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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한석봉 (1543-1605)은 리조시기에 활동한 저명한 명필가였다. 명나라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성난 사자가 바위를 깍아내고 목마른 말이 내가로 달리는것 같이 힘찬 글씨》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한석봉이 이렇게 된데는 그의 피타는 노력도 있었지만 더욱이 그의 어머니의 엄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1559년 여름 어느날이였다. 이때 16살이였던 한석봉이 집을 떠난지 7년만에 개성밖에 있는 나직한 초가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9살 어린 나이에 글씨공부를 하기 위하여 홀어머니를 두고 떠났던 그가 어언간 장부가 되어 어머니를 뵙게 되니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높뛰였고 걸음은 더딘것만 같았
다.
워낙 그의 아버지는 한석봉을 명필가로 키우려고 있는 힘을 다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남편의 뜻을 이어 아들을 꼭 성공시키려고 작심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되지 않는 가산을 죄다 팔아 9살밖에 안되는 석봉에게 주면서 10년을 기한으로 먼곳으로 글배우려 떠나보냈던 것이다.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다하며 떡장사를 하여 아들의 글공부를 뒷받침해 주었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문앞에 당도하자 석봉은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 들어갔다. 허지만 석봉은 의하해졌다. 자기가 들어서기 바쁘게 끌어안고 울고 웃으며 어쩔줄 몰라할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랭랭한 기색으로 맞이할 줄은 천만 뜻밖이였던 것이다.
《이제 겨우 7년이 지났는데 왜 벌써 돌아온단 말이냐?》
《어머니, 스승은 저를 잘 배웠다 하면서 이젠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실로 석봉이는 7년간 스승을 모시고 이악스레 배우고 밤잠을 잊어가며 글씨련습을 하였던 것이다.
《그럼 넉넉히 배웠단 말이지? 그간 네가 익힌 글씨를 한번 보자꾸나.》
석봉이가 먹을 갈고 종이를 편 다음 붓을 들었다. 어머니도 함지우에 올려놓은 칼도마우에다 길게 빚은 떡을 올려놓고 칼을 들었다.
《석봉아, 우리 한번 겨루어볼가?》
어머니는 곧 불을 끄고 석봉이더러 글을 쓰라고는 떡을 썰기 시작하였다. 석봉이는 난생 처음으로 캄캄한데서 손더듬하며 글을 쓰게 되어 여간 막막하지 않았다. 호미난방으로 어머니와의 겨루기에 말려들어간 석봉은 땀방울을 떨구며 한자 한자 써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캄캄한 방안에 률동적으로 울리던 칼도마소리가 뚝 멎었다.
《나는 다 썰었다. 너도 다 썼으면 불을 켜거라.》
석봉은 마지막 글자를 다 쓰고나서 불을 켰다. 그는 어머니의 지시대로 먼저 어머니가 썰어놓은 떡을 하나하나 맞추어 보았는데 크기와 두터이가 심통히도 똑 같았다.
어머니는 광설불로 석봉이 써놓은 글을 비추었다. 순간 석봉의 얼굴은 화로를 뒤집어 쓴듯 화끈 달아올랐다
.
《이게 바로 넉넉하게 배운 글씨냐?》
어머니는 한숨을 쉬였다.
석봉이는 자기가 쓴 글을 내려다보았다. 실로 망측했다. 글씨인지 아니면 알지 못할 한폭의 묵화인지 분간조차 할수없을 정도였다. 자자구구가 고르롭지 못한데다가 어느 획 하나 제대로 된것이 없었다.
《제가 졌습니다.》
《느꼈으면 됐다. 오늘 당장 떠나거라. 3년을 마치고 돌아오너라.》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홀로 둔채 한석봉은 집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기어이 성취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안고 이번에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그 당시 명필가로 이름있던 병조참의 심희남을 찾았다.
그는 이때부터 심희남의 사랑방에 묵으면서 밤낮으로 온 정력을 바쳐 글씨를 배웠다. 그는 붓끝의 재주로 글씨를 익혀나가는 한편 불을 끄고도 글씨를 더 일매지게, 힘있게 쓸수 있도록 하는데 힘썻다.
이렇게 3년동안 글씨를 련마해 가는 사이에 서울장안에서는《한석봉의 글씨는 오묘하다》는 소문이 쫙 퍼지기 시작하였다.
고심한 연찬과 배움의 3년세월은 어느덧 지나갔다. 그는 개운한 심정으로 어머니를 찾았다. 석봉이 불을 끄고 시험해보라 하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의 소문을 다 들었다. 더 시험할 생각은 없다. 석봉아, 어떤 공부든지 손끝이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몸에 배도록 익혀야 성공하게 되는 법이다. 10년공부를 끝냈으니 이제는 과거시험에 나서서 세상사람들과 겨루어보아라.》
《예, 명심하겠어요!》
석봉이는 끝내 25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말았다.
(5) 의병장령의 부인
중국 료녕성 관전현 청산구향 은광자촌 석가골의 깊은 숲속에는 화강암으로 된 비석 두개가 나란히 우뚝 세워져 있다. 하나는 리진룡의병장령의《의렬비(义烈碑)》이고 다른 하나는《우씨지묘-禹氏之墓)》라 하였는데 이《우씨지묘-禹氏之墓)》가 바로 의병장령 리진룡의 부인인 우씨부인의 묘비이다.
리씨조선말기 명문 단양 우씨가문에서 훈련원 판관 우병렬씨의 맏딸로 태여난 우씨부인은 곧기가 송죽같고 기품이 추상처럼 매섭고 또한 도고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조용하고 정숙하기가 이를데 없어 녀중 선비로 이름이 높았다.
8세때부터 서당에서 독서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하고 령리하였으며 항시 소학과 렬녀전 같은 책을 애독하여 부덕을 닦았다.
1905년 조선이 일제에게 짓밟히자 서울에 올라가 벼슬을 하고있던 우씨부인의 부친 우병렬은 울분을 품고 고향에 돌아와 서당을 꾸리고 성실한 마음과 타고난 소질로 조상의 빛나는 얼을 되살리기 위하여 후대양성에 온갖 심혈을 몰부었다.
그때 제자들 중 남달리 총명하고 독서에 열중하며 성격이 강직하고 사내답게 씨원씨원한 리진룡이란 학생이 있었는데 우병렬씨는 그의 사람됨을 보아 마침내 그를 맏사위로 받아들였다.
리진룡과 가정을 이룬 우씨부인은 부도를 다해 남편을 섬기고 아들 철해까지 낳아 키우면서 현처량모로 칭찬을 받았다.
1907년 헤그사건으로 하여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조선군대가 해산되니 담대하고 용감한 리진룡은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무찌르는 치렬한 유격전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그때 조선 서해일대에서 리진룡은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였다.
우씨부인의 부친 우병렬씨는 중군장령으로서 의기를 떨치였으며 우씨부인은 후방에서 정성껏 부상자를 돌보아 주었고 의병들에게 량식, 의복 등을 날라다주었으며 정보를 제때에 수집하는 등 뒤바라지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때 병참보조라는 일본헌병 밀정이 우씨부인을 찾아와서《남편 리진룡을 설득하여 귀순케 하면 상을 후하게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이에 우씨부인은 그자와 얼굴을 맞대는것 조차 욕된다고 하며 문을 닫고 준렬히 꾸짖어 이르기를《내가 만약 남자였던들 이러한 때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쳤을 것이다. 다만 녀자이기에 가문을 지키고 있거늘 어찌 버러지만도 못한 너같은 것과 더러운 담론을 할것이냐.》하고 분노에차 질책하였다.
그후 왜놈에게 잡혀 평산경찰서에 가니 적들은 갖은 형구를 차려놓고 온갖 협박을 가하며 백방으로 리진룡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날뛰였다. 이때 우씨부인은 조금도 동요없이 정색하여 말하기를《남자란 어떤 일은 부녀자가 모르게 행하거늘 하물며 비밀인 행방에 있어서야 더 말할것이 있는가? 설사 내가 안다할지라도 어찌 원쑤에게 말하겠는가 ... ... ! 》
《당신들은 나를 위협하고저 온갖 방법을 다 쓰겠지만 여기에 설치한 형틀이나 족쇄, 도검, 갈고리, 끓는 기름가마 같은 것이 부녀자의 기를 죽이기엔 충분하나 절개있는 녀인에게는 오히려 소원이다.》하고 추상같이 웨쳤다.
적들도 대꾸할말을 못찾고 그 기품과 지조에 압복되여 우씨부인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리진룡 등 애국자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압록강을 건너오는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대규모적으로 기구를 확대하여 반일투쟁활동을 줄기차게 벌렸다. 일제놈들은 리진룡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체포령을 내렸으며 도처에 수색망을 늘이였다. 일제 주구 성가란 놈의 밀고로 리진룡과 우씨부인의 큰 남동생 우제경은 끝내 놈들에게 체포되였다.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였을 때 우씨부인은 피눈물을 씹어 삼키며 옥중 부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이 몸도 곧 목숨이 다할것인즉 그때에 랑군의 묘곁에서 뵈오리다.》라고 썼다.
일제놈들은 의병운동을 탄압하고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놈들은 의병들을 감추어주었거나 후원해주었다는 죄병을 들씌워 온 마을사람들을 도살해버리거나 온 마을을 소각해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백색테로속에서 숨가뿐 생활을 하고있던 우씨부인은 어느날 남편 리진룡이 살해되였다는 가슴이 터지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놈들이 멀지 않아 자기에게도 재화를 들씌울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우씨부인은 절대 놈들의 손에서 죽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먹고 어느날 밤 아들 철해가 잠이 든 틈을 타서 깨끗이 씻은 누더기옷을 착착 개여 철해의 베개머리 맡에 고이 놓고 자기는 헛간으로 나가 짚신 삼는 끈으로 자진하여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원쑤놈들에 대한 증오심과 우씨부인의 장렬한 순절에 감복된 중국 료녕성의 자루골 인민들은 손에 손을 모아 우씨부인이 생활했던 관전현 소아하의 나지막한 언덕에《렬녀비(烈女碑)》를 세웠다.
우씨부인의 나어린 아들 철해는 그후 부모님의 원쑤를 갚으려고 의병대를 찾아 떠났고 우씨네 가정식구들은 놈들의 추격을 피해 빈몸으로 자루골을 떠나 본계현, 신빈현 등의 깊은 산골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해오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하회: 녀항일투사 김순희, 《종달새소녀》 김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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