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로스안젤스에 대한 유람을 마치고 태평양 중심에 있는 하와이주로 향하였다. 하와이는 하와이 제도에 위치해 있다. 하와이는 본래 폴레네시아 민족의 땅으로 녀왕이 다스리던 왕국이였다. 후에 미국의 식민지가 되였다. 1959년8월21일에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였디.
우리는 아침 5시에 로스안젤스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해관검사를 마친후 8시에 로스안젤스 – 호놀룰루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비행기가 로스안젤스 공항을 떠나10간을 비행하여 호놀룰루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하와이에 오면 시계 바늘을 돌려 놓아야 한다. 미국에는 각 지역마다 위도에 따라 시간이 달랐다. 워싱톤에 와서는 북경시간 보다 12시간 늦추어 놓으면 되지만 하와이에 와서는 북경시간보다 5시간을 늦추어 놓으면 된다.
호놀룰루시는 하와의주의 수부도시이다. 공항으로 부터 시내로 들어오는 사이에 보이는것은 호놀룰루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시라는 감을 느끼였다. 공로옆에는 푸르른 나무 숲이 우거졌고 나무숲속에 가담가담 큰 꽃나무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서 느껴보지못했던 싱그런 행기를 맞보게 되였다. 그 향기는 도로 량켠에 있는 나무 숲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였다. 하와이주와 호놀룰루시는 아열대지구에 속하므로 이곳은 사계절이 분명하지 않아 일년내내 나무가 푸르고 꽃이 핀다. 하기에 나무와 꽃에서 풍기는 향기가 화합하여 온 호놀룰루가 향기가 그득하게 했다.
호놀룰루 공항 출구를 나오니 젊은 녀인이 우리를 반겨 맞아주었다. 그녀는 우리팀이 가이드이며 운전기사를 겸하여 맡은 류아려였다. 그는 중국사천성 사람으로서 18년전에 미국으로 이민으로 왔다고 했다. 나는 그가 20대인줄 알았는데 39세라하면서 열 일곱살이 되는 아들이 있다고하자 그만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류씨를 보고 언제 미국으로 왔는가? 남편은 미국 사람인가? 물었다. 또 월급은 얼마이며 중국에서 살기보다 어떤가?를 바투대며 물었다. 그는 주저없이 술술 잘 대답했다. 그는 중국의 발전변화에 감동된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이미 미국화로 되였기에 중국에가 살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월수입은 3만원(인민페)이 된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하와이는 세가지가 좋은것이 있다고 했다. 첫째 공기가 좋고, 둘째는 물이 좋으며, 세째 기후가 좋다고 했다. 하와이는 4계절이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제일 추울때가 12도이고 제일 더울때가 31도라 한다. 자주 비가 내리며 일년 내내 나무잎이 푸르고 꽃이 피므로 환경조건이 좋아 세계각국의 관광객이 많이찾아오며 돈 많은 부자들이 고급 별장을 사놓는다 했다.
하와이에 왔으니 하와이 력사와 지리를 알아야 한다. 하와이주는 하와이 섬, 마우이 섬, 라나이 섬, 몰로카이 섬, 오아후 섬, 니하우 섬, 키우아이 섬. 등 여덟개의 큰 섬과 100여개 작은 화산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와이주의 총면적은 228.311평방킬로메터라 했다. 인구는 132만명되는데 하와이주는 미국에서 백인이 제일 적게 사는곳이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부분사람들은 아세아인들이라고 한다. 그 중에 일본인이 36프로를 점하고 화인은 17만명된다고 한다. 하와이는 미국 령토라 하지만 하와의에서 일본인이 세력이 강하다고 한다. 하와이주 주장도 일본인 후예라 한다. 나는 그말을 듣고 어찌하여 하와이에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고 주장도 일본인 후예라 할가? 알고보니 력사적 원인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밀운다.
하와이주에는 130개에 달하는 섬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이 많이 살고있는 섬은 근근히 8개섬이라 한다. 8개섬중에서 세번째로 큰 섬인 오아후 섬에 많이 살고 있었다. 오아후 섬에 거주하는 인구는 하와이주 인구의 80프로를 점한다고 한다.
하와이주에는 화산이 자주 폭팔하는 섬이있다. 하와이주에서 가장 큰 섬인 하와이 섬에있는 칼라우에아 산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활화산이라 한다.
우리는 호놀룰루공항을 떠나 먼저 진주항을 보려고 갔다. 오아후 섬에는 호놀룰루시와 진주항시가 있었는데 두개시라고 하지만 서로 련결되여 두시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한시간 달리자 진주항시에 도착하였다. 진주항시로 가면 꼭 진주항을 먼저 보아야 한다. 진주항을 둘러싸고 진주항시가 형성되였다.
진주항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것은 진주항 모습이 진주처럼생기였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란다. 그런 의미에서 진주항을 바라보니 정말로 맑고 푸른빛을 띤 바다와 푸른산들이 조화를 이룬것이 정말로 진주같아 보이였다.
진주항은 태평양 지역에서 제일 큰 미군군사항구이다. 진주항에는 미군태평양사령부가있었다. 진주항주위에는 산이 둘러있어 천연적인 항구조건을 구비하였다. 진주항으로 가는 길옆에는 철조망을 두른 미군군사기지가있었다. 관람객들은 미군군사기지로 마음대로 들어갈수없어 철조망밖에서 바라볼뿐이였다.
진주항에서는 군사시설을 내놓고는 다 관람할수 있었다. 우리는 진주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관람표를 사고 진주항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면 진주항의 모습이 환히 보인다. 푸른물결이 넘실대는 바다, 바다물을 둘싼 푸른산, 산듯한 항구를 바라보는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진주항을 바라볼수있는 관람구 정면에는 진주항 기념탑이 있었다. 기념탑옆에는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 비문을 보면 이러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제국비행기들이 불이에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에있는 진주만에 있는 미국군 기지에 기습을 가했다. 그번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었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403명의 군인 사상자와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진주만 공습이후 미군은 력량을 집중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그번 진주만 공습에 대하여 후세 사람들은 두가지 같지않은 분석을 하고 있었다. 그번 진주만공습이 일본군이 전략적 타산으로 주밀하게 계획한 공습이였다는 견해와 미국이 이미 일본이 공습하리라는것을 알고 일부러 일본군의 공습을 유도 했다는 견해였다. 미국이 일본군을 유도했다는 사람들의 견해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할 때 미해군이 항공모함을 비롯한 주력함대들은 진주만에 정박해 있지않고 다른곳에 피하여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다수의 분석가들은 진주만 공습을 일본의 전략적 공습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진주항을 돌아본후 호놀룰루시로 돌아왔다. 호놀룰루시에는 하와의 력사박물관이 있었다. 력사박물관에는 옛 이오라니 왕국의 력사를 정리해 놓았다.
하와의 원주민은 폴리네시아인들이였다. 대략 2,000년전에 다른 태평양 섬들에서 살던 폴리네시아인들이 섬을떠나 첫번째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한다. 1,200년경에 또 다른 폴리네시아인들은 타하티로부터 하와이에 이주하였다 한다. 이 단체는 초기 다른섬들에서 온 폴리네시아인들과 전쟁을 벌려 승리하여 지배 계급을 형성하였다.
어느때부터 이 섬들을 하와이라고 불렀을가? 전설에 의하면 폴리네시아인 정착자들이 “하와이로아”라 불리우는 추장의 명예를 기려 섬 무리를 “하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다른 전설은 하와이란 이름은 본래 풀리네시아 서부의 최초 정착지라고 알려진 전설속의 지명 “하와이키”로부터 유래됐다고 한다.
11. 이오라니 왕국
하와의주의 최초의 토착민은 폴리네시아인이였다. 그들은 태평양의 다른섬들에서 하와이주로 이주하여 왔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하고 이오라니 왕국을 건립하였다.
어떻게 이오라니 왕국이 건립되였을까? 최초에 하와의 섬에 이른 폴레네시아 혈통의 원주민들은 통합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제각각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과 섬에 군체를 이루고 살았다. 각 지방에서는 추장을 선출하여 추장이 그지역이 통치자로 되였다. 그 추장중에서 카메하 메하라고 하는 추장이 가장 슬기롭고 용맹하였다. 카메하 메하라는1782년에 폴레네시아 원주민과 전쟁을 벌리였다. 10년간의 잔인한 싸움끝에 승리하여 전반 오아후섬과 기타 모든섬들을 자기들의 통치하에 귀속시키였다. 전쟁에서 패한 추장들은 카메하 메하를 이오라니왕국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되여 이오라니왕국이 건립되였고 카메하 메하는 이오라니 왕국이 제1초대 국왕으로 되였다. 카메하 메하국왕은 관용을 베풀어 항복한 추장들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와이주에는 희귀한 백단나무가 있었다. 하와의 왕국에서는 1811년과 1830년 사이에 대량의 나무를 중국에 수출하였다. 백단나무의 교역으로부 들어온 돈은 카메하 메하 1세와 그후 2명의 국왕들의 주요 소득원이였다. 국왕은 그 돈으로 무기, 의루, 배와 다른 물건들을 사기위해 그돈을 썼다고 한다. 국왕은 왕궁을 지었고 군사를 두었다 한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카메하 메하대왕의 이 력사공훈을 기념하기위하여 호놀룰루에 있는 이오라니왕궁 건너편에다 카메하 메하대왕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동상에서 보여주는 국왕이 옷차림과 장속을 보아서 그 당시의 이오라니 왕국은 원시적인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냐?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넓은 하와이주를 통일된 왕국으로 건립한것만으로도 탁월한 정치가였음을 알수 있었다.
17세기 영국인 선장 제임스 쿡이 이곳으로 제일 처음 상륙하였다 상륙할때까지 이 섬들에 대하여 전혀 알지못하는 상태에서 상륙하였다. 상륙하고 보니 이 섬에는 이미 토착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들이 있었다. 제임스 쿡 선장은 같은 영국인 선원들을 이끌고 하와이에 상륙하자 처음에는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그와 교류하기를 꺼려 했으나 제임스 쿡이 하와의이 본질적인 문화를 리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소수의 하와이 원주민들과 교역하였다. 쿡은 이섬을 샌드위치 백작의 명예를 기려 샌드위치섬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는 2주후에 섬을 떠났으며 1781년11월에 다시 돌아왔으나 이듬해 섬을 략탈하자는 그의 부하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쿡은 이를 말리려다가 도리여 액운을 만나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분노한 원주민들에 의해 손상되여 몇파운드의 살점만이 영국으로 보내였다 한다.
쿡이 이 섬을 발견한 이후 많은 유럽상인들과 탐험가들이 이 섬들을 다니였다고 한다. 많은 외래인이 다니면서 하와이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였다. 또 한편으로 외래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으로인하여 천정지 땅이라던 섬나라가 질병에 곤욕을 치렸다 한다.
유럽인들이 이 섬에 도착하기전에는 대략 30만명의 하와이 주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것이 세계 여러나라의 무역선들이 아세아와 아메리카대륙을 오가다가 하와이군도에 머물러 휴식하군하였다 한다. 이런 무역선들이 다니면서 세계 여러 지역의 전염병을 뭍쳐 가지고 와서 전염시키였다 한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은 전염병으로 인해 많이 사망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와이 인구는 30만명으로 부터 1836년에 대략 18만명으로 되였고 1853년에는 7만3천명으로 감소되였다 한다.
1820년부터 미국은 본격적으로 하와이에 사람을 파견하였다 처음으로 미국 선교회협회에서는 개선교 선교사들을 하와이에 보냈다. 선교사들은 하와이 원주민을 설교하여 대부분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한다. 미국은 종교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이오라니왕국을 미국의 부속국으로 만드는 첫 발을 떼였다.
미국의 도움으로 1840년 이오라니황국은 첫 헌법을 채택하였다. 헌법에는 행정관 입법관과 대법원을 둔다고 규정하였다. 1848년까지 국왕은 모든섬들을 소유하였다. 그는 다양한 지역들을 추장혹은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에게 활양 또는 임대하였다. 새롭게 제정된 토지분활법에 따라 카메하 메하3세와 추장에게 분활된 토지의 소유권이 법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여온 새로운 법률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한채 수많은 하와이인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수 세대동안 일해온 토지를 법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못했다. 결국 이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민들에게 자신들의 가꾸어온 대지를 억지로 팔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법률은 많은 하와이인들이 땅을 잃고 가난해지는 원인이 되였다.
서방의 법률을 잘못 따른 이오라니 왕국은 결국 자멸이 길을 걸고 말았다. 많은 외국자본이 하와이에 몰려들어 땅을 매입하고 주권을 장악하였다. 미국 자본이 가장 많이 투입되면서 하와이는 기본상에서 미국의 부속국으로 전략되였다. 이 시기 금속도로 발전한 일본도 미국에 못지지않게 하와이에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땅을 매입하고 주권을 가지였다. 미국은 이오라니 왕국에대하여 종교와 강력한 경제 침투로 이오라니왕국은 무너뜨리였다. 미국의 강한압력하에 이오라니 왕국은 페국하고 말았다. 드디어 미국의 계획대로 1959년8월21일에 하와이는 정식으로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 되였다.
12. 하와이에 세가지가 좋은것
일반적으로 바다를 끼고있는 섬도들에서는 태풍의 습격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하와이는 비록 섬도이지만 태풍이 그리 심하지 않고 태풍이 먼지 모르고 산다고 한다. 하와이는 아열대 지방이여서 건조할때도 있지만 비가 자주내린다. 비가 자주 내리기에 아열대에 속하지만 무덥지 않다.
하와이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하와이는 “물이좋고 공기가 좋으며 기후가 좋다”고 한다. 내가 느끼건대도 그러했다. 하와의 물을 마이여보면 확실히 물맛이 좋다는 감을 느낀다. 맑고 시원한물은 조금 달큰한 맛이 났다. 랭수를 마사여도 배탈이 없었다. 태평양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다 바람은 신선한 공기를 싣고와서 하와이에 뿌려준다. 바다에서 불어온 신선한 공기와 섬을 덮은 나무숲에서 흘러나오는 싱싱한 공기가 회합되여 하와이는 세상에 둘도없는 공기가 좋은곳이다. 하와이 기후에 대하여 우에서 언급했지만 사람의 체온에 알맛는 년 평균기온이 24도라 하니 구태여 더 좋다고 보태 말할 필요없다. 하와이는 일년중 비오는 날이280날이 된다고 한다. 비가 자주 내리지만 비가 멈추면 하늘은 인츰 맑게 개인다. 일조량이 충족하여 식물이 자라기에 충족하다. 물이좋고 공기가 좋으며 기후가 좋기에 하와이는 세계각국의 돈 많은 사람들이 리상적인 휴양장소로 되고 있다. 호놀룰루 해변가나 산비탈에는 여러가지의 양식을 가춘 아담한 집들이 보인다. 이런 집들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의 부자들이이라고 한다. 집집마다 널직한 집터를 가지고 있었다. 집 앞뒤 뜰악에는 희귀한 나무와 꽃을 재배하고 있었다. 집 모양을 보면 집 주인이 어느 나라 사람인줄을 대뜸 알수 있다. 문앞에 미국국기를 계양한 집은 미국인들이 사는 집이고 파란기와를 옌 집은 일본인들이 사는 집이며 붉은 기와를 옌 집은 화인들이 사는 집이였다. 파란 기와를 옌 집들이 많이 보이였다.
하와이주에서 호놀룰루시의 도심의 땅값이 제일 비싸다고 한다. 미국의 뉴욕의 땅값에 뒤지지않는다 한다. 하와의주의 땅값이 비싸게 된것은 하와이의 자연환경조건이 좋아 하와이로 이주려는 사람이 많아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데도 있다. 또 다른한면으로 하와이주 정부의 토지매매정책과 토지소유권을 보장해 준데 있다. 하와이에서는 국적을 가리지않고 하와이에 와서 땅을 매입하면 매입한 땅에대한 소유권과 매입한 땅에 있는 문물이거나 지하자원도 매입자의 소유로 한다는 법이 제정되였기 때문이라 한다. 듣는 말에 의하면 하와이주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 광물이 많이 매장되여있다고한다. 면바로 자기가 매입한 토지에서 광물이 매장되여 있으면 횡재를 하게 된다. 하기에 세계각국의 재벌들은 하와이에와서 부동산을 매입한다고 한다.
지금 하와이를 보면 본토인보다 외래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와이는 미국의 령토라 하지만 인구의 비례를 보면 아세아인이 땅이라 하는것이 적절할것 같았다. 어떤 일본사람들은 하와이는 절반 일본이라고도 말했다. 하와이는 아세아인이 많이 살고있어 영어, 일어, 중국어, 조선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어를 모르고 일본말만 알아도 하와이에서는 살수 있다고 한다. 하와이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일찍 하와이에 와서 땅을 매입하고 상업과 유람업을 경영하여 부자로 되였다.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주요한 호텔과 운수공사, 항만, 항공공사는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호놀룰루의 거리를 보면 일본인 공공뻐스가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일본인은 호놀룰루의 부동산과 금융업, 상계에서 주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와이주를 절반 일본이라고 말한데는 일정한 근거가 있었다. 하와이주에서 일본인이 장악한 경제실력을 놓고도 그렇게 평가할수 있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인구의 비례이다. 2010년의 통계에 의하면 하와이주에 100만인구가 있었는데 일본인이 38만명, 백인종이 30만명, 원주민과 필린핀사람을 합하여10여만이 되며 화인과 조선인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합하면 1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외 유색인종과 인디안인이 있다고 한다. 그 당시의 통계가 이러 하였다면 지금의 인구비례는 많은 변동을 가져 왔다고 한다. 일본인은 전반 하와이 주 인구(132만명)중 36프로를 차지한다고 한다.
나는 이통계수자를 들으면서 어찌하여 일본인들이 하와이에 이렇게 많이 몰려왔을가? 궁금하였다. 그 궁금증을 풀려고 하니 자연 지난 하와의 력사를 알아야 했다.
하와이섬과 먼 유럽나라에서는 하와이섬에 대하여 아직 손을 펴지않을때 자본주의 사회로 급 부상한 일본은 해외 확장을 위한 목적으로 미국 버금으로 하와이에 진출하였다. 일본인들은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발전전망이 있는 하와이이 땅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다. 많은 일본사람들은 이민으로 하와이로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와이가 살기좋은곳이라 알려지자 세계의 많은 부자들이 하와이로 몰려왔다. 헐값으로 사들인 부동산이 몇배로 치달아 올랐다. 일본인들은 살때를 만났다.
일본인들은 하와이주에서 미국을 초과할 정도로 세력을 확충하였다. 그렇게 잘나가던 일본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초기 일본군이 불이에 진주만 공습하였다. 미국정부는 군사력량을 집중하여 일본군을 타격하였다. 한편으로 미국정부는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하와이에 있는 많은 일본인들을 집중수용소에 가두어놓았다. 2차세게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투항하자 수용소에 같치웠던 사람들이 풀려나왔다 한다. 그들은 다시 일떠 섯다고 한다.
13. “알로하”, “팁” 그리고 공동묘지
우리가 탄 려행뻐스는 20명이 탈수있는 소형뻐스였다. 호놀룰루려행사에서는 소형뻐스를 많이 리용하고 있었다. 소형뻐스는 산길을 달리는데 대형뻐스보다 령활성있고 편리하였다.
하와이를 돌고 보면 하와이의 다수 건물은 오랜전에 건축한 건물이였다. 왜서 이런 오랜 건물들이 있을가? 하와이 주민들은 오랜건물을 없애고 새길을 수축하며 새로운 개발구를 만드는것을 반대한다고 한다. 주민들의 주장은 하와이주의 특색은 자연 생태환경이 좋은것인데 그것을 인이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것을 만든다는것은 하와이의 생태를 회손하는것이라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하외이주 정부에서도 주민들의 의견을 채납하고 개발을 하지않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 류아려는 우리를보고 하와이에 와서는 두가지를 배워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첫째는 “알로하”하라는 말을 배워야 하고 둘째는 “팁”를 쓸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알로하”란 하와이 원주민 하와족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인사말이라 했다. 지금은 “알로하”는 하와이에 사는 모든 주민들의 공동어로 되였다고 했다. “알로하”란 말은 환경과 대상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억양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될수 있아고 했다.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알로하”하면 “안녕하십니까?” 라는 의미이고 갈라지면서 “알로하” 하면 “다시봅시다.” “안녕.” 하는 뜻으로 풀이되고 사랑하는 사람사이에 “알로하” 하면 “사랑합니다.” 는 의미이고 갈라질때 무뚝둑하게 “알로하” 한다면 사랑을 받아줄수없다는 뚯이라한다, 집 주인이 손님이 왔을때 “알로하” 하면 “환영합니다.” 라 할수있고 손님이 갈때 “알로하” 하면 “안녕히 가십시오”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와이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알로하” 는 환경과 정서에 따라 부동한 의미를 나타낸다. 류아려의 말을 듣고 우리도 자주 하와이 사람을 만나면 “알로하”하고 말하였더니 그들도 웃으며 “알로하”로 대답하는것이였다.
두번째로 명심하여야 할것은 “팁” 이였다. ‘팁” 이란? 미국문화의 일종 부분이다. 미국에서는 호텔에 주숙하였다가 나올때에는 꼭 침대거나 테불우에 1딸라씩 남기고 가는것이 상레라 한다. “팁”은 호텔에서 일하는 잡부들에게 손님이 간단한 인사를 남기는 뜻이라 한다. 우리도 하와이를 오기전에 미국 본토 호텔에서 주숙하고 나올때에는 꼭 “팁”을 남기였다. 하와이로 와서 “팁”이란 말을 잘 리해해야 한다던 가이드 말이 생소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본토의 “팁”과 하와이에서의 “팁” 은 같은 점이 있으면서도 다른 일면이 있다는것을 알게되였다. 하와이 호텔에서 “팀”을 남기는것이 미국 본토의 호텔과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서비스 산업에서도 “팁”을 사용할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와이에서는 음식점과 같은 서비스 산업에서는 어디라 없이 자연적으로 “팁”을 받고 있었다. 우리가 주숙한 호텔옆에 번하한 상업거리가 있었다. 거리 량켠에는 옷 가계와 음식점이 번갈아가며 있었다. 나는 가던길 오른켠에 일본글로 “사쿠라칵국수집”이라 간판을 단 음식점을 보았다. 하와이에 와서 일본음식점을 보자 호기심이 동하여 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음식 메뉴를 보니 칼국수 한그릇 값이 11.98딸라라 적혀 있었다. 나는 한 그릇을 청하여 먹었다. 새우탕에다 끓인 칼국수는 맛이 좋았다. 먹고나서 돈을 치르려 하자 음식점주인이 14.5따라라는 명세표를 내 보였다. 분명 메뉴에는 11.98딸라라 적어놓고 14.5 딸라를 받는지 이상스럽게 생각되였다. 알고보니 2.6딸라는 원값 이외에 “팁”값이였다. 하와이에서는 음식점이거나 호텔과 같은 서비스 산업체에서는 모두 고정가격과 “팁”가격이 따로 있었다. 11.98딸라는 음식의 정가이고 2.6따라는 서비스로 된 “팁”이였다. 왜서 음식의 정가와 “팁”을 구분하였을가? 알고보니 이런 리유였다. 11.98딸라는 세금을 물어야 하는 가격이고 “팁”은 세금을 물지않는 돈이라 한다.
그다음 날 나는 한국음식점으로 찾아갔다. 일본칼국수 집에서 멀지않은곳에 한국인이 꾸린 음식점이 있었다. 그 음식점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메뉴에 일인분이 25딸라라고 적혀 있었는데 결산표를 보니 29딸라라고 적혀있었다. 한국음식점에서도 “팁”을 받고 있었다.
하와이에는 풍경이 아름다운 해변과 산이 많았다. 차를 타고 해변가 산길을 달리였다. 한참 달리니 앞에는 푸른 잔디로 덮은 넓은 구릉지대가 보이였다. 이상스럽게도 잔디밭속에 촘촘히 붉은꽃 묵음이 세워져 있었다. 가이드 류씨는 우리를 보고 이곳이 공동묘지라 했다. 공동묘지라고 하면 응당 무덤을 상징하는 분봉이 있어야 하고 비석도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는 분봉도 비석도 보이지 않았다. 하와이의 공동묘지는 여느 나라와 지역의 공동묘지와는 전혀 달랐다. 땅속에 골회를 묻고 그우를 평편하게 하고 꽃을 꽂을수있는 통을 세워 놓았다. 그통에 고인이 명함이 적혀 있었다. 고인의 후손과 추모객들은 꽃을 가지고 와서 그 꽃꼬지 통에 꼽고 제를 지내였다. 매우 간편하고도 편리하였다.
이공동묘지에는 장학량장군의 묘지가 있었다. 많은 중국인들이 장학량장군의 묘지를 돌아 보았다.
18일간 미국관광을 하고나니 기분이 좋았다. 미국에서 제일 인상이 깊은 곳을 말하라 하면 뉴욕의 맨하탄도 좋고 라스베가스의 야경도 좋았고 하와이의 풍경도 좋았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곳은 그랜드 캔니언(죽음의계곡)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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