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776,726명이고 중국동포의 수는 650,094명으로서 83.7% 차지하고 있다(법무부 외국인정책본부 통계자료). 조선족출신 국적취득자(13만) 합치면 78만 명 조선족출신이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왜 이 많은 조선족이 한국에 왔을까? 다시 말하자면 이들의 한국입국목적이 무엇일까?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알아야 재한동포사회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 알려진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이 ‘중국에서 차별받고 무시당했기 때문에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전달된 이유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일부 기자들이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한 허위정보를 전파를 타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뷰에 응한 중국동포에게 “중국에서 차별당하고 무시당해 당당하게 살고 싶어 한국에 왔는데 정작 와보니 한국 역시 우리를 차별하고 무시한다.”는 내용을 기자들이 미리 자기네 입맛에 맞게 각본을 짜서 외우게 하고 그대로 말하게끔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중국동포는 중국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키는 서방질처럼 시키면 시킨 대로 따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왜곡된 허위정보가 전파를 타게 되어 중국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허위를 진실인줄로 착각하고 중국동포들이 진짜 중국에서 차별받고 피해를 받아온 것, 그래서 한국에 온 줄로 잘못 알게 된 것이다. 일부 지각 있는 한국학자들조차 이와 같은 허위정보에 동조하여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에 대해 역시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동포들은 식민시기에 중국에 가서 이산 트라우마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으로서 문화혁명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반혁명, 우파분자, 주자파 등으로 분류되어 비판받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으며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정치적 폭력이 난무한 문화혁명은 그 시기를 산 중국인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체험이었고 중국현대사의 커다란 정신적인 상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최병우 P416).”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이어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며 살아가던 중국 소수민족들은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자신의 고유문화가 비판받고 자신들의 삶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이중적인 고통을 받았다(최병우 P416).”
“중국의 동포들은 이러한 아픈 기억을 해소하고 치유하는 길로서 한국이주를 감행하였지만 같은 민족이라고 상상하면서 동일성을 가꾸어 온 한국과 한국민으로부터 차별과 배제를 당하면서 이중 삼중의 트라우마를 겪게 되었다. 트라우마의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길은 트라우마가 된 사건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를 통해 진정으로 그 시대를 애도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있다(최병우 P439).”
최병우 선생의 이 주장은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의 아픔, 영혼 깊이 상처를 겪은 조선족은 일부 지식인 및 당 간부들이었다. 필자의 부친은 시골 당지부 서기였는데 문화혁명시기에 주자파로 몰려 비판투쟁 받았으나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채 1995년 생을 마감했다. 당시 문화혁명의 피해를 입은 조선족 간부 중에 필자의 부친과 같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처 깊었던 조선족 지식인들은 문화혁명이 끝나고 금방 중국정치에 동조하였고 현재도 마찬가지로 문화혁명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국행을 택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조선족 절대다수가 지식인이 아닌 농민출신과 도시 노동자 출신들이다. 이들이 한국에 온 목적은 문화혁명의 상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들의 한국입국목적은 경제적 이득 추구이고, 문화회귀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1.2. 경제적 이득 추구가 주요목적
개혁개방 전 중국조선족사회는 80%가 농경에 종사하며 농부의 삶을 살아왔다.
연변의 상황을 돌아보면 개혁개방 전 사회주의집단생산 시기 조선족마을들이 보편적으로 한족마을보다 경제적 수입이 높았고 따라서 삶의 질도 높았다. 배달민족의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미덕 덕분이었을 것이다(《은둔의 나라 조선》저자 그리피스(1843년 ~ 1928년)는 그의 저서에서 조선인의 미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조선 사람의 커다란 미덕은 인간은 모두가 한형제임을 충실히 존중하고 매일 실천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민족성은 상부상조하고 후덕한 인정을 베푼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성과 구분된다.”).
그러던 데로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하자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의 상황이 반전되었다. 즉 조선족마을이 못 살기 시작하였던 비해 한족마을들이 잘 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3년 호도거리생산 실시 이후 이와 같은 반전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외관상으로 보아도 조선족마을들은 겨우 한두 채의 벽돌집이 들어서는데 비해 한족마을은 해마다 벽돌집이 쑥쑥 올라가고 있었다. 조선족마을총각들은 장가가지 못해 마을에 아이 울음소리가 아주 드물었던 데 비해 한족마을총각들은 장가 잘도 갔다.
왜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 사이 이런 상반된 현상이 일어났을까?
필자의 고향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불사 요구촌이다. 이 촌은 조선족마을 4개, 한족마을 1개로 이뤄졌다. 개혁개방 전에는 한족마을이 째지게 가난했고 조선족마을, 특히 필자의 마을은 잘 살았다. 그런데 개혁개방하자마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한족마을 청년들은 갓 가정을 이루고 신혼부부가 담배 1만 포기 재배하고 다른 농산품도 심었다. 담배 1만 포기 재배하려면 수확 철에 하루 평균 두세 시간만 잠을 자고 일해야 한다. 한족청년들은 그 고되고 힘든 일을 이겨내고 한해 만원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변농촌은 농망기와 농한기가 거의 반반인데 한족들은 겨우 내내 쉬지 않고 싸리로 광주리 결었고 빗자루 틀어 도시에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마을은 그 긴긴 반년 동안 끼리끼리 모여 화토치기, 마작놀이, 술놀이에 빠져 돈 벌 궁리가 없었다.
이렇듯 한족들은 당지에 머물면서 천연자원을 이용하여 부자가 되었던데 비해 조선족은 부를 창조하는 루트로서 한국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도시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낙후된 공업이 새로운 생산 수요에 부응하지 못해 실업자가 급증하고 한편 직장 있어도 소비가 수입을 능가하는 현상이 심각해 한국행을 선택하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너도나도 한국바람에 가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족이 한국에 온 목적은 돈 벌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일차적인 한국입국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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