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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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과 원효대사
2017년 05월 05일 10시 33분  조회:4121  추천:1  작성자: 김정룡
[역사문화이야기]

우리 말 어휘 중 75%가 한자어라고 한다. 한반도(조선반도)는 역사적으로 그만큼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증거이리라. 그런데 한문과 한어의 유입 과정에 있어서 중국어휘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있고, 자체로 창작해낸 한자 어휘도 있고, 중국과 뜻이 다르게 사용되는 것도 있고, 중국에서는 일상용어가 아닌 것이 우리말에서 일상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어휘가 꽤 많다.
 
여기서 일일이 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 같아 일단 마지막 경우를 밝혀보려고 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야단치다.’, ‘야단맞다.’, ‘야단법석을 떤다.’, ‘야단법석거리다’ 라는 등의 말을 곧잘 사용하고 있는데 ‘야단법석’은 한자어이다. ‘야단법석’의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중국에서는 일상용어로 사용되지 않고 우리민족은 매우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일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먼저 ‘야단법석’의 유래를 살펴보자.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시기는 후한 때였고 위진남북조 시기 세상이 혼란스럽고 각박해져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고자 부처를 믿는 신도가 급격히 증가해 불교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당나라 때 불교의 ‘꽃’이 활짝 피었다.
 
당나라 초기 당태종 때인 627년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고자 천축에 떠나 간난신고 끝에 인도에 도착하여 18년 동안 연구를 거쳐 645년 불경 600권을 안고 장안에 돌아왔다. 당시 현장법사의 영향에 의해 당나라는 불교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이윽고 무측천이 온 나라가 불교의 천하가 되기를 명하였다.
 
무측천 시대에 불교를 대중화로 흥기 시키려고 가축도살을 금지할 만큼 여러 가지 극단적인 조치들이 잇따라 시행되었다. 하지만 불교를 대중화 시키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불경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어렵다 못해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불경을 민초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안이 바로 ‘야단법석’이었다.
 
야단(野壇)이란 세속도시(世俗都市)의 빈 공터, 즉 사람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에 단(壇)을 설치하는 것이며, 법석(法席)이란 법어(法語:佛語)를 말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불교로 놓고 말하자면 절간은 ‘성(聖)의 세계’라면 야단법석은 ‘속(俗)의 세계’이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가 백성들을 신도로 불러들이려고 세속화(世俗化)하기 위해 야단법석이란 아이디어를 발굴했던 것이다.
 
이 야단법석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흔히 계급적 구분이 없이 각설이, 갑돌이, 짚세기 할 것 없이 아무나 모여서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 예하면 씨름, 널뛰기, 제기차기, 재주넘기, 수수께끼내기, 남녀데이트, 심지어 어떻게 하면 남녀가 더 자극적이고 또 어떻게 하면 애를 쉽게 배고 낳고 하는 등등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부담 없이 서로 주고받고 맘이 내키는 대로 한바탕 떠들어대는 장소였다. 
‘야단법석’이란 말은 한바탕 떠들어 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단법석은 그냥 한바탕 떠들어 대는 난장으로 끝나버리고 마는가? 아니다! 이 야단법석은 겉보기에는 일종 난장 같지만 역사적으로 변문(變文)이란 최대의 성과를 이룩해냈다.
 
변문이란 당대(唐代) 승려(和尙)들이 야단법석에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무지한 민중에게 알아먹기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바꿔놓은 것(변경)을 의미한다. 불경(佛經)이야기의 재미를 북돋우려고 악기도 곁들고 노래도 부르면서 잡예(雜藝)식으로 설경(說經)하였는데, 이로부터 강창문학(講唱文學)이 생겨났고, 제궁조(諸宮調:스님들이 비파를 타면서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설경하는 설창법)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생겨났고, 원곡(元曲)이 생겨났고, 명대(明代)에 이르러 설화문학(說話文學)이 소설문학으로 발전했고, 이윽고 20세기 초에는 백화문(白話文)이 생겨나게 되었다.
 
‘야단법석’은 이렇듯 중국문학과 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편 사람들은 흔히 서구민주화의 뿌리가 고대그리스의 광장문화에 있다고 해서, 그게 뭐 굉장히 대단한 줄로 여기고 있는데 기실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다. 인류 고대사회에 있어서 그런 ‘광장문화’는 고대그리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 사회생활의 보편현상이었으며, 중국에도 있었고 한반도에도 있었던 ‘야단법석’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문화 맹아를 싹 틔운 ‘광장문화’였다.
 
우리민족 역사에서는 야단법석을 통해 불교를 대중화 시킨 주인공으로서는 7세기 신라에 살았던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이다. 바꿔 말하자면 원효대사야말로 ‘야단법석’의 원조이다.  
원효대사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한 인물인지 현재 한국불교계에서 “원효 이후 1,400년 동안 원효를 뛰어넘는 스님이 없다.”고 말한다. 
원효스님은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원효스님은 중국행에 실패한 이후로 중국불교 번성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못하고 10년 뒤, 자기보다 10세나 연하인 의상(義湘)과 같이 중국 유학길을 재차 떠났다. 경주를 떠나 강주(수원) 남양(南陽) 해안에 이르러서 날이 저물었다. 날은 궂어 소낙비가 쏟아지고 더욱 컴컴해 졌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움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기로 하였다. 한 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행여나 하여 주위를 더듬거려 보니 손끝에 물이 담긴 그릇이 닿았다. 그는 황급히 물을 마시고는 계속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날이 활짝 밝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움집이라 여겼던 곳은 고총이었고 그릇의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옛날 무덤은 지하실 같이 돌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 관을 넣고, 생시에 사용하던 물건을 넣어 두는 풍속이 있었다. 그가 빗물이 고인 해골을 보니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심한 구토를 느껴 전 날 먹은 음식까지 몽땅 토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어젯밤에 갈증이 나서, 무척 애쓰는 것을 보았는가?”
“형님이 갈증으로 고생하다가 그릇의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지요.”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그것은 보통 물이 아니고 사람의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네. 어젯밤 그것을 마실 때는 그토록 시원하여 세상모르게 잠을 잤는데, 오늘 아침 그것이 해골의 썩은 물이란 것을 발견하니 구토가 나서 큰 고생을 하였다네. 밤중의 마음과 아침의 내 마음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모를 때는 시원하던 것이 알고 나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니 더럽고 깨끗한 것이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一切唯心造)이라고 이제 깨달았다네.”
이와 같은 계기를 통해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사상을 깨달은 원효대사는 굳이 멀리 당나라까지 들어가 법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원효스님은 스님의 신분으로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대사가 불교를 대중화 시키려고 촌촌락락(村村落落)을 찾아다니면서 낫 놓고 기윽(ㄱ) 자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경을 재미있고 쉬운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바가지를 악기로 삼아 반주하며 노래를 곁들어 부르면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쳤다. 원효가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판을 벌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야단법석’이다.
 
필자가 연변시골에 있었을 적에 잔치 집에서 저녁 오락 시 물독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반주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이러한 관습이 원효대사가 바가지를 악기로 사용하는 것을 널리 보급시킨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공중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우리민족이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기를 즐기는 관습이 모두 야단법석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북아신문 20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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