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살아온 신농씨는 늙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코가 냄새를 잃어 맛을 모르고 눈이 침침해 산나물의 생김새와 색을 분간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산마늘을 캐 먹는다는 것이 그만 비슷하게 생긴 박새를 먹어버렸다. 산마늘은 마늘 냄새가 강하게 나며 하나의 비늘줄기에 두세 장의 잎이 달린다. 박새는 여러 장의 잎이 촘촘히 어긋나 있으며 잎맥이 많고 주름이 뚜렷하다.
그는 박새를 먹고 나서 위에 머물던 음식물은 물론이고 소장과 대장에 썩어 있던 부식물마저 다 토해내고 드러누워 버렸다. 예전에도 산나물이나 약초로 사용할 수 있는 풀을 먹어본다는 것이 그만 독풀을 먹은 적이 많았으나 그땐 젊은 시절이라 금세 몸이 회복되었다. 허나 지금은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신진대사 기능이 부실해 몸이 전혀 회복되지를 않았다. 그는 박새를 먹은 후 위로 토하고 아래로 쏟아내는 고통에 시달리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두머리가 죽자 그의 무리는 곧 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때를 호시탐탐 노리던 치우가 신농씨의 무리를 먹어치우려 들었다. 헌원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형의 부족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반백을 넘긴 헌원이 비록 힘은 예전 같지 않지만 성욕은 여전히 왕성했다. 전쟁을 앞둔 전날 아소를 찾아가 한바탕 교합을 즐기면 그 쾌락이 싸움에 보탬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영리한 아소는 교합을 거절했다. 두 사람 사이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은 내가 싫어진 것이오?”
“아닙니다. 천만에 말씀인 걸요. 소녀가 감히 싫어할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사내가 큰일을 하기 전날 계집을 접하면 재수가 달아나 일을 그르칠 수 있어 거절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미 몸이 후끈 달아오른 헌원이 아소의 설득을 귓등으로 흘러버리고 달려들었다. 아소는 이게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헌원이 거세게 밀어붙여 어쩔 수 없이 음문을 열고 말았다.
“기왕에 하는 것이면 이 소녀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대하듯 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소. 내 사랑하는 그대를 어찌 하찮은 돌멩이 다루듯 한단 말이오.”
“전쟁을 앞두고 상대를 하찮은 물건으로 대하듯 하라는 뜻이옵니다.”
그 간언에 따라 헌원은 이제까지의 체위와 달리 아주 거칠게 아소를 다루었다. 마치 천한 계집을 상대하는 것처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었다. 그럼에도 아소는 뜨거운 쾌감을 느끼었고 이는 헌원도 마찬가지였다. 헌원은 이 통쾌함의 기를 이어받아 내일의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헌원과 치우가 기주(冀州)의 판천(阪泉)에서 한바탕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치우는 본래 용맹하고 날렵한데다 철갑모를 쓰고 나타나 헌원이 그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전쟁의 결과는 헌원의 예측과 달리 참담한 패배였다.
반년 뒤에 두 무리는 탁록(卓鹿)에서 다시 싸움이 붙었다. 그동안 헌원이 밤잠을 자지 않고 치우를 이길 방법을 연구하고 또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철갑모를 부술 방법만 찾는다면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 헌원은 아소를 찾아가 답을 구했다.
“간단하옵니다. 자석 전차를 만드십시오. 그러면 치우의 철갑모가 자석에 끌려들어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석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오?”
“음극과 양극의 원리로 철을 흡인하는 물건입니다.”
“듣고 보니 암수의 원리이구만.”
헌원이 기분 좋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에서 승자가 되려면 군사적으로 강해야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장을 잘해야 합니다.”
“정신적 무장은 투지가 아니요?”
“물론 투지가 중요하죠. 그 외에도 정신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요?”
“큰일을 앞둔 전날, 아니 3일 전부터 절대 계집을 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1차 전투에서 패한 원인이 아무래도 전날 아소와 방사를 나눈 것이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밤을 새워 아소와 전투의 승리 기술에 대해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교접을 하지 않았다.
기주의 들판에서 한원과 치우가 또 다시 한판 전쟁에 들어갔다. 푸른 옷을 입은 헌원의 딸 발(魃)은 풍백과 우사가 불러일으킨 비바람을 멈추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응룡(應龍)은 물을 모아 치우를 공격했다. 마지막으로 자석전차를 몰아 치우를 생포했다.
두 부족의 우두머리는 모두 서쪽에서 온 이주민으로서 맹수처럼 용맹하고 패기가 넘쳤다. 그러므로 승패의 관건은 머리싸움이었다. 결국 헌원이 치우보다 머리가 더 총명하고, 영리한 아소 덕분에 최후 승자가 되었다.
헌원이 중원에서 가장 강한 군사를 자랑하는 치우를 굴복시키고 그의 무리는 물론 형인 신농씨의 부족까지 순조롭게 복속시켰다. 그날 이후 크고 작은 부족 무리들이 신하를 자칭하고 귀순해왔다. 이렇듯 헌원이 지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중원을 제패하고 패자가 되었다.
중원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면 도읍을 옮겨야 했다. 헌원이 처음 중원에 발을 붙일 때 도읍은 황릉이었다. 황릉은 지리적으로 편벽해 통일된 나라의 도읍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헌원은 이곳저곳을 둘러본 끝에 치우를 물리친 탁록을 국도(國都)로 정하기로 했다.
탁록은 중원의 중심지이다. 중원을 동서남북으로 나누고 방위론에 의해 동은 적색, 남은 청색, 서는 백색, 북은 흑색이고 가운데 중앙은 토(土)이며 황색이다. 헌원은 중원의 패자 ‘제(帝)’가 되었고 방위론에 의해 토덕의 상서로움이 있어 ‘황제(黃帝)’로 칭해졌다.
황제는 탁록에 도읍하고 관직의 명칭에는 모두 구름 운자를 썼다. 좌우 정승을 두어 만국을 감독하게 했고 만국이 평화로워지자 귀신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의 일이 많아졌다. 또한 통일국가 황제가 된 헌원은 예전보다 할 일이 엄청 많아졌다. 수인씨가 발명한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먹는 화식(火食)을 널리 보급시켰다. 신하인 사황(史皇)이 그림을, 백여(伯余)가 의상을, 옹부(雍父)가 절구를, 공고(共敲)와 화적(化狄)이 배를, 휘(揮)가 화살을, 사관인 저송(沮誦)과 창힐(倉頡)이 글씨를 만드는 것을 담당케 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옷을 발명하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는 옷이 사람의 몸에 딱 맞아야 안온하고 포근하며 행동이 자유롭다고 믿었다. 백여의 생각은 황제와 달랐다. 딱 맞는 옷을 입으면 남녀의 생식기가 숨을 쉬지 못해 생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후대 번식이 가장 주요한 과제인데 생식력이 떨어지면 큰일이다. 그리하여 옷의 설계를 통풍이 잘 되게끔 헐렁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비록 천하지존의 신분이지만 신하들의 옳은 의견이라면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현명한 왕이었다. 따라서 신하들은 생각을 주저 없이 황제에게 진언했다. 백여는 왜 황제가 발명한 옷이 생식력에 지장이 있는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올렸다.
태초에 박씨 부부가 실 한 가닥 걸치지 않고 암수를 드러내 바람과 교감하여 천지를 창조하였다. 아득히 먼 옛날 인류 조상들이 여자의 임신이 사내의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바람을 맞으면 애를 밸 수 있다고 인식했다. 여인국에는 오로지 여자만 살지만 그녀들이 아기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여자들이 홀딱 벗은 채 남풍(봄바람)을 맞으면 잉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식은 필시 바람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옷도 남녀의 생식기가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게 널찍하게 만들어야 했다.
황제는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을 만들어 음악을 바로잡고 오관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위계를 바로잡았다. 그가 이렇게 사람과 하늘의 관계를 조화롭게 한 덕분에 천지간의 아름다움이 생겨났다. 또 치우와 대성, 사룡, 축융, 대붕, 후토 등 여섯 신하를 얻어 천하를 다스리니 성스러운 밝음이 지극하게 되었다. 천도에 밝은 치우는 황제에게 복속한 후 시간을 관리했으며 군신 상하의 도리와 부자·형제간의 예의, 부부가 짝짓는 도리를 널리 보급시키고 안으로는 형벌을 엄히 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일으켜 강토를 넓혔다.
남녀, 자웅, 상하, 귀천을 구분하여 질서 있는 세상을 만들었고 관리들은 아첨하지 않고 청렴하며 공정했다. 모든 백성은 사사로운 욕심 없이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았고 도둑이 없었으며 늘 풍년이 들고 맹수들조차 사납게 굴지 않았다. 나아가 주변의 부족들까지 모두 공물을 바쳐오는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세월은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규칙적으로 흐른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장마가 쏟아지면 이어 햇빛이 든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아소는 춘추를 60번 넘게 맞이했다. 환갑이 지난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꽃처럼 곱던 얼굴이 할미꽃이 되었고, 백옥 같던 피부도 거칠어졌다. 낭창낭창하던 허리는 통살이 커져 예전에는 엉덩이의 칠할이었으나 이제는 구할이 되어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오십 초반엔 홍목단이 그나마 촉촉한 습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물기가 하나 없는 사막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면서 한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사내는 계집과 달랐다. 비록 젊었을 때의 멋진 모습은 사라졌으나 환갑이 넘은 황제는 여전히 성적으로 강했다. 가끔 그가 소녀를 덮칠 때면 사막이 되어버린 음문은 양물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차라리 고통스러웠다.
이미 교합에서 멀어진 아소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황제보다 수십년 더 젊다면 얼마나 좋으랴! 허나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망상이다. 다만 자신이 사내를 받쳐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물주는 참으로 공평하지 못하다. 왜 계집의 생리구조를 든든하게 오래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사내에 비해 일찍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는가? 똑같은 나이의 남녀가 짝을 지으면 사내는 여전히 팔팔한데 비해 계집은 피하느라 쩔쩔 맨다. 아소는 이러한 차이를 감안하여 혼인을 할 때 사내가 적어도 여자보다 다섯 살 차이가 나도록 했다.
한편 황제가 성적 욕구가 여전하다는 것을 아는 아소는 대책을 세워주었다. 해가 저문 자신이 받쳐주지 못해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사내의 정력을 여전히 강하게 만들려 애썼다. 사내는 일단 정력이 세야 모든 일에서 큰일을 해낼 수 있었다. 통일제국의 황제로서 큰일을 해내야 할 황제가 정력이 쇠약해지면 국사를 망칠 수 있었다.
아소는 부지런히 옥즙을 다리고 산수유를 끓여 황제에게 바쳤다. 양물이 소처럼 힘을 쓰라고 우변(소의 성기)을 삶아 대접하고 해구변(물개 성기)처럼 강하라고 신하들을 풀어 구해들이게 했다. 기백에게 부탁해 정력에 좋은 보약을 지어 바치게 했다. 그러면서 회춘을 돕기 위해 인물이 반반하게 생긴 수많은 홍상미판의 소녀들을 뽑아 황제에게 바쳤다.
황혼에 접어든 황제는 성교의 재미는 어린 계집들과의 농탕질을 통해 맛보고 국사는 아소를 찾아 의논하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황제는 그만큼 행복한 사나이였다. 그가 이룬 업적의 절반은 아소가 기여한 것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였으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멋지게 산 인간은 죽음이 임박하면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더욱이 평생지기인 아소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홀로 저승으로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자식들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평생지기인 아소와 함께 수양산(首楊山)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구리를 캐내 보정(寶鼎: 보배롭고 귀중한 솥)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8개라 하여 무엇을 만들던 기둥을 8개로 했다. 그러나 헌원은 이러한 관례를 버리고 다리 3개만을 만들어 보정을 받치게 했다. 3개 다리로 물건을 떠받치는 것은 삼각형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헌원은 만년에 보정을 만들려는 꿈을 실현하게 되어 몹시 흥분되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심장이 멈추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식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쳤다. 네 부인 중 마지막 아내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었다. 헌원은 막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어미로서의 권위로 자녀들을 살필 것을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아소를 안아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태산 같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만 흘러내렸다.
중원을 통일한 황제는 6마리 교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서태산에서 귀신들을 불러모았다.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팔방조가 비녀장을 잡았고 치우가 앞섰으며 풍백이 길을 닦고 우사가 비를 뿌렸다. 호랑이와 이리가 앞에 섰고 귀신이 뒤따랐으며 등사(螣蛇)가 땅에 엎드리고 봉황이 날아다녔다. 귀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청각(靑角)이란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인 헌원은 이승을 떠나 저승길에 올랐다.
곤륜산의 장례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토막을 내 큰 나무 위에 걸어놓아 까마귀가 뜯어먹게 했다. 까마귀가 죽은 시체를 뜯어먹고 산 사람이 그 까마귀를 잡아먹으면 생명의 순환이 이뤄진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강물에 밀어넣는다. 물고기가 시체를 뜯어먹고 산 사람이 그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역시 생명의 순환이 이뤄진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파묻었다.
황제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해 치열한 시비가 붙은 끝에 그의 시체를 교산(嬌山)에 묻기로 했다. 그의 무덤은 높이 백 길이나 되는 거대의 뾰족산을 이뤘다. 황제의 위엄을 죽어서도 세상만방에 과시하기 위함도 있거니와 황제가 양물의 원리로 천하를 얻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상징물로서 거대한 묘를 만들었다. 그런데 3일이 되는 날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거대한 무덤이 내려앉아 버렸다. 그리고 황제의 시체가 사라졌다. 아소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동방삭이 나타났다. 그는 슬퍼하지도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는 흉사가 아니라 길사요.”
“시체가 사라지는 큰 변이 생겼는데도 길사라니요?”
“그렇소. 길사라도 이런 굉장한 길사가 없습니다. 황제께서 부활하여 승천했소이다.”
“네? 정말입니까?”
“황제께서 지상의 주인 역할을 다 마치고 이젠 하늘에 계시기 위해 훨훨 날아올랐소.”
아소는 황제의 승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생명 순환의 원리에 의해 땅에 묻혀 있어야 새생명을 얻는데, 하늘나라로 가버리다니. 그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인가.
동방삭이 아소가 당황해 하는 이유를 알고는 위로를 했다.
“인간이 죽어서 땅에 돌아가야 생명의 순환이 이뤄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나 황제만은 예외입니다.”
“예외라니요?”
“황제께서 생전에 땅을 딛고 인간 무리를 교화하는 지대한 기여를 했지요. 그 업적은 천추만대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분은 사후에 땅에 묻혀 계실 순 없지요. 마땅히 천령(天靈)이 되어 인간들을 계속 사랑하고 보듬고 가르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비록 대지에 육체를 남기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야 합니다.”
사당을 세우는 목적은 ‘조(祖)’를 수립하기 위함이다. 여왕이 판을 치던 시절에는 동식물을 조상으로 모시는 토템문화가 성행했다. 긴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역사는 개변이 없었다. 여인은 생리적으로 ‘무’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상징하는 젖가슴은 비록 밖에 드러나 있으나 그것은 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을 개변하는 힘이 없었다. 이에 비해 남근은 세상을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남근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 동방삭의 생각이었다.
동방삭이 창힐을 불러 ‘조’의 의미를 설명하고 글자를 지으라고 명했다. 창힐은 3일 동안 머리를 굴려 남근을 나타내는 문자 ‘且’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示’를 앞에 붙여 ‘祖’를 만들었다. 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부계사회의 성립을 나타내는 ‘조’가 생겨났다.
그날 이후 하나의 새로운 씨족이 출현하면 가장 중요한 일이 조상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며, 이 사당을 중심으로 족장이 씨족을 거느렸다. 이 주거지를 ‘籍(적)’이라 하며 조상을 기리어 ‘祖籍’이라 했다. 또 사당을 중심으로 군주가 백성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형태를 ‘國’이라 했다. ‘국’은 ‘조’로 인하여 생겨났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국이란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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