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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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산, 이 못난 사람아!
2011년 01월 24일 10시 38분  조회:3356  추천:19  작성자: 김송죽
 

◉ 류연산, 이 못난 사람아! 왜 나를 앞서 먼저가나?

   대학나와서 맨처음 임무로 맡아 해보는 노릇이 출판사에 들어간 나의 어지러운 첫장편 수개고를 다시 베끼고 정리하는 작업이였노라면서 <<강(정일)편집을 내놓고는 아마 제가 첫독자로 될겁니다.... 선생님의 소설을 베끼면서  많은걸 배웠습니다.... 나도 장차 글을 쓸텝니다. 두고보시오, 선생님처럼 소설가루 될텝니다.>> 속심을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내한테 도전적인 패기를 보인것이 어제같은데 벌써가다니? 과연 애석타, 그 열정 그 좋은 글재주를 더 부려보지 못함이! 우리 문단은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 故人의 명복을 빈다.



      북만일대 조선족삶과 투쟁 생생히

                  (김송죽소설 <<번개치는 아침>>)

                                                    류연산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향 중성촌에 사는 김송죽선생(59)은 퇴직교원이다.  자식 둘은 대학을 나와 하얼빈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가있다. 그래서 두 내외가 넓은 한족식 집을 지켰다. 그는 80년대초에 처녀작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발표하였는데 이어 90년대초에는 장편전기문학 <<설한>>을 내놓았다. 이미 문명(文名)을 얻은 그는 요즘 <<관동의 밤>>이라는 장편을 탈고했다.

   처녀작 <<번개치는 아침>>은 그의 부친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광복직후 조선족부대가 비적(匪賊)과 싸운 투쟁의 력사를 그렸다. 국민당군 별동대 성격의 비적은 광복직후 북만일대에서 살인과 략탈을 일삼았다. 공산당을 적으로 싸워야 했던 당시 국민당에게 북경에서 먼 북만은 사실상 통치지역밖이였는지 모른다. 그런탓에 국민당을 돕는답시고 나선 별동대속에는 만주국시절 헌병이나 경찰관도 끼여있었다는 것이다.


                  피땀어린 농토 등지고 유랑


   그리고 실제 국민당비호를 받았다.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상장 謝文東과 제1집단군 총사령 상장 李華堂, 국민당 동북 정진군(挺進軍) 총지휘 중장 張雨新이 별동대를 조종했다. 당시 그들의 횡포를 고발한 노래말에 <<사(사문동), 이(리화당), 장(장우신)은 불지르고 살인하나니>>라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다. 북만일대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공산당이 일찍 뿌리내린 리유도 이들때문이였다.

   이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불타버리고 주검이 들판을 덮었다. 더구나 조선족은 늘 사냥의 대상이 되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런일로 해서 조선족들은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다시금 유랑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이무렵 조선족 선각자(先覺者)들이 일어났다. 무장자위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얼마있다가 공산당 부대에 속속 편입되였다.

   그러한 무장대가운데 맨 먼저 공산당군부대에 편입한 조선독립대대는 1945년 11월 25일 연안에서 周德海와 손잡았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한 조선독립대대는 다음해 4월 28일 하얼빈에서 국민당과 싸웠다. 하얼빈이 국민당손에서 떨어져 나오자 당기관과 발전소, 송화강철교, 비행장경비를 담당했다가 국민당군 토벌에 나섰다. 1946년 9월 2일 하얼빈시 향방구 사리툰전투에서 제3지대소속 조선족 21명이 전사했다.

   김송죽선생의 부친이자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모델 金炳念은 광복직후 동북민주련군에 참가했다. 제1련대 조선족대대인 제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속되였다. 소대에서 3반장직책을 맡은 그는 1946년 늦가을 대대를 따라 흑룡강성 화남현 발전소로 이동했다. 그해 11월 16일 주변정찰을 나갔다가 국민당군병력과 교전이 붙었다. 그 전투에서 金炳念은 대대참모장 金海靜  등과 함께 전사했다. 그리고 얼마뒤인 11월 20일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사문동이 붙잡혔다. 사문동은 12월 23일 벌리에서 총살되였다.

   김송죽선생은 소년시절을 부대에서 보냈다. 부친 김병념이 전사한 이후에도 모친이 부대 재봉대(裁縫隊)에서 군복을 짓는 일을 하고있어서 그냥 영내에서 살았다. 그러다 부대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친과 함께 벌리현에 남았다. 할아버지 金錫吉이 아직 생존했던 때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애국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밑에서 비교적 엄하게 자랐다.

   

                 소년시절 軍 부대에서 생활


   할아버지 김석길은 1884년 평남 순안태생이였는데, 1912년부터 계몽운동에 참가했다. 그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연고로 지명수배를 받자 제자 9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집안과 휘남을 거쳐 왕청에 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신민부(新民府)에 들어갔다. 1928년에는 金佐鎭장군의 파견을 받고 의란현에서 이도강 등에 4개의 학교를 세웠다.

   김송죽선생이 스므살나던 해인 1958년에 할아버지 김석길은 흑룡강성 화남현에서 세상을 떴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민족의사들은 대접을 못받고 있다. 항일운동을 했으면서도 공산당이 이끈 투쟁대렬에 서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배제되였다. 오늘날 흑룡강성 항일렬사가운데 민족독립운동가는 한 사람도 없다. 물론 김석길 같은 분들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후손들은 오히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 더구나 문화혁명시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김송죽선생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리유로 반동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죄목은 반동민족주의자말고도 력사반혁명분자의 아들, 반혁명집단의 두목, 반당분자, 반사회주의분자 등 10가지에 이르렀다. 부친 김병념이 국민당군과 투쟁한 사실까지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김송죽선생 자신이 써놓았던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비적토벌을 내용으로 한것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갔으나, 김동철, 김해정이 조직한 조선족부대를 문제로 삼았다. 김동철과 김해정은 본래 항일련군 8군에서 일제와 싸웠다. 그러다 1939년 군장 사문동이 일제에 투항하자 숨어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조선부대를 창설했던것이다. 그 뒤  동북민주련군 제1련대 제2대대에 편입되였던 조선족부대가 1949년 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반동으로 몰았다. 문화혁명당시 중국에서는 북한을 수정주의로 보았던터라 조선족부대는 반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 틈틈이 습작


   그는 옹골진 4년을 투쟁받았다. 모진 매를 맞고 이른바 돌림투쟁을 숱하게 당했다. 그래도 푸른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자신의 이름(松竹)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감옥생활에도 벝히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소설 <<번개치는 아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965년 탈고하여 하얼빈 조선문화관에 원고를 보냈다가 되찾아온 상태에서 빼앗기우고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굳히였다.

   <<내 문학수업은 어떤 의무감에서 이루어졌지요. 청소년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숱해들어서 그걸 언제나 정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유언도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과 비적의 횡포를 력사로 기록하라는것이였지요. 할아버지한테 듣고, 어렴풋이나마 어려서 실제 보아왔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소설을 썼던겁니다. 1957년 벌리중학을 나와 농사일 틈틈이 그런 꿈을 키우면서 실제 습작을 해왔지요. 할아버지의 유언과 내 꿈은 실로 오래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김송죽선생의 <<번개치는 아침>>은 1983년에 출판되였다. 첫원고를 탈고해서 꼭 18년만에야 해빛을 본것이다. 그에게 물론 가족사를 문학으로 정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또 한편으로는 기억속에 차츰 멀어지고 있는 조선족의 삶과 투쟁을 복원한 대서사시(大敍事詩)의 의미를 부여할수 있다. 요즘 탈고한 장편소설 <<관동의 밤>>도 북만의 항일운동을 형상화한 것이다. 자그만치 87만자나 되는 작품을 출판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있다.


     (이 글은 1997년 2월 6일자 서울신문에 <<연변동포작가 류연산 현지프로 <송화강5천리> >>란 표제를 달고 실은것인데 東國大學校 行政學博士 許萬位 옹이 스크랩프하여 보내왔다. 그 연고로 생면이였던 우리는 인연이 닿아 친구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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