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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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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84)
2017년 10월 09일 10시 29분  조회:1180  추천:1  작성자: 김장혁




                          
                                      10. 범바위골로 진군
      기승스레 불어치는 눈보라를 무릎 쓰고 병완은 쌀 주머니를 메고 맏며느리 진달래네 집으로 갔다. 남편을 잃고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입고서도 이를 꼭 옥물고 가녀린 어깨에 혼자 가정부담을 떠메고 애들 둘을 데리고 사는 맏며느리가 불쌍했다.
      진달래는 애들 둘을 데리고 살면서 용천한테 총상을 입은 아픈 다리를 끌고 일하러 다니다나니 아주 힘겨웠다. 그녀가 아무리 한해 동안 혼자 뼈 빠지게 일해도 양곡이 얼마 차례지지 않았다. 병완이 쌀 주머니라도 메다 주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넘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병완은 진달래네 집에 들어가 쌀 주머니를 맏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나서 조왕 쪽에 있는 쌀독부터 열어보았다.
쌀을 나눠준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쌀독이 절반이나 비지 않았겠는가.
“헤이, 이걸로 세 식구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기겠소?"
병완은 맏며느리와 답답한 속을 털어놓으려다 말고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감투 끈인지 모르겠다. 개체로 농사를 지을 땐 쌀독이 꼴딱꼴딱 차지 않았고 뭐요? 그런데 지금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뼈 빠지게 일해도 쌀독이 텅텅 빈단 말이요.)
진달래는 쌀을 쌀독에 쏟아 넣으면서 한마디 께끼었다.
“제 보건대요. 저처럼 혁명에 남편마저 바친 열사 유가족이거나 상순 조카 같은 제대군인 가정의 쌀독이 텅텅 비었어요. 노동공수에 따라 쌀을 주는데 집에 노동력이 없어 그런 거 같아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벽 밑에 앉아 무릎에 손자 경수와 경주를 앉히고 흔들거리면서도 얼굴에는 수심의 그림자가 흘러지나가고 있었다.
“밭은 적고 인구는 많이 늘어난 것도 문제야. 이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더 일궈야겠소.”
진달래는 가마 목에 무릎을 꺾고 앉았다.
“그래요. 밭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열사 유가족에게 그저 열사증이나 주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 것도 문제예요.”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건국 초기 어려움을 벗어나면 장차 꼭 열사 유가족이거나 군속에게 우대 무휼 금 같은 걸 얼마라도 주겠지.”
진달래는 무릎을 안고 한숨을 땅이 꺼지게 호 내쉬었다.
“정말 살기 막막해요.”
며느리 말을 들으며 병완도 한숨을 가슴이 터지게 내쉬었다.
진달래는 벽 밑의 경주를 안아다가 가마 목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소서구 밭을 누가 일궜는데 합작사에 다 들여놓고 배를 촐촐 굶으면서 살아야 돼요?”
“쯧쯧, 그만 하오. 우린 당원이 아니오? 당원은 대공무사 해야 하오. 고만한 이익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이 흔들려서야 되오?”
시아버지 말을 듣고서도 진달래는 뽀로통해 했다.
“전 조선에 나가 인삼 시동생을 찾아 봐야겠어요. 애 아버지가 조선인민군 연대장을 하다가 희생됐으니까 조선에서는 우대해주겠지요.” 병완은 한숨만 내쉬었다.
“아가야, 그만 말해라. 용천 대장은 남조선 괴뢰군이 아니었나? 자칫, 어험, 험. 심중히 생각하고 가게나.”
병완은 손자들을 내려놓고 엉거주춤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진달래는 그래도 년세 계시는 시아버지가 시삼촌 덕성보다 자기를 더 보살핀다는 것을 느꼈다. 병완은 자손들을 데리고 초가삼간을 지어 진달래네 들어 살게 했다. 그리고 때때로 땔나무를 해 실어다 주기도 하였고 쌀이 떨어지면 종종 자손들을 보고 가져다주게 했던 것이다. 그 친어버이 같은 사랑에 진달래는 못내 고마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진달래는 생활고를 겪으면 겪을수록 남편 - 성칠을 잃은 것이 마음이 더 아파났고 한없이 성칠 오빠가 그리웠다. 그녀는 낮에는 합작사에 나가 아픈 다리를 끌고 나가 일하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새 없엇지만 조용한 밤이면 애들을 재우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군 했다.
     그녀는 항일유격대 중대장으로 돼 돌팔매질로 일본 놈들을 까눕힐 때부터 그 얼마나 일본 놈들이 없는 새 나라를 갈망했던가. 그 얼마나 자식들한테 풍요롭고 행복한 새 사회를 넘겨주고 싶었던가. 그러나 미제를 몰아내는 전쟁에 남편을 바치고나니 애들한테 따뜻한 밥 한그릇도 푼푼히 떠줄 여력도 없게 되였다.
     (안돼, 계속 이렇겐 살 순 없어. 언제까지 시집 신세에 살겠는가. 조선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령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재빨리 치유하고 중국과 쏘련의 국제주의 지원을 받아 새 나라를 재빨리 건설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경수 아빠는 조선인민군 련대장, 렬사야. 조선에서는 꼭 항일유격대 때부터 김일성 장군을 따라 싸운 렬사 유가족을 잘 보살펴줄 거야.)
    외로운 진달래는 이 시각,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이 령도하는 새 조선이 한없이 그리웠다...
병완은 진달래네 집을 나서자 그 길로 막내손자네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증손녀들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상우네 막내딸 순애는 순자를 윽박질렀다.
“네 엄마 못난데다가 키도 작달막한 게 어디 우리 삼촌 대상 되니?”
순자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만큼 마음이 좋으라고 해라. 네 엄마는 그리 잘 나서? 얼마나 댕댕거렸으면 마을에서 ‘땡땡이’이라고 별명을 지었겠니?”
“뭐라니?”
옆에서 듣던 동선도 기분이 상해 순자를 가로 보았다.
“네 엄마는 맏며느리라는 게 어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우리 집에 보냈니? 우리 엄마를 말할 게 있니?”
그 말에 동선과 순애는 말문이 막혔다.
“얘들아, 싸우지 말라!”
병완은 애들을 말리고 나서 마른기침을 하며 상순이네 집 윗방 문을 떼고 들어갔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윗자리를 권해 모셨다.
병완은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재워 넣으면서 말했다.
“너도 전선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웠는데 쌀독이 어떤지 모르겠다.”
상순은 아버지를 흘금 쳐다보며 “우리 집 쌀독 근심은 하지도 마십시오.”라고 했다.
“보나마나 쌀독이 훌쭉하겠지.”
병완은 수리치에 부시를 쳐서 곰방대에 불을 붙여 뻑뻑 빨다가 담배연기를 후 길게 내뿜었다.
“아무래도 사회주의 우월성을 백성들이 마음 속으로 느끼게 하려면 황무지를 더 일궈야 될 거 같아.”
상순은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사회주의 제도가 우월한 건 사회주의 이론에 명확히 쓰여 있습니다. 이제 온 동삼 정치사상교양을 하면 자연히 눈이 번쩍 뜨이게 될 겁니다.”
그러나 병완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맨 이론학습만 해선 절대 안 돼. 백성들 쌀독도 꼴딱꼴딱 채워 줘야 한다. 백성들이란 배가 불러야 저절로 노래도 나오고 춤도 나오는 법이야. 배고프고서는 아무리 이론이나 정신자극으로 좋다고 해도 좋다고 할 리 만무해. 봐라, 지금 자기 집 자류지는 풀 한 대 없이 알뜰히 가꿔도 합작사 밭은 대충대충 기음을 매지 않니? 어떤 밭엔 풀이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다.”
상순은 그 말씀에 도리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이제 봄이 되면 사원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합시다.”
그쯤 동을 달고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헌데 마을 부근에는 개간하기 좋은 황무지가 없습니다.”
조손삼대는 마주 앉아 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면서 한참 궁리했다.
방 안에는 납덩이와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상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에 들어가서 황무지를 개간하면 어떻겠습니까?”
“거 두만강변에 있는 범바위골 말이냐?”
“예. 내 약 담배 장사를 하러 조선에 드나들 때 범바위골을 지날 때가 많았습니다. 범바위산은 어찌나 높은지 산 중턱에 구름이 둥둥 떠다닙니다. 산에는 멧돼지들과 호랑이, 승냥이 같은 야수들까지 욱실거려 농사를 짓기 힘들어 무인지경이 됐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와 묵밭이 아주 많습디다.”
“그래?”
병완과 기준은 거의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반문하며 상순의 기이한 생각에 못내 탄복했다.
“예, 범바위골로 들어가서 황무지를 일굽시다.”
그러나 병완과 기준은 인차 대답하지 않고 궁리만 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 후 병완이 물었다.
“네 말은 사원들을 데리고 범바위골로 이사 가자는 게야?”
“그래도 괜찮습니다. 헌데 노동력을 범바위골에 다 뽑아 가면 함흥 촌 농사는 어찌 하겠습니까?”
병완은 곰방대를 빨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네 생각은 좋긴 좋다. 황무지를 많이 일궈 사원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 주면 모두들 사회주의가 좋다고 할 게야. 허나 진수해향 지역을 벗어나서 상급에서 알면 동의하겠는지 모르겠다.”
상순은 대수롭잖게 여겼다.
“괜찮습니다. 어떤 때엔 먼저 일을 하고 후에 회보해도 됩니다. 우리가 숱한 쌀농사를 지어 사원들의 쌀독을 꼴딱꼴딱 채워주면 우에서도 잘했다고 할 겁니다.”
“먼저 일을 해재끼고 후에 회보한다?”
병완이 망설일 때 기준이 나섰다.
“쌀독을 빡빡 긁으면서 배를 촐촐 굶을 게 있습니까? 범바위골 황무지를 개간하고 보깁소.”
병완은 “이제 봄이 되면 범바위골로 들어가자. 이 다음 우에서 뭐라고 하면 내가 책임질게.” 하고 말하며 우쭐 일어났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힘차게 말했다.
“아니, 할아버지,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병완은 한숨을 쉬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덧 여우도 눈물을 흘리는 매서운 추위로 만물이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은 지나가고 만물이 약동하는 새 봄이 왔다.
상순은 흥수와 성수 등 젊은 농사군들을 데리고 며칠 동안 비술나무랑 베다가 불에 달궈 후린 후 쇠보습을 박아 넣어 가대기를 만들었다.
흥수는 상순이랑 돌아온 한 달 후에야 함흥촌으로 돌아왔다. 상순은 궁금해 그간 어데 갔댔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흥수는 부대를 떨어져 헤매다가 길을 잃어 헤매다나니 늦었다고 얼버무렸다.
       상순은 흥수가 가능하게 남조선 땅에서 남조선 유격대원 영수의 총에 맞아죽은 동생 창수를 묻어주러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좀 섬찍한 생각도 들긴 했다.
      (흥수가 동생 원쑤를 갚으려고 총으로 영수를 쏜 적도 있다. 그럼 영수를 보복살해하자고 찾아갔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상순은 흥수가 남조선 땅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왔는지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상순은 어디까지나 수하 전우 흥수를 좋은 쪽으로 많이 생각하려고 무등 애를 썼다. 나중에 그는 흥수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기쁘게 여기며 더 캐여묻지 않기로 했다.
      (만약 흥수가 영수한테 보복하러 찾아갔댔다면 꼭 남로당(남조선 로동당) 유격대에서 조선인민군을 통해 적발이 들어올게 아닌가. 전우를 더 의심하지 말자.)
      한 보름 후 상순은 흥수를 포함해 끌끌한 젊은 농사꾼들을 데리고 소 수레에 농기구랑 강냉이와 감자 종자랑 싣고 호호탕탕하게 150여리나 떨어진 두만강변 범바위골로 "진군"했다.
병완은 마을 사람들 속에서 상순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산에 가면 불하구 야수들을 조심해라. 안전이 제일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안심시켰다.
"빗발치는 포탄과 총알 속에서도 죽지 않았는데 그까짓 야수들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평안히 보내십시오.”
지춘실은 흥수 쪽으로 다가와 귀속말로 주의를 줬다.
“저 나그네를 너무 믿지 마오.'
뒤이어 그녀는 상순을 흘겨보며 볼 멘 소리를 했다.
 "상순이, 당신 정말 큰 일 치겠다. 내내 남의 나그네를 전쟁터 아니면 무인지경 산골로 끌고 다녀? 여인네도 나그네 없인 살기 힘들다고. 흥!”
상순은 못 들은 척 하면서 배가 남산만한 명옥을 따라 나온 딸 넷을 한 아름에 안고 뽀뽀를 해 주었다.
병완과 기준, 창준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상순이랑 흥수랑 몬 소수레가 조개덕을 넘어 굽인 돌이에까지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으며 바래였다.
상순이 이끈 수레 대오는 이튿날 저녁 무렵에야 범바위산 기슭에 이르렀다. 그들은 한 마을에 들려서 대충 대국 가마를 걸어놓고 밥을 지어 먹고 하루 밤 묵었다.
이튿날 아침, 범바위산을 올려다보니 굽이굽이 올리막 길은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까마아득했다.
오뉴월의 소낙비는 소잔등을 다툰다고 금방까지도 맑던 하늘이 갑자기 먹장구름이 덮쳐와 시뻘건 번개가 번쩍이더니 달걀만큼 한 우박이 억수로 쏟아져 내렸다.
모두들 수레 밑에 우르르 쓸어 들어가 우박과 비를 피했다. 상순이네 검둥이와 흥수네 누렁이도 주인들과 함께 수레 밑에 들어와 꼬리를 사타구니에 차고 들어앉았다. 금숙은 검둥이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며 쌍까풀 청포도 눈으로 수레 틈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뒤이어 소낙비가 산기슭을 뒤덮으며 억수로 퍼부었다. 그 바람에 숱한 이불이 소낙비를 폭 맞아 몽땅 젖어버렸다.
한참 기승을 부리며 쏟아지던 소낙비가 멎고 먹구름이 점차 범바위산을 벗기더니 서쪽으로 밀려갔다. 뒤이어 안개가 덮쳐와 범바위산을 꼭 감쌌다. 안개는 산기슭의 굽이굽이 굽은 길을 껴안고 몸부림치며 마구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순은 코 기러기처럼 제일 앞의 수레를 몰고 굽인돌이 길에 접어들면서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소낙비가 멎었을 때 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가기요. 이 굽인 돌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평평한 황무지가 있소. 모두 힘을 내 올라 가기요!”
“예!”
그들은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 굽이굽이 아흔아홉 굽인 돌이를 에돌면서 범바위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모두들 구름 위에 우뚝 솟은 평평한 범바위산 산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유서 깊은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산마루가 구름 위에 바라보이고 범바위산 중턱에 하얀 양떼처럼 구름송이들이 흐르고 있었다.
상순은 개암나무와 쑥대가 키를 넘는 황무지를 바라보면서 시원한 산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아, 정말 범바위산은 농사꾼들의 희망으로 차 넘치는 땅, 그들이 땀 동이를 몰 부어 힘껏 개척할 할 처녀지였다.
(어쨌든 여기서 풍작을 거둬 마을 사람들이 사회주의 우월성을 피부로 느끼게 해야 한다.)
상순은 굳은 결의를 다지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범바위산 꼭대기 평평한 황야에 큼직한 돌멩이를 들어다 놓고 가마를 걸었다.
드디어 구름 속에서 밝은 해가 나오더니 따뜻한 햇볕을 빗물에 젖은 범바위산 황무지를 골고루 비추었다. 금숙이랑 몇몇 처녀애들이 수레에서 젖은 이불을 나무에 걸어 말리었다. 처녀애들은 웃고 떠들면서 산골짜기에 내려가 샘물을 찾아내 쌀을 일어 얹고 삭정이를 주어다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상순은 한창 밥을 짓는 금숙이랑 옥자랑 마을의 처녀애들한테 가서 신신당부했다.
“산불을 주의해라. 산불이 나면 큰 일이 난다. 알았지?”
“양, 근심하지 맙소.”
겨우 열대여섯 살 먹은 금숙은 몇 살 이상 언니들을 따라 범바위산으로 왔던 것이다. 상순은 금숙이 불쌍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 공부하러 가지 못하고 소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밥벌이를 하려고 범바위산에까지 따라 왔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야외에서 가마를 걸고 삭정이를 주어다가 불을 지펴 점심을 대충 끓여 먹었다.
오후부터 나무를 베다가 기둥을 대충 세우고 웃갓부터 씌워 집인지 막인지 세웠다.
상순은 주위 환경을 익숙히 하려고 사냥총을 메고 검둥이를 데리고 평평한 범바위산 꼭대기를 두루 돌아보았다. 범바위산의 꼭대기는 유별나게 울울창창한 수림 속에 평평한 평지이다가도 불시에 깊은 협곡이 패여 있어 꽤나 무시무시했다.
(저게 뭔가?)
상순은 한참 돌아다니다가 협곡과 협곡 사이 평지에 디귿 “ㄷ”자 형으로 앉은 허름한 초가집 세 채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집 이영이 다 날아나고 마당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마른 쑥대가 한 키나 자라 있었다. 집의 문짝이 다 떨어진 것을 보아 빈지 오랜 집인 것 같았다.
“됐다! 이 헌 집을 손질해 들면 되겠다.”
상순이 초가집에서 나왔을 때 웬 늙은이가 지게에 광주리를 지고 마당에 들어섰다.
둘은 주춤 멈춰서 상대방을 바라보다가 얼굴 근육을 느슨히 풀었다.
늙은이는 사냥총을 든 상순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어데서 왔소?”
상순은 “함흥 촌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다가갔다.
“함흥 촌?”
“예. 여기서 한 150리 떨어진 진수해 함흥 촌에서 왔습니다.”
늙은이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 먼 곳에서 여긴 어째 왔소?” 하고 물었다.
“예, 저, 쌀 고생이나 하지 말자고 감자농사나 좀 해갈가고 왔습니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상순의 대답에 늙은이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에이고, 어떻게 고생하겠소? 우리도 여기서 살다가 달아났소.”
“예? 건 왜서요?”
늙은이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우린 일제 때 나라를 잃고 두만강을 건너서 여기 인적 없는 범바위골에 들어와 화전 농사를 지었지. 그런데 이 산골엔 범과 승냥이 욱실거리는데다가 가을이면 멧돼지들 성화에 감자농사를 하지 못하오. 허나 일제 놈들의 가혹한 철발굽 밑에서 노예로 살기보다 나아서 여기서 그럭저럭 연명하면서 광복을 맞았소. 공산당 덕분에 우린 야수들과 멧돼지들을 피해 이 무서운 산골을 떠났소. 그런데 자네들 여기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늙은이는 상순을 데리고 다니면서 골짜기에 있는 샘물터와 자기들이 일궜던 묵밭을 일일이 알려 주었다.
상순은 늙은이와 갈라지면서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늙은이는 상순을 보고 “꼭 산불과 야수를 주의하오.”라고 신신당부하고는 약재를 캐면서 산비탈 쪽으로 내려갔다.
상순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 헌 초가집 세 채를 손질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이라고 드니까 마음이 놓였다.
                                         11. 올감자대풍작
       울울창창한 밀림에도 여름 땡볕이 쟁글쟁글 내리쪼였다. 상순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범바위산의 나무를 찍고 뿌리를 뽑아내고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감자밭에 연보라 빛 감자꽃이 소담하게 피어 웃음 짓고 있었다.
호미로 파 보면 포기마다 주먹만큼 한 올 감자알이 서너 개씩 달려 있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멧돼지야!”
“저 놈 멧돼지들이 감자를 다 파먹는다!”
한 무리 멧돼지들이 저쪽 감자밭머리에 덮쳐들어 올감자를 먹고 있었다.
“저 놈 멧돼지들이! 어제 저녁에도 달려 든 걸 사냥총을 쏴서 쫓아버렸는데 또 왔다!”
상순은 흥수와 병수와 함께 밭머리에 뛰어가 세워두었던 사냥총을 들었다.
상순은 전쟁터에서처럼 흥수와 병수를 보고 말했다.
“멧돼지를 잡기요!”
“좋소!”
그들 셋은 멧돼지들을 포위해갔다. 상순은 허리를 굽히고 감자밭에서 슬금슬금 멧돼지들 쪽으로 뛰어갔다. 멧돼지들은 감자를 파먹다가 상순을 발견하고 대가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땅! 땅!
그러나 늦었다. 좌우에서 포위해 들어가던 흥수와 병수가 총을 쏘며 멧돼지들을 한 곬으로 몰아쳤다.
그때 제일 큰 어미멧돼지가 판가리 싸움을 할 상으로 상순에게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땅!
총소리와 함께 멧돼지 대가리에서 먼지가 풀썩 했다. 그러나 멧돼지는 쇠바늘 같은 뾰족한 어금니를 빼물고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상순은 미처 두 번째 탄환을 재울 새도 없이 총자루로 멧돼지 대가리를 내리 팼다. 멧돼지는 상순을 깔고 넘어가 주둥이로 상순의 목을 물려고 들었다. 허나 상순은 총 박죽을 멧돼지 아가리에 밀어 넣었다. 멧돼지가 총자루를 까득까득 깨물었다. 그 새 상순은 오른 손으로 장단지 각반에서 비수를 뽑아 멧돼지 턱주가리 밑의 요해처를 푹푹 박아 넣고 도려냈다. 어미멧돼지는 꽥 비명을 지르며 피를 울컥 토하더니 버둑거리다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상순은 150킬로그램은 실히 될 어미멧돼지를 겨우 밀어내고 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멧돼지 발톱에 허빈 피 묻은 커다란 상처자국이 나 있었다.
그새 흥수와 병수는 사냥총으로 다른 멧돼지들을 쏘았다. 100킬로그램은 실히 될 멧돼지 두 마리가 그들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질겁한 멧돼지들은 무리를 지어 수림 속으로 우르르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도 호미와 괭이를 들고 이쪽으로 달려 왔다.
상순은 피 묻은 비수를 멧돼지 목에서 뽑아 팔소매에 쓱쓱 닦아 장 단지 각반에 되 꽂아 넣었다.
“아버지, 얼굴에 피!”
금숙은 자기 치맛자락을 쭉 찢어 들고 아버지한테 다가가 얼굴의 상처를 닦아주었다.
“괜찮아.”
상순은 금숙의 손에서 천 쪼박을 받아 얼굴을 대충 닦고 나서 육중한 어미멧돼지 배때기를 발로 툭툭 찼다.
성근이랑 태연이랑 멧돼지들을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다.
“허허허. 덕분에 멧돼지 고기를 잘 먹게 됐구먼!”
“이런 걸 두고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된다는 게요.”
“허허허. 감자를 도둑질 맞힌 대신 멧돼지 고기를 먹어도 좋지.”
“허허허”
“호호호”
마을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상순이네가 잡은 멧돼지를 초가집에 끌어다 물을 끓여 튀를 했다.
일군들은 점심밥상에 둘러 앉아 푹 끓인 멧돼지고기를 한 사발씩 놓고 맛나게 먹었다.
흥수는 큼직한 멧돼지고기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면서 떠들어댔다.
“야, 거 멧돼지고기는 썩썩한 게 술 안주로 들어났는데. 그런데 이 산골에는 술이 없단 말이야.”
상순은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묵직하게 말했다.
“올감자하구 멧돼지고기를 마을에 실어다 나눠 주기요. 돌아오는 길엔 술도 사오구.”
모두들 멧돼지고기에 삶은 감자로 점심을 배불리 먹고 수레 다섯 대에 중돼지 두 마리에 밭에서 파온 올 감자를 실었다.
상순은 병수와 흥수를 보고 “자네들은 산에 남아서 초막과 감자밭을 지키오. 멧돼지 오는 족족 잡소.”라고 했다.
병수는 사냥총을 들어 보이면서 “김 서기, 근심하지 마오. 멧돼지고 호랑이고 오겠으면 오라지. 다 쏴 잡겠소.”라고 장담했다.
흥수는 상을 찡그리면서 “나도 집을 떠난 지 오래서 가서 딸 해월이랑 보고 싶소.”라고 했다.
“어째 여편네 궁둥이가 생각나는가?”
병수가 놀려대는 바람에 흥수는 “에끼, 이 사람이, 자네와 함께 산에 남을 게.”라고 하며 초가집 안으로 훌 들어가 버렸다.
상순은 학수와 성근, 태연을 데리고 올감자를 꽉 박아 실은 소 수레를 몰고 함흥 촌을 바라고 떠났다.
그들은 중도에서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 쉬지도 않고 곤하면 수레 채에 걸터앉아 꺼떡꺼떡 골면서 온밤 길을 다그쳐 이튿날 점심에야 함흥 촌에 도착했다.
상순은 촌공소 마당에 소 수레들을 세워 놓고 할아버지를 찾아 촌공소에 들어갔다. 때마침 할아버지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촌공소에 계셨다.
“할아버지, 그간 무사히 계셨습니까?”
“오, 그래. 산에서 모두들 무사했냐?”
“예.”
병완은 상순이네가 실어온 올감자와 멧돼지고기를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야, 보릿고개를 겨우 넘고 이젠 어떻게 기나긴 여름을 지내겠는가고 근심했는데 이젠 마을 사람들이 살았다. 살았어.”
마을 사람들은 주머니와 함지를 들고 와서 올감자에 멧돼지고기까지 가져가면서 기뻐 야단쳤다.
병완과 상순은 웃음꽃이 활짝 핀 마을 사람들의 얼굴들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명옥은 배가 남산만 해가지고 두 살 밖에 안 되는 금자를 업고 와서 함지에 감자알과 돼지고기를 이고 가면서 만면춘풍이었다.
진달래는 경주와 경수를 데리고 와서 함지에 감자와 멧돼지고기를 담았다. 경주와 경수는 제법 어머니를 도와 자기 집에 차례진 감자를 함지에 주어 담았다. 상순은 진달래가 안간힘을 쓰며 이려는 함지를 훌 빼앗아 안고 진달래네 집으로 성큼성큼 갔다.
그때 옆에서 춘실이 입이 함박만 해 집으로 가는 명옥을 보고 입귀를 비죽거리며
“좋겠소. 저 잘난 나그네 와서.”라고 하더니 상순의 잔등을 흘겨보았다.
“당원이란 게 자긴 여편네 보러 오면서 남의 나그네는 오지 못하게 하다니. 쯧쯧쯧, 남을 보살피지 않는게 당원이오?”
상순은 슬그머니 밸이 꼬였지만 못 들은 척 했다.
상순이 데리고 온 검둥이를 보자 춘실의 황둥개는 꼬리를 치며 좋다고 달려와 “으응”하며 매달려댔다.
“지개! 더러운 개새끼! 치사하게 우리 집 암캐만 보면 매달려!”
춘실은 욕하며 검둥이를 발로 걷어 차 놓았다.
검둥이는 풀쩍 뛰어 피하며 춘실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검둥아! 그러지 마!”
상순은 어느 결에 진달래네 집에 감자를 가져다주고 돌아와 검둥이를 말렸다.
춘실은 상순을 핼끔 쳐다보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함지를 인 채 콧방귀를 “흥!” 하고 뀌더니 몸을 홱 돌려 떠나갔다.
마을 사원들은 풍작을 거뒀다고 기뻐 야단이었다. 아낙네들이 시루에 쩌 온 하얀 김이 몰몰 나는 조 찹쌀을 탈곡장 마당에 있는 커다란 둥그런 매돌 위에 쏟아놓았다. 그러자 나그네들이 손바닥에 침을 뱉고 떡메를 쥐여 샛노란 찰떡을 쿵쿵 쳤다. 남정네들의 힘찬 떡메 질에 신바람이 난 아낙네들이 대야에 찬물을 떠 가지고 와서 떡돌 위에서 익어가는 찰떡을 이리저리 번지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점심에 탈곡장 마당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병완이 막걸리 잔을 들고 축배를 올렸다.
“자, 올해 공산당의 영명한 정책의 혜택을 입어 올해 올감자 대풍작을 거뒀습니다. 범바위골에 간 부업대에서 이렇게 많은 올감자에 멧돼지 고기까지 실어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올감자 대풍작을 경축해 마음껏 마시고 춤을 춥시다!”
“예- 감사합구마!”
“자, 기쁘게 한잔 마시깁소!”
“옛!”
모두들 문문하게 삶은 썩썩한 멧돼지 고기를 안주로 막걸리를 쭉쭉 마셨다.
서너 잔 들어가자 학수가 막걸리 사발을 들고 상순의 앞에 다가와 내밀었다.
“김 서기,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게 됐는데 막걸리 한 사발 쭉 내고 한곡 부르오.”
상순은 막걸리를 받아 쭉 굽을 내고 항상 부르던 “호미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섬 때가 되어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마을 사람들은 일어나 원을 치고 돌아가면서 상순의 노랫소리에 맞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춘실이랑 새금이랑 명옥이랑 웃새집 신옥이랑 련옥이랑 아낙네들이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도라지 춤을 너울너울 췄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자 모두들 얼근해서 희희낙락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채칼에 감자를 싹싹 갈아 감자떡을 빚어 시루에 얹어 끓였다. 이윽고 집집마다에서 감자떡 냄새와 멧돼지고기 국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해지는 동네 골목마다 애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냄냄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냄냄 맛있다
돼지고기 맛있다
 
다른 애들은 또 다른 노래를 불러대며 뛰놀았다.

아가리 딱딱 벌려라
영채 김치 쑤셔넣게

다른 애들은 화답이나 하듯이 맞받아쳤다.

주둥이 짝짝 벌려라
감자떡을 쑤셔넣게
 
        마을 골목에서 애들이 떡을 먹으면서 깡충깡충 뛰놀며 부르는 노랫소리는 자장가처럼 하늘로 날아올라가 메아리쳤다. 둥근 해님은 애들이 부르는 그 자장가를 들으며 서산으로 넘어가 밤하늘의 꿈나라로 서서히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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