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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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인선생의 글에 답함
2010년 01월 26일 12시 13분  조회:3555  추천:22  작성자: 김송죽
 

신민부와 <<신민보>>사건


     

                                                      김송죽


    화요파는 1925년에 조선공산당을 파괴한 가장 악독한 종파집단의 하나였다. 그자들은 주의주장만 부르짖으면 그것이 “혁명”인줄로 알고 당파싸움을 일삼으면서 분렬을 조장했다. 하기에 국제공산당으로부터 해산을 선고받은것이다. 하건만 흩어지지 않고 비법적인 조직활동을 계속한 이 잔얼은 결국 일제의 반간책(反間策)에 보기좋게 넘어가 원쑤의 속을 후련히 풀어준 것이다. 나는 먼저번의 문장에서 화요파는 미런한 짓을 했다고 견책했다. 오늘 나는 한마디 더 보태야겠다, 화요파는 민족의 력사앞에 두고두고 지탄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내가 감히 그리고 이같이 떳떳이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남의 칼을 빌어 피를 본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일제가 반간책(反間策)을 쓰느라 요언을 날조하여 김좌진을 추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집단적인 획책을 꾸미여 끝끝내 그의 목숨을 해치고야말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일제가 해내기어려웠던 일을 그자들이 대신해서 해준 그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밖에 남지 않는다. 그자들의 집단적인 미런한 행동은 독립혁명에 막대한 해를 끼쳤다는것은 더 말할것 없다.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하다가 희생한건 의용(義勇)이라 하겠지만 죽을때까지 잘못을 반성할줄을 몰랐다면 그것은 악질(惡質)인 것이다. 나는 전에 화요파에 들었던 모든이들을 놓고 말하는게 아니다. 생을 마칠때까지 자기를 반성할줄은 모르고 오히려 자기를 “용감한 투사”로 분장했던 잔얼을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다.    

   “청산리전투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가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쏘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상점을 털어먹었다.”고 하는데

   이는 순전한 날조고 악의를 품은 지독한 모독인 것이다. 사실은 전연 그렇지 않다. 한데 화요파였던 자가 꾸며낸 그것이 지어는 소설로까지 묘사되여 진짜인듯이 세상에 퍼졌으니 지천(地天)이 낯을 붉힐 한심한 일이 아닌가!

   뭐, 지금 북만의 70여세되는 로인들은 이 일을 잘안다고? 되지도 않는 소리다. 어떻게 잘알수있는가?  1920년대초면 태여나지도 않았을거요 태여났다해도 철부지 어린애였을텐데 어떻게 잘알수가 있는가말이다. 기껏해야 독립군을 원쑤로만 여긴 화요파가 항간에 퍼뜨러진 풍우란설을 들은것이였겠지. 안그런가?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에서 굶어 자진하였다”는데 그야말로 백주발검(白晝拔劍)할 한심한 날조인 것이다.

   량환준은 독립군의 력사를 제대로 알기나하고 그런소리를 줴쳤는가?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백포종사 서일은 쏘련에 건너갓던 독립군이 “자유시사변”(흑하사변이라도 함)을 겪은지 8달만에 뒤를 이어서 토비들 손에 “당벽진참안”까지 겪고보니 너무도 참혹하고 눈앞이 캄캄해나는지라 전도에 절망하여 자결한것이지 제 독립군의 행실에 기막혀 자결한건 아니였다.

   량환준은 대체 심보가 어떻게 되여먹었기에 명명백백한 토비들의 행실을 김좌진과 독립군에 뒤집어씨운건가?

    

   자유시사변이란 1921년 6월 27일 갈란다라시월린의 국제군이 싸할린의용대(朴일리아부대, 니항군이라도 함)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로하여금 자유시(불라고베쉔스크)의 정세를 감시케하는 동시에 제 29연대가 로령지역(露領地域)의 자유시로 이동한 朴일리아부대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건을 말하는것이다. 손잡고 독립혁명을 하려고 쏘련에 건너간 독립군은 흑룡주 공산계렬의 오하묵과 싸할린의용대 박일리아지간의 군권쟁탈에 말려들어 참중한 희생자만 낸것이다. 이날의 무장충돌에서 싸할린의용대와 독립군부대는 전사자가 272명, 흑룡강을 건너오려고 뛰여들었다가 익사한자가 31명, 행방불명이 250명, 포로된 자 917명이였다.

   한데 <<자유시사변>>이 있은지 두달만인 8월 26일에 또 <<당벽진사변>>이 발생해서 김좌진은 전혀 예산못했던 혹심한 타격을 받았다.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여 독립군들이 로씨야로 건너갈 때 그와 가장 의기상투했던 동지자 총재였던 백포종사(白浦宗師) 서일(徐一)은 둔병제로써 전체독립군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려는 어려운 중임을 떠메고 당벽진에 남았다. (당벽진은 밀산남쪽 흥개호가의 중로변경에 있는 황량한 곳) 그런데 주력이 떠난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그날에 한무리의 토비들떼가 마치도 피에 굶주린 악마같이 급작스레 덮쳐들어 그곳에서 농사짖고있던 독립군을 전부 살해하여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이다. 너무도 참혹한 훼멸이였다!

   이틑날. 서일은 시교일로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자기가 데리고있던 청년병사들이 전부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는지라 비통하기 그지없은 절망끝에 이에 책임을 지고 대종사 라철의 <<귀신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는 허지에 정기빛이 어두우며 백암이 먹고 도야지 뛰여가니 겨레의 피고기가 즐벅하도다. 날 저믈고 길궁한데 인간가는 길이 어디메뇨!>>를 크게 읊조리고는 그만 자결하고만것이다.  

   

   그것은 “청보산패” 마적단이 한 짓이였다. 횡포하기 그지없는 그 토비무리는 그후 50여명이 따로 작당하여 북만의 동강(同江)근처에서 또 무고한 허저족 40명을 살해하는 <<고태자참>>까지 빚어냈다가 그해 즉 1923년 겨울에 허저족이 주도가 되어 조직된 “복수대”의 숙청에 들어 끝내 소멸되고 만 것이다.

   토비를 류자(liuzi)라 하는데 그 토비무리서 세 번째 인물 즉 규률을 장악하는 수이샹(水香)이 진사해(陣四海)란 자였는데 <<자유시사변>>때 니항군청년과 함께 흑룡강에 뛰여들어 표류하다가 허저인의 손에 간신히 구원된 북로군전사 정민호(鄭敏鎬)가 그자는 바로 <<당변진참안>>을 주도한 자였다는 것을 알고는 6년간의 끈질긴 추격끝네 끝끝내 통쾌하게 잡아치워 복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나는 동강의 허저인 나쟈로인한테서 이 사실을 알고는 사료들을 모아 연구하여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1998년도에 <<연변문학>>에 절반까지 련재되였다가 지난해 민족출판사에 의하여 온정한 책으로 묶이여 세상에 나온것이다. 장편소설인데 책명은  <<관동의 밤>>이다.  리해를 돕기위해 소설가 최국철이 소개의 글을 올린다.

    

   “김송죽의 두번째 장편소설《관동의 밤>이 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688 쪽에 87만자에  달하는 이 장편소설은  력사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소설은 ‘9.18’사변후 항일의용군의 항일과 토비들의 항일을 다루고있는데 민족청년 정민호를 주인공으로 전기적인 색채가 농후하고 스토리가 굴곡적이다. 특히 허저(인)족의 풍속과 토비들의 생활은 허구가 아닌 사실 그대로 묘사하여 타민족 문화를 접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특정력사의 갈피속에 묻혀있는 우리 민족의 반일, 항일 력사를 다른 측면에서 알수 있다.“ /연변일보


  나는 30년 넘어 전문 북만토비를 연구하면서 그에 대한 론문도 쓴 사람이다. 한데 량환준은 사실을 외곡하면서 한심한 날조로 독립군을 모독하니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화요파의 “거물”이였고 로당원이였다는 사람이 그래 그러는 것이 직책이였단말인가? 아무리 남을 잡아먹어도 분수있지. 공산당원의 본분이 이러는거야 아니지? 

  

   항일무장부대로서의 북로군정서는 건립되여서부터 백성들에게서 걷어들이는 군자금에 이뢰한것만은 사실이다. 지어는 조선에 까지 가서 군자금모집을 하다가 모집자가 희생된 이들도 있는것이다. 한데 내가 여기서 똑똑히 알려주고싶은건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선것은 그때 만주에 거주했던 30만에 이르는 대종교도들이였다는 것이다. 그 책임은 각지의 시교당이 책임지고있었다. 제일 숨이 가빳을 때는 “청산리전쟁”직전 무기살 돈을 장만하는 한편 로령을 넘나들며 서둘렀을 때였다. 그후에는 차츰 적어지다가 아예 거둬치우고 자급자족했다.

   량환준은 이런 사실을 알기나했는가? 북로군정서가 세운 신민부가 “군자금”을 거두면서 백성을 못살게 굴었다고 하는데 대체 어느 백성들을 그토록 못살게굴었단말인가? 하다면  독립군은 어떻게 북만에 발을 붙이고 생존했겠는가? 아래에 한국의 력사학가 박영석(朴永錫)선생의 글 인용문과 나의 글을 간단히 실으니 읽어보면 아마 판단이 생기리라 본다.


   “북로군정서는 在滿韓人社會의 바탕위에서 조직된 가장 큰 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였다. 더구나 이 북로군정서는 檀君을 중심으로 한 救國宗敎團體일 뿐만아니라 大倧敎 救國抗日民族獨立運動團體로서 철저하게 정신무장이 된 단체인 동시에 民族軍隊의 性格을 띤 强力한 獨立軍部隊였다.”

〔大倧敎의民族意識과 獨立運動〕『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1988, pp. 155~183. 

   

  1.

  “둔병전”을 하자면 토지가 있어야하는데 돈이 없지 땅을 어떻게 구한단말인가?“

   김좌진이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북만에서는 조선동포들은 물론 중국백성들까지 모르는 이라고는 별반없었다. 그같이 청산리투쟁에서 혁혁한 위훈을 떨치였던 이 독립군장령은 아직 그 위망이 퍼렇게 살아있었다. 김좌진은 자신의 이같이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지방당국과 교섭하여 되도록 관계를 좋게하려고 했다. 외국인으로서 이국땅에 발을 붙이자고 보니 그렇게 해야지 달리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산시(山市)에 아직 미개간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좌진은 친히 나서서 그곳을 고령자와 같이 독립군의 주요한 둔병지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앞의 2헥타르되는 밭에 장태콩을 심어먹기 위해 성이 마씨(馬氏)인 지주한테서 사고는 임자없는 습지판에 물도랑을 빼고 98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황지촌에 있는 얼마가량의 땅도 먼저 몇해간 부쳐먹다가 땅세를 적당히 물기로 지방관부와 협상했고 녕안의 땅 얼마가량도 그런 방법으로 차지했다. 신민부는 다방면의 노력끝에 사전자(沙田子)에도 수한전합해 5헥타르있게됐고 고령자, 석두하자, 백모자, 해림 등 여러곳들에 논과 천수답들이 얼마간씩 다 있게되였다.

   한편 신민부는 무장인원을 내놓고는 이젠 나이 많고 잔약하거나 남정북전에 고생많이했고 몹시 피로해진 900여명 독립군들을 <<재향군인>>이라 이름을  짓고 안착해서 농사짓게 했다.

   공농제(公農制)의 실시를 위해 이런 <<재향군인>>들은 붙임땅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원도 많고 적게 나뉘여졌는데 그네들은 자기가 간 곳에서 가정까지 이루었다.

   그렇지만 조직성과 규률성만은 의연했는바 유사시에 손에 무장만 잡고 나서면 여전히 당당한 전투원이였다. 신민부는 또한 군구제(軍區制),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면서 자기관할내의 18세이상 40세이하의 청년과 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계획있게 시켜서 장차 맞이할 항전을 준비하고 상비군을 보충하려 하였다.

   한편 신민부는 정예군인양성을 목적해서 목릉현경내에 있는 소수분(지금의 綏陽), 팔리평(八里坪)골안에다 사관학교를 세웠다. .....둔덕에 묘하게도 흡사 비행장같은 널다란 공지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공지의 서북쪽끝머리에 자그마한 삼각산이 하나 솟아있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고려옛성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즉 사관학교는 고려옛성의 동쪽에 위치한 셈이다. 하여 이름을 성동사관학교라 지어부르게 된것이다.

   성동사관학교는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 백종렬, 오상세 등이 취임하여 련 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해 그후 500여명의 사관생을 길러냈다.

   신민부는 발족하면서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각계각층이 모여서 다만 항일과 자주와 독립이란 대전제하에 굳게 뭉쳐 일제타도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하였고 또한 지성인이 갈구하던 시대적경향에 가장 적합하게 <<시대사조에 순응 병진한다>>는 선언을 한바가 있었기에 력사적인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내외인사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

   그리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

   일제는 신민부의 일거일동에 주목했고 간부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노리였던거다. 지어 주요간부의 목에 거액의 현상까지 내걸고 밀정들을 기관내부로 잠입, 암해음모를 획책하고있었기 때문에 령수급인물들은 주위의 경계를 특별히 심하게  해야했었다.

   김좌진은 고정지점이 거의 없다싶이 지냈다.      

      

  2.

   그런데 인제는 당지의 중국군경이 독립운동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해 1925년 11월하순 어느날 밤, 신민부의 보안대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되고있는 류운초(柳雲樵)의 집에서 보안대 대장 문동봉을 비롯한 림강(林崗), 리강훈(李康勳) 등 젊은 대원 8명이 회의를 하다가 녕안군경 수십명의 돌연습격을 받아 모두 체포되여 녕안감옥에 갇히우고말았다. 다행히 권총 몇자루만 압수당하고 기밀문건들은 류운초부인이 감쪽같이 뒷문으로 빼돌리였다.

   할빈일본령사관에서는 체포된 독립투사들을 매수하려고 온갖책동을 다했다. 그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볼장은 다 보는지라 신민부측에서는 자기의 사람을 빼내오기 위해서 박남파(朴南坡)와 조성환을 내놓아 주구배의 무고만 믿고 남의 나라 독립투사를 함부로 가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중국 중앙정부에 항의를 제기하게 했다. 했지만 허사였다.

   어리석은 중국관료는 언론계의 항의와 비난을 받고서야 6개월만에 강금했던 이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신갑수(申甲洙)와 박순보(朴順甫) 두 청년은 병에 걸려 억울하게 옥사하고말았다.

   이무렵 김좌진의 가정은 녕안에 있었는데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있는 처 오씨의 궁색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근본 집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다보니 오씨는 헝겊신을 지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형편이였다. 너무도 곱게 자라난 량반의 딸이 그렇게 살아가노라니 오죽 지겨웠으랴. 게다가 딸 옥남(玉南)이마저 불치의 병에 걸려 앓고있으니 더욱 말이 아니였다. 그것이 보기가 너무 안되여 그래도 권화산(權華山)로인이 가끔 들릴때마다 얼마간씩 돈을 주어 돕군 했다.

   어느날 감옥을 나온 24살의 리강훈이 중국사람 4명을 고용하여 담가로 옥남이를 메여다 목단강역 부근 동포부락에 있는 김좌진한테로 가져와 로씨야인의 병원에서 병을 보이게끔하려 했다. 그의 행실이 기특해서 모두 칭찬했고 오석 김혁은 그의 호를 청뢰(靑雷)라 지어주기까지 했다. 옥남이는 이틑날 죽고말았다.

   ..........

   <<남아의 한번 실수에 몸 붙일 곳이 없게 되었으나 나는 다른 날 때가 오기를 기다림이라.>>는 간단한 글귀를 고국땅에 남겨놓고 훌쩍 떠나왔던 김좌진이였다. 그가 늙은이로 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온지 어언 10년철, 언제면 고향땅을 다시 밟겠는지 앞길이 묘연했다. 부인 오씨는 전해에 딸 옥남이가 죽자 조선 고향에 돌아간 후론 다시 만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필경은 고생이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좌진은 홀아비로 살아가게 됐다.

   김좌진에게는 만주로 들어오기전에 계동의 김계월을 만나 그한테서 본 서자 하나와 아우인 시정 김동진(時旌 金東鎭)의 아들을 양자로 삼은 문한(文漢)이가 지금 조선 안성읍내(安城邑內)의 외조모집에 있을 뿐 더는 없다. 본처 오숙근이 만주로 돌아오지 않으니 집간도 없어서 70고령의 어머님을 지금 석두하자에 있는 동생에게 맡겨 모시고있다. 이런 형편에 <<8로>>들은 일곱번이나 편지를 해 오숙근더러 북만에 들어와 살림살이를 다시 하라고 권유했건만 헛수고였다. 본인이 한사코 들어오지 않으려는데야 무슨 방법이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모면키 어려운 액운과 요사가 빈번한데 대를 이어줄 자식 하나라도 더 보게 해야 할게 아니냐 하는것이 장로들의 생각이였다. 그래서 수차의 의논 끝에 여기서 맞춤한 색시감을 구해 백야를 재혼시키자는 것으로 의견이 둥글어졌는데 때마침 림정의 만주대표였던 김대지(金大池)도 해림에 왔다가 이 일을 알게 되어 후일은 자기가 책임지마고 하면서 이를 동의했던 것이다.

   

   3.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는 멀지 않은 대안이 우리의 심령속에 있나니 성품을 수양하고 닦으라. 인간의 암흑을 깨뜨려버리고 리상의 경지에 이를것이니 단군의 후손들은 의지와 행동을 한데 이으라는 내용의 사설을 실어서 널리 배포했다.

   한편 일제는 만주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일제는 전해(1925년)의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쯔야(三矢)를 시켜 봉청성 경찰청장 우진(于珍)을 매수해 이른바 <<미쯔야협정>>이라는것을 맺게했다. 그것은 중국관헌이 조선반일운동자를 체포하여 일본경찰관에 인도할것과 조선인반일단체의 해산, 무기몰수, 호상간의 정보교환 등을 규정한 비밀협정이였다.

   이무렵 동삼성은 물론 중국전지역에 걸쳐 독립운동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가고있었다.

   이런판에 1926년 4월에 들어와서 항일단체인 신민부는 경을 치르었다. 일본의 할빈령사관에서 김일성(金一星)이와 강경애(姜敬愛)가 써서 <<신민보>>에 낸 글이 반일적이라고 트집잡고 흑륭진(黑隆鎭)에 있던 신민부의 기관보를 돌연습격하여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黙)과 경사국장 리광진(李光鎭)을 체포해갔다. 그리하여 전해에 창간호를 낸 이래 동포계몽과 구국교양을 활발히 해오던 이 신문은 창간 한돐만에 활동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경애는 소설을 쓰는 녀 초학자로 알려지고있었다. 그리고 김일성(본명은 김봉환)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사람이였다. 그들은 동거했다.

   

   이때는 공산주의계렬의 내부도 자못 복잡했다.

   1919년 9월 5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철훈을 의장으로 하는 전로한인공산당(全俄韓人共産黨)(후에는 <<전로고려공산당>>으로 개칭)이 건립되였다. 이 당은 차츰 요하, 녕고탑, 돈화 등지에 당조직을 내오고 당원을 적극발전시키였다. 그러면서 연해주에서 <<선봉>>, <<동아공산신문>>, <<신세계>>, <<적기(赤旗)>>, <<로동세계>> 등의 신문, 잡지와 소책자들을 출판하여 만주 각지에 광범히 전파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는 1925년 4월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얻어 만주에다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만주총국(朝鮮共産靑年會滿洲總局)을 설립하고 그아래에다 북만, 동만, 남만 3개 구역국(局)을 두어 농민들을 조직하고 청년들을 령도하며 민족주의단체들을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울 임무를 주었다. 그해 조선공산당북만구역국(朝鮮共産黨北滿區域局)의 령도밑에 녕안일대에는 대진청년회(大震靑年會)와 중서청년련맹(中西靑年聯盟)이 결성되여 자체로 <<로력청년(勞力靑年)>>간행물까지 꾸리였다.

   다른 한편 1921년 1월에 조직되였던 서울청년회계통의 한 종파집단으로서 주로 화요파와 대립되였던 서울파가 다시 신 구 량파로 갈라진 후 서울신파의 주동분자들은 이해(1926년)에 만주로 밀려들어와 그 전해에 일본 도꾜에서 조직된 초기 맑스ㅡ레닌주의사상단체였던 일월회파 및 만주총국과 결탁하여 4월에 레닌주의자련맹(列寧主義者聯盟)이라는 그루빠를 만들고 자칭 엠엘파라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엠엘파를 반대하기 위하여 서울구파와 상해파가 협력하여 서상파를 만들어냈다.

   한즉 만주의 공산진영 역시 여러 종파집단으로 하여 사분오렬되여있었다.

   대동단결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5월에 중동로연선의 여러 청년단체들은 대표를 아성현(阿城縣)에 보내여 그곳에서 대표련석회의를 열어 북만조선인청년총련맹(北滿朝鮮人靑年總聯盟)을 설립하고 <<농군(農軍)>>이란 간행물을 꾸리여 각지의 청년들에게 무산계급리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했다.

   이들도 자기의 조직을 적극 발전시키는 한편 청년들을 조직하여 야학교를 꾸리고 운동회를 열고 문예공연을 하는 등 형식으로 군중들에게 반제, 반봉건의 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청년과 군중들을 동원하여 혁명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즈음에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여 끌려갔던 김봉환이 얼마지나지 않아 무사히 풀려나온것이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류치장에 갇혔던 독립군이 그가 할빈일본령사관의 고등경찰 마쯔시마와 조용히 마주앉아 담화하는것을 보고 소식을 밖에 내보내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자식이 왜 무사히 나왔어?>>

   <<그자식이 자수하고 풀려나온거나 아니여?>>

   모두들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김좌진역시 그에 대해 의문을 품고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김혁, 정신 등을 비롯한 여러 수뇌들과 함께 신민부의 사업을 계속 한걸음도 처지지 않겠끔 하려했다

                               (장편전기 <<설한>> 193~196페지. 흑룡강인민출판사)


                                                   2010. 1. 24.


 


                리광인선생의 글에 답함


                                                       김송죽


   리광인선생, 선의적인 글을 보낸다니 우선 감사합니다.

   한데 반론은 해야겠습니다. 나는 나이 70을 먹도록 남과 싸움한번 하지 않다가 몇해전에 내가 50여년간 살던 고장을 떠나면서 딱 한번 남을 때려봤습니다. 눈에 피지고 얼굴반쪽이 시퍼렇게 되게. 8.15해방직후, 나는 토비숙청을 나간 아버지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되자 그의 소속부대에서 자란건데 안옥균이라는 군인분이 나어린 나에게 근 3년간이나 가혹할지경 대적훈련과 사살훈련을 시키면서 참을 "忍"자를 배워주었던 겁니다. 죽을 고비에 들기전에는 절대 손을 쓰지 말거라, 재간믿고 손을 쓰다간 불행을 자초하리라고 단단히 일렀던겁니다. 그래 "문화혁명"때에 나는 매맞고 짓몰리면서도 맹세대로 용케 참은건데 장×선생만은 가냥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 일기책과 장편소설원고를 가져가서는 돌려주지 않고 없애버렸거니와 내가 그 고장을 떠날 때 까지도 한마디의 사과의 말도 없이 되려 뻔뻔스레 자기는 내한테 미안한 일을 한적이 없다면서 싼좡(算帳)을 하겠거든 모택동하고 하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래 내 손맛을 보였던겁니다.

   

   이만하면 나도 광인선생처럼 "삼사후행(三思後行)"을 아는 셈이 되겠죠? 한데 이번일에는 "忍"을 집어치우기로했습니다. 늘그막에 웃긴다고 짓몰릴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리선생은 내가 "김좌진의 딸이라는 분한테 들은 얘기고, 전 광복회 이광훈회장의 견해니 그럴수밖에 없겠지요"하는데 그건 틀리는 소립니다. 광인선생은 내가 그리도 제 주견없이 "남의 견해"에 노는사람같아보입니까? 나는 김강석누님의 "告訴"를 듣고는 김좌진전을 쓸 생각을 굳힌거고 그한테서 자료들을 많이 얻었다고했습니다. 리을규가 쓴 <<시야 김종진전>>도 그가 내놓은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옛 <<동아일보>> 어장도. 이광훈의 글은 <<설한>>이 출판된지 4년지나 서일의 손자가 제 할아버지의 전기도 써달라면서 빌려준겁니다. 그런데 강경애에 대해서 내가 쓴것이 아광훈선생이 쓴것과 맞아떨어지라 나는 내가 틀리게 쓴게 아니였음을 긍정하게 된거고 리을규도, 이광훈도 다가 그 시대사람, 그당시 목격자였의니 그 누구보다도 신빙성이 있다고 확고히 단언하게 된겁니다. 이렇게 하는게 그래 잘못입니까? 바꿔놓고 광인선생이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할가요?

   광인선생은 "어느한 력사인물, 어느한 력사사건에 대하여 흥취를 가지면 그 인물, 그 사건과 관련되는 이런저런 자료들을 다 들여다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맞는말이지요. 리선생은 그래 내가 그만한 상식도 모르고 력사인물전기를 쓴 줄로 압니까?

   "깊은 연구를 하지 않으며 여기저기서 베껴내고 자기의 연구성과처럼 자처하다가는 골탕을 먹게"된다는데 리선생의, 그건 대체 무슨말입니까? 나를 글도적놈으로  도적놈을 몰아붙이자는건가? 리선생은 력사인물전기가 어떻게 씌여지는지를 알기나하고 그런소립니까? 그렇게 몰아붙여도 좋지만 우리의 이 론전이나 끝난다음에 손쓰기 바랍니다. 방향을 돌려버리려고는 말고.

   이건 론문도 소설도 아닙니다. 주인공과 유관되는 자료들, 여기저기에서 모이는 자료들이 없이 제 주관대로 쓰면 안됩니다. 인물전기를 창작으로 여기고 달려든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고만다는걸 리선생은 알기나하고그럽니까?  전기를 쓰는데 그것이 어쩌면 "연구성과처럼 자처"하는게 됩니까? 내가 김좌진전기를 씀에 틀린것이 있다면 꼬집어내서 어디 골탕을 먹여보시구려! 나도 선의적인 충고를 한마디 하겠습니다. 리선생은 지금이라도 문학공부를 좀 더 해야겠습니다.      

   리선생의 눈에는 내가 앞뒤를 모르고하는 좌충우돌하는 인간같아보이는 모양인데 어디 내가 "당하게"끔 맘대로 들이쳐보구려. 나는 광인선생의 능력을 볼텝니다. 제발 方向轉移는 말고.

   <<설한>> 281페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치안대의 일부는 그날 밤으로 해림으로 달려가 그곳 역전근처에 있는 지난해 이미 해산을 선고받고서도 종파활동을 중지하지 않고있는 조공만주총국산하의 한 잔존기관(화요파)을 돌연습격하여 김봉환 일명 김일성(金一星)외 한명을 잡음과 동시에 문건을 압수했다.

   그 압수해낸 문건에서 예측한바와 같이 이번의 흉계는 그네들이 꾸미였고 권총을 직접 쏜 흉수 박상실은 김봉환의 사주를 받아서 한짓이라는것이 밝혀졌다."     광인선생의 생각에는 그네들이라는게 누구를 가리킨것 같습니까?

   

   리선생은 내가 댓글에 "진실"이라는 아이디글이 나타나니 뛰고있다고 나무리는데 그래 아닌 "진실"도 받아주고 공개적인 멸시와 무함도 죽치고 받아주라는 말입니까? 그렇게는 못하겠는걸. 남이 나를 돌로 치면 나도 돌로 받아쳐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실례되는게 아니겠지?

   리광인선생의 글과 장춘식선생의 글을 나오는건 다 읽어봤습니다.

   나는 나를 설득시키고 굴복시킬만한 글이 나오기를 바람니다.

   리선생은 "진실님의 댓글을 보면 박식하고 력사지식이 대단히 풍부하고 김좌진장군암살전후를 잘알고있는 분으로" 알려진다고 했지? 참 알다가도 모를일입니다. 아무렴 리선생의 수평이 그정도란 말입니까? 나는 그 댓글을 보고 그가 어떤 분인지 력사지식이 형편없고 김좌진의 암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사람으로 박에 보이지 않다군요.

   공도진이 리복림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박상실이 바로 공도진이라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라했습니다. 공도진이 박상실이라면 믿을수 있는 근거를 내놓으시오. 내놓라했습니다. 억지로 꾸미지는 말고.

   

   강경애의 력사를 다시쓰고 연구도 다시해야합니다. <<신민보>>사건에 김일성(金一星)과 강영애(姜敬愛)가 련루되니 강경애는 19살아니면 20살 때 북만으로 들어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1925년이 아니면 1926년이 된다는 말이지요. 딱 두만강을 건너 용정에 들리여야만이 증거로 되는겁니까? 압록강을 건너 들어왔을수도 있지요. 김좌진도 로인처럼 가장해갖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왔던겁니다. 강경애가 그때는 소설을 쓰노라고 한 초학자였습니다. 그러하니 그의 초기의 글 한두편을 갖고 고증한다는건 믿기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문인으로 되기에 이르는 기간의 작품을 보면 확실히 반일정서가 맥을 이루는데 그것은 그가 일찍부터 홍색의 짐보사상과 접촉했다는 증거로 됩니다. 조공만주총국의 젊은 화요파성원이였던 김일성(김봉환)과 동거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사상에 물든 것으로 여겨지게된다는 말입니다. 안그렇습니까? 리선생은요? 당시의 환경이 그를 무산계급켠에 서는 작가가로 성장하게끔 만들었다는 겁니다. 후에 시집을 가서 남편이 된 장하일리 그녀를 성장시킨것이 아니라 장하일이 되려 제 처한테서 사상을 배우지 않았나하는 생각입니다. 내 분석이 이러합니다. <<신민보사건>>을 일으킨걸 보시오. 그녀나 김보환(金一星)이나 보시오, 얼마나 대담하게 반일선전을 했습니까.

   강경애의 도만(度滿)이 1931년이였다는 설은 전혀 밑을수 없는겁니다. 보편적으로 가장 오랜전부터 믿어왔던 김헌순의 주장마저도 이제는 부정하게 되는데 뚜렸한 근거도 없이 몇편글로 추리해낸걸 어떻게 믿을수 있단말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반론을 쓴거니 더 말치않겠습니다.

   우리는 되려 리을규선생에게 강경애를 다시금 연구하게 해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그의 령전에라도. 

   

   리선생은 나더러 "다시다시 력사공부를 진진하게 하면서 잘 검토해보라"는데 력사공부를 하면 이이상 어떻게 더 진진하게 하랍니까. 나더러 량환준선생의 회고담이나 증언을 믿어야한다는 강박은 아니겠지? "그때는 내가 공도진에게서 잘못들엇는지 모르겠다"는 따위의 얼빤한 소리나하고 생판 꾸며낸 거짓말들을 어떻게 믿으란말입니까? 리선생님이나 곱다랗게 믿고 우겨보시오. 나는 그러지 않을텝니다. 내가 조선공산당이였던 사람을 싸잡아 다 모욕한다고는 여기지 마십시오. 나는 앞글에서 다 말했습니다. 중국공산당에 들어 항일을 하다가 희생한 렬사나 지사들은 저도 존중합니다. 저는 렬사의 자식이기에 혁명에 피흘렸다면 각별한 정감이 드는겁니다. 그러니 저를 無智覺한 사람으로는 보지 마시오. 그러나 화요파였다면 나는 그 사람을 달리봅니다. 편견이 아닙니다. 그들의 지난 행실ㅡ력사가 나를 이토록 만든겁니다. 바탕이 검은걸 어떻게 희게보랍니까? 어떻게 동정하랍니까? 이러면 나를 너무지독하게 무정한 인간으로 보겠지만 나는 원쑤일제가 반간책을 쓴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원쑤의 속을 후런히 풀어준, 그래서 미런한 짓을 했다는 화요파는 민족과 력사앞에는 죄인이라고 보는겁니다. 아무리생각해도 잘 볼수는 없습니다. 조선공산당을 부인한다하여 중국조선족의 피어린 력사, 피어린 항일투쟁사를 무시한다고는 보지 마시오. 그런건 아닙니다.

   

   나는 지금도 의연히 김좌진암살설에 들어가서는 그당시 목격자들의 공술이 신빙성이 더있다고 여기길래 이광훈을 거듭언급한거지 까닭없이 올리추는건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래 량환준의 증명이 맞다고 우기는것은 대체 뭡니까? 그건 올리추는게 아닙니까?

   잘못된 력사는 고쳐야 합니다. 거짓말로 백성을 그냥 속이고 후대를 속여서는 안됩니다. 례를 들것 같으면 지난때 중앙쏘베트구역 5차의 반"토벌"력사를 보면 제 1,2,3차 반"토벌"은 모택동의 지휘로 승리를 취득하였다말하고 제 5차 반"토벌"은 공산국제로부터 온 리덕이 지휘하여 엄중한 실패를 했다면서 제4차 반"토벌"은 누가 지휘했다는 말이 없이 그저 모택동의 정확한 군사사상의 영향으로 승리를 취득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당시를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4차 반"토벌"은 1932년말부터 1933년 기간이였는데 그때 모택동은 이미 쏘베트구역중앙령도회의에서 틀리게 홍1방면군지휘의 직무를 철소하였기에 홍군을 떠나 지방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다시는 모택동이 지휘했다고 말하지 말아야한다고 합니다.

   제4차 반"토벌"에 대해서 소극장군이 명확하게 말한것입니다.

   "제4차 반‘토벌’은 주은래, 주덕이 지휘하여 많은 승리를 취득한 것이다. 이는 진실한 력사인 것이다. 여실히 말하여 력사의 진면모를 회복시켜야한다."

   옳은 말이지요. 력사는 진짜말을 해야지요. 연구계에서는 지금 중공의 력사도 다시써야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가는데 그래 그러면 반당이 되는겁니까?

  

   나는 조선공산당이 원쑤로 보고 제일증오한 민족주의자 김좌진장군죽음은 억울하다면서 집단적인 살해를 회책한 화요파를 성토했고 그들을 죄인으로 규탄하고 나섯습니다. 그래 그러니 내가 반당이 되는겁니까? 반동으로 되는겁니까? 반동으로 몰던 반당으로 몰던 몰겠거던 어디 몰아보지요. 그래도 나는 할말은 해야겠습니다. 이쯤한건 각오했으니까.

   1993년7월초 흑룡강 해림에서 중앙의 참석하에 열었던 <<中國朝鮮族歷史學會金佐鎭將軍硏討會>>는 4일간의 변론 끝에 화요파가 “김좌진을 살해한것은 잘못한 일이다. 김좌진은 독립투사고 항일영웅”이라고 결론내렸고 그를 평판(評判)했습니다. 지금와서 어떤 사람은 그 평판을 뒤집자고드는데 어리석은 일입니다. 

  리광인선생, 충고가 선의적이라니 감사합니다. 력사공부를 부지런히 해야지요.       

            

                                                  2010.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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