로 초영이를 피나게 찍어보았다.
《거기는 누구죠. 남의 남편곁에》
《아—네. 사모님이시겠군요. 사실 그런게 아니라 저분이…》
《뭘 그런게 아니요. 썩 물러가요. 내가 모를줄알구! 흥》
  초영이는《잘 치료하세요.》 한마디를 남기고 미화의 눈총에 가슴이 펑 뚫린채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 선우정은 더구나 안해의 닥달질을 받아야 했다.
 
                                                                4.
 
    세월이 흘렀다.
    움트는 4월, 하늘엔 커다란 구름송이가 멋진 돛을 달아올리고 바람결따라 푸른 바다를 누벼가고있었다. 구름너머 해는 쨍쨍한 빛바늘로 열심히 봄빛을 수놓고있다. 도시의 풍경선엔 봄냄새가 아직 짙지 않았건만 거리에 인파만은 벌써 아롱다롱했다. 계절을 당겨오는 류행녀인들은 벌써 여름단장을 다투듯 겨끔내기로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여름녀자들은 벗지 못해 입는다던가. 선우정은 그런 모습들에 한번쯤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할가.
    선우정은 자전거핸들을 시초대소쪽으로 꺾고 슬슬 바퀴를 굴려갔다. 선진사적보고를 듣고오라는 명령을 받은것이다. 호텔의 너렁청한 마당에 녀자용자전거 한대가 외롭게 서있었다.(허, 나보다 더한 열성분자가 있군)혼자 중얼거리던 그는 낮꿈 한자락 펼쳐보고나 왔을걸 하는 후회를 늦게나마 굴리며 회의실에 구겨진 바지를 디밀었다. 어스레한 빛속에 과연 웬 녀자가 벽가까이에 앉아있었다.
   어떤 강한 힘이 선우의 발길을 끌어당겼다. 혼자 앉았기가 싫었을수도 있다.
《초면이지만 함께 앉아 얘기를 나누어도 될가요.》
  녀자는 송충에게 찔린듯 몹시 흠칫하다가 고개를 탈며 낮은 소리로 응했다.
《빙긍빙글 도는 의자는 아니여도 앉으면 임자인데요.》저절로 돌려지는 고개를 억지로 숙이는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과 놀라움, 당혹감같은것이 얼핏 스쳐가다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물론 그것은 초영이 자신의 느낌이였을뿐. 선우정은 몰라보았다.
 《기자인가요? 이렇게 일찍 오셨으니. 오늘 회의는 우리가 주인공 같네요.》
   녀자는 그래도 한사코 고개를 저쪽에 돌리고있었다.(역시 소탈한 그 웃음 그대로구나. 저인 지금?) 생각과 함께 본능적인 반응이 례절성을 대치해버렸다.
   (어데서 듣던 목소린데…왜 고개는 그냥 돌리지 않는담!)
 《전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잔뜩 주조되였다가 나중엔 자기풍자로 된 실례가 너무 많아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거예요.》
 《어느 단위에서 왔나요.》
 《제가요? 제가 어느 부류에 속하길 바라는가요? 선우정작가님.》
 《아니, 초영이 아니요? 연극을 놀아도 원…》
 《아이유,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더니 인제야 알아보시네요. 이름만은 기억해주 셔서 황송해요.》
 《아니, 그렇게 변할줄이야. 그리고 또…》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선우정은 마음이 숭숭 구멍이 뚫려있었다.(그 녀자 정말 칠면조인걸.)그는 풍편에 초영이가 원래 다니던 그 공장의 공장장이 되였다는 소문을 들은것 같았으니말이다. 선우정은 그냥 가버릴가 하다가 다시 회의장에 들어 가 구석쪽에 자리잡았다. 초영이가 한창 연설하고있었다.
 《전 무슨 전형이랄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생존권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모지름 써왔을뿐입니다…제가 말하고싶은것은 정리실업당한 사람들 모두가 무능력자거나 라태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믿음직한 지기는 마주보는 거울속에 있다지 않습 니까. 누구나 삶의 터전이 위협받고 무너져버릴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정리실업자 들의 가슴속에서 무엇이 꿈틀거리고있는지 아십니까?…》
   뒤에서 수군댔다.(저 아가씨…)선우정은 연설자의 말을 듣고있다기보다 그 본인을 뒤돌이켜보고있었다. 드디여 총화연설이 있었다.
《이자 방금 백초영동무가 정리실업후 어떻게 생활의 좌절속에서 굴하지 않고 자기 할일을 찾아했는가 하는 선진경험을 말했는데 심사숙고해야 할 일입니다. 이 생활의 격류속에서도 자기 할일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귀찮은 존재로 느껴 질것입니다. 모두 새생활을 개척해나가는 현대관념이 수립되여야 하겠습니다.…》
    선우정은 별로 적은것 없는 수첩을 주머니에 꿍져박고 첫사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자전거를 밀고 큰길에 나섰는데 가로수뒤에서 초영이가 가로막아나섰다.
 《절 피하셨죠. 나쁜녀자라구.》
   변함없이 꼭꼭 박히는 흑진주 두알이 선우정의 동공에 폭 박혀왔다. 그 꿰뚫어 보는듯한 특유의 눈에 도전비슷한 익살이 비껴있었다.
 《아니요. 찾음을 방불케 하는 피함이였다고 생각해두면 더 운치있지 않을가?》
 《전 잊은적 없었어요.》
 《그런데…한 시내에 살면서 이게 얼마만이요.》
《무서웠거든요. 작가부인님이. 그리구…》
《작가라니?!》
《제가 선생님의 애독자인줄 모르셨죠. 벌써 10년전부터인데요. 작가님인줄은 그날 알았지만도요…제가 이래뵈두…》
《고맙소. 하지만 난 되다가만 붓쟁이요. 그리고 난 초영이를 나쁜면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 세상에 나쁜녀자가 있다면 그게 다 남자들이 만들어놓은거야. 지금 세월에 똑바로 걷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구. 제인생은 제가 책임져야 하는 판이니 스스로 황제구 황후이지 안그래? 초영이.》
《소설가가 다르군요. 그 말씀 들을때마다 구겨졌던 마음이 펴지는것 같아요.》
《그렇다면 불행중다행이구만. 헌데 나에게 무슨 갓자를 붙이지 말아요. 돈을 내구 노래 몇번하면 가수요, 글 몇편 쓰면 작가요, 연극 좀 잘 놀면 스타니 뭐니 하는데 좀 싱거워요. 이 세상에 도적놈들이 너무 많은것처럼 무슨놈의 가가 그리도 많은지. 마치 명패옷을 사입혀주는듯이 말이요.》
《안요. 전 진심이예요. 제 마음속엔 선우님이 작가이고 소설가예요.》
   선우정은 어깨를 으쓱했다.(허, 참, 남자앞에서 하는 녀자의 칭찬은 베일을 쓰고 하는 키스와 같다던데…)하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다른 말을 내뱉았다.
《칭찬은 누구에게나 모르핀같은거 아니겠소. 허허…》
《우리 저 다방에 좀 앉았다가요. 녜?》
《것두 좋지. 오래간만에 녀동생을 만났는데…》
  선우정의 입에서 녀동생이라는 말이 불쑥 튀여나오자 초영이의 눈이 쌜쭉해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진한 커피처럼 풀어졌다.
《그래 부인님 잘 있어요? 아마 그때 저때문에 몹시 성나셨겠죠? 선생님두 애먹이구요.》
《뭐 별로…하지만 지금은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생겼으니 안심해요.》
《??!!》
    선우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미화는 남편이 멋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돈만 축내구 돌아와서도 태평스럽게 소설을 쓴답시고 제정신이 아닌데다가 웬 고운녀자때문에 칼까지 맞고 돌아다니지 해서 여간 뒤틀려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국돈벌이 나간다 고 가더니 돈많은 사장령감에게 찰싹 들어붙고말았던것이다.
《그래서 가운데 방해될것두 없구하니 밀구 당기구 할것없이 제갈길 가기로 했소. 참, 그동안 초영이도 가정일구고 아기자기 살겠지? 초영이는 워낙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는 녀자니까.》
《저요? 호—참 저때문은 아니였던가요?》
《아니, 아니요, 참 소설감 제공한다지 않았어? 그간 경력을 상상할수도 있겠지 만 들으면 가슴을 칠것같아.》
《작가신분으로 들으시겠어요?》
《아니, 오빠로서.》
《오빠? 그만두자요.》
《아니? 왜 그래? 그럼 량심으로 듣지.》
《좋아요. 얘기하지요. 소설로 써요. 제목은 <바르게 살려는 녀자>예요.》
   …선우가 칼에 찍힌 그날 이후 초영이는 가수노릇을 꿍져박았다. 이쯤하면 제모습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선우가 피로써 지켜주는 마음의 저변에 깔린 그 기대를 보아서라도 더는 자기를 학대할수 없었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의 눈에 너절한 녀자로 남아있고싶지 않았던것이다.
 
                                                                 5.
 
    원래 초영이는 공장에 적은 두었으나 할일이 없었다. 공장일도 시원하게 풀리는것같지 않았다. 왕씨한테 날아가서 새롭게 시작할가 생각도 했지만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고있어서 종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내 공장이 거덜나고 파산이 선고되여 경매에 붙여졌다. 초영이는 밑져 본전이라고 왕경리에게 소식을 전했다. 왕경리가 경매에서 이기고 공장을 접관했다. 그는 초영에게 총경리를 맡기고 경제권, 인사권까지 도거리맡겼다. 그는 초영이의 재능을 믿어의심치 않았던것이다.
   초영이는 텔레비대학을 다니며 배운 관리학지식을 한껏 발휘해볼 기회가 생기자 죽기내기로 접어들었다. 그는 일본중소기업가들의 경영관리모식을 모방했다. 우선 번다한 지도기구를 간소화해버렸다. 놀고먹는 수탉들은 제갈데로 가게 하고 로동자들도 자원원칙하에서 알쭌하게 묶어세웠다. 죽을고비에 살길이 나진다고 저저히 진정 한 주인공의 자세로 나왔다.
    반년지나 로임을 착착 내주고 일년후에는 장금까지 쑥쑥 올라갔다. 물론 왕경리가 뒤를 받쳐주었고 그만큼 초영이도 실속있게 해제꼈다. 2년후, 전시 18개 국유 기업에서 세집이 겨우 밥벌이하고 나머지 열다섯집은 말이 아닌판에 유독 초영이네 공장만이 만가동을 걸고 들끓었다. 그해 년말, 기업개혁경험교류회의가 제정한 날자에 열렸다. 초영이는 선진기업가로서의 자호감에 가슴뿌듯했다. 드디여 자기의 가치를 찾았고 이제 녀성기업가로 더 높이 나래쳐볼 판이였다…
    그러나 호경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고로 돼지는 살찌면 운이 좋지않다는 말이 있다. 선진기업이 되였다하니 겉으로는 둥둥 띄우고 밑에서 벽을 구멍내고있었다. 닭을 잡아서 금달걀을 빼내려한 우직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차차 그렇게 번져갔다. 아 글타글 벌어서 여기저기 “부조금”으로, “공헌”을 흘러나가는데 막아낼수 없었다. 여기저기에 낯을 내야만 했다. 순진한 초영이는 기실 세상이 돌아가는 내막을 다 모르고 아롱다롱한 꿈을 꾸었던것이다. 초영이는 마침내 연약한 녀자의 몸으로 더는 공장을 운영할수 없다는것을 느끼고 사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후엔 환경처에 청소공으로 들어가 새롭게 시작하게 되였던것이다…
《장하오. 난 초영이의 능력을 믿고싶소. 그리구 생활속에서 시대소설을 읽게 해줘서 고맙구요.》
《처음 페부에 스미는 말 해주어서 제가 오히려…》
《자, 저녁식사나 하지. 소설소재값을 외상으로 해서는 안되겠으니까.》
《어머, 인정 한번 찐하시네요. 오늘은.》
《무슨 말이요. 바위는 겉으로만 보는거 아니요. 뿌리가 깊다구. 내가 딱 그런 바위라는 말은 아니지만.》
    선우와 초영이가 저녁까지 걸치고 거리에 나서니 택시차도 뜸해진 밤중이였다.
《바래줘요. 택시를 말고요.》
《그래. 초영이와 함께 걸을수 있는 길이라면 만리길도 기꺼이 가고싶소.》
    초영이가 선우의 팔을 살며시 꼈다. 어스름달빛속에 길게 늘여진 희끄무레한 두 그림자…아, 어려운 인생길에 백년을 기약한 인연이라면 얼마나 좋을가?)너무나 지쳐버린 자신에게 시름놓고 기댈수 있는 커다란 기둥처럼 가슴 깊이에서부터 솟아있은지 오랜 선우를 살며시 훔쳐보며 초영은 한숨을 호—내쉬였다. 전생의 연분까지는 몰라도 돌이켜보면 어려운때마다 운명적이였던 그 만남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로처녀의 가슴속에 보라빛 동경의 세계를 구축하게 하였던것이다.
   이밤, 등을 꼬브린 하현달이 창안을 엿보다가 그만 지쳐서 서천에 기울고 밤은 새벽을 당겨왔는데도 초영은 두눈을 초롱초롱 뜨고 누웠다. 녀자는 단순히 추워서 이성의 따스한 품속을 그리는게 아니다. 서른살을 바라보는 녀자의 생리수요도 스스 로 속일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감각만을 추구하기에는 너무나 자성적이였던 초영인만큼 황보숭에게서 실망한후 사랑의 쪽문에 아예 녹쓴 자물쇠를 잠그었었다.(그이는 자유의 몸이라 했었지? 그말에 어떤 암시는 없었을가?)물과 젖처럼 마음과 마음이 녹아들고 령혼과 령혼의 얽힘속에서만 맛볼수 있는 안전하면서도 보람차고 정서적인 그 모든 감각을 줄수 있는 남자는 선우밖에 더 없다고 생각하니 더구나 마음이 짜릿해났다. 자신은 사랑의 렬차를 놓쳐버린 지각생이지만 선우라는 사나이가 몰고가는 인생렬차에 올라타야만 살것같았다.
    남들은 찢어지고 잊을수 없는것이기에 첫사랑이라지만 처음 만나고 그에게서 도움을 받을때 벌써 자기의 첫사랑은 아이들의 소꿉질같은 실패작이 아닐가 하는 위구심을 보듬은 그녀였다. 순정의 꽃대문을 꽁꽁 닫아두었지만 무시로 찾아돠 두드리는 선우정을 생각하면 화가 복이 되는듯 싶기도 하였다. 행복의 한쪽문이 닫기면 다른 한쪽문이 열릴수도 있는게 인생현장이 아닌가…
    그날, 차안의 도적에게 려비를 털리우고말것을 그 고마운 사나이가 수호신처럼 지켜주었으니말이지 어쩔번했던가. 대번에 믿음이 확 실린 초영이는 식당에서 맥주를 나누며 도와달라고 실토정했고 제이름 밝히는것은 꺼려하면서도 사나이는 쾌히 응낙 해왔다. 하여 그 아슬아슬한 시각에 절주있는 구두발소리로 침착성을 다져주었고《차예!》하는 엄엄한 목소리로 결전의 신호를 보내주었던것이다. 그는 다른 도시에 가서도 초영이의 든든한 뒤심이 되여주었다.그가 아니였더면 초영이는 빚은 커녕 메돼지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은격이 되고말았을것이다.
    물론 그때는 일종의 두려움같은 심정으로 존경했고 오빠에 대한 녀동생의 마음으로 고마워했을뿐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존경과 신뢰가 어떤 숙명적묵결을 지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서 남자는 공격형이고 녀자는 방어형이라는 전통적인 애정 스케줄도 지금 초영이에겐 색바랜 계률이다. 그래. 래일 먼저 전화를 쳐야지…)
   초영이는 터질듯 부푼 자기의 젖가슴에 다시다시 수집은 순정을 보듬어보며 선우를 찾아 에덴동산에 올랐다.…
   그날, 세번째로 초영이를 만나게 된 선우도 사나이로서 응당 가져보게 되는 녀자의 매력에 깊은 한숨을 톱았던것은 사실이다.(서로 마주보는 청산이 되지 않기를 바래요)하며 눈가에 미풍을 싣던 초영이의 동탕한 얼굴을 사진찍으며 선우도 속말을 하였다.(그래. 우리의 사랑은 덜기가 아니라 더하기로만 돼야겠지. 사랑했었다구. 알겠니? 귀여운 녀자야!)
   선우는 워낙 점액질이여서인지 불붙는 사춘기에도 이성에 대해서는 한심하게 보수적이였다. 아마 어려서 부모를 잃고 새끼 특무로 몰리며 조약돌처럼 값없이 자란탓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철들어 자기 생명창조에 들어가서는 패기가 넘쳤다. 고중 이나마 간신히 마치고 환경위생처에서 쓰레기차를 몰면서도 경리라는 별호를 가질 만큼 활약적이였고 궁량이 넓었다. 그는 주어진 운명에 고스란히 한목숨 내대고 싶지 않았던것이다. 어릴때 굳어진 렬등감에 비관적성격이 굳어졌지만 생활과는 열렬히 포옹하고있는터이다.
    막로동자치구 책벌레라면 드물긴 했지만 확실히 그는 많이도 읽었고 아는것도 많았다. 그는 행정적으로는 최하층의 존재였지만 사회는 그를 유망한 문인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였다. 그는 쓰레기차운전수로부터 환경처선전간사로 소환되였고 자기 인생마당에 자신의 동상을 열심히 조각해왔었다.
    썩 늦게 장가를 갔지만 그의 모든 열망은 녀자의 몸에가 아니라 독서, 창작이였다. 그래서 신혼의 나날, 착착 감겨드는 안해에게서 받는 자극도 오래가지 못했다. 련애할때는 다감하고 재미가 샘솟는 녀자라고 여겼는데 차차 지내보니 금시 자글자글 끓는듯 하다가도 어느새 앵돌아져 살얼음이 선뜩하고 또 그우를 걷게 하는 미화에게 진저리쳐질때면 더구나 책과 펜을 벗삼았다.
    미화가 바닥까지 환히 꿰뚫어보이는 시내물같기도 하고 틀어놓아야 요란스레 흘러나오는 수도물같은 녀자였다면 초영이는 겉흐름은 유유하나 속깊은 곳에서 사람을 휘감아치는 소용돌이가 있어 영원히 자맥질하게 만들 호한한 강물같은 녀자라고 느껴졌다. 선우는 그 깊이를 알수 없는 사랑의 강물에서 익사하고싶었던것이다.
    바람새 부드럽고 해볕 따스한 일요일날, 초영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록 로처녀이긴해도 동정을 지켜온 초영이와 늦은봄의 련가를 엮는다는것이 너무 로맨틱하지 않을가 저어되기도 했지만 초영이와 함께라면 점점 삭막해지는 이 인정세계에서 둘만의 오아시를 가꾸며 오래오래 즐겁게 살아갈것만 같았다.
    초영이의 얼굴은 찬란한 광한에 싸여있었다. 그도그럴것이, 사랑에 취한 녀자의 얼굴은 어느때보다 아름다운 법이다. 정차게 깜박거리는 긴 속눈섭에 하많은 사연들이 맺혀있는듯 싶었다. 도안이 너무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무늬간 적삼에 받쳐입은 품위있어보이는 스커트와 잘도 어울리는 미끈한 몸매가 그렇게 매력적일수가 없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싱싱한 향기가 풍겼고 미모의 녀자들이 거개 그러하듯 대리석같이 싸늘한 느낌을 줄대신 우아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더구나 이채로웠다.
 《나오셨군요. 안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요. 경박하다고 숙보지는 않겠죠?》
   예이제 눈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지성적타잎의 녀자가 걸어오는 눈전화이다.
 《천사가 부르는데야 기쁘게 달려왔지. 초영이, 초영인 내 마음속에 뿌리내린지 오랜 사랑의 금자탑이였다구요. 사랑스러운 내 미인아!》
   선우의 눈에서 발산하는 전파였다. 그들은 림간의 소로를 따라 가고 또 갔다. 낮다란 고개도 두개나 넘고 굽이도 몇개 돌았다. 선우가 조용히 웃고있는 함박꽃 한송이를 꺾어들었다.
《제가 곧 시들어버릴 함박꽃으로 보이지는 않나요?》
《너무 싱싱해서 독기가 풍기는것 같아. 가시속에 꽁꽁 숨어온 들장민가?!》
《아이 미워라, 그럼 왜 먼저 찾아주시지 않았나요?》
《난 이미 한고개 넘어온 지친 나그네처럼 벼랑우에 핀 꽃을 멀리서 보아야만 하는 그런 처지일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누가 먼저 훌쩍 꺾어가면 어쩔려구요?.》
《하긴 지금도 꽃을 슬며시 바라보는 속절없는 잎일수도 있으니말이요.》
《싫어요. 꽃은 잎에 받들려있어야 시름놓고 꽃꿈을 꾼다나요. 호호…》
《어이구, 제법 상징사가 나오는군.》
《닮았어요. 선우씨를.》
    아닌게 아니라 초영이는 선우와 만나면 자신이 그의 말투를 따르게 된다는것을 느끼고는 혼자 웃은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경구 비슷한 말로 운치있게 자기의사를 표달하는 선우에게 늘 탄복이 갔고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이 시각, 영원히 지지않을 사랑의 태양이 머리우에서 축복해주는듯 싶었고 미지의 그 세계속에서 선우와 함께 훨훨 나래치고싶었다.
    그녀의 늦어진 사랑은 풋내기소녀들의 첫사랑과 달랐다. 소녀들의 첫사랑은 수집음과 망설임속에서 천천히 타오를수도 있고 천천히 열을 가할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초영이의 사랑은 오래동안 잠자던 활화산이 폭발하듯 거대한 화염을 토하고 있다. 선우도 피부로 그것을 읽고있다. 조금은 철늦어진 꽃을 보는 느낌이였지만 초영이의 얼굴은 홍조로 물들어있었고 온몸이 그대로 불타오르고있었다.
《저 혼자 너무 힘들었어요. 저를 지켜주세요. 전 지쳤어요.》
《믿어주어 고맙소. 우리 함께 끝까지 걸어보자구. 전체가 울퉁불퉁한 길은 없을테니까. 내 사랑의 바위밑에서 용솟아 마를줄 모르는 옹달샘이 되여주오.》
    어린애같이 차분하게 안겨드는 초영이의 날씬한 허리를 감싸안으며 선우는 눈으로 물었다.(난 나그네인데 후회하지는 않겠나?)
  초영이는 대답대신 긴 속눈섭을 살며시 맞붙이며 꽃술같은 입술에 물기를 머금었다. 선우의 탄력있는 입술이 입술을 애무할때 초영이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6.
 
    요즈음 초영이는 두가지 사랑의 선물을 열심히 준비하고있었다. 하나는 선우가 꿈꾸던 첫소설집을 펴내게 하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부끄러우면서도 몸을 달구게 하는 그 장엄한《례식》을 올리는 일이였다.
    선우에겐 비밀로 붙이고 독단독행할 예정이였다. 그래도 선우님은 다 받아주리라 믿었던것이다. 그동안 알뜰히 모아두었던 소설들을 다시 정히 타자하고 표제도, 삽화 도 저혼자 해냈다. 제목은 선우의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미완성작》으로 선정했다. 서문도 직접 심장이 시키는대로 소박하게 진솔하게 썼다.
    드디여 최신정장본으로 된 소설집이 나오고 서점매대에 진렬되였다. 련며칠 서점에 지켜서서 보니 책은 잘 팔리고있었다. 그는 선우를 위해 축원의 뜨거운 눈물을 머금었다. 초영이는 시집가는 첫날색시의 울렁이는 가슴으로 선우와 오래간만에 마주앉았다.
《참 세상에 희한한 일도 있지요. 서점에 선우정소설집이 나와있지 않겠어요. 제목은 <미완성작>이였는데 어찌나 잘 팔리는지 저도 한권 샀어요. 보실래요?》
《지금 무슨 생무우같은 롱담하는거야?》
《롱담이 아니라니까요. 자 보세요.》
《아니, 이게 무슨 감투끈이야. 누가 내 작품을…》
《범죄자는 눈앞에 있어요. 저작권침해죄로 기소하지는 않겠지요?》
《아니? 초영이가?!… 그런데…초영이! 고맙소. 내가 꿈꾸는거야 아니겠지.》
《당신의 실현된 꿈은 저의 사랑의 선물이예요. 필을 꺾지 말고 써내세요. 두번째, 세번째 소설집을 펴내자요. 제가 피를 팔아서라도…》
《고마워, 초영이. 그래 써야지…청산이 있는데 땔나무걱정은 없을레라…》
   선우정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지금은 소설을 쓰기도 어렵다. 상품으로서의 소설은 다르지만도 인간희비극의 세부와 복잡다단한 인간의 감정을 피상적으로 그릴수 있겠으나 생활의 저변에서 흐르고있는 인간고와 비리와 사람들 가슴속에서 배회하는 볼수도 만질수도 없는 그 진실한 그림자를 굵은선으로 그려내고 생생하게 재현시키기란 정말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수 없다.
《그래도 쓰세요.》
   그들은 교외쪽으로 택시를 몰게 하였다. 남산언덕에서 불야성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초영이가 속삭였다.
《선우씨, 우리 결혼해요. 내 전반생은 회색구름속 오솔길이였지요. 당신이 곁에 있어주면 꽃구름만 필거에요.》
《나도 초영이를 사랑한지 오래였소. 그러나 바람새 세찬 세월에 뜬구름이 되지는 말아주오, 나도 녀자에게 지친 나그네라오》
   초영이는 선우의 푸근한 가슴에 차붓이 기대였다. 그렇듯 고요한 이 밤의 정취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물먹은 해면처럼 나긋나긋해지고 뜨겁게 달아있었다. 그 모든 애달픈 사연은 사라져버리고 머리우엔 찬란한 별빛이 끝없이 흐르고있었다. 그녀는 한줄기 가벼운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풀밭에 무너져내렸다. 어금이 사이에서 사랑이 부서지는듯한 달콤한 신음이 새여나갔다……
    밤안개같은 몽롱으로, 봄날언덕의 아지랑이의 가물거림으로, 세찬물결의 충격과 흔들림에 따라 여지없이 뭉개지는 꽃밭의 어지러움으로 엇갈리는 의식속에 두사람의 몸에서 불덩이들이 연신 빠져나가 풀들을 누렇게 태우고있었다.
  …초영은 누구에게 빼앗길가 두려워하듯 선우의 근육질의 어깨에 바싹기대여 산을 내렸다. 발밑에 비탈길은 울퉁불퉁해도 걸음만은 가벼웠다. 선우와 함께라면 그 어떤 비탈길도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을 자신에 넘쳐 가슴은 한껏 높아지는 그 만큼 둘이의 사랑은 2×2=5라고 생각하며 가마목에 엿가락처럼 흐믈흐믈해졌다…
 
                                             1995년2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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