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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에 걸린 학자님들!
이광인이 내놓은 4편 글을 보고서
김송죽
이광인은 한국 이상경교수의 <<행적과 수필로 보는 녀류작가 강경애>>와 <<이광훈이 전혀 근거없는 말을 지어냈을가?>>하는 두편글을 내놓았다. 그 두편문장은 아마 5년전에 강경애문제를 놓고 시비가 벌어졌을 때 한국의『문화산책』에 이미 올렸던 글이라 생각된다.
이광인은 근일 절강 어디서 “2005년초와 올해년초 두차례에 걸쳐 벌어진 강경애 시시비비 전후과정 특강”까지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기에 나는 생각이 다시돌아 그 두편문장과 이광인자신이 써서 사이트에 올린 다른 두편글도 다시한번 읽어보게되였다.
문제는 우리가 년초에 벌리였던 쟁명은 통쾌한 결론을 보지 못해서 아마 뒷불이 달리는 모양다.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의례적인 당연한 현상으로 여겨지면서 차라리 잘되는 일로 받아진다.
석연치 못한 문제는 아무 때건 제대로 밝혀내야 개운할 것이다.
나는 내가 이럴때 다시나서서 맞서주어야 본분에 맞는 처사라 여겨지기에 아래와 같은 주견과 견해를 피력하니 반론이라여겨도 좋다.
(1) 첫점, 나는 이른바 녀류작가 강경애에 대해서 “전문 깊이 연구”를 하고있다는 학자님들의 그 어상비상하게 강직(强直)이 된 사유방식이 도무지 리해되지 않거니와 똑같은 연구방법으로 쌍둥이결론을 도출해 내는것도 리해되지 않는다. 보아하니 량국의 그 몇몇 학자님들은 그것을 공동성명처럼 “정설”로 굳혀버리자는 기미가 보이는데 정녕 그런다면 혐오스러운 일이다.
이광인이 “한국 강경애연구 권위인사”라고 믿고 높이 보는 이상경교수나 여기 중국에 거주하고있는 몇몇 권위연구가들을 놓고 보면 다가 한모양 한본새로 “강경애가 어느때 용정에다 첫발을 들여놓았느냐?”하는 그 하나의 문제에만 모를 박고 골몰하면서 몇해전에 벌써 문단과 사회가 들썽하게 의론이 되고 말썽이 되여왔던 문제ㅡ “녀류작가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 공범인가?” 하는 시비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자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량국의 학자님들은 다가 한본새로 그것이 아주 심오한 연구끝에 찾아낸 결론인것 처럼 이구동성으로 “강경애가 김좌진암살과는 무관하다”고 떳떳이 “설명”을 하고나선다. 한데 그것이 들어맞기나하면 몰라도 변변치 못해 용렬하니 웃기는 일이다.
한국의 이상경교수는 자신이 틀어잡고 연구한「간도풍경」, 「간도를 등지면서」, 「두만강례찬」등 세편글이 발표된 년도수와 날자를 연구하고는 “이상의 세자료를 볼 때 강경애가 간도가 처음간 것은 1931년 봄이다. 그러므로 김좌진장군암살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국에 있었을 수가 없고 이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묻노니 “간도가 처음간 것은 1931년 봄”이면 그래 “김좌진장군암살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국에 있었을 수가 없다”는 증거로 된단말인가? 과연 그렇단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이건 학자의 수평문제도 아닐텐데 왜 각도를 좀 돌려서 연구해보지는 못하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서로 약속한 고의적인 통일행동이야아니겠지만도 내가 보기에는 한국의 학자나 중국의 학자나 꼭같은 사유방식을 가졌기에 한가지 동일한 큰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학자님들은 다가 김좌진암살에 유관한 이 문제의 연구에서 응당 관건으로 틀어잡아야 할 사건발생 지점을 념두에 두지도 않고 그것을 너무나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량국의 몇몇 학자님들 다가 “건망증”에 걸린걸로 본다. 안그러면 내가 왜 이같이 듣기거북한 험한 소리를 하겠는가.
나는 학자님들이 아무리 머리악을 써가며 깊이 연구했어도 다들 헛수고를 한것이요, 따라서 일호반점의 가치도 없어서 절대 “정설”로는 만들수는 없는 오판(誤判)만 도출해냈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가? 접수안되면 어디 반박해보라.
당시 “신여성”, “동광”, “신동아”에 발표된 작품에 의하여 연구된 것 처럼 강경애가 용정에 첫발을 들여놓은게 1931년이 옳다고 하자. 나도 그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異意)가 없는데 하다면 강경애 그녀가 1929년 10월후의 겨울에는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강경애의 동거남이요 화요파청년인 김봉환은 1929년 겨울 어느날 할빈에 갔다가 <<신민보사건>>으로 걸리여 일본령사관경찰손에 잡히운것이다. 그러니 그 문제의 사건이 지난지 3년된다. 3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났어도 유관인이니 체포 될 수 있다. 생전에 한국광복회 회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사>>를 비롯한 여러권의 력사관련의 저서를 내놓은 이광훈옹은 이렇게 쓰고있다.
“어느날 할빈시로 갔다가 일본령사경찰(日本領事警察)에 체포되어 심문(審問)을 받고있던 중 할빈 일본총사령관경찰서(日本總司令官警察署)의 독립운동자 (獨立運動者) 취체담당경부(取締擔當警部)로 한국말에도 능숙한 송도(松島)라는 자가 놈들 상부(上部)의 지시를 받고 해림(海林)에 있는 김(金)의 애인 강경애(姜慶愛)를 꾀어 할빈 구치장(拘置場)에 수금(囚禁)돼있는 김을 면회(面會)케하여 결국 김봉환(金鳳煥), 강경애(姜慶愛), 송도(松島) 3자(者)가 밀회(密會)를 나눈 뒤 즉석에서 김봉환이 석방되었다.”
(<<靑史에 밫난 순국선열들>> 510페지.
그러한즉 이 사실을 부인하자고 들면 그즈음에 강경애가 북만에 있지 않고 다른 어디에 있었다는 찾아 근거를 내놔야 할게 아닌가? 그래야만이 이광훈옹의 주장은 맥을 잃고 부인이 될 것이다. 한데로 한국 이상경교수는 그 겨울에 강경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의 암살사건에 관련될 가능성은 전혀없는 것이다”고 결론내리니 그것은 무리일 수 밖에없다.
(2) 강경애가 어느때 두만강을 건너고 어느때 룡정촌에 발을 들여놓았는가가 과연 그리도 중요하단말인가?
항일명장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아침에 조공만주총국 화요파손에 암살된거고 한국독립운동사상 특대비극이 된 그 사건이 발생된 지점은 지금의 연변(간도)의 룡정촌이 아니고 흑룡강(북만)의 해림(海林)근처 산시(山市)마을인 것이다. 한데 연구가 학자님들은 어찌하여 “강경애의 북만행”에 대해서는 전혀 가상도 해보지 않고 그녀의 행적을 다만 졻디졻은 “간도”땅의 “용정촌”에서만 찾으려 하면서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할가? 그래 건망증에 걸려도 단단히들 걸린게아니고 뭔가?. 보아하니 이상경교수건 여기 중국의 연구가 학자건 다가 사건발생지점인 북만(北滿)도 역시 간도(間島)라고 착각한것만 같다.
간도와 북만은 지명이 엄청다른것과 같이 풍토가 완전히 다른 두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용정촌과 산시마을 이 두 지점은 사이거리만봐도 천리도 넘는 것이다. 아무렴 그래 사건현장이 어딘지도 모르고 강경애를 연구한단말인가?
아래와 같이 세가지 물음을 제기하고싶다.
1ㅡ조선에서는 두만강을 건너야만 만주로 들어올수 있었던가?
2ㅡ용정촌을 거쳐야만이 만주로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건가?
3ㅡ강경애가 다른 어디로는 국경넘어 만주땅에 밟을 수는 없었을가?
조선에는 1933년도에야 드디여 완공이 된 길회선(吉會線: 중국 길림ㅡ조선 회녕)말고도 썩 전인 1906년 4월에 벌써 개통이 된 경의선이 있는것이다. 그 철길은 1911년 10월에 이르러 압록강철교가 완성됨으로 하여 중국의 안동과 련계된거고, 그렇게 됨으로 하여 경의선은 경부선과 더불어 조선에서 유럽ㅡ아세아횡단의 국제간선으로 된 것인데 그 철길이 바로 예나다름없이 지금도 의연히 강경애의 고향 장연이 있는 황해도를 꿰지르는 것이다.
일제의 손에 국권이 찬탈되자 수많은 난민과 항일투사들이 혹은 기차로 혹은 배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왔다. 한데 강경애연구가들은 이런 사실을 왜 망각하고있는가? 왜서 강경애역시 그 어느땐가 남부녀대로 제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인파에 끼여서 만주로 들어올 수도 있지 않았을가고는 생각하지는 않는가? 과연 코막고 답답한 일이다.
강경애는 근대문인이다. 그녀같이 근대문인으로 이미 조선력사에 문명(文名)을 남긴 적잖은 거룩한 이들이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하여 두만강만이 아니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온 것이다. 간단히 례를 들면 조선의 의병장으로는 첫손을 꼽을 수 있는 유학자 류인석(柳麟錫)도, 그후는 독립투자 신채호(申采浩), 그리고 그의 업적과 함께 근세(近世) 한국사학계에서 쌍벽을 이루었다해도 과언이 아닌 박은식(朴恩植)선생도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들어왔다. 문인은 아니라지만 해외독립전선의 최고령도자적 위치에서 신망이 가장 두터운 상징적존재였던 김동삼(金東三)도, 독립기지를 물색하고자 백지상(白紙商)으로 변장하고 험악한 만주산야를 고행(苦行)한 끝에 끝끝내 서간도독립기지를 건립한 리회영, 리동녕, 장유신, 이관식 등도 다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왔다. 어디 그들뿐인가, 수천수만의 독립지사들이 압록강을 건넜다. 내가 어느 글에선가 밝힌바있지만 김좌진역시 압록강을 건넌건데 그는 변방대의 수사를 피하느라 로인으로 가장하고 만주로 들어온 것이다.
봉오동, 청산리 량대첩으로 말미암아 영명(榮名)을 남긴 홍범도나 김좌진과 마찬가지로 만주산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여 일제에게 막대한 타격을 준 다른 한 명장 오동진(吳東振)선생은 독립군을 지휘하여 혈전 7년간에 수백회에 걸쳐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게릴라전을 한 것이다....... 하거니 이같은 민족수난의 강, 투쟁의 강, 력사의 강을 연구가 학자님들은 왜서 망각하고있단말이다?
저 남쪽 두만강가의 도문으로부터 머나먼 북만 송화강변의 도시 가목사까지 가닿는 도가선철로(圖佳線鐵路)는 1933년 6월 16일에 놓기시작하여 이듬해 12월에 록도(鹿道)까지 3년만인 1936년 12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완공됐으니 강경애가 거기를 달리는 렬차는 탈 사이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벌써 기차편으로 압록강만 건너면 그 누구던 봉천(심양), 장춘을 거쳐 중동철도로 할빈, 해림, 수분하는 물론 할빈에서 송화강의 륜선을 타고서도 제 가고푼데면 어디로든 거의나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강경애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그때 그 시절의 이러한 교통상황도 마땅히 연구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하건만 그러지를 않으니 “너무나 소홀했다”는 말이 나가게되는 것이다.
내가 렬거하다싶이 이런 상황에서 강경애는 일찍이 고향 황해도 장연을 떠나 독립군과 항일투사들이 운집하고있었던 북만으로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지 않았을가, 그래서 급진적인 공산계렬의 김봉환과 같은 청년을 만나서 그와 동거를 하면서까지 차츰 그도 급진적인 사상에 물젖게 된게 아닐가, 그러면서 초학자였던 강경애는 끓어오르는 격정과 열망으로 그의 문장집필을 도우면서 제 습작도 했을 수 있고 그로부터 작가로 의 성장에 사상기초를 닦은게 아닐가?..... 학자님들은 다른 추측들은 그리 곧잘하면서도 왜 이런 추측은 못해본단말인가? 하니까 솔직히 말해 나는 지어 강경애에 대한 연구가들의 그 연구태도마저도 리해되지 않으면서 그들의 그 출발점에 커다란 무름부호를 달게되는 것이다. 강경애를 연구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이였던가?.....
(3), 리광인이 “신민보사건시절 강경애는 일개 문학소녀”라는데 그건 과연 웃기는 소리다. 강경애가 그때 나이 20살이였다. 그렇게 보는게 맞을가? 어쩌면 소녀란 말인가? 아마 소학생하고 물어봐도 이건 제꺽 부정 될 것이다. 그당시 20살나이의 강경애는 언녕 시집갈 시절이였다. 안그런가? 그런 소녀표준이야 이광인선생본신에게만 사용 될 것이다.
한국의 이상경교수는 강경애가 쓴 “다림불을 보면 강경애는 아직 그렇게 일본령사관의 취제를 받을만한 사상적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면서 “그런점에서도 김봉환과 동거했다든지 공산주의자였다는 말은 근거도 없다”고 찍어말했다는데, 내가 여기서 이상경교수께 묻고싶은건 두가지.
1), “김봉환과 동거”하는데 표준이 있었단말가? 있었다면 무엇이였는가?
2), “취제를 받을만한 사상적글”은 쓰지 않았어도 문제의 공산당사람과 동거한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일제가 그녀를 취제하자고 하지 않을가? 그리고 실은 그녀가 취체받은것이 아니라 일제경찰에 유괴되여 동거남 김봉환을 변절케 함에 리용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가?
신민부의 독립군은 강경애가 1927년에 조공만주총국화요파(고려공산청년회라도 함)김봉환과 함께 중동선의 해림에 와 거기 역전근처에 자리잡고 같이 동거한다는 것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1926년 4월 그 두사람은 <<신민보사건>>에 어디론가에 사라졌다가 다시나타난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그때 강경애가 한두수의 짤막한 시나 “감상적인 유치한 글”을 쓰는 정도였고 소설은 내놓지는 못하였지만 그녀가 소설가가 돼보려고 애쓴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상황이였기에 객관에서 “소설을 쓴다는 초학자”라로 본것이 그래 뭐가 잘못되였단말인가? 얼마지나지 않아서는 강경애가 과연 소설가로 문명(文名)을 날리게되였다. “민족 반세기사ㅡ 일제하 36년 독립운동실록 17”을 내놓은 한국작가 이이녕이 강경애가 “<<혜성>>이라는 잡지에 <어머니와 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여류소설가”라고 찍어 말한 것은 사건당시를 놓고 말한것이 아니요 그같이 문학에 성공한 강경애를 념두에 두고 말했음이 분명한데 뭣이 잘못됐단말인가? 김좌진의 딸 김강석녀사도 내앞에서 1958년까지 생존하여 자주 상종한 여러 독립군인들이 알려줘서 잘 알게 된 것이라면서 여러번이나 “소설을 쓴다는 에미나”라면서 강경애를 욕했고 “화요파새끼(김봉환)와 해림에서 들어붙어 살면서 짜고서 ”그 못된 짓을“ 했다”고 욕하면서 저주했다. 그도 문학에 성공한 강경애를 념두에 두고 한 말인데 뭐가 틀린단말인가? 강경애연구에서 응당 관건으로 보아야 할 “지점”문제같은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도외시하면서 세심한 표현인것 같지만 어페(語弊)나 잡고 옴니암니 캐고드는건 도량이 넓어야 할 학자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4), 나는 1927년 10월에 김좌진의 재종제인 시야 김종진과 함께 북만에 들어와 독립혁명활동을 하면서 김좌진을 설득하여 마침내 1929년말에 이르러서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합쳐 급변하는 형세에 따라 기우려져가는 신민부의 기초에서 한족총련합회를 세우게끔 한 재중국무정부주의자련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의 골간인 리을규가 쓴 <<是也 金宗鎭傳>>과 <<北滿新民府史略>>에 의거하여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의 전기 <<설한>>을 쓴것이다.
그 두 책은 다 <<신민보사건>>을 다루면서 강경애는 조공만주총국 화요파의 한 고위급간부 김봉환(일명: 金一星)과 동거했다면서 그의 변절에도 김좌진장군 암살에도 유관하는 동범(同犯)으로 지적되였다. 한국작가 이이녕이 인터뷰를 한 그 김좌진장군을 측근에서 보좌했다는 이광훈, 정환일, 임기송 등도 “하나같이” 녀류작가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암살사건과 이어놓았는데 그건 왜서일가?
김좌진의 딸 김강석은 나와 “어머니가 해림에서 산시로 오는 산길에서 자기를 낳고는 정체모를 자객의 손에 피살되였다면서 피덩이나 다름없는 자기는 산동에서 북만에 이사온 한족(漢族) 리씨부부손에서 두 살먹을때 까지 자라고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직후부터는 독립군 김기철의 손에서 자라면서 그가 알려주고 다른 독립군다가 그렇게 알려주어 김봉환과 강경애의 성과 이름을 알게된 것이라면서 지금껏 내내 머리속에 기억하고 저주해왔노라했다. 없는 일이면 독립군들이 그한테 가슴에 못으로 밖히게 그토록 알려줬겠는가?
이상경교수는 “신민보사건”추적을 보니 강경애는 물론 김봉환의 이름조차도 없다면서 강경애는 김좌진암살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판단내리는데 그것이 맞는가? 이광훈도 이을규도 정일환도 임기송도 김강석도 그리고 신민부원생손자공동회의 사람도.... 그래 그네들 다가 전혀 없는 일을 신화같이 지어냈단말인가? 왜 하필이면 김봉환과 강경애를 한 데다 이어붙이였겠는가? 그들 모두가 강경애, 김봉환의 이름은 어떻게 알고?...... 해답은 간단하다. 그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도 공동으로 맺힌 원한이 없었다면 강경애니 김봉환이니 하는 인간명을 기억하고 뇌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상경교수의 손에 신민보와 신민보사건에 관한 자료가 있기는 하겠지만 과연 그들 모두의 증언을 “아니다!”고 부인할만큼 구전할가? 그당시 신문들에 오보가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는것도 알아야 할것이다.
내 경우 론전이 시작되면서부터 김좌진을 총으로 집적쏜 사람이 누구였는가를 놓고 옴니암니 캐다가 결국은 조공만주총국 화요파 김봉환의 사주를 받고 김좌진을 암살한 박상실이 그때 <<동아일보>>에는 “故金佐鎭氏下手人 朴相實에死刑判決 阿城縣護路軍에게逮捕되어 執行次로奉天에押送”이라했지만 “박상실이 바로 공도진이며, 공도진이 리복림이다. 그는 사형되지 않고 살아 중공에 전향하여 항일하다가 썩후에 전사”한 것으로 밝혀져 <<동아일보>>보도는 완전히 오보(誤報)였다는 것으로 결판나지 않았는가. 한즉 김좌진장군암살건에 유관한 문제에 들어가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서 받은 증언, 인터뷰를 한 기록이나 회고록, “北滿新民府史略”에 적힌 글을 더 믿어주는것이 더 바람직고 본다.
연구를 한답시고 구실을 대고 복잡하게 만들필요없다.
이광인선생은 한번다시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우리의 녀류작가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암살사건과 이어놓으려니 력사는 외곡”되는건가 아니면 “‘우리의 녀류작가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과는 무관하다’ 절대‘친일로 만들수없다’”고 주장하니 력사는 외곡되는건가?
(5), 이광인은 “김봉환이 정말 변절한 인물일까?”고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광인이 “당년 김좌진장군의 측근이였던 이을규나 이강훈은 하나같이 김봉환을 변절로 보거나 김봉환과 강경애, 마쓰시마를 서로 이어놓고있다”면서 “그시절 김좌진측근들이 이렇게 보았으니 후에 각기 회고록들에서 이렇게 나타나고있는것이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가? 아니다! 한둘만의 인원이 아니였을 그 신민부원생존자공동회 사람들 다가 김봉환과 강경애, 마쓰시마를 서로 이어놓은것이다. 왜 그랬을가? 대답은 간단하다. 사실이 바로 그러했기때문이다!
이광인은 “이를 증실할만한 일제측의 자료나 공산당측의 문헌자료”들이 보이지 않는것을 리유로 “이을규나 이강훈의 주장은 유력한 탄력을 얻지 못한다”면서 김봉환의 변절을 부정하고나서는데 그럼 김좌진암살을 놓고 “총을 쏜 사람은 공도진(리복림)이였다”든가 “조공만주총국이 엄밀히 짜고 한 일”이였다는 조공만주총국의 기록이나 문헌자료는 있었는던가? 어디 대답하고 내놓으라.
“강경애가 김봉환이와 함께 할빈일본령사관에서 나오는것을 본사람이 있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류치장에 갇혔던 독립군이 그가 할빈령사관의 고등경찰 마쯔시마와 조용히 마주앉아 담화하는것을 보고 소식을 밖에 내보내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거면 모두들 “그자식이 자수하고 풀려나온거나 아니여?”하면서 백안시하지 않았겠는가?
이광인은 “김좌진장군측근 치안대가 그날밤으로 김봉환과 다른 한명을 체포했을 때 문건을 압수했다는것도 큰 모순으로 남는다”면서 “김봉환 개인이 일제놈들의 사촉으로 리복림을 사주할 때 문건을 작성할 수 있었을가, 이역시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왜 문건을 작성하지 못하겠는가? 하다면 그래 독립군치안대가 있지도않는 문건을 들춰내여 압수했을가? 이광인은 “그어떤 일제측, 조공측 관련자료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리유를 대는데 그래 꼭 적의 당안에서 그자의 “자수서”가 나와야 한단말인가? 어쩌면 그것은 “그래 범이 정말 콧수염이 있냐 없냐, 어디 보자 그걸 뽑아와야 믿게다”는 허무한 소리같이 들린다.
“그때나 그후나 조공당이나 중공당시절 적에게 체포되였다가 나온 사람들에 대한 조직의 심사가 마못 엄했다. 조직의 심사결정이 내려지기전에는 그 어떤 직무를 맡고 활동하지 못한다”는건 당연하면서도 일반적인 상식이여서 이의(異意)가 없이 받아지는데 내가 말하자는건 변절(變節)을 포함하여 자기 당과 조직에 위배되는 짓을 하여 동지들로부터 백안시당하게 된 자일수록 자기기 “결백함”과 “철저성”을 보이느라 꾸미는 것이 하나의 공통적인 수완이라는 것, “고험”을 겪는 기간 그런 수완으로 발양된 “적극성”이 신임을 얻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할진대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그때로 부터 고액의 현상금까지 내걸면서 김좌진장군의 목숨을 빼앗자고 든 일제의 손에 잡힌 김봉환이 “그의 목숨을 해하기로”하고 무사히 풀려나왔을 경우 적의 반간책(反間策)에 넘어가고있는 제 조직의 심리에 맞춰서, 행동에 맞춰서 적극적으로 배합하지 않았을 수가 있을가? 이쯤만 생각해도 리광인은 “김봉환이 정말 변절한 인물일까?”하는 물음을 들고나오지 않을것이다.
우리 중공에서 오래해먹은 두 반역자ㅡ강생(康生)과 장춘교(張春橋)의 경우를 례로 들어 변절자의 공동본능과 그런자들이 제 목숨을 살혀내는 행운술을 보여주니 참고하기 바란다.
강생(康生ㅡ1898~1975.12.16). 생전에 중공중앙위원회부주석, 중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전국정협부주석이였고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주요성원중 하나다.
양상곤이 말했다.
“강생은 공산국제시대에 모쓰크바에서 왕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37년 겨울에 강생은 모쓰크바에서 돌아오자 말과 행동이 갑자기 달라져 자기를 왕명로선을 반대한 영웅으로 나타냈다. 그러면서 지어는 왕명에 대해 적발해서 모택동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1932년 12월 영국순경에 붙잡혀 상해시경찰국에 넘겨지자 인차 반변하여 국민당중통조사실의 후보특무로 변해버린 로복단(魯福壇)이 나이 79살을 먹도록 근 30년이나 상해의 어느 감옥에 비밀에 갇혀있으면서 문화혁명기간에 홍위병들이 족치니 자기 강생이 1930년에 체포되여 반변한 비밀을 발설했다는 것을 알자 풍전등화마냥 숨이 간들간들 붙어있는 “그 범인을 처결하기전에 입을 봉해 그가 아무소리나 하지 못하게 하라”는 “유래”깊은 비밀처결령을 내려 죽이게 했다. 로복단 뿐 아니였다. 공원, 추대붕, 왕세영, 리상영, 진강, 조건민, 풍중운, 사철.....자기의 믿그루를 아는 간부들을 하나도 가만두지 않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폭발할적에 강생는 중앙문혁의 고문이였지만 실제상에는 문혁소조의 정식 주임이였다. 그러면서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을 맡고 있었다. 1968년에 중공정보기관인 중공중앙조사부의 령도권을 획득하면서부터 대량의 억울한 안건을 만들어내여 당내투쟁에서 사람을 치떨게 하는 회자수(劊子手ㅡ살인백정)로 되고말았다. 사람들은 강생은 사람을 혼쌀내우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해서 “박해광”이란 별명을 달았고 외국사람들을 그를 중국의 “베리야”라 한다.
◎ 참고문헌 <<강생은 어떻게 모택동과 배함했는가>>
<<베일에 가리운 강생의 얼굴>>
<<강생이 서명한 비밀처결령>>
지난 2007년 2월 9일자 <<天津日報>>에 실린 진양용(陳揚勇)의 글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周恩來 他 說 : ”張春橋是叛徒 可主席不讓說”講完后, 他對卓琳特別屬咐: “卓琳, 你不要說出去啊”
이것은 주은래 자기가 제일 신임해온 등소평과 담화한 것인데 그의 병에 대해서도 금후의 사업에 대해서도 말한것이 아니라 오랜세월 제 가슴속에 맺혀있던것을 토로한 것이다.
한즉 어떤 인간은 철두철미한 반역자이지만 장춘교같이 웃어른이 감싸줘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만하면 박상실(리복림)을 사주하여 김좌진을 살해하게 한 당시의 김봉환의 경우도 상상이 될 것이다.
이번 론전을 겪고 내가 마지막으로 중국조선족력사학계에 보낸 글 <<독립군은 누구며 화요파는 무엇인가?”>>에서 결론부분의 한단락을 다시보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바란라.
“화요파는 자체내에 생겨난 수치스러운 그 변절자의 작간으로 꾸며진 일제의 반간책(反間策)에 넘어가 집단적인 암살을 획책했으며 김좌진장군을 살해햇으니 세상을 웃길 미런한 짓이였다.”
(6) 결속어
이제 우리의 학계에서는 강경애가 민족과 력사앞에 어떤 녀인이였는가를 다시 제대로 규명하고 그녀에 대한 연구를 새로운 출발점에서 다시해야겠다고 본다. 고통스럽고 시끄러울 수 있는 작업이지만 이 작업은 아무 때건 해야만 할것이다. 나의 성심으로 되는 충고다.
한국에서는 “1927년 봄에 강경애가 해림역에 도착해 동거생활을 하다가 두사람이 할빈령사관사령부소속 마쯔시마형사의 회유로 변절”했다고 하니 강경애는 <<신민보>>사건을 겪고는 조선에 나갔다가 다시 북만으로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 사건이 생긴것이 1926년 4월이였으니 강경애는 그 전에 벌써 북만에 와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녀가 19~20살때가 된다. 김좌진이 암살되기 착 전이거나 혹은 그 시각에는 그녀가 김봉환(金一星)을 떠나 그와 동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봉환외 다른 한자를 붙잡았다고 했다. 강경애는 미리내뺐을 가능성이 많은것이다. 그녀가 독립군손에 잡히우지 않았다하여, 문학초학자의 한두편 짤막한 글을 갖고 추리하여 낸 년도수 1931년을 들고 이봐라 하면서 만주에 온적이 없다고 우기는것은 아무런 학술적 가치가 없는 엉터리고 무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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