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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1-19 15:24:37 ] 클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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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기부터 항일전쟁승리후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조선반도로부터 동북에 건너와 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동북의 벼농사는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였으며 조선족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조선족들의 인구 대 이동으로 그 자랑스러운 ‘특허’도 이제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도 안전성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중한수교후 한국기업이 중국의 연해도시에로 대거 진출하면서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많이 취직하게 되였으며 특히는 한국방문취업제로 많은 조선족들이 토지를 국내의 다른 민족에게 임대 혹은 양도하면서 한국로무의 길에 올랐다. 10여년동안 한국에서 돈을 벌었으니 이만하면 이제는 외국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고 고향에 돌아온 조선족도 있는데 정작 와보니 그전과 완전히 다른 상황에 부딪쳤다.
한국에서 10년 일하고 집에 돌아온 김모는 자기의 논을 되찾아 1년동안 농사를 지어보았는데 생각과는 딴 판이였다. 소농경제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농사를 짓다나니 많은 품을 들였으나 수입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그 기간 조선족만의‘특허’였던 벼재배기술을 다 장악하고 대중형 농업기계를 갖추어놓고 조선족들이 내놓은 토지를 임대맡아 농민전문합작사 혹은 전문 농장을 꾸려 규모화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력을 얼마 팔지 않고서도 거대한 수입을 창출했다. 영농실력의 차이가 천양지차였다.
김모는 할 수 없이 토지를 실력이 강한 사람들에게 다시 임대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토지임대비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였다.
약육강식이라고 김모는 비록 한국로무에서 돈을 좀 벌고 빈곤에서는 해탈되였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결국 자기보다 실력이 강한 사람들에게 먹히우고 만것이였다.
동북의 농촌 조선족마을을 돌아보면 이런 현상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조상들이 알심들여 개척한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조상들이 가꾸어 놓은 삶의 터전을 그래 그저 이렇게 잃고 말아야 한단 말인가? 이는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필자는 도시에 들어와 ‘강태공 낚시질’이나 하면서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에게 각성하고 속히 정든 고향에 돌아가 자기의 집, 자기의 땅을 찾아 착실하게 농사를 지을 것을 권장하고 싶다.
/ 길림신문 칼럼리스트 주청룡 홍천룡
2018년 1월 19일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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